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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오순절역사

미 하나님의 성회가 1952년에야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한 이유

한오신 2025. 3. 29. 19:34

이창승

2025329일/ 2025년 4월 5일

 

 

미 하나님의 성회의 1952년 이전 이후 한국 선교 정책(이창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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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1952년에야 비로소 한국을 독립된 선교지로 정하고 아더 체스넛(Arthur B. Chesnut)을 필두로 교단 소속 선교사들을 보내기 시작했다. 그런데 왜 미 하나님의 성회는 그 이전에, 1930년 대와 1940년대에는 한국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왜, 1952년에야 한국에 선교사들을 보내기 시작했을까? 본 글은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한 것이며, 필자가 쓴,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선교사 아더 B. 체스넛에 포함된 부분을 발췌하고 확장하여 구성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에 대한 오순절적 선교의 역사는 주로 큰 흐름을 기술하는 것에 집중되어 왔다. 앞으로 그 역사는 보다 큰 구조적인 정황들, 즉 지정학적인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과 엮어서 서술되어야 할 것이다. 한국에 대한 오순절적 선교의 역사는 적어도 전 세계의 국가들 적어도 미국, 영국, 일본, 중국, 그리고 러시아 등의 국가들의 상황들과 그리고 그런 상황들을 반영했을 미 하나님의 성회 세계와 아시아 선교 정책과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본 글은 미약하나마 이런 방향의 연구들의 촉발점으로 공헌하기를 바란다.

 

II. 미 하나님의 성회가 일제시대 조선에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은 이유

 

    미 하나님의 성회 사역자 카드에 의하면 선교사 체스넛의 임지(assignment)1952619일에 일본에서 남한(South Korea)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일본 오순절 역사학자 스즈키에 의하면 체스넛(Arthur B. Chesnut)19521215일 정식으로 미국 하나님의성회 한국선교사단 의장(韓国宣教師団 議長)에 임명되었다. 체스넛은 오순절적인 첫 남성 그리고 미 하나님의 성회 파송 첫 공식 내한 선교사였다. 그가 첫 오순절적 내한 선교사는 아니었다. 체스넛 이전에, 즉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인 1930년대로부터 미국과 영국의 오순절적 선교사들이 내한했었다. 그런데 메리 C. 럼시(Mary C. Rumsey) 등 그들은 모두 여성 선교사들이었다. 체스넛은 태평양 전쟁이 종식된 후 1952년에 내한했던 첫 남성 오순절 선교사였다. 체스넛은 또한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 선교사였다. 체스넛 이전의 내한 오순절 선교사들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선교사들이 아니었다. 럼시가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공식 선교사신청서를 제출했지만, 거부되었었다. 체스넛이 미국 하나님의성회 소속 첫 오순절 내한 선교사가 되었다.

    미국 하나님의성회 소속 공식 선교사가 체스넛 이전 즉, 1952년 이전에 내한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체스넛의 개인적인 견해는 불순종론이었다. 체스넛이 내한한 후 대한기독교오순절교회의 집회에서 한 여인이 체스넛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오순절적 공식 선교사가 한국에 늦게 온 이유를 물었다. “나는 언제나 교회에 있었으나, 당신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체스넛은 그녀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계획론은 제외시켰다. 그에게 한국인들에게 그분의 말씀의 진리를 주는 것을 보류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당시 그는 그 질문에 확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몇 년 후 미국에 있는 몇 목사들을 만났다. 그들은 체스넛에게 한국에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었지만, 순종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체스넛에 의하면, 하나님은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성회 소속 사역자들에게 한국 선교의 소명을 주셨었으나, 그들은 불순종했고 그럼으로써 그 계획이 지체되었으나, 체스넛이 첫 번째로 순종함으로써 비로소 그 계획이 성취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체스넛에 이어 두 번째로 내한했던 미 하나님의성회 선교사 스테츠도 이 불순종론을 뒷받침하는 정보를 제공했다. 그에 따르면, 1942년부터 한국전쟁 사이에 몇 명의 미 하나님의성회 소속 젊은 사람들이 한국 선교 소명을 받았으나 불순종했었다.

