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the Pentecostal Continuation of Special Revelation
이창승
2023.6.7.
I. 들어가는 말
성경이 기록된 이후 하나님으로부터 특별계시가 지속되고 있는가? 이에 대한 개신교적인 대답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대답은 “아니요!”이다.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 중단론(cessationism)은 성경 기록 이후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 계시가 그쳤다고 주장한다. 루터(Martin Luther)는 “사도들은 말씀을 선포했으며 자기들의 기록을 남겼다. 따라서 그들이 기록으로 남긴 것 이상의 어떠한 것도 계시될 필요가 없으며, 새롭고 특별한 어떤 이적이나 계시도 필요치 않다”고 말했다. 루터에게 하나님께서는 외적인 말씀을 통해서만 성령과 은혜를 주신다. 그리고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역사하신다(Spiritus operatur in verbo). 루터는 성령께서 두 가지 방식으로 사람에게 오셨고, 오신다고 말한다. 첫 번째 방법은 “가시적인 모양”으로 오시는 것이다. 루터에게 이런 가시적인 성령의 오심은 불신자들에게 이적이나 방언을 통해 불신자들에게 표적을 보여주어야 했던 초대교회 시대에 필요했던 것이다. 그는 교회가 성립된 후에는 성령의 가시적 오심이 그쳤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성령이 오시는 두 번째 방식은 가시적 표적이 없이 말씀을 통해 보내시는 것이며 초대교회 이후에 성령이 오시는 방식이다. 이런 중단론은 벤자민 워필드(Benjamin B. Warfield)와 제임스 패커(James I. Packer) 그리고 리차드 가핀(Richard B. Gaffin) 등에로 이어졌다.
다른 대답은 “예!”이다. 오순절주의자들 대부분은 그 질문에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여전히 자기들을 향한 하나님의 직접적인 특별계시가 계속되고 있다고 보고한다(continuationism). 2006년에 행해진 10개국 조사는 오순절주의자들은 평균 그리스도인들보다 두 배에서 세 배나 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direct revelation)를 받아왔다고 보고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또한 미국에서 가장 큰 오순절 교단들에 대한 연구는 그 구성원들의 80%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적인 계시를 받아왔다는 것을 드러냈다. 아시아 오순절주의자들 사이에서도 특별계시는 낯설지 않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오순절 신학자들은 이런 특별계시 지속에 대한 경험들에 주목하고 언급해 왔다. 피터 알트하우스(Peter Althouse)는 오순절주의자들이 하나님의 특별계시가 오늘날에도 성령의 성경에 대한 조명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환상, 꿈, 예언, 방언 등의 은사들을 통해 온다고 믿는다고 말했다. 어네스트 B. 젠타일(Ernest B. Gentile)은 계시경험(revelatory experience), 또는 “하나님의 음성 듣기”(hearing God’s voice)는 오순절주의자에게 성령을 통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생각들”의 계시를 받는 것이라고 쓴다. 로저 스트론슈타드(Roger Stronstad)에 의하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능력은 새 언약의 한 특징이다. 그것에 의해 오순절날에 성령의 부어주심은 모든 신자가 옛 언약 시대 선지자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계시적인 메시지들을 받을 수 있게 했다(민 12:6; 행 2:16-17). 오순절 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오순절적 경험이 인지적 사고와 별도로 계시를 받는 것을 포함하며, 그리고 새롭고 그리고/또는 그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정보의 진정한 이동을 포함한다는 데 동의한다. 특별계시 경험은 알브레흐트(Albrecht)와 리(Lee)에 의해 오순절주의자들의 영성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것으로 인지되어왔다. 나아가 쿨터(Dale M. Coulter)는 오늘날에도 계시가 계속되고 있다는 “계시에 대한 역동적 이해”(dynamic view of revelation)가 오순절주의의 신학적 핵심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단순한 언급을 넘어서는 오순절적 특별계시 지속에 대한 신학적 숙고가 필요하다. 계시 경험이 오순절적 실행에 있어서 중요하고, 그것의 영적 가치가 크며, 그래서 그에 대한 오순절 신학자들의 언급이 있어 왔지만, 이 주제에 대한 오순절인 신학적 숙고(theological reflection)는 대단히 부족했다. 쿨터가 오순절주의의 신학적 핵심으로 제시한 “계시에 대한 역동적 이해”는 성경에 대한 다중적 해석에 집중된 것이었다. 그리고 오순절적 특별 계시의 지속에 대한 집중적인 신학적 연구는 지금까지 단 2편인 것 같다.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을 보다 더 진전시킬 필요가 있다.
호주 오순절 신학자 타니아 헤리스(Tania Harris)는 Asian Journal of Pentecostal Studies 2020년 1월호에 오순절적 계시론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이 논문은 헤리스가 2020년에 오순절계통 알파쿠루시스 대학(Alphacrucis College)에 제출한 박사학위신청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조사된 것을 바탕으로 써진 것이다.
한국 오순절 계통 건신대학원 대학교 이상환 교수는 헤리스의 연구보다 13년 전인 2007년에 『오순절신학논단』에 “예언적 은사의 계시적 의미”라는 글을 기고했다. 그리고 이 글은 The Spirit & Church 2001년 5월 호에 “Pentecostal Prophecy”라는 제목으로 실린 논문을 계시론적 측면에서 보강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헤리스는 실천신학 관점에서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을 연구했고, 이상환은 조직신학 관점에서 그것을 연구했다.
기존의 두 연구는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을 위한 토대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를 받을만하다. 그러나 두 연구는 치명적인 단점을 안고 있다. 기존의 두 연구는 한 편으로 오순절적 특별계시의 지속을 주장하기 위해 신복음주의 또는 신정통주의의 틀을 벗어나 오순절주의 특유의 틀을 모색하려 했으나,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을 위해 성경과 그 권위를 격하시키고 손상시킴으로써 그것들을 벗어나지 못했다. 본 연구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보존하면서도 오순절적 특별계시 지속을 신학적으로 숙고함으로써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을 적절한 방향으로 한 걸음 더 전진시키고자 한다.
II.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을 위한 오순절 정체성 규정
오순절적 특별계시 지속론을 신학적으로 숙고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오순절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오순절 정체성이란 “오순절주의는 무엇이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오순절의 정체성 규정은 그 위에 오순절적 특별계시 지속론을 쌓을 수 있는 토대가 되기 때문에 가장 먼저 다루어야 할 주제이다.
기존의 두 연구는 오순절의 정체성 혹은 핵심을 “경험”(experience)이라고 규정하고 그 토대 위에서 특별계시 지속을 숙고했다. 헤리스는 오순절 특성을 경험 중심으로 보았다. 그녀는 오순절주의는 전지구적으로 너무도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정의하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순절적”(Pentecostal)이란 용어를 경험적 영성(experiential spirituality)과 은사들의 실행(its pracitce of charismata)을 채택하는 단체들 또는 교단들을 구성하는 사람과 연결지었다. 헤리스는 오순절의 정체성을 “경험”으로 규정하고 자신의 특별계시 지속론의 경험적 인식론을 위해 오순절 기독교 철학자 제임스 K. 스미스(James K. Smith)의 경험중심적 인식론을 수용했다. 스미스는 그의 저서, 『방언 안에서 사고하기』(Thinking in Tongues)에서 영적 경험에서 발생하는 지식의 유형을 강조했다. 그는 오순절적 경험이 오순절주의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아는 것을 알게”(know what they know) 하는 “서사적 지식”(narrative knowledge)의 형성에로 이르는 것을 밝혔다. 헤리스는 오순절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미시사”(micro-story)를 하나님의 구원의 “거대서사”(macro-story of redemption)에 추가함으로써 간증과 이야기/서사(narrative)를 자신들의 경험의 뜻을 이해하는 데 사용한다고 보았다. 이 접근은 진리를 이야기의 상황 안에 그리고 특별한 “앎의 방식”(mode of knowing)과 관련하여 놓는다. 이 서사적 지식은 (철학적으로) 믿음(belief)이 보통 명제들에 대한 동의 또는 적어도 어떤 명제적 태도(propositional attitude)에 의해 특징지워지는 것으로 이해되는 “정당화된 진정한 믿음”으로 이해되는 “지극히 평범한 지식과는 다른” 것이다.
이상환도 역시 오순절의 핵심을 경험에 두었다. 그는 브루너를 따라 오순절적 영성의 핵심은 성령침례에 있다고 보았다. 브루너(Bruner)는 오순절주의의 특징을 성령세례중심적(Pneumobaptistocentric)이라고 규정지었었다. 나아가 이상환은 성령침례의 경험은 오순절 영성과 신학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리고 구성할 수 있는 해석적 축(a hermeneutical pivot)이라고 생각했다. 결정적으로 이상환은 “오순절 신학은 성령세례의 경험에 입각한 경험적 신학이다”라는 로드만 윌리엄스의 말을 인용하며, 오순절의 정체성을 “경험”에 두었다.
두 연구는 오순절 정체성을 “경험”에 둠으로써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을 위한 기초를 잘못 놓았다. 왜냐하면, 사실 오순절주의의 정체성은 성령침례에 방언이 동반된다는 것이며, 그런 정체성은 성경 읽기를 중시하는 성경에 대한 신학적 연구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오순절운동은 성경, 특히 사도행전에 대한 신학적 연구에서 시작되었다. 그 신학적 연구 결과 성령침례에 방언이라는 증거가 동반된다는 가설이 도출되었고, 이 가설이 경험으로 검증됨으로써 오순절운동의 신학적 핵심이 규정되고, 오순절운동이 시작되었다. 오순절운동의 경험 선행설은 바르지 않은 것이다. 경험 선행설은 오순절운동이 경험에서 시작되었고 그 후에 신학적 연구와 설명이 뒤따랐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오순절운동은 신학에서 시작되었으며, 경험이 뒤따랐다. 오순절운동은 다음과 같은 일련의 과정과 함께 탄생했다. 1) 신학적 성경 연구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는 무엇인가라는 신학 주제적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2) 그 신학적 성경연구로부터 신학적 가설 도출(방언 말하는 것), 3) 경험 (방언 말하기),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한 신학적 가설 확증과 원리 확립. 오순절운동의 시초에 신학 주제적 성경연구가 경험을 선행했다. 이렇게 오순절운동 또는 오순절주의는 경험 중심이 아니라 신학적 성경연구 중심이며, 오순절운동의 정체성은 경험이 아니라 성령침례와 방언 사이의 불가분리의 관계성에 있다. 따라서 이상환과 헤리스는 오순절 정체성을 부정확하게 규정함으로써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을 위해 부정확하고 적절하지 못한 기초를 놓았다. 그 부정확한 기초위에 세워진 건축물이 부정확하고 안전하지 않았을 것은 불 보듯 분명하다.
