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승
2019. 10/2024.6.01
I. 들어가는 말
더함(William H. Durham)은 초기 오순절운동의 성화론에 매우 중요한 변화를 이끌어낸 인물로 평가받아 왔다. 그런데 기존의 더함의 성화론에 대한 연구들은 대부분 칭의와 동시에 순간적으로 발생한다는 완전 성화론에 치우쳐 있다. 그러나 사실, 더함에게 완전 성화는 그 이후 일생에 걸쳐 진행되는 지속 성화로 이어지는 것이다. 완전 성화론에 치우친 연구들은 더함의 성화론에서 초기 단계만을 다룬 것이다. 또한 완전 성화론에 치우치는 데다가 더하여 완전 성화론의 전체적이고 구체적인 구조나 내용에 초점을 맞춘 연구는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더함의 성화론의 전체적인 구조와 구체적 내용을 밝혀보는 것이 오순절 신학 발전을 위해 필요하다. 본 소고는 이러한 과제를 수행할 것이다. 이 과제는 더함이 1907년 3월 2일에 아주사 선교회에서 성령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을 체험한 후, 1912년까지 펴냈던『오순절 증언』(Pentecostal Testimony)을 주요 문헌으로 삼고 수행될 것이다. II장에서는 더함의 완전 성화론을 III장에서는 더함의 지속 성화론을 살펴볼 것이다. 더하여 IV장에서 더함의 성화론을 다른 성화론들과 비교해 봄으로써 더함의 성화론을 보다 명확하게 규명해 볼 것이다.
더함은 오순절 진영에서 가장 먼저 십자가에서 완성된 성화론을 주장하였으며, 더함의 성화는 칭의부터 영화까지 지속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의 성화론은 칭의와 동반되는 완전 성화, 그 이후 지속 성화와 성화의 완성으로서 영화라는 구조를 갖는다. 더함에게 완전 성화는 순간적인 것인 반면에, 지속 성화는 점진적인 것이다. 더함은 중생과 함께 순간에 얻는 온전한 성화를 통해 원죄가 제거되며, 본성이 변하고 옛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어 죽고 새로운 그러나 제한을 갖는 “인간성”이 남는다고 보았으며, 그 인간성이 신자 안의 지속적인 싸움을 유발하므로 그 인간성을 정복해가야한다고 생각했다. 더함의 성화론은 죄가 제거된다고 주장한 점에서 어거스틴의 성화론과 유사하다.
II. 칭의와 함께 얻는 순간적 완전 성화
A. 칭의/회심과 함께 얻는 완전 성화
1. 칭의/회심과 함께 얻는 완전 성화
더함은 “온전한 성화”를 중생과 동시에 얻는다고 주장하였다. 더함은 “성화가 은혜의 분명한 두 번째의 순간적 역사라는 이론이 어떻게 사람들을 눈멀게 할 수 있는지 내게 큰 불가사의다”라고 말하며, 중생 이후 완전 성화를 인정하지 않고, 중생과 완전 성화가 함께 이루어진다고 생각했다. 그는 “우리는 회심 때에 . . . 성화의 상태에 들어간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회심에서 사람을 . . . 모든 내적인 죄와 외적인 죄를 씻어내심으로써 거룩하게 만드시며 . . .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에게 회심/칭의와 동시에 받는 성화는 “완전 성화”(entire sanctification)다. 더함은 완전 성화를 거부하지 않았고, 다만 그는 칭의 이후에 명확한 두 번째 체험으로써 완전 성화를 거부하고, 칭의와 동반되는 완전 성화를 주장했다. 성화에 대한 하나님의 표준은 “완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이며, 칭의 때 옛 사람이 못 박혀 죽임을 당하고, 완전하게 성화된다는 것이다.
2. 순간적인 완전 성화
더함에게 칭의와 함께 얻는 완전 성화는 순간적이다. 그에 따르면, 아담의 한 죄를 통해 모든 인간이 죄인들이 되었으며, 순종의 한 위대한 행동을 통해 믿는 모든 사람들은 믿는 “순간”(as soon as) 의롭게 된다. 불신앙은 이 시대의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죄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at the moment) 그는 불신앙의 죄에서 벗어나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진다. 더함의 완전 성화는 순간적인 성화(instantaneous sanctification)다.
B. 기독론적인 완전 성화
1.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사역으로서 완전 성화
더함은 칭의와 동시에 일어나는 완전 성화는 바로 갈보리에서 완성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에 동일하게 근거한다고 보았다. “사도들은 갈보리의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the finished work of Christ on the Cross of Calvary)과 그분의 죽은 자들 가운데서의 부활을 지속적으로 전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렇게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온전하고 완전한 구주로 설교했다”고 말한다. 그에게 “갈보리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은 가장 영광스럽고 강력한 복음의 진리, 중심, 핵심이다. 더함은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에 의한 칭의와 완전 성화가 동시에 발생하는 구원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구원”(finished salvation in Jesus Christ)이라고도 칭하기도 했다.
더함의 갈보리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론은 성경과 개인적 체험 그리고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었다. 1898년, 그가 미네소타주에 있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그를 진정으로 다루기 시작하셨다. 하나님께서는 부흥회나 다른 집회들에 참석함으로써가 아닌 성경말씀 읽음을 통해 죄를 깊이 자각하게 하셨다. 날마다 그 찔림이 깊어져 마침내 하나님께 항복했고, 자비를 구하자, 그 순간 성령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Jesus Christ hanging on the cross)를 그에게 계시하셨다(revealed).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너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고 말씀하셨다. 더함은 즉시 믿었으며, 온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했고, 그 순간에 성령께서 그가 구원을 받았다고 증거해 주셨다. 그러자 말할 수 없는 기쁨이 그의 영혼을 채웠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모든 죄를 용서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는 몇 달 동안 천국에 있는 것처럼 살았다. 그런데 그는 어떤 측면에서 승리를 잃기 시작했고, 반복하여 하나님을 구하였다. 그는 두 번째 역사론자들에게 그가 필요한 것이 성화라고 들었고, 그래서 이 축복을 그가 아는 한 최선을 다해 오랜 동안 추구했다. 때때로 그는 그 역사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도 했으나, 다시 그렇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결국 회심 삼년 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빛을 비추시고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의 피를 확실하게 신뢰하게 되었으며, 그의 믿음을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His finished works)에 두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이렇게 했을 때 성령은 그가 성화되었다고 증거하셨다.