    김익진은 불순종론에 더하여 두 가지 이유를 더했다. 그는 한국 전쟁 이전에는 오직 여성 선교사들만이 내한했던 이유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두 가지 이유(일제 억압설, 선교국 미준비설)를 구체적 자료제시 없이 추측했다. 김익진은 먼저 일제의 억압이 남성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는 것을 가로 막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반면에 일제는 여성들이 병자들이나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것에는 비교적 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고, 그래서 여성 선교사들은 그때 내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김익진의 이런 추측은 이미 다른 교단들에는 남성 선교사들이 내한했다는 것에 의해 쉽게 무너진다. 그가 추측하는 두 번째 이유는 선교국가들의 오순절 교회들이 세워진지 얼마되지 않아 훈련된 선교사들을 한국과 같은 머나먼 지역에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김익진의 두 번째 추측은 그렇듯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전쟁 전 멀지 않은 동해 건너 일본에는 미 하나님의성회가 존 주르겐센 등 공식 남성 선교사들을 보냈었기 때문이다. 미 하나님의성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기 보다는, 여력이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조선에 남성 선교사들을 파송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1947년부터 일본 선교사로 활동했던 마가렛 칼로우(Margaret E. Carlow)에 따르면, 일본에 파송된 미 하나님의성회 소속 공식 선교사 존 주르겐센은 한국에 대한 부담을 갖고 내한하기를 원했지만,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한국에 선교지로서 열 만한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 일본에 와있던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선교지를 확장하기를 원했지만, 미 하나님의성회가 재정적 뒷받침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단이나 선교국 차원에서 조선 선교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따라서 그것을 위한 재정도 책정하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자면, 개인적인 원인보다 더 중요한 구조적인 원인이 있었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전쟁 전에 조선을 일본의 한 지역으로 인식하였고, 따라서 조선을 일본과는 독립된 선교지로 인식하지 않았고, 일본과 동일한 선교지로 인식하고 계획하고 재정을 투입했기 때문에 교단 소속 공식 선교사들을 일본까지만 파송하고 조선에는 파송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추측은 미국 엘림선교회 소속 선교사 럼시가 미 하나님의성회 소속 공식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거부당했던 일에서 그 뒷받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럼시는 엘림 선교회 소속만으로는 한국 선교가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겪고 나서 미 하나님의 성회에 소속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미 하나님의 성회 입장에서는 일본의 통치를 받고 있던 한국에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의 당시 선교국장 도날드 기(Donald Gee)도 이런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교단에 보낸 보고서에서 일본과 한국은 정치적으로 연합되어 있고, 그래서 일본과 한국은 선교 사역을 위해 한 지역 선교지를 형성한다(Japan and Korea are united politically, and they make one logical Field for missionary work). 지금 클레멘트 군[영국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은 그런 선교지를 위한 우리의 선교 지부장(Field Superintendent for such a Field)으로서 손색이 없고, 나는 그런 조정은 아주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Donald Gee

 

또한 럼시에게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 선교사로 등록해 보라고 권고하고 미 하나님의 성회에 추천서를 써주었던 노르만 H. 바르트(Norman H. Barth)그 승인 문제를 당분간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던 것은 도날드 기와 동일한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럼시의 신청서를 거부한 미 하나님의 성회는 일본 지부장 노르만 H. 바르트를 영국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 존 클레멘트(John Clement)와 함께 조선을 방문하게 했고, 그들은 메레디트(Elsie H. Meredith)를 내한 오순절 여성 선교사들을 대표하여 기독교오순절교회의 제2대 포교관리자로 세우고, 박성산, 허홍, 배부근을 목사로 안수했다. 한국으로 선교지를 넓히겠다는 존 주르겐센의 계획을 승인하거나 재정을 투입하지 않았던 미 하나님의 성회는 일본 지부장 존 클레멘트가 조선을 방문하는 것에는 여비를 지급했다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미 하나님의성회는 일본 지부장 산하에 조선지방 관리자를 세우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래서 미 하나님의 성회는 전쟁 전에 공식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영국과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과 선교정책은 당시의 지정학적 국제 정치 상황이 민감하게 반영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조선의 왕 고종은 러시아 제국의 도움을 얻어 18962월 아관파천을 단행했다. 러시아 공사관에 망명한 고종은 친일 내각을 구성한 대신들을 숙청하고 일본에 대항할 힘을 갖추기 위해 중앙과 지방조직의 개편 등 내부 개혁을 추진하고 대신들을 유럽과 북미에 파견시켜 각국의 외교에 힘을 쏟았다. 특히 러시아 공사인 카를 베베르와 러시아 황제인 니콜라이 2세와 교류가 잦아지며 일본을 견제할 힘을 가진 러시아에 매력을 느끼고 국가를 변모시킬 것을 구상했다. 반면에, 러시아의 동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은 일본을 대리군으로 양성하기 위해 1903130일 런던에서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미국과 일본은 19057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TaftKatsura agreement)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했다. , 영국과 미국은 동남하하는 러시아를 막기 위해 친러적인 조선을 러시아에 대항하는 일본의 기지로 내어주었던 것이었다.

