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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J. 시무어의 전기(넬슨)

오순절주의자 윌리엄 J. 시무어의 전기(넬슨) 2.

한오신 2025. 1. 4. 17:18

 

 

 

(2) 인디애나, 인디애나폴리스 시기, 1895 - 1899

 

    시무어는 스물 다섯 살이 되었을 때 기차에 올라탔다. 그 철길은 그가 여덟 살이었을 때 센터빌을 관통해 놓였었다. 그는 그 기차를 타고 루이지애나를 떠나 인디애나, 인디애나폴리스(Indianapolis, Indiana)를 향해 갔다.

 

 

 

 

 

 

그의 여행은 그를 북부 지하 철도”(the northern Underground Railway)[19세기 미국에서 활동하였던 노예 해방을 위한 비공식 네트워크. 미국 흑인 노예들이 노예 제도를 인정하지 않는 자유주나 캐나다까지 갈 수 있도록 비밀스런 탈출 경로와 안전 가옥을 제공했다-역자 부연]가 자유를 갈구하던 흑인들에게 희망을 준 이래로 흑인들이 꿈에 그리던 땅으로 가게 했다. 이제, 그 철도는 자유의 땅에서 펼쳐질 삶의 흥미진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그를 손짓하여 불렀다.

 

 

 

    남부를 떠난 그 단순해 보이는 행동을 통해 시무어는 대담한 정신을 보였다. 그로부터 몇십 년 후에 일어날 이주 물결의 선구적 행동과 정신이었다. 1900년 말에는 흑인들의 90%가 여전히 열네 개의 남부 주들에서 살고 있었다. 대부분 남북전쟁 이전에 북부에서 살았던 나머지 10%의 절반은 뉴욕, 필라델피아, 시카고, 그리고 클리브랜드에서 살았고, 5%는 나머지 지역에서 살았다.

    한 중요하고 선견지명이 있는 집단이 네 개의 흑인 신문들, 우애 조직들, 강력한 교회들, 그리고 식당 웨이터들을 위한 유별난 노동조합과 함께 인디애나폴리스에 존재했다.

    오하이오 강 북부에 있는 진취적인 도시 인디애나폴리스는 전원적인 루이지애나와는 거의 다른 세상을 제공하는, 흑인을 위한 진정한 기회의 표본이었다. 지역 시민들은 그들의 철도역이 세계에서 가장 크다고 자랑했다. 그 역은 바퀴살처럼 사십 마일을 뻗어나가는 스물여섯 개의 도시 간 연결 철도의 허브였다.

    그러나 인종적 편견은 남부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천한 자들과 비숙련자들을 위한 것을 제외하고 모든 직업들이 시무어에게 허용되지 않았다. 시무어는 그에게 가능하고 가장 바람직한 직업들 중 하나를 발견했다. 그것은 중심가의 한 큰 호텔 식당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것이었다. 그 유별난 흑인 노조, “주 그리고 보조 웨이터 협회”(Association of Head and Side Waiters)는 이 고용을 위해 일했다. 그는 처음에 인디애나 아베뉴 127½(127½ Indiana Avenue)에서 살았고, 후에 버드 스트리트 309(309 Bird Street)에서 살았는데, 두 곳 모두 도심지와 인접한 지역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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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무어는 심슨 채플 감독 감리교회(Simpson Chapel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다녔는데, 그 교회는 화이트 강(White River Canal)가 미주리 방향으로 11번가(Northeast corner of Illinois St and 11th Ave)에 있었다. 이 교회의 회중은 모두 흑인들이었고, 인종혼합적 북 감독감리교회에 속해있었다. 그 교단은 흑인 위원들과 감독들이 이끄는 자신들의 행정 협의회 안에서 조직된 흑인들을 포함했다.

 

옛 심슨채플 감독 감리교회 건물

 

 

    (오늘날에는 연합감리교회로 알려진) 그 감독감리교회는 1844년에 노예제 문제로 인해 북쪽과 남쪽으로 갈라졌다. 남북전쟁 후 그 교단의 남부의 흑인 회원들은 1870년에 자신들만의 흑인 조직을 구성하기로 백인들과 서로 합의함으로써 분리되었다. 그 교단은 유색인 감독감리교회(Colored Methodist Episcopal Church (오늘날의 기독교 감독감리교회, Christian Methodist Episcopal Church)였다.