크리스토퍼 리크만은 더함이 맨 먼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말한 것이 아니고, 코플리(A. S. Copley)가 먼저 그것을 말했다고 주장했다고 보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리크만은 더함이 1910년 8월부터 1911년 2월 사이에 비로소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한 완성된 사역을 언급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반면에 코플리는 더함보다 먼저 1910년 5월에 바울신학에 근거하여 그때까지의 웨슬리적 오순절 성화론을 비판하기 시작했다고 주장한다. 리크만의 제시처럼 코플리는『오순절』(The Pentecost)의 1910년 5월 호에 “바울적 성화”(Pauline Sanctification)라는 글을 게재했다. 그런데 더함은『오순절증언』(Pentecostal Testimony)의 1909년 5월호에서 1898년에 미네소타에서 본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환상으로부터 “약 3년 후”(some three years after my conversion), 그러니까 1901년의 확신을 언급하며 “그분[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들”(His finished works)에 의한 죄 용서와 성화 체험을 간증했으며, 그리고 자신의 성령침례와 그 성경적 증거로서 방언말하기의 경험을 간증했다. 하지만 그 간증이 실린『오순절증언』은 현재 5쪽에서 12쪽만 전해진다. 표지가 없으므로 발간된 년도와 월을 알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 간증문에서 더함은 1907년 2월에 아주사에 가서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으며, 그 경험은 “그 이후 27개월이 지난”(after over twenty-seven months) 지금도 여전히 새롭다고 적었다. 그러니까 1907년 2월부터 27개월 후면, 적어도 더함의 간증문이 기록된 시기는 1909년 5월경이다. 나아가 더함이 그 간증문을 1909년 5월경의『오순절증언』에 싣기 위해 썼다면, 그 글의 최종 탈고 시기도 그때라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런 추정은 Follower Pentecostal Heritage Center가 제공한 Durham’s Pentecostal Testimony의 목차에 기입된 [Vol. 1#1 ? Mar. 1909?]와 일치한다. 그런데 1909년보다 2년 전인 1907년에 아주사에서의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 경험에 대한 더함의 간증이 사도신앙지 2월과 3월을 위한 6호에 게재되었었다. 그 간증문에 더함은 “9년 전,” 그러니까 1898년에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본 “후에 저는 믿음으로 성화의 진리를 보았고, 이해했습니다. 그러자 성령께서 내 마음에 그 사역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증거하셨습니다”라고 썼다. 1907년의 “이후”와 “the work was done” 그리고 1909년의 “3년 후”와 “His finished works”는 서로 동일하게 상응한다. 그러므로 리크만이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코플리가 먼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주장한 것이 아니고, 더함은 1910년에 주장한 코플리보다 9년 먼저, 1900년에서 1901년 사이에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 개념에 도달했으며, 길게는 3년 먼저 또는 적어도 1년 먼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2. 성화자/구속자이신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완전 성화
더함에게 희심과 동시에 일어나는 완전 성화가 갈보리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에 일어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피로 완전하게 하시는 성화자(Sanctifier)이시기 때문이다. 더함에게 그리스도는 자신의 보배로운 피로써 신자들에게 의로움과 동시에 성결을 제공하시는 성화자이시다. 그는 “회심 때에 우리는 우리의 성화자(Sanctifier)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성화자이신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면, 그는 성결(holiness)과 의(righteousness)의 상태에 있게 된다.
그 상태는 구속자 대속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 아래” 있는 것이고, 그럼으로써 “깨끗해진다.”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를 씻어낸다(wash away). 더함은 그리스도의 피를 “죄를 위한 유일한 치료제”(the only remedy for sin)로 규정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은 구속의 사역(the work of redemption)이며,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를 씻어내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속자(the Redeemer)시며 완전한 대속자(our perfect Substitute)가 되시기 때문이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한 대속자가 되시기를 자청하셔서 우리의 자리를 취하시고, 십자가에까지 우리의 죄를 지시고, 그분의 가장 보배로운 피를 흘리심으로써 우리를 위해 온전한 벌(paying the full penalty)을 받으셨다는 소식이다. 대속자이시며, 성화자이신 그리스도의 동일한 피로 인해 칭의와 완전 성화가 동시에 일어난다.
3.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의한 완전 성화
더함의 완전 성화론은 본인과 타인들에 의해 “갈보리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에 근거하고 있다고 말해지지만, 사실 그것은 한쪽 측면만을 부각시킨 것이다. 더함의 의미에서 갈보리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은 속죄론적 측면만 갖는다. 더함은 갈보리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완전히 용서됨으로써 칭의와 성화를 동시에 갖게 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더함의 갈보리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은 죄의 죽음 측면만 갖는다.
더함은 그런 편향성을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모델로 극복한다. 그에게 우리는 단순히 우리의 죄를 용서받았기 때문에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구원자시며 대속물(Substitute)이신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identification)을 통해 구원받는다. 죄인은 첫 아담과 연합된다.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다. 아무도 첫 아담과 그리고 동시에 둘째 아담과 연합될 수 없다. 죄인은 아담 안에 있고, 아담은 죄인 안에 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는 신자 안에 있다. 죄인은 아담 안에서 정죄된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정죄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죄인은 정죄를 받고, 신자는 평화를 얻는다. 아담 안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리스도 안에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와 아담은 동시에 어떤 사람 안에 계시지 않는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옛 피조물들은 그와 함께 타락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새 피조물들(the new creation)이 그와 함께 나타났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생명을 받는다.” 회심 때 그리스도와 연합되어(become identified with Christ) 성화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갈보리에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힘으로써 죄가 죽는 죽음 측면만 갖지만, 그리스도와 연합에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 측면뿐만 아니라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함께 새 생명으로 살아남의 측면도 갖는다. 그리스도의 부활과의 연합으로 인해 신자는 죄에 대하여 죽을 뿐만 아니라, 의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나 성화된다는 것이며, 완전 성화 이후 지속 성화를 이루어가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4. 그리스도의 생명과 본성에 참여로서 완전 성화
더함에게 완전 성화는 그리스도의 본성에 참여함으로써 얻어진다. 그에게 완전 성화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만 연합함의 산물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본성에까지 참여함의 산물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것은 보다 근본적으로 “그리스도의 신적 생명과 본성에 참여하는 자”(partaker of His divine life and nature)가 되는 것이며, 그럼으로써 완전 성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5.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들어감으로서 완전 성화
더함은 완전 성화를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들어감이라고도 말한다. 죄인은 흑암과 죄의 나라 안에 있다. 반면에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있다. 회심 전에 사람은 “본성의 어둠”(nature’s darkness) 속에 있다. 회심 때 그는 본성의 어둠에서 꺼내져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의 나라로 옮겨진다. 회심 때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스런 하나님의 아들을 받아들이며,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며, 옛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로워진다.
