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비카 바디(Vicar A. A. Boddy)의 방문, 1912
1912년 8월에, 잉글랜드, 선더랜드의 성공회 교구 목사이며 전 세계 오순절 운동의 지도자인 알렉산더 A. 바디가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다. 그는 즉시 아주사 선교회를 보러 갔다. “시무어 형제”는 동부를 여행하고 있었지만, 제니 무어 시무어 부인(Mrs. Jennie Moore)과 그리고 그의 부인과 함께 선교회에서 살고 있던 워렌(J. A. Warren)과 함께 긴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바디는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정말로 로스엔젤레스에 있는지 그리고 그 놀라운 모든 시간 동안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 중의 한 사람과 이야기하며 아주사 거리 선교회에 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 . . 이 지성적인 흑인 자매의 검지만 밝은 얼굴을 바라보는 것은 좋은 것이었다 . . . . 우리는 이제 넓은 바닥과 (그들이 즉시 잊어버리지 않을 한 방문자의 호의에 의해) 멋지게 갖추어진 아래 층으로 내려왔다. 우리 세 사람은 강단 근처에서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다. 아주사 거리 선교회에서 두 흑인 친구들과 멀리 선더랜드에서 온 백인 형제와 함께 기도하다니! 그리고 나는 그들을 떠났고, 가능하다면, 한 일 주일 후 그곳에 다시 와서 그 회중에게 설교하리라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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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디는 일주일 후인 목요일 저녁에 아주사 선교회에서 한 흥미로운 집회를 보고하는 설교를 하기 위해 돌아왔다. 이것은 아주사가 더함의 논란 이후에도 더욱 활발한 채로 남아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디는 그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오순절 공동체 가운데서 발견한 분열들 때문에 깊이 슬퍼했다. 더함의 유산은 모든 곳에 분명하게 남았다. 다락방에서 가장 밀접한 사람들인 조지 스터드(George B. Studd)와 엘머 피숴(Elmer Fisher) 사이에 불화가 일어났다. 스터드는 더함에게 호의를 갖고 있었지만, 바디에게 그는 그 시간 동안에 그 어떤 오순절적 선교회에 의식적으로 참석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다. 바디는 “이 사역 안의 큰 문제는 모든 점에서 유사성이 없어 보이는 사람들에 대한 심한 정죄인 것 같다”고 말했다. 바디는 말할 때마다, 더함에 의해 발생한 분열이 양 측에 대한 “사랑의 침례”에 의해 고침을 받아야 한다는 간청으로 끝을 맺었다.

(3) 증가하는 위기, 1913 – 1921
로스앤젤레스의 오순절 공동체에게 사랑과 일치를 가져다주려는 바디의 노력들은 초기에는 효과가 있었지만, 지속적인 결과를 맺지는 못했다. 더함의 부상에 이은 사랑하는 조화의 분열과 상실은 로스앤젤레스의 그 역사적 센터와 시카고의 양향력 있는 본부로부터 그 운동 전체로 퍼졌다. 목사 앨리스 레이놀즈 플라우어 부인(Rev. Mrs. Alice Reynolds Flower)은 1913년에 인디아나폴리스에서 분명 더함에 대해 언급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도 어떤 계열들에 따라 어떤 마음들을 불태우는 그 열심이 그리스도 안의 완전한 자유의 법을 보고 인식하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 것이다. . . .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하나님의 빛과 역사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보기 때문에 그들을 비그리스도인들로 만드는 것은 단지 우리의 결여를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 . . . 그들이 어떤 교리를 붙들고 있든, 많은 사랑하는 오순절 사람들의 마음에 중요한 것들이 결여되어 있다. . . . 우리는 아무런 유익이 없는 어리석은 말싸움(그리고, 일싸움)을 그쳐야만 한다. . . . 그리고 어떤 사람들이 완전히 진짜 진리를 선포하고 있다고 말하고 느끼는 이때에, 우리는 “지금 우리는 희미한 거울로 보고, 부분적으로만 안다”는 것을 여전히 기억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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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적 차이들은 부풀어 늘어났다. 더함의 사망 후, 더함의 추종자들은 시무어가 1907년에 그 첫 오순절 캠프 집회를 열었던 아로요 세코(Arroyo Seco)에서 열릴 거대한 1913년 “로스앤젤레스 범 세계 캠프 집회”를 알림으로써 그들의 주도권과 힘을 유지했다. 스캇(R. J. Scoot)과 스터드(George B. Studd)는 모든 준비를 책임지게 되었고, 그녀의 치유 사역 때문에 국제적으로 잘 알려진 전도자, 68세의 메리 우드워스-에터 부인(Mrs. Mary B. Woodworth-Etter)을 주 강사로 초청했다.
