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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오순절역사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선교사 아더 B. 체스넛

한오신 2024. 5. 8. 15:45

Arthur B. Chesnut:

The First Missionary from Assemblies of God of America to Korea

 

1952년 경의 체스넛

 

 

 

이창승

2024.5.8./2025.3.29.

 

 

미국하나님의성회첫공식내한선교사아더B체스넛(이창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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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오순절 내한 선교사 아더 B. 체스넛(Arthur Beryl Chesnut, 1915-2008)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발전에 공헌한 인물로 평가받아 왔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는 교단 창립 50주년을 맞아 초기 교단 창립과 발전에 기여하고 공헌한 희년 50인 인물과 희년 50교회를 선정했다. 이때 체스넛은 조용기, 메리 럼시(Mary C. Rumssy), 워너 마일스(Warner Miles)와 함께 교단발전공로자로 선정되었다. 체스넛은 한국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오순절적 교단이며,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협력으로 세워진 첫 번째 오순절적 교단 탄생의 산파였고, 초대 총리였으며, 한국에 첫 번째로 세워진 오순절적 신학교인 순복음신학교의 초대 교장이었다. 그리고 그는 첫 번째 한국 오순절적 사회복지 기관인 녹원영아원의 초대 이사장이기도 했다.

    이렇게 아더 B. 체스넛은 넓게는 한국 오순절 역사에서 보다 좁게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지만, 한국 오순절계에서 그에 대한 연구는 부분적인 것이었다. 체스넛은 변종호 등이 저술한 오순절 관련 서적이나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공식 역사서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어왔다. 그리고 김익진과 최재웅은 한국오순절역사를 다룬 각각의 박사학위청구논문에서 체스넛에 대한 자료들을 언급이 필요한 부분들에서 단편적으로 제시했다.

    체스넛의 생애 전반에 대한 언급은 체스넛 자신과 일본 오순절 역사신학자 스즈키 마사카즈(鈴木正和)에 의해 이루어졌다. 체스넛은 자신의 전기를 썼고, 그것은 1989년에 미국에서 출판되었다. 스즈키 마사카즈(鈴木正和)는 일본 오순절계 신학교인 중앙성서신학교(中央聖書学校)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水場 미스바 커뮤니티(コミュニティーチャーチ) 목사이다. 그는 2023년에 탄생으로부터 소천까지 체스넛의 생애를 간략하게 그려냈다. 그런데 스즈키의 연구에는 구체적인 자료들이 제시되어 있지 않다. 그는 체스넛의 자서전과 최재웅의 연구를 종합하고 자신의 연구를 더하여 그 글을 작성했다.

 

 

 

김익진 박사

 

스즈키 마사카즈 박사

 

쵀재웅 박사

 

 

    기존의 글이나 연구는 부분적으로 빈약한 부분들이 있어서 강화될 필요가 있고, 전반적인 체스넛의 생애가 한국에 소개될 필요가 있다. 스즈키의 연구의 한국선교부분은 일본선교부분에 비해 너무 빈약하다. 스즈키의 연구는 체스넛의 일본 선교와 관련된 인명이나 지명 등을 일본어로 표기했다는 점에 강점이 있다. 그러나 그의 연구는 체스넛의 한국 선교와 관련된 부분에서는 부정확하거나 너무 간략한 단점이 있다. 한국 오순절계를 위해서 그의 한국선교부분이 좀 더 강화될 필요가 있다. 또한 지금까지 한국에는 체스넛의 생애에 대한 전반적인 소개가 부재했었다.

    더하여 체스넛이 미 하나님의성회 파송 첫 공식 선교사,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설립 공로자, 초대 총리, 초대 순복음신학교교장이었다는 것에 대한 언급들은 있었지만, 그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가 운영한 최초의 사회복지 기관의 초대 이사장이었다는 것은 주목받지 못했다. 그래서 빈약한 부분의 보충과 전체적인 소개와 주목받지 못했던 점들에 대한 언급이 요구된다. 본 글은 그 요구에 부응하기를 시도한다.

 

 

II. 탄생과 성장 (1915~1942)

 

    아더 체스넛은 미국 서북부 워싱턴 주, 스캐짓 군, 세드로-울리(Sedro-Woolley, Skagit, Washington)의 근처 한 농장에서 아버지 알론조 체스넛(Alonzo Arthur Chesnut)과 어머니 해티(Hattie Chesnut) 슬하에서 191581일에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알론조 체스넛은 1887102에 인디아나 주, 그린 군, 리용스(Lyons, Greene County, Indiana)에서 태어났으며, 모친 해티 체스넛(Hattie Beryl Hall Chesnut)1884215일에 워싱턴, 스캐짓 군, 바우(Bow, Skagit County, Washington)에서 태어났다. 두 사람은 19111223에 스캐짓 군에서 결혼했다. 부친은 지붕에 쓰이는 나무 널판 가공사(shingle sawyer)였다. 아마도 부친은 일거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 스캐짓 군으로 왔다가 모친을 만난 것 같다. 원래 그의 부모는 비종교적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세드로 울리에서 열렸던 한 전도 집회에서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체스넛은 심장병을 고침받았다.

 

 

 

스캐짓 카운티

 

스캐짓 카운티의 세드로-울리, 바우, 마운트 버넌 등 체스넛과 관련된 마을
1911년 부모의 결혼기념사진

 

1915년 체스넛 가족 사진, 부친 무릎위의 아더 B. 체스넛

 

 

대공황 때인 1932년에 지역 고등학교를 졸업한 체스넛은 한 농장에서 잠시 일한 후 웨이어하우저 목재 회사(Weyerhauser Timber Company)에서 널판 가공사로 몇 년간 근무했다. 그런데 1936년 가을에 교통사고로 머리가 골절되고 뇌진탕과 기억상실을 겪었다.

 

Weyerhauser Timber Company

 

널판 가공사

 

    스캐짓 군의 군청이 있는 마운트 버넌(Mount Vernon)에서 살고 있던 체스넛은 1937221일에 21세의 나이로 제일복음루터교회(First Evangelical Luteran Church)에서 역시 마운트 버넌에서 살고 있던 엘비라(Elvira Cecelia Pearson)와 결혼했다. 엘비라는 1912년에 728일에 워싱턴 주, 스캐짓 군, 마운트 버넌(Mount Vernon, Skagit, Washington)에서 태어났다.

 

체스넛과 엘비라의 결혼증서

 

 

 

현재의 제일복음루터교회

 

 

 

    1940년 인구조사에 의하면, 자녀가 없는 주부 27세 엘비라와 널판 가공사 24세 아더 부부는 워싱턴 주, 카우리츠 군, 컬럼비아 하이츠(Columbia Heights, Cowlitz, Washington)에서 살고 있었다. 하이츠는 남쪽의 롱비유(Longview)와 맞닿아 있고, 롱비유에는 1931년부터 가동되기 시작한 세계에서 가장 큰 제재소인 웨이어하우저 목재회사 롱비유 공장이 있었다. 32시간 일하던 아더의 수입은 연 1800달러였다. 800달러나 1000달러 등을 받았던 다른 근로자들에 비해 높은 임금을 받은 것이었다. 또한 1940년에 미국 근로자의 평균 연수입은 1,368달러였으니, 체스넛의 수입은 미국인 근로자들의 평균 수입보다 더 높았다. 체스넛은 회사에서도 순조롭게 승진했는데, 노사문제 때문에 194111일에 일하던 목재회사가 문을 닫게 되었다.

 

 

 

 

 

 

 

2차세계대전으로 유럽 전선이 확대되던 중에 체스넛은 시애틀의 보잉사(Boeing Aircraft Company)에 취직했다.

 

 

Boeing Aircraft Company

 

그곳의 임금은 낮았고, 또 곧 징병될 수 있다는 불안이 엄습하면서 장래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아내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에서 일자리를 얻어 별거를 선택했다. 얼마 후 체스넛은 친구로부터 그의 아내가 이혼을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체스넛은 교통사고 후유증과 부부관계에 고민하며 해결의 길을 찾으며 태어나고 자란 루터교회에 다니지만, 그의 바람과는 달리 1942년에 5년 반의 결혼생활이 끝났다.

 

 

II. 오순절 경험과 선교준비 (1942~1947)

 

    체스넛은 영적 굶주림에 목말라 보잉사에서 일하면서 성경을 공부하고 싶어져 미국 하나님의성회 산하 노스웨스트 성경학교(Northwest Bible Institute)에 입학하여 학생 기숙사에서 지냈다. 그 학교는 1934101일에 시애틀, East 69th Street and 8th Ave. N. E.1927년부터 자리 잡고 있던 교회, 할리우드 템플(Hollywood Temple, 현재 Calvary Christian Assembly)의 시설을 사용하여 설립되었고, 1949년에 Northwest Bible College, 1962년에 Northwest College of the Assemblies of God, 2005년에 Northwest University로 명명되었다.

 

 

 

 

 

 

 

1940년대 노스웨스트성경학교

 

 

 

1940-1941 학생들

 

    체스넛은 성경학교 채플의 부흥을 통해 이전보다 더욱 하나님을 찾게 되었다. 그는 이 부흥회에서 방언을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고, 대신 자신을 하나님의 일에 헌신하겠다는 결단을 했다. 그는 그때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지만, 별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하나님께 불평하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은 그 축복을 받고 있는데, 나는 그렇지 못했다. 그런데 불평을 끝내기 전에 그분이 내게 원하시는 것을 위해 내 자신을 그분에게 드렸다.”

    그 후에도 그 축복을 받기를 포기하지 않은 체스넛은 드디어 시애틀 시내의 오순절 사역자 랄프 샌더(Ralph J. Sander, Sr.)의 교회, the Little Chapel에서 방언을 그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체험했다. 그는 그 성령침례 경험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리틀채플에서, 기도를 위해 앞으로 나오라는 초청에 응했다. 기도하기 위해 단의 끝부분으로 갔지만, 그곳에는 자리가 없었다. 그래서 다른 몇 사람들과 함께 서 있는 그 집회의 인도자 랄프 형제(Brother Ralph)가 있는 중앙 부분으로 곧장 갔다. 그에게 성령침례를 받고 싶은 데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었다. 지금 성령을 원하십니까? 그가 물었다. 내 대답은 확고했다. “.” 그러자 그는 그곳에 있던 사람들에게 눈짓을 했고, 그들은 모두 나와 함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전에 나빴던 심장 상태에서 고침을 받았을 때처럼 거의 즉시 하나님의 권능 아래 쓰러졌다. 기도하기 시작했고, 모든 다른 사람들 역시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방언으로 기도했다. 그때 내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Ralph J. Sander, Sr.의 아들 Ralph J. Sander, Jr.

 

    그때 오순절주의자가 된 체스넛에게 하나님으로부터 복음전도의 소명이 임했다. 그 소명은 하늘에 가득한 예수 이름들이 등장한 환상과 함께 일어났다. 그는 그 환상을 보면서 방언으로 세상에 예수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체스넛은 그 소명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하나님께서 내게 완벽하게 파란 하늘에 한 그림을 보여주기 시작하셨다. 자세히 볼수록, 그 하늘은 더 어두워졌다. 하늘에 빛들이 있었는데, 마치 큰 로고들과 같았다. 그 로고들의 어떤 것들은 큰 글자들로 이루어져 있었고, 어떤 것들은 작은 글자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모두 확실하게 읽을 만한 것들이었다. 그 글자들은 때때로 더 밝게 빛났지만, 완전히 꺼져버리지는 않았다. 내가 보는 곳마다 그 사인들은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오직 예수(JESUS)만을 볼 수 있었다. 이 모든 시간 동안 나는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말하고 있었다. 마치 세상에 그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방언을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으며 복음전도 소명을 받아 뜨거워진 체스넛은 신학공부를 다하고자 보잉사를 퇴직하고 성경학교 풀타임 학생이 되어 전도도 열심히 하게 되었다. 때가 되어 징병검사를 받았지만 부적합판정을 받았고, 더욱 전도에 힘쓰게 되었다. 성경학교 최종학년인 1946년 봄에 많은 학생들과 함께 미국 하나님의성회 북서지방회에 설교자 라이센스 신청을 했지만 허가받지 못했다. 체스넛이 그 이유를 문의했더니 대답은 단지 시기상조라고 했다. 그는 매우 실망했지만, 그의 헌신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체스넛은 신학공부를 계속하고 학사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주 코스타 메사의 서던캘리포니아성경대학(Southern California Bible College)에 편입했다. 서던캘리포니아성경대학은 1920년에 Southern California Bible School로 설립되었고, 1927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파사데나로 이전했다. 그리고 하나님의성회의 첫 4년제 교육기관인 Southern California Bible College가 되었고, 199971Vanguard 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가 되었다. 그때 체스넛은 약간의 희망을 가지고 2년 반 전에 이혼한 전처와 연락을 취하였는데, 그녀의 대답은 결코 목사의 아내가 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Southern California Bible School

 

 

 

서던캘리포니아성경대학

 

현재  방가드대학교

 

현재  방가드대학교

 

 

    그에게 서던캘리포니아성경대학에서의 배움과 교회에서의 봉사는 매우 충실한 것이었다. 성서대학에서의 배움을 마치고 서던캘리포니아지방회에 설교자 라이센스를 신청했고, 드디어 받았다. 그는 성경대학 졸업 후에 멕시코로 단기선교를 한 후 교도소 목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가 소속되었던 단체의 기금이 바닥나는 바람에 19471월 실직했다. 무직으로 로스앤젤레스에 남겨진 체스넛은 가족이 사는 워싱턴 주로 돌아갈지 고민했으나, 다행히 플라잉 타이거즈 항공(Flying Tiger’s Airline)에 일자리를 얻어 하와이의 호놀룰루로 갔다.

