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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J. 시무어의 전기(넬슨)

오순절주의자 윌리엄 J. 시무어의 전기(넬슨) 4.

한오신 2025. 1. 5. 15:50

 

 

 

(5) 북 보니 브레 거리 214번지(214 North Bonnie Brae Street)

 

    리차드와 룻 에즈베리 부부(Richard and Ruth Asbery)도 시무어의 태도와 현존의 영향을 피하지 못했다. 그들은 북 보니 브레 거리 214번지에 있는 그들의 집으로 거처를 옮겨 정기적인 기도회들을 시작하자고 시무어에게 제안했다. 시무어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고, 2월과 3월 동안 소수가 참여하는 한 기도회를 이끌었다. 그들은 크게 결심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구했다. 그런데 영적 열정은 절정으로 치닫다가 다시 사라지는 듯했다. 백인 방문자들은 가끔 그 기도회에 참석하기도 했다.

 

 

 

    오랫동안 7번가와 스프링가가 만나는 곳에 있던 은행에서 건물 관리인으로 일했던 에드 리(Ed Lee)는 지하실로 사라져 몇 시간 동안 기도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 다락방에서 사도 베드로가 보았던 환상과 같은 환상을 보았다. 베드로와 요한이 그에게 나타나 그를 보며 그들의 손을 들고는 하나님의 권능 아래서 떨며 다른 방언으로 말한 것 같았다. 환상은 그쳤지만 리의 몸 전체는 떨고 있었다. 그는 그 환상이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임하실 때 일어나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믿었다.

    리의 경험은 모든 사람들을 고무시켰다. 그들의 기도는 강렬해졌다. 한 저녁에 시무어는 성령침례를 위해 리에게 안수했다. 리는 마치 죽은 것처럼 몽환(trance)에 빠졌고, 그의 아내가 두려워하자 시무어는 그 모임을 마쳤다.

    그즈음에 시무어는 기차표값을 모아서 휴스턴에 보내면서 그의 친구들, 루시 패로우 부인(Mrs. Lucy Farrow)과 워랜(Mr. J. A. Warren)에게 와서 사역을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부활절이 다가오면서, 시무어와 다른 사람들은 구하던 그 하나님의 축복[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을 받기까지 기도에 더 힘쓰기로 작정했다. 성금요일 일주일 전인 46, 금요일에 그 기도 그룹은 영적 목적을 위해 음식을 먹지 않기로 결정하고 열흘 간의 금식기도에 돌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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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셤웨이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그 그룹의 몇 사람은 자기들의 영, 마음, , 전 존재가 성령침례와 방언이라는 표적을 얻으려는 욕구에 집중했고, 그리고 그것이 성취될 때까지 기도하기로 결심했었던 것 같다고 저자에게 말해왔었다. 남자들은 매일의 노동을 제쳐두고 기도에 집중했다. 기도회는 금요일, 토요일 그리고 주일 한밤중까지 열렸다.

 

    종려주일 다음 날인 49, 월요일에, 리는 시무어에게 와서 병으로부터 회복하도록 그래서 몇 블록 떨어져 있는 보니 브레에서 열리는 저녁 집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6시에 시무어가 도착해서 리에게 기름을 붓고 그의 머리에 안수하며 기도했다. 리는 즉시 호전되었다.

    그러자 리는 시무어에게 그가 오순절날처럼 성령과 방언을 받도록 기도해달라고 요청했다. 시무어는 다시 한번 안수했다. 시무어가 기도하고 있는 때 리는 새 방언을 열광적으로 터뜨렸다. 리와 시무어는 환하게 웃었다. 리가 외쳤다. “드디어, 이것은 저것입니다!(This is that)[오순절 날의 이 현상은 요엘이 예언했던 바로 저것이 성취된 것이라는 베드로의 설교 중의 한 구절, 역자 주]”

