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으로, 공적으로 방언 말하기:
오순절운동의 아버지 찰스 F. 파함의 방언론
이창승
|순복음대학원대학교 조직신학|
jesusgate@daum.net
I. 들어가는 말
오순절운동의 아버지 찰스 파함(Charles F. Parham)은 방언에 대한 이해와 체험이 지극히 미미했던 100여 년 전에 개척자로서 방언의 세계를 탐험하며 지도와 탐험기와 좌표들을 남겼다. 그런데 그동안 그 지도와 탐험기는 비판의 상자 안에 넣어져 인적이 드문 곳에 버려졌었다. 이제는 요시야가 성전 안에서 발견된 율법을 다시 읽었던 것처럼, 그의 방언 탐험기를 발견해내어 다시 읽음으로써 방언의 세계 이해에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A. 기존의 파함의 방언론 연구
파함의 방언론에 대한 기존 연구는 주로 그의 증거를 위한 선교적 방언에 편중되어 왔으므로 그의 방언론을 전반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1991년에 고프(James R. Goff)는 파함이 방언을 임박한 종말의 준비로서 선교적 제노글로사(missionary xenoglossa)로 이해한 역사를 연구했다. 1993년에 웨셀스(Roland Wessels)는 파함이 성령침례와 방언 말하기를 증거라는 용어로 결합하고, 방언을 이 세상언어를 말하는 선교적 언어로 이해하는데 이르기까지 파함의 성경연구와 사고의 변화를 추적하였다. 하지만 파함의 방언론은 좀 더 다양했다. 사실, 앞에서 언급한 두 연구는 파함의 방언론에 대한 포괄적인 연구는 아니었다. 파함의 방언론에 대한 전반적이고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본 소고는 이 요구에 부응하기 위해 파함의 방언론을 포괄적으로 탐구할 것이다.
B. 파함의 방언론의 구조
파함의 방언론의 전체 구조를 잡는데 유용한 기준은 그가 방언을 말하는 장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으로 구별한 것이다. 그는 “저는 주님과 . . . 방언으로 . . .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저는 공적으로(publicly)는 고린도전서 14장을 따르며, 그것을 순종합니다”라고 말했다. 파함은 바울을 따라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과 교회의 모임이나 집회에서 “공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을 구별했다. 그래서 본 소고는 파함의 방언을 크게 “사적 방언”(private tongues)과 “공적 방언”(public tongues)으로 분류한다.
C. 파함의 방언론 개략
파함은 방언을 사적으로 기도와 찬양, 대화의 길로 인식했고, 공적으로 성령침례에 반드시 동반되는 분리될 수 없는 명확하고 유일한 성경적, 내적인 성령침례의 외적 증거와 표적, 신자의 표적이며 또한 불신자에게 표적, 배우지 않은 이 세상 언어이며 그래서 선교와 설교를 위한 메시지의 통로, 하나님께 찬양과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 이해했다. 그런데 파함은 언어적인 방언만 고수하지는 않았다. 파함은 성령침례와 더불어 최초로 비언어적인 방언 은사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런 최초의 방언은 그 후 진정한 언어의 은사로 발전해야만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어느 정도 비언어적인 방언을 인정했다.
II. 사적 방언
A. 기도(Prayer)로서 사적 방언
파함은 방언을 사적 기도의 길로 인식했다. 그가 “저는 방언으로 기도하며(prayed in tongues) . . .”라고 말한 것을 미루어 보아, 그는 혼자 있을 때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곤 했다. 또한 그에게 사적 방언은 중보기도였다. 파함은 혼자 있을 때 방언으로 중보기도 했음을 언급했다. 그는 영어를 말할 수 없는 한 사람을 위해 방언으로 기도한 적이 있었다. 파함은 “오늘 아침 저는 우리 언어[영어]를 말할 수 없는, 그래서 우리 예배에서 유익을 얻을 수 없었던 한 사람의 기쁨을 위해 방언으로 기도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렇게 파함에게 사적 방언은 기도와 중보기도의 기능을 담당하기도 했다.
B. 대화(Conversation)로서 사적 방언
파함에게 사적 방언은 대화이기도 했다. 그에게 방언은 일방적인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기도가 아니고 주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주장의 근거는 그가 “저는 저녁에 주님과 함께 걷고 이야기를 나누며(talking with the Lord) 좋은 시간을 보냅니다. 저는 . . . 방언으로 이야기합니다(talk in tongues)”라고 말한 것이다. 그는 기도와 이야기하는 것을 구분한 반면에 주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방언으로 이야기하는 것을 동일시했다. 즉, 파함에게 사적 방언은 주님과의 대화의 한 방법이었다.
C. 찬양(Praise)으로서 사적 방언
파함은 사적 방언을 찬양의 한 길로 이해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방언으로 기도하고 대화할 뿐만 아니라 방언으로 찬양하기도 했다. 파함은 “저는 방언으로 찬양합니다(sing in tongues)”라고 말했다. 이런 파함의 사적 방언 찬양은 그의 첫 방언 체험 때부터 시작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토페카의 벧엘 성경학교 기도실에서 처음 방언을 말하기 시작할 때 방언으로 하나님을 예배했었다. 그는 당시를 “그때 나의 혀가 뒤틀리며 스웨덴어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다(I began to worship in the Sweedish tongue)”고 회고했다. 아마도 파함은 “스웨덴어로 예배하다”와 “방언으로 찬양하다”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했을 것이다.
