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 방언과 교회
본 장은 방언의 교회론적 의미를 탐색할 것이다. 이 탐색은 교회를 통해 방언을 봄으로써 방언의 신학적 의미를 확장시키기 위한 것이다. 이 탐색은 교회론에 관련된 모든 주제들을 다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교회의 탄생,” “방언과 교회의 양방성,” “교회의 단일성,” “은사적 공동체로서 교회,” “증인 공동체로서 교회” 등의 주제들만을 다룬다.
교회를 통해 방언을 보는 시도는 독특한 오순절 교회론(Pentecostal ecclesiology) 발전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동안 오순절주의자들은 교회를 오순절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프랑크 마키아는 성령침례를 통해 교회를 보았다. 그는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을 옹호하고 더 나아가 방언의 표적/상징성을 선호한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벨리 카케이넌과 같은 다른 오순절주의자들이 보다 넓게 성령론적으로 교회론을 보려하는 것을 따르지 않고 더 좁혀 성령침례를 통해 교회를 보려한다. 그런데 그는 성령침례를 통해 교회를 보는 중요한 순간마다 대부분 방언을 언급하곤 했다. 그렇다면, 마키아보다 더 좁혀서, 보다 더 적극적으로 방언을 통해 교회를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방언은 적어도 오순절주의의 정체성(identity)과 관련된다. 그래서 방언을 교회론적으로 조명하는 시도는 오순절 교회의 정체성을 밝히고 발전시키는데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A. 방언과 교회의 시작
1. 교회와 모성적 성령
a. 어머니 같은 성령
성령은 여성적으로 또는 어머니로 이해되기도 했다. 콤블린(Joseph Comblin)이 지적한 것처럼 성령은 보통 여성적이라고 일컬어지는 도움, 지지, 낳음, 격려 등등과 관련된다. 성령을 여성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신비주의의 전통에서 발견된다. 중세 신비주의자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에게 성령은 생명을 일으키는 여성적인 바람이시다. 하나님의 성령인 “그녀”는 상처에 기름을 발라 고치시고 소생케 하는 영이시다. 신비주의적 전통 속에서 성령은 때로 “여성적”을 지나 “어머니”로 규정되기도 했다. 동방교회 영성의 보고라고 일컬어지는 마카리우스(Macarius)의 50편 설교들 중 28편은 성부를 “하늘에 계신 참 아버지”라고, 성령을 “선하고 자비하신 어머니인 성령”이라고, 그리고 성자를 “아름답고 사랑하는 형제이신 주님”이라고 부른다. 성령을 비유적으로가 아닌 직접적으로 “어머니”라로 부른 것이다.
오순절주의자 시무어(William J. Seymour)는 성령을 어머니로 비유했다. 시무어는 자연적 삶에서 자녀는 한 아버지와 한 어머니가 있어야 세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영적인 자녀는 말씀과 성령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에게 성령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수용하는 사람들을 낳으신다. 시무어가 성령의 사역에 대한 언급에서 어머니를 말한 것 때문에 그를 신비주의적 전통 속에 있던 사람으로 볼 수는 없다. 시무어의 성령에 대한 여성적 언급은 신비주의적인 성령에 대한 언급과는 다른 점을 보였다. 시무어는 신비주의와는 달리 “성령은 어머니”라는 직유법을 쓰지 않았다. 어머니는 성령에 대한 비유로 사용될 뿐이다. 그래서 그에게 성령은 어머니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중생시키지만 여성 신(a goddess)은 아니다. 시무어는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어머니가 아이를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과 비교함으로써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이해를 도우려 했다.
신자들이 성령으로 중생한다면(요3:5-8), 성령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어머니”라고 비유적으로 불릴 수도 있다. 이런 명칭은 문법적으로 여성인 히브리어 “루아흐”(j^Wr)와 상통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 해도 성령의 모성성”(the motherhood of the Holy Spirit)은 성령이 인간의 양성(兩性)중 여성성만을 지닌 제3위의 신을 뜻하지는 않는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피조물의 성을 초월하시는 분이시다. 성부 하나님은 남성 신이 아니며, 성령 하나님도 여성 신이 아니다. 하나님의 부성(God’s fatherhood)은 결혼이나, 임신, 출산 또는 성과 관련이 없다.
b. 교회의 어머니 같은 성령
성령은 교회의 어머니로도 이해되었다. 모성적 성령에 대한 언급은 또한 경건주의에서도 등장한다. 진젠도르프 백작(Graf Zinzendorf)은 1741년 “성령의 어머니 직분”을 선포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을 참 어머니로 인식했다. 진젠도르프는 성령을 중생자의 유일한 어머니로 규정했다. 그에게 성령은 창으로 찔린 예수의 옆구리로부터 중생하는 영혼들의 유일한 어머니시다. 사람은 육체를 낳아주시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영적으로 낳아주시는 어머니가 필요하다. 진젠도르프가 이끌었던 모라비안교도들은 1750년에 어머니로서 성령에 관한 몇 가지 교송(litany)들을 불렀다. 또한 그 공동체는 성령을 “교회의 어머니”(Mutter der Kirche)로 삼았으며, 그것을 축하하는 특별한 축제를 해마다 열기도 했다. 진젠도르프처럼 성령을 비유법적으로가 아닌 직접적으로 “어머니”로 삼는다면 삼위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 안에서 남성 신(성부), 여성 신(성령), 중성 신(성자)이라는 삼신으로 전락 될 가능성이 있다. 다만 성령은 직접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교회의 어머니가 아닌, 교회에게 유비적으로 어머니와 같은 분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가톨릭교회는 성령이 아닌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로 삼아 왔다. 바티칸 편람(Enchiridion Vaticanum)은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Maria als Mutter der Kirche)로 규정했다. 또한 가톨릭 교리문답(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도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Mary, Mother of Christ, Mother of the Church)로 규정한다. 그 교리문답은 마리아가 구세주의 사역에 협력했기 때문에 교회의 어머니가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교리문답도 밝히는 것처럼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die Mutter der Kirche)가 아니라, 기도하는 교회 가운데(die Mitte der betenden Kirche)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었을 뿐이었다. 마리아는 단순히 성령의 은사를 간구하는 기도를 드리며 사도들과 여인들과 함께 있었을 뿐이다. 마리아는 교회의 어머니가 아니다. 교회에게 어머니와 같은 분은 인간인 마리아가 아닌 하나님이신 성령이시다.
