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세계의 오순절신학을 위해 KIPT

한국오순절역사

내한 오순절 선교사 루이스 P. 리차드: 조용기 목사의 영적 아버지

한오신 2025. 4. 2. 15:18

A Pentecostal Missionary to Korea,

Louis Peter Richards:

The Spiritual Father of Paul Yonggi Cho

 

 

1974년의 루이스 P. 리차드

 

 

이창승

2025.3.9./2025.4.12.

 

 

내한 오순절 선교사 루이스 리차드(이창승).pdf
0.26MB

 

 

 

I. 들어가는 말

 

    한국의 오순절적 교단들 가운데 가장 큰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2003년에 교단 창립 50주년을 맞이하며 초기 교단 창립과 발전에 기여하고 공헌한 희년 50인 인물을 선정했다. 50인에 루이스 피터 리차드(Louis Peter Richards)라는 선교사가 포함되었다.

    그동안 리차드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30년사에서 산발적으로 언급되었고, 김익진과 최재웅의 박사학위 논문들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졌다. 그리고 2005년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50주년 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교단연감은 내한 오순절 선교사들을 모아 각각 그들의 생애를 짧게 정리했는데, 그중에 리차드가 포함되었다. 그렇게 종래에는 리차드만 집중하여 독립적으로 다룬 글이 없었다.

    이 글은 기존의 연구들과 글들을 모으고, 다른 자료들을 발굴하여 리차드의 생애를 보다 구체적이고 풍부하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빈약하지만, 복원하려 한다. 한국 전쟁 직후 재건기에 행해진 리차드의 한국 선교는 한국 남동부 지역의 오순절 신앙 전파와 교회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의 한국 남동부 선교의 특별한 열매는 리차드를 영적 아버지로 여겼던 조용기 목사였다.

 

 

II. 탄생과 성장

 

    리차드는 1907211일에 미국 북동부 시카고 근처에 있는 일리노이스 주 제2의 도시 오로라(1 Ward Street, Aurora, Kane, Illinois)에서 태어났다. 오로라는 1908년에 빛의 도시”(City of Lights)라는 별명을 얻었는데, 그 이유는 그 도시가 미국 안에서 모든 가로등을 전등으로 교체한 첫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고도로 산업화된 도시, 도시를 나누는 거대한 강, 벌링턴의 상점 등 이 세 가지 요소의 조합은 오로라의 정치, 경제, 사회 역사의 역동성을 대부분 설명한다. 오로라의 성격은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철학적으로 이 도시는 포용적이고 관용적이었으며 다양한 유럽 이민자를 환영하고 남북전쟁 이전에 노예 제도 폐지론자 활동을 공개적으로 지원했다.

 

 

 

 

 

 

    그의 부친은 어떤 가게를 운영하던 루이스였고, 모친은 이다(Ida C. Phillips)였다. 그는 그의 부친의 이름(Louis Peter Richards)을 그대로 물려받았다. 그의 부친은 188531일에 일리노이스, 케인에서 태어났고, 1904615일에 동년배 이다 C. 필립스와 케인에서 결혼하여 22세에 낳은 둘째 리차드를 포함하여 두 아들과 세 딸들을 낳았다. 그의 가족은 가톨릭 교인이었지만 헌신적이지는 않았다. 194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52세의 그의 부모는 캘리포니아, 오렌지 카운티, 애너하임(Anaheim)에서 까페(Cafe)를 운영하며 살고 있었다.

 

 

 

    리차드는 1927년경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현재 오로라에는 네 개의 고등학교가 존재하고 있다. 로사리 고등학교(Rosary High School)1960년에 세워진 여고이며, 오로라 중앙 가톨릭 고등학교(Aurora Central Catholic High School)1968년에 설립되었다. 그러므로 두 학교는 리차드가 다닐 수 없었던 학교다. 나머지 두 학교는 오로라를 남북으로 나누며 흐르는 폭스 강(Fox River)의 동쪽에 1851년에 설립된 동 오로라 고등학교(East Aurora High School), 서쪽에 1890년에 설립된 서 오로라 고등학교(West Aurora High School)이다. 191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리차드는 폭스 강 동쪽 워드 스트리트 1번지에 살고 있었으므로, 그는 동 오로라 고등학교(East Aurora High School)를 졸업했을 것이다.

 

현재의 이스트 오로라 하이스쿨

 

    1927년경부터 리차드는 시카고에 있는 웨스턴 일렉트릭 컴퍼니(Western Electric Company)에서 몇 년 동안 일했다. 그 회사는 1881년부터 1996년까지 AT&T의 주요 축을 담당한 미국의 전기 엔지니어링 및 제조 회사였다. 1876년에 그 회사의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이 전화기에 대한 최초의 특허를 출원하기도 했다. 그 회사는 전기 통신 분야에서 세계 최첨단 회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리차드는 미국의 대공황기인 1929년에서 1930년에 퇴사해야 했다.

 

Western Electric Company

 

 

 

    그 후, 1930년경 프루덴셜 생명보험(Prudential Life Insurance)에 들어가 13년 동안 보험 판매인(insurance agent)으로 시카고, 덴버, 그리고 로스앤젤레스에서 일했다. 현재 미국 뉴저지, 뉴어크에 본사를 두는 프루덴셜 파이넨셜(Prudential Financial)이 존재한다. 그 회사는 1875년 즈음에 설립되어 2025년에 설립 150주년을 맞이하고 있는 다국적 생명보험 회사이다. 이 회사는 1935년부터 IBM 컴퓨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리차드도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컴퓨터를 사용하여 문서들을 처리하며 보험 판매일을 했을 것이다. 아마도 웨스턴 일렉트릭 컴퍼니와 프루덴셜 라이프 인슈어런스에서의 이 경험들은 후에 그가 한국에서 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중을 상대로 한 집회들을 진행하고, 방송 등 첨단 문명 기술들을 활용하여 선교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Prudential Life Insurance 본사

 

 

 

 

    그 회사에 다니던 1930(23) 712일에 그레이스 로이스 니드햄(Grace Lois Needham)과 시카고에서 결혼했다. 그녀는 1909119일에 아버지 프랑크(Frank William Needham, 1877년 일리노이스, 케인빌 출생 - 1934)와 어머니 데이지(Daisy E. Trumbull, 1878 1952) 사이에서 일리노이스, 슈가그로우브(Sugar Grove, Illinois)에서 태어났다. 루이스와 그레이스 부부는 1932년에 아들 로버트(Robert L Richards)1933년에 딸 제인(Jeanenne Richard)을 낳았다.