C. 실제적인 변화로서 완전 성화
1. 실제적인 경험으로서 완전 성화
더함은 칭의 시에 얻는 완전 성화를 법정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거부하고, 실제적인 것으로 이해한다. 더함은 의롭다함을 받았다할지라도 여전히 그 안에 죄가 남아있다는 주장을 일축한다. 그는 이런 이해를 “법정적인 방식”(judicial way)이고, 단순하게 “소극적 구원”(negative salvation)이라고 말한다. 그는 완전 성화를 법정적인 것이 아닌 “실제적인 경험”(actual experience)이라고 지칭한다. 첫 번째 은혜의 역사에 의해 구원받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성화되지 않고 법정적으로만 성화되었다고 말하는 두 번째 역사론과는 달리 그는 구원받을 때 동시에 실제로 완전히 성화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에게 완전 성화는 실제적이고, 이때 구원은 적극적 구원(positive salvation)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2. 원죄와 자범죄를 씻어냄으로서 완전 성화
더함은 실제적인 완전 성화의 근거를 내외적 죄의 씻음에 둔다. 그는 하나님께서는 회심에서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이끌어 가실 때, 모든 내적인 죄와 외적인 죄들을 씻어내심으로써(by washing away all his sins, inward and outward) 거룩하게 만드신다고 주장한다. 그가 주장하는 완전 성화는 칭의 때 내적인 죄와 외적인 죄, 즉 모든 죄를 실제로 제거 받는 실제적인 것이다. 그가 말하는 “내적인” 죄는 원죄를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죄는 자범죄를 의미할 것이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을 때, 그 분께서는 자범죄(committed) 그리고 원죄(original) 둘 다를 위한 모든 죄 값을 지불하셨다”고 말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죄들을 위해 “영원한” 단 한 번의 제사를 드리셨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영원한 단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죄의 문제를 해결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신자를 위한 영원한 구속을 이루셨다. 아무 죄도 없으신 분이 인간을 위해 죄인으로 취급되심으로써 그렇게 하셨다. 사람의 죄들, 사람의 정죄를 대신 취하셔서 유죄판결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써 온전한 죄 값을 치루셨다. 그리스도의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드린 단 한 번의 제사로 신자는 모든 죄를 단 번에 용서받음으로써 완전히 성화된다는 것이다. 불신앙은 이 시대의 사람들을 망하게 하는 죄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순간, 그는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진다.
3. 본성까지 새롭게 변화되는 완전 성화
더함에 따르면, 은혜의 두 번째 역사를 믿는 사람들은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자신 안에 옛 사람(the old man)을 가지고 있다고 가르쳤다. 그들은 그의 죄들이 칭의 때 사함을 받았지만, 아담적 본성(Adamic nature)은 여전히 그 사람 안에 있다고 말한다. 더함의 판단에는 이것은 칭의의 기준을 낮추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의 명백한 가르침들에 상반되는 것이다.
더함의 완전 성화론은 실제적으로 죄만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옛 사람(old man)의 죽음을 말한다. 그에게 유일한 기초는 옛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는 것이다(롬 6:6-7). 더함은 옛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사실 위에서 우리가 죄로부터 의롭다함을 받았다고 결론짓는다. 하나님께서 한 번 옛 사람을 그리스도 안으로 넣으셨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으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며, 그리고 그들의 옛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으로써 제거된다. 옛 사람은 사망선고를 받았고, 유죄판결을 받은 옛 사람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형집행을 당했고, 진정으로 회개하고 참된 산 믿음을 갖고 그리스도께 나아온 사람들이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을 때 그들을 위해 베푸신 “온전한 유익”(full benefit)을 얻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더함에게 완전 성화는 옛 사람의 죽음에서 그치지 않고 새 사람이 됨으로써 가능하다. 옛 사람을 위한 부활은 없다. 옛 사람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으며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된다. 반면에 오직 새 사람(the new man)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켜 진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누구든 새로운 피조물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피조물에게는 정죄함이 없다. 옛 사람은 죄로 가득 찼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람”(the new man)은 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보혈 아래 있다는 사실에 의해 거룩하다.
더함에게 칭의 때 옛 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살음은 곧 아담적 본성, 즉 옛 본성의 변화다. 더함은 회심을 “내적 변화”(an inward change)로 이해했다. 이것은 문자적으로 뒤집는 것이다. 구원은 내적인 일(inward work)이다. 그것은 마음의 변화, 본성의 변화(a change of nature)를 의미한다. 구원은 옛 것들이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된 것이다. 그것은 죄로 가득하여 부패된, 우리 안에서 정죄 받은 옛 사람, 또는 옛 본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다. 회심 때 인간의 본성이 변한다(the nature of man is changed).
더함은 회심 때 본성의 변화를 상태의 변화라고도 말한다. 회심 때 한 사람의 본성(nature)과 상태(state)가 변화된다. 회심 때 한 사람은 죄의 상태로부터 의의 상태로 변화된다. 그는 정죄와 사망의 상태로부터 생명과 평화의 상태로 변화된다. 죄와 불결의 상태로부터 정결과 거룩의 상태로 변화된다. 사단의 자녀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변화된다. 더함은 그런 상태의 변화를 “완전한 변화”(a complete change)라고 일컫는다.
4. 충분한 역사로서 완전 성화
더함에게 칭의 시의 완전 성화는 온전한 구원을 얻게 하는 하나님의 충분한 역사다. 그는 믿는 순간에 부분적으로(partly) 또는 외적으로(outwardly) 구원받지 않고, 온전하게(fully) 구원받는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하나님이 구원하신 사람에게 오직 부분적으로만 구원받았고 말하는 것, 은혜의 또 하나의 역사를 얻지 않는다면, 결국 그의 영혼을 잃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된 것이다. 그는 그런 교리에 이의를 제기한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구원하실 때, 그분은 충분한 역사(complete work)를 행하시지, 불충분한 역사(half-way work)를 행하지 않으신다.
D. 믿음으로 얻는 완전 성화
더함은 칭의와 동시에 발생하는 완전 성화를 얻는 방법으로 믿음을 제시한다. 그에 따르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우리는 어떻게 우리의 대속물과 연합되는가?” 그 가정된 질문에 대해 그는 “오직 믿음으로”라고 대답한다. 인간은 유죄판결을 받고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인간의 자리(place)를 취하시고, 대신 죽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형벌을 받으심으로 인간이 자유를 얻는다. 그 진리가 선포될 때 인간은 떨며 그분의 발에 엎드려 부르짖는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답이 들려온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의 완성된 구원은 내적인 일이다. 그것은 죄로 가득하여 부패된, 인간 안에서 정죄 받은 옛 사람, 또는 옛 본성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모든 사람의 구원자로 만들며, 인간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될 수 있다. 더함에게 믿음은 인간을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복된 주님과 함께 연합되게 함으로써 칭의와 동시에 완전 성화를 얻게 하는 길이다.
