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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신학

오순절 교회의식론 탐구: 성사/성례인가 의식인가?

한오신 2024. 2. 24. 23:52

A Study on Pentecostal Church Ordinances:

Sacrament or Ordinance?

 

 

 

 

이창승

2024.02.24./2024.02.25

 

 

오순절교회의식론탐구성례인가의식인가(이창승).pdf
0.27MB

 

 

 

I. 들어가는 말

 

    로마 가톨릭, 동방정교회, 그리고 개신교는 교회 의식(儀式)에 관한 용어와 수, 그리고 이 의식들의 성격과 관련하여 서로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어떤 교회는 성례”(sacrament)라는 용어를 쓰고, 어떤 교회는 의식”(ordianc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보다 좁혀서 가톨릭과 개신교 개혁주의는 성사/성례”(sacrament)라는 용어를 주로 사용하며, 개신교의 침례교는 의식”(ordinance)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오순절주의 교회는 어떤 용어를 사용해왔고, 앞으로 어떤 용어를 사용해야 하고, 그것에 어떤 의미를 담아야 하는가?

    본고는 본격적인 오순절교회 의식론을 위한 탐색 작업이다. 그래서 본 연구는 가톨릭교회와 개혁주의교회, 그리고 침례교회의 교회 의식론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의 교회 의식론을 살펴보고, 1990년대 이후에 소위 오순절신학자들 사이에서 일고 있는 교회 의식론의 가톨릭주의화 또는 개혁주의화라는 수정 현상을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이런 수정 현상은 오순절 교회 의식론을 위해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며, 오순절교회 의식론은 의식”(ordinance)이라는 수식어 없는 용어를 사용하고 그 안에 오순절 교회에 적합한 의식론을 담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필자의 견해를 간략하게 제시해볼 것이다.

 

 

II. 성사/성례(Sacrament): 로마 가톨릭 관점

 

    영어 사크라멘트(sacrament)는 라틴어 사크라멘툼(sacramentum)에서 왔는데, 그 용어는 라틴어역 성경들에서 사용되었다. 신약성경에서 뮤스떼리온(μυστριον)은 하나님께서 감추셨던 것을 이제 복음을 통해 계시하신 것을 일컫는 데 사용된다 (예를 들면, 16:25-26; 3:3-13; 1:24-27). 초대 교회는 이 의식들이 하나님의 은혜의 신비를 드러내는 것으로 생각하며 침례와 주의 만찬 의식에 사용했다. 헬라어 성경이 라틴어로 번역될 때, 뮤스떼리온(μυστριον)은 사크라멘툼이 되었으며, 그 용어는 의식 또는 신의의 서약을 일컬었다. 5세기에 내적이고 불가시적인 은총의 외적이고 가시적인 표징으로서의 사크라멘트라는 어거스틴의 정의는 확고한 것이 되었다. 교회는 이 두 의식들을 하나님의 실제성, 표징들 자체에 의해 내포된 그리고 일으켜진 실제성을 가리키기 위해 하나님에 의해 제정된 거룩한 표징들로 간주했다.

    가톨릭교회에게 사크라멘트들은 은혜를 전례들을 통해(ex opere operato, 사효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입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사크라멘트들이 집행될 때 전달된다. 그리고 그 은혜는 사크라멘트를 받는 사람들의 기질(character)의 변화를 일으킨다. 받는 사람의 사크라멘트들에 참여는 구원에 필수적이다. 사크라멘트들은 은혜의 수단들인데, 그 수단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구원의 은총을 그의 백성들에게 수여한다. 사크라멘트들이 은혜를 주입시킨다기 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결합에 의해, 그 약속을 믿음으로 전유하는 그것들을 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예를 들면, 성화)의 약속을 제공한다. 일곱 개의 사크라멘트들 중에서 첫 번째 것인 세례는 그것을 받는 사람들을 원죄로부터 깨끗하게 하고, 그럼으로써 중생하게 하며, 그들을 가톨릭 교회 안으로 가입시킨다. 사크라멘트의 집행의 효과는 그 자체만이 아닌 그 효과를 위한 말씀과 성령에 의존한다.

    이런 가톨릭교회의 성례관은 교부들, 특히 어거스틴과 아퀴나스의 성례관을 이어받은 것이다. 어거스틴은 세례를 통해 모든 죄가 사해진다고 말한다. 그는 세례는 모든 죄를 위해 마련된 것이며, 그에게 세례는 과거의 모든 죄들을 사해주기 시작하며,” 그 죄사함(remission)은 부활에 이르러서 완전함을 얻게 된다. 그는 죄책이 또한 세례에 의해 제거된다고 말한다.

 

죄사함.” 당신이 세례를 받을 때 당신은 당신 안에 그 완전함에 대한 신조를 갖고 있다. 바로 이 죄의 범함으로부터 죄 많은 육체가 태어났으며, 이 죄의 씻음은 죄 많은 육체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의 성례전을 통해 죄의 몸이 씻김을 받는다. 사망의 몸이라고도 부르는 죄의 몸으로부터의 구원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은 하나님의 은총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 그러므로 구원은 세례에 의해 초래된다. 왜냐하면 그의 부모로부터 획득한 그 어떤 죄든 더더욱 그 자신이 세례이전에 자신의 책임으로 지은 그 어떤 죄든 모두 용서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성례 고유의 능력이다. 그것은 새 생활을 위한 성례이다. 그것은 지금 과거의 모든 죄의 사면과 함께 시작하며, 죽은 자의 부활에 완전해질 것이다 . . . 그분은 그분을 바라는 사람들에게 그것을 계시하실 것이며, 그분은 우리가 지금 소망으로 받고 있는 것을 실제로 받게 될 때 그것을 완전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이 모든 정욕의 산물들과 옛 정욕의 죄책 자체는 세례의 씻음에 의해 제거된다.

 

 

 

 

    살펴본 바와 같이 어거스틴은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으로 죄사함(원죄와 자범죄를 사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그는 은총을 받기 이전의 모든 죄들이 은총을 받음으로 사함 받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어거스틴은 그 은총이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그리스도의 은총에 의한 사죄에 세례성사를 통한 사죄를 더하였다. 그는 세례를 통해 실제로 원죄가 사해지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그는 세례를 받기 이전에 지은 모든 죄들이 세례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는다고 말한다. 어거스틴이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한 죄사함을 부족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것에 세례를 통한 죄사함을 더한 것은 그의 오점이었다. 그러나 그가 그리스도를 통한 은총으로 실제적인 죄사함을 받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밝힌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아퀴나스는 세례가 죄를 사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는 세례보다 중요한 것은 구원에 이를만한 올바른 신앙”(right faith)이라고 말한다. 올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을 때 죄사함을 받고 비로소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반대 2에 대한 대답. 교회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는 이유는 그들이 불의가 속함을 얻으며 그 죄를 없이 함을 얻을 결과는 이로 인하나니라는 이사야 279절을 따라 죄로부터 깨끗함을 입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로서는 올바른 신앙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 세례를 베풀지는 않는다. 올바른 신앙이 없이는 그 어떤 죄의 사함도 없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세례를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믿고 있는지의 여부를 묻는다. 반면에 만약 어떤 사람이든 올바른 신앙 없이 교회 밖에서 세례를 받는다면, 그는 세례를 받아도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러므로 어거스틴은 말한다(De Baptism. contr. Donat. iv). “낙원과 비교되는 교회로부터 우리는 사람들이 교회 밖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다할지라도 복 받은 자들의 구원을 받거나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을 배운다.”

 

 

 

    아퀴나스는 세례가 원죄를 포함한 모든 죄를 사한다고 말한다. 아퀴나스는 침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으로서 세례를 받는 것은 옛 죄에 대해 죽고 새 은혜에 대해 살기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모든 죄는 옛 죄에 속한 것이며 세례는 그 옛 죄, 모든 죄를 제거한다고 말한다.

 

나는 그 사도의 말씀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침례를 받은 우리는 그분의 죽음 안에서 침례를 받는다라고 대답한다(6:3). 그리고 더 나아가 그는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에 대하여 죽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았다고 생각하라”(6:11). 그러므로 세례에 의해 사람이 옛 죄에 대해 죽고, 새 은혜에 대해 살아나기 시작했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죄는 그 옛 것에게 속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모든 죄는 세례에 의해 제거된다.