성령께서는 아기를 탄생시키는 어머니처럼 오순절 날 교회를 시작시키셨다.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은 오순절에야 비로소 교회를 이루었다. 교회의 탄생시점에 대해서는 크게 “구약시대,” “부활이후 오순절 이전,” “오순절”이라는 세 가지 설이 존재한다. 벌코프(L. Berkhof)는 족장 시대와 모세 시대 등의 구약 시대(old dispensation)에도 교회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콘첼만(Hans Conzelmann)은 교회의 탄생을 부활 이후, 오순절 이전으로 잡았다. 그러나 에릭슨은 예수께서 “에끌레시아”(e*kklhsiva)를 단 두 번 언급하셨는데 그중에 마 16:18은 미래적 설립에 대한 언급이었다는 것을 부각시킨다(다른 구절은 마 18:17로서 교회의 권징에 대한 언급이다). 그 본문에서 사용된 “오이꼬도메소”(oi*kodomhvsw)는 동사 “오이꼬도메오”(oi*kodomhvw)의 직설법, 능동태, 미래시제, 일인칭, 단수 형태로서 “내가 미래에 세울 것이다”라는 뜻을 갖는다. 에릭슨은 구약의 신자들이 교회를 이룬 것이 아니라 오순절에 시작된 교회 안으로 통합되었다고 본다. 그런 분석을 통해 에릭슨은 교회가 오순절 날에 탄생했다고 결론짓는다. 시무어(William J. Seymour)도 오순절의 예루살렘 교회를 “첫 회중”(the first congregation)라고 언급했다. 누가는 복음서에서 “에끌레시아”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사도행전에서는 24회나 언급한다. 120명은 그리스도로부터 말씀을 듣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는 표적도 보았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 교회를 이루지 않았었다. 그런 그들이 바로 오순절 날 교회를 이루었다.
성령은 오순절 날 교회의 탄생시에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하셨다. 슈바이처(Eduard Schweizer)가 언급했듯 성령은 교회와 떼어놓을 수 없는 “교회 시대의 특징”(feature of the age of the Church)이다. 성령이 계신 곳마다 교회가 있다. 카케이넌(Veli-Matti Käkkäinen)에 따르면, 교회는 성령의 역동적 사역에 의해 방언을 말하며 탄생했다. 성령은 여성이거나, 신자의 어머니이거나, 교회의 어머니는 아니다. 성령은 교회에게 어머니와 같다. 성령은 신자들을 위로부터 나게 하시는 것처럼, 신자들이 교회를 이루도록 역사하셨다. 성령은 어머니가 아기를 낳는 것처럼 교회를 시작시키셨다. 교회는 오순절에 어머니와 같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방언을 말하며 시작되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어머니처럼 사도들을 포함한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을 방언을 말하며 교회로 태어나게 하셨다. 어머니가 태중에서 아이를 기르는 것처럼, 성령은 120명을 기르다가 어머니처럼 오순절에 교회를 이루게 하셨다. 성령은 교회에게 어머니와 같다.
2. 방언과 교회의 탄생
a. 교회의 탄생의 표적으로서 방언
방언은 아기의 첫 울음이 신생의 표적인 것처럼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표적(sign)이었다. 오순절주의자인 프랑크 마키아(Frank D. Macchia)는 교회가 방언을 말하며 태어났다고 말했다. 예루살렘 첫 교회가 방언을 말하며 태어난 것은 아기가 첫 울음을 울면서 태어나는 것에 비유될 수 있다. 태아는 어머니의 자궁 안의 양수 속에서 허파를 이용하지 않고 탯줄을 통해 산소를 공급받는다. 세상으로 나온 신생아는 갑자기 폐로 밀려들어와 가득찬 공기를 강하게 내품으며 첫 울음을 터트린다. 급한 바람 같은 성령으로 충만해진 교회는 방언을 터트렸다. 몰트만(J. Moltmann)이 올바르게 간파한 바와 같이 방언은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표적(the sign of the birth of the Church)이었다.
b. 방언과 생명체로서 교회
방언은 교회가 태어났으되 살아있는 생명체로 태어났음을 알린 표적이었다. 태어나며 우는 아기는 살아있지만, 울지 않는 아기는 죽은 것이다. 설리반(Francis Sullivan)이 말한 것처럼 방언은 “울음의 은사”라고 말할 수 있다. 교회는 신생아의 울음처럼 방언을 말함으로써 죽지 않고 살아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증거했다. 방언은 갓 태어난 교회가 살아있음을 나타낸 표적이었다.
B. 방언과 교회의 단일성
1. 방언: 목회자와 평신도가 조화된 단일한 교회의 상징
a. 목회자의 권위에 의한 비정상적 단일체
교회의 단일성은 목회자와 평신도 중 어느 한 쪽이 배제되거나 억눌림 당함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교회는 모든 교회 구성원들의 신앙적 자유와 주체적 의식에 의한 통일보다는 주교단의 권위와 통제에 의한 통일을 추구한다. 바티칸 교리성(敎理省)이 2000년 9월 5일에 발표한 “도미누스 예수”(Dominus Iesus)는 모든 교회들은 이 세상에서 단일한 사회로서 제정되고 조직되는데, 그 단일성은 베드로의 후계자(the Successor of Peter)인 로마 주교와 그와의 교제 안에 있는 주교들만의 통치에 의해 실현된다고 단언했다. 그런 단일성은 진정한 것이 아니다. 오순절 방언은 교회가 목회자와 평신도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억누름 없이 하나 되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b. 방언: 목회자와 평신도가 조화된 단일체의 상징
방언은 교회가 목회자와 평신도의 조화에 의한 단일 공동체(miva e*kklhsiva, una ecclesia)임을 상징한다. 사도들과 평신도들로 구성된 첫 교회는 방언을 통해 그 통일성을 드러냈다. 리더보스(Herman Ridderbos)에 의하면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의 “직제(office)는 곧 은사(a charisma)”다. 첫 교회의 구성원은 열두 사도와 백여 명의 평신도로 구성되었다(행1:15, 26). 오순절 날 사도들과 평신도들은 어느 한 쪽을 억누르지 않고 방언을 각 사람이 동시에 “다 같이”(pavnte" o&mou') 말함으로써 교회의 단일성을 드러냈다(행2:1-4). 몰트만(J. Moltmann)에게도 교회는 동등한 사람들의 은사적 공동체다. 목회자나 평신도 사이에는 차별이 없다.
