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pirit as a Person: A Pentecostal Heritage:
A Continuity among Charles F. Parham, William J. Seymour,
and David Yonggi Cho
이창승
2024.9.16./2024.10.20.
I. 들어가는 말
영산 신학자들은 영산의 신학을 정통 오순절 신학 안에 놓으려 하기를 꺼려하는 것 같다. 그들은 그보다는 영산의 신학을 가장 넓게는 기독교, 좁게는 개신교, 더 좁게는 신오순절 갱신주의 또는 은사주의 안에 놓으려 하는 것 같이 보인다. 예를 들면, 이기성은 “방언 현상을 성령세례의 최초의 (유일한) 외적 증거로 고집하지 않으며 실제적으로 성령세례라는 표현보다는 성령충만이라는 개념을 선호한다는 점 등에서 그는 고전적 오순절주의를 넘어서 신(新, Neo) 오순절주의 내지 은사주의의 입장을 상당 부분 수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런 성향 때문인지, 그동안 오순절 신학자들, 특히 영산 신학자들은 대부분 파함과 시무어 등 초기 또는 정통 오순절지도자들의 원전들을 파고 들어가거나 그 결과들을 영산의 신학과 연결시키지 않았다. 그럼으로써 영산 신학은 오순절 신학 안에 뿌리가 없는, 비오순절적 신학, 사상누각의 신학이 되어 왔다. 영산 신학은 오순절신학 전통, 특히 초기 오순절 신학 안에 그 뿌리를 두어야만 하며, 그래서 오순절 신학이 되어야 한다.
본 소고는 이 과업을 인격적 성령 이해 측면에서 부분적으로 시도해 볼 것이다. 이 측면에서 시도는 찰스 파함(Charles F. Parham)과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의 인격적 성령 이해를 조명함으로써 달성될 것이다. 그럼으로써 신약성경에서 드러나고 있는 인격적 성령 이해는 오순절 성령론 역사에서 도외시 되었다가 영산 조용기로부터 재발현되기 시작한, 독특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것이 아니라, 초기 오순절 지도자들에서 발견되며, 그들의 인격적 성령론은, 영산 자신과 영산 신학자들은 알아차리지 못한 채, 영산에게로 이어진 것이라는 것이 명확해 질 것이다.
II. 영산 조용기와 인격적 성령
영산 조용기는 1956년에서 1957년경에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었다. 그래서 그는 성령에 대해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1964년경에, 영산 자신에 의하면, 그는 성령을 보다 깊게 이해하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영산에게 말씀하셨다. “내 아들아, 그것이 너의 문제다. 성령은 체험해야 할 사물이 아니다. 성령은 장엄한 인격이시다. 너는 그를 예배하고, 경외하고, 감사하고, 그분과 교제를 가져야 한다.”
그 이후 영산은 성령을 인격적으로 대하고, 교제하며 성령의 동역자가 되어 목회했다.
성령님께서 인격을 지니고 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우리의 신앙생활에 큰 변화가 다가오게 된다. 성령님과 인격적으로 깊은 교제를 가짐으로써 우리의 삶이 크게 변화된다. 나는 성령님께서 인격을 지니신 분임을 깨달은 이후부터 항상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며 동역함으로써 성공적인 목회 사역을 할 수 있었다. 성령님을 선배 동역자로 모시고 그분 말씀에 순종하며 섬기는 자세로 사역에 임하고 있는 것이다.
영산 조용기 목사의 신학 특히 성령론 정립에 힘써왔던 한국 오순절 신약신학자이며 한세대학교 교수로 사역하고 있는 최문홍은 “성령의 인격성”을 1999년 웨일즈 대학교에 제출한 박사학위 청구 논문의 주제로 삼았다. 그는 그 논문에서 성령의 인격성을 오순절주의의 주요 텍스트인 누가-행전을 중심으로 논했다. 그리고 그는 2009년에 영산의 성령론을 다음과 같이 간략하게 정리했다.
