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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J. 시무어의 전기(넬슨)

오순절주의자 윌리엄 J. 시무어의 전기(넬슨) 5.

한오신 2025. 1. 5. 18:32

 

 

(8) 시무어의 영향력

 

    아주사 선교회의 그 놀라운 매력 한 가운데 그 목사가 그의 겸손하고 부드럽지만 단호하고 엄격한 지도력을 가지고 서있었다. 시즈러브(Rachel Sizelove)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무도 그를 거스르려 하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았다. 나의 사랑스런 남편은 주님께서 모세에게 주셨던 것처럼 시무어 형제에게 그 사람들을 다스리는 지혜를 주셨다고 말하곤 했다. 아무도 성령의 기름 부음 아래서가 아니면 감히 일어나 찬양한다거나 간증하려하지 않았다.

 

Rachel Sizelove

 

 

     글렌 쿡(Glenn Cook)은 아주사의 성공을 직접적으로 시무어에게 돌렸다.

 

. . . 이 사람은 . . . 수 년 동안 우리가 설교해 왔었던 성화된 삶을 실제로 살아왔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이 비천한 모임에 계속 오도록 끌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셨던 이 사람의 놀라운 인격이었다.

 

 

Glenn Cook

 

 

    이 견해들을 증명할 확실한 증거가 있다. 플로렌스 크로우포드는 유명한 방문 사역자들을 포함하여 그 도시의 모든 지도적 목사들에게서 영적 능력을 찾아보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다. 그녀는 존 웨슬리의 글들을 연구했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은 웨슬리가 말한 온전한 사랑 또는 성화라고 믿게 되었다. 목사들은 그녀의 탐구에 도움을 줄 수 없었고, 또는 권고한답시고 보통 성화되었다고 주장하면, 성화된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면 그녀는 만족하지 못하고 성화를 받는다면, 받았다고 주장할 것이지만, 그것을 받을 때까지는 받았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시무어의 영향은 그녀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그녀는 첫 방문에 한 번에 그가 어떻게 다른지를 간파했다. 그녀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들은 잠깐 찬양했지만, 그것은 내 마음을 움직이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낮추어 기도했지만 그것도 내 마음을 전혀 움직이지 못했다. . . . 마침내, 한 커다란 흑인이 일어섰다. 그는 할렐루야!”라고 외쳤다. 그 외침은 내 영혼을 관통했다. 그는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외쳤다. “할렐루야!” 나는 세상에,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어. 마침내 들었어. . . . 그는 내 마음이 갈망하며 찾고 있던 것을 갖고 있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다른 모든 것은 잊었다. 왜냐하면 양의 위대한 목자의 음성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 . 한 가지 궁금한 것은, 내가 어떻게 그것을 받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렇게 오래 동안 갈망해왔었던 그 놀라운 축복을 내 영혼에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이 사람은 그 축복을 받았는가? . . . , 하나님께서 내 영혼에 심으신 그 갈망이여! 친구들이나 그 어떤 사람들이 뭐라든 상관없었다. 오직 한 가지, 어떻게 그것을 받을 수 있느냐가 관심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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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무어는 그 후 한 집회에서 크로우포드의 발전을 가져온 진기한 목회적 기술을 발휘했다. 그는 설교 도중에 갑자기 설교를 멈추고 이 안에 있는 누군가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무언가를 갈구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즉시 앞에 있는 의자들을 밀며 나가 제단에 쓰러졌다. 그리고는 영적 능력을 받고 그 새로운 운동의 주요 지도자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Florence Crowford

 

 

(9) 시무어의 신학

 

    보니 브레와 아주사 선교에서 일어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고, 적합한 장소와 적합한 시간에 펼쳐진 한 사람과 그의 꿈의 결과였다. 시무어의 전 생애는 미국 사회의 인종적 제한들과 백인 우월주의 안에서 가능했던 것 보다 더 온전한 교회 안에서의 인간적 교제를 향한 그의 추구를 보여주었다.

    그는 인종적으로 격리된 1895년의 루이지애나 시골 사탕수수 농장지역에서는 비록 그때에도 강한 믿음을 갖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교회에도 다니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는 북쪽 인디아나폴리스로 갔는데, 그곳은 오래 동안 흑인들의 희망의 원천인 자유의 약속의 땅”(promised land)의 주요 도시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곳에서 그는 감리교회에서 가장 인종적으로 통합된, 미국 노예들의 원조 챔피언 교단에 합류했다.