III. 지속되는 오순절적 특별계시의 매체
이상환은 오순절적 특별계시를 지속시키는 중점적 매체로서 예언을 택했다. 그는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밀접성보다는 성령침례와 은사의 밀접성을 채택했다. 그에 따르면,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성령침례와 은사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는 현대 오순절 운동은 성령침례를 통하여 경험한 “은사”를 나름대로 규정하면서부터 시작됐다고 보았다. 이상환은 예언도 방언과 같이 성령침례를 통하여 부여되는 은사로 파악했다. 그리고 그는 방언보다는 예언을 오순절 특별계시의 지속적인 주요 매체로 삼았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의 예언적 은사를 성경적 계시와 함께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제공하는 중요한 계시적 원천으로 간주한다는 것이다.
헤리스는 지속적인 오순절적 특별계시의 매체로서 예언에 “음성, 꿈, 그리고 환상”을 더했다. 그녀는 오순절적 예언의 영역에서 몇 가지 뛰어난 논문이 나왔지만, “음성들”과 꿈들과 환상들을 아우르는 보다 폭넓은 계시 경험은 간과되어왔다고 분석했다. 헤리스는 사도행전 2장 16절에서 17절의 성경 경험의 두 번째 국면인 “아들과 딸들은 예언할 것이요”는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해 채택되었는데, 그 첫 번째 국면인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는 전적으로 간과되어왔다고 평가했다. 그녀는 그 문제의 두 가지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로, 이것은 서사양식(epistolic genre)(많은 사적 계시 경험들을 언급)보다는 서간양식(the narratives)(공적 예언에 초점을 맞춤)을 선호하는 복음주의적 전통의 영향 때문일 수 있다. 둘째로, 꿈과 환상은 특히 서구 문화 가운데서 역사에 걸쳐 회의적으로 인식되어왔다. 켈시(Kelsey)는 최근 주요 원인으로서 계몽주의적 사고를 지목하면서 이 풍조에 주목했다. 하임즈(Hymes)는 초기 교회 안에 있던 그리고 다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은 아퀴나스 이후에 존재했던 유사한 궤적을 주목했다.
물론 예언, 음성, 꿈, 그리고 환상들도 지속되는 특별계시의 매체이긴 하지만, 그것들은 오순절적 특별계시론을 위한 중심적 매체는 아니다. 오순절 정체성을 잘 드러내는 지속적 오순절적 특별계시의 매체는 방언과 그에 대한 통역이다.
그런데 오순절주의자들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방언의 계시성을 부정한다. 예를 들면, 김동수는 계시를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방언은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시의 매체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설혹 지금 방언 은사의 성격을 분석하더라도 계시 성격의 은사가 아니다. 방언이 통역되면 계시적 성격을 가진다고 하지만 방언의 성격을 완전히 오해한 말이다. 방언은 신자가 성령의 인도함에 따라 사람이 알아들을 수 없는 발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계시의 방향과는 반대 방향이다. 계시가 되려면 하나님께로부터 사람에게로 와야 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김동수는 그에게 방언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시는 선포, 메시지/계시의 한 매체가 될 수 없고, 오직 인간이 하나님께 올리는 기도와 찬양의 한 양식일 뿐이다.
그가 방언의 매체성을 부정하는 것은 아마도 특별계시중지론자들이 방언을 계시의 매체로 이해하고 특별계시중지론을 위해 방언의 현대적 발현을 부정하는 것을 조금이나마 누그러뜨리기 위한 것일 것이다. 특별계시중지론자인 팔머 로버트슨(O. Palmer Robertson)은 “신약에서 방언은 계시적이었다. 방언은 계시를 전달하는데 사용한 하나님의 도구였다. 방언이 통역되면 예언과 같이 계시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교회는 의사 예언주의(pseudo-prophetism)이나 의사 방언 (pseudo-tongues)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김동수는 이런 방언 계시 매체를 전제로 특별계시중지론에게 원천적으로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해 아예 방언은 계시 매체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방언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자신을 지속적으로 계시하시는 특별한 매체이기도 하다. 첫째로, 방언의 근원은 사람이 아닌 성령 하나님이다. 방언은 성령 하나님께서 말하라고 사람에게 주시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임하시자 교회는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kaqwV" toV pneu'ma e*divdou a*pofqeggesqai) 방언을 말하기 시작했다(행2:4). 한글개역성경은 그 구절에서 “주다”(divdwmi)를 번역하지 않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로 번역함으로써 원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했다. 김동수의 계시성의 정의에 부합하게, 방언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으로 향하는 측면도 갖고 있는 것이다. 둘째로, 방언은 비밀을 말하는 것이다(고전 14). 김동수는 방언은 계시성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도 일관성을 보이지 않는다. 김동수는 “비밀”을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라고 보았다. 그런데 김동수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나아가 “비밀”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알려주시는 구원의 경륜”이라고 보았다. 김동수도 방언을 통해 말하는 비밀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알려주시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것”이 계시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겠는가? 방언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을 말하는 계시적 성격을 갖는다. 셋째로, 방언은 하나님의 큰일을 말하는 것이다(행 2). 이는 방언의 사람들에게 향하는 선포적 기능을 말한다. 넷째로, 방언은 사람을 향한 기도와 찬양, 감사, 축복이 될 수 있다(고전 14:15-17). 바울은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무식한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라고 말한다(고전 14:16). 김동수는 “유로게오”(eu*logew)를 “찬양”으로 해석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람에게 축복이라면 방언 발화자가 축복하는 것인가, 아니면 성령께서 축복하는 것인가? 성령 하나님께서 축복하시는 것이라면 계시일 수 있다. 다섯째로, 방언은 하나님께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인 자기에게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만일 통역하는 자가 없거든 교회에서는 잠잠하고 자기(e&autw/')와 및 하나님께 말할 것이요”라고 쓴다(고전 14:28). 여섯째로, 방언은 통역하면 예언과 유사한 효과를 갖는다. 방언의 계시성을 부정하는 김동수도 방언 통역은 예언과 같이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방언 통역의 기능에 대해 “다른 사람을 세워주는 역할”, “구성원의 신앙 성숙을 위한 것”, “기도하는 사람의 회개, 혹은 위로를 촉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듯 방언은 김동수가 말했던 것처럼 사람으로부터 하나님께로만 향하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 향하기도 하는 것이다. 김동수 자신도 “방언은 성령의 은사의 하나로서 하나님과 영으로 소통하는 은사(기도, 찬양, 감사, 축복)로 소중한 것이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나님과 영으로 소통”한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 계시가 임하고, 사람이 하나님께 응답하는 쌍방의 대화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방언은 계시의 매체이다.
방언은 통역되었을 때 예언과 같은 계시적 성격을 띤다. 방언은 통역되었을 때 사람에게로 향하는 것이며, 이런 사람으로의 방향성은 예언처럼 계시적 성격을 갖는다. 방언과 통역의 계시성은 성경적이고 오순절 현상적 뒷받침을 받는다. 누가는 바울이 에베소의 어떤 제자들에게 안수하자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셨고, 그들은 방언을 말하며 예언했다고 기록한다(행19:6). 누가는 “그들이 방언을 말하고 있었다”(e*lavloun glwvssai")와 “그들이 예언하고 있었다”(e*ptofhvteuon)라는 두 문장을 “그리고”(kaiv)라는 접속사로 연결했다(e*laloun te glwvssai" kaiV e*profhvtenoun). 호메로(Garcia-Cover Homero)는 접속사 “까이”(kaiv)를 시간상의 전후관계를 설정해주는 것으로만 해석하여 “그들이 방언을 말했고, 그 다음에 예언을 했다”로 그 문장을 해석했다. 그는 방언과 예언을 서로 상관없는 별개의 현상으로 구분했다. 그러나 누가가 “까이”로 시간상 전후관계를 의도했다면 앞쪽 부분을 “방언을 말하고 있었다”(e*lavloun 미완료의 행동지속)가 아닌 “방언을 말했다”(e*lavlousan 단순과거의 행동종결)로 썼을 것이다. 더구나 “까이”는 시간상의 전후 관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의 동시적인 동등성, 즉 병렬관계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그 구절은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예언을 하고 있었다”로 해석되어야 한다. 나아가 그 구절은 “그들이 방언을 말함으로써 예언을 하고 있었다”로 해석될 수 있다. 방언은 계시적 성격을 갖고 있다. 누가가 오순절 사건의 기록에서 사용하고 있는 “아뽀프텡고마이 (a*pofqevggomai)는 “밖으로 말하다, 담대하게 또는 크게 선언하다”(to speak out, declare)는 의미를 갖는다. 70인역과 신약성경에서 a*pofqevggesqai는 오직 예언자들 또는 다른 영감받은 사람들과 관련하여 사용되는 말이다.
1906년부터 시무어(William J. Seymour)가 주도했던 오순절적 아주사 집회에서는 방언 통역이 계시적인 예언의 기능을 담당했다. 아주사 집회의 소식지 『사도신앙』에는 “방언으로 말해진 예언”(the prophesies spoken in unknown tongues)이라는 어구가 등장했다. 그래서 시무어의 공동체에게 방언은 “하나님의 메시지”(God’s message)의 통로들 중에 하나였다. 방언 통역을 통한 예언은 때로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것이기도 했으며, 대부분은 재림에 관한 것과 신앙생활에 관한 것이었다.
많은 “방언으로 말해진 예언들”(the prophesies spoken in unknown tongues)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에 관해 보여주시는 많은 환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어떤 방언으로 말해진 한 예언은 “매우 임박했다. 그래서 나는 성령의 능력으로 순복음을 전하라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많은 사람들을 내보내고 있다”라고 통역되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방언을 통해 주어진 한 메시지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능력의 손아래 겸손하라.” 그분은 지금 오순절적 능력과 구원의 강력한 파도로 세상에서 일하고 계시다.