III. 삼위 하나님 안에서 점진적인 지속 성화
A. 삼위일체적인 지속 성화
1. 성부 하나님과의 친교로서 지속 성화
더함의 지속 성화론은 성부 하나님과의 지속적인 교제를 포함했다. 더함은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union/identification with Christ)으로 중생과 온전한 성화를 얻은 후 지속적으로 성령을 통한 “성부와의 친교”(communion with the Father)를 주장했다. 신자는 믿음으로 그리스도와의 연합되는데 그치지 않고, 이후에 성령에 의해 “성부와의 친교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더함은 성부와의 친교를 자세하게 설명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성부와의 친교는 한계가 없는 것임은 분명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함의 지속 성화론은 신론적이기도 하며 한계가 없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걷기로서 지속 성화
더함은 지속 성화를 위해서는 또한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걸어야 하며,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산 믿음(living faith)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이끌어주며, 그와 동일한 산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참으로 죽은 자”(dead indeed)로 여기게 하고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만든다. 그에게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abide in Christ)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지속적인 어찌할 수 없는 의존을 유지하는 것(maintaining a helpless continual dependence on Jesus Christ)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지속적인 의존은 또한 적극적으로 성화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걷는 것(walk in Christ)이다. 더함에게 그리스도 안에서 걷는 것은 성결, 의, 지혜, 지식,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지속적인 자라남”(continual increase)으로 연결된다. 이 성장은 점진적인 것이며 오직 죽음이나 변화[신령한 몸으로]에 의해 멈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지속적인 역사 또는 운행(a continual work or operation of the free grace of God)이다. 이처럼 더함에게 지속 성화는 기독론적이기도 하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걸으며, 나아가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끊임없이 자라나야 하는 한계가 없는 것이다.
3. 성령 안에서 걸음으로서 지속 성화
김삼환 교수는 더함이 성화를 성령침례의 조건으로 삼음으로써 오순절주의자들이 성령침례 이후 더 이상 성령과의 인격적 연합을 추구할 수 없게 만들어 버렸다고 비판했다. 김삼환에게 오순절성령체험은 그 자체로 완성되지 않은 것이며, 오순절성령체험의 시작은 성령은사체험이요 그 완성은 성령과의 인격적 합일체험이다. 그는 더함이 오순절성령체험을 그 자체로 완성된 것으로 봄으로써 성령과의 인격적 교제를 차단해 버렸다고 비판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삼환의 비판은 더함이 온전한 성화와 성령침례 이후에도 지속 성화를 주장한 것에 의해 적절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난다. 더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중생과 온전한 성화를 얻은 것으로 그치지 말고 “지속적으로”(continually) 하나님께 자신을 산제사로 드리고, 진정한 내적 겸손으로 “성령 안에서 걸으며” 기도와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하며(in real, inward humility walk in the Spirit and live a life of prayer and faith), 이렇게 사는 사람이 성장하고 발전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이것을 원하신다.
더함은 어떤 사람들은 성령 침례가 기독교적 체험에서 상당히 진전된 상태에 있는 사람들만을 위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의 체험은 단지 “성령 충만한 생활로 들어가는 문”(the entrance into the Spirit-filled life)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의 기름부으심(the anointing of the Spirit)이라는 복을 유지하는 것을 소홀히 하다가 성령의 임재의 의식(the consciousness of His presence)이라는 복을 잃어버린다고 한탄한다.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사람에게 그 다음으로 하시는 일은, 만약 그가 그것을 위해 그분을 신뢰한다면, 그를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정결하고, 거룩하고 구분된 삶을 살기를, 육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 안에서 계속 걷기를 바라신다. 이렇게 더함의 지속 성화는 성령론적이기도 하며, 한계가 없는 지속적인 것이다.
B. 지속 성화의 과거 지향적 측면
1. 머물기로서 지속 성화
더함의 지속 성화는 한편으로 과거에 이루어진 완전 성화에 머물기를 요구한다. 더함은 중생 때 얻는 온전한 성화의 상태를 “위치/자리”(place)라는 말로 표현한다. 어떤 사람이 회심 때에 있었던 “위치”(place)에 머문다면 그는 그 어떤 두 번째 경험(첫 경험인 중생 이후 온전한 성화 경험)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에 따르면 한 가지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그분은 우리를 순결하고 깨끗하게 만드시지만, 그러나 그분은 우리에게 완전 성화 상태에 계속 머무르기(remain so)를 요구하신다.
이렇게 더함의 지속 성화는 완전 성화와 구분되지만 분리되지 않고 연속성을 띈다. 완전 성화는 순간적이고, 지속 성화는 점진적이라는 점에서 두 성화는 불연속성을 띄지만, 지속 성화가 완전 성화 안에 머물기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두 성화는 연속성을 띈다.
2. 회복으로서 지속 성화
더함에게 지속 성화는 과거에 이루어진 완전 성화에로의 회복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머물기를 요구하시지만, 성도가 퇴보했을 때는 머물던 원 위치로의 “회복”(reclamation)이 필요하다. 구원받고 완전 성화를 얻으면, 하나님의 영광과 능력이 영혼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완전 성화를 얻은 사람들도 점점 무관심해지고, 구원의 기쁨을 잃어버리고, 종종 어둠과 혼란에 빠진다. 이런 상태에서 거룩해지기를 바라야 한다고 가르침 받기도 한다. 물론 이 말은 옳다. 거룩해져야 한다. 그러나 두 번째 은혜의 사역이 필요하다는 것보다는 “회복”(reclamation)이 그 상태에 보다 잘 어울리는 말이다. 물론 사실은 회심 때에 있었던 완전 성화의 위치(place)에 머물렀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할 때 진정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다시 또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다. 더함은 갈라디아서에서의 바울의 가르침을 이런 견해의 중요한 버팀목으로 이해했다. 그는 바울을 인용하며 타락한 자들은 은혜의 첫 상태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C. 지속 성화의 미래 지향적 측면
1. 인간성의 통제와 정복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서 지속 성화
더함에게 지속 성화의 필요성은 그리스도의 피로 죄가 제거된 “새 사람” 또는 새 본성도 여전히 나약한 인간성에 불과하므로 그 인간성을 통제해야한다는 사실에서 나온다. 만약 죄의 뿌리인 원죄가 제거되었다면, 어디서 그 이후의 죄가 나오는가? 그리고 왜 지속적인 성화가 필요한 것인가? 더함에게 신자는 옛 것에서 새 것으로 변화된 본성을 갖게 되었지만, 여전히 “인간성”(humanity)을 갖고 있다. 사실, 더함은 “죄된 본성”에서 실제로 죄가 제거된 새 본성을 말한 것이다. 그런데 더함에게 이 새 본성도 여전히 “인간성”이다. 더함이 말한 “인간성”은 첫 아담의 범죄이후의 그리고 중생 이전의 죄된 인간 본성이 아닌, 범죄 이전 창조시에 부여받은 제한적이지만 죄는 없는 “인간성”을 의미할 것이다. 인간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인간성” 안에서 사는 것이며,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적 본성”(human nature)을 파괴시키기 보다는 신자가 자신의 인간적 본성을 통제하기를 기대하신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를 씻으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채우신 다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성령께 지속적으로 맡김으로써 성령께서 우리의 전 존재를 통제하실 것(to control all our faculties)을 기대하신다.