    그 도시나 교단도 그의 순수한 평등을 향한 갈망을 만족시켜주지 못하자, 그는 신시네티로 옮겨갔다. 그곳에서는 인종적으로 더욱 포용적인 기독교 운동들이 보다 큰 가능성을 제공하고 있었다. 그는 당시에 미국적 삶에서 가장 인종적으로 통합적인 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그곳에서 흑인과 백인 신자들은 실제로 동일한 건물 안에서 함께 즐겁게 섞였다.

    구식 남부에서는 흑인들이 백인 성도들의 뒤쪽에 앉았는데, 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렇게 하는 것이 반란이 더 일어나는 것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북부에서도 교회 안에서 평등은 가능하지 않았다. 그 불가능성은 필라델피아와 뉴욕에 두 개의 흑인 감리교단들이 설립된 상황들에 의해 입증되었다.

    안수받은 목사가 된 시무어는 보다 포용적인 교제를 설교하기 위해 그리고 노예 시대 이후 끊어졌던 친척들과의 관계를 다시 잇기 위해 남부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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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휴스턴에서 친척들을 만났지만, 그리스도인들 가운에서 보다 포용적인 인종 통합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흑인 찰스 프라이스 존스(Charles Price Jones)와 백인 찰스 파함(Charles F. Parham)과의 연구를 통해 성경이 의미하는 것에 대한 통찰을 가다듬은 후, 그는 휴스턴에 흑인 교회를 세우는 것이 어떻겠냐는 권고를 뿌리치고 인종적으로 보다 개방적인 서부에서 한 회중을 이끌 기회를 놓치지 않고 도약했다. 그를 초청한 그 집단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교단을 떠난 후 언제나 백인들을 환영하며 받아들였다.

 

Charles Price Jones

 

Charles F. Parham

 

 

 

    시무어가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백인들이 참석했었고, 그에게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심지어 글로솔라리아에 대한 그의 생소한 믿음이 문을 닫아거는 결과를 가져온 후에도, 백인들은 그의 미천하게 보이는 기도 모임에 참석하며 계속 그와 함께했다.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그의 지도력과 그가 성취하려 노력하고 있던 것을 어느 정도 공유했던 그 백인들 때문이었다.

    그 기념할 만한 절정의 49일 저녁, 백인들은 참석하지 않았었지만, 곧 많은 백인들이 도착했다. 412일에, 시무어가 성령침례를 받았을 때, 그는 그와 함께 기도하고 있던 한 백인 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었다. 시무어가 그 침례를 받았을 때 그는 그것을 모두 흑인들 만의 무리 안에서가 아니라 한 백인과 함께 나란히 구하고 있었다는 것은 적어도 상징적이며, 그리고 매우 중요하다.

    시무어는 그 교회를 방언적 평등과 인종 간 평등, 두 가지를 갖는 하나의 새로운 몸으로 보았다. 인종 간 통합은 오직 복음 자체를 버림에 의해서만 부정될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 자체는 지상의 모든 사람들을 종교, , 국적, 또는 계급의 분열들 넘어서는 하나의 새로운 전체 안으로 통합하는 것을 의미한다.사도적 신앙은 인종적 일치와 큰 무리의 사람들에게 매혹적이었던 행복과 능력을 제공하는 방언적 황홀경을 포함했다.

    시무어는 전력을 다해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을 증명하려고 했다. 그 성취의 위대함은 바울이 사람들 앞에서 베드로와 의견을 달리했을 때 복음 자체가 인종적 차별, 인류의 가장 심한 파열의 치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초대 교회 역사에서 가장 뜻깊은 사례에서 드러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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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데반 집사의 순교 후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첫 번째로 전해졌던 그리고 예수의 추종자들이 첫 번째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불렸던 안디옥에서, 인종간 일치는 교회의 특징이었다. 바울에게 선교사로 파송하기 위해 안수했던 지도자들에는 흑인 시몬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울은 안디옥을 방문했을 때 유대교의 배타성을 제쳐두고, 적어도 한 명의 흑인과 그 이상의 흑인을 포함하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인들의 인종적으로 동등하게 섞인 인종 혼합 집단과 함께 먹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부터 다른 집단이 도착하자 베드로는 자신을 분리함으로써 그 교회를 인종적으로 분리하여 안디옥 유대인 그리스도인 전체 집단을 새로 도착한 유대인들과 함께 배타적인 식사를 나누는데 합류시켰다.

