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방언과 구원
구원론(soteriology)은 그것에 의해 교회가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는(articulus stantis et cadentis ecclesiae) 필요불가결한 것(sine que non)이다. 루터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교리들이 칭의 교리 안에 내포되기 때문에 칭의 교리를 부지런히 배워야만 한다고 권면했다. 오순절주의에 있어서도 구원론은 중요하다. 파함은 회심과 중생이라는 개인적인 구원을 경험하고, 그의 오중복음의 가르침 속에 회개와 칭의를 맨 먼저 위치시켰다. 구원론은 그렇게 중요하다. 본 장은 이렇게 중요한 구원론을 통해 방언을 해석한다. 이 해석은 방언의 구원론적 의미 탐색이다. 첫 항은 방언의 기본적인 구원론적 의미를 세 가지 측면에서 규명한다. 둘째 항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심과 관련하여 방언을 해석한다. 셋째 항은 인간의 하나님께 대한 응답을 통해 방언을 해석한다.
A. 방언의 기본적인 구원론적 의미
1. 방언과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a. 죄로 인한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
인간의 죄는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했었다. 전 장에서 숙고한 것처럼 인간의 첫 죄는 하나님과의 언어적 관계를 인간이 깸으로서 발생했다. 인간의 첫 번째 죄는 하나님의 언어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disobedience)이었다. 죄로 인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친밀한 관계는 파괴되었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성이 파괴되었다. 인간의 내적 본성은 죄로 부패했고, 인간의 몸은 결국 내적 본성과 유리되어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고,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친밀한 관계는 깨어져 원수의 관계가 되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었다.
b. 방언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 회복 경험
오순절날 발화된 방언은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의 상징일 수 있다. 존 스트롱(John T. Strong)은 바벨탑에서 하나님에 의한 인간의 언어의 다양화와 흩어짐(the scattering)을 하나님의 형상을 부수고 조각내어(shattering) 흩으심으로 해석했다. 그의 주장과 같이 바벨탑의 언어의 다양화가 하나님의 형상의 파괴의 상징이라면, 그 전환인 오순절의 다양한 언어의 “하나님의 큰일”이라는 한 가지 메시지 발화는 그리스도의 영에 의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의 상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의 형상의 여러 측면들의 회복을 경험시킨다.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은 하나님의 형상의 대표적 측면들인 인간의 영혼과 육, 그리고 관계성의 회복을 내포한다. 방언은 하나님의 형상의 그런 측면들의 회복을 통해 가능하게 된다. 방언은 죄로 인해 죽었었으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살아난 영이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서 몸을 통해 발화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의 하나님의 형상을 인정하지 않았던 칼빈(J. Calvin) 조차도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의 영혼에서 뿐만 아니라 육체 속에서도 회복될 것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따라서 영이 성령과의 관계성 속에서 몸을 통해 발화함으로써 가능한 방언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발화자에게 경험시킨다. 인간의 죄로 인해 퇴거하셨던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께서(창6:3) 인간에게 임하시고, 인간의 영이 몸과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방언을 말하게 되는 것은 파괴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의 내적이고 외적이며, 관계적 측면의 회복(recovery of the relational image of God)을 대표적으로 경험시키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 즉 하나님에 의한 새 창조의 상징이다. 방언은 진리의 언어가 사람들을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연합시키고 신앙 공동체를 교화시킴으로써, 새 창조(new creation)의 상징이 된다. 사도행전에서 방언이 말해지는 곳마다 사회적 관계가 새롭게 변혁되었다는 의미에서 방언이 터져 나온 오순절은 새 창조로 묘사될 수 있다. 방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한 역사의 재창조에 대한 표징으로써 “언어의 재창조”다.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방언은 단지 영혼의 해방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의 모든 측면들, 즉 영혼, 마음, 육체, 사회적 관계의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복음의 표징이다.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의 주체는 성령이시다. 그렌츠(Stanley J. Grenz)는 하나님의 형상론을 기독론적으로 재조명했다. 그에 따르면 죄가 없으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최초의 인간을 반영하며, 또한 종말론 새 창조의 절정이시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으나, 인간의 죄는 그 형상을 파괴했다. 인간은 이제 새 창조의 온전함과 절정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주의 영광이시오 보이지 않으시고 흠 없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형상”(ei*kwVn tou' qeou' tou' a*oravtou)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변화”되어갈(transformed) 수 있는 것은 성령이신 “주의 영으로”(a*poV kurivou pneuvmato") 말미암는다(고후3:18; 골1:15). 클라인(M. G. Kline)은 하나님의 형상을 성령론적으로 해석했다. 그는 인간이 “영광의 영”(Spirit-Glory)이신 성령님을 따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고 보았다. 창세기의 인간 창조를 위한 밑그림 말씀에 등장하는 “우리”에는 성자이신 그리스도뿐만 아니라 성령도 포함된다는 것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래서 그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으로의 회복은 성령과 밀접하다. 첫 창조의 일곱째 날의 영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 창조의 영이라는 상징으로써 영이 칠중적이다(예; 계1:4). 크라우스(D. Krause)는 이런 회복을 그리스도의 영에 의한 “영적 재-창조”(a spiritual re-creation)으로 해석했다. 인간은 새로움, 교제, 평화, 기쁨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재창조되며, 성령을 통해 그 형상을 닮아간다.
방언은 성령의 주체적인 역사로 말미암은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을 상징한다. 신자들을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회복시키시는 주체가 성령이시라면, 그 회복의 주체이신 성령께서 말하도록 주시는 방언(행2:4; 롬8:26; 고전12:9-11)도 역시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과 관련된다. 케렛(B. Charette)이 정확하게 본대로 방언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이 인간을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으로 변화시켜 가시는 “하나님의 영과의 심오한 만남”(a profound encounter with God’s Spirit)으로부터 발생되는 발화다. 인간의 영이 몸을 통해 인간을 높이는 인간 자신의 말이 아닌 하나님을 높이는 거룩한 영의 말을 하는 방언은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의 회복을 의미한다. 근본적으로 인간이 관계적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가능하며, 죄로 인해 파괴되었던 그 형상이 그리스도의 피의 은혜로 믿음을 통해, 성령(Spiritus Sanctus)과의 교제로 말미암아 회복되기 시작함으로써 가능하게 되었으며, 그 회복을 상징하며, 또한 그 회복의 과정의 부분이다.
2. 방언과 의사소통 회복
a. 혀와 그리스도의 소통 회복
방언은 의사소통 회복이다. 마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역과 말씀 속에서 방언을 통한 의사소통 회복을 발견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베풀어지는 구원은 의사소통을 포함하며, 그 측면은 방언을 통해 상징적으로 부각된다. 마가는 “글로사”(glw'ssa)를 그리스도의 “치유 이적”과 그리스도의 “선교명령”에서 등장시킨다. 먼저 마가는 그리스도께서 청각/언어 장애자를 치유하신 기사에서 혀를 언급한다. 마가는 사람들이 청각/언어 장애자(kwfov" kaiV mogilavlo")를 예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안수하여 주기를 간구했다고 말한다(막7:32). 사람들은 그 장애자와 소통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 장애자를 치유해 주시기를 간구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저 말씀으로 그를 고치시지 않고, 그 사람의 “혀”(glw'ssa)에 손을 친히 대셨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셨다. 마치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탄식하여 성부께 기도하듯이 그리스도께서 그 장애인을 위해 탄식하여 성부께 기도하셨다(막7:34). 그리고 “에바다”라고 명령하시자, 그의 귀가 열렸고, 그의 혀의 맺힌 것(o& desmoV" th'" glw'ssh")이 풀렸다(막7:35). 그리고 그가 분명하게 말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바벨에서 구음을 흩으시고 의사소통의 장애를 일으키신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구원사역을 통해 의사소통의 장애가 되는 혀를 풀어주셨다. 그리스도의 손이 맺힌 혀를 만지시자 혀가 풀어지며 막혔던 소통이 활짝 열리기 시작했다. 혀의 풀림을 통한 의사소통의 회복은 그를 데리고 온 사람들과 성자 사이의 의사소통, 성자의 탄식 기도와 성부의 응답, 즉 성자와 성부 사이의 의사소통의 결과였다. 청각/언어 장애자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의, 하나님의 위격들 사이의 의사소통 공동체의 당당한 일원으로 가입되었다. 그 이적은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하나님 사이, 하나님의 위격들 사이의 의사소통의 회복을 의미한다. 의사소통의 회복은 기쁜 소식, 곧 복음이다.
