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세계의 오순절신학을 위해 KIPT

오순절주의 방언연구 (PhD논문)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연구 3: 방언의 삼위일체 하나님적 특성

한오신 2017. 6. 11. 09:34

 

오순절적방언연구박사논문 삼위적특성 (이창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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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 방언의 삼위적 특성

 

방언의 본질적인 기원은 삼위일체 하나님(triune God)이다. 방언의 최종 발화는 사람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방언의 근본적인 기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본 항은 방언의 근본적 기원이신 삼위 하나님의 측면에서 방언을 해석한다. 성부와 성자의 친교의 관점에서, 성자와 성령의 친교의 관점에서, 성부와 성령의 친교의 관점에서 방언을 해석하고, 삼위일체의 친교의 관점에서 방언에 대한 해석을 시도한다. 이 해석은 하나님과 인간의 방언을 통한 양방 소통의 기초가 될 것이다. 그리고 성부, 성자, 성령 각위의 전유적 사역을 통해 방언을 해석한다.

    

1. 방언과 삼위적 친교

 

a. 방언과 성부 성자의 친교

 

방언은 하나님 우편으로 상징되는 성부와 성자의 한 본질로부터 발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먼저 마가에 따르면 방언은 하나님 우편으로부터 주어진다. 마가는 신자에게 방언을 포함한 표적이 따를 것이라고 약속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dexiov" qeou')에 앉으셨다고 말한다(16:19). 제자들이 복음을 전파할 때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우편에서 방언을 포함한 따르는 표적으로 그 말씀을 확증하셨다. 둘째로, 하나님 우편은 하나님의 본질인 신성을 상징한다. 성부와 성자는 하나님 우편을 매개로 연결된다. 성부와 성자를 연결하는 하나님의 우편은 성부와 성자가 공유하시는 하나님의 본질인 신성(Godhead)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마스커스의 요한(John of Damascus)은 하나님의 우편을 신성의 영광과 존귀”(the glory and honour of the Godhead)라고 지칭했다. 이런 맥락에서 방언의 근원은 하나님의 우편으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본질 곧 신성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방언은 성부와 성자의 하나님 우편에서 주고받음으로부터 발생한다. 누가는 방언이 성자의 받음에 의해 발생한다고 말한다. 이는 성부의 주심을 전제한다. 성부의 주심(divdwmi)과 성자의 받음(lambavnw)하나님 우편에서 발생한다(2:33-35). 성부께서는 오른손으로 예수를 친히 하나님 우편까지 높이셨고, 그 우편에서 약속하셨던 성령을 성자에게 주셨으며, 그 우편에서 성자는 성령을 받아서 사람들이 보고 들는 방언을 부어주신다. 그런데 성부의 주심과 성자의 받음은 성부의 우월성이나 성자의 종속성을 말하지 않고 본질적으로 동등한 관계를 의미한다. 방언은 성부와 성자의 동등한 주고받음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대화에서 발생한다. 하나님 우편(dexiov" qeou')은 왕으로서 영광과 통치와 권능의 우편”(Sessio ad dexteram)뿐만이 아니다. 하나님 우편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친밀한 대화의 우편”(Sermo ad dexteram)이기도 하다. 하나님 우편은 하나님 곁”(alongside God) , 사도 요한이 선포한 대로 태초에 계셨던 하나님과 함께계셨던 그 상태(1:1), 성부와 친밀한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까움을 의미한다. 하나님 우편은 성부와 성자의 대화의 상징이다. 누가가 인용한 다윗의 시에 의하면 성부께서는 우편에 있는 성자에게 말씀하신다(rm^a*).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으라”(2:33; 110).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성자를 향한 성부의 말씀을 미리 들었고, 그 말씀은 그리스도께 승천하셔서 우편에 앉으면서 성부로부터 발화되었다. 베드로는 방언이 성자를 향한 성부의 말씀과 성자의 들으심의 결과라고 역설한다. 또한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에 의하면 성자는 하나님 우편이라는 사랑의 자리에서 성부께 끊임없이 중보기도의 말씀을 하신다(8:34; 10:12, 7:25). 하나님의 우편은 성부께서 성자에게 말씀하시고, 성자께서 성부께 말씀하시는 대화의 장소이며, 그 대화에서 방언이 발생한다. 존재들 간의 진정한 대화(dialogue)는 진화론적 변증법(dialectic)과는 달리 어떤 존재가 최종적으로 다른 존재들을 삼켜버리지 않고 각 존재들이 각각의 독특성을 유지하면서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열려진 통일성(open totality)을 창출해낸다. 방언은 그런 하나님 우편에서 나누는 독특한 성부와 성자 사이의 서로를 풍요롭게 하는 친밀한 대화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성부와 성자의 친밀한 연합에서 발생한다. 하나님의 우편 보좌는 성부와 성자의 친밀한 연합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우편 보좌는 아들의 보좌와 동일시된다(1:8). 그리스도는 성부와 함께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셨다(3:21). 그 보좌는 하나님과 어린양의 보좌다(22:1, 3). 사도 요한은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을 뿐만 아니라 곧 하나님이시다고 선포한다(1:1). 두 보좌와 두 위격이 계시지만 오직 하나의 보좌요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 방언은 그렇게 동일시되는 하나님의 보좌 곧 그리스도의 보좌에서 성부와 성자의 친밀한 연합에 의해 발생된다. “필리오크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내재적 친교(communion)에 의해 가능하다. 성령은 성부와 성자 사이의 연합하는 내재적 친교로부터 나오시면서 방언을 발화하게 하신다. 방언이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발생한다는 것은 방언의 타종교 발생설을 일축한다. 방언은 성부와 승천하신 성자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성부와 성자 사이에서 발생하지 않는, 타종교에서 발생하는 이상한 소리는 방언이 아니다.

 

b. 방언과 성자 성령의 친교

 