 

 

III. 일본 선교(1947~1952)

 

  체스넛은 하와이에 도착하자마자 항공사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하와이는 교원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관공서에 문의했고, 즉시 교원으로 채용되어 하와이에 온 지 3주 만에 오아후의 와이파후 고등학교(Waipahu High School)9학년 영어과 교사가 되었다.

 

 

 

체스넛은 호놀룰루 군인 YMCA에 거주했다. 1947년 여름에 하와이 대학(University of Hawaii)에서 공식 교원자격증을 획득하기 위해 낮에는 호주인 교수로부터 교육철학과 밤에는 일본어 등을 배웠다. 일본어에 관심을 가진 체스넛은 그 후에도 개인교사에게 일본어를 계속 배웠다. 그의 일본어 개인교사였던 여성은 체스넛의 사람됨을 보고 그에게 그녀의 형제가 운영하는 도쿄 학교의 영어 교사 자리를 추천했다. 그녀의 형제는 1927년에 설립된 도쿄 여자 경제 전문학교(東京女子経済専門学校, 현 신토베문화학원, 新渡戸文化学園) 교장인 모리모토 아츠요시(森本厚吉) 박사(존 홉킨스 대학 경제학 박사, 1877-1950)였다. 정식으로 모리모토 박사로부터 체스넛에게 도쿄에서 일본어 공부를 계속하면서 그의 학교에서 일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이 있었고, 몇 번의 모리모토 부부와의 통신을 통해 체스넛은 일본행을 결심했다. 그러나 일본행을 결정했지만, 워싱턴 주에 남긴 부모님의 일이나 일본까지의 도항비의 일도 있어 불안을 느꼈다. 그러나 기도 속에서 확신을 얻었다. 체스넛은 반년 후인 19489월 호놀룰루 출항 요코하마행 배를 예약하고 주간뿐만 아니라 야간 학교에서도 가르치고 게다가 도장업 아르바이트 등을 해서 도항비를 모았다.

    체스넛은 하와이에서 1947년에 개척 전도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미국 하나님의성회가 하와이에 첫 번째로 파송한 엘든 어빈 빈센트(Eldon Ervin Vincent, 1912-2005) 선교사 부부를 알게 되고, 그들 교회, 호노루루의 중앙교회(the Central church, 현재는 First Assembly of God)의 주일학교 교장으로서 그들의 일을 도왔다.

 

빈센트 선교사 가족

 

 

 

빈센트 목사의 도움으로 미국 하나님의성회 노엘 퍼킨(Noel Perkin) 해외선교부장에게 하와이 선교 상황과 그 자신의 일본 선교 희망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퍼킨으로부터 호의적인 답장을 받은 체스넛의 일본행이 더욱 확실해졌다.

 

노엘 퍼킨

 

노엘 퍼킨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해외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는 교단의 안수가 요구되는 것을 알고, 체스넛은 1948125일에 하와이의 교회에서 북캘리포니아-네바다 지방회(Northern California-Nevada District)로부터의 안수를 받고, 194823일에 미국 하나님의성회로부터 일본에서 학교 교원으로서 일하는 선교 교사”(a missionary teacher)로서 인정되었다. 선교 교사라는 표현의 방점은 선교보다는 교사에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공식 선교사는 아니었을 가능성이 있다.

 

 

 

근무하던 학교의 교장으로부터 1949년의 가을 학기부터 부교장이 되는 것을 제안받았지만, 거절했다. 그 후에도 일본으로의 비자 신청은 복잡했지만, 모든 것이 구비되어 체스넛은 비자를 취득할 수 있었다.

  194891일에 33세의 체스넛은 제너럴 고든호(USNS General Walter H. Gordon (T-AP-117))에 승선해 호놀룰루를 출항해 필리핀 제도를 거쳐 11월에 요코하마항(横浜港)에 입항했다.

 

 

 

요코하마항에서는 모리모토 아츠요시 박사와 미국 하나님의성회 일본 지부장이었던 제시 엥글러(Miss Jessie Wengler)의 영접을 받았다. 그리고 체스넛은 나카노구 모모조노쵸 26번지(中野区 桃園町 26番地)의 모리모토 부부(森本夫妻) 집에 기거하게 되었다. 침대와 의자만 있는 한 다락방에서 지냈다. 체스넛은 곧 일본여자경제전문학교의 교수로서 몇 가지 과목과 성경반을 가르치게 되는데, 점차 다른 학교의 성경반도 가르치게 되었다. 일본여자경제전문학교의 교훈은 “Veritas vos Liberabit, 真理は あなたがたを 自由にす,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였다.

 

모리모토

 

 

체스넛의 일본 거주지

 

제스넛이 근무했던 일본여자전문학교의 후신인 단기대학

 

 

    체스넛이 일본을 방문했을 당시의 미국 하나님의성회 일본 지부 선교단에는 마리 주르겐센(Marie Juergensen), 마가렛 칼로(Margaret Carlow), 플로시 바이어스(Flossie Byers), 3명의 여성 선교사밖에 없었으며,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는 사람은 체스넛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부인 선교사들의 운전기사로 도쿄를 누볐다. 그리고 19491월의 미국 하나님의성회 본부의 간부 2(노엘 퍼킨 해외선교부장과 게일 루이스 교단부총회장)의 일본 방문이 결정되면서 그 준비에 바빠졌다. 체스넛은 일본을 방문한 퍼킨 해외선교부장과 친분을 맺었고, 체스넛의 일하는 모습을 본 퍼킨은 그에게 자동차 구입비용을 약속했고, 체스넛은 곧 다른 교단 선교사가 필요하지 않게 된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었다. 이미 신소기독교회(神召キリスト教会)에서는 유미야마(弓山喜代馬)1931년에 세웠으나 태평양전쟁으로 1941년에 패쇄되었던 성령신학원(聖霊神学院)이 재개되어 있어 6명의 신학생이 배우고 있었는데, 체스넛은 거기서도 교편을 잡으며 간사와 회계를 담당했다. 그리고 체스넛은 1949315일, 16일에 신소교회에서 열렸던 일본 어셈블리 교단”(日本アッセンブリー教団, Assemblies of God Japan) 창립총회에 참가했다. 

 

1949년 3월 일본어셈블리교단 창립 기념사진, 왼쪽에서 세 번째 인물이 안경을 쓰지 않은 체스넛일 것이다.

 

중앙에 서있는 인물이 체스넛 같다.
1949년 3월 15일에 신소교회에서 열렸던 니혼 아세므브리즈 오브 가드 교가이 창립회의록에 등장한 체스넛(チエスナツト)이라는 이름

 

 

 

선교 교사”(missionary teacher)였던 그는 1950 4 1일에 미국 하나님의성회로 부터 공식 선교사로 승인받았다.

 

 

 

1951년도는 교단의 교직 검정 위원(教職検定委員), 결의 위원(決議委員), 연회 위원(年会委員), 1952년도는 결의 위원, 성회 위원(聖会委員), 재무 위원장(財務委員長)에 선출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1952 2 8일에 소속 지방회를 남 캘리포니아(South California)로 옮겼다.

 

 

  3월에 니혼 어셈블리즈 오브 가드 교단이 설립되어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존 클레멘트(John Clement)나 제시 엥글러에 의해 고마고메(駒込) 교단 본부 및 성서학교를 위한 토지가 마련되었다. 당시 도쿄는 건설 자재가 부족해 성경학교를 지을 자재를 쉽게 구할 수 없었다. 체스넛이 근무하던 일본여자경제전문학교가 옛 일본군 기지의 폐자재를 구입했고, 그것을 이용해 교사를 건설했지만, 미사용 자재가 있어 체스넛이 교섭해 그것을 무료로 양도받기도 했다. 그리고 일본여자경제전문학교의 교사의 건설을 도급받은 야자키 공무점(矢崎 工務店)이 성서학교의 교사의 건설도 도급했다. 이 일을 통해서 공무점의 야자키 유노스케(矢崎酉之介) 점장이 그리스도인이 되어 성령 체험(聖霊 体験)을 하게 되었다. 19504월 중앙성서학교(中央聖書學校, Central Bible Institute, 현재 中央聖書神學校, Central Bible College)가 개교되자 체스넛은 성경학교 서기와 회계직과 더불어 중앙성서학교 교원으로서 오순절의 진리”(ペンテコステの真理)를 매주 3일간 하루에 2~3시간의 강의했다.

 

 

 

 

 

 

 

  체스넛은 차를 몰고 19497월부터 8월까지 40일 동안 동해 길의 자동차 여행을 하면서 전도했고, 8월에는 2주 동안 교토, 오사카에서 전도했다. 10월 말에 이토 켄에이(伊藤顯榮) 신학생을 통역으로 삼고 하마마츠시(浜松市)의 공회당에서 10일간의 하마마츠 대전도회를 개최하자 도쿄에서 마리 주루겐센(Mari Jurgensen), 쿄토(京都)에서 우치무라 세이이치(内村誠一)가 응원하러 달려왔다. 19505월에는 통역으로서 이토 켄에이 신학생을 수반해 고베(神戸)의 어영(御影)에서 특별 전도 집회를 실시해, 여름에는 교토의 시치조 교회(七条教会)의 회당 건설 예정지에서 특별 천막 집회를 가져 우치무라 세이이치의 사역을 지원했다. 교토의 우치무라 세이치의 사역을 플로렌스 바이어스와 루스 플로이드도 지원했는데, 시치조 교회의 회당 건축을 위해 미국 뉴저지의 세일렘의 세일렘 오순절 교회에서 1000달러를 기부했다.

 

 

 

    체스넛은 알게 된 점령군의 고관에게 신주쿠역(新宿駅)에서 야외집회를 개최할 것을 청하자 바로 허가가 내려져 19509월에 한 달간 신주쿠 서쪽 출구 역전 광장에서 천막 전도집회를 마리 주르겐센과 함께 많은 크리스천 미군들과 신학생들의 지원을 받아 개최했다. 이 집회에서 삼백 수십 명의 결심자가 나왔고, 그 결과 두 교회가 세워졌다. 하나의 그룹은 야자키 공무점의 목수 오두막을 빌려 집회를 가졌고, 이것이 후에 코엔지 교회(高円寺教会)(현 신나카노그리스도교회, 新中野キリスト教会)가 되어 체스넛이 목회하게 되었다.

 

현재의 新中野그리스도教会

 

또 다른 그룹은 제스 페디고 부부의 집에서 집회를 시작했고, 이것이 나중에 가미타카 교회(上高田教会)가 되었다. 19525월에 가미타카다 교회가 헌당되었고, 헌당식 후에 체스넛은 마리 주르겐센과 함께 특별 전도 집회를 개최했다. 19528월에 체스넛은 나고야(名古屋)의 아마츠카교회(天塚教会)의 특별 전도회에도 나갔다. 그리고 195211월에는 코엔지교회가 헌당되었다. 체스넛은 이러한 사역 외에도 포켓 성경 리그의 사역도 하고 있었다.

    체스넛은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공식소식지 Pentecostal Evangel에 일본 선교보고를 3회 기고했다. 그것은 하마마츠(浜松) 리포트(1950121), 쿄토(京都) 리포트(19501022), 그리고 도쿄(東京) 리포트(195276)였다. 도쿄 리포트에는 1952년 부활절 고마고메(駒込)에서의 주일학교 성회 보고가 있으며, 이 성회에는 750명의 학생과 100명의 교사가 모였다. 땅에 볏짚돗자리를 깔고 하는 성회였다.

 

 

 

 

 

 

IV. 한국 선교 (1952~1955)

 

    체스넛은 19506월 한국전쟁의 발발을 도쿄에서 노방전도 중에 들었다. 1950년 여름 카루이자와(軽井沢)에서 선교사 총회와 집회가 열렸는데, 그 집회에는 한국에서 온 선교사들도 참가했다. 가루이자와정”(軽井沢町)은 일본 나가노현 기타사쿠군의 정이다. 그곳은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약 160km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최고 지점은 해발 2,568m이고, 최저 지점은 798.7m이다. 연평균 기온은 7.9°C로 홋카이도 수준으로 낮다. 고지에 있기 때문에 겨울 추위는 심하고 여름은 시원한 전형적인 고원형 피서지의 기후이다. 카루이자와는 스코틀랜드 출신 선교사 알렉산더 샤우(Alexander C. Shaw)1886년에 방문한 이래로 선교사들의 여름 집회지가 되었었다.

 

 

 

 

 

 

 

체스넛을 포함해 그 집회에 참석했던 선교사들의 관심은 한국에 집중되었다. 한 한국인 형제가 일본의 목사들에게 한국인들이 음식과 옷을 얻는 것을 도와줄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미국에서 오는 구호품들이 선교사와 교회들을 통해 전달되었는데, 오순절교인들은 선교사가 없어서 구호품을 받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소식을 들은 체스넛은 한국 오순절교인들의 그런 필요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즈음에 체스넛은 한국 미군에게 군목이 부족하다는 것을 관계자들로부터 직접 듣게 되었다. 그 이후 그는 미군 군목이 되어 한국에 가야한다는 막연하지만 거룩한 부담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정식으로 미군 군목에 지원하고 몇 번 면접을 보았다. 겨우 군목훈련학교에 갈 것을 명령받을 정도까지 되었는데, 그러나 마음에 평안은 없었다. 그리고 어떤 심리사에 의한 최종 면담 후 군목 지원이 거부되었다. 체스넛은 막연히 자기가 한국에 가서 하나님의 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군목이 되어 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고 인식하게 되었다.