마가는 “혀”를 그리스도의 구원의 복음을 전파하라는 선교명령에서 다시 등장시킨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의사소통 회복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신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자들에게 “새 혀/방언들”이 그 표적으로 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신다(막16:17). 혀가 맺힌 자는 그 한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다.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자들의 혀마다 풀어져 분명하게 새 혀들을 말하게 될 것이다. 새 방언들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의 온전한 회복을 상징한다.
b. 오순절의 혀와 소통
오순절 사건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불통이 소통으로 전환된 구원을 경험시키고 선포한 것이었다. 그 사건의 핵심은 “발화 및 청취”, 즉 소통이었다. 발화와 청취를 일으킨 오순절 방언은 바벨 사건으로 상징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죄로 인한 의사소통 단절의 회복을 상징하며 경험시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큰일이 사람들에게 방언(혀)을 통해 들려지고, 사람들은 방언(혀)을 통해 하나님을 높였다.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말이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방언을 통해 사람들의 말이 하나님께 들려졌다. 또한 방언을 통해 어떤 언어권의 사람의 말이 다른 언어권의 사람들에게 들려졌다.
현대의 오순절적 방언도 역시 심판으로 인한 불통의 반전인 의사소통의 회복을 경험시킨다. 오순절 공동체는 사도시대의 오순절 사건의 소통 회복과 재현을 경험한다. 바벨탑에서 심판으로 언어를 혼잡케 할 수 있었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언어를 소통시키실 수 있으셨고, 오늘날에도 여러 언어들로 인해 야기된 불통을 해소시키시며 알아듣게 하실 수 있다. 방언이 통역되며 하나님의 뜻이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또한 방언이 찬양과 기도가 되며 사람의 뜻이 하나님께 전달된다.
3. 방언과 하나 됨
a. 하나 됨의 상징인 방언
방언은 하나 됨의 상징이다. 방언은 바벨탑 언어 혼잡이후로 분열되고 대립되었던 하나님과 사람, 사람들과 민족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바벨과는 달리 소통성은 메시아 시대(the Messianic Age)의 특징이다. 오순절 날 각 나라에서 온 다양한 언어를 사용하는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통해 동일하게 “하나님의 큰 일”을 듣고 하나가 되었다.
방언은 하나님과 사람의 사귐으로 인한 하나 됨의 회복을 상징한다. 방언은 죄로 인해 원수가 되어 분리되었던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친밀한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상징한다. 죄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를 갈라놓아 서로 원수가 되게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여있던 죄의 담을 무너트렸다. 방언은 인간의 기도이기 이전에 성령의 기도다. 방언은 성령께서 말하라고 은혜 받은 인간에게 주시는 은사다. 방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가로막혀 있던 담이 무너졌음을 보여준다. 방언은 성령께서 능동적으로 주도하시는 하나님과 인간의 상호관계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은사적 언어”(the charismatic language)인 방언을 통해 하나가 된다. 성령은 신자 안에 들어오시며, 신자는 성령 안에서 방언으로 기도한다. 방언은 성령 하나님과 인간의 친밀한 사귐에서 발생한다. 방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사귐이 회복되었음을 상징한다.
방언은 또한 다양하면서도 다양한 우상 숭배를 일으키지 않는다. 오순절의 방언들은 다양하면서도 다양한 방언들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를 위협했던 다양한 우상들을 찬미하지 않는다. 오순절의 다양한 방언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위해, 유일하신 하나님에 관해서만 말했다. 이렇게 다양한 방언들이 유일한 하나님 신앙을 일으킨 것은 바벨탑 사건 이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위협했던 다양한 방언들이 다양한 우상들에 대한 숭배를 일으켰던 사건들의 반전이다. 방언은 다양하면서도 창조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전파하는 단일한 신앙공동체를 형성한다.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다양한 방언의 단일 공동체 안에 있다. 다양한 방언의 단일 공동체는 갖가지 언어로 사람들에게 말한다.
b. 다양성을 초월하여 하나 되게 하는 방언
방언은 사회적 계급(Class)과 민족(Nationality)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게 한다. 시무어의 지도로 열린 아주사거리 집회에서는 모든 계급들과 민족들에서 온 사람들이 동일한 위치에서 만났다(All classes and nationalities meet on a common level). 비록 멕시코인이나 독일인이 영어로 말할 수 없어도, 일어나서 편안하게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었고, 사람들은 성령께서 통역하심을 듣고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은 피부색이나 입은 옷이나 교육 부족 때문에 거절당하지 않았다. 주님의 재림이 가까웠다는 것의 한 징표는 그분께서 모든 인종들과 나라들을 방언을 통해 하나로 녹이시고 계시다는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으로 충만해진다는 것이다. 그분은 한 성령에 의해 한 몸으로 침례를 주고 계시며, 사람들로 하여금 그분이 오실 때 그분과 만날 준비가 되도록 만들고 계시다.
방언은 나이와 성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게 한다. 아주사거리에 찾아온 사람들은 나이를 초월하여 하나가 되었다. 대부분의 종교집회에서 배척되었던 여덟 살에서 열두 살 아이들이 강단에 서서 장년들 앞에서 방언을 말할 수 있었다. 방언은 성(Gender)도 초월하여 하나가 되게 한다. 아주사거리에서는 여성들도 사역할 수 있는 길이 열렸었다. 예수께서는 남자와 여자에게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셔서 방언을 말하게 하시고 사역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성령의 역사와 그리스도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이 모두 하나다(In Christ Jesus there is neither male nor female, all are one). 남녀노소, 모든 인종들, 모든 육체가 방언으로 말하고 간증하고 설교할 수 있다. 여성들 안에 계시는 성령은 남성들 안에 계신 성령과 동일하다(It is the same Holy Spirit in the woman as in the man).
방언이 일으키는 통합은 다양성을 초월하는 것이지, 다양성을 억압하거나 와해시키는 통합이 아니다. 인류의 다양성 속의 일치(the unity in diversity)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인류를 위해 계획하신 복이다. 앤더슨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은 획일성(homogenity)이 아니라 다양성 속의 단일성이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바벨탑에서 방언들의 다양화에는 복이 내포되어 있었으며, 동시에 약속을 내포하고 있었다. 오순절의 다양한 방언들은 바벨탑에서의 다양화된 방언들의 반전이 아니다. 오순절의 다양한 방언들은 바벨탑에서의 획일적이고 우상숭배적인 단일성의 반전이다. 획일적이고 우상숭배적인 단일성은 언어의 전유와 통폐합으로 망상적이고 유토피아적 단일 세계를 건설하려는 전제적 지도자들의 억압 수단이었다. 바벨탑에서 분산과 다양화는 그런 전제적 집단들에게는 저주이면서 동시에 그 억압에서 풀려나 자유를 얻은 사람들에게는 암시된 약속이었으며, 그 약속은 오순절의 다양성 속의 일치에서 성취되었다. 방언은 인류가 각기 독특한 문화적이고 언어적이고 계급적이고 성적인 다양성을 잃지 않고 성령 안에서 초월하여 자유롭게 하나가 되게 한다.