 

영일동맹서
테프트와 가쓰라

 

 

 

III. 미 하나님의 성회가 1952년부터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기 시작한 이유

 

    그런데 미 하나님의 성회가 1952년에 비로소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 명확하게 제시된 적이 거의 없었다. 이 이유는 뒷받침 할 수 있는 증거를 중심으로 보자면, 증거에 기반한 것과 순전히 추정적인 것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을 중심으로 보자면, 외적인 이유와 내적인 이유로 나누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외적 이유로는 미 하나님의 성회가 한국을 독립 선교지로 삼을 수 있는 구조적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며, 내적 이유로는 한국의 오순절 신자들의 생존을 도울 선교사가 절박하게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을 역사적 순서에 따라 세분화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2차 세계대전 종식과 함께 미군의 남한 진입으로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군목이 내한했다. 2)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한국이 독립적인 선교지가 될 수 있는 조건 형성되었다. 3) 일본 하나님의 성회 결성으로 일본 오순절교회가 재건되었고, 중국의 공산화로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 가용 역량이 높아져 한국을 독립된 선교지로 삼고 선교사들을 파송할 여력이 생겼다. 4) 6.25 전쟁 발발로 더 많은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군목들이 내한하게 되었다. 5) 전쟁 중 생존을 위한 오순절 교회와 신자들의 구호품 수령을 도울 선교사 절박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6) 엘로드 군목과 박성산 목사가 미 하나님의 성회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으며, 일본의 지인들에게도 요청했다. 7) 한국 전쟁 발발과 함께 미 하나님의 성외의 한국과 한국 오순절 신자들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미 하나님의 성회의 한국 선교 정책이 변화하기 시작했으며, 한국 선교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1941127일 일본 해군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했다. 공격 다음 날인 128일 오후 미국 의회가 일본에 선전포고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중립국으로 남아있던 미국이 참전하여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같은 날 미국보다 9시간 앞서 영국도 일본에 선전포고 했다. 이로써 영미국과 일본 사이의 밀월이 깨졌다. 그런데 19416월에 미국에 망명 중이던 65세 이승만은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라는 책을 출판했었다. 이승만은 이 책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실상을 낱낱이 고발하며 향후 장차 미국은 일본과 전쟁을 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예언했었다. 이 책이 나왔을 당시 미국인들과 서구인들은 일본의 가면 뒤에 숨겨진 흉계를 알지 못하고 이승만이 헛소리를 한다고 조롱했었다. 그러나 불과 6개월 후에 일본이 하와이의 진주만을 불시에 기습 공격하자 전 세계는 경악했고, 이 책은 순식간에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 전쟁이 종식되며  19458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의 한 지방이 되었던 조선이 해방되었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남한으로 미군 제24군단이 진주하고, 194598일에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이 설치되었다.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군목 엘로드는 1946년에 내한했다. 그때 그는 춘천에서 배부근 목사를 만나 성경 보급 등을 도왔다. 그는 1948815일에 미군정청이 폐쇄되고, 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을 떠났다.

 

 

 

 

미군에 의해 총독부의 일장기가 내려지고 성조기가 올라감으로 남한에 미군정이 시작되다.

 

 

