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세계의 오순절신학을 위해 KIPT

오순절주의 방언연구 (PhD논문)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연구 5: 방언과 창조: 인간론, 죄론을 중심으로

한오신 2017. 6. 11. 09:39

오순절적방언연구박사논문 III장 (이창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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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방언과 창조

 

방언의 근원은 하나님이지만, 방언의 최종 발화는 피조물인 인간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방언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인간에 대한 이해와 깊이 관련된다. 본 장을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한다. 첫 항은 방언의 발화를 가능케 하는 인간론적 기초를 하나님의 형상을 통해 탐구한다. 둘째 항은 방언 발화와 관계되는 인간의 요소들을 살피고, 발화될 때 인간의 각 요소들에게 발생하는 현상을 기술한다. 셋째 항은 그런 인간의 본질적인 가능성을 파괴 내지는 왜곡시킨 죄가 어떤 것인지를, 그리고 그 죄의 결과들을 통해 방언을 해석한다.

방언에 대한 이런 연구는 개혁주의적 인간론과 오순절주의적 인간론의 조화를 모색한다. 개혁주의적 인간론은 구원론 중심적이며 죄론으로 끝을 맺는다. 기존의 오순절주의자들의 인간론은 타락 전 인간의 본성과 타락 후 인간의 본성의 변화를 주로 논하는 구원중심적인 개신교의 전통과 차이점이 없었다. 구원 후의 성령의 인도와 방언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에 초점을 맞추는 오순절주의적 인간론을 새롭게 모색하고, 개혁주의 전통적 인간론과의 조화를 시도할 필요가 있다.

 

A. 방언과 하나님의 형상

 

인간이 방언을 통해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이 그렇게 할 수 있는 본질적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 가능성은 한 마디로 인간이 하나님과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나님의 형상(<yh!OA$ <l=x*)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1:27). 마키아는 방언을 하나님의 형상의 언어”(language of the imago Dei)라고 부연 설명 없이 규정하였다. 그리고 케렛은 방언의 하나님의 형상의 언어성을 성서신학적으로 설명하려 했다. 본 항은 방언의 하나님의 형상의 언어성에 대한 조직신학적 규명을 시도한다.

 

1. 방언과 실체적인 하나님의 형상

 

a. 방언과 내적인 하나님의 형상

 

방언은 인간이 내적으로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능하다. 방언은 인간의 내부로부터 발화된다. 방언이 발화되는 인간의 내부는 바로 인간의 영이다. 방언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내부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영으로부터 발화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실체적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내적 본성 안에 있는 심리적 영적 자질을 의미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은 존재적 관여(methexis)로서 신적인 의식과 내적 본성을 포함하, 하나님을 이해하고 바라볼 수 있는 내면적 능력, 영혼의 지성과 이성, 하나님의 영광을 반영하는 거울(reflection)인 인간의 영혼이라는 것이다. 인간의 내부에 있는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타인을 향해 방언을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께 방언을 통해 비밀을 말할 수 있다. 오순절운동이 폭넓은 지지를 얻은 것은 끊임없는 목적감과 의미를 추구하는 씨름인 원초적 영성”(primal spirituality)을 사람들에게 회복시켰기 때문이다. 하비 콕스(Harvey Cox)에 따르면, 그 원초적 영성은 전통적 용어로 하나님의 형상”(iamgo dei)이다. 그 원초적 영성에서 표출되는 것이 바로 원초적 발화”(primal speech), 방언이다.

 

b. 방언과 외형적 하나님의 형상

 

방언은 인간의 몸을 통해 발화된다. 방언은 인간의 내부에 있는 인간의 영에서 시작되지만, 인간의 외적 몸을 통해 비로소 발화된다. 인간의 영에서 그치는 것은 방언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사정을 아시는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을 통해 방언을 발하고 싶으셔도 인간의 몸의 일부인 발성기관이 움직여 소리를 내지 않으면 방언이 형성되지 않는다. 인간의 영에서부터 시작되지만 인간의 몸을 통해 발화될 때 비로소 방언이 된다. 방언은 인간이 몸의 발성기관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방언이 인간의 몸을 통해 발화될 수 있는 가능성은 인간의 영혼뿐만 아니라 인간의 몸도 하나님의 형상임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몸과는 관계가 없다고 본다고 할지라도, 인간의 영혼 특히 마음은 그 몸을 통해 반영된다. 교부신학자 중 일부가 아담과 이브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에 몸을 포함시킨 것은, 몸을 영혼의 감옥으로 간주한 영지주의에 대항하면서 형성되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이분화하고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의 외면적 인 것(imago in effigie), 즉 육체를 가리키며, 모양은 영적인 것(similitudo in aeternitate)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첫 사람의 몸은 완벽한것이었으며, 하나님의 형상에 포함되어 있었다. 육체적 닮음(corporeal resemblance)이란 개념은 구약성경에서 거부되지 않는다. 특히 창세기 5:3에서 아담이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고 한 것은 부자간의 외모의 유사성을 형상으로 표현한 대표적 구절이다. 몸을 포함한 인간의 전 존재(entire being)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의 전인성(whole man)은 인간의 영과 혼으로부터 인간의 몸을 도외시하지 않는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육과 피의 형상”(the flesh-and-blood image of the invisible God)이다.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내면적인 것에만 해당된다면 몸을 통해 발화되는 방언은 하찮은 것으로 평가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하나님의 형상의 고귀한 한 부분이며, 그래서 인간의 몸을 통해 발화되는 방언은 고귀한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의 영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의 외형적 측면인 몸이 말하는 것이다.

방언이 하나님의 형상인 몸을 통해 발화된다는 것은 입으로 말씀하시고 귀로 들으신다는 하나님의 형체성을 지지하는 것 같이 오해될 수 있다. 스트리트(R Larry. Overstreet)는 심지어 하나님 자신이 어떤 일정한 형태를 갖고 계시며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몸으로 닮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는 신학자들이 말하는 소위 신인동형론적 표현”(anthropomorphic expression)이 사실은 하나님의 일정한 형태성을 말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리고 그는 인간은 몸으로 그런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랍비문서 연구를 통해 랍비들은 하나님이 어떤 몸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한 마머스타인(Arthur Marmorstein)의 결론과 흡사하다. 고센 고트스타인(Alon Goshen-Gottstein)은 랍비문서들이 하나님의 형체성을 말하고 있다는 것에 동의하면서 하나님의 형체가 인간의 몸과 유사한 것이라며 신인동형론이라는 표현을 거부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체성에 대해서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한다. 성경의 하나님의 형체성은 존재론적(analogia entis)이라기보다는 유비론적이기 때문이다.

방언의 몸성은 인간의 몸에 대한 부정적 견해의 수정을 요청한다. 방언이 인간의 몸을 통해 발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몸을 배제하는 것이라는 몸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을 무색케 한다. 플라톤(Plato)은 비록 몸을 통한 감각적 인식이 영혼이 이데아의 세계로 나아가는데 자극적인 역할을 한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몸(sw'ma)을 비본래적이며 하등한 것으로 생각했다. 그의 몸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은 기독교 신학에 영향을 미쳤고, 기독교 신학의 주류는 몸을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했다. 오리겐(Origenes)은 선재했던 지성이 타락한 이후 그 벌로 몸에 갇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적게 타락한 지성은 천사의 몸에 갇히게 되었고, 많이 타락한 지성은 악마의 몸을 갖게 되었고, 천사보다는 더 타락하고 악마보다 덜 타락한 지성은 인간의 몸에 갇히게 되었다고 보았다. 토니 리히(Tony Richie)C. S. 루이스(C. S. Lewis)를 분석하면서 방언에 대해 전위”(transposition)란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인간의 몸, 즉 발성기관이라는 저급한 매체가 영적 경험이라는 고귀한 것을 표현하는 것을 전위 현상이라고 규정했다. 그런 그의 규정에는 하나님의 형상을 영혼만 포함시키고, 몸은 제외하는 편협한 이해가 자리 잡고 있다.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몸을 통해 발화하시는 방언은 그런 몸에 대한 부정적 견해를 깨뜨리고 있다.

방언이 입 등의 인간의 몸의 발성기관을 통해 발화된다는 것은 구약에서 인간의 머리보다 얼굴을 중요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얼굴은 구약에서 머리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앞쪽으로서의 얼굴에는 눈과 입, 귀 등 인간의 모든 전달기관이 다 집중되어 있다. 귀먹고 벙어리가 될 위험에 처해있는 자는 자기의 고유의 인간됨이 말살되는 것을 괴로워한다(38:24-15). 얼굴에 있는 들을 줄 아는 귀와 방향을 바로잡는 혀는 인간의 본질적인 기관이다(15:32; 18:21). 구약성경의 중심에서 하나님은 인간에게 들으라고 말씀하신다(6:4). 인간의 귀와 입은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통수단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귀를 주셨으므로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혀를 주셨으므로 하나님께 대답한다(5:4f).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을 고백함으로 그분의 백성이 되었다(19:7). 귀와 눈이 지각한 것을 말로 나타내주는 입은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보다 위대하게 만드는 기관이다. 인간의 언어활동에 입술, , 입천장, 목구멍 등의 기관들이 동원된다(19:18; 8:23; 6:30; 58:1). 인간의 몸의 호흡은 입으로 말을 할 때도 필요하며, 또한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때도 필요하다. 시편 기자는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외친다.

