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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 선교사 아더 B. 체스넛의 자서전 5

한오신 2024. 4. 28. 12:54

발에 신을 신기라

Put . . . Shoes on His Feet

[15:22]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 선교사]

아더 B. 체스넛

Arthur B. Chesnut

 

 

 

(Tulsa, OK: Christian Publishing Services, Inc., 1987).

 

이창승 역

2024.4.27.

 

* 이 번역은 한세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송하종 목사가 역자에게 체스넛의 자서전을 기증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본 번역은 체스넛의 자서전 중에서 한국편만 떼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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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으로 그리고 다시 한국으로

 

    부산에서 어떤 것들을 세우고 머물며 나의 의무인 직무들을 수행하며 예닐곱 주를 보낸 후, 내 물건을 완전히 다 옮기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갔다.

    일본 상공을 날면서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내 마음에는 일본인들에 대한 사랑이 흘러넘쳤고, 그 나라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새겨진 예수 이름을 보고 싶었다. 지난 수 주 동안 그야말로 암흑의 땅에 있었다. 왜냐하면 한국에는 사용할 수 있는 전기시설이 너무도 적었기 때문이다. 그 나라의 시설들은 전쟁으로 파괴되었거나 피난 상황에 의해 과부하가 걸렸었다. 낡아버린 장비들은 대체되거나 수리되지 못했다. 적어도 당분간 모든 것이 그대로 방치되어야 했었다.

    이제, 낮게 나는 프로펠러 비행기를 타고 일본의 마을과 동네들을 내려다보았다. 모든 시골과 중심지들의 도시들은 빛으로 밤을 밝히고 있었다. 도시가 이렇게 이글거리며 빛을 발한다는 것을 거의 잊었었다. 그 아름다운 광경을 보며 울었다. 그렇지만 일본은 그 모든 전문적 기술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너무도 어두웠다. 그 비행기 안에서 눈물을 흘리며 기도했다. “주여, 한국도 하나님께서 참 빛이심을 앎으로써 빛을 발하는 자유 국가가 되게 하소서.”

    모든 일을 마쳤고, 약 두 주 후 배에 실려진 내 짐들의 도착을 기다리려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가 되었다. 요코하마와 부산 사이를 오가는 배들이 많아서 나의 빛처럼 빠른승용차를 포함한 내 짐들이 빠르게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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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부산항의 시설들은 최고이지는 않아서, 하역할 때는 느긋하게 기다려야 했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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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을 돌아보다

 

    부산 외곽에서는 게릴라의 활동이 극심했다. 헌병은 내게 그 도시 통제선 안에 머물거나 아니면 그 바깥에 나가고 싶다면 권총을 가지고 가라고 조언했다. 그들은 내게 총을 빌려주거나 팔 수 없다고 말했지만, 내가 총을 살 수 있는 곳은 가르쳐 주었다. 그곳으로 갔다. 그런데

    팔기 위해 내놓은 그 무기는 미군에서 훔친 것이었다. 그 총을 살 수는 없었다. 돌아서 나올 때 성령께서 내게 물으셨다. “왜 그런 일을 했느냐?” 나는 총을 원하지 않았고, 다만, 사람의 조언을 따라 행동했다. 그런 믿음 없는 행동들이 하나님께 헌신한 많은 사람들을 타락시켜 왔다.

 

    형제들은 순천에서 열릴 순복음교회들의 연합집회를 계획했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그 남부 도시에는 오순절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이 살고 있었다. 다른 지역의 오순절 사람들은 비교적 쉽게 그곳에 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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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즈음에 대부분 걸어서 다녀야 했던 한국식 여행에 익숙해졌다. 버스가 운행되고 있다면, 보통 이미 만원이었다. 도시들을 오가는 열차들은 너무도 적었고, 장비들은 불완전했으며, 지방은 위험했다. 갈 곳도 없었고, 얼마간이든 여비를 가진 사람은 극소수였다.

