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세계의 오순절신학을 위해 KIPT

윌리엄 J. 시무어의 전기(넬슨)

오순절주의자 윌리엄 J. 시무어의 전기(넬슨) 1.

한오신 2025. 1. 4. 10:38

이와 같은 때를 위해

윌리엄 J. 시무어 감독과 아주사 거리 부흥의 이야기

오순절주의/은사주의의 뿌리 탐구

 

 

 

 

더글라스 J. 넬슨

 

이창승 편역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고린도전서 1:27-29

 

 

영국, 버밍햄 대학교

신학과

철학 박사 학위 청구 논문

 

19815

 

 

 

 

For Such A Time as This

The Story of Bishop William J. Seymour and the Azusa Street Revival

A Search for Pentecostal/Charismatic Roots

 

by Douglas J. Nelson

 

God hath chosen the foolish things of the world to confound the wise; and God hath chosen the weak things of the world to confound the things which are mighty; and base things of the world, and things which are despised, hath God chosen, yea, and things which are not, to bring to nought things that are: that no flesh should glory in his presences.

I Corinthians 1:27-29

 

 

Dissertation submitted for the degree of Doctor of Philosophy

in the Faculty of Arts, Department of Theology,

University of Birmingham, England

 

May 1981

 

 

 

 

편역자의 말

 

    윌리엄 J. 시무어(William J. Seymour)는 일각의 사람들에 의해 오순절운동의 아버지로 불리우기도 하는 등 오순절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 중의 하나였다. 그동안 한국에 시무어의 생애는 로버츠 리어든이 2006년에 편집하고 집필한 The Azusa Street Revival2008년에 김광석이 번역한 아주사 부흥을 통해 알려졌었다(로버트 리어든, 아주사 부흥김광석 역 [서울: 서로사랑, 2008]).

    그런데 시무어의 생애에 대한 학문적인 연구는 더글라스 J. 넬슨(Douglas J. Nelson)1981년에 버밍햄대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 논문 이와 같은 때를 위해에서 이루어졌었다. 이 논문은 시무어 연구에 있어서는 전설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논문은 한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번역자가 2007년 대전에 있는 건신대학원대학교의 박사과정 중에 있을 때, 버밍햄대학교 도서관에 소장 중인 넬슨의 논문의 복사본이 모종의 경로를 통해 번역자의 수중에 들어왔었다. 그 후 어떤 탁월한 분이 이 논문을 번역하여 소개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그런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더 늦기 전에 미천한 자가 그 일을 수행해야만 했다.

    얼마 전, 번역자는 오순절운동의 아버지라고 여기는 찰스 F. 파함에 대해 쓴 고프(James Rudolph, Jr. Goff)1987년 박사학위논문의 수년간에 걸친 번역을 끝냈다. 넬슨이 고프보다 6년 먼저 넬슨에 대해 논문을 썼다. 그런데 번역자는 고프의 논문을 먼저 번역했다. 그만큼 파함에 대한 논문이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넬슨의 시무어에 대한 논문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넬슨은 이 논문에서 오순절운동의 특징은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에 있지 않고, 인종혼합적 일치에 있다고 주장했다. , 오순절운동의 아버지는 시무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런 주장을 위해 찰스 파함과 윌리엄 더함 그리고 그들의 신학을 무리하게 폄하하고 왜곡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측면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논문은 오순절 역사에 있어서 무시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고프의 논문 번역을 끝내자마자, 넬슨의 논문 번역에 돌입했고, 이제 그 작업을 끝냈다. 이 번역을 계기로 한국에서 진정한 시무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넬슨의 논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앞부분은 시무어를 왜곡하는 글들을 제시하고, 그 글들을 비판한다. 뒷부분은 시무어의 생애를 기술하면서 시무어가 왜 오순절운동의 아버지인지를 주장한다. 그런데 본 번역은 앞부분은 생략하고 뒷부분만 편번역한다.

 

202512일 편역자 이창승

 

 

 

초록

 

    이것은 이전에 간과되었던, 그 근원을 1906년에서 1909년 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의 아주사 거리 선교회의 윌리엄 J. 시무어 감독에 두는, 현대 오순절/은사주의 운동의 뿌리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것은 한 혁명적인 기독교 운동과 관련되는 데, 그 운동은 한 탁월한 흑인에 의해 일어났다. 인종적 피부색에 의한 경계선은 그에 의해 정복되었으나, 결국 그는 백인들의 인종적 태도들의 소생에 의해 정복당했다. 이것은 희귀한 역사적 자료들, 사진들, 그리고 시무어를 기억하고 있던 열두 사람과의 인터뷰들에 근거한 것이며, 그래서 그의 오늘날과의 관련성과 함께 시무어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가능하게 만든다.