방언은 몸의 소리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방언은 인간의 혀를 포함한 발성기관과 청각기관, 즉 몸(수화방언에서는 손을 포함해)을 통해야만 하는 것이다. 방언을 통해 인간은 몸으로써 하나님과 교제한다. 바람 같은 하나님의 영은 인간의 몸의 폐에서 나오는 바람을 통해 소리를 내신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인간의 영이 혀를 포함한 몸의 발성기관과 협력해 폐의 바람을 통해 방언을 말한다. 몸은 하나님의 형상의 부분이기에 영과 함께 방언을 말하는 것에 동참함으로써 하나님과 사귐에 들어간다. 성령의 사귐 안에서 전인(全人)은 몸, 혼 그리고 영으로 이 땅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만약 몸이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면, 방언은 오직 영이 직접 하나님께 혀를 거치지 않고 말하는 것이 될 것이다. 몸도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영은 몸과 협력해야만 방언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언은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지시하는 징표가 된다.

 

2. 방언과 관계적인 하나님의 형상

 

a. 관계에서 발생하는 방언

 

방언은 하나님의 형상의 관계적 측면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인간의 홀로 분리된 이성적 능력에 의해 발화되지 않는다. 방언은 허공에 외치는 것이 아니다. 방언은 하나님과 또는 타인과 마주 대할 때 발화된다. 방언의 그런 관계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관계적 측면이다. 하나님은 안으로 삼위 간에 관계를 맺으며, 밖으로 피조물과 관계를 맺으시는 분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형상에는 관계적 측면이 존재한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과 인간의 대면 관계도 포함한다. 나와 너의 대면 속에 인간됨이 있으며 이런 인간됨 속에 인간의 창조주를 닮은 모습이 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는 존재론적 유사성(Analogia entis)이 아닌 관계론적 유사성(Analogia relationis)이 있다. 하나님의 형상의 수직적 관계성(vertical)은 하나님과의 관계성이며, 수평적 관계성(horizontal)은 인간과의 관계성이다. 방언은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관계(man’s relationship toward God)에서, 방언 통변을 통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관계(God’s relationship toward man)에서, 인간의 인간을 향한 관계(man’s relationship toward man)에서, 즉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됨에서 발생한다.

 

b. 하나님의 형상의 언어로서 방언

 

인간은 언어적 존재로 창조되었다. 인간은 말하는 것을 부여받은존재다. 인간의 언어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언어 신수설을 거부하고 인간이 스스로 언어를 획득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언어의 창조는 고차원적인 이성의 사용을 전제해야 하는 점은 인간의 언어가 언어적 존재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인간의 창조에 대한 어떤 전통들은 인간이 말하는 존재라는 것을 강조한다. 아람어 옹켈로스 탈굼(Aramic Targum of onkelos)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아담을 만드시고 그 얼굴에 숨을 불어넣으시자, 그 숨이 아담 안에서 말하는 영(al*l!m^m= j^Wrl! <d*a*b=)이 되었다고 쓴다. 팔레스타인 탈굼(The Palestinian Targum)은 아담이 귀의 들음과 눈의 봄에 더하여 그 몸 안에 말하는 영(a speaking spirit)의 영감을 갖게 되었다고 쓴다.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깨어났다.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말씀”(the absolute Word)이 말을 걸어옴으로써 비로소 깨어나기 시작했다. 언어적 존재이신 하나님께서는 창조하신 남자와 여자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1:28).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 . 다스리라.” 이 때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에게 이해되었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셨을 때 존재의 상태”(state of being)에 머물러 있던 인간이 비로소 존재의 역사”(history of being)에 참여하기 시작했. 아담의 말은 주로 존재와 이름 규정에 사용되었다.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 되었다(2:19). 비록 아담의 언어가 존재를 무에서 유로 창조해내지는 못하지만 존재하는 피조물들의 존재를 인정하며, 규정했다. 아담은 성소의 언어로”(the language of the sanctuary) 그 일을 수행했다. 아담의 여인을 보고는 시를 읊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하리라”(2:23). 첫 여자의 말은 뱀과의 대화에서 등장한다(3:2). 고대의 유대 문헌들은 거짓 혹은 진실을 수용하고 소통할 수 있는, 말하는 존재로 창조된 인간에 무게를 두었다.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 말씀을 말하도록 창조되었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고도의 언어 구사 능력에 있다. 촘스키(N. Chomsky)는 이 점을 잘 간파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은 무엇보다도 언어 구사 능력에 있다. 인간의 언어는 소리의 체계와 의미의 체계가 분리/독립되어 있는 반면, 동물의 신호는 소리와 의미가 한 덩어리로 되어 있어서 둘을 구분할 수 없다. 인간의 언어는 새로운 문장을 언제나 창조해낼 수 있으나, 동물의 통신 내용의 목록은 선천적으로 규정된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다. 인간의 언어는 말의 소리와 그 소리가 상징하는 개념사이의 관계가 필연적이지 않다. 인간의 언어에는 동일한 사람이 메시지의 송신자와 수신자의 역할을 할 수 있는 교환성이 있는 반면, 동물의 언어는 그렇지 않다. 인간의 언어는 과거와 미래 및 가까운 곳과 먼 곳에서 일어났던 사항을 서술할 수 있는 전위(displacement)를 가지고 있으나, 동물의 언어는 현재와 현장에 관한 것을 통신하는데 국한되어 있다. 인간의 언어는 문화적으로 전달되고 동물의 신호는 유전적으로 결정된다. 발타자르의 말대로 인간의 언어는 동물적 잡소리들(animal noises)로부터 발전될 수 없다. 동물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귀와 심지어 혀까지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로 언어(speech)를 말할 수는 없다. 나아가 동물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할 수 없다. 언어적으로 동물보다 뛰어난 인간은 동물과 다르게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언어의 깨어남은 인간을 다른 모든 피조물로부터 구별지어준다. 물론 방언은 인간의 언어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지만 방언은 동물보다 뛰어난 인간의 언어 능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방언은 인간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언어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각인시킨다. 방언은 기본적으로 말하기이며(물론 그 말하기의 근원은 하나님이시다), 방언의 언어성은 하나님의 형상의 언어성에서 온다. 2세기경의 한 유대교 전통은 하나님께서 고차원적인 존재들의 네 가지 속성들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가르치는데 그 중에 한 속성이 말하기다. 인간의 언어 능력은 인간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1:27). 창조 기사에 등장하는 하나님의 특성은 말씀하시는 것이며,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됨은 말하기”(speech). 언어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형상의 언어적 측면은 방언을 통해 드러난다. 방언은 하나님의 형상의 언어”(language of the imago Dei). 언어 신비는 하나님의 형상을 간직한 인간성의 신비와 동일하다.

창세기의 기록은 인간이 태초에 발화된 하나님의 낯선 언어, “창조의 방언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유대교 전승은 아브라함이 바벨에서 언어의 혼잡과 더불어 잃어버렸던 창조의 방언”(the tongue of creation)을 말하면서 조상들의 책들”(the books of the fathers)을 공부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 모세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하나님의 창조적 방언을 알아듣고 창세기를 기록했다. 태초에 발화된 하나님의 창조적 낯선 언어를 인간의 익숙한 언어로 기록했다. 그런 능력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만 허락하신 능력이다. 모세는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해 태초의 하나님의 낯선 언어를 시간을 초월하여 들을 수 있었고, 그것을 자기에게 익숙한 언어로 옮겨 적었다. 인간은 모세를 통해 모든 피조물들과 다른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의 낯선 언어의 창조적 능력에 대한 가장 탁월한 증인이 된다. 인간은 창세기 1장을 읽고 하나님의 낯선 언어의 창조적 능력에 사로잡히며, 언어로 그 감동을 다른 피조물과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

 

c. 교제와 소통으로서 방언

 

방언은 서로 소통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관계성을 반영한다. 방언은 인간이 서로 교통하시는 인격적인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실 때 서로 교제하셨다. 삼위이신 우리우리가 사람을 만들자”(hc#u&n~, let us make)며 서로 소통하면서 인간을 만드셨다.하나님의 형상(<yh!OA$ <l=x*)은 곧 서로 소통/관계하시는 삼위이신 우리의 형상”(Wnm@l=x*, our image)이다(1:26). 방언의 소통적 관계성의 근원은 삼위 간의 끊임없는 소통적 관계성(unbroken relationship)이다. 인간이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서로 소통하시며 교제하시는 삼위 하나님의 형상이기에 가능하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인간이 삼위 간에 교제하시는 하나님과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교제의 길들 중에 하나다. 언어는 사물들에게 기호를 붙이는 것보다는 사람의 친밀한 참여를 위한 교제와 관련된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관계적 존재다. “”(Ich)는 고독에 의해서가 아니라 언어를 통한 ”(Du)와의 인격적 만남에 의해 실현된다. 근원어는 낱개의 말이 아닌 짝을 이루는 말로서 나와 너”(Ich und Du)이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대화의 상대자로 삼을 수 있으며, 집단 자체를 대화의 상대자로 삼을 수 있다. 자기 자신과만 대화하면 개인주의가 되며, 집단 전체와만 대화하면 집단주의가 된다. 진정한 대화는 나와 너의 독립적이며 어떤 선입견이나 목적이 끼어들지 않는 인격적인 상호 대화를 통해 공동체를 형성하는 소통으로서의 만남이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은 방언을 통해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 기도에 참여한다. 또한 인간은 방언 통역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인간은 방언을 통해 인격적인 성부와 성자와의 성령의 교통하심”(h& koinwniva tou' a&givou pneuvmato")(고후13:13)에 참여하는 것이다.

방언은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됨의 언어성, 몸성, 관계성을 드러낸다. 인간의 몸도 하나님의 형상에 속한다는 사실은 몸을 통해 발화되는 방언이 하나님과의 관계와 교제를 가능하게 하는 기초가 된다. 인간은 이성과 언어능력 등의 내적인 면에서, 몸이라는 외적인 면에서 그리고 나와 너 사이의 교제를 일으키는 관계적인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인간의 영혼과 몸, 즉 전인이 하나님의 형상과 관련되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교제는 영적이며 정신적인 것에만 그치지 않고 몸적인 것이기도 하다. 방언은 인간의 하나님과 대화를 통해 영적 관계, 언어를 유발시키는 인간의 내적 능력, 그리고 최종적으로 몸의 발성기관을 통한 표출을 통해 그런 하나님의 형상성을 잘 드러낸다. 몸을 통해 발화되는 방언은 그런 전인적인 하나님의 형상성, 나아가 전인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를 인간에게 경험시킨다.

