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 아세아연합신학교 ThM 과정 중
이 창 승
목 차
I. 서론 ---------------------------------------------
A. 문제제기와 논지 ----------------------------------
B. 연구 범위와 방법 ---------------------------------
1. 연구 범위 -------------------------------------
2. 연구 방법 -------------------------------------
II. 사도행전의 구약 인용 --------------------------------
A.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
B. 신약 성경의 구약 인용과 사도행전의 구약 인용 -----------
III.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중 요엘서 인용 (행 2:16-21) ---------
A.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구조 --------------------------
B. 행 2:16 요엘서 인용 중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문제 ---
1. τούτὸ ἐστιν (“이는”) -----------------------------
2.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마지막 날들에”) ----------
a.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는 누가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주장 -
b.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는 베드로의 대체라는 주장 -----
c.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는 전승을 받아들인 것이라는 주장 -
C. 베드로의 요엘서 인용에 나타나는 종말론 --------------
1. “마지막 날들”(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의 종말론 -----
2. “주의 날”(ἡμερα κυίου)의 종말론 -------------------
3.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이 이루는 종말 -------------
a.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의 병치 -----------------
b.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의 병치에서 드러나는 누가의 종말론 -
IV. 결론 --------------------------------------------
부록
참고문헌
I. 서 론
A. 문제 제기와 논지
누가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행 2:14-40)를 통해 구약성경의 요엘서 2:28-32a(MT Jl 3:1-5)를 인용한다(행 2:16-21). 그런데 누가는 요엘서를 인용하면서 MT(맛소라 텍스트)를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LXX(70인역)과도 다르게 몇 가지를 대체하여 인용한다. 그 대체들 중에 종말론과 관련된 중요한 대체가 있다. 그것은 누가가 요엘서 2:28의 “그 후에”를 사도행전 2:17에서 “말세에”로 대체한 것이다.
이러한 대체는 우리로 하여금 첫째로 그 대체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문제와 그 대체의 자료 혹은 그 대체에 영향을 준 문화가 무엇이었는가라는 문제를 제기하게 한다. 디벨리우스(M. Dibelius), 듀퐁뜨(Dupont) 등은 그 대체는 헬라문화의 영향을 받은 누가 자신의 순수한 창작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필자는 본 소논문에서 행 2:17에 등장하는 요엘서의 대체 인용은 누가의 순수 창작물은 아니며, 베드로의 것일 수 있으며, 보다 정확하게는 누가가 이미 존재했던 구약의 전승들을 계승했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누가는 호세아가 “그 후에”와 “마지막 날들에”를 교차대구법적으로 동의어로 사용한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호3:5), 그 전승에 따라 요엘서의 “그 후에”를 “마지막 날들”로 대체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대체는 우리로 하여금 ‘누가가 구약과 초대교회의 종말론을 변형시킨 것인가?’ 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 콘첼만은 누가가 그리스도가 곧 오시리라는 임박한 초대교회의 종말론을 변형시켰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는 누가의 종말론은 초대교회의 종말론보다는 중간기의 유대 묵시문학적 종말론에 가깝다고 보았다. 그러나 필자는 본 소논문을 통해 누가는 초대교회의 종말론을 변형시키지도 않았으며, 또한 묵시문학적 종말론으로 회귀한 것이 아니라, 구약의 종말론을 그대로 계승하였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구약의 종말론은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이 함께 구성하는 종말구조를 갖는다. 구약은 “주의 날”과 “그 날”을 동의어로 사용하며(예, 습 1:14-15a; 욜 3:14,18a; 슥 14:7-8), 복수 형태인 “마지막 날들”과 단수 형태인 “그 날”을 같은 문맥에서 사용하고 있다(사 2:11, 미4:6-7a). 즉, 구약이 말하는 종말은 “그 날”(주의 날)과 그 이전에 있을 “마지막 날들”이 함께 묶어진 종말이며, 누가는 “그 후에”를 구약에 따라 “마지막 날들”로 바꾸고, 구약에 따라 “마지막 날들”을 “주의 날”과 함께 묶어 종말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 누가는 이러한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을 함께 묶어 제시하는 종말구조 안에서 오순절 성령강림에 대한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이미 시작된 “마지막 날들”을 강조하며, 다른 한편으로 아직 오지 않은 “주의 날”을 기대하게 한다.