    그 운동은 오순절날 예루살렘의 사도적 교회에 의해 경험된 것과 함께 기독교적 삶의 회복을 바라던 한 작은 흑인 기도 모임에서 조용히 시작되었다. 방언(glossolalia)은 발생하자마자 즉시 지구상의 거의 모든 인종, 나라, 그리고 계급의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인종적 편견이 심각한 사회적 함의들과 함께 기적적으로 사라졌다. 성장은 급격하게 일어났다. 1908년에는 사람들이 50개 이상의 나라에서 와서 참여했으며, 1914년에는 모든 미국 도시마다 3,000명 이상의 참여자들이 있었고, 아이스랜드로부터 타스마니아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사람들이 왔다. 그리고 사도신앙30개의 언어들로 번역되었다.

    시무어는 250년간의 노예시대 동안 형성된 중요한 흑인 기독교 믿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 안에는 그 어떤 피부색에 의한 경계선도 없어야만 한다를 구체적으로 실현시켰다. 그의 위대함은 교회와 세상에 모든 분열을 넘어 진정한 인종적 그리고 사회적 치유를 위한 유례가 없는 역사적 기회를 제공하면서 흑인 경험의 사회적 비전과 결합되었을 때 글로솔라리아가 중요하다는 것을 증명한 것에 있다.

    20세기에 가장 심각한 세계적 문제인 피부색에 의한 경계선은 교회와 사회를 변혁시키기 위한 평화적인 혁명적 힘을 산출해 내었던 시무어에 의해 극복되었었다. 비극적이게도, 백인 지도자들은 글로솔라리아를 말하면서도, 전통적인 백인 태도들을 선호하면서, 그 운동을 분열시키고 그 운동의 심오한 사회적 영향력에 타격을 주면서 새로운 인간 평등을 경시했다.

    이 논문은 예비적이고 포괄적인 평가라는 장으로 시작한다. 여섯 개의 주요 장들은 각각 세 개의 장을 갖는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A 부분은 역사적 분석으로서 (1) 시무어를 역사 지우기의 관점에서 선별된 사건들 안에 놓을 것이며, (2) 1906년부터 1908년의 연대기적 요약과 함께 시무어를 접근할 것이다. 그리고 (3) 지난 75년간의 111차 자료들과 23개 이차 자료들에 포함되어 있는 역사적 문서들에서 담겨있던 시무어에 대한 묘사들을 분석한다. B 부분은 해석적 서사부분으로서, 시무어의 생애와 이 연구에 의해 발견된 것처럼 그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제시한다. (1) 시무어의 준비기 (2) 시무어의 지도기, 그리고 (3) 시무어의 쇠퇴기. 마지막 장인 최종적인 비평적 평가는 이 논문의 결론을 짓는다. 마지막 장에 이어 7개의 부록이 붙으며, 14개의 사진이 포함된다.

 

 

목 차

 

Section B 해석적 서사

 

5 : 준비기의 시무어, 1870 1905

 

6 : 지도자 시무어, 1906 1910

 

7 : 무명기의 시무어, 1911 - 1922, 1923 1938

 

8 : 최종 비판적 평가

 

 

 

 

 

Section B

 

해석적 서사

 

 

 

 

 

5 : 준비기의 시무어, 1870 - 1905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다 . . .

사도행전 10:34

 

. . . 우리 왕족 흑인들은 하나님께서 이 가치 있는 색깔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것에 매우 만족한다. . . 나는 왕족이며, 그리고 왕중의 왕을 잘 알고 있고, 지구상에 있는 나보다 더 높은 위대한 가족 중에서 더 잘 알려지고 더 잘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 시간이 다가오고 있음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그리고 우리는 안개가 걷히면, 서로를 보다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아만다 스미스(Amanda Smith)

 

 

Amanda Smith

 

 

 

(1) 루이지애나, 센터빌 시기, 1870 - 1894

 