    리차드는 37세가 되는 제2차 세계대전 중이었던 19444월에 미국 해군에 차출되었고, 19441213일부터 19452월 하순까지 일본군을 상대로 일어났던 필리핀 중부 민도로섬 전투(the Battle of Mindoro)에 참전했다. 일본군은 가미카제 자살 특공대 비행기들을 띄워 항공 연료와 군수품이 적재된 미 해군 군함들을 공격했고, 두 척이 피격당했다. 미 육군은 미 해군과 미 육군 공군(USAAF)의 지원을 받아 민도로에 상륙하여 일본 제국 육군(IJA)을 격파했다. 미국은 민도로를 점령하여 그곳에 비행장을 건설했는데, 이 비행장은 필리핀에 대한 다음 주요 상륙 작전이 계획된 루손 섬 북부의 링가옌 만을 타격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이었다. 민도로는 루손섬에서 싸울 미군의 전진 기지 역할을 할 수 있었다. 리차드는 그 전투 동안 전쟁 피로증에 시달렸고, 곧 미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453월에 제대했다. 이 전투 경험은 후에 그의 한국군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III. 오순절적 성령침례 체험과 한국 선교 소명

 

    그의 건강 상실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고, 그가 하나님을 찾게 만들었다. 보험 판매원으로 일을 다시 시작한 리차드는 캘리포니아, 잉글우드(Inglewood, CA)에 있는 갈바리 어셈블리 오브 갓 처치(Calvary Assembly of God Church)의 라디오 방송의 애청자가 되었다. 그 결과, 40세의 그는 194761일에 중생을 경험했다. 캘리포니아, 상 페드로(San Pedro)에 있는 그의 보험회사 사무실로 운전하다가 한 천상적 빛이 그의 자동차 안으로 비쳐드는 것을 보았고, 오렌지꽃 향기 같은 냄새를 맡았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죄의 짐을 지고 자유케 하시는 것을 마음에 느꼈다. 그래서 갈바리 어셈블리 오브 갓 처치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194711월에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적 침례를 받았다.

 

 

 

 

    현재 잉글우드에는 Calvary Assemblies of God라는 명칭의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인터넷 상에 그런 교회는 검색되지 않는다. 그 대신 다른 곳들에는 명칭적으로 유사한 교회들이 있다. 예를 들면, 캘리포니아, 엘 몬테(El monte, CA.)에는 Calvary Assembly of God라는 교회가 있다. 교회 설립 시기는 확인할 수 없다. 교회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는 Calvary Assembly of God이라는 교회는 자기 교회에 대해 더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미 하나님의 성회 웹사이트를 열어 볼 수 있도록 연결해 놓았다. 그리고 캘리포니아, 로미타(Lomita, California)에 있는 Calvary Assembly Church는 웹 사이트에 성령침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는 방언이라고 표명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리차드가 다녔던 잉글우드의 교회는 그 자취를 찾을 수 없지만, “Calvary Assembly”라는 문구를 사용하는 교회는 모두 미 하나님의 성회에 소속된 그리고 방언이 성령침례의 최초의 외적 증거라는 오순절적 신앙을 표방하는 교회라는 것은 확인된다.

    그 후 42세의 리차드는 1949년에서 1951년까지 2년 동안 캘리포니아, 파사데나에 있던, 미 하나님의 성회의 교육기관이었던 남부 캘리포니아 성경 대학(Southern California Bible College)에 다녔다. 그가 그 학교에 입학하기 몇 년 전에 아더 B. 체스넛이 이 학교에 입학, 졸업했었다. 그 학교는 1943년에 군목 양성을 위한 정부의 허가를 받았다. 그가 군목 양성 과정을 밟았다는 기록은 없다. 대신에 그 학교에서 배우고 있던 중에 리차드는 한국 선교 소명을 받았다. 코스타 메사 캠퍼스의 오후 기도 시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in an audible voice) 명령하셨다. 그런데 그가 한국 선교 소명을 받았던 날은 바로 1950625, 즉 한국 전쟁이 발발한 날이었다. 46세인 그는 195323일에 하나님의 성회 남부 캘리포니아 지방회로부터 사역자인증을 받았다.

 

 

 

    그리고 19533월에 하나님의 성회에 선교사 지원서를 냈지만,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거부당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한국에 선교하러 가겠다는 그의 의지를 꺾지 못했고, 마침내 195310월에 국제 선교 협회(Universal Missions Incorporated)의 지원을 받아 증기선을 타고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한국으로 향했다. 캘리포니아, 알함브라(Alhambra)에 있던 그 선교단체는 다른 선교 단체들로부터 선교사 자격을 받을 수 없는 선교사들을 돕고 있었다.

