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시무어의 대응, 1913 - 1921
오순절 운동 안에서 수적으로 지배적인 백인들은 방언에는 가치를 두고 있지만, 시무어의 아주사 선교회에서 그렇게 강력하게 제시되었던 인간의 그리스도 안에서 평등과 하나 됨의, 새롭게 재발견된 공동체를 이상하게도 경시하거나 잊고 있다. 영향력 있는 백인 지도자들 사이에서 분열들이 증가할 때, 비판자들은 싸우고 있는 모든 파벌들이 방언을 말한다는 것을 지적했다. 그들은 이것이 방언 현상을 불신하게 만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것은 성경 시대 고린도 교회의 다툼, 논쟁, 분열, 방언 강조, 그리고 사랑 결여라는 경험이 다시 나타나고 있는 것 같았다.
백인들은 방언이 오순절 운동의 독특한 특징(the distinctive feature of the Pentecostal movement)이라고, 그리고 그 운동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큰 걸림돌”(great stumbling block) 또는 “부딪치는 바위”(rock of offense)라고 인식했으며, 자주 언급했다. 글로솔라리아가 많은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 불쾌를 일으킨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그 운동의 흑인 기원들에 그리고 인종혼합적 친교에 놓여 있다. 흑인 기원들은 외부인들로부터 경멸받았을 뿐만 아니라, 오순절주의자들 자신들에게 곤혹스러움과 부끄러움을 의미했다. 방언으로 자신들의 어려움을 극복하려 했던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종문제와 계속 씨름했고, 결국 그 문제에 의해 패배했다. 로렌스 존스(Lawrence A. Jones)는 그 문제의 심각함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교회들 안에서 흑은-백인 관계들에 있어서 걸림돌은 모호하며 그리고 종종 명백한 흑인 열등이라는 가정이었다. . . . 코네티컷, 뉴헤이븐에 사는 한 배운 성직자는 “부유함도, 교육도, 종교도 흑인이 백인과 평등하게 살기적합하게 만들 수 없다”고 선언했다. 다른 교구 목사는 자기 생각에, 그리스도께서 두 가족을 수용할 수 있는 집에 사신다면, 그분은 흑인 가족을 들이기를 거절하실 것이라고 [말했다.]
한 흑인이 교회를 교회 되게 하고 싶은 꿈, 새로운 기독교 공동체 안에 의미있는 평등을 확립시키려는 꿈은 미국 안에, 기독교 안에, 그리고 오순절 운동 자체 안에 모든 다른 문제 배후에 숨겨져 있던 공격적인 백인 우월주의라는 무서운 진실과 맞부딪쳤다. 듀보이스는 그것이 무엇과 같았는지를 묘사했다.
. . . . 해방된 노예들의 노래들의 영적 분투는 그들의 짐을 자기들의 힘으로는 거의 감당할 수 없는 영혼들의 진통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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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피부색의 베일 안과 밖에서 변하고, 빠르게 변하고 있지만, 같은 비율이나 같은 방식으로 변하지는 않고 있고, 그래서 이것은 그 영혼에 대한 기묘한 왜곡, 기묘한 의심과 황당함을 낳을 것이다. . . . 그의 권리들과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이상들이 짓밟히고 있다는 것을, 대중의 의식이 그의 정당한 호소에 더욱더 귀를 닫고 있다는 것을, 편견, 욕심, 그리고 복수라는 모든 대응적 세력들이 날마다 새로운 힘과 동맹을 얻고 있다는 것을 느끼면서, 흑인들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딜레마에 빠졌다. . . . 여기서 흑인의 갈망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들의 경험의 풍부하고 쓰라린 깊이, 그들의 내적 삶의 알려지지 않은 보물들, 그들이 보아온 본질의 이상한 왜곡은 세상에 새로운 관점을 제공할 것이고,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그들의 소중한 사랑, 삶, 그리고 행위를 소중한 것으로 만들 것이다.
그러나 시무어는 거의 존중을 받지 못했다. 소수만이 그의 지도력이나 성취가 값진 것이라고 인식했다. 그의 “새로운 관점”은 지속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참으로, 이것은 결코 바람직한 딜레마가 아니었다.
시무어는 그가 그 시작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주사 선교회를 모든 인종들과 사람들에게 계속 개방하면서 아주사 선교회를 지속적으로 목회함으로써 증대되고 있던 위기, 인종적 분열, 그리고 거부에 대응했다. 미국은 점차 백인 우월주의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오순절운동은 피부색에 의한 경계선을 끌어안았지만, 시무어는 변하지 않았다. 아주사는 공개적인 채로 남았지만, 모든 인종의 많은 사람들은 그 새로운 타입의 친교에 관심이 없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시무어는 자신의 방식에 계속 충실하기로 작정한 듯 했다. 그 자신의 깊은 길 속에서, 그는 자신을 통해 오순절운동을 진정한 교회로 회복시키는 사도라고 믿었다.
