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방언의 본질
본 장은 방언의 본질을 탐색한다. 방언과 성령침례의 관계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으로 규정하는 정통 오순절주의에게 방언의 본질은 성령침례와 깊이 관련된다. 방언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하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의 관계 이해는 방언 본질 이해에 필수적이다. 방언의 본질은 또한 방언의 종류 탐사에서 드러나고, 그 탐사는 방언의 양방성으로 규결된다. 방언의 양방성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심과 인간이 하나님께 말함에서, 즉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교에서 온다. 방언의 양방성 중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성은 성경기록 이후의 성령을 통한 특별계시의 지속성을 전제로 발생하므로 방언의 본질은 방언을 통한 성령계시와 관련된다.
A. 방언과 성령침례
가톨릭교도들에게는 “누구의 손이 누구에게 얹어졌느냐?”가, 일반적인 개신교도들에게는 “무엇을 믿느냐?”가 중요할 것이다. 그런데 개신교도들 중에서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침례를 받았습니까?” 또는 “방언을 말하십니까?”라고 묻는다. 그만큼 오순절주의 안에서 성령침례와 방언은 중요하면서 서로 떼어놓을 수 없이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본 항에서는 오순절주의 안에서 긴밀한 방언과 성령침례의 관계 속에서 방언의 본질을 탐구한다.
1. 성령침례에 결합된 방언: 오순절주의의 정체성과 핵심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이 오순절운동과 신학의 “핵심”(core)이라는 생각은 저항을 받아왔다. 심지어 오순절적 조직신학책의 편집자 호르톤(Wade Horton)도 오순절주의가 다른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방언 그 자체에 큰 무게를 두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방언을 오순절운동과 신학의 중심에서 밀어내고 “급박한 전천년주의적 종말론,” “성령침례,” “성령경험” 등을 그 자리에 놓으려는 시도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오순절운동과 신학의 핵심은 성령침례와 결합된 방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침례와 결합된 방언, 성령침례와 불가분리적인 방언이야말로 오순절주의의 정체성이며 핵심이다. 본 절은 오순절주의의 정체성이 방언과 성령침례의 불가분리성에 있다는 것을 역사적 근거를 통해 밝힌다.
a. 유사한 오순절 정체성과 핵심
1) 종말론과 오순절주의
종말론을 오순절주의의 핵심으로 보는 것은 재고되어야 한다. 스티븐 J. 랜드(Steven J. Land)는 오순절의 핵심을 종말론으로 파악했다. 그러나 전천년주의적 종말론은 파함 이전에 성결운동가들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적 부흥운동가들에 의해서 이미 형성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인식의 전환을 요구한다. 발드포겔(Edith Lydia Waldvogel)이 지적했듯이 무디, 토레이, 고든, 심프슨 등과 같은 사람들은 당시에 지배적이던 개혁주의의 후천년주의에서 급박한 전천주의(imminent premillennialism)로 돌아섰으며, 컨퍼런스와 성경학교(Bible institute)를 통해 그것을 전파했었다. 또한 도날드 데이턴도 언급했던 것처럼 감리교 성결주의자들 가운데서도 1890년대 중반에 왓슨(George D. Watson)을 포함해 웨슬리의 후천년주의 대신 전천년주의를 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었다. 그러므로 급박한 세대주의적 종말론은 1901년에 파함으로부터 시작된 오순절운동을 다른 운동들로부터 구별시켜 줄 수 있는 오순절운동만의 독특한 점이 되지 못한다.
2) 성령침례와 오순절주의
성령침례도 그 자체만으로는 오순절운동을 다른 운동과 구별 짓는 중심/척도가 될 수 없을 것이다. 사이몬 찬(Simon Chan)은 오순절주의의 핵심을 “성령침례”(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로 보았다. 데일 브룬너(Frederick Dale Brunner)도 오순절주의의 특징을 “성령침례중심적”(Pneumobaptistocentric) 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성령침례 개념은 이미 성결주의자들 뿐만 아니라 개혁주의적 부흥운동가들에 의해서도 형성되어 있었다. 웨슬리는 오순절날 일어난 일을 그리스도인의 완전의 모범으로 보았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오순절에 주어진 성령으로 인해 죄를 정복하는 힘을 얻었다고 해석했다. 즉, 웨슬리는 완전 성화와 성령침례를 동일하게 이해했다. 성결주의자들은 중생이후의 제 2 체험으로서 완전 성화를 추구했으며, 웨슬리를 따라 완전 성화를 “성령침례”로 이해했다. 팔머(Phoebe Palmer)는 성령침례를 강조했다. 그녀는 성령침례를 “감리교의 특징적인 교리”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녀는 “성결은 곧 능력”이라며 정결케 하는 사역과 함께 봉사의 능력을 부여하는 사역을 함께 강조했다. 그녀는 웨슬리를 따라 오순절 날 제자들이 받은 능력은 곧 성결의 은혜라고 보았던 것이다. 반면에 청교도들을 포함한 칼빈주의자들은 성령침례를 회심과 연결시켰다. 그들에게는 회심 과정의 끝을 맺는 것이 곧 성령침례다. 그들은 칼빈의 이중예정론에 의해 불분명하던 구원으로의 선택이 성령침례를 통해 그들에게 확실해지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령침례는 구원확증적 기능이 강하다.
19세기 중엽에 성결주의자들 사이에서 성령침례를 성화와 분리시켜, 중생이후 성화에 이은 체험으로서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침례를 추구하는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호너(R. C. Horner)는 웨슬리가 가르쳤던 제2의 축복인 성화에는 대체로 감리교-성결인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던 “성령침례”(a baptism in the Holy Spirit)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그는 1891년에 쓴『오순절』(Pentecost)에서 성령침례는 구원과 성화 이후에 오는 “제3의 은총의 역사”(a third work of grace)이며, “영혼 구원 능력”을 부여해준다고 가르쳤다.