방언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인격적 관계(the relationship of personality)에서 발생한다. 누가는 성자가 약속하신 성령을 성부께 받아서 120여 명의 성도들에게 부어 주셨다고 말한다(2:33).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그리스도의 승귀를 오순절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다. 승귀하신 성자께서는 성부로부터 약속하신 성령을 받으셨을 뿐만 아니라 성령을 제자들에게 부어주셨다. 성령을 받고” “부어주는 것으로 묘사하는 것은 성령을 비인격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 말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인격적 관계를 전제한다. 사도 요한은 성자께서 성부께로 가셔서 성령을 보내신다고 말한다(16:7). “보낸다”(pevmpw)는 말은 부어준다”(e*kcevw)라는 말보다 더 인격적이지만 덜 적극적이다. “부어준다는 말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친밀한, 완전한 의사소통, 적극성, 기꺼움, 자발성등의 인격적 의미를 포함한다. 동방신학자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는 위격 차원에서는 성령께서 오직 성부로부터 나오시고, “에너지”(e*nergia)의 차원에서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해 나오신다고 말했다. 그는 아들과 성령과의 관계를 규명해봄으로써 위격 차원에서 필리오크를 거부한 동방신학에 결여된 점을 보강하려했지만, 성령을 에너지라는 비인격적인 용어로 설명하는 한계를 가졌었다. 성자는 단순히 성령 충만한 인간이 아니고, 성령은 단순히 승귀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의 현존이 아니다. 성자와 성령은 각각 동등한 인격으로서 대면하신다. 성자께서는 성령을 대면하시고 성령을 보내신다. 사람들이 보고 들은방언(2:2-4)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성자와 성령의 밀접한 말씀적 관계(the relationship of word)에서 발생한다. 성령의 말씀은 성자의 말씀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보내신 그리스도는 성령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하신다고 말한다(3:34). 사도 요한에 의하면 성령은 모든 것을 가르치시되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신다(14:26). 그래서 성령께서 알리시는 것은 그리스도의 것이기도 하다(16:14). 성령은 신적 말씀(the divine Word)의 중보다(cf. 24:2ff). 성령이 말하게 하시는 방언은 성자의 말씀과 무관하지 않다. 방언을 말하게 하며 오시는 성령은 성자의 메시아 되심에 대한 증거의 절정이다. 성자와 성령은 말씀을 매개로 밀접한 관계를 맺는 것이다. 고넬료의 집에서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증거 할 때 성령이 내려오시고 방언이 발생했다는 것은 성령과 성자의 말씀을 매개로한 관계에서 방언이 발생한다는 것을 보여준다(10:33-46). 이렇게 방언은 성자와 성령 사이의 밀접한 말씀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성자와 성령의 사역적 관계(the relationship of ministry)에서 발생한다. 성령으로 침례를 주시는 성자의 사역에서 발생한다. 그리스도의 침례는 성령을 동반하며 그리스도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는 방언과 같은 능력을 부여한다. 성령께서는 모든 신자들을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주시며(회심), 성자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신자들을 성령 안으로 침례를 주신다(오순절). 중생에서 성령은 대행자로서 속죄하시는 피에 의해 중생을 일으키신다. 성령침례에서 그리스도는 대행자이신 성령에 의해 방언을 말하는 능력을 부여하신다. 성령침례는 성령으로 침례주시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의 대면이. 성령은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결과로서 십자가로부터 오셔서 방언을 통해 그리스도의 현존과 그분 안에 있는 능력을 드러내신다. 시무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수여하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체로 삼는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으로 침례”(the baptism with the Holy Ghost)를 말한다. 그에게도 성령은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대행자다. 방언은 이렇게 성자와 성령의 사역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c. 방언과 성부 성령의 친교

 

방언은 성령의 성부로부터 본질적이고 위격적인 나오심에서 발생한다. 사도 요한은 방언을 말하게 하시는 성령을 성부로부터 나오시는 분(o@ paraV tou' patroV" e*kporeuvetai)으로 소개한다(15:26). 성령의 성부로부터 나오심은 동방신학자들이 주로 주장해왔던 것이다. 바실(Basil of Caesarea)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한 본질”(miva ou*siva)세 위격들”(trei'" u&postavsei")라고 말했다. 그는 삼위의 본질과 실체를 생물의 종과 류에 비교했다. 삼위의 본질은 생물의 종처럼 일반적인 또는 공통적(toV koinovn, general, common)이며, 삼위의 실체는 생물의 류처럼 특수한 것(toV kaq * e@kaston, particular)이다. 특수한 위격인 삼위 각각은 신성(qeovthto")을 공통적으로 갖는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처럼 성령 하나님을 믿습니다”(Pisteuvw ei*" toV qVei'on)라고 고백할 수 있다. 바실은 성자와 성령이 성부와 동등하게 근원적인 위격들”(a*rcikaV" u&postavsei")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성부만이 유일한 시작( *Archv miva)이며, 근원적인 위격이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나오신다(proevrcomai). 성령은 성부의 본질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성부의 위격에서 나오신다. 그 나오심은 성부로부터 성자의 낳으심(gennavw)과 구별된다. 성령의 위격은 오직 성부의 위격으로부터만 나오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방교회의 전통을 따르면 성부와 동일한(o&moousivo") 본질을 갖는 성령은 성부의 본질에서 나오신다. 이런 논제와 관련해 서방과 동방신학을 성부와 성령과의 관계에서 정리해본다면, 방언을 말하게 하시는 성령의 실체 또는 실존(divine existence) 또는 위격(u&postavsi")은 성부로부터 나오고, 성령의 본질(essentia) 또는 형상(ei*do") 또는 인격(prosopon)은 성자로부터 나온다고 말할 수 있다.

방언은 성부와 성령의 서로 아심의 결과다. 성부는 성령을 아신다. 한편으로 성부는 성령의 생각(tiv toV frovnhma tou' pneuvmato")을 아신다(8:27). 성부는 성령의 깊은 곳의 의미와 의도를 아신다. 다른 한편으로 성령은 성부를 아신다. 성령의 생각은 곧 성부 하나님의 깊은 것, 성부의 뜻이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뜻대로(kataV qeovn) 탄식하며 방언으로 성도들을 위해 간구하신다. “까따 테온은 직역하면 하나님을 따라이지만 의역하면 하나님의 뜻대로가 된다. NIV까따 테온in accordance with God's will로 번역했다. 이런 번역은 성령께서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는 말과 상응한다(고전2:10). “하나님의 깊은 것(toV bavqo" tou' qeou')하나님을 따라(kataV qeovn)와 병치될 수 있다.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이 알듯이, “하나님의 사정(taV tou' qeou')도 하나님의 영이 알기 때문이다(고전2:11). 때로 방언은 성부를 아시는 성령께서 성부께 드리는 기도다. 성부와 성령은 앎을 매개로 서로 연결된다. 방언은 이렇게 성부와 성령 사이의 서로 아심을 통한 친교”(communion through mutual knowing)에서 발생한다. 이런 의미에서 방언은 성부와 성령사이의 사귐, 빼리코레시스(pericovresi", perichoresis)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부의 마음을 아시는 성령께서는 우리를 그 연합에 동참하여 진리이고 말씀인 성부의 입(the Father’s Mouth)과 하나가 되어 방언을 말하도록 하신다.

방언은 성부께서 성령을 주심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성부께서 주시기로 약속하신 성령(toV pneu'ma h@ e*paggeliva tou' patrov")을 주심으로 발화된다(cf. 24:49; 2:33). 성부께서는 성령을 주신다(divdwmi, 5:5, 5:32). 성령은 성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dwreav tou' qeou')이다(8:19-20). 선물로 주어진 성령은 사람으로 하여금 방언을 말하게 하신다. 방언은 성부의 성령 주심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성부께서 주시는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으로 발생한다. 방언은 성부께서 주시는 선물(dwreav')이 베푸시는 은사(carivsma)인 것이다.