    발발한 지 2년이 되자 전황은 38선에서 교착상태에 빠졌다. 당시 체스넛은 중앙성서학교의 일, 고엔지교회(高円寺教会)의 목회, 천막집회, 그 밖에 일본여자경제전문학교에서도 파트타임으로 가르치느라 하루하루 바빴다. 그러나 한국에 오순절 선교사 파견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리고 한국을 위한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그는 한국을 위한 기도 중에 확실하게 한국선교 소명을 받았다. 체스넛은 한국 선교의 소명을 받았을 때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언젠가 내 방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있을 때, 그분께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도와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고 있을 때 갑자기 그분이 내 등에 어떤 짐을 얹어놓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게 물으셨다. “네가 가면 되잖니?” 어떤 긴 논의나 주어진 약속도 없었다. 그저 단순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은 심지어 강의하고 있을 때조차도 온종일 떠올랐다. 왜 내가 가지 않아야 되고, 갈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들을 계속 댔지만, 그것들 중 아무 것도 그 명령적인 질문을 잠재우지 못했다.

 

    1946년에 내한하여 춘천에서 배부근을 만나 도왔던 종군 목사 엘로드(John R. Elrod, 1918-1992)는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전쟁 중에 만난 허홍에게 내가 미국에 도착하는 대로 곧 하나님의 성회를 한국에도 세우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엘로드는 1946년에 군목으로 내한했다가 1948년 돌아갔으나, 195011월에 다시 내한하여 19519월에 떠났다. 195124일 자 펜테코스탈 에반젤의 한 기사에 따르면 당시 존 R. 엘로드는 일본에서 가까운, 경상남도 어딘가에, 즉 부산에 있었다. 엘로드는 이때 허홍과 박성산 등을 만났고, 그들에게 그런 약속을 했고, 그 약속을 이행했다.

 

엘로드 군목 가족

 

1951년 4월, 5월경(엘로드 부인과 아들, 그리고 여학생은 반팔옷을 입었다) 박성산이 부산에 세웠던 교회로 추정되는 곳에서 엘로드 군목 가족과 허홍(뒷줄 왼쪽에서 세번째), 박성산 (뒷줄 왼쪽에서 여서번째)등 한국 오순절 지도자들과 교인들

 

 

    엘로드의 노력은 당시 미국 하나님의성회 극동지부장이었던 오스굳의 내한을 이끌어내었다하워드 오스굳(Howard Osgood)은 전쟁 전 중국에서 활동했었다. 그는 1952년 초엽에 한국을 방문했다. 30년사는 오스굳이 1952년 여름에 한국에 왔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오스굳은 한국을 방문한 후 1952429일에 홍콩에서 허홍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럼시는 195255일에 허홍에게 보낸 편지에서 지난번 편지에 부산에 가서 오스굳 목사(Rev. Howard. C. Osgood)를 만나려 한다고 쓰셨습니다. 그를 만났습니까?”라고 오스굳의 한국 방문에 대해 물었다. 럼시는 허홍이 자기에게 보낸 지난번 편지48일에 도착했다고 썼다. 오스굳은 여름이 아닌 48일 이전, 봄에 내한했던 것이다.

 

오스굳가족

 

퍼킨(왼쪽)과 오스굳(오른쪽), 1945년

 

1949년 중국 성도들과 함께 선 오스굿

 

그는 그 방문 때 한국 오순절 교역자들로부터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사 파견 요청을 받았다. 그는 이 요청을 오순절복음지에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나의 방문으로 용기를 얻었다. 그들은 내게 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오스굳은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것을 절절하게 호소했다.

 

한국 오순절의 앞날은 어둡습니다. 그러나 저는 오순절적으로 잘 교육을 받은 이 사람들을 등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찢긴 나라의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손이 우리의 양심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즉시 이런 한국에 들어가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오스굳은 홍콩으로 돌아가기 전에 일본에 들렀다가 체스넛의 일본 활동을 보고 미국 교단 본부에 체스넛의 한국 파견을 추천했다. 홍콩으로 돌아간 오스굳은 1952429일에 허홍에게 쓴 편지에서 일본에 선교하고 있던 체스넛이 한국선교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고 알렸다. 그 편지에 의하면, 체스넛은 오스굳에게서 한국 오순절 교역자들의 명단과 주소를 받았다.

 

체스넛(Chesnut) 형제가 한국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에게 여러분의 이름과 주소를 주었습니다. 그는 한국에 들어갈 방도를 찾고 있는 중입니다. 아시다시피, 지금 한국방문 허가를 받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문이 열리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가 먼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한 달 정도 방문하여 돌아볼 것 같습니다. 큰 문제는 거처들을 찾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필요와 그것을 어떻게 충족시켜야 할 줄을 잘 아십니다.

 

 

 

 

    오스굳으로부터 한국 오순절 교역자들의 명단과 주소를 입수하게 된 체스넛의 발길이 빨라졌다. 선교사 카드에 의하면 체스넛의 임지(assignment)1952619일에 일본에서 남한(South Korea)으로 바뀌었다.

 

 

그는 그날 체스넛은 도쿄의 점령군 본부로 가서 한국에 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문의했는데,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한국에 있던 사람 이외에는 비자를 발급받지 못한다는 말을 들었다. 그럼에도 체스넛은 비자 신청서를 제출했고, 처음에는 거부당했지만, 한 달 반 후에 비자가 발급되었다. 그러자 그는 바로 맡고 있던 모든 수업을 취소하고 이틀 뒤인 1952911일 부산행 비행기를 예약하고 하네다(羽田)에서 부산으로 향했다.

    비행기를 타고 일본을 떠난 체스넛은 부산공항에 도착했다. 체스넛의 한국 도착시기에 대해 세 가지 설이 존재한다. 30년사는 체스넛이 19521215일에 내한 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버터필드는 체스넛이 19528월에 부산에 들어왔다고 전했다. 체스넛의 한국 도착시기는 그도 참여했던 제3회 오순절성회의 개최시기에 의해 결정된다. 3회 오순절성회는 1952105일 즈음에 열렸다. 30년사는 1952년 대한기독교 오순절교회 제3회 성회 기념사진을 제시했는데, 그 사진에는 허홍과 박성산 사이에 체스넛이 등장했다. 그러므로 체스넛의 내한시기는 195210월 이전인 것이다. 따라서 버터필드가 주장한 8월 설과 스즈키가 주장한 9월 내한설이 남는다. 그런데 스즈키가 제시하는 비자발급, 경제대학 사임 등을 미루어 볼 때 911일 내한설이 제일 설득력이 있다.

 

공항에 도착한 체스넛

 

1952년 부산 수영비행장 (출처: 연합뉴스, 2017.7.22)

 

    체스넛의 한국행은 미국에서 허홍에게 보낸 메리 C. 럼시의 편지에서도 포착된다. 럼시는 1952618일에 허홍에게 보낸 편지에서 일본에 있던 그 형제가 한국의 선교사로 갔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바람을 표현했다. 그리고 럼시는 최초로 남성 선교사가 한국에 가게 되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며 기대했다. 또한 럼시는 730일에 허홍에게 보낸 편지에서 체스넛의 이름을 거론하고, 한국행을 자원한 체스넛이 한국에 도착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허씨에게, 당신의 편지가 도착했고, 당신이 쓴 모든 것으로 인해 기뻤습니다. 그리고 그 [체스넛] 형제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올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가 올 수 있다면, 한국에 남자 선교사가 있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스넛 형제가 원하는 대로 한국에 갔는지요? 그랬기를 바라고, 그가 여러분 모두에게 큰 도움과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체스넛이 한국에 입국하여 받은 첫 인상들은 세 가지, 한국이 전쟁 중이라는 것, 한국에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것, 그리고 많은 피난민과 쓰레기에 대한 것이었다.

 

부산 공항에 도착한 것은 아주 놀라운 경험이었다. 미공군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이 어디든 앉아 있었다. 방어 무기들이 그야말로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더 많으리라 예상해야만 했었다. 아는 사람도, 마중 나온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고 [오스굳에게] 받은 주소지로 갔다. 그렇게 쉬웠다. 일본에서 극심한 가난을 보았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맞닥뜨린 전시 상황들은 내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대규모의 피난민이 문제였고, 쓰레기나 오물도 무시 못 할 것이었다.

 

    체스넛은 박성산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조카였던 한 장로교 목사의 집에서 기거하기 시작했다. 체스넛은 먼저 각지에 흩어져 있던 오순절 교역자, 박성산, 허홍, 배부근, 박귀임, 그리고 곽봉조를 부산으로 불러 식사를 함께 하며 그들과의 친분을 돈독히 했다. 그들 중에 아무도 부산에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전보를 보내서 가능한 한 빨리 오라고 전했다. 그들은 모두 체스넛이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기 전인 이틀이나 사흘 이내에 도착했다.

    체스넛은 한국 오순절교회의 지도자들에게서 특히 박성산에게서 한국 오순절 교회에 대한 깊은 헌신과 애정을 보았다. 그는 박성산을 한국 오순절 신자들의 영적 아버지라고 평가했다.

 

[박성산] 형제는 다른 사람들이 간 후에도 남았다. 그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그는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편지를 보내서 한국 오순절 성도들의 필요를 알린 사람이었다. 그는 오순절 신자 집단들 대부분의 영적 아버지였다. 후에 나는 그가 남한의 남단 지역 교회들 가운데서 신앙을 지키도록 돕는 직무에 헌신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외진 곳에 있는 교회들을 찾아가기 위해 한 번에 며칠을 걷기도 했었다. 철길은 적 전투기들의 가장 중요한 표적이 되었었고, 대부분의 기관차나 차량들도 파괴되었었다. 그 사람은 그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메시지였었다. 그는 방문했었던 곳들의 문제들과 상황들에 대해 말할 때면, 자주 드러내놓고 울었다. 그는 광적인 북한군 때문에 자기 집을 떠나 피난해야만 했던 사람들을 돕기를 원했다. 그는 내게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100달러요, 그렇지만 미국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얼마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였다. . . . 이 소식은 박 형제에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실망들과 용감하게 맞서 싸워왔었고,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계속 꿋꿋하게 살아왔었다.

 

20대의 박성산

 

 

    체스넛은 곧 타 교단 선교사들이 오순절 선교사들이나 한국 오순절 신자들을 홀대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타 교단 선교사들은 오순절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오는 것을 가로 막아왔었고, 한국에 들어오는 구호품들도 오순절 신자들에게 전해주지도 않았었다. 체스넛은 기거하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살던 한 선교사와 접촉을 시도했지만 냉대를 받았다. 그리고 오순절 신자들은 다른 교회 교인들 중에서 아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그 구호품을 받을 수 있었다. 오순절 신자들은 많은 다른 한국인들처럼 큰 필요 가운데 있었고, 해외에서 구호품들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인정받은 기독교 교회들을 통해 분배되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들을 돌보고 구호품 수령을 도와 줄 선교사들이 필요했다. 결국 그들은 일본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 그들을 도와 줄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그들의 메시지는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체스넛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는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응했던 것이다.

    이런 홀대와 고난 속에서도 꿋꿋하게 하나님을 섬기고 있던 한국 오순절 신자들의 강인한 신앙을 체스넛은 높게 평가했다. 그는 기존의 오순절 교회들은 아주 강한 성격을 갖고 있었는데, 그 나라의 극심한 상황들이 그들의 신앙을 더 강하게 붙들도록 만들었다고 보았다. 그는 오순절 신자들이 교회에 앉아서 기도하기 위해 이른 아침 다섯 시에 눈을 헤치고 걷는 것을 보면서 그런 결연한 믿음을 높이 평가하기를 배웠다. 체스넛이 보기에 그 사랑스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법을 배웠었다. 피난민이 아닐 때에도, 시골집에 있을 때에도 그들은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었다. 체스넛은 그런 강인한 한국 오순절 신자들의 신앙을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믿음이라고 규정했다.

 

이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고 있던 믿음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것이다. 이것은 상황들 때문에 주님을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는 믿음이다.

 

    이렇게 한국 오순절 신자들의 신앙에 대해 지적인 감명을 받았던 체스넛은 급기야 그들에 대한 정서적 공감의 필요성을 자각하기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어느 주일 오후에 체스넛은 오순절 신자들에게 교회의 휴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환난의 때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간략하게 묘사했다. 그런데 얼마간 이야기했을 때, 한 여성이 물었다. “지금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것이 그 환난 아닌가요?” 그 난감한 질문에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체스넛은 빠르게 주제를 바꾸어야 했다. 집회가 끝나고 홀로 남아 깊은 생각에 빠졌던 체스넛은 한국 사람들에 대한 자기의 메시지가 마음의 공감이 없는 자기 지식 자랑에 불과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인의 상황을 자기의 마음이 공감하는 설교의 필요성을 자각했다.