B. 방언과 하나님의 베푸심
구원은 먼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심으로써 가능하게 된다. 본 항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방향성 측면에서 방언을 해석한다.
1. 방언과 새 언약
a. 새 언약의 상징인 방언
방언은 구원을 위한 새 언약의 “상징”이다. 비록 방언은 구원을 위한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을 상징한다. 오순절적 방언은 하나님께서 새 언약을 중보하신 그리스도의 영의 도래를 알리기 위해 취하신 “상징”(symbol)이라고 볼 수 있다. 성령은 구원의 시대에 사람과 하나님 사이를 중보하기 위해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영으로서 오셨다. 그래서 성령께서 오순절 날에 오심은 그리스도에 의해 중보 된 구원을 위한 새 언약(new covenant)의 상징이며, 인침일 수 있다. 방언은 역사적(historical)으로 새 언약을 상징하는 그리스도의 영이신 성령의 오심의 청각적 표징이 될 수 있다.
b. 새 언약의 실존적 상징인 방언
방언은 인간 개개인을 향한 그리스도 안의 새 언약의 상징이다. 누가는 오순절 날 불같은 혀가 “각 사람 위에”(e*f * e@na e@kaaton au*tw'n) 있더니 각 사람이 방언(혀)을 말하기 시작했다고 기록한다(행2:3). 시무어는 성령침례는 각각 개개인이 받아야 한다며, “개인적인 오순절”(personal Pentecost)이란 말을 사용했다. 방언은 각 사람 개개인을 향한 새 언약을 상징한다. 방언은 개개인을 향한 새 언약의 상징이되 실존적(existential) 상징이다. 방언은 추상적이지 않고 구체적으로 경험된다. 방언의 구체성은 개인에게 실존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방언은 개개인에게 새 언약의 상징이되 실존적 상징이다.
c. 새 언약의 보편성과 방언
오순절의 방언은 새 언약의 보편성(universality)을 상징한다. 베드로가 오순절 설교에서 인용한 요엘에 의해 예언 되었던 것처럼 하나님의 영의 부으심은 “모든 육체에”(e*piV pa'san savrka) 해당될 가능성을 갖는다(행2:17). 모든 남자와 여자 그리고 모든 육체에 약속된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한 다른 방언은 하늘 아래의 모든 나라를 상징하며, 그런 방언의 보편적 상징성은 모든 사람의 구원 가능성을 위한 새 언약의 보편성과 상응한다.
2. 은혜/은사와 방언
a. 은혜와 방언 은사
방언은 은혜(cariv")와 간접적으로 관련된다. 방언은 죄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관계되지만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방언은 “은혜”로 중생한 이후에 받는 것이기 때문에, 은혜와 간접적으로 관련된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은혜를 성도들의 마음속에 내재하는 질(質)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질(質)로서의 은혜를 영혼의 본성 안에 놓았고, 믿음, 소망, 사람을 영혼의 능력 안에 놓았다. 그리고 롬바르두스는 성령님을 은혜라고 불렀다. 그러나 루터는 “은혜”(Gnade, grace)와 “은사”(Gabe, gift)를 구분하고 “은혜”를 하나님께서 인간을 향해 지니시는 인자 또는 호의라고 정의했다. 즉 그에게 은혜는 하나님께서 “지니고 계시는 것”이다.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는 전체적으로 완전하고 충분하다고 말한다. 은혜는 사람의 죄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한다. 멜랑흐톤도 은혜를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뜻 혹은 호의(benevolentia)라고 보았다.
시무어는 은혜를 두 단계로 나누어 설명한다. 성결운동가로서 오순절운동에 들어온 시무어는 자범죄를 사하고 영혼에 영생을 가져오는 중생을 “첫 번째 은혜의 사역”(the first work of grace)에 의한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또한 “두 번째 은혜의 사역”(the second work of grace)은 원죄(inbred sin/original sin)의 제거를 가져온다고 보았으며, 그 상태를 성화라고 규정했다. 그에게 두 은혜의 사역들인 칭의와 성화는 구원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칭의와 성화는 받는 자의 속죄와 관계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은혜”(grace)는 죄용서와 그로인한 구원에 관계된다. 그는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인한 구원이 이 세상에서 성화로 완성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은혜를 칭의와 성화까지에만 적용했다.
방언은 은사(carivsma)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누가는 고넬료의 집에서 발화된 방언을 “성령의 은사”라고 말한다(행11:45-46). 루터에게 성령과 “은사”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것”이다. 즉 그에게 성령과 은사는 사람이 받는 것이며, 사람 속에 새 마음을 창조하시고 생명을 준다. “은사”는 파편으로 나뉘어 오기에 날마다 받아야 하는 불충분한 것이다. 사람이 성령과 은사를 날마다 받아도 부족한 이유는 옛 욕망과 죄악들이 여전히 사람 속에 아른거리며 성령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멜랑흐톤도 은사를 호의를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것으로, 인간의 마음을 거듭나게 하시고 거룩하게 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의 마음에 부어 주시는 성령님 자신이라고 생각했다(롬5; 요20).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은사이신 성령께서는 방언의 은사를 신자들에게 주신다.
b. 은혜와 방언 은사의 순차성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역사하고, 그 다음에 은사인 방언이 주어진다. 루터의 개념에 따르면 은사인 방언은 은혜를 바탕으로 주어진다. 먼저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그 은혜를 바탕으로 은사를 받는다. 구원은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시며 죄를 용서하는 은혜로 인해 발생하며, 그 은혜를 결과로 인간에게 은사가 주어진다. 루터의 이러한 생각에 대해 턴불(Stephan K. Turnbull)도 동일한 분석 결과를 내놓았다. 먼저 하나님께서 자신이 가지고 계시는 은혜로 단번에 충분히 인간의 죄를 용서하신 후에야 비로소 파편적인 은사인 방언이 인간에게 주어진다. 시무어에게 은사는 은혜로 인해 사람 속에 뿌리를 내릴 수 있다. 그에게 방언을 포함한 은사는 절대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만 받을 수 있는 것이다. 그에게 은혜는 첫 번째와 두 번째 역사요, 은사는 세 번째 역사, 즉 중생 이후에 주어지는 것(donum superadditum)이다.
세 번째로, 성령님은 우리를 그 단계에서 성령침례로 이끄시기 시작하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여러분의 진정한 유산을 받아야합니다. 여러분은 마음에 그 두 은혜의 사역들에 대한 분명한 증거를 가진 후, 이런 하나님의 은사를, 회개 없이, 값없이 주시는 은사(free gift)를 받을 수 있습니다.
방언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중생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하는 은사다. 그러므로 방언은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다. “방언을 말하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라는 말은 참이 아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비록 방언을 중요시하며 강조하더라도,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 침례를 구원의 필수요소(necessary for salvation)로 믿지는 않는다. 파함은 성령께서는 칭의와 성화에 있어서 우리 마음에 속죄라는 사역을 증거 하시지만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로서 그분의 “개별적 사역”(His personal work)은 “은사”(a gift)이지 “은혜”(grace)가 아니며 칭의에서 얻어지지 않는다고 보았다. 방언은 중생과 칭의를 위한 조건이 아니다.