    그 두 행복한 사람들은 그 저녁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그들이 730분 경에 에즈베리의 집에 도착했을 때, 그 방들과 거실들이 접해있는 커다란 더블룸은 이미 간절한 흑인들로 꽉 차 있었다. 그들 대부분은 세탁 여성들, 건물 관리인들, 그리고 철도 짐꾼들이었다. 백인들은 그날 밤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기도하고 있었다. 시무어는 주도권을 잡고 기도회를 시작시켰다. 그들은 한 찬송가를 불렀고, 세 사람이 기도를 인도했고, 몇 사람은 간증했다. 그리고는 시무어가 일어나 사도행전 24절을 읽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주시는 것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시무어는 초저녁에 있었던 리의 경험을 말하며 설교를 시작했다. 가이사랴에서 사도 베드로의 설교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놀라운 방언 소리로 갑자기 중단되었던 것처럼, 시무어의 설교도 그렇게 놀랍게 끝났다. 그가 설교의 도입 부분으로 방금 전에 일어났었던 것을 말하자마자, 에드 리가 자기 양손을 높이 들고는 입을 열어 방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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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기도회에 모인 사람들 모두는 어떤 막대한 힘에 의한 것처럼 즉시 무릎을 꿇었다. 적어도 일곱 명이, 그리고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목소리를 높여 놀라운 조화를 이루며 생소한 새 방언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제니 에반스 무어(Jennie Evans Moore)는 피아노 의자에서 떨어져 무릎을 꿇고는 그렇게 방언을 말하는 첫 여성이 되었다. 몇 사람은 모든 이웃이 들을 수 있게 외치며 방언으로 말하며 현관문 밖으로, 마당으로 거리로 뛰어나갔다. 리틀 윌렐라 에즈베리(Little Willella Asbery)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려고 부엌에서 뛰어왔다. 그녀의 오빠, 열 한 살 난 모르톤(Morton)은 무서워서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10대의 버드 트레이너(Bud Traynor)는 현관에 서서 예언하며 설교했다. 제니 에반스 무어는 피아노로 돌아가 일련의 여섯 가지 언어들과 통역들이라고 여겨진 것을 그녀의 아름다운 음성으로 노래하기 시작했다. 그 집회는 오후 10시까지 계속되었고, 그들 모두는 그들이 초대 오순절이 회복되었다고 믿는 것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다.

 

 

제니 무어가 쳤던 피아노

 

 

 

 

    삼일 동안 그들은 큰 환희와 넘치는 기쁨으로 경축했다. 군중은 모여 그 마당과 집 주변을 채웠다. 어떤 사람들은 열린 창문들 근처에 서서 안에서 나는 방언 소리를 들었다. 많은 백인들이 왔다. 나무로 만들어진 현관의 바닥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으나 아무도 다치지는 않았고, 곧 보강되었다. 그들은 어떤 때에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외쳤고, 다른 때에는 침묵했다. 어떤 사람들은 삼일, 사일, 또는 심지어 오일 동안 몽환(trance)에 빠졌다. 진기한 치유들이 보고되었다. 밖에 있던 무리는 하나님의 능력이 사도행전에서처럼 다시 떨어지고 있다고 경건하게 속삭였다.

    시무어와 다른 사람들은 이것은 하나님께서 종말시대를 위해 예언하신 것이 교회에 회복된 오순절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믿었다. 그들의 성경공부들은 오래 전에 첫 예루살렘에서처럼 성령의 두 번째 큰 부으심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올렸었다. 그리고 그들은 이제 놀랍고도 기쁘게도 하나님께서 190649일에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북 보니 브레 거리 214번지에서 그들 가운데 다시 성령을 부어주셨다고 주장했다. 갑자기 그들은 이 견해들을 공유하는 많은 사람들의 가입으로 한 운동을 이루게 되었다.