1907년부터 1912년 사이에 시카고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오순절운동을 했던 더함(William H. Durham)은 근본주의자 딕슨(Dr. Amzi Clarence Dixon)이 방언의 비언어성을 주장했을 때, 방언의 언어성과 나아가 “의사 소통 수단성”을 주장했다. 더함은 딕슨이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탈이성적 기쁨의 표현만으로 본 것, 그리고 사도행전 방언의 언어성도 의심한 것에 반대하고 사도행전적 방언 뿐만 아니라 고린도전서적 방언도 “의사 소통 수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딕슨 박사가 방언 은사를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만드는 것처럼 중요하지 않은 것을 그분의 자녀들이 그분 자신과 소통하는 수단으로 약속하시는 것이 가능한가?”라고 반문했다. 더함은 방언을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의 “소통 수단”(a means of communication)으로 규정한 것이다.
딕슨은 방언은 가사가 없는 기악과 같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순절 날 사람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통해 회심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때 회심은 모든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헬라어로 말해진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발생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생각하기에 방언으로 말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게도 그 어떤 하나님의 메시지도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언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이다. 물론 딕슨에게 방언은 통역될 수 없는 것이긴 하지만 무언가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방언은 메시지를 내포한 것은 아니지만 해석하는 자가 무언가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는 방언을 음악에 비유하여 방언은 성악이 아닌 수금이나 피리 등 기악이나 관악과 같이 “소리를 내지만 가사가 없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더함은 딕슨의 방언 비메시지성 주장을 방언 메시지성으로 응수했다. 더함은 하나님으로부터 통역을 통해 사람으로 향하는 방언은 예언과 같으며, 성령으로 말미암아 “비밀”을 말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통역은 그 메시지를 실제로 통역한다고 주장했다. 더함은 성령의 의지와 발화자의 의지가 동조할 때 성령께서 그 발화자를 통해 말씀하시며, 그 말씀은 일종의 메시지라고 생각했다. 더함은 1908년 2월 1일부터 더함의 선교회의 일원들 중 두 사람에게 주어지기 시작한 방언을 통한 예언을 메시지(message)라고 규정했다. 그는 그 방언을 통한 예언과 그에 대한 통역을 기록하여 소책자로 발간했다. 그는 그 책의 서문에서 “이 소책자의 여기저기에서 ‘해석들’(interpretations)이라고 표기된 것들은 예언하는 사람들에 의해 방언으로 말해진 것들이며,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 성령에 의해 해석된 것이고, 주어진 메시지의 부분이다”라고 썼다.
또한 더함에게 방언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시는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께 말하는 매체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령의 은사로 주어지는 고린도전서적 방언을 “말하는 자가 하나님께 말하는 것”(the speaker speaks to God)이라고 규정했다. 더함은 방언이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매체도 된다고 주장했다. 더함에게 방언은 현악이나 기악이 아닌 성악이었던 것이다. 즉, 더함은 방언이 하나님께로 향할 때는 사람이 방언을 통해 하나님께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그는 윗 단락에서 밝힌 것처럼 사람에게로 향할 때는 하나님께서 방언을 통해 사람에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더함에게 방언은 하나님과 사람이 서로 메시지를 교환하는 의사소통 매체이기도 했다.
IV. 오순절적 특별계시 지속론을 위한 신학적 틀의 필요성
오순절적 특별계시의 지속을 담아낼 수 있는 적절한 신학적 틀이 필요하다. 타니아 헤리스와 이상환은 오순절적 특별계시의 지속론을 정립하기 위해 맞지 않는 기존 신학의 틀을 깨고 오순절 특유의 신학적 틀을 마련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상환은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적 계시관을 비판하고 그와 다른 오순절주의 특유의 계시관을 모색했다. 그에 따르면, 오순절주의자들은 말씀의 계시(the revelation of the Word)뿐만 아니라 성령의 계시(the revelation of the Holy Spirit)도 인정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상환은 오순절적 계시론이 칼 바르트(Karl Barth)가 주창한 신정통주의(Neo-Orthodox)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계시론과 사뭇 다르다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아들)만을 유일한 계시의 객관적 가능성과 실체와 원천과 수단으로 보았다. 이에 비해 성령은 성경이 증거하는 계시의 객관적 실체인 하나님의 말씀(아들, 예수 그리스도)을 인간의 내적 주체에 임하게 하는, 즉 객관적 계시의 주관적 가능성(the subjective possibility of the objective revelation)일 뿐이다. 성령의 활동(침례와 은사)을 계시의 실체로 그리고 그의 존재를 계시자로 보지 않는다. 다만 성부 하나님의 한 인격적인 존재와 주체만을 계시자(revealer)로 인정한다. 이상환은 그런 바르트의 신정통주의의 기독론 중심적 계시관을 비판하고, 성령론적 계시관을 제시했다. 이상환에 따르면, 성령 하나님도 자신의 독특한 활동(예. 성령침례와 은사)을 통하여 자신의 신적 존재와 뜻을 계시할 수 있다. 그러므로 성령의 독특한 활동이 계시가 될 수 있고, 또한 성령 자신이 계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환은 성령을 계시자로 인식하지 못한 바르트의 과오를 오순절주의자들도 범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에 따르면, 오순절주의자들 역시 성령침례와 은사를 성령 자신의 독특한 활동과 계시로 그리고 성령 자신을 계시자로 명백히 표현하지 않는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성령보다는 성자를 성령침례와 은사의 활동 주체로 보고, 성령보다는 성자를 성령침례자(the Spirit-Baptizer)로 주장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이 성령의 독특한 활동과 존재의 계시적 의미를 경시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상환은 이렇게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 계시관에 잠식당한 오순절 계시관을 개선하기 위해 성령 중심적 계시관을 논리적으로 숙고하며 성령도 계시자라고 주장했다.
헤리스는 “복음주의” 보다 정확하게는 “신복음주의”적 틀을 버리고 오순절 특유의 틀을 마련하기 위해 분투했다. 흔히 현대에 복음주의라고 불리고 있는 신복음주의(Neo-Evangelicalism)는 근본주의에 대한 수정주의운동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20세기 중엽부터 미국 신학계에 일어나기 시작한 운동이다. 신복음주의는 이성의 활용을 추구하고자 한다. 그것은 칸트(I. Kant)가 영적 세계에서 이성을 분리시켜 버렸고, 다윈(Darwin)은 이성을 자연 세계에만 국한시켜 버렸고, 드위(Dewey)는 이성의 실용적 가치만을 인정했다고 비판하고, 이런 이성의 오용을 버리고 활용하자고 제안한다.
헤리스는 서구 기독교 안의 현대 오순절 교회들은 전형적으로 보다 작게는 신복음주의(Evangelism)라는 우산을 쓰고, 보다 크게는 자신들을 개신교 전통과 제휴해 왔다고 보았다. 거의 모든 오순절주의자들은 자신들을 복음주의자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국제복음주의연맹 가입의 결과일 것이다. 세계 오순절진영에서 가장 큰 교단인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1928년 근본주의에서 탈퇴한 후 고립을 면하려고 1942년 국제복음주의연맹에 가입했다. 그런데, 그녀에 따르면, 그 두 전통들은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에 대한 개신교적/복음주의적 접근은 오순절주의자들의 접근과 명백하게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다. 헤리스는 개신교 복음주의 전통 안에서 현대 계시 경험에 대한 두 가지 관점들을 식별해 내었다. 첫 번째 관점은 중단론(cessationism)으로 알려진 것으로서 정경 이외의 계시 경험은 중단되었다고 주장한다. 현대적 계시에 대한 그 어떤 주장도 타당성이 없으며, 위험하고 심지어 이단적이라는 것이다. 개신교적/복음주의적 전통들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심을 듣는 경험은 아주 종종 성령의 조명을 통해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과 동일하게 여겨진다.
두 번째 관점은 주로 은사주의적 흐름 안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주장되는데, 침례교 신학자 웨인 그루뎀(Wayne Grudem)에 의해 가장 분명하고 실제적으로 제시된다. 그루뎀의 연구는 복음주의적 성경의 우위성을 보존하면서도 중단론의 주장들을 반박한 입장을 제공함으로써 성경 이외의 계시 경험들에 타당성을 부여하려 했다. 성경 외에서의 현대 계시 경험은 지속적으로 가능할 수는 있겠지만(continuationism), 그러나 보통 성경에 기록되고 영감된 경험들과 비교해 질적으로 열등하고, 상대적으로 신뢰할 수 없고, 그리고 최소한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헤리스에게 성경적 계시가 예언적 계시의 신적 근원과 진실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는 사실이 이들의 종속관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예언적 계시가 성경적 계시보다 열등하다고 간주하여 이를 성경적 계시에 종속 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헤리스는 갱신주의자 로드만 윌리엄스가 그루뎀을 따라 예언적 계시를 성경적 계시의 종속적인 계시(a subordinate revelation)로 정의하는 과오를 범한다고 비판한다. 헤리스는 첫 번째 관점뿐만 아니라, 중재적인 두 번째 관점도 거부한다.
헤리스에게 그런 복음주의적 틀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부적합하며, 따라서 오순절적 접근에 적합한 신학적 틀(a theological framework that is consistent with the Pentecostal approach)의 개발이 요구된다. 그녀는 오순절주의자들이 자기들의 경험들을 위한 적합한 신학적 틀의 부재 때문에, 그리고 성경의 우위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들의 경험을 이해하기 위해 복음주의적 틀(Evangelical framework)을 차용해 왔다고 분석했다. 그녀에게 그 차용은 오순절적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계시 경험의 신학(theology)과 실행(practice) 사이에 심각한 단절을 발생시켜 왔다. 그들은 계시 경험을 지속적으로 실행하면서도, 중단 신학적 접근(discontinuous theological approach)을 채택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이런 불일치는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해 신약성경 아래에서 성령의 사역의 요지라고 이해되는 계시 경험의 지속적인 실행과 효력을 감소시킬 정도로 위협적이라고 보았다.