필자는 이 소논문에서 이렇게 누가가 “그 후에”와 “마지막 날들”을 동의어로 사용한 구약을 계승하여 요엘서의 “그 후에”를 “마지막 날들”에로 대체하였고,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로 구성되는 구약의 종말론 구조에 따라 이미 시작된 복수형 “마지막 날들”을 아직 오지 않은 “주의 날”과 함께 묶어 종말을 제시하였다는 것을 밝힐 것이다.
B. 연구 범위와 방법
1. 연구 범위
요엘서 인용에 나타나는 누가의 종말론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본 논문은 사도행전 2:16-35에 위치하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중 구약의 요엘서(개역 욜 2:28-32a, MT Jl3:1-5) 인용부분(행 2:16-21)을 주 본문으로 삼는다. 그리고 그 본문에 나타나는 구약의 종말론에 해당하는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여호와의 날”)에 집중하고자 한다.
2. 연구 방법
본 소논문의 연구 방법은 통시적 방법(diachronic method)과 공시적 방법(synchronic method)이 어우러진 공-통시적 방법(Synchro-Diachronic Method)이 될 것이다. 통시적 방법이라 함은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배경이 되는 구약의 요엘서를 살펴보며, 구약에 나타난 “마지막 날들”과 “여호와의 날”에 관련된 단어나 주제를 살펴보고, 유대교 문헌에 나오는 관련된 주제나 단어를 추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시적 방법이라 함은 본고의 본문인 신약의 사도행전 중 행 2:16-35의 본문을 문학적으로 고정된 것으로 인정하고 살펴본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본고의 연구 방법은 신학적인데, 신학적이라 함은 신약 본문에 나타나는 구약의 종말론 주제와 그 의미를 살펴본다는 것을 뜻한다.
II장에서는 신구약의 연속성과 사도행전의 구약인용을 간단하게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III장에서는 먼저 A부분에서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구조를 표로 개괄하고, 다음 B 부분에서 요엘서의 “그 후에”를 “마지막 날들”에로 대체한 주체와 자료에 대한 종래의 설들을 살펴본 후 호세아 3:5을 근거로 필자의 의견을 개진할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C 부분에서 “마지막 날”들에 대한 구약과 중간기 유대교적 의미와 누가의 의미, “주의 날”에 대한 구약과 중간기 유대교적 의미와 누가의 의미를 살펴보고,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의 병치에서 드러나는 누가의 종말론을 결론적으로 추출해 볼 것이다.
II. 사도행전의 구약 인용
A. 구약과 신약의 연속성
바우어가 1800년에 네 권짜리 신약성경신학(Biblische Theologie des Neuen Testaments)을 발간함으로써 구약과 신약을 한 권의 책에 취급하지 않는 흐름이 형성되었지만, 그 흐름에 반대하여 한 권의 책에 구약과 신약을 함께 다루는 흐름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슈툴마허(P. Stuhlmacher)는 신약을 취급하는 신약신학은 신약 전승의 형성을 위해 결정적인 기초를 제공한 구약 성경에 열려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주장들은 구약과 신약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들을 일으켰다. 로울리(H. H. Rowley)는 구약성경은 끊임없이(continually) 앞을 향하고, 신약성경은 끊임없이 뒤를 향한다고 보았다.