    세족식이 열리던 그 영적 폭발의 셋째 날 저녁, 412, 목요일에 시무어는 그의 개인적 오순절을 받았다. 밤은 깊어 날이 새려 하고 있었다. 참석했던 사람들은 대부분 기도를 계속하기에는 너무 지쳐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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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중에 두 사람이 계속 기도하리라고 작정하고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시무어였고, 다른 사람은 어떤 백인이었다. 마침내, 그 백인 친구는 지쳐서 비틀거렸다. 그는 성령침례를 받을 때가 아닌가 봅니다라고 말했다. 시무어는 대답했다. “아니오, 그때입니다. 저는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시무어는 홀로 기도를 계속했고, 그의 최후의 기도에 응답으로 하얗고도 뜨겁게 빛나고 있는 한 공이 나타나 가까이 다가오더니 그의 위에 떨어졌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녹였다. 그는 의식을 잃은 것처럼 바닥에 쓰러졌다. 그는 깊은 치유와 격려의 말씀을 들었다. 그는 마치 아주 멀리에서 발해지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단어들을 들었다. 그것은 천사들의 찬양과 경배였는가? 그는 표현할 수 없게 사랑스런 언어가 그의 가장 깊은 존재로부터 솟아 나오고 있다는 것을 천천히 깨달았다. 큰 미소가 만면에 가득했다. 마침내, 그는 일어나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행복하게 포옹했다.

 

 

 

 

 

(6) 아주사 거리 312번지

 

    그들 모두는 다른 집회 장소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에즈베리의 집은 그 무리를 더 이상 수용할 수 없었다. 그들 중 어떤 사람들은 1888년에 아주사 거리 312번지에 그 옛 건물을 지었을 때 제일 아프리칸 감독감리교회(로스앤젤레스의 첫 흑인 기독교교회)의 성도들이었다. 그 건물은 1903년에 교회가 8번가와 타운가(8th and Towne)에 새로운 건물로 이전했을 때 비게 되었다.

 

 

 

 

 

 

그 후 아주사의 그 건물은 오래된 건축 자재 창고로 사용되게 되었다. 시무어와 성도들은 재빨리 그 건물을 한 달에 8달러를 주고 빌렸다.

    아주사 거리 312번지에 있던 그 옛 교회 건물은 로스앤젤레스의 흑인지역에 있었다. 몇 흑인들이 여전히 거기에 살고 있었지만, 그 주변은 말 보관업소들, 묘비석 판매소, 목재 야적장, 등등의 산업 지역으로 바뀌었었다. 근처의 술집들과 바람직하지 않은 활동들은 그 지역을 비호감 지역으로 만들었다. 아주사 거리는 단지 한 블록에 불과했다. 서쪽으로는 분주한 스프링 거리와 교차하고, 동쪽은 화물기차 역 후방의 제일 끝부분으로 막혀있었다. 그 화물기차 역 너머에는 로스앤젤레스 강이 흐르고 있었고, 그 강 건너에 아주사 거리가 한 블록 더 이어졌다.

    아주사 선교회 건물은 그 시대 전 세계에 한 전설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잔해에 불과했다. 본래 2층 나무 교회로 지어졌다. 그 건물 바깥 앞면에 양쪽으로 설치된 큰 계단으로 2층에 있는 예배당으로 올라갈 수 있었다. 그런데 1층 바닥은 완성되지 못하고 땅이 드러난 채로 남았다.

 

 

 

    그 감리교회가 1903년에 이사해 나갈 때, 그들은 그 건물을 분할하고 개조하여 2층은 사람이 거주하는 아파트로 그리고 1층은 말 보관소로 사용하게 했다. 그들은 고딕 양식의 스테인드 글라스 창문들을 제거하고 평범한 창들로 교체했다. 긴 아치가 이전의 2층 앞문 위에 남아있다. 바깥 계단은 없어졌다.

    오래지 않아 아파트 안에서 불이 나서 교회 같은 가파른 지붕이 부서졌고, 내부에는 목재들이 시커멓게 탄 채로 남았다. 수리공들이 지붕을 아스팔트로 평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 건물은 창고가 되었다.