    바울은 공개적으로 베드로를 질책했고, 그런 인종적 분리를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는 위선으로 규정했으며, 기독교를 모든 인간의 분리들을 넘어서는 하나의 전체로 정의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인종적 분리들이 기독교 역사의 탄생 시점에 그 두 지도적 사도들 사이에 일어났던 그런 일화 이후 교회 안에서 완전히 치유된 적이 없었다는 것은 정말 놀랍다. 그 인종들은 기독교 역사 전체를 통해 배타적 집단들로 분리되었었을 뿐만 아니라, 그 위선은 그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며 인식되지 못한 채 남아있어 왔다. 니이버는 말했다.

 

타협들은 인식되지 못할 때, 기독교 이상의 거세가 드러나지 않은 채 남아있을 때, 그리고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무언가 성취한 것처럼, 복음의 본질이 패배한 것처럼 교만해졌을 때 가중된 악이다. 그런 의식하지 못하는 위선은 . . . 적어도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졌던 믿음을 떠난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가짜 복음을 양산한다.

 

    시무어는 아주사에서 한 전체로서 몸을 보여주면서 교회 안에서 인종적인 그리고 다른 분리들에 의해 드러난 복음의 부인에 주목했다. 그는 성도들에게 단번에 전해진 믿음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의 하나 됨이라는 본질적인 교리를 위해 인종적 배척이라는 가짜 복음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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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무어의 신학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인종적 분열을 넘어서는 그들의 새로운 인류를 누리며 기뻐했던 그 초기 시대 이래로 기독교 역사 안에서 잃어버려 왔다가 회복된 한 교리였던 만큼 새로운 경험은 아니었다.

3년 동안 모든 인종들, 성들, 계급들, 그리고 국적의 사람들이 아주사 거리에서 일어난 한 이적 안에서 통합되었다. 그 이적은 교회에게 잃어버렸던 전체성을 회복시킬 기회를 제공했다. 시무어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자 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나가 되자고 요청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존귀하게 여기는 모든 사람들은 교단, 신조, 또는 교리와 상관없이 우리의 형제임을 인정합니다.

 

    아주사에서 드러난 것처럼, 시무어의 오순절 신학 안에서 모든 인종들은 하늘 아래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이 놀라며 복음에 대해 말하는 언어를 듣고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생각했던, 그리고 베드로가 첫 기독교적 설교를 하게 하고, 모였던 사람들 중 3,000명이 기꺼이 반응하게 했던 그 초기 시대에서처럼 모두 하나가 되었다. 또다시 가이사랴에서 성령은 다른 인종들을 새로운 한 일치 안으로 함께 모았다. 글로솔라리아는 이방인들의 영적 상태를 그렇게 썩 정확하게 입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분의 교회를 형성하는 데 있어서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래서 인류를 갈라놓는 가장 큰 간격을 극복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치유하는 능력을 구현하는 인종적 포용성이 참된 교회의 징표이다. 성령의 제1순위 사역은 방언(글로솔라리아)를 산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종들과 나라들의 사람들을 하나의 공동 가족으로 만드는 것이다. 백인들은 글로솔라리아를 오순절적 교제의 특징적인 징표로 취함으로써 시무어의 성취를 오해했다. 그는 오순절적 교제의 특징적 징표를 다음과 같이 다르게 보았다.

 

방언은 모든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들과 함께 하는 표징들(sings) 중의 하나이지, 일상 생활 속에서 나타나는 성령침례의 진정한 증거는 아닙니다. 만약 당신이 화를 내거나, 악한 말을 하거나, 뒤에서 험담한다면, 얼마나 많은 방언들을 말할 수 있든 상관없이 당신은 성령침례를 받지 못한 것입니다. 당신은 구원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 . . 그 비결은 하나가 되어, 한 곳에서, 한 마음으로, 한 뜻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어디에서든 사람들이 하나가 되어 한 곳에 모여 한 마음과 한 뜻으로 이 큰 능력을 믿게 하실 수 있다면, 그 능력이 임하고 오순절적 결과들이 따를 것입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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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즈음 제 마음이 하나님께 그분의 모든 자녀들이 예수께서 기도하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요한복음 17장의 삶의 필요를 보게 해 달라고 얼마나 간구하는지 모릅니다. . . .

