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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 선교사 아더 B. 체스넛의 자서전 8

한오신 2024. 4. 28. 18:25

발에 신을 신기라

Put . . . Shoes on His Feet

[15:22]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 선교사]

아더 B. 체스넛

Arthur B. Chesnut

 

 

 

(Tulsa, OK: Christian Publishing Services, Inc., 1987).

 

이창승 역

2024.4.27.

 

* 이 번역은 한세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송하종 목사가 역자에게 체스넛의 자서전을 기증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본 번역은 체스넛의 자서전 중에서 한국편만 떼어낸 것이다.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

 

    서울의 그 교회는 그 건물이 수리된 후 첫 주택 집회에서 그 건물로 이사했다. 한 연인들이 내게 결혼식 주례를 부탁했다. 그들은 그 교회 교인들이었고, 평판이 좋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들이 그 교회에 와서 구원을 받았는지, 아니면 그 전에 받았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은 결혼식을 한국어로 진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나는 그 결혼식 주례를 하고 싶었다. 그것은 과한 요청이었지만, 나는 그들을 신성한 결혼으로 연합시키는 특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나는 한국어를 말하지는 못했지만, 날마다 듣고는 있었다. 나의 통역자는 기꺼이 그 예식을 통역하려 했고, 예식 순서와 내용을 내가 읽을 수 있도록 한국어 전체를 영어 알파벳으로 음역하여 표기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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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음역 표기는 그 결혼식 3일 전에 최종 완성되었다. 교인들은 그 예식을 위해 정성들여 준비했다. 그 예식은 그 교회에서 열린 첫 결혼식이었다.

    적어준 것을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그 예식을 잘 인도하고 싶었고, 또한 그 예식에 참석할 목회자들에게 모범을 보이고 싶었다. 그 결혼식 날이 되었다. 적어준 것을 외우지는 않았다. 그 이유는 그 단어들을 결합하는 것이 너무도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그것을 읽어내려가는 것이 그리 나쁠 것 같지 않았다. 그 종이를 잘 보이지 않는 곳에 놓으며 그 영광스런 행사를 준비했다.

    그 예식이 시작되고, 그 신랑과 신부가 내 앞에 섰다. 그 종이에 적힌 것을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 모든 것이 완벽하게 내 앞에 있었다. 예식 순서에 따라, 나를 위해 주의 깊게 써진 종이의 페이지를 넘기지 않았다. 그 대신, 아무 문제 없이 그저 흐르듯 그 예식 전체를 이끌어 갔다. 마지막 기도 전까지 모든 것이 한국어로 마쳐졌다. 마지막 기도는 영어로 할 수 있도록 합의되었었다. 그래서 그 기도만큼은 더 자유스러울 것이었다. 그러나 그 마지막 기도는 유일하게 어려웠던 순서였다. 내 마음을 담아야 했고, 스스로 기도해야만 했다.

    무엇이 그 차이를 만들었던가? 성령께서 그 예식 전체를 주관하셨고, 나는 그 영어 기도 직전까지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한국어] 방언으로 말했었던 것이다. 내가 강력하게 요청했다면, 그분은 마지막 기도까지도 다 한국어 방언으로 말하게 하셨을 것이다.

    예식 후 몇 한국인 설교자들이 내게 언제 한국어를 익혔느냐고 물었다. 나는 성령께서 나를 위해 그 예식을 인도하셨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한국어를 충분히 배울 수 있는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어느 부분이든 한국어로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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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로 변한 종이

 

    성경학교가 필요했다. 유아기의 교단에 필요한 것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는 것일 것이다. 우리는 교과과정을 짜고 가능성 있는 교원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나는 도쿄에 있는 성경학교를 기획해 본 경험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들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가르치는 일에 적합하고 서로 간에 이의가 없는 교원들을 선발하는 것이었다. 그런 유아기 조직의 교원들은 한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 그렇지 않으면 시작하자마자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기획이 마무리되고, 1954[1953?]4월에 그 학교의 문을 연다고 알렸다. 첫해에 열여덟 명의 학생들이 등록했다. 모두에게 음식을 제공하고, 모두를 돌보아야 했기 때문에, 그 수도 벅찼다. 종종 모두를 위해 충분한 음식을 마련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 학생들에게 소량의 쌀과 다른 것들을 섞어 불린 우유와 버터를 먹였다. 그러던 어느 날 교실에 들어갔는데, 학생들 절반가량이 아픈 것을 발견했다. 학생들에게 물어본 후 그들이 먹은 음식 때문에 아프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소식은 무상급식에 대한 나의 의욕을 꺾어버렸다. 더군다나 그들의 가족들도 모두 식중독에 걸렸다.