2. 방언: 말씀과 은사가 조화된 단일한 교회의 상징
a. 은사가 배제된 비정상적 단일체
방언은 말씀과 은사 중 어느 한 쪽도 희생함 없는 교회의 단일성을 상징한다. 그런데 루터(M. Luther)는 “말씀”을 강조하고 외적 은사를 희생시켰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이 울려 퍼지지 않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반면에 그는 방언과 같은 표적을 동반하는 외적이고 가시적인 은사들을 자기 시대에는 필요 없는 것이라고 잘라내 버렸다. 루터는 방언을 통해 말씀과 은사가 조화된 오순절적 교회의 단일성을 추구하지 못했다. 교회는 말씀과 은사가 조화를 이룰 때 진정한 단일한 교회를 이룰 수 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다같이 “방언” 은사로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한 것은 말씀과 은사가 조화를 이루는 교회의 단일성을 상징한다.
b. 방언: 말씀과 은사가 균형을 이루는 단일체 상징
사도들을 포함한 첫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했다(행2:11). 은사인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한 것(laluvntwn tai'" h&metevrai" glwvssai" tav megalei'a tou qeou)은 문자적으로 보면 선포다. 크레머(J. Kremer)와 로버트 멘지스(Robert P. Menzies)에 따르면 LXX에서 taV megalei'a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선포 동사들과 관련된다. 로버트 멘지스는 “다른 방언들”이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이해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다음 그것들이 선포(proclamation)였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다른 방언들”의 선포성은 “하나님의 큰일”(taV megalei'a tou' qeou')이라는 영감 받은 말의 내용(the content of the inspired speech)에 의해 확증된다고 주장했다. 오순절의 방언은 화자가 사전 지식 없이 청자의 언어를 말하는 제노놀리아(xenolalia)였으며, 제노롤리아를 통해 하나님의 큰일이라는 내용이 선포되었다.
하나님의 큰일 말함이 오직 찬양이었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 바네트(Donald Lee Barnett)는 오순절날 사도들의 방언 찬양으로 해석했다. 그는 120여명이 한꺼번에 설교했다면, 듣는 자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네트는 그렇게 주장했으면서도 어떻게 각 청자들이 자신이 난 곳 언어로 알아들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시끄럽고 혼란스러워 그 내용을 다알아듣지는 못했겠지만 많은 언어들 가운데서도 자기에게 익숙한 말소리는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듣는 자들 각자가 자기가 난 곳 언어 소리를 들은 것 자체는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제자들이 각 나라말로 설교했는데, 듣는 자들이 그 내용을 혼란스러워 다 듣지는 못했지만, 그 내용의 대략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 추측은 누가가 오순절 방언의 내용을 간단하게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요약한 것과 더 맞아 떨어진다.
하나님의 큰일 말함이 찬양이었다면, 선포적 내용을 갖는 것이었다. 브루스(F. F. Bruce)는 오순절 방언을 한편으로 “황홀경적 외침들”(the ecstatic exclamation) 혹은 “하나님을 찬양함”(the praise of God)으로 해석했다. 그는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팔레스틴에서 유대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종교적 형식인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되는 “쉐마”와 같았다고 보았다(신6:4). 브루스는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한 것이 “찬양”과 “선포”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폴힐(John B. Polhill)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하고 있었다”(declaring)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큰일”은 오순절날 “그리스도인들이 말한 내용”(the content of the Christians’ speaking) 전체에 대한 “유일한 힌트”(only hint)였다. 그는 “하나님의 큰일 말하는 것”을 선포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폴힐은 또한 그들의 증언은 “찬양의 언어”(the language of praise)이었다고도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큰일 말함을 바울서신과 연결하여서 찬양으로도 보았다. 그는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표현이 바로 찬양이기 때문에(엡5:18-19) 오순절의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한 것도 역시 찬양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찬양과 선포를 합하여 “찬양의 언어”(the language of praise)라는 이중적인 조합어를 만들었다. 그에게 더 비중 있는 것은 “찬양”보다는 내용을 선포하는 “언어”다. 그래서 “언어의 찬양”(the praise of language)이 아니고, “찬양의 언어”(the language of praise)다. 폴힐은 또한 오순절에 듣는 이적이 일어났다면, 청중들에게 성령침례가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면서, 오순절의 이적을 말하는 이적으로 해석했다.
“하나님의 큰일”은 베드로의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오순절 설교의 대략이며, 그 설교를 지시하는 것이었다. 콘첼만(Hans Conzelmann)은 누가가 그 설교들의 내용에 대해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그것을 베드로의 설교를 위해 아끼고 있다고 주석했다. 폴힐은 누가가 그렇게 간추려서 언급한 이유를 추정했다. 그에 따르면 누가는 먼저 그 내용을 추상적으로 간추려서 말함으로써 그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그 다음에 그 전체 내용을 베드로로 하여금 말하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미치는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다 말했으나 누가가 그것을 “하나님의 큰일”로 간추려 기록하였으며, 베드로의 설교에서 비로소 그 전체 내용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오순절의 방언은 베드로의 설교에서 떼어내어도 좋은 전주(prelude)가 아니라 베드로의 설교에 앞서며 인도한 선창(leading song)이었다.