    미시시피 강의 주요 도시, 뉴 오를래앙스의 서쪽으로 차로 90마일, 까마귀의 날개짓으로 50마일 지점에는 여름이면, 짙은 녹색의 설탕 수수의 드넓은 밭들이 끝없이 펼쳐진다. 두터운 잎사귀가 달린 줄기 다발들이 키가 큰 사람의 머리보다도 높게 자란다. 티보독스(Thibodaux), 후마(Houma), 그리고 모르간 시(Morgan City)를 지나면 루이지애나, 센터빌(Centerville, Louisiana)의 인구 500명이 거주하는, 시간의 지나감에 의해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은 세인트 메리 페리쉬(St. Mary parish)의 심장부가 있다. 단 하나의 주요 거리를 따라 줄지어 서 있는 커다랗고 구식의 흰색 기둥들로 받쳐진 농장 스타일의 집들이 지나간 과거를 연상시킨다. 시간이 계절과 사건들로 측정되는 이곳에서의 과거는 허리케인이 발생한 해들로 기억된다.

 

 

 

 

 

 

 

 

 

 

 

    까다로운 스페인 이끼가 커다랗고 오래된 하얀 참나무들에 우아하게 매달려 있다. 어디든 무더운 남부 만의 무성한 적도 지역 안에서 번성하는 바나나, 오렌지, 삿수마스, 카멜리아스, 히비스쿠스, 올레안더, 그리고 그 이외의 온갖 종류의 열매들과 꽃들이 현란한 색깔을 발산한다.

    이곳은 미시시피 삼각주의 어귀 지역이다. 북쪽으로 센터빌 옆을 흐르는 강이 바이유 테세(Bayou Teche). 그 강의 조용한 물은 새벽의 한기 속에서 흐른다. 치티마카 인디언(Chitimacha Indians)들은 그 어귀의 이름을 바톤 루지의 미시시피 강과 멕시코 만 사이에서 한 커다란 뱀이 꿈틀거리는 물길의 완만하게 굽이치는 물길이었다는 옛 전설에서 따서 지었다. 센터빌을 몇 마일 지난 곳에서 바이유 테세 강은 남쪽으로 방향을 틀고 아차팔라야 만(Atchafalaya Bay)에서 근처 멕시코 만으로 쏟아져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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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52일 바이유 테세 옆, 센터빌의 만에 부는 산들바람의 소금 맛 가운데서 한 흑인 남자 아기, 윌리엄 조셉 시무어(William Joseph Seymour)가 태어났다. 아버지 시몬 시무어(Simon Seymour)와 그의 아내 필리스 살라바 시무어(Phyllis Salabarr Seymour)는 전에 노예였다가 4년 반 전에 자유롭게 되었었다. 그의 부모는 시무어 부인이 태어나고 자랐던 센터빌을 그들의 집으로 삼았다. 미스터 시무어는 20마일 북쪽 어귀와 아카디안(Acadian) 또는 롱펠로우(Longfellow)의 시 에반젤린”(Evangeline)에서 불멸화된 케이준 지방(Cajun country)의 중심지 뉴 이베리아(New Iberia) 출신이었다.

 

 

 

 

    센터빌 자체는 복잡한 역사의 결과물이었다. 정착자들은 토마스 제퍼슨 대통령이 1803년에 그 새로운 나라의 크기를 두 배로 늘리면서 (그리고 현재의 미국 대륙의 삼분의 일을 구성하면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부터 루이지애나 지역을 매입한 직후 도착했다. 1808년에 센터빌로부터 6마일 위 어귀, 프랭클린 하선지역은 첫 페리쉬[parish, 다른 주에서는 카운티라 불린다] 타운이 되기에 충분하게 커졌고, 1820년에 그 페리쉬가 되었다. 떼돈을 벌려는 사람들이 커지고 있던 나라의 식탁을 위해 정제 설탕의 상태인 흰색 금”(white gold)을 찾아왔다. 그들은 미시시피강 상류 뉴 오를레앙에서 배를 타고 서쪽으로 내려와 바이유 플래크마인즈(Plaquemines)와 다른 어귀들을 지나 바이유 테세에 이르면 뉴 오를레앙과 후에 텍사스로 알려지게 되는 사바인 강 넘어 땅 사이의 중간 지대에 도착했다.