 

    아퀴나스는 세례가 모든 형벌”(punishments)을 사한다고 말한다. 그는 그리스도의 수난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들을 위해 충분히 만족을 주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는 받는 자의 모든 형벌을 제거한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수난은 세례 받는 모든 사람에게 교류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고난당하여 죽은 것처럼 고침 받는다. 이제 그리스도의 수난은 모든 사람들의 모든 죄들”(all the sins of all men)을 위해 충분한 만족이다. 그 결과 세례를 받는 사람은 자신의 죄 때문에 자신에게 합당한 모든 형벌의 부채로부터 자유를 얻는다.

 

    아퀴나스는 세례 후에도 응보”(penalty)는 남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남은 응보는 부활 때 제거된다고 말한다. 그는 영광스러운 그리스도께서도 고통을 당할 수 있는 몸으로 오셔서 수난과 죽음을 당하셨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세례를 받는 사람들도 역시 이 세상에서 세례 후에도 남은 응보로 수난과 죽음을 당한다고 말한다.

 

나는 세례는 현생의 응보들(penalties)을 제거하는 능력을 가졌지만, 그러나 그것은 현생동안 그것들을 제거하지 않고, 그것들은 그것의 능력으로 이 죽을 것이 죽지 않을 것을 입는”(고전 15:54) 부활에 의인들로부터 제거될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리고 이것이 타당하다. 왜냐하면 먼저 사람은 위에서 언급된 대로(3; 68, 5) 세례에 의해 그리스도와 연합되기 때문에, 그리고 그분의 지체로 삼아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머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연합된 그 지체에서도 일어나야 한다는 것은 적절하다. 그리스도는 잉태될 때부터 은혜와 진리로 충만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아픔을 느낄 수 있는 몸”(passible body)을 가지셨었다. 그것은 그분의 수난과 죽음을 통해 영광의 삶에로 일으킴 받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세례를 통해 은혜를 받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은 그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게 된다. 그러나 결국에 그는 아픔을 느끼지 않는 삶에로 일으켜질 것이다.

 

    살펴본 바와 같이 아퀴나스는 이단에 대처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 교회 안의 세례를 구원의 수단으로 만들어 버린다. 물론 그 세례를 받기 위해 올바른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 이외에 세례를 죄사함을 받는 동등한 길로 만듦으로써 그리스도의 피의 사죄성과 그에 대한 신앙을 약화시킨다. 이점은 비판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아퀴나스는 그리스도의 은총이 분명 실제적 죄의 제거를 가져온다는 측면을 간과하지 않는다. 그가 올바른 신앙에 세례라는 수단을 더하기는 했지만 올바른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의 은총을 통해 실제적으로 원죄가 제거된다는 측면을 놓치지 않은 점은 높이 평가받아야 한다.

    어거스틴과 아퀴나스 같은 교부들의 성례관은 그대로 가톨릭교회에 녹아들었다. 가톨릭교회는 세례라는 성례(聖禮)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 주장의 근거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를 제시한다. 오순절 날에 베드로는 수천 명의 유대교 순례자들에게 설교했다. 예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으니,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그러면 죄사함을 받고, 성령의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했다(2:37-38, 벧후 3:21). 가톨릭교회는 이 베드로의 설교를 근거로 세례를 받으면 죄사함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또한 가톨릭교회는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니”(16:16)라는 예수의 말씀을 세례라는 성례를 통한 구원 주장의 근거로 삼는다.

    또한 가톨릭교회는 성찬(the Eucharist)이라는 성례도 구원의 수단으로 삼는다. 예수께서는 인자의 살을 먹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 안에 생명이 없고,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내가 마지막 날에 그를 살리리니”(6:52-54)라고 말씀하셨다. 가톨릭교회는 그 말씀을 성찬이 구원의 효과를 일으키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래서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c. A.D. 107)는 성찬을 불멸을 위한 약이라고 칭했고, 카르타고의 키프리안(c. 210-258)구원을 위한 음식이라고 칭했으며, 어거스틴(354-430)은 그 미사를 구원을 위한 제물이라고 칭했다는 것이다. 1547년에 열렸던 트렌트공회는 가시적 형식들은 불가시적인 은혜를 표현할 때만 그리고 그것의 통로가 되었을 때에만 성례들이다라고 그 정의를 바꾸었다 (I.S.B.E. p.2636). 에드가드 쉴레벡스(Eduard Schillebeeckx)성례를 그것이 지시하는 은혜를 실제로 사실로 수여하는 표징이라고 정의했다.

    한국 가톨릭교회는 sacrament성사”(聖事)라고 번역한다. 가톨릭교회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 삶의 여정에 함께 하시면서 인생사의 중대한 순간마다, 그에 필요한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한층 성숙한 당신의 자녀로 받아들이시고 끊임없이 은총을 주신다. 신자들이 신앙 안에서 성장의 단계마다 공동체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화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특별한 예식을 통하여 더 깊은 성화의 단계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은총을 보이는 표지로 드러내는 특별한 예식을 성사(聖事, Sacramentum)라고 칭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사를 통하여 우리 각자에게 필요한 은총을 베푸시고,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성사를 집행함으로써 하나님께 공적 예배를 드린다.

    가톨릭교회에게 성사들은 구원을 제공하는 수단이다. 성사들은 사효적으로”(ex opere operato: ‘성사 거행 그 자체로’) 효력을 가진다. , 단 한 번에 영원히 성취된 그리스도의 구원업적으로 효력을 가진다. 따라서 성사는 그것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의 의로움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어진다.” 가톨릭교회는 사효적인 성사들이 신자들의 구원을 위하여 필요하다고 말한다. “성사의 은총은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성령의 은총이며, 각 성사에 고유한 것이다.

    세례성사의 효과 중에서 죄에 대한 세례의 효과에 대해 제 2 차 바티칸공의회는 세례성사를 받으면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룬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세례성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남을 의미한다고 가르친다(계시헌장 3; 교회헌장 2). 가톨릭교회교리서는 VII. 세례의 은총, 1263항에서 세례가 원죄와 본죄도 사한다고 주장한다. “세례를 통하여 모든 죄, 곧 원죄와 본죄, 그리고 모든 죄벌까지도 용서받는다. 세례로 새로 태어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을 아무런 죄도 남아있지 않다. 곧 아담의 죄도, 본죄도, 죄의 가장 중대한 결과인 하나님과 단절도 남아 있지 않는 것이다. 예비자교리에 따르면, 세례성사는 인간구원의 첫째 조건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로 새로이 태어나는 "재생의 성사"이다. 세례성사의 뜻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성사이고 두 번째, 자녀들은 아버지의 상속권을 받을 권리가 있다. 세례성사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그 아버지가 우리에게 약속한 유산의 "영원한 생명"이다. 그래서 세례성사를 받으면 영생의 은혜를 받게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과정에 있어서 세례성사는 우리가 범한 모든 죄를 씻어줄 뿐만 아니라 죄로 오는 모든 벌까지도 몽땅 씻어준다. 따라서 세례성사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아(사도행전 4, 12) 죄와 마귀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된다. 결국 세례성사를 통해서 새로 태어난다고 하는 의미는 인류의 원조 아담에게서 비롯된 하나님과의 단절이 화해로 다시 이어지고, 원죄와 지금까지 지은 죄와 그 잠벌까지 용서받음을 뜻한다.

 

 

II. 성례(Sacrament): 개혁주의 관점

 

    종교개혁가 마틴 루터는 가톨릭교회와는 달리 세례를 받은 후에도 여전히 원죄는 남는다고 말한다. 그는 원죄란 타고난 기질이어서 세례이후에도 남는다고 말한다. 그는 죄사함을 받는 다는 것은 죄가 없어졌다기보다는 죄가 전가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사실 에라스무스는 원죄가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한다. 타고난 죄요 악인 원죄는 계속 우리에게 달라붙어 우리로 영원한 죽음의 형벌에 처하게 한다.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되는 타고난 기질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이것을 모를 뿐만 아니라 믿지도 인정하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원죄는 세례로 제거되었고 그렇게 때문에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죄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타락했을지라도 세례로 인해 다시 죄사함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점에서 비록 사죄를 내세움으로써 죄가 제거되어 그것이 우리에게 돌려지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원죄는 최후의 날 온 세계와 우리의 육체가 불로 완전히 깨끗해지기까지 실질적으로 또 본질적으로 없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흙으로 돌아갈 때 그때 마침내 죄도 완전히 없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안, 마지막 숨지는 순간까지 성자들에게서도 보는 것처럼 원죄가 또한 살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죄가 없어졌다기 보다는 전가되지 않았다는 의미에서 죄가 사해졌다고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죄는 사함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죄는 전가됨으로 말미암아 면죄된 것뿐이요, 우리가 죽을 때에야 본질적으로 없어진다 . . . 만약 아리스토텔레스가 내적인 죄의 상태를 이해했다면 그는 그것을 격정(passionem)일 뿐만 아니라 기질(habitum)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왜냐하면 원죄는 이 육체가 완전히 죽어지고 불로 깨끗해지고 개조될 때만 끝이 오는 뿌리요 타고난 악이기 때문이다. 스콜라 신학자들은 마치 빛 앞에서 어둠이 완전히 물러가고, 눈의 티가 완전히 제거되는 것같이 원죄”(original sin)"행위 죄"(actual sin)처럼 제거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왔다. 그러나 고대 교부 어거스틴이나 암브로시우스는 성경이 말하는 것에 따라 전혀 다르게 말했다. 그런데 전자는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에 근거해 말했다. 즉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죄와 의는 행위에 의해서 성립되는데 결국 의를 행하지 않는 것이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성 어거스틴은 죄 또는 정욕은 세례로 사함을 받기는 하지만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전가되지 않는다(it is not imputed)”라고 아주 분명히 말한다.