아주사 자체에서 시무어는 참석자와 사역자들의 감소에 직면했다. 더함의 떠남으로 그의 스테프의 삼분의 이가 빠져나갔고, 그러나 그의 활동적인 서신교환을 위한 비서를 포함하여 적어도 몇 명의 전임 사역자들은 남았다. 고든 자매(sister Gordon)는 집사로 봉사했고, 드레퍼 자매(sister Draper)는 마룻바닥들을 닦아 빛나게 유지시켰다.
“시계 주위에서”(around the clock) 예배 집회들은 3년 동안 거의 그치지 않고 열렸지만, 점차 감소하여 결국 사람들은 매주 한 번 주일에 온종일 만나게 되었다. 시무어는 저녁 집회에서 칠판과 분필을 사용했다. 그는 정기적으로 주중 집회들을 늘리려 했지만, 그것에 대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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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적어도 한 번 아주사에서 얼마간 떨어져 있는 곳에 다른 로스앤젤레스 선교회를 시작시키려 노력했지만, 단지 아주사에서 온 서너 명이 참석했을 뿐이었고, 몇 번의 집회들 후 그 노력은 끝났다. 시무어는 주기적으로 모든 철야 기도회와 여러 집들에서 열리는 금식기도회를 이끌었다. 결국 아주사에는 보니 브레 기도회에 참석했던 대부분이 여성들인 6-8명의 백인들을 포함한 약 스무 명이 참석하게 되었다. 영광스러웠던 시절에 방문했던 사람들이 때때로 참석했다. 그 방문이 있을 때면 그들 모두는 대단히 기뻐했는데, 특히 시무어가 기뻐했다.
1906년 초에 헌금은 그 건물을 단지 일 년 만에 매입하는 것을 포함하여 모든 필요에 충분했다. 이제, 그 선교회는 생존을 위해 분투해야만 하게 되었다. 초기의 기부는 벽들에 못으로 고정된 우편함들을 필요로 했다. 그 우편함들 위에는 “주님과 화해하십시오”라는 푯말이 있었다. 예배 시간 동안에는 헌금을 거두지 않았다. 현금이 그 우편함들을 가득 채웠고, 때때로 이웃 사람들이 그 돈을 훔치기도 했다. 이런 절도는 많은 선도적인 성결교회들에서 행해지는 것처럼 사람들이 예배 시간에 제단에 가다가 그 위에 펼쳐진 성경 위에 헌금을 놓는 방법을 택하게 했다. 마지막 시기에 헌금은 아주 적어졌는데, 아마도 주일에 단 75센트에 불과했을 것이다. 시무어는 때때로 “최소한의 경비라도 부탁합니다”라고 말하며 회중에게 헌금을 더 해 달라고 마지못해 요청하곤 했다. 요리에 큰 재능이 있던 제니 시무어 부인(Mrs. Jennie Seymour)은 일을 해야만 했다. 주일에 아주사에 참석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그녀는 읽는 사람들을 격려하는 편지를 썼을 것이다.
로스앤젤레스는 그 시기의 최악의 인종적 폭력에 의해 영향을 받지는 않았었지만, 시무어는 상당한 전국적 전도 여행을 통해 직접 그런 미국의 상황을 알게 되었다. 그 전도 여행들에 대한 기록은 매우 적게 남아있지만, 그 여행들은 자주 있었고, 길었다고 알려진다. 시무어는 1912년에 더함이 그의 십 주 동안 아주사에 머물기 시작하기 전에 얼마 동안 나가 있었고, 그렇게 빨리 돌아오지는 않았다. 바디가 1912년에 아주사에 도착했을 때, 시무어는 다시 여행하고 있었다. 그는 사역을 위해 여러 각 센터들에 몇 주간씩 습관적으로 머물렀고, 다른 곳에서는 보다 짧게 머물렀다.
시무어는 정기적으로 인디아나폴리스, 시카고, 신시네티, 뉴욕, 워싱턴, 발티모어, 휴스턴, 그리고 많은 다른 곳들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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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의 친구이며 후에 감독이 된 가필드 헤이우드(Garfield T. Haywood)와 함께 인디아나폴리스에 있는 화이트 리버 카날에서 새신자들에게 침례를 주었다. 그는 휴스턴의 브룬너 타버나클에서 설교하기도 했다.