    창문들과 문들은 망가졌다. 각 천정에는 단 하나의 전등이 달려있었다. 건물 뒤에는 한 작은 오두막이 있었다. 몇 그루의 큰 나무들이 동쪽에서 그늘을 드리워주었다. 1층을 둘러 나무로 만들어 놓은 인도가 더러운 마당과 비포장도로로부터 보행자를 보호했다.

 

 

 

 

 

 

 

    312번지 건물을 청소하는 일은 만만찮았다. 백인 여성, 루이스 오스터버그 부인(Mrs. Louis Osterberg)은 그녀의 아들 아더(Arthur), 68가와 덴버가에 있던 풀 가스펠 처치(Full Gospel Church)21살 난 진지한 마음의 목사이며 맥나일 건설회사 명목상의 사장을 자원봉사자로 보냈다. 그는 그의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그의 회중과 함께 보니 브레를 방문함으로써 시무어를 알게 되었다.

 

 

오스터버그 가족

 

 

    시무어는 312번지를 빌릴 때 청소업체가 다음 날 저녁에 그 창고를 청소할 때 돕기로 합의했다. 오스터버그는 비번일 때 일하기 원하는 세 명의 건설 인부를 발견하고는 자기 돈으로 그들에게 지불하고, 그 건물을 청소시키기 위해 그들을 아주사 거리로 데리고 왔다. 그는 아주사 선교회를 처음부터 다르게 만들었던 것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몇 흑인 여성들이 이미 거기서 일하고 있었다. 이 남자들이 안으로 들어갔을 때, 그 여성들이 첫 번째로 하기 원했던 것은 기도 모임을 갖는 것이었다. 우리가 알기로 그다음은 그 여성들 가운데 한 사람이 그 인부들 가운데 한 사람을 무릎 꿇게 한 것이다. 그는 울며 철저하게 회심했다. 내가 알기로 그것은 아주사 거리 선교회에서 일어난 첫 회심이었다. 그 회심은 아주사 거리 선교회가 개시되기도 전에 발생했다. 더구나 그 사람은 로마 가톨릭 교인이었다.

 

    그들은 1층 쓰레기 더미를 치우고 약 백 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을 확보했다. 못통들, 오래된 상자들, 의자 다리들, 그리고 잡동사니 위에 적색삼나무 널판들을 가로질러 얹었다. 이것은 편리했을 뿐만 아니라, 흑인 기독교 안에서 한 오랜 전통이었다. 등받이가 없는 신도석들은 노예들이 좋아하던 것이었는데, 그들에게 기도의 방”(room to pray)은 허락되었기 때문이었다.

    경건한 로마 가톨릭 교인 맥나일(J. V. McNeil)은 제단을 만들 목재를 기증했다. 커다란 나무 신발장 두 개를 겹쳐 위로 쌓고 무명천으로 덮어서 강단을 만들었다. 그 강단은 고물상인에게는 십오 센트 정도 쳐줄 수 있는것으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은 톱밥을 흙바닥 전체에 뿌렸다.

    시무어는 평범하지 않은 좌석 배치를 고안했다. 그는 강단을 그 방 한가운데 놓고 그 앞에 제단을 놓았다. 그것은 강단에 올라갈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앉아 있는 의자로도 사용되었다. 신도석들은 강단과 제단을 사방으로 둘러싸며 놓였고, 그것들은 모두 똑같은 높이의 흙바닥 위에 놓였다. 이 방식은 시무어가 구상해왔던 평등 안에서 하나 됨을 반영했다. 예배자들은 성직자나 성가대를 향해 앉아 많은 뒤통수들만 바라보는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서로를 섬기는 친밀한 통일체로서, 완전히 평등한 새로운 방식으로 하나님의 집, 그리스도의 몸 안에 모였다. 그런 비인습적인 좌석 구상은 아주사 선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다르고, 독특하고, 그리고 혁명적이라는 시무어의 확신을 보여주었다. 그의 소식지의 첫 호 1면은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예수님은 그 회당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크신 분이셨다. 내부 공간이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분은 밖에서 설교하셨다. 이 오순절 운동은 어떤 교단이나 분파 안에 갇히기에는 너무 크다. 오순절 운동은 밖에서 작동한다. 모든 사람들을 하나의 사랑의 띠 안으로, 한 교회 안으로, 그리스도의 한 몸 안으로 끌어들인다.

