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세계의 오순절신학을 위해 KIPT

윌리엄 H. 더함의 글들

윌리엄 H. 더함의 글: 갈보리의 완성된 사역

한오신 2023. 2. 15. 12:04

갈보리의 완성된 사역

The Finished Work of Calvary, Identification with Jesus Christ Saves and Sanctifies,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구원하고 성화시킨다.

은혜의 두 번째 역사는 가르쳐질 필요가 없다.

 

 

 

Pentecostal Testimony 2:1 (Jan. 1912), 1-3.

 

 

이창승 역

 

    성화[온전한 성화]가 은혜의 분명한 두 번째의 순간적 역사라는 이론이 어떻게 사람들을 눈멀게 할 수 있는지 내게 큰 불가사의다. 이것이 사람들이 그 안에 노예가 되어 있는 모든 이론들 중에서 가장 빈약하고 비성경적이다. 그런데도 마치 세상의 구원이 충분히 그것에 의존하는 것처럼 사람들이 그것을 옹호하고 있다. 이렇게 하기 위해 그들은 성령침례와 방언 말함에 관련된 진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해오고 여전히 하고 있는 것과 아주 똑같이 그들의 눈을 빛에 대하여 감으려 한다.

    성경적인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론처럼 명확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지만, 은혜의 두 번째 역사를 세울 것 같은 가르침은 아무리 눈 씻고 보아도 성경에서 찾을 수 없다. 그런 경우에, 우리는 우리의 이론을 제쳐놓고 하나님의 말씀 편에 서야 한다. 성령침례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God’s standard of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은 사도행전 24절에서 발견되며, 성령만이 유일한 하나의 기준이다.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유일한 기준이다. 하나님께서는 칭의를 정하는 유일한 기준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며, 그분이 하는 다른 하나의 기준은 성결인데, 그 이유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하기때문이다(12:14).

    구원의 성경적 기준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그리스도 안의 새 생명 가운데서 살아나는 사람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사람들이 구원받는 유일한 장소는 예수 그리스도 안이다. 한 죄인은 그리스도 바깥에 있으며,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렇다면 한 질문이 떠오르는데, 한 사람은 언제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가? 우리는 모든 건전한 선생들이 그때는 바로 회심이라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그분 안에서 죄를 가질 수 있는가?이다. 가질 수 없다.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우리 안에 옛 사람”(old man)을 가지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우리의 옛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셨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며, 그리고 그들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는다.

    아담 안에서 옛 피조물은 죄로 인해 사망선고와 함께 정죄를 받았다. 만인이 산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새로운 피조들이 될 때까지 이 판결 아래 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는 정죄가 없다. 거기에는 중간지대가 없다. 우리가 정죄를 받든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든지 둘 중 하나이다. ! 당신은 이 점에서 우리에게 동의할 것이나, 그러나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을 수는 있지만, 여전히 성화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 형제여, 우리의 칭의를 위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기초는 우리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것이다(6:6-7). 그러나, 당신은 이것은 법정적인 방식(judicial way)이고, 단순하게 부정적 구원(negative salvation)이라고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과 관련된 것이라는 것이지만,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 믿음을 행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실제적인 경험(actual experience)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대속자(the substitute)이시지만,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사람들만 구원받는다. 은혜의 새 언약은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좌우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믿는 순간에 그는 부분적으로(partly) 또는 외적으로(outwardly) 구원받지 않고, 온전하게(fully) 구원받으며, 그가 바라거나 할 수 있는 만큼 구원받는다. 당신은 물론, 그는 구원받지만, 그러나 성화되지는 않는다라고 말한다. 사람은 그가 성화되기까지는 구원받지 못한다. 물론 거룩하게 한다는 것(to sanctify)은 일반적으로 예배나 거룩한 사용을 위해 구별하여 분리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깨끗하게 한다(cleanse) 또는 거룩하게 한다(make holy)는 의미의 측면을 다루고 있다. 거룩하게 한다는 때때로 악과 더러움으로부터 내적인 분리(inward separation)를 의미한다. 이것은 결코 은혜의 두 번째 역사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구원하실 때, 그분은 그를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구원하신다. 깨끗해지지 않은 사람은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동시에 내적인 죄(inward sin)로부터 구원하시지 않는 사람을 결코 외적인 죄들(outwared sins)로부터 구원하지 않으신다.

    그 혼란의 대부분이 오랜 동안 칭의(Justification)는 용서하는 것(pardon)이다그리고 성화(Sanctification)는 씻는 것(cleansing)이다라고 가르침을 받아왔던 사실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우리가 성경적 구원을 일으키는 것은 칭의와 성화 둘 다라는 단순한 진리를 아는 순간, 우리는 단지 그의 죄들이 용서받았기 때문에 구원받을 것이라는 망상으로부터 자유롭게 된다. 우리가 구원받을 때 우리의 죄들이 용서되는(pardoned) 것이지, 우리가 은혜의 두 번째 역사를 얻기까지는 씻음 받지(cleansed) 못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사람들은 그들이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려고 애쓰는 것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회심(conversion)을 오직 외적 역사로만, 그리고 성화를 내적 역사로만 만든다. - - -- 회심은 내적 변화이다(an inward change). 이것은 문자적으로 뒤집는 것이다. 회심 때 인간의 본성은 변한다(the nature of man is changed). 단순한 죄들의 용서가 구원이 아니다 - - -. 그리스도께서는 네가 다시 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셨다.