 

 

 

    존 칼뱅은 인간의 부패성이란 본성의 부패성으로서 그것이 바로 원죄라고 말한다. 그에게 원죄, 즉 본성의 부패성은 인간을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이게 만들고, “육체의 일을 발생시킨다. 그는 그런 본성의 부패성, 즉 죄의 뿌리는 세례에도 불구하고, 또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음에도 불구하고, 은총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신자 안에 남아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세례를 통해 아담에게서 그의 모든 후손에게로 전수되어 내려간 원죄와 부패함에서 해방되고 면죄를 받으며, 또한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계속해서 올바른 상태를 유지했더라면 아담이 얻게 되었을 그 본성적인 의와 순결의 상태가 세례를 통해서 우리에게 회복된다는 식의 가르침을 오랫동안 일부에서 퍼뜨려왔고 여러 사람들이 여전히 고집하고 있는데, 이것이 얼마나 거짓된 것인가 하는 것이 분명히 드러난다. 어린 식으로 가르치는 자들은 원죄가 무엇이며 원래의 의가 무엇이며 세례가 주는 은혜가 무엇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원죄란 우리의 본성의 부패함과 더러움으로서, 첫째로는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게 만들며, 둘째로는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는바 육체의 일”(5:19)을 생겨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두 가지 점을 조심스럽게 주목해야 한다.

 

 

 

    중생에도 불구하고 원죄와 죄가 남아있다는 루터와 칼뱅에게는 침례와 주의 만찬이 그 죄들을 처리하는 수단이 가톨릭에게 만큼이나 중요했다. 칼뱅은 공재설을 취한 루터처럼 주의 만찬에서 중재적 견해를 취했다. 요소들 사이에 주의 살과 피가 공재한다는 루터의 물질적이고 지역적인 것 대신에, 칼뱅은 주의 만찬의 요소들에 그리스도의 영적 임재를 가르쳤다. 그는 쯔빙글리의 견해와의 구별을 원했다. 쯔빙글리는 주의 만찬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부인했다.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몸으로나 지역적으로 임재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그분의 전 인격, 살과 피로 만찬의 요소들에 임재하신다고 믿었다. 칼뱅은 신자들의 그 구속자의 전 인격과의 신비한 친교를 강조했다. 칼뱅은 그리스도 살과 피가 비록 부재하고 지역적으로 오직 하늘에만 계시지만, 신자가 요소들을 받는 행위를 할 때 신자에게 죄사함을 포함하는 생명을 부여하는 영향력을 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칼뱅의 후예들인 개혁주의자들은 성례들 안에서 그 자체들로 효력있는 물질들과 행위들을 갖는다는, 의식에 대한 로마 가톨릭과 루터교 관점 모두를 거부한다. 개혁주의자들은 그리스도의 문자적인 살과 피가 임재한다는 로마 가톨릭의 화체설(transubstantiation)과 루터주의의 공재설(consubstantiation)을 거부한다. 또한 세례라는 육체적 행위가 그 자체로 죄를 씻어내는 효력이 있다는 로마 가톨릭과 루터주의의 견해를 거부한다. 다른 한 편으로, 개혁주의자들은 성례들에서 단지 유비적 겉치례만 갖는다는 쯔빙글리의 견해도 거부한다. 성례들은 단지 진리를 실현하거나 극적으로 표현하는 것 이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교화를 위해 그리스도에 의해 제정된 의식들로서 전 세대를 통해 교회 안에 있다. 그 의식들의 효능(efficacy), 그것 때문에 개혁주의자들이 의식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성례들이라고 부르는 효능은 전적으로 그리스도 자신에 의한 그것들의 제정에 있다. 로마 가톨릭과 성공회와 루터교는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자들은 참여하는 행위에 의해 지시된 은혜를 받는다고 믿는다. 성례의 은혜 중재는 받는 사람의 믿음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믿음으로 참여하는 사람들만 그 외적 요소들에 의해 지시된 죄를 사하는 생명의 은혜를 받는다고 주장한다.

    1647년에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세례와 성찬을 성례라고 칭했다.

 

27장 성례(Of the Sacraments)

1. 성례[聖禮]는 은혜언약에 대해 인치는 거룩한 표이다(17:7,10; 4:11).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과 맺은 언약의 표로서 친히 제정하신 것이다(고전 11:23; 28:19). 이는 그리스도와 그가 주시는 은혜를 나타내며 그 안에서 우리가 누리는 유익을 확고히 하며(고전 10:16, 11:25,26; 3:17,27), 교회에 속한 성도들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 사이를 가시적으로 구별해 준다(12:48; 34:14; 15:8). 또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경건하게 참여토록 하기 위함이다(6:3,4; 고전 10:16,21; 26:26-28).

2. 모든 성례에는 그 표와 실체 사이에 영적인 관계와 성례적 연합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그 실체에 관한 내용이 그 표에 따른 명칭과 효과들로 표현될 수 있다(3:5; 17:10; 26:27,28)

3. 올바른 성례전을 통해 나타나는 은혜는 성례에 사용되는 음식에 들어있는 내재적인 능력이나 집례자의 경건성과 그의 의도 때문이 아니다(벧전 3:21; 2:28,29). 거기에 은혜가 임하게 되는 원인은 성령의 사역과(고전 12:13; 3:11) 성례에 관련된 하나님의 말씀 때문이다. , 성례에 관한 주님의 명령과 그것을 합당하게 받는 성도들에게 주어진 주님의 약속이 은혜의 원천이 된다(26:27, 28).

 

    개혁주의자들에게 성례는 구원의 수단이다.

 

1. [91] 성례들은 어떻게 구원에 효과적인 수단이 됩니까?

() 성례들은 구원의 효과적인 수단이 되는데, 성례들 안에 있는 어떤 덕이나 혹은 그 성례들을 집행하는 자 안에 있는 어떤 덕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의 충족하심과(벧전 3:21; 3:11; 고전 3:6~7) 성례들을 믿음으로 받는 자들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역사하심 때문이다(고전 12:13).

 

    개혁주의 관점은 그리스도의 신성의 편재를 말하지는 않고, 특수한 영적 임재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성례 안에서 떡과 포도주라는 요소들에 실제로 임재하시지만, 몸으로가 아닌, 영으로 임재하신다는 것이다. 지역적 밀접감이 아니라, 거행의 유효성이라는 것이다. 수신자는 그분을 입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는다는 것이다. 수신자는 그분의 살과 피를 물질적인 것으로가 아닌, 천국에 있는 그분의 영화된 몸의 초자연적 영향력이 아닌, 그러나 그분의 찢긴 몸과 흘린 피를 받는다는 것이다. 상징주의를 견지하는 사람들은 이 실제 임재가 무엇인지를 정당하게 질문 할 수 있다. 편재하는 신성도 아니고, 부활하신 성육신한 몸도 아니고, 영원한 것이 아닌 성육신한 예수도 아니라면, 무엇이 실제로 임재하는가?