더함은 인간성의 통제를 보다 더 적극적인 전투적 용어로 인간성을 이겨내는 싸움으로 표현한다. 회심자들이 필요한 것은 그 보혈 아래 돌아가서 자신, 즉 인간성, 인간적 본성을 죽은 것으로 여기고 이겨내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가르침을 받는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일종의 싸움(a battle)이라는 가르침을 받아야만 한다. 더함은 온전한 성화이후 신자들이 싸워야할 대상은 죄로 물든 옛 본성이 아닌 죄가 제거된 새로운 본성, 즉 근본적인 한계를 갖는 인간성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함은 “인간성”을 죄와 연결시키지는 않았다. 더함은 이런 인간성과의 싸움에서 “승리”(victory)를 추구하였다. 그에 따르면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워 믿음을 지켰으며, 면류관을 받는 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과 이기는 삶(overcoming life)을 사는 것에 관한 진리를 보고 주의를 기울여야만 개인들과 교회가 패배의 고통을 당하지 않는다. 승리는 지속적인 경계, 기도, 그리고 정복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
더함의 지속 성화론에서 인간성에 대한 통제와 정복은 나아가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 규결된다. 인간성은 매일매일 십자가를 지고, 이겨내는 삶을 살아갈 필요가 있다.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이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뿐만 아니라, 육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 안에서 걷기를 바라신다. 완전 성화를 얻은 사람들도 날마다 십자가를 지는 것(taking up the daily cross)과 십자가에 못 박히는 삶(living the crucified life)에서 면제되지는 않는다. 십자가를 지는 것과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완전함(perfection)을 가져다준다. 인간성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자신을 하나님께 산제사로 끊임없이 드리는 것”(to continually yield themselves up a living sacrifice to God)일 것이다.
2. 자라남으로서 지속적 성화
더함의 미래적 지속 성화는 통제하고 싸우는 부정적인 측면만 갖지 않고, 자라남이라는 긍정적 측면도 갖는다. 더함에게 성화 또는 심적 순전함은 은혜의 순간적인 행위이거나 활동(an instantaneous act or operation of grace)이며, 한 사람을 완전한 상태로 이끌어 간다는 가르침은 성숙(maturity)과 관련되는 한에 있어서 망상이다. 그런 가르침은 너무도 치명적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가장 무서운 독을 피하는 것처럼 그런 가르침을 피해야만 한다. 칭의와 원죄로부터 완전 성화를 포함하는 구원은 그것을 받는 순간에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그러나 성장에 있어서(in stature) 또는 성숙과 관련되는 한, 신자는 단지 “작고, 죄 없고, 무력하고, 완전히 깨끗한 갓난아기”(little, innocent, helpless babes, perfectly clean)에 불과하다. 완전 성화를 얻은 신자 앞에는 기독교적 삶과 경험 전체(the whole Christian life and experience)가 기다리고 있다. 신자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그리고 갓난아기들로서 말씀이라는 참된 젖을 바랄 때 성장하고(grow) 번창할 수 있다(prosper). 보다 강하게 자라남에 따라 보다 강한 음식을 받을 수 있다. 단 한 번의 경험으로 모든 점에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에게까지 자라날 수는 없다. 그 자라남을 위해서는 지속적으로 말씀을 먹고 깨어 기도해야 한다.
D. 구원의 수단이 아닌 구원의 증거로서 지속 성화
1. 구원의 수단이며 유지하는 길인 믿음
더함에게 구원의 수단은 성화가 아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그에게 구원은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받는 것이다. 더함에 따르면 사람은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간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들어감으로써 칭의와 완전 성화를, 즉 구원을 얻는다. 또한 구원을 유지하는 길도 역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다.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믿음에 의해 구원을 유지한다(by faith we keep saved). 새 언약은 오직 믿음에 달려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믿으면, 그는 구원받는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관계를 올바르게 유지하는 것은 첫 상태에서 의롭다함을 얻는 것만큼의 믿음을 요구한다. 산 믿음(living faith)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으로 이끌며, 그와 동일한 산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을 “참으로 죽은 자”(dead indeed)로 여기게 하고 계속 그리스도 안에 거하게 한다.
더함에게 구원의 수단이며, 구원을 유지하는 길인 믿음은 그리스도의 보혈에 대한 믿음이다. 성령은 죄에 대한 지식을 일으키시며 유일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 또한 성령은 죄 씻음의 유일한 방편으로서 보혈 그리고 그것으로 피가 전유되는 방편으로서 믿음을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under the Blood of Jesus Christ) 있으며, 그들이 그 상태에 머무는 한(as long as they stay there) 사단은 그들을 건드릴 힘이 없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신들을 정결하게 유지하고 그 원수가 그들을 장악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깨어 기도하고, 그 보혈을 지속적으로 신뢰해야한다. 더함은 구원의 수단도 구원을 유지하는 길도 성화가 아닌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이라고 말한 것이다.
2. 구원의 증거인 지속 성화
더함에게 지속 성화는 구원을 위한 수단이 아니고, 구원의 증거다. 그는 사도들이 정결하고, 구별되고, 거룩한 삶, 모든 선한 일에 열매 맺음, 세상과의 분리, 하나님의 교제 등을 강조 했다고 보았다. 그런데 더함에 따르면, 사도들은 성화를 “구원의 수단”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not as a means of being saved). 더함은 모든 신자들이 지속적인 성화를 추구해야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지만, 그러나 그는 지속적 성화를 구원을 위한 기준이나 척도, 수단으로 삼는 율법주의에 빠지지는 않았다. 더함에게 지속 성화는 이미 얻은 구원에 대한 확실한 증거다. 더함은 지속 성화를 구원의 수단이 아닌,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구원에 대한 확실한 증거”(but as a sure proof of salvation already received . . . in Christ)라고 주장했다. 더함은 칭의와 완전 성화를 구원을 위한 조건으로, 지속 성화를 이미 얻은 구원에 대한 증표로 제시한 것이다. 즉, 더함에게 신자는 지속 성화를 완전히 못 이루었다고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구원받는 것은 칭의와 완전 성화를 통해서이다. 지속 성화는 구원을 받은 자들에게 당연히 동반되는 증거다.
E. 지속 성화의 목표인 영화
더함에게 지속 성화의 절정, 목표는 “영화”(glorification)다. 지속 성화는 “영화”되기까지 지속되어야하는 과정적이며 미래 지향적 성화이다. 더함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회심으로부터 영화에” 이르는 싸움(Christian life is a battle from conversion to glorification)으로, 즉 성화의 점진적인 과정으로 이해했다. 영화는 이 세상에서나 이 세대에서 이루어질 수 없고, 개인적 종말이나 우주적 종말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미래의 것이라는 점에서, 더함은 성화를 이 세상에서는 완성될 수 없는, 다만 미래의 완성을 향해 진행되어야하는 과정적인 것으로 이해했다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함의 지속 성화의 목표는 한 개인의 일생 바깥에서, 역사나 우주의 시간 바깥에서 발생할 영화였다.
