VI. 방언과 종말
오순절운동은 종말론과도 깊이 관련된다. 초기 오순절 운동은 만국에 곧 도래할 천국 증거라는 명확한 목적을 가진 종말적 선교 단체로 출현했다. 오순절신학의 창시자 파함은 자기가 은혜의 시대가 거의 끝나고 예견된 종말적 사건들이 시작되는 시기에 살고 있으므로, 그 사건들이 시작되기 전에 방언의 은사로 세계를 복음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북미 오순절 협회(PFNA)의 “진리 진술문”(Statement of Truth)은 오순절신학의 주요 주제들인 “칭의, 성화, 신유, 성령침례”에 “재림”(Jesus’ second coming)을 더했다. 비록 종말론이 오순절신학의 핵심은 아니지만 종말론은 오순절신학을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에 하나인 것만은 틀림없다. 본 장은 이렇게 오순절 신학의 중요한 요소들 중에 하나인 종말론을 통해 방언을 해석내지는 방언의 종말론적 의미를 규명한다.
A. 방언과 종말구조
1. 신약의 종말구조: 마지막 날들 + 주의 날
신약의 종말은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로 구성된다.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요엘서 인용에는 “마지막 날들”(e*n taiv" e*scavtai" h&mevrai", 행2:17)과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에 나타나는 “주의 날”(h&mera kurivou, 행2:20)은 짝을 이루며 나타난다.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기 시작하심으로써 구약과 요엘을 통해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이 성취되어 “마지막 날들”(the last days)이 이미(already) 시작되었다고 외친다. 그러나 누가는 “이르기 전”(priVn e*lqein)이라는 표현을 통해(행2:20) “크고 영화로운 주의 날”이 아직(not yet) 이르지 않았다고 외친다. 즉,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마지막 날들”이며, 앞으로 “여호와의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2. 마지막 날들에 나타난 방언
방언 마지막 날들에 나타났다.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오순절의 방언이 주의 날이 이르기 전 “마지막 날들에”(한글개역성경에서는 “말세에”) 임했다고 말했다(행2:17). 누가가 초대 교회의 종말론적 모티브를 구원역사로 대체했다고 주장하는 콘첼만과 달리, 뎀스터(Murray Dempster)는 사도행전에서 역사의 개조를 그리스도의 새로운 구속 질서와 관련된 교회의 정체성이라는 종말론적 정황에서 추진되는 것으로 본다. 그는 교회의 선교 범위가 증가하고, 인종, 종교, 경제적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방언이 출현한 것을 강조한다.
파함은 방언을 마지막 날들에 주어지는 성령침례의 증거로 인식했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마지막 날들”(the last days)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성령침례가 지금 마지막 날들에 주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사도행전 2장 33절에서 베드로는 약속의 성령의 인침에 대해 말했으며 그 인침을 받았고, 또다시 이 마지막 날들에 많은 사람들이 마음에 기쁨과 평안 가운데 약속의 성령의 인침을 받고 있다. 약속의 성령의 인침을 약속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사도시대의 증거와 동일한 증거(same evidence), 즉 방언으로 말하기(speaking with tongues)를 지금까지 주시고 계시다. 파함에게 성령침례는 마지막 날들의 보증이며, 방언은 성령침례의 증거였다.
시무어도 자신이 “마지막 날들에”(in these last days) 살고 있다고 인식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이 마지막 날들에” 성경적 구원을 얻는 삶을 살려하지 않고 운명에 맡기려 한다고 한탄했다. 시무어가 펴낸『사도신앙』에는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설교에서 인용한 요엘서가 자주 인용된다. 그 인용을 따라 시무어의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들”에 그분의 사람들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과 불 침례를 받기 원하신다고 가르쳤다.
3. 주의 날과 방언
방언은 주의 날을 가리키는 종말론적 표적들 중의 하나이다. 방언을 하나의 종말론적 표적으로, 최후의 사건들에 대한 하나의 표적으로 더 확대시켜 볼 수 있다. 베드로는 성령 부어주심에 초점을 맞추면서 이 일을 마지막 때를 알리는 하나의 사건으로 선포하였다(행2:17). 또한 베드로는 이 성령 부어주심을 어떤 종말에 관한 언급에 이어서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고 덧붙여 말하였다. 그 “기사”와 “징조”(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 등)는 아마도 오순절 날과 앞으로 닥쳐 올 마지막의 어떤 사건들을 가리키는 것일 것이다. 만약 “징조”가 방언을 포함한다면 이는 오순절 날에 성령 강림의 표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을 나타내는 표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베드로가 한 말의 완전한 의미가 무엇이든지 간에 방언은 그 외의 다른 표적들과 함께 충분히 마지막 “주의 날”을 가리킬 수 있었다. 방언은 마지막 그 날의 “예기적 표적”(a proleptic sign)이다.