1920년 경에, 후에 감독이 된 젊은 프랑크 클레몽스(Frank Clemmons)가 뉴욕의 할렘 안의 135 스크리트와 레녹스 아베뉴가 만나는 코너에 서 있었다. 한 낯선 사람이 걸어왔고, 그들은 말하기 시작했다. 그 낯선 사람은 시무어였고, 135 스트리트에 있는 엘더 쿡(Elder Cook)의 교회에서 설교하고 있었다. 시무어는 그 청년이 그리스도 안의 하나님의 교회 신자인 것을 알고는 “오, 내가 얼마나 메이슨(Mason) 형제를 보기를 바라는지 모릅니다”라고 말했다. 놀랍게도 클레몽스는 메이슨이 뉴저지, 나약 근처에 있는 엘더 제임스 웰스(Elder James Wells)의 가스펠 타버나클에서 한 컨퍼런스를 열고 있다고 말했다. 곧 클레몽스와 시무어는 나약으로 향했다. 두 오랜 친구들인 시무어와 메이슨이 서로를 보았을 때, 그들은 주체할 수 없는 기쁨으로 행복하게 포옹하며 함께 주님을 찬양했다.
분명 제니 시무어 부인은 그 여행들 중 어떤 여행들에 남편과 함께 했을 것이다. 그녀는 바디가 방문했을 때는 아주사에 있었지만 1912년에 더함이 아주사에 도착했을 때는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다. 시무어가 출타했을 때 아주사를 방문한 것에 대한 바틀맨의 언급은 그녀가 그곳에 없었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그녀는 강력하고 흥미를 자아내는 연사였고, 아름답게 찬양했으며, 그들의 결혼 전에도 한 전도자로서 여행했었다.
시무어는 그 시기에 더욱더 읽고 생각하며 시간을 보냈다. 1914년 5월에, 미국의 인종적 긴장들이 증가했을 때, 그리고 오순절운동이 점차 이데올로기적 전선을 따라 분리되었을 때, 시무어는 아주사 『법인 정관과 헌법』(Articles of Incorporation and Constitution)을 개정했다. 그것은 본래 1907년, 3월에 캘리포니아 주에서 아주사 재산의 매입을 허가받기 위해 제출되었는데, 이사회, 공동의회, 제직회, 선교회를 포함하고 있었다.
1914 개정판은 두 가지 중요한 변경을 포함했다. 첫째로, 아주사의 인종적 요인을 명시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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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사도적 신앙 선교회는 . . . 캘리포니아 주의 흑인들의 유익을 위해 운영되어야 하지만, 그러나 모든 지역들, 지방들, 그리고 나라들의 사람들도 환영받아야 한다.
이 진술은 아주사의 법적 근거를 더욱 날카롭게 만들었지만, 사실 본래 보니 브레 거리에서 흑인들이 백인 방문자들과 함께 기도한 이래로 잠재해 있던 실제를 분명하게 만들었을 뿐이었다.
둘째로, 그 개정은 아주사의 중요한 권리를 사망이나 해임 시 근본적으로 그 목적을 위해 지명된 부감독에 의해 승계될 감독(Bishop)으로 알려질 한 지도자에게 분명하게 귀속시켰다. 그 첫 감독은 아주사 선교회의 설립자와 조직자여야 했다. 감독, 부감독, 그리고 이사들은 “흑인”이어야 했다. 그래서 시무어는 아주사 선교회는 그것의 본래 목적에 충실하게 남아있게 하려고 노력했고, 그 목적을 이해하거나 받아들이지 않는 백인들에 의해 점령당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시무어는 주교직을 제공하는 데 있어서 존 웨슬리의 선례를 따랐다. 웨슬리는 미국 감리교의 필요가 영국 성공회 주교의 안수 의지보다 커졌을 때 그 직함보다는 실질적 직책을 맡았다. 웨슬리는 신약성경에서 발견되는 그 개념에 대한 그의 관점에서 권위를 찾았다. 미국 지도자들은 첫 조직 모임이었던 1784년 성탄절 컨퍼런스에서 그 직함을 수용했다. 아프리칸 감독감리교회(the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설립자 리차드 알렌(Richard Allen)은 그들의 첫 총회에서 감독(Bishop)이라는 직함을 승인했다. 아프리칸 감독감리교회(자이언), 그리고 기독교감독감리교회와 같은 다른 흑인 감리교 교단들의 지도자들도 감독들이 되었다.
시무어는 자신을 습관적으로 감독이라고 칭하지는 않았지만,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후의 사건들이 보여준 것처럼, 이것은 선견지명이었다. 감독직과 이사직을 “유색인”(people of Color)에 제한한 것은 인종적 배타성을 주장하는 것이기 보다는 아주사 선교회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이것은 “모든 지역, 지방, 나라들의 사람들”을 법적으로 환영한 것에서 엿보인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한 백인, 루이스 오스터버그(Louis Osterberg)의 이름이 첫 번째 그리고 마지막 이사진 명단에 올라있던 것에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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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어는 1915년에 95쪽의 『아주사거리 사도적 믿음 선교회의 교리와 계율』(Doctrines and Discipline of the Azusa Street Apostolic Faith Mission)이라는 단행본을 출판했다. 이 책은 중요한 자료인데, 전체적으로 『감독감리교회의 교리와 계율』(Doctrine and Discipline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의 개요를 따르고 있었으며, 그의 근본적인 감리교 성향을 보여주었다. 시무어는 그 감리교의 계율을 그의 목적들을 위해 수용하거나 변형시켰다. (1) 인종적 편견을 극복하기, (2) 일치를 달성하기 (3) 글로솔라리아에 대한 과도한 강조들을 인식하기라는 세 가지 주요 관심사들이 드러났다.
