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서론
A. 오순절적 방언 연구의 의의
방언은 현대 오순절운동을 다른 운동들과 구별시키며 촉발시킨 요인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현대 오순절운동은 성령침례 경험의 독특한 해석을 통해 시작되었다. 대부분의 오순절 학자들은 방언이 성령침례의 “첫 번째 육체적 증거”(the initial physical evidence)로 해석되면서 현대 오순절운동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성령침례에 대한 논의들은 오순절운동이 발발하기 이전에도 존재했었다. 1901년에 오순절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에도 웨슬리안 성결운동가들은 성령침례를 언급했으며, 또한 개혁주의적 부흥/성결운동가들도 성령침례를 언급했었다. 그러나 방언을 성령침례의 첫 번째 육체적 증거로 의도적으로, 혹은 신학적으로 논증한 예는 없었다. 이 첫 번째 육체적 증거론이 오순절운동에 의해서 처음으로 주창되었다. 현대 오순절주의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찰스 파함(Charles F. Parham)은 방언을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the real Bible evidence)라고 정의하면서 현대 오순절운동을 탄생시켰다. 첫 번째 증거론은 오순절운동을 기존의 다른 갱신 운동과 구분시키는 결정적 요소다. 이처럼 방언은 현대 오순절 운동을 촉발 시킨 중요한 요소다.
현대 오순절운동은 성령침례와의 밀접한 관계를 전제로 “방언운동”이라고 칭해질 수 있을 만큼 방언은 오순절운동과 신학에 중요하다. 오순절운동을 촉발시킨 파함이 오순절운동을 “방언운동”(Tongue Movement)이라고 규정하기도 했을 정도로 방언과 오순절운동의 관계는 가깝다. 파함은 한편으로 오순절운동을 방언에만 집중시킬 수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그렇게 말한 것은 그가 오순절운동을 방언운동으로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래서 파함은 다른 한편으로는 오순절운동을 분명하게 “방언운동”(Tongue movement)으로 명명했다. 오순절운동에서 방언의 위치가 그 만큼 현저했기 때문에 외부에서 오순절운동을 비판하던 사람들도 오순절운동을 “방언운동”이라고 인식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그로마키(Robert G. Gromacki)는 자신의 오순절운동 비판서의 제목을『현대방언운동』(The Modern Tongues Movement)이라고 붙였다. 이렇게 오순절운동은 주도자와 비판자에 의해 방언운동으로 일컬어질 정도로 방언과 밀접하다. 방언은 “오순절 교회의 독특한 교리”이며, “특징 중에 특징”(the distinctive of the distinctive)이 될 수 있다. 방언은 오순절 신학에 있어 중요한 가치를 갖는다.
방언이 오순절주의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포괄적이고 충분하게 되지 않았다. 밀스(Watson Mills)는 “오순절 그룹은 방언 신학을 발전시키고 명확히 하는 데 더 창조적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방언에 대한 신학적 숙고의 부족을 지적한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박사학위논문에서도 방언에 대한 괄목할 만한 신학적 숙고의 진전을 발견할 수 없다. 그 스스로도 방언과 관련된 신학적 숙고가 부족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밀스는 방언에 대한 연구 안내서를 펴냈다. 그런데 그는 다른 접근법의 긴 언급에 비하면 신학적 연구의 역할을 단 하나의 짤막한 단락에서 다루었을 뿐이다. 방언에 대한 신학적 연구가 적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방언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신학적 탐구가 요청된다. 켈시는 오순절 운동은 방언 경험 이상이며, 그것은 방언에 대한 신학, “방언의 신학”(a theology of tongues)이라고 말했다. 그의 언급은 방언을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표현할 여지가 많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런 가능성을 현실적인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방언에 대한 신학적 의미 확장은 이제 적극적으로 시도되어야 한다. 방언에 대한 기존의 신학적 연구의 한계와 문제를 극복하고, 방언 경험이 내포하고 있는 신학적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풀어내야 한다.
본 논문은 방언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의 이해에 대한 연구이다. 이들이 체험한 방언에 대한 의미를 조직신학적인 틀을 통해 관찰할 것이다. 그리하여 방언의 의미를 보다 넓고 체계적으로 드러내고자 한다. 방언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측면에서의 연구는 거의 발견되지 않는다. 이는 방언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제한적이고,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에 대한 기존 연구의 대부분이 방언과 언어의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 혹은 특정한 신학적인 주제에 입각하여 연구되어 왔다. 방언에 대한 폭 넓은 그리고 체계적인(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의) 연구는 본 논문이 제시하는 첫 번째 중요한 의미와 공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의 두 번째 중요한 의의와 공헌은 오순절주의자들만의 독특한 조직신학을 제의할 수 있는 것이다. 본 논문은 조직신학적인 특성을 가진다. 이는 방언을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 다룬다. 어떤 면에서 조직신학을 방언의 측면에서 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방언은 오순절주의자들의 신앙체험과 신학에 중요하고 독특한 요소이다. 이들의 방언을 조직신학적인 관점에서 다룬다는 것은 이들만의 독특한 조직신학을 제의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본 논문은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해 오순절주의자들만의 독특한 조직신학을 발전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다고 본다.
B. 오순절적 방언에 대한 기존의 신학적 연구
본 항은 기존의 방언에 대한 모든 연구들을 다 다루지 않고 조직신학에 관련된 것들만을 선별적으로 다룬다. 방언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대부분 종교학적/사회학적, 언어학적, 심리학적, 역사적, 주석적인 것이었다. 마키아는 기존의 방언연구가 주로 역사적이고 주석적인 측면에서 이루어져 왔다고 분석했다. 그리고 그는 방언에 대한 기존의 신학적 작업 언급에서 두 접근을 포함하여 심리학적인 접근과 사회학적 접근 등은 논외로 삼았다. 본 연구도 방언에 대한 조직신학적인 고찰이므로, 본 항에서 위와 같은 비신학적 접근들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는 것은 본 논문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이먼 찬, 류바르직, 프랑크 마키아, 그리고 사이먼 턱웰의 방언에 대한 신학적 접근만을 분석하고 다룬다.