B. 방언의 종말적 두 방향성
1. 방언의 인간을 향한 종말적 방향성
a. 방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나타나심
방언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나타나심(theophany)이다. 성령은 오순절 날에 불의 혀처럼 방언과 함께 임하셨다. 이런 하나님의 나타나심은 방언을 사모하는 오순절주의자의 동경의 대상이 되어왔다. 신약에서 불, 성자, 영광의 구름과 함께 인자가 내려오는 지각 변동으로 묘사된 재림은 초기 유대 묵시문학이 아니라, 구약의 하나님의 나타나심(현현) 이미지를 본뜬 것이다. 방언은 인간 밖에 계신, 전적 타자가 소리를 통해 인간에게 나타나시는 것이다. 방언은 성령 안에 잠김으로써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의 깊은 곳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께서 인간의 이성과 마음이 아닌 영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인간을 향한 방언이 이 세상 언어일지라도 그것은 이전에 배우지 않은 것이다. 방언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인격과 능력이 인간을 향해 나타나는 것이다.
b. 방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현재적 나타나심
방언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되 현재적인 것이다. 방언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방언은 과거에 일어나고 이제는 그쳐버린 것이 아니다. 과거에 그쳐버린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 방언으로 말하기(speaking with tongues)라는 사도시대의 증거와 동일한 증거(same evidence)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방언을 통해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이미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방언은 미래에 있을 온전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 오늘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c. 방언: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종말적 나타나심
방언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종말적 나타나심(eschatological theophany)이다. 방언을 통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현재성은 곧 종말성을 말한다. 방언은 마지막 날들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시는 한 형태다. 방언은 마지막 날들에 속해 있는 오순절날에 발생하기 시작했으며, 현재는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마지막 날들 가운데 속해있다. 그래서 현재적 하나님의 나타나심인 방언은 곧 하나님의 종말적 나타나심이다. 방언은 마지막 날들(in these last days)에 전적 타자인 하나님께서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과 말씀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2. 방언의 하나님을 향한 종말적 방향성
a. 방언: 인간의 하나님께로 나아감
방언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감이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깊은 곳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이 만드시는 방언이라는 길을 통해 성부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인간의 영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간다. 인간의 영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 비밀을 말한다.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 하나님께 아뢰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비밀의 인을 떼어내 주시지 않는 한 내밀한 것으로 남는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방언은 기도뿐만 아니라 찬양이기도 하다. 바울은 방언이 기도일 수도 있고 “영으로 찬미”(yalw tw'/ pneuvmati)일 수도 있다고 말했다(고전14:15). 즉 방언은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도 될 수 있으며, 찬양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환희의 송가”(jubilation)는 방언의 계속일 수 있다. 환희의 송가를 부르는 일은 가장 표현력이 있는 말로도 나타낼 수 없는 일반적인 언어의 수준을 뛰어넘어선 최고의 표현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간주되어 왔다. 환희의 송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기쁨의 외침을 나타낸다. 비록 환희의 송가를 방언과 동일시 할 수는 없지만 그 관련성은 매우 밀접하다. 이러한 찬양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고 그래서 일상적 언어의 영역을 넘어서 초월적 찬양의 영역으로 들어서려는 점에서 방언과 관련된다.
12세기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는 전혀 배우지 않은 말로 노래를 불렀다. 그녀는 그것을 “성령의 연주회”(Concerts in the Spirit)라고 불렀다. 파함은 방언을 주로 선교적 언어로 이해했다. 그러나 그는 방언을 기도뿐만 아니라 “찬양”으로 이해하고 방언으로 찬양하기도 했다. 그는 세인트루이스의 제니 글라세이(Jenny Glassey)라는 선교사가 방언으로 노래했다고 전하기도 했다. 그런데 파함의 방언 찬양은 주로 개인적인 것이었다. 그의 집회에서는 집단적인 방언 찬양이 용인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파함은 공적 예배에서 찬양은 반드시 통역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 통역됨 없이 발화되는 시무어 집회의 집단적 방언 찬양을 용납하지 않았다.