    시무어가 북 감리교회에 가담한 것은 놀랍지 않다. 북 감리교회는 처음부터 다른 교단보다 더 활발한 노예 전도의 이미지를 보였다. 노예들은 그 시초에 환영을 받았을 때 열렬하게 반응했다. 그 초기 시대에 루이지애나에서의 그 노력은 강력한 국내 전도를 반영했다. 프란시스 에즈베리(Francis Asbury) 감독은 1805년에 엘리사 바우맨(Elisha Bowman)을 순회목사로 임명했다. 바우맨은 바이유 테세를 따라 능선을 타고 가며 1806년에 오펠루사(Opelousa)에 루이지애나 주 첫 감리회 회중을 조직했다. 그리고 그 직후 강 어귀를 따라 프랭클린을 비롯하여 다른 곳들에서 교회들을 세웠다. 바우맨의 순회 거리는 총 565마일에 달했다.

 

 

 

노예들은 프랭클린 교회에서 활발했는데, 1822년에 한 목회자 고별 예배에서 기억할만하게 절정에 달했다. 그때 떠났던 데빈 목사(Pastor Davinne)는 후에 이렇게 회고했다.

 

세인트 메리 법원(St. Mary courthouse)에서 고별설교 후, 나는 흑인들 가운데서 어떤 움직임을 감지했다. 곧 두 여성이 내게 15센트를 주었다. 그들은 아주 적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금액이라고 말했다.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재건기 동안, 북 감리회는 센터빌 근처, 배턴 루지, 티보도, 제퍼슨, 그리고 프랭클린에 학교들을 세움으로써 루이지애나에서 주요 교육 기관들 중 하나가 되었다. 그 교단은 프랭클린에서 톰슨 대학교(Thomson University)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그 대학교는 1873년에 뉴 오를레앙 대학교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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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무어가 감독감리교회의 회원이 된 것은 놀랍지 않지만, 아주 중요하다. 비록 1876년 조항이 흑인 목사가 그 교단 안에서 별개의 협의회들을 구성하도록 만들었지만, 북 감리회는 계속 인종적으로 분리하기를 거부했다. 한 가지 보다 가능성 있는 선택은 미주리 서부, 버몬트에 있는 벧엘 아프리칸 메소디스트 에피스코팔 처치(Bethel African Methodist Episcopal Church)일 것이다. 그 교회는 인디애나폴리스에서 가장 강한 흑인 감리교회인데, 시무어가 살고 있던 곳에서 일곱 블록 거리에 있었다. (후에 감독이 된) 리처드 알렌(Richard Allen)은 감리교도들 가운데 존재하던 백인들의 인종적 편견에 대응하여 전체가 흑인들로 구성된 그 교단을 필라델피아에서 18세기 말엽에 세웠다. 그 교단은 세계에서 가장 큰 흑인 조직이라고 불려왔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두 인종이 한 몸을 이루기 위한 화해를 위해 전체 구성원들이 흑인인 교회가 타당한지 의문을 던져왔다.

 

Richard Allen

 

 

    시무어의 보다 인종혼합적 감독감리교회의 선택은 그가 인종간 화해를 추구했다는 것에 대한 첫 번째 명확한 증거였다. 보다 이른 암시는 그가 남부의 큰 도시로 향하지 않고, 그곳에서 도망치는 흑인들이 환영받고 자유를 얻는 데 도움을 받았던 전쟁 전 지하철도(Underground Railroad)의 전통적 중심지를 향해 유별나게 그 시골 루이지애나의 억압적인 환경을 떠난 것이었다. 시무어는 그 어떤 인종혼합적 기회들도 존재하지 않았던 센터빌에서는 그 어떤 지역교회도 다니지 않았다. 그가 인종적 경계선들이 막 점점 더 강화될 때 루아지애나를 떠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닐 것이며, 그가 다른 모든 사람들과의 보다 의미있는 관계를 추구했다는 것을 반영할 것이다. 인디애나폴리스에서 일하기로 한 그의 선택은 그와 동일한 결론을 가리킨다. 왜냐하면 한 큰 중심가 호텔 레스토랑에서 그는 사람들이 서로 피부색에 의한 경계선을 넘어 대화하는 상황 가운데서 백인들을 만났기 때문이다.