파함이 기도와 찬양, 중보적인 사적 방언을 인정했다는 것은 재조명되어야 한다. 맥기는 “비록 파함이 방언의 선포적 성격(preaching nature)에 대한 그의 관점을 유지하였지만, 오순절 주의자들은 더욱더 방언이 성령 안에서의 기도를, 중보와 찬양을 대표한다는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의 판단과는 달리 파함은 선포적 방언뿐만 아니라 찬양, 중보, 기도로서 방언을 스스로 행하였다. 그는 한 문장 안에서 성령침례는 성령 안에서 찬양하고, 기도하고, 그리고 설교할 수 있게 하기 위해 주어지고 있다(bestowing the power so that we can sing, pray, and preach “in the Spirit” as a “gift of tongues”)고 말하기도 했다.
II. 공적 방언
A. 성령침례의 증거(Evidence)로서 공적 방언
1. 성령침례에서 분리될 수 없는 증거로서 방언
파함은 방언을 성령침례에 반드시 동반되는 분리될 수 없는 증거로 이해했다. 그는 약속의 성령은 성경에서 방언 말하기를 동반했었으며, 오늘날에도 역시 동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점은 성경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방언이 성부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성령께서 강림하시는 것을 증거한다는 것이다. 파함은『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의 재판 서문에서 그 책을 쓰고, 8년 전에 첫 판을 낸 이래로 사도 신앙 운동(the Apostolic Faith Movement)은 전 세계로 퍼졌고, 그래서 지금까지 만국이 다른 방언을 말함이라는 증거를 동반하는 성령침례(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with the accompanying evidence of speaking in other tongues)와 병자를 고치는 동등한 신유 은사들, 예수 이름으로 행하는 축귀, 소위 기독교 문명의 몰락에 대한 경고와 주님의 임박한 재림에 대한 증거를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방언이 성령침례에 동반된다는 것은 성령침례와 분리될 수 없음을 의미했다. 파함은 “방언이 성령 침례와는 분리 될 수 없는 성령 침례의 일부이다”(the speaking in other tongues is an inseparable part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distinguishing it from all previous works)라고 말했다. 성령침례의 “증거”(evidence)라는 말은 성경에는 등장하지 않는, 파함이 창조적으로 사용한 신학적 용어다.
2. 성령침례의 유일한 성경적 증거로서 방언
파함은 방언을 성령침례의 유일한 성경적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는 “방언이라는 성경적 증거를 동반하는(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with the Bible evidence of speaking with tongues) 성령 침례”라는 어구를 사용했다. 파함은 “Bible evidence”라는 단수 명사 앞에 그 명사를 한정하는 정관사 “the”를 붙임으로써 “유일한”이라는 의미를 부각시켰다. 파함에게 방언은 성령침례의 “그 유일한” 증거였다. 또한 그는 현대의 방언은 사도시대와 동일한 증거라고 보았다. 약속의 성령의 인침을 약속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사도시대의 증거와 동일한 증거(same evidence), 즉 방언으로 말하기(speaking with tongues)를 지금까지 그들에게 주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파함은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 오순절 성령강림,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의 성령강림을 근거로 방언이 성령침례의 성경적인 증거라는 주장을 펼쳤다. 파함은 방언을 하나님의 증거라고도 말했다. 그에게 성령이 말하라고 주시는 것으로서 방언을 말함은 성령 침례에 대한 “하나님의 증거”(God’s witness to the Baptism)이기도 했다.
3. 내적 성령침례의 외적 증거로서 방언
파함에게 방언은 내적인 성령침례의 외적 증거였으며, 이 점은 그의 방언론에의 웨슬리의 영향을 보여준다. 그는 방언을 “이 침례의 결과로 나타난 증거”(the manifest evidence resulting from this Baptism)라고 말했다. 파함은 실질적인 성령침례는 영혼에 베풀어지는 내적인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에게는 성령침례가 내적으로 베풀어질 때, 그 결과가 외적으로 나타나는 증거가 방언이었다. 파함이 방언을 성령침례의 외적 증거로 파악한 것은 웨슬리가 성령침례를 성결로 파악한 것과의 조화를 시도한 것일 것이다. 웨슬리는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 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는 말씀은 기적을 행하는 성령의 능력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는 뜻이 결코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이런 성령은 이미 제자들에게 주어졌었다. 주님께서 제자들을 처음으로 파송하사 복음을 전파하라 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그분의 모든 제자들에게 성령을 주셨다는 것이다. 더러운 귀신을 내어 쫓을 권세, 병든 자를 고칠 능력, 죽은 자를 살릴 능력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그의 판단에 따르면, 그 말씀은 성결의 은총을 베푸시는 성령은 아직 오시지 않았다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인간과 심지어 배반자들까지 위하여 은사를 받으셨고 하나님이 저들과 함께 거하시게 된 것은 곧 “주께서 위로 올라가실 때요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을 때”(엡 4:8)였다. 그리고 오순절날이 완전히 도래했을 때에야 비로소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던 자들”(행 1:4)이 주어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처음으로 죄를 정복하고도 남음이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웨슬리에게 성령침례는 본질적으로 내적인 성결을 의미했다. 또한 파함이 성령침례를 내적인 면과 외적인 면으로 이해하고 방언을 외적인 면으로 규정한 것은 성결주의를 반영한 것이기도 했다. 웨슬리적 성결주의자 모리슨(H. C. Morrison)은 “성령침례는 신자들의 마음을 정화시키며 그들에게 봉사를 위한 능력을 부여한다”라고 말했다.