나는 밤에 주님과 함께 걷고 말하며 유익한 시간을 보냈다. 나는 방언으로 찬양하고(I sing in tongues), 방언으로 기도하고, 그리고 방언하면서 걷는다(talk in tongues). 그러나 나는 공적으로는 고린도전서 14장을 따르며, 순종한다.
시무어는 성령침례가 방언 찬양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실제로 시무어가 인도하던 집회에는 “천상적 찬양”으로 유명했다. 시무어가 발행한『사도신앙』은 “천상적 찬양”(Heavenly Anthem)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사도 신앙 운동”의 가장 중요한 특징들 중에 하나가 바로 천상적 찬양이라고 소개한다. 천상적 찬양은 성령과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들이 부르는 찬양이다. 또한 천상적 찬양은 성령께서 부르시는 노래다. 그런데 천상적 찬양은 집회에 참석한 사람들이 함께 동시에 다양한 방언으로 부르는 찬양이다. 시무어의 집회는 방언 찬양을 “찬양의 은사”(the gift of singing)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 은사에 따라 부르는 찬양은 피아노 등의 다른 악기들 없이도 조화롭고 아름다운 찬양이었다. 그 성령침례가 일으키는 집단적인 방언 찬양을 경험한 더함은 그것을 “성령 안에서 찬양”이라고 소개하기도 했다.
성령께서 완전히 지배하시는 것 같았고, 질서는 완벽했다. 내 영혼은 주님 앞에서 녹아내렸다. 그러나 내게 가장 놀라운 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았다. 몇 곡의 찬송이 불러진 후 능력의 파도와 영광이 그 곳을 엄습하는 것 같았고, 많은 사람들이 성령 안에서 찬양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그 사역 안에서는 “천상적 찬양”(Heavenly Anthem)이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나는 내 생애에서 그렇게 감미로운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 바로 그분이었고, 나는 그것을 알았다.
인간의 영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로 나아가 찬양한다.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 드리는 찬양은 인간이 범할 수 없는 초월적인 신비스러운 것이다.
b. 방언: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종말적 나아감
방언은 마지막 날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주의 날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감을 기대하게 한다. 방언이 최초로 발화되기 시작한 오순절과 재림을 암시적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베드로가 오순절의 최후의 신 현현 혹은 재림과 연결시킴으로써, 사도행전 2장에서 분명해졌다(2:19-20). 히브리서 12장은 종말론적인 어법으로 시내산 전통을 재구성했다. 사도행전 2장에 있는 오순절에 대한 묘사는 이런 빛 아래 해석되었다. 거기서 오순절은 그리스도 사건으로 완성된 이전의 신 현현을 다시 언급하고, 최후의 재림을 미리 지적하는 종말론적 사건으로 여겨졌다. 오순절 날의 방언은 최후의 날에 하나님 앞에서 말하고 찬양할 것을 미리 지적한다. 오순절로부터 발화되기 시작한 방언은 최후의 하나님의 현현 앞에 나아가 하나님께 아뢰고,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기대하게 한다.
방언 찬양은 하나님 앞에서의 종말적 찬양의 전조(sign)다. 요한은 큰 환난에서 나오는 자들이 흰옷을 입고 하나님의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쳐서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양하는 모습을 전해주었다. 그 찬양하는 자들은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의 사람들이다. 각 나라와 족속의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소리를 모아서 한 뜻을 가지고 찬양한다. 아마도 그 흰옷을 입은 자들은 각각 자기의 태어난 곳 방언으로 찬양할 것이다. 각각 방언들로 인해 소리는 다를 것이지만 그 소리의 뜻은 하나님과 어린 양을 찬양하는 것일 것이다(계7:9-10). 방언은 그 날에 하나님께 나아가 그런 종말적 찬양을 드리는 것을 기대하게 한다.
