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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 선교사 아더 B. 체스넛의 자서전 6

한오신 2024. 4. 28. 17:24

발에 신을 신기라

Put . . . Shoes on His Feet

[15:22]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 선교사]

아더 B. 체스넛

Arthur B. Chesnut

 

 

 

(Tulsa, OK: Christian Publishing Services, Inc., 1987).

 

이창승 역

2024.4.27.

 

* 이 번역은 한세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송하종 목사가 역자에게 체스넛의 자서전을 기증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본 번역은 체스넛의 자서전 중에서 한국편만 떼어낸 것이다.

 

 

부산에 온 빌리 그래함

 

     [복음주의전도자] 빌리 그래함(Billy Graham)이 군인들에게 말하기 위해 [19521215일에] 부산에 왔다. 한 극장이 그 집회를 위해 사용되었다. 그 집회는 좋았고 그 장소는 [미군들 이외에 6000여명의 한국인들로] 가득 찼다. 그 집회 후, 나는 몇 군인들과 함께 나가 버스 정류소로 향했다. 그때 한 한국 남자가 내 뒤에서 달려와 팔꿈치로 내 머리를 쳤다. 그 순간적 동작은 나를 잠시 멍하게 했다. 그는 나의 스태트슨 모자[챙이 넓고 운두가 높은 카우보이의 모자]를 잡아채고는 지프차들과 버스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거리를 가로질러 달렸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몇 작은 건물들 사이로 달려 내려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저 그에게 손을 흔들며 이 사람아,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시길. 당신이 나보다 그 모자가 더 필요할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 뿐이었다.

    우리와 함께 있던 군인들 중의 하나가 물었다. “형제님, 그를 쫓아가지 않으십니까?”

    “아니요, 어리석은 사람만 저 어둠 속으로 그를 쫓아갈 겁니다. 그렇게 쫓아가지 않는 것이 모자보다 더 좋습니다.”

    며칠 전에 군수품 부두를 지키는 두 헌병이 내게 머리에서 발까지 칼로 공격을 받고 상처를 입었었다고 말해주었다. 그들은 몇 도둑들을 잡으려고 했지만, 놀랍게도 오히려 붙잡혔다. 모자없이 빌리 그래함 집회에서 집으로 가는 동안 겨울의 추위를 온전히 느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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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일본에 갈 때까지 다른 모자를 구할 수 없었다.

 

 

빌리 그래함

 

 

1952년 12월 25일 빌리 그래함의 전장에서 설교

 

 

부산에서의 겨울

 

    주요 교통 흐름에 관한 한 부산은 길 하나를 따라 뻗어 있었다. 그 거리 가운데에는 전차 궤도가 놓여있었다. 전기차들은 사람들이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이동하는 것을 도와주었다. 가끔 그 전차들을 탔는데, 언제나 만원이어서 오르기가 어려웠다. 문도 없고 유리창도 없었지만, 모든 것이 너무도 불결했기 때문에 그것은 축복이었다. 도시 유지보수가 없어서 구덩이들은 승용차들이나 버스들이 그 거리들을 다니기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비록 승용차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을 사용하지는 않았다. 그 도로들은 어떤 승용차에든 너무도 많은 것을 요구했다. 미군 버스들이 같은 경로를 운행했고, 필요할 때면 그것들을 탈 수 있었다.

 

 

1935년 부산 노면전차 노선도

 

 

 

 

 

 

 

 

 

1952년 부산 전차충돌사고

 

    물건을 받아 새 방에 정리하자 곧장 겨울이 되었다. 어느 날 아침에 깨어보니 눈이 거의 발이 빠질 정도로 내렸다. 나와 눈 덮인 땅 사이에는 얇은 종이를 바른 문밖에 없었다. 그 눈은 이른 눈이었고 며칠 내로 녹아 사라졌지만, 도로들은 엉망이 되었다. 공무원들은 거의 매일 아침에 도로들에서 밤새 굶주리거나 얼어버린 여덟에서 열 구의 시체들을 치웠다고 내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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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울로 이사

 

    형제들은 내가 서울로 이사하는 것이 좋겠다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허 형제는 한 건물을 갖고 있었는데, 그 집은 그리 손상되지 않았었다. 그는 그 집에서 그의 아내와 두 딸들 가족과 함께 살고 있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북쪽에서 온 다른 두 사람도 함께 살고 있었다. 그는 내게, 기거하려면 조금 손을 본 필요가 있지만, 그의 집의 이층에서 지내는 것이 어떻겠냐고 물었다. 이 제안은 솔깃한 것이었고, 합의가 이루어졌다.