방언은 은사와 말씀이 조화를 이루는 하나 된 교회를 상징한다.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이 비록 찬양이었다 할지라도 내용은 없고 정서와 가락만 있는 기악(instrumental music)이 아니었다. 그것이 비록 찬양이었다 할지라도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한 것은 정서와 더불어 “선포적 가사를 갖는 성악”(vocal music which has the proclamatory words of the song)이었다. 오순절 사건 첫날의 방언은 뜻을 알아들을 수 있는 지방 사투리, 또는 종족 언어였다. 120명은 그 언어들을 통해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큰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상징이라고 볼 수 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방언이라는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큰일”을 말한 것은 교회가 은사와 말씀이 조화를 이루는 하나임을 상징했다. 방언은 교회가 말씀과 은사(word and gifts)의 조화에 의한 단일 공동체임을 상징한다.
3. 방언: 다양성과 단일성이 조화된 단일한 교회의 상징
a. 방언: 다양하면서 단일함 상징
방언은 교회의 다양하면서도 단일함(variety in unity)을 상징한다. 다락방에 모였던 120여명은 직업, 이데올로기, 가족, 성 등에 있어서 다양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로 구성되었었다. 예를 들면, 마태의 직업은 물질적으로 부유할 수는 있었지만 당시 유대인들의 지탄의 대상이었고 죄인 취급 받던 세리였고(마10:3),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는 하층 어부였다(막1:16). 시몬은 정치적으로 공격적인 혁명노선을 추구했던 “열심당원”(o& zhlwthv")이었다(눅6:15; 행1:13). 빌립(fivlippo")은 헬라적 이름이었고, 도마(amwat)는 히브리적 이름이었다. 그 이름들은 헬라파 유대인들과 히브리파 유대인들을 연상시킨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형제지간이었고, 요한과 야고보도 그러했다(마10:2). 그들 중에는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를 포함한 다수의 여성들도 있었다(행1:14). 그 다양성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에서 “자녀들, 청년들과 노인들, 남종과 여종”으로 표현된다(행2:17-18). 다 같이 한곳에 모여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말한 방언은 그들이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하나이었음을 드러냈다. 프랑크 마키아(Frank D. Macchia)에 따르면 성령침례는 교회를 “다양한 일치”(differentiated unity)에로 이끌며, 성령침례의 표적으로서 방언은 그 “다양한 일치”를 상징한다. 방언은 교회의 다양한 단일성을 드러낸다.
b. 방언: 인종과 민족을 초월한 일치 상징
방언은 또한 교회가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여 하나임을 나타낸다(행10:45-48). 베드로와 동행했던 유대인들은 고넬료의 집에 모였던 이방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이는 것을 들었다. 그들과 예루살렘교회는 그것을 근거로 그 이방인들을 하나 된 교회의 구성원들로 받아들였다(행10:46-11:1-18). 베드로의 요엘서 인용은 교회의 다양성을 “모든 육체”(pa'sa savrx)라는 말로 상징 요약했다(행2:17). 그 다양한 구성원들이 방언을 말하며 서로 하나임을 확인했다. 바울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인종을 초월하여 다 한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므로 각각 방언을 포함한 은사들을 받아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을 지적했다(고전12:4-13). 바울은 인종을 초월하여 누구든 은사들을 받을 수 있으며, 은사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한 몸에 참예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방언은 은사들의 그런 초월적 성격과 교회의 다양하면서도 단일함을 상징한다. 넬슨(D. J. Nelson)도 지적한 것처럼 시무어(W. J. Seymour)의 집회에서는 남녀노소, 다양한 인종과 민족의 사람들이 함께 한 장소에 모여 방언으로 말하고 간증하고 설교할 수 있었다. 교회의 다양한 일치가 방언을 통해 나타난다.
C. 방언과 교회의 양방성
바울은 신자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며(고전12:27), 그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말한다(엡1:22). 본 항은 교회의 머리와 그 지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양방성을 통해 방언의 양방성을 해석한다.
1. 방언과 교회의 머리로부터 지체로의 방향성
a. 교회의 머리로부터 지체로의 방향성
교회는 머리로부터 지체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몸의 지체들을 통제하는 것은 그 머리다. 온 몸은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는다(골2:19). 머리로부터 명령이 내려옴으로써 각 지체들이 움직인다. 머리가 지체들을 양육하고 보호한다(엡5:29-30). 바울에게서 머리와 지체들 간의 관계는 그리스도와 신자들 간의 관계의 유비로 사용된다. 머리와 지체들은 한 몸을 이루듯이, 그리스도와 신자들은 한 교회를 이룬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교회의 각 지체 같은 신자들의 머리로 삼으셨다(엡1:22; 5:23). 그리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신자들을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심으로써 교회의 지체들을 형성시키신다(엡4:11).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는 교회의 각 지체들을 보호하고 양육한다(엡5:30). 교회의 구주(엡5:23)이며 머리이신 그리스도로부터 관심과 보호와 명령과 능력이 교회의 각 지체들인 신자들에게로 온다.
b. 방언과 교회의 머리로부터 지체로의 방향성
교회에 주어지는 방언의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성은 교회의 머리로부터 지체들에게로의 방향성을 드러낸다. 예루살렘교회적 방언은 성령 하나님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인간에게 발화되는 것이다. 예루살렘교회적 방언(헤테로글로솔라리아)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이런 방향성은 교회의 머리로부터 지체들로의 방향성과 일치한다. 오순절의 방언은 120문도가 모인 교회의 공적 집회에서 발생했다. 오순절 방언의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성은 교회의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성과 일치한다. 고린도교회적 방언(글로솔라리아)은 통역될 때 사적이든 공적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성령 하나님에 의해 발생하는 방언의 근본적 방향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고 있는 교회의 근본적 방향성도 또한 신성을 갖고 계신 그리스도로부터 인간에게로 향하는 것이다. 방언과 교회는 은사에 의해 연결된다. 방언은 하나님에 의해 교회에 주어지는 은사다. 방언과 교회는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성을 띈 은사에 의해 연결된다.