오순절 특별계시론에 적합한 틀을 개발하는 열정과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런 노력의 계속은 기존의 연구에 대한 비판 위에서만 가능하다. 이상환과 헤리스가 신정통주의와 신복음주의의 계시론적 틀들이 오순절 계시론에 부정적 영향을 준 것을 파악해 낸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이상환과 헤리스가 지적한 오순절 계시론의 바르트류의 신정통주의적 잠식, 헤리스가 드러낸 오순절 계시론의 신복음주의적 잠식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또한 기존의 그런 틀들을 버리고 새로운, 오순절에 적합한 계시론적 틀을 탐구한 그들에게 찬사를 보낸다. 하지만, 그들이 신정통주의나 신복음주의와 같은 기존의 틀들에서 벗어나고자 벌인 분투는 그렇게 성공적이지 못했다. 비록 그들은 한 편으로 신정통주의나 신복음주의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쳤지만, 다른 한 편으로 신정통주의나 신복음주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들은 신정통주의나 신복음주의에 내포된, 오순절 특별계시론에 가장 치명적인 국면을 오순절 특별계시론에 도입했다. 그 치명적 국면은 성경의 권위를 추락시키는 것이다. 이상환과 헤리스는 신정통주의나 신복음주의 성경 권위 파괴를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의 중요한 기초로 삼았다. 이런 안타까운 측면은 다음 장에서 다루어질 것이다.
V. 성경의 권위와 오순절적 특별계시
기존의 두 연구는 오순절적 특별계시의 지속을 주장하기 위해 성경의 권위를 심각하게 손상시켰다. 이 손상은 두 연구가 목표했던 신정통주의와 신복음주의로부터의 부분적 탈피를 성사시킨 반면에, 오히려 두 틀에 전적으로 예속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비유컨대 두 연구는 신정통주의와 신복음주의와의 부분적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전체적인 전쟁에서는 패해 포로가 되었다. 이상환은 오순절적 계시론을 위해 바르트의 그리스도 중심적 계시론을 비판했지만, 바르트의 계시관과 성경관은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자신의 비판을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헤리스도 오순절 계시론을 위해 성경을 계시가 아닌 계시 경험에 대한 인간적 기록물로 격하시킴으로써 신정통주의와 신복음주의의 성경관에 삼켜졌다.
이상환은 성경의 정경화가 하나님에 의해서가 아닌 인간에 의해서 종결되었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성령 하나님은 성경처럼 예언의 은사도 교회를 인도하는 계시적 수단으로 자유롭게 활용할 수 있다. 그는 인간에 의하여 종결된 성경의 정경화 작업이 성령 하나님의 예언적 은사의 중단을 주장할 근거가 절대로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경의 정경화는 인간에 의해 종결되었다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통해 종결시켰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정경 종결의 주관자시다. 하나님은 정경 종결자시다. 하나님이 정경을 위한 계시를 그치셨다. 그러자 사람이 더 이상 기록할 것이 없어졌다. 따라서 정경이 종결되었다. 또한 하나님은 정경 종결의 옹호자시다. 사도 요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종결된 계시록에 무언가를 더하는 자에게 재앙을 내리실 것이다. “내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각인에게 증거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계 22:18). 구약과 신약 성경의 마지막 책인 계시록의 종결은 성경 전체의 종결에로 확대 적용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은 재앙을 내리시는 행위로써 정경 종결을 지지하고 옹호하신다. 개혁주의 신학자 박형용은 하나님의 섭리적 관점에서 정경 종결을 보았다. 그는 “교회회의와 인간이 정경 결정에 일정의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교회가 정경을 결정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상환은 성경의 권위를 지속되는 특별계시의 권위와 상호적인 것으로 격하시켰다. 그는 맥퍼슨의 언급에 대해 “성경 말씀의 참 의미가 성령의 예언적 계시에 의하여 확인되고 조명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예언적 계시의 참 의미가 순서상 일방적으로 성경 말씀에 의해서만 확인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라고 평했다. 그리고 그는 “성경적 계시와 예언적 계시가 서로의 참 의미를 위하여 유기적인 관계를 갖고 상호 교환적으로 이들의 진실을 확인해야 될 것을 암시한다”라고 썼다.
결정적으로 이상환은 바르트를 따라 계시로서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기록으로서 성경을 분리시켰다. 하나님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시고, 성경은 그 말씀의 계시에 대한 인간적 기록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상환은 “엄밀히 말해서 성경은 하나님의 활동과 존재에 대한 계시의 인간적 기록”이라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칼 바르트의 신정통주의는 성경과 하나님 말씀과의 개념적 존재론적 구분을 확실히 짓는다.” 바르트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세 가지 양태를 갖는다. 첫째는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다. 바르트에 의하면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Selbstoffenbarung Gottes)이다. 둘째 양태는 성경이다. 성경은 인간적 언어로 쓰여 있는 하나님의 말씀, 씌여진 말씀이다. 그래서 그에게 성경은 여러 가지 문제점을 내포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이고, 성경은 이 말씀에 의존하고 있는 이차적 의미에서의 하나님의 말씀이다. 셋째 양태는 교회의 선포다. 바르트는 교회의 선포를 선포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정통주의자에게 성경은 계시이다. 그러나 신정통주의자에게 성경은 계시의 인간적 기록물에 불과하다. 신정통주의자들에게 성경은 하나님과의 개인적이고 실존적인 대면에 대한 기록물에 불과하다. 이상환에게 맥퍼슨 등의 오순절주의자들이 말씀과 기록을 구분한 것은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과 피조물인 인간의 말인 성경과의 존재론적 혼합을 성공적으로 배제한다는 측면에서 바람직한 신학적 결정이다.” 이상환은 “엄밀히 말해서 성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이에 대한 인간의 말이고 기록이다. 성서의 궁극적인 목적과 기능은 이 하나님의 영원히 살아 있는 말씀과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이상환은 오순절 계시론을 위해 바르트의 계시론의 지극히 일부분만을 비판하고, 바르트의 성경론과 계시론의 뼈대를 통째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상환은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성경을 계시에 대한 인간의 기록으로 전락시킨 신정통주의는 자유주의의 전형적 성서연구 방법인 역사 비평을 수용하고 있다. 신정통주의의 원조 칼 바르트는 “역사비평의 원수”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역사비평을 성서 본문 안에 무엇이 있는지를 밝힐 수 있는 방법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그에게 역사비평은 “이해를 위한 준비”(preparation for understanding)였다. 그런데 오순절 조직신학자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프랑크 마키아는 유감스럽게도 비평 방법들(critical methods)은 “성경의 이질적인 새로운 세계”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준비시킨다는 신정통주의자 칼 바르트의 견해를 “통찰”(insight)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오순절주의자들은 칼 바르트의 그런 통찰의 안내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
헤리스도 성경을 계시 경험에 대한 인간의 기록으로 보고, 성경을 계시 경험보다 하위에 놓는다. 그녀는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인간의 경험을 기록한 인간적 기록물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녀는 ‘(1) 하나님의 계시 → (2) 하나님의 계시에 대한 사람의 경험 → (3) 하나님의 계시 경험에 대한 기록(성경) → (4) 하나님의 지속적인 계시에 대한 사람의 지속적인 경험’이라는 도식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헤리스의 그런 도식은 성경을 계시가 아닌 계시에 대한 인간적 기록물로 전락시킴으로써 (3)이라는 장애물을 제거하고, (2)와 (4)를 직접 연결시킴으로써 하나님의 특별계시의 지속성을 정당화하려는 시도에서 나온 것이다.
헤리스는 웨인 그루뎀의 중재론은 “성경 대 성령”(Scripture vs. Spirit)이라는 딜레마의 적절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입장은 근본적으로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아주 중대한 문제들을 야기시킨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먼저 그루뎀의 중재적 입장을 정리한다. 그루뎀에 따르면, 현대 계시 경험들은 타당하지만, 그러나 성경 인물들의 특별한 경험에 비교 현상적으로 열등하다. 이 입장은 그가 성경에서 예언적 경험에 대한 두 가지 범주들을 식별해 낸 것에 근거를 둔다: (1)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말하는 (정경적) 구약 성경 시대의 예언자들과 그들과 동등한 자들, 신약 시대의 사도들의 특별한 경험, (2) “하나님께서 마음에 일으키신 어떤 것을 인간의 말들로” 말하는 구약과 신약의 비 예언자들의 평범한 경험. 그루뎀에게, 현재에는 성경에서 입증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자체”에 대한 그 어떤 접근도 없지만, 후 사도적 계시 경험들(post-apostolic revelatory experiences)은 가능하며, 그럼에도 그 경험들은 질적으로 열등하다. 왜냐하면 그 경험들은 시험을 요구하는 인간의 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루뎀은 “새” 계시라는 국면을 후-사도적 계시 경험들의 특징이라고 단언하지만, 그는 그 빈약한 성질에 조심스러워한다. 메시지들은 개인적이고 특수한 필요들로 향할 수 있지만, 안내를 위해 신뢰받지 말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오직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들만이 신뢰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의 말”(human words)로서 현대 계시적 메시지들은 교회를 세우는 데, 즉 교화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그러나 목회적 상담이나 권고의 방식 안에서 최소한의 권위를 갖는다는 것이다. 그루뎀에게,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분명하게 듣기 위해 성경 읽기를 우선시해야만 한다. 그루뎀의 근본적인 관심사는 성경의 권위를 보존하는 것이다. 이것이 중단론자들이 현대 경험 전체를 거부해온 근본적인 이유들 중의 하나다. 부가적인 음성을 주장하는 것은 “말씀의 권능을 약화시키는 데 이바지 한다”는 것이다. 그루뎀의 입장은 또한 성경의 충족성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성경에 가지고 있는 것보다 더 믿거나 순종하기를 바라시는 더 이상의 말씀을 사람에게 하지 않으신다.”
헤리스는 그루뎀의 연구는 오순절주의자들에게 잘 수용되었고, 이것이 무심코 오순절 학자들과 대중 교사들 모두를 위한 태만한 입장이 되어버렸다고 한탄한다. 그루뎀처럼, 오순절주의자들도 성경의 독특한 역할을 보존하기에 열심이라는 것이다. 로벡(Cecil Robeck Jr.)과 다른 사람들은 오순절과 은사적 공동체들의 대부분은 현대적 예언들은 언제나 “성경에 의해 충족된 역할에 도움이 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현대 예언들은 정경과 모순되지 말아야만 하며 또는 그것과 “동등하게 놓이지” 말아야만 한다고, 이것이 역사 전체의 진상이었다고 주장한다. 로벡은 그 두 가지 사이의 차이를 보다 더 상세하게 말한다. 그는 예언 경험을 “특수하고, 일시적이고, 주관적인 것”인 반면에, 성경은 “보편적이고, 영원하고, 객관적인 것”이라고 묘사한다.
