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 방언과 계시
1. 방언의 종류
a. 새 방언
마가복음 16장 17절에서 귀신축사와 신유 등과 함께 언급되는 방언은 “새 방언”(kainh glw'ssa)이다. 로드만 윌리엄스에게 “새로운”은 “그 이전에 존재하지 않던”을 의미한다. 그는 헬라어의 “새로운”(kainov")이라는 단어의 반대말이 “오래된 혹은 옛날의”(palaiov")임을 지적하며 “새 방언”을 추가적인 언어가 아니고 결코 말해진 적이 없는 영적인 말로 규정했다. 그러나 “새로운 방언”은 오순절 방언과 연결될 가능성도 존재한다. 오순절 방언이 실제적으로 교회에 주어진 최초의 방언이었기 때문이다. 현상적/기록적으로 최초의 방언이 “새 방언”일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 방언은 언어적인 것일 수도 있다.
“새 방언”(new tongues)은 말하는 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사실을 본인과 타인이 확신할 수 있는 표적이 된다. 마가는 믿는 자들에게 새 방언이라는 표적이 따를 것이라고 말한다. 파함은 “방언은 하나의 은사(gift)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 믿는 자라는 표적(sign)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시무어의 공동체에게도 방언을 말하는 것은 말하는 자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표적이나 증거가 된다.
새 방언은 믿음의 사건 즉, 회심에 후속한다. “믿는 자에게 따른다”는 말을 분석해보면 “믿음”과 “표적” 사이에는 논리적 순차성 혹은 단계성이 존재한다. 믿음이 선행하는 원인이 되고 표적이 후행하는 결과가 된다. 이런 논리적 순차성은 양자 사이의 시간적 순차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빠라꼴루테오”(parakolouqevw)는 “-곁에”를 의미하는 “빠라”(parav)와 “따르다”를 의미하는 “아꼴루테오”(a*kolouqevw)의 합성어로서 “바싹 따르다”(to follow closely)로 해석될 수 있으며, 나아가 “반드시 따르다”로 해석될 수 있다. KJV는 “follow”로 해석함으로써 순차적 해석을 택했다. 순차적 해석에 따르면 새 방언은 믿음을 전제로 삼는 회심이후의 제 2차적 체험(논리적으로든 시간적으로든)이 된다.
물론 믿음과 표적의 동시적 해석도 가능하다. “빠라꼴루테오”를 “동반하다”(accompany closely), 또는 “믿음이 표적을 동반한다”로 해석한다면 그것은 동시성적 해석이다. NIV는 “accompany”로 해석함으로써 동시적 해석을 취했다. 동시적 해석을 취한다면 새 방언은 모든 믿는 자가 믿음과 동시에, 즉 회심과 동시에 말할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러나 그 약속을 받은 제자들은, 적어도 베드로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었다. 그들은 오순절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동시적 해석보다는 순차적 해석이 더 타당하다.
새 방언적으로 말하면 신자는 누구나 방언을 말할 수 있다. 믿는 자에게 새 방언이 따른다는 것은 “절대성”(absoluteness)을 갖는가 아니면 “가능성”(possibility)을 갖는가?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새 방언이 “반드시” 따르는 것인가? 아니면 신자들에게는 누구에게나 새 방언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인가? 절대성의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역으로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자는 신자가 아니다”라는 명제도 수긍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방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대신 구원의 수단이 되어버린다. 그러므로 절대성의 입장은 불가한 것이다. 그렇다면 가능성의 입장에서 신자에게는 누구나 방언을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거나, 신자라도 방언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거나, 방언을 말하지 못하는 신자도 언젠가는 방언을 말할 수 있다는 개방적 해석(open interpretation)이 타당하다.
새 방언은 그리스도와 관련된다. 마가는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 방언이라는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을 사용하시는 것으로 묘사했다. 마가는 제자들이 나가서 복음을 전파할 때, 그리스도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거하셨다고 기록했다(막16:20). 그리스도께서 새 방언이라는 표적을 사용하셔서 제자들이 증거하는 복음이 옳다는 것을 확증하신다. 물론 최종적으로 새 방언을 말하는 존재는 믿는 사람이지만, 방언을 촉발시키고, 새 방언을 사용하시는 주체는 그리스도다.
새 방언의 방향은 불분명하다. 마가는 제자들이 나가 복음을 전파할 때, 따르는 표적들로 그 복음을 확증하셨다고 전한다. 제자들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했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새 방언을 말하게 하심으로 불신자들에게 제자들이 전파하는 내용이 진정한 것임을 확증하셨다. 그런데 마가는 새 방언이 사람들에게로 향한 것이었는지, 하나님께로 향한 것이었는지 언급하지 않는다. 새 방언은 하나님께로든 사람에게로든 두 방향으로 해석될 가능성을 갖는다. 시무어의『사도신앙』를 보면 마가적, 오순절적 그리고 고린도적 방언 중에서 자기 공동체에 발생하는 방언을 어느 곳에 귀속시키야하는지에 대한 고민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오하이오의 륍톤(Rev. Levi R. Lupton)은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근거로 자기 공동체에 발생하는 방언을 오순절적 방언으로 규정했다. 그런데 시카고의 한 오순절 공동체는 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하는 것을 근거로 자기들에게 임하고 있는 방언이 소수에게만 임하는 고린도전서의 은사적 방언은 아니라고 보았지만, 륌톤과는 다르게, 사람에게 보다는 하나님께 향하는 것을 근거로 자기들에게 임하고 있는 방언을 마가적 방언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b. 탄식 방언
바울은 성령의 탄식 기도에 대해 언급한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 우리가 빌 바를 알지 못하되 성령이 우리를 위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간구하신다(롬8:26-27). 그것은 성령의 중보 기도다. 탄식은 성령의 기도의 한 유형이다. 본문에서는 미래의 영광과 현재의 탄식이 공존한다. 기도는 우리의 종말적 현존의 연약성 속에서 수행된다. 연약함은 “고난”(suffering)과 관련되기도 한다. 그런 분석은 바울의 현재의 고난과 미래의 영광 대비에서 볼 때 정확한 것이다.
로마서의 성령의 기도는 방언과 암시적으로 연결된다. “말할 수 없는 탄식”(stenagmoi'" a*lalhvtoi")에서 고든 피는 “말할 수 없는”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inexpressible)으로 해석한다. 시무어의『사도신앙』에는 영어로는 충분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본 사람의 간증이 실리기도 했다. NRSV나 NASB가 “too deep for words”로 해석한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브룸백(Carl Brumback)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을 인간의 “지적인 이해로 알 수 없는”으로 해석하며 그 탄식을 방언기도의 한 예로 간주한다. 오리겐은 이 성령의 탄식에 의한 기도를 일종의 “사적인 방언 기도”(private praying in tongues)로 해석했다. 또한 헤밀턴(Mamilton), 델링(Delling), 스땅달(Stendahl), 고든 피 등도 그와 같은 견해를 표명했다. 그러나 케제만(Käsemann)은 “공적 방언 기도”로 해석했다.
탄식 방언은 인간의 기도인 동시에 성령의 기도다. 고든 피는 그 구절이 “성령께서 방언을 통해 기도하신다”는 말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러나 바울은 명확하게 “성령께서 탄식으로 간구하신다”라고 말한다. 탄식 방언은 인간을 통한 성령의 탄식 기도다.
탄식 방언은 회심 이후에 가능할 수 있다. 탄식 방언은 불신자를 구원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이미 구원받은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롬8:23)인 성도의 육체의 구속을 위한 것이다. 성령의 탄식 기도가 성도들을 위한 것임은 구원적 회심 후에 주어지는 후속적 축복임을 주장하는 오순절신학의 입장을 지지할 수 있다. 이상환은 성령의 탄식 기도를 방언과 연결시키고, 탄식 방언이 구원받은 자들에게 가능한 것에 착안하여, 탄식 방언의 회심 이후의 후속성을 논리적으로 산출해 냈다. 보통 바울에게 있어서 은사들은 회심과 더불어 주어지는 것으로 간주되어왔다. 그의 연구는 바울의 은사론에 대한 그런 편향적 시각을 극복하여 그것에 대한 오순절적 해석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는 점에서 평가를 받을만하다.
c. 다른 방언과 각종 방언
누가는 오순절날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e&tevra glw'ssa)으로 말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했다(행2:4). 바울은 교회 중에 세운 직분 중에 “각종 방언(gevnh glw'ssa)을 말하는 것”을 언급했다(고전12:28). 다른 방언과 각종 방언의 상이점과 공통점을 살펴보고 그것을 통합하여 해석한다.
