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 장: 지도자 시무어, 1906 - 1910
때가 제 삼 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사도행전 2:15-17
하나님의 마음에 로스앤젤레스는 이제 교회를 그 이전의 위치, 모습, 그리고 능력에로 회복시킬 때인 것 같다. 지금, 교회의 완전한 회복의 시간이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에서 그의 종들에게 말씀해 오셨고, 그들 중에서 많은 사람들을 로스앤젤레스로 보내오셨다. 그들은 옛날에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하늘 아래의 모든 나라를 대표해 ‘오순절’을 위해 올라왔다가, 다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 세계에 전하기 위해 나가고 있다. ‘오순절’을 위한 활동 본부는 옛 예루살렘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옮겨졌다.
프랑크 바틀맨(Frank Bartleman)
(1) 시무어의 여행, 1906
1906년 1월에, 시무어는 기차를 타고 휴스턴을 떠나 로스앤젤레스로 그리고 보다 개방적인 인종적 환경 안으로 들어갔다. 190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미국 흑인들의 1%의 10분의 3이 미국 서부에서 살고 있었다.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거주민 수는 1900년 2,131명에서 1906년 5,468명이 되었다. 다시 한번, 시무어는 뒤따를 이주의 파도들을 선구적으로 탔다.
그 길고 지루한 기차 여행은 4일 또는 그 이상이 걸렸다. 흑인은 침대칸에 탈 수 없었고, 짐 크로우 인종 분리 정책을 위해 마련된 가장 꺼려하는 칸에만 탈 수 있었다.
시무어는 그 여행의 중간지인 덴버에서 쉬기 위해 내렸고, 알마 화이트 부인(Mrs. Alma White)의 기독교 센터(Denver Christian Center)에서 원기를 회복했다. 호의를 요청하는 데 있어서 그는 저녁 빛 성도회의 여행하는 목회자들이 동료 그리스도인들에게 요청하던 관례를 따랐다. 당시에 저녁 빛 성도회는 미국 전역에 걸쳐 그들 소유의 열아홉 개에 달하는 선교 숙박시설을 운영하고 있었고, 여행하는 성직자들이 그곳에서 언제나 환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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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로스앤젤레스의 역사
시무어의 목적지 로스앤젤레스는 다양한 역사를 자랑했다. 바스(Bass)는 “미국 전체에서 그 어떤 도시도 로스앤젤레스처럼 전설적인 시작을 갖지 않았다”고 보았다. 스페인 왕, 카를로스 3세(Carlos III)는 뉴 스페인으로부터 가스파 드 포톨라(Gaspar de Portola)가 이끄는 원정대를 북쪽으로 보냈고, 1769년 8월 2일에 현재의 로스앤젤레스를 찾아냈다. 그리고 그곳에 1781년 9월 4일에 열한 가정이 엘 뿌에블로 데 누에스뜨라 시뇨라 라 레이나 데 로스 앙겔로스, 천사들의 여왕인 우리의 아가씨의 마을, 또는 “천사들의 도시”를 세우며 정착했다. 프란시스 수도회의 후안 크레스피 신부(Father Juan Crespi)가 그 새로운 시의 이름을 지었다.
그 열한 설립 가정은 22명의 성인들과 22명의 어린이들을 포함하는 총 44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 중 2명은 코카시아인, 16명은 원주민들, 그리고 26명은 흑인들이었다. 1847년 미국과 멕시코 사이의 전쟁 후 그리고 1848년 황금 발견 후인 1850년에 캘리포니아는 (노예가 없는) 자유 주의 하나로 연방에 가입했다. 그해의 로스앤젤레스 인구조사는 12명의 흑인들을 포함해 1,610명이 살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여행자들은 육로로 힘든 여정을 따라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거나 태평양으로 항해하기 전에 대륙횡단 지름길로서 파나마 운하를 배로 통과하여 도착했다.
남부 태평양 철도는 1876년에 로스앤젤레스까지 이르렀고, 1885년에는 산타페에까지 뻗어나갔다. 그로 인해 인구는 1870년에 5,728명에서 1900년에는 (2,131명의 흑인들을 포함하여) 102,479명으로 증가했다. 미국의 그 어떤 도시도 그렇게 빨리 성장하지 않았다.
1906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인종적 분리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중심가 호텔들과 레스토랑들은 흑인들에게 출입을 허용했고, 인종 간 접촉들과 우정은 예외가 아닌 규칙이었다. 로스앤젤레스는 흑인 소방관들과 경찰관들을 고용한 첫 미국 도시가 되었다. 그곳은 시무어의 인종 간 공존에 대한 꿈을 실현시키기에 아주 적합한 장소였다.