 

 

IV. 오순절적 한국 선교

 

A. 한국 도착

 

    46세의 리차드와 그의 부인은 일본을 거쳐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4개월이 지난 19531117일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공식 선교사로 내한한 스테츠 선교사 부부와는 달리 리차드 부부는 비록 미 하나님의 성회의 공식 선교사들은 아니었지만, 교단 배경이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들과 관계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한국에 오는 도중에 일본, 도쿄에 머물고 있을 때 한국으로 가고 있던 스테츠 선교사 가족을 그리고 휴가차 일본에 와있던 체스넛(Arthur B. Chesnut) 선교사를 만났고, 그에게서 한국의 사회적 그리고 경제적 상황에 대해 들었다. 그리하여 그는 체스넛에 이어 두 번째로 내한하는 남성 오순절적 선교사가 되었다.

    그렇게 부산에 도착한 리차드는 부산의 첫 번째 그리고 유일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교회였던 부산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당시 그 교회는 19537월 휴전협정으로 한국 전쟁이 끝나자 창립자 박성산과 대부분의 교인들이 서울로 돌아갔기 때문에 김상필 전도사의 지도 아래 생존을 위해 분투하고 있었다. 리차드 부부는 김상필을 도와 그 교회의 생존에 공헌했다. 미국 잉글우드에 있는 리차드의 모교회는 리차드 부부에게 매달 50달러를 후원하기 시작했다.

    리차드의 내한 소식은 195421일에 발간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단지 純福音의 창간호를 통해 전 교단 구성원들에게 알려졌다.

 

    리챠-드 선교사 부부는 195311월 중 내한하야 부산에 체류하면서 선교사업 준비 중이라고 한다.

 

B. 교회 개척: 순복음교회

 

    리차드는 여러 하나님의 성회 교회들을 개척했는데, 그 교회 명칭에 순복음”(Full Gospel, 純福音)을 꼭 집어넣었다. 47세인 그는 195445일에 부산 중심가 부민동 19번지에 부산순복음중앙교회를 설립했다. 이 교회는 한국에서 최초로 교회명에 순복음”(Full Gospel)이라는 문구를 사용한 교회가 되었다. 2002년에 남구 문현동 306-5번지로 이전하고 문현순복음교회로 개칭했다.

 

 

현재의 부산순복음중앙교회

 

 

    그리고 1954725일에 부산 서쪽, 김해군 대저읍 맥도리 동자동 회관에 맥도순복음교회를 세웠다. 맥도순복음교회는 19548월 말 본동리 소재 동자동 가정집(장로교 고신에서 사용하던 것임)을 인수 철거하고 군용 천막을 쳐 예배처소를 마련했다. 1955515일에 리차드가 도움을 주어 대지 631평을 매입했다. 19556월에 천막을 철거하고 리차드의 자금 지원으로 콘센트로 예배당을 세웠다.

 

맥도순복음교회의 천말성전(좌)과 컨센트와 벽돌 성전(우)

 

 

    당시 그 땅은 맥도’(麥島)라고 불리는 버려진 땅이었다. 땅 모양이 보리처럼 생겼다 하여 맥도(麥島)라고 불렀다고 하나, 이곳에 낙동강 제방을 쌓기 전에는 농업용수가 없고 바닷물이 논밭에 스며들어 벼농사를 조금밖에 못 짓고 보리()를 주곡으로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고도 한다. 또 맥()은 갯벌의 뻘(개흙)을 뜻한다고도 한다. 주변은 온통 갈대밭뿐이었고, 토착민들과 도시에서 상처받은 이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었다. 19599월에 태풍 사라가 휩쓸고 지나가는 바람에 교회의 역사적 자료들이 많이 사라졌다. 순복음맥도교회는 현재 순복음강변교회가 되었다.

 

 

 

순복음강변교회

 

 

    리차드는 또한 1956815일에 부산의 북부 교외에 순복음안락교회를 세웠다. 현재 순복음안락교회는 홈페이지를 통해 그 교회의 역사를 비교적 상세하고 체계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 역사의 복원은 김종회 장로의 회고록과 사진들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1942년 부산부 동래출장소가 되며 안락리라 불렸고, 1949년 부산시 동래출장소 관할이 되었다가 1957년 부산시 동래구 안락동이 되었다. 안락동은 북서쪽으로 마안산과 접하여 동래읍성지의 동쪽에 해당하며, 이곳 산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평지로 구성되어 있다. 동쪽은 수영천이 북에서 남으로, 남쪽은 온천천이 서에서 동쪽으로 흘러 이곳은 하천의 합류 지점에 해당한다. 매년 홍수 피해가 잦았었다.

 

1970년대 안락로터리

 

 

    19506. 25가 일어난 후 피란민들이 안락동에도 들어오게 되었다. 당시 피란민들에게는 방을 잘 내어 주지 않았고, 방을 내어 줄 수 있도록 여유 있는 집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서울에서 예수를 믿던 두세 가족이 예수 믿는 집을 찾다가 김종회의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에 그 집은 아래채가 커서 방이 여러 개 있었다. 그런데 한 가족 중에 서울에서 목회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통해 박명순 집사와 박귀순 집사(김종회의 할머니)가 리차드를 만나게 되었다. 그 후, 리차드가 몇 번 그곳을 방문 답사했다. 당시 리차드는 서면에 인접해 있던 부산진구 범전동 및 연지동의 약 543,360m² 규모의 주한 미군의 부산 사령부 군영, 하야리아 부대(Camp Hialeah) 영내(현재는 부산시민공원이 되었다)에 거주하고 있었다. 1956620일에 두 집사는 리차드가 거주하던 하야리아 부대를 방문하기도 했는데, 그때 김종회도 동행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서로 간에 교회를 세우기로 약속하게 되었다.