    남북전쟁 후, 인디애나의 정치 지도자들은 과거의 불의들을 바로잡으려고 그 주의 헌법과 법률들에서 모든 인종적 차별들을 제거했다. 흑인들은 그 법 아래서 시민들로서 동등한 보호와 투표하고 선출될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1900년이 다가왔을 때 초기의 낙관의 많은 부분이 사라졌다. 헌법적 보장들과 주 시민 법에도 불구하고, 차별은 정의에 대한 이중적, 하나는 백인들을 위해 그리고 다른 하나는 흑인들을 위한 기준과 함께 계속되었다. 흑인들에 대한 군중 폭력과 폭행들이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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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턴브루(Thornbrough)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시기 전체 동안 . . . 백인들 중 많은 사람들은 보통 단지 남부 백인들의 특별한 계급의 성격이라고 여겨지는 인종적 태도들을 보였었다. 유색인은 천성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은 주류 백인들이 의심의 여지없이 용인했던 일종의 신조였다. 그리고 이 신념에 따라 법적 그리고 사회적인 인종적 장벽들이 빈틈없이 세워졌다. . . . 인종간 관계성의 패턴들은 1900년에 형성된 후 거의 반세기 동안 대부분 와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디애나주의 흑인들의 상황은 백인 우월주의가 만연하고, 해방선언 후 밝아 보였던 평등과 기회에 대한 희망도 실현될 가능성에서 멀어지던 남부의 주들 안의 흑인들보다는 훨씬 좋았다.

 

    1900년에 인종 차별은 인디애나 주에서 더 극심해졌다. 그곳에서 두 인종 간의 사회적 접촉은 거의 없어졌다. 그리고 교회들에서 색깔 경계선은 모든 집단을 갈라놓았다. 감독감리교회 안에서의 인종 간 연합은 대부분 행정적 격식에 불과했다. 몇 년 전에 한 흑인 선견자가 선포했던 것은 점차 명확해져 갔다. “유색인은 그 어느 누구도 감독감리교회 안에 있을 수 없을 것이다.”

 

 

(3) 오하이오, 신시네티 시기, 1900 - 1902

 

    1900년에 시무어는 남동쪽으로 백마일 조금 넘는 곳, 오하이오, 신시네티(Cincinnati, Ohio)로 갔다. 신시네티 역시 지하철도의 한 중심지였었다. 노예 주 켄터키로부터 오하이오 강을 건너 인디애나 주 경계선 근처 신시네티는 자유를 찾아 도망치던 노예들에게 인디애나폴리스보다 더 중요한 지역이었다.

 

 

 

 

 

 

헤리엇 비처 스토(Harriet Beecher Stowe)톰 아저씨의 오두막(Uncle Tom’s Cabin)은 얼어붙은 오하이오 강을 건너는 극적인 탈출을 다루었다. 그 소설은 한 젊은 어머니 엘리자 해리스(Eliza Harris)가 그녀의 아기를 업고 한 빙원에서 다른 빙원을 걸어 올라 신시네티의 남동쪽 리플리(Ripley)에 있는 존 랜킨 목사(Rev. John Rankin)의 집에 안전하게 도착했던 탈출 실화를 바탕으로 써졌다. 퀘이커교도였으며, 상인이었던 레비 코핀(Levi Coffin)은 비공식적으로 지하철도의 관리자였다. 그는 3,200명의 지하철도 자원봉사자들을 지휘했고, 개인적으로 3,000명의 노예들을 안전하게 캐나다로 탈출시키는 것을 주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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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riet Beecher Stowe