 

내 영혼은 그들의 말과 행동이 내게 전달하는 것을 듣기 시작했다. 나는 그저 공감이 없는, 짐을 지지 않는 메시지를 설교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자기들의 상처를 공감해주고 자기들의 고통을 나누어 줄 누군가를 필요로 할 때, 나는 성경과 하나님의 계획에 대한 나의 지식을 자랑하고 있었다. 몇 시간 후, 사람들이 모두 갔다. 그대로 앉아 그날 밤에 일어났던 일을 생각했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하고 계셨다. 그들에게 단순히 옷과 먹거리를 가져다 줌으로써 또는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함을 설교함으로써 그들을 도울 수 없었다. 그것은 내가 육적으로 춥게 지내고 굶주려야만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내 마음이 그들의 정서를 공감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체스넛의 지적 감명에서 정서적 공감으로의 선교 자세의 이행은 오순절 순교자 박헌근의 추도식 참석에서 급속하게 깊어졌다. 체스넛은 1952927일에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봉산3리 마을 뒷산에서 열렸던 박헌근 순교 2주년 추도식에 참석했다. 박헌근이 묻힌 묘지는 거의 온종일 볕이 드는 탁 트인 산 중턱에 자리 잡고 있었다. 가볍고 밝은 햇볕이 무색하게 마음이 무거운 참석자들과 함께 묘지 옆에 서있던 체스넛은 이런 경우에 무슨 말을 해야 합니까?”라고 주님께 묻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그런 고난을 당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족들과 그 추도식에 참석한 사람들은 집, 수입, 가족 그리고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그들은 버려진 맥주 깡통, 마분지, 그리고 주울 수 있는모든 것으로 만든 작은 움막에서 살고 있었다. 그 사람들 사이에서 체스넛은 속에서 특권의식과 문화적 자부심, 낭만적 감정이 모두 사라지는 경험을 했다. 체스넛의 옛 속사람이 비워진 자리에, 다함 없는 공감을 추구하는 새로운 속사람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특권적 위치에서 느껴왔을 자부심, 다른 문화의 사람들 가운데 생소한 나라에서 한 외국인으로 있다는 것에서 오는 낭만적 감정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는 당시의 사람들을 보면서 금세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말해진 모든 것은 내 생각이나 계획의 결과가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 말이 참석한 사람들에게 어떤 위안과 격려가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1952년 부산 서구 보수천변에 자리 잡은 피란민 움막. [출처: 부산일보] https://www.busan.com/view/biz/view.php?code=2020062311073718545

 

1950년 부산 동구 성북고개에서 바라본 피란민 판잣집  [출처: 부산일보] https://www.busan.com/view/biz/view.php?code=2020062311073718545

 

 

    1952105일 경에 체스넛은 광주에서 열린 대한기독교 오순절교회 제3회 성회에 참가했다. 증기 기관차가 끄는 열차를 타고 광주에 도착한 체스넛은 조심스런 전략적인 설교를 했다. 그는 회중들을 고려하는 단계적 설교를 택했다. 체스넛은 그 회중들이 자기와 자기 설교에 대한 감수성이 강하다는 것을 알고 유연한 방식을 택한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방언으로 증거되는 성령침례를 설교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먼저 하나님의 공급하심이라는 보다 넓고 유연한 주제를 택했다. 왜냐하면, 그가 판단하기에 한국인들에게 방언을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 개념은 막연한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오직 두 사람만이 방언을 말함이라는 인정된 최초의 증거를 갖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뜨거워지는 것그리고 뛰어오르는 경험을 했었다. 이런 상황에서 체스넛은 보다 일반적인 주제로부터 서서히 방언을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 주제로 이행했다. 그리고 그는 그 이행을 하나님께 맡겼다.

 

3회성회 기념사진 두 번째 줄 허홍과 박성산 사이의 오른쪽에서 7번째의 체스넛

 

 

    그즈음에 부산의 다른 교단들의 어떤 기독교인들은 개교회에 참석하고 있는 것과는 별도로 집단들을 이루기 시작했다. 그들은 체스넛에게 오순절적인 신약 복음을 가르쳐달라고 요청했다. 오순절적 메시지에 대한 공격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궁금증을 일으켰고, 그것을 알고 싶은 욕구를 갖게 했다. 방언이 동반되는 성령침례에 대한 오순절적 경험(the Pentecostal experience)에 대해 몰랐던 사람들은 그것을 믿지 않는 사람은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체스넛에게 오순절 신앙에 대해 가르침을 요청했던 것이다.

   부산과 대구의 오순절 교회 설립을 지원하던 체스넛은 1952111일 도쿄로 가서 남은 짐을 싼 후 16일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체스넛은 한국에 있던 2년 반 동안, 일본에 네 번 다녀왔다. 각 여행은 휴식과 회복의 시간으로 계획되었었다. 휴가는 두 주에서 석 주 간이었지만, 체스넛은 결코 진정으로 전혀 한국 선교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한국을 위한 부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부담은 그 선교지에서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의무지를 벗어나면, 그는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을 한국의 상황과 관련시켰다. 체스넛은 자기가 소속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언제나 기쁨이 넘치는 것이었다고 회상했다.

 

 

Pentecostal Evangel의 1052년 11월 23일 호, 9쪽에 실린 체스넛과 한국오순절그리스도인들의 사진. 오른쪽 두 번째부터 체스넛, 허홍, 배부근, 박성산

 

 

    스즈키에 의하면 체스넛은 19521215일 정식으로 미국 하나님의성회 한국선교사단 의장(韓国宣教師団 議長)에 임명되었다. 체스넛은 오순절적인 첫 남성 그리고 미 하나님의 성회 파송 첫 공식 내한 선교사였다. 그가 첫 오순절적 내한 선교사는 아니었다. 체스넛 이전에, 즉 태평양 전쟁 발발 이전인 1930년대로부터 미국과 영국의 오순절적 선교사들이 내한했었다. 그런데 메리 C. 럼시(Mary C. Rumsey) 등 그들은 모두 여성 선교사들이었다. 체스넛은 태평양 전쟁이 종식된 후 1952년에 내한했던 첫 남성 오순절 선교사였다. 체스넛은 또한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 선교사였다. 체스넛 이전의 내한 오순절 선교사들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선교사들이 아니었다. 럼시가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공식 선교사신청서를 제출했지만, 거부되었었다. 체스넛이 미국 하나님의성회 소속 첫 오순절 내한 선교사가 되었다.

    미국 하나님의성회 소속 공식 선교사가 체스넛 이전 즉, 1952년 이전에 내한하지 않았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 질문에 대한 체스넛의 개인적인 견해는 불순종론이었다. 체스넛이 내한한 후 대한기독교오순절교회의 집회에서 한 여인이 체스넛에게 질문했다. 그녀는 오순절적 공식 선교사가 한국에 늦게 온 이유를 물었다. “나는 언제나 교회에 있었으나, 당신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체스넛은 그녀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계획론은 제외시켰다. 그에게 한국인들에게 그분의 말씀의 진리를 주는 것을 보류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당시 그는 그 질문에 확신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 그는 몇 년 후 미국에 있는 몇 목사들을 만났다. 그들은 체스넛에게 한국에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었지만, 순종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체스넛에 의하면, 하나님은 계획에 따라 하나님의성회 소속 사역자들에게 한국 선교의 소명을 주셨었으나, 그들은 불순종했고 그럼으로써 그 계획이 지체되었으나, 체스넛이 첫 번째로 순종함으로써 비로소 그 계획이 성취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체스넛에 이어 두 번째로 내한했던 미 하나님의성회 선교사 스테츠도 이 불순종론을 뒷받침하는 정보를 제공했다. 그에 따르면, 1942년부터 한국전쟁 사이에 몇 명의 미 하나님의성회 소속 젊은 사람들이 한국 선교 소명을 받았으나 불순종했었다.

    김익진은 불순종론에 더하여 두 가지 이유를 더했다. 그는 한국 전쟁 이전에는 오직 여성 선교사들만이 내한했던 이유를 확실히 알 수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그는 두 가지 이유(일제 억압설, 선교국 미준비설)를 구체적 자료제시 없이 추측했다. 김익진은 먼저 일제의 억압이 남성 선교사들이 한국에 오는 것을 가로 막았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반면에 일제는 여성들이 병자들이나 아이들에게 접근하는 것에는 비교적 덜 관심을 기울였을 것이고, 그래서 여성 선교사들은 그때 내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김익진의 이런 추측은 이미 다른 교단들에는 남성 선교사들이 내한했다는 것에 의해 쉽게 무너진다. 그가 추측하는 두 번째 이유는 선교국가들의 오순절 교회들이 세워진지 얼마되지 않아 훈련된 선교사들을 한국과 같은 머나먼 지역에 보낼 준비가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김익진의 두 번째 추측은 그렇듯하지 않은 것 같다. 왜냐하면, 전쟁 전 멀지 않은 동해 건너 일본에는 미 하나님의성회가 존 주르겐센 등 공식 남성 선교사들을 보냈었기 때문이다. 미 하나님의성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보낼만한 준비가 되지 않았다기 보다는, 여력이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조선에 남성 선교사들을 파송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더 높았을 것이다. 1947년부터 일본 선교사로 활동했던 마가렛 칼로우(Margaret E. Carlow)에 따르면, 일본에 파송된 미 하나님의성회 소속 공식 선교사 존 주르겐센은 한국에 대한 부담을 갖고 내한하기를 원했지만, 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한국에 선교지로서 열 만한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했다. , 일본에 와있던 선교사들이 조선으로 선교지를 확장하기를 원했지만, 미 하나님의성회가 재정적 뒷받침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교단이나 선교국 차원에서 조선 선교 계획을 세우지 않았고, 따라서 그것을 위한 재정도 책정하지 않았었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초점을 맞추자면, 개인적인 원인보다 더 중요한 구조적인 원인이 있었다. 미 하나님의성회는 전쟁 전에 조선을 일본의 한 지역으로 인식하였고, 따라서 조선을 일본과는 독립된 선교지로 인식하지 않았고, 일본과 동일한 선교지로 인식하고 계획하고 재정을 투입했기 때문에 교단 소속 공식 선교사들을 일본까지만 파송하고 조선에는 파송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추측은 미국 엘림선교회 소속 선교사 럼시가 미 하나님의성회 소속 공식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거부당했던 일에서 그 뒷받침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럼시는 엘림 선교회 소속만으로는 한국 선교가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겪고 나서 미 하나님의 성회에 소속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런데 미 하나님의 성회 입장에서는 일본의 통치를 받고 있던 한국에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의 당시 선교국장 도날드 기도 이런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교단에 보낸 보고서에서 일본과 한국은 정치적으로 연합되어 있고, 그래서 일본과 한국은 선교 사역을 위해 한 지역 선교지를 형성한다(Japan and Korea are united politically, and they make one logical Field for missionary work). 지금 클레멘트 군[영국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은 그런 선교지를 위한 우리의 선교 지부장(Field Superintendent for such a Field)으로서 손색이 없고, 나는 그런 조정은 아주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또한 럼시에게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 선교사로 등록해 보라고 권고하고 미 하나님의 성회에 추천서를 써주었던 노르만 H. 바르트(Norman H. Barth)그 승인 문제를 당분간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던 것은 도날드 기와 동일한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럼시의 신청서를 거부한 미 하나님의성회는 일본 지부장 노르만 H. 바르트를 영국 하나님의성회 일본 지부장 존 클레멘트(John Clement)와 함께 조선을 방문하게 했고, 그들은 메레디트 (Elsie H. Meredith)를 내한 오순절 여성 선교사들을 대표하여 기독교오순절교회의 제2대 포교관리자로 세우고, 박성산, 허홍, 배부근을 목사로 안수했다. 한국으로 선교지를 넓히겠다는 존 주르겐센의 계획을 승인하거나 재정을 투입하지 않았던 미 하나님의성회는 일본 지부장 존 클레멘트가 조선을 방문하는 것에는 여비를 지급했다는 것이다. 종합하자면, 미 하나님의성회는 일본 지부장 산하에 조선지방 관리자를 세우는 정책을 폈던 것이다. 그래서 미 하나님의성회는 전쟁 전에 공식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영국과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들의 조선에 대한 인식과 선교정책은 당시의 지정학적 국제 정치 상황이 민감하게 반영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러시아의 동남진을 저지하기 위해 영국은 일본을 대리군으로 양성하기 위해 1903130일 런던에서 영일동맹을 체결했다. 그리고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했다. 미국과 일본은 1905729일 가쓰라-태프트 밀약(密約)(TaftKatsura agreement)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과 일본 제국의 대한제국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승인했다. 영국과 미국의 하나님의 성회는 삼국간의 지정학적 국제 정치 상황을 적극 반영하여 선교정책을 수립한 것 같다. 이런 양국 하나님의 성회들의 양태는 당시 조선을 독립적인 선교지로 선정하고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었던 장로교, 감리교 등의 다른 교단들의 양태와는 다른 것이었다.