3. 방언과 용서
a. 심판의 상징인 바벨 방언
바벨 방언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심판의 상징이었다. 바벨탑에서 일어난 언어의 다양화는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심판의 징표였다. 언어의 다양화는 하나님의 분산 명령에 대한 인간의 불순종 죄에 대한 심판이었다. 다양한 언어들은 바벨탑 쌓기라는 “인간의 큰 일”(toV magalei'a tou' a*nqropou')에 대한 심판(krivsi")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인간의 큰일은 획일적이고 우상숭배적인 단일성의 추구였다. 다양한 방언들과 분산은 그런 “인간의 큰 일”의 좌절이었다.
b. 용서의 상징인 오순절 방언
오순절 방언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징표다. 오순절에 일어난 다양한 방언들(다른 방언들)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큰 일”(toV megalei'a tou' qeou')을 선포한다(행2:11). 다양한 방언들은 “하나님의 큰 일”이 성공하고 있음을 선포한다. 다양한 방언들로 선포된 “하나님의 큰 일”은 이어지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다시 선포된다. “하나님의 큰 일”은 “하나님의 인간의 죄를 용서하는 일”이다(행2:38). 요엘의 예언에 따라 모든 육체에 부어지고 있는 다른 방언들은 다양한 언어들 중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이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죄 사함(a!fesi" tw'n a&martiw'n)을 받아 구원을 얻으리라고 선포한다(행2:21). 그러므로 방언은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의 징표다.
C. 방언과 인간의 응답
구원은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일방성만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반응함으로써 일어난다. 인간의 믿음은 인간의 하나님에게로의 방향성의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요소다. 본 항은 구원을 일으키는 인간으로부터 하나님에게로의 방향성의 측면에서 방언을 해석한다. 또한 구원을 얻게 하는 직접적 요소는 아니지만, 구원받은 자들이 세상에서 존재하는 동안 성장 내지는 성숙해야하는 측면, 즉 성화적 관점에서 방언을 해석한다.
1. 방언과 믿음
a. 방언과 구원 얻는 믿음
방언은 구원 얻는 믿음을 확증시키는 표적들 중의 하나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믿는 자들, 즉 구원 얻는 믿음을 가진 자들에게 방언이 뒤따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막16:17). 구원 얻는 믿음이 있다면 방언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파함은 방언이 은사일 뿐만 아니라 신자임을 표시해주는 표적(sign)이라고 말했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대문자로 믿는 자에게 그 표적이 “반드시”(SHALL) 따른다고 강력히 주장했다(This scripture plainly declares that these signs SHALL follow them that believe). 방언을 말하는 것은 발화자가 구원 얻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자신과 타인이 확증하는 표적이 될 수 있다.
b. 방언과 신앙생활 믿음
방언은 신앙생활을 위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한다. 유다서 20절의 내용은 방언이 우리의 믿음을 자극하여 더욱 성장하게 만든다고 해석될 수 있다. 유다서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o*ikodomevw) 성령으로 기도하며”(유20)라고 쓴다. 그 언급에 등장하는 “성령으로 기도”(e*n pneuvmati a&givw/ proseucomenoi)드리는 것에는 방언도 포함될 것은 분명하다. 성령으로 드리는 기도 가운데 한 종류인 방언은 신자 개인의 신앙의 덕을 세운다. 방언은 개인적인 믿음의 집을 튼튼하고 높이 쌓아 올라가는 수단이 된다. 방언으로 말하기위해서는 반드시 성령께서 초자연적으로 우리가 기도하는 말을 인도하신다는 믿음을 사용해야 한다. 다음에 나올 말이 무엇일지 알 지 못하므로 오로지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다. 그를 의지하여 하나를 구하고 나면, 다음 간구를 위해 또 하나님을 의지하게 된다. 방언은 믿음을 역동적으로 만든다. 방언기도를 하고 나면 하나님의 모든 약속을 믿을 준비가 된다. 방언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더욱 강하게 만든다.
2. 방언과 언어의 성화
a. 인간의 항복을 상징하는 방언
방언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항복을 상징한다. 방언 찬양은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대한 인간의 항복(surrender)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방언은 사람이 그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말이 인간의 혼의 표현이므로, 방언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구원하시는 능력으로 사람의 영혼을 길들일 수(tame) 있으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상기시킨다. 하나님께서는 방언이라는 그분의 초월적 능력으로 사람을 압도하셔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된 뜻과 행위를 멈추어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생각하고, 행하게 하려 하신다.
b. 성화된 말로서 방언
방언은 한편으로 성화된 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방언은 옛 사람 때와는 다르게 말하는 성화된 말이라고 규정될 수도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 16장 17절에 등장하는 “새 방언”(kainh glw'ssa)은 “새로운 회심자의 성화된 말”(the sanctified speech of a new convert)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런 해석은 “글로사”의 문자적 의미는 “몸의 한 기관으로서 혀”를 의미하며, “까이노스”는 “새로운, 신선한 혹은 갱신된”(new, fresh, anew or renewed)를 의미한다고 봄으로써 가능하다. “까이노스”의 용례들(막2:21; 고후5:17; 벧후3:13)은 마가복음 16장 17절을 한 죄인이 진정으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을 때,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이 될 때, 한 가지 확실하고 신뢰할 수 있는 가시적 표적이 따를 것을, 즉 그가 “새로운 또는 갱신된 혀”(a new or renewed tongue)로 말할 것에 대한 예언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방언으로부터 거룩하게 됨, 즉 성화(sanctification)를 분리시키지 말아야 한다. 스랍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바 핀 숯으로 이사야의 입술을 지저 거룩하게 했던 것처럼(사6:6-7), 오순절의 성령의 불의 혀가 다락방에 모였던 사람들의 혀를 거룩하게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c. 성화되어 가는 말로서 방언
방언은 다른 한편으로 성화되어 가는 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방언은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것이다. 방언의 중요성은 자기 교화에도 있다. 바울은 방언을 말하는 자는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e&anutoVn oi*kodomei')이라고 덧붙인다(고전14:4). 성도가 하나님과의 새로운 교통의 길을 통하여 말하고 있을 때는 동시에 자기 반성적 행동이 있어야 한다. 즉 그는 영적으로 교화되어야 한다. 이 말과 밀접히 연관된 구절은 앞서 인용된 유다서 20절의 “성령으로 기도하라”(e*n pneuvmati a&givw/ proseucomenoi)는 말씀이다. 성령으로 기도하는 것에는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으로 기도하는 것도 포함된다. 바울은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라”고 말하고 있다. 방언을 말함으로써 우리 혀를 거룩하게 하고 영을 거룩하게 하고, 마음을 거룩하게 하고, 삶을 거룩하게 해야 한다. “거룩한”은 그냥 거룩한 것이 아니라 원어적으로 형용사 최상급으로서 “가장 거룩한”(th'/ a&giwtavth/) 것이다. 그래서 NIV는 그 구절을 “most holy”라고 번역했다. 방언을 통해 가장 거룩함을 향해 자신을 건축해나가야 한다. 거룩함은 방언을 말하는 자의 삶의 기초이면서 방언을 통해 말하는 자의 삶이 지어져 도달해야할 절정이다. 방언은 정서적으로 친밀한 사귐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형성적인 행위”(a morally formative act)다. 방언으로 기도하면서 자기를 가장 거룩한 믿음 위에 건축해 나가야 한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자는 믿음이 성장하고 점점 더 거룩해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방언은 성화되어가는 말이다.