1913년의 캠프 집회는 북미 전체와 다른 지역들의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약 1,000명의 사람들이 강단 위의 200명의 목회자들과 함께 모였다. 그 집회는 4월 15일부터 6월 1일까지 계속되었는데, 계획된 것보다 두 주일 더 진행된 것이었다. 에터 부인은 이 집회는 “의심할 여지 없이 성령침례를 받은 성도들이 근래에 가장 많이 모인 것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녀가 가장 원했던 것은 일치를 증진시키는 것이었지만, 그 집회는 “은총의 두 번째 역사가 아닌 성화”라는 기치를 든 사람들만 모인 것으로 인식되었다. 참석하고 있던 목사가 그녀의 지도력에 반기를 들었을 때 어려움은 가중되었다. 그 목사는 신유에 대한 강조보다는 당시의 논쟁과 관련된 새로운 이데올로기적 문제들을 더 강조하기를 원했다. 시무어는 참석했지만, 강단 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인식되지 못했거나, 또는 어떤 방식으로든 동참할 요청을 받지 못했다.

눈부신 개인적 치유들이 보고되었지만, 오순절 운동 자체는 치료받지 못했고, 이전보다 더 분열되었다. 더함의 논란은 거의 절반을 이데올로기적으로 갈아놓았다. 1913년 캠프 집회는 더함 추종자들 사이에 다른 분열을 초래시켰다. 3년 내에 삼분의 이는 예수 이름으로 물침례를 주어야 한다는 “새로운 이슈”를 수용한 나머지를 이단적이라고 거부했다. 더함이 “성화는 은총의 두 번째 역사가 아니다”라고 주장했을 때 아주사에서 그 배경에서 드러났던 것과 동일한 인종적 문제가 “예수의 이름” 논쟁 배후에서 다시 나타났다.
1913년 캠프 집회는 오순절 역사 안에서 한 분수령이 되어서 더함의 분열이 고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었고, 정말로 그것이 여전히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면, 오늘날까지 그 운동의 방향을 좌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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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선전된 이데올로기적 차이점들은 증가하고 있던 인종적 긴장들과 차별을 가렸다. 1906년 여름에 피숴와 바틀맨이 열었던 그들의 8번 가와 메이플 선교회(8th and Maple mission)가 백인들을 아주사로부터 빼내갔다. 파함은 시무어와의 협력을 거부했다. 럼은 시무어의 소식지를 가져갔고, 더함은 시무어의 건물을 차지했다. 그들 각각은 시무어의 지도력을 멸시했고, 평등한 신자들의 그 혁명적인 새 몸을 축소시켰다. 더함이 인종적 파열을 증가시키기 전에도, 로스앤젤레스에 있던 백인들이 아주사를 떠났었지만, 그러나 경계선들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굳어지지는 않았었다.