파함은 시무어보다 먼저 방언을 내적인 성령침례의 외적 측면으로 인식했다. 로벡은 시무어가 파함과의 논쟁과정에서 성령침례의 증거를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으로 분류하고 내적 증거를 성결주의의 전통을 따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충만하게 되는 윤리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외적 표적들 중의 하나를 방언으로 규정하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파함은 1902년, 그러니까 파함이 시무어를 만나기 3년 전에 이미 성령침례의 내적 국면과 외적 국면을 인식하고 외적 국면의 증거를 방언 말하기로 규정했었다. 이 점은 시무어가 1905년에 파함에게서 방언이 성령침례의 외적 증거라고 배웠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그렇다면 로벡의 주장의 설득력은 약화된다.
4. 성령침례의 명확한 표준으로서 방언
방언이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들도 확인할 수 있는 외적인 증거이기에, 또한 성령침례의 명확한 표준이 될 수 있었다. 파함에게는 오직 방언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한 가지 명확한 표준”(a definite standard)이었다. 방언은 중생 등 다른 은혜의 역사들로부터 명확하게 구분될 수 있는 표준이라는 것이다. 파함에게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은 자신이 주도하는 운동과 성결주의 운동을 구분하는 시금석이었다. 그는 “다른 방언을 말하는 것은 성령 침례를 그 이전의 모든 사역들[성결주의를 포함하여]로부터 구별시키는, . . . 성령 침례의 일부이다”(the speaking in other tongues is . . . part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 distinguishing it from all previous works)라고 말했다.
5. 성령침례의 최초의 은사로서 방언
파함은 방언을 명확하게 최후의 은사로 보았으며, 불명확하게는 최초의 은사로 보았을 것이다. 파함은 오순절 이전을 기준으로 볼 때는 방언이 모든 은사들 중에 최후의 은사라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지혜의 은사, 지식의 은사, 믿음의 은사, 신유의 은사, 이적을 행하는 은사, 예언 은사, 영들을 분별하는 은사, 방언들을 통역하는 은사는 구약 예언자들과 오순절 날 이전에 신약 제자들에게서 전부 나타났었다. 그러나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의 개인적 침례’(His personal Baptism)는 아직 주어지지 않았었다.”
반면에, 파함은 오순절을 기준으로 볼 때 방언이 모든 은사들 중에 최초의 은사라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있다. 파함이 직접적으로 방언을 성령침례의 최초의 은사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가 “최초”라는 용어를 방언 은사(the initial gift of tongues)에 사용하기는 했지만, 은사들의 최초라는 의미로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성령침례에 방언이 유일한 성경적 증거로 주어지고, 또한 다른 은사들도 동반된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그가 방언을 최초의 은사로 인식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파함에 따르면, 위대한 천년의 새벽에 날개에 치유를 싣고 날아오르시는 의의 아드님께서(the Son of Righteousness) 세상의 종말의 능력, 오는 세대, 만물의 회복을 실현시키고 계시다. 그리고 그분은 사도들과 함께 서는 특권을 가지면서 또 다시 표적들과 이적들, 그리고 기사들을 보시고, 성령의 모든 아홉 가지 은사들을 가지고 교회를 재방문하시고 계시다. 오순절의 순복음(full gospel)은 표적들과 이적들, 여러 이적들과 지혜, 지식, 믿음, 병 고치는 은사, 이적 행함, 방언, 영분별, 예언, 그리고 방언통역 같은 성령의 은사들이 동반되는(attended with) 복음이다.
6. 방언이외 성령침례의 사적 증거들
파함은 다른 사람들이 성령침례의 증거라고 주장했던 방언이외의 현상들을 성경적 증거가 아닌 “사적 증거”로 분류했다. 그는 어떤 사람들이 “큰 확신, 기쁨의 홍수, 기름 부으심들(unctions or anointings)”을 성령 침례(the Baptism)라고 부르는 것은 비성경적이라고 보았다. 또한, 파함에 따르면, 다른 사람들은 “외치기(shouting), 껑충껑충 뛰기(leaping), 뛰어오르기(jumping), 쓰러지기(falling in trance), 그리고 영감(inspiration), 기름 부으심(unction)과 계시(divine revelation)를 성령침례의 증거로 제시했다. 파함은 그것들은 성경적 근거를 갖지 못하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자신들만의 사적인 증거(their private evidence)”라고 일축했다. 그의 눈에 그들은 성령 침례의 증거로서 주어지는 방언이라는 그 유일한 성경적 증거(the only Bible sign)를 추구하거나, 얻거나, 존중하는데 실패했다.
B. 표적(Sign)으로서 공적 방언
1. 성령침례의 유일한 표적으로서 방언
파함은 “증거”(evidence)라는 용어만 성령침례와 연결시키지 않았고, “표적”(sign)이라는 용어도 성령침례와 연결시켰다. 파함은 방언에 “증거”라는 신학적 용어이외에, 마가복음 16장 17절과 18절, 소위 “긴 종결”(longer ending) 부분을 근거로 삼아 “표적”(sign)이라는 성경적 용어를 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the only Bible sign given as the evidence of the Baptism of the Holy Ghost”라는 한 문장 안에서 표적과 증거를 성령침례와 연결시켰다. 파함에게 방언은 성령침례의 표적이되, “그 성경적 표적”이었다. 그리고 그 성경적 표적은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주어진다. 파함은 방언을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일 뿐만 아니라, 나아가 “유일한 표적”(the only Bible sign)으로 보았다.