1. 영성신학적 접근
사이먼 찬(Simon Chan)은 방언을 영성신학적으로 접근했다. 그는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기독교 영성 전통에서 재발견하고 영성신학(spiritual theology)을 방언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적용했다. 영성신학이라는 틀을 통해 방언에 대한 신학적 통찰을 시도한 것이다. 사이먼 찬의 방언에 대한 신학적 논구의 기저에는 “하나님과의 친밀함”(intimacy with God)이 자리 잡고 있다. 찬은 방언을 하나님과의 친밀한 인격적 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그는 기독교 영성의 관조적 전통(contemplative tradition)과 오순절주의는 동일한 목적을 갖는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영성의 전통은 열광주의적(enthusiastic) 흐름과 금욕주의적(ascetical) 흐름으로 대별된다. 찬은 그 두 흐름을 방언의 두 가지 기능과 관련시킨다. 그는 방언에 두 가지의 기능(function)을 부여한다. 그에 따르면 방언은 한 편으로는 성령침례의 증거(tongues as evidence)로서 기능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회중 가운데서 은사나 기도(tongues as gift/prayer)로서 기능한다. 그는 증거로서 방언의 근거를 사도행전에서 찾으며, 은사로서 방언의 근거를 고린도전서에서 찾는다. 찬은 사도행전적 방언을 열광주의적 영성(enthusiastic spirituality) 관점에서 탐구한다. 그에 따르면 증거로서 방언은 누가적이고, 열광주의적(enthusiastic)이다. 그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증거적 방언이 열광주의적인 이유는 방언이 발화될 때 성령께서 완전한 통제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때 발화자는 성령의 능동적 통제에 완전히 수동적이 된다. 또한 찬은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금욕주의적 영성(ascetical spirituality) 관점에서 탐구했다. 그에게 성령이 베푸시는 은사로서 또는 기도로서 방언은 바울적이고, 금욕적(ascetical)이다. 그 이유는 발화자인 인간의 마음이 능동적으로 통제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사이먼 찬이 정통 오순절의 최초 증거교리를 수호하고 방언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진전시키기 위해 분투한 것은 긍정적으로 평가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는 증거적 방언의 언어성을 부정함으로써 그 긍정적 측면을 상쇄시킨다. 찬은 증거적 방언의 근거를 사도행전에서 찾는다. 그럼에도 그는 방언은 이 세상 언어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에게는 증거적 방언의 표식적 측면과 선포적 측면 중에서 표식적인 것만 남는다. 방언이 내포하고 있는 선포적 또는 선교적 측면을 외면하는 것이다. 이 점은 그의 방언 신학의 단점이다. 그의 방언관에 대한 언급의 초점은 하나님과 신자 사이의 관계에 맞춰지고, 하나님과 불신자 사이의 관계는 그 언급에서 사라진다. 그런 방언 이해는 오순절주의의 특징인 선교적 역동성을 위축시킬 위험성을 내포한다. 또한 그의 방언에 대한 신학적 의미 확장 노력은 조직신학적 주제 전체로 발전하지 못했다. 단순히 영성 신학 안의 두 흐름으로 방언의 두 기능을 간단하게 규정하는 데 그쳤다.
2. 부정신학적/포스트모던적 접근
류바르직(Edmund J. Rybarczyk)은 프리모던적인 부정신학과 포스트모던이라는 문화 철학적 틀을 방언 연구에 사용했다. 그에 따르면 근대에 방언을 다시 발굴한 오순절주의자들은 근대(modern)의 이성에 변증하기 위해 방언을 성령침례의 확실한 “증거”(evidence)로 삼았다. 류바르직은 모더니즘적 방언 이해는 한편으로 고대적 부정신학이 가지고 있던 장점의 관점에서 해석되지 못했고, 다른 한편으로 현대적 포스트모던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부정적 신학과 포스트모던의 관점에서 방언을 재해석했다. 그는 프리모던(pre-modern)적인 부정신학(apophaticism/ negative theology)을 통해 “방언의 신비성”(the mystery of glossolalia)을 부각시켰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이라는 틀을 통해 “방언의 심미적 차원들”(the aesthetic dimensions of glossolalia)을 파고들었다.
류바르직에 따르면 부정적(apophatic) 측면에서 방언은 하나님과의 만남(encounter)을 하나님께 표현(Godward expression)하는 기도와 찬양이다. 그런데 그 표현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며 인간은 그저 탄식할 뿐이다. 그 방언이라는 신비한 표현은 인간 이성의 이해를 넘어서면서 이미와 아직 사이에 처한 인간의 연약함(weakness)를 드러낸다. 이런 방언의 성격은 인간이란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결코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는 존재임을 고백하는 부정신학적 측면과 일치한다. 류바르직에 따르면 방언은 하나님께로부터 시작하여 하나님께로 향하는 표현이며, 그 표현 과정에서 인간은 한계를 절감한다. 방언은 부정신학적으로 하나님의 의사소통 수단이면서 동시에 인간에게는 초이성적이다.
류바르직은 포스트모던적 측면에서 방언은 하나님께 향한 인간의 초인식적인 마음과 몸의 기도와 찬양적 표현이라고 이해했다. 그에게 방언은 하나님의 신비가 역사 속에 들어오고 지속적으로 현존하는 것을 초인식적(unintelligible)으로 묘사한다. 그에 따르면 기도와 찬양으로서 방언은 발화자의 마음과 정서와 몸의 움직임을 통해서 발화된다. 그는 그런 방언의 성격이 포스트모던적 예술 과정과 유사하다고 분석했다. 그에게 포스트모더니즘은 비합리적(non-rational)이고 비언어적(non-verbal)인 상상(imagination)을 통한 앎이다. 그 대표적 현상은 예술이다. 상상은 마음과 몸에서 나온다. 표현은 그 상상과 이해 사이의 자유로운 놀이다. 그는 방언의 초인식적 영적 근원과 비합리적 예술의 상상을 대비시켰다. 방언발화자의 마음과 예술가의 마음을 대비시켰으며, 방언 발화자의 발성기관과 예술가의 몸을 대비시켰다.
