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무명기의 시무어, 1911 - 1922, 1923 - 1938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 돌보게 하셨느니라
고린도전서 12:25
우리가 순전한 영적 나라를 세워보려는 노력은 실패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지 않는 것이다.
프랑크 바틀맨
(1) 더함의 분립, 1911 - 1912
1908년에 발생했던 『사도신앙』의 소실 후 시무어의 영향력의 쇠퇴는 1911년 초에도 지속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에도 아주사는 여전히 활발했다. 포르드샴(Arthur. W. Fordsham)은 1910년 말 혹은 1911년 초에 캐나다에서 와서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한 후 다음과 같이 전했다.
물론 우리는 그 불이 제일 먼저 떨어진 곳인 아주사 거리 선교회를 방문해야 했다. 간선 도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위치가 좋지 않고, 건물은 오래되어 허름하지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령을 맨 먼저 부어주신 늦은 비를 통해 이곳을 인정하셨었고, 이제 그 늦은 비는 전 세계에 내리고 있다. 이 선교회는 최근 그 전처럼 차고 넘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곳에는 풍부한 늦은 비의 징표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복을 받고 있다. 유색인들과 백인들이 함께 이 집회소에 모여 자유롭게 예배드리고 있다.
포르드샴의 방문 직후, 시무어는 흑인 두 명에게 아주사 거리 선교회를 맡기고 전국에 걸친 말씀 선교를 위해 출발했다. 그가 출타한 사이에, 전에 시카고의 노스 아베뉴 미션(North Avenue Mission)의 목사였던 윌리엄 더함(William H. Durham)이 그곳을 떠나 며칠 후 인 2월 9일에 그의 가족과 다섯 명의 조력자들과 함께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고, 사우스 덴버 아베뉴 6820번지(6820 South Denver Avenue)에 새로운 선교회를 세웠다.
더함은 본래 1907년 2월과 3월에 약 한 달간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었다. 그 방문은 전에 그의 시카고 선교회 회원들이었던 루이스 오스터 버그 부부(Mr. and Mrs. Louis Osterberg)가 그에게 열차 요금을 보내며 그들의 집에 머물면서 아주사 선교회를 직접 보라고 그를 초청하여 성사된 것이었다. 그는 아주사에서 놀라운 개인적인 변혁을 겪었다. 그리고 후에 시무어를 “하나님 아래서 그 운동의 지도자”라고 부름으로써 그에게 따뜻한 경의를 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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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더함은 머물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왔고, 그의 논쟁적인 교리, “갈보리에서 완성된 역사”(The Finished Work of Calvary)를 선포했다. 이 신앙은 대부분의 성결주의자들과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해 보다 넓게 수용되고 있던 회심에 후속하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두 번째 경험으로서 성화에 대한 웨슬리적 견해를 거부했다. 더함은 죄 용서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의 마음의 순전함을 가져오는 죄의 근원 제거를 주장했다.
더함의 가르침은 회심 때에 완전한 성화를 약속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성화에 있어서 전 생애에 걸친 점진적인 성장을 의미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모든 사람은 이것이 어떤 의미를 갖든, 더함의 관점에서 성화는 회심에 후속하는 두 번째 결정적인 경험이 아니라는 데에는 동의한다.
플라우어는 더함이 거의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진 웨슬리의 견해를 단순하게 논하거나 거부한 것이 아니고 조롱했다고 보았다. 더함은 자신이 새롭게 형성한 신앙을 큰 교리적 열심을 가지고 추구했으며, 그것을 “진리일 뿐만 아니라, . . . 신약성경의 크고, 중심적인 교리” 그리고 “복음의 중심 주제, 그렇다, 바로 그 근원이며 생명”이라고 불렀으며, 나아가 “그밖에 다른 복음이 없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내용이든 방식이든, 어떤 이유 때문이든, 엘머 피숴(Elmer Fisher)는 당시에 그 도시에서 가장 큰 오순절적 선교회였던 다락방 선교회에서 설교하도록 해달라는 더함의 요청을 거절했다. 다섯 명의 동료 사역자들과 함께 더함은 아주사 집회를 인도할 수 있는 허락을 받고는 2월 15일경에 시작했다.