2. 신자의 뚜렷한 시각적 표적으로서 방언
파함에게 방언은 신자의 표적이었다. 그는 방언을 “표적”으로서 성령침례와 연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믿음”과도 연결시킨 것이다. 파함은 “소위 사도적 교회들의 그렇게 많은 지도자들이 마가복음 16장 17절과 18절에 기록된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들 중에 많은 것을 혹은 거의 모든 것을 가졌는데도 왜 새 방언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까?”라는 상대자들의 질문을 인용하는 간접적 방법을 통해 그 근거를 제시했다. 파함에게 방언은 신자에게 당연히 따르는 표적이었다. 파함은 “방언은 하나의 은사(gift)일 뿐만 아니라, 여러분에게 믿는 자라는 표적(sign)이 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방언을 말한다면 다른 사람들이 그 표적을 듣고 그가 신자인 것을 알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파함은 방언이 신자의 표적이되 시각적 혹은 뚜렷한 표적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자기를 믿는 자녀들에게 따르는 특징인 시각적/뚜렷한 표적들(visible sings) 없이 그들을 남겨놓고 떠나지 않으셨다. 세상은 그 표적을 통해 누가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종들을 오는 세상에 대한 모호하고 추상적인 이론들을 전하라고 보내지 않으셨고 방언 등의 시각적이거나 청각적인 뚜렷한 표적들을 남겨놓으셨다. 그가 방언에 “visible”이라는 단어를 붙인 것은 적절했는가는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이다. “visible”은 기본적으로 “시각적”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방언을 눈으로 볼 수 있는가? 일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사람이 방언으로 말할 때, 다른 사람이 눈으로 그 입모양을 본다고 가정하자. 그 경우에 방언은 시각적 측면을 갖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visible”은 “명확한, 뚜렷한”이라는 의미도 갖는다. 그 단어가 그것을 의미할 때, 방언이 “visible”하다고 말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적절할 것이다.
파함에게 방언은 영적인 유익의 외적 확증이었다. 파함에 따르면 세상은 그 표적을 통해 누가 영적 유익을 받고 있는 그리스도인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새 방언이라는 외적이고 명확한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내적이고 영적인 유익에 대한 말씀을 확증한다(confirming the word of inward spiritual benefit wrought in Jesus Christ―by these outward visible signs). 이것은 파함이 방언을 성령침례의 외적 증거로 파악한 것과 일치한다.
3. 불신자에게 표적으로서 방언
파함에게 방언은 신자의 표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불신자에게 표적이기도 했다. 그는 “오직 하나의 증거(witness)로서, 우리는 그 목적을 위해 신자의 표적(the sign of believers)과 불신자에게 표적(the sign to unbelievers)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했다. 현대 오순절은 신자의 표적으로서 주어질 뿐만 아니라, 불신자에게 표적이기도 하며, 자신의 언어(own language)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other tongues)으로 증거하는 능력이다. 파함은 신자와 방언과의 관계를 말할 때는 소유를 의미하는 전치사를 사용해 “신자의 표적”(the sign of believers)이라고 말했다. 이는 방언이 신자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이해한 결과일 것이다. 그런데 파함은 불신자와 방언과의 관계를 말할 때는 방향을 의미하는 전치사를 사용해 “불신자에게 표적”(the sign to believers)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표현한 것은, 방언이 불신자에게는 주어지지 않고 다만 들려지고 보여지는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마도 파함이 방언을 “불신자에게 표적”으로 본 것은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을 근거로 삼은 것일 것이다. 바울에 따르면, “방언은 신자에게 표적이지 않고 불신자에게 표적이다.”
C. 선포(Proclamation)로서 공적 방언
1. 언어적인 방언
파함은 초기에는 모든 방언을 이 세상 언어(소위 Xenolalia)라고 생각했다. 그는 오순절날 제자들은 성령께서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양한 언어들을 말했고, 다양한 나라들에서 모여들었던 유대인들은 그 제자들이 자기들이 태어난 곳의 언어들로 하나님의 놀라운 일들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했다. 파함은 “다른 방언”을 “여러 외국어들”(various foreign languages)로 해석한 것이다. 파함은 벧엘 성경학교의 성령침례 주제에 대한 성경적 연구를 경험적으로 확증했던 아그네스 오즈만의 방언을 중국어로 생각했다. 파함은 “그녀는 중국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으며, 3일 동안 영어를 말할 수 없었다. 그녀가 자신의 경험을 알리기 위해 영어로 글을 쓰려고 했을 때 그녀는 중국어를 썼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파함은 자기가 성령침례와 더불어 받았던 방언도 역시 이 세상 언어로 회고했다. 그가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주시기를 기도했을 때, 그의 혀가 뒤틀렸으며, 그는 스웨덴어로 하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 날 아침까지 여러 언어로 방언을 말했다. 그리고 이후에 그는 자주 중앙 유럽에 사는 모든 유대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이디쉬어(the Yiddish language)로 말하곤 했다.