류바르직은 부정적 신학 전통을 통해 방언을 재해석함으로써 동방교회와의 대화를 시도했으며, 포스트모던적 예술 과정의 틀을 통해 방언을 해석함으로써 포스트모던 시대의 이해를 구했다. 그런 그의 노력은 그 두 집단의 방언에 대한 거부감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또한 분명히 방언의 신학적 의미의 외연을 더욱 확대시켰다. 그런 점에서 그의 방언 연구는 평가 받아야 한다.
류바르직의 연구에서는 방언의 인간을 향한 선포적 측면이 간과된다. 그에게 방언은 인간을 향한 선포가 아닌 하나님을 향한 기도와 찬양이다. 방언은 인간이 하나님께 드리는 표현으로 한정된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통해 인간에게 전달되는 선포를 위한 매체로서 방언의 기능은 주목받지 못한다. 그의 연구의 기조에는 방언은 비언어적이라는 전제가 놓여있다. 사도행전 2장적인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 배우지 않은 이 세상 언어를 통한 선포로서 방언은 무시되고 고린도적인 은사로서 방언만 남는다. 동방신학이나 포스트모던을 향한 변증을 위해 방언 자체의 선포적 기능은 무시된다. 전체적으로 그의 방언 연구는 정통 오순절주의보다는 은사주의에 가깝다.
그의 방언 연구는 조직신학적으로 말하면 대부분 인간론과 관련된다. 그 연구는 인간의 연약함, 인간의 마음과 감성, 발화하는 몸, 인간의 표현 등 인간과 관련하여 진행된다. 방언의 삼위일체론적 의미라든가 기독론적 의미, 또는 교회론적 의미 등과 같은 조직신학적 제 주제들을 통한 해석으로 나가지 못했다. 초기 오순절주의의 증거 교리를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모더니즘의 산물로 치부한 편협성이 그가 방언을 논리와 체계를 요구하는 조직신학의 틀을 통해 해석하는 것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었을 것이다.
3. 단편적인 신학주제적 접근
프랑크 마키아(Frank Macchia)는 방언을 모던적 틀을 통해 보는 것에 반대한다. 그의 눈에는 방언을 성령침례의 증거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성 중심의 모던적 잔재로 비친다. 그렇지만 그는 자기가 포스트모던적 틀을 사용하여 방언을 연구한다고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는다. 마키아의 방언 연구의 근저에는 방언은 증거나 매체가 아닌 상징(sign)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다. 그는 방언의 모던적 증거성 보다는 상징(표적)성을 선호한다. 그에게 방언은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이라는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시도이다. 하나님의 행동을 지시하는 상징(sign)이며, 그런 면에서 성례전적(sacramental)이다. 그는 방언은 또한 종말론적으로 오는 세대의 철저하게 자유스런 능력(radically free power of the age to come)을 지시한다고 주장한다.
마키아는 방언을 여러 신학적 주제들을 통해 연구했다. 그는 방언을 성령침례의 증거와 인종과 민족, 성, 사회적 계급을 뛰어 넘는 성령의 역사에 대한 표적, 하나님 현존 하의 언어, 성도의 교제(sanctorum communio), 십자가의 신학(Theologia Crucis), 새 창조 그리고 성례전적 특성, 종말론적 신 현현의 관점에서 보았다. 그의 방언에 관한 연구들은 기독론, 성령론, 교회론, 종말론과 관련된다. 그 연구는 방언의 의미를 조직신학의 여러 주제들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데 공헌했다. 본 논문은 그의 각 주제들을 통한 방언 해석에서 큰 도움을 받았다. 이 점은 높이 평가 받아야 한다.
비록 그가 방언을 여러 신학적 주제들을 통해 보았지만, 그것은 단편적(fragmentary)이었다. 그가 방언에 대해 신학적으로 가장 넓고 길게 논구한 “말할 수 없는 탄식: 방언 신학을 향해”(Sighs Too Deep for Words: Toward a Theology of Glossolalia)는 30쪽의 짧은 것이다. 그렇게 짧은 글 안에 여러 신학적 주제들을 통한 방언 해석이 담겨있다. 그래서 각 주제들에 대한 충분한 논의가 부족하다. 마키아는 방언을 신학적으로 해석하는 데 있어서 선두주자였다. 하지만, 그는 그 해석을 조직신학의 전반적인 주제들로 확대하거나 방언을 중심으로 단권의 조직신학을 쓰지 않았다.
마키아의 성령침례 중심적 조직신학은 성령침례로부터 방언을 분리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는 방언을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독특한 것”(distinctive) 정도로 인정한다. 그러나 그에게 방언은 오순절주의의 핵심(core)은 아니다. 그는 그의 최초의 조직신학적 단행본을 세상에 내놓으면서 방언이 아닌 성령침례를 중심주지로 삼았다. 그는 성령침례로부터 방언을 떼어놓으려는 은사주의의 공격을 막아내고자 그 불분리성을 고수하고, 방언의 성령침례에 대한 상징성을 주장해왔다. 그러나 그의 성령침례 중심 신학은 안타깝게도 그의 분투와는 상반되게 성령침례에서 방언의 분리를 초래했다. 그의 인간론, 구원론 등 대부분의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성령침례 중심적 해석에서 방언은 그 설자리를 잃었다.
4. 구성 신학적 접근
사이먼 텍웰(Simon Tugwell)은 방언이 기독교 교리의 중심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간파했다. 그는 방언은 은사들의 연결망의 중추일 뿐만 아니라 “기독교 교리 전체 안으로 들어가는 한 길”(a way into the whole of christian doctrine)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게 방언은 한 현상에 그치지 않고, 기독교인의 신학과 신앙과 실천의 전체 시스템의 중심일 수 있다.