(3) 영적 발효
1900년 이후 몇 년간 로스앤젤레스는 지난 세기가 저무는 십여 년 전부터 시작된 전 세계적인 영적 갱신의 영향을 반영했다. 성결적 부흥이 그 새로운 세기를 휩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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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히터는 다음과 같이 썼다.
오순절적 경험의 갱신과 “새로운 성령의 시대”의 동반을 통해 교회들을 초대기독교로 회복시키려는 부흥 노력은 그 이전의 개신교 역사에서 필적할 수 없는 영적 기대를 일으켰다.
로스앤젤레스는 이 기대에 완전히 부응했다. 바야흐로 그 시간은 시무어의 오순절의 회복 성취 추구를 위해 적당한 때였다. 1904년에서 1906년의 웨일즈 부흥은 전 세계에서 그랬던 것처럼 많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조셉 스메일(Joseph Smale)은 명성있는 제일침례교회(First Baptist Church)의 목사였는데 1905년에 성지(the Holy Land)를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웨일즈를 경유했고, 그곳에서 부흥 지도자 이반 로버츠를 만나 관심사를 나누었다. 6월에 귀국한 그는 밤낮으로 진행된 15주간의 특별 집회들을 시작시켰고, 그 집회들은 그의 교회를 그 도시의 영적 센터로 만들었다. 그 열정은 그 교회의 어떤 성도들에게는 과도한 것이었다. 스메일은 사임했으나, 그 교회의 성도들 대부분은 그와 함께 나와 버뱅크 홀(Burbank Hall)에서 모이는 신약교회(The New Testament Church)를 세웠다.
프랑크 바틀맨(Frank Bartleman)은 순회 전도자였다가 1904년에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고, 1905년에도 전도지 배포, 기도, 그리고 설교 사역을 활발하게 유지했다. 그의 활동은 그 집요함(urgency)에 있어서 그 누구도 필적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웨일즈의 이반 로버츠와 연락을 주고받았고,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진기한 일들을 알리는 글들을 퍼트렸다.
다음과 같은 많은 다른 지도자들이 영적 관심의 수준을 끌어올렸다. 글렌달 침례교회의 엘머 피숴(Elmer Fisher), 메트로폴리탄 성결 협회(불타는 가시떨기 나무)의 알프레드 굿리치 가르(Alfred Goodrich Garr), 파사데나와 중심가의 한 천막 집회를 이끈 윌리엄 만리(William Manley), 그리고 독립 순복음교회의 아더 오스터버그(Arthur Osterberg). 로스앤젤레스에 정착했던 웰티 잉글리쉬맨(Wealthy Englishman), 조지 스투드(George B. Studd)는 한 성결회 센터, 900석 규모의 브니엘 홀(Peniel Hall) 건설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브니엘에 있던 한 특별한 아파트에 살면서 영적 삶의 모든 국면들을 나누었다.
전국적으로 알려졌던 감리교 목사 피네아스 브리시(Phineas Bresee)는 성결적 전도단을 오랫동안 이끌었었고, 결국 그 교단을 떠나라는 압력을 받고 1896년 로스앤젤레스에 나사렛교회를 설립했다.
뉴욕의 심슨(A. B. Simpson)이 이끌던 전국적인 기독교선교연맹(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은 열정적으로 전도했고, 병자들의 치유를 위해 기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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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니스 요쿰 박사(Dr. Finis E. Yoakum)은 덴버에서 발생했던 교통사고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후 로스앤젤레스에 왔다. 덴버에서 그는 탁월한 뇌수술 전문의사였고, 그로스 메디칼 칼리지(Gross Medical College)의 교수였다. 서른두 명의 의사들이 그가 죽어가고 있다고 마지못해 진단한 후, 그는 여행 반대를 무릅쓰고 기후가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고 캘리포니아로 떠났다. 기후가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에 그는 한 심슨의 연맹(Alliance) 집회에서 기도를 통한 극적인 치유를 경험했고, 집으로 돌아가 거의 일 년 만에 처음으로 먹고 잘 잤다. 그는 그로부터 90일 후 그의 몸무게는 90파운드 증가하여 100파운드에서 190파운드가 되었고, 결국 그의 정상 체중인 225파운드에 도달했다.
요쿰은 주목할 만한 사회사업을 통한 전도사역을 시작했고, 그 사역은 성장하여 커다란 복합적인 사역들을 포함하게 되었다. (1) 비스가 홈(Pisgah Home)은 파사데나에 있었으며 많은 병자들과 사회적 약자들 부랑자들을 환영하고 대우해 주었고, 한 달에 18,000명에게 무료로 식사를 제공했으며, (2) 비스가 아크(Pisgah Ark)는 미혼모들을 돌보았고, (3) 비스가 가든즈(Pisgah Gardens)는 과일과 채소들이 자라는 18에이커의 산지에 세워졌고, 결핵환자들을 돌보았으며, (4) 비스가 그랑드(Pisgah Grande)는 3,200에이커의 산악에 세워진 목장이었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음식들을 생산했다.