 

 

    그런데 1900년에 미국의 분위기는 흑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고, 그보다는 선거권 박탈, 분리, 그리고 차별이 만연했다. 백인들은 스스로를 인종적으로 보다 열등한 사람들을 다스리도록 창조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흑인을 향상시키려는 재건이라는 노력은 자연적 질서를 거스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유명한 과학자들에 의해 생성된 신화들이 널리 수용되었다. 흑인들의 뇌는 백인들의 뇌 보다 작기도 하고 가볍기도 해서, 흑색 자체가 열등성에 대한 증거로 여겨졌다. 가장 신뢰를 받는 학술지들은 흑인을 가장 조잡한 모습으로 그렸다. 찰스 캐롤(Charles Carroll)의 책, 짐승 흑인(The Negro A Beast)의 출판과 폭넓은 관심은 인종주의가 존경받던 견해였음을 보여주었다.

 

 

 

 

    감독감리교회는 증가하던 격식성 가운데서 인종적 정의와 평등에 관한 관심을 상실하는 것 같았다. 흑인 감리교도들은 반응에 있어서 달랐다. 신시네티에서, 그 아프리카 감독감리교회 회중은 오하이오에서 제정된 악명높은 흑인법들을 적극적으로 무효화시키려 했다. 그런데 북감독감리교회의 흑인 회원들은 그 대신에 우리는 지금까지 백인들의 미소들을 즐겨왔던 것처럼 그들의 미소의 존속을 요구할 것이라는 자신들의 다른 견해를 발표했다.

    시무어는 다른 기독교인들 가운데서 일어나고 있던 경향들뿐만 아니라 감리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던 경향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감리교도들이 점점 더 분리하고 진지한 성결주의자들을 거부하게 되었을 때, 아주 소수의 사람들이 진심으로 흑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려 했다.

    그 두 경향은 감리교 전도자 마틴 웰스 크냅(Martin Wells Knapp)의 역동적인 신시네티 사역 안에서 시무어에게 영향을 주었다. 1892년에서 1901년까지 크냅은 중심가에 있던 리바이벌리스트 체플(Revivalist Chapel)에서 열리던 저녁 집회들 중심의 그의 탁월한 사역 안에 흑인들을 포함시켰다. 크냅은 또한 하나님의 성경학교(God’s Bible School)와 선교 훈련원(Missionary Training Home)에 개설된 수업들에 흑인들을 받아들였다. 크냅은 1901년에 감독감리교회에서 탈퇴했지만, 또한 그 이전에 성결협회 주류에서도 떨어져 나왔는데, 그 이유는 그 협회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적 재림과 신유(또는 믿음치유)를 설교하는 것을 금했기 때문이다.

시무어는 감리교 고유의 열정과 인종 포용성을 드러내는 크냅의 사역에 열렬하게 반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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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rtin Wells Knapp

 

 

God’s Bible School & College

 

 

현재의 God’s Bible School & College

 

 

 

1900년에 세워진 본관앞 기념 사진

 

 

오른쪽 건물이 1900년에 세워진 본관

 

 

God’s Bible School 본관

 

 

 

본관 앞에서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설립자 크냅

 

 

 

    시무어는 감리교도들 가운데서 평안을 누리지 못하게 되었다. 그 이유는 인종 간 교제의 결여뿐만 아니라, 주 예수의 능력 가운데서 재림하심에 대한 그리고 친밀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대한 그의 어렸을 때부터의 믿음이 그 교단 지도자들에 의해 공유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들 때문에, 시무어는 크냅을 높이 평가했다.