“다른 방언”과 “각종 방언”은 서로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오순절 날의 방언은 “다른 방언”(other Tongues)으로 “지성적인 언어”(intelligible language)였으며, 고린도 전서 14장의 방언은 “알지 못하는 방언”(unknown Tongues)으로 황홀경적이고 “음성적 발성”(ecstatic, vocal utterances) 혹은 “알지 못하는, 천상적 언어”(unknown, heavenly languages)다. 브루스(Bruce) 교수는 “바울의 기술에 의해 판단하건대(고전14:23) 고린도인들의 방언은 이것(예를 들면, 오순절 현상)과 매우 다르다”고 말한다. 또한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이 그 방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지 못할 때(그가 또한 통변의 은사가 없는 한) 그 방언은 황홀경적 말함(ecstatic speech)의 특별한 유형인 것으로 나타난다. 사도행전 2장에 언급된 오순절 날 베드로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다양한 언어를 말하는, 다양한 곳으로부터 온 사람들에게 이해되었을 때 그 곳에는 특별한 드러남(unusual manifestation)이 있었다”고 썼다. 바렛(C. K. Barrett)은 고린도 전서 13장 1절의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이라는 언급 중에서 “사람의 방언”을 인간의 지성적 언어를 “천사의 말”을 방언이라고 보았다. 더필드는 “각종 방언”(different kinds of tongues)을 사도행전적인 “인간의 언어”로서 방언, 고린도전서적인 하늘에 기원을 둔 “천사의 방언” 등의 다양한 방언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신약 성경에서 방언을 언급할 때 그것은 언제나 식별 가능한 인간(외국인)의 언어를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파함은 “다른 방언”이나 각종 방언을 “다른 언어들”(other languages)로 해석했다. 즉 “다른 방언”을 “여러 외국어들”(various foreign languages)로 해석한 것이다. 스토트(John R. W. Stott)는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이나 사도행전에서 누가나 방언 현상을 기술할 때 같은 헬라어 단어들을 사용하고 있음을 제시한다. 그는 “통역하다”라는 의미의 헬라어 “헤르메뉴오”(e&rmhneuvw)는 알려진 외국어를 통역하는 것을 의미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러나 같은 단어가 다른 문맥들에서 반드시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볼 수 없다.
두 방언은 언제나 비언어적/영적인 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로드만 윌리엄스는 모든 경우의 방언은 영적인 발성이었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 원천은 성령이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에게 방언은 일상 언어인 평범한 말이 아닌 초월적인 말이었다. 무아지경이란 말을 사용한다면(많은 방언 통역자들이 사용하듯이), 이는 불합리한 의미에서가 아니라 합리성을 초월하는 의미에서 무아경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순절에는 술 취한 말로 해석 되어지는 외적인 특징이 있었을지라도 그 내용을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이었다. 로드만 윌리엄스는 “각종 방언”을 인간의 언어가 아닌 영적인 말로서 다양한 어조/성격의 방언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는 “각종”(kinds)이라는 말은 언급된 방언이 항상 똑같은 성격을 지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다양한 방언이 말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나타남으로 인한 방언에는 제한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에게 영적인 발언은 그 종류에 있어 다양성을 띈다. 그러나 오순절적 방언은 선포였으며,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였다. 윌리엄 사마린(William Samarin)은 모든 방언을 무언가를 전달하지 않는 비언어적인 것(non-linguistical)으로 보았다. 만약 그를 따른다면, 아모스 영(Amos Yong)이 말한 대로, 방언의 내용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릴 것이다.
오스왈드 샌더스(J. Oswald Sanders)는 오순절 방언과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비교하고 차이점들을 제시했다. 오순절에는 모든 사람이 방언을 말했지만, 고린도에서는 모든 사람이 방언을 말하지는 않았다. 오순절에는 모든 사람이 방언을 이해했지만, 고린도에서는 모든 사람이 방언을 이해하지는 못했다. 오순절에 방언은 사람들에게 향해졌지만, 고린도에서는 하나님께 향해졌다. 오순절에 방언은 신자들을 위한 표적이나 확증이었지만, 고린도에서는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었다.
오순절 방언 |
고린도 방언 |
모두 [동시에] 말했다. |
모두 [동시에] 말하지 않았다. |
모든 사람이 이해했다. |
모든 사람이 이해하지는 못했다. |
사람들에게 말했다. |
하나님께 말했다. |
통역자가 필요 없었다. |
통역자가 필요했다. |
신자들을 위한 표적 혹은 확증이었다. |
불신자들을 위한 표적이었다. |
방언은 때로는 언어적이며, 때로는 비언어적이다. 방언을 언어적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편향적인 것이며, 비언어적으로만 이해하는 것도 편향적이다. 오순절운동의 창시자 파함은 방언을 언어적으로만 이해하였으며, 그 결과 시무어의 집회에서 발생했던 비언어적 방언을 마귀가 주는 현상으로 간주하는 오류를 범했다. 반면에 최근 프랑크 마키아는 언어적 방언을 신화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있다. 그는 제노랄리아적 이적의 가능성을 부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는 제노랄리아가 고통당하는 피조물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적 임재의 신비를 포착하고 표현하는 인간 언어의 한계들을 드러낸다고 보고 글로솔라리아를 선호한다. 나아가 그는 언어적 방언의 선교적 기능을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의 신화(myth)로 간주하고, 언어적 방언이라는 신화를 현실화하는 비신화(demythologization)가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방언을 상징으로 해석함으로써 성령침례와 방언의 절대적 관계성을 약화시려는 마키아를 비판하며 증거적 방언을 사수하는 사이몬 찬(Simon Chan)도 증거적 방언을 사랑하는 둘 사이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idiolect) 비언어적인 것으로만 해석한다. 두 사람은 성령침례와 방언의 관계성을 방어하는 정통 오순절 신학자이면서 방언의 언어성을 무시하고, 비언어적으로만 해석하는 편향성을 드러내고 있다. 언어적인 방언과 비언어적인 방언을 상황에 따라 선택하는 주체는 사람이 아닌 하나님이시다. 이상환은 마키아의 편향성을 비판하며 “방언의 언어적 가능성은 성령 하나님의 가능성이다. 하나님의 상황판단에 의하여 특정한 시간과 장소와 성도에게 얼마든지 현실화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라고 말했다. 성령은 바람처럼 인간이 예측할 수 없게 자신의 뜻에 따라 선택하실 수 있다.
두 방언은 현상적으로 제노랄리아와 글로솔라리아라고 명명된다. 스탠리 Mr. 버거스(Stanley Mr. Burgess)는 중세기에 나타난 방언 현상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는 “제노랄리아, 헤테로글로솔라리아, 글로솔라리아”라는 세 가지의 방언 유형을 제시했다. 다른 방언은 버거스의 분류에 따르면 제노랄리아로 분류될 수 있다. “제노랄리아”(xenolalia)는 발화자가 자기 모국어가 아닌 배우지 않은 타국어로 말할 때, 청자가 자기 모국어로 알아듣는 현상이다. 파코미우스(St. Pachomius)는 전혀 배운 적이 없는 라틴어와 희랍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고 전해진다. 이 현상의 성경적 예로 사도행전 2장에 등장하는 오순절 날의 방언현상이 거론되어 왔다. 12세기 빙엔의 힐데가르트(Hildegard von Bingen)는 전혀 배우지 않은 라틴어로 음악과 의학 그리고 신앙적인 주제들에 대해 많은 책을 썼다. 수도원장 도미니크(St. Dominic)는 독일인들을 만나 “기도하고나자 곧 바로 독일어를 말했으므로 독일인들이 몹시 놀랐다”고 전해진다. 뉴욕에 살았던 루시 리서맨 자매(Sister Lucy M. Leatherman)는 1906년에 아랍어 방언을 말했다. 그녀는 로스엔젤레스 아주사 거리의 시무어의 집회에서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 며칠 후 그녀는 교회로 가다가 아이들에게 말하고 있는 여인을 만났다. 그 여인은 리서맨이 받은 방언의 소리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리서맨이 그 여인에게 방언을 말하자 그 여인은 리서맨에게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자기 자신을 주셨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여인은 시리아의 베이루트에서 온 아랍인이었다. 리서맨은 배우지 않은 아랍어를 말하는 은사를 받았던 것이다. 헨리(Henry McLain)는 아주사 집회에서 성령침례를 받고 방언을 경험하고 위티(Whittie)에 갔다. 그는 길가에서 전도하다가 법정에 서게 되었다. 그는 법정에서 방언을 말해버렸으며, 소란죄로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사람들을 모아놓고 그들을 향해 방언을 말했다. 그런데 그 죄수들은 거의 다 멕시코인들이었다. 헨리가 방언으로 말하자 그들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헨리는 자기가 말하는 방언의 뜻을 알지 못했다. 그는 이사야서 55장을 멕시코 말로 읽어주었으며, 그는 그 사실을 그들에게 들어서 비로소 알았다. 시무어 집회에서 방언을 말하게 된 한 노동자는 길가에서 전도하다가 경찰에 의해 병원으로 압송되었다. 그는 그 병원에서 밤새 병자들에게 방언들로 말했다. 그 병자들 중에 한 사람은 그 노동자의 방언들 가운데서 자기에게 익숙한 아프리카의 크루어(Kru language)를 알아듣고 그 노동자에게 통역해 주었다. 그리고 법정에서 그 노동자는 이탈리아어 방언을 말했고 판사들 중에 한 사람이 그 것을 알아듣고는 무죄판결을 내렸다.