사이먼 텍웰(Simon Tugwell)은 방언을 구성적(constructive)으로 연구했다. 턱웰은 방언을 유기적(organic)인 신학 구조를 통해 해석하고 구성하려 했다. 그는 방언의 구성적 가능성을 주장한 후 2 장에 걸쳐 순차적으로(linearly) 일관성 있게 구성된 방언 신학을 전개한다. I 장은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심을 따라”(As the Spirit gave them utterance)라는 머리글을 달고 있으며, 총 4항으로 구성된다. 그는 “말하도록 하시는 성령”(The Speech-giving Spirit)이라는 제목으로 첫 항을 장식한다. 그는 첫 항 서두에서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 말하기”(speaking in tongues)를 언급한다. 그에게 “성부의 혀”(the Father's Tongues)이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성부의 입”(the Father’s Mouth)이신 성자와 연합시키셔서 사단이 일으키는 겨울바람같이 냉랭하게 얼어붙은 침묵을 깨는 신앙 고백과 찬양을 일으키신다. 첫 항은 전통적인 조직신학적 주제로 본다면 신론에 해당할 것이다.
턱웰은 두 번째 항의 제목을 “말씀의 담지자 인간”(Man the Word-bearer)이라고 단다. 인간은 태초에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거룩한 성소의 언어(the language of the sancturary), “창조의 방언”(the tongue of creation)으로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을 하나님과 나누도록 불림 받은 하나님의 형상(the image of God), 말하는 존재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러나 그에 따르면 인간은 죄를 범함으로써 하나님과의 교제를 거절했으며, 그 결과 하나님의 언어를 나누는 능력을 상실했다. 바벨의 언어 혼잡은 그 능력의 상실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두 번째 항의 상반부는 전통적인 조직신학적 주제로 본다면 창조론 혹은 인간론에 해당한다.
턱웰은 두 번째 항의 하반부에서 만물을 창조했던 태초의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을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오순절의 방언이 바벨과는 다르게 모든 사람들을 하나 됨으로 이끌었다고 말한다. 방언으로 인한 하나 됨으로 언어의 장벽들이 걷혀져 타인과 그리고 하나님의 언어와 분리될 필요가 없게 되었다. 성령이 임하심으로 말씀이 우리 안에서 형성되기 시작하고 지옥의 침묵을 깨뜨려 이기고 말하기 시작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말할 수 있는 확신을 회복시키시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성부와 자유롭게 말함으로써 친밀한 신뢰 관계, 의사소통을 형성하게 된다. 이 부분은 전통적인 조직신학적 주제로 본다면 구원론에 해당할 것이다.
턱웰은 세 번째 항에 “둘이 하나가 될지니”(The Two shall be one)라는 제목을 붙인다. 세 번째 항에서 그는 방언은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의 달콤한 동의의 표징으로 이해한다. 그에게 예전이나, 교회의 믿음, 소망, 사랑의 언어, 교회의 전통과 성령의 말하심은 양립되는 것이 아니라 연합하여 시너지를 일으킴으로써 기독인의 공동체의 응집력을 높인다. 이 부분은 전통적인 조직신학적 주제로 본다면 교회론에 해당할 것이다.
텍웰은 네 번째 항에 “시인으로서 인간”(Man the Poet)이라는 제목을 단다. 그에게 말은 구체화된 생각이다. 그는 인간은 “창조를 위한 시인 사제”(the poet-priest of creation)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새 방언, 곧 다른 방언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위한 새 능력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새로운 세상, 다른 세상을 이미 맛보는 것이다. 그래서 새 방언은 보통 찬양으로 승화된다. 이 부분은 전통적인 조직신학적 주제로 본다면 종말론에 해당할 것이다.
사이먼 턱웰은 II 장의 제목을 “찬양의 제사”(The Sacrifice of Praise)로 붙인다. 두 번째 부분에서 그는 방언을 말함에 “성례전적 성격”(the sacramentality of speaking in tongues)을 부여한다. 그는 성례전을 하나님과 인간의 연합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에게 방언은 신랑과 신부가 서로 포옹하는 것, 하나님과 인간이 함께 기뻐하는 것을 표현하는 성례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비록 구원을 받았지만 아직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처럼 하나님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회복된 하나님과의 연합을 표현할 상징적 수단들이 요청된다. 성례전은 그 안에서 인간이 말하는 인간의 행동이지만, 그 기원은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며 행위다. 그는 방언을 통해 성례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II 장은 I장 세 번째 항과 같이 교회론에 해당한다.
턱웰은 방언을 통해 조직신학의 주요 주제들인 “신론, 창조론(인간론, 죄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에 해당하는 범주들에 대해 논했다. 이 점은 높이 평가받고 조명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그의 유기적이고 구성적 성격인 방언신학에 대한 적절한 학문적 평가가 없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으나 본 논문을 통해 조명된 것은 다행이다.
턱웰은 비록 방언을 구성적으로 접근했지만 정통 오순절주의의 입장에서 수행하지는 않았다. 그는 글을 써가면서 가톨릭 도미니칸 신학자로서 오순절주의자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그는 그의 방언에 대한 구성적 신학을 “가톨릭 입장”(from a catholic point of view)에서 수행한다고 분명하게 못 받았다. 그런 그의 오순절주의자들로부터의 거리 두기는 방언에 대한 신학적 해석에 한계를 가했다. 그 한계는 그의 가톨릭의 전통적 성례전 옹호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방언 신학은 오순절적 방언신학이 아니라 가톨릭적 방언신학이라는 한계를 갖는다.
턱웰의 방언신학은 보다 풍부해질 필요가 있다. 그의 방언에 대한 신학적 진술은 단행본 34쪽 분량 안에서 진행되었다. 물론 분량이 질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보다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고, 각 주제들 안에서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소주제들을 통해 방언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면, 방언에 대한 성화론적 해석은 그의 구성적 접근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C. 오순절적 방언: 조직신학적 관점에서의 해석
1. 조직신학적 해석의 필요성
방언을 조직신학의 전반적인 주요 주제들을 통해 해석해야할 필요성은, 첫째로, 종래의 단편적인 방언의 신학적 해석의 극복이라는 과제에서 발견된다. 전 항에서 살펴본 것처럼 종래의 방언에 대한 신학적 연구는 매우 단편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런 단편적 해석의 극복은 신학자들에게 주어진 과제다. 그 과제는 조직신학의 중요하고 포괄적인 주제들을 통한 방언 연구로 말미암아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둘째로, 그 필요성은 방언이 갖고 있는 조직신학적인 제 주제들을 통해 확장될 수 있는 가능성에서 발생한다. 캔티(George Canty)는 방언이 기독교 신학의 모든 부분에 중요하며, 모든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위한 새로운 통일성을 제공할 것이라고 잘 예견했었다. 이미 언급했던 것처럼 가톨릭 신학자 턱웰(Simon Tugwell)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방언은 “기독교 교리 전체 안으로 들어가는 한 길”(a way into the whole of christian doctrine)이라고 파악했다. 그들이 적절하게 파악한 것처럼 방언은 여러 조직신학적 주제들을 통해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 가능성은 방언을 여러 조직신학적 주제들을 통해 해석할 필요성을 유발시킨다.