조용기 목사는 그의 삶에서 자신의 성령 이해의 바탕이 된 두 번의 결정적인 신앙 경험이 있었다. 그 하나는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세례의 체험이었고, 다른 하나는 인격을 지니신 성령에 대한 계시의 경험이었다. 특히 후자가 그의 성령 이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최문홍은 내적으로 영산 조용기의 신학을 정립하고, 외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영산의 성령론이 능력에만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인격에도 역시 동일한 초점을 맞춘 것이라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영산의 인격적 성령론을 신약성경과 연결시킨 것이다.
최문홍의 웨일즈에서 연구 이후 기존의 영산의 인격적 성령론에 대한 연구들은 영산의 인격적 성령론이 가장 넓게는 기독교 역사에서, 좁게는 개신교 역사에서, 더 좁게는 오순절주의 역사에서 그 이전에 없던 전혀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예를 들면, 임형근은 2004년에 조용기 목사의 성령이해는 삼위일체에 관련한 전통적이지만,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 성령을 인격적인 분으로 강조한 것은 “개신교의 전통적인 이해와는 다른 독특한 점”이라고 주장했다. 임형근으로부터 조용기의 인격적 성령 이해가 개신교 역사에서 유례가 없는 특수한 것이라는 주장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성령이 삼위일체의 한 분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점에서 조용기 목사의 성령 이해는 지극히 전통적이다. 그는 성령이 삼위일체 하나님 가운데 한 위격을 가지신 인격적인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누구보다도 강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용기 목사의 성령이해에는 개신교의 전통적인 이해와는 다른 독특한 점이 있다. 그것은 바로 성령과의 교제에 대한 강조이다.
이기성은 2006년에 임형근의 조용기의 인격적 성령 이해의 특수성 주장을 개신교 역사로부터 기독교 역사 전체로 확장시켰다. 그에 의하면, 조용기는 기독교 영성 이해와 구현에 있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으며, 그 구체적 내용은 성령과의 개인적이며 친밀한 인격적 교제다. 이기성은 조용기의 성령에 대한 인격적 이해와 실천은 기독교 전체 역사에서도 그 유례가 없던 독창적인 새로운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영산 조용기 목사(이하 영산)의 목회사상과 신학의 중요성은 그것이 기독교 전통의 주요 내용을 계승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건전한 창조성 속에서 발전, 심화시키는 뛰어난 독창성 내지 독특성을 보여준다는 점에도 있다. 기독교 영성의 이해와 구현에 있어서도 영산은 신학적 정통성과 독창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영성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 있는데, 이는 바로 성령과의 개인적이며 친밀한 인격적 교제에 그 핵심을 두고 있다.
이종호는 2021년 한세대학교 대학원에 제출된 신학석사학위청구논문에서 방언의 중요성과 관점을 중심으로 영산의 인격적 성령론을 연구했다. 그 연구에서 이종호는 초기 오순절 지도자 찰스 파함(Charles F. Parham, 1873-1929)의 성령론을 언급했지만, 파함의 성령론을 “능력의 영으로서 성령”의 범주에서만 다루었다. 이종호는 “파함의 성령침례에 대한 이해는 오순절주의 운동과 신학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즉 이종호는 초기 오순절주의 성령이해는 오직 영산이 1964년 이전에 가지고 있던 성령이해와 동일한 “능력의 영”에 한정된 것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영산 이전까지 대부분의 성령사역자들은 성령이 인격적인 존재임을 신학적으로는 알고 있었으나, 이를 구체적으로 삶과 목회에 적용·실천하는 데까지 나아가지는 못했다. 이를 삶과 목회사역에 도입해서 실천에 이른 사람은 영산이었다”라고 쓰기도 했다.