2. 비언어적인 방언
그러나 파함은 후에는 언어적 방언뿐만 아니라 비언어적 방언(소위, glossolalia)도 인정했다. 그는 비언어적인 “최초의 방언의 은사”와 “진정한 언어의 은사”를 구분하고 최초의 것으로부터 진정한 것으로 발전을 요구했다. 그는 오순절에 대한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는 것(the speaking in tongues as the witness to Pentecost)을 “최초의 방언의 은사”(the initial gift of tongues)라고 불렀다. 이러한 명명은 최초로 방언을 말하게 될 때 대부분 파함 자신의 경험처럼 언어적 방언을 말하지만, 이 세상 언어 같지 않은 불분명하고, 모호한 발화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고프(James F. Goff, Jr.)는 파함이 끝까지 방언을 실제 외국어를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을 바꾸지 않았다고 보았다. 그러나 파함은 고프의 관찰과는 달리 이 세상 언어 같지 않은 “최초의 방언의 은사”는 시간이 지나면서 “진정한 언어의 은사”(a real gift of language)로 발전할 수 있다(may develop into)고 주장했다. 파함에 따르면, 이러한 방언 은사의 변이와 발전은 마치 회심에 생기는 신앙이 최초의 신앙으로부터 의심 없이 하나님을 믿는 진정한 신앙의 은사로 발전하는 것과 같다.
오순절에 대한 증거로서 방언을 말하는 것(the speaking in tongues as the witness to Pentecost)은 최초의 방언의 은사(the initial gift of tongues)이며, 이 은사는 진정한 언어의 은사(a real gift of language)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회심에 생기는 신앙은 최초의 신앙으로서 진정한 신앙의 은사로 발전하는 것과 같습니다. 진정한 신앙의 은사는 의심 없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방언의 은사(the gift of tongues)는 하나님의 영광에 유익하게 하기 위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집니다.
그에 따르면, 소리나 캑캑거림의 반복은 성령 침례를 처음으로 받을 때 발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받아들여진 적이 없다. 그런 소리나 캑캑거림의 반복은 그 다음에는 반드시 신속하게 분명하고 진정한 언어(real language)로 바뀌어 그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사도적 사역에 속한 사람들은 그 어느 누구도 다른 언어로 유창하게 말하기 전에는, 그다음 그들이 정말로 어떤 언어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증거 해 줄, 이해관계가 없는 몇 외국인에 의해 그것이 증명될 때까지는 성령 침례라고 주장한 적이 없습니다. 소리나 캑캑거림의 반복은 성령 침례를 처음으로 받을 때 발생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받아들여진 적이 없습니다. 그런 소리나 캑캑거림의 반복은 그 다음에는 반드시 신속하게 분명하고 진정한 언어로 바뀌어 그 어떤 부당한 감정이나 몸의 부자연스러운 움직임 없이 그 언어를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파함의 방언관의 변화는 파함이 시무어와 그 공동체에서 발생했던 비언어적인 방언을 접한 결과였다. 로벡(Cecil M. Robeck Jr.)은 파함과 시무어 사이의 방언에 대한 충돌을 인식했다. 그는 파함과 시무어가 충돌하고 있을 때 “파함과 시무어는 적절한 방언 행위의 범위(the boundaries of appropriate glossolalic behavior)를 면밀히 조사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로벡은 그 충돌을 방언을 “그 증거”(the evidence)로 보느냐 아니면 “표적들”(signs) 중의 하나로 보느냐에 대한 것에 국한 시켰다. 로벡은 비록 파함이 시무어의 집회의 행위들을 “개같이 짓고, 닭같이 꼬꼬댁 거린다”(barking like dogs, crowing like roosters)고 비판한 것을 인용했지만, 파함의 비판은 시무어의 집회에 나타났던 비언어적 방언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 그 충돌의 근본적인 원인이 방언의 언어적 나타남과 비언어적 나타남이었다는 것을 간파하지 못했던 것이다. 파함은 시무어의 집회에서 일어나고 있던 비언어적 방언을 비판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 비언어적 방언을 인정하고 자기 방언 체계에 받아들였다. 파함의 방언론은 시무어의 집회의 비언어적 방언 대면을 통해 더 풍부해진 것이다. 파함과 시무어의 논쟁이 꼭 부정적 결과만을 낳은 것은 아니었다.