“헤테로글로솔라리아”(heteroglossolaia)는 화자가 자국어로 말하는데 외국인 청자가 자신어로 알아듣는 현상이다. 아모스 영(Amos Yong)은 이 현상을 “아꼬라리아”(a*kolaliva)라고 칭한다. 1200년대 패두아의 안토니(Antony of Padua)는 이태리말로 설교할 때 외국인들이 각각 자국어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1400년대 빈센트 페리어(Vincent Ferrer)는 자국어인 라틴어로 설교하는 동안 프랑스인, 이태리인 등이 그 설교를 각각 자국어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이 현상은 언어적 현상이란 면에서 제노랄리아와 묶어질 수 있다.
각종방언은 버거스의 분류에 따르면 글로솔라리아로 분류될 수 있다. “글로솔라리아”(glossolalia)는 헬라어구 “e*n glwvssai" lalhvin”에서 온 것이며 “speaking in tongues”으로 번역된다. 글로솔라리아는 화자가 비언어를 말할 때 통역 은사를 받은 청자가 그 뜻을 알아듣는 현상이다. 빙헨의 힐데가르트(St. Hildegarde)는 알지 못하는 언어로 노래를 부르며, 글을 썼다고 전해진다.
명 칭 |
화 자 |
청 자 |
언어 공동체 |
Xenololia |
타국어 말함 |
자국어로 들음 |
다른 언어공동체 |
Heteroglossolalia |
자국어 말함 |
자국어로 들음 |
다른 언어공동체 |
Glossolalia |
비언어 말함 |
알아 들음(통역) |
같은 언어공동체 (다른 언어공동체) |
두 방언은 신학적으로 표적방언과 은사방언으로 명명된다. 정통 오순절주의자들은 두 방언을 “표적 방언”과 “은사 방언”으로 분류해왔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방언을 “은사 방언”(the gift of tongues)과 “증거 방언”(the witness of tongues)으로 구분했다. 그 공동체는 성령침례를 받을 때 은사 방언을 말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증거 방언을 반드시 말하게 된다고 보았다. 미 하나님의 성회의 “16개 항의 근본신조”(Our 16 Fundamental Truths)는 제 8 항 “성령침례의 최초의 육체적 증거”(The Initial Physical Evidence of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에서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최초의 육체적 표적”(the initial physical sign)으로서 “다른 방언”(other tongues)과 “은사 방언”(the gift of tongues)을 구분한다. 그 신조는 두 방언이 “목적과 사용”(purpose and use)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고 주장한다. 가스턴(W. To. Gaston)은 두 방언을 “표적 방언”(tongues as evidence)과 “은사 방언”(the gift of tongues)이라고 명명했다. 그에 의하면 표적 방언은 수동적인 인간을 성령께서 능동적으로 통제함으로써 발생한다. 그리고 성령께서 능동적으로 주시기 때문에 그 방언은 신자라면 누구나 제한 없이 받을 수 있으며 그 행사에 제한이 없다. 반면에 은사 방언은 인간의 마음에 의해 통제되며, 그 행사는 제한된다. 조용기 목사도 사도행전적 방언을 “표적 방언”으로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은사 방언”으로 신학적 혹은 기능적으로 나누었다. 그에게 “표적 방언”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침례의 경험과 함께 나타나며 성령침례에 대한 최초의 육체적 증거(initial physical evidence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의 표적(sign)으로 이해된다. 최초 증거 교리는 파함에게서 시작되었으며, 주로 정통 오순절 교회들에서 주장된다. “은사 방언”은 고린도전서에서 성령의 여러 은사들 가운데 한 은사(a gift)로 등장한다. 조용기 목사는 방언은 성령침례와 동반되나 그 후에는 계속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방언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은사로서 받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은사 방언을 받은 사람은 원하기만 하면 방언으로 말할 수 있다. 사이몬 찬은 표적 방언과 은사 방언의 구분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신앙 교리들”(tenets faith) 중의 하나로 간주된다고 말했다.
두 방언은 그 근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방언은 인간의 영이 하나님의 영을 만나는 경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오순절 날의 방언은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임하시고, 그들에게 말하라고 주심으로써 가능해진 것이었다(행2:4). 또한 고린도전서에 있어서도 방언은 성령께서 주시는 것이며(고전12:11, 14:2; cf. 롬8:26-27), 인간의 영이 말하는 것이다(고전14:14-15).
방언은 그것이 인간적 언어형태이든, 초월적 언어(비언어)형태이든 비습득적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방언은 발화자가 그 이전에 습득한 것이 아니다. 또한 방언은 발화자가 점차 그것을 습득해 나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두 방언은 “성령께서 능력으로 신자들에게 그 이전에 전혀 배운 적이 없는 언어(초월적이든, 인간적이든)를 말하도록 주시는 것”이라는 것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사도신앙에 따르면 방언을 말하게 된 어떤 사람이 스스로 특별한 소리를 내보고 싶은 충동에 이끌려, 방언이 그쳤을 때, 자기가 소리를 만들어 내려고 시도했지만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방언은 비습득적인 것이기 때문에 좌뇌보다는 우뇌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뮬러(D. C. Mueller)는 방언을 말하는 자들은 방언을 말하지 않는 자보다 우뇌적인 성향을 갖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우뇌적 성향을 갖기 때문에 방언을 말하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일반적으로 좌뇌(left hemisphere)는 언어와 사고를 담당하고, 우뇌(right hemisphere)는 감정, 의지, 상상, 공간지각을 담당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뮬러는 방언을 성향적으로 논리적 사고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이 택하게 되는 저급한 것으로 평가했다. 필립초크(R. P. Philipchalk)는 적외선 온도 측정기를 통해 방언을 말할 때 좌뇌보다는 우뇌가 더 온도가 상승하는 것으로 보아 우뇌가 더 활발하게 움직인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밝혀냈다. 그런데 방언을 말함이 우뇌를 활성화시킨다는 것은 말하는 자의 근본적인 성향이나 기질이 우뇌적, 즉 비논리적인 것을 증명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방언이 좌뇌에서 발생하는 습득할 수 있는 일반 언어가 아님을 증명한다. 습득할 수 있는 일반 언어를 말할 때는 당연히 좌뇌가 활성화될 것이다. 방언은 습득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을 말할 때 우뇌가 활성화 되는 것이다.
사도행전2장적 방언과 고린도전서적 방언은 이 세상 언어라는 점과 비언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형식적 공통성을 갖는다. 그 공통성은 두 방언이 선포와 찬양으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날의 방언은 기본적으로 선포였다. 사도들을 포함한 첫 교회의 모든 구성원들은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했다(행2:11). 은사인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한 것(laluvntwn tai'" h&metevrai" glwvssai" tav megalei'a tou qeou)은 문자적으로 보면 선포다. 크레머(J. Kremer)와 로버트 멘지스(Robert P. Menzies)에 따르면 LXX에서 taV megalei'a는 대부분 사람들에게 연설하는 선포 동사들과 관련된다. 로버트 멘지스는 “다른 방언들”이 단순히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이해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 다음 그것들이 선포(proclamation)였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다른 방언들”의 선포성은 “하나님의 큰일”(taV megalei'a tou' qeou')이라는 영감 받은 말의 내용(the content of the inspired speech)에 의해 확증된다고 주장했다. 오순절의 방언은 화자가 사전 지식 없이 청자의 언어를 말하는 제노놀리아(xenolalia)였으며, 제노롤리아를 통해 하나님의 큰일이라는 내용이 선포되었다.