하젤은 이와 같은 신약과 구약과의 연속적인 관계를 “상호관계”(reciprocal relationship)라고 이름 붙였다. 그리고 그는 그 상호관계 속에서 드러나는 연속성과 통일성 요소들을 7가지로-(1) 역사적 연결성 (historical connection), (2) 상호 본문 의존성 (Scriptural Dependence), (3) 용어들의 연결성 (Vocabulary), (4) 주제들의 연결성 (Themes), (5) 모형론적 연결성 (Typology), (6) 약속-성취 관계의 연결성 (Promise-Fulfillment), (7) 구속사적 연결성 (Salvation History)-정리하였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은 구속사의 전개 속에서 약속과 성취 혹은 예언과 성취라는 “연속성”(continuity)을 갖는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이러한 “예언과 성취의 연속성”은 신약성경이 구약성경을 직접 인용한 구절들에서(하젤의 용어대로 하자면 “본문 의존성”에서) 보다 더 확실하게 드러난다.
B. 신약 성경의 구약 인용과 사도행전의 구약 인용
엘리스(E. Ellis)는 신약 성경에 나타나는 구약 문구의 형태를 세 가지-“인용”(citations), “암시”(allusions), 그리고 “회상”(reminiscences)-로 분류하였다. 신약 속의 구약 인용은 명백한 “도입형식”(introductory Formulas)을 통해 다른 두 가지 형태들과 구별된다. 토이(C. H. Toy)는 신약에서 613개의 인용들과 암시들을 찾아내었으며, 휸(E. Hühn)은 4,105개라고 주장했다. 시어스(H. M. Shires)는 185개의 구약 문구들에서 239개의 인용공식을 통한 직접인용들을 찾아내었으며, 198개의 명백한 인용공식 없는 인용문들, 1,167개의 의역인용들을 찾아내어 도합 1,604개의 인용들을 찾아내었다. 엘리스(E. Ellis)는 신약에서 발견되는 구약 인용들의 3분의 1이 바울 서신에서 발견되는 것으로 계산한다.
사도행전은 베드로, 스데반, 빌립, 야고보 그리고 바울이라는 5명의 주요 설교자들의 직접인용들을 담고 있다. 사도행전의 설교들에 나타난 27개의 직접인용들을 인물별로 분류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I. 베드로의 설교중 인용
1. 1:20 (시 69:25 [MT 69:26, LXX 68:26])-I.F.: "시편에 기록하되 (γέγραπται)"
2. 1:20 (시 109:8 [LXX 108:8])-I.F.: “그리고” (시 69:25의 인용공식을 공유)
3. 2:17-21 (욜 2:28-32 [MT, LXX 3:1-5])-I.F.: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τούτὸ ἐστιν τὸ εἰρημένον διὰ τού προφήτου Ἰωήλ)
4. 2:25-28 (시 16:8-11 [LXX 15:8-11])-I.F.: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5. 2:34f. (시 110:1 [LXX 109:1])-I.F.: “[그(다윗)가] 친히 말하여 가로되”
6. 3:22f. (신 18:15, 18f.)-I.F.: "모세가 말하되“
7. 3:25 (창 12:3, 18:18, 22:18)-I.F.: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8. 4:11 (시 118:22 [LXX 117:22])-I.F.: “이”(this is, οὑτός ἐστιν)
II. 교회 일반의 인용
9. 4;25f. (시 2;1f.)-I.F.: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III. 스데반의 설교중 인용
10. 7:3 (창 12:1)-I.F.: “가라사대 . . . 가라 하시니”
11. 7:6f. (시 15:13f.)-I.F.: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12. 7:7b (출 3:12)-I.F.: “또 가라사대”
13. 7:27f. (출 2;14)-I.F.: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 . . 가로되”
14. 7:31 (출 3:6)-I.F.: “주의 소리 있어”
15. 7:33f. (출 3:5, 7-10)-I.F.: “주께서 가라사대”
16. 7:37 (신 18:15)-I.F.: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 . . 하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17. 7:42f. (암 5:25-27)-I.F.: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바”
18. 7:48 (사 66:1f.)-I.F.: “선지자의 말한바”
IV. 빌립의 설교중의 인용
19. 8:32 (사 53:7f.)-I.F.: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참조: 35절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V. 야고보의 설교중의 인용
20. 15:16-18 (암 9:11f.)-I.F.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VI. 바울의 설교중의 인용
21. 13:33 (시 2:7)-I.F.: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γέγραπται) 바와 같이”
22. 13:34 (사 55:3)-I.F.: “또 하나님께서 . . . 가르쳐 가라사대”
23. 13:35 (시 16:10 [LXX 15:10])-I.F.: “그러므로 또 다른 편에 일렀으되”
24. 13:41 (합 1:5)-I.F.: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 . . 일렀으되”
25. 13:47 (사 49:6)-I.F.: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26. 23:5 (출 22:28 [MT, LXX 22:27])-I.F.: “기록하였으되”(γέγραπται).