시무어의 인종적 편견 극복에 대한 관심은 명확하게 진술되었다.
우리 유색 형제들(our colored brethren)은 진리 안에서 우리의 백인 형제들을 사랑하고 존경해야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제한을 받지 않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백인 형제들은 진리 안에서 그들의 유색 형제들을 사랑하고 존경해야 한다. 그래서 성령께서 근심하지 않게 해야 한다. 나는 우리가 더 이상 불화와 분열의 영을 갖지 않기를 바란다.
W. J. Seymour
그 서명은 그의 관심사를 강조했다. 이 진술의 온건함은 1915년에 일어났던 미국적 인종 폭력의 절정과 그리고 오순절 운동 안에서 증가하고 있던 인종 차별과는 날카롭게 대조된다. 아주사에서 과거의 고통스런 사건들에 대한 시무어의 유일한 언급은 목차에 덧붙여진 간단한 언급이었다.
우리들 중 그 누구도 포도원에서 우리의 형제들을 도둑질하는 아합과 같지 않기를 바란다. 왕상 21:14-20. 당신의 죄가 반드시 밝혀질 것이다. 민 32:23. 유다의 죄는 밝혀질 것이다. 가인의 죄도 밝혀질 것이다.
일치에 대한 더 큰 관심은 그 이전의 문구들에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영적 능력의 기초가 기술된 그 이후의 문구들에서도 보인다.
나는 성령의 능력을 통해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한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함께 모일 사람들을 얻을 수 있는 곳에서마다, 성령께서는 고넬리우스의 집에서처럼(행 10:45-46) 그들에게 임하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 사도행전 2:42-47에서처럼 하나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시무어는 일치의 사례들을 오순절의 유대인 무리로부터 취하지 않고, 예루살렘의 3,000명의 인종혼합적 무리들로부터 그리고 그 이후 고넬리우스의 집에서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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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어가 표명한 가장 큰 관심사는 그가 글로솔라리아에 대한 오해라고 보았던 것이었다. 그는 아홉 차례의 다른 언급들에서 방언을 성령침례의 유일한 증거로 보는 것에 경고했고, 이것을 처음부터 이루어진 수정으로 기술했고, 진실의 결여와 방언의 호환성을 서술했고, 그리고 성령침례의 많은 다른 더욱 필수적인 증거들, 특히 기독교적 사랑을 언급했다.
이 관심사들은 시무어의 오순절운동에 대한 견해와 지배적인 백인 지도자들의 견해 사이에 넓은 간격을 입증했다. 그리스도인들, 일치, 그리고 이 맥락 안에서 글로솔라리아 사이의 사랑에 대한 그의 가장 큰 바램은 점차 환영을 받지 못하고 경시되었다.
무명과 쇠퇴 중에서도, 시무어와 아주사는 참된 영적 능력을 나타냈다. 예를 들면, 23살의 한 젊고 매력적인 여성, 사디 잠보(Sadie Jambor)는 중서부에서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그녀는 자신을 철두철미한 폴란드 로마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했으며, 정기적으로 성당에 다녔다. 그녀는 또한 아주사에서 성령침례를 받았던 첫 백인 여성, 메이 에반스(Ms. May Evans)의 집에서 머물었었다. 에반스는 그녀를 아주사 거리 312번지에 실어다 줄 전차를 타고 내리는 데 약간의 어려움을 겪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한 젊은 여성에게 자기를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잠보는 수락했고, 1916년 한 주일에 아주사 선교회로 가는 에반스와 동행했다. 그녀는 “나는 이전에 개신교회에 가본 적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 쓰러질 듯한 오래된 건물 안에서, 소수의 사람들 가운데서, 그녀는 호의적인 인상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찬양이 이상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것을 느꼈고, 그녀의 당황과 주저를 극복시키는 사랑을 느꼈다. 그녀는 성령께서 어떤 사람 안에 거하시기 위해 실제로 오실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녀는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가지고 계시는 모든 것을 원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특히, 그녀는 방언을 말하고 싶었지만, 시무어 목사는 그녀에게 다음과 같이 주의를 주었다.
이제, 사디 자매님 이것을 보십시오, 당신은 방언을 바라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구하십시오. 주님을 구하십시오. 그분은 유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는 그녀를 위해 기도했고, 곧, 그녀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 것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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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천국 전체가 내려온 것 같았다. 나는 그저 모든 사람을 사랑했다. 나는 그들 모두를 껴안아 주고 싶었다. 이것은 압도적이었다. 주님의 기쁨은 엄청났다.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 세분 모두가 나와 며칠간 머무셨다. 밤낮으로 주님의 임재와 영광이 그곳에 있었다.