    백인들이 그들의 아프리카 흑인 노예들을 데리고 왔다. 튼튼한 사람들이 그 사탕수수밭 경작에 필요했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덥고 습한 지역들 가운데 하나에서 추수를 위해 하루에 18시간에서 20시간 동안 일해야 했다. 메쉐티 칼이 지상에서 2인치 높이의 뻣뻣하고 두터운 섬유질 다발들을 베고 끊으면서 햇빛에 번쩍일 때 등은 굽고 몸은 신음했다. 그런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일하는 것은 초인적인 힘을 요구했고, 그 노예들은 그 힘을 갖고 있었다.

 

 

 

 

 

 

 

 

    센터빌을 막 벗어나면, 프랭클린으로 가는 길에 역사적이고, 우아한 프랜시스 플렌테인션(Frances Plantation)의 주요 동이 온전하게 수리된 채 여전히 서 있으면서, 그 초기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1820년에 루이스 조지 데마렛(Louis George DeMaret)에 의해 지어진 그 커다란 집은 나이를 잊은 하얀 참나무들과 부드럽게 걸쳐있는 스페인 이끼 사이에, 바이유 테세를 따라 위엄있게 앉아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집에서 만든 회반죽, 나무쐐기들, 그리고 네모난 못들로 연결된, 손으로 제작한 벽돌들, 토종 나무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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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0년대에 세인트 메리 페리쉬의 부동산은 막대한 새로운 부를 산출해 낸 등을 굽게 만드는 노예 노동에 의해 부양된 열광적인 숙고와 급격하게 뛴 토지가 가운데서 붐을 탔다.

 

 

 

    또한 1830년에 루이지애나는, 백인들의 수십 년 간 고조된 노예 반란에 대한 염려 후, 노예들에게 읽기나 쓰기를 가르치는 것을 금하고, 이를 어길 시 일 년 간 수감시킨다는 법을 제정했다. 다음 해에 낫 터너(Nat Turner)에 의해 촉발된 반란은 남부 전체에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그 결과 노예는 그 어떤 교육도 받을 희망을 품을 수 없게 되었다.

 

낫 터너

 

 

    1791년 하이티 출신 노예들의 반란 이후로 노예들을 통제하는 것에 날카로운 염려가 있어 왔었다. 그 반란에서 50만 명의 흑인들이 사탕수수 농장과 그들의 지배인들을 파괴하고 사살했다. 이로 인해 나폴레옹의 서구제국에 대한 꿈이 종말을 고했고, 그는 그 드넓은 루이지애나 지역을 미국에 팔아넘기게 되었다. 노예들의 숫자의 증가를 통제하기 위한 노력으로, 1798년에 모든 미국의 주들은 노예무역을 불법화 했었고, 180811일에는 노예 수입이 연방정부에 의해 금지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그 유입을 금지시키기 위한 것이기 보다는, 뉴 오를레앙에서 40마일 남쪽의 바라타리아 베이로부터 베이 테세로 쉽게 도달하는 항해를 했던 유명한 해적 쟝 라피트(Jean Lafitte, 1780-1826)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작동되었던, 돈이 되는 흑인 판매 시장을 창출해내기 위한 것이었다.

    1840년에 세인트 마리 인구는 8,950명이었다. 2,366명은 백인이었으며, 6,286명은 노예였고, 298명이 자유 흑인(Negro)였다. 1860년에 마리 페리쉬에는 8개의 교회가 있었다. 4개는 로마 가톨릭교회, 2개는 감리교회, 하나는 침례교회, 그리고 하나는 감독교회였다. 교인수는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동등하게 나뉘었다.

    1861-1865년의 서사적인 남북전쟁이 미국을 갈라놓았을 때, 벤자민 버틀러(Benjamin Butler) 장군이 이끌던 북군은 뉴 오를레앙의 긴 봉쇄로 루이지애나의 상업 생활을 질식시켰고, 186251일에 그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종말을 고하게 했다. 퇴각하던 연방군은 모든 보트들, 부두들, 그리고 목화와 사탕수수 창고들을 불태움으로써 그 파멸을 완성시켰다. 1862년 후반에 사탕수수 수확은 단지 총 8,000,000달러였는데, 그것은 1861년 수확 수익의 삼분의 일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전쟁 동안 사탕수수 수익 상실은 총 170,000,000달러에 달했는데, 그 산업은 거의 초토화된 것이었다.

