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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 선교사 아더 B. 체스넛의 자서전 7

한오신 2024. 4. 28. 17:31

발에 신을 신기라

Put . . . Shoes on His Feet

[15:22]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 선교사]

아더 B. 체스넛

Arthur B. Chesnut

 

 

 

(Tulsa, OK: Christian Publishing Services, Inc., 1987).

 

이창승 역

2024.4.27.

 

* 이 번역은 한세대학교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송하종 목사가 역자에게 체스넛의 자서전을 기증함으로써 이루어지게 되었다. 본 번역은 체스넛의 자서전 중에서 한국편만 떼어낸 것이다.

 

 

성령침례

 

    하비 맥알리스터(Harvey McAlister) 형제는 전 세계 여러 곳에서 하나님께 쓰임을 받고 있던 전도자였다. 그는 일본 여러 지역에서 열린 집회들에서 우리와 함께 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에 사역을 위해 잠시라도 한국에 가야한다는 부담을 주셨다. 몇 통의 편지는 그가 오는 길을 열었고, 그가 서울에서 사역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그 집회들은 내가 살고 있던 교회[남부교회]에서 열릴 것이었다.

    [19536월 말?] 오전에 열린 첫 집회는 그 지역 설교자들[속성 순복음신학교학생들]만을 위해 계획되었다. 십오 명이 참석했는데, 당시에는 그들 모두가 목사로 섬기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 형제들은 그런 능력과 헌신에 가깝다고 인정받고 있었다.

 

하비 맥알리스터

 

 

    맥알리스터 형제는 성령침례에 관해 조심스럽게 안내했다. 그리고 청중에게 이 영적 은사를 받는 증거로 성경이 가르치는 것 이외에 어떤 것이든 수용하는 것을 경계하게 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이루어지도록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 형제들이 알지 못하는 방언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것을 듣는 것은 참으로 기쁨이었다. 오순절적 믿음으로 이미 이 경험을 했었던 두 목사[박성산과 배부근]는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임재에 의해 압도되었다. 그 집회들이 끝난 후 이 남자와 여자들은 자기들의 곳으로 돌아가 모든 사람들에게 그 메시지를 전했다.

    그때부터 또 다른 성회 계획이 세워지기 시작했다[1953107일경 제4회 성회]. 순천[광주]이 그 집회지로 선정되었다. 그곳은 남부 지역의 가장 중심에 자리 잡고 있고, 가장 많은 오순절적 그리스도인들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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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성회를 위해 큰 군용 천막을 빌렸다. 오백 명 이상이 모였다. 전황은 안정되었었고, 산악들에서도 여행을 방해하는 게릴라들의 활동이 없었었다. 그렇지만, 기차들과 버스들은 수리되지 않았었다. 음식과 의복은 여전히 문제였지만, 구호 활동은 그 문제를 어느 정도 해소시켰다.

 

제4회 광주대회 기념사진

 

 

 

    그 성회의 말미에, 침례식이 계획되었었다[19531012]. 참석자들 중 거의 절반이 침례받기를 원했다. 그 규모는 나를 놀라게 했다.

    이 침례식은 건기 동안에 수행되어서 강[무등산록 광주천]에 물이 많지 않았다. 아무도 그 침례식을 충족시킬 좋은 장소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저 강바닥을 향해 걸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한 곳에 잠길 만큼 충분한 물이 있었다. 우리는 그곳에 모였고, 침례식을 거행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나는 만약 현지 목사가 침례식을 수행할 수 있다면, 선교사는 그 침례식을 행하지 말고 그 목사가 그 직무를 수행하도록 격려해야 한다고 훈련을 받았었다. 그래서 한국인 목사들이 스스로 침례식을 감당하도록 격려하기 시작했지만, 그 지도자, 박 형제도 충분히 건강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하고자 했지만, 어떻게 행해야 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려달라고 했다. 그제야 나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침례식을 기다려 왔었는지 그 이유를 파악하기 시작했다. 나는 형제들에게 침례식이 어떻게 수행되어야 하고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형제[곽봉조]가 동의하지 않았다. 우리는 그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그리고 곧 침례식이 거행되었고, 형제들 중 둘이 물속에서 그 사역을 감당했다.