오순절적 능력은, 요약하자면, 더 큰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만약 그것이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을 가져오지 않는다면, 단지 가짜에 불과한 것입니다. 오순절은 고린도전서 13장에서처럼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표준입니다. . . 이것이 성경적 종교입니다. 이것은 가공된 종교가 아닙니다. 오순절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 사랑하게 만들고, 우리의 형제들을 더 사랑하게 만듭니다. 오순절은 우리 모두를 한 공동 가족 안으로 이끌어갑니다.

 

 

 

 

    시무어는 그 핵심 교리를 그가 아주사 표준”(the Azusa standard), 또는 예수의 표준,” 또는 성경적 표준이라고 부르는 것 안에 요약했다. 그것은 십자가에 의해 요청되고, 방언 안에서 성령의 부어주심에 의해 드러난 인류의 모든 분열을 넘어서는 그리스도의 몸의 완전한 하나 됨이다. 요약 하자면, 참된 기독교적 사랑은 교회가 교회 될 때, 오직 피부색으로 가른 선을 그리고 인간이 성, 계급, 또는 국적에 따라 그은 모든 다른 선을 넘어 하나가 될 때 성취된다.

    이 신학은 기독교적 성결을 개인들을 넘어 교회 자체를 위해 추구할 때 혁명적이다. 교회는 거룩한 개인들 또는 온전한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다. 교회는 인종, , 계급, 또는 국적을 넘어 분리 없이 함께 결합 된 하나의 거룩한 또는 온전한 몸이다.

    그 몸 안에서 어떤 개인이나 무리의 가장 큰 죄는 인종적, 성적, 사회적, 또는 국가적 선들을 따라 사람들을 중시하거나 가르는 것, 그럼으로써 그 온전한 통합을 약화시키거나 파괴하는 것일 것이다. 바울의 온전함에 대한 관심이 잊혀지기 전에, 그리고 다양한 인종들이 교회 안에서 분리되기 전에, 초기 기독교 저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유대인도 아니요 이방인도 아닌 그 둘을 넘어서는 제3의 인종으로 묘사하는 그를 따랐다. 3의 인종은 예수 피로 채워진 하나의 새로운 인종인 그리스도인이었다. 시무어는 이 혁명적 통찰을 납득하고 모든 장벽들을 넘어서는 기독교적 온전함(Christian wholeness)이라는 본래적 교리를 회복시켰고, 나누어진 교회와 세상에 치유를 제공했다. 시무어의 관점에서, “나누어진 교회라는 용어는 용어상 모순이다. 왜냐하면 나누어진 교회는 결코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의 참된 본질은 단번에 성도들에게 전해진 믿음인 전체성(wholeness)에 있다. 시무어에게 신학은 그 본래적 전체성의 회복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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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사에서 사랑은 언급할 가치가 있는 두 가지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되었다. 그 두 가지는 비평적으로 이해하기에 어려움을 준다. 한 방식은 기도를 통한 신유였다. 이 현상은 종종 아주사를 선전해 주었고, 사람들을 그 교제 안으로 끌어들였다. 목발들, 교정기들, 안경들, 담뱃대들, 아편 유도체 사용을 위한 장치들, 술중독을 극복한 사람들이 쓰던 술병들, 온갖 종류의 약통들 등의 무수한 물건들로 장식된 그 선교회의 다락방에 의해 예시되는 수 많은 사례들이 있었다. 많은 잘 검증된 사례들은 심리학적으로 쉽게 설명될 수 없다.

    한 가지 전형적인 사례는 로렌스 캐틀리(Lawrence F. Catley)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1906년에 열한 살 먹은 흑인 소년이었다. 그는 텍사스, 샌 안토니오의 그의 집에서 폐결핵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당했고, 그곳 기후가 건강에 도움을 줄까 봐 그의 부모에 함께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다. 그런데 기후도 당시의 의학적 치료들도 희망을 주지 못했고, 그의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암담해졌다. 실망한 그는 저를 깨우지 마십시오라는 기도를 한 후 잠자리에 들곤 했다.