하나님의 큰일 말함이 오직 찬양이었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 바네트(Donald Lee Barnett)는 오순절날 사도들의 방언 찬양으로 해석했다. 그는 120여명이 한꺼번에 설교했다면, 듣는 자들이 그 내용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바네트는 그렇게 주장했으면서도 어떻게 각 청자들이 자신이 난 곳 언어로 알아들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시끄럽고 혼란스러워 그 내용을 다알아듣지는 못했겠지만 많은 언어들 가운데서도 자기에게 익숙한 말소리는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는 듣는 자들 각자가 자기가 난 곳 언어 소리를 들은 것 자체는 부인하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면 그의 주장과는 반대로 제자들이 각 나라말로 설교했는데, 듣는 자들이 그 내용을 혼란스러워 다 듣지는 못했지만, 그 내용의 대략을 파악할 수 있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이 추측은 누가가 오순절 방언의 내용을 간단하게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요약한 것과 더 맞아 떨어진다.
하나님의 큰일 말함이 찬양이었다면, 선포적 내용을 갖는 것이었다. 브루스(F. F. Bruce)는 오순절 방언을 한편으로 “황홀경적 외침들”(the ecstatic exclamation) 혹은 “하나님을 찬양함”(the praise of God)으로 해석했다. 그는 다른 한편으로 그것이 팔레스틴에서 유대교적 권위를 상징하는 종교적 형식인 “이스라엘아 들으라”로 시작되는 “쉐마”와 같았다고 보았다(신6:4). 브루스는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한 것이 “찬양”과 “선포”라는 이중적 성격을 가졌던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폴힐(John B. Polhill)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하고 있었다”(declaring)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의 큰일”은 오순절날 “그리스도인들이 말한 내용”(the content of the Christians’ speaking) 전체에 대한 “유일한 힌트”(only hint)였다. 그는 “하나님의 큰일 말하는 것”을 선포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폴힐은 또한 그들의 증언은 “찬양의 언어”(the language of praise)이었다고도 말했다. 그는 하나님의 큰일 말함을 바울서신과 연결하여서 찬양으로도 보았다. 그는 성령에 충만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표현이 바로 찬양이기 때문에(엡5:18-19) 오순절의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한 것도 역시 찬양으로 볼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찬양과 선포를 합하여 “찬양의 언어”(the language of praise)라는 이중적인 조합어를 만들었다. 그에게 더 비중 있는 것은 “찬양”보다는 내용을 선포하는 “언어”다. 그래서 “언어의 찬양”(the praise of language)이 아니고, “찬양의 언어”(the language of praise)다. 폴힐은 또한 오순절에 듣는 이적이 일어났다면, 청중들에게 성령침례가 일어난 것으로 보아야 한다면서, 오순절의 이적을 말하는 이적으로 해석했다.
“하나님의 큰일”은 베드로의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오순절 설교의 대략이며, 그 설교를 지시하는 것이었다. 콘첼만(Hans Conzelmann)은 누가가 그 설교들의 내용에 대해 더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그것을 베드로의 설교를 위해 아끼고 있다고 주석했다. 폴힐은 누가가 그렇게 간추려서 언급한 이유를 추정했다. 그에 따르면 누가는 먼저 그 내용을 추상적으로 간추려서 말함으로써 그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유발시키고, 그 다음에 그 전체 내용을 베드로로 하여금 말하게 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미치는 효과를 극대화하려 했다.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다 말했으나 누가가 그것을 “하나님의 큰일”로 간추려 기록하였으며, 베드로의 설교에서 비로소 그 전체 내용을 언급했다는 것이다. 오순절의 방언은 베드로의 설교에서 떼어내어도 좋은 전주(prelude)가 아니라 베드로의 설교에 앞서며 인도한 선창(leading song)이었다.
누가는 방언이 찬양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했다. 누가는 고넬료 집에 모였던 이방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었다고 기록한다(행10:46).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높임”(lalouvntwn glwvssai" kaiV megalunouvntwn toVn qwovn)이라는 어구는 “방언을 말함”과 “하나님을 높임”이라는 어구들의 정확한 관계를 규정하지는 않는다. “방언을 말함”과 “하나님을 높임/찬양”이 동일한 행동이었는지, 아니면 별개의 행동이었는지 그 어구만으로는 판단이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 판단 불가능성은 두 어구가 동일한 행동이었고, 그 전체 구는 “방언으로 하나님을 찬양했다”로 해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시키지는 않는다. 두 어구는 별개의 행동이었을 수도 있고, 반면에 동일한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사도행전 2장 11절의 기사는 두 어구의 관계에 대한 판단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방언을 들은 각 나라에서 사람들은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도다”라고 말했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laluvntwn tai'" h&metevrai" glwvssai" tav megalei'a tou qeou')에서는 “방언”과 “하나님의 큰일”이 문법적으로 “~으로”라는 수단을 의미하는 여격에 의해 하나로 연결된다. 이런 연결은 “방언을 말하여 하나님을 높임”을 “방언으로 하나님을 높임”으로 해석할 가능성을 열어준다. 두 경우에서 “메가”(mega)는 “찬양하다”라는 동사와 “큰 일”이라는 명사로 분화될 뿐이다.
lalouvntwn glwvssai" kaiV megalunouvntwn toVn qwovn(행10:46)
laluvntwn tai'" h&metevrai" glwvssai" tav megalei'a tou qeou'(행2:11)
두 가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누가의 화법은 에베소의 성령침례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에베소의 열두 명가량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te glwvssai" kaiV e*profhvtouon)라고 기록했다(행19:6). 그 구절을 방언과 예언을 한 행동으로 해석하면 그 의미는 “방언을 말함으로써 예언했다”가 될 것이다. NIV와 RSV는 “they spoke in tongues and prophesied”라고 번역함으로써 두 행동을 하나로 연결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두었다. 방언과 예언을 두 행동으로 해석하면 “방언도 말하고, 또한 예언도 했다”가 될 것이다. KJV는 “they spake with tongues, and prophesied”라고 콤마로서 두 행동을 분리시켰다. 한글 개역성경도 두 행동을 분리시켰다. 방언과 예언을 두 행동으로 해석하면, 그 때의 방언은 예언적 선포는 아니고 찬양이나 기도일 가능성을 갖는다.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은 선포가 될 수 있다. 방언은 통역을 동반할 때 비로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적 선포가 될 수 있다(고전14:4-5, 12, 26-27). 바울에게 있어서 예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며, 방언은 통역이 없을 때 개인적 덕을 세운다. 그러나 방언이 통역될 때 교회의 덕을 세우는 예언적인 선포의 성격을 갖게 된다.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은 분명하게 찬양의 한 형식이다. 바울은 누가와는 달리 분명하게 방언을 찬양과 관련짓는다. 그는 영의 기도와 마음의 기도를 대조시키면서 나아가 영의 찬미와 마음의 찬미를 대조시킨다(고전14:15). 즉 방언은 기도도 될 수 있으며, 찬양도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영으로 찬미”(yalw tw'/ pneuvmati)는 방언의 한 형태다.