 

d. 방언과 삼위일체 하나님의 친교

 

방언의 근원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본질이다. 먼저 방언을 말하게 하시는 성령은 성부 그리고 성자의 본질로부터 나오신다. “그리고 아들로부터를 의미하는 필리오크(filioque)는 서방교회의 본질 중심적 삼위일체론의 산물이. 안셀름(Anselm)이 지고의 선[성령]은 당신[성부]과 당신의 아들[성자]에게 공동의 한 사랑이며, 성령은 [성부와 성자] 양자에게서 나오십니다”(Sanctus Spiritus ab utroque procedens)라고 고백했다. 그에 따르면,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한 본질(una essentia)로부터 나오신다. 성부와 성자의 한 본질로부터 성령이 나오심으로써 방언이 발화될 수 있다. 방언의 가장 내밀한 기원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본질인 것이다. 그렇다고 성부와 성자의 본질이 성령과 무관한 것은 아니다. 성부와 성자의 한 본질은 또한 성령의 본질이기도 하다. 결국 방언의 근원은 성부와 성자와 성자 하나님의 본질이다.

방언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immanent relation)를 전제로 발생한다. 누가는 방언이 성부의 부어주심이며(2:17), 성자의 부어주심이고(2:33),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는 것(2:4)이라고 말한다. 또한 누가는 방언이 성령을 중심으로 성부와 성자의 주고 받음에서, 즉 삼위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에서 발생한다고 말한다(2:33). 방언이 인간에게 주어지기 위해서는 먼저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사이에서 내재적인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 방언은 본질적으로 동일한 본질(o&moousivo")인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세 위격들의 상호침투, 상호공유(pericovresi"; perichoresis)내재적 관계를 전제로 삼는다. 세 위격의 활동들은 시간의 표지나 분리된 행위의 구분 없이 함께 행위 하면서 셋 모두에 의해 행해진다. 위격들은 항상 세 존재양식들 안에서, 또는 행위영역 안에서, 또는 상호관계들 안에서 한 실체적 실재로 존재하신다. 아버지께서는 아들로부터 떨어져서 인식될 수 없고, 아들께서도 성령으로부터 떨어져서 파악되실 수 없으며, 아들께서는 항상 아버지 안에 계시고, 성령께서도 항상 아들과 함께 계신다. 그 관계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존재 공동체”, 또는 실체의 교류”(communio substantiae). 또한 그 관계성은 세 인격이 상호간에 스며들어(interpenetrate) 하나가 되는 인격의 교류”(person-perichoresis). 방언은 삼위 하나님의 그런 내적인 상호관계에서 발생한다.

방언을 발생시키는 삼위 하나님의 상호교류는 삼위의 참여와 존중 속에서 사귀는 자기 소통/친교적 연합에서 일어난다. 삼위 하나님은 영원히 스스로 소통(eternal self-communication)하시는 분이시다. 삼위는 서로에게 자신을 소통하며 하나가 되신다. 삼위 사이의 소통을 사귐(koinoniva)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사귐은 서로를 위한 개방성과 서로에 대한 참여와 서로에 대한 존중을 의미한다. 사귐은 소유와 존재의 모든 것을 서로 나누는 행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단일성은 단지 하나의 동질적이고 신적인 실재나 동일한 신적인 주체만이 아니라 무엇보다 세 위격들의 유일 독특한 사귐에 있다. 그 사귐을 삼위 하나님의 참여와 친교적 연합”(Communion)이라고 일컬을 수도 있을 것이다. 방언은 삼위의 참여와 존중 속에서의 친교적 연합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서 발생하되 내재적 관계와 동시에 존재하는 경세적 관계(economic relation)에 의해 발생한다. 바울은 방언을 포함한 은사는 성령과 성자와 성부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은사는 여러 가지이지만 성령은 동일하며, 직임은 여러 가지이지만 주는 동일하시고, 역사는 여러 가지나 하나님은 동일하시다(고전12:4-6). 사도 요한에 의하면 성부께서 방언을 말하게 하시는 성령을 보내시며(14:26), 성자도 성부로부터 성령을 보내신다(15:26).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보내심을 받고 신자에게 오셔서 방언을 말하게 하신다. 방언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인간에게서 발생한다. 방언은 동일하신 성령과 성자와 성부의 인간을 향한 외적 역사(ad extra)에서 발생한다. 동방신학은 삼위일체에 초점을 두고 영원 속에서 하나님 본성의 교리인 신론(qeologia)과 수육을 중심한 경륜(oi*konomia) 사이를 구별했다. 삼위 사이의 사귐은 그 존재와 그 사역을 모두 포함한다. 삼위일체론은 오랫동안 하나님 안의 내적 신비에 대한 탐구로 간주되어 왔으나 최근에는 삼위의 구원 사역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활발해졌다. 삼위일체신학은 교회의 하나님 체험에 근거한다. 하나님 체험을 강조하는 오순절주의자들은 내재적 삼위일체(immanent Trinity)보다는 인간을 향한 경세적 삼위일체”(economic Trinity)를 선호한다. 오순절 안에서는 삼위의 자신들을 향한(ad intra) 국면보다는 인간인 우리를 향한”(pro nobis) 국면이 강조된다. 그런데 삼위일체론과 구원 경륜의 교리 사이를 특별히 구별할 이유가 없다. 구원을 위한 경세적 삼위일체는 내재적 삼위일체이며, 또한 그 역이기도 하다. 삼위의 내재적 사역들은 분리될 수 있지만 삼위의 외적 사역들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삼위 간의 빼리코레시스에 의한 친교적 연합은 존재”(Being)뿐만 아니라 사역”(Activity)에 있어서도 발생한다. 성자는 전유적으로 구속자이시지만, 성부와 성령은 성자를 구속자로 보내신다. 또한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보냄을 받아 신자들에게 나오신다. 방언은 내재적 관계와 동시에 존재하는 삼위의 인간을 향한 경세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2. 방언과 삼위의 전유적 사역

 

a. 방언과 성부 하나님

 

