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에 신을 신기라
Put . . . Shoes on His Feet
[눅15:22]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 선교사]
아더 B. 체스넛
Arthur B. Chesnut
(Tulsa, OK: Christian Publishing Services, Inc., 1987).
이창승 역
2024.4.27.
흐르는 물
도쿄에서 한국을 위해 기도하고 싶은 강한 욕구를 경험하기 시작했다. 성경학교에서 가르치기와 천막 집회로부터 성장한 작은 개척 교회를 목회하기에 바빴다. 여전히 경제대학에서 파트 타임으로 가르치고 있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의 순복음 사람들 가운데서 일할 선교사가 필요하다는 것을 날마다 생각했다.
그리고 그 일이 일어났다. 언젠가 내 방에서 하나님 앞에 홀로 있을 때, 그분께 한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도와달라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고 있을 때 갑자기 그분이 내 등에 어떤 짐을 얹어놓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내게 물으셨다. “네가 가면 되잖니?” 어떤 긴 논의나 주어진 약속도 없었다. 그저 단순한 질문이었다. 그 질문은 심지어 강의하고 있을 때조차도 온종일 떠올랐다. 왜 내가 가지 않아야 되고, 갈 수 없는지에 대한 이유들을 계속 댔지만, 그것들 중 아무 것도 그 명령적인 질문을 잠재우지 못했다.
차를 운전해 미군 본부로 가서 이민 담당과 이야기했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한국에 없던 사람들은 지금 그곳에 갈 수 없다는 말을 들었다. 지난 몇 달 동안 한국에 있었던 판매원들, 여행자들, 선교사들 그리고 몇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이 지식을 바탕으로 나의 지원이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부드럽게 주장했다. 만약 받아들여지면, 가능한 한 빨리 갈 태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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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삼 주 후, 나의 지원을 점검해 보았지만, 아무 대답도 듣지 못했다. 오 주 후에 다시 점검해 보았으나, 여전히 반응이 없었다. 그즈음에 조금 걱정이 들었다. 왜냐하면 이 의무는 내 삶의 한 부분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한 주 간을 더 보낸 후 다시 들렀다. 그때는 일반 담당자가 근무하고 있지 않았다. 한 부사관에게 나의 지원에 대해 물었다. 그는 그것에 대한 그 어떤 결정 기록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는 내게 말했다. “며칠 말미를 주십시오, 그러면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며칠 후, 나고야에서 그 부사관에게 직통 전화를 했다. 그의 대답은 “당신의 승인된 비자가 여기 제 책상 위에 있습니다. 가능하실 때 가져가십시오.” 나를 믿어주시라, 기분 최고였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기 시작했는데, 그 이후에도 계속 그랬다.
모든 일정들과 학교 강의들을 취소했다. 그리고 불과 이틀 후에 한국 부산으로 가는 비행기표를 샀다. 허락된다면 가겠다는 마음이었지만, 비자를 받기 전에는 다소 염려되었었다. 내가 가는 것은 단순히 모호한 가능성 이상이 되었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되었다. 그 사역을 위한 아주 강한 욕구가 솟아올랐다. 어떤 값을 치르든 그 필요를 성취시켜야만 했다.
[1952년 9월에] 부산 공항에 도착한 것은 아주 놀라운 경험이었다. 미공군 전투기들과 폭격기들이 어디든 앉아 있었다. 방어 무기들이 그야말로 그곳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것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더 많으리라 예상해야만 했었다.
아는 사람도, 마중 나온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택시를 잡아타고 [오스굳에게] 받은 주소지로 갔다. 그렇게 쉬웠다. 일본에서 극심한 가난을 보았었기 때문에, 한국에서 맞닥뜨린 전시 상황들은 내게 충격적이지는 않았다. 대규모의 피난민이 문제였고, 쓰레기나 오물도 무시 못 할 것이었다.
놀랍게도 한 독립 장로교회 목사의 집에서 지내야 했다. 그는 한국의 순복음 교역자들 중에서 가장 나이 많고 강한 사람[박성산?]의 조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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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친해졌고, 한국인들이 얼마나 진실하게 하나님을 섬기는 지를 곧 알게 되었다.
숙소는 방 하나에 테이블 하나, 의자 하나, 그리고 침대처럼 바닥에 깔 수 있는 둘둘 말린 이불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 건물은 그 교회의 목사관이었다. 옆집은 큰 정미소였다. 그 가까운 정미소는 나를 수많은 밤에 잠들지 못하게 했다. 그 지역에 살면서 정미소 쌀을 먹은 쥐들은 엄청나게 컸다.
그 젊은 장로교 목사는 영어를 잘 구사했다. 수년 동안 선교사들과 함께 동역한 결과였다. 그 가족은 나를 위해 음식을 준비해서 내 방으로 가지고 왔다. 그들은 모두 친절했지만, 언제나 앞문을 닫고는 안에서 빗장을 걸어 놓곤 했다. 그런 극단적인 가난과 굶주림의 상황에서는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물건을 가져간다 해도 아무도 심하게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한 번은 그 문이 열려진 채로 있었던지, 어떤 사람이 내 방에 몰래 들어와 벽에 걸려 있었던 내 옷들을 가져갔다. 다른 것들은 그대로 있었고, 세 가지 옷들만 없어졌다. 남은 옷은 내가 입고 있던 것뿐이었다.