 

태프트와 가쓰라

 

 

 

    그런데 미 하나님의 성회가 1952년에 비로소 한국에 선교사를 보내기 시작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지금까지 명확하게 제시된 적이 거의 없었다. 이 이유는 뒷받침 할 수 있는 증거를 중심으로 보자면, 증거에 기반한 것과 순전히 추정적인 것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을 중심으로 보자면, 외적인 이유와 내적인 이유로 나누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외적 이유로는 미 하나님의 성회가 한국을 독립 선교지로 삼을 수 있는 구조적 변화가 발생했다는 것이며, 내적 이유로는 한국의 오순절 신자들의 생존을 도울 선교사가 절박하게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요인을 역사적 순서에 따라 세분화한다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1) 2차 세계대전 종식과 함께 미군의 남한 진입으로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군목이 내한했다. 2) 대한민국 정부 수립으로 한국이 독립적인 선교지가 될 수 있는 조건 형성되었다. 3) 일본 하나님의 성회 결성으로 일본 오순절교회가 재건되었고, 중국의 공산화로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 가용 역량이 높아져 한국을 독립된 선교지로 삼고 선교사들을 파송할 여력이 생겼다. 4) 6.25 전쟁 발발로 더 많은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군목들이 내한하게 되었다. 5) 전쟁 중 생존을 위한 오순절 교회와 신자들의 구호품 수령을 도울 선교사 절박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6) 엘로드 군목과 박성산 목사가 미 하나님의 성회에 선교사 파송을 요청했으며, 일본의 지인들에게도 요청했다. 7) 미국 오순절신자들의 한국 선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일본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공격함으로써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다. 이로써 미국과 일본 사이의 밀월이 깨졌다. 그리고 19458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일본의 한 지방이 되었던 조선이 해방되었다.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남한으로 미군 제24군단이 진주하고, 194598일에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이 설치되었다.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군목 엘로드는 1946년에 군목으로 내한했다. 그때 그는 춘천에서 배부근 목사를 만나 성경 보급 등을 도왔다. 그는 1948815일에 미군정청이 폐쇄되고, 미군이 철수하면서 한국을 떠났다.

    1948815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어 독립 국가가 탄생했다. 이는 독립된 선교지를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추어진 것이었다. 한편, 한국인 스스로 오순절 교회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일어났다. 195049일에 1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 대회가 열렸다. 그 명칭은 이미 일제시대인 1932년에 세워졌던 기독교 오순절교회라는 교단과의 명칭적 연속성을 띠고 있었다. 그리고 박성산과 허홍 등의 목회자들은 기독교 오순절교회소속 목회자들이었으므로 또한 구성원적 연속성을 띠고 있었다. 새로운 불연속성은 명칭상으로 대한이라는 문구가 첨가되었다는 것이다. 2년 전인 1948815일에 대한민국이라는 건국되었으므로, 일본의 통치하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독립 국가 안에 있는 교단임을 강조하기 위해 국호에서 대한이라는 문구를 따와 기존 교단 명에 첨가했을 것이다. 변종호는 제1회 기독교 오순절교회 대회를 교단적 대회로 보지 않았다. 그는 그 대회에 대해 그저 연합부흥회 비슷하게 모였을 뿐 아직 교단 조직의 논의는 없었다라고 평가했다. 그의 평가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관점에서는 일면 정당성을 갖고 있겠지만, 기존 기독교 오순절교회라는 교단적 관점에서는 바르지 않았다. 그가 이 대회가 23회를 거쳐 4회까지 개최되었고, 이 대회가 바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기반이 되고 모체가 되었다고 평가한 것은 일면 바른 것이었다. 물론 엄밀하게 따지자면, 2회 대회까지는 기독교 오순절교회적 성격이 강했다면, 3회부터 체스넛 선교사가 참석하기 시작함으로써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적 성격이 생성되고 점점 강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교단형성의 시도로써 195049일 제1기독교대한 오순절대회를 개최되었지만, 불과 2개월이 지나 6.25 전쟁이 터짐으로 교단 조직의 노력이 무산되었다. 이렇게 무산되지 않았다면, 한국인 스스로 오순절 교단을 법적으로도 재건했을 것이다.

    1945815일 일본이 항복하고 1948815일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됨으로써 한국이 독립된 선교지가 될 수 있는 조건이 형성되었는데도 왜 미 하나님의 성회는 곧바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태평양전쟁 종식 직후 미 하나님의 성회와 아시아 선교지부에는 일본 오순절 교회 재건이 우선순위이었을 것이다. 태평양 전쟁 발발과 함께 선교사들이 대거 일본을 떠났었다. 전시 체제의 일본 정부는 종교단체를 통제할 목적으로 1939년 종교단체법(宗敎團體法)을 제정하고 공포했다. 교단의 설립을 위해서는 문부대신에게 허가를 받아야 했으며(3), 주무대신은 공익을 해할 만한 행위를 한 종교단체는 허가를 취소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17). 19406월 문부성은 종교단체법에 따라 교회수 50, 신도수 5,000명 이상이 못 되면 교단으로 인정할 수 없다고 성명을 발표했다. 가톨릭은 194153일 일본천주공교교단으로 설립인가를 받고, 개신교 각파는 19416월 일본기독교단(日本基督敎團)으로 합동하여 같은 해 1124일 인가받았다. 그리고 일본 오순절 교단이었던 일본성서교회도 일본기독교단에 합병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 하나님의 성회는 처음에는 선교사들의 일본 잔류를 택했다. 그러나 두 나라의 사이가 더욱 나빠지자 미 하나님의 성회는 정책을 바꾸어 선교사들을 일본에서 소개시키기 시작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선교사들이 일본을 떠났다.

    19458월 전쟁의 종식과 함께 미군이 일본에 진주하고 군정이 시작되면서,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군목들이 일본에 들어갔고,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선교사들이 다시 일본에 들어가 수습하기 시작했다. 19491월 말에 미 하나님의 성회의 세계선교를 총괄하는 선교국장, 노엘 퍼킨(Noel Perkin)과 부총회장 게일 루이스(Gayle Lewis)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직접 일본에 갔다. 이때 체스넛은 그들의 운전수가 되어 주었고, 퍼킨과 안면을 텄다. 그들은 파괴된 일본 오순절 교회와 신학교를 재건하기 위해 많은 기금이 필요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사들을 만나 일본 오순절 교회와 신학교 재건을 위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했다. 미 하나님의 성회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19493월에 일본인 목회자 20인과 체스넛을 포함한 7인의 선교사가 모여 일본 하나님의 성회를 결성하고 신학교를 재개교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본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을 설립함으로써 집중적으로 일본 선교를 재건한 미 하나님의 성회는 이제 다른 선교지로 눈을 돌릴 수 있는 여력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국공 내전에서 승리한 공산당이 1949101일에 중화인민공화국(中华人民共和国)을 건국함으로써 중국 선교가 어렵게 되었다. 19493월에 발간된 목회자들과 선교사들 명부에 따르면, 미 하나님의 성회는 중국(China)120여 명의 선교사를 파송했었다. 그 수는 1951년에는 약 30여 명으로 거의 4분의 1로 급감했으며, 1952년에는 20여 명이 되었다. 아시아에서 중국에 제일 많은 선교사들을 파송했었을 미 하나님의 성회의 인적 물질적 선교 가용 역량이 넉넉해졌을 것이다. 이렇게 1950년 즈음에야 미 하나님의 성회가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는 조건들이 갖추어졌던 것이다.

    1950625일 북한군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고, 미군이 참전하기 시작했다. 미 하나님의 성회 기관지 펜테코스탈 에반젤195124일 자의 한 기사에서 전쟁 중인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세 명의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군목들에 대해 썼다. 그 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군 군목으로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들은 열 명이었다. 그중에 세 명이 한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프랑크 R. 그랲과 더들리 Q. 보이드는 오산(烏山)-장호원(長湖院)-제천(堤川)-영월(寧越)-삼척(三陟)을 연결하는 전투 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존 R. 엘로드는 일본에서 가까운, 아마도 경상남도 어딘 가에 있었다. 군목 엘로드는 195011월에 다시 내한했다가 부산에 피난 온 배부근을 다시 만났다. 그리고 그는 허홍, 박성산 등도 만나 일 년 동안 함께 예배를 드리다가 19519월에 한국을 떠났다. 엘로드는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전쟁 중에 부산에서 만난 허홍에게 내가 미국에 도착하는 대로 곧 하나님의 성회를 한국에도 세우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그 약속을 이행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 등 해외에서 구호품들이 한국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 구호품들은 선교사가 있는 교단을 통해 배포되었다. 오순절 신자들은 많은 다른 한국인들처럼 큰 필요 가운데 있었고, 해외에서 구호품들이 들어오고 있었지만, 인정받은 기독교 교회들을 통해 분배되었던 것이다. 오랫동안 한국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들을 돌보고 구호품 수령을 도와 줄 선교사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박성산은 미 하나님의 성회에 보내서 한국 오순절 성도들의 필요를 알렸다. 그리고 오순절 신자들은 일본에도 편지를 보냈다. 그들의 메시지는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었던 체스넛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그리고 그는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비록 체스넛이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한국 선교사가 되었지만, 그의 이름은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목회자들과 선교사 명단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가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195111일에 발간된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는 체스넛이 교단에서 안수받은 목회자로서 26 Momosono Cho Nakano Ku-Tokyo Japan(26 桃園町 中野九 東京)에 주소지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정작 일본주재 선교사 명단에서는 제외되었었다. 그런데 한국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던 195331일에 발간된 미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와 선교사 명부에서도 체스넛은 여전히 교단에서 안수받은 목회자로서 26 Momosono Cho Nakano Ku-Tokyo Japan에 주소지를 두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 개인적인 사역 카드에는 일본과 한국 선교사로 기록되었지만, 공식적인 선교사 명부에서는 누락된 것이다.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 명부에 독립된 선교지로서 한국(Korea)과 파송 선교사 이름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9541월의 일이었다. 그때 한국 선교사로 명부에 오른 사람들은 스테츠 부부(John and Edith Stetz)였다. 체스넛은 19551월에서야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는 목회자 명부에 올랐다. 그렇지만, 여전히 선교지는 드러나지 않았다.

    체스넛은 19531월 부산에서 서울로 옮겨 허홍의 집에 기거하기 시작했다. 형제들은 체스넛이 서울로 이사하는 것이 좋겠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허홍은 서울 용산구 한강로 165번지에 목조 2층 건물을 소유하고 있었다. 1층에는 허홍의 가족이 사는 방과 7-8평 정도의 예배실이 있었다. 그 집은 폭격에도 불구하고 그리 손상되지 않았었다. 허홍은 그 집에서 그의 아내와 두 딸들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북쪽에서 온 다른 두 사람도 함께 살고 있었다. 허홍은 체스넛에게, 기거하려면 조금 손을 본 필요가 있지만, 그의 집의 이층에서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이 제안은 체스넛에게 솔깃한 것이었고, 합의가 이루어졌다.

 

허홍

 

현 전쟁기념관 부근의 한강로 1가 65

 

체스넛이 머물던 허홍의 건물 2층

 

 

Pentecostal Evangel, (1952.11.23), 9.

 

    체스넛은 19531월에 오순절 복음지에 한국을 소개하고 한국에 대한 원조, 특히 교회 건물 마련을 위한 원조를 촉구하는 글을 게재했다.

 

한국은 우리에게 진정한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 . . 우리에게는 정말로 교회 건물이 필요하다. . . . 한국에서는 몇 명이 예배드렸습니까?”라고 묻지 않는다. 그보다는 예배당이 성도들을 다 수용할 수 있나요?”라고 묻는다. 진정 추수할 때가 되었다. 수도였던 서울은 동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들 중 하나였다. 중심가들에는 높고 당당한 건물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극소수의 건물들만 서 있고, 그마저도 전쟁으로 심각하게 파손되어있다. 값이 비싸지 않을 때 그곳에 건물을 구입하여 이 수도의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데 사용하는 것이 현명할 것이다.

 

 

 

 

 

 

    허홍은 자신의 집에 전에 서빙고교회 성도들이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것은 남부교회의 시작이었다. 허홍의 집 2층에 머물고 있던 체스넛이 그를 도왔다. 허홍이 육체적으로 매우 허약해서 혼자 사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서울의 남부교회가 설립된 지 약 여섯 달 지났을 때, 몇 교인들이 물침례받기를 요청했다. 허홍은 얼마간 그들을 목회해 왔었지만, 그의 목회 직무의 이 예식은 수행하지 못했었다. 그는 체스넛에게 그를 위해 침례식을 집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왜냐하면 그는 물속에 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매우 허약했고, 그래서 이 사역을 혼자 시도하기를 주저했다. 체스넛은 이런 직무가 수행되지 못했던 것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한 돕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한 주일 아침에 체스넛과 허홍은 교인 전체를 데리고 침례식을 위해 한강에 갔다. 몇 사람이 물속에 잠김으로써 주님의 명령을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체스넛은 그 시간을 축복의 시간으로 회상했고,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시키는 기쁨은 충만한 평안과 수행감을 주었다.

    체스넛이 서울로 올라오면서 박성산이 개척한 작은 교회가 부산에 남겨졌다. 1952년 11월 27일에 창립된 부산교회는 그 도시에서 첫 번째 하나님의성회 교회였다. 부산교회는 당시 가로 2.5 미터, 세로 5 미터의 작은 방에서 예배를 드렸다. 배부근이 그런 일을 대구에서 시작했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그들의 지역으로 가라고 권고받았다. 배부근과 체스넛은 대구 임시 피난민촌 안에 있는 한 오래된 창고를 빌렸다. 배부근은 그 창고를 청소하고 어느 정도 수리한 다음, 거기서 대구교회를 개척했다. 그 방의 가로는 3.7 미터, 세로는 7.4 미터였다. 그 교회는 꾸준히 성장하여, 예배 때는 방이 꽉 찼었다. 그 주일학교학생들은 200여명으로 성장했다.