 

 

제4회 대회 말미에 무등산록 광주천에서 행해진 침례식

 

    나는 후에 침례가 그의 방식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그렇게 강경하게 주장했던 형제가 오직 예수”(Jesus Only) 운동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운동은 침례가 삼위일체의 이름이 아닌 오직 예수 이름으로 수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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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형제에게 사도행전에 기록된 대로 예수의 이름을 사용하는 것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의 가르침이 그를 잠시 붙잡아 놓은 듯 하였지만, 몇 년 후 그는 그 이전의 가르침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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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화 하기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국은 우리에게 한국 하나님의성회 사역을 위한 영구적 본부로 기능할 땅과 건물을 찾아보라고 재촉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지만, 땅과 건물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매우 적기도 했지만, 아무도 팔려고 하지 않았다. 그 지역에 땅 소유주는 매우 적었다. 많은 사람과 함께 몇 주 동안 말해본 결과 살 수 있는 땅 한 조각을 발견했다. 그 땅에는 부분적으로 불탄 골조 건물 하나가 있었다. 그것의 상태는 그런 건물을 위한 자재를 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매력적이었다. 우리는 그런 구조물을 교회와 사무실 공간으로 재건하기에 충분한 물자를 마련했다. 이 자산이 그 교단의 전반적인 가동을 위한 본부가 되었다.

    그즈음에 서울에 온 이래로 머물러 왔던 집에서 이사 나오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요청을 처음 받았을 때는 조금 놀랐었다. 그러나 곧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세군이 소유하고 있던 이층 벽돌건물이 내게 제공되었다. 그 건물은 컸고, 위치가 좋았고 살기에 알맞은 곳이었다. 여기서, 몇 년 만에 처음으로, 흐르는 물[수도]을 갖춘 부엌을 갖게 되었다. (그야말로, 흐르는 물을 갖지 못했었다. , 한 대야의 뜨거운 물을 쓰면 다른 물을 위해 뛰어야 했다!) 그런 안락함과 호사는 당시 한국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이었다. 첫해 대부분에는 씻기 위해 물을 데울 수 있는 수단조차도 갖지 못했었다.

    이 새로운 생활은 형제들과의 나의 관계를 개선시켰다. 형제들이 내가 허 형제의 집에서 사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꼈었는지를 인식하지 못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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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집단과 일해야만 할 때, 그들 중의 단 한 사람과 가까이 지내며 사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이라는 것을 배웠다.

    몇 형제들이 함께 그 사무실에 있을 때 한 낯선 사람이 방문했다. 그는 자신을 그 나라 서울의 남부, 얼마 떨어진 곳에 있는 교회의 목사라고 소개했다. 그는 계속 어떻게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매일 기도하기 위해 벽장으로 들어갔는지 말했다. 얼마 동안 이렇게 한 후 그는 그에게 아무 의미도 주지 않는 말로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을 알고 있었고, 혹시 이 경험이 성령침례가 아닌지 알기를 원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그의 회중과 그들의 경험에 대해 말했다. 그는 그들에게 이 사례를 말했고, 그러자 몇 성도들이 그가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기 위해 왔다. 그들 중 많은 성도들이 그 벽장으로 들어가 동일한 은사를 받았다. 이것이 계속되어 그 교회 교인들 반이 성령침례를 받게 되었다. 그 회중의 나머지 절반이 이 경험에 맞섰고, 교단에 그것의 확대를 멈추게 해달라고 도움을 청했다. 이 목사는 그의 교회에서 축출되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일하고 계시다.