    부산에서 순천으로 갈 우리 지역 사람들은 약 열 명이었다. 기차를 타는 것이 무척 흥미로웠다. 기진맥진한 석탄 증기기관차가 끄는 열차의 모든 유리창들은 깨져 있었고, 의자들만 뎅그러니 있었다. 기차들은 터널에서 멈춰서기 일쑤였고, 그럴 때면 모든 사람은 기관차의 연통이 품어대는 검은 연기에 질식되지 않기 위해 걸어서 나와야 했다.

    초소들이 언덕들과 산들을 가로지르는 철길을 따라 적절한 곳에 세워져 있었다. 그 초소들은 모두 기차를 통제하고 있었다. 그 지역에 아무런 군사 행동이 없으면, 하얀 깃발이 걸렸고, 앞쪽에 문제가 있으면, 빨간 깃발이 나부꼈다. 그 신호에 따라, 기차는 멈춰서서 경계했고, 승객들은 내려서 상황을 주시했다. 우리는 그 여행에서 모든 가능한 상황을 만났다. 우리는 초병들의 생명이 걱정되었다. 어떻게 초병이 게릴라의 활동을 감시하기 위해 그렇게 보호되지 않는 곳에서 홀로 서 있을 용기를 가질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는 약 네 시간 동안 객차를 탄 후 다른 기차로 갈아탔다. 이번에는 객실은 하나도 없었고, 오직 평평한 화물차량만 있었다. 그 기차는 매우 느렸다. 그런데 그게 좋았다. 교차로에 있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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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 옆에 있는 몇 소년들에게는 열차 안의 사람들을 향해 돌멩이를 던지는 때가 최고로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우리 일행 중 한 청년이 머리를 맞았지만, 크게 다치지는 않았다.

    터널들은 언제나 걱정거리였다. 열차에 탄 사람들은 석탄 연기가 너무 독해서 숨쉬기 힘들었다. 우리 모두는 숱덩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저 전쟁의 결과들 중 하나에 불과했다.

    우리는 심각한 재난을 당하지 않고 목적지에 도착했고, 많은 사람들의 환영을 받았다[1952105일부터 열렸던 대한기독교오순절회 제3회 집회]. 진수성찬이 차려졌고, 맛있게 먹었다. 다른 사람들과는 따로 나를 위해 방 하나가 마련되었다. 나의 음식과 물은 정성스럽게 준비되어 그곳으로 옮겨졌다. 그 사람들은 내가 그들과 함께 먹게 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해가 지기 전에 한 한국 군인이 내 방으로 불쑥 들어왔다. 그는 미군이 사용하던 종류의 소총을 갖고 왔다. 그는 영어로 내게 그것을 가까이 두고 사용하라고 말했다. 그 총에는 총알이 장전되어 있었고 발사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는 그에게 그 총을 구석에 놓고, 탄약통도 그 옆에 함께 놓으라고 말했다. 그 총을 사용을 의도는 없었지만, 그 군인이 그렇게 하는 것은 그의 일이었다. 그래서 가능한 한 그에게 문제가 생기지 않게 했다.

    성령침례는 한국인들에게 막연한 개념이었다. 그래서 그 설교자들을 당황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 하나님의 그분의 교회를 위한 공급과 이 경험에서 오는 기쁨을 말하기 시작했다. 배우지 않은 언어로 방언을 말함이라는 증거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 중 몇몇은 뜨거워지는 것을 경험했었고, 어떤 사람들은 뛰어오르는 경험을 했었고, 오직 두 사람만[박성산과 배부근?]이 방언을 말함이라는 인정된 최초의 증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의심없이 나와 내가 말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있어서, 시작부터 그들의 신앙을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적절한 시간에 그분의 메시지를 택하실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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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번은 예배 후 한 여인이 내게 왔다. 그녀는 돌보고 있던 몇 명의 아이들을 소개해 주었다. 그 아이들은 자기 부모들과 헤어진 고아들 중의 몇 명이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나서 그녀는 나를 보며 정색하고 말했다. “나는 언제나 교회에 있었으나, 당신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을 결코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게 그렇게 좋은 것이라면, 왜 이렇게 늦게 오셨습니까?”