    1948815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어 독립 국가가 탄생했다. 이는 독립된 선교지를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었다. 한편, 한국인 스스로 오순절 교회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195049일에 1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 대회가 열렸다. 그 명칭은 이미 일제시대인 1932년에 세워졌던 기독교 오순절교회라는 교단과의 명칭적 연속성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박성산과 허홍 등의 목회자들은 기독교 오순절교회소속 목회자들이었으므로 또한 구성원적 연속성을 띠고 있었다. 새로운 불연속성은 명칭상으로 대한이라는 문구가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2년 전인 1948815일에 대한민국이라는 건국되었으므로, 일본의 통치하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독립 국가 안에 있는 교단임을 강조하기 위해 국호에서 대한이라는 문구를 따와 기존 교단 명에 첨가했을 것이다. 변종호는 제1회 기독교 오순절교회 대회를 교단적 대회로 보지 않았다. 그는 그 대회에 대해 그저 연합부흥회 비슷하게 모였을 뿐 아직 교단 조직의 논의는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그의 평가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관점에서는 일면 정당성을 갖고 있겠지만, 기존 기독교 오순절교회라는 교단적 관점에서는 바르지 않았다. 그가 이 대회가 23회를 거쳐 4회까지 개최되었고, 이 대회가 바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기반이 되고 모체가 되었다고 평가한 것은 일면 바른 것이었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자면, 2회 대회까지는 기독교 오순절교회적 성격이 강했다면, 3회부터 체스넛 선교사가 참석하기 시작함으로써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적 성격이 생성되고 점점 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교단형성의 시도로써 195049일 제1기독교대한 오순절대회를 개최되었지만, 불과 2개월이 지나 6.25 전쟁이 터짐으로 교단 조직의 노력이 무산되었다. 이렇게 무산되지 않았다면, 한국인 스스로 오순절 교단을 법적으로도 재건했을 것이다.

 

대한기독교 오순절교회 제1회성회 장노취임세례 기념사진 1950년 4월 9일

 

 

    1945815일 일본이 항복하고 1948815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한국이 독립된 선교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는데도 왜 미 하나님의 성회는 곧바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당시 미 하나님의 성회는 한국을 새로운 독립된 선교지로 정하고 선교사를 파송할 여력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직후 존 스테츠(John Stetz)는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에 자기를 한국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두 번을 요청했다. 그러나 해외선교국장은 그의 요청을 묵살했다. 그 이유는 한국이라는 새로운 선교지를 열 수 있는 여력이 없다는 것이었다.

 

당신의 한국에 대한 관심은 참으로 인상적입니다. 하나님의 성회는 그곳에서 사역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45개의 다른 선교지들을 열려고 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일손이 너무도 부족하기 때문에 한국에 어떤 선교사든 보낼 여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새로운 선교지를 열라고 권할 수 없습니다.

 

    “45개의 다른 선교지에는 일본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태평양전쟁 종식 직후 미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국과 아시아 선교지부에는 일본 오순절 교회 재건이 최우선순위이었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선교사들이 대거 일본을 떠났었다. 전시 체제의 일본 정부는 종교단체를 통제할 목적으로 1939년 종교단체법(宗敎團體法)을 제정하고 공포했다. 교단의 설립을 위해서는 문부대신에게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3), 주무대신은 공익을 해할 만한 행위를 한 종교단체는 허가를 취소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17). 19406월 문부성은 종교단체법에 따라 교회수 50, 신도수 5,000명 이상이 못 되면 교단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가톨릭은 194153일 일본천주공교교단으로 설립인가를 받고, 개신교 각파는 19416월 일본기독교단(日本基督敎團)으로 합동하여 같은 해 1124일 인가받았다. 그리고 일본 오순절 교단이었던 일본성서교회도 일본기독교단에 합병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 하나님의 성회는 처음에는 선교사들의 일본 잔류를 택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사이가 더욱 나빠지자 미 하나님의 성회는 정책을 바꾸어 선교사들을 일본에서 소개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선교사들이 일본을 떠났다.

    19458월 전쟁의 종식과 함께 미군이 일본에 진주하고 군정이 시작되면서,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군목들이 일본에 들어갔고,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선교사들이 다시 일본에 들어가 수습하기 시작했다. 19491월 말에 미 하나님의 성회의 세계선교를 총괄하는 선교국장, 노엘 퍼킨(Noel Perkin)과 부총회장 게일 루이스(Gayle Lewis)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일본에 갔다. 퍼킨의 일본 직접 방문은 미 하나님의 성회가 일본 오순절 교회의 재건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를 잘 대변해 준다. 이때 체스넛은 그들의 운전수가 되어 주었고, 퍼킨과 안면을 텄다. 그들은 파괴된 일본 오순절 교회와 신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많은 기금이 필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만나 일본 오순절 교회와 신학교 재건을 위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미 하나님의 성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9493월에 일본인 목회자 20인과 체스넛을 포함한 7인의 선교사가 모여 일본 하나님의 성회를 결성하고 신학교를 재개교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본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을 설립함으로써 집중적으로 일본 선교를 재건한 미 하나님의 성회는 이제 다른 선교지로 눈을 돌릴 수 있는 여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마리 주르겐센(앞줄 왼쪽 끝)은 태평양 전쟁으로 미국으로 돌아갔다가 전쟁 후 다시 일본 선교사가 되었다. 1945년 8.15일 이후일본 AG 임원들과 함께.