 

시초의 공간이 청소되자마자, 아주사 선교회에서 매일 집회가 열리기 시작했고, 일시적으로 보니 브레에서도 집회가 이어졌다. 청소는 예배 사이 사이에 계속되었다.

    49일에서 12일의 사건들은 즉시 폭넓은 관심을 끌었다. 보니 브레 참석자들은 소식들로 로스앤젤레스를 뒤덮었다. 제니 에반스 무어는 에즈베리를 부활주일 아침에 자기가 교인으로 소속되어 있는 스메일의 신약교회에 데리고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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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메일의 설교는 그 회중을 고도의 기대의 상태에 이르게 했다. 설교 후 그는 개인적으로 간증할 사람을 초청했다. 시무어는 강력한 연설가였는데, 강단에 올라가 그 흑인 기도 그룹에서 있었던 그녀의 이야기와 하나님의 로스앤젤레스 안에서 오순절의 극적 회복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방언을 터트려 그 회중에게 충격을 주면서 간증을 끝냈다. 어안이 벙벙한 침묵 속에서 루스 에즈베리(Ruth Asbery)가 일어나 영어로 통역했고, 그것은 그 성회를 청천벽력같이 때렸다. 어떤 사람들은 무서워서 거리로 도망쳤고, 다른 사람들은 소리쳤으며, 모두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참석했던 다른 기도 그룹 멤버들로부터 더 많은 방언과 통역이 뒤따랐다.

    그렇게 부활주일 예배들이 끝났고, 바깥 도보에 모인 무리들은 그 모든 일의 의미에 대해 흥미롭게 이야기했다. 스메일 자신은 곧 18쪽의 소책자를 발행했는데, 4분의 1은 특별히 아주사 선교회의 추종자들의 모든 주장과 같이 아주사 사역을 설명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417, 화요일 저녁에 한 기자를 아주사에 보냈다. 다음 날 아침 그 신문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신조들의 서식지, 그 새 분파가 놀라운 것들을 주장했다는 로스앤젤레스에 관한 굉장한 기사를 실었다. 한 뛰어난 랍비가 참석하여 이적적으로 치유를 받았다고 고백했고 그 그룹의 환영을 받았다. 그 기사는 그 시의 시민들이 새 믿음의 주요 교의를 믿지 않는다면, 그 시는 무섭게 파괴될 것이라고 예언한 한 연설자를 인용하며 끝을 맺었다.

 

 

 

    그 신문은 두 번째 색션의 한 면에는 그날에 일어난 큰 샌프란시스코 지진과 화재 이야기를 대서특필했다. 그 지진은 그 도시 인구 400,000만 명 가운데 300,000만 명이 노숙하게 되었고, 10,000명이 사망했고, 가스관들과 수도관들이 파열되어 화재들이 발생했고, 소방관들이 물을 뿌려도 소용이 없었다. 여진들이 한 시간 동안이나 계속되면서 주변의 타운들 뿐만 아니라 60마일 떨어진 싸크라멘토의 건물들이 붕괴되었다. 소방관들이 옮겨붙고 있는 불들을 필사적으로 억제하기 위해 파우더와 다이너마이트로 보다 많은 건물들을 폭발시켰다.