    체스넛은 UN과 미 하나님의 성회에서 오는 구호품 조달을 포함하여 그 교회들의 목회자들을 조금 도울 수 있었다. 그런 도움은 그들의 가족부양의 짐을 덜어주었고, 그들에게 목회를 위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그는 한국에 들어 온 즉시 의복과 음식 형태의 구호품을 기부받기 위해 미군 우체국에 등록을 해 놓았었다. 그리고 미 하나님의 성회는 워싱턴 주, 타코마(Tacoma, Washington)동양 원조 에이전시”(Oriental Relief Agency)를 설치했고, 그곳에서 체스넛의 요청에 따라 한국의 유아들에게 필요한 분유를 배로 보내기도 했다. 그리고 체스넛은 여러 필수적인 구호품들과 함께 고아들에게 먹일 귀리와 보리 등의 먹거리들도 요청하기도 했다.

 

 

체스넛 자서전 부록에 실린 부산교회 교인들 사진

 

 

대구 피난민촌

 

 

    체스넛은 한 선교사가 선교현장에서 현지인들을 바라보아야 할 근본적인 시각에 대해 고민하며 기도했다. 그는 한 나라는 그 구성원들의 육체적 집합 이상이라고 생각했다. 체스넛에게 한 나라는 단순히 육체들의 집합이 아니라, “영원을 위해 운명 지워진 영혼들의 집합이었다. 이런 정의는 그에게 부담을 주었다. 한 선교사로서 그는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떤 지식도 없이 그 영원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피를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가?”라고 질문했다. 그런 부담스런 질문 앞에서 그는 주님, 사람들을 사람의 눈으로 보지 않게 하시고, 오직 당신의 눈으로 보게 하옵소서. 언제나 그들을 진리를 찾으며 영원에 매여있는 영혼들로 보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이 너무 늦기 전에 그 진리를 알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체스넛은 한 선교사로서 현지인을 영혼으로 바라보아야 할 시각을 갖추기를 기도한 것이다.

    체스넛이 거하고 있던 곳에 세워진 서울 남부교회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임시 본부가 되었다. 흩어져 있던 교역자들은 약속된 때에 함께 예배하고, 방문하고,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 서울에 모이기로 했다. 그들은 오랫동안 혼자 있었기 때문에 서울 본부의 안정성은 그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지원 아래 새로운 전국적인 오순절 교단의 설립을 원하는 오순절 교역자들은 체스넛의 조력을 구하러 그에게 모였다. 마침내 남부교회는 일제시대의 기독교오순절교회의 명맥을 잇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창립회의 장소가 되었다. 195348일에 체스넛은 허홍, 박성산, 윤성덕, 배부근, 곽봉조, 박귀임 등과 남부교회에 모여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창립에 관한 건을 토의할 목적으로 첫 회의를 개최했다.

 

1953년 4월 8일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창립기념사진, 뒷줄 오른쪽 끝의 체스넛

 

 

    체스넛은 한국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오순절 교단, 그러면서도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첫 공식적인 지원을 받으며 설립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창립의 산파였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는 한국의 첫 오순절 교단은 아니었다. 첫 한국의 오순절 교단은 1932년에 글레이디스 M. 파슨스(Gladys Margaret Parsons)가 포교관리자로 설립허가를 받은 기독교 오순절교회(基督敎 五旬節敎會)였다. 그로부터 20년 후인 1953년에 설립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는 두 번째 한국 오순절 교단이었다. 그렇지만 기독교대한 하나님성회는 미국 하나님의성회와 공식적으로 연결되어 탄생한 첫 한국 오순절 교단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갖는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창립회의에서 체스넛은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체스넛은 그 첫 회의에서 미리 준비한 헌장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 헌장은 통과되었고, 그 헌장에 따라 총리가 선출되었는데, 그 총리는 체스넛이었다. 그는 그 전국 조직의 총리가 되는 것을 의도하지 않았었다. 그는 외국인 선교사였고, 더구나 한국어를 말하지도 못했다. 체스넛은 외국인 선교사가 선교지의 국가적 그리스도인들의 조직의 관리자가 되는 것에 부정적이었다. 그는 현지인이 그런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투표 결과는 체스넛의 뜻과는 다르게 나왔고 그가 총리가 되었다. 그는 자기가 총리가 된 것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외국인 선교사가 국가적 그리스도인을 관리하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현지인의 지도력 향상을 위한 길이 아니라고 배웠었다. 그 가르침은 참된 것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가 지명투표에 의해 한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것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나는 투표를 하지 않았는데, 내가 누구에게 투표를 했는지 곧 밝혀질 것이고 그러면 편애를 보이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투표지들에는 내 이름만 써있었다. 그것은 건강한 징조는 아니었고,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였다.

 

 

 

 

    1953510일에는 2년제 순복음신학교가 남부교회에서 개교되었고 체스넛이 초대교장이 되었다. 순복음신학교는 한국에 세워진 첫 번째 오순절신학을 토대로 세워진 교육과 훈련기관이었다. 비록 20년 전인 1930년대로부터 여성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오순절 신앙을 전파하고, 교회들을 개척하여 오순절적 교단을 세웠었지만, 그들은 신학교를 세우지는 않았었다. 그 선교사들이나 다른 사람들이 그 이유에 대해 언급한 적이 전혀 없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미국 하나님의 성회나 영국 하나님의 성회가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이기 때문에 조선인 사역자들은 일본에 세워진 신학교에서 교육시키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유아기의 교단에 필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이었고, 그 희망은 순복음신학교 설립으로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체스넛은 교과과정을 짜고 가능성 있는 교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그는 도쿄에 있는 성경학교인 성령신학원을 기획해 본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가르치는 일에 적합하고 서로 간에 이의가 없는 교원들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그는 유아기 조직의 교원들은 한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시작하자마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획이 마무리되고, 학교 개교가 알려졌다. 6개월의 특별과정에 장로교 집사로 섬기다가 한국기독교성서신학교를 졸업하고 그리스도교에서 목회했으나 은사중지론을 포함한 성령론에 만족하지 못했던 김상호, 그리고 정찬성, 최요열 등 타교단 교역자 열여덟 명이 오순절신학을 배우고자 등록했다.

 

 

 체스넛은 그 학생들 모두에게 음식을 무상으로 제공하고, 모두를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그 수도 벅찼다. 종종 모두를 위해 충분한 음식을 마련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 학생들에게 소량의 쌀과 다른 것들을 섞어 불린 우유와 버터를 먹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교실에 들어간 체스넛은 학생들 절반가량이 아픈 것을 발견했다. 그는 학생들에게 물어본 후 그들이 먹은 음식 때문에 아프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소식은 무상급식에 대한 체스넛의 의욕을 꺾어버렸다. 더군다나 그들의 가족들도 모두 식중독에 걸렸다.

    해결책은 매주 체스넛이 이끌었던 성경공부에 참석하고 있던 미군들 중 하나에게서 나왔다. 그는 미군 우체국에서 폐 우편물을 수거해 보라고 제안했다. 잡지나 신문 같은 배달할 수 없고, 반송 불가능한 우편물 다발이 매일 생겼는데, 당시에 종이는 시장성이 좋았다. 미군 우체국 주임은 그 폐기물들을 치워준다니 기뻐했다. 체스넛의 1950년식 연녹색 Flymouth station wagon 차가 그 일에 아주 적합했다

 

 

체스넛이 일본에서 구입하여 한국에 들여온 연녹색의 1950년식 Flymouth station wagon와 같은 종류의 차

 

 

체스넛은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 잡지와 신문 더미를 수거했다. 그리고 그 폐지를 팔아 그 학생들에게 필요한 쌀과 반찬들을 살 충분한 돈을 마련했다. 이 일은 여러 달 지속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선교단체의 한 선교사가 우연히 미군 우체국 안쪽 방에 있다가 체스넛이 하고 있던 것을 보았다. 그는 곧 그 전말을 파악했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 그 주임은 체스넛을 불러서 그 폐지를 다른 선교단체에게도 나누어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을 지역 고물상에게 팔아넘기는 계약을 해버렸다. 그 축복은 끝났다. 그 일 후, 아무도 그 폐지를 받지 못했다. 주님께서는 가장 필요할 때 그것을 체스넛에게 주셨던 것이다. 그 일이 종료된 후, 체스넛은 음식 공급을 위한 다른 협약을 맺을 수 있었다.

    순복음신학교 첫 1학기 말에 체스넛은 캐나다인 하비 맥알리스터(Harvey McAlister, 1892-1978)를 한국으로 초청하여 7월에 선교대회를 개최했다. 맥알리스터는 전 세계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던 전도자였고, 일본 여러 지역에서 열린 집회들에서 체스넛의 팀과 동역하기도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맥알리스터의 마음에 사역을 위해 잠시라도 한국에 가야한다는 부담을 주셨다. 체스넛과 주고 받은 몇 통의 편지는 그가 한국에 오는 길을 열었고, 서울에서 사역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맥알리스터

 

 

    그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방언을 그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라는 오순절적 경험을 하게 되었다. 오전에 열린 첫 집회는 그 지역 설교자들만을 위해 계획되었다. 십오 명이 참석했다. 맥알리스터는 성령침례에 관해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그리고 참석자들에게 이 영적 은사를 받는 증거로 성경이 가르치는 것 이외에 어떤 것이든 수용하는 것을 경계하게 했다. 그리고 체스넛과 맥알리스터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틈에 참석자들은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주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오순절적 믿음으로 이미 이 경험을 했었던 두 목사는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 압도되었다. 그 집회들이 끝난 후 이 남자와 여자들은 자기들의 곳으로 돌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오순절적 메시지를 전했다.

    극동 지부장(The Field Secretary of the Far East) 메이나드 케참(Maynard L. Ketcham)은 당시의 순복음신학교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시기에 그 학교는 세련된기관과는 거리가 멀었다. 남한은 여전히 격렬한 전쟁의 타격으로 휘청거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시대 상황이 반영되었다. 건물이 파괴되고 경제가 침체되었으며 통신이 끊겼다. 사방이 무질서하고 가난했다. . . . 학교 건물은 임시 벽들로만 구성되었다. 학생들은 구호 식량으로 생활하고 임시 교실에서 공부했지만, 그 학교에는 긍정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억센 자립심, 영적 열정, 오순절이 한국의 모든 필요에 대한 해결책이라는 확고한 신념.

 

    1953년 가을에 체스넛은 서울 서대문에 황폐한 건물이 서 있는 1300제곱미터 부지의 물건을 취득하고, 이를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본부 및 성경학교로 사용했다.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국은 체스넛에게 한국 하나님의성회 사역을 위한 영구적 본부로 기능할 땅과 건물을 찾아보라고 재촉했다. 체스넛은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지만, 땅과 건물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매우 적기도 했지만, 아무도 팔려고 하지 않았다. 그 지역에 땅 소유주는 매우 적었다. 그는 많은 사람과 함께 몇 주 동안 말해보았고, 그 결과 서대문구 충정로 121번지 땅 한 조각을 발견했다. 그 땅은 현재의 4.19혁명기념도서관과 강북삼성병원 연구동이 있는 부분이다.

 

 

그 땅에는 부분적으로 불탄 골조 건물 하나가 있었다. 그것의 상태는 그런 건물을 위한 자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었다. 체스넛과 그런 구조물을 교회(서부교회)와 사무실 공간으로 재건하기에 충분한 물자를 마련했다. 이 자산이 그 교단의 전반적인 가동을 위한 본부가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부지구입과 건축을 위한 비용의 종자돈은 괌섬(Guam)에서 마련된 것이었다. 괌섬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 군속들과 현지인들로 추정되는 오순절 신자들이 괌의 복음화를 위한 센터가 될 교회건물을 짓기를 원했다. 그리고 선교사를 초청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 건물을 위해 기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런데 미 하나님의성회 선교국은 괌에 그런 계획을 실행하는 것이 시기상조라고 판단했다. 미 하나님의성회 선교국은 괌의 성도들에게 괌대신 한국의 서울에 한국 오순절 교단을 위한 센터로서 교회를 짓는데 그 기금을 사용하면 좋겠다는 제안을 했다. 괌의 성도들은 그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그들이 모은 701.55달러에 다른 기금이 더해져 총 1,500달러가 체스넛에게 송금되었다.