C. 방언의 종말적 상징성과 매체성
1. 방언과 이상적 소통
a. 이상적 소통의 예기로서 방언
방언은 천국에서의 자유스런 의사소통의 상징 혹은 예기(anticipation)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천국에서 바벨탑 사건 이전 구음이 하나였던 시대처럼 서로 의사를 자유롭게 소통하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과도 장애 없이 자유스럽게 의사를 소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상적인 소통은 “의사소통 행위론”(Theory of Communicative Action) 또는 “담론 윤리학”(Discourse Ethics)으로 유명한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이상적 담화 상태”(ideal speech situation)란 개념을 생각하게 한다. 그것은 담론의 형식으로서 그 어떤 강제도 없이 토의 자체의 충동만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그 어떤 지배구조도 존재하지 않으며 참여자들에게 균등한 기회가 주어지는 상태다. 그는 돈과 권력에 의해 왜곡된 의사소통이 벌어지고 있는 인간의 실제상황 때문에 그 이상적 담화 상태는 실현될 수 없고, 다만 예기될 수 있을 뿐(can only anticipate)이라고 생각했다. 에른스트 블로흐(Ernst Bloch)는 진정한 경험을 위한 조건은 “새로운 것”(Novum) 또는 “아직 오지 않은 것”(noch-nicht) 또는 “Utopia”의 예기(anticipation)라고 주장했다. 하버마스와 블로흐의 “예기”(anticipation)의 유사한 사용에는 이상적 담화 상황에 대한 종말론적 차원이 존재한다. 하버마스와 블로흐의 어법에 따라 말한다면 방언은 아직 오지 않은 천국에서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새롭고 이상적인 친밀한 대화를 지시하는 상징이며, “예기”(anticipation)이다. 그러나 방언이 하버마스의 이상적 담화의 예기와 다른 점은 하버마스의 예기는 실현될 수 없는 것에 대한 것인 반면에 방언이라는 하나님과 신자사이의 이상적인 친밀한 대화에 대한 예기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반드시 실현될 것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다. 방언은 주의 날에의 이상적 소통을 지시하는 상징이며 예기이다.
b. 이상적 소통의 선취로서 방언
방언은 이상적 소통의 과도기적 매체다. 방언은 아직 오직 않은 천국에서의 친밀한 대화에 대한 예기일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의 친밀한 대화의 과도기적 선취이기도 하다. 그것을 통해 천국에서 실현, 완성될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이상적인 친밀한 대화를 지금 성취해 가고 있는 매체다. 천국에서 이루어질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온전한 소통은 방언이라는 매체를 통해 오늘 선취되고 있다. 하나님과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의 매체인 방언은 이 관계가 완전하고도 온전하게 실현되어질 미래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단계다. 방언은 이상적인 하나님과 신자의 대화라는 미래가 현재에 강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그 이상적 대화라는 미래가 지금 우리를 만나러 오는 것이다. 방언은 “완전한 몸이 올 때까지 깨어진 몸을 위한 깨어진 말”(broken language for a broken body until perfection comes)뿐만이 아니다. 사실 방언은 또한 깨어진 몸에게 천국의 온전한 소통을 미리 경험시키는 “중재의 말”(broking language between a broken body and perfect communication)이다. 방언은 천국에서의 하나님과 신자사이의 이상적인 소통이 완성된 것은 아니지만, 그 완성을 미리 경험시키는 선취 매체다.
2. 방언과 종말적 선포
a. 늦은 비로서 방언
방언의 현대적 회복은 영혼 구원을 위한 늦은 비의 역사를 의미한다. 구약의 이른 비(the early rain)는 새롭게 뿌린 씨 위에 떨어져 그 싹이 트고 자라게 한다. 그리고 늦은 비(the latter rain)는 이삭이 익어 추수할 때에 내린다. 이것은 오늘날의 오순절 사역에 대해서도 옳다. 이른 비는 오순절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쏟아졌다. 기독교는 익어 추수할 때가 되었다. 파함은 벧엘성경학교를 돕고 있었던 캡틴 튜틀(Captain Tuttle)이 본 환상을 통해 토페카에서 임하기 시작한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는 늦은 비 역사임을 확신했다. 파함에 따르면 튜틀은 그 성령께서 오순절 권능으로 임하셨을 때 그 건물위에 신선한 물이 찬 큰 호수가 있는 것을 환상을 통해 보았다. 그 호수의 물은 온 땅이 새롭게 될 때까지 흘러넘쳐 흘렀다. 파함은 늦은 비의 목적을 두 가지로 파악했다. 하나는 전 세계에 증거로서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곡식과 같은 영혼들을 추수하도록 풍부하게 만드는 것(fulling)이다. 파함에게 방언은 영혼들을 추수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늦은 비의 역사였다. 파함이 방언을 배우지 않은 이 세상 언어를 말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시무어의 공동체와 결별하면서도 그것을 끝까지 주장했던 것은 그가 방언을 주로 늦은 비 시대에 영혼을 추수하기 위한 중요한 선포의 매체로 파악했기 때문이다.
