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연구
-조직신학의 주요쟁점과 관련하여-
A Study of the Pentecostals' Speaking in Tongues from the Perspective of Systematic Theology
이창승
결론
본 논문은 방언을 조직신학적 측면에서 해석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했다. 그 가능성을 “신론(방언의 본질과 관련하여), 창조론(인간론을 중심으로), 구원론, 교회론, 종말론”이라는 조직신학적 주요 주제들을 통해 방언을 해석함으로써 입증하려 노력했다. 현대 오순절운동은 그 이전부터 논의되어왔던 성령침례에 방언이 새롭게 결합되면서 탄생했기 때문에 다른 운동들과 구별되었고, 주창자와 비판자에 의해 방언운동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므로 방언 연구는 오순절운동과 신학에 의미 있는 것이다. 이렇게 중요한 방언에 대한 신학적 접근은 극히 드물었다. 드문 신학적 접근 가운데도 주목할 만한 것들이 있었지만 조직신학적 측면의 연구는 거의 전무했다. 이런 신학적 현실을 개선하고자 본 논문은 전반적인 조직신학적 주제들을 통해 방언 해석을 시도하였다. 또한 오순절신학의 요청에 의해 “성령침례”라는 주제를 첨가하는 등 그 시도를 오순절적 관점에서 수행했다.
성령침례와 결합된 방언,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불가분리적 관계성이야말로 오순절주의의 정체성이며 핵심이다. 종말론, 성령침례, 능력이나 하나님/성령 경험도 오순절운동을 다른 운동과 구별 짓는 중심/척도가 될 수 없으며, 오순절신학의 핵심이 될 수 없다. 오순절주의의 정체성과 중심인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불가분리성은 “증거”(evidence)나 “표징/표적”(sign)이라는 용어들에 의해 표현된다. 방언은 오순절운동과 신학을 다른 운동들과 신학들로부터 구별시킬 수 있는 증거, 한 개인이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명확하고 객관적 증거, 성령침례를 받음에 대한 성경적 증거다. “성경적 증거”라는 말은 현대 오순절 운동의 방언현상을 성경의 방언 현상과 연속선상에 놓으며 그런 연속성과 동일성은 성경방언의 현대에의 지속적인 반복가능성을 의미한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또한 성령의 오심의 증거이며, 성령께서 확실하게 어떤 신자 안에 내주하신다는 확증이다. 방언은 성령침례와의 분리할 수 없는 그 증거이되 “최초의 증거”이며, 최초 증거론은 방언이외에 또 다른 증거들이 방언이후에 발생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성령은 원하는 곳으로 부신다”라는 말은 성령침례의 증거에서 방언을 제외시키려는 근거로 사용되지만, 역으로 성령께서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을 택하실 자유의 근거도 된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발화자의 믿음의 표징, 성령의 임재의 표징,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의 표징, 하나님께서 주시는 내적이고 영적인 유익을 외적으로 확증해주는 외적인 표적이다. 방언은 성령침례의 증거이며 동시에 표징이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과 삶을 경험시킨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발화자의 옛 사람과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함(mortification)을 인식시키며 경험시킨다. 방언은 이성의 무력함을 통해 인간의 죽음과 같은 본질적인 무능력을 드러낸다. 방언은 성령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경험이라는 성령침례의 본질을 잘 드러내기 때문에 성령침례와 떼어놓거나 비신화할 필요가 없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수동적이 되어 하나님의 가장 비밀스런 품에까지 잠기는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발생한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또한 죽음으로부터 살아남(vivification)과 관련된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승리자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으로 가능하며, 기쁨 넘치는 찬양을 경험시키며, 그 찬양의 내용은 “능력”이며, 그 능력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능력이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성령침례의 목적이 복음전파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일 뿐만 아니라 성령침례의 목적을 이루는 탁월한 방법이다.