헤리스는 그런 그루뎀의 중재와 오순절주의자들의 수용을 거부하며 오순절주의의 핵심을 경험으로 삼고,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을 특별계시 지속 경험으로 지지하려 한다. 그녀에 따르면, 오순절 학자들은 이 문제가 논의의 중심에 놓여 있다는 것에 주목해 왔다. 헤리스는 하나님의 음성이 현대 경험 안에서 분명하고 정확하게 들려질 수 있으려면, 현대 경험이 성경 경험만큼의 권위의 가능성을 가져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권위는 하나님 자신 안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사 45:23; 민 23:19). 헤리스는 오순절적 계시 경험을 설명하기 위해 복음주의 신학을 차용하는 것은 그것의 지속적인 실행에 부정적인 결과들을 초래해왔다고 분석한다. 그리고 그녀는 오순절 핵심을 경험에 두고, 경험을 통한 인식론을 채용한다. 오순절적 기독교 철학자 제임스 K. A. 스미스(James K. A. Smith)는 오순절적 공동체의 구술적 접근(oral approach)에 권위를 두는 것과 복음주의자들의 성경 텍스트적 접근(textual approach)에 권위를 두는 것을 비교하면서 어떻게 그 부정적 결과들이 발생해 왔는지를 기술한다. 이 역학은 성경학 그리고 인식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스미스는 1세기 교회는 읽는 것보다 듣는 것을 더 강조하고, 서기관들보다는 선지자들을 더 강조하고, 문서성(textuality)보다는 청각성(aurality)을 더 강조하는 근본적으로 구술 공동체였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문자 소통보다 구술 소통을 소중히 여겼던 그리고 기록된 문서들이 소수의 교육받은 엘리트들에게나 한정되었던 보다 넓은 그레고-로마 문화를 반영했다. 스미스는 비록 초기 교회 공동체들이 자기들의 유대교적 선조들의 “성경의 사람들”로서의 정경적 의식을 유산으로 받았다 할지라도, 그들의 원초적 텍스트가 기록된 “말씀”보다는 말해진 것이었기 때문에 보다 적합한 명칭은 “성령의 사람들”일 것이라고 주장한다. 교회 안에서 선지자들은 말했고 들려졌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왔었고(롬 10:17), 그러나 이 말씀은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였다. 그래서 “말씀”은 후에 성경에 실렸느냐의 여부와 관계없이 신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인식되었다. 이 접근은 교회 안에서의 책들의 가치나 현존을 대체하지는 않았고, 그보다는 책들의 지위를 파생물로 설정했다. 신적 권위는 먼저 그리고 무엇보다도 말해진 말씀(the spoken word)에 두었다.
헤리스는 2세기 초에, 한 전환이 발생하여 읽고 쓰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 선호되기 시작했고, 기록된 말씀이 말해진 말씀보다 권위와 신뢰성을 획득하게 되었다고 보았다. 이런 문서화(textualization)의 과정은 권위를 그 전승을 전달한 사람들로부터 그 전승을 기록한 말씀들에로 이동시켰다. 거룩한 텍스트들이 그것을 통해 삶이 보여지는 렌즈로서뿐만 아니라 사실과 권위의 자리가 되었다. 헤리스에게 이 과정의 결과는 현대 예언들과 정경 사이의 증가되는 긴장이었다. 왜냐하면 “정경적 사고의 부분과 꾸러미는 규범적인 계시를 과거에 묶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스미스의 말로, “‘수준화’(levelling)가 그 글들이 ‘하나님 자신의 한 대용 임재’(ersatz presence)가 되어버림으로써 발생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안에서 들려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글들 자체가 신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헤리스는 이런 전환이 지속되는 계시 경험이 성경에 종속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녀에 따르면, 스미스는 권위를 기록된 말씀에 두는 텍스트적 접근의 차용이 지속적인 계시의 실행을 어떻게 누그러뜨리는가를 보여준다. 그 결과는 현대 계시 경험들의 희석 또는 거부이다. 그는 이 과정이 2세기 교회 안에서는 뚜렷했고, 현재는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한 신복음주의 전통의 차용 안에서 되풀이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스미스와 다른 사람들이 알아차린 것처럼, 신복음주의는 텍스트 중심적 공동체(a textual community)이며, “그것의 경험을 텍스트의 지평에서 정리한다.” 권위는 인물보다는 텍스트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며, 말해진 말씀보다는 기록된 말씀에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헤리스는 계시 경험과 성경을 구분하고 그 구분을 신정통주의, 바르트에 의해 지지받으려 한다. 스미는 성경은 “신적 임재의 장소”로 인식되지 말아야 하며, 그보다는 “교회 안에 하나님 임재의 권능에 대한 간증”으로 인식되어야만 할 것을 제안한다. 그래서 텍스트의 권위는 생득적인 것이기보다는 획득된 것이다. 권위는 텍스트 안에 새겨진 것이 아니고, “텍스트가 가리키고 있는 분에게” 있다. 헤리스에 따르면, “이것은 바르트의 신학과 닮았다. 바르트는 성경을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라고 주장했다. 바르트는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의 인물 사이를 존재론적으로 올바르게 구별했다.”
헤리스는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방식은 무엇보다도 성경 연구, 특히 역사적-문법적 접근(a historical-grammatical approach)를 통하는 것이라고 파악했다. 그녀는 신복음주의자들의 특별계시 중단론이나 중재론이 성경에 대한 역사적-문법적 접근의 결과물이라고 파악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파악과는 다르게 신복음주의자들은 성경의 축자적 영감을 부인하고 역사적-문법적 접근이 아닌 고등비평, 역사비평 접근을 채택하고 있다. 오늘날 신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성경론이다. 신복음주의는 성경관에 있어서 근본주의가 믿어온 축자영감설에 동의하기를 주저한다. 마드슨은 풀러신학교(Fuller Theological Seminary)의 변화가 신복음주의를 예시한다고 보았다. 풀러신학교가 창건된 이후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신학교 창건 당시의 교수들의 신앙과 신학과는 달리,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되 성경의 무오성(Inerrancy)을 믿지 않는 교수들을 영입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교수들과 믿지 않는 교수들 사이에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의견 충돌이 일어나곤 했다. 이런 갈등은 1962년에 대충돌을 발생시켰다. 이 사건은 토요일에 발생했기 때문에 “암흑의 토요일”(Black Saturday)라고 일컬어진다. 이때부터 풀러신학교는 성경의 무오성을 교수들에게 강요하는 “서명”을 폐지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풀러신학교는 “개방된 복음주의”(open Evangelicalism) 신학교로 변했다.
블룸버그(Craig L. Blomberg)는 신복음주의자로서 성경의 어떤 이야기들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블롬버그는 “신역사론”(New Historiography)을 주장하고 있는 마이클 리코나(Michael Licona)가 그레고 로만 전기(Greco-Roman bios)를 성경 연구에 사용하는 장르 비평(genre criticism)에 의해 복음서의 부분들을 비역사화(dehistoricize)하는 것을 지지한다. 리코나는 전기가 유동적인 장르였기 때문에 역사가 어디에서 끝나고 전설이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결정하기가 어렵다고 말하며,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이후 성도들의 부활(마 27:51-54)과 예수의 무덤에 천사들의 나타남을 “시적”(poetic) 요소들이나 “전설”(legend)을 반영하고 있는 비역사적인 것으로 규정한다. 블룸버그는 리코나를 따라 복음서들 안의 명백한 이야기 구절들의 역사성을 부정한다.
헤리스는 계시 경험보다 성경에 권위를 더 두는 것을 성경숭배라고 비판했다. 그녀는 스미스를 따라 계시 경험이 성경의 권위 아래 놓이는 것은 오순절 공동체들 안에서의 지속적인 계시의 실행을 위협하며, 하나님보다 성경을 더 사랑하는 “성경숭배”(bibliolatry)로 이끄는 성경에 대한 왜곡된 교리에서 절정을 이룬다고 경고한다. 헤리스는 성경의 권위를 무너뜨릴 뿐만 아니라, 그 권위를 사수하려는 것을 “성경숭배”라고 비난한다. 정작 헤리스는 경험숭배에 빠진 것이 아닌가? 그래서 그녀의 눈에는 성경의 권위 사수가 성경숭배로 보이는 것인가?
이상환과 헤리스는 성경의 권위를 보존하면서도 계시 경험의 지속성을 모색해야 했지만, 그 반대로 했다. 이런 과오는 종교개혁을 일으킨 개신교도들이 중세 가톨릭에 대항해 그렇게 지키려 했던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손상시킨 것이다. 개신교적 특별계시 중지론자들과 중재론자들이 그 입장들을 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런 과오가 발생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의 권위는 아예 건드리지도 말고, 그 권위에 도전하지도 말라는 것이다. 이상환과 헤리스는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을 위해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켰다. 오순절 신학을 위해 성경을 격하, 손상시킨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큰 오순절적 교단인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그 설립 초기부터 지금까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로 여겨왔다. 1914년에 결성된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1916년에 “신앙진술문”을 채택했다. 그 진술문 제1항은 “영감된 성경”(The Scriptures Inspired)이라는 제목 아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말씀,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게로 향한 계시, 신앙과 행위에 있어서 무오한 규율이고, 양심과 이성보다 우위에 있으며, 그러나 이성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선언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2013년에도 여전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계시라고 믿고 있다. 2013년에 총회에 의해 인정된 신앙진술문 제 1 항은 영감된 성경(The Scriptures Inspired)에 대해 진술한다. “구약과 신약 성경은 둘 다 하나님의 축자적 영감을 받았으며,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계시이고, 신앙과 행위의 무오하고, 권위 있는 규율이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는 분리될 수 없다. 그래서 성경도 계시오, 예수 그리스도도 계시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성경에 기록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성경 이외에서는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는 분리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의 비분리성을 말한다. 그는 자신이 전한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며(갈 1:12), 편지의 내용은 “주의 명령”이라고(고전 14:37), 즉 하나님의 명령,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단언한다. 그 비분리성에 관해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M. Luther)의 권고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는 성경과 하나님의 불가분리성을 역설했다.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 즉 성경은 하나님께서 스스로를 사람에게 나타내시는/계시하시는 수단이다. 그는 성경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만나라고 권고한다. 그리고 성경을 통하지 않고도 계시는 하나님을 제처두라고 권고한다.