2. 방언의 방향성
a. 방언의 하나님께로의 방향성
방언은 한편으로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오순절적 방언은 하나님께 향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오순절적 방언이 “찬양”이었다면 그 방언은 하나님께로 향한 것이었을 것이다. 고린도적 방언은 통역을 동반하지 않을 때 분명히 하나님께 향한 방향성을 갖는다. 바울적 방언은 영으로 하나님께(tw/ qew/) 비밀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고전14:15).
b. 방언의 사람에게로의 방향성
방언은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두 방언의 선포적 기능은 그런 방향성을 드러낸다. 누가는 성령께서 제자들에게 말하라고 주셨고, 제자들은 그 방언을 말했으며, 발화된 방언은 최종적으로 예루살렘에 머물던 사람들에게 들려졌다고 보고한다. 오순절적 방언은 그 근원인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이었다. 고린도적 방언이 통역을 동반할 때는 사람에게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통역을 동반하는 고린도적 방언은 신앙 공동체를 향하여 발화된다. 발화자가 통역은사를 받았을 경우에는 사도행전적 방언이나 고린도적 방언은 발화자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뜻을 내포한다.
c. 방언의 방향의 이중성
방언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라는 양방성을 갖는다. 토니 리히(Tony Richie)는 이런 방언의 이중적 성격을 정확하게 간파했다. 그는 방언은 “신적이거나 인간적이지 않고 신적이면서 인간적이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방언을 “밑으로부터”(from below)만 보면 인간의 실제, 방언을 말하는 것만 볼 수 있으며, 반대로 “위로부터”(from above)만 보면 신적 실제만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두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d. 의사소통으로서 방언
하나님께서는 방언을 통해 발화자에게나, 청자에게 자기의 뜻을 나타내신다. 호르톤(H. Horton)은 방언을 인간의 발성기관을 사용하는 하나님의 영의 마음(the mind of the Spirit of God)의 나타남이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사람이 방언을 말할 때는 그의 영과 발성기관은 활성화 상태이지만, 성령을 통해 작동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이다. 그 방언이 이 세상 언어(제노롤라리아)인 경우, 하나님의 뜻은 통역 없이 발화자를 거쳐 청자(집단이든 개인이든)에게 이해 될 것이다. 그 방언이 초월적 언어(글로솔라리아)인 경우, 하나님의 뜻은 발화자를 거쳐 통역을 통해 청자(집단이든 개인이든)에게 이해될 것이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을 통해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 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다. 신자는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자(the oracle of God)가 된다. 발타자(Hans Balthasar)가 기도와 관련해 말한 것처럼, 방언이 신의 자기 계시 행위로 주어진 때에만 이해될 수 있는 분야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방언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자기표현”(a self-expression of God toward man)의 한 길이다.
사람의 영이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 자기의 뜻을 말할 수도 있다. 바울은 방언을 사람에게 하지 않고, 하나님께 하는 것이라고 규정한다(고전14:2). 바울에게 방언은 때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다. 인간의 영은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 비밀을 말한다(고전14:2). 방언은 때로 인간의 영이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이다(고전14:15). 그런 의미에서 방언은 “하나님을 향한 사람의 자기표현”(a self-expression of man toward God)의 한 방법이다.
방언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에 대한 경험을 표현한다. 방언은 예술 형태, 즉 추상화나 즉흥 음악처럼,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전통적 형태의 결함을 상징하는 다른 창조적 수단에 비유되어 왔다. 사람이 하나님의 신비에 더 가까이 다가갈수록, 자신을 표현하려는 시도는 더 절박해지고, 동시에 점점 더 적당한 표현을 찾을 수 없게 된다. 경험을 이성적으로 숙고하고 전달하는 것은 이미 방언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는 것이기 때문에, 그 경험을 전하려는 이성적인 시도는 결국 방언으로 끝난다. 제노프(Arthur Janov)가 말한 이성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표출하는 “원초적 외침”(primal scream)은 바로 방언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은 경험을 파멸시키지 않은 채 그것을 표현하는 방법이다. 그에게 하나님 경험과 방언을 통한 표현은 하나가 된다. 방언은 사람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 경험을 하나님께 표현하는 것이다.
방언의 그런 양방향성은 하나님과 발화자 사이의 의사소통(communication)을 의미한다.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뜻이 사람에게 전달되기도 하며, 사람의 뜻이 하나님께 전달되기도 한다. 방언은 “하나님과 사람의 상호 표현”(a mutual expression of God and man)의 한 방법이다. 성령은 성부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인간에게 이르고, 인간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 이르는(a Patre ad Patrem; from the Father to the Father) 문이다. 교부적 전통은 성부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 안에서의 움직임과 성령으로부터 그리스도를 통해 성부께 이르는 움직임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특히 바실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이르는 길은 한 성령으로부터 한 성자를 통해 한 성부에게로 이르는 곳에 있다고 보았다. 성령께서 말하게 하시는 방언은 성부로부터(a Patre) 뜻이 인간에게 임하고, 인간으로부터 성부께(ad Patrem) 뜻이 전달되는 길이다. 방언이라는 상호표현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의사소통이 일어난다. 방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의 한 길인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말씀하시고, 인간이 하나님께 말하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이다.
방언을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의사소통은 인간에게 뚜렷하면서도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는다. 방언이 제노롤리아일 때 말하는 사람은 통역의 은사를 받지 못하는 한 그 내용을 알지 못한다. 방언이 글로솔라리아일 때 역시 말하는 사람은 통역의 은사를 받지 못하는 한 그 내용에 무지하다. 하나님께서 통역의 은사를 주시지 않는 한 방언을 말하는 자에게는 하나님께로 향하는 방언이든, 사람에게로 향하는 방언이든 그 내용이 미지의 세계로 남는다. 방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이되 인간의 능력 바깥에서 일어나는, 인간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즉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신비한 소통이다.
e. 방언: 하나님과 사귐, 초청
두 방언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귐을 의미한다. 방언이 성령침례의 최초의 증거이든 그렇지 않은 것이든 그것은 성령의 현존(presence)을 의미한다. 방언은 “신현의 본질에 함께하는 것”(partaking of the nature of theophany)이며, 방언 기도는 의사소통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하고(participate), 함께하는 것(partake)이다. 방언이 통역을 동반하지 않는 경우라도, 바울의 관점에서 방언은 “하나님과의 친밀함”(intimacy with God)을 강화시킨다. 방언은 하나님의 현존에 참여하는 것이며,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며, 하나님과의 친밀한 사귐(communion)이다. 방언의 첫 번째 목적은 하나님과 인간의 초자연적인 교제로 기능하는 것이다. 아모스 영은 방언을 받은 사람이 처음에는 방언을 말하는 자체에 집중하다(innocence)가 두 번째 단계에서 타인을 향한 증거에 집중하며(growth), 마지막으로 성숙한 단계(adept)에서 찬양이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의 연합(divine unity)을 추구한다고 보았다. 방언 말하기는 신랑이 영적 신부와 연합하여 나누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과 사람의 친밀한 사귐의 단순한 상징(symbol)이 아니라, 때로 그 사귐과 떼어놓을 수 없는 사귐의 한 방법(a way or method)이다.
방언이 불신자에게 향해질 때, 그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으로의 초청이다. 오순절의 방언은 예루살렘에 모여들었던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큰일을 선포했다. 그것은 그들을 하나님과의 사귐으로의 초청이었다. 하나님의 거룩한 호흡(성령)은 현존과 능력(power)과 방향성(direction)을 제공한다. 그 성령과의 사귐은 증거와 선교의 능력을 부여한다. 그 사귐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아래 있다는 것에 대한 확증이기보다는 증거와 선교를 위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준다. 그가 언급한 그 방향성은 불신자를 향한 선포적, 선교적인 방언에서 명백해진다. 아모스 영은 방언을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단계를 세 가지로 말하면서 두 번째 단계로서 “성장”(growth)의 단계를 설정했다. 그에 따르면 그 성장의 단계에서 방언을 말하는 사람의 관심은 방언을 말하는 자체에서 타인을 향한 “증거”로 바뀐다. 창조적 말씀(창1장)이든, 생명의 말씀으로서 로고스(요1장), 레마 또는 하나님의 예언적 말씀이든, 신적 말(speech of the divine)이 방언을 통해 증거된다. 그런데 방언은 단지 신적 말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부여의 상징이라는 아모스 영이 말한 것과는 달리 신적 말의 통로가 된다. 바울은 방언이 불신자에게 표적이 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방언이 불신자들을 하나님과의 신비스러운 사귐으로 초청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자를 향한 선포적/선교적 방언은 하나님의 능력의 화려한 과시가 아니라 불신자를 향한 하나님과의 사귐으로의 친밀한 초청이다.
3. 방언의 계시성
초대교회는 읽는 것을 주로 하는 “텍스트 공동체”가 아닌 “듣는 공동체,” 서기관 보다는 예언자 중심적인 “은사적 공동체”였다. 그러나 루터이래로 개신교는 텍스트 공동체가 되었다. 그 텍스트는 열리지 않고 닫힌 텍스트로 이해된다. 그 텍스트를 통하지 않는 직접적인 계시가, 그 텍스트에 담겨있는 것 이외에 더 이상 더해질 하나님으로부터의 계시가 없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들은 현대에도 여전히 인간을 향한 직접적인 성령의 계시가 방언을 통해서도 계속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본 항에서는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는 방언의 계시적 성격과 방언을 통한 성령계시와 성경계시와의 올바른 관계 설정을 다룬다.
a. 방언과 비밀 계시
방언은 때로 비밀을 계시하는 것이다. 바울은 방언은 그 영으로 하나님께 “비밀”(musthvrion)을 말하는 것이라고 보았다(고전13:2). 방언과 관련된 비밀은 무엇인가? 첫째로, 방언으로 말해지는 비밀은 사람이 모르는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곳이라고 통달하시는 분이시다(고전2:10). 하나님의 깊은 곳은 사람들이 알지 못하고 성령만이 알고 계시다. 사람은 하나님의 깊은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곳을 아시며, 하나님의 뜻을 아신다. 그래서 성령은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들을 위해 중보기도 하실 수 있으시다(롬8:27). 하나님의 깊은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숨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kataV qeoVn)이 바울이 말하는 “비밀”일 수도 있다. 이때 방언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것일 수 있다.