 

B. 방언과 인간의 요소

 

방언을 말할 때 인간의 요소들에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본 항에서는 이런 질문들에 답하면서 인간의 구성요소들과 방언의 관계를 규명할 것이다.

 

1. 방언과 인간구성 삼분설

 

a. 인간 이분설을 재고시키는 방언

 

방언은 나의 영의 기도이며, 그것은 마음의 기도와 구별된다. 영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의 구별은 인간 이분설(dichotomous theory)을 재고시킨다. 칼빈은 인간이 영혼두 가지 요소로 구성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만드신 후 영혼이 그 안에 머물러 생명력을 지니게 하셨다고 말했다. 이분설(dichotomy) 주장자들은 내가 실로 몸으로(tw'/ swvmati)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tw'/ pneuvmati)는 함께 있어서”(고전5:3)라는 말씀에 기초한다. 마태복음 625절과 1028절에서는 몸과 혼이, 고린도전서 53절과 5절은 몸과 영이 인간의 기본적인 구성요소로 언급된다. 죽음은 혼을 포기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고(35:18; 왕상17:21; 15:26), 영을 포기하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한다(31:5; 23:46). 때로 혼이 인간의 자아 또는 생명과 동의어로 쓰이기도 한다(16:26). 영이 번민한다고 말하기도 하며(41:8; 13:21), 혼이 번민한다고도 말한다(42:6; 12:27). 웨슬리는 인간은 아무래도 세 가지 부분으로 성립될 수는 없다. 그런 것처럼 보일 뿐이다. 영혼은 질료이거나 질료가 아니거나 이다. 그 중간물은 없다며 이원설을 주장했다. 그러나 바울의 영의 기도(방언)과 마음의 기도의 구분은 그런 인간 이분설을 재고시킨다.

 

b. 인간 삼분설을 뒷받침하는 방언

 

바울은 영으로 기도(proseuvxomai tw'/ pneuvmati)마음으로 기도(proseuvxomai tw'/ noi?)를 대조시킨다(고전14:15). 그리고 방언은 영이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혀를 통해 말하는 것이므로 몸으로 기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방언에 대한 언급을 통해 마음,” 즉 혼과 혀, (swvma)이라는 인간 구성의 세 가지 요소가 드러난다. 이런 분석은 너희 영과 혼과 몸(toV pneu'ma kaiV h& yuchV kaiV toV sw'ma)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살전5:23)라는 말씀과 상응한다. 물론 영과 혼과 몸은 브룬너(E. Brunner)가 지적한대로 인간을 통전적으로 한 존재(a whole)로 만들지만 세 구성요소는 서로 구분된다. 방언은 삼분설(trichotomy)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

 

2. 방언과 인간의 영

 

a. “나의 영의 발화인 방언

 

바울이 언급한 나의 영을 성령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은사 방언은 나의 영(toV pneu'ma mou')이 말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14:14). 그런데 이 은사 방언을 말하는 나의 영성령으로 그릇 해석하는 사람이 있다. 리차드 B. 개핀(Richard B. Gaffin Jr.)이 그렇게 본다. “나의 영을 인간의 영혼으로 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자명한 것 같으나 마음영혼의 대조를 인간의 비지성적, 비사고적 측면과 이성적, 사고적 측면의 대조로 보는 것은 바울 서신 그 어느 부분에서도 그 근거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바울의 인간론을 속사람겉사람의 기본적인 구분(고후4:6, 7:22, 3:16) 면에서 개괄해 볼 때 영혼마음은 다 같이 속사람과 관계된다. 영혼마음이 근본적으로 동의어다. 더욱이 인간이 무엇을 전체적으로 추구하는 중심, 자아의식의 중심이 영혼이다. 이것은 하나님 안에서 성령의 활동과 비슷하다. 여기서 15, 16절의 병행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성령을 가리킨다. 개핀에게 마음의 대조는 성령과 방언자의 마음의 대조, 즉 방언은사에 나타난 성령의 활동과 방언자의 마음의 무활동의 대조이다. 개핀도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내 영내 성령으로 해석했을 때는 어딘가 어색하다. 성경 어디에도 성령을 인간의 소유 형태로 표현하지 않는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등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b. 인간의 영의 발화인 방언

 

그러나 여기서 이란 방언 말하는 자 자신의 영 곧 인간의 영을 가리키는 것이다. 여기서 쁘뉴마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방언을 말할 때에는 평상시 말할 때처럼 광범위한 사고는 일어나지 않는다. 말하는 것을 지배하기 위하여 보통의 지력이 작동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영이 성령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되며, 무슨 말로 방언을 말해야 할지를 알게 되며, 그것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된다. 방언을 말하는 자는 그가 이같이 말한 것을 이해할 수도 있고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 양자의 경우에 있어서 그 방언은 먼저 사고하기도 전에 입술에 이르게 되며, 이것은 그의 영에 영향을 미치는 직접적 충동에 기인한다.

개핀도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내 영내 성령으로 해석했을 때는 어딘가 어색하다. 성경 어디에도 성령을 인간의 소유 형태로 표현하지 않는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 혹은 그리스도의 영등으로 표현되고 있을 뿐이다. 각 번역서들을 살펴보면 에 대한 해석이 매우 혼란스러우나 일정한 맥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42절에는 성령으로 번역하였지만 14절과 15절에서는 나의 영으로 번역한 것도 있고(TLB, TB, GNB ), 2절에서 성령으로 번역하고 14절에서 내 심령으로 번역한 것도 있다(공동번역). 그리고 심지어 2절에서 성령으로 번역하고 14절에서 내 영이라고 번역했다가 15절에서 다시 성령(the Spirit)”으로 번역한 것도 있다(TB). NIVHB는 난하에 성령으로 번역할 수도 있다고 주를 달면서 14절과 15절에서는 내 영으로 번역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TB를 제외한 표본 번역서들 모두가 14절과 15절에서 (the spirit;혹은 내 영’)의 기도마음의 기도를 대조시키고 있으며, “영의 찬미마음의 찬미를 대조시키고 있다. 더욱이 KJV내 영내 이해(my understanding)”를 대조시키고 있다. 그리고 2절에서 성령이라고 번역한 공동번역과 새번역은 14절에서 내 영(혹은 심령)의 기도내 이성의 기도”, “내 영의 찬미내 이성의 찬미를 대조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표본 번역서의 대부분이 -- 2절에서는 성령으로 번역한 것들조차도 -- 14절에서 을 성령이 아닌 방언을 말하는 자의 영으로 번역하고 있다.

살펴본 바와 같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 영성령이 아니라 방언을 말하는 자의 영이라는 해석이 더욱 타당하다. 방언은 방언을 하는 자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께 인간의 영이 비밀을 말하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이기도 하다.

 

c. 영적 경험인 방언 

 

 

방언 경험은 무엇보다도 영적 경험(spiritual experience)이며, 영적 사귐의 경험(experience of spiritual communion)이다. 방언은 인간의 영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또한 방언은 하나님의 영이 홀로 말씀하시는 것도 아니다. 방언은 하나님의 영과 인간의 영이 사귀며 함께 발생시키는 것이다. 방언 경험은 하나님의 영이 말하라고 주시는 것을 인간의 영이 말함으로써 가능해진다. 누가에 의하면 방언은 성령께서 인간에게 말하라고 주시는 것이며, 인간이 말하는 것이다(2:4). 바울에게도 방언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며(고전12:11, 14:2; cf. 8:26-27), 인간의 영이 말하는 것이다(고전14:14-15). 칼 라너(Karl Rahner)도 올바르게 언급했듯이 영적 경험은 인간 외부에서 인간의 영에 대한 하나님의 일방적 행동의 결과가 아니. 적 경험은 영이신 하나님과 인간의 영의 만남과 사귐(meeting and communion)의 결과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 경험은 행동하시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대한 사실적이며, “구체적 지식”(concrete knowledge)이다. 방언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을 만나고 사귐으로서 가능해진다.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을 감지하고, 하나님의 영과 교통하면서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방언을 받고서 방언을 말한다. 그래서 방언은 기본적으로 영적 경험이다. 시무어는 심령에 대한 성령의 능동적이고 직접적 역사를 말한다. 그에게 성령침례는 심령 안에 임하시는 성령 안에 잠기는 것이다. 그에게 방언 경험은 성령께서 심령에 임하셔서 사람의 영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심으로써 가능하다.

 

바람은 언제나 성령이나 생명을 상징합니다. 바람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 했습니다.” 구원의 강물이 흘러들어와 그 장소 전체를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자 그들 모두는 성령에 잠겨 침례를 받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방언으로 말하는 것에 너무 관심을 쏟지 말고, 성령께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말하게 하십시오. 그러면 방언은 우리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유롭게 올 것입니다.

 

d. 방언과 지혜

 

방언 경험은 성령에 의한 내적인 경험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어거스틴의 지혜”(sapientia)와 관련된다. 어거스틴은 일찍이 외부 사물의 자극에 대한 감각기관의 반응에 의한 경험으로부터 오는 이성의 일시적 인식을 열등한 지식”(scientia)이라고 명명했다. 그리고 그는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정신의 봄(ad-spectus mentis)을 통한 이성의 인식을 우월한 지혜”(sapientia)라고 명명했. 방언 경험은 기본적으로 내부에서 시작되는 영적 경험이므로, 어거스틴의 분류에 따르면 방언 경험은 월등한 지혜와 관련된 경험이다.