    어느 날 한 이웃 여인이 뒷마당 담장 너머로 캐틀리의 어머니에게 아주사 선교회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람들이 서로를 위해 기도해 주면, 고침을 받고 있으니어린 로렌스를 데리고 가보라고 권했다. 캐틀리 부인은 회의적이었지만, 결국 그녀의 아들을 아주사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서 한 무리가 그 아들 주변에 모여 기도했다. 캐틀리는 나머지 길고도 생산적인 생애 동안 그 순간에 고침을 받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그는 폐결핵을 앓았었다는 증거가 확실하게 남은 몸을 가지고도 신체검사에 합격한 후 제1차 세계대전에 군인으로 복무하기도 했다.

 

1956년 아주사부흥 발발 50주년 기념사진, 맨 오른쪽에 앉아서 지팡이를 들고 있는 흑인이 캐틀리

 

1970년의 캐틀리, 왼쪽 두 번째

 

1970년에 파사데나 하나님의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79세 캐틀리 목사

 

 

2006_02_Spring.pdf - Enrichment Journal

 

 

 

    다른 중요한 사랑 표현은 방언과 관련되었다. 방언은 역사의 종말을 위해 전 세계의 사람들을 준비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사람들을 하나님과 서로를 보다 더 온전하게 사랑하도록 능력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여겨졌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방언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의 의사소통을 개선시키기 위해 주어지는 실제 언어들을 포함한다고 믿어졌다. 예배의 한 부분으로서, 통역과 함께 발해지는 방언은 예언과 동등한 가치를 갖는 것이었다. 복음을 전 세계로 전파하는 직무를 위해, 방언들은 선교사들이 이 세대의 끝에 너희는 가서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는 대위임령을 성취하기 위해 이전에 배우지 않았던 만국의 언어들을 이적적으로 말하게 할 수 있게 한다고 여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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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초엽 역사에서 가장 당혹스런 국면들 가운데 하나는 종종 방언들이 실제적인 언어들이었다는 놀라운 기록과 더불어 선교지에서 보통 그 기대대로 되지 않았다는 실망들을 정직하게 진술한 것과 관련된다. 더하여, 그 주장은 초기 몇 년 후에 거의 사라졌고, 그 이후에는 매우 드물었다.

    실제 언어들로 이해된 방언의 많은 사례들은 발화자에 의해 알려지지 않았고, (보통 그들의 모국어가 말해졌다고 보고하는) 청자에 의해 이해되었다는 것이 문서들을 채웠다. 아프리카에서 20년 동안 선교사로 섬겼던 베테랑 목사 메드 부인(Rev. and Mrs. S. J. Mead)은 그 운동에 합류했는데, 아주사 선교회에서 아프리카 방언들을 들었다고 보고했다. 사례들은 넘쳐난다. 비록 그녀의 경험은 예외적인 것이었지만, 루시 패로 부인(Mrs. Lucy Farrow)은 그녀의 설교를 듣는 자들의 교화를 위해 적어도 때때로 그루어를 말하고는 아프리카에서 돌아왔다.

    1906년 로스앤젤레스에서, 가르(A. G. Garr)의 방언들은 한 힌두인에 의해 인도의 주요 공용어를 포함하는 몇 가지 인도어들인 것으로 인지되었다. 그러나 가르는 그 선교지에 도착하자마자 온전히 외국어로 설교하기 위해서는 통역사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의 경험은 보통 일어나는 것이었다.

    1906년에서 1909년까지 아주사 선교회의 역동적인 시기 동안 여러 외국태생 사람들에 의해 이해된 방언들은 잠깐 일어났었다가 치유들에 대한 보고들, 신자들의 일치, 그리고 놀라운 인종 간 사랑과 그 배후의 지도력과 함께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것과 유사한 전개 또는 쇠퇴가 사도행전 24절의 최초의 방언과 극적인 치유들 이후 기독교의 초기 시기에 일어났다. 그리스도인들과 그리스도의 몸 전체 사이의 사랑의 강한 유대관계가 초기 기독교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라져버렸다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방언과 치유 능력의 상실은 사랑의 저하와 일치의 상실과 관련되는 것 같다. 어떤 결정적인 답변을 제시하는 것은 이 논문의 목적을 벗어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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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인종들과, 국적들, 성들, 그리소 계급들이 피부색으로 그어진 선을 넘어 새롭고 동등한 교제 가운데서 하나가 된 아주사 이적의 나타남과 함께 시무어와 아주사 선교회는 2년 동안 전 세계에 폭넓은 영향을 미쳤다. 세 가지 중요한 사건들이 이 시기의 특징을 이루었다. (1) 아주사 선교회에서 파함과 시무어의 분열 (2) 시무어의 사도신앙지(The Aposotlic Faith) 출판과 그 운동의 전 세계적 전파, 그리고 (3) 시무어의 결혼과 사도신앙지구독자 명부 분실.

