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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 선교사 아더 B. 체스넛의 자서전 2

한오신 2024. 4. 28. 10:18

발에 신을 신기라

Put . . . Shoes on His Feet

[15:22]

 

 

 

[미국 하나님의성회 첫 공식 내한 선교사]

아더 B. 체스넛

Arthur B. Chesnu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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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 관심을 갖기 시작하다

 

    일본에서 2년 조금 넘게 있었을 때인 1950년 어느 날[625] 북한이 남한을 침공했다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 침공은 가족들이 학교, 일터, 장보기 그리고 방문 등 여러 가지 활동으로 흩어져 있던 한낮에[사실은 새벽에] 일어났다. 어떤 가족들은 수개월 동안 재회하지 못했거나, 어떤 사람들은 영영 가족에 합류하지 못했다.

    겁에 질린 사람들은 한강을 건너 남쪽으로 피난했다. 거의 마지막 한 사람까지 서울을 떠났고, 지극히 소수만 남았다. 선교사들은 그 수도에서 약 두 시간 떨어져 있는 해안가 캠프에 모였다. 개인적인 소지품을 담은 작은 가방만 들고 미군 버스를 타고 피난을 떠난 선교사들은 곧장 공항으로 옮겨졌다. 다른 모든 소유물들은 집과 함께 남겨져야 했다. 어떤 피난민들은 대만으로, 어떤 사람들은 일본으로 옮겨졌다.

    일본에 있던 선교사들은 그 침공이 일어났을 때 한 여름 집회에 참석하고 있었다. 한국에서 온 몇 사람이 그 집회에 참석했다. 그 집회에 참석하여 기도하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부흥의 열기에 휩싸였다. 모든 관심이 한국의 상황에 쏠렸다. 그 전쟁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 생각이 많았다. 그 집회는 훌륭했다. 뛰어난 강사들, 마음을 온전히 드러내는 기도, 그리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의 마음 안에 영적 의존의 진정한 부흥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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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부터의 간증들

 

    한국에서 온 한 선교사의 아내는 그 집회 끝 무렵에 간증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의 기도가 응답된 것 같습니다. 남편이 한국인을 위해서만 시간을 써버리려 할 때면 언제나 남편의 길을 막아섰었습니다. 그를 도와야만 했을 때, 그의 관심을 요구했습니다. 그가 자기 방식이 아닌 내 방식대로 일하기를 바랐습니다. 이기적이게도 한국 사람들 가운데서의 그의 사역을 방해했습니다. 그 모든 시간 동안 이런 생활에서 건져달라고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건짐을 받았습니다. 우리의 모든 소유물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남편과 가족들은 슬픔에 잠겼고, 저의 마음은 갑자기 과거에 행동했던 방식 때문에 괴로워졌습니다. 사단은 내게 다가와서 , 우리가 드디어 해냈어. 너는 이제 이 모든 것에서 자유를 얻었어. 언제나 바랐던 대로 이제 네 마음대로 갈 수 있고, 살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많은 영혼들을 잃고 마귀의 왕국을 세우는 결과를 가져올 무언가를 알지도 못한 채 기도해 왔던 것입니다. 이 비극은 내게 선교사의 마음을 갖게 하려고 일어났습니다. 이제 진정으로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여, 제가 한 번만 더 한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

 

    말할 것도 없이, 이 간증은 참석한 사람들 모두에 의해 받아들여진 아름다운 영적 은사로서 그 집회의 최절정을 이루었다. 그 간증은 거기 있던 모든 사람에게 무시될 수 없는 영적 특성을 주었다. 그것은 우리 모두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임을 깨닫게 만들었다. 우리의 삶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우리는 경건한 보살핌으로 그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 침략의 첫 소식이 전해졌을 때, 나는 도쿄에서 한 거리 집회를 인도하고 있었다. 몇 미군들과 일본인 학생들이 나와 함께 그 집회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런데 젊은 미군 병사가 갑자기 뛰어왔다. 그는 내가 눈이 쌓여 있던 지역의 타마가와 강[야마나시현, 가나가와현, 도쿄도를 남부를 흐르는 多摩川]에서 침례를 주었던 병사였다. 그는 그 집회들에 지각해본 적이 없었었다. 이 집회들은 그에게 소중한 시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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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그가 집회를 시작할 때 그곳에 없었다는 것은 아주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는 그날 지각했는데, 평소와 달랐다. 그의 첫 마디는 목사님, 한국에서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도 가야 합니다!”