 

3. 방언과 이성

 

a. 초이성적인 방언

 

방언은 초이성적(super-rational)이지, 탈 이성적(ex-rational)인 것이 아니다. 방언은 사람이 의식적으로 또렷이 발음할 수 있는 능력과 이해력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방언이 말해질 때 이성이 제 기능을 상실하지는 않는다. 이성은 영에 의해 방언이 발화되는 것을 귀를 통해 듣고 있다. 랍슬리(J. N. Lapsley)와 심슨(J. H. Simpson) 같은 사람들은 방언이 심리적 황홀경, 몽유병, 무당의 입신, 무의식 상태에서 글을 쓰는 것 등과 유사한 행동이라고 오해한다. 일종의 모든 자율신경들이 의식의 지배에서 벗어난 상태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적 자동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비록 바울이 방언으로 말할 때 우리의 마음이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말했지만(고전14:14), 방언은 무아지경/황홀경(ecstasy), 무의식에서 발화되지는 않는다. 바울이 강조한 질서는 이성의 활동을 전제로 한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정신 곧 이성을 잃어버리는 상태를 유발시키지 않는다. 또한 방언 상태는 인류학적으로 자극에 대한 민감성이 저하되고, 무엇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지식의 상실을 의미하는 트랜스”(trance) 상태가 아니다. 칼란(Terrance Callan)은 예언을 트랜스가 아닌 상태에서 예언하는 자가 성령의 영감을 받아 자기 이성으로 말하는 것으로, 방언을 트랜스 상태에서 발화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는 잘못 판단했다. 방언은 이성을 초월하여 발화되고 있는 것이지, 이성을 상실시키며 발화되지는 않는다. “황홀경에 도취된 말은 탈이성적인 발언을 의미하는 반면에 각종 방언을 말함은 지성을 초월한 매우 영적인 언어이다.

이분설은 방언을 트랜스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설이다. 인간의 구성을 영혼과 몸, 두 요소로 보는 사람들은 방언을 트랜스 현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관점에서는 성령이 말하게 함으로 영혼이 몸을 움직이며 말을 해야 하므로 몸과 영혼 사이에 중간 요소가 없다. 그들은 성령이 영혼을 점령하여 몸을 통해 말하면 인간에게는 능동적 요소가 남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의 언급에 의하면 비록 인간의 영과 몸이 성령에 의해 수동적이 된다고 할지라도, 그의 마음, 이성은 능동적으로 그의 몸을 통제할 수 있다.

 

b. 방언 발화와 이성의 불참여성

 

방언을 말함은 기본적으로 이성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수동적으로 만들거나 비활성화시키지는 않는다. 방언은 기본적으로 인간의 영이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것을 그 몸의 발성기관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성은 방언을 말하는 자체에는 참여할 수 없다. 방언은 영적 영역, 융 학파의 용어로는 집단무의식(collective unconsciousness)에 직접적으로 접근하기위해서 이성적이고 의식적인 방어를 완화시키는 것이다. 방언의 발화는 이성적 방어가 해제된 가운데 진행된다. 방언 발화자의 이성은 방언의 내용에 무언가를 더하거나 방언의 성격을 바꾸거나 할 수 없다. 이러한 이성의 불참여성(nonparticipation)은 수동성(passivity)과는 다르다. 이성이 수동적이 되어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방언은 이성을 비활성화시키지도 않는다. 방언 자체는 이성의 불참여성을 요구하지만, 방언을 하기 시작하고 끝내는 통제와 조절은 활성화된 이성을 요구한다. 방언을 말할 때 이성은 적극적으로 활동한다. , 이성은 영이 발성기관을 통해 방언을 말할 때 귀를 통해 방언을 듣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성이 방언을 듣고 있다가 질서가 필요한 시점에서 끝냄으로써 방언을 통제 혹은 조절(control)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방언을 무아지경”(ecstasy)에서 발화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방언 말함에 있어서 이성의 불참여성을 그렇게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c. 방언과 영의 자유와 이성의 통제

 

방언은 영의 말하는 자유(the freedom of spirit)와 이성의 통제(the control of reason)라는 얼핏 모순된 두 요소의 조화를 통해 적절해진다. 방언은 무아지경으로 오해될 정도의 영의 자유로운 발화이다. 물론 영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을 그대로 말할 때 수동적이다. 그러나 영은 방언에 있어서 능동적이기도 하다. 영은 하나님께 자기 비밀을 말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을 찬양할 때 능동적이다. 영이 방언으로 기도하며 찬양할 때 영은 자유롭다. 그러나 영의 자유로운 방언은 이성의 통제를 받는다. 윌슨(R. Wilson)엑스터시”(ecstasy)를 그것에 의해 신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이 발생하는 수단, 또는 한 인간이 신적 세계와 소통 중에 있을 때 가시적으로 표출되는 행동적 특성으로 정의한다. 그리고 그는 다른 영과 인간의 의사소통의 기본적 방법을 두 가지로 요약한다. 그에 따르면, 첫 번째 방법은 어떤 영이 인간의 몸 안에 들어가 그 몸을 통제함으로써 소통이 발생한다. 그리고 다른 방법은 인간의 영혼이 그 몸을 떠나 영들의 세계를 여행함으로써 소통이 발생한다. 두 번째 방법은 확실히 방언이 발생하는 방법이 아니다. 방언은 발화자의 몸 안에 있는 발화자의 영이 발화자의 몸(발성기관)을 통해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방법은 일단 어떤 영이 한 사람의 몸 안에 들어가는 것에 있어서는 방언이 발생할 때와 유사하다. 왜냐하면 방언은 성령께서 한 사람의 몸 안에 들어가심으로써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방언을 말할 때 그 사람의 몸을 통제하는 것은 들어온 영인 성령이라기보다는 그 사람의 영, 혹은 이성이다. 그래서 누가에 따르면 오순절날 방언을 말했던 사람들은 성령이 말하도록 주신 것을 그들이 말하기 시작했으며(2:4), 바울에 따르면 방언은 그 사람의 영이 하나님께 말하는 것이고(고전14:2), 이성이 방언을 통제하여 차례를 따라 말하여 질서를 유지한다(고전14:27). 바울은 예언하는 자들의 영들이 예언하는 자들에 의해 제재를 받는다고 말한다(고전14:32). 예언하는 자 안에 들어오신 성령이 제재를 받는 것이 아니라 예언하는 자의 영이 제재를 받는다. 그의 말은 방언에도 적용될 수 있다. 방언을 말하는 자 안에 들어오신 성령이 제재를 받는 것이 아니라 방언을 말하는 자의 영이 통제를 받는다. 방언 하는 자의 영은 방언하는 자의 이성에 의해 통제된다.

 

d. 영과 이성 사이에서 발화되는 방언

 

방언은 영과 마음의 이성 사이의 몸을 통해 발화된다. 그것은 마치 예술이 상상과 이해사이의 신체를 통한 놀이와 유사하다. 예술은 어떤 대상이 우리의 감각 또는 감수성(sensibility)에 주는 영향력에 대한 상상(imagination)과 이해(understanding) 사이의 자유스런 놀이(free play)일 수 있다. 그리고 예술은 무언가 영적인 것에 대한 표현(expression)으로 간주될 수도 있다. 예술은 영적인 것과 이성적인 것의 중간 영역 안에 설정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술은 이성적이라기보다는 영에서 발생하는 감흥을 몸을 통해 발산하는 것일 수 있다. 이런 예술이해는 방언의 구조와 상통한다. 방언은 영과 마음/이성 사이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영에서 발생하는 것이 이성을 직접 거치지 않고, 그러나 이성의 통제 하에 몸을 통해 발화되는 것이다.

 

4. 방언과 정서

 

방언 경험은 감정(emotion)을 동반하기도 한다. 감정주의(emotionalism)의 목적은 감정 체험 그 자체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의 방언 경험은 감정만을 위한 경험이 아니다. 방언을 통한 오순절적 경험은 살아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이며, 사람의 마음에 정서적 각성”(an emotional wake)을 남긴다.

 

a. 방언에 동반되는 정서적 경험의 정당성

 

방언에 때때로 동반되는 정서적 경험은 종교개혁 전통 안에서 정당한 것이다. 방언 경험은 감정주의로 낙인 찍혀왔다. 하지만 정서적 경험은 종교개혁주의 전통에서처럼 중생에도 동반되는 것이므로 방언 경험을 감정주의로 낙인찍지 말아야 한다. 루터에게 신앙은 마음의 신뢰 경험이었다. 그는 복음에 의해 계시된 하나님의 의는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 해주시는 수동적 의인 것을 깨달으며 완전히 모든 것이 새롭게 태어나서 낙원에 이른 것처럼 마음에 느꼈다.” 그런 루터에게 신앙은 단순한 이성의 지적 찬동을 넘어서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신뢰의 경험이었다. 루터는 믿음의 경험을 성령의 역사로 돌렸다. 루터에게는 성령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이해를 받지 않는다면 아무도 하나님이나 그의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 없다. 루터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공로를 깨닫도록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그 공로를 받아들이고 지키도록 도우시기 위해 믿음이라는 내적인방편을 사용하신다고 말한. 런 내적 성령 체험을 구원론적 경험”(Salvific experience)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멜랑흐톤(Philip Melanchthon)은 원죄를 마음의 성향(affection)의 문제요 구원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성향의 변화로 이해했다. 그는 원죄를 아담으로부터 모든 후손들에게 유전되는 범죄행위로 이끄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생득적 충동 또는 힘으로 정의했다. 원죄의 힘은 마음의 악한 성향들, 즉 탐욕, 공명심, 증오감, 시기심, 질투심, 쾌락의 불꽃, 분노, 오만불손, 교만, 위선, 하나님 경멸, 하나님 불신, 신성모독 등에서 느껴진다. 그에게 죄는 하나님의 법을 거스리는 전도된 마음의 성향이요 왜곡된 마음의 움직임이다. 멜랑흐톤에게 믿음은 성령의 역사로 마음에서 경험되는 성향의 변화다. 믿음은 복음 혹은 인간의 선악간의 행위를 고려하지 않고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신뢰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경험이다. 성령님의 사역은 마음을 거듭나게 하시고, 마음에 믿음, 소망, 평화, 기쁨, 사랑이라는 성향을 일으키셔서 거룩하게 만드신다.