 

벤자민 버틀러

 

    186311일에 행한 아브라함 링컨의 해방 선언은 루이지애나 인구의 절반 이상을 차지하던 노예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세인트 마리와 그 주변의 페리쉬들의 노예들은 자유를 찾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선언은 반란군[남군]이 장악하고 있던 지역들에만 해당된 것이었고, 연방군은 테세 지역까지만 진입해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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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Butler) 장군은 도망쳐 나온 노예들을 그들의 주인들에게로 돌려보냈는데, 그것은 18641월 나타나엘 P. 뱅크스(Nathanael P. Banks)가 그의 후임자가 되었을 때야 비로소 그쳤다. 1년 전에 뱅크스는 프랭클린에서 15,000명의 연방군과 함께 싸웠는데, 그 전투가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연방군이 텍사스로 진입하는 것을 저지시켰기 때문이다.

    186512월에, 모든 노예들은 13차 수정 헌법의 비준에 의해 자유를 얻었다. 그때 영어와 불어로 기록된 복사본들이 (노예였다가 새롭게) 자유롭게 된 사람들의 각 집단에 주어지며 해방선언문이 루이지애나 농장 전역에서 공개적으로 낭독되었다. 한 특별한 경고가 프랭클린에게 주어졌는데, 그곳에서는 흑인들이 재산을 소유하고, 무기를 소지하고, 허락이 없이 예배드리러 모이는 것을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금지당했다.

    그 전쟁 동안 그리고 후에, 큰 고통과 불황이 일반적으로 남부를 그리고 특별히 루이지애나를 덮쳤다. 제방들과 둑들이 방치되거나 부서졌기 때문에, 밭들은 정기적으로 홍수에 잠겼다. 1866년에 홍수는 루이지애나의 충적토의 삼분의 이를 침수시켰다. 바턴 리지 윗 부분에서 제방들이 터지고 친과 로버트슨의 균열들은 물을 쏟아내어 뉴 오를레앙부터 바이유 테세까지 미시시피강의 서부 제방 전체, 넓이 50마일 길이 100마일 지역이 덮였다. 그로 인해 30,000,000달러 상당의 농작물들이 피해를 입었다. 세인트 메리 페리쉬에서 연방 당국은 아사를 막기 위해 비상식량을 지급했다.

 

 

    1867년 봄에 홍수는 또 하나의 위급 상황을 일으켰다. 한 뉴 오를레앙 신문은 전했다. “루이지애나 역사상 이처럼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아사 위험에 처했던 적은 없었다.” 백 개의 농장들 중에서 단 한 곳도 경작 비용을 건지지 못했다. 그리고 홍수피해 이외에도 유충들이 면화 작물의 삼분의 이를 황폐화 시켰다.

    또 다른 재해가 1867813일부터 104일까지 바이유 테세를 포함하는 뉴 이베리아로부터 뉴 오를레앙까지 지역을 강타했다. 그때 황열병이 유행하여 2,500명 이상이 사망했다.

    연방정부가 해방노예국(the Freedmen’s Bureau)을 통해 흑인들을 교육하고 자유민이 되게 하려 할 때, 남부의 백인들에게서 폭력적인 반응이 발발했다. 그들은 케이케이단(Ku Klus Klan)과 백인동맹(White League)과 같은 비밀 테러 집단들을 구성하여 흑인들을 난폭하게 억압하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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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인트 마리 페리쉬는 주변 지역들 그리고 뉴 오를레앙과 함께 극심한 사건들로인해 고통을 받았는데, 그 지역에서는 1866730일에 흑인들이 [1866년 민권법과 그 법률이 약속한 흑인의 시민권 및 그에 수반되는 평등. 권리에 따른] 헌법적 회합을 시도했지만, 그들 중에서 34명이 죽임을 당했고, 146명이 부상당했다.

 

 

 

    186739일에 노예해방국은 비록 18659월부터 186611월까지 알려진 것만 해도 25명의 흑인 자유인들이 살해되었지만 그 어떤 백인도 벌을 받지 않았다고 비난했다. 18679월에 마감된 노예해방국의 그해 집계에 따르면, 살인 51, 살해를 목적으로 한 공격 69, 그리고 습격과 폭행 56건이 발생했다. 다음 해에는 살인이 166, 자유인을 향한 폭행 225건이 더 일어났지만, 당국은 수많은사건들에서 백인들을 합당하게 처벌하는 데 실패했다.

    186781일 나폴레옹빌 근처에서, 한 백인이 한 옥수수밭에서 한 흑인 여성을 성폭행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게다가 화가 난 백인들은 성폭행은 흑인(a nigger)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야단스럽게 주장했다.