3. 배우지 않은 언어를 말하는 방언
파함에게 방언은 이 세상 언어를 말하는 것이되, 성령에 의해 배우지 않은 언어를 말하게 되는 것이었다. 파함은 방언을 “뇌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이 마지막 날들에 성령은 이마에 인치시고, 권능을 주셔서 우리가 뇌의 은사(a gift of brains)가 아닌 방언의 은사(a gift of tongues)로서”라는 말을 했다. 그가 방언이 뇌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머리로 방언을 배울 수 없는 것임을 표현한 것이다. 그래서 파함에게 방언은 말하는 자에게는 “한 마디도 모르는 언어”였다. 파함은 뇌로 배우지 않은 방언을 선교사들이 거의 불가능한 언어들에 정통하기 위해 쓸데없이 수 천 달러나 종종 자신의 삶을 허비하는 것의 대안으로 여겼다. 파함은 방언이 배울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방언을 받기 원하지만 잘되지 않는 사람들에게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를 내며 방언을 흉내 내도록 부추기는 것은 성령의 역사를 그릇되고 해로운 일들에로 이끌어 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4. 메시지의 기능을 갖는 방언
파함은 이 세상 언어인 방언이 통역되면 메시지의 기능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방언들이 “통역되면, 그것을 듣는 자들은 그것이 성령의 권능에 의해 흙[몸]의 입을 통해 말해진 하나님으로부터의 진정한 메시지(truly a message from God)라는 것을 알 것이다”라고 말했다. 파함은 방언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싶으신 메지시를 전달하는 통로가 될 수 있다고 이해한 것이다. 그래서 파함에게 방언은 하나의 증거의 매체였다. “오순절은 증거를 위한 능력으로서 주어진다. 오순절에서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나,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더해지지는 않는다 . . . 오순절은 기본적으로 증거를 위한 능력(a power to witness)으로서 주어진다.” 사도행전 1장 8절을 주의 깊게 연구해보면, 방언은 증인으로 만드는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5. 선교적 방언
파함은 하나님의 메시지 전달의 통로가 될 수 있는 방언은 특별히 선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다른 언어들을 말하는 방언이 필요한 것은 “세계 선교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오순절에서 부여되는 것은 두 가지다. 그 중 하나는 전 세계적 선교 노력에 있어서 세계의 그 어떤 언어로 증거 하기 위한 능력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모든 나라에 신속하게 전파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이디쉬 방언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놀랄만한 사역을 하게할 것이라고 기대했다. 파함은 교회사 속에서 선교를 위한 방언이 나타났던 사례들을 열거하기도 했다. 그는 카톨릭 신부들이 일본 해안에 도달하면서 일본어로 말했다는 것을 발견했다. 파함에 따르면, 세인트루이스의 제니 글라세이(Jenny Glassey)는 특별한 머묾의 시간 후에 그녀의 오순절을 받았고 어떤 아프리카 방언들을 말하고, 노래하고, 쓰고 통역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프리카 선교사가 되었다. 선교적 방언은 파함의 사역에서도 나타났었다. 티슬스웨이스트에 따르면, 한 번은 파함이 설교할 때 방언으로 잠시 말했다. 그런데 그 설교가 마쳐질 무렵에 한 사람이 일어나서 말했다. “저는 저의 불신을 고침받았습니다. 설교시간에 어머니의 무릎에서 익혔던 모국어로 시편 23편을 들었습니다.”
6. 국내인을 위한 설교매체로서 방언
파함은 방언이 해외 선교의 수단뿐만 아니라 국내인을 위한 설교 매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현대 오순절은 내국인 자신의 언어(own language)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other tongues)으로 증거하는 능력이다. 이 마지막 날들에 성령은 성령 안에서(in the Spirit) “설교할 수 있게”(preach) 하고 계시다. 파함은 “내가 다른 방언하는 자와 다른 입술로 이 백성에게 말할지라도 저희가 오히려 듣지 아니하리라”라는 이사야 28장 11절을 인용한 고린도전서 14장 21을 인용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외국에 간다면, 다른 방언으로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있는데 그것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위의 예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자기나라 사람들에게 전하는데 다른 방언들로 말하는 것을 사용하시려 하신다고 대답했다.
D. 기록할 수 있는 방언
파함은 방언을 이 세상 언어라고 그래서 방언을 기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방언을 기록하는 것을 “Written tongues” 또는 “glossographia”(방서, 方書)라고 부른다. 때로 “영서”(靈書)라고 불리기도 한다. 벧엘 성경학교 학생들 중 첫 번째로 성령침례로서 중국어 방언을 말했다는 아그네스 오즈만(Agnes Ozman)은 그 중국어 방언을 기록했다고 한다. 아래 그림은 1901년 1월에 토페카 부흥 기간에 한 기자에 의해 수집된 것으로 방언을 기록한 것이다. 이 방서는 아그네스 오즈만이 쓴 것으로 알려졌다.
한 기자는 학생들이 말하는 방언을 듣고 그것의 음을 다음과 같이 옮겨 적고 그 뜻을 해석하기도 했다.
“Euossa, Euossa use, rela sema calah mala kanah leulla sage nalan. Ligle logle lazle logle. Ene mine mo, sah rah me sah rah me."
이 문장의 뜻은 다음과 같다. “예수께서는 구원하시는 능력이 있으시다,” “예수께서는 들을 준비가 되어있으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E. 통역과 질서가 필요한 공적 방언
파함에게 공적 방언이 선포가 될 수 있는 것은 통역 은사를 통해서이다. 그래서 그는 공적 방언은 통역되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공적 모임시에 통역이 없는 방언은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는 고린도전서 14장을 공적 방언의 기준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기준에 따라 공적으로 방언을 말할 때는 통역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또한 파함은 공적 모임에서 방언은 질서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오순절의 모든 것은 성령께 돌려져야 한다. 성령의 모든 역사들의 특징은 품위(decency), 질서(order), 그리고 적절함(propriety)이다.
F. 찬양으로서 공적 방언
파함은 공적 방언을 인간을 향한 선포로만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도 이해했다. 비록 파함이 방언이 공적 모임에서 말해질 때는 한 사람씩, 반드시 통역을 동반하여 차례대로 질서 있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사역에서 공적 찬양이 반드시 통역을 동반하지 않았으며, 한 두 사람이 말하지 않고 동시에 여러 사람이 방언을 말하는 현상이 존재했다. 그에게 이 마지막 날들에 성령은 방언의 은사로써 성령 안에서(in the Spirit) 찬양(sing)할 수 있게 하고 계시다.