이 경험의 한 결과로서,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의절했다. 흥미롭게도, 그녀는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차별의 벽이 사라질 것이다”는 확신을 주셨다고 말했다. 후에, 그녀의 모든 친척들이 캘리포니아로 이사했고, 완전한 화해가 뒤따랐다.
잠보는 1916년에서 1917년까지 여덟 달 동안 정기적으로 아주사 선교회에 참석했다. 그녀는 한 동안 주일 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녀는 시무어가 오순절 운동 안의 일치를 위해 모든 로스앤젤레스 오순절 지도자들의 모임을 소집했다고 말했다. 단 두 명이 왔다. 시무어는 후에 그는 그들이 올 것이라고 정말로 믿지는 않았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기회를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느꼈었던 것이다. 그녀는, 만일 그가 백인이었다면, 더 많은 관심을 받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선교회 건물에서 살고 있던 사람들 중에 비서실장으로 섬기던 한 젊은 백인 여성을 기억했다. 그 어머니는 물론 활동적으로 참석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는 내 딸을 이 사역을 위해 바쳤다”고 말했다.
그녀는 후에 이사해 나갔지만, 1918년 에이미 샘플 맥퍼슨의 첫 로스앤젤레스 캠페인에서 “시무어 형제”를 보고는 기뻐했다. 그는 단지 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석했다. 그리고 그는, 희귀한 개인적인 언급의 하나로, 자기가 그때 완전히 건강하지는 않다고 느꼈었다고 말했다. 그의 심장이 좋지 않았던 것이다.
그즈음, 오순절 운동은 확연하게 달라졌다. 인종들이 분열하고 있었을 뿐만아니라 그것의 본래 정신도 결여되었다. 한 관찰자는 다음과 같이 썼다.
하나님께서는 1906년에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의 곧 오심을 각성시키셨다. 이제 9년 더 가까워졌다. 그러나 이 점에서 그 열심은 현저하게 사그라들었다.
1914년에 바디(A. A. Boddy)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시작된 그 운동에 대한 비판적 분석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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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방언을 말하는 사람은 오순절 날의 백이십 명과 같은 축복과 동일한 정도의 복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이 있어 왔다. 그러나 이 우리의 시대에 표적들이 따른다는 오순절의 가르침은 세상을 복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예루살렘에서 나왔던 혼과 영의 복된 조화를, 그리고 거짓 없는 형제 사랑을 따르지 않았다. 그 대신, 널리 퍼진 혼란과 충돌이 일어났고, 방언은 많은 선교회들과 성회들에서 울리는 꽹과리와 소리 나는 심벌즈가 되어 왔다. 거기에는 무언가 지극히 중요하고 본질적인 잘못이 있다는 것은 자명하다.
이 비판은 방언의 중요성, 본성, 그리고 사용에 있어서 “과대평가”를 인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비판은 “방언이 성령침례의 확실한 성경적 증거”라는 이념에 이의를 제기했다. 바디 자신은 방언은 가시적인 사랑에 의해 확증될 필요가 있다고 믿었다.
시무어는 1920년에 아주사 거리에서 “제14회 로스앤젤레스 성령 부으심의 기념집회”와 성경 컨퍼런스를 열었다. 그 프로그램은 주 예수의 묵시적 재림이라는 주제에 집중했다. 그 컨퍼런스의 기도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였다.
그 집회의 찬양들은 시무어가 이 시기에 그의 사람들의 위대한 흑인 영가들에서 힘을 얻었다는 것을 보였다. 그 컨퍼런스 찬양집의 첫 영가는 “거기 너 있었는가?”(Were you there)였다. 그리고 두 개의 영가, “예루살렘을 걷기 원하네”(Walk in Jerusalem) 그리고 “신자되기 원합니다”(I want to be a Christian)가 뒤따랐다. 그 찬양집은 한 영가로 끝났는데, 그 곡(I couldn’t hear nobody pray)은 지금까지 작곡된 노래들 중에서 인간의 고독을 가장 우아하게 표현한 것일 것이다.
합창 오 주여!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없네;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없네,
오 홀로 저곳으로 내려가네,
아무도 기도하지 않는 것을 들을 수 없네.
후렴 1 골짜기에서!
무릎을 꿇고!
짐을 지고!
나의 구원자! 오 주여!
후렴 2 차가운 물!
요단강에서!
건너가!
가나안 땅으로! 오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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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렴 3 할렐루야!
고통은 끝나네!
천국에서!
내 예수님과 함께! 오 주여!