    매주 성경공부에 참석하고 있던 미군들 중 하나가 그 상황을 듣고는 돕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미군 우체국에서 폐 우편물을 수거해 보라고 제안했다. 잡지나 신문 같은 배달할 수 없고, 반송 불가능한 우편물 다발이 매일 생겼다. 당시에 종이는 시장성이 좋았다. 미군 우체국 주임은 그 폐기물들을 치워준다니 기쁘다고 말했다. 내 차가 그 일에 아주 적합했다.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 잡지와 신문 더미를 수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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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폐지를 팔아 그 학생들에게 필요한 쌀과 반찬들을 살 충분한 돈을 마련했다. 이 일은 여러 달 지속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선교단체의 한 선교사가 우연히 미군 우체국 안쪽 방에 있다가 내가 하고 있던 것을 보았다. 그는 곧 그 전말을 파악했다. 그리고 나서 며칠 후, 그 주임은 나를 불러서 그 폐지를 다른 선교단체에게도 나누어주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고, 그것을 지역 고물상에게 팔아넘기는 계약을 해버렸다. 그 축복은 끝났다. 그 일 후, 아무도 그 폐지를 받지 못했다. 주님께서는 가장 필요할 때 그것을 우리에게 주셨던 것이다. 그 일이 종료된 후, 우리는 음식 공급을 위한 다른 협약을 맺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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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조직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형제들 간에 한국에 하나님의성회 교회들의 전국 조직을 갖고 싶다는 열망이 있었다. 기존 교회들은 도움을 주는 각 교단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래서 우리 형제들이 미국 하나님의성회와 같은 전국적 조직의 일부가 되기를 바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남자들과 여자들을 한 모임을 위해 모으고 그들에게 제안된 헌법과 정관을 읽어주는 것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논쟁이 거의 없었다.

    참석자 중 세 사람이 영어를 말할 수 있어서 그 사람들의 언어로 통역하고 쓰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 그 하나 됨은 아름다웠고 모든 것이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나는 언제나 주의 영이 그 단체에 임하셔서 한마음을 갖게 하고 계심을 강하게 느꼈다.

    그 전국 조직의 총리가 되는 것은 내 의도가 아니었었다. 나는 이 사람들에게 한 선교사였고, 더구나 그들의 언어를 말하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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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외국인 선교사가 국가적 그리스도인을 관리하는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현지인의 지도력 향상을 위한 길이 아니라고 배웠었다. 그 가르침은 참된 것이라고 믿었고, 지금도 그렇게 믿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가 지명투표에 의해 한 사람에게 주어진다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그것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나는 투표를 하지 않았는데, 내가 누구에게 투표를 했는지 곧 밝혀질 것이고 그러면 편애를 보이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 투표지들에는 내 이름만 써있었다. 그것은 건강한 징조는 아니었고, 그것을 알고 있었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였다.

    그 조직에 어떤 생각이 다른 사람들”(bugs)[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이 있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몇 달 안에,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몇 년 안에 정체를 드러냈다.

 

원치 않는 아기들을 위한 집

 

    전쟁이 멈추고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다. 모든 노력이 국가 재건에 집중되었다. 자선적, 공적, 사회적 또는 종교적 돌봄을 위한 건축자재를 공급하려는 계획이 미국정부에 의해 개시되었다. 미군에 의해 공급되고 인도될 그 자재를 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 우리는 한 건물을 설계하고 건설을 위한 자금을 모아야 했다. 우리는 그 공급이 좋은 기회임을 인식하고, 재빠르게 승인을 받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우리의 첫 프로젝트는 녹원영아원(錄原嬰兒原, Green Meadows Baby Home)이라고 명명한 원치 않는 아기들을 위한 집이었다. 부지는 기부를 받았고, 골조 건물이 지어졌다. [195489일에 개원하여] 첫아기를 받고, 가정을 찾아준 날 너무도 기뻤다. [서울 은평구 대조동 88번지-371(당시 서대문구 대조동 88-34), 도로명 은평구 진흥로1319에는 현재 은평뉴타운 우물골8단지 아파트가 세워졌다.]

