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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H. 더함의 글들

윌리엄 H. 더함의 글: 성령침례의 증거는 무엇인가?

한오신 2017. 6. 6. 17:02

성령침례의 증거는 무엇인가?

(What is the Evidence of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No. 3)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것을 다른 방언으로 말하는 것이 오순절의 큰 표준이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Pentecostal Testimony  2/1 (Jan. 1912):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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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H. 더함

 

 

    교계는 여전히 성령침례의 증거 문제 때문에 요동치고 있다. 오순절 날에처럼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것을 다른 방언들로 말하는 영광스런 진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와서 사람들을 점유하는 모든 다른 명백하게 명시된 진리들처럼 사방으로부터 가장 신랄한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그러나 그 어떤 진리도 스스로를 돌보는데 있어서 더 적합하지 않았던 것 같다. 사실 이것은 반대를 받으면 받을수록 더 번창한다. 어떤 하나님의 진리가 얼마나 경멸당하고 거절당하고, 반대 받느냐는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그것은 진리를 남겨둔다. 진리는 전복될 수 없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전복시킬 때 그것을 반대할 수 있지만, 진리는 요동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며, 결국 그들을 거슬러 증언할 것이다. 그것의 가장 슬픈 부분은 오류는 생생할지라도 하나님의 모든 위대한 진리가 부닥쳐온 반대에 부닥치지 않는 것 같이 보인다는 것이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세상에서 모든 노선들 위에 그분의 영광스런 진리를 계속 세우고 계시다.

    성령의 선물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 분을 받는 순간에 방언으로 말할 것이라는 가르침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런 가르침이 의미하는 것과 그것이 성령 침례와 관련되는 한 얼마나 대단하게 모든 크리스찬 경험에 미칠지를 정확하게 이해했다. 나는 그것이 세상에서 다른 어떤 사람의 경험에 미쳤거나 또는 미칠 수 있었을 만큼 내 자신의 경험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한 때 그것을 거부했었다. 나는 그것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내 모든 힘을 다해 그것을 반대했다. 그렇지만, 나는 방언을 반대했거나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의 경험들의 진정성을 의심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이해하라. 나는 단지 교리의 이 점을 규탄한 것이다. 나는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신실하지만 실수하고 있다고 믿었다. 나는 또한 만약 이 가르침이 어떤 오류를 갖고 있다면, 그것은 아주 터무니없는 것일 것이고, 그리고 만약 그것이 오류라면, 나는 그런 오류를 받아들이느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이라고 알았다. 이것은 그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는 내가 쉴 수 없을 것 같은 경우였다. 그 문제에 진지해졌을 때, 나는 곧 이 굉장한 경험을 가졌던 사람들에 대한 대부분의 비난들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예를 들면, 그들은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만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는 비난을 받았다. 사실인즉, 그들은 그런 것을 가르치지 않았고, 다만 그들은 그 삶이 그것의 열매들을 보이는 모든 사람들만 구원받고 성화되었다고 인정했다. 왜 어떤 사람이나 가르침을 반대하기 위해 그런 수단들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각 비난을 차례로 연구해 보았다. 나는 그 비난들이 완전히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진리는 뚜렷하게 내 앞에 섰다. 여기에 철저하게 정통이고, 내가 그 이전에 들어 본적이 없을 정도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를 찬미하고, 끊임없이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방언(speaking in tongues)이 성령침례의 증거(the evidence of the baptism in the Holy Ghost)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을 만나기 위한 유일하게 정당한 길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았다. 내가 더 -- 할수록 더욱 더 그들이 옳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불쑥 찾아온 어떤 낯선 사람들을 다루고 있었다고 생각하지 말라. 나는 몇 년씩 잘 알고 지냈고 내가 알기에 영적으로 깊은 사람들 가운데 있었다. 나는 이 사랑스런 사람들만큼 내 생애에서 그렇게 복된 사람들을 결코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으며, 내 마음은 그들이 받았다고 알았던 그런 복을 갈망했었다. 나는 그들이 서서 얼굴에 눈물을 흘리며 얼마나 다정하고 귀한 예수께서 자기들의 영혼에 오셨었는지, 그리고 복된 성령께서 예수를 얼마나 사실적으로 만드셨는지를 말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어느 누구든 그들이 받았던 것은 성령이 아니셨다고 내게 말하려고 애쓰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방언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성령을 받았을 사람들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그 기대는 어긋날 수밖에 없었다. 차례로 성령을 받았고, 그때마다 각 자 모두가 방언을 말했다. 더구나, 그들 중 각자가 계속 나를 사랑으로 존중하면서도, 그들은 모두 내게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내가 성령을 받을 때 또한 방언을 말할 것이라고 말했다. 나는 그들 중 아무도 내가 그들의 목사나 친구이기 때문에 나와 타협하려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기를 결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내가 성령을 탐구했을 때, 나는 내가 발견한 것 때문에 놀랐다. 나는 성화와 성령침례가 하나이며 동일한 것이라고 결코 믿은 적이 없었다. 사실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정도로 유능한 사람은 아무도 그런 교리를 갖고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갈보리 언덕에서의 위대한 희생을 통해 구원을 받고 성화되며,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씻김을 받은 후 성령께서 인격으로 오셔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