이제 자신의 본성과 엄위 속에 계시는 하나님은 제처두어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우리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도 없으며 하나님도 우리가 그런 하나님과 교섭을 갖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우리는 우리에게 스스로를 나타내시는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을 입고 그 말씀 속에서 스스로를 드러내시는 하나님과 상관이 있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시키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도 사라진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시키는 순간부터 성경에서 비 예수 그리스도적인 것과 참 예수 그리스도적인 것을 서로 분리시키려는 어쳐구니없는 작태가 벌어지기 시작한다.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시킬 수 없으며, 성경의 예수 그리스도 전체가 참 예수 그리스도시다. 이렇게 분리시킬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을 분리시키려한 이상환과 헤리스의 행태는 마땅히 비판받아야 한다. 그들의 과오는 극복되어야만 하고, 적절한 방향으로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이 전진해야 한다.
VI. 오순절적 특별계시 지속론을 위한 대안적 틀
신정통주의, 그리고 신복음주의를 틀을 극복하고 오순절 특유의 특별계시 지속론을 담을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틀을 모색해야 한다. 이 대안적 틀은 성경의 권위 보존과 특별계시의 지속을 동시에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이상환은 오순절적 특별계시 지속론을 위한 대안적 틀로서 조직신학자답게 삼위일체론을 꺼내 들었다. 그는 “오순절적 계시의 본질은 삼위일체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상환은 종래의 계시론이 그리스도 중심적이라고 비판하고 보다 균형잡힌 삼위일체적 계시론을 모색했다. 그에게 성령과 계시는 본질적으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진다. 성령침례는 성령 자신의 존재를 계시하는 자신의 독특한 활동이다. 성령침례는 그 자체가 계시적 수단인 동시에 계시의 객관적인 실체이다. 이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에게 양도될 수 없는 성령 자신만의 독특한 활동과 계시이다. 삼위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성령의 독특한 활동이다. 성령침례는 그 자체가 계시적 수단인 동시에 계시의 객관적인 실체이다. 이는 성부와 성자 하나님에게 양도될 수 없는 성령 자신만의 독특한 활동과 계시이다. 삼위 하나님의 관계 속에서 성령의 독특한 활동과 존재가 바로 성령침례에 의하여 계시된다. 성령의 예언적 계시는 특정한 상황과 존재를 위한 하나님의 계시이기 때문에 성경적 계시에 상황성을 제공하는 차원에서 후자에 보완적이다. 성자의 계시인 성경의 신적 말씀이 예언적 계시의 신적 근원과 진실성과 권위를 판단하는 근거가 됨으로써 전자는 후자에 보완적이다. 성부 하나님의 계시는 성자의 구속적 계시와 성령의 예언적 계시에 창조적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후자에 보완적이다. 그러므로 삼위 하나님의 삼위적 계시들은 일체 속에서 서로 공존하며 상호 보완적이다. 그런데 그는 성령이 성령침례의 수여자시고, 또한 계시자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주장을 성경적으로 뒷받침 하지는 않았다. 그 주장은 순전히 논리적 사고에 의존한 것이다. 향후 성경적 뒷받침을 받는 삼위일체적 계시론을 더욱 확대,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이상환은 오순절주의자들은 개신교보다는 로마 가톨릭과 그리고 동방정교회와 더 공통점을 갖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이 언급을 확대하거나 그것의 구체적인 사례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아마도 이 언급은 한편으로 서방 교회의 필리오크를 거부하는 동방 교회의 성령의 성부로부터의 단독 발출을 염두에 둔 것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오순절주의와 로마 가톨릭의 유사점을 언급하며 염두에 둔 것은 추측하기 어렵다.
헤리스는 대안적 틀로서 로마 가톨릭적 접근을 제시한다. 그녀는 “대안적 틀: 계시 경험에 대한 가톨릭적 접근(An Alternative Framework: The Catholic Approach to Revelatory Experience)”이라는 제목의 장을 따로 마련하고 그것을 제안한다. 헤리스는 오순절적 교회들 안에서 계시 경험의 실행을 유지하기 위해, 오순절주의자들의 경험적으로 지속적인 세계관을 반영하는 신학적 접근이 필요하다고 보고 이것은 가톨릭 전통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녀의 제안은 카스텔로와 같은 사람들의 연구에 의존했다. 카스텔로에게,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에 대한 오순절적 강조는 가톨릭 신비주의가 “하나님과의 연합”을 향한 움직임을 강조하는 것과 유사하다. “오순절주의를 주로 가톨릭 교회의 신비주의 전통과 유사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그 신비주의 전통의 대면(encounter)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적인, 그리고 대폭적인 강조이다.” 이런 신비주의 유형은 그 안에서 경험이 연구적이기 보다(investigative)는 계시적(revelatory)이다. 오순절적 경험을 통해, 하나님의 신비 자체가 계시된다. 가톨릭 신비주의자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런 지식은 관계적이기도 하고 지적이며, 그것의 궁극적인 목적으로서 변혁을 발생시킨다.
카스텔로의 관점은 오순절주의를 신비주의적 전통과 관련시켜온 또는 그 전통을 그들의 연구에 포함시켜 온 몇 학자들의 관점과 일치한다. 예를 들면, 신학자 사이몬 찬(Simon Chan)은 기도 실행들과 영성의 영역에서 오순절주의와 가톨릭 신비주의 사이를 연결시키려 노력해 왔다. 쿨터(Coulter)는 오순절주의자들의 해석학적 접근과 중세 신비주의 사상가들의 해석학적 접근 사이의 유사성을 인지해 왔다. 사회학자 폴로마(Poloma)는 오순절주의자들을 “중심가 신비주의자들”(Main Street Mystics)이라고 부른다. 카스텔로의 연구에 대한 그의 논평에서, 신학자 샴미 알패로(Sammy Alfaro)는 카스텔로가 오순절 학계에서 오순절주의의 신비주의적 요소에 대해 몇 가지 신학적 담론을 제시한다고 말한다. 로벡은 전통 오순절주의자들과 가톨릭 은사주의자들 가운데서 예언 은사의 실행을 “가교가 놓여질 수 있는” 한 장소라고 묘사한다.
헤리스는 영적 경험에 대한 공유된 강조와 함께, 계시 경험들에 대한 가톨릭적 접근은 자기들의 경험을 숙고하려는 오순절주의자들을 위해 적절한 대화 상대라고 본다. 그녀는 가톨릭 신학자 니엘스 흐비트(Niels Hvidt)의 기독교 예언에 대한 다학제적(multi-disciplinary) 연구를 예로 들었다. 그녀에 따르면, 흐비트의 연구는 오순절적 패러다임과 일치하는 경험적으로 지속적인 접근을 반영한다. 흐비트는 현상적 관점에서 현대 경험과 성경 경험을 다르게 취급하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고, 그리고 구약 예언과 기독교 예언은 많은 공통점들을 공유한다고 확신한다. 참으로, 그는 계시의 그 어떤 “종결”이라도 주장하는 인식도 추방할 것을 주장한다. 계시는 그리스도로 끝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도들로 또는 정경으로도 끝나지 않았다. 더하여, 그녀에 따르면, 흐비트는 예언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계시 경험”(the individual revelatory experience)에 주목하며, 실제적인 경험을 숙고하는 것의 가치를 회피하는 그루뎀과는 다르게, 역사 속의 예언적 인물들의 실제 경험으로부터 오는 통찰들을 숙고한다.
헤리스는 비록 성경론에서는 실패했지만, 오순절적 특별계시 지속론이 지향해야 할 방향은 어렴풋이 잘 잡았다. 그녀는 가톨릭 계시론 안에 무언가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이 참고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감각적으로 감지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지는 못했다. 그녀가 어렴풋이 감지한 것을 명확하게 드러낼 필요가 있다. 오순절적 특별계시 지속론을 위해서는 가톨릭 계시론을 더 탐구할 필요가 있다.
필자가 보기에 가톨릭 안에 있는,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을 위해 참고할 만한 것은 바로 가톨릭 교회가 계시를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로 대별하고, “사적 계시”(Private Revelation)의 지속을 공식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2005년부터 2013년까지 제 265 대 교황 베네딕토 16세를 역임했던 가톨릭 신학자 라칭거(Joseph Card. Ratzinger)는 가톨릭 교회의 계시에 대한 가르침을 “공적 계시”(public Revelation)와 “사적 계시들”(private revelations)로 구분한다. 라칭거에 따르면, 그 두 실제들은 정도(degree)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본질(essence)에서도 차이가 난다. 라칭거에게, “공적 계시”(revelatio Publica, 公的啓示)라는 용어는 사람에게로 향해지는 하나님의 드러내시는 행위 전체를 지시하며, 그것의 문학적 표현이 구약과 신약이라는 두 부분으로 된 성경에서 발견된다. 이것은 대문자로 시작하는 “계시”(Revelation)라는 단수 명사로 칭해지는 데,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자신에게로 이끄셔서 온 세상을 자신과 연합시키기 위해, 그것 안에서 그분의 성육신하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스스로 사람이 되시기까지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공적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서 그 완료에 도달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말씀하셨다. 즉,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완전하게 계시하셨다. 그래서 계시는 신약 안에 언명된 대로 그리스도의 신비의 성취로 완료되었다.