 

 

 

 

 

 

 

 

 

    그날 불쾌한 진동들이 사람들을 건물들로부터 몰아내며 로스앤젤레스를 흔들었다. 바틀맨은 브니엘 홀(Peniel Hall)에서 열리던 정오 기도회 동안 그 진동들을 느꼈다. 그는 그 사건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을 감지했고, 그다음 5일 동안 마지막 부르심”(The Last Call)이라는 제목을 붙인 소책자 10,000부를 배포했다. 그리고 지진을 하나님의 경고로 설명하는 소책자 75,000부를 더 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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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무어는 곧 보니 브레에서 열리던 모든 집회들을 아주사 선교회에 통합시켰다. 그 첫날 저녁에 100명이 참석했다. 일주일 만에 그 건물은 사람들로 붐볐다. 예배는 매일, 오전, 오후, 그리고 저녁, 세 번 드려지기 시작했다. 때때로 앞 집회가 계속되어 뒤 집회들과 합쳐지기도 했다. 참석 인원은 항상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진실성, 열정, 그리고 강렬함은 적어도 언제나 작지만 헌신적인 사람들이 모였다.

    약 한 달 후, 로스앤젤레스는 전 세계의 축소판이었기 때문에,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인종, 국적, 그리고 사회적 계급의 사람들을 포함하는 군중들이 아주사로 몰려들었다.

    시무어는 등받이가 없는 벤치들을 최대한 밀착시켰다. 그는 1층 전체의 모든 공간을 빠짐없이 활용하려고 잡동사니와 의자의 다리들, 그리고 다른 생소하고 상상력이 담긴 좌석들로 채웠다. “다락방”(the upper room)이라고 명명된 방 하나의 길죽한 이층에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들로 보충되는 의자들과 적색삼나무 판자들이 놓였고, 기도를 위해 사용되었다. 그곳에는 속삭이는 소리 이상으로 말하지 마세요라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주일이 되면,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온종일 사람들로 붐볐다. 아주사 선교회 건물은 너비 40피트 길이 60피트, 도합 2,400 스퀘어 피트의 면적을 갖고 있었다. 꽉 찼을 때는 1인이 평균 3 스퀘어 피트 밖에 차지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벽들을 따라 두 겹이나 세 겹으로 둘러싸야 했다. 밖에서는 군중들이 창문들에든, 문들에든, 또는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거나 들을 수 있는 어느 곳에든 모였다. 750명이나 800명이 안에 있었고, 400명이나 500명이 밖에 있었으며, 더하여 다른 사람들이 하루 종일 오갔다.

 

 

(7) 아주사 이적

 

    모든 인종, 국적, 그리고 계급의 거대한 군중이 아주사 선교회로 몰려들었다는 단순한 사실 자체가 놀라운 것이었다. 역사 속에서 그 그렇게 많은 무리가 한 흑인 목사의 교회로 몰려들었다는 사례가 전혀 없었었다.

    사도 바울 시대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은 함께 교회로 왔지만, 인종적으로 평등한 친교는 곧 사라졌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시 문제가 되지 않았었다. 미국 백인들은 때때로 흑인을 자기 회중들에로 받아들였지만, 인종적 구별이라는 기초위에서 면밀하게 통제된 상황들 아래에서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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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전형적인 사례가 있었다. 리차드 알렌(Richard Allen)은 어느 날 성찬식 중에 기도하려고 무릎을 꿇었을 때 백인들은 그에게 복도 뒤쪽으로 갈 것을 강요했었다. 그 일이 있은 후, 그는 필라델피아의 역사적인 성 조지 감리교회(St. George’s Methodist)에서 탈퇴하고 아프리칸 감리교회(African Methodist)를 형성해야 했다.

흑인과 백인 사이의 긴장은 노예들의 유입으로부터 현재까지 미국 인종 관계를 특징지웠다. 그 긴장은 어떤 다른 요인이 필적할 수 없게 남북전쟁을 유발시켰고, 미국 역사를 형성시켰다. 흑인과 백인은 피부색을 따라 형성된 경계선에 의해 분리된 두 개의 다른 세계들 안에서 살아왔다.