 

 

III. 의식(Ordinance): 침례주의적 관점

 

    순전한 상징적, -성례적 이해는 종교개혁자들 중의 하나였던 쯔빙글리(Huldreich Zwingli, 1484-1531)에 의해 도입되었다. 쯔빙글리는 침례와 주의 만찬을 성례들이라고 보기를 거부했다. 쯔빙글리는 성령은 사람들에게 도달하기 위한 그 어떤 수단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성령 자신이 모든 것을 스스로 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쯔빙글리는 침례와 주의 만찬을 통해 성령이 우리에게 중재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성령 스스로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쯔빙글리는 침례와 같은 가견적 행위를 통해서 믿음이 강화될 수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복음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능력, 즉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로운 구속에 대한 믿음이 수세자에게 결여된 상태에서 물에 담근다고 해서 그의 죄가 씻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보았다. 침례는 결코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Huldreich Zwingli

 

 

    쯔빙글리는 1527년에 루터를 향해 쓴 우호적인 해명”(Amica Exegesis)에서 떡과 포도주라는 만찬의 물질적 요소들에 그리스도께서 물질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만찬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영혼 속에영적으로 임하신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쯔빙글리에게 주의 만찬은 내적인 것을 지시하는 외적 상징”(externums signum)이었다. 쯔빙글리는 믿음이 하나님을 임재하시게 하고, 믿음이 그리스도의 몸을 임재하시게 한다”(Fides facit praesentem deum; fides facit praesens corpus Christi)고 썼다. 그 다음 쯔빙글리는 다음과 같이 믿음에 의해 그리스도의 물질적 몸이 아닌 영적 몸이 신자의 영혼에 임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어떻게 영이나 마음에 임재하는가? . . . 만약 그리스도의 몸의 임재가 영적이라면, 예를 들면,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의 마음에 임하신다면, 우리 사이에는 더이상 그 어떤 불일치도 없을 것이다.

At quomodo, in spiritu aut mente? An etiam se ipso sive natura? Si spiritualis est ista corporis praesentia, puta, quod in mente fidimus Christo pro nobis mortuo, iam nihil dissidii inter nos manebit.

 

    재침례주의자인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은 모든 죄를 씻는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신앙에 의해 내적 침례를 받고 옛 사람이 죽고 새롭게 변하면 죄사함을 받으며, 그 신앙의 의미를 따라 살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즉 그는 물침례가 죄사함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적침례가 모든 죄사함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그에게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신앙을 통한 내적침례는 실제적인 모든 죄의 제거이며, 물침례는 죄사함을 얻게 하는 구원의 수단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침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즉 침례는 신앙에 의하여 그 의미를 찾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모든 죄가 씻음 받음을 의미한다. 침례의 의미는 옛 사람의 죽음이며 죄로부터 돌아서서 육과 영이 새롭게 변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람이 이러한 내적 침례를 통해 그 신앙의 의미를 따라 살게 되면, 그는 분명히 구원을 받는다.

 

Conrad Grebel

 

 

    재침례주의자인 휴브마이어(Balthasar Hübmaier)는 물침례를 내적 신앙의 결단의 외적인 증거로 본다. 그는 인간이 신앙을 가지고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죄의 용서(remissio peccatorum)를 청한다고 말한다. 그러면 그 인간은 모든 죄를 사함 받는다. 휴브마이어는 그렇게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 그렇게 은총을 받은 신앙으로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겠다는 내적 결단을 외적으로 표현하는 증거가 바로 물침례라고 말한다. 그에게도 물침례는 죄사함을 받는 수단이 아니며, 실제적인 죄사함은 그리스도의 공로에 대한 신앙으로 인한 내적 침례로 발생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인간은 자신의 죄를 깨닫는데 이른다. 그리고 자신의 죄를 고백한다.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그리스도로 인하여 죄의 용서를 요청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러한 행동을 신앙 안에서 어떤 의심도 하지 않고 한다. 이제 하나님 안에서 인간의 양심은 신앙과 신뢰 가운데 깨끗하게 되고, 그의 모든 죄는 사함을 받는다. 그리고나서, 인간이 이러한 은총과 하나님의 행하심을 알게 되면, 하나님께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법칙에 따라 새로운 인생을 살 것을 내적으로 마음에 결단하는 것이다. 이로써 인간은 다른 그리스도인에게 자신의 마음과 심정과 신앙과 결단을 증거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을 형제단과 교회 앞에 내어놓은 것이다 . . . 공적으로 자신의 내적인 신앙을 증거하였으므로 물로 침례 받게 되는 것이다.

 

Balthasar Hübmaier

 

 

    재침례주의를 자신들의 영적 기원으로 삼기도 하는 침례교도들(Baptists)성례”(사크라멘트)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침례와 주의 만찬에 대한 가톨릭 신학과 실천에 너무도 많은 것들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의식”(ordinance, 儀式)은 전례들이 그리스도 자신에 의해 제정되었거나, 실시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 침례교도들의 의식론(the theology of ordinances)의 많은 부분이 하나님께서 성례들을 통해 자신의 백성들을 구원하신다는 가톨릭과 정교회에 대한 반작용에 의해 형성되었다.

    1925년에 작성된 미국 침례교 신앙과 메시지”(Baptist Faith and Message)는 복음적 교회는 그리스도의 의식들”(the ordinances of Christ)을 지킨다고 썼다.

 

XII. The Gospel Church

A church of Christ is a congregation of baptized believers, associated by covenant in the faith and fellowship of the gospel; observing the ordinances of Christ, governed by his laws, and exercising the gifts, rights, and privileges invested in them by his word, and seeking to extend the gospel to the ends of the earth. Its Scriptural officers are bishops, or elders, and deacons. Matt. 16:18; Matt. 18:15-18; Rom. 1:7; 1 Cor. 1:2; Acts 2:41-42; 5:13-14; 2 Cor. 9:13; Phil. 1:1; 1 Tim. 4:14; Acts 14:23; Acts 6:3,5-6; Heb. 13:17; 1 Cor. 9:6,14.

 

    미국 남침례교는 또한 침례와 주의 만찬을 구세주에 대한 믿음의 상징, 그리스도의 사랑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XIII. Baptism and the Lord’s Supper

Christian baptism is the immersion of a believer in water in the name of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The act is a symbol of our faith in a crucified, buried and risen Saviour. It is prerequisite to the privileges of a church relation and to the Lord's Supper, in which the members of the church, by the use of bread and wine, commemorate the dying love of Christ. Matt. 28:19-20; 1 Cor. 4:1; Rom. 6:3-5; Col. 2:12; Mark 1:4; Matt. 3:16; John 3:23; 1 Cor. 11:23-26; 1 Cor. 10:16-17,21; Matt. 26:26-27; Acts 8:38-39; Mark 1:9-11

 

    침례교는 하나님께서 성례들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가톨릭의 주장에 반대한다. 미국 복음적 자유 교회(the Evangelical Free Church of America)의 신앙 진술문은 그 예를 보여준다.

 

주 예수께서는 두 가지 의식들, 침례(baptism)와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을 명령하셨다. 그 의식들(ordinances)은 가시적이고 실체적으로 복음을 표현한다. 그 의식들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지만, 참된 믿음 안에서 교회에 의해 거행될 때, 이 의식들은 그 신자를 승인하고 육성한다(nourish).

 

의식들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를 설명하면서도, 그들은 그 의식들이 무엇이 아닌지를,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편리성과 단순화를 위해 개혁주의 관점에 관련하여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침례주의 관점에 관련하여 상징적”(symbolic)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양자 사이의 차이를 드러내는 데 유용할 것이다. 또한 개혁주의 관점을 영적으로 효능있는”(spiritually efficacious)이라고 말하고, 침례주의 관점을 전적으로 상징적인”(solely symbolic)이라고 말하면, 그 차이는 더 분명해질 것이다.

    침례교도들에게 침례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통해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고, 믿는 자의 고백이다. 이것은 상징(sign)이지, 표식(seal)이 아니다. 한국 침례신학자 김승진은 침례교인의 신앙과 메시지”(2000)를 중심으로 침례교와 다른 교파들과의 공통점과 상이점을 논했다. 그에 따르면, 그 상이점들 중에 교회의 두 의식에 대한 성례전주의적인 해석의 배격이 존재한다. 침례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위임하신 주의 만찬”(Lord’s Supper)침례”(Immersion)는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상징하거나”(symbolize) “기념하는”(memorialize) 의식이라고 믿는다. 김승진은 프로테스탄트 개혁가들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리를 비판했지만 두 예전을 이해하고 해석함에 있어서 그 개혁이 미진하다고 평가했다.

 

김승진

 

 

김승진은 개혁주의의 영적 임재설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리스도의 영이나 성령은 인격체이신데, 무생물이자 비인격체인 떡과 포도주에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임재하시는가? 그리고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무생물이자 비인격체인 떡과 포도주에 육체적이든 영적이든 임재하여 거룩하게 되고 그것들이 영적인 양식이 된다고 믿는 것은, 화체설이 그러하듯 일종의 신앙적인 미신이다라고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성령께서는 떡과 포도주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은 신자들의 영혼에 임하셔서(예수님을 진정으로 믿는 순간부터 이미 임해 계신다), 그 떡과 그 포도주를 나를 위해 십자가 상에서 찢기신 예수님의 살과 십자가 상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로 간주”(regard)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의 만찬에 참예하면서 2,000년 전에 십자가 상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영적으로 만나는 것이다.