 

 

 

 

 

 

 

 

 

 

 

    첫아기는 어떤 한국인 어머니의 방문 후 한 친구의 집에 남겨졌다. 그 엄마는 소파 뒤에 잠든 아기를 두고 인사도 없이 살짝 가버렸다. 그 집 여주인은 새로 연 우리의 집에 대해 알고 있었고, 발견한 아기를 우리에게 데리고 왔다.

    두 번째 아기는 연동 인도에서 발견되었다. 한국에 갓 들어온 선교사 존 스테츠(John Stetz )와 에딧 스테츠(Edith Stetz)가 그 아기를 주워 그들이 기거하던 곳에 데리고 갔다가 후에 우리의 새집으로 데리고 왔다.

 

존 스테츠

 

에딧 스테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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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한국 상황에 대한 흥미로운 사례가 아닌가! 종종 한국인 엄마들은 자기 자녀가 자신이 제공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나은 삶을 살기를 바랐다. 그래서 자기 아기를 발견될 수 있는 눈에 띄는 장소에 두고 갔다. 그 아기에게 동정심을 갖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갑자기 그 아기를 책임지게 되었다.)

    스테츠는 울고 있는 이 두 번째 아기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안아서 차에 태우려 했다. 몇 사람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보기 위해 옆에 서 있었는데, 아무도 그 아기를 위해 무엇이든 하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스테츠가 그 여아를 안은 후, 한 여성이 다가와서는 스테츠에게 그 아기가 배고프다고 손짓했다. 그 여인은 웃옷을 열어 가슴을 드러내고는 더 다가왔다. 그녀는 거기에 서서 그 작은 아기가 잠이 들 때까지 젖을 먹였다. 우리는 그 행동을 자기 자녀에게 베푼 그녀의 마지막 호의였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그 아기가 좋은 사람을 만났다는 것을 알았으며, 그래서 기뻐했다.

    그 이후로 원치 않는 아기들을 위한 집이 계속 운영되었다. 거기서 일하고 살던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대부분의 필요품들은 정부 복지 기관들에 의해 공급되었고, 다른 것들은 구입했다. 그곳에 갈 때마다, 보모들은 다른 새로운 아기를 내게 보여주었다. 마침내 기어 다니는 아기가 이십여 명이 되었다. 힘든 일이었지만, 몇 년 후 그 아이들 모두를 보는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었다. 그 아기들 대부분에게 그 집에 들어오는 것은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몇 년 후, 그 집을 서울 남부로 옮길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그 집은 이제 맹아들과 장애아들을 돌보고 있다. 주님을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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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기간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놀라워 하기를 그친 적이 없었다. 그분은 언제나 참으로 놀라운 분이시다. 그리고 이 하잘것없는 마음은 그분에 대해 결코 충분히 안 적이 없었다. 사람이 그분과 계약하지 않는다. 그분이 약속하시고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자신의 말씀에 묶이신다. 그분은 사람의 말에 묶이지 않으신다. 그분이 신뢰하실 수 있는 사람에게 무수한 은사들을 내려주시는 것은 그분의 기쁨이다. 그분의 사랑은 사람의 실패들에도 불구하고 넘친다.

    한국에서의 마지막 2년 동안 집에 돌아가면 결혼[재혼]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내 삶에 이 부가를 기대했지만, 언제나 조금 걱정스러웠다. 누가 아내가 될지 몰랐지만, 그 상황에 대해 적지 않게 기도했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의 사역뿐만 아니라 나의 사역을 배가시켜 줄 아내를 원했다. 사역은 그런 변화로 인해 장애를 받지 말아야 한다. 결혼이 두 사람에게 유익이 될 수 없다면, 결혼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님께서 결혼에 관여하신다면, 그렇게 하실 줄 알았다.

    마지막 해는 매우 평이하게 보냈다. 스테츠 부부는 현장에 있으면서 정기적으로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한국인에 편안했다. 그들의 첫 선교사역이라 좋은 결과를 바라고 모든 일을 열심히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