당시에 흑인 영가들은 구시대적인 것으로 여겨졌고, 심지어 많은 흑인들도 영가들을 별로 가치 있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시무어는 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시무어는 1921년에 그의 마지막 미국 전역 캠페인을 했다. 조지아나 페프시코 부인(Mrs. Georgiana Aycock nee Pepsico)는 흑인과 백인으로 함께 구성된 그녀의 크리스찬 엔 미셔나리 얼라이언스 처치(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Church)에서 그가 두 주간 설교했던 것을 기억했다. 시무어는 콜럼버스(Columbus)에서 몇 주간 머물렀고, 떠나기 전 다른 교회들을 방문했다. 집회들은 매일 저녁에 열렸고, 주일에는 세 번의 집회가 있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영광은 그 사람의 얼굴에 나타나 있었다. 그는 천국에서 온 한 천사와 같이 보였다. 그에게 들었었던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듣기를 원했다. 시무어 형제는 헌금을 원하지 않았다. 때때로, 그들은 그가 헌금을 가져가게 했다. 그는 자신을 높이는 사람은 아니었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당신이 그를 그 문에서 만난다면,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과도한 감정을 믿지 않았다. 한 여성이 일어나 외치기 시작했고, 주위를 돌아다니며 다른 사람들을 만졌다. 그는 그녀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앉아 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육적인 것입니다. 당신은 그것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앉았다. 시무어 형제는 진정한 감정을 믿었다. 그는 좋은 분별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얼굴을 본다면, 진정한 것이 진행되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그것을 거의 알아차리지 못하겠지만, 그는 하나의 눈 만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하나의 눈으로 많은 것을 보았다. 그는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는 말하기를 좋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나님께 신실하게 주님에 대해 말할 것이다. 그는 “펲시코 자매님, 무엇을 하든, 하나님께 신실하십시오”라고 말했다.
시무어는 펲시코에게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해 와서 아주사 선교회 스텝진에 합류하도록 초청했다. 그녀는 그 제안을 거절했지만, 나중에 많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녀는 시무어가 콜럼버스에 머무는 동안, 그는 계속 잊혀지지 않는 후렴구를 갖는 한 매우 좋아하는 찬양을 요청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들은 그 찬양을 거의 매일 저녁에 불렀고, 찬양대도 여러 번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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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이 뷸라(Beulah)의 땅 아닌가,
복된, 복된 빛의 땅,
꽃들이 영원히 피어나는 곳,
해가 언제나 빛나는 곳.
시무어는 1922년 여름에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왔는데, 지치고 야위어 보였다. 그는 그 대회에 참석했고, 보통 그랬던 것처럼, 강단에서 알아차려지지 못한 채 회중 가운데 한 사람으로 앉아있었다. 그 “영혼의 독특한 고통이” 그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5) 시무어의 소천, 1922년 9월 28일
1922년 9월 28일 아주사 선교회 건물에서, 시무어는 갑자기 심장에 격심한 고통을 느끼고 숨을 헐떡이게 되었다. 사역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월터 보이드 박사(Dr. Walter M. Boyd)에게 뛰어갔다. 그 박사의 병원은 세 블록 떨어진 119 1/2 사우스 스프링 스트리트(119 1/2 South Spring Street)에 있었다. 그 박사는 시무어를 살펴보고는, 편안해진 그를 떠났다.
그날 오후 5:00시에 시무어는 일어나 앉아 한 편지를 불러주었다. 다른 강력한 고통이 그의 심장을 쳤다. 그는 숨을 쉬려고 씨름한 후 52세, 4달, 그리고 26일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10월 2일 소박한 삼나무 관에 넣어져 에버그린 묘지(Evergreen Cemetery)에 안장되었다. 약 200여 명이 그 장례식에 참석했는데, 대부분 흑인들이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원했다. 많은 간증이 있었다. 긴 예식 후, 마지막으로 제니 시무어 부인(Mrs. Jennie Seymour)가 일어나 모든 것을 마무리 했다.
10월 28일에 시무어의 소박한 삼나무 관은 제거되고, 보다 비싸고 영구적인 콘크리트 납골로 대체되었다.
구획번호 3332( Section B, Lot 3332 ), 시무어의 무덤은 많은 나라들과 대륙들에서 온 무덤들 가운데 놓여있다. 담백한 회색 화강암 비석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있다.
우리의 목자
윌리엄 J. 시무어 목사
1870년 5월 2일
1922년 9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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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어의 추종자들은 그가 낙담하여 심장 마비(broken heart)로 죽었다고 믿었다. 낙담에 대한 간단한, 사전적 정의는 “슬픔, 비통, 또는 절망에 의해 압도당하다”이다. 이것을 시무어의 정확한 상황으로 제안하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천 년 전에 한 현자는 “상처받은 영혼을 누가 감당할 수 있겠는가?”라고 엄중하게 물었다. 아주사의 정신과 그 운동 안에서 증가하던 인종적 그리고 이념적 분열 사이의 대립은 그의 마음을 부수었다.