    1868년 말에 워싱턴에 있던 노예해방국 국장 필 쉐리단 장군(General Phil Sheridan)은 불의가 테레본(Terrebone)과 세인트 제임스 페리쉬(St. James Parishes)에서 만연하다고 보고했는데, 그 두 곳은 다 세인트 마리와 가까운 지역이다. 그는 뉴 오를레앙으로부터 멀리에 있는 많은 시골 페리쉬들은 백인들에 의한 테러에 취약하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 백인들은 늪지대들에서 갑자기 나타났다가 다시 감쪽같이 그 늪지대들 안으로 사라졌다.

    1868113일에 있을 대선일이 다가오자, 흑인 저항이 일어났고, 어떤 백인들은 대량 봉기를 우려했다. 세인트 마틴빌(St. Marinville)에서 922일에 자유 흑인들의 한 큰 무리가 그곳을 불질러버리겠다고 협박하며 그 타운을 휩쓸었다. 선거일에, 백인들은 연방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있던 지역을 제외한 지역에서 흑인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것을 거부하는 어떤 사나운 공포 지배를 확실하게 조장했다. 어떤 페리쉬들에서는 공화당에 단 한 표도 던져지지 않았는데, 이것은 흑인들이 투표할 수 없었다는 확실한 징표였다. 세인트 마틴빌에서 조차 한 농장주가 자기 일기에 이렇게 기록할 정도였다. “오늘 여기서 단 하나의 흑인도 투표하러 가지 않았다. 오늘은 영광스런 날이었다. 모든 백인들이여!”

    1869-1871년 동안 케이케이단의 폭력은 끔찍한 절정에 달했다. 북부에서는 뉴욕 거주자들이 브로클린 다리(Brooklyn Bridge)의 기술적 대성공을 축하했다. 남부에서는 1845년 이래로 북쪽의 반으로부터 갈라져 나왔던 남감리회가 그 흑인 회원들을 다른 교단, 흑인 감독 감리교회(the Colored Methodist Episcopal Church)로 분리시켰다. 루이지애나 어귀 지역에서 시무어가 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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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611월에 논란이 많았던 선거는 루이지애나와 사우스 캐롤라이나가 워싱턴에서 타협하게 했다. 공화당은 대통령직에 대한 대가로 연방군을 남부에서 철수시키는 데 동의했다. 루터포드 하이스(Lutherford B. Hayes)가 대통령이 되었고, 1877년에 연방군이 떠남으로써 흑인들이 실제적으로 자유케 되는 것을 도우려는 재건 노력들이 끝나고 말았다.

    불행하게도, 많은 성공에도 불구하고, (연방군에 의해 뒷받침되던) 노예해방국은 흑인들의 자유를 위한 그 어떤 경제적 토대로 마련하지 않았고, 이러한 실패는 의회와 국가가 필요한 지원을 제공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정치적 평등을 보장하는 헌법적 권리는 만약 자유인들이 선거할 수 없고, 교육받을 수 없고, 독립적으로 고용될 수 없다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40에이커의 땅과 한 마리의 노새에 대한 꿈은 허무한 것이 되었고, 흑인들은 그들을 자유케 한 사람들로부터 버림받았다.

    시무어가 성인으로 자랄 때, 흑인 미국인들은 말할 수 없는 적의와 무수한 잔악 행위들을 감내해야만 했다. 테러와 폭력 이면에 까무라칠 사실이 놓여있었다. 남북전쟁 직후 이전에 노예였던 사람들은 남부의 가장 비옥한 농장 지역에서 살았으며, 종종 그 지역의 백인보다 더 많았다. 만약 그들이 그들의 새로운 헌법적 투표 권리를 행사할 수 있었다면, 그 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농경지와 미국의 삼분의 일의 사회적, 정치적, 그리고 경제적 운명을 통제할 수 있었을 것이다. 백인들은 그들의 행위들을 사흘 굶어 도둑질 안 할 놈 없다, 자기 생존이 삶의 첫 번째 법이다, 그리고 이것은 전쟁이지, 정치가 아니다라는 표어들로써 정당화시켰다. 남부에서 백인이 흑인을 억업하는 것은 한계가 없었으며, 북부 사람들은 암묵적으로 동조했다. 결국 1876년 재건 종말의 해, 그리고 미국 건국 100주년의 해는 또한 리틀 빅 혼에서 커스터의 최후 항전, 그리고 미국 인디언들에 대한 연방의 마지막 진압의 해였다.