    죄인은 그 부패하기 쉬운 씨앗(the corruptible seed)으로부터 태어나며, 그래서 거룩하지 못하다(unholy). 한 사람이 중생할 때, 그는 그 부패할 수 없는 씨앗으로부터 태어나며, 그래서 거룩하다. 그리스도를 믿음은 그를 새로움 또는 생명 안으로 소생시키며,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들이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제발 옛 것들이 지나갔으며, 모든 것들이 새롭게 되었다는 것에 주목하라. 그 어느 누가 한 사람이 이 복된 상태(this blessed state)에서 그 안에 모든 죄(sin)의 뿌리인 원죄(Sin)”를 갖고(웨슬리) 있다거나, 그래서 온전히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그가 은혜의 다른 역사를 가져야만 한다고 어떻게 감히 말하겠는가?

    우리는 사방에서 어떤 의미에서 한 사람이 구원 받을 때 새로운 피조물이 되지만, 그러나 그는 여전히 옛 사람”(old man)을 갖고 있다는 가르침에 직면하고 있다. 그들은 육적 마음(the carnal mind)이 모든 신자들 안에 있다고 말한다. 그들이 말하는 다른 것들 중에 어떤 것들은 신자 안에 타고난 부패성”(inbred corruption), “괴로움과 죄의 뿌리들”(the roots of bitterness and sin), “사악함의 유물들”(the remains of iniquity), “음탕함의 과다함”, “죄를 짓는 성향”(the bent to sinning), “악을 향한 유전된 성향”(the inherited tendencies to evil), “아담적 본성”(Adamic nature), “유전된 죄”(inbred sin), “죄의 나무의 그루터기”(the stump of the tree of sin) 등등이며, 그 말들은 모두 동일한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어떤 사람이 구원 받은 사람은 모두 그 안에 이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이단이라고 말한다. 나는 정중하게 그들의 관점에서 나는 이단이라는 것을 고백한다. 나는 한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서 그것을 다 가지고 있을 수 있으며, 동시에 구원받고, 또는 새로운 피조물이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라고 말하며(8:6), 로마서 87절은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말한다. 어느 누가 어떻게 한 사람이 구원 받음과 동시에 그 안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을 그 안에 가질 수 있는지 내게 말해주겠는가? 형제여, 이것은 구원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원수 됨(enmity)을 멸하셨다. 우리가 그분의 영광스런 십자가 앞에 설 때, 그리고 그분을 믿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되며, 우리 안에 있는 원수 됨은 죽음을 당하며, 우리의 마음은 순결하게 되고, 우리 자신을 그분께 기꺼이 드리며 죄와 마귀로부터의 자유를 외친다. 모든 새롭게 태어난 영혼은 자신이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되었다고, 또는 반드시 오실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되었다고 증언할 것이다. 누가 하나님께서 자기를 구원하실 때 하늘나라를 위해 준비시키지 않으신다고 감히 말하겠는가?

    성화는 은혜의 두 번째 명확한 역사라는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들은 한 사람을 천국을 위해 준비시키는 것은 그 두 번째 역사라고 뻔뻔스럽게 주장한다. 갓비 박사(Dr. Godbey)는 그의 책 성화에서 성화는 성경의 유일한 표준이라고, 그래서 우리 모두는 하늘에 들어가기 이전에 그것을 가져야만 한다고 쓴다. 호너 감독(Bishop Horner)은 하나님께서 그를 구원하실 때, 그에게 모든 거리 구석구석에 시골의 그루터기와 통나무에 복음을 전하기에 충분한 종교를 주셨지만, 이것은 그가 성화되기 칠일 전이었다라고 말한 것으로 인용된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그 어떤 종류의 고양”(uprising)도 느끼지 못했으며, 그런데 만약 그가 은혜의 두 번째 역사를 갖기 전에 죽었었다면, 지옥으로 직행할 뻔했다고 말한다. , 만약 이 가르침이 옳다면, 은혜의 두 번째 역사를 갖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다. 이 이론이 이 형제들 중 어떤 사람들 안에 남길 곤경이 무엇인지 보자. 그들 모두는 우리가 아는 한 웨슬리와 모든 그의 가르침들에 완전히 찬성한다. 웨슬리는 그의 그리스도인의 완전에 대한 명확한 언급에서 바울의 첫 편지의 독자인 회중들(assemblies)은 두 번째 축복(the second blessing)을 받지 못했었다고 말한다. 그는 바울 자신이 그 교회에 첫 번째 편지를 쓸 당시에는 그 경험을 갖지 못했었다고 말한다. , 만약 웨슬리가 옳다면, 오늘날의 호너와 갓비와 많은 다름 사람들이 옳다면, 바울은 은혜의 두 번째 명확한 역사를 갖지 못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영감 된 말씀이라고 믿는, 그리고 기록될 때부터 모든 세대들의 사람들을 복 받게 해온 복된 서신들의 몇 가지를 썼을 당시에는 지옥으로 가는 길 위에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바울이 은혜의 두 번째 역사를 받지 않았었다고 말한 웨슬리에 동의하는 데, 그 이유는 받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거룩함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모든 사람에 동의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것은 은혜의 두 번째 역사라는 그들의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만약 이 형제들이 그들의 이론들이 다되기 전에 멈추어 그것들이 그들을 내려놓는 곳을 본다면, 그들은 그 이론들을 버리고 하나님의 복된 말씀을 가르치기 시작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구원하실 때, 그분은 그를 죄로부터 구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신다. 그분은 그를 사망의 상태로부터 생명의 상태로 이끄신다. 그렇다, 그분은 그에게 영생을 주신다. 이것이 옳을진대 하나님이 구원하신 사람에게 그는 오직 부분적으로만 구원받았고 말하는 것, 은혜의 또 하나의 역사를 얻지 않는다면, 결국 그의 영혼을 잃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모순된 것인가. 나는 그런 교리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구원하실 때, 그분은 충분한 역사(complete work)를 행하시지, 불충분한 역사(half-way work)를 행하지 않으신다.