시무어에게도 방언의 회복은 늦은 비의 역사였다. 그는 요엘서 2장 23절과 야고보서 5장 7절의 말씀을 성령의 역사로 간주하고 방언을 동반한 오순절날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성령을 내리신 이른 비(the former rain, the early rain)이었으며, 역시 방언을 동반하는 현대의 오순절의 역사는 늦은 비(the latter rain)라고 말했다. 팔레스타인에서 농작물을 가꾸기 위해서는 두 가지 비가 필요하다. 땅이 갈아지고 씨가 심어지면 하나님께서 농작물이 자라게 하시기 위해 이른 비를 내리신다. 그리고 추수를 위해 곡식이 있으려면 늦은 비가 필요하다. 시무어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진 때에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과 불 침례라는 오순절적 늦은 비가 교회위에 내리고 있다고 믿었다.
파함과 시무어는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이른 비와 늦은 비”라는 틀(frame)을 통해 봄으로써 방언을 고리로 삼아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현재”와 “미래”를 연결하여 역사를 조망할 수 있었다. 그들에게 과거의 사도시대 오순절 역사는 현대의 오순절 역사와 방언으로 연결되며, 현대의 오순절 역사는 영혼을 추수하게 되는 미래의 그리스도의 재림과 영혼으로 하여금 추수할만한 상태로 만들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유익한 도구인 방언으로 연결된다. 그들은 방언이라는 공통 현상으로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고, 방언이라는 복음전파 도구로 현재와 미래를 연결했다. 결국 그들은 방언을 매개로 과거로부터 역사의 종점으로서 미래에 이르는 역사를 조망할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파우펠(D. William Faupel)이 오순절적 사고를 해석하는 모델로 제시한 유형 중에서 “늦은 비” 유형을 “세계관적 모델”(The World-view Model)이라고 분석하고 늦은 비 모델을 오순절주의자들이 그것을 통해 전체 역사를 해석할 수 있었던 틀이었다고 규정한 것은 적절했다.
b. 종말적 선포 매체로서 방언
방언은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늦은 비 시대의 종말적 선포를 위한 매체다. 늦은 비가 방언을 동반하며 내리는 시대에 전해야할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늦은 비 시대에 전해야할 복음은 표적과 기사들과 여러 이적들과 성령의 은사들을 동반하는 “순복음”(full gospel)이다. 파함은 순복음을 “영원한 복음”(The Everlasting gospel)이라고 명명했다. 그는 요한계시록 14장 6절에 등장하는 “방언”을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으로 해석하고, 그 방언과 “영원한 복음”(eu*aggevlion ai*wvnion)을 연결시켰다. 파함은 한편으로 영원한 복음을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나아가 전해야한다고 말함으로써 요한계시록 14장 6절의 문맥을 그대로 따라 “방언”을 족속과 동등한 의미로 말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는 다른 한편으로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모든 방언들로 선포하며(preaching in all languages)” 모든 권능으로 덧입고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함으로써 본문의 “방언”(glw'ssa)을 성령께서 주시는 “방언”과 동일시하여 영원한 복음을 선포하기 위한 매체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는 6절의 방언을 통한 영원한 복음 선포를 7절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라”라는 종말적 언급과 연결시켰다. 방언은 종말적 선포를 위한 매체다.