방언의 근원은 친밀하게 사귀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이다. 방언은 성부와 성자의 주고받음에서, 대화에서, 친밀한 연합에서 발생한다. 성자와 성령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 밀접한 말씀적 관계에서, 사역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성부와 성령의 서로 아심에서, 성부께서 성령을 주심에서 발생한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참여와 존중 속에서 사귀는 자기 소통/친교적인 내재적 관계와 피조물, 특히 인간과 관련된 경세적 관계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외부와 내부를 향해 말씀하시는 언어적 존재이신 성부 하나님으로부터 발생한다. 언어적 존재이신 하나님은 내부를 향해 자기 자신과 대화하시며, 또한 외부를 향해 말씀하시는 존재다. 하나님의 외부적인 창조의 말씀은 인간에게는 낯선 말, 곧 방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방언은 언어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직접적 현현의 한 형태로서 하나님의 임재를 각성시킨다. 방언은 그리스도의 현재적 사역의 한 형태로서 성자가 끊임없이 신자들을 위해 활동하심에서 발생한다.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범위를 드러내며,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수난 가운데 부르짖음일 수 있으며,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의 유비일 수도 있다. 성육신은 방언 같은 말씀의 구체적 통역이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방언 같은 낯선 소리로 기도드리기도 하셨고,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울의 동행인들에게 방언 같은 낯선 소리로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성령은 방언의 근원이시다. 방언의 독특성은 인간의 영을 통한 성령의 말씀이라는 점이다. 성령의 기도인 “탄식”은 익숙한 언어가 아닌 낯선 소리다. 방언은 보이지 않는 성령 하나님의 나타남의 형태 가운데 하나이되, 청각적 현현이다. 한편으로 성령의 임재를 상징하며, 다른 한편으로 성령 자신의 임재다. 성령의 능동적 임재는 그리스도와의 밀접한 관계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방언은 신자가 삼위일체 하나님의 친교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방언이 수신자의 시청각 경험을 일으키는 것은 방언의 소통성을 말하는 것이다. 불신자들을 향해 발화될 때 그것은 불신자들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으로의 초청이다. 그런 소통 경험을 일으키는 방언은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공동체를 확장시키는 한 방법이다.
성경은 새 방언, 탄식 방언, 다른 방언, 각종 방언이라는 여러 종류의 방언을 언급한다. “새 방언”은 그리스도와 관련되며, 말하는 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사실을 본인과 타인이 확신할 수 있는 표적이 되며, 믿음의 사건 즉, 회심에 후속한다. 성령의 탄식 기도는 방언과 암시적으로 연결된다. “탄식 방언”은 인간의 기도인 동시에 성령의 기도다. 탄식 방언은 회심 이후에 가능할 수 있다. “다른 방언”과 “각종 방언”은 현상적으로 언어적인 것과 비언어적인 것, 신학적으로 표적적인 것과 은사적인 것이라는 상이점을 갖는다. 그러나 두 방언은 근원(하나님)의 동일성, 비습득적 공통성, 형식적 공통성을 갖는다. 방언은 한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의 방향성을 갖으며, 다른 한편으로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의 방향성, 즉 양방성을 갖는다. 그 양방향성은 하나님과 발화자 사이의 의사소통을 의미하지만, 그 소통은 인간에게 뚜렷하면서도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는다. 두 방언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귐을 의미한다. 방언이 불신자에게 향해질 때, 그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으로의 초청이다. 성경계시와 함께 오늘날에도 지속되고 있는 특별계시의 한 종류인 성령계시이다. 방언을 통해 계시되는 비밀은 사람이 모르는 “하나님의 뜻”, “성경”, 그리고 “그리스도”일 가능성이 있다. 방언 통역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이며, 계시적인 예언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 성령을 포함한 삼위는 각각 계시자이시고, 방언은 성령의 계시의 한 길이다. 성경계시는 성령계시에 대한 진위 판별기준인 점에서 우위에 있지만, 성경계시와 성령계시는 상호 보완되어야 한다.
방언은 인간의 내면적 하나님의 형상성과 더불어 몸의 하나님 형상됨을 지지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요소인 인간의 몸을 통해 발화된다. 몸의 소리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하나님과 그리고 타인과 교제할 수 있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방언은 인간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언어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각인시킨다. 서로 소통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인간이 삼위 간에 교제하시는 하나님과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교제의 길들 중에 하나다. 방언은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됨의 언어성, 몸성, 관계성을 드러낸다.