    어떤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어떻게 성령이 외적인 또는 내적인 죄를 없앤다는 의미에서 한 사람을 구원한다거나 성화시킨다고 믿고 가르칠 수 있는지는 내게 불가사의다. 누구든 그렇게 하는 사람은 성경을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의 경험이 어떤 것이든지 그는 구원이란 오직 예수 이름 안에 있으며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죄를 위한 유일한 해결책이라는 사실을 보는 눈이 없다. 성령이 그리스도의 피를 적용한다는 가르침이 있지만, 그러나 나는 이것을 성경에서 발견하지 못했다. 구원은 은혜에 의해 믿음을 통해 받는다. 그렇다면 구원은 예수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해받는다. 그러나 이 글에서 이 주제를 다루는 것은 나의 목적이 아니고, 다만 사람들이 성령은 죄에 대한 지식을 일으키시며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는 것을, 죄 씻음의 유일한 방편으로서 보혈 그리고 그것으로 피가 전유되는 방편으로서 믿음을 가르치는 대신에 성령이 구원자라고 가르치려하는 것에 대한 나의 경악을 표현하려할 따름이다.

    나는 처음에는 이것들을 분명하게 보지 못했지만, 딱 한 가지 내가 분명하게 보았던 것은 내 자신의 경험들을 포함하여 내가 보았던 모든 경험들은 하나님께서 사도행전에서 들어 올리신 기준에 너무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더하여 나는 성령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믿는 사람들 위에 임하고 계시며, 그들이 초대교회의 시초에 그 제자들처럼 방언을 말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러므로,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에게 반항하겠는가?” 나는 즉시 하나님께서 세상에 놀라운 일을 행하고 계심을 보았다. 나는 만약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제공하고 계시는 기회를 잡기만 하면, 그것은 강력하고 전 세계적인 부흥을 의미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런 역사가 만날 강력한 저항의 급류를 예견할 수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영광스럽고 너무도 성경적이어서 내가 사람들이 그것에 저항하기 위해 가질 수 있는 구실을 본다는 것은 어려웠다. 내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역사에 대항하여 벌여 온 것을 하려는 것을 믿기는 당시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성령이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침례의 증거(the evidence of the baptism)”라는 가르침을 믿지 않으면서, 내가 언제나 존경했던 위대한 종교적인 사람들이 성경으로부터의 무게 있고 강력한 논거들을 가지고 앞으로 나와서 방언 증거론을 주장하는 자들을 영원히 입 다물게 만들기를 기다렸다. 내가 그들이 믿지도 않고 가르치지도 않는 것을 가지고 그리고 내가 그들이 가르치지 않았고 많은 경우에 그 필자들이 자기들이 그런 것을 믿지도 가르치지도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만 했다고 알았던 것을 가지고 오순절 사람들(the Pentecostal people)을 비난하는 글들을 계속 읽어나갔을 때 혐오를 말하는 것은 아니더라도, 내가 얼마나 실망했을 것이라는 것을 상상해 보라. 방언이 성령침례의 증거라는 명백한 가르침에 대응하는 대신에 그들은 그 때에 성령의 나타남들을 비웃기 시작했으며, 그 가르침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그 경험을 한 사람들의 특징을 반영할 어떤 것을 찾느라 피조물 전체를 뒤지기 시작했다. 만약 그들이 당연히 그래야만 하는 모습과 전혀 다른 어떤 사람을 발견하는 데 성공했다면, 그것은 내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나의 도시에는 내가 이전에는 들어본 적이 없게 성령으로 충만하여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깨끗하고 신실한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나는 즉시 그것이 바리새인들이 범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데 실패했던 그 길을 반복하는 것임을 알아차렸다.