 

 

    체스넛은 그즈음에 서울에 온 이래로 머물러 왔던 집에서 이사 나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요청을 처음 받았을 때는 그는 조금 놀랐었다. 그러나 곧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세군이 소유하고 있던 (아마도 종로구 평동 76, 현 강북삼성병원 외래동 쪽) 이층 벽돌 건물이 그에게 제공되었다. 그 건물은 컸고, 새로운 교단 사무실과 가까운 속에 있어 위치가 좋았고 살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이곳에서의 새로운 생활은 체스넛의 교역자들과의 관계를 개선시켰다. 체스넛은 교역자들이 그가 허홍의 집에서 사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꼈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했었다. 체스넛이 허홍의 집에서 이사 나오자 체스넛에게로의 접근이 자유로워진 다른 교역자들과의 관계가 더욱 원만해졌다. 체스넛은 그때 사람들의 집단과 일해야만 할 때, 그들 중의 단 한 사람과 가까이 지내며 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교단 사무실이 마련되자 타교단 소속 목회자들의 방문도 이어졌다. 하루는 체스넛이 몇 교단 교역자들과 함께 그 사무실에 있을 때 한 낯선 사람이 방문했다. 그는 어떻게 그의 교인들에게 사도행전을 가르치기 시작했는지를 설명했다. 그런데 그가 2장에 도달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붙잡혔다. 그는 그 새 선교”(new mission) 사무실로 가야한다고 그리고 그곳 사람들에게 그의 교인들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는 체스넛 앞에 앉아서 이렇게 질문했다. “오셔서 이 오순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체스넛은 그런 요청을 자기에게 엄청난 기회라고 생각했다. 다음 주일 아침에, 체스넛과 통역자 유문회는 수원의 한 마을로 갔다. 한 작은 이층 방에는 약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체스넛과 유문회는 딱 설교가 시작되는 때에 그 교회에 도착했다. 주의 영이 임하셨고, 주의력은 최고도에 달했었다. 그 오후 집회는 두 시에 시작되었지만, 사람들은 한 시간 전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었다. 때때로 그들의 기도 소리는 통곡 같았다. 체스넛은 그 소리는 영혼의 산고 또는 성령 안에서 신음이었다고 생각했다. 체스넛은 기도 받기를 원하는 병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말했지만, 그 사람들은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기도가 필요한 사람은 옆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여전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체스넛은 그들은 모두 병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축복, 방언을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기 위해 기도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다. 기도를 시작하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체스넛은 그 꽉 찬 사람들 사이를 기어가야 하다시피 다니며 안수하며 한 시간 이상 기도했다. 끝났을 때, 체스넛은 지쳐버렸지만, 성령님을 높여드렸다.

    집회가 끝났을 때, 한 자매가 손에 천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자기 딸이 9년 동안이나 자리에 누운 채 집에 있었다고 말했다. 열아홉 살인 그 딸은 서서히 일어나는 마비 증상에 시달렸다. 그 어머니는 사도들이 천 위에 기도하고 병자들에게 얹었더니 그들이 나았다고 들었었다. 체스넛은 난생처음 그런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그 이전에 해 보지 않았던 정도로 믿음으로 강하게 되기 위해 주님을 바라보아야 했다. 체스넛은 기도한 후 그 여인에게 그 기도 천을 그녀의 딸에게 가져가서 딸 위에 얹고 기도하라고, 기억할 수 있는 한 그가 했던 기도를 반복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녀에게 만약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하면, 딸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예배 후, 잠시 휴식한 후 저녁 집회를 위해 돌아가고 있을 때, 그 여인이 그 교회 건물로 걸어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녀의 딸도 함께 오고 있었다. 그 딸은 조금 어색했지만, 자신의 발로 걷고 있었다. 체스넛은 집회를 4일 더 열었고, 그 소녀가 매 예배마다 스스로 쉽게 걸어서 참석하는 것을 보았다.

    어느 날 체스넛은 한 연인들로부터 결혼식 주례를 부탁받았다. 그들은 남부교회 교인들이었고, 평판이 좋았다. 체스넛은 그들을 신성한 결혼으로 결합시키는 특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그들이 체스넛에게 예식을 한국어로 진행해 주기를 요청한 것이었다. 난처하게도 체스넛은 한국어 환경 안에 있었을 뿐 한국어를 전혀 말하지 못했다. 해결책이 필요했는데 그것을 통역자 유문회가 제시했다. 그 해결책은 1차적으로 결혼 예식에서 체스넛이 해야 할 한국어를 체스넛이 읽거나 외울 수 있도록 영어 철자로 표기하는 것이었다. 그 한국어의 영어철자 표기는 그 결혼식 3일 전에 최종 완성되었다. 체스넛은 적어준 것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는 그 예식을 잘 인도하고 싶었고, 또한 그 예식에 참석할 목회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싶었다. 드디어 그 결혼식 날이 되었다. 그는 적어준 것을 외우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단어들을 결합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읽어내려가는 것이 그리 나쁠 것 같지 않았다. 체스넛은 그 종이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놓으며 그 영광스런 행사를 준비했다.

    그 예식이 시작되고, 그 신랑과 신부가 체스넛 앞에 섰다. 그는 그 종이에 적힌 것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체스넛 앞에 있었다. 체스넛은 준비된 종이의 한 페이지도 넘기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아무 문제 없이 그저 흐르듯 그 예식 전체를 이끌어 갔다. 마지막 기도 전까지 모든 것이 한국어로 마쳐졌다. 마지막 기도는 영어로 할 수 있도록 합의되었었다. 그래서 그 기도만큼은 더 자유스러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마지막 기도는 체스넛에게 유일하게 어려웠던 순서였다. 자기의 마음을 담아야 했고, 스스로 기도해야만 했다. 체스넛은 그 놀라운 현상을 성령께서 그 예식 전체를 주관하셨고, 나는 그 영어 기도 직전까지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한국어] 방언으로 말했었던 것이다라고 해석했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라는 새로운 교단을 결성한 오순절 교역자들은 대규모 성회를 계획했다. 체스넛은 그 성회 장소를 순천이라고 기억했지만, 사실 그 장소는 전라남도 광주였다. 체스넛이 그 장소를 묘사한 것과 30년사를 종합해 보면 그 장소가 순천이 아닌 광주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체스넛은 그곳은 남부 지역의 가장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라고 기억했다. 그런데 순천은 남한의 중심이 아닌 거의 남단에 위치해 있다. 남한의 중심이라면 순천보다는 광주에 해당된다. 그리고 30년사에 의하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결성 6개월 후 열렸던 성회는 1953107일부터 광주에서 열린 제4회 성회였다.

 

1953년 10월 10일 제4회 광주성회 기념사진

 

 

    체스넛과 지도부는 광주 성회를 위해 큰 군용 천막을 빌렸다. 체스넛에 의하면, 오백 명 이상이 모였다. 그곳에서 제2차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총회가 열렸고 체스넛은 총리에 재선되었으며, 그 성회의 주 강사로 봉사했다. 참석 교역자들은 19531010일이 기록된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 성회의 말미인 19531012일에 무등산록 광주천에서 침례식이 계획되었다. 그런데 참석자들 중 거의 절반이 침례받기를 원했다. 그 규모는 체스넛을 놀라게 했다. 그 침례식은 건기 동안에 수행되어서 강에 물이 많지 않았다. 아무도 그 침례식을 충족시킬 좋은 장소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체스넛과 성도들은 그저 강바닥을 향해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곳에 잠길 만큼 충분한 물이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모였다.

 

1953년 10월 12일에 거행된 광주천 침례식

 

    이때 체스넛은 침례식을 거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런데 체스넛은 선교사는 가능한 한 현지 목사가 침례식을 수행하도록 해야 한다고 훈련을 받았었다. 그래서 그는 한국인 목사들이 스스로 침례식을 감당하도록 격려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박성산도 충분히 건강하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목사들은 침례식을 감당하고자 했지만, 체스넛에게 어떻게 행해야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그제야 체스넛은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침례식을 기다려 왔었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체스넛은 목사들에게 침례식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곽봉조가 동의하지 않았다. 체스넛은 상황을 가까스로 수습했고, 곧 목사 둘에 의해 침례식이 거행되었다. 체스넛은 후에 침례가 자기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강경하게 주장했던 곽봉조가 오직 예수”(Jesus Only)으로 침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운동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체스넛 은 곽봉조에게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보여주려고 노력했고, 그의 가르침이 그를 잠시 붙잡아 놓은 듯 했지만, 몇 년 후 그는 그 이전의 가르침으로 돌아갔다.

    19543월에 체스넛은 미국 오순절복음에 부산과 대구의 오순절교회 건축을 위한 원조를 요청하는 글을 실었다. 체스넛은 새로운 교회 건축 문제를 살피기 위해 대구와 부산에 내려갔었다. 그는 담당 공무원들과 상의했고, 그들은 교회 건축을 위한 자재를 무상으로 제공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건축을 위한 인건비는 교회가 부담해야 했다. 예상 인건비는 약 2,500달러였다. 그 문제를 해결하여 그 좋은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체스넛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성도들에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공사는 군인들이 맡았고, 체스넛은 2주일에 4일씩 부산과 대구에 내려가 교회 건축공사를 감독했다.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다. 모든 노력이 국가 재건에 집중되었다. 자선적, 공적, 사회적 또는 종교적 돌봄을 위한 건축자재를 공급하려는 계획이 미국정부에 의해 개시되었다. 미군에 의해 공급되고 인도될 그 자재를 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 체스넛과 교역자들은 한 건물을 설계하고 건설을 위한 자금을 모아야 했다. 그들은 그 공급이 좋은 기회임을 인식하고, 재빠르게 승인을 받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첫 프로젝트는 녹원영아원(錄原嬰兒原, Green Meadows Baby Home)이라고 명명한 원치 않는 아기들을 위한 집이었다. 승인을 위해 제출된 서류에는 녹원영아원의 이사장 체스넛, 이사 허홍과 이석영, 원장 허난경(허홍의 자매)이 등장했다. 당시 서대문구 대조동 88-34호 부지는 기부를 받았고, 골조 건물이 지어졌다. 녹원영아원은 195489일에 개원되었다. 이렇게 체스넛은 한국 오순절 교단이 세운 첫 사회복지기관의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초기 모습으로 추정되는 녹원영아원
녹원영아원 자리에 있던 녹원유치원

 

 

 

국가기록원에  보관되어 있는 녹원영아원과 관련된 서류들

 

 

    녹원영아원에 들어온 첫아기는 어떤 한국인 어머니의 방문 후 한 친구의 집에 남겨졌다. 그 엄마는 소파 뒤에 잠든 아기를 두고 인사도 없이 살짝 가버렸다. 그 집 여주인은 새로 연 녹원영아원에 대해 알고 있었고, 발견한 아기를 영아원에 데리고 왔다. 두 번째 아기는 연동 인도에서 발견되었다. 한국에 갓 들어온 선교사 존 스테츠(John Stetz)와 에딧 스테츠(Edith Stetz) 부부가 그 아기를 발견해 그들이 기거하던 곳에 데리고 갔다가 후에 녹원영아원으로 데리고 왔다. 그 후 수 많은 아기들이 녹원영아원에 수용되거나 녹원영아원을 거쳐갔다. 예를 들면, 루네 호르네란(한국명 오영수)19785월경 녹원영아원을 거쳐 노르웨이로 입양되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이름과 나이를 말할 수 있는 4(추정) 때인 197852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홀트아동복지회 앞에서 발견됐어요. 왼쪽 팔에 주삿바늘 자국이 있다는 기록이 있고요. 당시 서부경찰서는 저를 근처에 있는 녹원 영아원에 보냈데요. 보름 뒤 홀트아동복지회로 넘겨져 7개월을 그곳에 머물다 그해 12월 노르웨이로 입양됐습니다.”

    1955년 새해가 밝아오자, 체스넛과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교역자들은 10일간의 신년 집회를 열었다. 그 집회 기간에 교단 성장을 위한 계획도 수립되었다. 그 집회에 참석했던 사람들은 성령침례를 받고 그리스도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기를 다짐했다. 그 집회 동안 기온이 영도 이하로 떨어졌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추위를 덜기 위해 그 교회에서 자야 했다. 체스넛은 이 소식을 미국 하나님의성회 기관지 오순절복음에 알리며 특별히 한국의 교역자들을 훈련시킬 성경학교에 대한 지원을 호소했다.

 

한국인의 지난 두 세대는 교육을 받지 못했었습니다. 그들은 자유를 얻자 이제 그 어느 때보다 배움에 목말라 있습니다. 특별히 청년들은 교육받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순복음성경학교(full gospel Bible School [순복음신학교])를 위해 기도해 줄 것을 여러분에게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익은 곡식을 추수하러 나갈 많은 남자와 여자 청년들을 훈련시킬 수 있게 하시기를 기도해 주십시오.

 

 

 

충정로 1가 21번지에 세워진 교회와 교단 사무실로 사용되던 건물 앞의 체스넛과 교역자들

 

 

    체스넛은 한국에서의 마지막 2년 동안 집에 돌아가면 재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그런 기대를 했었지만, 조금 걱정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의 사역뿐만 아니라 체스넛의 사역을 배가시켜 줄 아내를 원했기 때문이었다. 사역은 그런 변화로 인해 장애를 받지 말아야 했었고, 그래서 체스넛은 결혼이 두 사람에게 유익이 될 수 없다면, 결혼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결혼에 관여하신다면, 그렇게 하실 줄 알았다. 체스넛은 재혼을 위해 적지 않게 기도했다.

    체스넛은 19554월 제4차 총회에서도 총리에 재선되었다. 총리(Superintendent) 체스넛은 정찬성, 김상호, 최요열 등에게 427일자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제1차 목사안수증을 발행했다.

 

정찬성

 

 

 

 

그런데 1개월 후 체스넛은 휴가차 귀국을 하기로 하고 귀국 도중에 일본, 홍콩, 필리핀, 하와이를 돌아보았다. 체스넛의 휴가 귀국 후 존 스테츠(John Stetz)가 그를 대신해 총리가 되었다. 체스넛을 제외하고 다른 교의를 가진 교역자들이 섞여 있던 집단의 지휘는 어려운 것이었다. 1955년 말부터 1956년 초까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는 체스넛이 잡아놓은 아슬아슬한 균형을 잃고 침례 방식의 일 등으로 최초의 분열 위기를 맞았다.