2. 방언과 교회의 지체로부터 머리로의 방향성
a. 교회의 지체로부터 머리로의 방향성
교회는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의 방향성도 갖는다. 교회의 각 지체들인 신자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라나야 한다(엡4:15).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몸된 지체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하도록 자라나야 한다(엡4:12-13). 교회의 지체들은 하나님께 예배하며, 찬양하고 기도한다. 머리를 주인으로 지체들이 존재하는 이유는 머리의 명령에 반응하며, 머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다. 에클레시아(e*kklhsiva)는 말 자체가 “ . . 밖으로”라는 의미를 갖는 “에크”(e*k)라는 전치사를 포함하며 방향성을 띈다. 그 방향 정점에는 하나님이 계시다. 에클레시아의 주인은 신성을 갖고 계시는 그리스도시다(마16:18). 교회가 하나님을 향할 때 그 주인을 인정하는 것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성에 의해 존재하게 되고 유지되는 교회는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으로의 방향성에 의해 성장하며 성숙해간다.
b. 방언과 교회의 지체로부터 머리로의 방향성
방언의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으로의 방향성은 교회의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으로의 방향성을 드러낸다. 방언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14:2). 방언은 교회의 지체들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인 기도와 찬양의 한 형태이다. 바울은 교회의 지체들이 모일 때 하나님을 영으로 찬미하라고 말한다(고전14:15). “영으로 찬미”(yalw' tw'/ pneu'mati)는 방언이 곡조 있는 형태로 하나님을 향해 발화되는 것이다. 통역을 동반할 때 방언은 교회의 공적 집회시에 하나님을 향해 발화될 수 있다(고전14:26). 방언의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으로의 방향성은 교회의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으로의 방향성과 일치하며, 그 방향성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D. 방언과 교회의 이중적 성격
1. 방언과 교회의 힘의 이중성
a. 방언과 교회의 연약함
방언은 교회가 아기처럼 연약한 존재임을 말해준다. 오순절 방언은 교회의 연약함을 드러낸다. 오순절 방언은 연약한 아기의 울음이었다. 아기는 거친 세상을 홀로 살아가지 못하는 연약한 존재다. 교회는 방언을 말하며 자기의 연약성을 깊이 절감한다. 고든 피(Gordon D. Fee)가 지적했듯 바울에게 방언은 미래가 아직 성취되지 않았다는 것을, 현재적 연약함을 일깨워준다. 방언은 현재의 연약한 시기에 속한다.
b. 방언과 교회의 능력
방언은 교회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교회의 능력의 기원을 알게 한다. 성령은 교회의 “연약함”을 도우신다(롬8:26-27). 성령은 교회로 하여금 연약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할 수 있게 하신다. 성령은 교회가 아기처럼 연약하여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큰일”을 교회로 하여금 따라 말하게 하심으로써 친히 오순절의 방언을 통해 선포하셨다. 교회는 연약하여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부활의 증인이 될 수 없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임하시고 능력이 임하기 전에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연약함을 도우시는 “다른 보혜사” 성령이 오시자 교회는 그 보혜사를 따라 “하나님의 큰일”을 말할 수 있었다.
2. 방언과 교회의 하나님과의 친밀함
방언은 또한 연약한 교회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나타낸다. 방언은 교회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친밀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사람들은 일시적인 관계에서 “외교적인”(diplomatic) 언어를 사용한다. 친구들은 “방언적”(dialectic) 언어를 사용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둘 사이만 이해할 수 있는 “개인적”(idiolect) 언어를 사용한다. 그런데 연약한 어린 아기는 “옹알거림”(prattle)으로 그 부모와 깊은 친밀함을 나눈다. 비록 방언이 옹알거림같을지라도 하나님과의 깊은 친밀함을 나누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방언은 연약한 교회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보여준다.
3. 방언과 교회의 거룩함
a. 거룩하지 못한 거룩한 교회
교회는 거룩하면서도 여전히 “죄인들의 교회”(communio peccatorum)다. 교회의 거룩은 “거룩하지 못한 거룩”(die unheilige Heiligkeit)이다. 교회의 거룩은 그 지체들의 거룩의 합이 아니다. 그 거룩은 자기를 교회에게 선사하시는 그리스도의 거룩이며, 죄인들을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다. 시무어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교회”(holy church)를 원하시지만 교회는 죄를 갖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온갖 죄를 깨끗하게 하기를 원하신다. 예수의 눈은 모든 교회를 감찰하고, 그의 손가락은 성결을 무시하는 교회를 향하고 있다. 거룩한 교회를 원하시는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의 간음과, 두 아내, 두 남편을 용인하지 않으신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채소 값, 물세, 가구세, 연료비, 가스비 등등의 모든 세금과 비용을 떼어먹지 않기를 바라신다.
b. 방언과 거룩하지 못한 거룩한 교회
방언은 교회가 거룩하면서도 동시에 거룩하지 못한 공동체임을 말해준다. 오순절에 첫 교회가 말한 방언은 교회가 스스로는 이해할 수 없는 “다른 방언”이었다. 방언은 교회의 이해와 학습을 초월하는 것이다. 방언은 성령 하나님께서 자유로이 교회에게 주시는 것이다. 방언은 교회가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고, 그 종류를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방언은 성령께서 이해의 능력을 주실 때야 비로소 교회가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것이다. 교회는 방언을 말하며 한편으로 하나님의 능력과 거룩하심을 경험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무력함과 연약함과 한계와 죄인 됨을 경험한다. 교회는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것을 자기에게는 낯설고 다른 방언으로 말해야한다. 교회는 방언을 말하며 세상적인 눈으로 볼 때 새 술에 취하는 것처럼 비정상적인 것 같은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행2:13). 그래서 어떤 사람들에 의해 조롱을 받기도 한다. 자기 혀와 입술을 자기가 익숙한 모양으로 만들 수가 없다. 교회는 방언을 말하며 자기가 스스로 거룩하고 능력있어 방언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거룩한 성령에 의해 방언을 말하고 있음을 경험한다.