방언은 외부와 내부를 향해 말씀하시는 언어적 존재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한다. 하나님은 외부를 향해 말씀하시는 언어적 존재다. 창세기는 하나님을 외부를 향해 말씀하시는 언어적 존재”(the Being of language)로 규정한다. 하나님은 권세와 능력의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rb^d+B!) 하늘이 지음을 받았다고 선포한다(33:6). 히브리서 기자도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11:3)고 선포한다. 언어적 존재이신 하나님은 외부를 향해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셨고, 그 말씀에 따라 없었던 빛이 존재하게 되었다(1:3). 헤밀턴(Victor P. Hamilton)은 하나님의 발화는 독주자(soloist)와 같이 홀로 말씀하시고, 해설자는 반주자와 같다고 말했지만, 연주가의 연주가 곧 사라지는 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발화는 사라지지 않고 발화의 대상을 구체적으로 존재케 한다. 하나님께서 외부를 향해 말씀하시자 그 말씀으로 인해 구체적 현실이 하나님 바깥에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 바깥의 존재들은 하나님의 본성의 유출이 아니고 하나님의 인격적 창조 의지의 산물”(the product of his personal will)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피조물들 사이의 유일한 연속성은 말씀이다. 이사야는 하나님의 만물 창조의 방법을 각각의 이름 부름”(ar`q+y] <v@B= <L*k|l= calling all the names)으로 규정한다(40:26). 하나님께서 이름을 불러주시니 그 이름이 지칭하는 존재가 형성되었다(44:24). 하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창조한 인간을 향해 말씀하기 시작하셨다(1:28). 하나님의 외부를 향한 말씀을 하나님의 경세적 발화”(God’s economic speech)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내부를 향해 자기 자신과 대화하시는 존재다. 창세기는 하나님을 자기 내부를 향해 대화하시는 존재로 규정한다.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자기 자신과의 대화 후에 일어났다(1:26). “우리”(hc#u&n^) 문구는 하나님과 천사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다신론적 언급도 아니다. 그것은 장엄 복수”(a plural of majesty)라기 보다는 한 하나님의 자기 대화”(self-communication)를 지칭한다.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홀로”(yD]b^l=) 하늘을 펴시고, 땅을 베푸셨다고 선언한다(44:24). 한 분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향해 대화하셨다. 하나님의 자기 대화는 사도 요한의 창조자 기독론”(Creator-Christology)(1:3) 창세기 기자의 하나님의 영언급(1:2)을 통해 삼위일체적 해석을 허용한다. 인간의 창조는 다른 존재들의 창조처럼 하나님의 일방적인 발화를 통해 일어난 것이 아니다. 인간의 창조는 삼위 하나님의 자기-대화를 통해 결정되고, 발생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되 타율이 아닌 전적인 자율에 의해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창세의 말씀은 누구에게도 구속받지 않는 자율적 발화였다. 삼위 하나님의 자율적인 자기 대화를 하나님의 내재적 발화”(God’s immanent speech)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창조는 하나님의 경세적 발화 이전에 하나님의 내재적 발화를 거쳐 발생했다.

언어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은 인간에게는 낯선 말(strange, unfamiliar word), 곧 방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창조의 말씀은 인간이 존재하여 말하기 전에 발화된, 인간에게는 모르는 낯선 것이었다. 베스터(Claus Westermann)만은 구약에 드러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과의 관계에서만 규정하여 고지”, “선포”, “가르침”, 또는 지시로 분류했다. 그러나 구약에는 인간이 존재하기 이전에 발화된 하나님의 말씀이 등장한다. 창조의 말씀은 기록되어 명사화되기 전에 발화되었다. 바르트(K. Barth)는 하나님의 말씀을 동사적으로 이해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God speaks)로 해석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행동이며, 하나님의 신비(God’s mystery). 창조의 말씀은 인간에게는 감추어졌던 신비다. 태초의 하나님의 발화는 그것에 의해 세상이 창조된 신비하고 거룩한 언어 창조의 방언”(tongue of creation)이었다. 태초에 하나님의 방언은 무에서(Creatio ex Nihilo) 유를 창조했다. 하나님의 방언은 하나님의 뜻을 반영했으며, 그 뜻대로 만물이 창조되고 존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낯선 언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만세 전에 세우신 예정하신 계획을 이루시기 위해 세상을 창조했다. 세상은 그분의 뜻을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낯선 말의 창조적 발화의 결과물이다. 하나님의 낯선 말은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부르신다(4:17). 피조물들은 하나님의 낯선 말의 창조적 능력을 드러내고 있다. 방언과 같은 하나님의 낯선 말은 그 어떤 피조물의 도움도 없이 세상을 창조해 내는 능력을 갖고 있다.

방언은 언어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직접적 현현(theophany)의 한 형태이다. 방언 체험은 의식을 초월한 즉각적이고 초자연적인 현현이다. 시내산의 초자연적 현현은 유월절 어린양의 죽임을 성취하고(구약), 오순절 방언의 초자연적 현현은 십자가상에서 하나님의 어린양의 죽음을 성취한다. 방언은 떨리는그리고 두려운하나님 체험을 상징한다. 방언은 계몽주의에 근거한 초월적인 것의 개입을 차단하려하는 세계관을 가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직접적인 현현을 경험시키는 길들 중에서 매우 강력한 것이다. 방언 그 자체도 중요한 것이나, 방언이 상징하는 것, 즉 임의롭고 자유로운 그리고 놀랄만한 하나님의 현현과의 만남 또한 중요하다.

오순절 날에 다른 방언들”(혀들)과 함께 동반된 불같은 혀는 전승접근을 통해 볼 때 하늘의 신성함이 나타난 것이다. 에녹 11416그리고 보라! 그것보다 더 큰집이 있었으니 그 문은 나를 향해 활짝 열려 있었다. 그리고 그 집은 모두 불의 혀들로 만들어졌었다고 묘사한다.불의 혀들(ai& glw'ssai tou' purov")이란 표현은 에녹 114:8-25까지 3회 등장한다. 에녹 1서의 이 부분이 제작된 시기는 중간기(Diadochoi 대략 323-281 B. C.)로 추측된다. 본문은 에녹이 하늘로 올라가 하늘의 성전()으로 들어가는 장면을 묘사한다. 에녹은 이 여행 중에 불로 만들어진 것들을 만난다. 불은 초월적인 것에 대한 우주적인 상징이다. 에녹이 묘사한 것은 사람의 손으로 만들지 않은것을 의미한다. 본문에서 불의 혀들은 하늘의 것들과 땅의 것을 대조시키는 표징이 된다. 분명하게 불의 혀들신적 기원”(divine origin)을 의미한다. 이 에녹서의 불의 혀들전승은 누가의 오순절 불같은 혀들과 어구적으로 관련을 맺는다. 그런데 오순절의 불같은 혀들은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 불이므로, 오순절의 불은 하늘에 있는 신성한 것이 땅에 나타난 것(뒤집힌 메르카바, inverted Merkabah)을 의미한다. 오순절의 다른 혀(방언)들은 불같은 혀와 함께 신성한 하나님의 현현의 한 형태다.

방언은 하나님의 임재를 각성시킨다. 방언은 하나님의 임재를 알리는 방울소리와 같다. 구약시대에 대제사장은 방울들이 달린 옷(39-25-26)을 입고 성전 안으로 들어갔다. 대제사장이 성전 안에서 움직일 때 방울이 울려 소리를 냈다. 만약 하나님께서 임하셔서 대제사장과 제사가 합당하지 못하다고 판단하시면 대제사장을 죽이셨다. 그러면 더 이상 방울이 울릴 수가 없었다. 반면에 성전 안에서 방울 소리가 계속 들려오면 성전 밖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대제사장과 자기들의 제사를 받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방울 소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을 사람들에게 분명하게 육체적으로, 청각적으로 체험시켰다. 방언은 마치 그 방울 소리와 같다. 방언은 방울소리/종소리처럼 울려서 교회를 깨워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분명하게 경험시킨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시는 한, 성령께서는 지속적으로 방언이라는 종을 울려서 삼위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증거 하신다.