야고보는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라고 가르친다(약3:8). 스스로 자기 혀를 길들일 사람이 없다. 사람은 어느 누구든지 자기 혀를 길들일 수 없다. 혀는 인간이 죄인인 것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혀는 악한 것을 쉬지 않고 발한다. 다른 사람을 죽이는 독으로 가득하다. 혀는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사르는 불인데 그 원천은 지옥불이다(약3:6). 지옥불에 살라지는 혀는 악과 독을 품는다. 작은 키가 큰 배를 움직이듯, 작은 혀가 인생을 움직인다(약3:4). 자기 혀를 통제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경건은 헛된 것이 된다(약1:26).
방언은 인간의 혀를 통해 말하는 마음과 생각을 길들이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다면 온전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약3:2). “온전한”(tevleio")은 “목표에 도달한, 성숙한”이란 의미를 갖는다. 혀를 통제하는 것은 거룩의 완성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혀를 통제하는 것은 그만큼 성화의 중요한 국면이다. 누가는 방언이란 “성령이 그들에게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kaqwV" toV pneu'ma e*divdou a*pofqevggesqai au*toi'", as the Spirit gave them to speak out) 말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준다(행2:4). 혀를 움직이는 주도권은 발화자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 있다. 성령께서 혀를 통제하셔야만 사람이 방언을 말할 수 있다. 성령께서는 방언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말의 실수가 없는 온전함으로 나가도록 독려하며 이끄시는 것이다. 방언은 “언어의 개조”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장 온전한, 거룩한 경지에 이르는 것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쳐야 한다(벧전3:10). 성령께서 우리 혀를 움직이도록 통제권을 내어 드림으로써 우리는 온전한 사람을 향해 성숙해가야 한다.
d. 언어의 신학적 순기능 회복으로서 방언
방언은 인간 언어의 “신학적 순기능”(theological proper function)의 회복을 의미한다. 인간의 언어는 죄로 인해 원래의 신학적 순기능을 상실했다. 그에게 신학적 순기능이란 언어가 창조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용됨으로써 인간의 몸과 영혼에 유익을 주는 것이다. 신학적 역기능은 언어가 불순종으로 인해 인간의 몸과 영혼에 해를 가하게 되는 것이다. 타락은 인간의 언어를 하나님을 향한 대적의 도구로 전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인간의 전 존재를 범죄케 하여 지옥의 심판을 받을 처지에 놓이게 만들었다. 방언은 그런 언어의 신학적 역기능을 순기능으로 바꾼다. 방언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말을 포기하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말하게 함으로써 인간 언어의 신학적 순기능을 회복시키기 시작한다.
3. 방언과 회개
a. 용서받은 죄인을 상징하는 방언
방언은 중생하여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여전히 죄된 인간의 본성을 상징한다. 바울은 로마서 8장 26절에서 성령의 탄식 기도를 언급한다. 그리고 신학자들은 그 언급을 방언에 관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왜 신자가 방언을 통해 탄식해야하는가? 이상환은 그 이유를 신자의 죄된 실존에서 찾으려 한다. 그에 의하면 성령은 신자의 영혼 깊은 곳에 있어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죄들을 조명하고 드러낸다. 신자라할지라도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켜 죄와 사망에서 해방될 수 없다(8:3-4). 육신의 연약함은 죄적 본질에 의한 것이다. 어거스틴은 중생자 안에 있는 죄를 죄가 아니지만 “죄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에” 죄라고 불렀다. 그는 침례 후에 남아 있는 것을 “연약성”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침례이후에도 죄가 “존재”하며 다만 관여하지 않을 뿐이다. 어거스틴은 중생자 안에 존재하는 죄는 중생자의 싸움을 유발시킨다고 말한다. 그 싸움은 때로 승리로 끝나고 중생자에게 기쁨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패배로 끝나고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는 그러므로 중생자들에게 죄가 “다스리는 힘”을 갖지 못하게 하라고 충고했다. 루터에게 원죄란 타고난 “기질”이며, 죄사함 받는 다는 것은 죄가 없어졌다기보다는 죄가 전가되지 않는 것이다.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에게도 의심, 불신, 침체 등의 죄들이 있을 수 있다. 신자가 육체 가운데 살아 있는 동안에는 죄가 그 안에 있다. 신자의 죄는 이 세상에서 제거되지 않지만 그 죄에 대한 책임이 제거된다. 루터는 신자의 속에도 죄가 존재하는 상태를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루터는 바울을 따라 신자 안에 “원죄”가 남아 있어서 선에 대항하여 싸움을 일으키고 파멸시키기도 한다고 보았다. 신자 안에서 성령의 싸움은 인간의 원죄와의 싸움이다. 루터는 이렇게 신자 안에서 죄와 성령이 대립하여 일어나는 싸움을 말하면서 동시에 영적인 본성과 육적인 본성이라는 신자 안의 두 사람의 싸움을 말한다. 어거스틴은 병들었던 본성이 치유를 받아 성령으로 행하게 된다고 말했지만, 루터는 신자 안에 옛 본성과 새 본성, 즉 “영적인 본성”과 “육체적인 본성”의 대립적인 두 본성이 존재한다고 말했다. 칼빈은 중생자 안에 있는 죄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는 신자 안에 있는 죄, 즉 “연약성”이 신자를 겸손하게 만든다고 평가했다. 즉 그는 중생자 안에 연약성이라는 죄가 남아 있음으로써 중생자가 그 연약성을 의식할 때 교만하지 않고 겸손하게 된다고 말했다. 이렇게 그는 중생자 안에 죄의 존재를 기능적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제임스 던(James Dunn)에 의하면 그 “연약함”은 외적인 유혹에 대한 성도의 노출도, 기도에 대한 성도의 무능력도 아니다. 그것은 죄로 인한 부패와 타락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 연약함은 성령의 도우심을 요구한다. 탄식 방언은 인간이 연약하여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본성의 죄성을 향한 성령의 탄식을 반영한다. 탄식방언은 인간의 죄된 본성에 대한 성령의 탄식이며 또한 자기 본성에 대한 인간의 탄식이다.
b. 탄식 방언과 회개
방언은 회개일 수 있다. 로버트 맨지스(Robert P. Menzies)는 방언을 성결과 성숙을 말해주는 “배지”(badge)로 보는 것을 반대했다. 그는 방언이 발화자가 고도의 영적 성숙에 들어간 것을 말해주는 것은 아니라고 보았다. 그의 언급은 파함의 언급과 일치한다. 파함은 성화를 통해 두 번째 은혜를 받고 원죄까지 사함을 받고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도 성결이라는 자라남의 과정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성화(sanctification)를 성결(holiness)로 들어가는 문으로 이해했다. 즉, 파함은 성화를 얻고 방언을 받은 후에도 지속적인 성결의 큰 바다로 들어가야 함을 강조했다. 그런데 이상환 은 방언이 회개일 수 있으며, 그렇다면 성화의 기능을 갖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전 항에서 논의했던 것처럼 방언의 성화적 기능은 이미 방언이 혀를 길들인다는 관점에서 언급되어 왔다. 그런 면에서 로버트 맨지스의 주장은 편향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이상환의 방언에 대한 성화론적 해석도 새로운 것은 아니다. 다만 이상환은 인간 본성의 죄를 탄식방언의 원인으로 해석하면서, 탄식이 그 죄에 대한 회개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그 가능성에 따라 논리적으로 탄식방언의 성화적 기능을 상정함으로써 종래의 오순절신학자들이 간과했던 방언에 대한 성화적 해석을 시도한다.