칼빈(Jean Calvin)에게 신앙은 인식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경험이었다. 그에게 신앙의 출발점은 지식이지만, 그러나 그 완성은 대립되는 의심을 전혀 허용하지 않는 확실하고도 안정성 있는 마음의 확신 경험이다. 칼빈의 신앙은 먼저 인식에 기초했다. 그리스도를 통한 화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자비로우신 아버지가 되셨으며(고후5:18-19),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의와 성결과 생명으로 주셨다는 것을 지적으로 알 때, 구원을 얻게 된다. 칼빈의 신앙은 또한 마음의 정서적인 경험을 포함했다. 칼빈은 루터처럼 극적인 것은 아니었지만 1523년 회심을 경험했으며, 후에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것을 갑작스런 회심”(a sudden conversion) 경험이었다고 회고 했다. 그에게 회심은 하나님에 대한 순수하고 진지한 두려움이라는 마음의 감정 경험으로부터 일어나는 전향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이 두뇌의 꼭대기에서만 날아다닌다면 믿음으로 받아들여 지지 못한다. 말씀이 심령 깊은 곳에 뿌리를 내려 신뢰가 되어야 한. 칼빈에게 믿음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다. 믿음은 성령께서 행하시는 가장 중요한 역사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마음과 심령은 들어 올려져 이해력을 초월하는 경지에까지 이르게 된다. 성령은 마음에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열정적인 헌신의 불길을 일으키신다. 그래서 성령은 또한 불이라고 불린다(3:16).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에게 신앙의 좌소는 마음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참된 신앙은 대부분 거룩한 감정(affection) 안에 있다고 주장했. 에드워즈는 대체적으로 마음에서 일어나는 상당한 감정적 두려움이 구원의 경험에 앞선다고 주장했다. 그 두려움과 고민은 하나님의 공의와 심판의 무서운 진리를 인식할 때까지 커진다. 사람들은 대개 이런 충격을 받은 다음에 주님을 알게 되며, 그 때 주님은 빛처럼 나타나시며, 때에 따라 그 빛은 영혼을 사랑, 흠모, 기쁨 등으로 채우며 다가온다. 에드워즈는 감정적 경험이 성령님의 진정한 사역일 수 있기 때문에 회심경험들을 무조건 비판하지 말 것을 호소했다.

세일러(D. E. Saliers) 기독교 신앙은 심오한 감정의 한 유형(a pattern of deep emotions)이다. 기독교 신앙은 창조와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의 언급은 종교개혁 전통과 미국 부흥운동을 관통하여 흐르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은 내적이며 감정적인 구원론적 경험관을 잘 요약한다. 그러므로 개신교사람들은 방언 경험이 감정적 경험을 동반한다는 점을 비판하지 말아야 한다.

 

 

b. 방언에 동반되는 정서적 경험의 신적 기원

 

방언을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심리적 반응으로 격하시키려는 시도들이 있다. 메츠(D. S. Metz)는 방언을 마음에서 일어나는 심리적 반응일 뿐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방언이란 심리적 현상에서 유발된 인간 스스로 일으킨 반응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커튼(G. B. Cutten)은 방언을 이상심리 중 하나로 판단했다. 그는 방언을 히스테리(발작증), 심리적 황홀경, 또는 강경증(catalepsis) 등과 유사한 이상심리 상태 중의 하나로 분류했다. 그런데 커튼은 한편으로 방언 현상에 대한 그런 심리학적인 판단을 내렸지만, 다른 한편으로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를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방언에 동반되는 정서의 기원은 하나님이다. 방언의 근원은 심리적 정서 자체가 아니고 바로 성령과 인간의 영과의 영적 조우(spiritual meeting)와 사귐(spiritual communion)이다. 무한한 하나님과의 진정한 영적 만남은 사람의 삶에 정서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방언 경험은 그 전에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친밀하고 깊은 하나님의 임재 경험이다. 방언에 동반되는 정서적 경험이 다른 일반적인 정서적 경험과 다른 것은 그것의 영적 근원에서 기인한다.

 

c. 신적 감정 표출로서 방언

 

방언을 억압되었던 인간 감정의 표출로 곡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오우츠(W. E. Oates)는 방언현상을 억제되었던 감정의 표출로 이해했다. 그는 방언은 정신 깊숙이 느껴오기는 했지만 오랫동안 표출하지 못하고 억눌렸던 감정들이 돌파구를 얻어 표출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오우츠에게 방언은 심리적으로 병든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억눌렸던 종교 감정을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있는 형태로 전달할 수 있는 일종의 돌파구를 제공하는 것이다.

올바르게 말하면 방언은 신적 감정의 표출이다. 바울은 방언을 인간 안에 억눌렸던 감정의 표출이 아닌 성령 하나님의 탄식으로 이해했다. 그는 성령께서 신자 안에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고 말한다(8:26-28). 탄식”(groaning)은 일반적으로 방언에 동반되는 경험의 한 측면으로 간주된다. 방언은 인적 감정 표출”(human emotional expression)보다는 신적 감정 표출”(divine emotional expression)이다. 헤리 메이슨(C. H. Mason)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탄식 같은 방언을 경험했다. 그는 방언을 말하면서 죽어가시는 그리스도처럼 탄식하기(groan) 시작했으며, 완전히 자기 자신이 죽은 것 같이 경험을 했다. 무어의 주도로 로스엔젤래스 아주사거리에서 일어났던 오순절 집회에서는 방언과 함께 기쁨으로 인한 웃음의 감정이 경험되기도 했다.

 

우리는 블라스꼬 형제(Bro. Blassco)가 있는 곳에 그를 만나러 갔다. 주님께서 그 예배 가운데서 놀랍도록 은혜를 주셨다. 죄인이 구원받았고 . . . 성령 침례를 받았다. 주님께서 그녀의 입을 거룩한 웃음으로 채우셨고, 그녀는 새 방언을 말했으며, 주님의 능력 아래서 기쁨과 즐거움으로 가득 찼다.

 

5. 방언과 신체적 경험

 

a. 신체적 경험으로서 방언

 

방언 경험은 신체적 경험(physical experience)이기도 하다. 방언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이 말하도록 주시는 것을 성대와 혀, 입 등의 신체를 통해 발화하는 발성기관적 경험(vocal organic experience)이다. 방언은 성령의 권능에 의해 흙으로 만들어진 입(lips of clay)을 통해 말해진 하나님으로부터의 진정한 메시지다. 생명의 성령께서 들어오실 때, 마음속에서의 성령의 능력을 통해 입이 열리므로 방언 경험은 신체적인 것이다. 대 기독교인들은 물질-영의 이원론(matter-spirit dualism)에 빠져 영적으로 되는 것에는 신체적 측면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지만 성령의 임재는 신체적 나타남(physical manifestations)들도 동반한다. 하나님에 대한 경험은 내적인 요소와 외적 요소를 포함하는 것이다. 방언으로 하는 기도, 예언의 증언, 손을 높이 들거나 박수를 치며, 무릎을 꿇으며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땅 바닥에 던지며 춤을 추는 행위를 통하여 인상적으로 나타나는 몸 언어(body language)는 카리스마적 부흥운동의 모임에 나타나는 특징이다. 스티븐 J. 랜드가 성령의 역사와 인간의 몸 사이의 관계성에 주목했지만 방언의 신체성은 언급하지 않고, 찬양 시의 손듦, 속죄와 안수에 의한 신유, 침례, 주의 만찬 등의 교회 의식에 참여 등에만 집중한 것은 유감스런 일이다. 오순절운동은 무엇보다 방언이라는 신체적 동작”(motoric movement)을 강조한. 언은 단순한 감각 경험”(sensory experience)을 넘어서는 복합적이고, 폭넓은 신체적 경험인 것이다. 방언 경험은 웨슬리와 그의 추종자들이 경험했던 구원적 경험의 감정적 경험을 넘어선다. 감정 경험은 모호하다. 그런데 방언 경험은 감정 경험 보다 더 나은 것(par excellence)으로서 감정의 모호성을 제거한.

방언 경험은 어거스틴의 지혜”(sapientia)가 미쳐 담아내지 못한 신체적 경험에까지 연장된다. 어거스틴은 감각적인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지혜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방언 경험은 어거스틴이 제외했던 신체적 경험을 포함한다. 이 지점에서 방언 경험은 베이컨이나 로크의 외부적 자극에 대한 감각을 통한 지식과 관련된다. 베이컨(Francis Bacon)은 지식의 확대에 기여하지 못하는 연역적 삼단논법이 아니라, 실험과 관찰에 기초를 둔 경험적 귀납적 방법을 중시했다. 그에게 인간은 자연에 대해 관찰하고 고찰한 만큼만 이해할 수 있는 존재다. 그의 진리 탐구 방법은 감각과 개별자에서 출발하여 궁극적으로 가장 일반적인 명제에까지 도달하는 방법이다. 그는 감각이야말로 진리를 증명하고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감각이 언제나 직접적으로 진리를 증명하고 전달하는 것은 아니지만, 감각은 비교나 도구의 도움을 받아 진리를 전할 수 있다. 그런데 방언 경험은 베이컨이 담아내지 못한 내적인 자극이나 만남에서 촉발되는 감각 기관을 포괄하는 신체적 경험이다. 방언 경험은 영적 경험에서 출발하여 때로 정서적이며 청각 기관, 발성 기관, 시각 기관에 경험되는 신체적 경험이다.