성부께서는 방언 같은 말씀을 하셨다. 요한복음은 성부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들을 수 있으나 이해할 수 없는 낯선 말을 하셨다고 기록한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며 성부께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다(12:27). 이때 하늘에서 소리(fwnhv e*k tou' ou*ranou')가 났다. 요한은 이 소리의 내용을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라고 파악했다(12:28). , 요한은 하늘에서 들려온 그 소리는 성부 하나님께서 성자의 기도에 응답하신 뜻있는 말씀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곁에 서서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 중에 어떤 이들은 그 소리를 뜻 없는 단순한 우뢰 소리(bronthv)로 들었다. 우뢰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음성으로 비유되었으며(20:18), 군중들은 예수의 말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으로 어렴풋하게 이해했다. 그 소리의 내용은 그들에게는 파악할 수 없는 낯선 것으로 남았다. 또한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천사가 저에게 말하였다라고 외쳤다(12:29). 그들에게 성부의 말은 바울의 용어로 말하자면 천사의 말(glw'ssa tw'n a*ggevlw'n)로 파악되었다(고전13:1). 그들의 반응을 종합해보면, 하늘에서 들려온 성부의 말은 곁에 있던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은 하나님의 낯선 말, 즉 하나님의 방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하나님의 방언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2:30). 브라운(R. E. Brown)은 성부의 낯선 소리가 군중들에게 이해되지 못했는데 어떻게 그들을 위한 소리였는지 반문한다. 그런데 성부의 소리는 그 군중들을 이해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미 성자께서도 기도드렸듯이 성부의 인간 구원을 위한 자기 결의이다. 성부 하나님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해서 실추된 자신의 명예를 그리스도의 속죄적 죽음을 통해 회복시켜 그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시겠다는 말이다. 곧 그 하나님의 방언은 우리 인간을 위한, 인간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 하나님의 낯선 말은 죽은 자를 살리시기(4:17) 위한 결의의 말씀이었다. 사도 요한은 그 하나님의 낯선 말을 통변하여 기록함으로써 죽은 자를 살리시는, 즉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증거 했다.

 

b. 방언과 성자 하나님

 

성육신은 방언 같은 말씀의 구체적 통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성육신은 인간에게 멀리 있고 낯선 말씀의 인간에게 익숙한 것으로의 체화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곧 하나님이신 말씀(lovgo")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한다(1:1,2,14).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신, 인간에게는 멀리 떨어져 있던 낯선 분이었다. 그 말씀이 사람들이 눈으로 볼 수 있는 익숙한 분으로 오셨다. 성육신(incarnation)을 방언같이 낯선 말씀의 익숙한 것으로의 체화 혹은 구체적 통역(the concrete interpretation of unfamiliar Word)이라고 정의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곧 성부를 보는 것이었다(14:9). 믿음이 있는 자는 익숙한 육신을 통해 낯선 말씀, 하나님의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볼 수 있었다(1:14).

그리스도께서는 방언 같은 낯선 소리로 기도드리기도 하셨다. 사람들이 귀먹고 혀가 어눌한 자를 데리고 예수께 오자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a*nablevya" ei*" toVn ou*ranoVn e*stevnaxen)하셨다(7:34). 레인(W. L. Lane)은 탄식을 강한 정서”(strong emotion) 정도로 해석했지만, 탄식에는 정서를 넘어서는 의미가 포함된다. 하늘을 우러러 탄식했다는 것은 성부께 기도하는 것을 일컫는다. 예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비일상적인 낯선 소리, 즉 방언 같은 탄식(stenavzw)으로 기도하셨다. 그리스도의 낯선 소리 기도는 죄로 인해 스스로 벗어날 수 없었던 인간의 고통에 대한 동정뿐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의 개입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낯선 소리 기도는 바울이 언급한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 방언 기도와 상응한다(8:26). 그리스도의 방언과 같은 탄식기도는 혀의 맺힌 것을 풀어 말이 분명하게 함으로써 어눌한 혀를 치유했다.

방언은 그리스도의 수난 가운데 부르짖음일 수 있으며 십자가의 신학을 형성할 수 있다. 종종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은 십자가 아래서 바울이 말한 약할 때 강함으로 보다는,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자연적 질서에 대한 승리주의적인 지배로 규정된다. 그러나 방언은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을 배제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가 언급한 그리스도의 즐거운 혀는 십자가 죽음이후 음부로부터 말하고 있다. 즐거운 혀는 임박한 승리의 예기임과 동시에 단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을 위해 음부로부터의 구원을 부르짖는 방언이기도 했다. 음부로부터의 예수의 즐거운 혀는 오순절의 즐거운 방언과 상응하기 때문에, 방언은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고립되지 않는다. 그것은 고통 받는 피조물의 구원을 위한 갈망의 말이기도 하다(8:26).

시무어의 오순절 공동체에서 성령 안에서 탄식은 때로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었다. 성령은 기쁨 속에서만 구주의 온전한 생명을 드러내시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는 그분과 함께 기쁨뿐만 아니라 고통을 나눌 신부를 찾고 계시다. 그분은 신자의 마음에 탄식을 일으키신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의 환상을 통해 그리스도와 함께 고통을 당하듯 성령 안에서 탄식한다. 이윽고 어둠이 물러가고 부활하듯 영광 가운데서 방언으로 그리스도를 찬양한다. 시무어의 집회에서 성령침례를 받은 헤리 메이슨(C. H. Mason)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신음 같은 방언을 경험했다. 그는 방언으로 찬양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성령께서 그를 완전히 통제하셨다. 그가 십자가 옆에 서는 것 같았는데 성령께서 죽어가시는 그리스도처럼 신음하기(groan) 시작하셨고, 그도 신음하기 시작했다. 자기 안에서 들려온 그 신음소리는 그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음이었다. 그는 다시 방언으로 잠시 찬양했고, 그리고 완전한 자기 자신의 죽음을 느꼈다.