시무어의 소식지의 첫 호에서, 그는 아주사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
많은 교회들이 오순절을 위해 기도해 왔었고, 오순절이 도래했다. 이제 질문은, 그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것인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바라지 않던 방식으로 응답해 오셨다. 그분은 마구간에서의 옛 탄생처럼 겸손한 방식으로 오셨다.
해가 거듭될수록, 그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고통스럽게도 분명해졌다. 교회들은 상당한 정도로 시무어와 아주사를 거부했다.
더욱이, 오순절 운동 자체는 인종적 경계선을 따라 분열되었고, 시무어를 잊었다. “오순절은 국가, 피부색, 언어, 성 그리고 사회적 계급들이라는 장벽들을 무너뜨리는 사건이다”라는 홀렌베거의 말이 옳다면, 그 운동은 미국 백인들의 인종적 태도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그 자신의 뿌리들을 부인한 것이다. 이 사태는 이해할만한 것이었을지라도, 시무어에게는 결정적인 낙담 이외에 다른 것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내 친구들의 집에서 상처를 입었다”는 말은 적절한 기술일 것이다. 어떤 적의 공격도 한 친구의 약간의 공격만큼 상하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시무어는 1906년에서 1909년의 드높은 희망들 사이에서 그리고 그 이후의 고통스러운 실제 사이에서 짓밟혔다. 백인 오순절 지도자들에 의해 받아들여진 인종 차별에 의해 전에 없게 찢어졌던 나라에서, 그는 피부색에 의한 경계선을 따라 십자가에 못 박혔다. “국가, 피부색, 언어, 성과 사회적 계급의 벽들”을 넘어서는 기독교적 일치의 비전에 전적으로 헌신했던 사람을 위한 자리는 없었던 것 같았다. 그는 또 다른 교파나 분파에는 관심이 없었고, 다만 그가 이해한 대로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진 믿음”의 회복에 관심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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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무어는 교회를 위한 그들의 비전적 이념과 다른 것들과 나란히 또 다른 분파나 교단이 될 불쾌한 숙명 사이에서 선택하도록 억압을 받았던 종교개혁가들의 옛 딜레마에 직면했었다. 시무어는 또 다른 분열보다는 죽음을 받아들였다. 그의 단순한 기독교적 평등에 대한 비전은 실현되기에는 너무 앞서 있었다. 또는 사도적 기독교의 본래적 가치를 엿본 시무어는 그의 시대에 너무 뒤처져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경우든, 그의 비전은 깊은 고독과 마음의 고통을 일으켰다. 그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바틀맨은 1925년에 시무어가 직면했던 것에 대한 설득력 있는 분석을 인용했다.
오순절 밖에 있는 한 저명한 교회의 탁월한 설교가는 얼마 전에 “성령침례를 받은” 성도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아무도 똑같이 볼 수 없는, 그 분파에 얽매여 있는 군중 위에서 분열된 교회를 바라보면서, 우리의 시련받는 영혼은 얼마나 초대교회적 사랑을 위해 울부짖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는 그 어떤 다른 계획으로는 세상을 결코 이길 수 없을 것이다. 다음은 존경받는 이방인들에 의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말해진 것이었다.
보라, 이 그리스도인들은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
우리가 분파들, 신조들, 주의들, 그리고 교리들로 분열할 때, 우리의 사랑은 죽어가고 있고, 우리의 교회들은 비고, 우리의 사람들을 잃고 있다. 당신의 아름다운, 그렇게 희망으로 가득 찬, 하나님께서 들어오셔서 영혼을 충만하게 하시고, 그들을 성령으로 놀랍게 침례를 주시기로 계획하신 오순절 역사는 사랑의 결여로 인해 나누어지고, 벗겨지고, 그리고 몰락하고 있다. 이것은 무서운 고발 아닌가?”
(6) 아주사 선교회의 마지막 시기, 1923 – 1938
시무어의 소천 후, 제니 시무어 부인은 아주사 선교회의 목사로 시무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감독직을 수용하지는 않았다. 그녀의 비범한 정신은 1908년 결혼 후 그녀의 첫 이름과 두 중간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사실에서 엿보일 수 있을 것이다. 그 회중은 인종혼합적으로 남았고, 약 40여 명으로 늘었다. 8년간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1930년에 사건들이 일어나기 시작해 그 선교회의 종말에 극에 달했다. 어느 날, 시무어 부인이 오후 기도회를 인도하고 있었을 때, 한 백인 외부인이 참석해 그들과 함께 기도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환영을 받았다. 그의 기도들은 너무도 열렬하여 다음 집회들에서 사람들이 그의 주변에 모여 또 오라고 요청했다. 그는 자신을 그리피스(R. C. Griffith)라고 소개했는데, 곱트교회 사제겸 감독으로 추정된다.