 

 

    그런데 갑자기 아주사 이적이 일어났다. 모든 사람들이 함께 모였을 뿐만 아니라, 인종적 색깔 경계선도 사라졌다. 듀보이스(DuBois)사람이 목숨을 걸고 건너야 할 만큼 공포스런 깊은 간격(chasm)”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시무어의 지도력 아래서 극복되었다. 아주사 예배자들은 자신들을 분리된 인종들로 인식하지 않고 교회 가족 안에서 형제들과 자매들로 보았다.

    글로솔라리아(Glossolalia)는 어떤 사람들에게는 보다 더 놀라운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 때문에 인종간 이적이 일어나지는 않았다(but nevertheless there stood the interracial miracle). 그 그리스도의 몸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최초로 그리스도인들로 통합되었던 이래로 볼 수 없었던 하나의 실제적인 통합체가 되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말해진 것은 다시 나타났다. “보라, 이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서로 사랑하는가!”

    시무어의 소식지 1호는 “. . . 큰 무리가 밀려들었다. 하나님께서는 국적이 무엇이든, 이디오피아인이든, 중국인이든, 인도인이든, 멕시코인이든, 또는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든 차별하지 않으시고 함께 예배드리게 하셨다고 썼다. 백인들은 특별 대우를 받지 않았다. 시무어는 일어났던 일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이 집회는 녹아드는 시간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녹아 함께 . . . 한 덩어리, 한 빵,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모두 한 몸이 되었다. 아주사 거리 선교회에서는 유대인이나 이방인, 노예나 자유인이 없었다. . . . 그분은 사람들이나 장소들은 아랑곳하지 않는 분이시다(He is no respecter of persons or places).

 

    시무어는 여성들을 아주사 예배에 완전히 동등하게 포함시켰고, 그들이 자신들의 달란트들과 지도력을 펼칠 수 있게 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께서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는, 거룩하게 부어지는 기름이 어떤 여성의 머리에 부어진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분은 그분의 교회를 조직하기 전에, 그들, 남성들과 여성들을 모두 다락방에 모으시고 성령이라는 기름을 그들에게 부으셨고, 그들 모두에게 이 복음 안에서 사역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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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 날에 그들 모두는 성령의 권능을 통해 설교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남자도 여자도 없고, 오직 모두 하나일 뿐이다.

 

    이 놀라운 친교는 참석했던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전했다.

 

남부에서 태어난 나는 내가 하나님의 흑인 성도 옆에 앉아서 예배할 수 있다는 것, 또는 하나의 커다란 캠프 식탁에 앉아 먹으면서 흑인 성도 옆에서 먹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는 것은 하나의 기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신령과 진리 안에서 하나님께서 사랑과 조화 안에서 예배를 받으셨다.

 

    전에 감리교회 교역자였고, 노스캐롤라이나의 성결운동 지도자였던 케스웰(G. B. Cashwell)의 경험은 일어나고 있던 일을 보여주었다. 그는 9월에 아주사 선교회에 대해 읽었고는 자기 눈으로 보기로 작정했고, 6일 동안 3,000마일을 여행하여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했다. 캐스웰은 처음에는 흑인 지도력에 주춤했다. 한 젊은 흑인이 그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 그를 만졌을 때 속으로 움추렸다. 그러나 몇 번의 예배 후, 그의 마음은 바뀌었고, 자신을 낮추어 시무어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그의 집으로 돌아와 남부에서 오순절의 사도(Apostle of Pentecost)”가 되어 그 지역 전체에 빠르게 영향을 미치며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다.