방언은 그리스도의 또한 부활의 기쁨의 유비일 수 있으며 영광의 신학을 형성할 수 있다. 베드로는 부활 때 예수의 마음이 기뻐하였고 그의 혀는 즐거워했다는 2:26절의 진술로서 사도행전 2:1-13의 성령침례/방언 현상에 대해 반응했다. 베드로는 오순절 설교에서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diaV tou'to hu*fravnqh h& kardiva mou kaiV h*galliavsato h& glw'ssav mou)라는 다윗의 시편을 인용했다(16:8). 그는 그 다윗의 시편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고,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을 보았다. 누가는 사도행전 2:4절의 오순절적 방언이 예수의 즐거운 혀의 유비였음을 말하려고 했던 것일 것이다. 방언은 이렇게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과 기쁨을 드러내는 영광의 신학을 형성할 수 있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울에게 그와 동행인들에게는 낯선 소리로 말씀하셨다. 누가는 바울의 영문 층대 설교에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빛은 보면서도 나더러 말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22:9)고 말한다. 다메섹도상에서 바울과 일행들은 그리스도께서 현현(christophany)하시는 빛만 보았지 그리스도의 소리는 듣지 못했다. “소리를 듣지 못했다(ou*k h#kousan tou' lalou'ntov")는 말은 그리스도의 말씀하는 소리를 아예 듣지 못했다는 것이 아니라 그 음은 들었으나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NIV는 그 구절을 “they did not understand the voice of him who was speaking”이라고 번역했다. 그런데 바울의 아그립바왕 앞에서의 변론에 따르면 바울은 동행인들이 알아듣지 못한 그리스도의 소리를 히브리 방언으로(th'/ &Ebrai?di dialevktw/) 알아들었다. “우리가 다 땅에 엎드러지매 내가 소리를 들으니 히브리 방언으로 이르되”(26:14). 만약 그리스도께서 히브리어로 말씀하셨다면 동행인들이 그 소리의 뜻을 이해했을 것이다. 동행인들이 알아듣지 못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낯선 소리, 즉 방언이었다. 그리스도의 방언은 바울에게만 히브리어로 통역되어 들렸다. 또는 동행인들은 아람어를 상용하는 사람들이었는데, 바울만 종교적 언어였던 히브리어를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시지 않고 바울만 알아들을 수 있는 히브리어를 말하셨을 수도 있다. 훈련받은 바리새인들에게 바울이 히브리어로 말한 것은 효과적이었다는 것이 이것을 뒷받침한다(21:40-22:2).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낯선 소리/방언은 한 사람의 인생의 방향을 전환시켰다.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방언은 불신자를 신자로 만들고, 나아가 사명자로 전환시킨 극적인 구원 역사의 한 방법이었다.

새 방언은 기독론적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믿는 자들에게 표적들이 따를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그 표적들 중에 새 방언을 말하는 것이 포함되어 있다(16:17). 마가에게 새 방언(new tongue)은 그리스도의 약속에 의한 것이다. 방언이 새롭다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관련성 속에서 규정지어진다. , 새 방언은 기독론적이다. 새 방언은 그리스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기독론적 방언(christological tongue)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누구나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약속된다. 기독론적인 방언은 그것을 말하는 사람이 복음을 믿는 자라는 것을 확증해주는 표적이 된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누구나 방언을 말할 수 있고, 방언을 말함으로써 자기가 복음을 믿는 자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론적 새 방언은 모든 믿는 자에게 따르는/동반되는 표적(e*pakolouvnton shneivwn)이다(16:20).

방언은 그리스도의 현재적 사역의 한 형태다. 마가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 때 함께 역사하셔서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 하신다고 전한다(16:20).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믿는 자들이 방언을 말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실 뿐만 아니라, 그 약속을 실현시키고 계시다. 새 방언은 그리스도께서 제자들과 함께 역사하시는 것”(sunergou'nto")이다. 그리스도께서 방언이라는 표적으로(diaV tw'n e*pakolouvnton shneivwn) 제자들이 전한 말을 증거하신다. 방언은 그리스도의 일인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로 하여금 방언을 말하게 하심으로 그 약속의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고 계신다. 믿는 자들에게 방언을 말하게 하심으로 그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확신을 더해주시고 계시다. 그리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정죄를 받을 것이라는 경고를 주시고 계시다. 기독론적 방언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결코 중단될 수 없는 것이다. 방언은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역사하고 계심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다. 방언은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영향력을 끼치시는 방법 중의 하나이다.

방언은 성자와 성부와의 친밀한 교제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교제 가운데서도 성자가 끊임없이 신자들을 위해 활동하심에서 발생한다. 스데반 집사는 순교하면서 하나님 우편에 서계시는 그리스도를 보았다(7:55-56).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보좌와 장로들 사이에 어린양이 서있는 것을 보았다(4:4-11). 그리스도께서 서계시다는 것은 왕위에 앉으신 것뿐만 아니라 계속적인 활동을 의미한다. 방언은 그런 성자의 신자들을 위한 끊임없는 하늘에서의 활동에서 발생한다.

다른 방언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범위를 드러낸다. 오순절 날 하늘 아래의 각 나라 사람들”(a*poV pantoV" e!qnou" tw'n u&poV toVn ou*ranovn)이 자기 나라 방언으로 들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범위를 말하는 것이다(2:5, 6). 오순절 날의 다른 방언들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광범위함을, 모든 족속들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도요한은 이십사 장로들의 찬양을 기록한다. “책을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시기에 합당하도다. 일찍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저희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을 삼으셨으니 저희가 땅에서 왕노릇하리로다”(5:9-10). 그리스도께서는 각 족속과 방언(e*k pavsh" fulh'" kaiV glwvssh")의 사람들을 구원하셨다.

방언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방언은 영으로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고전14:2). “비밀(musthvrion)이 무엇을 지칭하는 지는 본문에서 확실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고든 피는 비밀이해를 초월하는 것”(which lies outside the understanding)으로 해석하고 13:2절의 모든 비밀과 연결시킨다. 그런데 바울은 골로새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비밀(toV musthrivon tou' qeou')이라고 소개하고 있다(2:2, 1:27). 로버트슨(A. Robertson)비밀을 골로새서 126절과 27절을 통해 감추어졌었지만 이제 계시된 하나님에 관한 진리, 그리스도로 해석한다. 오어(W. F. Orr)와 왈터(J. A. Walther))비밀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구원으로 본다. 고린도전서와 골로새서의 두 본문의 연결은 방언이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임을 드러낸다.

 

c. 방언과 성령 하나님

 

신자는 자신 안에 성령이 거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성령은 영이시기에 인간의 감각으로 포착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이 감각에 포착되지 않는 성령께서 영혼에 내주하심을 알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4:16-17). 먼저 신자는 성령의 내적 증거에 의해 그분의 내주하심을 알 수 있다. 시무어(W. J. Seymour)에게 성령의 내적 증거(the witness of Holy Spirit inward)는 하나님을 아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지식이다. 신자는 또한 성령의 외적 증거들에 의해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시무어는 외적인 표적들(outward signs)으로 성령의 내주를 확인하려는 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는 따르는 표적들을 소유하는 것은 좋다라고 말함으로써 외적인 표적들에 의해 성령의 내주를 확인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어떤 외적인 표적들(outward signs)이 나타나지 않는다할지라도 자신들이 성령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한다. 그것이 이단이다. 성령의 내적 증거(the witness of the Holy Spirit inward)는 하나님을 아는데 있어서 가장 큰 지식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기 때문이다(14:17). 따르는 표적들을 소유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을 외적인 나타남들(outward manifestations)에만 고정시키는 것은 좋지 못하다.