    이 침략으로 남한은 충격에 빠졌고 퇴각해야만 했다. 마을들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파괴되었고, 오직 소수만이 기어서 또는 그 침략자들에게 자비를 구걸하여 탈출할 수 있었다. 남한 정부는 미군에게 개입을 요청했다. [1950년 7월 1일]  제1기병사단이 맨 처음으로 투입되었다. 그들은 불과 몇 시간 후에 출동해야 했다.

 

제1기병사단 마크와 깃발

 

[제1기병사단은 1921년 텍사스 포트 블리스에서 창설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애드미럴티 전투, 필리핀 탈환전과 같은 태평양 전선 전투에 참전했다. 이때에는 사실상 보병사단이 되어있었지만 삼각편제를 사용하는 보병사단과 달리 사각편제를 사용했다. 일본이 항복한 후 도쿄에 최초로 입성한 미군 사단이 되었다. 이후 도쿄 주둔군으로 있었다. 6.25 전쟁 당시 낙동강 방어선 때부터 투입되었다. 평양 탈환작전에 참가하여 많은 공적을 이뤘다.]

 

    이 갑작스럽게 일어난 사건들에 놀란 그 젊은 병사와 나는 물침례이래로 지난 몇 주 동안 일어났었던 것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미군 교체부대의 병사로 일본에 왔던 가를 회상했다. 이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는 명사수였다. 그는 명사수 메달들을 자랑스럽게 달고 다녔다. 그는 실전을 치루어 보지 않았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것에 직면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미처 깨닫지 못했었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내게 말했다. “목사님, 아무도 죽이고 싶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게 저의 일인데요.”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의 죄된 삶에서 형제를 불러내셨고, 형제가 누구이며 어디로 보내질지 다 잘 아십니다.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비전투부대를 요청하지 마십시오. 단지 하나님을 믿고 그분에게 순종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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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무엇을 하든, 모든 능력을 다해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는 나의 권고를 받아들이고는 그의 장비를 챙기기 위해 부대로 돌아갔다. 그 부대원들은 그날 밤 한국행 배를 타야 했다. 그는 주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실패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확신했다.

    2년 후, 그 젊은 병사는 교체되어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는 교체되기 전에 많은 다른 병사들처럼 오랫동안 전장에 있었다. 걱정되어 그에게 그동안 무엇을 했었는지 물었다. 놀랍게도, 그는 그 기간동안 그의 지휘관 차량의 운전병이었다고 대답했다. 그는 다른 지휘관들의 차량들도 운전하느라 전장에서 총 한 방 쏜 적이 없었다. 그는 이 경험에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길 때 그들을 돌보신다는 것을 배웠다. 그분은 우리의 도움이 필요 없으시고, 오직 우리의 협력을 원하신다.

 

 

군목들이 필요했다

    그 전쟁이 시작된 직후, 우리는 어떤 이유 때문에 한국에 파견되는 군인들을 위한 군목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필요를 그 직무를 담당하고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직접 들었다. 후에 신문 기사에서 그것을 읽었다.