개혁주의 측에서는 찰스 피니를 시작으로 무디, 토레이 심프슨 등이 중생과 더불어 시작되는 성화에서 성령침례를 분리시켰다. 그들은 회심이후에 제 2의 체험으로서 봉사의 능력을 부여하는 성령침례를 주장했다. 피니(Chares G. Finney)는 회심이후에 성령침례를 경험하고, 성령침례를 능력부여로 이해했다. 토레이(R. A. Torrey)는 성령침례가 중생과 구별되는 명확한 체험이라고 강조하면서, 신자들은 자신이 성령침례를 받았는지 안 받았는지를 분명히 알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토레이는 성령침례가 중생 시에 역사 하는 성령의 사역과는 명확하게 구분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모든 사람이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잠정적으로 의롭다함을 입었지만(롬5:18), 잠정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속해 있는 그것을 모든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자기의 것으로 삼아야만 칭의가 실제적으로 경험적으로 그의 것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그와 마찬가지로 성령 침례는 잠정적으로 믿는 모든 자의 소유이지만 믿는 각자는 모두 그 성령 침례가 경험상 자기의 것으로 되기에 앞서 스스로 소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성령침례는 언제나 증거(testimony)나 봉사(service)와 관련된다. 심프슨(Albert Benjamin Simpson)도 역시 “성령침례”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였으며 신자가 그것을 특별하게 받아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령침례를 성결의 차원과 봉사의 능력 차원 모두와 관련시켜 받아들였다.
3) 능력 혹은 성령 경험과 오순절주의
능력이나 하나님/성령 경험도 오순절신학의 핵심이 될 수 없다. 피터 알트하우스(Peter Althouse)는 오순절운동의 핵심을 “능력”(power)에 두었다. 그러나 성령침례를 능력으로 파악한 것은 살펴본 것처럼 이미 성결운동이나 부흥운동권 안에서도 존재했다. 그러므로 성령침례 자체나 그에 따르는 능력만을 오순절신학의 핵심으로 삼을 수 없다. 성령침례와 동반되는 방언을 부차적으로 삼는 성령경험도 오순절신학의 핵심이 될 수 없다. 크로스(Terry L Cross)나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 등은 하나님 경험(the experience of God)/성령 경험(the experience of the Holy Spirit)을 오순절주의의 핵심으로 보았다. 그러나 성령경험은 루터, 경건주의, 조나단 에드워즈 웨슬리, 부흥운동 등에서 광범위하게 발견된다. 또한 고프(James R. Goff, Jr.)가 지적한대로 1875년 이후의 기간은 “성령 시대”(a Pneumatic or Spirit Age)라고 느슨하게 칭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성령 경험은 오순절신학만의 정체성과 핵심이 될 수 없다.
b. 진정한 오순절 정체성과 핵심
1) 성령침례와 결합된 방언과 오순절주의
오순절운동이나 신학의 독특한 정체성과 핵심은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이다. 성령침례와 결합된 방언이 오순절운동을 타 운동들과 구별시켜주는 중심이다. 오순절운동은 성령침례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했던 성령침례에 대한 확실한 증거를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경험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중생과 구별되고 이후에 오는 성령침례개념은 이미 성결주의자들과 부흥운동가들 가운데서 형성되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3단계 체험을 주장했던 성결주의자로서 심프슨 등의 개혁주의자들의 성령침례 개념에 접했던 파함이 등장했다. 그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중생과 성화 이후의 제 3의 체험으로서 성령침례의 확실한 증거에 몰두했다. 그는 벧엘성경학교 학생들과의 성경연구를 통해 “성령침례의 최초의 증거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는 오순절신학의 중심 교리를 세웠다. 파함은 그 이전에 성령침례의 증거라고 주장된 경험들을 “성령의 내주하시는 기름 부으심”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만들고 그 안에 집어넣어 처리했다. 그리고 진정한 성경적 성령침례는 방언을 말하는 것으로 증명된다고 주장했다. 성령침례만 가지고는 파함의 오순절운동을 3단계 성결주의와 2단계 개혁주의로부터 구별해낼 수 없다. “방언과 연결되는 성령침례”만이 오순절운동을 다른 운동으로부터 구별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방언 현상은 파함 이전에도 존재했다. 오순절운동은 성령침례와 방언이 결합되어 일어난 것이다. 파함은 방언이 오순절신학의 핵심이라는 것에는 반대를 표명했지만 오순절운동을 다른 운동들과 구별시켜주는 시금석으로 파악했다. 또한 파함은 오순절 운동을 “방언운동”(Tongue movement)이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오순절운동의 정체성은 방언에만 있는 것도 아니며, 성령침례에만 있는 것도 아니다. 오순절운동의 시금석은 방언과 결합된 성령침례, 성령침례와 결합된 방언에 있다.
지금까지 논의한 19세기 후반의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관계 이해를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웨슬리안적 |
개혁주의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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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결운동 |
성결운동II |
정통 오순절운동 |
부흥운동 |
보수개혁 |
|
팔머 |
호너, 어윈 |
파함, 시무어 |
더함 |
토레이, 심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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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생→성화 (성령 침례) |
중생→성화→ 성령침례 |
중생→성화→ 성령침례 + 방언 |
중생→성령침례+방언 성화 |
중생→성령침례 성화
|
중생 성화 성령침례 |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라는 용어는 방언과 성령침례의 떨어질 수 없이 밀접한 관계를 인정하는 것에 제한되어야한다. 파함을 연구했던 고프(James R. Goff)도 오순절주의의 안에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관계성을 약화시키면서 교회 안에서의 다른 “은사의 정당성”(the validity of charismata)을 주장하는 사람들 모두를 받아들이는 것에 반대한다. 그가 올바르게 주장한 것처럼 “오순절주의”(Pentecostal)를 포괄적으로 사용하는 것보다는 그 용어를 오직 방언과 성령침례를 떼어놓을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정통 오순절주의자들”(the traditional Pentecostals)을 위한 것으로 제한하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2. 성령침례 증거 또는 표징으로서 방언
오순절주의의 정체성과 중심인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불가분리성은 “증거”(evidence)나 “표징/표적”(sign)이라는 용어들에 의해 표현된다. 오순절운동과 신학의 시작은 방언을 성령침례의 증거나 표징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경험으로 확인한 것이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증거”보다는 “표징”이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그러나 “증거”나 “표징”은 오순절운동의 기원으로부터 서로 교환될 수 있는 용어로 사용되어왔다. 그럼에도 “증거”나 “표징”은 각각 다른 것에 의해 대체될 수 없는 독특한 의미로 성령침례와 연결된다.
a.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
방언은 오순절운동 안에서 성령침례의 증거(evidence)로 이해되어왔다. 찰스 F. 파함은 1902년에 물침례에 대해 언급한 글에서 성령침례와 관련된 방언을 개개인이 스스로 주장하는 “사적 증거”(private evidence)가 아닌 “성경적 증거”(the Bible evidence)라고 칭했다. 파함은 또한 성령침례에 대한 글에서 베드로가 유대인들의 논쟁을 완전히 논박하고 이방인인 고넬료 가정에 물침례를 준 근거로서 “다른 방언”을 제시하며, 다른 방언을 “성령의 증거”(the evidence of the Holy Spirit)라고 말했다.