    이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야만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만들었으며, 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갔고, 그 결과 나는 곧 사람들이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 때 방언을 말한다는 것보다 더 나은 진리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이제 거의 5년 동안이나 그 경험을 해 왔으며, 그래서 이전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이것을 굳건하게 믿고 있다고 진실하게 말할 수 있다. 결코 아무 것도 나를 흔들 수 없을 것이다. 나는 실패와 위선의 사례들을 보아왔다는 것을 잊지 말라. 나는 많은 사람들이 극단으로 치닫는 것을 보아왔으며, 많은 유치한 것들을 보아왔다. 아무도 육적인 것으로 말미암은 사람들의 실패들 때문에 나보다 더 마음 아파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신실한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로부터 현재 까지 그 어떤 운동도 사람들의 실패와 연약함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는 것을, 그리고 어떤 운동이 영적일수록, 광신주의가 그것을 접수할 것이라는 것을 알 것이다. 마귀가 하나님의 역사를 흉내 냄으로써 사람들을 현혹시키려 하는 때는 오직 하나님께서 강력한 방법으로 역사하실 때이다. 오늘 날의 교파적 교회들 안에는 광신주의도 모조품도 없다. 그 이유는 그것들은 죽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위해 진짜 역사를 일으키기 원하는 모든 사람은 그 교파적 교회들 바깥에서 해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 생생한 진리들은 마귀를 자극하는 것들이며, 그것들은 그 교파적 교회들에서 배제되며, 그것들을 설교하는 사람들은 괴짜들로 낙인찍힌다. 오늘날의 모든 유명한 복음전도자들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명하지 않은 진리들을 버리기 때문에 유명하다. 나는 나로 하여금 이 위대한 경험이 참된 성령침례라는 것을, 방언이 그것의 증거라는 것을 한 순간이라고 의심하게 만드는 것을 결코 본 적이 없다고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더 분명하게 말하겠다. 성경은 모든 주제들에 대한 우리의 인정된 권위이고 이어야만 하며, 위에서 언급한 대로, 이것은 이 주제에 대해 분명하다.

    우리가 성경을 탐구할 때,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거기에 기록된 표준(standard)을 갖고 계시다는 것을 발견한다. 하나님은 결코 이중적인 표준을 갖고 계시지 않다. 만약 그분이 이중적인 표준을 갖고 계시다면, 그것은 그분의 사람들에게 혼란을 줄 것이다. 니고데모가 예수께 왔을 때, 예수께서는 구원의 표준을 거론하셨다.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그 표준은 정확히 예수께서 그것을 놓으셨던 곳에 서있다. 사람들은 모든 세대에서 그 표준을 자기들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려 했다. 그러나 그 표준은 오늘날에도 서있으며, 심판 날까지 서있을 것이고, 그것에 의해 모든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한지를 심판받을 것이다. 이 경험을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이 우주 전체에 아무 것도 없다. 박애, 인도주의, 율법주의, 도덕, 자선, 모든 종류의 선행들은 대체물로 제공되어 왔지만, 그러나 그것들 중 아무 것도 그 밤에 그 위대한 바리새인이 그리스도께 질문했을 때 그리스도께서 거론하셨던 유일한 표준을 제거하거나 대체할 수 없다. 이것은 다른 경험들과 관련해서도 그렇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표준을 들어 올리시며, 그 표준은 일반적으로 모든 다른 표준을 반영하며, “너는 이 표준을 만족시켜야 한다고 모든 사람들에게 말한다. 사람들은 수 세기에 걸쳐 저항하고 변명하겠지만,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모든 힘을 다한 후, 하나님의 표준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놓으셨던 곳에 남아있을 것이며,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자신들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 표준을 만족시켜야할 것이다.