셋째로, 그 필요성은 오순절 조직신학의 발전을 위한 요청에서 발생한다. 북미 오순절 운동에 대해 글을 쓴 데이비드 파우펠(David W. Faupel)은 1973년에 “오순절 신학이 전혀 써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니콜스(David R. Nichols)는 1984년에 만개한 오순절 조직신학(a full-orbed Pentecostal Systematic Theology)을 기대했다. 그런데 침례교 신학자 피녹(Cark H. Pinnock)은 2000년에 여전히 “완전히 개화된 오순절 조직신학”(full-blown Pentecostal systematic theology)이 등장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주도적인 오순절주의자들이 온전한 오순절적 조직신학이 있을 수 없다고 본 때문이기도 하다. 예를 들면, 윌리암 멘지스는 “오순절 신학”(Pentecostal theology)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순복음신학이란 조직신학이 아닌 성서신학(Biblical theology)으로서 오순절적 경험을 기독교 신학 안의 올바른 자리에 회복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폴 W. 루이스는 2001년에 오순절 신학의 100년 발자취를 밟은 회고에서 오순절적 기록물들과 신학교육 안에 흘러온 신학적 흐름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 말미에서 오순절적 관점(pentecostal perspective)에서의 조직신학의 출현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가 바라는 오순절적 조직신학이란 성서신학을 넘어서며, 교단 교리 진술 이상의 것이다. 또한 그것은 개혁주의 등의 틀(framework) 안에 성령론적 특색(pneumatological veneer)을 삽입한 것 이상의 것이다. 물론 그는 오순절 조직신학이 웨슬리안이나 복음주의에 함몰되지 않고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자신의 맹점을 극복하면서 다른 관점들과 지속적인 대화(constant dialogue)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그런 대화를 통해 도움을 받으면서 전체적으로는 정통신학(Orthodoxy) 안에 자리 잡는 그러면서도 오순절적 관점에서, 즉 하나의 오순절적 중심을 축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하고 충분하게 발전된 조직신학”(a thorough going fully developed systematic theology)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오순절적 중심을 축으로 충분하게 발전된 조직신학은 “총체적 오순절적 관점의 조직신학”이라고 불릴 수 있을 것이다. “총체적 오순절 관점의 조직신학”(A Holistic Pentecostal Perspective of Systematic Theology)이란 역사학적, 선교학적, 성서학적인 관점이 아닌 “오순절적 핵심 신학과 영성을 조직신학의 전 체계와 내용에 적용시킨 그야말로 순수한 오순절적 관점의 조직신학”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모든 신학적 흐름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규범을 세우기보다는 적극적으로 정통오순절 조직신학의 발전을 위해 방언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아모스 영은 다양한 서사들을 인정하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의식하며 모든 상황들과 서사들에 적용될 수 있는 규범적이고 객관적 진리를 찾는 오순절 조직신학의 가능성을 타진한 적이 있다. 그가 추구한 방향과는 다른, 정통 오순절주의자들을 위한, 정통 오순절주의의 특징을 담은 조직신학이 필요하다. 다른 신학들과 구별되는 정통 오순절 특유의 맛을 내는 조직신학의 출현과 발전에 대한 요청은 다른 신학적 사고들과 대화하지만 정통 오순절적 관점에서 다양한 조직신학적 주제들을 통해 방언을 해석할 필요성을 일으킨다.
2. 조직신학적 측면의 해석
본 논문은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을 조직신학적인 측면에서 연구한다. 조직신학적 측면의 연구란 조직신학적 주제들을 통해 방언을 해석함으로써 방언의 신학적 의미를 확장시키는 것이다. 방언은 조직신학적 측면에서 해석될 수 있다. 조직신학적 주제들은 본 논문이 다루고자하는 “신론, 창조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을 포함한다. 방언을 조직신학적 측면에서 해석할 것이지만 그렇다고 지금까지 조직신학계에서 논의된 모든 주제들과 논제들을 다 다룬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본 논문은 방언을 주요 주제들과 논제들의 한 부분 혹은 여러 부분들을 통해 해석할 것이다. 그 주제들은 주요 조직신학적 저작들에서 나타난다. 동방신학자 다마스커스의 요한( *Iwavnnh" Damaskhvno")은『정통신앙정해』(*Ekdosi" *Akribe" te" *Orqodocou' Pisteo")에서 신론, 창조론, 기독론을 다루었다. 서방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신학대전』(Summa Theologica)에서 “신론, 다양한 존재들과 인간의 창조론, 인간의 덕목들과 은총론, 성령의 보충적 은사론(윤리학), 기독론과 교회론 일부(성사론), 종말론”을 언급한다. 종교개혁자 칼빈(J. Calvin)은『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의 결정판인 1559년의 라틴어판을 사도신경에 따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성령, 그리고 교회”의 4가지 주제들로 재구성하였다. 개혁주의신학자 벌코프(L. Berkhof)는『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을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의 6가지 주제들로 구성했다. 바르트(K. Barth)는 그의 『교의학』(Die Kirchliche Dogmatic)을 “하나님의 말씀론인 프롤레고메나, 신론, 창조론, 화해론”으로 구성했다. 복음주의 신학자 밀라드 에릭슨(Millard J. Erickson)은 “신론, 인간론,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을 다루었다.