IV. 더함의 성화론과 타 성화론과의 비교
A. 더함의 성화론과 루터나 진젠도르프의 성화론
칭의와 함께 모든 죄가 씻어내진다는 더함의 성화론은 칭의 이후에도 원죄가 남아있다는 루터의 성화론과 다르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의 전가(imputatur)에 의한 칭의 후에도 마지막 숨지는 순간까지 신자 안에 여전히 “타고난 기질”(habitum)인 원죄(peccatum originis)가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루터는 “이 전가는 우리에게 매우 필요한데, 우리는 아직 완벽하게 의롭지 않고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죄는 여전히 우리의 육에 머무르기 때문이다(sed in hac vita haeret adhuc peccatum in carne)”라고 말했다. 루터는 신자의 속에도 죄가 존재하는 상태를 “죄인인 동시에 의인”(simul peccator et Iustus)이라는 말로 표현했다. 루터는 “원죄”가 신자 안에도 남아 있어서 선에 대항하여 싸움을 일으키고 파멸시키기도 한다고 보았다. 그는 심지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경건한 사람들 속에서도 원죄가 선에 대항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루터는 신자 안에 “영적인 본성”(natura spirituali)과 “육체적인 본성”(natura corporali) “새 사람”(novus homo)과 “옛 사람”(vetus homo)의 대립적인 두 본성이 존재한다고 말한다. 이해 비해 더함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해 내적 외적 모든 죄가 제거되고, 옛 본성이 죽고 새 본성, 인간성이 남는다고 주장했다.
클레이턴은 더함의 완전성화론을 “수정된 진젠도르프주의”(a modification of Zinzendofrianism)으로 보았는데, 그런 주장은 더함의 성화론을 잘못 파악한 결과다. 그는 완성된 사역론은 “근본적으로 루터주의적이고, 특히 진젠도르프주의적이다”라고 주장했다. 진젠도르프는 웨슬리와의 대화 중에 “우리의 모든 완전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 그리스도인의 모든 완전은 그리스도의 피에 대한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의 완전 전체는 전가되는 것이지, 선천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해 진다”라고 주장했다. 진젠도르프는 또한 “신자가 의롭다함을 받는 순간 전적으로 거룩해졌다. 그 때로부터 죽을 때까지 더 거룩해지지도 않으며, 덜 거룩해지지도 않는다,” “완전한 성화와 칭의는 동일한 순간에 발생하며,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라고 말했다. 클레이턴은 더함의 “완성된 사역 성화는 주입된 은혜가 아니라, 신자들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다”라고 말했다. 이런 측면에서 진젠도르프의 주장은 더함의 완전 성화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반면에 진젠도르프는 “가장 탁월한 신자들도 죽을 때까지 가장 비천한 죄인들이다”(Optimi hominum ad mortem usque miserabilissimi sunt peccatores)라고 말했다. 클레이턴은 “더함의 체계에서 죄된 본성(the sinful nature)은 제거되지 않고, 그리스도와 함께 못박힌다”고 말했다. 이것은 더함을 오해한 것이다. 더함은 신자들이 죽을 때까지 죄인들이라고 말하지는 않았으며, 그리스도의 피가 자범죄와 원죄를 실제로 제거해버리고 옛 본성을 완전히 바꾸어 버린다고 주장했다. 파카스가 잘 본 것처럼, 옛 본성이 변화되고 실제로 죄가 제거된다는 더함의 완성된 사역은 옛 본성이 남아있다며 법정적 칭의를 주장하는 루터/진젠도르프주의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더함은 거룩함이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다는 진젠도르프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성을 극복하고 어린아이가 자라나는 것처럼 자라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B. 더함의 성화론과 급진적 웨슬리주의 성화론
웨슬리는 믿음에 의한 칭의와 중생에 의해 죄책과 죄의 세력에서 해방되지만, 반면에, 여전히 신자 안에 죄가 남아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웨슬리는 칼빈과는 달리 어거스틴이 “연약성”(infirmities) 자체를 죄로 규정하지 않은 것을 따른다. 다만 그에게는 연약성이 그것에 의지가 발동하여 행위로 나타나면 죄가 되지만, 의지와 관련되지 않으면 죄가 아니다. 그런데 웨슬리는 신자들이 믿음으로 종말이 아닌 현재에서 세상 안에서 죄로부터 그리고 죄의 결과로부터 “현재적 구원”(a present salvation)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웨슬리는 그리스도의 피가 현세에서도 죄책뿐만 아니라 실제로 과거와 미래의 외적이고 내적인 모든 죄를 제거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웨슬리에 의하면 신자가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의 완전(Christian perfection)은 무지나, 실수, 오류로부터의 완전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더함의 성화론에 “단회적 사역 완전론”이라 이름붙이고 “일종의 급진적 웨슬리주의”라는 평가를 내렸다. 파카스는 더함이 웨슬리적 성결주의 성화론의 원죄의 제거나 원죄로부터의 구출에 대한 주장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단지 칭의 후에 그것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거부했다고 보았는데 이것은 바로 본 것이다. 파카스에게 진정한 더함의 원래 완성된 사역론은 “단회적 사역 완전론”(single-work perfection), 또는 “회심 때 죄된 본성이 제거된다고 주장하는 일종의 급진적 웨슬리주의”(a radicalized Wesleyanism advocating eradication of the sin nature at conversion)이다. 즉, 파카스는 루터와 칼빈이 완전성화의 시점을 저 세상으로 한정한 것을 웨슬리가 이 세상 안으로 끌어왔으며, 더함은 앞으로 더 끌어당겨 중생의 시점과 동시적인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더함의 성화론을 “급진적 웨슬리주의”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이점에서 파카스는 옳게 판단했다.
그러나 파카스는 완성된 사역은 성화를 회심 때 발생하는 최초의 죄 씻음과 정화와 전 생애에 걸친 그 상태의 지속으로 구성된다고만 보았고, 그 지속된 상태를 성결의 진전(progress in holiness)으로는 보지 않았는데 이 점에서 그르게 판단했다. 그의 주장과는 달리 더함의 지속 성화론에는 그런 과거 종결된 상태로의 지향적인 면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더함은 칭의와 동시에 완전 성화를 얻지만, 남아 있는 인간성과 싸우며 동시에 성인으로 자라나야 한다며 진전되는 점진적 성화도 주장했다.