연구들을 통합하여 해석하자면, 기존의 연구들은 신약성경에서 드러나는 인격적 성령은 기독교 역사 안에서, 좁혀서 개신교 역사 안에서, 더 좁혀서 초기 오순절지도자들과 그 이후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서 도외시 되다가 조용기에 이르러 드디어 재발견되었다고, 나아가 영산의 인격적 성령 이해와 실천은 기독교 역사 안에서는 그 유래가 없는 전혀 새로운, 신약성경에서만 그 뿌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이라고 주장해 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일까? 그렇지 않다. 인격적 성령은 신약성경에서만 발견되다가 갑자기 영산 조용기에서 발현되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오순절운동의 아버지 찰스 파함으로부터 그의 제자 윌리엄 시무어의 글들에서 이미 인격적 성령론이 뚜렷했다.
III. 찰스 F. 파함과 인격적 성령
오순절운동의 아버지 찰스 파함(Charles F. Parham)은 성령을 능력의 영으로만 부각시키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성령침례에 그 증거로서 동반되는 방언을 하나님과의 교제와 영적 활동의 기초(a basis) 또는 시금석(test)으로 만드는 것을 “광신적 상태”(a fanatical state)라고 비판했다. 파함에게 하나님과의 교제와 영적 활동의 기초 또는 시금석은 성령의 능력 측면이 아닌 성령의 인격 측면이었다.
파함은 직접적으로 “성령은 인격이시다”라고 명확하게 말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인격성을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을 표현하곤 했다. 예를 들면, 파함은 인격을 구성하는 지와 정과 의라는 요소들 중의 한 요소인 성령의 지성에 대해 언급한 적이 있다. 파함은 “성령님께서는 모든 언어들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다른 언어가 우리의 언어인 것처럼 우리를 통해 하나의 언어로 쉽게 말 할 수 있으십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파함은 성령의 민감한 인격적 감성을 인식했었고, 그런 성령의 인격적 감성을 손상시키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파함은 성령님은 “마치 비둘기와 같아서 거칠고 난폭하거나 부자연스럽거나 부적절한 시시한 것들이 행해질 때 쉽게 상처를 입고는 빨리 물러나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오순절의 모든 것은 성령님께 돌려져야 합니다. 품위(Decency), 질서(order), 그리고 적당함(propriety)은 성령님의 모든 역사의 특징입니다”라고도 말했다. 그래서 그는 성령님을 대할 때 유순하고, 자연스럽고 적절하게 행하여 성령의 민감한 인격의 감성에 손상을 주지 않기 위해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그는 벧엘 성경학교에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가 발생하기 시작한 것을 성령님이 벧엘 성경학교의 응접실에 임하셨다고 묘사했다. 그리고 그는 성령님을 “천국의 총리”(the Prime Minister of Heaven), 하나님과 그분의 아드님의 대행자(the representative of God and His Son)라고 비유했다. 그는 그 천국의 총리, 왕이신 하나님과 그분의 아드님의 대행자가 손님으로 오셨다고 묘사했다. 그리고 그와 벧엘성경학교 학생들은 그 천국의 총리가 “세련된 감성”(the refined sensibilities)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 감성에 충격을 주지 않으려고, 그런 경외와 신성한 느낌을 가지고 그 건물의 복도들과 방들을 하나님의 궁전의 왕들과 왕비들, 왕자들과 공주들로서 제일 좋은 옷을 입고 최선의 예절과 최고로 세련된 품위로 걸었다.