“증거”라는 말은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과 결합되면서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첫째로, 방언은 오순절운동과 신학을 다른 운동들과 신학들로부터 구별시킬 수 있는 증거가 된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과 관련된 “증거”라는 말은 다른 운동들이나 신학적 흐름들로부터 오순절운동과 신학을 구별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파함은 “다른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 침례를 그 이전의 모든 사역들로부터 구별시키는 ‘증거’”라고 말했다. 같은 맥락에서 슈만(Joel Shuman)은 성령침례와 더불어 방언을 말하는 것은 다른 신학적 공동체들로부터 구별되게 “오순절 공동체의 범위”(the boundaries of the Pentecostal community)를 규정짓는 제의적 행위라고 말했다. 그들이 정확하게 지적한 것처럼 방언은 오순절운동이 다른 운동과 다르다는 것을 증거 한다.
방언은 한 개인이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명확하고 객관적 증거가 된다. 파함은 성령침례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방언이라는 명백한 증거(unmistakable evidence)가 따르며 성취되면, 아무도 그것을 받았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게 된다고 말했다. 방언은 파함에 따르면 성령침례의 결과가 밖으로 “나타난 증거”(the manifest evidence)이다. 시무어의 공동체에 따르면 “외적 증거”(outward evidence)이다. 방언은 타인이 어떤 사람이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귀로 들어서 확인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증거가 된다.
방언은 성령침례를 받음에 대한 성경적 증거다. 파함은 그 이전의 운동들이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제시한 여러 가지 현상들을 비 성경적인 것이라고 일축하고 방언을 말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적인 성령침례의 증거라고 주장했다. 또한 파함은 여러 운동의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방언이외의 다른 현상들은 “사적인 증거”, 즉 확신할 수 없는 것인 반면에, 방언이야말로 “성경적 증거”(the Bible evidence)라고 말했다. 시무어의 공동체도 역시 방언을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the Bible evidence)로 이해했다.
“성경적 증거”라는 말은 현대 오순절 운동의 방언현상을 성경의 방언 현상과 연속선상에 놓는다. 파함은 현대 방언을 바울이 언급한 방언과 “동일한 증거”(the same evidence)라는 말로 연결했다. 시무어의 공동체도 현대 방언을 오순절날 제자들이 받았던 것과 “동일한 증거”(the same evidence)라고 인식했다. 현대 방언은 성경 방언과 동일한 방언인 것이다. 그런 연속성과 동일성은 성경방언의 현대에의 지속적인 반복가능성을 의미한다. 성경시대만이 성령 침례의 증거로서 다른 방언을 말하는 유일한 때가 아니었고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은 “반복해서”(repeatedly) 발견되어 왔다.
방언은 성령 내주의 증거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이미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일으킨다. 성령침례와 더불어 성령이 내주하기 시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성령께서 성령침례 이전에 내주하고 계시는 것이다. 파함은 성령의 내주와 성령침례를 구분했으며, 성령의 내주를 성령침례의 전제조건으로, 성령침례를 성령의 내주에 후속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에 따르면 방언은 성령침례의 증거이되, 성령(the Holy Spirit)께서 마련해놓으신 그분의 심령 안으로 오심(incoming)에 대한 증거(evidence)다. 신자들은 방언 말함을 통해 성령께서 확실하게 자신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방언은 성령 자신이 스스로 자신의 임재를 증거하는 “권위 있는 증거”(the authoritative evidence)다.
시무어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성령의 내주하심으로 해석했다. 그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단지 성령침례를 위한 준비단계로 말할 뿐만 아니라 보다 본질적으로 성령께서 신자의 영혼에 내주하시는 것으로 해석했다. 그는 부활 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며”(요20:22) 성령을 불어넣으신 것을 “내주하시는 기름 부으심”이라고 말했다. 그런 규정은 그가 요한복음의 성령 불어넣으심에 대한 기록을 고린도후서(1:21)와 연결 지어 해석함으로써 가능해졌다. 그는 예수께서 제자들을 향해 숨을 내쉼으로써 성령을 제자들의 마음에 주신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시무어는 고린도후서를 따라 성령의 내주는 곧 기름 부으심과 같은 것으로 해석했다. 그런 해석은 “내주하시는 기름 부으심”이라는 용어를 낳았다. 그에게 기름 부음에 의해 내주하시는 성령은 보혜사시며 “영혼에 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시무어는 성령의 내주를 성령침례 이전에 놓고 성령의 내주와 성령침례를 구분했다. 시무어에게 성령 침례는 성령께서 신자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구별되는 성령의 임재이다. 시무어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 이후의 성령침례를 어느 정도의 기름을 넘어서는 “갑절의 성령”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에게 불의 혀로 상징되는 성령침례는 성령께서 밤낮 머무시는 영광의 임재다. 시무어는 성령의 임재인 성령침례의 증거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을 신자들의 마음에 보내셔서 그분의 복된 성령으로 채우시고, 사도행전 2장 1절에서 4절 말씀대로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들을 말하는 성경적 증거(the Bible evidence)를 주신다.
방언은 성령침례와 분리될 수 없는 증거다. 파함은 “다른 방언을 말하는 것은 . . . 성령 침례와는 분리 될 수 없는(inseparable part) 성령 침례의 일부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시무어의 공동체 역시 성령침례에 예외 없이 “언제나”(always) 방언이라는 증거가 뒤따른다고 말했다.