 

b. 활성화되는 신체 경험

 

방언은 때로 신체를 활성화시킨다. 시무어의사도신앙(The Apostolic Faith)은 방언과 관련하여 활성화되는 신체적 경험을 자주 보고했다. 한 시카고의 전도자에게 190731일 금요일 저녁에 성령의 강력한 능력이 임했다. 그의 몸은 거의 세 시간동안 그 능력아래서 경련과 진동을 일으켰다. 그는 그것이 낯설지만 놀랍고도 영광스러운 것이었다고 적었다. 그때 성령께서 그의 온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셨다. 한 번에 한 부분을, 처음에는 두 팔을, 그리고 손발을, 그리고 몸통을, 그리고 머리를, 그리고 얼굴을, 그리고 턱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32일 토요일 새벽 한 시 즈음에 발성 기관들을 움직이셔서 방언을 말하게 하셨다. 그는 자신의 의식이 완벽하게 깨어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살아계시는 한 인격이 자기 안에 들어오셔서 자신의 신체(physical being)를 점유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의식했다. 오순절운동 안에서 완성된 사역”(The Finished Work)을 일으켰던 더함(William H. Durham)의 방언을 통한 신체적 경험도 이채롭다. 그는 자신의 목은 넓어지기 시작했고 발성 기관들이 어떤 다른 모양으로 끌려 움직여지는 것을 느꼈다. 최후로 그는 자기의 혀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입술들이 이상한 소리들을 내기 시작하는 것을 느꼈다.

 

c. 비활성화되는 신체 경험

 

방언은 때로 신체를 비활성화 시키기도 한다. 시무어의사도신앙(The Apostolic Faith)은 방언에 동반되는 경련과 진동처럼 신체가 활동적이 되는 경험도 보고했지만, 신체가 비활동적이 되는 현상도 보고했다. 하나님의 권능 아래에 쓰러짐(falling down under the power of God), 말을 하지 못함(speechlessness), 움직이지 못함(unable to move) 등이 그런 현상들이다.

 

d. 회심경험의 신체성과 방언경험의 신체성

 

회심 경험은 신체적 측면을 동반하기도 한다. 회심중심의 부흥운동을 주도했던 에드워즈는 정서적인 회심 경험이 격할 때는 육체에까지도고통스러운 영향을 주는 일이 흔하다고 증언했다. 그는 그런 회심에 동반되는 신체적 경험의 예로 갑작스런 웃음, 눈물, 큰 소리로 찬양 등을 들었다. 에드워즈는 떨림, 펄쩍 펄쩍 뜀, 꼬꾸라짐, 뒹굶, 창백해짐과 더불어 날카로운 비명, 기절, 경련, 아픔, 기력이 빠짐 등도 언급했다. 그는 그런 신체적 현상들이 구원을 위한 것이라면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보았다. 신체적 경험을 동반 한다는 점에서 구원적 경험과 방언 경험은 유사하다.

이와 대조적으로 방언 경험은 신체적 측면을 반드시 동반한다. 구원적 경험은 신체 경험을 반드시 동반하지는 않지만, 방언 경험은 반드시 신체적 경험을 동반한다(적어도 발성기관의 움직임을 경험한다). 두 경험은 이 점에서 서로 차이를 드러낸다. 또한 구원적 신체경험은 반드시 죄에 대한 각성과 그 죄의 회개에 동반되는 경험이며, 방언적 신체경험은 그 각성과 회개를 전제로 삼으며, 회개를 반드시 동반하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두 경험은 다르다. 그래서 시무어는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씻음 받아 거룩하게 된 그릇에 대한 회개 없이 값없이 주시는 은사로 이해했다.

 

C. 방언과 죄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죄를 짓는 존재가 되었다고 규정한다. 본 항은 인간의 다양한 발화와 인간의 죄와의 관계를 논의한다. 이 논의는 다음 장에서 시도될 구원을 통한 방언 해석의 기초를 제공한다.

 

1. 하나님의 언어 불순종

 

a. 첫 죄인 하나님의 언어 거부

 

인간의 첫 죄는 하나님의 언어를 거부한 것이었다. 인간의 첫 죄는 하나님과의 언어적 관계를 인간이 깸으로서 발생했다. 인간의 첫 번째 죄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disobedience)이었다. 바울은 인간의 첫 번째 죄를 불순종”(parakohv)이라고 정의한다(5:19).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하나님의 언어를 명령으로 받았다. 그러나 첫 아담은 그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다. 물론 어거스틴은 인간의 죄를 교만과 연결시켰다. 그러나 인간의 첫 죄는 하나님의 언어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이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사단의 거짓 언어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언어를 의심하게 하고 결국 거절하게 만든다.

불순종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깨뜨렸다. 불순종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숨게 만들어 하나님과 대면하지 못하게 한다. 첫 아담은 하나님의 언어를 거절한 후 하나님을 피해 나무 뒤로 숨었다. , 하나님의 언어에 대한 거부는 하나님과 관계의 균열을 초래했다.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는 인간이 하나님의 언어를 거부함으로써 원수의 관계로 변했다.

언어적 관계의 깨짐이라는 첫 죄는 계속 다른 언어적 관계들의 깨짐을 유발시켰다. 아담은 하나님의 추궁의 말에 대해 여자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말을 함으로써 여자와의 관계에 상처를 입혔다. 그리고 여자는 다른 피조물에게 책임 전가의 말을 발함으로써, 인간과 피조물 사이의 언어적 관계의 단절을 일으켰다. 여자는 뱀의 언어는 뱀의 배후에 있는 사단이라는 영적 존재의 언어였음을 간파하지 못하고, 자기와 사단이 아닌 뱀에게만 책임을 전가함으로써 피조물과의 언어적 관계를 단절시켰다.

 

b. 바벨탑과 하나님의 언어 거부

 

하나님의 언어 거부라는 인간의 죄는 바벨탑 사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나님께서는 대홍수후 노아와 그 자손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9:1)고 명령하셨다. 그런데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에 머물렀다. 꼭대기가 하늘 속으로 들어가는 탑(<y]m^V*b^ ovar)w+ lD*g=m])을 쌓자고 합의하고 그 탑을 쌓기 시작했다(11:4). 그런 탑을 쌓는 이유 중 하나는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언어에 대한 인간의 거부라는 첫 번째 범죄의 경향이 여기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기독교 전통은 바벨 이야기에 드러나는 인간의 죄를 하늘에 도달하려는 인간의 교만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유대교 전통은 그것을 흩어지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부로 보아왔다. 바벨탑 사건은 땅에 충만하라(Wal=m!W), 땅을 채우라는 하나님의 명령과 함께 이미 주어진 한 권의 책 속 연속적 사건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사람들은 그 명령을 어기고 한 곳에 모임으로써 땅에 흩어지려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하늘 안으로 그 꼭대기가 들어가는 탑을 쌓아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실 제2의 대홍수에 대비하려 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사람들에게 무지개를 보여주시며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지라라고 약속하셨다(9:15). 그런데도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제2의 대홍수를 내리실 것으로 지레짐작하고, 그 홍수가 났을 때, 그 탑을 통해 하늘로 피신하려 한 것이다. 그래서 그 꼭대기가 하늘 안으로 들어가는 탑 쌓기는 하나님에 대한 불신의 표였으며, 하나님의 명령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의 표였고, 인간의 죄를 나타내는 표였다.

 

2. 인간의 다양한 언어들

 

a.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언어의 혼잡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다루시기 위해 하나였던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 유스토 곤잘레스(Catherine and Justo Gonzalez)가 잘 지적한대로 바벨탑 이야기는 언어와 의사소통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그런 탑을 쌓자고 함께 모의하며, 그것을 쌓을 수 있는 것은 모든 인간이 한 구음(<yd]j*a& <yr]b*d=), 한 언어(tj*a# hp*c*)로 회의하고 협동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셨다(11:6). 그래서 그 탑 쌓기를, 인간의 죄를 중단시키기 위해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t*p*c= ll^B*) 하셔서 사람들 사이의 대규모의 일을 계획하고 실행하기 위한 의사소통의 길을 차단하셨다(11:7). 의사소통이 되지 않아 대규모 탑을 쌓을 수 없게 된 사람들은 의사소통이 되는 언어를 중심으로 소규모 집단을 이루고 각기 지면에 흩어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탑 이름을 바벨(lb#B*)이라고 명명하셨다(11:9).

하나였던 인간의 언어가 많아진 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었다. 인간의 언어는 하나님에 의해 다양해진 것이다. 다양한 인간 언어는 다양한 개인의 창의성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인간은 다양한 언어를 원하지 않았다. 인간에게 다양한 언어는 의사소통이 무너진 혼란”(disorder)이었고, 하늘에 다다르지 못한 좌절(discouragement)이었고, 하나 됨이 깨진 분열(division)이었다.