시무어와 아주사 이적은 지배적인 백인 미국인의 배타적인 인종적 태도들의 변화 안에서 오순절 운동을 낳았다. 이제 그 운동은 그 태도들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 운동의 역동적인 힘은 단지 시무어의 지도력에서만 나온 것이 아니라, 회개와 겸손 안에서 그것을 수용한 백인들에 의해서도 나왔다. 이제 시무어가 굴욕당하고, 거부당하고, 그리고 잊혀지면서 백인들은 이데올로기적 논쟁과 함께 오래된 인종적 태도를 공개적으로 채택했다. 시무어가 사라지면서 피부색에 의한 경계선이 다시 등장했다. 그의 리더십의 중요성에 대한 찬사가 필요하다면, 이 과정이 그것을 제공할 것이다. 시무어는 그리스도의 몸의 치유된 하나 됨을 상징했다. 그가 홀로 그것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시무어를 거부한 것은 미국의 종교적 생활과 사회 환경 안에서 백인 인종주의 증가라는 냉혹한 현실을 반영했다. 바디(Boddy)는 1912년에 미국의 인종적 분열들은 “백인들이 지배하는 인종으로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운명지워졌기 때문에” “점점 더 격심해지고” 있었다고 썼다.
이런 경향과 그것을 수용하는 것은 또한 미국 기독교계에서 유일한 다른 중요한 인종 혼합 단체, 시무어를 처음으로 안수했던 “저녁 빛 성도회”(the Evening Light Saints) 또는 후에 하나님의 교회 개혁 운동(Church of God Reformation Movement)로 알려지게 된 단체를 파괴했다. 인종차별이 지배적이 되자 “그 운동이 급진적으로 변했다.” 그 운동의 흑인 신학자, 메시(Massey)는 “1913년에서 1918년 사이의 기간은 인종적 문제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고,” 1916년에 “차별 체계는 공개적으로 권고되었고 심지어 북부에서도 나타났고,” 그리고 “완전한 인종 혼합적 단체를 위한 사례는 희망이 없어 보였다.” 인디아나, 앤더슨에서 1912년에 열렸던 그들의 국제 캠프 집회에서 조차 인종적 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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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한 백인 인종주의가 미국에서 절정에 달했다. 알스트롬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시민전쟁 후 반세기는 노예 해방선언을 의미 있는 문서로 만들려는 국가의 의지의 지속적인 침식이 동반되었다. 해방노예국의 붕괴, 1877년의 타협, 대법원의 1883년의 민권법 실질적 무효화, 그리고 1913년 윌슨 대통령의 인종적 차별의 연방정책에로의 확대는 자유와 평등으로부터의 멀어지는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다. [시민으로서 권리, 그리고 투표할 권리]의 14차 그리고 15차 수정들, 그리고 심지어 어떤 의미에서 [노예제를 금지한] 13차 수정조차도 사문서들이 되었다.
흑인 미국인들과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폭행들과 화형들은 인정적 혐오의 탐닉이었다. 시무어의 19세 때로부터 그의 사망까지, 1889년에서 1922년까지, 3,436명이 폭행을 당했는데, 83명의 여성이 포함되었으며, 평균 한 주에 두 명이었고, 그 보고된 통계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간과되었다. 폭행들은 점차 44개의 주들로 퍼져나갔다. 나라의 풍조의 이런 소름끼치는 지표들에 더하여,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찌르기, 곤봉으로 치기, 채찍으로 때리기, 염산 뿌리기, 타르붓기 및 깃털 장식, 기타 협박 및 야만적인 행위들의 증가하는 홍수가 있었다. 그 홍수는 1915년에 “그 국가가 그 이전에 경험했던 그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정도에 이르렀다.
1914년에 유럽은 제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었고,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인류가 마침내 이 인류의 불행에서 벗어날 것이라고 합리적으로 바랐던 전쟁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한 세기를 끝장냈다. 위대한 흑인 학자, 듀 보이스(Du Bois)는 “ 경제적 제국주의의 쓰디쓴 경쟁의 결과, 아프리카에 있는 그 파국의 원인들은 근저에 피부색으로 인한 경계선의 문제들과 깊게 얽혀있었다”고 논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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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에 (로스앤젤레스의 근교) 할리우드는 첫 서사적 영화들 가운데 하나인 “국가의 탄생”(Birth of a Nation)을 만들었는데, 그 영화는 토마스 딕슨(Thomas Dixon)의 『케이케이단』(The Klansman)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 케이케이단은 재건기 동안 남부에서 폭력적인 반-흑인 집단이었다. 대통령, 국회의원들, 그리고 대법원장은 백악관에서 열린 한 특별한 전시회에 참석했다. 그 전시는 미합중국 전역에서 온 거대한 관객들에게 제공되었다.