E. 방언과 은사적 공동체
1. 방언: 첫 은사
a. 성령: 교회에 주어진 은사
성령은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선물이다. 성령은 성부께서 성자께 “주신 것”이다(행2:33).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h& dwreva e!dwken o& qeov")(행11:17), “하나님의 선물”(h& dwreva tou' qeou')이며(행8:20), 성자께서 교회에 주신 선물(h& dwreva tou' a&givou pneuvmato")이기도 하다(행2:38, 10:45). 어거스틴은 성령이 “하나님의 선물”(donum patris)이라고 말하고, 선물을 주는 이와 선물과의 관계성을 규정하려했다. 루터(M. Luther)도 성령을 “은사”로 이해했다. 그는 성령을 하나님의 은사(gift)와 선물(endowment)이라고 불렀다.
b. 방언: 성령께서 교회에 주신 첫 은사
방언은 하나님의 선물이신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신(divdwmi) 첫 은사다(행2:4). 성령께서 임하시자 교회는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kaqwV" toV pneu'ma e*divdou a*pofqeggesqai)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행2:4). 방언은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시고, 성자께서는 성부께 받아서 교회에게 주신 “선물”(dwreva)이신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신”(divdwmi) 첫 은사였다. 파함(Charles F. Parham)은 성령침례를 받으면 “최초의 은사”(initial gift)로서 방언을 말하게 되고, 연이어 다른 표적들과 이적들, 그리고 기사들과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들 모두를 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하워드 어빈(Howard M. Ervin)은 성령의 모든 초자연적 은사 중에서 오순절 날 순서 면에서 제일 먼저 나타난 것은 방언이었으며, 방언에 이어 다른 은사들이 나타났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런 순서가 나중에 뒤바뀌었다는 증거는 아무 데도 없다고 말했다. 방언이 교회에 나타난 첫 은사였다는 것은 방언 은사의 중요성을 대변해준다.
2. 방언: 은사적 구조의 상징이며 부분
a. 교회의 은사적 구조
교회의 구조는 은사적이다. 교회는 성부와 성자 사이의 사랑의 띠(viculum caritatis)이신 성령에 의해 연합되며, 그 안에서 주님의 사역에 의해 모든 은사들과 달란트들이 나타난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카리스마를 갖는다. 한 성령을 마심으로써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성령의 은사의 다양함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몸의 다양성도 없다.
교회는 제도이면서 동시에 은사적 유기체다. 교회론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화두 중에 하나는 은사와 제도 사이의 관계성이다. 제도(institutio, institution)로서 교회는 하나님께서 제정해 오신 직제들과 수단들(은혜 수여를 위한), 제도적 형식과 기능들에 의해 존재한다. 제도로서 교회는 죄인들의 회심을 위한 그리고 성도들의 온전함을 위한 신앙을 낳고 길러주는 “신자들의 어머니”(mater fidelim)라고 말할 수 있다. 가톨릭 교회는 전통적으로 은사보다는 성직제도(hierarchy), 성직자들의 사역, 교회의 권위와 성례전 등의 제도적 형식을 강조해 왔다. 제도의 강조는 은사의 축소, 제한을 초래했다. 그러나 한스 큉(Hans Küng)은 교회의 제도를 중요시하는 가톨릭 신학자이면서도 가톨릭 교회의 갱신적 차원에서 교회 구조의 은사성을 연구했다. 그는 고린도 전서에 등장하는 교회 구조의 은사적 성격(the charismatic nature of Church’s structure)을 고려했다. 그는 은사들은 특별한 것이 아니고 전체 교회를 위한 보편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성령의 자유에 의해 주어지는 은사는 공동체에 봉사하고, 공동체를 세우기(교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공동체의 필요가 많기 때문에 다양한 은사들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그 공동체는 하나이기 때문에 은사들은 그 단일성을 위해 봉사한다. 카케이넌은 성령론적 교회론(pneumatological ecclesiology)의 관점에서 교회의 은사적 구조를 언급했다. 카케이넌은 교회의 성령론적 기초를 탐구함으로써 교회의 기독론적 기초와 성령론적 기초의 조화를 모색하려 했다. 그는 “은사와 제도”(charism and institution) 사이의 딜레마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에 의한 “은사적 구조”(charismatic structure)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을 추구해야한다고 말했다.
b. 방언: 교회의 은사적 구조 상징
방언은 교회의 구조가 은사적이며, 그 은사적 구조는 오순절에 형성되었음을 알게 하는 단서다. 마키아(F. Macchia)는 교회는 오순절에 “은사적 구조”(charismatic structure)로 형성되었다고 말했다. 그 구조는 유동적이고 관계적이다. 영적 은사들은 성령의 뜻과 말씀 사역의 상황적 필요들을 서로 연결시키는 은혜로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오순절의 성령 부어주심은 다양한 은사들의 특수한 형태로 공동체 안에서 확산된다. 영적 은사들은 교회가 그것으로 은혜로운 공동체가 되는 특별 수단이다. 교회는 그 은사적 구조를 통해 복음과 성례전을 통해 우리에게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서로를 돕고, 수용하고, 성장하면서 그 지체들을 사랑 안에서 세워 나간다. 그리고 교회는 이 은사적 구조의 도움을 받아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데 도움을 준다. 그런데 마키아는 교회가 오순절에 은사적 구조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런 모호성은 성령침례를 강조하기 위해 첫 번째로 나타났던 은사인 방언을 제거해버린 결과다. 교회의 탄생과 함께 첫 번째로 나타났던 은사인 방언을 언급하지 않고는 오순절에 교회가 은사적 구조로 형성되었다는 것을 논하기 어렵다. 교회를 구성하는 은사들 중에 교회의 구성원뿐만 아니라, 비구성원들도 명백하게 알 수 있도록 맨 처음 드러난 은사는 바로 방언이었기 때문이다. 방언은 오순절에 교회가 은사적 구조로 형성되었음을 알게 하는 분명한 단서다.