 

 

IV. 의식(Ordinance):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의 관점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침례와 주의 만찬은 성례들”(聖禮, sacraments: means of saving grace)이 아닌 교회의 의식들”(儀式, rites or ordinances)이다. 이런 인식은 오순절 밖에 있는 신학자나 안에 있는 신학자에 의해 포착되었다. 가톨릭 신학자 사이몬 턱웰(Simon Tugwell)은 대부분의 정통 오순절주의자들은 침례와 주의 만찬을 성례전적의미를 갖는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순절 신학자 프랑크 마키아에 따르면,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례”(sacrament)라는 말에 편안함을 느끼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용어가 성령의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또는 형식적인”(formalistic) 예전 전통들과 관련되기 때문이다. 개신교(특히 쯔빙글리)의 성례주의에 대한 비판의 영향으로, 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례라는 용어의 사용은 원인론적이고 역학적이고 본질적인 것에 의해 그 요소들에 수반되는 것으로서 성례전적 효력에 대한 이해를 포함할 것이라는 것과 그것이 성령의 자유 또는 하나님의 은혜를 제도화하거나 형식화할 것을 염려한다.

    영국 엘림의 관점에서 글을 쓰고 있는 비크넬(Bicknell)은 성례(sacrament)라는 용어의 사용은 성례들이 은혜의 수단이라는 생각을 피하기 위해 오순절 진영 안에서 보통 회피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듀코에 의하면, 오늘날 정통 오순절 교회들(classical Pentecostal churches)과 교단들 안에서, 주의 만찬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라는 과거에 대한 기념, 상징이다. 이 견해는 역사적으로 주의 만찬에 대한 기념설 또는 스위스 개혁자 쯔빙글리(Ulrich Zwingli)의 이해에 그 기원을 둔다. 그래서 그 만찬의 요소들을 과거에 발생했던 것을 기념하는 데 도움을 주는 상징들로 취급한다. 또한 톰벌린에 따르면, 오순절주의자 대부분은 물 침례를 그리스도인의 최초 의식으로 받아들이지, 성례적 작인(sacramental causality)이라는 것을 거부한다.

    이렇듯 여러 신학자들이 언급한 것처럼 오늘날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례라는 용어와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를 거부하고 의식이라는 용어와 그것이 내포하는 의미를 취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오순절주의자들의 성향은 오늘날 형성된 것이 아니고 오순절운동의 조상들로부터 전수된 것이다.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런 유산이 초기 오순절운동의 지도자들로부터 온 것임을 구체적으로 간파하지 못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그런 성향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오순절운동의 아버지 찰스 F. 파함이 전해준 유산이었다. 파함은 기독교회가 이 의식(ordinance)을 거룩하게 지키는 한, 그들은 의심 많은 세상에게 하나님의 아들께서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그것을 제정하셨으며, 그 준수를 명령하셨다는 것을 증거 할 것이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이 오실 때까지 우리의 충성을 그리스도께 보여드리는 것이다라고 썼다. 파함이 의식이라고 명명한 것은 주의 만찬이었다.

 

기독교회가 이 의식(ordinance)을 거룩하게 지키는 한, 그들은 의심 많은 세상에게 하나님의 아들께서 어떤 시간과 장소에서 그것을 제정하셨으며, 그 준수를 명령하셨다는 것을 증거 할 것입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이 오실 때까지 우리의 충성을 그리스도께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찰스 F. 파함

 

 

    그는 그 이전 문단에서 유월절이신 예수께서 그 율법을 성취하시고 그 유대 의식에 참여하셨을 때, 그분은 그것을 제쳐 놓으시고 빵과 포도주의 기념의식을 제정하셨다며 주의 만찬을 언급했다. 그러면서 파함은 주의 만찬의 요소인 포도주는 구원을 위한 그분의 피를 상징하며(presenting), 다른 요소인 떡은 치유를 위한 그분의 몸을 상징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파함은 받아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는 예수 말씀을 인용하면서, 주의 만찬이 구원하는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인 성례가 아닌 구원하는 은혜를 기념하는 의식인 이유를 제시했다.

 

그리스도의 완전한 몸(the perfect body)은 우리의 불완전한 몸들(imperfect bodies)을 위해 찢기어 우리에게 온전한 건강(perfect health)을 가져다주었습니다. 이 주제에 대한 최초의 성경 말씀들 중의 하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멸하는 자로부터 구원을 얻기 위해 유월절 어린 양을 죽여 그 피를 좌우 문설주에 바르고, 이집트로부터 나갈 힘을 얻기 위해 그 고기를 먹으라는 명령을 받은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유월절이신 예수께서 그 율법을 성취하시고 그 유대 의식에 참여하셨을 때, 그분은 그것을 제쳐 놓으시고 빵과 포도주의 기념의식을 제정하셨습니다. 포도주는 구원을 위한 그분의 피를 상징하며(presenting), 떡은 치유를 위한 그분의 몸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감사기도를 드리신 후, 그것을 떼어(brake) “받아먹으라, 이것은 너희를 위해 떼는 내 몸이라(which is broken for you)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24]고 말씀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떡과 이 잔을 먹고 마실 때마다, 여러분은 그분이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입니다(고전 11:25, 26).

 

    파함은 인간은 도덕성이나 타고난 선량함으로써, 그 어떤 신조, 교리 또는 교회를 신봉함으로써, 그 어떤 날의 준수로써, 또는 그 어떤 의식들(ordinances)을 행함으로써, 그 어떤 침례 형식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생과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피의 능력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말했다. 파함에게 주의 만찬과 침례는 구원하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성례가 될 수 없었고, 구원하는 은혜를 고백하고 기념하는 의식이었다.

 

우리는 도덕성이나 타고난 선량함으로써, 그 어떤 신조, 교리 또는 교회를 신봉함으로써, 그 어떤 날의 준수로써, 또는 그 어떤 의식들을 행함으로써, 그 어떤 침례 형식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다만 신생과 그리스도의 속죄하는 피의 능력으로써 구원을 받습니다.

 

    파함은 성례라는 용어를 알고 있었으면서도, 의도적으로 의식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파함은 유대인이 지켜오던 유월절 만찬을 유대교 성례”(Jewish sacrament)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파함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그 유대교 성례를 옆으로 밀어 놓고, 구원을 위한 그분의 피와 치유를 위한 그분의 살을 상징하는 빵과 포도즙을 통한 기념을 개시하셨다. 파함은 유대교의 성례로서 유월절 만찬과 기독교의 의식으로서 주의 만찬을 대비시킨 것이다.

 

우리의 유월절이신 예수께서 그 율법을 성취하시고 그 유대교 성례(Jewish sacrament)에 참여하셨을 때, 그분은 그것을 제쳐 놓으시고 빵과 포도주의 기념식(the memorial of bread and wine)을 제정하셨습니다. 포도주는 구원을 위한 그분의 피를 상징하며(presenting), 떡은 치유를 위한 그분의 몸을 상징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오순절주의자들이 성례라는 용어와 그에 담긴 의미를 거부하고, “의식이라는 용어와 그에 담긴 의미를 취하는 성향은 두 번째로, 오순절운동을 국제적 운동으로 확장시킨 윌리엄 J. 시무어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기도 했다. 19079월에 발간된 사도신앙지에는 우리 주님에 의해 가르쳐진 의식들”(The Ordinances Taught By Our Lord)이란 제목의 글이 실렸다. 이 글의 편집자 시무어는 침례는 구원하는 의식이 아니다”(Baptism is not a saving ordinance)라고 주장했다. , 시무어는 침례라는 교회 의식이 성례와 같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고 말했다. 또한 시무어는 자신의 유일한 저서에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교회에 세 가지 의식들”(three ordinances)을 제정하셨다고 썼다.

 

 

William J. Seymour

 

    시무어는 심지어 구원하는 성례”(saving sacrament)라고 쓰지 않고 구원하는 의식”(saving ordinance)이라고 썼다. “구원하는 성례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써왔던 용어일 것이었다. 하지만 시무어는 성례라는 말조차 사용하기를 거부했다. 그가 편집하고 썼던 사도신앙지의 글들 그 어디에서도 “sacrament”라는 단어가 등장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구원하는 의식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시무어는 그 근거로 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침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라는 사도 베드로의 침례에 대한 규정을 제시했다(벧전 3:21).