1916년에 텍사스, 와코에서, 한 백인 폭도가 한 백인 여성을 살해했다는 죄목으로 막 사형 선고를 받았던 정신지체 흑인 청년, 제세 워싱턴(Jesse Washington)을 붙잡았고, 그를 타운 광장에 끌고 가서 한 나무에 매달아 때리고, 고문하고, 15,000명의 군중 앞에서 산 채로 불살랐다.

1917년에 미합중국은 “세계를 민주주의를 위해 안전하게 만들기 위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첫 번째로 징병된 사람은 흑인, 데오 핑크니(Leo Pinckney)였고, 프랑스 무공십자훈장을 첫 번째로 받은 두 군인들은 프랑스 군대에 배속되었던 흑인 미국인들이었다. 프랑스는 이 흑인 군인들을 동등하게 대우하지 말고, 그들과 프랑스 국민들과의 접촉을 제한하라는 미국 정부의 지령들을 무시했다. 많은 프랑스인들은 그곳에 배속된 흑인 군인들을 억압하는 미국의 정책에 격노했다.

1917년에 세인트 루이스 동부에서 발생했던 서른 아홉 명의 흑인 살해에 대한 대응으로, 10,000명이 뉴욕에서 소음기를 단 북들을 치며 침묵 시위를 벌였다. 한 깃발에는 “대통령 각하, 민주주의를 위해 미국을 안전하게 만드는 것은 어떨까요?”라는 문구가 있었다. 다른 깃발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있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은 동등하게 창조되었다는 이 자명한 진리들을 붙들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은 그들의 창조주에 의해 양도할 수 없는 권리들을 부여받았습니다. 이 권리들에는 생명, 자유, 그리고 행복 추구 권리가 있습니다.
아프리카 혈통이 이 모서리를 찢는다면.
흑인 군인들이 전쟁에서 돌아오자 폭력이 증가했다. 백인들은 “그들을 그들의 지역에 가두려”고 작정했다. 첫해에 몇 명은 여전히 군복을 입고 있던 10명의 퇴역 군인들을 포함하여 70명 이상의 흑인들이 폭행당했다. 열네 명의 흑인들이 공개적으로, 그들 중 열한 명은 산 채로 화형당했다. 1918년에서 1921년까지 스물 여덟 명의 흑인들이 백인 폭도들에 의해 공개적으로 화형당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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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합중국은 지구상에서 사람들이 화형당하는 유일한 나라가 되었다.
폭력의 광포가 제임스 웰던 존슨(James Weldon Johnson)이 1919년의 “붉은 여름”(Red Summer)이라고 부른 것을 낳았다. 그때는 시무어가 좋아하던 도시, 시카고의 한 특별히 사악한 폭동을 포함하는 스물다섯 차례의 인종 폭동들과 함께 “그 나라가 전에 경험했던 인종 간 다툼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였다. 한 축소판 싸움은 미시간 호에서 수영하던 한 젊은 흑인이 백인들을 위해 지정된 물 안으로 표류해 들어갔을 때, 시작되었다. 백인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고, 비록 건져내진 몸에는 실제로 돌에 맞은 흔적이 없었지만, 그는 익사했다. 14일 만에 방위군이 도착했지만, 13일 동안 법과 질서는 실종되었다. 백인 15명과 흑인 23명, 합하여 삼십팔 명이 죽임당했고, 537명이 부상당했고, 1,000세대가 화재로 집을 잃었는데, 대부분은 흑인 세대였다.