방언은 성령침례와의 분리할 수 없는 그 증거이되 “최초의 증거”(initial evidence)이다. 파함은 방언을 성령침례의 “최초의 은사”(initial gift)로 보았다. 그는 회심 때 주어지는 최초의 신앙(initial faith)이 의심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 진정한 신앙 은사(real gift of faith)로 발전하는 것처럼, 방언이라는 “최초의 은사”는 “진정한 언어 은사”(a real gift of language)로 발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초”(initial)와 “증거”(evidence)를 결합한 것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1916년 “근본 진리 선언”(a Statement of Fundamental Truths)을 작성했다. 그 선언 6 항은 방언을 성령침례의 “최초의 표징”(the initial sign)으로 규정했다. 이듬해인 1917년에 미 하나님의 성회는 “최초 표징”이라는 문구의 중간에 처음으로 “육체적”(physical)이라는 말을 삽입했다. 파함은 방언을 “외적이고 시각적”(outward visible)인 것이라고 표현했었다. 방언과 관련하여 “육체적”(physical)이란 말을 최초로 쓴 사람은 파함이 아닌 카로터스(W. F. Carothers)였다. 그는 방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발성기관을 통해 육체적으로 나타나심(Physical Manifestation)이라고 보았었다. 그러나 그는 “육체적”이란 말을 증거와 직접적으로 연결하지는 않았었다. 1981년에 미 하나님의 성회는 입장 표명문(position paper)에서 방언을 성령침례에 대한 “최초의 육체적 증거”라고 진술했다. 즉, “표징”(sign)을 “증거”(evidence)로 바꾸었다. 그럼으로써 방언이 성령침례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the initial physical evidence)라는 진술이 명문화 되었다.
방언은 성령침례의 최초의 증거라는 것은 방언과 함께 또 다른 증거들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시무어의 공동체는 성령침례의 증거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즉 이중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 공동체에게 성령침례의 내적인 증거는 “하나님의 사랑”(Divine love), 즉 “자애”(charity)이며, 이것이야말로 성령침례의 “진정한 증거”(the real Bible evidence)이다. 진정한 증거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방언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침례의 증거에서 방언을 제외시키려한다. 웨슬리는 일찍이 “사랑”(love)을 그 증거로 삼았다. 아사 마한(Asa Mahan)은 “속 사람의 강건함”(strengthened with might in the inner man)을 그 증거로 삼았다. 보스 워스(F. F. Bosworth)는 성령의 다른 “나타남들”(manifestations)을 그 증거로 삼았다. 한나 스미스(Hannah W. Smith)는 “성령의 열매”(the presence of fruit of the Spirit)를 그 증거로 삼았다. 데일 부룬너(Frederick Dale Bruner)는 “신앙”(faith)을 성령침례의 증거로 삼았다. 최초 증거로서 방언 교리에 대한 신학적 비판은 헨리 레덜(Henry Lederle)에 의해 강력하게 표출된다. 그는 그 교리가 성령 침례에서 시작되는 성령 안의 활기 넘치는 생활을 보증하려한다고 비판한다. 그는 방언은 성령의 사역의 규범적 원리로 형식화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성령의 사역은 자유로우며, 규정되거나 형식화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대부분 “성령은 원하는 곳으로 부신다”(Spiritus ubi vult spirat; The Spirit blows where it wills)라고 말한다. 그들은 성령은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처럼 원하는 곳에 원하는 방식으로 역사하신다(요3:6)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 근거로 내세우며 방언이 성령침례의 증거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을 택하시는 것도 성령의 자유다. 성령께 방언을 택하지 않으실 자유가 있다면, 또한 방언을 택할 자유도 성령께 있다.
b. 성령침례의 표징으로서 방언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발화자의 믿음을 표징한다. 마가는 믿는 자들에게 새 방언이라는 표적(shmeivon)이 따를 것이라고 말한다. 방언은 말하는 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사실을 본인과 타인이 확신할 수 있는 표적이 된다. 파함은 “방언은 하나의 은사(gift)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 믿는 자라는 표적(sign)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시무어의 공동체에게도 방언을 말하는 것은 말하는 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표적이나 증거가 된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성령에 대한 경험의 표징이다. 프랑크 마키아는 방언을 성령침례로부터 떼어 놓지 않는 대신 방언을 성령침례의 “증거”보다는 표징(sign)이라고 이해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에게 “증거”(evidence)라는 용어는 그 안에서 어떤 지적인 가설을 입증하는 데로 이끌 수 있는 단서들 혹은 자료를 찾는 과학적 연구와 잘 어울린다. 그래서 “증거”보다는 “표징”(sign)이라는 말을 더 선호한다. “표징”이라는 용어는 어떤 외적 대상 혹은 관념에 대한 지시(reference)라는 단순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에 따르면 방언은 성령을 통한 하나님에 대한 놀라운 경험을 표현하는 표징이다. 겔피(Donald L. Gelpi, S. J.)는 방언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영(the Spirit of Christ)의 오순절적 도래를 나타내시기 위해 택한 표징(the sign)으로 이해했다. 방언이 성령침례의 증거라는 것이 인정 된다면, 방언이 또한 성령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표현하는 표징이기도 하다는 것을 거부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방언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의 표징이다. 성령침례는 모든 사람들이 인종과 성을 초월하여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며 방언은 그 하나 됨을 표징한다. 사도행전 2장 4절과 10장 46절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공동 찬양과 증거 안에서 하나로 결합시키는 성령의 역사의 최초 표적이라는 방언의 신학적 의미를 내포한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내적이고 영적인 유익을 외적으로 확증해주는 외적인 표적(outward sign)이다. 파함에 따르면 세상은 그 표적을 통해 누가 영적 유익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새 방언이라는 외적인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내적이고 영적인 유익에 대한 말씀을 확증한다(confirming the word of inward spiritual benefit wrought in Jesus Christ―by these outward visible sings).