27. 28:26f. (사 6:9f.)-I.F.: “성령이 선지자 이사야로 너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것이 옳도다 일렀으되”
III.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중 요엘서 인용 (행2:16-21)
A.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구조
사도행전 안의 설교들을 연구한 소아드(Marion L. Soards)는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구조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1.0 베드로의 군중들의 결론 부정 (14-21)
1.1 설교를 여는 말 (14)
1.2 상황설명 (15-16)
1.3 요엘 선지서 인용 (17-21)
2.0 베드로의 기독론적 논증 전개 (22-36)
2.1 첫 번째 의견 개진 (22-28)
2.1.1 두 번째 설교 (22절)
2.1.2 기독론적 케리그마 (22b-24)
2.1.3 상호 관련된 증거본문 제시 (25-28)
2.2 베드로의 증거 설명 (29-36)
2.2.1 세 번째 설교 (29a)
2.2.2 제시했던 인용본문 주석 (29b-31)
2.2.3 기독론적 케리그마 (32-33)
2.2.4 다른 인용문 주석 (34-35)
2.2.5 분명한 케리그마와 비난 (36)
3.0 군중을 향한 교훈들과 약속들 (38-39)
3.1 회개와 침례로의 초청 (38a)
3.2 성령에 대한 약속 (38b)
3.3 그 약속에 대한 설명 (39)
4.0 마지막 권고 (40)
B. 행 2:16 요엘서 인용 중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문제
1. τούτὸ ἐστιν (“이는”)
요엘서 2:28-32a(MT 3:1-5) 부분의 인용은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베드로의 구약 인용들 중 세 번째 것이며,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의 군중들의 결론을 부정하는 마지막 부분에 위치하고, 그 설교 중 첫 번째 구약 인용이다. 누가는 행 2:16-21에서 이 요엘서를 명백하고 직접적으로 인용한다. 이 직접성은 “도입형식”(introductory formula)에서 드러난다. 누가는 “알라 투토 에스틴”(ἀλλὰ τούτὸ ἐστιν τὸ εἰρημένον διὰ τού προφήτου Ἰωήλ; No, this is what was spoken through the prophet Joel, NRSV) 라는 명백한 도입형식을 사용하며 요엘서 인용을 시작한다.
2.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마지막 날들에”)
누가가 인용한 요엘서 2:28-3a는 “엔 타이스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라는 말로 시작한다. 누가의 문구를 MT 그리고 LXX와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MT, Jl 2:28 ן־יאַ (그 후에)
LXX μετὰ ταύτα
LUKE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마지막 날들에)
LXX은 MT를 따라 “그 후에”라고 번역하였다. 그런데 누가는 MT와 LXX를 따르지 않았다. 누가는 LXX가 MT를 따라 “메타 타우타”(μετὰ ταύτα)라고 번역한 부분을 “엔 타이스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마지막 날들에)라고 번역하였다. 젠르(R. F. Zehnle)는 이러한 번역을 “대체”(substitution)라고 표현하였다. 이러한 대체는 누가 한 것인가?