둘째로, 그 “비밀”은 “성경”일 수 있다. 레이몬드는 방언에 대해 말하면서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비밀의 말이지만 이미 기록된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모든 비밀(뮈스테리온)이 드러났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용을 모르는 “광적인 횡설수설”이 아니라 분명하게 내용을 아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뮈스떼리온은 이미 드러난 계시의 복음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 뜻을 분명히 모른다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드러나고 숨겨진 두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는 뮈스떼리온에 대한 바울의 용법은 물론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가지 의미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두 가지 측면과 부합된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우리에게 모든 지혜안에서 그 뜻의 비밀을 알려 주셨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심판은 측량할 수 없고 그 방법은 찾지 못할 정도이다(롬11:33). 방언은 성경이라는 계시와 관련된다.
셋째로 고린도전서 2장의 맥락에서 성령이 통달하시는 하나님의 사정, 비밀은 “그리스도”일 가능성이 있다. 바울은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에게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고전2:24). 오순절날 각지에서 온 사람들은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들었다(행2:11). 그 하나님의 큰일은 바로 하나님의 구원사역, 즉 그리스도에 대한 것일 것이다. 베드로는 오순절의 변증적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큰일”을 확대하여 말하였는데, 그 요점은 바로 “그리스도”였다(행2:22-36). 성령께서 오순절 날 방언을 통해 드러낸 일반 사람들이 모르고 있던 “비밀”은 바로 “그리스도”였다. 그래서 방언은 파함이 주장했던 선교적 언어(missiological language)가 될 수 있다. 여기서 논리적으로 더 확대하여 그리스도의 일을 문자로 기록한 것이 성경이므로, 성경도 “비밀”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때 방언은 그리스도라는 비밀을 계시하는 통로이다.
b. 방언 통역과 성령계시
방언 통역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다. 바울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사들 중에 “통역 은사”를 포함시켰고, 공적 예배에 있어서 방언의 “통역 원리”를 제시했다(고전12:10). 방언 통역은 기존의 알려진 언어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앞에서 방언이 선포한 것에 대한 어떠한 이성적 이해는 있을 수 없다. 방언 통역자는 마치 방언으로 말하는 경우와 같이 입과 입술의 사용이 있어야 하며 예언하는 경우와 같이 자신의 모국어로 말하기를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방언 통역은 근본적으로 인간의 지성을 초월한 영역에서 오로지 그리고 전적으로 성령에 의해 수행된다.
방언 통역은 계시적인 예언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가 만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통역하지 아니하면 예언하는 자만 못하니라”라고 말했다(고전14:15). 이 구절의 하반 절 없이 상반절만 있다면 예언이 통역 있는 방언 보다 가치가 더 높을 것이다. 그러나 하반절의 말이 통역된 방언을 예언과 동일한 위치에 올려놓는다. 방언 통역과 함께 방언은 가장 저급한 은사로 여겨지기 보다는 오히려 예언의 은사와 함께 두드러진 은사들의 대열에 놓여있다. 계시적 예언은 말할 수 없는 탄식에 명료함과 지침을 부여하고, 방언은 불가해한 깊이를 느끼게 한다. 그러므로 방언은 요구되는 통역과는 별도로 공적예배에서 그 가치를 갖는다. 그런데 방언과 예언은 “단순히” 예언과 동등하지는 않다. 방언과 통역의 상호작용과 상징 안에는 예언만으로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 흥미롭고 역동적인 다가섬(going on)이 있다. 바울은 어떤 고유의 혹은 추상적 가치를 따라 방언을 예언에 종속시키지 않는다.
방언은 통역되었을 때 계시적 성격을 띤다. 방언은 통역되었을 때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이며, 이런 사람으로의 방향성은 예언처럼 계시적 성격을 갖는다. 성령께서는 방언 통역을 통해 “비밀”을 계시하신다. 누가는 바울이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며 예언했다고 기록한다(행19:6). 누가는 “그들이 방언을 말하고 있었다”(e*lavloun glwvssai")와 “그들이 예언하고 있었다”(e*ptofhvteuon)라는 두 문장을 “그리고”(kaiv)라는 접속사로 연결했다(e*laloun te glwvssai" kaiV e*profhvtenoun). 호메로(Garcia-Cover Homero)는 접속사 “까이”(kaiv)를 시간상의 전후관계를 설정해주는 것으로만 해석하여 “그들이 방언을 말했고, 그 다음에 예언을 했다”로 그 문장을 해석했다. 그는 방언과 예언을 서로 상관없는 별개의 현상으로 구분했다. 그러나 누가가 “까이”로 시간상 전후관계를 의도했다면 앞쪽 부분을 “방언을 말하고 있었다”(e*lavloun 미완료의 행동지속)가 아닌 “방언을 말했다”(e*lavlousan 단순과거의 행동종결)로 썼을 것이다. 더구나 “까이”는 시간상의 전후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동시적인 동등성, 즉 병렬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구절은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예언을 하고 있었다”로 해석되어야 한다. 나아가 그 구절은 “그들이 방언을 말함으로써 예언을 하고 있었다”로 해석될 수 있다. 방언은 계시적 성격을 갖고 있다. 누가가 오순절 사건의 기록에서 사용하고 있는 a*pofqevggomai는 “밖으로 말하다, 담대하게 또는 크게 선언하다”(to speak out, declare)는 의미를 갖는다. 70인역과 신약성경에서 a*pofqevggesqai는 오직 예언자들 또는 다른 영감받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이다. 시무어의 집회에서는 방언 통역이 계시적인 예언의 기능을 담당했다.『사도신앙』에는 “방언으로 말해진 예언”(the prophesies spoken in unknown tongues)이라는 어구가 등장한다. 그래서 시무어의 공동체에게 방언은 “하나님의 메시지”(God’s message)의 통로들 중에 하나였다. 방언 통역을 통한 예언은 때로 일어날 사건에 대한 것이기도 했으며, 대부분은 재림에 관한 것과 신앙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방언으로 말해진 예언들”(the prophesies spoken in unknown tongues)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관해 보여주시는 많은 환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방언으로 말해진 한 예언은 “매우 임박했다. 그래서 나는 성령의 능력으로 순복음을 전하라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많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있다”라고 통역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방언을 통해 주어진 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아래 겸손하라.” 그분은 지금 오순절적 능력과 구원의 강력한 파도로 세상에서 일하고 계시다.
c. 성령계시와 삼위일체론적 계시
성령은 계시자이며, 방언은 성령의 계시의 한 길이다. 방언이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사들 중의 하나이며, 방언의 통역이 예언처럼 계시적 성격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방언은 성령께서 신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계시하시는 한 길이다. 종래의 신학은 신론적 계시(창조를 통한), 기독론적 계시(성육신과 성경)에 고착되어 있다. 칼 바르트(K. Barth)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아들)만이 유일한 계시의 원천과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령의 사역(침례와 방언을 포함한 은사들)을 계시의 실체로, 그분의 존재를 계시자로 보지 않고, 다만 성부 하나님만을 계시자로 인정한다. 칼 바르트는 성령의 독특한 인격적 주체와 존재 자체를 부정하며, 성령을 하나님의 계시의 한 형태로 보았다. 그와는 다르게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인격이신 “성령의 임재”(Gegenwart des göttlichen Geistes)를 하나님의 계시(Offenbarung)로 이해했다. 그에게 계시는 하나님의 영 임재의 한 국면(Offenbarung ein Aspekt der Gegenwart des göttlichen Geistes)이다. 오순절 운동은 성령론적 계시(성령의 임재와 나타나심, 성령침례와 은사를 통한 계시)를 되찾음으로써 삼위일체론적 계시를 회복하려한다. 이상환에 의하면 오순절적 계시론은 삼위 하나님 각위가 톡특한 사역을 통해 자신의 뜻과 의지를 계시할 수 있다는 사실에 개방적이다. 성령은 성령침례와 은사를 통해 자신을 계시하고, 성자는 성육신과 삶과 사역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고, 성부는 창조적 활동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신다. 삼위의 각위는 각각 계시자인 것이다.
d. 성령계시에 대한 성경계시의 우위성
성경계시(Bible revelation)는 방언 등을 통한 성령계시(Spirit revelation)보다 우위에 있다. 성령계시는 성경계시에 부차적인 것이다. 로드만 윌리엄스(Rodman Williams)는 하나님께 사도들의 증언으로 완성되는 특별계시인 성경이외에 기독교 공동체 안의 성도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를 “종속계시”(subordinate revelation)라고 칭했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 오늘날에 와서 방언 등의 성령의 은사로서 주어지는 성령계시는 성경계시와는 기능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 성경계시에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류의 구원에 대한 진리가 담겨있는 “구원적 계시”(salvific revelation)이다. 반면에 성령계시는 상황에 따라 성경계시를 해석하거나 선포하는 “해석적 계시”(interpretative revelation), 구원받은 자들을 권면하며 안위하는 “목회적 계시”(pastoral revelation)다.