가톨릭 교회에게 공적 계시가 완료되었다는 것을 더 설명할 필요가 있다. 공적 계시가 완료되었다는 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구원”에 관한 계시가 성경으로 완료되었음을 의미한다. 가톨릭 교회의 “계시헌장” 제4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혈육을 취하신 말씀이시며 인간들에게 파견되신 인간이시고, 하느님의 말씀을 하시며(요한 3,34), 아버지께서 맡기신 구원의 임무를 완수하신 분이시다(요한 5,36; 17,4 참조) . . . 따라서 새롭고 결정적인 계약인 그리스도의 구원 경륜은 결코 폐기되지 않을 것이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스럽게 나타나시기 전에는(1티모 6,14; 티토 2,13 참조) 어떠한 새로운 공적 계시도 바라지 말아야 한다”라고 쓴다. 공적 계시, 즉 구원에 관한 계시는 성경으로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는 성경으로 종료된 공적 계시 이외에 지속적인 사적 계시를 인정한다. 헤리스는 가톨릭 신학자 흐비트가 “개인적인 계시 경험”(the individual revelatory experience)에 주목한다고 파악했다. 헤리스가 “개인적인 계시 경험”이라고 표현한 것은 가톨릭 교회 공식 용어로 “사적 계시들”(revelatio privata, 私的啓示)이다. 가톨릭 교회에게 소문자로 시작하는 복수 명사 “사적 계시들”은 신약의 종결 이후에 발생해 온 모든 환상들과 계시들을 일컫는다. 가톨릭교회교리서(Catechismus Catholicae Ecclesiae)는 사적 계시들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른바 ‘사적’ 계시들이 있었고, 그중의 어떤 것들은 교회의 권위로 인정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것들은 신앙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의 결정적 계시를 ‘개선’하거나 ‘보완’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의 한 시대에서 계시에 따른 삶을 더욱 충만하게 살 수 있도록 돕는 데에 지나지 않는다.
라칭거에게 이것은 두 가지를 명확하게 한다. 첫째로, 사적 계시들의 권위는 본질적으로 완성된 공적 계시(the definitive public Revelation)의 권위와 다르다. 공적 계시는 신앙을 요구한다. 그 안에서 사실적으로 하나님 자신이 인간의 말과 교회라는 살아있는 공동체의 중재를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신앙은 그 어떤 다른 인간적 신앙, 신뢰 또는 견해와는 다르다. 말하고 있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확신은 나에게 내가 진리 자체와 교제하고 있다는 확신을 준다. 이것은 나에게 그 어떤 인간적 앎의 방식에 의한 증명을 넘어서는 확실성을 준다. 이것은 그 위에서 내가 나의 삶을 세우고 그리고 그것에 내가 내 자신을 죽음 속에서도 맡길 수 있는 확실성이다. 둘째로, 사적 계시는 이 신앙에 도움이 되며, 틀림없이 나를 완성된 공적 계시에로 되돌아가도록 인도함으로써 그것의 확실성을 보여준다. 만약 어떤 사적 계시가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면, 그리스도를 의존하지 않게 한다면 또는 그것 자체를 구원의 또 다른 그리고 더 나은 계획을 제시하기까지 한다면, 복음보다 더 중요하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것은 분명히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은 우리를 복음 안으로 보다 더 깊이 안내하는 것이지, 복음으로부터 멀어지게 안내하지 않는다. 이런 맥락에서, 칼 라너가 말한 것처럼, “공적 계시는 사도들의 소천과 함께 끝이 났으며, 따라서 그 후의 계시들은 교회의 신앙의 확신에 속하지 않고, 이를 ‘가톨릭 신앙’으로 믿을 의무는 없다. 교회는 그런 사적 계시들이 교회의 신앙내용과 일치할 때에만 ‘사적 계시’로 다룰 수 있다.”
가톨릭적 공적 계시와 사적 계시 구분은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을 위한 적합한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종결된 계시는 전 인류를 향한 공적 계시로 명명되며 구원에 관한 계시로서 성경으로 종결되었다. 지속되고 있는 계시는 사적 계시라고 명명되며 어떤 개인을 향한 계시로서 성경 완료 이후에도 지속되고 있다. 이런 구분과 규정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와 성경을 일치시키고 성경의 권위를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계시의 지속성을 확보한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을 외치며 가톨릭 교회에서 분리해 나온 종교개혁자들의 후예를 자처하는 어떤 사람들이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고 하락시키고 있는데, 오히려 가톨릭 교회는 성경의 권위를 보존하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렇게 성경의 권위를 하락시키는 것은 “비록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은 성경의 충분성에 대해 립서비스를 하지만, 실제로는 보통 경험과 ‘사적 계시’(personal revelation)가 보다 더 높은 권위를 갖는다”라는 비판을 받을 수 밖에 없게 한다. 완료된 것과 지속된 것의 구별은 ‘오직 지속’만을 주장하려다 ‘오직 성경’의 권위를 훼손시킨 두 기존 연구의 과오를 반복하지 않게 할 것이다. 성경의 권위를 그대로 보존하면서도, 계시의 지속성을 확보하는 가톨릭 교회의 계시론은 성경의 권위를 손상시킨 기존의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 연구들의 단점을 보완함으로써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을 위한 적합한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완성된 이후 오늘날에 와서 방언 등의 성령의 은사로서 주어지는 성령계시는 성경계시와는 기능적인 면에서 차이가 있다. 공적 계시, 즉 종료된 성경 계시는 어떤 상황에서도 변하지 않는 인류의 구원에 대한 진리가 담겨있는 새롭지 않아야 할 “구원적 계시”(salvific revelation)이다. 만약 이상환의 주장대로 그리스도의 계시로부터 독립된 성령 계시의 지속성만 주장한다면, 그리고 헤리스의 주장대로 구술적인 계시의 지속성을 우위에 두고 그 구술 계시의 일부를 기록한 텍스트, 즉 성경을 하위에 둔다면, 어떤 사람이 “내가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는데, 성령이 내게 계시했는데, 내가 그리스도다! 나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라고 주장하는 것을 판별하거나 거부할 근거를 상실하게 된다. 구원적 계시가 성경으로 종결되었다면, 그런 주장을 성경에 따라 판별하고 거부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신교 안에서도 구원에 관련된 성경의 종결성에 대한 언급들을 찾을 수 있다. 마틴 루터는 성경이 구원을 위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가르쳐준다고, 구원을 위한 믿음은 사람의 말이 아닌 오직 성경을 통해서만 온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성경으로 구원에 관한 계시가 끝났다고 주장했다.
그 책들은 당신이 그 밖의 다른 책이나 다른 가르침을 듣거나 보지 않더라도 당신의 구원을 위해 알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가르쳐준다.
이미 말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다스려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외적인 행위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믿음 속에서 다스려져야 한다. 그런데 믿음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만 올 수 있다.
최근에 존 파이퍼도 성경의 충분성(the sufficiency of the Bible)은 구원(salvation)에 관한 것임을 언급했다. 그는 미국의 침례교 목사이며 휘튼 칼리지와 풀러 신학교를 거쳐 뮌헨 대학교에서 신약학 전공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베델 대학에서 6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고 미국 미네소타주 미네아폴리스에 있는 베들레헴 침례교회에서 33년 동안 목회하고 있다. 그는 칼빈주의자이지만 은사의 지속성을 인정한다. 파이퍼는 디모데후서 3장 15절에서 17절(“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과 유다서 1장 3절을 해설하면서 “다른 말로 하면, 성경은 유일하게 (단번에) 영감된 그리고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길을 알기 위해 그리고 순종의 길을 알기 위해 필요한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파이퍼는 이것을 보다 명확하고 풍부하게 부연 설명하지는 않았다.
중재론자 웨인 그루뎀도 성경의 충분성과 관련하여 구원을 언급했다. 그는 성경의 충분성(The sufficiency of Scripture)이란 성경이 하나님께서 그분의 사람들에게 구원사의 각 단계에서 뜻하신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또한 그는 이 충분성은 성경이 우리가 구원을 위해(for salvation) 필요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보았다. 그런데 그도 이것을 더 이상 발전시키지 않았다.
오순절 신학자 히긴스도 성경이 구원을 위해 충분함을 주장했다. 그는 비록 사람은 하나님의 지식을 결코 완전히 다 알 수는 없을 것이지만,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의 필요에 관련하여 불충분하지는 않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은 구원을 위해 충분하다”고 말했다.
반면에 사적 계시, 즉 이상환의 주장대로 계시자 성령에 의해 지속되고 있는 새로운 계시는 상황에 따라 성경 계시를 해석하거나 선포하는 “해석적 계시”(interpretative revelation), 구원받은 자들을 권면하며 안위하는 “목회적 계시”(pastoral revelation)다. 사적 계시는 구원에 관한 계시를 포함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만약 어떤 사적 계시가 구원에 관해 성경 계시와 다르고 새로운 것을 말한다면, 그 계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은 가짜 말이므로 배격되어야 한다.
VII. 지속되는 특별계시의 분별 필요성과 분별 척도
지속되는 특별 계시, 즉 사적 계시는 엄정하고 세심하게 분별 될 필요가 있다. 그런 분별의 필요한 이유는 사적 계시에 여러 가지 근원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요일 4:1)라며 분별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오순절 신학자 폴 킹은 오순절주의자들에게 나타나는 현상들의 근원이 하나님 이외에 마귀일 수도 있으므로 그것들을 잘 분별할 필요성을 제기했다.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한 모든 초자연적 나타남들로 보이는 것들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것은 비-오순절주의자들의 자동반사적 반대를 일으킨다. 그들은 그 모든 현상을 마귀적인 것이라고 칭해버린다. 오순절주의자들의 그런 비-오순절적 비판에 대한 반응은 종종 마귀적 나타남들의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이다. 만약 오순절주의자들이 자기 반성적이 되고, 더욱 더 엄정해져서 육적이고 가짜 나타남들의 가능성과 실제성을 인식하며 분별한다면, 그들의 경험들은 비-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해 더 개방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의 분별 필요성은 사적 계시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오순절운동의 시조인 찰스 파함은 이미 사적 계시의 근원이 두 가지로부터 올 수 있으므로 분별이 중요하다는 것을 갈파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계시와 환상과 꿈을 주시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믿으며 알고 있었지만, 마귀도 종종 빛의 천사를 가장하여, 음성으로, 계시로 환상으로 온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아무리 매력적이고 멋있어 보일지라도 사람이나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받아들이지 않고, 그리스도를 높이며 영화롭게 하는 하나님의 말씀과 완전히 부합하는 것만을 믿고 받아들이자는 엄격한 규칙을 정했다.