남부 캘리포니아 성결 협회는 로버츠 회장에 의한 감독 아래 총 26개의 교회를 갖고 있었다. 자유 감리교단은 헤르몬(Hermon)에 한 신학교를 운영했다. 다 합하여, 100개 이상의 교회들이 1906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순복음”(full gospel)을 표방했다.
사람들에게 놀라운 방식으로 접근하면서 영적 관심은 로스앤젤레스에서 최고조에 달했다. 때때로 무리들이 단지, 아마도 병든 노모를 씻겨드리거나 아이들을 돌보는 등, 섬기는 방법을 찾기 위해 이집 저집을 방문했다.
이들 기대하지 않았던 방문자들의 기도들은 때때로 극적인 결과들을 낳았다. 1904년에 7번가의 흑인 거주지역에 살고 있던 커밍스(William Henry Cummings)의 아홉 살 어린 딸 마티(Mattie Cummings)는 날 때부터 호흡기 질환으로 숨쉬기 어려운 고통을 받았고, 그녀의 오른 쪽 귀에 대고 외치지 않는 한 들을 수가 없었다. 왼쪽 귀의 청력은 100% 상실되었고, 오른 쪽 귀의 청력은 95% 상실되었었다. 그래서 그녀는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어느 날 한 백인이 그녀가 살던 집의 문을 두드리며 치유가 필요한 사람이 있는지 물었다. 허락을 받은 그는 성경 구절을 읽고는 올리브기름을 마티의 귀들에 부은 후 그녀의 회복을 위해 기도했다. 그는 사례금이나 선물을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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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에 잠에서 깬 마티는 누군가가 거실에서 피아노를 치고 있는 소리를 듣고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녀는 침대에서 뛰어나와 그녀의 어머니에게 달려가 외쳤다. “엄마, 나 들을 수 있어요, 들을 수 있어요!” 그녀의 청력은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았고, 그 후에도 계속 그랬다.
1905년 초봄에 그 역사적인 (로스앤젤레스에 세워진 첫 번째 흑인 침례교회) 제2침례교회에서 지도적 성도였던 줄리아 헛친스 부인(Mrs. Julia W. Hutchins)이 그리스도인의 성결은 하나님의 은총의 한 뚜렷한 경험이라고 주장했다. 한 부흥회 중에, 그녀는 사람들을 초청하여 제단에 무릎을 꿇고 이 축복을 구하게 했다. 그 결과 헛친스 부인은 아홉 가정과 함께 그 교회에서 축출되었다.
그들은 백인 목사 윌리엄 만리(William Manley)와 1번 가와 보니브레 가가 만나는 지점에 있던 “믿음의 집”(Household of Faith)라 불리던 그의 천막 전도단에 합류했다. 그러나 그들은 곧 7번 가와 브로드웨이가 만나는 곳에 자신들의 천막을 치고 그 여름을 보냈다. 가을비들은 그들을 북 보니브래가 214번지(214 North Bonnie Brae Street)에 있는 리차드 에즈베리 부부(Mr. and Mrs. Richard Asbery)의 집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그 집은 맥아더 파크(MacArthur Park)와 후에 [에이미 샘플 맥퍼슨의] 앙겔루스 템플이 세워진 에코 파크(Echo Park) 사이의 매력적인 흑인 거주지, 템플 스트리트(Temple Street) 지역 안에 있었다.
그들은 자주 만났고, 매주 월요일 밤에는 그 집 앞에서 특별 전도집회들을 열었다. 그들은 그때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몰려올 때까지 찬송을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집안에 들어가 예배를 드리자고 모인 사람들을 초청했다. 그 집단은 상당히 커졌다.
참석자가 그 집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늘어나기 전에 헛친스 부인은 9번가와 산타페가 만나는 곳에 있던 한 작은 건물을 세내었다.
참석자가 계속 늘어나자 그들은 지도력을 생각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들의 일이 하나님의 일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단순하게 하나님께서 이 집회 저 집회마다 지도자들을 보내주시는 것에 의존했다. 그런데 성도들의 수가 계속 증가하자 그들은 전임 목사를 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되도록 먼 곳에 있는, 인정받는 성결인을 구하자고 결의했다. 낯선 사람이 보다 더 잘 존경을 명하고 규율을 유지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때문이었다. 그 구성원들 중에 그 해 여름에 휴스턴에 있는 친척들을 방문했다가 시무어가 목회하고 있던 성결교회에서 예배를 드렸었던 닐리 테리 부인(Mrs. Neely Terry)이 윌리엄 J. 시무어를 추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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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를 아주 적격인 사람으로 묘사했고, 기도한 그들 모두는 이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고 동의했다. 그들은 시무어에게 교통비를 동봉한 초청장을 보냈다. 곧 그들은 휴스턴으로부터 그들의 새로운 목사가 길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다.