 

이적이 일어난 집회

 

    다른 목사가 와서는 그의 교인들에게 오순절에 대해 가르쳐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서울에서 남쪽으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곳에서 살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별 어려움 없이 그의 교회로 차를 타고 갈 수 있었다. 그는 그가 언제나 신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던 좋은 회중을 갖고 있었다. 그는 두 개의 다른 교단들을 위한 성경학교들에서 가르쳐 온 경험이 있는 선생이기도 했다.

    그는 우리 사무실에서 어떻게 그의 교인들에게 사도행전을 가르치기 시작했는지를 설명했다. 그런데 그가 2장에 도달했을 때, 그는 하나님의 영에 의해 붙잡혔다. 그는 그 새 선교”(new mission) 사무실로 가야한다고 그리고 그곳 사람들에게 그의 회중에게 이 진리를 가르쳐 달라고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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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그는 내 앞에 앉아서 이렇게 질문했다. “오셔서 이 오순절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이런 것은 내게 엄청난 기회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더 알도록 돕기 위해 많은 것들을 포기할 수 있다.

    다음 주일 아침에, 통역자 유[유문회, 박성산의 자매의 남편] 형제와 나는 수원의 작은 마을로 갔다. 한 작은 이층 방에는 약 오십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노래 부르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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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 설교가 시작되는 때에 도착했다. 준비 찬송이 없었다. 주의 영이 임재하셨고, 주의력은 최고도에 달했었다. 이 나라의 집회들에서는 모든 사람이 가능한 한 가까이 바닥에 앉았었다.

    그 오후 집회는 두 시에 시작되었지만, 사람들은 한 시간 전부터 기도하기 시작했었다. 때때로 그들의 기도 소리는 통곡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소리는 영혼의 산고 또는 성령 안에서 신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며 기도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뭔가 제대로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병자들에게 기도 받기를 원하는 병자는 앞으로 나오라고 말했을 때, 그 사람들은 제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다시 기도가 필요한 사람은 옆으로 나오라고 말했다. 여전히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나서 나는 그들은 모두 병들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축복을 받기 위해 기도하기를 원한다는 말을 들었다. 기도를 시작하는 것 이외에는 할 일이 없었다. 우리는 그 꽉 찬 사람들 사이를 기어가야 하다시피 했지만, 끝까지 해냈다. 한 시간 이상 기도했다. 끝났을 때, 우리는 지쳐버렸지만, 성령님을 높여드렸다.

    집회가 끝났을 때, 한 자매가 손에 천을 들고 앞으로 나왔다. 그녀는 자기 딸이 9년 동안이나 자리에 누운 채 집에 있었다고 말했다. 열아홉 살인 그 딸은 서서히 일어나는 마비 증상에 시달렸다. 그 어머니는 사도들이 천 위에 기도하고 병자들에게 얹었더니 그들이 나았다고 들었었다. 난생처음 그런 요청을 받았었다. 그래서 그 이전에 해 보지 않았던 정도로 믿음으로 강하게 되기 위해 주님을 바라보아야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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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한 후 그 여인에게 그 기도 천을 그녀의 딸에게 가져가서 그녀 위에 얹고 기도하라고, 기억할 수 있는 한 우리가 했던 기도를 반복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그녀에게 만약 믿음을 가지고 그렇게 하면, 딸이 나을 것이라는 확신을 주었다.

    예배 후, 우리는 (한국식) 차와 크레커[아마도 숭늉과 누룽지]를 먹으러 갔다. 저녁 집회를 위해 돌아가고 있을 때, 그 여인이 그 교회 건물로 걸어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녀의 딸도 함께 오고 있었다. 그 딸은 조금 어색했지만, 자신의 발로 걷고 있었다.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뛸 듯이 기뻤다. 우리는 집회를 4일 더 열었고, 그 소녀가 매 예배마다 스스로 쉽게 걸어서 참석하는 것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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