 

일본을 직접 방문 했던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국장이었던 Noel Perkin

 

    그리고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1949101일에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을 건국함으로써 중국 선교가 어렵게 되었다. 19493월에 발간된 목회자들과 선교사들 명부에 따르면, 미 하나님의 성회는 중국(China)12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었다. 1950년에 미 하나님의 성회의 중국 사역은 약 네 명의 선교사들만 남을 정도로 축소되었다. 1953년에는 중국에 남아있는 선교사가 하나도 없게 되었다. 아시아에서 중국에 제일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었을 미 하나님의 성회의 인적 물질적 선교 가용 역량이 넉넉해졌을 것이다. 이렇게 1950년 즈음에야 미 하나님의 성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조건들이 갖추어졌던 것이다.

 

 

1949년 명부

 

1948년까지 중국에 파송된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들

 

 

 

1953년 명부

 

1953년 중국에 파송된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들

 

 

 

1958년

 

 

 

    19506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고, 미군이 참전하기 시작했다. 미 하나님의 성회 기관지 펜테코스탈 에반젤195124일 자의 한 기사에서 전쟁 중인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세 명의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군목들에 대해 썼다. 그 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군 군목으로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들은 열 명이었다. 그중에 세 명이 한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프랑크 R. 그랲과 더들리 Q. 보이드는 오산(烏山)-장호원(長湖院)-제천(堤川)-영월(寧越)-삼척(三陟)을 연결하는 전투 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존 R. 엘로드는 일본에서 가까운, 아마도 경상남도 어딘 가에 있었다. 군목 엘로드는 195011월에 다시 내한했다가 부산에 피난 온 배부근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는 허홍, 박성산 등도 만나 일 년 동안 함께 예배를 드리다가 19519월에 한국을 떠났다. 엘로드는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전쟁 중에 부산에서 만난 허홍에게 내가 미국에 도착하는 대로 곧 하나님의 성회를 한국에도 세우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그 약속을 이행했다.

 

 

 

전쟁 중 군목의 예배 인도

 

전쟁 중 군목의 예배 인도

 

John R. Elrod와 가족

 

창틀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위 사진과 같은 장소일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부산교회교인들로 추정되는 성도들과 엘로드 가족. 뒷줄 왼쪽에서 세번 째 허홍. 오른쪽 끝 인물은 박성산일 것이다. 아마도 이때 배부근은 대구에 있었던 것 같다.
엘로드 군목의 가족과 오순절 신자들의 식사

 

 

    한국 전쟁은 미 하나님의 성회가 한국을 지정학적으로 놓쳐서는 안되는 아주 중요한 지역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미 하나님의 성회 기관지 팬테코스탈 에반젤(Pentecostal Evangel)6.25 전쟁이 일어나고 불과 한 달 후인 1950722일자 사설(Editorial)에서 한국 문제를 다루었다. 그 사설에는 미 하나님의 성회의 한국 오순절 신자들에 대한 인식과 한국에 대한 인식 전환이 담겨있다. 그 사설에 의하면, 미 하나님의 성회는 한국 오순절 신자들을 독립적인 오순절 신자들”(independent Pentecostal believers)이라고 인식했다. 여기서 독립적인이란 단어는 미 하나님의 성회와 관련이 없는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 하나님의 성회는 1940년대에 일본 지부장 산하에 조선 지방을 관장하게 했던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또한 독립적인이라는 단어는 아무런 도움도 없이 외롭고 불쌍하게 고군분투하고 있는이라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을 것이다. , 단어는 한국 오순절 신자들에 대한 관심 표명이며, 그들을 도와야 한다는 동정심의 표출이었던 것이다.