 

(10) 파함의 분열

 

    190610월 말에 파함이 로스앤젤레스에 왔다. 시무어는 파함을 오직 휴스턴에서 몇 주간 공부하는 동안 알았을 뿐이었지만, 그는 잊혀졌던 기독교 방언의 재발견을 그곳에서 공부하도록 받아들여 주는 친절함을 베푼 파함을 높게 평가하고 존경했다.

    그런데 화해할 수 없는 다툼이 둘 사이에 아무런 경고도 없이 갑자기 일어났다. 파함은 아주사에서 행한 첫 번째 설교의 태도에 의해 그 분열을 촉진시켰다. 서로 다른 기대, 배경, 그리고 인식차는 그 파열을 봉합하는 것을 가로막았다. 그 파열은 오순절 운동의 두 가지 대립되는 개념들을 대표했다. 그 분열은 개인적이기 보다는 사회적이고 신학적이었다.

    파함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그의 지인들로부터 아주사에 미치고 있는 흑인적 영향력에 관해 비판적인 보고들을 받은 후 아주사 선교회에 갔다. 파함은 휴스턴과 일리노이주, 시온시에서의 성공적인 집회들로 인해 절정에 이른 명성을 얻고 있던 때에 아주사에 왔다. 그는 자기가 백인들이 남부의 무식하고 유치한 흑인주의를 모방하며 그것을 성령의 역사로 돌리고 있는 것과 같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를 중지시킬 수 있는 총괄적 지도자로서 합당한 위치에 있다고 생각했다.

    아주사에 도착했을 때, 파함은 미국 사회에서 용인되는 모든 관습을 거스려 흑인들과 백인들이 뒤섞이고 있는 것을 본 것 때문에 역겨움에 휩싸였다. 그에게 흑인들은 그들에게 합당한 자리에 있지 않았고, 그들의 과도함이 너무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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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에 파함과 시무어 사이의 유사점들은 그들을 함께 묶어주었지만, 이제 상이점들은 그들을 갈라놓았다. 파함의 배경과 방식은 시무어와 아주사의 배경과 방식과 너무도 달랐다. 파함은 겨우 19세에 한 유명한 감리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그의 토페카 성경학교를 위한 건물을 빌렸었고, 캔사스주 갈레나에서 성공을 거두었고, 그곳에서 한 부유한 광산 경영자의 후원을 받았으며, 한 부자 목장주의 초청을 받고 텍사스로 가서 휴스턴에서 가장 큰 홀들에서 집회를 열었고, 신문들에 의해 호의적인 평가를 받았다. 일리노이주, 시온시는 파함을 그저 전형적인 방식으로 환영했었다. 한 신문은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 도시에서 가장 영향력 있다고 간주되는 재력가들이 파함을 그들의 좋은 집들로 초청해오고 있고, 그에게 최선의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 같다.

 

    그의 수입은 감리교 목사였을 때 보다 열 배로 늘었다. 캔사스 주는 다섯 권으로 구성된 주 역사서에 그를 포함시키며 경의를 표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영적인 성경학교 학생들을 가지고 있던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파함은 인종간의 혼합이 노아시대의 홍수의 원인이었다고 믿었고, 앵글로-색슨족을 이스라엘이라는 선택된 백성 가운데서 잃어버린 열 지파의 직계 자손이라고 보았다.

    파함이 아주사 집회에 참석했을 때, 많은 점에서 그가 지지하는 것과는 정반대로, 거대한 충돌이 일어났다. 시무어는 텍사스에서 그의 인종에게 목회하라는 충고를 따르지 않았었다. 그리고 아주사에서 파함의 이름은 그 타운 안에서 가장 극심한 슬럼가에서 일어나던 인종간 혼합과 동일시되고 있었다.