방언과 관련된 정서적 표현에 대한 해석은 심리적, 신체적, 종말론적, 기독론적 등의 관점에서 시도되었으며, 최근 윤리적 관점과 성화론적 관점에서 시도되고 있다. 리차드 허치(Richard A. Hutch)는 방언과 함께 동반되는 울음(crying)은 내적인 극심한 심리적 상처(extreme hurt)를 가리키며, 더 나아가 삶의 종말, 가려졌던 피할 수 없는 죽음(death)을 가리킨다고 분석했다. 버튼(John Berton)은 방언과 동반되는 탄식(a*sqevneia)을 썩어질 육체의 현재적 한계(physical limitations)로 해석했다. 고든 피(Gordon D. Fee)는 탄식하게 만드는 연약함을 “고난”(suffering)과 관련시켰다. 마키아는 탄식 방언을 기독론적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에게 방언은 피조물을 고통해서 해방시키기 위한 그리스도의 탄식에 동참하는 것, 십자가의 체험이다. 또한 마키아에게 탄식 방언은 약함 속의 강함의 표현 또는 고통당하는 피조물과 함께하는 우리의 탄식 한 가운데서 도래하는 천국의 첫 열매를 경험하는 능력이다.
탄식 방언에 대한 윤리적 해석은 방언에 잠재된 변혁적 능력을 드러낸다. 버톤(John Bertone)에 따르면 방언 경험은 종말에 온전히 실현될 하나님의 구속의 과정으로서 “적극적인 변혁 능력”(positive transformative power)을 갖는다. 방언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감정이입(God’s empathy)이며, 신자와 하나님의 감정적 정렬(alignment)로서 적절한 행동으로 인도하는 신자와 성령 하나님의 지속적인 협력(ongoing cooperative effort of the believer and the Spirit that leads to proper behavior)의 일환이다.
이미 살펴본 것처럼 방언에 대한 성화론적 해석 중에서 회개와 연결시키는 해석이 이상환에 의해 시도되고 있다. 고든 피와 마키아가 탄식에 신학적 의미를 가하는데 집중하였다면, 이상환은 먼저 탄식의 근본원인으로 깊이 천착해 들어가 거기에서 죄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는 탄식을 죄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보게 됨으로써 탄식방언을 회개 방언으로 해석해낼 수 있었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방언을 회개와 직접적으로 관계없이 받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주로 회심으로 이어지는 회개를 언급했다. 그 공동체의 신앙 진술문은 구원의 과정의 첫 단계로 “회개”(repentance)를 들었다. 그리고 마음에 회개가 없다면, 그것은 곧 구원받으려는 갈망도 없는 것이라고 보았다. 예수께서 마음에 들어오시게 하려면 죄를 슬퍼해야한다. 회개 없는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얻을 수 없다. 파사데나주의 홈스테드에서 열린 6일간의 오순절적 집회의 첫 날 주제는 “회개”였다. 회개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가입하기 위한 조건이다. 회개는 그 위에 성령께서 집을 짓는 기초가 된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방언을 회개 없이 받는 은사로 규정했다. 회개를 중생을 위한 조건으로 파악한 것이다.
“회개”를 중생을 위한 것에만 국한 시키지 않는다면, 즉 기신자의 신앙생활 가운데서의 죄악에 대한 회개와 관련된다면 탄식 방언은 죄에 대한 회개일 수 있다. 기신자들에게도 죄가 존재한다. 그래서 기신자들에게도 회개가 필요하다. 기신자가 탄식 방언을 통해 회개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은 회개를 중생에만 관련시킴으로써 방언을 통한 죄의 회개의 가능성을 차단하려했던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의 주장이 편향적인 것이었다고 평가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기신자는 방언을 통해 자기의 죄악을 탄식하며 회개함으로써 성화를 이루어 갈 수 있다.
4. 방언과 신화(神化)
a. 인간의 능동적 신화의 길로서 방언
은사가운데 하나인 방언은 인간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능동적으로 “신화”(神化, deification/theosis)에 참여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방언이 인간의 죄된 본성의 탄식이며 회개일 수 있다면, 방언을 통한 죄의 정화는 곧 인간의 능동적인 신화의 과정이라고 이해될 수도 있다. 동방교회에서 하나님과의 합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다. 그리스도의 비하(katavbasi")는 성령 안에서 인간의 상승(a*navbasi")을 위한 것이다. 동방신학자 로스키(Lossky)는 베드로가 신자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들”(partakers of the divine nature)로 규정한 것을 근거로 하나님과의 합일을 실제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동방교회는 성부와 성자에게 공통적인 것은 신의 성품에 참여케 하시는 성령께서 교회 안에서 인간에게 소통해주시는(perichoresis)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동방정교회의 신학에 따르면 방언은 인간이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신화의 한 길이라고 말할 수 있다.
b. 신화적 은사 해석과 성화적 방언 해석
루터는 “은사”를 통한 인간의 능동적 의인화를 추구했다. 바울과 루터의 신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은 인간의 능동적 참여로 인한 의인화에 주목한다. 바울에 관한 “새 관점적”(new perspective) 연구자들은 바울 신학의 중심을 “법정적인 칭의”(forensic righteousness)로부터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 with Christ)을 통한 “참여”(participation)로 이해해왔다. 그들은 바울에 대한 루터의 칭의 중심적 해석을 비판한다. 핀란드 학파는 이런 관점에서 루터를 재해석해왔다. 핀란드 루터교 신학자들은 동방정교회신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신화”(神化, deification/theosis)의 관점으로 루터적 칭의론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루터가 칭의를 구원을 묘사하기위해 “신화”(theosis)적 이미지를 사용하기도 했다고 주장한다. 핀란드의 소위 “마네르마 학파”(Mannermaa School)의 한 인물인 퓨라(Simo Peura)는 루터가 “은혜”를 죄인이 수동적이고 법정적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길로 이해했고, “은사”를 죄인이 능동적으로 의롭게 되는 길로 이해했다고 주장했다.
방언의 성화론적 기능에 대한 인식과 은사에 대한 신화적 해석은 서로 일치한다. 비록 두 연구가 출발하는 지점은 다르지만 두 연구는 지향하는 바가 동일하다. 이상환은 은사 중에 하나인 특수한 탄식 방언을 소극적으로 죄를 드러냄으로써 달성되어 가는 성화와 연결시켰고, 퓨라는 일반적인 은사와 능동적인 신화를 연결시켰다. 방언의 성화론적 기능에 대한 이상환의 연구와 은사를 신화적(神化的)으로 해석한 퓨라의 연구가 만나면, 은사들 중 하나인 탄식 방언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의 죄됨을 고백하면서 능동적으로 의롭게 되어가는 성화/신화의 한 길이라고 규정될 수 있다.