a.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는 누가 자신의 창조물이라는 주장
누가 μετὰ ταύτα를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로 대체했는가에 대한 연구의 결과는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뉜다. 첫 번째 그룹은 이 대체는 누가 자신의 창조물 또는 수정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디벨리우스(M. Dibelius), 듀퐁뜨(Dupont), 베노이트(Benoit), 젠르(Zehnle) 그리고 멘지스(Menzies) 등등이 그들이다. 사도행전 안의 설교들에 대한 현대 비평학적 연구는 1922년 캐드베리(H. J. Cadbury)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사도행전을 헬라적 역사문서로 분류하고 사도행전의 설교들이 실제 설교를 그대로 담고 있다기보다는 최종적인 문학적 편집 단계에서 그것을 편집한 역사가의 상상력의 산물이었다고 보았다. 그를 따라 다수의 연구물들이 (1) 누가는 투키디데스의 모델을 따르는 헬라적 역사가였으며, (2) 사도행전의 설교들은 초기 교회로부터 받은 자료를 정황에 맞게 편집된 것이며, (3) 그 편집의 신학적 의도나 용어들이 누가의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이에 대해 글래슨(T. F. Glasson)은 누가의 편집을 인정하면서도 그 내용이 순전히 상상력의 산물은 아니었다고 반박하였다. 그는 투키디데스가 진정으로 무엇을 말했는가에 주의를 기울여 보면, 투키디데스가 캐드베리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역사가는 연설들을 전하면서 그 연설 내용을 문자 그대로 전하지는 못하지만 가능한 한 “실제로 말해진 것”에 근접하게 전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역사가의 노력은 독자의 상황에 맞추려 연설들을 상상하여 작문하는 것과는 사뭇 다르다. 멘지스는 누가가 18절의 “엔 타이스 헤메라이스 에케이나이스”(ἐν ταίς ἡμέραις ἐκείναις; 이 날들)를 약간 수정하여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를 만들어 내었으므로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는 누가의 문체와도 잘 들어맞는다고 보았다. 젠르(Zehnle)는 누가가 “마지막 날들”(개역은 “말일”이라고 번역하였음)을 포함하고 있는 사 2:2 또는 미 4:1 등등의 문구들에서 요엘서의 대체문구 형식을 발견했다고 본다면, 다른 요엘서 본문에 대한 증거들에서 누가적인 대체 문구가 등장하지 않는 것이 참으로 이상하다고 말하며 문제를 제기한다. 사실 요엘서 3:1절은 랍비 문서에서 세 번-신명기 라바 6 (203d), 탈굼 요엘 3:1-5, 미드라쉬 예레미아 애가 2:4 (65b)-인용되는데, 그곳에서는 누가와 같은 변형의 증거가 나타나지 않는다. 또한 그는 그 요엘서의 본문이 사도행전 2장을 제외하고는 다른 초기 기독교 변증에서 그다지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 변형이 누가 자신의 것이라고 결론짓는다.
b.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는 베드로의 대체라는 주장
두 번째 그룹은 이 대체가 베드로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브루스(Bruce)와 가스끄(Gasque) 등이다. 브루스는 사도행전의 설교들은 실제로 행해졌던 설교들을 압축시킨 것이므로 설교 안의 변형은 일차적으로 그 설교자의 것임을 고려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그들의 주장은 요엘서의 문구가 수정되었다면 그 수정은 일차적으로 설교 속에서 그 문구를 사용한 베드로의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브루스는 베드로의 요엘서 변형을 베드로의 페쉐르(pesher)로 분류한다.