 

 

허홍의 건물 2층

 

 

    밖에서 들어가는 모든 교통이 차단되었기 때문에 서울로 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었다. 그러나 몇 선교사들이 그곳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미 제8군 산하의 주한유엔 민사원조 사령부에 가서 그 폐쇄된 도시 방문 허가를 신청했다. 군 열차를 타고 목적지에 갈 수 있는 허가증을 받아냈다. 이 기회는 내가 기대했던 것 이상이었고, 다음 날 기차를 탔다.

    서울은 부산과 달랐다. 거기에는 피난민이 매우 적었고, 주민들은 그렇게 많이 돌아오지는 않았었다. 숨통이 트였다. 많이 걸어야 했지만, 그러나 그게 좋았다. 인도와 광장들이 있었지만, 모든 건물은 북쪽의 인민군을 패배시킨 포격과 폭탄 투하에 의해 훼손되었다. 그 집이 준비되는 며칠 동안 군 귀빈 숙소에서 지냈다. 그리고 허 형제와 나는 내 물건들을 서울로 가지고 오기 위해 부산으로 돌아갔다.

    그 여행은 봄에 있었다. 모든 길에는 자갈이 깔려있었고, 밤에 차에서 내려 묵을 곳이 없었다. 돌아올 때에는 일찍 일어나, 물건을 차에 모두 싣고 한밤중이 지나서 그 집에 도착하기 까지 계속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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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가 녹으면서 곳곳이 미끄러워 달리기가 어려웠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헤쳐나가야 했던 움푹 패인 곳들 때문에) 차 밑 부분의 스프링 행거들이 파손된 것을 발견했지만, 심각한 정도는 아니었다. 우리 차는 약 열여섯 시간 동안 길 위를 달려야 했었다.

 

하나님이 너의 편이면 . . .”

 

    미군목 사령관을 만나러 오라는 통보를 받은 지 두 달이 지났었다. 그는 내가 서울에 머무를 수 없다고 알렸다. 서울은 폐쇄된 도시여서 전쟁 전에 서울에 살지 않았던 선교사들은 제한될 것이었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물건을 팔고 있는 판매원들에게는 개방되어 있었다.)

    내 안에서 누군가가 말하고 있었다. “이건 좋지 않아. 이럴 수 없어.” 그 명령에 호의적으로 반응하지 않고, 군 상부에 의해 서울로 가도 좋다고 기록된 허가증을 내보였다. 그 서류에는 돌아오는 것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없었다. 또한 나의 체류 기간도 제한되어 있지 않았다.

    몇 달 전에, 나의 군목 친구 하나가 드문 상황들에 대단히 귀중한 것으로 판명된 선택할 수 있는 정보를 건네주었었다. 그는 말했었다. “체스넛, 너는 미국 시민이잖아, 그러니 고위급 아래의 그 어느 누구든 만나기를 주저할 필요가 없어.”

    이 지식은 이 대면에서 내게 강한 확신과 굳센 감정을 갖게 했다. 나는 그 군목 사령관에게 한강을 건너도록 헌병이 호위한다면 서울을 떠날 것이지만, 나의 본청이 워싱턴 D.C.에 있는 권력자와 접촉한 직후 곧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반응은 분명 그 군목 사령관에게 충격이었을 것이지만, 내 마음에는 그런 확신이 있었다. 나로서는 그것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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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이라도 하나님의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하기 전에 행동했다. 하나님께서는 전적으로 통제하고 계셨다. 나는 언제나 그 군목 사령관이 다른 누군가의 요청에 따라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었다. 그 사령관은 내게 임시 삼십일 연장증을 발부해 주었다. 그 기간이 만료되었을 때, 그는 여덟 달로 갱신해 주었고, 갱신 후 그는 교체되었다. 새로운 사령관은 그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내게 영구 체류증을 발부해 주었다. 내가 서울에 체류하는 것을 불허하는 그 어떤 규정도 없었던 것 같았다.