 

 

존 스테츠

 

 

V. 오키나와와 세계선교 (1955~1994)

 

    체스넛은 존 스테츠와 슬픔에 빠진 한국인 교역자들과 친구들을 대합실에 남겨놓고 눈물을 흘리며 팬 아메리카 항공사(Pan American World Airways) 비행기에 탑승했다그는 일본, 홍콩, 마카오, 마닐라, 호노룰루를 거쳐 1955525일에 오레곤 주, 포틀랜드(Portland, OR)를 통해 귀국했다.

 

 

 

1955년 팬 아메리카 항공 노선

 

 

1955년 6월의 체스넛

 

고향 시애틀에서 부친, 모친과 함께 지낸 체스넛은 캘리포니아로 갔다. 그리고 그는 그곳에서 미국 하나님의성회 남캘리포니아지방회 여성선교사협의회(Women’s Missionary Council of the Southern California Assemblies of God) 회장 주아니타(Rubi Juanita England)를 만났다. 그녀의 일은 귀국한 선교사들의 집회를 주선해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체스넛보다 한 살 어리고 6년 전인 1949년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으로 쌍둥이를 포함한 세 명의 자녀가 있었습니다. 주아니타는 1916816일 미주리 주 출생으로 캘리포니아성경학교를 졸업하고 195269일 캘리포니아지방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195591일에 체스넛의 남한 공식 선교가 종식되었다. 선교사 카드에 의하면 그는 1956131일에 하나님의성회(AG)에서 루터교회(ML)로 교단을 옮겼다.

 

 

 

체스넛과 주아니타는 195639일에 캘리포니아, 복음 루터교회에서 결혼했다. 그러나 그들의 결혼에는 큰 결단과 선택이 뒤따랐다. 당시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이혼과 재혼에 관한 규정에 따라 그들은 미국 하나님의성회를 탈퇴해야 했고, 루터교회에 가입한 것이다.

 

아더 체스넛과 주아니타 체스넛 부부

 

체스넛의 재혼 결혼자료

 

 

    하나님의성회를 떠난 그들은 캘리포니아주, 리버사이드, 델가 4100(4100 Dell st., Riverside, Calif.)에 살면서, 웨스트 리버사이드(West Riverside)에 있던 한 작은 독립 교회에서 목회했는데, 그 교회는 후에 하나님의성회에 합류했다. 그리고 인디언 교육을 위해 1901년에 아링턴(Arlington)에 세워진 셔먼 인스티튜트(Sherman Institute) 등 공립 학교들에서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체스넛이 살고 있던 주소지와 그 근처의 서니슬로프 초등학교

 

체스넛 부부가 살던 주소지의 현재 모습

 

Sherman Institute

 

 

한편 한국에서는 박성산이 1956320일에 갑작스럽게 소천하기도 하여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지도부가 그 어느 때보다 불안정해졌다. 이에 허홍은 체스넛에게 한국으로 돌아와달라고 청했다. 그 요청을 받은 체스넛은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재가입과 한국파견을 신청했다. 그러나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상황을 살펴 본 미하나님의성회 퍼킨 해외선교부장은 체스넛의 한국파견 대신 오키나와 행을 제안했다. 체스넛은 그 제안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한국에 돌아가 주님을 섬기기로 작정한 데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적당한 시간에, 신중하게 준비하여 우리가 아는 사람들에게 편지로 우리의 생각을 전했다. 반응이 없었다. 그런데 미하나님의성회 해외선교부는 우리에게 전화하여 오키나와로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비록 그 교단에서 탈퇴했었지만, 우리는 언제나 국내외에서 그들과의 실질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미하나님의성회로부터 한국재입국대신 오키나와 선교 제안을 받은 체스넛은 195725일 허홍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이 편지에서 자기가 한국에 가고 싶어도 갈 여비가 없으며, 가더라도 허홍을 중심으로 세워지고 있던 새로운 교단이나 기존 교단 모두에 참여하지 않을 것, 즉 중립을 지킬 것이며, 한국이 아닌 오키나와로 가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다가오는 봄에 한국으로 갈 계획을 세웠었는데, 그렇게 할 자금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이동을 위해 돈을 우리에게 주실 때까지 얼마간 기다려야 합니다. . . . 그곳에 없기 때문에 저로서는 한국의 그 상황에 대해 말할 거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설혹 그곳에 있다 해도, 오직 하나가 되어 함께 하나님을 위한 복음전도에 매진하자고 요청할 것입니다. 저는 그 조직[허홍을 중심으로 세우고 있던 교단]에 참여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 교단은 한국인 교역자들을 위한 한국인 단체여야만 합니다. . . . 확실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한국에 있는 분열된 그 어떤 사역들 가운데 하나에도 참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 . . 우리는 해외 사역에서 그분을 섬기기로 하나님과 의견의 일치를 보았고, 다른 선교단체의 요청도 있고,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재촉도 있기 때문에, 오키나와 인근 섬들인, 류큐 섬들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체스넛은 추신에서 허홍에게 자기가 쓴 그 편지를 스테츠에게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그럼으로써 체스넛은 스테츠에게 힘을 실어주고, 허홍에게는 스테츠와 협력하기를 권고한 것이었다.

 

이 편지를 스테츠 형제에게 보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면 그는 내가 그의 뒤에서 비밀리에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런 행동은 그가 당신을 믿게 만들 것이고, 그에게 격려가 될 것입니다.

 

    퍼킨은 체스넛 대신 당시 고베에서 선교하던 리처드 존스턴(Richard Lawrence Johnston, 1919-1961)에게 한국행을 요청했다. 존스턴은 이에 따라 19571월 한국에 도착했다. 럼시는 195732일에 허홍에게 쓴 편지에서 존스톤의 한국 도착을 언급했다. 그리고 1957420일에 열린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제6차 총회에서 존스턴이 새 총리로 선출되었다.

 

존스턴 가족

 

 

    체스넛은 화물 우선으로 건조된 Old Colony Mariner를 타고 19579월경 오키나와(沖縄県)에 도착했다. 럼시는 1957101일에 허홍에게 보낸 편지에서 체스넛의 오키나와 행을 언급했다. 그녀는 체스넛 형제는 오키나와로 갔습니다. 그의 미국 주소는 캘리포니아, 몬로비아, 사서함 345입니다라고 썼다. 체스넛은 오키나와 스타일 집”(a Okinawan-style house)을 주거용으로 빌렸다. 그리고 그 집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주일학교 학생들이 그 집이 감당할 수 없게 늘어나자 한 블록 떨어진 건물을 빌렸다. 그 건물이 교회 건물이 되었다. 그 교회의 교인들은 일본 원주민들과 미군인들로 구성되었다. 주일 아침에는 원주민들이 예배를 드렸고, 오후에는 미군들이 그리고 저녁에는 다시 원주민들이 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주중에는 하루는 원주민들, 다른 하루는 미군들을 목회했다. 그 교회의 명칭은 The Neighborhood Full Gospel Church였다. 스즈키에 의하면, 체스넛 부부는 1979년까지 22년간 거주하며 현재의 네이버후드 교회를 개척하고 오키나와 크리스천 스쿨 등을 지원했다. 671 Yagibaru, Kitanakagusuku, Nakagami District, Okinawa에 위치하고 있는 네이버후드 처치 오키나와(Neighborhood Church Okinawa)는 교회에 대해 국제적 그리스도인 성회로서 오키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 군속들의 영적 필요에 부응하기 위해 1957년 하나님의성회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Facebook“I went to Neighborhood Assembly of God church in Okinawa”라는 계정에 미스티 스캇(Misty Scott)이라는 사람이 2015817일에 게시한 글에 의하면, 네이버후드 어셈들리지 오브 갓의 설립자가 체스넛이었다. 그녀는 그 교회가 1950년대에서 1980년대 초까지 어떻게 시작되었고 성장했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그 사역의 설립자인 아더 체스넛(the founder, Art Chestnut)의 전기를 읽어볼 것을 권하며 그 전기의 표지 사진을 제시했다.

 

 

 

 

 

 

 

 

 

 

2021년 10월의 네이버후드 교인들

 

 

 

 

1964년, Okinawa Christian School의 교장으로서 체스넛

 

 

 

    체스넛 부부는 1979327일에 미국 하나님의성회 북캘리포니아지방회에 복귀해 오키나와에서의 일을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맡기고 귀국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이들을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호간(James Philip Hogan, 1915-2002) 해외선교부장은 오래 묶어두지 않았고, 이들에게 캄보디아 분쟁으로 인해 생긴 태국 난민촌 지원을 요청했다. 이 제의를 흔쾌히 수락한 체스넛은 1980년 1월 경에 호간과 함께 태국 난민촌을 방문했으며, 체스넛 부부는 1980513일부터 태국에서의 일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섯 달 정도의 사역을 계획했었으나, 4년으로 늘어났고, 태국 안에 몇 개의 캄보디아인 교회들을 세웠다.

    체스넛 부부는 파종을 위한 볍씨를 포함한 기본적인 음식들과 필요한 물품들을 분배했다. 그리고 농찬 국경 캠프(Nong Chan border camp) 근처를 경작하는 것을 돕기 위해 물소를 공급기도 했다. 2년 동안 사람들은 그 캠프로 왔고, 그리고 캄보디아로 돌아가거나 태국에 있는 다른 캠프들로 갔다. “잃어버린 자들을 위한 빛”(Light for the Lost)은 수천 권의 기독교 소책자들과 문헌들을 난민들에게 제공했고, 젊은 캄보디아인들은 체스넛 부부가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도왔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 마침내, 농찬 캠프에서 구원을 받은 한 청년이 농세메트(Nong Semet)에 두 번째 난민 교회를 개척했다.

    체스넛은 너무도 신뢰를 받고 존경을 받았기 때문에 유엔은 그에게 캄보디아 난민들에게 구호품을 나누어주는 것을 감독해 달라고 청할 정도였다. 1983년에 베트남인들이 그 캠프를 불질렀고, 교회도 전소되었다. 체스넛은 말했다, “비록 그 건물은 사라졌지만,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교회는 그들이 있는 곳마다 남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캄보디아로 돌아가 있고, 다른 사람들은 태국에 있는 국격 캠프들이나 난민 센터들에 있습니다.”

 

 

 

 

농찬 난민촌

 

 

호간

 

1980년 1월 17일에 태국 사케오 난민촌. 왼쪽에 서 있는 호간. 체스넛이 이 사진을 찍었을 수도 있다.

 

 

왼쪽 인물이 이마가 벗겨진 체스넛과 유사하고, 오른쪽 인물은 호간 필립(HOGAN, J. PHILIP)이다. 1980년 1월 17일

 

 

 

 

 

    그 후 그는 1984 6 23일부터 이탈리아에서 활동했으며, 1986년 12월 31일 이후 유럽 그리고 남태평양 지역에서 1994년까지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시니어 선교사로 활동하고 귀국했다.

 

 

 

VI. 소천 (2008)

 

    아더 체스넛은 2008113일에 93세로 10년 동안 살고 있던 캘리포니아주 트레이시(Tracy, California)에서 소천했다. 기록에 따르면, 아더 B. 체스넛은 191581일에 태어나 2008113일에 세상을 떠났다. 체스넛의 장례식은 세쿠오이아 블브드 1790번지(1790 Sequoia Blvd)에 있는 트레이시 커뮤너티 처취(Tracy Community Church)에서 열렸다. 주아니타 체스넛은 그로부터 16일 후인 1119일에 92세로 소천했다. 체스넛 부부의 2008년 소천은 미국 하나님의성회가 20076월에서 20095월까지 소천한 사역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펴낸 책에도 등장한다. 그들의 결혼생활은 52년 동안 이어졌고, 그들에게는 자녀 3, 손자 10, 증손자 27, 증외손자 1명이 남겨졌다.

 

 

 

트레이시 커뮤너티 처취

 

 

 

 

 

VII. 나가는 말

 

    아더 B. 체스넛(Arthur Beryl Chesnut)은 미국 워싱턴 주, 세드로-울리에서 191581일에 태어나 93세가 되는 2008113일에 캘리포니아주 트레이시에서 소천했다. 그는 1942년경 방언을 그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고 오순절주의자가 되었다. 그때 체스넛은 환상 중에 복음전도의 소명을 받았다. 그는 일본에서 선교하고 있던 1952년 어느 날 한국선교 소명을 받게 되었다.

    아더 B. 체스넛은 19529월 11일에 내한하여 19555월 초에 한국을 떠났다. 그는 오순절적인 첫 남성 그리고 미 하나님의 성회 파송 첫 공식 내한 선교사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오순절 교단, 그러면서도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첫 공식적인 지원을 받으며 설립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창립의 산파였고, 초대 총리였다. 그는 한국에 세워진 첫 오순절적 신학교의 초대 교장, 한국 오순절적 교단이 첫 번째로 세운 사회복지 기관의 초대 이사장으로 봉사했으며, 그럼으로써 전쟁 후 한국 오순절교회의 복구와 성장을 위한 초석을 놓았다.

    아더 B. 체스넛은 외국인으로서 문화적 자긍심과 교만을 내려놓고 낮아져, 지식만을 자랑하는 대신 한국인들의 고난에 심적으로 공감하는 선교사가 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삼위일체적 오순절주의자들과 단일성적 오순절 주의자들이라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하나의 교단과 하나의 신학교 안에 비록 짧고 완전히 안정적이지는 않았지만 비교적 원만하게 결합시켰다. 한 마디로 아더 B. 체스넛은 그때 그 자리에 가장 필요하고 적합한 선교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