에반스(Craig A Evans)는 유대교 주석은 “각색”(adaptation), “확장”(expansion), 그리고 “해석”(interpretation)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말하고, 유대교 주석의 유형을 5가지-“탈굼”, “미드라쉬”, “페쉐르”, “알레고리”, “타입폴로지”(모형론)-로 분류하였다. “페쉐르” 주석 방법은 주로 쿰란 공동체에서 행해졌다. 쿰란 공동체에서 행해진 주석들은 보통 “페쉐르”라는 말로 시작하였는데, 그 용어는 “해결”(solution) 또는 “해석”(interpretation)을 의미하였으며, 아람어 파샤르(רשׁפ)에서 온 말이다. 사해 종파인들은 자신들을 종말(eschatological consummation) 이전의 “메시아의 수난의 날들”(the days of messianic travail)을 살아가고 있는 현 시대(the present age)의 마지막 세대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직무를 도래하는 메시아 시대 또는 오는 세대를 준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구약 본문들이 현 시대에 종말적으로 성취되었다고 여기고 그 본문들의 단어들을 임의로 다른 것으로 바꾸었다. “종말론적 전망”(the eschatological perspective)이 페쉐르를 단순한 상황화로부터 구별시킨다. 즉, 쿰란 종파인들은 구약 본문들은 쿰란 공동체에 관해 또는 그 공동체에게 말했으며, 펼쳐질 종말적 사건들에 관해 말했다고 생각했다. 4QFlorilegium은 아모스 9:11을 종말론적 정황 안에서 인용하는데, 그 정황을 “마지막 날들에”(베아하리트 헤이야밈, םי תיאַ)라는 표현으로 소개한다. 이 םי תיאַ는 행2:16의 요엘서 인용 중 대체된 단어들 중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와 정확하게 일치한다.
רשׁא הרותה שׁרוד עם דמועה דיוד המצ האוה ןבל יל היהי אוהו באל אול היהא ינא 11
תכוס תא יתומיקהו בותכ רשׁאכ םימיה תירח[אב ןו]יץב [םיקי] 12
לארשׂי תא עישׁוהל דימעי רשׁא תלפונה דיוד תכוס האיה תלפונה דיוד 13
11. I will be a father to him and he will be a son to me. This is branch of David, who will arise with the Interpreter of the law who 12 [will rise up] in Zi[on in] the [l]ast days, as it is written: Amos 9:11 "I will raise up the hut of 13 David which has fallen." This (refers to) the hut of David which has fall[en, w]hich he will raise up to save Israel.
11. 나는 그의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 이는 다윗의 가지이니, 그는 율법 해석자와 함께 일어나리니, 그는 12 [마]지막 날들[에] 시[온]에서 일어나리니, 이는 암9:11에 기록된 바와 같으니 “내가 천막을 일으키리니 13 이는 무너진 다윗의 천막이라.” 이것은 무너진 다윗의 천막을 (가리키는 데),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해 일어날 것이다. (필자 한글역)
행 2:16은 요엘서의 인용을 τούτὸ ἐστιν (“this is", “이는”)으로 시작하는데 그것과 동일한 의미인 אוּה(후), ןד(단), אז(쩨) (저것(that), 이것(this)) 등이 특히 구약 후기 부분에서 사용된다. 이 도입문구는 예언적 말(사 9:14f.), 비유(슥 5:5), 환상(슥 1:10,19, 5:3,6), 꿈(사9:14f.), 그리고 이상한 글(단 5:25)을 통해 주어진 계시를 설명하는 말 가운데 등장한다. 이 도입문구는 다니엘서와 사해 두루마리들에서 רשׁפ와 함께 사용된다.
기록한 글자는 이것이니 (ןד)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그 (ןד) 뜻을 해석하건대 (ר)
This is (ןד) the inscription that was written
MENE, MENE, TEKEL, PARSIN
This is (ןד) what these words mean (ר): (NIV, MT)
. . . (삼하 7:10f.). This is (האוּה) the House . . . as it is written . . .,
'In the House that your hands have established . . .' (출 15:17)
. . . (삼하 7:14f.). This is (האוּה) the Shoot of David . . . as it is written,
. . . (암 9,11).
. . . (시 1;1). The interpretation (ר) is . . .