    크냅은 교단 권위자들이 먼저 그가 행정적 승인을 받지 않으면 전도 여행을 할 수 없게 하려고 했을 때 감리교단을 탈퇴했다. 그것은 존 웨슬리의 마음에 드는 문제였는데, 그가 동일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 때 나는 전 세계를 나의 교구로 삼는다라고 선포했다. 탈퇴한 직후, 크냅은 장티푸스 열병에 걸려 48세의 나이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시무어는 크넵을 높이 평가했을 뿐만 아니라, 점차 저녁 빛 성도들(Evening Light Saints) 또는 (후에 그렇게 알려진) 하나님의 교회 개혁 운동(Church of God Reformation Movement)의 신시네티지역 사역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 운동은 1880년에 오하이오, 인디애나, 그리고 미시간에서 다니엘 워너(Daniel S. Warner)에 의해 시작된 중서부 운동이었다. 그 운동은 흑인들을 포함시키기 위해 왕성하게 활동했다. 역사의 종결 직전에 저녁 빛”(또는 마지막 영적 부어주심)성도들”(또는 신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 것은 빛을 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찬양하는 행복한 신앙이었다. 그들의 신문 복음 나팔(The Gospel Trumpet)100명의 직원에 의해 35,000부가 발행되었다. 편집자 비럼(E. E. Byrum)은 워너의 후계자가 되었고, 비럼은 급박한 역사의 종말을 맞을 준비, 신유, 그리고 하나의 참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교단주의를 버릴 필요성을 강조하면서 그 기독교 성결운동을 이끌었다.

 

 

Daniel S. Warner 와 그의 성경

 

 

 

 

Enoch E. Byrum

 

 

    지각 있는 흑인들은 그 운동의 인종 포용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메시(Massey)소수의 흑인들이 재빠르게 살펴보고는 그 운동의 기독교적 친교에 대한 중심적 메시지에 내포된 영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들을 주장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1901년에 그 운동의 출판사는 대담하게도 윌리엄 쉘(William G. Schell)의 책, 흑인은 짐승인가?: 찰스 캐롤의 책 짐승 흑인에 대한 대답(Is the Negro a Beast?: A Reply to Charles Carroll’s Book Entitled ‘The Negro a Beast)을 출판했다. 쉘은 흑인들을 온전히 인간적이고, 백인들과 동등하고, 법 앞에 동등한 위대한 과거의 흑인 문명들의 후예로 묘사했다. 그는 그들의 1863년 이래 빠른 진보를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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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lliam G. Schell

 

 

 

 

그리고 그는 독자들에게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미국의 입장을 상기시키고, 인종적 편견의 완전한 제거를 촉구했다. 인종주의의 전국적인 부상 가운데서 이것은 기독교 집단이 흑인들의 공정한 대우 또는 그들과의 친밀한 교제를 확보하기 위한 마지막 중요한 노력이었다.

    저녁 빛 성도들은 존 웨슬리를 따라 성경에 나타나는 오순절날에 성령의 보다 완전한 받음이라고 여겨지는 성화라는 경험을 가르쳤다. 그리고 그들은 그 초대교회 시기에 가장 강력한 집회들 가운데 하나에서 인종들이 섞여 있었기 때문에인종문제를 감지했다. 흑인들은 전통적으로 성령을 많은 백인들이 인식했던 것보다 더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존재로 경험했다. 한 흑인에게 성결 경험은 전적으로 개인적이거나 사적인 문제라기보다는 사회적 억압과 불의에 대한 승리를 위한 힘을 부여하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달랐다. 웨슬리는 성화(sanctification)의 필요성을 사회적 맥락 안에서 가르쳤으나, 미국인들이 그 가르침을 항상 따른 것은 아니었다. 시무어는 저녁 빛 성도들 가운데서 그가 성화 경험을 받을 수 있게 한 인종간 환영을 발견했다.

    시무어의 저녁 빛 성도들과의 의미 있는 삶의 결과는 설교 사역으로 들어가라는 하나님의 부르심(divine calling)이었다. 그는 그 부르심과 씨름했고, 우물쭈물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 결과는 재앙이었다.

    시무어는 당시에 가장 만연하던, 전염된 백인 다섯 명 가운데 네 명이 그리고 종종 전염된 흑인들은 대부분 사망하던 심한 천연두에 걸렸다. 그는 약 삼 주 동안 심하게 앓았고, 살아남기는 했지만, 자주 일어났던 것처럼, 그 전염병은 그에게 얼굴의 흉터와 왼쪽 눈의 시력 상실을 남겼다.