더함의 강단 재능은 즉시 많은 청중을 사로잡았다. 그 첫 주일에는 500명이 공간이 부족하여 돌아갔다고 전해졌다. 다락방 선교회 참석자는 더함의 영향력으로 크게 감소했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 후 첫 번째로 출판된 더함의 소식지는 독자들에게 그가 “일리노이, 시카고의 2836 웨스트-노스 아베뉴에 있는 그 선교회와의 모든 관계를 끊었다”고 알렸다. 이 진술은 로스앤젤레스로 떠나기 전에 일어났을 비우호적인 분열을 암시했다.
아주사에서의 캠페인은 약 십 주간 계속되었고, 그 로스앤젤레스의 오순절 공동체를 심각하게 분열시켰다. 더함이 자신의 접근의 영향을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을 다음과 같은 말을 통해 시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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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완성된 역사”(Finished Work of Christ)라는 진리가 『오순절적 증언』을 통해 맨 처음으로 알려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충돌을 촉발시킬 것이라고 예상했었다. 그러나 아무도 그 주제에 대해 글들을 썼던 편집자보다 그것을 더 분명하게 예상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그 반대가 가능했겠는가? 그 완성된 역사는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다. 원수가 그의 모든 힘을 동원해 반대할 것이라는 것 이외에는 우리가 무엇을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 . [우리는] 그것이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여전히 두 번째 역사론(the second work theory)에 매달려 있을 모든 사람들과의 우정을 잃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았다.
더함이 촉발시킨 그 논란 때문에, 아주사 선교회 이사들은 뉴욕에 있는 시무어에게 연락해 빨리 돌아오라고 재촉했다. 도착하자마자 시무어는 어려운 상황에 직면했다. 시카고에서 온 한 백인 팀이 그 분란을 일으키는 견해를 공격적으로 전할 실제적인 목적을 위해 아주사 선교회를 탈취했었다. 시무어는 이런 형태의 교리적 논쟁들에 완전히 익숙했었다. 그는 즉시 더함에게 아주사에서 그런 분란을 일으키는 것을 멈추어주기를 침착하게 요구하면서 더함과 논의했다. 더함은 그 요구를 거절했다.
셤웨이(Shumway)는 더함이 “극복하지 않으면 파멸한다는 굳은 결의”를 보였다고 전했다. 그는 결과가 어떤 것이든 상관없이 전력을 다해 “두 번째 역사론”에 대항하도록 자기가 지명되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견해에 “동조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는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저 복음 자체를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시무어는 그런 접근에 동조할 수 없었다. 그는 성화에 대한 논의는 용인할 수 있을 것이지만, 더함의 견해와 같은 극단적인 것은 용인할 수 없었다. 그는 아주사 선교회의 담임 목사로서 그에게 가능한 단 한 가지 선택 사항을 취했다. 5월 2일에, 그는 더함이 더 이상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출입문을 잠그고 쇠사슬로 문을 봉했다. 아주사 선교회 건물은 그 이전에 결코 잠긴 적이 없었다. 그는 점잖은 사람이었지만, 그러나 “시무어 형제는 더 이상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고 전해진다.
더함은 바틀맨(Bartleman)이 주선하여 콜러 스트리트 미션(Kohler Street Mission)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1,000명을 수용하는 7번 가와 로스앤젤레스 스트리트가 만나는 곳(7th and Los Angeles Streets)에 있던 큰 건물을 빌렸다. 그는 아주사에 머무는 동안 600명 이상의 회중을 자기에게로 모았었다. 그는 자기 관점에서 이곳을 오순절 운동의 전국적 조직을 위한 중앙 본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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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바틀맨은 더함의 설교와 그의 간행물에 나타나는 더함의 신랄함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그가 “육적 논쟁”(carnal controversy)이라고 부른 것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켰다.
더함은 그 다음 그녀의 강단에서 자신의 견해를 전할 목적으로 오레곤, 포트랜드에 있는 플로렌스 크로우포드(Florence Crawford)에게 접근했다. 그녀가 거절하자, 더함은 한 부흥 선교회를 열어서 “그녀로부터 그녀의 교인 전체를 빼오겠다”고 위협했다. 그러자 그녀는 “할 수 있으면, 해보시오”라고 대답했다.