파함이 언급한 공적 집회에서 방언 찬양의 사례들 중 하나는 벧엘 성경 학교에서의 방언 찬양이다. 그에 따르면, 아그네스 오즈만의 방언 말함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이 기도탑에 모여 기도하다가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으로 찬양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불의 혀(tongues of fire)가 임했다. 파함이 한 테이블 뒤에서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을 때 갑자기 그들은 “예수 나의 사랑”이라는 찬양을 적어도 여섯 가지 언어로 부르기 시작했다. 그 찬양은 4부로 불러졌고, 일생 동안 들어 본 것들 보다 더 천상적인 소리(angelic voice)였다. 티슬렛웨이트 양(Miss Lilian Thistlethwaite)은 당시를 “우리는 동시에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며 각자의 새 언어로 함께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 . 우리 가운데 성령의 임재의 신성한 영광을 묘사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라고 회고했다.
로트락 부인(Mrs. Rothrock)은 1905년에 파함이 텍사스주의 휴스턴에서 이끌었던 한 집회에서 일어났던 일을 기술했는데 그 중에 방언 찬양에 대한 언급이 있다.
그 찬양! 오, 신적 영감 아래서 여러 언어들로 부르는 천상적 찬양(heavenly singing)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한 저녁 집회에서 오일러(Oyler) 자매가 일어나 방언으로 찬양하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세 사람이 즉시 그녀와 합류했고, 네 사람은 같은 멜로디, 같은 가사를 소프라노, 앨토, 테너, 베이스 4부로 아름답게 불렀습니다. 그 사성부의 음악은 마치 천사의 합창(angelic choir)같았습니다.
G. 인간이 만든 길을 좌절시키는 공적 방언
파함에게 방언은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이었다. 파함은 바벨탑 건축으로 인해 구음이 하나였던 것이 여러 구음들로 나뉜 것을 언급했다. 그는 그때 여러 방언들의 목적은 “인간이 만든 길(바벨탑)이 하늘에 닫는 것을 막는 것”이었다고 생각했다. 파함에게 바벨의 방언은 스스로 살길을 모색하려고 하나님께 대항한 사람들을 흩어버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이었다. 파함은 “오늘날의 다양한 방언들의 내림은 이 현대 바빌론과 그 개신교도들이라는 딸들(Protestant daughters)을 완전히 혼란스럽게(to utterly confuse) 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파함은 이 언급으로 개신교도들의 은사중단론을 비판했을 것이다. 파함에게는 은사중단론은 바벨론의 딸이며, 그 아비가 만든 바벨탑처럼 “인간이 만든 길”(man-made way)로 여겨졌을 것이다. 바벨의 방언처럼 현대의 방언은 방언을 인정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했을 것이다. 방언 은사가 성경시대에는 존재했지만, 현대에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은사중단적인 개신교도들은 오순절주의자들이 말하는 현대 방언을 접하면서 혼란에 빠져 분열되어 지리멸멸해질 것이다. 파함에게 바벨탑 건설과 방언 배척은 하나님께서 만드시지 않은, 인간 스스로 만든 길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었으며, 구음의 다양화, 다른 방언들은 그 길을 만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혼란, 흩어버리심과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기도 했을 것이다.
IV. 나가는 말
연구 결과는 파함의 방언론은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선교적 방언에만 한정되지 않았었고, 그가 개발되지 않은 방언의 세계를 보다 폭넓고 깊게 탐사했음을 가리킨다. 파함(Charles F. Parham)은 방언을 시행하는 장소에 따라 공적 방언과 사적 방언으로 구분하였고, 공적 방언을 주로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 향하는 선포의 수단으로, 사적 방언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찬양과 하나님과의 교제의 길로 규정했으며, 성격에 따라 언어적 방언뿐만 아니라 비 언어적 방언도 인정했고, 방언을 “증거”라는 신학적 용어뿐만 아니라 “표적”이라는 성경적 용어에 의해 성령침례와 연결시켰으며, 방언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로도 간주했고, 본질적으로 영적인 유익과 내적인 성령침례의 외적인 나타남으로 이해했다.
파함의 방언론의 전체 구조를 잡는데 유용한 기준은 그가 방언을 말하는 장을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으로 구별한 것이다. 먼저, 파함은 방언을 사적 기도와 찬양, 대화의 길로 인식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방언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곤 했다. 그에게 사적 방언은 대화이기도 했다. 파함에게 방언은 일방적인 하나님께로만 향하는 기도가 아니고 주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기도 했다. 파함은 사적 방언을 찬양의 한 길로 이해했다. 그는 혼자 있을 때 방언으로 기도하고 대화할 뿐만 아니라 방언으로 찬양하기도 했다.
파함은 공적 방언을 성령침례의 그 성경적 증거로 삼았다. 파함은 공적으로 방언을 성령침례에 반드시 동반되는 분리될 수 없는 그 유일하고 명확한 성경적, 외적 증거로 이해했다. 그는 약속의 성령은 성경에서 방언 말하기를 동반했었으며, 오늘날에도 역시 동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파함은 사도행전 2장의 예루살렘 오순절 성령강림, 사도행전 10장의 고넬료 가정의 성령강림, 사도행전 19장의 에베소의 성령강림을 근거로 방언이 성령침례의 성경적인 증거라는 주장을 펼쳤다. 파함에게 방언은 내적/윤리적 성령침례의 외적 증거였으며, 이 점은 그의 방언론에의 웨슬리와 성결주의적 영향을 보여준다. 방언이 본인뿐만 아니라 타인들로 확인할 수 있는 외적인 증거이기에, 또한 성령침례의 명확한 표준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성령침례의 증거라고 주장했던 방언이외의 현상들을 성경적 증거가 아닌 “사적 증거”로 분류했다.