시무어에게도 방언은 종말적 선포의 매체였다. 그는 대위임령에 따르는 복음 전파와 성령침례를 연결시켰다. 그는 성령침례를 받아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1906년의 놀라운 표적은 방언의 회복이었으며, 그 회복은 이방인의 시대가 끝나기 전에 수행되어야만 하는 모든 나라들에게 순전한 복음을 전파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방언이 선교현장에서 사용될 수 있으며, 그 가능성은 하나님께 있다고 보았다. 그 공동체에게 방언을 말함과 선교사들이 돈도 없이 선교현장으로 달려가는 것 등등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D. 방언과 변혁적 종말론
1. 오순절주의의 변혁적 종말론
변혁적 종말론은 “예언적 종말론”이라고도 불린다. “예언적 종말론”(prophetic eschatology)은 사회적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성경, 전통, 종교적 경험 등등을 통해 종교적 또는 사회적 질서를 비판한다. “묵시적 종말론”(apocalyptic eschatology)은 주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세상이 멸망할 것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변혁적 종말론을 통해 방언을 해석하기 전에 파함의 예를 들어 오순절주의의 변혁적 종말론을 살펴본다.
파함의 사회적 문제 해결 관심과 행동은 그의 변혁적 종말론(transformational eschatology)을 드러낸다. 그는 인간의 역사가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급박하게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록 한편으로 그런 묵시적 역사관을 가졌지만, 다른 한편으로 소외된 자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그의 종말론은 기본적으로 세대주의적 구조를 갖고 있으면서도 일반 세대주의자들의 도피주의적 태도와는 달리 참여적인 사회 문제 해결을 위한 행동을 낳았다. 첫째로, 파함은 병과 가난의 문제 해결을 위한 사역을 수행했다. 1898년에 “벧엘 치유의 집”(Bethel Healing House)을 토페카에 설립했다. 처음에는 환자들로부터 요금을 받았지만, 곧 무료로 전환했다. 1899년에 그는 창녀들과 가난한 소녀 노동자들에게 음식과 숙소를 제공하는 구호사업을 계획하기도 했다. 둘째로, 그는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혀왔지만, 적어도 구원론에 있어서는 인종포용주의자였다. 그 점은 그에 의해 1902년에 초판되고, 시무어의 공동체와의 1906년 결별 후 1910년에 재판된『광야에서 외치는 소리』(A Voice Crying in the Wilderness)에서 확인된다. 파함은 예수 그리스도의 핏줄 안에는 모든 인종의 피가 흐르며, 아브라함의 피는 이스라엘의 혼합결혼으로 인해 모든 인종들에게 흘러들어갔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모든 인종 안에는 이스라엘의 피가 흐르고 있다고 보았으며, 모든 인종이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그는 그리스도 신부는 이스라엘의 피가 흐르는 그리스도의 혈족 가운데서 취해질 것이므로, 그리스도의 신부는 모든 인종으로부터 취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로, 파함은 자본주의적 집단도 아니고 공산 사회주의적 집단도 아닌 제 3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사회체제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파함은 자기 시대를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쟁투의 현장으로 파악했다. 그는 서로 양보 없이 평행선을 긋는 두 집단 모두가 비 성경적인 것이라고 판단하고 성경적인 제 3의 공동체를 추구했다. 그는 두 집단 모두에게서 가능성을 찾지 못했던 것이다. 제 3의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을 바탕으로 방언이 동반되는 성령침례라는 오는 세대의 능력에 의해 형성된 “영원한 복음”을 받아들인 순복음으로 하나가 된 공동체다. 파함은 현실 도피적이지 않았다. 현실을 오는 세대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제 3의 종말적 집단을 형성함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능동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파함의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의 능력을 맛봄에 대한 언급은 그의 변혁적 종말론을 엿보게 한다. 파함은 “이 세대”(this age)에서 “오는 세대”(age to come)의 능력을 맛보는 것에 언급한 적이 있다. 그는 “이 세대”와 “오는 세대”가 “마지막 날들”에 중첩되는 종말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대가 “이 세대”(this age)이지만, 이 세대가 끝나기 전에 이 세대의 사람들이 “오는 세대의 능력”(the power of the age to come)을 맛볼 것(taste)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신유나 방언 등의 오는 세대의 능력은 만물을 회복시키며 이 세대에서 사람들의 삶을 변혁시키는 원동력이었다. 그의 두 세대에 대한 언급은 그의 종말론이 “변혁적”(transformative)이었다는 것을 증거 한다.