 

 

 

1950년대 하야리아 부대
하야리아부대 터에 조성한 부산시민공원
하야리아부대 장교클럽건물을 활용하여 만든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부산시민공원 역사관 안에 전시된 하야리아부대 정문모형
하야리아부대 내 하사관 숙소들
퀸셋막사

 

 

  이렇게 교회를 세우기로 하고, 처음 준비 단계로 동네 주민 최명률씨 소유 기와 공장에서 야외 부흥회를 개최 했다. 그 부흥회는 4 ~ 5일 정도 지속되었는데 모내기 철임을 감안해 저녁 집회만 열었다. 리차드는 주강사로 섬겼다. 통역은 정덕환이 담당했고, 서면 영생교회 지승권 목사와 소교민 목사가 강사였다. 당시 안락동에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김종회에 의하면, 리차드 선교사가 타고 온, “스리쿼드라고도 불렸던 닷찌 차(Dodge)에 시동을 걸어놓고 밧데리에 전선을 연결해서 불을 밝히고 집회를 진행했다. 스리쿼드라고도 불렸던 다찌 차는 “Dodge M37”이었을 것이다. 이 차는 3/44륜 군용 트럭이었다. “스리쿼드는 그 차의 적재 무게 “3/4 을 말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 차는 1951년부터 출시되기 시작했고, 한국 전쟁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었다. 당시 미 하나님의 성회의 지원을 받지 못하여 승용차를 구입할 수 없었을 것이고, 미군 부대 내에 거주하던 리차드는 아마도 이 군용 트럭을 빌려 타고 와서 그 부흥회를 인도했을 것이다.

 

Dodge M37 3/4 ton

 

    그 부흥회가 끝나고 1956626일에 박귀순 집사의 집에서 김갑희 여전도사의 인도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참석인원은 7 8명이었다. 리차드는 한 교인이 제공한 밭에 미군이 사용하던 야전군 소대 천막 막사를 구하여 치고, 천막 안에 나무판을 붙여서 벽을 만들었다. 천장은 천막 그대로였고, 바닥은 가마니와 멍석을 깔아 예배당을 세웠다. 리차드도 손수 거들었고, 강냉이 가루와 분유를 가져와 반죽하여 빵을 만들어 간식으로 제공했다. 그는 또한 전지우유, 강냉이 가루, 과자 등 구호품을 가져와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리차드는 그 교회를 수시로 찾아가 말씀을 전했고, 갈 때마다 여러 가지 선물들을 갖고 갔다. 그가 주었던 선물들 중에 가장 큰 것은 풍금이었고, 그것은 그 교회 재산목록 1호가 되었다. 펜테코스탈 에반젤(Pentecostal Evangel)에 의하면,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은 한국의 오순절 신자들을 위해 많은 의복 등 구호품들을 보냈고, 한국의 오순절 목회자들을 위해 자전거 6대를 보냈고, 풍금(organ) 6대를 오순절교회들에 보내기도 했다. 안락순복음교회는 1956815일에 김상필 전도사가 담임한 후 건평 18평의 목조건물을 신축했다.

 

 

 

발로 바람을 불어넣어 연주하던 풍금

 

 

    리차드는 51세가 되는 1958314일에 남부 캘리포니아 지방회(Southern California)에서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특정한 교단의 지원을 받지 않은 믿음 선교사들(faith missionaries)로 사역하던 리차드와 부인은 마침내 1958101일에 교단 지원을 받는 미 하나님의성회 소속 선교사들이 되었다. 4개월 후 미 하나님의 성회에서 1959120일에 개정 발간한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 리차드 부부의 이름이 한국(Korea) 선교사로 등재되었다.

 

 

 

 

    안락순복음교회가 설립된지 3년째 되는 19599월 추석날 아침, 사라호 태풍에 산 중턱에 있던 천막 예배당이 크게 파손되었다. 리차드는 이때도 지원했고, 이전보다 더 튼튼한 천막 예배당이 세워졌고, 아래쪽에, 양철 지붕에 방 하나, 부엌 하나가 달린 사택도 지어졌다. 재건된 교회의 네 귀퉁이에 기둥이 세워졌고, 천막 위에는 루삥이라는 비닐 덮개에 콜타르를 발라 비가 쓰며들지 못하게 했다. 나무틀 창문이 설치됐고, 강대상에 나무 바닥이 깔렸으나, 교인들이 앉는 자리는 여전히 가마니와 멍석자리가 깔렸다. 그 후 리차드의 지원으로 교인들이 앉는 자리에도 마루가 깔렸다. 역시 리차드의 도움으로 1963320일에 건평 36평의 시멘트 블록 건물이 개축되기 시작했고, 526일에 헌당 예배가 드려졌다.

 

1959년 9월에 불어온 패풍 사라호로 파괴던 건물들

 

 

 

    순복음안락교회의 성장에는 리차드를 통해 나타난 성령의 권능이 큰 몫을 했다. 김종회에 따르면, 교회가 자리 잡고 있던 산 아래에 토굴을 파놓고 죽을 날 만 기다리며 살고 있던 폐결핵 환자가 안락교회에 나와 리차드의 안수기도를 통해 고침을 받았다. 또한 귀신 들려 온 동네를 헤매고 다니던 동네 유지의 자녀가 리차드의 안수를 받고 고침을 받기도 했다. 이런 성령의 나타남은 주민들이 교회를 우호적으로 보게 했고, 자녀들을 교회에 보내거나 자신들이 교회에 다니게 했다. 어느 불신자 집의 우물이 벌겋게 변하여 마시지 못하게 되었다. 그 집 안 주인은 하나님을 믿으면 무엇이든지 이루어 주신다는 전도의 말을 들고는 리차드에게 찾아와 예수를 믿을 테니 우물을 고쳐달라고 요청했다. 리차드는 그 집에 찾아가 우물을 붙들고 기도했고, 우물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그 집 사람들은 순복음안락교회 교인이 되었다.