c. 방언: 교회의 은사적 구조의 부분
첫 번째로 나타난 은사인 방언은 교회의 은사적 구조에 대한 상징이며, 동시에 그 일부분을 담당한다. 방언은 은사들 중에 맨 처음 나타남으로서 교회가 은사적 구조임을 지시했다. 즉, 방언은 교회의 은사적 구조를 대표적으로 상징한다. 방언은 교회의 은사적 구조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떼어낼 수 있는 단순한 기호가 아닌 기호가 지시하는 것 자체의 떼어낼 수 없는(integral) 부분을 형성한다. 제임스 던이 지적한대로 바울에게 있어서 교회는 은사적 공동체이며, 방언은 은사적 공동체에서 제거될 수 없는 한 은사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여러 은사들 중의 하나이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의 일부를 이룬다(고전12:10-12). 방언은 어떤 신자가 그것을 통해 그리스도의 몸의 한 지체를 이루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 은사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한다(고전12:21). 방언을 버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를 떼어 내버리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자가 고통을 받으면 그리스도의 몸 전체가 함께 고통을 받는다(고전12:26). 방언을 교회의 은사적 구조에서 제거하면 그 구조는 일부를 상실한 비정상적 구조가 된다. 방언은 교회에 나타난 첫 은사로서 교회의 구조가 은사적인 것을 상징하며, 동시에 교회의 은사적 구조와 떼어놓을 수 없는 그 구조의 중요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이다.
F. 방언과 증인 공동체
1. 방언: 증인 공동체가 되는 길, 따르는 표적
a. 방언: 증인 공동체가 되는 길
성령은 증거하시는 영이다. 요한은 성령을 증거하는 영으로 소개한다. 성령이 오시면 예수를 증거하신다(요14:26-27). 누가도 역시 성령을 증거하는 영으로 그린다. 누가는 성령이 임하심은 “증인”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한다(행1:8). 오순절 날 임하신 성령의 능력은 복음 증거와 불가분의 관계를 갖고 있는 기관인 혀를 통해 적절하게 현시된다. 루터(M. Luther)는 성령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영”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증거의 영이신 성령이 교회에 주시는 방언은 교회로 하여금 능력있고 열정적인 증인공동체가 되게 한다. 오순절 날에 증거의 영이신 성령이 충만하게 임했다. 다락방에 모였던 교회의 모든 지체들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taV megalei'a tou' qeou')을 말했다. 교회는 증거하시는 영인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며 태어난 것이다. 교회는 외향적 “증인 공동체”다. 교회는 오순절에 증인 공동체로 태어났다. 교회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의 일에 대한 “증인 공동체”(witnessing community)로 태어났다. 성령께서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깊은 곳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의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경험한 성도들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핍박을 무릅쓰고 사랑과 기쁨으로 담대하게 세상을 향해 방언을 말하며 증거한다. 성령이 임하실 때 “친밀함”(intimacy)과 “확신”(confidence) 그리고 능력(power)이 함께 역사한다. 시무어 공동체에게 오순절의 불의 혀들은 불타는 것처럼 열정적이고 성령 충만한 증인들을 의미했다. 방언은 교회가 증인 공동체가 되는 길이다.
b. 방언: 증인 공동체에 따르는 표적
방언은 증인 공동체에게 따르는 표적(sign)들 중의 하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나가서 전파할 때 그 따르는 표적으로 그 내용을 확실하게 증거하셨다(막16:20). 방언이 증인 공동체에 표적으로 따랐다. 시무어(W. J. Seymour)의 공동체는 성령침례를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기름 부으심을 유지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이라고 인식했다. 기름 부으심을 유지하는 길은 지속적인 복음 증거로 이해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침례를 받은 자들이 나가서 이 복음을 전할 것을 원하신다. 그러면 방언을 포함하여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들이 따를 것이다(막16:17). 방언은 교회가 증인 공동체임을 상징한다.
2. 방언: 증인 공동체의 선교의 유익한 길
a. 방언: 초대 교회 선교의 유익한 길
오순절의 “다른 방언”, 즉 “다른 혀”(e&tevra glw'ssa)는 다양한 지역에서 온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방편이 되었다. 오순절 날의 방언현상은 방언을 통해 언어의 장벽을 넘어 복음이 전파되는 선교의 예를 보여준다. 칼빈(J. Calvin)에게 오순절 성령 강림에 의한 방언은 복음 전파를 가장 짧은 시간에 폭넓게 알리는 최선의 수단이었다. 사도들이 말한 방언은 신속한 복음 전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성령께서 주셨던 그들이 알지 못했던 기존의 알려진 언어였다. 칼빈은 각국의 다양한 언어들을 복음의 문을 닫아 버리게 되는 장애물로 보았다. 그래서 그는 사도들이 방언의 은사를 받지 못했다면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간파했다. 다른 방언들은 문화적 언어적 차이를 초월하여 모든 혀들로 하여금 예수를 그리스도로 인정하게 하려는 선교적 방언이다.
b. 방언: 현대 교회 선교의 유익한 길
방언은 증인 공동체의 선교의 유익한 길이다. 방언은 교회가 언어적, 인종적 장벽을 넘어 복음을 전파하는 길이다. 찰스 파함(C. F. Farham)은 방언이 이 세상 언어로서 선교적 언어라고 보았다. 방언을 받아 선교한다면 선교지 언어를 배우기 위해 보내야 하는 세월과 노력을 아낄 수 있다고 보았다. 시무어(W. J. Seymour)에게도 방언은 기본적으로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담긴 선교적 방언(missionary tongues)이다. 시무어 공동체는 새 방언을 말할 때 비로소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공동체에게 하나님은 사도적 신앙 운동을 통해 새 방언으로 무장된 선교사들을 파송하심으로써 선교적 문제를 해결하시고 계셨다. 방언은 현대 증인 공동체의 선교의 길이다.