 

신자는 성령의 외적 표적들 중에 하나인 방언을 통해 자신 안에 성령께서 거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방언은 표현할 수 없는 것, 즉 성령의 내주를 표현하는 우리의 무력함의 상징이기도 하다. 방언을 말함으로써 신자는 성령께서 자기 안에 계셔서 자기 영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방언을 통해 성령의 내주를 아는 것은 이성을 통한 지적인 앎(cognitive knowledge)만은 아니다. 방언을 통해 성령의 내주를 아는 것은 먼저 자기 자신의 발성기관, 즉 몸으로 경험되기 시작하는 앎이다. 발성기관의 움직임을 통해 발화되는 방언을 이번에는 청각기관이 감각한다. 그 청각기관의 감지를 통해 신자는 자신 안에 성령께서 내주하고 계심을 확실하게 알게 된다. 이렇게 방언을 통한 성령 내주에 대한 앎은 신체를 통한 감각적인 앎(sensorial knowledge)이기도 하다. 계속하여 방언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면 성령님의 내주하심을 항상 의식할 수 있게 된다. 방언을 말함으로써 성령께서 자기 안에 내주하심을 분명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은 방언의 근원이시다. 방언은 성령의 인격적 현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방언이 말해질 때에 사람의 발성 기관(, , 성대)이 모두 사용되어지나 그 말은 엄밀히 말해서 발화자가 하는 말이 아니다. 그 말은 성령께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며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이다. 카로터스(W. F. Carothers)는 일찍이 19065월에 방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성기관을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간파했다. 방언은 성령의 한없는 자유스러운 역사다. 시무어는 다음과 같이 방언을 말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동적이고 직접적인 역사를 말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너무 관심을 쏟지 말고, 성령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방언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유롭게 올 것입니다.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It is nothing worked up, but it comes from the heart).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10). 그래서 생명의 성령께서 들어오실 때, 마음속에서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 입이 열립니다.

 

방언의 독특성은 인간의 영을 통한 성령의 말씀이라는 점이다. 하나님의 영은 사람의 영 깊은 곳에 계시고 성령의 말은 그곳으로부터 흘러나온다. 그 차원은 사람이 개념화하고 발음하는 정신적 차원보다 더 깊고 더 높은 차원이다. 그리고 그 차원은 또한 매우 감정적인 내용을 갖는 사람의 느낌보다 더 깊다. 그 차원은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 안에서 그리고 그 영을 통해서 말씀하시면서 초월적인 하나님과 교통하는 인간의 영적인 차원이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사람의 모국어의 수준을 넘어서 영적인 발성의 영역으로 들어서는 것이다.

방언은 성령의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바울은 성령의 기도에 대해 언급한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8:26-27). 성령께서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 기도하신다. “탄식(stenavgmo")은 익숙한 언어가 아닌 낯선 소리다. 성령이 명확한 음절로 말할 수 없는 신음으로 우리를 위해서 중보 하신다는 것이다. 로마서 826절의 말할 수 없는(a*lalhvto")은 원어적으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unutterable) 것이지 말로 표현되지 않은”(unuttered)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본문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unutterable utterance)로 볼 수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은, 예를 들면 그리스도의 사랑 같은, 알 수 없는 것을 아는 것과 역설적인 면에서 유사하다(3:19). 예배의 인식 가능한 특성이 탄식에 대한 바울의 언급의 가장 적절한 목적(object)을 제공하기 때문에, 그것은 방언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방언은 부분적으로 성령의 중보기도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성령께서 방언으로 자신들을 통해 기도하고 말씀하신다고 생각했다.

방언은 성령의 나타남의 형태 가운데 하나다. 바울은 성령의 나타남(h& fanevrwsi" tou' pneuvmato") 가운데 각종 방언 말함을 제시했다(고전 12:7, 10). 성령께서는 성도들 안에 내주하시기도 하지만, 또한 성도들 밖으로 나타나시기도 하신다. 방언은 성령 하나님께서 성도들 밖으로 나타나심(disclosure, manifestation)이다. 방언은 보이지 않는 성령 하나님의 청각적 현현(the audible theophany of the invisible Spirit)이다. 성령은 영이시기에 사람들이 육체의 감각으로 포착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방언을 통해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청각적으로 포착되신다. 때로 성령께서는 수화 방언”(manual tongues)을 통해 시각적으로 나타나신다.

한편으로 방언은 성령의 임재를 상징한다. 시무어는 오순절의 불의 혀(the tongues of fire)는 성령의 영광의 성대한 임재”(the great Shekina glory)상징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는 영광의 성대한 임재는 마치 밤의 불기둥과 낮의 구름기둥처럼 여전히 우리 위에 머물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불을 통한 쉐키나를 시내산의 불과 연결시키지 않고 시내광야와 성막의 지성소 안의 불기둥과 연결시켰다. 방언들(tongues)과 함께 등장한, 120문도 각각의 머리위에 임했던 불의 혀들(the tongues of fire)은 성령 하나님의 영광의 성대한 임재를 상징하는(represent) 것이다. 그런데 그 성령의 쉐키나는 성령의 내주를 전제로 한다. 불의 혀들은 성령의 쉐키나의 시각적 상징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다른 혀들(방언들)”은 성령의 쉐키나의 청각적 상징이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순절날 시각적으로 나타난 것이 단순한 이 아니었고, “불의 혀였다는 것은 다른 혀들인 방언과의 밀접한 관련성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방언은 성령 자신의 임재다. 쉐키나(nkv; shekinah)는 성령의 본성에 더해지는 속성(divine attribute)만이 아니다. 그것은 특별한 장소에 그리고 특별한 시간에 일어나는 성령 자신의 임재다. 랍비적 유대교에서 쉐키나는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세상 그리고 유대인들과의 관계에 대한 은유”(metaphor)였지만, 그러나 때로는 은유라기보다는 체현”(personification)이기도 했다. 방언은 그것을 통해 말씀하시는 인격적 성령 하나님이 임재하는 성령의 체현이다. 쉐키나는 성령의 케노시스(kenosis)를 가리킨다. 방언을 통한 성령의 현현은 신인동형론적이지 않고, 피조물 가운데 성령의 직접적 거하심을 통해 가능해지는 것이다. 방언은 말씀하시는 성령의 인격적 체현인 쉐키나를 경험시킨다.

방언은 성령의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오심을 통해 발생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의 능동적인 오심을 말씀하셨다(16:13).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o@tan deV e!lqh/ e*kei'no", toV pneu'ma th'" a*lhqeiva")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예수께서는 또한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권능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1:8). 누가는 오순절날 성령은 각 사람에게 충만하셨고 그들에게 말할 거리를 주셔서 방언을 말하게 하셨다고 기록했다(2:4).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서는 성부와 성자와의 관계에서 성령의 피동적인 보내지심을 말했지만(2:33, 38), 오순절날의 해설을 통해서는 성령의 능동적 오심을 말한 것이다. 바울도 성령께서 능동적으로 방언의 은사를 나누어주신다고 말했다(고전12:10-11).