    그 사설에서 미 하나님의 성회는 세계를 크게 민주 진영과 공산 진영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그 두 진영이 팽팽하게 대치하는 전쟁을 냉전으로 인식했다. “냉전”(冷戰, cold war, Холо́дная война)은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45년부터 소련의 붕괴가 일어나기 전인 1991년까지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양측 동맹국 사이에서 갈등, 긴장, 경쟁 상태가 이어진 대립 시기를 말한다. “냉전이라는 표현은 버나드 바루크가 1947312일에 트루먼 독트린에 관한 논쟁 중 이 말을 써서 유명해졌는데, 이것은 무기를 들고 싸운다는 의미의 전쟁인 열전”(熱戰, 영어: hot war)과는 반대 상황을 표현한다. 그런데 민주 진영과 공산 진영 사이의 열전이 한국에서 터진 것이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그 사설을 통해 한국을 민주 진영(the democratic front)의 최후의 보루(its last substantial foothold)”로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냈다. 미 하나님의 성회에게 한국 전쟁 문제는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세계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것으로 보았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두 진영이 맞부딪치고 있는 열전에서 남한이 무너진다면, 민주 진영의 그 마지막 보루를 잃게 될 것이라고 보았다. 기본적으로, 만약 한국(Korea)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승리한다면, 의심의 여지 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남한 사람들이 국가주의(nationalism)라는 죄목으로 총에 맞을 것이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만약 남한이 자유를 지키지 못한다면, 위험에 처한 모든 아시아와 유럽의 사람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자비를 구걸하며 앞다투어 도매금으로 넘기고 항복하려는 유혹을 받게 될 것이라며 우려를 표했다. 더하여 한국이 무너진다면, 공산주의자들(the Communists)은 맥아더 장군의 일본 사령부로부터 125마일 안에 공군과 잠수함 기지들을 만들 수 있게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미 하나님의 성회에게 당시 한국은 극동 아시아의 평화에 중요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미국 등 전 세계의 평화를 위해서도 극히 중요했던 것이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한국이 자유(freedom), 평등(equality), 그리고 정의(justice)에 기초한 세계 평화(world peace)를 세우는 데 있어서(establishing) 좋은 시험 사례(a good test case)”라는 노르웨이 정치인이며 1946년부터 1952까지 초대 유엔 사무총장(the first secretary-general of the United Nations)이었던 트뤼그베 리(Trygve Lie)의 말을 인용했다. 이러한 한국에 대한 인식은 동남하하는 러시아를 막기 위해 친러적인 조선을 러시아 육군에 대항하는 일본 육군의 기지로 내어주었던 영국과 미국의 한국에 대한 인식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것이었다.

 

 

 

 

Trygve Lie

 

 

    그 사설에서 미 하나님의 성회는 한국 전쟁 전까지 미국이 한국 등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의 확산에 거의 손을 놓고 있었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런 트루만 대통령이 이끌던 미국이 한국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완강하게 대항하기 시작했는데, 미 하나님의 성회는 무엇이 그에게 영향을 주어 그 정책으로 선회하게 했는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썼다. 예상과는 다르게 미국의 한국 전쟁에 대한 대응은 매우 신속하였다. UP통신의 확인 요청을 받고 국무부로 복귀한 러스크 차관보와 페이스 육군 장관은 6242230(한국시간 251230)에 무초 대사에게 북한군의 남한으로부터 전면 침공을 알리는 보고를 받았다. 보고를 받은 애치슨 국무장관은 개인 저택에서 휴식을 취하던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보고를 받은 트루먼 대통령은 워싱턴 D.C.로 돌아가는 비행기에서 북한의 공격은 2차 세계 대전을 유발했던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침략과 그 성격이 유사하다고 생각했다. 미영프와 소련은 독일이 라인란트 점령에서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 그리고 체코 병합까지 착착 진행하는 동안 별 조치를 취하지 않았었다. 또한 일본이 조선에서 만주, 그리고 중국본토(상하이시)까지 침략하는 동안에도 역시 별 대응을 하지 않았었다. 이에 트루먼은 공산주의의 침공과 도전에 강경하게 대응하지 않아서 당시에는 지킬 가치가 없다고 평가받던 한국이 그대로 적화통일이 된다면, 소련은 서방의 무대응을 보고 얕잡아 보고 위성국가를 지원해 더 큰 전쟁을 벌일 것이고, 결국 3차 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또다시 세계대전이라는 큰 희생을 치르기 전에 당장 지원군을 투입하여 북한과 소련의 야욕을 막아야 한다고 판단했다.