또한 성경계시는 성령계시에 대한 진위 판별기준인 점에서 우위에 있다. 신구약 성경이 완성된 이후의 성령계시는 성경계시와 결코 동등시 될 수 없다. 왜냐하면 성령계시의 옳고 그릇됨은 반드시 성경계시에 따라 분별되고 판단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성령계시를 판별해야 될 이유는 먼저 “유사 성령계시”(quasi-Spirit revelation)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사 성령계시”는 악령들이 성령을 가장하여 인간을 통해 말하는 것이다. 또한 “변질된 성령계시”(deteriorated Spirit revelation)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변질된 성령계시”는 발화자가 자기 의도에 따라 성령 계시를 가감할 때 발생한다.
e. 성령계시와 성경계시의 상호보완
성경계시의 성령계시에 대한 우위성에도 불구하고, 성경계시와 성령계시는 상호 보완되어야 한다. 성령계시는 새로운 구속 방법이나 새로운 구속사적 뼈대를 계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면에서 성령계시는 새롭지 않다. 한편 성령계시는 성경계시의 구속 방법이나 구속사적 뼈대 안에서 필요한 것들을 계시한다. 이런 면에서 성령계시는 새롭다. 그런 이유 때문에 성경계시와 성령계시를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보지 말고 상호보완적인 것으로 보아야 한다. 로드만 윌리엄스는 성경계시의 성령계시의 우위성만을 주장했다. 그는 성령계시란 성경계시를 더 깊게 해석하거나 상황에 적합하게 적용한 것일 뿐이지 본질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라고 말했을 뿐이다. 그러나 이상환은 성령계시의 새로움을 더하여 규정함으로써 신학적으로 성경계시와 성령계시의 우위와 종속을 넘어서서 상호보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을 활짝 열었다. 그 점에 있어서 이상환의 주장은 주목과 평가를 받을 만하다.
2세기에 몬타누스(Montanus)를 중심으로 펼쳐졌던 “새 예언”(The New Prophecy)운동은 보혜사를 통한 새로운 계시를 주장했지만, 새 예언은 성경에 대립되는 것이 아니었다. 새 예언 운동은 방언을 말하며 예언하곤 했다. 몬타누스 당대의 주류 예언은 “성경 중심적 예언”이었던 것 같다. 알시비아데스는 진정한 예언자 암미아와 콰드라투스가 “신약성경 아래서”(u&pokatabaV" d * e*n tautw'/ kataV thVn kainhVn diaqhvkhn) 예언을 하였다고 보고했다. 즉 그는 당시의 예언의 주류는 신약성경 중심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인용한 유세비우스는 신약 성경 아래서 행하는 예언이 어떤 것인지 예를 들어 밝히지는 않았다. 그들은 몬타누스의 새 예언 운동을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주류의 예언과는 다르게 성경을 무시하고 또 다른 성경을 만들려는 시도로 파악했다. 그러나 몬타누스와 함께 새 예언 운동을 펼쳤던 막시밀라는 자신을 성경을 대체하는 자가 아닌 “언약, 약속의 설교자와 해석자”로 이해했다.
[막시밀라가 말한다:] 주님께서 나를 지지자, 설교자 그리고 이 고난, 언약, 약속의 해석자(e&rmhveuthvn)로 보내셨다; 그분은 나를, 자발적이든 그렇지 않든, 하나님의 지식을 배우지 않을 수 없게 하셨다.
몬타누스주의에 합류했던 터툴리안(Tertulianus)도 보혜사 성령에 의한 새 예언의 계시들은 성경을 해석하고 보완해 주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보혜사 성령께서 성경의 어두운 부분들, 다시 말하면 명백하지 않았던 부분들을 명백하게 풀어 가르쳐 주신다고 보았다. 그는 꽃을 비유로 들어 계시의 점진성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계시는 씨앗이 싹, 가지와 잎사귀, 꽃봉오리, 꽃, 열매로 진전되는 것처럼 자연종교 상태에서는 그 계시의 형태가 매우 초보적인 원칙으로서 나타났고, 율법서와 예언서들 가운데서는 유아의 모습으로, 복음서에서는 유년의 모습으로 나타났으며, 그것이 성년의 모습으로 나타나게 된 것은 보혜사 성령의 역사 가운데서이다(nunc per paracletum componitur in maturitatem). 그 보혜사 성령의 계시를 통해 성경의 어두운 부분들은 명백해지게 되고, 비유로 언급된 사실들도 명백해지며, 이단들이 즐겨 사용했던 모든 애매한 구절들도 그 의미가 분명히 드러나게 된다.
시무어도 성령계시와 성경계시는 서로 보완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방언으로 말해진 모든 것은 구원에 관한한 성경과 완전히 일치한다고 말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성령계시는 듣는 자들로 하여금 자기의 죄를 깨닫게 할 때도 있지만, 기운을 내게 하며 위로를 받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D. 요 약
성령침례와 결합된 방언,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불가분리적 관계성이야말로 오순절주의의 정체성이며 핵심이다. 종말론은 오순절주의의 핵심이 아니다. 성령침례도 오순절운동을 다른 운동과 구별 짓는 중심/척도가 될 수 없다. 능력이나 하나님/성령 경험도 오순절신학의 핵심이 될 수 없다. 오순절운동이나 신학의 독특한 정체성과 핵심은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이다. 오순절주의의 정체성과 중심인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불가분리성은 “증거”(evidence)나 “표징/표적”(sign)이라는 용어들에 의해 표현된다. 방언은 오순절운동 안에서 성령침례의 증거로 이해되어왔다. 방언은 오순절운동과 신학을 다른 운동들과 신학들로부터 구별시킬 수 있는 증거가 된다. 방언은 한 개인이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명확하고 객관적 증거가 된다. 방언은 성령침례를 받음에 대한 성경적 증거다. “성경적 증거”라는 말은 현대 오순절 운동의 방언현상을 성경의 방언 현상과 연속선상에 놓는다. 그런 연속성과 동일성은 성경방언의 현대에의 지속적인 반복가능성을 의미한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또한 성령의 오심의 증거다. 신자들은 방언 말함을 통해 성령께서 확실하게 자신 안에 내주하신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다. 방언은 성령침례와 분리될 수 없는 증거다. 방언은 성령침례와의 분리할 수 없는 그 증거이되 “최초의 증거”이다. 방언은 성령침례의 최초의 증거라는 것은 방언이외에 또 다른 증거들이 방언이후에 발생한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침례의 증거에서 방언을 제외시키려한다. 그런 부류의 사람들은 대부분 “성령은 원하는 곳으로 부신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령께서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을 택하시는 것도 성령의 자유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발화자의 믿음의 표징이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성령의 임재의 표징이다. 방언은 성령 안에서 하나 됨의 표징이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내적이고 영적인 유익을 외적으로 확증해주는 외적인 표적이다. 방언은 성령침례의 증거이며 동시에 표징이다.