c. 성령침례의 증거이며 동시에 표징으로서 방언
방언은 성령침례의 증거이며 동시에 표징이다. 방언은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the Bible evidence)이기도 하며, 동시에 “성경적 표징”(the Bible sign)이다. 방언의 증거성과 표징성은 극도로 대립적이어서 둘 중 하나가 사라져야만 되는 것은 아니다.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밀접한 관련성 속에서 증거와 표징은 서로 양립할 수 있다. 그래서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의 증거성과 표징성을 동시에 언급했다. “표징”은 방언을 일컫는 성경적 용어이며(cf. 막16; 고전14), “증거”는 파함이 방언과 성령침례의 상관성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신학적 용어다. 그는 성경적 용어와 창의적인 신학적 용어를 결합함으로써 방언에 풍부하고도 오순절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방언이 성령침례의 증거라는 것을 부인하는 것은 오순절운동의 신학적 창의성을 무시하는 처사일 것이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방언의 은사를 성령침례의 “표징과 증거”(sign and evidence)가 되기 위해 오순절날을 위해 예비된 것으로 이해했다. 또한 믿음과 성령침례를 소유하고 받았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주어지는 상징 또는 증거(the sign or evidence)로 이해했다. 프랑크 마키아는 방언에 대한 이해를 신학적으로 더 분명하게 하기 위해 표징적 방언을 하나님의 자기 증거와 관련시키는 오순절적 이해를 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나님께서 독특하게 방언을 통해 자기 증거에 참여하신다는 아주사 공동체의 주장에 대한 그의 반응은 변증법적 긍정 그리고 부정이다. 방언의 증거성과 표징성에 대한 애매한 그의 태도는 시정되어야 한다. 방언의 성령침례에 대한 증거성을 확실하게 인정하면서도, 표징성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3. 성령침례의 의미와 방언
성령침례의 의미와 방언과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호켄(Fr. Peter Hocken)은 그 이전의 오순절주의자들이 “사역과 봉사를 위한 능력부여”라는 성령침례의 목적(purpose)에만 주목해왔다고 진단하고 “성령침례의 의미”(the meaning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를 새롭게 묻기 시작했다. 본 절은 그가 묻기 시작한 성령침례의 기본적 의미를 통해 방언을 해석한다.
a. 잠김/죽음과 방언
성령침례는 물 침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두 용어는 “침례”를 공통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래서 성령침례에 대한 이해는 침례에 대한 이해와 관련된다. 침례는 헬라어 원어를 따르면 잠기는 의식이다. “침례”를 의미하는 헬라어 “밥띠조”(baptivzw)는 “밥또”(bavtw)에서 온 말로 “담그다(immersion, dip), 흠뻑 젖게 하다(drench), 뛰어들다(plunge), 가라앉히다(sink)” 등의 의미를 갖는다.
물 침례는 물속에 잠겼다가 나오는 것으로 구성된다. 물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롬6:4; 골2:11-12). 물 침례 자체는 죄를 씻는다거나 갱신시키는 것이 아니다(벧전3:21). 물 침례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을 받았다는 복음을 믿는 자들을 보증하시는 외적인 상징적 선포다. 물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를 중심으로 받은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구속적 침례(막10:38; 눅12:50)와 믿음으로 연합하여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아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으로 잠기는 자(ei*" CristoVn e*baptivsqhte, CristoVn e*nedusasqe)는 그리스도를 입은 것이다(갈3:27). 물 침례는 그렇게 그리스도의 구속적 침례와 믿음으로 연합하여 구원을 받은 것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의식이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적 침례, 그리고 신자의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적 침례에 연합하는 신앙적 침례 이후에 신앙적 침례를 선포하는 의식으로 받는 것이 물 침례다.
오순절운동의 초기 지도자들은 물속에 잠기는 침례를 택했다. 오순절주의의 신학과 운동의 기초를 놓았던 찰스 파함은 감리교에서 사역을 시작했음에도 물을 뿌리는 세례를 주지 않고 잠기는 침례를 주었다. 웨슬리는 뿌리기(sprinkling)와 잠기기(dipping), 붓기(puring), 씻기(washing)를 모두 인정했다. 그러나 파함은 웨슬리와는 달리 침수례만을 인정했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결한 양심을 공적으로 고백하기를 원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을 믿고, 한 번 잠김(immersion)으로 물 침례를 받으라고 권면했다. 그에게 그 잠김은 죽어서 장사지냄과 부활을 의미한다. 시무어의 공동체도 역시 뿌리는 세례가 아닌 잠기는 침례(baptism by immersion)를 주었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우리는 한 번 물속에 잠기는 것을 믿는다”라고 신앙진술문을 통해 공표했다. 또한 시무어는 그의 유일한 저서를 통해 “우리는 후보자를 단 한 번,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잠기게 하는 것(burying)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으며, 잠김을 유일한 양식(the only mode)으로 인정했다. 그리고 시내물가에 형성된 물웅덩이에서 물 침례를 준 것을 기사에 싣기도 했다.
“성령침례”에 포함된 전치사는 장소적 의미를 갖는다. “성령침례”라는 어구는 성경에 5회 등장한다. “성령침례”(baptivzw e*n pneuvmati)라는 말은 “엔”(e*n)이라는 전치사를 어떻게 해석하는 가에 따라 “성령으로 침례”(baptism with the Holy Spirit) 또는 “성령 안에서/안으로 침례”(baptism in the Holy Spirit)으로 번역될 수 있다. “엔”(e*n)은 도구적 의미(instrument)로서 “에 의해, 로”(by means of, with)보다는 주로 장소적 의미(locative)로서 “안에서, 안으로”라는 의미를 갖는다.
성령침례는 성령 안으로의 저항할 수 없는 잠김이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성령침례를 무엇보다도 “성령 안으로 잠김”(the baptism in the Hoy Spirit)으로 이해했다. 시무어는 성령침례를 “성령과 불 안으로 침례(the baptism in the Holy Ghost and fire)라고 명시했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오순절날에 제자들이 “성령 안으로 잠겨졌다”(were immersed into the Holy Spirit)고 이해했다. 더함은 시카고로부터 로스앤젤레스로 “성령 안으로 침례”를 받으러 갔다. 그는 마침내 성령침례를 받으며 성령 하나님의 능동성이 자기 몸과 마음을 지배하는 철저한 수동성을 경험했다. 성령침례는 인간이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성령 안으로 잠기는 것이다. 존스(Donald Johns)에 의하면, 성령침례를 통한 성령과의 접촉은 성령의 인격과 능력에 의한 인간의 영혼의 저항할 수 없는 잠김(overwhelming immersion)이다.
성령침례는 성령과의 연합이며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성령침례는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 잠겨 성부에까지 이르러 삼위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다. 성령침례는 “성령 안으로 침례”(baptism in the Spirit)이며 그 의미는 신자들이 성령이라는 대행자에 의해 그리스도의 존재와 신비 안으로 성부의 영광에까지 온전히 잠기는 것이다.