    파함은 오래지 않아 그 상황을 파악했다. 그는 놀랍게도, 상황이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고 말했다. 아주사 선교회에 다가가면서, 그는 예배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 소리는 그가 결코 허락해 오지 않아 왔던 것이었다. 안에 들어간 그는 사람들이 몸을 떨며 능력 아래서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 그런 것들은 그가 보기에 인종혼합적 개방성에 의해 강화된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파함은 그 무리 사이를 걸어 앞으로 나가 시무어에게 인사하고는 강단에 섰다. 그는 하나님께서 역겨워하십니다!”라고 선언하며 신랄하게 꾸짖기 시작했고, 자존심이 강하신 하나님께서는 그런 동물주의(animalism)를 참으실 수 없으실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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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접근은 아주사 회중이 멀어지게 했고 그의 지도력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 결과 파함은 아주사를 떠나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던 여성 기독교 금주 운동 본부 빌딩(Women’s Christian Temperance Union Building)에 새로운 부흥 캠페인을 열었고, 그 캠페인은 12월까지 지속되었다.

    시무어에게 이 사건은 오순절에 대한 두 사람 사이의 눈에 띄는 이해의 대조를 드러냈다. 그때까지는 파함이 단지 지역적 관습에 순응하기 위해 일시적인 방책으로 휴스턴에서 그의 사역을 분리시켰다고 믿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파함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사회적이고 인종적 신념들이 너무도 명백하게 드러났다. 그 신념들은 파함의 목적과 시무어의 목적 사이에 날카로운 경계선을 만들었다. 그 첫 인종적 분열이 그 운동 안에서 나타났다.

    그 미션은 오래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파함의 계산에 의하면, 성령침례를 받았던 200-300명의 아주사 참석자들이 여성 기독교 금주 운동 본부 빌딩(W.C.T.U) 시절 동안 그의 관점에로 돌아섰다. 그는 아주사 선교회를 강력하게 공격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가장 강한 말들로 그들을 계속 정죄했다.

    아주사의 인종 간 교제에 대해 제대로 평가하지 못한 파함의 무능력과 그 자신의 우월감에 따라 로스앤젤레스에 다른 운동을 설립하기 위해 벌였던 경쟁적 겨루기는 그 운동에서 인정받던 그 지도자를 전 세계적인 활동들의 본진에서 효과적으로 제거했고, 그 운동을 분열시켰다. 다른 거만했던 백인 지도자들은 아주사에서 자신을 낮추었지만, 파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시무어는 파함이 그 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 전체의 부흥을 이끌어 주기를 바랐다. 그런 규모의 부흥은 한 흑인이 백인들이 지배적이었던 미국 사회에서 성취할 수 없는 것이었다. 시무어는 아주사 선교회의 목사로서 특수하게 섬기기도 했지만, 단순히 방언뿐만이 아닌 기독교적인 인종적 평등과 실제적 일치의 가치를 알았던 백인 동역자들에 의존한 효과적이고 전면적인 대도시적, 전국적, 그리고 전 세계적 지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파함은 전면적인 지도력을 제공하기에 가장 좋은 위치에 있었다. 그는 토페카 성경학교를 이끌었었고, 텍사스 운동을 조직했으며, 그의 도착 이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자격 있는 지도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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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와 동의하지 않던 사람들에 의해서조차 청중을 사로잡는 연설가로 인식되었다. 확신에서 오는 용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전 생애의 특징이었다.

    파함은 로스앤젤레스에서 그에게 제공된 기회를 큰 부흥을 위한 전면적 지도력을 행사하는 데 활용하지 않았다. 이것에 있어서는 그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모든 백인 지도자들은 곧 또는 얼마 후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시무어와 아주사 선교회에서 분열하여 나감으로써 파함을 뒤따랐다. 파함의 인종적 편견들은 대부분의 백인들의 편견보다 더 노골적이고 성경적으로 합리화된 것이었지만, 본질적으로는 당시의 지배적인 백인 문화와 다르지 않았다.

    아주사로부터 갈라서서 경쟁하기로 한 치명적이고 의도적인 결정은 시무어의 지위를 손상시켰고, 그 운동을 심각하게 약화시켰다. 시무어는 아주사에서 발생했다고 주장된 과도함들 때문에 희생양이 되었다. 그런데 사건들 이면에 있는 진짜 이유들은 의도치 않게 또는 다른 방법으로 조심스럽게 위장되었다.