다섯 명의 목사들을 만나기 원했다. 세 사람[박성산, 배부근, 곽봉조]은 일본에서 훈련을 받았었고, 다른 두 사람[허홍, ?]은 한국에서 선교사들에 의해 훈련을 받았었다. 그들 중에 아무도 부산에 없었기 때문에, 그 사람들에게 연락을 해야 했다. 전보를 보내서 가능한 한 빨리 오라고 전했다. 그들은 모두 내가 새로운 생활에 익숙해지기 전인 이틀이나 사흘 이내에 도착했다.
우리는 함께 앉아서 일본에 있는 친구들과 교회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이외에는 이야깃거리가 별로 없었다. 그 사람들은 끝없이 무언가가 필요했고, 나는 그들을 도우려고 거기에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오직 한 가지 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을 위해 만찬을 차려주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다음 날로 계획된 만찬에 필요한 것들을 사라고 얼마간의 한국 돈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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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박성산] 형제는 다른 사람들이 간 후에도 남았다. 그는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진지하게 이야기하기를 원했다. 그는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편지를 보내서 한국 오순절 성도들의 필요를 알린 사람이었다. 그는 오순절 신자 집단들 대부분의 영적 아버지였다.
후에 나는 그가 남한의 남단 지역 교회들 가운데서 신앙을 지키도록 돕는 직무에 헌신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외진 곳에 있는 교회들을 찾아가기 위해 한 번에 며칠을 걷기도 했었다. 철길은 적 전투기들의 가장 중요한 표적이 되었었고, 대부분의 기관차나 차량들도 파괴되었었다. 그 사람은 그 전쟁이 일어난 이래로 하나님의 살아있는 메시지였었다.
그는 방문했었던 곳들의 문제들과 상황들에 대해 말할 때면, 자주 드러내놓고 울었다. 그는 광적인 북한군 때문에 자기 집을 떠나 피난해야만 했던 사람들을 돕기를 원했다. 먹거리가 가장 큰 문제였다. 농경지가 매우 적었고, 그나마 남아 있는 것도 종종 산에서 내려오는 적군들에게 약탈당했다.
그는 내게 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물었다.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은 “한 100달러요, 그렇지만 미국에 있는 친구들로부터 얼마간의 지원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였다. 나는 의복과 음식 형태의 구호품을 기부받기 위해 미군 우체국에 등록을 해 놓았었다. 나의 요청에 응답을 받으려면 며칠을 기다려야 했다. 이 소식은 박 형제에게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실망들과 용감하게 맞서 싸워왔었고,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계속 꿋꿋하게 살아왔었다.
다음 날 차려진 스키야키[아마도 한국식 불고기]는 그 사람들과 형제와 같은 친밀한 관계를 갖게 만들었다. 그 모든 사람을 위해 충분할 만한 접시들은 없었다. 자그마한 공기밥은 각자에게 주어졌지만, 주요 반찬은 그 식탁의 한가운데에 놓였고, 모든 사람들은 그 반찬을 직접 가져다 먹었다. 놋쇠로 만든 가느다란 젓가락들이 사용되었는데, 그것들은 잠시 나를 어렵게 만들었다. 크고 나무로 만든 일본 젓가락이 처음 사용하는 사람에게는 보다 더 사용하기가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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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들은 그 소중한 음식을 완벽한 신사들처럼 먹었다. 각자는 그 주요 반찬에 똑같은 횟수를 접근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후에야 그 만찬은 그들이 몇 달 만에 배부르게 먹을 수 첫 시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 모두는 음식은 언제나 풍족하지 않다는 것을 배우는 시간이 있었을 것이었다. 돈은 충분해도 먹을거리가 없으면 음식을 만들어낼 수 없다.
며칠 후, 선교국으로부터 800달러 수표를 받았다. 당시 하워드 오스굳(Howard Osgood)이 선교국 극동아시아지부장이었다. 그는 그 필요에 빠르게 반응했던 것이다. 한국 돈으로 환전하려고 그 수표를 은행으로 가지고 갔다. (극심한 인플레이션 때문에) 돈의 양이 엄청날 것을 예상하고 그 돈을 넣어 나르기 위해 카메라 가방을 가지고 갔다. 그 수표는 수월하게 현금으로 바꿀 수 있었는데, 곧 여행 가방 하나를 가득 채울 수 있는 현금이 내 앞에 쌓였다. 어안이 벙벙했다. 은행 직원이 내가 당황한 것을 알아차렸다. 나는 그 돈더미가 카메라 가방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그 가방을 그 돈더미 옆에 나란히 놓았다. 그러자 여성들 중 한 사람이 보자기(이런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크고 사각형의 천) 하나를 가지고 와서는 그 엄청나게 큰 현금 덩어리를 말끔하게 싸서 넣었다.
그 천은 그런 필요를 위해 가장 편리한 것이었다. 왜 사람들이 동양철학은 상황에 유연한 것이라고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동양적 사고는 서양적인 것과 달라서 필요에 따라 늘리거나 줄일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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