파함은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가능하게 하며, 그 교제는 성도들의 인격을 아름답게 도야시킨다고 보았다. 그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영적인 사람을 하나님의 마음과의 직접적인 교통 안으로 들어가게 합니다”라고 말했다. 파함은 또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열어 주고 조명해 줍니다. 그러면 성경에 대한 이해가 생기고, 보좌로부터 하나님의 빛과 계시가 오며, 생수가 여러분의 존재에서 솟아나게 됩니다. 오순절적 침례는 그 진리와 빛과 생명과 능력을 취하여 여러분의 동료들에게 흘려 내보내게 합니다”라고도 말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그뿐만 아니라, 그분의 마음을 여러분의 영과 직접적으로 연결시킬 것입니다. 이것은 여러분 안에 있는 영의 마음이 시대의 지혜가 에테르의 파도 위에 떠다니다가 여러분의 명령에 의해 철수할 수 있을 때까지 지난 수 세기 동안 교회에 의해 잊혀진 지혜의 파도 같은 생각을 위한 그릇이 된다는 의미에서 신비합니다. 이것은, 비록 거의 이해되지 못하고 있지만, 심오한 진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능력으로 무의식을 통해 말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아십시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성령의 능력으로 잠재의식(the subconscious mind)을 통해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을 압시다. 훈련되고, 하나님의 능력과 접촉하여 영적으로 아름다워지고, 고양되면, 그것[잠재 의식]은 하나님의 보다 깊은 생각과 이 시대의 생각을 감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들을 전달할 수 있도록 조절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그 도구, 성화에 의해 정화되어 온 성화된 도구를 조절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진리와 지식의 수용을 위해 그 도구를 조절합니다. 그 조절로 인해 우리는 한 벽에 의해 보호되는 정원에 있는 영원히 솟아나는 샘이 됩니다. 그 정원은 활짝 핀 꽃들과 달콤한 향기를 풍기는 향신료들과 여러 종류의 과일을 맺은 나무들로 가득 차고, 그 영원히 솟아나는 샘들로부터 물을 공급받습니다. 그 정원에 모아진 향기들은 거의 가두어질 수 없게 되고, 그렇게 되면 복된 오순절 경험이 그 달콤한 향기들을 산과 계곡에 퍼트리게 되고, 여러분의 영혼 안에서 영원히 솟아나는 생명의 물을 모으게 되고, 그러면 그것은 온 땅 위에 생수의 강처럼 흘러나갈 것입니다.
파함은 지성과 민감한 감성을 갖고 계신 성령과의 교제 가운데서 성령의 음성을 듣곤 했으며, 새로운 이해를 갖게 되곤 했다. 예를 들면, 그는 어느 날 숲속에서 홀로 명상에 잠겨있는데, 성령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말씀 속에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모든 것에 순종했느냐?” 그런 성령의 질문을 받은 그는 그동안 물침례를 소홀히 해 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IV. 윌리엄 J. 시무어와 인격적 성령
시무어에게 성령은 무엇보다도 인격이셨다. 그에게 성령은 단순한 능력이 아니었다. 시무어는 파함보다 더 명확하게 성령의 인격을 부각시켰다. 그는 “성령님은 인격이십니다”(The Spirit is a person)라고 문자와 한 문장으로써 분명하게 성령의 인격성을 고백했다. 반면에 시무어는 “성령은 능력”이라고 계사(繫辭)를 통한 직유법을 사용해 말한 적이 없다. 그는 능력을 성령과 결부시킬 때는 언제나 소유를 의미하는 전치사를 사용하여 “성령의 능력”(the power of the Spirit)이라고 말했다. 시무어는 성령께서 인격이심의 근거를 그분이 기뻐하실 수도 있고, 모욕을 받으실 수 있다는 것에 두었다. 그는 성령이 인격이시기 때문에 성령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즉 그에게 성령을 받는 것은 비인격을 받는 것이 아니다. 성령을 받는 것은 인격이신 성령을 환영하여 모셔 들이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신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기뻐하시고, 예수님의 보내심을 받아 오신다는 것이다.
성령님은 인격이십니다(The Spirit is a person). 그분은 기뻐하실 수 있으시고[살전 1:6], 그분은 소멸될 수 있으시고[살전 5:19], 그분은 우리가 아는 대로 아나니아가 그분을 모욕한 것처럼 모욕을 받을 수 있으십니다[행 5:3].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때 우리는 성령님을 기쁘게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서 증거하시도록 성령님을 보내십니다.