윌리엄 더함은 하나님과 마귀에 더하여 사람을 가능한 근원으로 더했다. 그는 기독교 집회나 운동들에 나타나는 초자연적 현상들을 세 가지로 분류하고 분별했다. 그에 따르면 초자연적 “나타남”(manifestations)에는 세 가지 독특한 종류가 있다. 첫 번째 것은 하나님의 영의 직접적 역사로 말미암아(by the direct operation of the Spirit of God) 발생한다. 이런 나타남이 바로 그가 옹호하고자 하는 나타남이다. 반대쪽 끝에 있는 다른 나타남은 마귀의 능력의 직접적 역사(the direct operation of demon power)에 의해 발생하는 것이다. 성경에 대한 지식을 조금이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귀가 능력이 있어서, 원할 때마다 사람들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그 두 나타남들의 중간에 그가 육신의 나타남들(manifestations of the flesh)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이라고 말할 수 없고, 그렇다고 감히 마귀의 역사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 많다.
가톨릭 신학자 윌리엄 모스트(William G. Most)는 어떤 계시적 발화가 발생했을 때 가능한 근원을 세 가지로 제시했다. 그는“ 어떤 사람이 어떤 계시나 환시를 받을 때 역사하는 영의 종류는 어떤 것이 있는가?”라고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이것을 결정하는 것은 영 분별이라고 불린다고 말한다. 어떤 계시적 발화가 발생했을 때 올바른 영을 분별해내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그가 제시하는 계시나 환시의 근원에는 세 가지다. “선한 영”(good spirit), “악한 영”(evil spirit) 그리고 “자기 제안”(auto-suggestion)이다. 모스트가 “자기 제안”이라고 명명한 것을 “인간의 영”이라고 수정하는 것이 일관성이 있을 것이다. “자기 제안”이나 “인간의 영”은 발화의 근원이 매체인 인간의 영 자신을 가리킨다. 그의 분류는 더함의 분류와 매우 유사하다.
종합하자면, 사적 계시 현상을 근원에 따라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 부류는 ‘참 사적 계시’(true special revelations)이다. ‘참 사적 계시’는 그 근원이 하나님인 경우에 발생한다. 두 번째 부류는 ‘유사 또는 가짜 사적 계시’(quasi or pseudo – special revelations)이다. ‘유사 또는 가짜 사적 계시’는 그 근원이 하나님이 아닌 악령인 경우에 또는 매체인 발화자가 자기 의도를 계시로 가장할 때 발생한다. 세 번째 부류는 ‘변질된 사적 계시’(deteriorated special revelations)이다. ‘변질된 사적 계시’는 그 매체가 되는 발화자가 자기 자신의 의도에 따라 참 계시를 가감할 때 발생한다.
이렇게 사적 계시의 근원이 세 가지일 수 있기 때문에 어떤 사적 계시 현상이 발생했을 때 그것을 근원에 따라 정확하게 분별해내기 위한 기준 또는 척도를 세우는 것이 필요하고, 중요하다. 이런 필요성과 중요성이 특별 계시를 “주 계시”(the main revelation)와 “종속 계시”(the subordinate revelation)로 나누게 하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성경을 분별의 기준 또는 척도로 삼아 지속적인 특별 계시, 즉 사적 계시의 진위성을 분별해 낸다는 것이다. 그래서 종결된 특별 계시인 성경 계시를 분별 기준이 되는 ‘주 계시’라고 명명하고, 분별 대상이 되는 지속적인 특별 계시, 즉 사적 계시를 ‘종속 계시’라고 명명했을 것이다. 분별을 위해 계시를 “주 계시”와 “종속 계시”로 분류한 것은 적절한 것이다. 이상환은 “오순절적 예언이 성령 하나님의 참 계시로 판명되기 위하여는 이미 주어진 성경적 계시와 상반하지 않고 원칙적으로 일치해야 한다”며 간접적으로 성경 계시의 척도성을 말했다. 종결된 특별 계시인 성경, 즉 공적 계시는 지속되는 특별 계시, 즉 사적 계시의 근원과 진위를 분별해내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기본이 되는 기준과 척도이다.
그런데 웨인 그루뎀이 분석한 것처럼 성경에 기록된 사도적 권위를 갖지 않는 사적계시 형태들의 계시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밝힌 것처럼 성경에 기록된 사적계시 형태의 계시들은 신앙생활에 유익하지 않은 것이 없고 모두 유익하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딤후 3:17). 그 유익성을 다른 말로 한다면, 무오류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사적계시 형태의 계시들은 이미 분별되어 유익하고 오류가 없기 때문에 기록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그 사적계시 형태의 계시들의 유익성 또는 무오류성은 구원계시와 함께 정경의 종결 이후에도 지속되는 사적계시들에 대한 분별의 기준과 척도가 된다. 강경한 중단론은 이런 의로 교육하고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유익하고 온전케 하는 사적계시 형태의 계시들조차도 중단되었다고 주장한다. 그 중단을 사적계시 형태의 계시들이 정경에 기록되는 것이 종결되었다는 의미를 갖는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 적절할 것 같다. 그리고 정경에 기록되는 것이 종결된 사적계시 형태의 계시들은 그 기록 종결 이후에도 지속되는 사적계시들의 기준과 척도라고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VIII. 나가는 말
이상과 같이 본 연구는 성경의 권위를 보존하면서도 특별계시의 지속성을 확보함으로써 이상환과 헤리스의 기존의 두 연구들의 단점을 보완하고 진정한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을 모색했다. 기존의 두 연구는 한 편으로 오순절적 특별계시의 지속을 주장하기 위해 신복음주의 또는 신정통주의의 틀을 벗어나 오순절주의 특유의 틀을 모색하려 계시의 지속만을 주장했으나, 다른 한 편으로 그것을 위해 성경과 그 권위를 격하시키고 손상시킴으로써 그것들을 벗어나지 못했다. 본 연구는 성경의 절대적 권위를 보존하면서도 오순절적 특별계시 지속을 신학적으로 숙고함으로써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을 적절한 방향으로 한 걸음 더 전진시키고자 노력했다.
먼저 오순절 특별 계시 지속론을 위한 기초 작업으로서 오순절의 정체성은 경험이 아닌 성경에 대한 신학적 연구라는 것, 그리고 성령 침례에 동반되는 방언임을 밝혔다. 그리고 오순절 특별 계시의 주요 매체로서 방언의 계시성을 드러내었다. 이후에 기존의 연구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시킴으로써 성경이 계시임을 부정하고, 성경을 계시나 계시 경험에 대한 인간적 기록물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시켰고, 그럼으로써 계시 경험의 지속성을 확보하려 한 것을 비판하고,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는 분리시킬 수 없는 것임을, 성경도 계시임을 분명히 하고 성경의 권위를 보존하였다.
그다음, 오순절 특별 계시 지속론의 대안적 틀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에 관해 계시하는 “공적 계시”는 성경으로 종결되었으며, 어떤 특정한 사람에게 계시하는 “사적 계시”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가톨릭 계시론을 참고할 것을 제안했다. 종결된 것은 구원에 관한 계시이며, 지속되고 있는 것은 신앙 생활에 관한 계시라고 계시를 분류하는 것은 오순절 특별 계시 지속론을 위해 적절한 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 틀은 성경의 권위를 보존하면서도 특별 계시의 지속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적절한 오순절적 특별 계시 지속론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적 계시들은 하나님, 마귀, 사람이라는 그 근원에 따라 ‘참 사적 계시,’ ‘유사-가짜 사적 계시,’ 그리고 ‘변질 사적 계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분별의 필요성을 제기하였으며, 사적 계시, 즉 “종속 계시”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척도는 “주 계시”인 성경임을 밝혔다.
본 연구는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의 모든 것을 다루지는 않고, 중요한 몇몇 요소들만 다루었다. 다른 연구자들이 본 연구를 비판하고, 더 보완하고, 구체화하고, 체계화시키기를 바란다.
오순절 특별계시 지속론 비교
주제들 | 주장자 | ||
헤리스 | 이상환 | 이창승 | |
공통점 | 1. 성경 종결 이후 계시 지속론 주장 2. 오순절 계시론 모색: 오순절 계시 실행과 신학(틀) 일치 모색 |
||
2. 신학적 분야 | 실천신학 | 조직신학 | 조직신학 |
3. 오순절 규정 | 공식적으로 하지 않음 실질적 경험(구술) 중심 |
성령세례 중심 + 방언, 예언 경험 |
성령침례 + 방언 신학, 성경 연구 중심 |
4. 계시 방식 | 예언 + 꿈, 환상 | 예언 | 방언과 통역 |
5. 탈 신정통/신복음주의 |
선언적 탈신복음주의 실질적 더신복음주의화 |
선언적 신정통주의 실질적 더신정통주의화 |
탈 신정통/신복음주의 실질적 오순절주의 |
6. 계시와 성경 관계 |
‧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 ‧ 성경은 계시에 대한 인간적 기록 ‧ 칼바르트 추종 역사적문법적연구배격 (고등비평수용) |
‧ 계시와 성경 분리 ‧ 성령도 계시자 ‧ 칼바르트 비판 & 칼바르트 추종 ( ) |
예수 그리스도와 성경 분리 불가 예수를 성경을 통해서만 알 수 있음 칼바르트 배격 역사적문법적연구수호 고등비평배격 |
7. 성경과 지속계시 권위 |
지속구술계시 우위 성경문서계시 종속 |
성경계시와 성령계시 상호보완 성령계시로 성경계시 분별 |
성경계시와 지속계시 내용과 기능에 있어서 차등, 특수성, 상호보완 |
8. 성경 가치 | ‧ 성경 격하 ‧ 성경사수를 성경숭배라 공격 ‧ 가톨릭보다 더 성경 격하 |
‧ 성경 격하 ‧ 가톨릭보다 더 성경 격하 |
‧ 성경 사수 보존 ‧ 성경화 |
8. 종결계시와 지속계시 |
문서적 계시 종결 구술적 계시 지속 |
성경계시 종결: 옛것 성령계시 지속: 새것 |
구원계시 종결: 옛것 생활계시 지속: 새것 |
9. 대안 | 가톨릭 전통과 신학 하나님과의 대면(오순) = 하나님과의 연합(가신) |
삼위일체적 계시 성령도 계시자 |
가톨릭 계시론: 공적계시: 구원계시 사적계시: 생활계시 |
11. 분별이유 | ‧ 유사/가짜 사적 계시: 악령, 자기의도 근원 ‧ 변질 사적 계시: 하나님 근원 그러나 수용자 가감 개입 |
||
12. 분별기준 | 모호 없음 | 간접적으로 성경 | 성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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