방언 경험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과의 영적 사귐 경험이다. 바울이 언급하고 있는 은사 방언은 “나의 영”, 즉 방언을 말하는 인간의 영을 가리킨다. 방언을 통한 영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의 구별은 인간 이분설을 재고시키며, 삼분설을 뒷받침한다. 방언은 초이성적(super-rational)이지, 탈 이성적(ex-rational)인 것이 아니다. 방언을 말함은 기본적으로 이성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수동적으로 만들거나 비활성화시키지는 않는다. 방언은 영의 말하는 자유와 이성의 통제라는 얼핏 모순된 두 요소의 조화를 통해 적절해진다. 방언에 때때로 동반되는 정서적 경험은 원죄와 구원, 그리고 신앙을 마음의 성향에 두었던 종교개혁 전통 안에서 정당한 것이다. 방언에 동반되는 정서의 기원은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며, 인간 감정의 표출이라기보다는 신적 감정의 표출이다. 방언은 신체적 경험을 활성화시키기도 하며 비활성화시키기도 한다. 방언은 신체적 경험을 반드시 동반한다는 점에 있어서 반드시 동반하지는 않는 회심 경험의 신체성과 다르다.
하나님의 언어를 거부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언어적 관계의 깨짐을 유발한 인간의 첫 죄는 계속 다른 언어적 관계들의 깨짐을 일으켰다. 하나님의 언어 거부라는 인간의 죄는 바벨탑 사건에서 적나라하게 표출되었다. 인간 언어들의 다양성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인간에게는 혼잡과 좌절과 분열이었다는 점은 오순절날 일어났던 방언 역사의 배경이 된다. 방언은 불신자들에게 심판이며, 또한 그 상징이기도 하다. 다양한 인간의 언어들은 우상숭배의 죄로 이끌어가는 길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의 언어를 거부하는 인간의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대신 더럽고 악한 다른 영들과의 교제의 문을 열었으며, 귀신이라는 “더러운 영”이 인간의 몸을 통해 발성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인간의 영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의 분리는 죄로 가득한 인간 실존 상황을 드러낸다. 방언 기도, 즉 영의 기도는 죄로 오염된 인간의 언어를 좌절시킨다.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 했었지만, 오순절에 인간의 영이 몸과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은 파괴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방언은 의사소통 회복의 상징이다. 바벨에서 구음을 흩으시고 의사소통의 장애를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의사소통의 장애가 되는 혀를 풀어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의사소통 회복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신다. 오순절의 다른 방언들도 또한 의사소통의 회복을 상징한다. 발화와 청취를 일으킨 오순절 방언은 바벨 사건으로 상징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 단절의 회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방언은 하나 됨의 상징이다. 방언은 바벨탑 언어 혼잡이후로 분열되고 대립되었던 하나님과 사람, 사람들과 민족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방언은 또한 다양하면서도 다양한 우상 숭배를 일으키지 않는다. 오순절의 다양한 방언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위해, 유일하신 하나님에 관해서만 말했다. 방언은 사회적 계급과 민족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게 한다. 방언이 일으키는 통합은 다양성을 초월하는 것이지, 다양성을 억압하거나 와해시키는 통합이 아니다. 방언은 나이와 성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게 한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구원을 위한 새 언약의 “상징”이다. 오순절의 방언은 새 언약의 보편성을 상징한다. 방언은 죄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관계되지만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죄 사함과 관련된 은혜와 간접적으로 관련되지만, 은사와는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역사하고, 그 다음에 은사로서 방언이 주어진다. 방언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중생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하는 은사다. 그러므로 방언은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다. 바벨 방언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심판의 상징이었지만, 오순절 방언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용서의 징표다. 방언은 하나님에 의한 새 창조의 상징이다. 방언은 단지 영혼의 해방뿐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면, 영혼, 마음, 육체, 사회적 관계의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복음의 표징이다.