성령침례를 통한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의 연합을 바탕으로 발생한다. 듀간(Fr. Michael Duggan)은 십자가와 성령과의 관계를 성령침례에 적용하려 했다. 그는 봉사를 위한 능력을 경험했으면서도 지속적으로 성숙해지지 못하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그 원인을 분석했다. 그는 그런 현상이 성령침례의 진정한 성격을 온전하고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발생하고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성령 안으로의 침례”(baptism in the Holy Spirit)가 십자가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정확하게 간파했다. 그에게 성령의 사역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중심에 있는 십자가를 가리키는 것이다. 십자가의 선포(고전1:18-25)와 성령의 가르침(고전2:6-16)은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 성령은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선포한다(롬6:6). 그리스도만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니라 옛 사람 안에 있는 죄도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롬6:2). 옛 사람의 죄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롬6:8). 내 안에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산다(갈2:20). 성령침례는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옛 사람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확인시키면서 여전히 신자 안에 존재하는 죄를 계속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을 요청한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발화자의 옛 사람과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함을 인식시키며 경험시킨다. 호켄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으로의 잠김을 성령침례와 연결시켰지만 그 연결을 방언까지 확장하지는 않았다. 왜 성령침례에 방언이 동반되는가? 왜 성령침례의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이 동반되는가? 그는 그런 질문들을 간과했다. 방언은 성령침례의 죽음이라는 측면을 잘 드러낸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성령침례와 십자가에서의 죽음과의 관련성을 이미 경험을 통해 간파하고 있었다. 쿡(G. A. Cook)은 간결하고 정확하게 성령침례를 의심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으로 잠김”(the baptism into the death of Christ)으로 규명했다. 헤리 메이슨(C. H. Mason)의 경험은 성령침례와 십자가의 관련성을 더욱 드라마틱하게 보여준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신음 같은 방언을 경험했다. 성령에 의해 완전히 통제된 그는 마치 십자가 옆에 서는 것 같이 느꼈고, 그때 성령께서 죽어가시는 그리스도처럼 신음하기(groan) 시작하셨으며, 그도 신음하기 시작했다. 그의 안에서 들려온 그 신음소리는 그를 사랑하시는 그리스도의 신음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신음하시는 방언을 들으면서 일종의 완전한 자기 자신의 죽음(a complete death)을 경험했다. 마키아는 듀간을 인용하면서 오순절주의자들 안에서 성령침례에서 경험되고 묘사된 능력의 하나님이 예수그리스도의 성육신, 생애, 죽음에서 계시된 하나님에 의해 정의되지 않으며, 따라서 성령의 능력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십자가의 그늘 아래서 바울이 말한 “약함의 강함”으로 보다는, 초자연적인 영역에서 자연적 질서에 대한 승리주의적인 지배로 규정된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오순절주의자들은 초기부터 방언과 십자가의 관련성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일방적인 비판은 시정되어야 한다.
방언은 이성의 무력함을 통해 인간의 죽음과 같은 본질적인 무능력을 드러낸다. 이성은 영이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을 말할 때 비록 그것이 사도행전적인 세상의 언어라고 할지라도 통역은사를 받지 않는 한 발화되고 있는 방언의 내용을 알지 못한다. 그 방언은 발화자의 이성에게 비밀이 된다. 발화자의 마음과 이성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발성기관이 움직이는 것을 그저 느끼기만 해야 한다. 그 상태를 마음과 지성에게는 어둠과 죽음이라고 표현해도 무방할 것이다. 통역 없는 방언은 마음에게는 비밀스럽게 숨겨진 것이다. 마음은 방언에 대해 죽은 상태가 된다. 고대 부정신학(apophatic theology)의 인간에 대한 부정을 현대 오순절 운동의 방언의 비이성성과 연결시켜 방언에 대한 이해를 확대시킬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은 성령께서 발화자를 통해 “비이성적 방법”(non-rational) 또는 “초이성적 방법”으로, 발화자의 이성을 어둠의 상태에 두면서, 부정적(negative/apophatic)으로 기도하시는 것이다. 성령의 은사는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영의 일하심에 더욱 수동적으로 만든다. 방언은 성령으로 충만했던 메시아 예수처럼 그리스도의 영에 더욱 유순하게(docile) 만든다. 방언은 인간의 본질적인 무능력을 드러낸다.
방언은 성령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경험이라는 성령침례의 본질을 잘 드러내기 때문에 성령침례와 떼어놓거나 비신화할 필요가 없다. 왓슨 밀스(Watson Mills)는 성령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경험이라는 성령 침례의 본질과 방언이라는 형식적 상징(formal symbolism) 사이를 떼어 놓으려했다. 그는 방언은 한 때 그랬던 것만큼 인간 심리와 공동체의 삶에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낡은 상징적 표현이기 때문에, 방언은 “비신화”(demythologized) 되어야 하고, 20세기 사람들에게 더욱 의미 있는 성령충만에 대한 상징적 표현들로 대체되어야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령침례의 본질을 성령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경험으로 본다고 할지라도 그것과 방언을 떼어 놓는다거나 비신화할 필요가 없다. 방언은 성령에 대한 저항 할 수 없는 경험을 잘 드러내기 때문이다. 시무어의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케스웰(G.B. Cashwell)은 이미 이 사실을 잘 간파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언어”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하나님께 양도해야만(to be surrendered to God) 그분께서 우리를 통해 영어든 독일어든 헬라어든 자신의 뜻과 방법대로 말씀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었다. 방언은 성령침례를 통한 성령 안으로의 잠김에 필수적인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전인격적 양도(necessary yielding of the total person)다. 방언은 성령침례라는 압도적인 경험에 최후까지 저항하는 가장 하나님께 굴복하기 어려운 “혀”의 굴복을 의미한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수동적이 되어 하나님의 가장 비밀스런 품에까지 잠기는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발생한다. “성령 안으로 침례”(baptism in the Spirit)의 의미는 성령이라는 대행자에 의해 그리스도의 존재와 신비 안으로 성부의 영광에까지 온전히 잠기는 것이다. 루시 리더만(Lucy M. Leatherman)은 “성령으로 침례”를 구하다가 환상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옆구리의 고난의 상처 안에 들어가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비밀스런 품 안에 들어가는 것을 체험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방언을 말하였다.