 

 

 

현재 순복음안락교회

 

2023년 8월 15일 창립 67주년 기념사진

 

C. 전도 집회

 

    리차드는 교회들을 개척하면서 동시에 여러 곳에 천막을 치고 전도집회들을 열었다. 10여 년 동안 보험 판매일을 했던 그는 사람들을 대하는 데 있어서 대담하고 거침이 없었다. 그는 군 장병들로부터, 참모들 그리고 장군들에게도 담대하게 전도하곤 했다. 그 전도집회의 면모를 53세의 그가 19606월에 미 하나님의 성회에 전도집회에 대해 보고한 것에서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집회들은 불교 도시인 온정, 부산, 그리고 영도섬에서 열렸다. 헤리 피터슨(Harry J. Peterson)이 부산 집회 동안 리차드의 팀과 함께 사역했다. 550명이 결신 카드에 서명했다. 지역 교회들의 장로들과 집사들은 결신 카드 서명자들을 찾아갔고, 대부분의 경우에 그들은 그 결신들은 진정한 것들이었다고 보고했다. 또한 수많은 치유 간증들이 쏟아졌다.

 

리차드가 촬영한 부흥집회 사진

 

 

    리차드에 의하면, 그는 부산에 있는 큰 나환자촌에서 일련의 전도 집회들을 열기도 했다. 그런데 그는 그 나환자촌의 명칭을 전하지는 않았다. 1960년대에 부산에 있던 나환자촌은 성화원상애원이었다. 성화원(聖花院)6·25 전쟁 당시 전쟁고아들을 위해 구평동에 설립되었고, 이후 1960년대에는 기독교 출신 상이 제대 군인들의 자활 목적으로 운영되었다. 이 시기 음성 한센인도 함께 수용되었으며, 이후 성화원에 수용되어 있던 음성 한센인이 이 지역에 정착하여 닭이나 돼지 등 가축을 기르고 파 같은 밭작물을 재배해 시장에 내다 팔게 된다. 이때 성화원으로 알려진 마을의 이미지 개선을 위해 구평 농장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상애원(相愛園)용호농장이라고도 불렸다. 용호농장의 전사(前史)는 감만동 나환자 수용소였다. 감만동 나환자촌을 일군 이는 호주 장로교 선교회에서 파견한 제임스 매켄지(James Noble. McKenzie) 선교사였다. 1910245세 때 부산에 도착한 매켄지는 의료 선교사로서, 그 앞 해에 미국 북장로교 선교회의 어빈(Charles H. Irvine) 선교사가 만들어 놓은 80명 수용 규모의 감만동 나환자 수용소를 넘겨받았다. 이후 수용 인원이 팽창해 650여 명에 이르렀다. 1940년 일제는 남아 있던 나환자를 소록도로 강제 이주시켰으며 이때 소록도에 가지 않고 뿔뿔이 흩어져 있던 270명의 나환자들은 19463월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다시 용호동에 정착했고, 그 정착촌은 상애원 또는 용호농장으로 불렸다. 상애원에는 가장 많았을 때 7천여 명의 나환자들이 살았었고, 1990년대 말 재개발 직전에는 약 1,200명의 나환자들이 있었다.

 

 

일제시대 상애원

 

    리차드는 이 두 나환자촌 가운데서 규모가 더 컸고, 나환자들만 거주하던 상애원에서 전도집회를 열었을 것이다. 리차드에 따르면, 당시 그곳에는 1,500명 이상의 나환자들이 살고 있었다. 하루에 세 번의 집회들이 열렸고, 각 집회에 600명가량이 참석했다. 그 집회의 말미에 그 나환자들은 자기들의 사랑과 감사를 표하기 위해 40,000(50달러)과 닭들 그리고 다른 헌물들을 드렸다. 그런데 아주 소수의 나환자들이 구원을 받았다. 그래서 리차드는 그 돈을 받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성경책들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기로 하고 받았다.

    리차드는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선교사가 되던 1958년부터 부산 지역에 주둔하던 한국군 2사단의 예하 부대들에서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19601월에 미 하나님의 성회에 한국군 선교를 위한 특별 기도를 부탁했다. 그가 19604월에 기사화된 보고서에 의하면, 그 해는 하나님께서 리차드에게 한국군에게 복음을 전할 문을 열어주신 지 3년 째였다. 그 동안 한국군 2사단 예하 부대들(units of the Korean Second Army)에서 33회의 집회를 열었다. 그 집회들은 영내, 학교들, 병기창들, 병원들, 그리고 교도소에서 열렸고, 수 백 명의 군인들이 그리스도를 믿기로 결심했다.

 

 

 

    그는 또한 남한의 다른 도시들을 위해 전도집회들을 계획했다. 각 집회에서 드려지는 헌금은 보통 비용의 절반에 이르렀다. 한 한국 도시에서 한 부흥집회를 여는 데 약 50달러가 소요되었다.

 

D. 전도 열매: 조용기 목사

 