방언은 구원 얻는 믿음을 확증시키는 표적들 중의 하나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발화자가 구원 얻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자신과 타인이 확증하는 표적이 될 수 있다. 방언은 신앙생활을 위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한다. 방언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항복을 상징한다. 방언은 한편으로 성화된 말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성화되어 가는 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방언은 인간 언어의 “신학적 순기능”의 회복을 의미한다. 방언은 중생하여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여전히 죄된 인간의 본성을 상징한다. 탄식방언은 인간의 죄된 본성에 대한 성령의 탄식이며 또한 자기 본성에 대한 인간의 탄식이다. 그래서 방언은 회개일 수 있다. 탄식 방언에 대한 윤리적 해석은 방언에 잠재된 변혁적 능력을 드러낸다. 방언은 인간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능동적으로 “신화”(神化, deification/theosis)에 참여하는 길이 될 수 있다. 탄식방언이 성화론적으로 소극적인 면, 다시 말하면 죄에 대해 죽음(mortificatione)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방언의 성화론적 적극성, 즉 의에 대해 살아남(vivificatione)은 방언을 통해 밖으로 사랑이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방언은 사랑을 제거하지 않는다. 파함은 결코 오순절운동에서 사랑을 제거하지 않았으며, 시무어에게 사랑은 성령침례의 외적 증거인 방언과 조화를 이루는 성령침례의 내적 증거다. 방언을 통해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방언과 사랑은 원칙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방언과 사랑이 때로 분리되기도 한다. 방언과 사랑의 분리는 발화자의 마음속 깊은 본성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죄성 혹은 연약성 때문이다. 방언과 사랑은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방언과 사랑이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영과 혼이 서로 일치해야한다는 것이다. 방언은 그것을 통해 성령의 사랑 속에 잠기고 또한 흘러넘치는 사랑의 침례다.
방언은 아기의 첫 울음이 신생의 표적인 것처럼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표적이었다. 방언은 교회가 태어났으되 살아있는 생명체로 태어났음을 알린 표적이었다. 방언은 교회가 목회자와 평신도의 조화에 의한, 말씀과 은사의 조화에 의한 단일 공동체임을, 교회의 다양하면서도 단일함을 상징한다. 교회에 주어지는 방언의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성은 교회의 머리로부터 지체들에게로의 방향성을 드러내며, 방언의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으로의 방향성은 교회의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으로의 방향성을 드러낸다. 방언은 교회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교회의 능력의 기원이 성령임을 알게 한다. 방언은 또한 연약한 교회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나타낸다. 방언은 교회가 거룩하면서도 동시에 거룩하지 못한 공동체임을 말해준다. 방언은 교회의 첫 은사였으며, 교회의 은사적 구조를 상징하며, 그 구조의 일부를 형성한다. 방언은 교회의 은사적 구조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떼어낼 수 있는 단순한 기호가 아닌 기호가 지시하는 것 자체의 떼어낼 수 없는 부분을 형성한다. 방언은 교회가 증인 공동체가 되는 길들 중의 하나이며, 동시에 증인 공동체에게 따르는 표적들 중의 하나다. 방언은 증인 공동체의 선교의 유익한 길이이며, 증인 공동체인 교회의 선교의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선교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의 선교임을 각인시킨다.
방언은 마지막 날들에 임한 주의 날의 예기적 표적이며, 주의 날을 가리키는 종말론적 표적들 중의 하나이다. 방언은 “종말적 신현”이다. 그리스도의 신부의 자격되는 자격을 얻는 인침을 받는 성령침례는 방언으로 증거 된다고 볼 수 있다. 방언은 천국에서의 자유스런 의사소통의 예기일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의 친밀한 대화의 현재적 선취이기도 하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방언 찬양은 종말적 찬양의 전조(sign)다. 방언의 회복은 영혼 구원을 위한 늦은 비의 역사를 의미하며, “영원한 복음”을 전하는 늦은 비 시대의 인간을 향한 종말적 선포를 위한 매체다. 방언은 세상을 변혁시켜 가시는 성령의 사역의 상징이며, 한 방법이다. 비록 방언이 종말을 고한다할지라도 천국에서의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대화는 지속될 것이다. 바울이 언급한 방언의 종말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일 것이며, 방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지속될 수 있을 것이지만, 비록 방언이 종말을 고할지라도, 방언이 지시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친밀하고 온전한 의사소통은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
ABSTRACT
A Study of the Pentecostals’ Speaking in Tongues from the Perspective of Systematic Theology
by Lee, Chang-Soung
Department of Theology
The Graduate School of Theology
Gospel Theological Seminary
Daejeon, Korea
The thesis of this work is that theological meaning of speaking in tongues can be expanded through the main themes of systematic theology. Modern Pentecostal movement was born when the baptism of Holy Spirit was combined with speaking in tongues. Naturally the movement has been understood as “tongue movement” by both advocators and critics. Therefore, the study of speaking in tongues is utterly meaningful to Pentecostal movement and it’s theology. But, unfortunately, systematic theological approach to speaking in tongues was very rare. This work tried to improve such a theological situation by interpreting speaking in tongues through the themes: theology proper, creationology, soteriology, ecclesiology, and eschatology from the perspective of Pentecostalism.