 

 

시무어의 천연두발생에 대해 전해 준 Mattie Cummings, 1970년

 

 

    천연두는 그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그는 얼굴의 흉터를 가리기 위해 수염을 길렀고, 더 이상 그 어떤 값비싼 백인 레스토랑에서도 일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왼쪽 눈은 한 작은, 부분적인, 불투명한 덮개가 씌워진 것같이 손상된 상태로 남았다.

 

 

 

    육체적 변화들을 넘어서서, 시무어는 그 질병 가운데서 심오한 의미를 깨달았다. 그는 그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그의 불순종에서 온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 결과, 그는 마음을 바꾸고 그가 건강을 회복하기까지 돌보아주었을 저녁 빛 성도들의 성직수임을 받음으로써 사역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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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하나님의 교회 설교가의 삶은 사도 바울 시대의 삶과 비슷했다. 통상적인 과정은 안정적인 교인들은 적었고, 교회들도 적었고, 헌금은 거두어진 적이 없어서 자신의 제정을 스스로 장만해야 하는 전도자로서 여행을 의미했다.

 

 

(4) 텍사스, 휴스턴 시기, 1903 - 1905

 

    시무어는 신시네티를 떠나 남부로 돌아가 전도자로서 여행하며 텍사스로 들어갔다. 그리고 노예시대 동안 떨어져 있었던 친척들을 찾았다. 그는 휴스턴에서 친족을 발견하고는 그곳을 그의 집으로 삼았다

 

 

 

    1904년에서 1905년 겨울에, 시무어는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성결주의) 교단의 탁월한 흑인 교역자이며, 지도자 장로 (후에 감독) 찰스 프라이스 존스(Charles Price Jones)의 조언을 구하러 미시시피, 젝슨(Jackson, Mississippi)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느꼈다. 시무어보다 다섯 살 더 많았던 존스는 1891년에 알칸사스 침례 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후에 셀마 대학교의 대학교회에서 교목으로 봉사했으며, 젝슨으로 옮겨 그곳에서 그의 교단에서 나가라는 압력을 받은 후 자신의 성결사역을 시작했다. 그는 또한 1900년 천연두 전염병으로 고통을 당했으며, 전도자로서 널리 여행했고, 많은 책을 출판했고, 한 기독교 정기간행물인 TheTruth를 편집했다. 시무어는 존스와 따뜻한 우정을 발전시키며 폭넓게 대화했고, 그의 많은 신념들을 확인한 채 떠났다.

 

Charles Price Jones

 

 

 

 

 

    시무어는 휴스턴을 본부로 삼고 전도자로서 다양한 교회들에서 설교하면서 광범위하게 여행했다.

    19057월과 8월에, 전도자 찰스 F. 파함이 휴스턴 중심가에 있는 커다란 브레이언 홀에서 전도집회를 열었다. 저녁마다 교통이 뜸해지고, 말들이 마굿간으로 들어간 후, 파함과 그의 팀은 사도신앙운동이라는 문구가 담긴 큰 깃발을 높이 들고, 성지의 볼만한 의복을 입고는 중심가 도로를 행진했다. 신문들은 호의적인 기사를 제공했고,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다.

 

 

 

 

    많은 흑인들이 남부 도시인 휴스턴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은 와서 뒤쪽에 분리되어 앉았다. 한 흑인 성결교회의 목사 루시 F. 패로우 부인(Rev. Mrs. Lucy F. Farrow)이 흥미를 갖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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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 Mrs. Lucy F. Farrow

 

 

파함은 만약 그녀가 파함의 가족이 살고 있는 캔사스로 함께 간다면, 그녀를 가정교사로 고용하겠다고 그녀에게 제안을 했다. 그녀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녀 친구, 윌리엄 J. 시무어에게 자기가 없는 동안 그 교회를 돌봐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그녀가 10월 말에 돌아올 때까지 그 목회를 수행했다.