케이케이단(The Ku Klux Klan)은 흑인들, 일본인들 그리고 다른 동양인들, 로마 가톨릭교도들, 유대인들, 그리고 모든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에 대항하여 “미국 기관들과 백인종의 우월성의 보존에 있어서 일치된 행동을 위해 미국 토박이 백인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한 프로그램과 함께 1915년에 부활했다. 첫해 말엽에 케이케이단원은 100,000명이 되었고, 그들이 연방정부의 허가를 받고 국회의사당 앞의 펜실바니아 아베뉴를 따라 행진했을 때 4,000,000명으로 증가했다. 변화된 시대의 한 징후는 케이케이단원들이 의식을 위한 두건을 썼다는 것, 그리고 폭력이 처벌에 대한 두려움 없이 공공연하게 자행되었다는 것이었다. 그 조직은 전국에 걸쳐 광범한 인기를 누리고 세력을 떨쳤다. 케이케이단은 특히 시무어가 루이지애나를 떠난 후 첫 번째로 거주한 곳이었던 인디아나폴리스에서 강했다.

미국 기독교는, 피부색 경계선 자체를 극복한 적이 없었는데, 점증하고 있던 인종주의의 이 조류를 인식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대신, 교단들은 미국 안에서 공업적 또는 의학적 용도들 이외에 주류의 제조, 판매, 또는 소비를 법으로 금지하라는 기념비적인 캠페인에서 그 이전에 결코 하지 못했던 단일대오를 이루었다. 그 “개혁운동”은 남북전쟁 이전에 미국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었지만, 그 전쟁 후 인종적 잔악행위들 가운데서 금주당(the National Prohibition Party, 1869), 여성 기독교 절제 연합(Women’s Christian Temperance Union, 1873), 그리고 반 주류연맹(National Anti-Saloon League, 1895)의 창설과 함께 진정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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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의 인종차별적 행위가 극심해질 때, 감리교도들이 선봉에 서고 1872년에 결성된 가톨릭 금욕 연합(Catholic Total Abstinence Union)의 회원들 가운데 일부의 의미 있는 지원을 포함하여 다른 거의 모든 교단들이 유례없는 단일대오를 이루어 합류한 반-주류 캠페인이 휩쓸었다.
1916년에 열아홉 개의 주들은 주류 판매를 완전히 금했고, 1919년 1월 16일에는 법적으로 “중독성 주류”를 전국적으로 금하는 제18차 헌법 수정이 이루어졌다. 흑인 미국인의 극히 기초적인 시민권만을 “보장하는” 헌법 수정과는 대조적으로, 주류 금지는 관심을 기울이고 각성한 국가가 활용할 수 있는 모든 법적 수단들을 통해 엄격하게 강제되었다.
민심은 점차 주류 금지에 등을 돌리게 되었고, 법적 강요는 해가 지나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져 갔고, 마침내 1933년 12월 5일, 제18차 수정은 21차 수정에 의해 무효화 되었다. 그렇게 미국 교회들의 가장 큰 단 하나의 사회적 캠페인은 실패로 끝났지만, 대중의 법에 대한 존중 약화와 갱단의 형성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져야만 했다.
더 중요하게도, 금주운동은 “고상한 실험”이라고 불렸지만, 그러나 “그것은 많은 다른 사회적 문제들로부터 주의를 분산시켰고, 교회들이 다가오는 큰 재앙에 대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금주 캠페인은, 백인 미국인 그리스도인의 우월성과 가치가 진리라고 주장하는, 1876년 재건기 말엽부터 제1차 세계대전의 시기에 절정에 달하기까지 휩쓸었던 인종적 증오의 미국적 탐닉과 정확하게 동시에 일어났다. 금주법의 종말과 함께, 대공황의 심연에서, 피부색에 의한 경계선은 군중 폭력이 더 이상 그것을 강요할 필요가 없어질 정도로 엄격하게 그어졌다. 남북전쟁부터 제1차 세계대전까지 그 나라에 그리고 1906년부터 1909년까지 시무어에 의해 교회에 주어졌던 역사적 기회는 돌이킬 수 없게 상실되었다. 미국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피부색에 의한 경계선을 따라 분열된 채 완전히 다른 세계들 안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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