    한 가지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분은 우리를 순결하고 깨끗하게 만드시지만,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그런 상태에 머무르기(remain so)를 요구하신다. 그 어떤 명확한 경험도 하나님께 힘차고 건강하고 구별된 삶을 위한 필요를 제거할 수 없다. 하나님은 가장 완전하고, 고귀한 의미에서 이것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행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신다. 그래서 그분은 구원받는 모든 사람들은 거의 즉시 성령의 선물(the gift of the Holy Ghost)을 받으며, 성령은 만약 그분께 맡기면 우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는 직무를 취하실 것이라고 규정해 오셨다. 그 위대한 사도가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명백한 진술을 마친 후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8:9]라고 더하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성경적 관점에서, 죄인은 육신에 있으며, 신자는 성령 안에 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회심을 그 두 상태 사이를 가르는 선으로 삼으신다. 옛 생활에서, 첫 아담 안의 옛 피조물이 육신으로서 다스린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활은 완전히 성령 안에서 사는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가 그 사례를 성경에 호소하자면, 우리는 그들이 회개하고 침례를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으라고 가르치는 것을 본다(2:38-39). 우리는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 전체를 통해 이 가르침의 순서(order)를 본다. 단 한 구절도 은혜의 두 번째 역사를 언급하지 않는다. 그러나 오순절 날에 베드로에 의해 세워진 원칙은 가르침과 실천 속에서 지속적으로 지켜진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 빌립은 그들에게 침례를 주었고, 후에 사도 베드로와 요한이 내려가, 그들에게 안수하며 기도했더니,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우리는 사도행전 19장에서 동일한 것을 본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것이 유일한 성경적 진행의 순서이다.

    로마서 16장에서 바울은 아기도 그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분명하고 명백하게 가르친다.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그의 훌륭한 진술들을, 특히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5:20]는 진술을 이어서, 그는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고 묻는다. 그는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대답한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와 합하여 침례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분의 죽음과 합하여 침례를 받는 다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 묻는다. 그는 가장 아름답고, 가장 단순하게 구원의 참된 방식을 설명한다. 사망, 즉 장사와 부활이 명백하게 그것을 표현한다. 기독교 침례는 그것의 아름다운 상징(symbol)이다. 연합(identification)은 이 성경의 명확한 가르침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며, 그리고 그리스도와 함께 새로운 삶 안에서 걷도록 일으켜 진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닮음 안으로 심겨졌으며, 이제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닮음 안에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정죄로부터 자유로운데, 무슨 근거로 그런가? 사망 선고를 받았던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근거 위에서 그렇다. , 첫 탄생을 통해 아담과 연합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아래서 태어난 사망 선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실행되었다. 우리가 믿음과 중생을 통해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을 때 이것이 우리 안에서 실제로 이루어졌으며, 그래서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정죄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다음으로 그 사도는 이 복된 상태에서 해야 할 일을 가르친다. “자신을 하나님께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산 자로 드리라.” 그리고 연합의 진리를 보다 더 설명한다. 그는 그리스도에 대해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8:10]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는 그의 교훈은 무엇인가?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8:11]. 제발 알아라.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다. 우리도 그와 아주 동일하게 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죽으셨던 분이 사망에서 일으켜지시고, 이제 하나님께 살아나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부활 생명 안에서 그분과 함께 연합되고 하나님께 대해 살아가는 것으로 여겨진다. 여기에는 은혜의 두 번째 역사 같은 것은 없으며, 아무 것도 더 필요 없다. 믿음은 우리를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우리의 복된 주님과 함께 연합되게 했다. 우리는 우리가 침례를 받았을 때 그분의 장사 됨 안에서 그분과 함께 우리 자신을 연합시켰고, 이제 산 믿음으로 복된 성령 안에서 하나님께 대해 살아 있으며, 우리의 복된 주님 안에 거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적 구원이다우리 모두는 그 서신서들의 교훈들에 순종하며, 자신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고, 성령 안에서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