    시무어가 목회자로 그 회중을 섬기고 있을 때, 로스앤젤레스로부터 온 한 방문자, 닐리 테리 부인(Mrs. Neely Terry)이 도착했다. 그녀는 시무어가 주관하는 예배들에 참석했고, 그의 목회적이고 경건한 품행에 큰 감명을 받았다.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즉시, 그녀는 명목상 줄리아 헛친스 부인(Mrs. Julia Hutchins)이 이끌던 그녀의 성결교회의 동료 성도들에게 휴스턴에 있는 그 경외심을 일으키는 목사에 대해 말했다.

    그동안 루시 패로우는 파함 가족과 함께 10월 말에 휴스턴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시무어에게 파함의 집에서 배우지 않은 방언으로 말했다는 강렬한 이야기를 포함하는 그녀의 캔사스 경험들에 대해 말해주었다. 그녀는 방언(글로솔라리아)은 단지 초대교회의 일부였을 뿐만 아니라 또한 현대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시무어는 이 생소한 가르침에 관해 더 알고 싶어졌다. 파함이 12월에 단기 성경 공부 반을 개설할 것이라고 발표하자, 시무어는 입학허가를 받았다. 파함이 휴스턴의 인종적 태도에 대해 우려를 표명한 후, 한 타협안이 시무어에게 허락되었다. 시무어는 파함이 조금 열어놓은 교실 문 바깥 바로 옆에 앉을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시무어는 매일 아침 수업에 참석했다.

    오후에는 병원과 교도소 방문과 같은 현장 사역의 시간이었다. 시무어와 파함은 휴스턴의 흑인 거주지역들에서 함께 설교했다. 저녁에는 거리 집회가 열렸고, 직후 중심가 칼레도니아 홀(Caledonia Hall)에서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 집회가 열렸다.

    파함과 시무어 사이에는 공통 관심사가 많았다. 본래 감리교 교구목사였던 파함은 증가하는 형식주의 때문에 그 교단을 떠났고, 신유를 강조하는 진지한 성결운동의 흐름을 따라 적극적인 전도를 추구했다. 저녁 빛 성도들처럼, 그는 헌금 쟁반을 돌리거나 정기적인 봉급을 받지 않았다. 그는 단지 주님의 뜻이라고 여기는 것을 행하며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실 것을 기대했다. 그는 그의 성경학교 학생들에게 학비를 받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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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었고, 위대한 초대교회 지도자들의 사도적 신앙”(apostolic faith)의 재건을 추구했다. 그는 역사가 급박한 종말의 확실한 징표인 방언(glossolalia)의 발생과 함께 그 최종 단계로 움직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배우지 않은 방언”(unknown tongues)은 기독교 선교사들을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이라는 복음을 선포하러 전 세계로 가게 할 수 있는 외국어라고 가르쳐졌다.

    방언은 시무어의 관심을 끌었다. 그는 어떤 심오한 영적 진리를 간과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결주의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자기들이 가능한 모든 신적 능력부여를 받았다고 생각하지만, 이제 배우고 성경을 찾아본 시무어는 영적 성장의 새로운 가능성들을 보았다. 방언으로 나타내지는 무언가가 여전히 그의 너머에 있었다. 비록 그것이 저녁 빛 성도회의 믿음과 충돌되는 것이었지만, 그는 아직 획득하지 못한 영적 실제를 추구하게 되었다.

    파함은 그의 집회에서 흑인들을 분리하여 뒤편에 앉게 했을 뿐만 아니라, 집회 후 인종들이 제단에서 뒤섞이는 것을 금지했다. 이것이 시무어가 방언을 받는 데 장애가 되었다.

    그즈음에, 시무어는 줄리아 헛친스, 닐 테리, 그리고 그에게 다른 사람들로 구성된 성결교회를 목회해달라고 초청하는, 여행경비가 동봉된 로스앤젤레스로부터 온 한 편지를 받았다. 그들은 집회마다 임시 사역자에 의존해야 했었지만, 한 사람의 승인된 목회자를 지정하기로 결정했다. 시무어는 그 초청을 하나님께서 맡기시는 일로 받아들였고, 지체없이 휴스턴을 떠나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