C. 더함의 성화론과 파함의 성화론
더함의 성화론과 웨슬리적 성결주의 성화론의 경향을 보였던 파함의 성화론 사이에는 유사점들이 있다. 두 성화론은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이 저 세상이 아닌 이 세상에서 순간에 자범죄는 물론 원죄도 다 제거할 수 있다(eradicate)고 주장한다. 이런 제거론은 “완전 성화”(perfect sanctification)라는 용어를 통해 표현된다. 두 성화론은 신자는 완전 성화이후 과정적이고 점진적인 성화를 이루어 가야한다고 주장한다. 두 성화론은 점진 성화에 있어서 성령의 주도성 등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인정한다. 두 성화론은 신자는 종말에 진정한 완전 성화에 이를 것이라고 내다본다. 두 성화론은 성화를 구원의 수단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더함의 성화론과 파함의 성화론 사이의 상이점들 중에 가장 큰 것은 파함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성화를 중생으로부터 시간적으로 순차적으로 일어나는 법정 성화(잉태: 자범죄 제거)와 완전 성화(출생: 원죄 제거)로 나누는 반면에, 더함은 그리스도의 피에 의한 완전 성화를 중생 시점의 순간에 단번에 일어나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더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완전 성화의 원인으로 제시하며, 파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완전 성화의 결과로 제시한다. 즉, 더함은 그리스도와 연합의 중생론적 측면을 강조한다면, 파함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전통적인 칭의 후 성화론적 측면을 강조한다. 더함은 온전한 성화는 오직 사람의 믿음과 그리스도의 보혈로 성취된다고 본 반면에, 파함은 그런 측면도 말하지만 더하여 사람의 정화와 헌신을 온전한 성화의 인간적 원인으로 제시한다. 파함은 완전 성화 후에도 육적 본성은 제거되지만, 여전히 “옛 사람”이 남아 있으며 그래서 그 옛 사람과 싸워야 한다고 말하며, 반면에 더함은 본성이 변하는 것은 물론 옛 사람도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며, 그러나 죄가 없으나 제한을 가진 “인간성”(humanity)이 남아있으니 그 인간성과 평생 싸워 이겨야 한다고 말한다.
D. 더함의 성화론과 개혁주의 또는 케스윅의 성화론
어떤 사람들은 더함의 성화론이 칼빈주의 특히 케스윅의 성화론과 유사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더함의 칭의로 인한 모든 죄 제거와 본성의 변화 주장은 칼빈의 주장과 다르다. 칼빈은 원죄는 우리의 본성의 유전적 타락과 부패이며 영혼의 모든 부분에 만연되어 첫째,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만들고, 다음에는 성경이 “육체의 일”(opera carnis)(갈 5:19)이라고 명명한 행위를 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칼빈은 오직 은총의 전가를 통해서만 원죄가 사해지며, 그럼에도 여전히 원죄는 남아있고, 사라지는 것은 죄책과 형벌이라고 생각했다. 칼빈에게 죄는 신자를 다스리는 힘만 잃었을 뿐 여전히 신자 안에 존재한다. 칼빈은 어거스틴이 중생자 안에도 남아 있는 “정욕”이라는 “연약함”을 인정했지만 그 자체를 “죄”라고 부르지 않은 것을 비판한다. 그리고 이어서 그는 “정욕”(concupiscentia)에서 발생되는 것은 “죄”(peccatum)라고 규정한다. 칼빈은 중생자 안에 있는 죄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신자 안에 있는 죄, 즉 “연약성”이 신자를 겸손하게(humiliet) 만든다고 평가한다.
더함의 완전 성화론은 원죄의 제거에 있어서 케직의 성화론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을 갖는다. 케스윅은 성화를 세 단계, 즉 “지위적 의”(positional righteousness), “경험적 성화”(experiential sanctification) 그리고 이 세상 종말에 얻을 “온전하고 영원한 성화”(complete or permanent sanctification)로 나눈다. 케스윅에서 “경험적 성화”는 “대항”(counteraction)이라고도 명명된다. 케스윅에 있어서 죄는 신자 안에 거하는 경향성이나 법이며, 대항할 수는 있지만 제거할 수는 없는 것이다. 억압이나 제거가 아닌 대항만이 죄에 대해 승리를 얻는 유일한 방법이다. 신자가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 성령의 법은 신자 안에 거하는 죄의 법에 대항한다. 페플뢰(Hanmer William Webb-Peploe)는 웨슬리가 이 세상에서 죄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다고 말한 것은 스스로가 속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홉킨스(Evan Henry Hopkins)는 죄를 향한 하향성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생명의 법으로 상향성이 유지될 수 있는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즉, 죄를 지을 수 있지만, 믿음에 의한 성령의 역사로 죄를 향한 의도를 갖지 않게 될 뿐이라는 것이다. 케스윅은 한편으로 신자의 죄가 순간에 완전히 제거될 수 있다는 웨슬리주의자들의 견해를 거부했으며, 다른 한편으로 영화에 이르기까지는 신자의 죄가 점차 제거될 수 있다는 개혁주의의 견해도 거부했다. 신자는 남아 있는 죄에 대항하여 일생 싸울 뿐 점진적으로 나아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케스윅과는 달리 더함은 죄가 제거되기 때문에 죄와 대항하여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인간성”과 싸우는 것이며, 점진적으로 나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E. 더함의 성화론과 미 하나님의 성회의 성화론
미 하나님의 성회는 1959년에 더함의 “완전성화”를 버렸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1916년 10월에 개최한 제 4차 총회에서 “근본진리들의 선언”을 채택하였다. 그 선언의 제7항의 제목은 “완전한 성화, 모든 신자들이 추구해야 할 목표”(Entire Sanctification, The Goal for All Believers)이었다. 그 제목에 담겼던 “완전한 성화”에는 더함의 성화론의 영향력이 나타난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그 선언은 성화를 즉각적이라기보다는 점진적인 것으로 제시함을 알 수 있다. 제7항은 “완전한 성화는 모든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성화를 추구해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7항의 제목이나 내용에 의하면 완전한 성화는 신자가 되는 시초에 얻는 것이 아닌, 신자의 목표로서 제시된다. 나아가 미 하나님의 성회는 1959년에 제9항의 제목을 “완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에서 “완전한”을 빼고 그저 “성화”(Sanctification)라고 잡았다. 이로서 더함의 완전한 성화 개념이 하나님의 성회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이런 미 하나님의 성회의 성화론이 더함의 성화론과 달라진 원인들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대표적 학자들이 더함의 성화론을 정확하게 인식하는 데 실패한 것일 것이다. 펄만은 “원죄의 제거”(Eradication of inbred sin)를 “성화에 대한 잘못된 견해들”의 목록에 올렸다. 윌리엄 멘지스는 “더함이 죄의 제거(eradication)라는 웨슬리주의자들의 개념을 비성경적인 것이라고 거부했다”라고 말했다. 멘지스는 더함이 “완전 성화론을 거부했다”(He objected to the doctrine of entire sanctification)고 생각했다. 그는 그 이유를 “그가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걸친 지속적인 성화 과정의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라고 적었다. 그리고 그는 더함에게 성화는 칭의 후에도 존속하는 죄에 대한 지속적인 승리라고 생각했다. 스텐리 호르톤은 더함이 “그러나 죄된 본성은 제거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The sinful nature, however, is not removed but crucified with Christ)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파우펠도 더함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받힘으로 죄가 제거(eradication)되지 않는다고, 칭의를 일으키는 신앙의 행동은 본성을 변화시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과는 달리, 파카스와 니콜이 제 대로 본 것처럼, 더함은 죄의 제거와 본성의 변화를 주장했다. 그들은 원죄의 제거를 주장하는 더함의 완전 성화론을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 그들이 더함의 완전 성화론을 오해한 원인은 더함이 원죄를 사함받은 신자들 안에 있다고 주장한 “인간성”(humanity)을 간과하거나 오해한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더함이 명명한 “인간성”을 창조시의 죄가 없지만 제한적인 본성이 아닌, 원죄를 발생시키는 옛 본성 또는 옛 사람으로 이해한 것 같다.