2. 방언과 변혁적 종말론
방언은 오는 세대의 변혁적 능력을 경험시킨다. 이 세대와 오는 세대가 중첩된 마지막 날들에 오는 세대의 능력을 대변한다. 물론 방언은 이 세대의 특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이성에게는 당황스러운 방언은 이 세대의 죄됨과 연약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방언은 또한 오는 세대의 능력을 표출시킨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시키고, 사고와 언어를 거룩하게 만든다. 비록 그런 이중성을 띄고 있어서 완벽하지는 않지만, 방언이 오는 세대의 변혁적 능력을 미리 경험시킨다는 것은 분명하다.
방언은 하나님의 나라의 침입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방언은 인간 안에 내재해 있던 것의 발현이 아니다. 인간의 무의식의 표출이 아니다. 인간 안의 가능성이 마침내 실현되는 것도 아니다. 비록 인간이 영과 몸과 관계성에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어 방언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추고는 있지만 그 가능성이 자연적으로, 또는 인위적으로 방언으로 싹트거나 성장하거나 성숙하거나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방언은 인간의 노력의 산물이 아니다. 위로부터 수직으로 부여된다. 성령에 의해 발화되는 방언은 하나님의 나라의 침입(the inbreaking of the kingdom)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제공하시는 천국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천국의 첫 열매를 경험하는 능력이다.
방언은 하나님의 나라의 침입에 의한 세상의 변혁을 표징한다. 방언은 하나님의 세상 변혁 표징이다. 하나님의 급진적인 개조 역사를 드러낸다. 방언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역사 안에서 사회적 관계들을 변혁시키시고 있다는 것에 대한 징표다. 침입한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 나라를 변혁시켜 나간다. 방언은 도피가 아니다. 고통스런 세상에서 피안으로의 도피가 아니다. 악하고 오염된 인간의 입과 언어를 도전적으로 거룩하게 변혁시키는 것이다. 방언 경험은 종말에 온전히 실현될 하나님의 구속의 과정으로서 “적극적인 변혁 능력”을 갖는다. 신자와 성령 하나님의 지속적인 변혁을 위한 협력의 일환이다. 방언은 그분의 나라를 도래시키는 하나님의 세상 변혁에의 인간의 적극적인 참여에 대한 징표다. 하나님께서 설교에서 뿐만 아니라, 의학, 사회적 행동, 환경 보호적 의무에 있어서 만물의 변혁에 우리를 참여시키시는 것에 대한 징표다.
E. 방언의 종말
1. 방언의 중단
바울은 방언의 종말을 말했다. 그 종말은 언제인가? 바울은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pauvw) 지식도 폐하리라”고 말했다(고전13:8). 또한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라고 말했다(고전13:10). “온전한 것”은 헬라어로 “toV tevleion”으로써, “완전한 것”, “(예언이나 약속을)성취한 것”, “작정된 목표에 도달한 것”등의 의미이다. 은사중단론자들(cessationists)은 바울의 그 언급을 근거로 방언은 이미 정경이 완성된 초대교회 이후로 종말을 고했다고 주장한다. 엉거(Merrill F. Unger) 등의 세대주의자들은 “온전한 것”을 “정경”(Canon)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브루스(F. F. Bruce)는 “온전한 것”이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리킨다고 주장하였다. 오순절주의자들 등의 은사지속론자들은 방언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온전한 것이 재림이라면 방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2. 방언의 계속
비록 방언이 종말을 고할지라도, 방언이 지시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밀하고 온전한 의사소통은 그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바울은 사랑은 그치지 않고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랑은 대화를 통해 표현되고 받아들여진다. 방언이 종말을 고할지라도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사랑은 지속적으로 대화로서 표현되고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런 온전한 의사소통과 사랑의 대화의 근원은 하나님이실 것이며, 그런 하나님의 중심성은 방언의 초월성이 지시하는 것이며, 이 세상에서 미리 경험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오순절운동과 함께 “회복된 방언”(recovered tongues)은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종말을 고하여 “사망한 방언”(deceased tongues)이 될지도 모르지만, 방언은 그리스도의 재림 후에도 지속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완성된 천국,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온전한 사랑의 의사소통이 “부활한 방언”(resurrected tongue)을 통해 가능하게 될지도 모른다. 생명의 부활로 들어간 하나님의 자녀들은 바벨탑의 언어혼잡 이전의 하나였던 구음같은 하나의 구음을 통해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하나님의 자녀들과 의사를 소통하게 될 것인가? 아니면 다양한 언어들을 말하지만 통역되어 서로 의사를 소통하게 될 것인가? 인간은 영원히 변화체를 갖게 될 것인데, 그 변화체를 통해 부활한 방언이 발화될 것인가? 천국에서도 하나님과 사람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은 이루어질 것이며,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의사소통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그 미지의 의사소통 방법을 “부활한 방언”이라고 불러 본다.