    그 크고 기억할만한 날인 오순절에, 성령께서 주님의 명령을 받들어 기다릴 만큼 그들의 주님을 존중했던 무리 위에 강림하셨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분명하고 강력한 방법으로 성령침례의 경험에 관해 그분의 표준을 들어 올리셨기 때문에 그 이후의 세대들이 그들이 그 경험을 가졌는지 갖지 못했는지 의심할 필요가 없다. 그들 모두가 해야 할 것은 사도행전 24절을 읽고, 유일한 하나님의 표준(God's only standard)인 그것으로 자기들의 경험을 판단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 표준은 무엇인가? “그리고 그들은 성령으로 충만하여 성령이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무언가를 그 표준과 동등하게 높이려는 사람들에 의해 써진 많은 글들을 읽어왔다. 오늘날의 위대한 선생들이 이 세대에(in this dispensation) 성령 받음을 묘사하는 유일한 성경구절들을 지나쳐야 하고, 오직 이미 성령을 받은 사람들을 향한 교육을 위해서만 기록된 구절들만 언급한다는 것은 이상하게 지나치는 것이 아닌가? , 그 서신서들은 하나님께서 사도행전 24절에서 들어 올리신 그 표준에 따라 성령을 받았던 사람들을 향한 가르침을 위해 기록되었다. 그 위대한 교사들은 이것을 알지만, 그러나 그들은 사람들의 평판을 잃을까봐 감히 그것을 가르치지 못한다. 그들은 모두 이 세대가 오순절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것을 믿고 가르치지만, 그러나 그들은 오순절의 그 위대한 경험과 사도행전에 기록된 다른 경험들로부터 담대하게 가르치려 하지 않는다. 사도행전은 성경의 책들 중에서 어떤 사람이 이 세대에 성령을 받은 경험을 기록하고 있는 유일한 책이다. 많은 고귀하고 신실한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 지도자들은 그것을 알고 있다. 또는 만약 그들이 그것을 모른다면, 그들은 마땅히 알고 가르쳐야만 하는 영광스런 진리에 대해 용서할 수 없을 만큼 무지할 것이다.

    오순절 날에 군중들이 그들이 보고 들은 것에 이끌려 밀려들었을 때, 그들은 놀라서 이 어찌된 일이냐?”라고 소리쳤다. 베드로의 대답은 하나님의 표준이 무엇이냐는 그리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을 때 뒤따를 것으로 기대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영원히 잠재운다. 그는 그들에게 이것이 새로운 세대의 안내로서 그 첫 번째 큰 부어주심이기 때문에 거기에는 곧 지나가버릴 어떤 특별한 나타남들이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는 비록 그들이 비하당하고, 비신사적인 대접을 받고,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들에 걸맞지 않는 취급을 당하고 있었지만, 그 놀라운 나타남들 때문에 사과하지 않는다. 그는 이것은 바로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다(this is that which was spoken by the prophet Joel)”라고 말한다. 그는 모든 유대인들이 저것”(that)이 의미했던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이것”(this)저것”(that)이라면, 다른 어떤 것일 수 없다. 그때 이후로 모든 세대에서 어느 누구든 받느냐 못 받느냐는 별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 표준은 거기에 세워 졌고, 오늘날까지 서있다. 베드로의 이것은 저것이다”(This is that)라는 말은 너는 다시 나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오늘날에도 효력이 있다. 만약 이 진리를 확증하는 다른 성경구절이 없다면, 이것은 충분히 족하다. 그 날에 오순절적 경험의 그 표준이 하나님 자신에 의해 세워졌고, 그 표준은 언제나 서있을 것이다. 사도행전 안의 모든 경험은 이것과 아름답게 조화를 이루며, 성경의 다른 책들은 성령침례 경험을 묘사하지 않는다. 우리 모두 하나님의 표준을 만족시키자(Let us come to the standard of Go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