 

 

 

Harry S. Truman

 

    미 하나님의 성회는 공산주의 확산에 미온적인 정책의 전환을 이끌어 낸 요인 중에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를 포함시켰다. 한국의 공산주의의 침략에 대항한 미군의 개입은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는 것이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하나님께서 세계의 각 나라를 위한 그분의 계획을 세우고 계시지만, 그 계획은 그분의 백성들이 계속 기도할 때에만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인들 스스로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한국에서 공산주의를 몰아내고자 세우신 하나님의 계획이 그 응답으로서 실행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아가 미 하나님의 성회는 그 구성원들에게 공산주의를 물리쳐 달라는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기도에 동참하자고 호소했다. “공산주의가 그들의 아름다운 땅에서 쫓겨 나가기를 기도함으로써 한국의 평화를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과 합류하자!” 미 하나님의 성회에게 한국을 위한 기도는 동시에 미국 청년들을 위한 기도이기도 했다. “또한 [2차 세계대전 이후] 또다시 해외 전쟁터에서 피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우리의 미국 청년들을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비를 베푸셔서 그 전쟁을 속히 종식시키시기 위해 개입하시도록 기도하자!” 이렇게 미 하나님의 성회는 6.25 직후 한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 시작했지만, 기도 이외에 적극적인 정책의 변화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런데 6.25 두 달 후 한국에 대한 선교 정책변화를 예고하는 발언이 있었다. 미 하나님의 성회의 해외선교를 총괄 지휘하는 해외선교국장 노엘 퍼컨(Nel Perkin)1950830일부터 91일까지 열렸던 총회에서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의 결여에 주목하게 했다. 그에 따르면, 미 하나님의 성회는 당시에 48개 나라에 660명을 해외 선교사로 파송하고 있었다. 그런데 비록 한국에는 독립 사역자들(independent workers)에 의해 수행되고 있는 어떤 오순절 사역이 있어 왔지만, 우리의 관리를 받는 그 어떤 사역도 그곳에 없었다.” 퍼킨의 이 발언은 미 하나님의 성회의 한국에 대한 과거의 정책이 적극적으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방향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음을 시사한 것이었다.

 

 

 

 

  또한 한국 전쟁 발발부터 미 하나님의 성회 신자들에게 하나님으로부터 한국 선교로의 부르심이 본격적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남 캘리포니아 성경 대학(the Southern California Bible College)의 학생, 루이스 P. 리차드(Louis Peter Richards)1950625, 한국 전쟁 발발일에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한국 선교의 소명을 받았다. 또한 아더 B. 체스넛은 그 침략의 첫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일본, 도쿄에서 한 거리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그 후 한 한국인 형제가 일본의 목사들에게 한국인들이 음식과 옷을 얻는 것을 도와줄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에서 오는 구호품들이 선교사들과 그들이 소속해 있는 교단, 교회들을 통해 전달되었는데, 오순절교인들은 선교사가 없어서 구호품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체스넛은 한국 오순절교인들의 그런 필요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는 한국을 위한 기도 중에 확실하게 한국선교 소명을 받았다. 박성산은 미 하나님의 성회에 편지를 보내 그와 유사한 요청을 했다.

 

 

리차드 선교사

 

체스넛 선교사

 

부산항에 도착한 구호품들

 

 

IV. 나가는 말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기 이전에 영국과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조선을 일본제국의 식민지, 한 지방으로 인식했으며, 그에 따라 조선의 오순절 교회를 일본의 오순절 교회의 지방회 정도로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일본만 독립된 선교지로 삼았고, 조선은 일본 선교회의 지부 정도로 여기고 선교 정책을 수립했다. 따라서 일본 주재 선교사 대표가 조선 오순절 교회까지 관장했던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은 미 하나님의 성회로 하여금 한국을 독립된 선교지로 선정하고 선교사들을 파송할 조건을 갖추게 했다. 그러나 일본 오순절 교회 재건에 미 하나님의 성회의 아시아 선교적 역량을 집중하느라 한국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일본 오순절 교회가 재건되고, 중국 선교가 어렵게 되자 미 하나님의 성회의 선교 가용 역량이 높아졌을 것이다. 그러다가 해방 후 미 군정과 6.25 전쟁이 발발로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군목들이 한국에 입국하여 한국의 오순절신자들과 접촉을 시작했다. 당시 오순절신자들은 생존에 필요한 구호품을 수령하기 위해 선교사가 절실했고, 엘로드 군목과 박성산 목사의 미 하나님의 성회에 호소와 일본에 호소는 준비된 미 하나님의 성회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한국 선교 소명을 받은 체스넛을 필두로 선교사들을 파송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