    오순절주의자들이 성례대신 의식을 선호하는 것은 또한 오순절운동 성화론의 방향을 전환시킨 윌리엄 H. 더함의 유산이기도 했다. 더함은 교회의 두 의식”(Two Ordinances of the Church)에 대해 글을 썼다. 더함은 선교회에서 매 주일 오후 645분에 주의 만찬 의식(the ordinance of the Lord’s supper)을 거행했다. 그리고 잠기는 침례를 주었다(baptize by immersion). 그리고 더함은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과 침례(baptism)의식”(ordinance)이라고 일컫고, 그 두 의식(two ordinances)만을 의식으로 인정했다.

 

우리의 사역 안에서 우리는 주의 만찬 의식을 매주 오후 645분에 지키며, 그것을 지킬 때 많은 복이 우리에게 임하고 있다. 우리는 오직 잠기는 침례(baptize by immersion)를 주며, 나는 삼 년 동안 우리 사역 안에서 천여 명이 잠김으로 침례를 받아왔다고 겸손하게 믿는다. 우리는 복음에서 오직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과 침례(baptism)라는 두 의식들(two ordinances)만을 인정한다.

 

 

William H. Durham

 

 

 

    더함에게 그 두 의식은 구원하는 은혜를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고, 구원하는 은혜를 상징한다”(symbolize grace). 더함에게 침례 의식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며,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그분이 우리 안에 들어오시는 것을 상징한다(One ordinance symbolizes our getting into Christ, the other our partaking of Christ, or of His coming into us). 더함은 복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 신자 안에 있는 그리스도로 요약된다고 보았으며, 그 요약을 침례와 주의 만찬이 상징한다고 보았다. 더함은 sacrament라는 단어 자체를 사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편집하고 글을 썼던 Pentecostal Testimony 그 어디에도 sacrament가 등장하지 않았다.

 

복음의 의식들은 은혜를 상징한다(symbolize grace). 우리는 침례에 의해 주님의 죽음 안으로 장사된다. 우리는 주님의 몸과 피를 나눈다(commune of). 한 의식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상징하며, 다른 의식은 우리의 그리스도에게 참여함 또는 그분의 우리 안에 오심을 상징한다. 복음은 이 몇 마디로 간략하게 요약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들, 그리고 신자들 안에 있는 그리스도(the believer in Christ, and Christ in the believer).

 

    살펴본 바와 같이 침례와 주의 만찬을 성례”(sacrament)라고 일컫지 않고, “의식”(ordiance)이라고 일컫는 오순절주의자들의 성향은 그 신앙적 조상들인 파함, 시무어, 그리고 더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그 유산은 1914년에 미국에서 결성된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1916년에 승인한 근본신앙진술문(A Statement of Fundamental Truths)에서 드러난다. 그 진술문의 10항은 주의 만찬”(The Lord’s supper)에 대한 것이다. 그 조항에 따르면,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신자들이 공유하는 것을 표현하는 상징(the symbol),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으심에 대한 기념(a memorial)이다.

 

10. THE LORD’S SUPPER.

The lord’s supper, consisting of the elements, bread and the fruit of the vine, is the symbol expressing our sharing the divine nature of our Lord Jesus Christ, 2 Pet. 1:4; a memorial of his suffering and death, 1 Cor. 11:26; and a prophecy of his second coming, 1 Cor. 11:26; and is enjoined on all believers until he comes.”

 

    11항은 침례”(Batism)에 대한 것이다. 그런데 11항은 침례를 의식이라는 말과 연결되었다. 그 조항에서 침례는 성례가 아닌 침례 의식”(the ordinance of Baptism)이라는 어구로 의식과 연결되었다. 그 조항은 침례 의식은 이미 진심으로 회개한, 그리고 그리스도를 구원자와 주님으로 믿은 사람 모두에 의해 준수되어야만 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그 조항에 따르면, 침례는 마음이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받음으로써 이미 발생한 내적 씻음(inner cleansing)을 상징하는 물로 몸을 씻는 외적 씻음(an outward symbol of cleansing)이다. 그 조항은 이미”(already)라는 말로 영적 침례와 육적 침례를 구분하고, 그 구분을 통해 믿음으로 받는 내적인 실제 침례와 믿음을 고백하는 외적인 상징적 침례를 구별했다. , 구원은 내적이고 실제적 침례로 말미암아 발생하며, 그 이후 외적이고 상징적 침례를 통해 그 구원을 고백하고 확증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11항은 성례라는 용어와 그 의미를 버리고 의식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를 취했다.

 

11. BAPTISM IN WATER.

The ordinance of Baptism by a burial with Christ should be observed as commanded in the scriptures, by all who have really repented and in their hearts have truly believed on Christ as savior and lord. In so doing, they have the body washed in pure water as an outward symbol of cleansing while their heart has already been sprinkled with the blood of Christ as an inner cleansing. Thus been raised with him to walk in newness of life. Math. 28:19; Acts 10;47-48; Rom. 6:4; Acts 20:21; Heb. 10:22.

 

    1961년 미국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근본신앙진술문을 약간 개정했다. 이 개정은 침례와 주의 만찬이 성례가 아닌 의식임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냈다. 1961년 진술문은 1914년 진술문이 침례와 주의 만찬을 10항과 11, 두 항으로 나누었던 것을 6항 하나로 통합했다. 그리고 6항의 표제어를 교회의 의식들”(The Ordinances of the Church)라고 붙였다. 1914년 진술문에서는 의식이라는 용어가 침례에만 붙여졌었는데, 1961년 진술문은 그것을 수정하여 의식을 침례와 주의 만찬 모두에 붙인 것이다. 1961년에 개정된 6항은 현재까지 동일하게 남아 있다.

    침례와 주의 만찬을 성례가 아닌 의식이라고 명명했던 초기 오순절운동 지도자들의 유산은 오순절적 교단에로 전해졌고, 1990년 초까지 오순절 신학자들도 이런 유산 안에 있었다. 미국 오순절 신학자 윌리엄 멘지스(William W. Menzies)1993년에 성경적 기독교는 전례적이거나 성례적이 아니다(Biblical Christianity is not ritualistic or sacramental). 이 두 의식들[침례와 주의 만찬]은 기념 행사들로(as occasions of memorial) 이해되어야 한다라고 썼다.

 

William W. Menzies

 

 

스텐리 M. 호르톤(Stanley M. Horton)은 물침례는 새생활,” “그리스도와의 연합그리고 신자가 그리스도의 지고의 주되심과 권위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을 상징하는 의식(an ordinance)이라고 주장했다. 호르톤에 따르면, 물침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초래하지 않고, 다만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필수 전제조건으로 삼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상징한다. ,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선행하고, 후에 상징적 의식으로서 물침례가 뒤따른다는 것이다.

 

Stanley M. Horton

 

 

 

다니엘 톰벌린(Daniel Tomberlin)은 이런 오순절 신학자들의 유산에 대한 충실함에 대해 오순절주의자들은 유산으로 받은 전통에 충실하여 성례적 언어를 거부한다”(Pentecostals have remained committed to their inherited evangelical traditions and resist sacramental language)고 썼다.

 

 

V. 성령론적 성례적 의식(Pneumatological Sacramental Ordinance):

    소위 오순절신학자들의 수정적 견해

 

    그런데 1990년 초부터 소위 오순절 신학자들은 오순절주의가 성례적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타진하기 시작했다. 존 토마스, 프랑크 마키아, 사이몬 찬, 벨리 마티 케케이넌, 케네스 아처, 제임스 스미스, 다니엘 톰벌린, 아모스 영, 볼프강 반디와 크리스 그린, 조셉 듀코, 그리고 필립 웹 등이 그 가능성을 탐사해 왔다. 필립 웹은 이 탐사들의 어떤 것들은 성례주의를 제안함에 있어서 주저했고, 다른 사람들은 강한 성례적 견해를 발전시켰다고 평가했다.

    C. 토마스(John Christopher Thomas)1991년에 세족식을 침례와 만찬과 구분되는 또 다른 성례(sacrament)라고 주장했다. 토마스는 시무어가 세족식을 제 삼의 교회 의식으로 삼은 전통을 따른다. 토마스는 오순절신학자들 가운데서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이 사용하기를 거부하고 반대했던 성례(sacrament)라는 용어를 최초로 오순절신학 안에 끌어들인 것이다.