더함은 1912년 2월 1일에서 18일까지 포틀랜드, 앙케니 스트리트(Ankeney Street)에 있는 한 선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열었다. 그곳은 단지 크로우포드의 본부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나 그 집회의 결과는 초라했다. 더함이 한 부흥집회의 장소로서 포틀랜드를 택한 것은 그 운동을 지배하겠다는 그의 계획을 확인해 주었다. 그는 이어서 중서부를 위한 본부를 세우기 위해 2월 25일부터 시작하기로 예정된 지도자들과의 두 주간 회합을 갖기 위해 시카고로 갔다. 먼 곳에 있던 여러 지도자들이 참석하지 못하자, 더함은 그 회합을 한 부흥집회로 바꾸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자, 그는 그 집회는 무기한 계속될 것이라고 발표했다.
더함은 그의 건강과 힘이 나빨질 때까지 시카고에 남아 있었다. 그는 7월 2일 화요일에 시카고를 떠나 7월 5일, 금요일에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주일 아침에, 프랑크 에와르트(Frank Ewart)는 7번 가와 로스앤젤레스 스트리트에서 예배를 인도하다가 더함이 소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더함은 1912년 7월 7일 오전 8시 10분에 사우스 덴버 아베뉴(South Denver Avenue)에 있는 그의 집에서 39세의 나이에 조용하게 소천했다. 그의 사망 원인, 폐렴은 공공연하게 알려지지는 않았다. 그는 자기가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고, 그래서 시카고로 떠나기 전에 에와르트에게 그의 후계자가 되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더함은 다음과 같이 자신의 죽음을 기묘하게 예견했다.
에와르트, 내가 예수 안에 계속 감추어지기를 기도해주시오. 만약 내가 무엇이든 잘못된 생각을 했다면, 갑자기 죽을 것이고, 그래서 당신은 이 무슨 일인가 놀랄 것이오.
로스앤젤레스에서 더함의 갈등은 일곱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1) 성화, (2) 글로솔라리아, (3) 인종, (4) 성, (5) 윤리, (6) 지도력, 그리고 (7) 오순절 운동 자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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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더함은 성화의 문제를 “은총의 두 번째 역사가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불행하게도 대립, 분열, 그리고 고통을 일으켰다. 더함은 다른 사람의 견해에 존중, 이해, 관용, 인내, 또는 동정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것을 필수적이고 절대적인 진리라고 묘사하면서, 반면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믿음을 조롱했다. 더함은 그가 반대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았지만, 그러나 그가 찬성하는 것을 완전히 설명하지는 않았다. 은총의 두 번째 역사가 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성화”(sanctification)라는 용어로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게 이것저것 되는 대로 집어 던지듯 말했다. 그의 전투적인 방식은 그의 견해에 찬성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갈라서라는 최후통첩이었다. 그래서 그의 방식은 그 문제에 대한 개방적인 논의를 불가능하게 만들었고, 그 문제를 필수적으로 택해야 할 사항으로 만들었다.
(2) 더함이 일으킨 문제에는 방언도 포함되는 데,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견해를 두 요소로 구성된 것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첫째 요소는, 성화, 그리고 둘째 요소는 성령침례의 표징 또는 증거로서 방언이었다. 시무어는 이 문제를 유일하게 인식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분명하게 방언이라는 표징을 오직 사랑이라는 증거에 의해 입증되는 다른 표징들 중에 하나라고 주장하는 미국 지도자들 측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시무어는 방언을 유일한 증거로 그리고 분명하게 가장 중요한 것으로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시무어의 관점에서, 더함은 방언을 모든 의도와 목적을 위해 성령침례와 하나로 만듦으로써 방언의 중요성을 과장하고 있었다.