성령침례는 물 침례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물 침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롬6:4; 골2:11-12). 오순절운동의 초기 지도자들은 물속에 잠기는 침례를 택했다. 성령침례는 성령 안으로의 인간의 저항할 수 없는 잠김이다. 성령침례는 성령과의 연합이며 나아가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이다. 성령침례는,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연합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의 연합을 바탕으로 발생한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발화자의 옛 사람과 자아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함을 인식시키며 경험시킨다. 방언은 이성의 무력함을 통해 인간의 죽음과 같은 본질적인 무능력을 드러낸다. 방언은 성령에 대한 저항할 수 없는 경험이라는 성령침례의 본질을 잘 드러내기 때문에 성령침례와 떼어놓거나 비신화할 필요가 없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수동적이 되어 하나님의 가장 비밀스런 품에까지 잠기는 하나님과의 연합에서 발생한다. 성경에서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죽음뿐만 아니라 죽음으로부터 살아남과 관련된다.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동반되기 시작한 방언을 말함은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우편에 계심으로 가능하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능력으로 부활하신 승리자 그리스도와 관련된다. 성령침례와 동반되는 방언은 기쁨 넘치는 찬양을 경험시킨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 찬양의 내용은 “능력”이며, 그 능력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능력이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죽음과 살아남이라는 양면성을 띈다.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경험을 일으킬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경험을 일으킨다. 성령침례의 목적은 신자들에게 언어와 민족 지역적 한계들을 넘어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복음 전파를 위한 능력을 부여해 주는 것이다. 성령침례의 목적은 신자들에게 권능을 부여하여 신자들을 증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오순절날 임한 방언은 성령침례의 목적이 그런 복음전파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방언은 성령침례의 상징일 뿐만 아니라 성령침례의 목적을 이루는 탁월한 방법이다.
방언은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성부와 성자의 주고받음에서, 성부와 성자 사이의 대화에서, 성부와 성자의 친밀한 연합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성자와 성령 사이의 인격적 관계에서, 성자와 성령의 밀접한 말씀적 관계에서, 성자와 성령의 사역적 관계에서, 성부와 성령의 서로 아심의 결과이며, 성부께서 성령을 주심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의 내재적 관계를 전제로 발생한다. 방언을 발생시키는 삼위 하나님의 상호교류는 삼위의 참여와 존중 속에서 사귀는 자기 소통/친교적 연합에서 일어난다. 방언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관계에서 발생하되 내재적 관계와 동시에 존재하는 경세적 관계에 의해 발생한다.
방언은 외부와 내부를 향해 말씀하시는 언어적 존재이신 하나님에게로부터 발생한다. 하나님은 내부를 향해 자기 자신과 대화하시는 존재다. 언어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창조의 말씀은 인간에게는 낯선 말, 곧 방언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방언은 언어적 존재이신 하나님의 직접적 현현의 한 형태이다. 오순절 날에 “다른 방언들”(혀들)과 함께 동반된 “불같은 혀”는 전승접근을 통해 볼 때 하늘의 신성함이 나타난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의 임재를 각성시킨다. 성부께서는 방언 같은 말씀을 하셨다. 하늘에서 들려온 성부의 말은 곁에 있던 사람들이 익숙하지 않은 하나님의 낯선 말, 즉 하나님의 방언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하나님의 방언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을 위한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12:30).
“새 방언”은 기독론적이다. 방언은 그리스도의 현재적 사역의 한 형태다. 방언은 성자와 성부와의 친밀한 교제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교제 가운데서도 성자가 끊임없이 신자들을 위해 활동하심에서 발생한다. 다른 방언은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의 범위를 드러낸다. 방언은 부분적으로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방언은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의 유비일 수도 있다. 방언은 또한 그리스도의 수난 가운데 부르짖음일 수 있다. 성육신은 방언 같은 말씀의 구체적 통역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방언 같은 낯선 소리로 기도드리기도 하셨다. 승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사울에게 그와 동행인들에게는 낯선 소리로 말씀하셨다.
신자는 자신 안에 성령이 거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신자는 성령의 외적 표적들 중에 하나인 방언을 통해 자신 안에 성령께서 거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성령은 방언의 근원이시다. 방언의 독특성은 인간의 영을 통한 성령의 말씀이라는 점이다. 바울은 성령의 기도에 대해 언급한다. “탄식”은 익숙한 언어가 아닌 낯선 소리다. 방언은 성령의 나타남의 형태 가운데 하나다. 방언은 보이지 않는 성령 하나님의 청각적 현현)이다. 한편으로 방언은 성령의 임재를 상징한다. 다른 한편으로 방언은 성령 자신의 임재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은 신자들에게 열려 있다. 방언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친교 공동체에 참여하는 것이다. 방언이 수신자의 시청각 경험을 일으키는 것은 방언의 소통성을 말하는 것이다. 방언이 불신자들을 향해 발화될 때 그 방언은 불신자들을 향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귐으로의 초청이다. 방언을 통한 소통 경험은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친교 공동체를 확장시켜가는 한 방법이다.
마가복음 16장 17절에서 귀신축사와 신유 등과 함께 언급되는 방언은 “새 방언”이다. “새 방언”은 말하는 자가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는 사실을 본인과 타인이 확신할 수 있는 표적이 된다. 새 방언은 믿음의 사건 즉, 회심에 후속한다. 새 방언적으로 말하면 신자는 누구나 방언을 말할 수 있다. 새 방언은 그리스도와 관련된다. 새 방언의 방향은 불분명하다. 바울은 성령의 탄식 기도에 대해 언급한다. 로마서의 성령의 기도는 방언과 암시적으로 연결된다. 탄식 방언은 인간의 기도인 동시에 성령의 기도다. 탄식 방언은 회심 이후에 가능할 수 있다. “다른 방언”과 “각종 방언”은 서로 다른 점을 가지고 있다. 방언은 때로는 언어적이며, 때로는 비언어적이다. 두 방언은 현상적으로 제노랄리아와 글로솔라리아라고 명명된다. “헤테로글로솔라리아”는 화자가 자국어로 말하는데 외국인 청자가 자신어로 알아듣는 현상이다. 각종방언은 버거스의 분류에 따르면 글로솔라리아로 분류될 수 있다. 두 방언은 신학적으로 표적방언과 은사방언으로 명명된다. 두 방언은 그 근원에 있어서는 동일하다. 방언은 그것이 인간적 언어형태이든, 초월적 언어(비언어)형태이든 비습득적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방언은 비습득적인 것이기 때문에 좌뇌보다는 우뇌를 활성화시킬 수 있다. 사도행전 2장적 방언과 고린도전서적 방언은 이 세상 언어라는 점과 비언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지만 형식적 공통성을 갖는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오순절 날의 방언은 기본적으로 선포였다. 하나님의 큰일 말함이 오직 찬양이었다는 해석은 설득력이 없다. 하나님의 큰일 말함이 찬양이었다면, 선포적 내용을 갖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큰일”은 베드로의 하나님이 행하신 일에 대한 오순절 설교의 대략이며, 그 설교를 지시하는 것이었다. 누가는 방언이 찬양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말했다. 고린도전서에서 방언은 선포가 될 수 있다.
방언은 한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방언은 다른 한편으로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의 방향성을 갖는다. 방언은 이렇게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라는 양방성을 갖는다. 하나님께서는 방언을 통해 발화자에게나, 청자에게 자기의 뜻을 나타내신다. 사람의 영이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 자기의 뜻을 말할 수도 있다. 방언의 양방향성은 하나님과 발화자 사이의 의사소통을 의미한다. 방언을 통한 하나님과 인간의 의사소통은 인간에게 뚜렷하면서도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는다. 방언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이라면, 그것은 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귐을 의미한다. 방언이 불신자에게 향해질 때, 그것은 하나님과의 사귐으로의 초청이다.
방언이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 발화될 때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로의 계시가 된다. 방언은 비밀을 계시하는 것이다. 첫째로, 방언으로 말해지는 비밀은 사람이 모르는 “하나님의 뜻”일 수 있다. 둘째로, 그 “비밀”은 “성경”일 수 있다. 셋째로 고린도전서 2장의 맥락에서 성령이 통달하시는 하나님의 사정, 비밀은 “그리스도”일 가능성이 있다. 방언 통역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다. 방언 통역은 계시적인 예언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 방언은 통역되었을 때 계시적 성격을 띈다. 성령은 계시자이며, 삼위는 각각 계시자이시고, 방언은 성령의 계시의 한 길이다. 성경계시는 방언 등을 통한 성령계시보다 우위에 있다. 또한 성경계시는 성령계시에 대한 진위 판별기준인 점에서 우위에 있다. 성경계시의 성령계시에 대한 우위성에도 불구하고, 성경계시와 성령계시는 상호 보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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