    한국 사역 동안 리차드의 복음 전도 노력은 수 많은 한국인들이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알게 했다. 그 회심자들 가운데 소교민, 정덕환 등 열두 명이 전임 목회자들이 되었다. 그 사람들 가운데에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개척한 조용기 목사도 있었다. 조용기는 1956년 초에 케네스 타이스(Kenneth Tice) 선교사의 소개로 49세 리차드의 통역이 되었고, 리차드의 세계선교회(the World Mission)에 다니기 시작했다. 1980년에 조용기의 전기를 썼던 케네디(Nell L. Kennedy)에 의하면, 조용기는 리차드의 집회에 참석하면서 처음으로 자신의 하나님과의 관계(for the first time . . . his own relationship to God)에 대해 확신하기 시작했다. 조용기는 리차드의 성경공부와 집회에 참석하던 중 철저하게 회개했다. 환상 중에 주님을 만나는 경험을 하고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 체험과 오랜 폐결핵 병에서 치유 받게 되었다. 더하여 리차드의 권고로 순복음신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조용기가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경험한 것에 대해 두 가지 다른 보고가 있다. 2008년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발간한 위대한 소명: 희망 목회 50은 그 경험이 타이스의 영향을 통해 일어났다고 썼다. 반면에 케네디는 리차드의 영향을 통해 일어났다고 썼다. 그에 따르면, 조용기는 부산의 월드미션 교회에 참석하기 시작했고, 리차드는 그 교회 안의 작은 사무실로 조용기를 초청해 가르쳤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자신의 숙소에서 기도하고 있던 조용기의 혀는 그 이전에 전혀 들어보지 못했던 것을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내부로부터 풀려나오는 그 놀라운 소리는 그의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그는 멈추었다가 다시 말하기 시작하며, 그것이 가능한지 시험해 보았다. 단어들은 그런 기분 좋음과 함께 쏟아져나왔고, 때때로 반복되었고, 연속적으로 발산되었다. 순간적이었던 같은 데 반나절이 지나갔다. 그의 가슴은 숨쉬기를 편하게 해주는 이상한 따뜻함으로 찼다. 그날 저녁 조용기는 리차드 앞에서 방언을 말했다. 그리고 가르침을 구했다. 리차드는 그의 앞에 사도행전 2장을 펼치고 조용기와 함께 소리 내어 읽었다. 그리고 리차드는 조용기에게 방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리차드와 조용기 자신의 글들이 이 주제에 대해 일치한다는 점에서 볼 때, 케네디가 주장한 것처럼, 리차드의 영향 아래서 조용기가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 리차드는 1967년에 발간된 그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나 [한국 전쟁으로 인한] 이 불행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주린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셨다. 수백 명의 고귀한 불신자들이 구원을 받았다. 그 사람들 가운데 부산에서 살고 있던 젊은 의학도 조용기가 있었다. 이 청년은 구원을 받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고(filled with the Holy Spirit), 폐결핵을 치유 받았고, 그리고 사역의 소명을 받았다.

 

    리차드가 언급한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았고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고라는 말과 동일할 것이다. 조용기는 리차드의 그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썼다.

 

루이스 리차드 형제는 나의 담임 목사(my own pastor)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개인적인 구원자로 받아들이고 중생하는 확고한 경험을 한 것은 바로 1956년 한국의 부산에 있던 순복음 선교회(the Full Gospel Mission)에서 일어났다. 하나님에 대한 나의 믿음이 강하여지고, 성령으로 침례를 받고(I was baptized with the Holy Ghost), 그리고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당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그 가르침을 통해서(It was through the teaching of God’s Holy Word) 일어났다.

 

 

 

조용기가 언급한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대한 그 가르침은 리차드의 가르침을 지칭한 것이다. 케네디는 리차드 목사가 성경과 자신의 삶의 경험으로부터 얻은 것들을 조용기에게 가르쳤다고 썼다. 2022년에 루티 오버그는 리차드의 가르침과 조용기의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 경험의 상관성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의 가족은 그를 박해했지만, 미국인 선교사, 루이스 리차드는 죽어가는 그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 제자화하기 시작했고, 그에게 치유를 위해 예수를 바라보라고 격려했다. 어느 날 저녁 기도하고 있던 조는 그리스도의 환상을 보았고,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새로운 믿음이 그를 압도했다. 그리고 그 사랑이 그의 입을 통해 끓어 올랐고(bubbled up), 그는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he began to speak in another language). 이것은 그를 놀라게 했으나, 그 선교사[리차드]가 이 현상은 성경적인 것이고, 그리고 다른 많은 사람들도 또한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경험해 왔었다고 설명해 주었다. 여전히 그의 몸에는 연약함이 있었지만, 의사는 곧 그의 폐가 더 이상 결핵의 징후들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그의 심장은 정상적인 크기로 돌아갔다.

 

    리차드는 19832월에 극동 아시아 선교지부장 허스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조용기 목사가 자신의 사역 하에서 구원을 받았음을 분명히 밝혔다. 그에 의하면, 그의 부인이 조용기가 회심한 지 3개월 후 그를 순복음신학교에 등록시켰다. 리차드는 자신과 조 목사의 관계에 대해 여러 이야기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을, 즉 조 목사의 회심과 성령침례 받음이 리차드와 관계가 없다는 낭설 때문에 마음의 상처를 받았다. 그리고 그는 “Full Gospel Business Men’s Voice에 실린 기사가 그 주제와 관련해 가장 정확한 것이라고 썼다. 그 기사에 의하면, 리차드는 조용기에게 당신이 죽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만 하면, 말씀은 놀라운 창조적 능력을 발휘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습니다.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당신을 고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리차드는 조용기에게 병고침을 약속하는 많은 성경 구절들을 가르쳐 주었고, 조용기는 그 구절들을 암기했다. 어느 날 저녁, 기도하고 있던 조용기는 환상 가운데 가시관을 쓰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다. 예수께서는 조용기에게 삶을 바칠 것을 요구하며 병고침을 약속하셨다. 그리고 그의 머리에 안수하자, 그는 강력한 바람이 부는 것처럼 흔들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혀가 딱딱해지다가 떨면서 전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영광이 그의 전 존재 안으로 가득 찼고, 그는 쓰러졌다. 다음 날 아침에 그는 리차드에게 달려갔고, 리차드는 기뻐 뛰며 외쳤다. “조 형제님, 당신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함을 입었습니다!

 

 

 

 

 

    조용기 목사가 1958년에 대조동에 교회를 개척하고 교회명을 대조동순복음교회로 칭했던 것은 리차드가 교회를 세울 때마다 교회명에 순복음을 넣었던 것에 영향을 받은 것이었을 것이다.