F. 요 약
방언은 마지막 날들에 임한 주의 날의 예기적 표적이다. 성경적 종말은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로 구성된다.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요엘서의 예언을 인용하면서 오순절의 방언이 주의 날이 이르기 전 “마지막 날들에” 임했다고 말했다(행2:17). 파함은 방언을 마지막 날들에 주어지는 성령침례의 증거로 인식했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를 “마지막 날들”로 인식하고 있었다. 시무어도 자신이 “마지막 날들에” 살고 있다고 인식했다. 방언은 주의 날을 가리키는 종말론적 표적들 중의 하나이다. 방언은 마지막 날의 “예기적 표적”이다.
방언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방언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되 현재적인 것이다. 방언은 과거나 미래가 아닌 현재 일어나고 있는 하나님의 나타나심이다. 방언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종말적 나타나심이다. 방언을 통한 하나님의 나타나심의 현재성은 곧 종말성을 말한다. 방언은 마지막 날들에 전적 타자인 하나님께서 인간을 초월하는 능력과 말씀으로 나타나시는 것이다.
방언은 인간이 하나님께로 나아감이다. 인간의 영은 하나님의 깊은 곳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이 만드시는 방언이라는 길을 통해 성부 하나님께로 나아간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방언은 기도뿐만 아니라 찬양이기도 하다. 방언은 마지막 날 곧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주의 날에 하나님 앞으로 나아감을 기대하게 한다. 방언 찬양은 하나님 앞에서의 종말적 찬양의 전조다. 방언은 그 날에 하나님께 나아가 그런 종말적 찬양을 드리는 것을 기대하게 한다.
방언은 천국에서의 자유스런 의사소통의 상징 혹은 예기이다. 그런 이상적인 소통은 “이상적 담화 상태”란 개념을 생각하게 한다. 방언이 이상적 담화의 예기와 다른 점은 이상적 담화의 예기는 실현될 수 없는 것에 대한 것인 반면에 방언이라는 하나님과 신자사이의 이상적인 친밀한 대화에 대한 예기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에 반드시 실현될 것에 대한 것이라는 것이다. 방언은 이상적 소통의 과도기적 매체다. 방언은 아직 오직 않은 천국에서의 친밀한 대화에 대한 예기일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의 친밀한 대화의 과도기적 선취이기도 하다. 방언의 회복은 영혼 구원을 위한 늦은 비의 역사를 의미한다. 방언은 영혼들을 추수하기 위해 복음을 전파하는 늦은 비의 역사다. 방언은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늦은 비 시대의 종말적 선포를 위한 매체다. 늦은 비가 방언을 동반하며 내리는 시대에 전해야할 복음은 “영원한 복음”이다. 이 늦은 비 시대에 전해야할 복음은 표적과 기사들과 여러 이적들과 성령의 은사들을 동반하는 “순복음”이다. 파함의 사회적 문제 해결 관심은 그의 변혁적 종말론을 드러낸다. 파함은 병과 가난의 문제 해결을 위한 사역을 수행했다. 그는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혀왔지만, 적어도 구원론에 있어서는 인종포용주의자였다. 파함은 자본주의적 집단도 아니고 공산 사회주의적 집단도 아닌 제 3의 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사회체제 문제 해결을 시도했다. 파함의 “이 세대”에서 “오는 세대”의 능력을 맛봄에 대한 언급은 그의 변혁적 종말론을 엿보게 한다. 방언은 오는 세대의 변혁적 능력을 경험시킨다. 방언은 하나님의 나라의 침입에 의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의 나라의 침입에 의한 세상의 변혁을 표징한다.
비록 방언이 종말을 고한다할지라도 천국에서의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대화는 지속될 것이다. 바울은 방언의 종말을 말했다. 방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방언이 종말을 고할지라도, 방언이 지시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밀하고 온전한 의사소통은 그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천국에서도 하나님과 사람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은 이루어질 것이며, 따라서 어떤 형태로든 의사소통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그 미지의 의사소통 방법을 “부활한 방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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