5. 방언과 사랑
a. 방언의 성화론적 적극성과 사랑
탄식방언이 성화론적으로 소극적인 면, 다시 말하면 죄에 대해 죽음(mortificatione)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방언의 성화론적 적극성, 즉 의에 대해 살아남(vivificatione)은 방언을 통해 밖으로 사랑이 흘러나가게 하는 것이다. 칼빈(J. Calvin)은 “육의 죽음”(moritificatione scilicet carnis)과 “영의 살음”(spiritus vivificatione)을 회개의 구성요소들로 보았다. 육의 죽음은 본성을 부인하는 것(abnegatio), 즉 죄에 대한 죽음이며, 영의 살음은 거룩으로의 갱신(renovationem)이다. 방언은 탄식으로 육에 속한 미움을 죽이고, 마음의 사랑을 살려 흘러 보내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바울은 모든 성령의 은사들이 출발해야할, 그리고 나아가야할 “제일 좋은 길”(u&perbolhV o&dov")을 제시한다(고전12:31). 그 가장 좋은 길(the most excellent way)은 “사랑”(a*gavph)이다. “사랑을 따라” 방언을 구하고 행사해야 한다. 사랑의 실천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은사들도 혹은 종교적이고 윤리적인 행위들도, 지식도 무익하고 무의미하다. 사랑은 비교 가능한 은사도 아니며 최고의 은사도 아니다. 오히려 사랑은 언급된 은사들과 행위들의 근원적인 동기이며 그 한계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4:8). 그 진술은 사람의 언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가장 대담한 진술이다. 사랑은 하나님의 단순한 속성이 아닌 가장 내밀한 하나님의 본성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그 사랑은 성자를 통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으며, 성령은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통달하여 아신다. 그래서 사랑은 “성령의 사랑”(h& a*gavph tou' pneuvma)이기도 하다(롬15:30). 바르트가 언급했듯이 “기독교인의 생활은 사랑으로 시작한다. 또한 그 생활은 사랑으로 끝을 맺는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든 신앙생활의 동기가 되어야 하며 또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신자의 모든 말과 행함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흘러가야한다. 방언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오고, 방언을 통해 우리의 사랑이 하나님께 흘러가야 한다. 방언을 통해 성령의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오고, 타인에게 흘러가야 한다.
b. 방언과 오순절주의자들의 사랑
방언은 사랑을 제거하지 않는다. 오순절운동은 성령침례의 증거를 방언으로 보아왔다. 그러나 비록 오순절운동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의 목적을 복음증거와 봉사를 위한 능력부여로 보았지만 성령침례에서 사랑을 제거하지는 않았다.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사랑이 오순절주의자들로 하여금 방언을 통해 증명되는 성령침례를 받음으로 복음증거를 위한 능력을 받기를 갈구하게 했다.
오순절운동을 시작한 파함은 결코 오순절운동에서 사랑을 제거하지 않았다. 파함은 오순절주의자들을 비 분파적인 정신으로 무장한 “온전한 사랑”(perfect love)과 순복음의 남자들과 여자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으며, 표적과 기사들과 여러 이적들과 성령의 은사들을 동반하는 순복음(full gospel)을 믿는 자들이라고 소개했다. 방언이 동반되는 순복음은 온전한 사랑과 함께 전해졌다. 그는 오순절주의자들을 온전한 사랑의 사람들이라고 규정했던 것이다. 그는 모든 교파의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사랑하기를 바랐다. 심지어 죄를 범한 형제까지도 사랑하고자 했다. 우리도 죄인이 될 수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독생자를 주실 때 보여주셨던 그런 사랑으로 그를 대해야하며, 필요하다면 우리 자신의 생명을 그를 위해 내놓아야 한다고 말했다. 파함은 궁핍한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와 자매들을 돕기 위해 벧엘 치유의 집을 세우고 자기의 재산을 내놓고 공유하기까지 했다.
수년 동안 나는 모든 것을 공유해왔습니다. 나는 어느 것이라도, 나의 옷들조차도, 내 것으로 간주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습니까(요일 3:17).
시무어에게 사랑은 성령침례의 외적 증거인 방언과 조화를 이루는 성령침례의 내적 증거다. 시무어의 공동체는 성령침례의 증거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 즉 이중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 공동체에게 외적으로 방언에 의해 입증되는 성령침례의 내적인 증거는 “하나님의 사랑”(Divine love), 즉 “자애”(charity)이다. 사랑이야 말로 성령침례의 “진정한 증거”(the real Bible evidence)다. “시무어는 성령침례의 이해를 윤리적 차원에까지 확장했다”는 록벡의 평가는 재조명되어야 한다. 파함이 성령침례에서 사랑을 제거한 것도 아니요, 시무어가 성령침례를 제거된 사랑에까지 다시 확장시킨 것도 아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처음부터 성령침례에서 사랑을 제거하지 않았으며, 성령침례 개념 안에는 사랑이 포함되어 있었다. 스티븐 J. 랜드도 성령침례의 “본질적 증거”(essential evidence)로서 “사랑”을 제시했다. 진정한 증거가 외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방언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이 흘러가지 않는 방언은 성령침례의 증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방언을 말하는 것 자체만 가지고 어떤 사람이 성령침례를 받았다고 판단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방언을 통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흐를 때 진정으로 그 방언이 성령침례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사랑이 흐르는 방언만이 성령침례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성령침례를 받음은 사랑이라는 내적증거와 방언이라는 외적 증거를 통해 증명된다.
성령침례를 받은 진정한 증거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사랑, 즉 자애다. 자애는 예수의 영이다. 진정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성령의 열매를 맺는다(갈5:22). 이것이야말로 일상생활이나 대화에서 나타나는 진정한 성경적 증거다. 그리고 그 진정한 증거의 외적 나타남들이 있다. 그것들은 방언과 귀신축사, 병든 자에게 안수하면 나음이라는 믿는 자들에게 뒤따르는 표적들이다. 이런 외적 표적들이 나타나면서 영혼들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속에서 점점 더 커지는 것이다.
c. 방언과 성령의 열매
방언을 통해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은 너무도 멋지게 들려서 모든 교인들이 방언을 말하기를 원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랑이 그 주제(love was the theme)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그는 성령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갈5:22). 사람들이 성령의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그들이 얼마나 많은 방언을 말하고, 얼마나 큰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와는 상관없이, 주님께서는 그들이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미 하나님의 성회 초대 회장이었던 벨(E. N. Bell)은 방언과 관련하여 세 가지의 길을 예시한다. 하나는 방언 없이 열매만 추구하는 길이다. 그 길과 정 반대의 길은 열매 없이 방언만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고 두 길 사이의 중도는 방언 없이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그는 세 가지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면 중도의 길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더 좋은 길은 방언을 통해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이다.
d. 방언과 사랑의 분리와 하나 됨
방언과 사랑은 원칙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방언은 하나님의 삼위사이의 친밀한 사랑과 하나님과 발화자 사이의 친밀한 사랑의 교제에서 발생하며, 하나님의 사랑의 언어가 발화자를 통해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발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과 사랑은 분리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방언과 사랑이 때로 분리되기도 한다. 방언과 사랑의 분리는 발화자의 마음속 깊은 본성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죄성(sinful nature) 혹은 연약성(weakness) 때문이다. 비록 한 인간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고백하여 죄책을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 마음이라는 본성은 갓 태어난 연약한 아기의 상태와 같다. 그래서 어린 아기와 같은 불완전함에 의해 그 마음에 사랑대신 타인에 대한 미움과 무관심이 발생한 상태에서 방언을 말할 수도 있다. 또한 루터나 칼빈이 주장한대로 칭의를 받고 죄책을 용서받았으나 그 마음의 본성이 여전히 죄로 오염되어 있기 때문에 그 죄성으로 인해 때로 그 생각과 마음에 미움과 무관심이 발생한 상태에서 방언을 말할 수도 있다. 바울이 고린도교회의 방언을 말하는 자들을 “신령한 사람”(pneumativko")이 아니라 “육신에 속한 사람”(sarkivko")이라고 비판한 것은 그들이 그 영으로는 방언을 말하면서도 그 마음이 “바울파, 게바파, 예수파” 등으로 서로 갈라져 파당을 이루고 서로를 미워했기 때문이었다(고전3:3).