(4Qflor 1:2f., 11f., 14)
구약 본문들이 도입형식(אוּה, ןד)을 통해 인용된 후 그 본문들에 대한 해석(ר)이 뒤따른다. 쿰란 공동체는 페쉐르 주석방법을 스스로 창안해 낸 것이 아니라 구약의 방법을 계승하였으며, 그 공동체는 이러한 구약적 방법에 종말론적 전망을 더한 것이다. 그리고 구약적 페쉐르 방법을 사용하여 구약을 인용하면서 그 종말론적 전망 안에서 필요한 단어들을 대체한 것이다. 누가의 본문에서 베드로의 설교는 구약의 페쉐르 방법을 계승하여 인용도입형식을 사용한 것이다. 또한 베드로의 설교는 구약의 페쉐르 방법을 계승할 뿐만 아니라, 동시대의 쿰란 공동체에서 사용했던 종말적 전망을 가미한 페쉐르 방법을 사용했다고 볼 수 있다. 요엘서 3:1절은 랍비 문서에서 세 번-신명기 라바 6 (203d), 탈굼 요엘 3:1-5, 미드라쉬 예레미아 애가 2:4 (65b)-인용되는데, 그곳에서는 누가와 같은 변형의 증거가 나타나지는 않지만 그 본문은 종말에 있을 하나님의 마지막 개입을 언급하는데 사용되었다. 그래서 누가와 베드로 이전에도 종말적 전망을 가미한 페쉐르 방법이 있었으므로 행 2:16이 요엘서의 “아하르-켄”(MT ן־יאַ, LXX μετὰ ταύτα)을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로 대체한 것은 순전한 누가의 창조물이 아니고 베드로의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c.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는 이미 존재했던 전승을 받아들인 것이라는 주장
세 번째 그룹은 이 대체가 베드로의 대체이든 누가의 대체이든 그것은 그들의 창조물이 아니라 그들이 이미 존재했던 전승적 형식(an existing traditional formula)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플류마허(E. Plümacher), 그레서(E. Grässer), 크레머(J. Kremer), 보크(D. L. Bock) 등등이다. 마샬(I. H. Marshall)은 누가를 헬라 역사가들과 비교하는 것도 좋지만 누가는 그들보다는 구약의 역사기록 전통에 더욱 의존하였다고 보았다. 이러한 대체는 누가 개인의 것이라기보다는 “그 당시 존재했던 한 전승적 형식”(the existing traditional Formula)을 의도적으로 받아들인 것일 것이라는 것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누가가(혹 베드로가) 그 이전의 전승을 따라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םי תיאַ)를 ן־יאַ(μετὰ ταύτα)의 동의어로, 서로 대체할 수 있는 동의어로 사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호세아는 ראַ와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의 히브리어 상당어인 םי תיאַ을 한 문장 안에서 사용하였다.
MT Hos. 3:5 ם ד ת םי הה־ת וּשׁוּ ל י וּב ראַ
׃םי תיאַ וֹבוּט־ל הה־ל וּדוּ
그런데 이 문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문장이 ‘교차대구법적 구조’(chiastic structure)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A ראַ
B ם ד ת םי הה־ת וּשׁוּ ל י וּב
B' וֹבוּט־ל [םי] הה־ל וּדוּ [ל י]
A' םי תיאַ
호세아는 ראַ를 문장의 첫 자리인 A에 놓고, םי תי을 마지막 자리인 A'에 놓았다. 그리고 안쪽에서 두 문장을 하나로 엮어 B를 만들고, 세 번째 문장인 B'와 교차대구법 안에서 평행법적으로(parallelismically) 대등접속사 וּ로 연결되는 한 문장으로 만든다. 문장의 주어는 ל י이다. B 부분의 다윗 왕(ם ד)은 B'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그의 축복을 받은 자”, וֹבוּט)로 바뀐다. 즉, B의 ם ד(다윗 왕)과 B'의 וֹבוּט(그의 축복을 받은 자)는 동의평행법적으로 같은 의미를 띈다. 동사는 “돌아와 וּשׁוּ(찾을 것이며)”에서 “וּדוּ(두려워 떨 것이며)”로 바뀌지만 하나님과 다윗을 찾고 그 앞에서 떨 것이라는 의미에서 완전히 동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B와 B'를 동의평행법(synonymous parallelism)라고도 할 수 있으며, 약간 진전된 “계단 평행법”(stairlike paralleism)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호세아는 B에서 사용한 הה를 B'에도 남겨놓음으로써 B와 B'이 평행법적이라는 단서를 남겨놓았다. 