성령은 우리에게 능동적으로도 오신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오실 뿐만 아니라, 또한 성부와 성자로부터 나오실(e*kporeuvomai, proceed) 뿐만 아니라, 주체적으로 능동적으로 오신다(e!rcomai, come). 그런 주체적 오심은 성령께서 본질적으로 성부와 성자와 동등하신 하나님이시며, 또한 삼위 중의 한 독립적인 위격이시기 때문이다. 능동적으로 오신 성령께서는 능동적으로 방언을 말하게 하신다. 서방신학에 의해 주장되어온 필리오크론은 성령을 성부와 성자보다 열등하고 종속적인 것으로 취급하기 쉽다. 홀렌베거는 서방의 필리오크론이 실제로는 성부로부터 성자로 성자로부터 성령으로 이어지는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왔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어거스틴은 성부와 성자가 성령의 시작이라고 말했을 뿐만 아니라. 성령도 역시 시작(principium)이며,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동일한 시작(unum principium)이라고 말했다. 성령은 스스로 나오시기를 시작하신다. 동방신학자 포띠오스(Fwtio" Patriarcou)는 만약 성령을 발출하는 능력이 성부와 성자에게 공통의 특성이라면, 그것은 성령에게도 공통적이어야 하며, 따라서 성령은 그 자신으로부터 나오실 것이라고 말했다. 비록 그는 가정적으로 말했지만, 결국 성령의 능동적 오심에 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했다. 키프러스의 그레고리(Gregory of Cyprus)는 성령의 성자로부터 나오심은 성령의 성자를 통한 영원한 나타나심의 열매라고 생각했다. 칼빈(Calvin)은 그레고리를 극복하려 성령의 에너지는 그리스도의 에너지로서 나타나심에 의해 신자에게 알려지는 것이 아니라 내주하심에 의해 신자와 함께 맺는 위격적 관계에 의해 알려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위격적 관계를 내적인 구원사역에 한정시켰다. 하지만 성령은 능동적으로 위격적으로 오시지만 신자의 안에 머무르시지 않고 방언 은사를 통해 밖으로 알려지도록 나타나신다(고전12:7, 10). 성령의 능동적 오심과 나타나심은 성령이여 임하소서!”(Veni, Sancte Spiritus)라는 인간의 적극적 초청을 가능하게 한다.

성령의 능동적 오심은 결코 성부와 성자와 무관한 것은 아니다. 만약 성령의 능동적 나오심이 성부나 성자와 관계없다고 생각한다면 성령을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다른 종교의 영들과 동일시하는 혼합주의(syncretism)의 우를 범할 수 있다. 그리고 타 종교의 귀신에 의한 황홀경적 발화현상을 성령에 의한 방언이라고 주장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바르트가 필리오크를 적극 지지했던 이유들 중 하나가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으로 한정함으로써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자연신학적 계시론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 누가는 능동적으로 나오신 성령께서 사람에게 능동적으로 말하도록 주신 방언의 내용은 하나님의 큰일이었다고 말한다(2:11). 이는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며(14:26), 그리스도를 증거하실 것이며(15:28), 자의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듣는 것을 말하실 것(16:13)이라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일치한다. 비록 성령께서 능동적으로 오시지만, 그분과 그분의 사역은 성부와 성자와 무관하지 않다. 성령은 거룩한 영으로서 능동적으로 오시지만, “하나님의 영으로서 하나님의 큰일을 방언으로 말하도록 하시며, 성부께 찬양과 기도하도록 하시고, “아들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증거 하신다. 그러므로 다른 종교의 사람들이 읊조리는 소리는 방언이 아니다. 오직 말씀이 사람이 되어 오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께서 말하게 하는 것만이 방언이다.

 

3. 방언과 삼위적 친교 공동체에 참여

 

a. 신자들의 하나님의 친교 공동체에 참여

 

방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친교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participating in the communion of the Triune God)이다. 신자는 성령의 탄식 방언을 통해 성령의 생각을 아시는 성부와 성부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는 성령의 친교에 참여하는 것이다. 방언은 신자들이 그런 삼위 하나님의 친밀한 사귐에 참여하는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은 신자들에게 열려 있다. 성자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 . .”(17, 21)라고 그리스도인들이 삼위 하나님의 친교 안에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셨다. “성령의 사귐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삼위일체적 본질과 상응하는, 그리고 하나님 자신에게 참여하는 사귐을 가져다준다.

방언이 수신자의 시청각 경험을 일으키는 것은 방언의 소통성(communication)을 말하는 것이다. 방언은 시청각 경험이다(visual and auditorial experience). 방언은 청각 경험(auditorial experience)이다. 방언은 발신자에게나 수신자에게 청각 기관을 통한 경험을 일으킨다. 방언 경험은 또한 가시적 경험(visible experience)이기도 하다. 수신자들이 화자가 입으로 말하는 것을 눈으로 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신약 성경에서 방언을 포함한 성령의 은사는 가시적”(visible)적 표적이었다. 방언이 발신자의 내적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또한 발신자에게만 감지될 수 있는 신체적 경험에 그치지 않고, 수신자들에게도 현저한 시청각 경험을 일으키는 것은 방언의 소통성을 대변해준다. 방언은 근본적으로 수신자의 시각을 포함한 청각의 자극하며 주의를 끈다. 수신자에 대한 방언의 자극은 결국 수신자의 반응을 이끌어낸다. 방언은 인간의 마음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그리스도의 영과의 불가해한 그리고 만남에 대한 신체적, 가시적, 청각적 증거”(physical, visible, audible evidence). 그런데 방언은 그 증거에 그치지 않고 발화자의 영을 만난 하나님의 영이 발화자의 발성기관과 수신자의 시청각기관을 통해 수신자에게 말씀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말씀은 수신자의 반응을 일으킨다. 신체적 경험인 방언을 통한 하나님의 수신자의 신체에 대한 자극은 수신자의 반응을 일으키며, 하나님의 자극과 수신자의 반응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소통을 발생시킨다. 방언은 이처럼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소통을 위한 신체적 경험(physical experience for intimate communication between God and man)이다.

 

b. 불신자들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으로의 초청

 

방언이 불신자들을 향해 발화될 때 그 방언은 불신자들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으로의 초청(The invitation of the Triune God toward unbelievers to the communion)이다. 오순절 날에서처럼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는 방언은 때로 불신자들을 향한 초청이다. 바울이 언급한 것처럼 방언이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일 때 그 방언은 불신자들을 삼위 하나님의 친교 공동체로의 초청이다. 방언은 신자들이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에 참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로 하여금 그 사귐에 들어오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방언을 통한 소통 경험은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친교 공동체를 확장시켜가는 한 방법이다. 하나님께서는 발화자의 영을 만나주시고, 친밀한 사귀시면서 발화자의 내적 경험의 한계 내에 머무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발화자의 발성기관을 통해 방언을 다른 수신자의 청각기관과 시각기관을 자극함으로써 수신자를 하나님과의 사귐의 공동체 안으로 초청하신다. 방언을 통한 하나님의 초청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 공동체의 확장을 가져온다. 이런 면에서 방언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 공동체의 확장 경험(expansionary experience of communion among God and men)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