(3) 더함이 그 흑인, 시무어를 거부하고 근본적으로 백인이 지배적인 운동을 형성했을 때 인종 문제가 제기되었다. 더함의 이데올로기가 1914년에서 1916년에 교단적 조직을 위한 기초가 되었을 때, 그 어떤 흑인도 포함되지 않았다. 1914년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그 교단에 예수 이름으로 침례가 불거져 나왔을 때인 1916년에 추방되었다. 그들 가운데 모든 흑인은 주류 백인 집단에 의해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의도적이었든 혹은 아니었든, 이 인종적 분열은 그 운동 안의 인종적 평등과 일치에 대한 시무어의 관심을 효과적으로 무시했다. 시무어는 인종 문제를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을 위해 신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이해했다. 더함은 인종 문제를 하나의 신학적 문제로 경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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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성평등 문제가 더함이 플로렌스 크로우포드(Florence Crawford)의 강단에까지 자신을 확장하려는 것을 그녀가 거절하자 그녀를 위협했을 때 발생했다. 그는 엘머 피숴의 다락방을 비웠고, 아주사를 모호하게 떠나 포틀랜드 캠페인을 벌이면서 그 운동의 출중한 여성 지도자에 대해 그와 동일한 것을 시도했다. 더함의 접근은 맹목적인 백인 남성 우월주의만을 드러낸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익을 위해 인종평등과 성평등, 둘 다를 희생시키려 했다는 것도 드러내었다. 시무어는 그 신학적 문제를 여성들을 위한 평등의 관점에서 보았지만, 더함은 그것을 무시했다.
(5) 윤리적 문제가 더함이 불화를 일으킬 것이라고 인식했던 어떤 목적을 가지고 다른 지도자의 교회 건물을 점거했던 것에 내포되어 있었다. 더함은 시무어가 출타 중일 때 시무어의 강단을 사용하면서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성화에 대한 견해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더함은 시무어가 더함과 의논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뉴욕에서 서둘러 돌아왔을 때 시무어와 사전에 상의하지도 않았고 중단하지도 않았다.
더함의 충격적인 행위 뒤에는 비우호적으로 갈라선 뒤 시카고의 노스 아베뉴 미션의 목사로서의 지위와 수입을 잃어버린 후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놓여있다. 그는 일터를 잃었고 목사로서 후원을 받으려면 한 교회가 필요했다. 이 사실은 그의 공격적이고 전투적인 방식을 그리고 그 자신의 이데올로기에 대한 용어들과 지배 이외에 그 운동 안의 일치에 대한 관심의 결여를 설명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6) 오순절 운동의 지도력 문제는 더함의 행위에서 발생했다. 그는 분명 그 무엇보다도 이의 없이 지배적인 지도자가 되기를 원했다. 더함이 1907년에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을 때, 그는 시무어를 그 운동의 하나님 아래 지도자로 묘사했다. 1911년에 그가 시무어와 자신 사이의 분리를 강요했을 때, 그는 자기가 그 운동을 이끌어 가기를 주장했다. 그는 이미 피숴의 교인들을 빼앗았었다. 더함은 단지 한 새로운 선교회를 만들기를 바라지 않았다. 그는 오순절 운동 전체를 이끌기를 바랐다. 그래서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중앙 본부를 세우고는 로스앤젤레스에 이어 지부들을 중요한 오순절적 도시들인 포틀랜드와 시카고에 세우려고 했다. 더함의 전도 활동들은 오직 중요한 오순절 지역들에만 관련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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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오순절 운동 자체는 그 운동을 강제로 지배하려는 더함의 시도 때문에 한 문제가 되었다. 이것은 이데올로기적, 인종적, 그리고 젠더 방침에 따라 타인들을 배제시키는 그의 접근에 의한 그 운동의 극적인 변경을 의미한다. 그는 그의 이데올로기와 지도력에 동의하지 않는 흑인과 여성 지도자들을 포함하는 모든 사람을 단호하게 거부했다. 시무어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존중하는 모든 사람들의 일치를 추구했었다.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끌어안았다. 더함은 성화와 방언에 대한 그의 특수한 견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배제했다.
더함의 돌출은 아주사로부터의 후퇴와 그 운동의 결정적인 유턴을 의미했다. 그의 지배로부터 실제적인 사랑과 일치는 그 운동에서 되돌릴 수 없게 완전히 사라졌고, 오직 여러 이데올리기적으로 그리고 인종적으로 분열된 집단들 안에 남았다. 더함의 지도력은 시무어의 지도력과 완전히 대조적이었고, 그 운동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끌어갔다. 1911년부터, 그의 갑작스런 사망에도 불구하고, 더함은 가장 영향력 있는 오순절 지도자가 되어서 현재까지 그 운동의 역사적 발전을 결정짓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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