만약 그가 “성령의 능력”(the power of the Spirit)으로 충만하다면 그 자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일을 하는 분은 사람이 아니고, 영광스런 곳에서부터 이 흙으로 만든 장막을 통해 일하시도록 예수님에 의해 보냄 받으신 성령님이기 때문입니다.
시무어는 오순절주의의 핵심 본문이라고 여겨져 왔던 누가-행전에서 성령의 능력 측면 만이 아니라, 성령의 인격 측면을 이미 인식하고 언급했던 것이다. 최문홍은 2001년에 열렸던 북미 오순절 신학회 연례 학술발표회에서 오순절주의자들이 누가-행전에서 성령의 능력부여 측면만 보았다고 비판하고, 누가-행전에서 드러나는 성령의 인격성으로 균형을 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그는 사도행전 5장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망 사건을 성령께서 속고 시험을 받으실 수 있는 인격적인 분임을 증거하기 위한 증빙전으로 제시했다. 그는 시무어가 그 본문을 통해 이미 성령의 인격성을 언급했던 것을 몰랐던 것이다. 또한 시무어는 비오순절주의의 핵심 본문이라고 여겨져 왔던 바울서신을 성령의 인격성을 뒷받침하는 본문으로도 삼았다.
영산 조용기는 성령의 인격성을 계시를 통해 깨달은 후 성도들에게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고 인격이신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라고 설교하곤 했다. 그런 영산의 인격적 성령 이해는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독특한 것이 아니었고, 이미 시무어가 명확하게 명문화한 오순절적 전통 속에 있는 것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령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서는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인격적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지식이 있고 감정이 있고 의지가 있고 인격이신 것입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성령은 바람과 같이 우리와 같이 계시는 인격자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격이신 성령님을 늘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령님,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 들입니다. 의지합니다. 보혜사 성령님이시여, 감사합니다. 저를 이끌어 주옵소서”하고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시무어는 성령을 인격으로 믿기 때문에 신자들이 예수님의 동역자가 되어야 하며 또한 “성령님의 분담자”(partakers of the Holy Ghost)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성령님은 도구로 삼을 수 있는 비인격이 아니라 함께 동역해야 하는 인격이시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과 불로 침례를 받는 오순절 날에야 그들의 마음에 임명장을 주셨습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그들을 땅 끝까지 이르러 그분의 증인이 되게 하는 권세였습니다. 왜냐하면 복된 성령님의 충만하심이 아니면 땅 끝까지 이르러 증거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동역자(coworkers with Him), 성령의 분담자(partakers of the Holy Ghost)가 되어야 합니다.
영산 조용기는 아래와 같이 인격이신 성령과의 깊은 동역 속에서 일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성령과의 동역은 이미 시무어에 의해 이해되고 실행된 것이었던 것이다.
지금도 매일 아침 이렇게 기도합니다. ‘성령님, 성령님을 인정합니다. 환영합니다. 모셔들입니다. 의지합니다. 성령께서 저의 손을 잡고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끌어주시옵소서!’ 제가 기도하고 설교 원고를 작성할 때도 그렇게 하고 강단에 가서 설교하려고 일어서기 전에도 ‘성령님, 함께 하여 주옵소서. 저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함께 저를 손잡아 주시고 동행하여 주옵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설교를 끝내거나 하나님 사업을 마치면 언제나 ‘성령님, 고맙습니다. 성령께서 저를 기름 부어주시고 붙들어 주시고 이끌어 주셨으므로 제가 이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성령과의 깊은 동역 속에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님을 인격으로 믿는 시무어는 성령님을 교회의 모든 사역들의 주관자(감독, Bishop)로 받아들였다. 그는 성령께서 주관자로 모셔진 집회와 사역은 회개와 불과 능력과 사랑이 충만하여 새신자 등의 풍성한 열매를 맺는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인격이신 성령님을 근심케 하여 떠나시게 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시무어는 모든 사역의 의장 자리에 성령님을 모시라고 권고했다.