    하나님께서는 계획을 세우시고 행동으로 옮기신다. 만약 다른 영향력들이 그분의 계획에 개입하려 하면, 그 상황을 변경시킬 수 있으시다. 그분이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고 계시다는 것을 기대하라, 그러면 그분의 은혜의 강물이 흐를 것이다.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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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근본적인 질문

 

    한 나라는 사람들 이상이다. 그것은 영원을 위해 운명 지워진 영혼들의 집합이다. 하나님에 대한 그 어떤 지식도 없이 그 영원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의 피를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가?

    이 근본적인 질문에 직면하며 드리는 개인적인 기도는 다음과 같았다. “주님, 사람들을 사람의 눈으로 보지 않게 하시고, 오직 당신의 눈으로 보게 하옵소서. 언제나 그들을 진리를 찾으며 영원에 매여있는 영혼들로 보게 하소서. 그리고 그들이 너무 늦기 전에 그 진리를 알게 하소서.”

    한국에 있던 4년 동안, 일본에 네 번 다녀왔다. 각 여행은 휴식과 회복의 시간일 것이었다. 그 여행을 위해 많은 계획을 세웠었지만, 실행되지는 못했다. 휴가는 두 주에서 석 주 간이었지만, 결코 진정으로 전혀 한국 선교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 마음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한국을 위한 부담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부담은 그 선교지에서는 분명하지 않았지만, 의무지를 벗어나면, 보고, 듣고, 만지는 모든 것을 한국의 상황과 관련시켰다. 내가 소속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은 언제나 기쁨이 넘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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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가 규합하다

 

    [195253] 내가 거주하고 있던 [용산구 한강로 165번지] [허홍의] 집에서 개척되었던 그 작은 교회는 다른 지역의 교인들에게 아주 넓은 영향을 주었다. 그 교회는 서울에서 첫 번째 하나님의성회 교회[남부교회]가 되었다. 그런 명칭이 공식적으로 채택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명칭은 출발지로서 그 교회에 합당한 것이었다. 우리는 한 작은 교회를 부산에 남겨 놓았었다. 그것은 그 도시에서 첫 번째 하나님의성회 교회였다. 다른 형제가 그런 일을 대구에서 시작했었고,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그들의 지역으로 가라고 권고받았다. 우리는 그때 구호품 조달을 포함하여 그들을 조금 도울 수 있었다. 그런 도움은 그들의 가족부양의 짐을 덜어주었고, 그들에게 목회를 위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약속된 때에 함께 예배하고, 방문하고,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 서울에 모이기로 했다[195348일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창립회]. 우리는 언제나 함께 식사했지만, 한국 음식은 내가 먹기에 힘든 것이었다. 모든 다른 형제들은 오랫동안 혼자 있었기 때문에 서울 본부의 안정성은 그들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서울의 그 교회가 설립된 지 약 여섯 달 지났을 때, 몇 교인들이 물침례받기를 요청했다. 허 목사는 얼마간 그들을 목회해 왔었지만, 그의 목회 직무의 이 예식은 수행하지 못했었다. 그는 내게 그를 위해 침례식을 집행해 달라고 요청했다. 왜냐하면 그는 물속에 서 있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육체적으로 매우 허약했고, 그래서 이 사역을 혼자 시도하기를 주저했다. 이런 직무가 수행되지 못했던 것을 조금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한 돕는 것을 기쁘게 여겼다.

    그래서 한 주일 아침에 우리는 교인 전체를 데리고 침례식을 위해 한강에 갔다. 몇 사람이 물속에 잠김으로써 주님의 명령을 순종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나에게 그것은 축복의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시키는 기쁨은 충만한 평안과 수행감을 주었다.

 

108

그 사랑스런 성도들은 마침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너무도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