그 새 “감독”은 그 선교회를 매일 방문하여 그 교인들의 환심을 샀다. 몇 달 후, 그는 시무어 부인에게 자기가 교인들에게 물어보았더니, 그들 대부분이 자신을 선호했다고 알렸다. 그 결과, 그는 그 교회의 목사직을 차지했다.
옛 교인들은 시무어 부인에게 여전히 충성했지만, 주로 백인들이었던 새 교인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 찬탈자를 지지했다. 그리피스는 자기의 권리를 너무도 강하게 주장하여 로스앤젤레스 경찰국은 법원 합의를 기다리며 그 선교회의 문들을 잠가버렸다. 규린 판사(Judge Guerin)는 최종적으로 백인 측의 청원을 거부하고, 그 선교회를 시무어 부인에게 돌려주었다.
시무어 부인은 그녀의 명백한 법적 권리에도 불구하고 얼마간 선교회에 들어가지 못했다. 최종 승리의 대가는 너무도 컸다. 법적 소송비용을 대기 위해, 아주사 이사들은 1930년 12월에 시무어 부인에게서 2,000달러를 빌렸고, 그녀에게 아주사 거리 312번지 건물에 6년짜리 모기지를 담보로 제공했다. 27명의 교인들이 충실하게 남았다.
더 파국적이게도, 그 법적 분쟁은 그 도시가 그 선교회 규탄을 채택하는 사례를 제공했다. 1931년 말에 선교회 건물은 화재 위험이 있다는 이유로 철거되었다. 그 해체 동안, 프랑크 바틀맨은 아주사를 방문해 “312”라는 번지판을 구해내어 집으로 가져가 벽에 걸어놓았다.
시무어 부인, 리차드 부부(Mr. and Mrs. Richard), 루스 에즈베리(Ruth Asbery), 그리고 몇 사람들은 북 보니 브레 217번지에 있는 시무어 부인의 집에서 아주사 사역을 계속하려고 노력했다. 그 집은 1906년의 최초 기도 집회소에서 길 건너에 있었다. 그들은 목자 없는 양같이 흩어졌다고 전해진다.
아주사 이사진은 여전히 아주사 거리의 빈 대지의 법적 소유자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1929 – 1934년의 깊은 대공황에 의해 삼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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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그 담보대출에 이자를 지불하거나, 매년 그 시가 그 소유물에 대해 부과한 세금을 지불하지 못했다.
1933년 3월 30일에, 흑인들이 백인들보다 더 고통을 느꼈던 최악의 불경기 중에, 시무어 부인은 자신의 주택에 대한 모기지와 함께 아주사의 모기지를 세큐러티 퍼스트 네이셔널 뱅크(the Security-First National Bank)에 양도해야만 했다.
시무어 부인의 건강은 나빠졌다. 1935년에 그녀는 여전히 그녀의 집에서 살고 있었지만, 예배를 인도하거나 자신을 온전히 돌볼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재산을 저당 잡히고 1,650달러를 빌렸고, 920달러를 상환했지만, 나머지는 갚지 못했다. 1935년 12월 31일에 은행은 그녀의 집을 팔기로 결정했다.
1936년 1월 13일에, 은행은 아주사 부동산에 대한 압류 절차를 시작했다. 시무어 부인과 이사장 리차드 에즈베리와 이사들은 이 행위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1936년 2월 3일에, 시무어 부인은 말기 치료를 위해 카운티 병원인 랑코 로스 아미고스(Rancho Los Amigos)에 입원했다.
6월 10일에, 미론 웨스트오버 판사(Myron Westover)는 심리 후 그 담보물의 압류를 파기하며 사도적 믿음 선교회의 손을 들어주었다.
6월 15일에, 시무어 부인은 그녀의 형제, 헨리 무어(Henry R. Moore)에게 위임장을 주었다.
1936년 5월 2일 오전 11시 45분에, 제니 에반스 무어 시무어(Jennie Evans Moore Seymour)는 향년 62세에 심장 만성 염증으로 인한 순환장애로 조용히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몸은 그녀의 남편 옆에 단순한 삼나무 관에 넣어져 안장 되었다. 그러나 그 1922년에 세워진 비석에는 그 어떤 문구도 새겨지지 않았다.
아주사 재산에 대한 법적 소송들은 1938년 6월 10일까지 계속되었고, 2년 반 동안 지속적인 법적 조치와 대응 조치 후 은행이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그 부동산은 후에 로스앤젤레스 시의 소유물이 되었고, 그 시는 그 땅을 주차장으로 만들었고, 도시 재개발 지역에 포함시켰다. 그 장소를 장식하는 그 어떤 역사적 표식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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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사선교회 건물자리는 현재는 아주사거리부흥을 기념하는 공원이 되었다. 역자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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