3. 방언과 하나님의 선교
a. 방언과 하나님의 선교 주도권
방언은 증인 공동체인 교회의 선교의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상징한다. 러셀(Letty M. Russell)이 말했듯이 방언은 교회의 선교가 사람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임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하나님의 선교는 철저하게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룩하시는 일이다. 뎀스터(M. Dempster)에 따르면 “방언”은 인종적, 경제적 장벽들을 넘어서는 데 있어 하나님의 주도하심에 동반되며, 또한 이러한 주도하심의 결정적 “표적”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 중요하다.
b. 방언과 선교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또한 방언은 선교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언어의 사람들이, 온 천하 사람들이 다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받기를 바라신다. 누가는 오순절에 “천하 각국으로부터” 경건한 유대인들과 유대교에 들어 온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다른 방언”을 들었다고 보고한다(행2:5, 10). “다른 방언[혀]”은 하늘아래 있는 모든 나라와 민족을 상징한다. 오순절의 “다른 방언[혀]”(e&tevra glw'ssa)는 증인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모든 혀”(pa'sa glw'ssa)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교의 시작이었다(빌2:11).
G. 요 약
방언은 교회의 탄생의 표적이고, 교회의 단일성을 상징하며, 교회가 은사적 공동체임을 경험시키며, 증인 공동체임을 천명한다.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 방언을 말하며 태어났다. 사도들을 포함한 120명은 오순절에야 비로소 교회를 이루었다. 성령께서 오순절 날 어머니처럼 교회를 낳아 시작시키셨다. 방언은 아기의 첫 울음이 신생의 표적인 것처럼 교회의 시작을 알리는 표적(sign)이었다. 방언은 교회가 태어났으되 살아있는 생명체로 태어났음을 알린 표적이었다.
방언은 교회가 목회자와 평신도의 조화에 의한 단일 공동체임을 상징한다. 교회의 단일성은 목회자와 평신도 중 어느 한 쪽이 배제되거나 억눌림 당함 없이 이루어져야 한다. 오순절 방언은 교회가 목회자와 평신도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억누름 없이 하나 되어야 함을 보여주었다. 방언은 교회가 말씀과 은사의 조화에 의한 단일 공동체임을 상징한다.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한 것은 정서와 더불어 “선포적 가사를 갖는 성악”이었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이 다같이 “방언” 은사로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한 것은 말씀과 은사가 조화를 이루는 교회의 단일성을 상징한다. 방언은 교회의 다양하면서도 단일함을 상징한다. 방언은 또한 교회로 하여금 인종과 민족을 초월하여 하나임을 나타낸다.
교회는 머리로부터 지체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교회에 주어지는 방언의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성은 교회의 머리로부터 지체들에게로의 방향성을 드러낸다. 예루살렘교회적 방언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고린도교회적 방언은 통역될 때 사적이든 공적이든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으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교회는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의 방향성도 갖는다. 교회의 각 지체들인 신자들은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향하여 자라나야 한다(엡4:15). 방언의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으로의 방향성은 교회의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으로의 방향성을 드러낸다. 방언은 교회의 지체들이 하나님께로 향하는 길인 기도와 찬양의 한 형태이다.
방언은 교회가 아기처럼 연약한 존재임을 말해준다. 방언은 교회의 연약함을 드러내는 동시에 교회의 능력의 기원이 성령임을 알게 한다. 방언은 또한 연약한 교회의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나타낸다. 방언은 교회가 거룩하면서도 동시에 거룩하지 못한 공동체임을 말해준다.
방언은 교회의 첫 은사였으며, 교회의 은사적 구조를 상징하며, 그 구조의 일부를 형성한다. 방언은 성부께서 성자에게 주시고, 성자께서는 성부께 받아서 교회에게 주신 “선물”이신 성령께서 교회에게 “주신” 첫 은사였다. 교회의 구조는 은사적이다.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성령께서 주시는 카리스마를 갖으며 그리스도의 몸을 이룬다. 성령의 자유에 의해 주어지는 은사는 공동체에 봉사하고, 공동체를 세우기(교화하기) 위한 것이다. “은사와 제도” 사이의 딜레마를 청산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사역에 의한 “은사적 구조”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을 추구해야한다. 오순절에 “은사적 구조”로 형성되었으며, 구조는 유동적이고 관계적이다. 교회는 이 은사적 구조의 도움을 받아 은혜를 다른 이들에게 전달하는데 도움을 준다. 방언은 교회의 은사적 구조의 상징이면서, 동시에 떼어낼 수 있는 단순한 기호가 아닌 기호가 지시하는 것 자체의 떼어낼 수 없는 부분을 형성한다.
방언은 교회가 증인 공동체가 되는 길들 중의 하나이며, 동시에 증인 공동체에게 따르는 표적들 중의 하나다. 방언은 증인 공동체의 선교의 유익한 길이이며, 증인 공동체인 교회의 선교의 주도권이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음을, 선교가 근본적으로 인간의 선교가 아닌 하나님의 선교임을 각인시킨다. 방언은 증인 공동체인 교회를 통해 하늘 아래 모든 나라들의 “모든 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선교를 알리는 힘차고 청아한 종소리다.
'오순절주의 방언연구 (PhD논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연구 8: 방언과 종말 (0) | 2017.06.11 |
---|---|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연구 6: 방언과 구원, 성화 (0) | 2017.06.11 |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연구 5: 방언과 창조: 인간론, 죄론을 중심으로 (0) | 2017.06.11 |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연구 4: 방언과 계시 (0) | 2017.06.11 |
오순절주의자들의 방언연구 3: 방언의 삼위일체 하나님적 특성 (0) | 2017.06.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