b. 나옴/살아남과 방언
성경에서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죽음(mortification)뿐만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살아남(vivification)과 관련된다. 물 침례가 물속으로 잠기는 것뿐만 아니라 물속에서 나오는 것으로 구성되는 것처럼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도 죽음뿐만 아니라, 생명과 승리의 능력을 경험시킨다.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동반되기 시작한 방언을 말함은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가능하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으로 가능하다. 마가복음의 긴 결말부분은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 가운데 언급되는 새 방언이 “하늘로 올라가사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그리스도”에 의해 가능하다고 말한다(막16:17-20). 방언과 그리스도의 부활과 승천이라는 승리와의 관계성은 누가의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베드로의 설교에서도 확인된다. 베드로는 죽임을 당했던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셔서 자기 우편에 앉게 하셨고, 죽임을 이기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보고 들을 수(방언) 있도록 부어주셨다고 증언했다(행2:33). 이처럼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깊이 관련된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능력으로 부활하신 승리자 그리스도와 관련된다. 시무어의 공동체에서 “성령으로 침례”(baptism with the Holy Ghost)에 동반되는 방언은 승리자 그리스도와 연결되었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방언 경험을 “성령으로 침례”(baptism with the Holy Ghost)와 연결시키기도 했는데 이때 경험된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승천하신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시다. “성령으로 침례”를 구하는 자에게 환상이 보이기도 했는데 그 환상 가운데 나타나시는 그리스도는 “구름위에 오르셔서 바라보고 계시는 예수”(Jesus sitting upon a cloud looking at me and at the congregation)이셨다. 죽음을 이기시고 승천하신 승리자 그리스도의 환상 뒤 곧 방언을 말함이 뒤따랐다. “성령으로 침례”는 죽음을 경험시키는 “성령 안으로 침례”와는 달리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험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성령침례와 동반되는 방언은 기쁨 넘치는 찬양을 경험시킨다. 시무어의 공동체 안에서 고통과 죽음을 경험시킨 “성령 안으로 침례”에 동반되는 방언과는 달리 “성령으로 침례”와 연결된 방언은 기쁨 넘치는 찬양을 경험시켰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성령으로 침례”에 동반되는 방언 경험이 찬양을 일으켰다고 간증했다. 수천 가지의 악기들로 구성된 악단이 연주하는 듯한 찬양이 내부로부터 넘쳐 나왔다. 시무어는 성령침례가 하나님에 대한 찬양을 일으킨다고 말했다. 성령으로 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기쁨 넘치는 찬양이었다. 호켄도 성령 침례의 의미 안에 내포되어있는 하나님을 향한 목적(the purpose towards God)을 찬양(중보기도도 포함)을 드리는 것으로 규정했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이렇게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의 기쁨을 경험시키는 찬양이기도 하다.
c. 죽음과 살아남과 방언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죽음과 살아남이라는 양면성을 띈다. 물침례가 물속에 잠김과 물 밖으로 나옴으로 구성되듯이 성령침례도 역시 잠김과 나옴으로 구성된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도 또한 삼위 하나님 안으로 잠겨 죽음과 다시 살아나는 능력을 경험시킨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인간의 무력함(weakness)과 하나님의 능력(Power)을 절감시킨다. 그 방언은 때로 무기력하게 안으로 잠기게(immersion) 하고, 때로 활발하게 밖으로 표출(expression)하게 한다. 방언은 자아(ego)가 깊은 무의식(unconscious) 속에 잠겼다가 정화되고 회복되어 나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경험을 일으킨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희생자 그리스도(Christus Vitime)의 죽으심에 의해 발화된다. 인간의 죽음과 같은 무력함, 전적 항복을 통해 발화된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 승리의 능력을 통해 발화된다. 죽음을 이기신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의 능력을 찬양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mortification) 함께 살아남(vivification)을 경험시킨다. 그리스도의 십자가(Cross)와 그리스도의 부활(Resurrection)을 경험시킨다. 그리스도의 고난(Suffering)과 그리스도의 승리(Victory)를 경험시킨다. 시무어의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쉬들러(Myrtie K. Shideler)의 간증은 그 방언의 그런 양면성을 잘 드러낸다. 그녀는 “성령으로 침례”에 동반된 방언을 말하면서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그 환상은 갈보리 언덕에서 가시관을 쓰고 고난당하시는 그리스도와 승리하신 준엄한 그리스도가 교차된 것이었다.
그분은 그분의 용모를 때때로 바꾸시는 듯 했습니다. 때로 그 용모는 그분이 갈보리로 향하는 거친 길을 가실 때처럼 가시관으로 찢겨져 있었으며, 깊은 동정과 슬픔이 그분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어떤 때는 그 용모는 승리한 분의 침착하고, 위엄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내 영혼은 오직 외쳤습니다. “보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 나는 결코 그 용모를 적절한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나는 자신의 오순절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이것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얼마나 오래 서서 내게서 터져 나오는 찬양을 하나님께 올렸는지 모릅니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내가 어떤 방언으로 노래했다고 내게 말해주었습니다. 나는 내가 찬양하고 있었다는 것을 전혀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4. 성령침례의 목적과 방언
a. 복음전파 능력부여의 표징으로서 방언
성령침례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복음전파 능력부여다. 그리스도께서는 “너희는 몇 날이 못 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행1:5),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1:8)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침례를 받아야할 이유를 증인이 되기 위한 권능을 받는 것이라고 규명해 주셨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신 성령침례의 목적은 신자들에게 언어와 민족 지역적 한계들을 넘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복음 전파를 위한 능력을 부여해 주는 것이(empowerment)다. 호켄은 성령침례의 타인을 향한 목적(the purpose towards other people)을 사랑과 봉사, 사역, 그리고 전도로 규정했다.
오순절날 발화된 방언은 성령침례의 목적이 그런 복음전파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신비한 언어로서 방언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봉사를 위한 능력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하는 과정 속에서 그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은 성령침례가 신자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게 하는 능력을 부여한다는 것을 적절하게 각인시킨다. 방언 은사가 그 어떤 은사들보다도 먼저 성령침례에 동반되었다는 것은 방언이 그런 탁월한 상징성을 갖고 있음을 증명한다.