 

John Christopher Thomas

 

    프랑크 D. 마키아(Frank D. Macchia)1993년에 성례가 하나님의 역사를 지시하는 상징이라는 측면을 부각시키는 가톨릭 신학자 칼 라너의 성례전 신학에 동의하며 방언이 성례의 그런 측면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마키아는 나아가 방언을 하나의 성례전적 표징”(a sacramental sign)이라고 규정하고, 방언이 기존의 경직되고 질서정연한 성례에 비해 자유롭고 즉흥적인 하나님의 임재와 역사를 보다 더 직접적으로 경험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더 성례적이라고 주장했다. 마키아는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을 그 안에 참여하고 있을 때 그리스도인의 삶 가운데서 성령의 능력부여를 지시하는 일종의 원초적 성례(a kind of primary sacrament) 또는 카이로스 사건으로 간주한다고 썼다. 마키아는 어떤 오순절주의자들이 교회의 의식에 참여함으로써 전달되는 실제 은혜”(real grace)를 거부하는 것을 유감스럽다”(unfortunately)고 평가했다. 마키아에 따르면, 그런 거부는 이 신비들을 성령의 임재와 권능이 결여된 인식적 회상에 불과한 단순한 기념 의례들(mere memorial tites)로 축소시키는 것이다.

 

Frank D. Macchia

 

    마키아는 1997년에 예배하는 공동체가 이 경축하는 행위들 안에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의 임재를 경험하기를 기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마키아는 의식들”(ordinances)이라는 개념은 수정되어야만 한다고 역설했다. 왜냐하면, 오순절 예배 공동체들 안에서 이 전례들(rites)은 믿음이 있는 참석자들에게 성례적 경험들(sacramental experiences)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 침례와 만찬은 구원하시고 성화시키는 하나님의 임재를 큰 권능으로 경험시키는 정황을 제공해야 한다는 것이다.

    볼프강 반디(Wolfgang Vondey)2001년에 오순절주의의 전례에 관한 글에서 그 연구의 목적을 1) 에큐메니칼 대화, 2) 한 오순절 성례 신학(a Pentecostal sacramental theology), 3) 그리스도인과 인간의 존재에 대한 오순절 이론 등을 위한 기초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반디는 오순절주의가 상징의 전환”(symbolic turn)을 통해 기존의 흐름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새로운 흐름을 형성했다고 분석했다.

 

Wolfgang Vondey

 

 

    2002년에 벨레-마티 케케이넌(Veli-Matti Kärkkäinen)은 침례교 관점을 가진 로저 올슨을 따라 오순절주의자들이 성사의 은총은 그리스도의 행위인 성사적 예절에 내재하는 힘에 의하여 주어진다는 사효론(Ex Opere Operato)에 유사한 것은 무엇이든 거부하는 것에 주목했다. 케케이넌은 오순절 관점이 쯔빙글리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는 또한 성례적 이해(a sacramental understanding)에 가까운 만찬 의식 안에서의 성령의 역사에 대한 강조도 있다는 것에 주목했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설명하지는 않았다. 케케이넌은 성령의 역사와 주의 만찬의 치유 개념을 강조했다. 케케이넌은 오순절주의자들은 성찬을 치료약으로 묘사했던 고대 기독교 전동을 따라 주의 만찬의 치유성을 지적했다. 케케이넌은 오순절 신학자 아모스 영이 주의 만찬이 성령의 성례”(sacrament of the Spirit)가 되는 오순절 제의를 포함하는 성령론적 교회론(a pneumatological ecclesiology)를 건설하기 시작할 시간이라고 제안했다는 것을 주목했다.

 

Veli-Matti Kärkkäinen

 

 

    2003년에 박문옥은 한국의 오순절교단들 가운데 대표적 교단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회의 기획물로 출판된 오순절교의학교회의 성례라는 제목의 장을 마련했다. 그 책의 책임집필자였던 박문옥은 그 책 제7장 교회의 성례의 서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재정하신 교회의 성례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전달하는 방법이라고 썼다. 또한 그는 개신교 교회에서는 성례가 이미 구원 얻은 사람에게 은혜를 계속 받게 하는 방법으로 생각한다라고 썼다. 박문옥은 초기 오순절주의의 전통을 고려하지 않고, 아무런 비판이나 여과도 없이 칼뱅의 개혁주의 성례론을 오순절교회 의식론에 도입했던 것이다.

 

박문옥

 

 

    2004년에 케네스 J. 아처(Kenneth J. Archer)는 성례적 의식들(sacramental ordinances)은 그리스도에 의해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으로 제정된 교회의 행위들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성례적 의식들은 오순절적 정체성(이야기)과 믿음의 여정(via salutis)을 위해 상징적 중요성을 갖는다. 아처에게 성례들은 사람들을 예수의 구원하시는 행위에 보다 밀접하게 접촉시킴으로써 변혁시키는 은혜를 불러일으키는 상징적 표징들이다. 성례적 의식들은 성령에게 공동체로 하여금 구원의 길 위에 있게 하는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그리스도인들의 구원적 여정(salvific journey)을 돕는다는 것이다. 아처에 따르면, 침례와 만찬은 구원 경험들(redemptive experiences)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예수의 이야기의 참여적 재연을 통해, 그리스도의 영을 만남을 통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화하는 지속적인 영적 형성을 위한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Kenneth J. Arche

 

    다니엘 톰벌린(Daniel Tomberlin)2006년에 의식(ordinance)이라는 용어에서 성례(sacrament)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 이유를 성례가 그곳에서 성령을 만나는 은혜의 수단”(means of grace)이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톰벌린은 오순절 예배의 중심과 초점은 설교단이 아닌 그 위에서 주의 만찬이 행해지는 제단(the altar)이라고 주장했다. 톰벌린은 성자와 성령이라는 성부로부터 주어지는 일차적 구원적 은사들”(primary salvific gifts)와 비교할 때 교회와 성례들은 이차적 구원적 은사들”(secondary salvific gifts)이라고 보았다. 동시에 그는 교회의 성례적 삶에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행 은총 때문에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인 것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했다.

 

Daniel Tomberlin

 

    2010년에 반디는 그린과 함께 오순절주의의 성례성(sacramentality)에 관해 논했다. 반디와 그린은 오순절적인 초현실적세계관(surrealistic worldview)이 종종 성례적 세계관과 충돌을 일으키는 것으로 보이지만, 성례성과 실제(reality)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세상 안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이해하는 것을 도울 수 있는 용어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성례성은 오순절주의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위해 선택적인 것이 아니라 필수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크리스 E. W. 그린(Chris E. W. Green)2012년에 침례와 주의 만찬뿐만 아니라 세족식과 안수, 그리고 도유식을 모두 성례들(sacraments)라고 칭했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영향력 있는 임재를 야기시키거나 중재하기”(to occasion or mediate God’s effective presence) 때문이라고 썼다. 그런데 그린은 이런 신학적 모델이 성경적이고, 오순절이며, 그리고 가톨릭적이라고 주장했다.

 

Chris E. W. Green

 

    2017년에 조셉 L. 듀코(Joseph Lee Dutko)는 의식 또는 기념적 견해(ordinance/memorialist position)는 특히 글로솔라리아의 실행이라는 오순절 신앙과 실천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듀크토는 주의 만찬에 대한 보다 성례적 이해(sacramental understanding)가 특히 성령론, 종말론, 그리고 교회론과 같은 분야에서 다른 오순절적 핵심 신앙들의 강화와 부흥을 위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주의 만찬에 대한 성례적 이해(sacramental understanding)가 오순절 신학과 영성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Joseph Lee Dutko

 

 

    그리고 듀코는 성령론적 성례(pneumatological sacrament)를 제안했다. 듀코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쯔빙글리의 비 성례적 기념설 채택하게 된 이유를 꼭 집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이 구원적 은혜(salvific grace)를 일으킨다는 사효론(ex opere operato)과 의식적(ritualistic)이라고 여겨지는, 특히 가톨릭주의의 것은 어떤 것이든 의심했던 것에서 유래된 것일 것이라고 보았다. 듀코는 성령 임재가 오순절주의자들이 만찬의 효력에 대한 두 극단 사이를 헤쳐나가기 위한 건강한 틀을 제공할 수 있다고 보았다. 듀코는 케케이넌을 인용하면서 교회에 남긴 칼뱅의 주요 공헌들 가운데 하나를 그의 성례들의 성령론적 틀(pneumatological framing of the sacraments)이라고 보았다. 칼뱅은 성례들은 성령의 활동력 없이는 효력이 없다”(do not avail one iota without the energy of the Holy Spirit)라고 말했다.