    리차드와 조용기와의 관계는 1965년에 조용기가 브라질 선교에서 일어났던 일로 인해 곤경에 처해졌던 때에 해결책이 되기도 했다. 조용기는 브라질 성회에 갔다가 리오데자네이루 비행장에서 팬암(PAN AM) 비행기를 타려고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한 브라질 경찰이 다가와서 그에게 패스포드를 보여주기를 요청했다. 조 목사가 보여주는 순간 그 경찰은 자기 주머니에 그것을 집어넣고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비행기는 그의 짐을 내려놓고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그는 포르투칼어를 전혀 몰랐고, 당시는 브라질에 한국영사관도 없었다. 브라질에서 노숙자가 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는 대합실에 앉아서 울며 기도했다. 그런데 딸과 함께 지나가던 한 신사가 그의 앞에 서서 당신 혹시 조용기 목사 아닙니까?”라고 물었다. 너무 반가워 일어난 그는 어떻게 나를 아느냐?”고 물었다. 그 신사는 대답했다. “10년 전에 나의 친구 루이스 피 리차드라는 목사가 한국에 선교사로 나갔는데 그가 간증을 적어서 당신 사진을 내게 보낸 적이 있습니다. 10년 전에 당신 얼굴을 본 후 까맣게 잊어버렸었는데, 오늘 마침 상파울로에서 온 손님을 리오데자네이로 비행장에서 환송하고 난 다음 돌아가려고 하는데 10년 전에 본 그 사진과 똑같은 사람이 앉아있기에 혹시나 하고 물어보았습니다.”

    리차드와 조용기의 돈독한 관계는 조 목사가 1995년경에 88세의 리차드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드러난다. 그 편지에서 조 목사는 자신을 예수 안에서 당신의 아들”(your son in Jesus)로 규정하며 리차드와 자신의 관계를 신앙의 아버지, 영적 아버지와 아들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저는 아주 자주 당신을 생각합니다! 참으로 세월이 너무도 빠르게 흘러갑니다. 이제 저는 이미 59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부산에서 사역하던 세계선교회(the World Mission)와 당신의 사역 아래서 예배하던 그 복된 시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 . . 그러나 여전히 저의 마음속에서 저는 당신의 소년이며 양입니다. . . . 여전히 예수 안에서 당신의 아들입니다.

 

E. 방송 전도: 순복음의 시간

 

    천막 전도 집회, 기관 전도 집회, 그리고 교회 개척 등을 통해 복음을 전하던 리차드는 방송 전도도 시작했다. 그는 19605월에 HLKP를 통해 방송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 HLKP19591223일 개국된 부산광역시, 경상남도 내 인근 지역의 CBS 기독교방송의 호출부호였다, 서울과 대구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그 지역국은 지역 기독교방송에서 최초로 CBS 음악 FM을 개국한 방송국이었다. 그 기회를 제공한 사람은 그 전에 리차드에게 몇 번의 전도 집회들을 조정해 주었었던 한국인 목회자 이정수였다. 그는 그 방송국의 영업 관리자(business manager)였다. 리차드는 즉시 라디오 방송의 전도를 위한 가능성을 알아차릴 수 있었고, 한 달에 아홉 번 방송을 지속했다. 그가 방송 전도를 통해 회심한 것이 이 사역을 시작하는 데 큰 동기와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리차드는 그 방송 프로그램을 순복음의 시간”(the Full Gospel Hour)이라고 칭했다. 순복음의 시간(the Full Gospel Hour)을 듣는 사람들 중 60퍼센트는 불신자들이었다. 이것은 부산에서 실시한 한 조사에서 드러났다. 그 조사는 부산에 살고 있던 1,050,000명 가운데 147,000명이 라디오를 갖고 있었고, 39,600명이 순복음의 시간이 그것을 통해 방송되고 있는 HLKP 방송을 듣고 있으며, 26,520명이 순복음의 시간 자체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휴식을 위해 1962년에 미국 고향에 갔을 때, 그는 하나님께서 매일 방송을 제공하시려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는 부산에 적어도 1,100,000명 이상의 영혼들의 대부분이 미신, 우상, 그리고 거짓 종교들에게 묶여 어둠에 앉아 구원받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주변의 읍과 마을들의 수십만 명이 그의 방송을 들을 필요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 필요한 자금을 공급하심으로써 그의 기도들에 응답하셨다. 마침내 순복음의 시간(the Full Gospel Hour)은 그가 56세가 되는 196331일부터 매일 방송될 수 있게 되었다.

 

 

    순복음의 시간이란 방송이 한국인들의 영적 필요들을 채워주었다는 것은 유장식(Yoo Jan Sik) 같은 사람의 간증들에서 드러났다. 철도 직원이었던 유 씨는 유교에 심취해 있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 삶의 목적을 잃어버렸었다. 조상 때부터 유교를 믿어왔었고 선한 일을 하려고 노력해왔었다. 그러나 그것은 헛된 것으로 끝났었다. 이 세상에서 자기 삶의 목적이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었다. 기독교인이 되겠다고 생각도 했었지만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대해 듣고 싶었다. 우연히 순복음의 시간을 듣기 시작했다. 순복음의 시간의 성탄절 방송을 듣고 있던 중에 그의 의심과 두려움이 사라졌고 예수께서 그의 마음에 들어오셨다. 그는 성경책을 구입했고, 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리차드는 순복음의 시간의 미래를 위해 이리(현 익산)와 대구에 있는 기독교방송 지국들에서 동일한 테잎들을 사용하는 것을 포함하는 미래의 계획을 세웠었다. 이것은 매월 75달러가 더 투입되어야 실행될 수 있었다. 라디오 성경 통신 강좌들도 통역되며 개설되었다.