하나님의 지상 사역전체를 관장하는 것이 바로 성령님의 직무입니다(요 10:3)(It is the office work of the Holy Spirit to preside over the entire work of God on earth). 예수께서는 세상에 계시는 동안 우리의 감독이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께서 자신의 직무를 수행케 하려고 사람들이 아닌 성령님을 보내셨습니다(요 14:16, 15:26, 16:7-14)(Jesus was our Bishop while on earth, but now He has sent the Holy Ghost), 아멘. 그분의 거룩하신 이름을 찬양합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능력을 불어넣으시고, 하늘의 권세를 주실 것입니다. 그분의 임재와 결재 없는(without His presence and His transaction) 종교적 회합은 불법입니다. 우리는 성령님이 최고의 교사임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 . . 모든 성회에서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성령께서 좌정하시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렇게 많은 사역들과 교회들이 메마르게 된 것은 성령님을 의장(the chairman)으로 모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역들과 교회들은 성령님의 자리에 어떤 사람을 앉힙니다 ... 여러분은 어떤 성회에서든 성령께서 의장으로 계시는 성회에서는 열매가 풍성한 것을, 하나님께 자녀들이 탄생하는 것을 목격할 것입니다.
어떤 교회와 선교기관이 하나님의 능력이 떠나기 시작했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그들은 전심으로 와서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모든 것을 내려놓고 회개하고, 이전의 불과 능력과 사랑을 회복할 때까지 하나님께 기도해야만 합니다. 많은 경우에 그 목사가 성령님을 근심시키기 때문에 성령님께서 회중이나 선교회 또는 교회에서 떠나십니다.
영산 조용기는 인격이신 성령을 교회의 사역을 총괄하는 “담임 목사”로 모시고 사역했다. 또 다른 말로 그에게 인격이신 성령은 “교회의 총사령관”이었다.
그때부터 저는 성령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들이고 의지하며 성령을 제 삶에 있어서 담임 목사(senior pastor)로 받아들이며 사역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뜻에 순종해야 합니다. 성령님은 교회의 총사령관이시고 우리는 영혼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사역에 부름을 받은 머슴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나 성령님의 뜻을 받들어 일해야 됩니다. 내 맘대로 하겠다고 오늘은 동쪽 밭으로 가고 다음은 서쪽 밭으로 가리라 이것은 안 되는 일인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성령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서 우리 삶에 날마다 생기가 넘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영산이 인격적 성령을 교회의 모든 사역을 총괄하는 담임 목사나 총사령관으로 여긴 것은 유례가 없는 것이 아니었고, 인격적 성령을 “천국의 총리”(the Prime Minister of Heaven), “하나님과 그분의 아드님의 대행자”(the representative of God and His Son)로 여겼던 찰스 파함으로부터 인격적 성령을 하나님의 지상 사역 전체를 관장하는 감독(the Bishop), 교회의 의장(The chairman)으로 여겼던 윌리엄 시무어를 잇는 오순절 전통 안에 있는 것이었던 것이다.
V. 나가는 말
살펴본 것처럼, 영산 조용기의 독특한 성령론이라고, 기독교 역사와 개신교 역사 안에서 유례가 없던 독특한 것이라고 일컬어져 온 “인격적 성령 이해”는 신약 시대 이후 특히 오순절운동 역사에서 사라졌다가 갑자기 재발현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인격적 성령 이해”는 찰스 F. 파함이나 윌리엄 J. 시무어의 글들에서 이미 드러났던 것이었다. 인격적 성령 이해는 신약성경으로부터 오순절 초기 지도자들에게로도 전수되었고, 영산 조용기에게로 이어진 것이다. 이 이어짐을 영산 자신이나, 영산 신학을 정립하고 확산시키겠다는 사람들이 전혀 의식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부지중에 영산의 인격성 성령 이해는 오순절 전통 안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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