또한 파함은 방언을 표적으로도 삼았다. 그는 방언에 “증거”라는 신학적 용어이외에 “표적”(sign)이라는 성경적 용어를 붙이기도 했다. 파함은 방언은 성령침례의 증거로서 주어진 “그 유일한 성경적 표적”이라고 말했다. 파함에게 방언은 신자의 표적이며 또한 불신자에게 표적이었다. 파함은 마가복음 16장 17절과 18절, 소위 “긴 종결”(longer ending) 부분을 근거로 삼고 방언을 “신자의 표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방언이 신자의 표적이되 시각적 혹은 뚜렷한 표적이라고 주장했다. 파함에게 방언은 내적인 영적 유익의 외적 확증이었다. 파함에게 방언은 신자의 표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불신자에게 표적이기도 했다. 아마도 파함이 방언을 “불신자에게 표적”으로 본 것은 고린도전서 14장 22절을 근거로 삼은 것일 것이다.
파함은 초기에는 모든 방언을 선교적 언어로 생각했으나 후에는 비언어적 방언도 인정하게 되었다. 파함은 방언을 배우지 않은 이 세상 언어이며 그래서 선교와 설교를 위한 메시지의 통로라고 생각했다. 파함은 벧엘 성경학교의 성령침례 주제에 대한 성경적 연구를 경험적으로 확증했던 아그네스 오즈만의 방언을 중국어로 생각했다. 파함은 자기가 성령침례와 더불어 받았던 방언도 역시 이 세상 언어로 회고했다. 그러나 파함은 시무어의 공동체에서 발생한 비언어적인 방언을 접하면서 비언어적인 “최초의 방언의 은사”와 “진정한 언어의 은사”를 구분하고 최초의 것으로부터 진정한 것으로 발전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것은 파함이 비언어적인 방언을 어느 정도 인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파함에게 방언은 이 세상 언어를 말하는 것이되, 성령에 의해 배우지 않은 언어를 말하게 되는 것이었다. 파함은 방언을 “뇌의 은사”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이 세상 언어인 방언이 통역되면 메시지의 기능을 갖는다고 주장했다. 하나님의 메시지 전달의 통로가 될 수 있는 방언을 특별히 선교를 위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파함은 방언이 해외 선교의 수단뿐만 아니라 내국인을 위한 설교 매체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파함은 방언을 이 세상 언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방언을 기록하는 방서를 인정했다. 벧엘 성경학교 학생들 중 첫 번째로 성령침례로서 중국어 방언을 말했다는 아그네스 오즈만(Agnes Ozman)은 그 중국어 방언을 기록했다고 한다. 파함에게 공적 방언이 선포가 될 수 있는 것은 통역 은사를 통해서이다. 파함은 공적 모임에서 방언은 질서 있게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함에게 공적 방언은 또한 하나님께 찬양과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였다. 파함은 공적 방언을 인간을 향한 선포로만 이해하지 않고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도 이해했다. 1901년 벧엘 성경 학교에서의 방언 찬양, 1905년에 파함이 텍사스주의 휴스턴에서 이끌었던 한 집회에서 일어났던 네 사람의 방언 찬양 현상이 일어났었다. 파함에게 바벨탑 건설과 방언 배척은 하나님께서 만드시지 않은, 인간 스스로 만든 길이라는 점에서 동일한 것이었으며, 구음의 다양화, 다른 방언들은 그 길을 만든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혼란, 흩어버리심과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기도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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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Speaking in Tongues Privately and Publicly:
Charles F. Parham’s View of Speaking in Tongues
Chang-Soung, Lee
The Father of Pentecostal Movement, Charles F. Parham explored the world of Speaking in tongues about 100 years ago when the understanding and experience of tongue was almost like an unknown world. Existing Studies on Parham’s view of speaking in tongues focused primarily on missionary tongues for witness, so it is necessary to see Parham’s view in all its aspects. To meet the demand, this study investigates Parham’s view of speaking in tongues comprehensively and systematically.
Parham’s view did not limited to missionary tongues as the evidence of the Spirit Baptism, but he explored more broadly and deeply the undeveloped world of speaking in tongues. Parham categorized, according to place, speaking in tongues into two aspects: public tongues and private tongues, defined public tongues mainly as a medium of proclamation from God to people, private tongues as a way of prayer to, praise to, and communion with God, according to nature, admitted un-language tongues as well as language tongues, connected tongues to Spirit Baptism by the extra-biblical theological usage, “evidence,” at the same time by the biblical usage, “sign,” regarded tongues as a method of the judgement of God upon people rejecting tongues, and in essence recognized tongues as the manifestation of spiritual benefit and inner Spirit Baptism.
주제어: 오순절운동, 찰스 파함, 사적 그리고 공적 방언, 하나님으로부터 선포 그리고 하나님과의 교제의 수단, 성령침례의 증거와 표징
Pentecostal Movement, Charles F. Parham, private and public speaking in tongues, a medium of proclamation from and communion with God, the evidence and sign of the Spirit Bapt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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