 

D. 한국 선교 종결

 

    60세의 리차드는 1967115일 안락순복음교회(현 순복음안락교회)에서 귀국 송별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그는 196736일에 경남 김해군 이북면 퇴래리 소업부락 1187번지(현 김해시 한림면 명동리 1187)에 대지 243평을 구입하고, 건평 26평의 성전을 지어 순복음소업교회를 개척했고, 전덕종 목사가 초대교역자로 부임했다. 19675월에 발간된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는 리차드 부부의 이름이 여전히 한국 선교사로 기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부산을 선교 기지로 삼고 15년간 한국의 남동부에 오순절주의를 확산시키는데 헌신했던 리차드 부부는 196710월에 홍콩으로 선교지를 옮겼다.

 

 

 

 

현재 소업순복음교회

 

 

V. 동남아 선교와 소천

 

    1967년에 필리핀, 마닐라에서 리차드의 책 하나님과의 멋진 만남들: 영혼 구원을 위한 교범(Divine Appointments with God: A Manual for Soul-Winning)이 출판되었다. 미 하나님의 성회에서 1968522일에 발간한 목회자 및 선교사 명부에 리차드 부부의 이름이 홍콩 선교사로 올랐다.

 

 

    홍콩으로 간 리차드는 1968년 가을에 다시 잠시 내한 했다. 그리고 서울, 마산, 대구, 부산, 대전, 청주, 그리고 원주에서 대중 전도 집회를 열었다. 이렇게 한국 전역을 7주 동안 돌며 전도한 결과 476명의 결신자를 얻었다. 서울 집회에서는 소교민과 함께 집회를 이끌었다. 소교민은 오전에 성령침례에 대해 가르쳤고, 리차드는 저녁에 설교했다.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고, 172명이 결신 카드를 작성하기도 했다. 그는 19697월에도 내한하여 대중 전도 집회를 여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 후 197011월부터 19732월까지 싱가폴로 선교지를 옮겼다가 다시 홍콩으로 돌아갔다. 그는 홍콩을 센터로 삼고 필리핀 등 동남아에서 선교한 것 같다. 그가 197311월에 극동 아시아 선교 지부장 허스트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그는 필리핀, 민도로, 로삭스(Roxas, Midoro, P.I.)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민도로는 그가 태평양 전쟁때 해군으로 참전했던 곳이었다. 그 이전에는 교회가 전혀 없던 그 곳에서 한 부흥회가 열린 후 땅이 구입되고, 그 부지에 건물이 지어지고, 뉴 파이오니어 처치(New Pioneer Church)가 설립되었다.

 

 

 

 리차드는 69세가 되는 1976 7월에 은퇴했다. 본국으로 귀환한 그는 캘리포니아, 패러다이스(Paradise, California)에 거주하면서 Evangelistic Campaigns Soul-Winning Seminars에서 가르치기도 하고, 목회자들이 출타하거나 부재한 교회들을 돕기도 했다. 그리고 클락 공군기지에서 전도하기도 하고, 오레곤, 워싱턴, 캐나다, 그리고 동부 순회 전도집회를 열었으며, 해외선교를 위한 강연을 하기도 했다.

 

 

 

1974년 7월 18일 리차드 부부사진

  

 

 

 

    마침내 리차드는 2001117일 수요일에 미국, 캘리포니아, 버트, 마갈리아(Magalia, Butte, CA, USA)에서 94세에 소천했다. 그의 남은 몸은 치코 세미트리(Chico Cemetery)Sec 14,B Lot 50,B sp 1에 안치되었다. 당시 그의 아내 그레이스 리차드(Grace Lois Needham Richards)91세였으며, 슬하에 아들 로버트 리차드(Robert Louis Richards)와 딸 제인 크리스웰(Jaenne Criswell)이 있었으며, 그들에게는 12명의 자녀들이 있었다. 리차드의 소천은 2003년에 발간된 소천 목회자 추념록에서도 발견된다. 그 책에 의하면 그는 캘리포니아 북부 네바다(Northern California Nevada) 지방회 소속이었다. 그로부터 약 3개월 후인 2002221일에 그의 아내가 버트 카운티, 패러다이스(Paradise, Butte County) 돌봄센터(Paradise Care Center)에서 9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녀의 남은 몸은 그의 남편 곁에 묻혔다.

 

 

 

 

 

 

VI. 나가는 말

 

    1907년에 미국에서 태어나 2001년에 소천한 루이스 피터 리차드(Louis Peter Richards)는 아더 B. 체스넛에 이어 두 번째로 내한한 남성 오순절적 선교사였다. 194711월에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적 침례를 받고,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625일에 한국 선교의 소명을 받았다. 아더 B. 체스넛이 서울을 중심으로 2년 반 동안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교단적인 활동을 했던 반면에, 리차드는 한국 전쟁 직후인 19531117일부터 196710(4660)까지 15년간, 주로 부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여 한국의 남동부 지역의 오순절 순복음 신앙 전파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성장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믿음 선교사로 시작하여 19589월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선교사가 된 그는 그 지역에서 천막 전도 집회들을 열어 복음을 전하면서 순복음부산중앙교회”(현 문현순복음교회), 순복음맥도회, 순복음안락교회 등 여러 교회들을 개척하고 지원했다. 한국의 교회명에 순복음이란 문구를 최초로 넣기 시작한 사람이 바로 리차드였다. 그는 특히 한국 오순절계에서는 최초로 방송 선교를 실시했다. 그는 기독교방송(CBS) 부산지국 방송에 순복음의 시간이라는 프로그램을 마련하고 오순절적 복음 확산에 기여했다. 또한 오순절적 한국군 선교가 그를 통해 최초로 실시되었다.

    리차드의 가장 큰 공헌은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던 여의도순복음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킨 조용기 목사를 성경 말씀으로 가르쳐 중생하는 것을 돕고, 폐결핵에서 치유받게 하고,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하도록 이끈 것이다. 조용기는 자신을 리차드의 영적 아들이라고, , 리차드를 영적인 아버지로 인식할 정도로 리차드는 조용기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리차드는 조용기 목사를 영적으로 탄생시킨 아버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