방언과 사랑은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방언과 사랑이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영과 혼이 서로 일치해야한다는 것이다. 영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방언을 말하는데, 마음과 이성, 즉 혼은 미움으로 가득해 있다면, 바로 그 상태가 방언과 사랑의 분리 상태다. 방언을 통해 사랑이 흘러가려면 방언을 말하는 자의 마음에 사랑이 가득해져야 한다. 영이 방언을 말할 때 그 마음이 하나님과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찰 때 방언을 통해 하나님과 타인에게로 그 사랑이 넘쳐서 흘러간다.
e. 방언과 “사랑의 침례”
방언은 그것을 통해 성령의 사랑 속에 잠기고 또한 흘러넘치는 사랑의 침례다.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는 다름 아닌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우는 “사랑의 침례”(a baptism of love)다. 시무어의 공동체의 한 자매는 방언을 구하지 않고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그 즉시 방언으로 말할 수 있었다고 간증했다. 또한 한 형제는 성령침례가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타인에 대한 깊은 동정심을 일으키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성령침례가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움을 경험하고 성령침례를 “사랑의 침례”(a baptism of love)라고 불렀다. 또한 메드(Mead)라는 형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해지며 방언을 말하기 시작하는 경험을 하고 성령침례를 “하나님의 사랑의 침례(baptism of Divine love)라고 일컬었다. 바울은 성령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마음에 부어주신다고 말했으며(롬5:5), “성령의 사랑”(h& a*gaph tou' pneuvmato")으로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권면했다(롬15:30). 성령침례는 방언이라는 매체를 통해 “성령의 사랑” 속에 잠기고, 그 사랑이 방언이라는 매체를 통해 타인에게로 흘러 넘쳐나가는 “사랑의 침례”이다.
D. 요 약
인간의 죄는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 했었다. 오순절에 성령께서 인간에게 임하시고, 인간의 영이 몸과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은 파괴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이었다. 방언은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경험시킨다. 방언은 의사소통 회복의 상징이다. 바벨에서 구음을 흩으시고 의사소통의 장애를 일으키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의사소통의 장애가 되는 혀를 풀어주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의사소통 회복의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신다. 오순절의 다른 방언들도 또한 의사소통의 회복을 상징한다. 오순절 사건은 “발화 및 청취”, 즉 소통이었다. 발화와 청취를 일으킨 오순절 방언은 바벨 사건으로 상징되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 단절의 회복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방언은 하나 됨의 상징이다. 방언은 바벨탑 언어 혼잡이후로 분열되고 대립되었던 하나님과 사람, 사람들과 민족들을 하나로 묶어준다. 방언은 하나님과 사람의 사귐으로 인한 하나 됨의 회복을 상징한다. 방언은 또한 다양하면서도 다양한 우상 숭배를 일으키지 않는다. 오순절의 다양한 방언들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에 의해서, 유일하신 하나님을 위해, 유일하신 하나님에 관해서만 말했다. 이렇게 다양한 방언들이 유일한 하나님 신앙을 일으킨 것은 바벨탑 사건 이후 이스라엘 신앙공동체를 위협했던 다양한 방언들이 다양한 우상들에 대한 숭배를 일으켰던 사건들의 반전이다. 방언은 사회적 계급과 민족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게 한다. 방언이 일으키는 통합은 다양성을 초월하는 것이지, 다양성을 억압하거나 와해시키는 통합이 아니다. 방언은 나이와 성을 초월하여 하나가 되게 한다.
방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베푸시는 구원을 위한 새 언약의 “상징”이다. 방언은 또한 인간 개개인을 향한 그리스도 안의 새 언약의 실존적 상징이다. 방언은 죄사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관계되지만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것은 아니다. 오순절의 방언은 새 언약의 보편성을 상징한다. 방언은 “은혜”로 구원함을 받은 이후에 받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을 전제로 삼기 때문에 은혜와 간접적으로 관련된다. 방언은 은사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먼저 역사하고, 그 다음에 은사인 방언이 주어진다. 방언은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중생한 사람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하는 은사다. 그러므로 방언은 구원을 위한 조건이 아니다. 바벨 방언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심판의 상징이었지만 오순절 방언은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용서의 징표다. 방언은 하나님에 의한 새 창조의 상징이다. 방언은 단지 영혼의 해방뿐 아니라 인간 존재의 모든 면, 영혼, 마음, 육체, 사회적 관계의 새로운 창조를 위한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새 창조의 복음의 표징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일방성만으로는 발생하지 않는다. 구원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반응함으로써 일어난다. 방언은 구원 얻는 믿음을 확증시키는 표적들 중의 하나다. 방언을 말하는 것은 발화자가 구원 얻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자신과 타인이 확증하는 표적이 될 수 있다. 방언은 신앙생활을 위한 믿음을 더욱 강하게 한다. 방언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항복을 상징한다. 방언은 한편으로 성화된 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새 방언”은 “새로운 회심자의 성화된 말”로 해석될 수 있다. 방언은 다른 한편으로 성화되어 가는 말이라고 말할 수 있다. 방언은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는 것이다. 방언은 인간의 혀를 통해 말하는 마음과 생각을 길들이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방언은 인간 언어의 “신학적 순기능”의 회복을 의미한다. 방언은 중생하여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여전히 죄된 인간의 본성을 상징한다. 탄식방언은 인간의 죄된 본성에 대한 성령의 탄식이며 또한 자기 본성에 대한 인간의 탄식이다. 방언은 회개일 수 있다. 탄식 방언에 대한 윤리적 해석은 방언에 잠재된 변혁적 능력을 드러낸다. “회개”를 중생을 위한 것에만 국한 시키지 않는다면, 즉 기신자의 신앙생활 가운데서의 죄악에 대한 회개와 관련된다면 탄식 방언은 죄에 대한 회개일 수 있다.
은사가운데 하나인 방언은 인간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능동적으로 “신화”(神化, deification/theosis)에 참여하는 길이 될 수 있다. 방언의 성화론적 기능에 대한 인식과 은사에 대한 신화적 해석은 서로 일치한다. 탄식방언이 성화론적으로 소극적인 면, 다시 말하면 죄에 대해 죽음(mortificatione)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방언의 성화론적 적극성, 즉 의에 대해 살아남(vivificatione)은 방언을 통해 밖으로 사랑이 흘러가게 하는 것이다. 방언은 사랑을 제거하지 않는다. 성령침례의 증거를 방언으로 규정하면서 오순절운동을 시작한 파함은 결코 오순절운동에서 사랑을 제거하지 않았다. 시무어에게 사랑은 성령침례의 외적 증거인 방언과 조화를 이루는 성령침례의 내적 증거다. 방언을 통해 사랑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풍성히 맺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방언과 사랑은 원칙적으로 분리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방언과 사랑이 때로 분리되기도 한다. 방언과 사랑의 분리는 발화자의 마음속 깊은 본성에 여전히 자리 잡고 있는 죄성 혹은 연약성 때문이다. 방언과 사랑은 분리되지 않아야 한다. 방언과 사랑이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영과 혼이 서로 일치해야한다는 것이다. 방언은 그것을 통해 성령의 사랑 속에 잠기고 또한 흘러넘치는 사랑의 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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