(4) 쫓겨난 시무어
시무어는 하나님의 뜻을 강하게 느끼며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그의 열정적인 회중은 그를 기차역에서 맞았고, 9번가와 산타페가 만나는 곳에서 곧 저녁 집회들을 시작했다.
그는 다양한 기독교적 주제들을 설교했는데, 설교를 듣던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것을 알아챘다. 시무어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대한 그리고 거룩한 삶에 대한 친숙한 주제들과 함께 신유를 강조했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을 그들이 전에 들어보지 못한 강도로 선포했다. 그리고 정말로 충격적이게도, 그는 방언(glossolalia)이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표징(sign)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성령께서 어떤 사람에게 충만하게 들어가실 때 일어나는 한 가지 결과는 “방언을 말하는 것”(speaking in tongues)일 것이라고 설명했다. 시무어 자신은 그렇게 방언을 말하지 못했었지만, 그러나 그것을 믿었다.
그 회중은 호의적으로 반응하기도 하고 비호의적으로 반응하기도 했다. 맥고완(W. H. McGowan)은 호의적으로 들었다. 그는 텍사스의 오랜 감리교 가문 출신의 백인이며 카우보이였는데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해 온 후로 그 성결교회에 다녔었다. 그는 마부로 일하면서 주일 오후에 헛친스의 집회들에 조용히 참석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그 새로운 목사의 말을 경청하려고 특별히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즉시, 기뻐할 것 같은 성결협회의 로버츠 총회장(President Roberts)을 초청했다. 맥고완은 그의 목사 윌리엄 펜들레턴(William Pendleton)에게도 말했고, 그 목사는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갈망에 대한 응답일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시무어의 생소한 가르침들을 의심하거나, 그 가르침들을 옳지 않다고 거부했다. 특히 방언이 표징이라는 가르침은 몇 소중한 믿음들에 도전적인 것이었다. 로버트 총회장은 넷째 날에 참석했고, 공개적으로 시무어의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성결교인들은 이미 성령으로 충만해 있고, 방언은 현시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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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회 후 총회장은 시무어에게 더 이상 이 계파를 따라 설교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다음 날은 주일이었다. 시무어는 역풍을 개의치 않고 확실하게 그가 진리라고 아는 것을 설교했다. 예배 후, 1번가 근처 사우스 유니온(South Union)에 살고 있던 에드워드 리 부부(Mr. and Mrs. Edward S. Lee)가 그 설교가를 주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그날 밤 교회로 돌아온 시모어는 줄리아 허친스가 화가 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 함께 갔던 사람들은 교회 문이 폐쇄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헛친스 부인은 그녀는 그런 극단적인 가르침들이 계속되는 것을 허용할 수 없다고 선언했고, 또한 시무어가 그 선교회 건물에 있는 방에서 묶는 것을 취소시켰다.
그는 머물 곳이 없게 되었고, 더구나 돈도 거의 없었다. 리 부부(the Lees)는 동정심을 발휘해 그를 자기들의 집으로 데리고 갔고, 그는 그곳에서 머물렀다. 사실 완전히 환영받은 손님은 아니었다.
시무어는 그 선교회 문의 폐쇄에 대한 반응으로 리의 집, 그의 방에만 머물며 식사도 거절하고 홀로 금식 기도로 밤을 지샜다. 이것은 며칠 동안 계속되었다.
시무어는 리 부부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권유했다. 그들은 그렇게 했고, 그 낯선자에게 다른 감정을 갖기 시작했다. 그 선교회의 회원들은 그 집을 방문하고는, 기도의 영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시무어는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비록 그들 모두는 그의 교리를 받아들이지는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기도하기를 원했던 것 같다.
한 편, 헛친스는 시무어의 설교들에 동의했던 사람들로부터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그 문제를 해결하여 방언에 대한 더 이상의 논쟁을 그치게 하기 위해 한 특별한 모임을 주선했다. 로버츠는 많은 성결 설교가들을 데리고 왔다.
시무어는 어려운 청중을 대면했다. 그러나 그 모임에 대한 그의 영향력은 놀라운 결과를 낳았다. 그 모임 후, 로버츠 총회장은 구하던 것을 받았을 때 자기에게 알려달라고 시무어에게 부탁했다. 줄리아 헛친스 자신은 곧 드러날 것처럼 마음의 변화에서 그리 멀리 있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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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무어는 그 모임을 다음과 같이 우아하고 단순하게 요약했다.
그들은 성화가 곧 성령침례라고 주장했지만, 그러나 그들은 사도행전 2장의 그 증거를 갖고 있지 않았었다. 사도행전 2장은 그 제자들이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지자 성령이 말하라고 주시는 것을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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