Chapter 2 interprets speaking in tongues through theology proper. This work is to scrutinize the essence of speaking in tongues. For classical Pentecostalists speaking in tongues can't be separated from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The essence of Spirit Baptism is immersion into the Holy Spirit. The ignorance of speaker's reason of the content of speaking in tongues corresponds well with the essence. Speaking in tongues is both the sign and the evidence of Spirit Baptism. Speaking in tongues is generated from the intimate communion among the three persons of Trinity. So, speaking in tongues is man's participation in the divine communion. The origin of Speaking in tongues is Triune God. Speaking in tongues, and the interpretation of it is a way of revelation of the Holy Spirit.
Chapter 3 deals with speaking in tongues from the perspective of Creationology. Man's possibility of speaking in tongues comes from the fact that he was created as the image of God internally, externally(physically), and relationally. Speaking in tongues can be uttered by the three elements of man. It is a speaking of man's spirit through his body(vocal organ) with the control of his mind. Speaking in tongues isn't ex-rational, but super-rational, and the expression not of man's feeling, but of divine emotion. Man's original sin was man's disobedience against God's word, and the sin destroyed the linguistic relation between God and man. The variety of languages of men at the Babel tower was God's judgement on the naked exposition of the sin. Man's refusal against God's word resulted in the opportunity of evil spirits' utterance through man's vocal organ. The separation between the prayer of spirit and that of mind discloses man's sinful existential situation.
Chapter 4 construes speaking in tongues from the point of Soteriology. Speaking in tongues is the recovering experience of the Image of God, the communication, and the becoming one between God and man, and among men, destructed by sin. It is a sign of the universality, concreteness, and existential personality of New Covenant. Grace is indirectly connected, but gift directly with speaking in tongues. The different languages at the Babel was God's judgment, but the speaking in tongues on the day of Pentecost was the sign of God's forgiveness. Speaking in tongues is a sign carrying conviction and faith of salvation. There is the possibility of sanctified and being sanctified word in speaking in tongues. In one respect, speaking in tongues is the sigh of the Holy Spirit on man's sinful nature. And it is man's sigh too, so it may be repentance and a way of participation into deification. Positively, speaking in tongues is a duct through which God's love flows out. Speaking in tongues is the baptism of love: immersing in the love the Holy Spirit and coming out from the love.
Chapter 5 scrutinizes the ecclesiological meaning of speaking in tongues. Church was born with speaking in tongues as a baby with crying. Speaking in tongues is the sign designating church as one community harmonized with pastor and laity. Two directions in speaking in tongues from God to man, and from man to God signify the two directions and relationship of church from the head Christ to the limbs and body, and from the body to the head. The first gift to church, speaking in tongues is a sign of the charismatic structure of church, and a part of the structure also. Speaking in tongues is a way through which church may become a witness community to the world. Speaking in tongues makes church recognize that mission is fundamentally of God, not of man.
Chapter 6 investigates the deep eschatological meaning of speaking in tongues. Speaking in tongues started to utter in the last days and became the anticipating sign of the Lord's day. Speaking in tongues is not only the anticipating sign of the free communication in the Heaven, but also the present accomplishment of intimate conversation in the Heaven. Praise with speaking in tongues is a sign of eschatological praise toward God in the Heaven. Speaking in tongues is a eschatological medium to preach the everlasting Gospel, to transform the world by the Holy Spirit. Speaking in tongues may be uttered continuously till the second coming of Christ and further in the Heaven as a way of eternal commun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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