    한 사건이 그 당시를 잘 보여준다. 1873년에, 연방군이 센터빌에서 북서쪽으로 100마일 떨어진 그랜트 페리쉬, 콜팍스(Colfax)에서 떠나기 전에도, 150-200명의 흑인들이 살육당했고, 그 이후에도 무장한 백인들이 흑인들의 노새들과 다른 재산들을 강탈하며 그 시골지역을 쓸어버렸다. 연방 조사관들은 그 학살의 소름끼치는 상세한 현장을 확인했지만, 그 이상을 할 수 없었다. 510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며 루이지애나의 늪지대들 안에서 그들의 목숨을 숨기고 있는 흑인들의 그림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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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리 퍼진 불안감은 루이지애나 흑인들 가운데서 만연하고 있으며, 수백 명의 흑인들이 늪지대들과 숲속에서 안전을 도모하고 있다.

 

    1876년부터 그 세기 말엽까지 백인 지도자들은 노예제로 돌아가는 듯하게 남부 전역에서 그들의 우위성과 분리를 난폭하게 강제했다. 흑인차별법(Jim Crow laws)과 악명높은 흑인단속법(Black Codes)은 점차 흑인을 위한 전체주의적 연대라는 분리된 세계를 지시했다. 그 세계 안에서 삶은 생명줄들로부터 분리시키기 위해 철저하게 통제되는 임금과 함께 강제되는 일상 노동에 의해 완벽하게 조절되는 것이었다. 그 세기의 마지막 16년 동안, 미시시피, 알라배마, 조지아, 그리고 루이지애나의 흑인과 거주자들 중 2,500명이 교수형을 당하거나 화형을 당했다.

    1896년에 대법원은 공식적으로 그것의 가차 없는 분리 그러나 동등이라는 판결을 통해 백인의 지배를 찬성했다. 2년 후, 시무어의 고향 주는 할아버지 조항”(grandfather clause)을 고안해 내었고, 그 조항에 따라 186711일에 그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투표자격자였지 않으면, 그 어떤 시민에게도 투표권을 주지 않았다. 그 조항에 의해 거의 모든 흑인 유권자들이 배제되었고, 나머지 흑인들도 또한 엄격한 교육과 재산 규정들을 충족시키도록 강요당했다. 1896년에 유권자로 등록된 흑인이 26개 주요 페리쉬의 과반수인 130,344명이었는데, 그 숫자는 1900년에 그 어떤 페리쉬에서도 과반수에 미치지 못하는 5,320명으로 급격히 줄었다.

기독교 교회들은 흑인 그리스도인들을 이등 시민으로 이상하게 분리시키는 일에 관여했다. 퀄스(Quarles)는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1900년에 기독교는 그 이전보다 더욱더 색깔 경계선을 따라 분할되었다. . . 남부 교회들은 거의 완벽하게 분리되었다.

 

1907년에 듀보이스(W. E. B. DuBois)오늘날 남부에는 백인 교회에 소속된 흑인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만약 그렇다면, 그는 늙고 매우 허약할 것이다라고 썼다.

 

W. E. B. DuBois

 

 

    재건의 유산은 미국에 그 이전보다 더욱 심한 인종주의를 남겼다. 프랭클린은 그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새로운 세기가 동트기 전에, 그런데 사실은 1876년 대선이전에도 남부 스스로 제정했던 법에 대한 온전한 인정이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린 시무어가 성인으로 자라났다. 강인했던 그의 부모는 사탕수수 농장들에서 고된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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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인종주의와 억압이라는 미국의 악몽가운데서도 아들에게 강인한 성격과 평등과 희망이라는 아메리칸 드림을 어느 정도 넘겨주었다. 그들은 1852년 자기 주인에게 저는 저의 자녀들이 그 누구의 자녀들보다 더 잘나고 현명하기를 바랍니다라고 말했던 루이지애나의 노예와 같았다.

    시무어는 자라나 농장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일을 감당해야 했다. 당시, 모든 아이들은 가족의 생계를 도와야 했다. 강하고 건장한 소년이 된 시무어는 곧 성인이 감당해야 할 짐을 져야 했다. 그는 정식 학교 교육을 조금 받았거나 또는 전혀 받지 못했지만, 아브라함 링컨처럼, 독학으로 읽기와 쓰기를 배우는 최선의 미국 개척 전통 안에 있었다.