방언은 오순절운동 초기 지도자들에 의해 성령침례의 목적인 복음전파를 수행하는 탁월한 길로서 이해되었다. 방언은 성령침례의 증거라는 교리의 기초를 놓은 파함은 성령침례의 목적은 신자들에게 권능을 부여하여 신자들을 증인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사도행전 1장 8절을 주의 깊게 연구해보면, 우리는 그 능력은 그들을 증인으로 만드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고넬료 집 사람들이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듣고는 그 이방인들도 또한 예수의 피로 가까워졌고, “권능 부여”(the endowment of power)를 받을 특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시무어도 방언으로 입증되는 성령침례는 타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여 구원을 얻게 하는 능력을 부여한다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사했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다는 것,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주시라는 것, 이러한 사실들을 경험한 사람들이 타인에게 그 사실들을 증거 할 능력을 성령침례를 통해 얻는다는 것이다. 그에게 성령침례는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의 증인이 될 수 있는, 즉 선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해 준다.
성령침례를 받은 우리는 무언가 말할 거리를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로부터 깨끗케 했다는 것입니다. 성령침례는 우리에게 죽음에서 일어나셔서 부활하신 구주를 증거 할 능력을 줍니다. 성령침례를 받으려면, 우리는 먼저 성화되어야만 합니다. 그러면[성령침례를 받으면] 우리는 땅 끝까지 그분의 증인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9-20), 아멘! 그들은 오순절 날에 이 위임령과 부합하는 권능을 받았습니다(행 2:4).
b. 복음전파의 한 능력 있는 방법으로서 방언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은 성령침례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성령침례의 목적을 이루는 탁월한 방법이다. 증거로서 방언은 하나님의 큰일을 초월적으로 전파하는 탁월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다른 방법들보다 맨 먼저 등장했다. 이 순차성은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들어 내신 신적 기원의 것이다. 그 만큼 방언은 성령침례의 목적을 이루는 방법들 혹은 은사들 중에서 가장 적절하고 탁월한 것이다.
누가에게 성령은 예언의 영(the Spirit of prophecy)이다. 이 점은 오순절 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된 바와 같다. 로저 스트론스타드(Roger Stronstad), 로버트 멘지스(Robert Menzies), 그리고 매싱베르드 포드(J. Massyngbaerde Ford)는 누가가 성령 받음을 영감 받은 또는 예언적인 말(inspired or prophetic speech)과 결부시키는 유대교적 경향을 따랐다는 것을 지적해 왔다. 성령은 예언의 영(the Spirit of prophecy)으로서 성령침례를 받은 자에게 증인이 되는 능력을 부여한다. 성령침례를 만국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국적과 문화적 장벽들을 초월하기 위한 사도적 권능의 갱신으로 이해하는 것은 배우지 않은 타국어를 말하는 것(xenolalia)으로 이해된 방언이 다른 은사들을 제치고 그 경험에 대한 최초의 증거라는 지위를 점유하는 특권을 받은 이유를 설명해준다.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의 기능은 증인이 되게 하는 성령침례의 기능과 온전히 일치한다. 오순절 날 성령께서 임하실 때 각 사람위에 머물러있었던 불이 꼭 혀의 모양과 같았다는 것은 “성령침례”와 “다른 방언들”과 “하늘로부터 내린 불의 혀”가 복음전파라는 목적을 중심으로 떼어놓을 수 없는 밀접한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순절의 불같은 혀는 복음선포 능력의 불이다. 누가는 첫 번째 승천기사에서 “아버지의 약속”을 받는 것과 “증인되는 능력”을 받는 것을 평행법적으로 동일시한다(눅24:48-49).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볼찌어다 내가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
누가는 예수께 “내가 . . . 보내리니”라고 말씀하게 한 후 예수를 하늘로 올려보낸다(행24:52). 독자는 두 말씀을 연결함으로써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보내시리라고 기대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위로부터”라는 말을 “하늘로부터”라는 말과 동일하게 생각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누가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는 것을 능력 입히움과 동일시한다. 누가는 두 번째 승천기사에서 성령과 복음전파(예수 증인) 능력을 보다 더 긴밀하게 연결한다. 누가는 예수말씀 가운에서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을 것이고 권능을 받으면 예수의 증인이 되리라고 말한다(행 1:8). 그리고 누가는 사도충원 기사에서 베드로의 입을 통해 성령을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가룟 유다에 대해 미리 말씀하신 분으로 묘사한다(행1:16).
누가는 오순절 성령강림에 “불같은 혀”를 등장시킨다. 누가가 묘사한 오순절의 “성령과 불침례”는 받는 자들을 위한 회심-입문(conversion initiation), 즉 구원을 위한 것은 아니다. 누가는 성령의 내적 갱신을 강조한 이사야나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을 인용하지 않고, 은사적이고 예언적 현시를 약속한 요엘을 인용한다. 누가는 요엘을 인용하되 “예언 할 것이요”(kaiV prfhteuvsousin)라는 말을 삽입함으로써 성령과 불의 침례를 받을 남종과 여종이 예언적 선포의 말을 할 것을 강조한다. 누가는 “성령이 불같은 혀로 임했다”고 표현한 후 그 위에 혀(glw'ssa)가 임한 사람들로 하여금 방언(glw'ssa, 혀)를 말하게 한다. 브루스(F. F. Bruce)는 “불의 혀”가 제자들이 말한 “다른 혀들(방언들)”을 상징하도록 어느 정도로 의도되었는지는 불확실하다고 보았다. 던(James D. G. Dunn)은 누가의 “불같은 혀”와 “방언”과의 관계를 가능성 있는 것으로 보았다 폴힐(John B. Polhill)은 좀 더 적극적으로 혀와 같은 불은 신자들의 혀로 하여금 영감있는 말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했다고 봄으로써 불같은 혀와 제자들의 다른 방언과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보았다. 몽테규(George T. Montague)는 이들보다도 먼저 불같은 혀들은 성령의 은사와 사도들이 말하게 될 다른 방언들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성령의 이러한 불같은 활동의 즉각적인 결과는 영감 넘치는 선포였다(예: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이렇게 다른 방언들은 복음전파의 권능을 부여하는 성령침례/불같은 혀와 다른 은사들보다 더욱 밀접하게 관련된다. 이것은 증거 방언이 복음전파를 위한 탁월한 방법임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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