    파함은 190612월에 로스앤젤레스를 떠나 19074월에 텍사스 주에 도착할 때까지 미합중국을 여행했다. 그는 텍사스에 도착한 후 곧 동성애 혐의로 고소되어 체포되었고, 법정에 기소되었다. 그리고 그는 카로터스의 중재 노력들이 실패한 후 텍사스 지도력에 의해 제명되었다. 그 조치는 1959년과 그 이후의 역사적 기록들에서 명예가 회복되기까지 파함을 불명예 상태에 처하게 만들었다.

 

 

(11) 시무어의 대응

 

    시무어는 파함이 로스앤젤레스에서 한 통합적인 부흥을 이끌어주기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부흥 캠페인에 뒤이은 파함의 아주사와의 결별 이후, 시무어는 두 달 동안 그 어떤 공적 진술도 하지 않았다. 그의 사도신앙지의 9월 호와 10월 호는 파함의 소식들로 채워졌었지만, 11월 호는 그에 대해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고, 단지 아주사 예배의 겸허하고 인종 혼합적 방식에 주목할 것을 요구했으며, 그 출판자를 사도신앙운동의 로스앤젤레스지부”(The Apostolic Faith Movement of Los Angeles)에서 로스앤젤레스, 태평양 사도신앙운동 본부”(The Pacific Apostolic Faith Movement, Headquarters, Los Angeles)로 변경했다.

 

 

 

 

 

 

 

 

     12월 호는 파함에 대한 그 어떤 비판도 피하며 그 문제를 아주 품위 있게 다루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말하며 파함을 너무 성급하게 지도자로 알렸던 것에 대한 책임을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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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찰스 F. 파함 박사가 이 운동의 지도자냐고 묻고 있다. 우리는 대답할 수 있는데, 그는 아주사 선교회 운동의 지도자가 아니다. 우리는 그가 우리의 지도자라고 생각해 왔었고, 그래서 주님께 묻지 않고 우리의 소식지에 그렇게 썼었다. 우리는 특히 우리가 성령의 능력에 있어서 아주 미숙할 때 경솔해질 수 있다. 우리는 마치 갓난아기와 같다. 사랑으로 가득 찬 우리는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이면 그 누구든 기꺼이 우리의 지도자로 받아들이려 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를 침착하게 만드셨고,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지도자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양의 큰 목자장으로 모신다. 그분이 우리의 모범이시다.

 

    시무어는 아주사 예배의 포용적인 방식을 다시 언급하면서 자신을 성령께서 그 위에 감독으로 삼으신 양떼의 비천한 목자로 묘사했다. 그러면서 그는 파함의 특징적인 가르침들 중에 두 가지에 대한 믿음을 적절하게 거부했고, 파함을 끌어안으면서도 방언 경험이 아닌 십자가와 그 피를 세계적인 아주사 친교를 위한 기초로 삼았다. 시무어는 흑인들에 의해 오랫동안 성경의 중심 주제로 여겨져 왔었던 노예 생활과 억압으로부터 해방을 축하하는 희년(jubilee)의 측면에서 아주사에 의미를 부여하며 결론을 맺었다.

    시무어와 아주사에 참여했던 다른 사람들은 파함이 오순절을 권위주의적으로 다루는 것을 인종적으로 편견에 사로잡힌, 제한된, 분열을 조장하는, 그리고 결과적으로 참된 것이기보다는 가짜라고 인식했다. 시무어는 이 모든 점들을 간접적으로 드러냈다. 왜냐하면 그는 아주사 선교회에 적대적인 사람들에게 불친절한 말을 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12) 시무어의 꿈

 

    두 사람 사이의 차이는 시무어가 아주사 선교회가 세워지기 전에 가졌었던 놀라운 꿈을 대담하게 나누게 했다. 평상시에 별로 말이 없고 과묵했던 시무어는 이 경우에 대해서는 어린 커밍스(Frank Cummings)에게, 그리고 후에 회중에게 말했다. 시무어는 한 드넓은 숲에 있는 꿈을 꾸었다. 작은 불꽃들이 딱딱 소리를 내며 피어나더니 하나로 합해져 불꽃의 견고한 벽 안에서 함께 그 숲을 태우기 시작하기까지 번져나갔다. 한 설교가가 젖은 마대자루를 들고 그 불을 향해 달려와서는 그 불을 끄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 불은 더 높게 뛰어올라 더 멀리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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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어는 아들 프랑크야, 이것의 교훈은 전세계로 퍼져나감을 의미하는 것이란다라고 털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