    도쿄에 있는 모병소로 가서 내가 이 직무를 감당할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요청되는 교육도 받았었고 경험도 있었다. 하지만 병사나 중위가 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그렇지만 몇 가지 시험 후, 나의 폭넓은 경험 때문에, 나이 제한은 나의 사례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고, 따라서 내가 대위가 될 수 있다고 결정되었다. 논의가 삼일 간 계속되었고, 최종 결정이 내려졌을 때, 나는 갑자기 내 어깨에 아주 무거운 짐이 지워진 것처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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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심란해져서 모병소를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올 입대 명령 전화를 기다렸다. 군목 훈련소에 보내질 것이고, 그리고 군 생활을 위한 짧은 안내 과정을 밟을 것이었다.

    몇 선교사 친구들에게 이야기했다. 그들은 그 계획이 하나님께서 내게 진정으로 원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 자신이 그 전망에 매료되지 않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그저 하나님을 위해 필요한 것을 채우는 것을 돕고 싶을 뿐이었다. 아니면 그저 그런 지위가 제공할 경제적 안정을 바라고 있었던가? 이 문제에 대해 나도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알 수 없었다.

    심리사와 면담을 해야 했다.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었기 때문에 이 국면에서 조금 흔들렸다. 그럼에도 정해진 시간에 면담 담당자를 만나기 위해 도착했다. 그는 내게 아주 거칠게 굴었고, 나는 그가 나를 화나게 하려고 작정하고 덤벼들고 있다고 느꼈다. 그가 기독교에 공격을 퍼붓는 동안 나는 하나님에 대한 나의 헌신과 그분을 섬기겠다는 나의 신념 안에 굳게 서 있었다. 그 심리사가 말하는 모든 것으로 판단하건대, 그는 예수그리스도와 복음 메시지를 강하게 반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미군은 나같은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를 원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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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면담 말미에, 자기 견해에 따르면, 내가 군목에 지원하기를 바라는 단 하나의 이유는 수년 동안 내 안에 잠재되어왔었던 일종의 영웅적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그의 결론을 요약했다. 내가 일본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이 그에게 더 나은 것인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기독교 메시시는 일본인들에게 그리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기껏해야 일본인들의 종교 꾸러미에 다른 하나의 종교를 더해주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의 말은 나를 계속 화나게 했다. 나는 결코 그를 그런 결론에 이르게 할만한 말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면담은 끝나버렸고, 그 문제가 완전히 종결되었다고 생각해야만 했다. 면담 결과는 며칠 내로 집으로 보내질 것이었다.

    나를 믿어주시라, 그 사무소 바깥으로 나왔을 때, 나의 전 존재가 멍해졌다. 그저 그 건물에 기대어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려고 애썼다. 그러자 예수께서 구해주러 오셔서 내가 기도하며 보냈던 밤을 기억나게 하셨다. 이 문제에 대한 안내를 구하면서, 보다 강해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서서 얼마 동안 그 상황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일어난 일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완전히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면담 결과를 기다리고 있던 선교사 친구들에게 전화해서 알렸다. 그들 모두가 내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았다고 느꼈다.

    나는 미군으로부터 두 번째로 아주 호되게 거절당한 것이다. 모병소가 나를 미군에 부적합하다고 거절했었고, 이제는 군목에 부적합하다고 거절한 것처럼 느꼈다. 당시에는 그것이 내게 큰 충격이었다. 아직도 그 거절을 통보한 서류들을 갖고 있고, 가끔 꺼내 보고 있다. 그 사건에서 내가 배운 교훈은 군대나 군목으로 입대하려는 내 시도와 무관한 것이었다. 그보다는 내가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졌었다는 것이었다. 그 교훈을 따라 그 같은 일을 다시는 시도하지 않았다.
    그 전쟁이 이제 2년간 계속되어 교착상태에 빠졌다. 전선은 북위 38도 선에 걸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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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중부 지역의 산악들에서는 격전이 벌어지고 있었고, 남부의 고지대에서는 게릴라가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민간인들은 다시 일상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대부분은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즈음, 돌아오지 않은 가족들은 사망자로 간주되었다. 많은 곳에서 명백한 고아들이 친절한 사람들에 의해 돌봄을 받았고, 부모를 찾기 위한 노력이 병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