    무어라 대답할 수 있었겠는가? 그녀에게 나를 비난할 마음은 조금도 없었을 것이다. 다만 솔직하게 질문했을 뿐이었다. 한국인들에게 그분의 말씀의 진리를 주는 것을 보류하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계획이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했다. (몇 년 후 나는 미국에 있는 몇 목사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한국에 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었지만, 순종하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분명 하나님은 이 땅의 북쪽 반을 한 체제에게 주고, 남쪽 반을 다른 체제에게 준다는 사람의 계획과 전혀 관계가 없으셨다. 이 계획은 세계 2차 대전 몇 해 전에 세워졌고, 이후 수정되지 않았었다.

    세계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일본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필요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는 많은 나라 출신의 수 많은 젊은이들의 생명을 요구하는 전쟁이 일어나야 했었다. 이제 한국에 주의를 끌기 위해 다른 전쟁[6.25전쟁]이 일어나야 했다.

    이 땅은 전쟁 후 변화되었다. 북쪽 반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점령당했고, 그곳에서는 모든 기독교 활동이 즉시 중단되었다. 신앙을 버릴 수 없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먼저 죽임을 당해야 했다. 그래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남쪽으로 피했고, 거기서 하나님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었다. 성경이 그 지역의 많은 교회들에서 가르쳐졌고, 그 말씀은 여전히 살아있다. 말씀은 그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할 것이고, 그들을 하나님의 위대한 일들에로 이끌 것이다.

    사람은 그저 복음의 청지기이다. 그는 그 메시지가 전해지지 못하도록 덮어버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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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님은 어두운 곳의 영혼에 이르기 위해 끊임없이 역사하고 계시다. 그분은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모든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것이다.

    나의 느낌은 세계2차대전은 하나님의 말씀의 예언 안에 있는 한 전쟁이 아니라 나라들을 고치기 위해서 말씀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들을 그것의 직무를 위해 깨우시고, 잃어버린 자들에게 대한 그것의 빚을 상기시키기 원하셨다. 몇 나라들의 분단과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 없는 무신론에 넘겨준 것은 수정할 수 없는 잘못이었다. 하나님은 세상 전체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알게 될 자유를 갖기를 바라셨지만, 어둠의 장막이 복음을 듣지 못한 수 많은 영혼들을 덮어버렸다.

    그 부인에게 무엇을 말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가 내게 말한 것은 계속 나를 괴롭혀 왔다. 분명히 아무도 하나님을 절하하여 팔려고 하지는 않았겠지만, 당시 상황에 의해 그렇게 하도록 강요당했다.

그 모임 후, 우리는 배를 타고 부산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우리는 여수의 작은 항구에서 불과 두 시간 거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부산까지 한밤이면 갈 수 있을 것이었다. 그 생각은 기차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 좋은 것 같았다.

    그 배의 길이는 65피트[20미터]였다. 그런 항해를 위해서는 그리 큰 배는 아니었다. 사람들이 배에 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우리가 올바른 결정을 내렸는지 의심하기 시작했다. 기차들과 버스들은 대부분 운행이 중단되었다. 그래서 그 승객들이 그 배를 타고 있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등에 물건들을 지고 개인 소지품들을 들고 있었다.

    형제들은 내게 특실에 들어가라고 했지만, 나는 그들이 나와 함께 가지 않으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그들은 내게 음식을 좀 먹으라고 했지만, 먹을거리는 쌀뿐이었다. 객실은 볏짚이 깔린 작은 방이었다. 우리 모두는 그 바닥에 앉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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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음식이 우리 앞에 차려졌고 먹기 시작했을 때, 갑자기 몇 작은 손들이 구멍을 통해 쌀이 담긴 그릇을 향해 들어왔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손을 뻗은 아이들에게 주었다. 분명, 그 아이들은 그것을 나보다 더 필요로 했다. 그 경험 후, 기지개를 켜고 잠들었다.

    새벽에 부산항에 들어섰다. 항해하는 동안 잠들어 있었던 것이었다. 그 여행이 끝나고 한국에서의 첫 하나님의성회 집회가 종료되었다. 다시 한번 더 그 그리스도인들의 집회에 참석하기 위해 그 기차에 오르라고 하면 못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