인간 언어들의 다양성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인간에게는 혼잡과 좌절과 분열이었다는 점은 오순절날 일어났던 방언 역사의 배경이 된다. 오순절날 어떤 사람들은 다른 방언들”(other tongues)을 알아듣지 못하고, 그 것을 새 술 취한 사람들의 지껄임으로 여겼(2:13). 그들에게 다른 방언들은 혼란에 불과했다. 찰스 F. 파함은 일찍이 이런 점을 간파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바빌론에서 여러 방언들의 목적은 인간이 만든 길(바벨탑)이 하늘에 닫는 것을 막는 것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다양한 방언들의 내림은 이 현대 바빌론과 그 개혁주의 딸들을 완전히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바벨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획일성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바벨에서의 하나님의 심판은 분산 명령에 대한 인류의 불순종의 죄에 대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인류의 획일적이고 억압적인 단일성 추구라는 죄에 대한 심판이기도 했었다. 인류의 분산(dispersion)은 원래 하나님의 의도였다. 하나님께서는 인류를 온 지면에 분산시킴으로써 다양한 방언들과 문화들을 통해서 생명의 주로서 한 분 하나님을 찾는 복을 주시는 것을 계획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하나님께서 멀리 계획하신 복을 바라보지 못하고, 근시안 적으로 흩어지지 않고 자기 섬김적(self-serving)이고, 억압적이고, 획일적이고, 우상숭배적인 단일성아래서 안전을 확보하려는 인류를 심판하셨다. 바벨 이야기는 정치/문화적으로 억압하는 한 집단과 억압받는 집단들 사이의 이야기로 설정하여 하나의 구음을 어떤 억압적인 한 집단이 정치/문화적으로 다른 집단들을 하나의 언어를 강요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런 해석은 창세기의 바벨탑 기사를 언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으로 보고, 그 기원을 앗시리아의 정치문서로 삼는다. 사르곤 2세의 비문(inscription)에 사람들을 통치하기 위해 한 언어를 말하게 하고, 건물을 짓게 하는 계획이 기록된 것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집단이 어떤 집단들을 억압 했다기보다는 시날 평지에 모였던 모든 사람들이 그 사건을 공모했다고 밝힌다. 바벨이야기는 인간의 집단 간의 투쟁이 아니라 분산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에 관한 것이다. 인간이 획일성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다양성을 일으키셨으며, 인간은 어떤 중심을 구했지만, 하나님께서는 흩어버림으로 맞서셨. 그런 인류에게 분산과 다양한 언어들은 혼란과 분열과 좌절이었다.

 

b. 하나님의 심판으로서 낯선 말

 

방언은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기도 하다. 바벨론 왕궁의 벽에 써졌던 글에 대한 언급에서 그 근거를 찾을 수 있다. 바벨론 왕 벨사살이 연회를 베풀어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해온 금, , 동 잔으로 술을 마시고 신상을 만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왕궁 벽에 낯선 글을 썼다. 벨사살 왕과 술객, 술사, 점장이, 바벨론 박사들은 그 글을 해독하지 못했다. 그런데 다니엘이 그 글의 의미를 해독했다. “메네 메네 테켈 우파르신(/ys!r+p^W lq}T= an}m= an}m+). 달아 보니 함량 미달이라는 뜻이었다. 벽에 써진 낯선 글들은 벨사살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그 심판선언과 함께 바벨론은 메대와 바사로 양분되었다(5). 방언은 벨사살처럼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그분을 거부하는 자들에게 벽에 써졌던 글들처럼 하나님의 유죄판결에 대한 상징(condemnatory sign)이 된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되기도 한다. 바울에 의하면 각종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표적”(shmei'on toi'" a*pivstoi")이 된다(고전 14:22).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도들에게는 축복이 되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표적이 된다. 바울은 그러므로 방언은 믿는 자들을 위하지 않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위하는 표적이다”(고전14:22)라고 말한다. 이 말의 배경은 그가 자유로이 인용한 구약성경 이사야서라고 말할 수 있다. “율법에 기록된바 주께서 가라사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28:11). 하나님께서 방언으로 말씀하시지만 불신자들이 이 말씀을 일축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심판이 되는 것이다. 즉 그들은 더욱 더 그들의 불신앙으로 확고해지는 것이다. 방언은 신은 죽었다고 외치는 현대주의와 신학 앞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발성의 이적인 방언은 불신앙에 대한 심판이요, 도전이다.

 

c. 우상숭배로 이끌 가능성을 지닌 다양한 언어들

 

다양한 인간의 언어들은 우상숭배의 죄로 이끌어가는 길이 될 수 있다. 구약성경에서 바벨탑 이후 다양한 방언은 우상숭배의 문이 되어 단일한 여호와 신앙 공동체의 위기를 초래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포로기에 느헤미야는 본토에 와서 유다의 남은 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을 재건했다. 성을 재건한 느헤미야는 유다 공동체의 신앙생활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그는 유다 사람들이 아스돗과 암몬과 모압 여인을 취하여 아내를 삼았는데 그들이 낳은 자녀들이 유다 방언을 전혀 하지 못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 다문화 가정(multi-cultural family)의 자녀들의 절반가량은 아스돗 방언을 말했고, 나머지는 각 족속의 방언을 말했다. 느헤미야는 다문화 가정의 가장들 중에서 두 세 사람을 때리고 심지어 그들의 머리털을 뽑아 버리는 벌을 가했다. 그리고 그는 유다인들로 하여금 다른 언어를 가진 이방인들과 결혼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아내었다(13:23-25).

느헤미야가 그렇게 유다 공동체 안의 다문화 가정을 인정하지 않고 말살시키려 한 이유는 그가 언어의 다양화는 곧 종교의 다양화로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느헤미야의 유다 공동체에 대한 이상은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으로 인식되는 유다의 창조주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단일 신앙 공동체였다. 그는 언어의 다양화는 그런 여호와를 중심으로 한 단일 신앙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다. 블록(Daniel I. Block)은 그 사건에서 유대적 정체성의 유지는 곧 그 언어의 유지(the retention of the language)와 관련되었었다고 보았지만 종교적 정체성보다는 정치적/지역적 정체성에 더 치중했다. 느헤미야는 솔로몬 왕의 이방나라와의 혼인 정책을 그 예로 들었다. 그는 비록 솔로몬이 탁월한 왕이었지만, 이방 나라와의 혼인 정책을 통해 이방 여인들이 이스라엘에 깊숙이 파고들어와 이스라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범죄케 하는 결과를 초래시켰다고 비판했다. 느헤미야는 이방 방언을 말하는 여인들이 자기들의 우상 숭배를 이스라엘에 가지고 들어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로 하여금 죄를 범하게 했다고 보았다(13:26). 열왕기상 기자는 솔로몬이 바로의 딸 이외에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여인들을 이스라엘로 끌어들였다고 고발했다. 그 왕비들은 솔로몬이 늙자 그 마음을 혼란시켜서 아스다롯이나 밀곰 등과 같은 다른 신들을 좇게 하여 그로 하여금 그 하나님 여호와 앞에 온전치 못하게 만들었다(왕상11:1-5). 솔로몬은 그 후비들을 위해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의 몰록을 위해 산당을 지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자기 신들에게 분향하며 제사했다. 그런 죄의 결과는 나라의 분단이었다(왕상11:7-13).

느헤미야는 이런 역사를 통해 이방 방언이 이방 종교로 들어가는 문이 될 것이며 이방종교를 유지하는 길이 되는 것을 간파했던 것이다. 유다 방언을 모르는 자녀들은 성경을 이해할 수 없고, 성경을 이해할 수 없는 그들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으며,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언의 종교를 좇아가게 되어 결국 신앙 공동체를 와해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방언은 다양한 우상 숭배 죄로 이어져 단일한 신앙 공동체를 와해시킬 수 있다고 인식되었다.

 

4. 더러운 영들의 몸을 통한 발화

 

a. 더러운 영들의 유입을 초래한 죄

 

사단이라는 영적 존재는 뱀의 몸을 통해 인간과 대화를 시도했고, 인간은 그 대화의 내용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언어를 거부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다. 요한 계시록은 사단을 옛 뱀이라고 칭한다(12:9, 20:2). 바울은 뱀이 간계로 이화를 미혹케 하였다고 말했지만(고후11:3), 여자를 미혹시킨 뱀의 언어는 곧 사단의 언어였다. 사단이 뱀을 통해 하나님의 언어를 대적하는 말을 하였고, 인간은 그 말을 따라 하나님의 언어를 거부했다.

하나님의 언어를 거부하는 인간의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대신 더럽고 악한 다른 영들과의 교제의 문을 열었다. 하나님의 언어를 거부하는 인간의 죄는 하나님의 영의 퇴거와 악한 영들의 유입 가능성을 초래했다. 창세기는 노아 시대 때 인간이 극도로 악해져 급기야 하나님께서 자기 영의 퇴거를 선언했다고 기록한다(6:3). 사울이 하나님의 언어를 거부했을 때 하나님의 신이 그를 떠나고 악신”(h^Wr hu*r*)이 그에게 들어왔다(삼상16:14).