 

G. B. Cashwell

 

 

    영국에서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던 교구목사 바디(A. A. Boddy)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남부의 백인 목사들이 그 흑인들과 교제를 나누고 그들의 기도와 중보를 통해 성령의 축복들을 받고 싶어서 그 흑인들이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가려고 기꺼이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생소한 것이었다. 그리고 이 백인 목사들이 남부로 돌아가 그들의 회중들에게 그들이 흑인들과 함께 있었었고, 함께 한 성령 안에서 기도했었고, 그 흑인들이 받았던 것과 동일한 축복들을 받았다고 보고하는 것은 더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A. A. Boddy

 

 

    시무어의 작은 흑인 기도 모임의 그 생소하고 갑작스런 인기는 일어나자마자 빠르게 식을 것이라고 예상되었다. 사실은, 정 반대 현상이 벌어졌다. 그 인기는 지속되었고 추진력을 얻었다. 이 이상한 발생은 두 상황들에 의해 관심을 받았다. 정상적이라면, 그 두 상황은 그 집단이 관심에서 멀어지는 것을 촉진시켰을 것이었다. (1) 아주사 거리로 몰려듦 (2) 시무어의 지도력의 유형

    아주사 거리는 보니 브레 보다 모든 인종들의 사람들을 받아들이기에 있어서 훨씬 더 어려운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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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즈베리의 집은 흑인 거주지였지만 흉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아주사 거리는 아무리 통상적으로 생각해도 불쾌한 곳이었다. 백인이 보니 브레를 방문해야 한다면, 마지못해 감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백인이나 다른 인종들이 아주사에 가려면 훨씬 더 큰 결심을 해야 했다. 예를 들면, 어네스트 윌리엄스(Ernest S. Williams)의 모친이 그녀의 친구 플로렌스 크로우포드 부인(Mrs. Florence Crawford)에게 아주사 거리에 대해 언급했을 때, 그 부인이 실제로 그곳을 방문할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녀는 크로우포드 부인이 소외된 사람들 가운데서 사회봉사를 위해 그 지역에 가려고는 하겠지만, 그녀가 그곳에 예배하러 갈 것이라고는 믿지 않았다. 사회적으로 높은 크로우포드 부인이 그 진기한 모임에 대해 들었을 때, 그녀는 그곳에 갔지만, 아무도 그녀가 들어가는 것을 보지 않기를 바라며 주변을 살폈다. 그리고 그녀는 가족에게 그 장소를 감히 말하지 못했다.

 

Mrs. Florence Crawford

 

 

    아주사 선교회 위치의 통상적인 비호감 상황 이외에도, 시무어의 비인습적인 지도력 유형도 어떤 부흥을 일으킬 것이라고 결코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 방식을 감히 사용하려는 지도자들이 거의 없을 것이지만, 시무어의 접근이 일어나는 관심과 참석을 가로막지 않았다는 것은 불가사의다. 아주사 사람들은 이점을 인식하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 . . 소식이 멀리 그리고 널리 퍼지자 로스앤젤레스는 하늘로부터 불어오는 강력한 바람과 함께 방문하는 사람들로 붐볐다. 어떻게 그리고 왜 보통 어떤 큰 부흥에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조건들과는 아주 반대되는 것들이 발견되는지 의아스럽다. 성가대가 없다. 그러나 천사들로 구성된 악단의 연주 소리가 성령 안에서 어떤 사람들에 의해 들려졌고, 성령에 의해 영감된 천상적 찬양(heavenly singing)이 있다. 헌금을 거두지 않는다. 그 집회를 알리기 위해 광고비를 지불한 적도 없다. 그 어떤 교회 조직도 선교회를 뒷받침하고 있지 않다. . . 당신은 흰색 칠을 한 오래된 이층 건물 하나만을 볼 것이다. 당신이 베들레헴 마구간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곳에 천상적인 방문들이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바틀맨은 그 사역이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그는 그것을 단지 하나님의 역사라고 설명했다. “그것은 신비였다”(That was the secret). 시무어의 소식지는 더욱 특별히 아주사의 성공의 원인을 완전한 동등성과 각 사람의 받아들여짐에 돌렸다. 그곳에서 각 사람은 단지 예배자들만이 아니었고, 지도력에 참여자들로 받아들여졌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있는 도구는 어떤 것[사람]이든 색깔이나 옷이나 교육의 결여 때문에 거부당하지 않는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사역을 세워 오신 이유이다. . . . 가장 매혹적인 것은 사랑스런 조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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