    그가 읽기 시작한 혁명적인 한 책은 바로 성경이었다. 성경 읽기는 많은 흑인들의 교육 목적이었다. 백인 노예소유주들은 성경의 내용의 많은 부분을 감추려 했다. 솔로몬 노덥(Solomon Northup)이라는 자유를 얻은 흑인이 납치되어, 다른 많은 다른 흑인들처럼, 루이지애나에 노예로 팔렸었다. 1853년에 그는 루이지애나 백인들은 자기 노예에게 성경을 주는 주인은 흑인 노예 하나도 소유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믿었다고 전하며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Solomon Northup

 

 

    백인들은 오직 피부색에 따른 차별과 우월한 사람들로서 특권을 부여받은 노예소유 인종에 기반을 둔 그들 자신의 세심하게 검열되고 각색된 신앙을 전해주려 했음에도 불구하고, 흑인 기독교는 놀랍게 일어났다. 흑인 노예 기독교의 위대함은 혁명적인 성경적 가르침들과 위선적인 백인 노예소유 경건사이의 차이를 분별해 냈다는 데 있었다. 흑인들은 진정한 기독교란 억압당하는 사람들의 자유를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흑인들의 신앙은 이 토대 위에서 일어났고, 그것의 능력에 대한 감명적인 간증을, 잊혀지지 않는 그리고 감동을 주는 흑인영가들을 산출해냈다.

    시무어는 흑인들의 신앙의 보이지 않는 기관,” 250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흑인들의 생명 유지의 근원이었던 이 영성의 샘물을 깊이 들여 마셨다. 그는 흑인들이 표현했던 신앙과 흑인 영성에 대한 강하고 변함없는 사랑을 발전시켰다. 그는 흑인 신앙의 기독교의 한 본래적인 의미의 재발견의 진가를 알기 시작했다. 그 본래적 의미는 예수께서는 강한 자들이 그들의 자리라고 앉아있는 것을 승인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비천하고 유순한 자들을 높이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었다.

    그는 하나님은 차별하지 않는 분”[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그들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언하시고 믿음으로 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그들이나 우리나 차별하지 아니하셨느니라 (사도행전 158-9);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역자 부연]이시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포로된 자들의 해방을, 그리고 억압받는 자들에게 자유를 전하라고 명령하셨기 때문에 성경적 믿음의 혁명적 함의들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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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어떤 인종의 육체도 그분 앞에서 자랑할 수 없다. “나중 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 90세의 제인 심슨(Jane Simpson)은 전에 노예였는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옛 노예들이 밑에 깔린 철길이 위에 있는 철길이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듣곤 했습니다. 그때 저는 도대체 그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의아했습니다. 그들은 그들이 포로생활에서 해방되는 때에 대해 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지금은 저도 압니다.” 또는 1865년에 한 흑인 여성이 우월하다는 자들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백인들이기 때문에 노예로 만드신 적이 없으시다라는 백인종 신학을 주장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그녀의 사람들에게 말했다.

    섬세하고, 고결한 마음을 소유한 청년 시무어는 언제나 인간의 삶에 닿아있는 친밀한 영적 현존을 의식하고 있는 흑인의 전형이었다. 그는 신적 환상들을 경험했고, 어린 시절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묵시적이고 영광스러운 재림을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삶에 의미를 부여한 준비였다.

    후에 시무어는 겉으로 드러난 것의 이면을 보고, 만사를 평가하고, 비평적 사고를 계발해야 할 필요성을 수수하지만 생생한 한 이야기를 통해 말했다. 그가 어느 날 저녁 매우 어두워졌을 때 집에 돌아오면서 겪었던 그 일은 잊을 수 없게 그에게 각인되었다. 그는 공동묘지를 통과하는 지름길을 택했었다. 그런데 머리가 없는 한 남자가 나타나 그를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그는 가던 길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그 유령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동안 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침내, 그것이 그의 바로 앞까지 왔다. 그런데 그것은 어둠 속에서 그 머리를 들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것은 단지 그 길을 따라 공동묘지를 지나며 평온하게 풀을 뜯어 먹고 있던 한 마리의 말이었다. 자기 자리에 서서 겉으로 드러난 것의 이면을 보았던 것은 그날 밤 그에게 교훈을 주었고, 그의 나머지 생애 동안에도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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