 

b. 더러운 영들의 발성을 초래한 죄

 

인간의 하나님의 언어거부 죄는 귀신이라는 더러운 영”(pneuvma a*kavqarta)이 인간의 몸을 통해 발성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인간은 죄로 인해 질서를 창조해 내는 하나님의 언어”(God’s language)를 나누는 능력을 상실했다. 그리고 파괴시키는 더러운 영의 언어, “사단의 언어”(Satan’s language)를 나누게 되었다. “더러운”(a*kavqarta)은 위생적인 것이 아니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유대교 지도자들이 형성한 정결 체계를 바탕으로 한 규범적 개념이다. 신약은 거룩한 영(toV pneu'ma toV a@gion)을 더러운 영(pneu'ma a*kavqarta)과 대비시킨다. 귀신 들림”(demon possession)은 침입하는 영들에 의해 본의 아니게 사로잡혀 그 영들의 영향력에 의해 우발적 행동을 하는 상태다.귀신들림의 증상은 때로 배우지 않은 언어를 말하는 것과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는 것이다. 귀신들린 자(the demoniac)의 자아가 자기 몸을 스스로 통제하기를 포기하면, 귀신들이 그의 몸을 통제하고 그 몸의 발성기관을 통해 말할 수도 있게 된다. 귀신들린 자는 타의에 의해”(involuntarily) 말한다. , 귀신이 귀신들린 자의 자아를 억누르고 귀신들린 자의 발성기관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영매들은 자발적으로”(voluntarily) 자기 몸 안에 있는 귀신의 영의 인격들에게 자기를 통해 말하도록 허락한다. 귀신은 귀신들린 자나 영매나 인간의 몸의 발성기관을 통해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귀신은 신접한 자를 통해 말한다(cf. 29:4). 귀신은 신접한 자를 통해 지절거리며, 속살거린다”(8:19). 신약에서 귀신은 자기가 점령한 인간의 발성기관을 통해 말한다. 가버나움 회당에서 예수의 말씀 중에 귀신이 한 사람을 통해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귀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알아보고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외쳤다. 예수의 추방 명령에 그 귀신은 소리를 지르며 나왔다(1:23-26). 마가는 귀신들이 예수를 만나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했다고 전한다(3:11). 귀신들은 사람의 몸을 통해 간청하기도 한다. 가다라 지방의 귀신들린 사람 속에 있던 귀신들은 예수께 돼지 떼에게로 자기들을 들여보내달라고 요청했다(8:31). 러운 영에 사로잡혀 말함은 인간의 죄악으로 더럽혀진 상태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한 예인 것이다.

 

c. 방언과 다른 더러운 영에 의한 발화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더러운 영들에게 사로잡혀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려하지만 성령에 의한 방언과 더러운 영에 의한 발화는 동일하지 않다. 프레임(R. Frame)은 방언을 무아의 경지로 보고 그런 상태는 악령에 사로잡히는 것이라고 잘못 판단했다. 그는 신자들이 모든 인격적 기능을 잠시 포기하고 자기의 의지를 보이지 않는 인격체에 완전히 순복하라고 권고 받을 때 마귀는 그 사람을 지배할 기회를 얻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방언의 은사를 구하는 것은 귀신들림, 강박관념, 등의 위험에 빠질 수 있는 상태에 자신을 내어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방언은 무아의 경지가 아니며, 더러운 영에 의한 것도 아니다. 방언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영이 말하는 것이며, 영이 말할 때 발화자의 이성은 작동을 멈추지 않는다. 발화자는 방언을 말할 때 자신이 어느 곳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자각한다. 심지어 차를 운전하면서도 방언으로 기도할 수 있다.

 

5. 인간 언어의 좌절

 

a. 영 기도와 마음 기도의 분리

 

인간의 영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의 분리는 죄로 가득한 인간 실존 상황을 드러낸다.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언어를 거부하고 사단의 언어를 택하는 인간의 영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를 분리함으로써 한 편으로 더욱 거룩하고 심오한 영적 교제의 세계가 있음을 조금이나마 경험시키신다. 그분은 다른 한편으로 영의 기도를 마음의 기도와 분리시키시고, 영의 언어로 드리는 기도를 통해 마음은 알 수 없는 비밀스런 말을 하게 함으로써 죄로 오염된 인간의 마음과 이성으로는 그런 보다 깊은 세계에 다다를 수 없게 하셨다. 이성은 영의 기도와 맞부딪히면서 자기 한계를 알게 된다. 그 한계는 죄로 인한 인간의 실존의 한계다.

 

b. 인간 언어의 좌절

 

방언 기도, 즉 영의 기도는 죄로 오염된 인간의 언어를 좌절시킨다. 인간의 언어는 때로 한계에 다다른다. 에드워드 테일러(Edward Taylor)는 언어의 한계를 다음과 같이 읊조렸다. “그리고 생각의 영역을 뒤졌으나 그 어떤/ 충분한 의미 있는 말을 찾지 못하여,/여기에서 일련의 새로운 말과 생각을 택하고,/ 그런 말을 얻기 위해 경계를 뛰어넘어/ 다른 영역에 가려하나 . . . 이는 헛된 시도일 뿐.” 그런데 마음과 분리된 영적 언어는 인간의 언어를 더욱 깊이 좌절시킨다. 비트겐슈타인(L. Wittgenstein)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서는 침묵해야한다고 말했다. 해결 가능한 부분적이고 개체적 문제에 관심을 국한시키고, 해결이 불가능한 종교 문제 등에 대해서는 언급을 회피해야한다는 것이다. 그가 언급을 회피한 종교적 언어에 가운데서도 이성적 언어에 대해 비밀스런 방언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능력에 놀라게 하고, 인간 언어의 연약함과 무력함을 더더욱 깨닫게 한다.

 

 

 

D. 요 약

 

인간이 방언을 말할 가능성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는데 있다. 성경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고 규정한다(1:27). 방언은 인간의 내면적 하나님의 형상성을 지지한다. 방언은 하나님의 형상의 요소인 인간의 몸을 통해 발화된다. 방언이 입 등의 인간의 몸의 발성기관을 통해 발화된다는 것은 구약에서 인간의 머리보다 얼굴을 중요시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방언은 몸의 소리를 통해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사람은 언어를 통해 하나님과 그리고 타인과 교제할 수 있는 점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다. 방언은 인간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언어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음을 각인시킨다. 방언은 인간이 동물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언어적 존재임을 말해준다. 창세기의 기록은 인간이 태초에 발화된 하나님의 낯선 언어, “창조의 방언을 이해할 수 있었다는 것을 말한다. 방언은 서로 소통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한다.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인간이 삼위 간에 교제하시는 하나님과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교제의 길들 중에 하나다. 방언은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됨의 언어성, 몸성, 관계성을 드러낸다.

방언이 발화될 때 인간의 영과 혼과 감정과 몸 등의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이 관여한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언급하고 있는 은사 방언은 나의 영이 말하는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14:14). 여기서 이란 방언 말하는 자 자신의 영 곧 인간의 영을 가리키는 것이다. 방언 경험은 무엇보다도 영적 경험이며, 영적 사귐의 경험이다. 방언 경험은 성령에 의한 내적인 경험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점에서 어거스틴의 지혜와 관련된다. 방언은 나의 영의 기도이며, 영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의 구별은 인간 이분설을 재고시킨다. 그것은 마음의 기도와 구별된다. 방언에 대한 언급을 통해 마음,” 즉 혼과 혀, 이라는 인간 구성의 세 가지 요소가 드러난다. 방언은 삼분설에 의해 더 잘 설명된다. 방언은 초이성적이지, 탈 이성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구성을 영혼과 몸, 두 요소로 보는 사람들은 방언을 트랜스 현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다. 방언을 말함은 기본적으로 이성의 참여를 허락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이성을 수동적으로 만들거나 비활성화시키지는 않는다. 방언은 영의 말하는 자유와 이성의 통제라는 얼핏 모순된 두 요소의 조화를 통해 적절해진다. 방언은 영과 마음의 이성 사이의 몸을 통해 발화된다. 방언에 때때로 동반되는 정서적 경험은 종교개혁 전통 안에서 정당한 것이다. 멜랑흐톤은 원죄를 마음의 성향의 문제요 구원도 마음에서 일어나는 성향의 변화로 이해했다. 칼빈에게 신앙은 인식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경험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게 신앙의 좌소는 마음이었다. 방언을 인간 스스로 만들어낸 심리적 반응으로 격하시키려는 시도들이 있지만 방언에 동반되는 정서의 기원은 하나님이다. 방언을 억압되었던 인간 감정의 표출로 이해하는 사람도 있지만 방언은 신적 감정의 표출이다. 방언 경험은 어거스틴의 지혜가 미쳐 담아내지 못한 신체적 경험에까지 연장된다. 방언 경험은 신체적 경험이기도 하다. 시무어의사도신앙은 방언과 관련하여 활성화되는 신체적 경험을 자주 보고했다. 시무어의사도신앙은 방언에 동반되는 경련과 진동처럼 신체가 활동적이 되는 경험도 보고했지만, 신체가 비활동적이 되는 현상도 보고했다. 방언 경험의 신체성은 에드워즈가 증언한 회심 경험의 신체성과는 다른 면을 갖는다.

인간의 첫 죄는 하나님의 언어를 거부한 불순종이었다. 언어적 관계의 깨짐이라는 첫 죄는 계속 다른 언어적 관계들의 깨짐을 유발시켰다. 하나님의 언어 거부라는 인간의 죄는 바벨탑 사건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다루시기 위해 하나였던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다. 하나였던 인간의 언어가 많아진 것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때문이었다. 인간 언어들의 다양성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고, 인간에게는 혼잡과 좌절과 분열이었다는 점은 오순절날 일어났던 방언 역사의 배경이 된다. 바벨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획일성에 대한 것이기도 했다. 방언은 하나님의 심판의 상징이기도 하다. 방언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심판이 되기도 한다. 다양한 인간의 언어들은 우상숭배의 죄로 이끌어가는 길이 될 수 있다. 느헤미야가 그렇게 유다 공동체 안의 다문화 가정을 인정하지 않고 말살시키려 한 이유는 그가 언어의 다양화는 곧 종교의 다양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단이라는 영적 존재는 뱀의 몸을 통해 인간과 대화를 시도했고, 인간은 그 대화의 내용을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언어를 거부하는 죄를 범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언어를 거부하는 인간의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대신 더럽고 악한 다른 영들과의 교제의 문을 열었다. 인간의 하나님의 언어거부 죄는 귀신이라는 더러운 영이 인간의 몸을 통해 발성하는 것을 허용하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방언을 더러운 영들에게 사로잡혀 말하는 것과 동일한 것으로 보려하지만 성령에 의한 방언과 더러운 영에 의한 발화는 동일하지 않다. 인간의 영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의 분리는 죄로 가득한 인간 실존 상황을 드러낸다. 방언 기도, 즉 영의 기도는 죄로 오염된 인간의 언어를 좌절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