첫째로 신론적 관점에서 방언을 해석한다. 이 해석은 본 연구에서 방언의 본질적 측면에 포함된다. 본 연구에서 방언의 본질적 측면은 “성령침례, 삼위 하나님, 계시성”과 관련된다. 성령침례의 본질적 측면에서 방언을 탐구하면 방언의 이성초월성과 표출성은 잠김/죽음과 나옴/살음이라는 성령침례의 본질과 각각 상응함이 드러난다. 또한 방언을 삼위 하나님을 통해 해석할 것이다. 이 해석은 방언의 근원에 대한 탐구와 일치한다. 방언은 삼위 하나님의 각 위격들 간의 친밀한 관계에서 발생하며, 각 위격의 전유적 사역에 의해서도 발생한다. 성령침례의 본질적 측면에서 방언 해석은 방언 연구에서 처음시도 되는 것일 것이다. 삼위일체론 등을 내포하는 신론을 통한 방언해석은 종래의 연구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일 것이다.
둘째로, 창조적 관점에서 방언을 해석한다. 보통 창조론에서는 시간과 공간, 천사들, 그리고 인간 등등에 관한 창조가 논의된다. 본 논문은 인간이 발화하는 방언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에 논의의 초점을 맞춘다. 먼저 “하나님의 형상론”을 통해 방언을 해석한다. 하나님의 형상론에서 논의되어온 “내적, 외적, 관계적”이라는 세 가지 측면을 통해 방언을 해석하면 인간에게 주어진 “방언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드러난다. 인간이 방언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데에 있다. 이미 케렛이 방언을 하나님의 형상의 언어로 규정했다. 그런데 그의 작업은 조직신학이 아닌 성서신학적 입장에서 수행되었다. 하나님의 형상의 세 가지 측면과 관련하여 방언을 해석함으로써 방언 발화의 인간론적 가능성을 조직신학적으로 탐구한 것은 새로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론적 관점에서 방언 연구는 보다 구체적으로 인간의 구성 각 요소들을 통해 방언을 탐구한다. 방언은 인간의 요소를 “영, 혼, 몸”으로 구분하는 삼분설에 의해 더 잘 규명된다. 영의 기도인 방언은 마음의 기도와 분리되며, 영의 기도는 몸의 발성기관을 통해 발화되므로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는 삼분설에 의해 보다 명확하게 설명된다. 인간의 구성 요소인 영과 이성과 몸을 통한 방언 통찰은 방언이 영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성의 통제를 받아 때로 감정을 유발시키며 최종적으로 몸을 통해 발화되는 과정과 구조와 현상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낸다. 이런 통찰은 방언이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의 황홀경 속에서 발화되는 것일 것이라는 선입견을 수정시킬 수 있다. 인간의 구성요소들을 통해 방언이 발화되는 과정과 현상을 설명해보려는 시도는 기존의 연구들보다 한 걸음 앞으로 더 나간 것이라고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로, 구원론적 관점에서 방언을 해석한다. 방언을 크게 세 가지의 구원론적 측면에서 탐구한다. 먼저 방언이 함축하고 있는 기본적인 구원론적 의미를 풀어낸다. 방언의 기본적인 구원론적 의미는 죄로 인해 손상되었던 “하나님의 형상”과 “소통”과 “하나 됨”과 관련된다. 방언은 무엇보다 죄로 인해 파괴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경험시킨다. 죄로 인해 막혔던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소통의 회복을 경험시킨다. 죄로 말미암아 분열되고 대립되었던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이 하나 됨을 경험시킨다.
구원론적 관점의 방언 해석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인간에게 베푸시는 측면을 간과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인간에게 베푸심에는 “새 언약, 은혜/은사, 용서, 새 창조”라는 주제들을 포함시킨다. 방언은 새 언약을 중보하신 그리스도의 영의 도래를 청각적으로 상징한다. 오순절에 각 사람에게서 발화된 방언은 개개인을 향한 새 언약의 상징이되, 구체적이며 실존적 상징이다. 하늘 아래의 각 나라의 말로 발화되었던 오순절 방언은 새 언약의 보편성을 상징한다. 방언은 “은혜” 받아 중생한 이후에 주어지므로 은혜와는 간접적으로 관련된다. 반면에 은혜 이후에 주어지는 “은사”와는 직접적으로 관련되며, 곧 하나의 은사다. 그래서 방언은 중생과 칭의를 위한 조건이 아니다. 바벨 방언은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이었지만, 오순절 방언은 하나님의 용서를 상징한다. 방언은 죄로 인해 파괴된 옛 창조물을 새롭게 변혁시키는 새 창조를 상징한다. “은혜”와 “은사”의 관점에서 방언 해석은 루터와 멜랑흐톤의 개념과 루터의 개념에 대한 턴불의 연구를 동원한다. 기존의 연구들이 간과했던 이런 탐구는 은혜에 후속하며 구별되는 은사로서 방언의 신학적 의미를 보다 확실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구원론적 관점의 방언 해석은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응답 측면을 포착한다. 인간의 응답 측면의 방언 해석은 “믿음, 언어의 성화, 회개, 신화(神化), 사랑”이라는 주제들을 통해 수행된다. 방언은 구원 얻는 믿음을 확증시키는 표적들 중에 하나이다. 새 방언은 성화된 말일 수 있으며, 또한 방언은 형성적 행위로서 성화되어 가는 말일 수 있다. 방언은 인간의 연약한 죄된 본성의 탄식을 드러낸다. 그래서 용서받았음에도 여전히 죄인인 인간의 실존을 상징한다. 신자에게 존재하는 “용서 받은 죄인”이라는 이중성은 방언을 “회개”로 해석할 수 있게 한다. 방언이 죄된 인간 본성의 탄식이며 회개라면, 그것은 인간이 능동적으로 하나님의 성품에 참예하는 길, 즉 신화(神化)에 참여하는 길일 수 있다. 탄식 방언이 소극적으로 죄에 대한 죽음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방언을 통해 사랑이 흘러나가게 하는 것은 의에 대해 살아나는 성화론적 적극성을 드러낸다. 방언의 성화론적 기능에 대한 이상환의 연구와 은사를 신화적(神化的)으로 해석한 퓨라의 연구를 종합하여 방언을 신화적(神化的)으로 해석한 것은, 종래의 연구에서 진일보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방언과 사랑의 관계 정립을 통해 방언의 의미를 확장한 것은 기존의 연구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것일 것이다.