 

성례들은 내적 교사이신 성령이 성도들에게 오실 때에만 그 직무를 다한다. 오직 성령의 능력에 의해서만 마음들은 관통되고 감동이 우리의 영혼으로 하여금 성례들 안으로 들어가도록 열리게 한다. 만약 성령이 없다면, 성례들은 태양의 광휘가 먼눈을 비추고 목소리가 먼귀에 들리는 것보다 우리의 마음에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필립 웹(Phillip Webb)2018년에 오순절적 성례주의”(pentecostal sacrementalism)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웹은 성례성(sacramentality)이란 내적이고 영적인 것을 외적이고 가시적인 것을 통해 전달하는 것이며, 성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제임스 화이트의 정의와 주장을 수용했다. 웹은 그런 화이트의 설명을 근거로 성례주의를 물질적 사물들을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해 중보되는 하나님과의 대면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웹은 성례들을 그것을 통해 성령과의 대면이 경험되는 특수한 사물들을 일컫는다고 썼다. 웹은 오순절 신학자들 가운데서 어떻게 오순절주의가 성례적인지에 대한 합의가 존재하지 않지만, 그들은 공통적으로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를 경험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VI. 수정주의 오순절 신학자들의 오순절 교회 성례론 평가

 

    살펴본 것처럼, 소위 오순절 신학자들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의식들을 통해 성령에 대한 경험을 하기 때문에 의식들을 단순한 기념식들이 아닌 성례들이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의 글에서는 그런 주장의 근거를 찾을 수 없다.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리스도 중심적인 순복음(Full Gospel)을 주장하면서 교회의 의례들을 의식”(ordinance)이라고 명명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한 죄의 용서를 베푸는 것을 은혜”(grace)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파함과 시무어에게 자범죄를 용서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은혜의 첫 번째 사역으로서 중생을 의미하며, 원죄를 용서받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은혜의 두 번째 사역으로서 온전한 성화를 의미했다. 그들에게 은혜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한 죄 용서와만 관련되었다.

    예를 들면, 파함에게 온전한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grace)에 의해 발생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화는 거룩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온전한 성화는 값없는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는 한데, 첫 번째 은혜의 사역이 아닌 두 번째 은혜의 사역에 의한 것이다.두 번째라는 언급은 첫 번째를 전제한다. 당시 성결운동 안에서 은혜의 첫 번째 사역은 중생을 의미했다. 파함은 성화의 주요한 주체는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했다. 그에게 성경에서 성화가 언급되는 곳은 정결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한다. 신자를 정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일이다.” 그래서 신자가 전적으로 구별된다면, 하나님께서 성화시키실 것이다.” 그래서 파함에게 성령침례는 은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교회의 전례들은 그것을 통해 죄를 용서하는 은혜의 수단이 될 수 없었으며, 오직 그리스도의 구원하는 은혜를 고백하고 기념하는 의식”(ordinance)이었다.

    교회의 전례들을 의식이 아닌 성례로 보는 견해의 근저에는 오순절주의의 핵심을 성령에 대한 경험에 두려는 수정주의가 있다. 교회의 전례들을 의식이 아닌 성례라고 명명하려는 주장들 거의 모두에는 오순절주의의 핵심을 성령침례에 증거로 방언이 동반된다는, 성경 연구를 통한 교리에 두지 않고, 성령에 대한 경험에 두려는 수정주의가 도사리고 있다. 수정주의는 오순절주의의 핵심을 성령 경험에 두고, 성령 경험을 신학의 전 주제들을 해석하는 틀로 삼아 가고 있다. 토마스는 세족식을 교회 의식으로 삼은 시무어를 중심으로 신학을 연구하고 있다. 그리고 토마스는 시무어를 그 시조로 삼는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소속 Pentecostal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반디는 시무어를 그 시조로 삼는 하나님의 교회(Church of God) 소속 Pentecostal Theological Seminary에서 M.Div를 획득했다. 그리고 시무어를 오순절운동의 기원으로 삼은 홀렌베거가 버밍햄대학에 설립한 Centre for Pentecostal and Charismatic Studies의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마키아는 오순절운동이 교리에서 시작되지 않고 경험에서 시작되었다고 생각한다. 마키아는 시무어의 아주사부흥으로부터 탄생한 방가드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아처는 하나님의 교회 소속 목사이며, 하나님의 교회 신학교(Church Of God Theological Seminary)의 조교수였으며, 오순절해석학을 경험에 대한 간증, 즉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하려 한다. 톰벌린은 하나님의 교회 소속 목사이며, 하나님의 교회 소속 Pentecostal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석사(M.Div)와 목회학박사(D.M) 학위를 받고 Pentecostal Theological Seminary에서 교수로 일하고 있다. 그린 역시 Pentecostal Theological Seminary의 조교수였다. 듀코는 버밍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침례와 주의 만찬을 성례들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공교롭게도 대부분 시무어와 관련된다. 무어를 오순절운동의 기원으로 삼는 사람들은 오순절운동의 정체성을 성령에 대한 경험에 두고 있다.

    그런 경험 중심적 수정주의 신학은 오순절 신학이 아닌 은사주의 신학을 강화시켜 줄 뿐이다. 교회의 전례를 의식이 아닌 성례로 만드려는 시도는 온건하게는 오순절신학의 칼뱅주의화, 급진적으로는 오순절신학의 가톨릭화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개혁주의적 은사주의화 또는 가톨릭적 은사주의화라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시도는 가톨릭이 세례와 성찬이라는 성례를 죄를 사하는 은혜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간과한다. 그런 시도는 성례라는 용어를 불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수단이라고 넓게 재해석하여 사용한다. 같은 성례”(sacrament)라는 용어에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를 사하는 은혜의 수단으로서 성례와 불가시적인 것을 가시적인 것으로 만드는 성례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만들고, 두 가지를 혼돈하게 만들어 성례에 대한 거부감을 없애려 한다. 그러나 열심히 구분하려 하지만, 그 두 의미는 혼합되고 있다. “성례적 의식”(sacramental ordinance), “성령론적 성례”(pneumatological sacrament)라는 용어들은 오순절신학을 혼합주의”(syncretism)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침례와 주의 만찬을 통한 성령 경험을 부각시키려고 굳이 수정주의자들처럼 물질적 요소들에 성령이 임한다거나 그리스도가 임한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쯔빙글리가 주장한 것처럼, 성령은 물질적 요소들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참여자의 영혼에 임하는 것이고, 참여자의 영혼이 그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이 침례와 주의 만찬을 고백과 상징으로 이해한 것의 바탕에는 참여자의 영혼에 임재라는 쯔빙글리의 견해가 전제로 깔려있었다. 현대 오순절신학자들은 그 전제를 망각하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순절주의는 성령에 대한 경험을 부각시키기 위해 물질적 요소들에 임재를 경험한다는 의미에서 성례”(sacrament)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루터주의나 개혁주의에 기댈 필요가 전혀 없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의식”(ordinance)이라는 용어 안에 침례와 주의 만찬 때에 참여자의 영혼에 임재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담아내면서 오순절교회 만의 독특한 교회의식론을 발전시켜야 한다.

 

 

VII. 나가는 말

 

    가톨릭교회는 세례와 성찬을 죄를 사하는 구원의 수단을 의미하는 성사/성례”(sacrament, 聖事/聖禮)로 만들었다. 개혁교회는 가톨릭교회를 개혁한다고 했지만, 세례와 성찬을 은혜의 수단을 의미하는 모호한 성례”(sacrament, 聖禮)로 만들었다. 침례교회는 가톨릭과 개혁교회와는 달리 침례와 주의 만찬에서 죄를 사하는 구원의 수단이라는 의미를 제거하고, 그것들을 기념하는 의식들”(ordinances, 儀式)이라고 칭해왔다.

    파함, 시무어, 더함 등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가톨릭이나 루터주의, 그리고 개혁주의가 사용해온 성례”(Sacrament)라는 용어를 쓰지 않고, 쯔빙글리의 그리스도의 참여자들의 영혼에 임재를 전제로 삼고 의식(ordinanc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으나, 1990년대 이후 소위 오순절신학자들은 그 전제를 망각하고 요약하여 성령론적 성례적 의식(Pneumatological sacramantal ordinance)이라는 개념을 만들며 오순절교회 의식론의 가톨릭화 또는 개혁주의화, 은사주의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는 바람직하지 않은 수정주의적 방향이며, 오순절교회 의식론은 의식이라는 수식어 없는 용어를 사용하고 그 안에 오순절 교회에 적합한 의식론을 담는 방향으로 다시 바로 잡히고 발전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