F. 더함의 성화론과 어거스틴의 성화론
더함의 성화론은 진젠도르프, 급진적 웨슬리, 칼빈과 케스윅의 성화론보다는 어거스틴의 성화론과 더욱 유사하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총으로 내적으로 믿는 사람의 원죄가 실제적으로 다 사해진다고 주장했다. 더하여, 그는 외적인 물세례가 죄의 뿌리, 즉 원죄를 사한다고도 주장했다. 즉, 어거스틴은 내적으로 믿음을 가지고 외적인 물세례를 받을 때 인간의 죄가 사해진다고 주장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의 공로와 하나님의 은총으로 죄사함을 받을 때 죄의 주권이 제거되고 그 사람의 본성이 고침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중생자 안에도 죄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죄는 죄라고 불린다 할지라도 “죄에 의해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세례 후에도 남아있는 것을 “연약성”(infirmity)이라고도 칭했다. 그 연약성 또는 죄 아닌 죄는 중생자의 싸움을 유발하며, 이기기도 하고 지기도 하지만, 중생자는 죄의 다스리는 힘을 정복해야한다. 어거스틴은 인간이 하나님의 은총과 자신의 치료받은 자유의지에 의해 이 세상에서 율법을 온전히 지키고 죄 없이 살 수 있다고 본다. 그 상태는 충족스럽지 못하고 완벽한 것은 아니지만, 결점이라고 불리지 말아야 한다. 그는 또한 비록 인간 스스로는 그것을 이룰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다고 주장했다. 더함은 물침례식을 통해 인간의 원죄가 사함 받는다고 까지는 주장하지 않았다. 그러나 더함의 성화론은 물침례의 원형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원죄가 사함받고 본성이 새로와지며, 그 후 새롭지만 제한성 있는 인간성과 싸워 이겨야 한다고 주장한 점에서 어거스틴의 성화론을 닮았다. 특히 더함이 신자 안의 “인간성”을 죄로 규정하지 않은 것은 어거스틴이 신자 안의 “연약성”을 죄로 규정하지 않은 것과 매우 유사하다.
V. 나가는 말
살펴본 바와 같이 더함은 코플리보다 먼저 그리스도의 완성된 사역을 주장했다. 더함의 성화론의 가장 큰 특징은 중생시 순간에 그리스도의 보혈을 믿음으로 죄가 제거되고 본성이 변화된다고 주장하며, 그 이후 지속적으로 성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더함의 성화론은 칭의와 동반되는 완전 성화와 그 이후 영화에서 완성될 지속 성화라는 구조를 갖는다. 더함에게 칭의시 얻는 완전 성화는 법정적인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갈보리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옛 사람의 죄된 본성이 죄가 제거됨으로써 새 본성으로 변하는 실제적인 것이다. 더함의 완전성화 이후 지속 성화는 한편으로 과거의 완전 성화의 상태 안에 계속 머무는 것을 포함하며, 다른 한편으로 미래적으로 부정적인 면에서 죄는 제거 되었지만 여전히 한계를 갖는 “인간성”(humanity)을 통제하고, 싸워 정복하는 것을 포함하며, 긍정적인 측면에서 아기처럼 자라남, 성숙되어감을 포함한다. 더함에게 지속성화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성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에게 성화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며, 구원과 구원의 유지 수단은 믿음이고, 성화는 이미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증거하는 것이다. 더함의 성화의 최종목표는 영화다. 더함의 성화론은 중생시 원죄가 제거된다고 주장한 점에서 그리고 그 이후 점진적 성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 점에서 진젠도르프, 급진적 웨슬리주의, 파함, 케스윅, 미하나님의 성회의 성화론과 상이한 점을 가지며, 어거스틴의 성화론과 가장 유사하다.
더함과 파함의 성화론 비교표
주장자 | 시초 성화 → | 과정 성화 → | 최종 성화 | |
파함의 성화론 | 법정 성화(중생) → | 완전 성화(중생 이후) → | 성결 → | 구속 |
순간적 갈보리 십자가 그리스도의 피 자범죄 제거 |
순간적 그리스도의 피 결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 원죄(육적 본성) 제거 인간적 원인: “정화/헌신” 영적 영향력: 성령 내주적 기름부음 몸의 성화 |
점진적 위로 향한 경향성 소극적: 옛 사람(old man)과 싸움 적극적: 그리스도를 닮음 성령침례: 방언+희생적 봉사 능력 성령생활 |
종말적 성숙, 영,혼,몸의 전인적 완성 구속의 모형이신 그리스도 하나님의 자녀: 신의 성품에 참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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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는 백보좌 심판을 면하거나 받는 기준이 아님 칭의가 그 기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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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태 | 출생 | 성장 | 성인 | |
첫 은혜 | 둘째 은혜 | |||
더함의 성화론 | 완전 성화(중생): 구속 → | (지속 성화) → | 영화 | |
순간적 갈보리 십자가 그리스도의 피 구속자/대속자/성화자이신 그리스도 원인으로서 그리스도와 연합 그리스도 생명과 본성에 참여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들어감 단번에 완성된 사역, 충분한 역사 원죄 + 자범죄 제거(eradication not suppression) 본성변화 실제적 경험 성화의 상태 인간적 원인: 믿음으로 |
점진적 과거적: 머물기, 회복 미래적: “새 사람”이지만 한계를 갖는 인간성(humanity)을 통제, 싸워 정복, 십자가에 못 박아 하나님께 산제사로 드림 적극적: 자라나며 성인으로 범사에 그리스도에게까지 성숙해 가는 것 그리스도 안에서 걷기 성령침례: 방언+봉사능력 성령 안에서 걷기 |
종말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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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는 구원의 수단이 아님 구원과 구원의 유지 수단은 믿음 성화는 이미 믿음으로 얻은 구원을 증거 |
||||
출생 | 성장 | 성인 | ||
단번 은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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