넷째로, 교회론적 관점에서 방언을 해석한다. 교회론적 방언 해석은 “교회의 탄생, 단일성, 양방성”과 “은사적, 증인 공동체” 등의 주제들을 포함한다. 오순절 방언은 아기의 첫 울음이 신생의 표적인 것처럼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표적(sign)이었다. 방언은 교회가 목회자와 평신도의 조화에 의한 단일 공동체임을 상징한다. 인간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발화되는 방언은 교회의 지체로부터 그 머리이신 그리스도께로 향하는 방향성을 상징한다. 하나님께로부터 인간에게 통역되는 방언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그 지체로 향하는 방향성을 상징한다. 교회의 첫 은사인 방언은 교회의 은사적 구조를 상징하며, 그 구조의 일부를 형성한다. 방언은 교회가 증인 공동체가 되는 길들 중의 하나이며, 동시에 증인 공동체에게 따르는 표적들 중의 하나다. 본 연구는 너무 광범위한 카케이넌의 성령론 중심의 교회 해석과 그보다는 조금 좁혀진 마키아의 성령침례론 중심의 교회 해석보다도 더 오순절적으로 초점이 맞추어진 교회를 통해 방언을 해석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연구들과의 차별성을 갖는다.
다섯째로, 종말론적 관점에서 방언을 해석한다. 종말론적 방언 해석은 “종말구조, 종말적 방향성, 종말적 상징성과 매체성, 방언의 종말”이라는 주제들을 통해 진행된다. 먼저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로 구성된 종말 구조를 통해 방언을 본다. “마지막 날들”에 발화되기 시작한 방언은 “주의 날”의 예기적 표적이다. 방언은 천국에서의 자유스런 의사소통의 예기일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의 친밀한 대화의 현재적 선취이기도 하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방언 찬양은 천국에서 하나님께 드릴 종말적 찬양의 전조(sign)다. 방언은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종말적 선포를 위한 매체다. 세상을 변혁시켜 가시는 성령의 사역의 상징이며, 한 방법이다. 방언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계속 발화될 것이다. 천국에서도 하나님과의 사람사이, 사람과 사람사이의 사랑의 의사소통은 계속될 것이다. 하버마스(Jürgen Habermas)의 “이상적 담화 상태”(ideal speech situation)란 개념을 천국에서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이상적 대화의 상징으로서 방언과 비교하여 그 공통점과 상이점을 분석함으로써 방언의 종말론적 의미를 확장시킨 것은 기존의 연구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일 것이다.
3. 조직신학적 해석의 부차적 특성
조직신학적 측면의 방언 해석은 방언의 신학적 의미의 확장이외에도 두 가지 부차적인 특성들을 띈다. 첫 번째 특성은 조직신학적 특성을 띄는 것이다. 조직신학은 하나의 중심주지와 여러 주요 주제들로 구성된다. 조직신학은 다양한 신학적 주제들을 하나의 중심주지로 해석하며 구성하는 것이다. 그것은 “신학 자료들 속에 두서없이 나열된 신앙의 내용들을 내적 논리와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 조직ㆍ체계화하는 학문”이다. 조직신학은 먼저 하나의 중심주지를 갖는다. 미글리오르(D. Migliore)나 킹(R. H. King)에 의하면 “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은 “하나의 통합적인 동기”(an integrative motif)를 갖는다. 복음주의 조직신학자 밀라드 에릭슨(Millard J. Erickson)은 조직신학방법론의 여덟째 단계로 해석과 전체 체계의 통일성을 위한 “해석적 중심주지”(central interpretive motif)를 설정했다. 그는 중심적 주지가 신학의 자료들이 조망되는 어떤 관점이며, 관점은 자료들이 조망되는 방식에 대한 특별한 각도나 투사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주지가 신학 체계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의사 전달에 힘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다. 본 연구에서 방언은 조직신학의 중심주지와 같은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본 연구는 조직신학적 특성을 갖는다.
조직신학은 또한 주요 주제들로 구성된다. 조직신학은 구성적/건설적(constructive)이며 구조적(structural)이다. 미글리오르(D. Migliore)와 킹(R. H. King)은 조직신학을 통합된 주지를 중심으로 여러 주제들을 배열하여 숙고하는 구성적 신학(constructive theology)으로 보았다. 쿨터(Dale M. Coulter)도 조직신학의 요소들인 “신학적 핵심”(theological core), “신학적 주제들”(theological loci)과 그 주제들을 “조직하는 하나의 원리”(an organizing principle), 그 원리에 따른 “하나의 특별한 구조”(a particular structure)를 언급한 바 있다. 그들이 잘 언급한 것처럼 조직신학은 한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신론, 창조론, 기독론, 성령론,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 등 여러 신학적 주제들을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방언을 조직신학 제 주제들을 통해 체계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본 연구가 띄는 조직신학적 특성이다.
본 논문이 갖는 두 번째 부차적 특성은 총체적 오순절 조직신학의 발전에 공헌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개혁주의적인 주제들에 성령침례라는 오순절적 주제를 더한다. 이런 구조는 종래의 오순절조직신학자들이 택했던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방언을 중심으로 그 주제들을 해석했다는 차별성이 있다. 바로 그 차별성에 있어서 본 연구는 총체적 오순절 조직신학 발전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본 연구는 기존의 오순절조직신학 작업과 유사성을 갖는다. 종래의 오순절조직신학자들은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구성 틀(framework)과 순서를 채용하고 오순절적 주제인 성령침례론을 첨가했었다. 예를 들면, 윌리암 W. 멘지스는 1993년에 16개의 주제를 담은『성경교리』(Bible Doctrines)를 펴냈다. 그 책은 미 하나님의 성회에서 채택된 “근본적 진리 진술”(The Statement of Fundamental Truths)의 16개 항목을 따라 16개의 주제들을 담고 있는 미 하나님의 성회의 교의학(Dogmatics)이다. 그 16개의 주제들은 전통적인 주제들에 “성령침례”와 “성령침례에 대한 최초의 육체적 증거”라는 정통 오순절적 주제들을 더한 것이다. 스탠리 M. 호르톤은 1994년에 18개의 주제를 담은『오순절조직신학』(Systematic Theology : a Pentecostal Perspective)을 편집했다. 그 책은 전통적인 주제들을 다루고, 그와 함께 “성령침례”와 “성령 침례에 대한 최초의 육체적 증거”를 “성령침례” 아래 통합하여 다루고, “성령의 은사들”을 더했다. 이런 유사성에만 초점을 맞춘다면 본 연구는 기존의 오순절 조직신학 작업에서 진보하지 못했다.
본 논문은 기존의 오순절 조직신학 작업과의 구조적 유사성을 상쇄시키는 상이성 또는 차별성을 또한 갖는다. 그 차별성이야 말로 본 논문이 주요 목적이외에 부차적으로 오순절 조직신학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점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지극히 오순절적 방언으로 조직신학의 제 주제들을 관통하는 것이다. 쿨터(Dale M. Coulter)는 이미 오순절 신학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면서 중심주지 설정을 수용한 바 있다. 그가 언급한 여러 신학적 주제(theological loci)들에 통찰력을 주는 오순절주의의 “독특한 관점”(particular perspective), “정체성”(identity), “신학적 중심”(theological heart), “신학적 핵심”(theological core)은 미글리오르나 에릭슨이 말한 “주지”(motif)와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종래의 오순절 조직신학은 오순절적 중심주지로 조직신학적 주제들을 엮지 못했다. 멘지스가 채택한 “성령침례”와 “성령침례에 대한 최초의 육체적 증거”는 오순절적 주제이다. 주제 면에서 그 책의 제목에 “오순절적 관점”(pentecostal perspective)이라는 말을 덧붙인 것은 타당하다. 그런데 멘지스는 그 교리책의 “중심”을 말하지 않는다. 그 책은 오순절 조직신학의 중심을 설정하지 않은 채 써진 것이다. 오순절적 관점은 주제들을 선별하는 기준은 될 수 있지만, 주제들의 중심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중심 측면에서 오순절적 관점이라는 부제는 타당하지 않다. 호르톤은 “근본적 진리 진술”에 포함된 오순절적 주제들을 전통적인 구원 중심의 조직신학 구조에 넣어 배열했다. 주제 면에서 호르톤의 책도 “오순절적 관점”이라는 부제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전체 주제들을 관통하는 오순절적 중심을 설정하여 그것으로 모든 주제들을 처음부터 끝까지 엮어내지 않았다. 그 점에서는 그 부제가 그 책에 적절하지 않다. 본 논문은 오순절적 방언을 “중심주지”(locus)로 삼고 기존의 오순절 조직신학이 다루어온 주제들을 관통함으로써 종래의 오순절 조직신학적 작업과 차별성을 갖는다. 이 차별성 면에서 본 연구는 기존의 오순절 조직신학에서 진일보함으로써 총체적 오순절 조직신학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각 신학적 주제들에 대한 오순절적 해석은 1901년에 오순절운동이 시작된 이래 전문적인 오순절신학자들이 씨름해왔던 일이다. 본 논문이 그 연구들과 다르게 오순절신학에 기여할 수 있는 점은 각 주제들에 대한 종래의 오순절적 해석들을 지극히 오순절적인 방언 중심으로 발굴하고 정리하며 발전시켜 전통적인 조직신학적 틀 안에 구조화 하는 것이다. 본 연구는 그런 점에서 진정한 오순절적 관점에서 써진 총체적 오순절 조직신학의 출현과 발전에 공헌할 수 있을 것이다.
D. 본 논문의 구성
II 장부터는 방언의 본질을 탐색한다. 먼저 방언과 성령침례와의 밀접한 관계성을 역사적으로 살펴본다. 그럼으로써 방언을 오순절 조직신학의 주지로 삼을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성령침례의 본질과 목적의 시각에서 방언을 조명한다. 그 다음 삼위 하나님의 친교를 방언 발화의 근원으로서 설정하고, 각 위의 전유적 특성의 관점에서 방언을 해석한다. 또한 방언의 종류와 그 종류로부터 드러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에서 발생하는 방언의 양방성, 인간에게로 향해지는 방언의 계시성을 연구한다.
III 장에서는 창조된 인간과 관련된 방언의 의미를 살펴본다. 먼저 방언을 하나님의 형상에 관한 실체적 견해와 관계적 견해를 통해 탐구한다. 인간이 방언을 발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하나님의 형상론에서 찾는다. 그리고 방언이 발화될 때 일어나는 인간 구성 요소들(영, 이성, 정서, 몸 등)의 작용을 규명한다. 또한 방언의 죄론적 의미를 규명한다.
IV 장에서는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의사소통의 회복, 하나 됨이라는 주제들을 통해 방언의 기본적인 구원론적 의미를 규명한다. 그리고 새 언약, 은혜, 용서라는 주제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 인간에게 베푸심의 측면에서 방언을 탐색한다. 또한 믿음, 성화, 회개, 신화, 사랑 등의 주제들과 관련하여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적 베푸심에 응답하는 관점에서 방언을 탐구한다.
V 장에서는 방언을 교회론적 측면에서 해석한다. 교회의 탄생, 교회의 단일성, 방언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양방성을 교회의 머리와 지체간의 교회론적 관계 측면에서 해석한다. 교회의 은사적 구조, 교회의 연약함과 능력, 증인 공동체로서 교회 등의 항목 하에 교회와 관련된 방언의 신학적 의미들을 탐색한다.
VI 장에서는 방언을 종말의 구조와의 관계성 속에서 살핀다. 그리고 방언의 종말론적 양방성을 연구한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을 향한 미래적이고 초월적인 것의 현재적 개입, 인간의 하나님께로 종말적 나아감과 찬양을 방언을 통해 조명한다. 또한 방언이 갖고 있는 이상적 소통, 종말적 선포의 상징성과 매체성을 탐색한다. 마지막으로 방언이 과연 종말을 고할 것인지, 그렇지 않으면 계속될 것인지에 대해, 방언의 종말에 관해 사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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