이렇게 호세아는 ראַ(후에)와 םי תיאַ(마지막 날들에)를 대차대구법적 구조 안에서 동의평행법적으로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LXX는 ראַ를 μετὰ ταύτα로 번역하고, םי תיאַ를 ἐπ ἐσχατών τών ἡμέρών로 번역하였다. 또 LXX는 MT를 따라 μετὰ ταύτα를 3:5의 맨 앞에 ἐπ ἐσχατών τών ἡμέρών를 맨 끝에 놓았다. 즉, LXX는 μετὰ ταύτα와 ἐπ ἐσχατών τών ἡμέρών을 대차대구법 구조 속의 평행법에 의해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LXX Hos. 3:5
A μετὰ ταύτα
ἐπιστρεψουσιν οἱ υἰοι ἰσραηλ καὶ
B ἐπιζητησουσιν κυριον τού θεού αὐτών καὶ δαυιδ του βασιλεια αὐτών
καὶ
B' ἐκστησονται ἐπὶ τῳ κυριῳ καὶ ἐπὶ τοὶς ἀγαθοίς αὐτού
A' ἐπ ἐσχατών τών ἡμέρών.
LXX의 “에프 에스카톤 톤 헤메론”(헤메론ἐπ ἐσχατών τών ἡμέρών)이 사도행전의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와 서로 다른 점은 전치사가 “엔”(ἐν)이 아니고 “에피”(ἐπι)라는 것과 정관사가 “에스카톤”(ἐσχατών) 앞에 붙지 않고 “헤메론”(ἡμέρών) 앞에 붙어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 LXX 이사야 2:2은 MT의 םי תיאַ을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로 번역하였다. 즉, LXX는 םי תיאַ를 의미 차이 없이 ἐπ ἐσχατών τών ἡμέρών나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로 번역하였다. 베드로나 누가는 LXX의 호세아가 μετὰ ταύτα와 ἐπ ἐσχατών τών ἡμέρών를 동의어로 사용한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또한 LXX가 ἐπ ἐσχατών τών ἡμέρών과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를 의미차이 없이 동일어로 사용한 전통을 알고 있었을 것이며, 이 전통을 받아들여 요엘서의 μετὰ ταύτα를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로 바꾸었을 것이다.
행 2:16에서 요엘서의 “아하르-켄”(ן־יאַ, μετὰ ταύτα)을 “엔 타이스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로 대체한 사람이 베드로였든 또는 누가가 당시 존재했던 전승형식을 그대로 받은 것이었든 상관없이 최종 편집자는 누가이다. 그러므로 그 대체에 나타난 사상은 역시 누가의 사상이라고 보아도 될 것이다.
C. 베드로의 요엘서 인용에 나타나는 종말론
1. “마지막 날들”(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의 종말론
행2:16의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마지막 날들)에서 나타나는 분명한 사상은 종말론이다.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의 히브리어 상응 어인 םי תיאַ 문구는 누가의 유대교 독자들에게 생소한 문구가 아니었다. םי תיאַ(마지막 날들)은 구약에서 10회 등장한다. 개역성경은 구약의 םי תיאַ을 “말일에”(7회, 사 2:2, 호 3:5, 미 4:1, 렘 23:20, 30:24, 48:47, 단 10:14), “끝 날에”(2회, 신 4:30, 렘 49:39), “말세에(1회, 신 31:29)” 등등의 용어로 번역하였다. 이 단어가 처음 사용된 곳은 신명기서이며, 두 번 나타나는데 두 번 모두 모세가 이스라엘의 미래를 예언한 말 중에 나타난다(신 31:29, 4:30). 이 두 번을 제외하고 이 단어는 단 10:14을 제외하고는 모두 포로기 이전 시대의 예언서에 등장한다. 이 어구는 쿰란 문서에서 약 28회 등장하며, 주로 어떤 예언의 시작 부분에 위치하고, 그 날들이 그들의 날에 성취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 어구가 종말론적 본문과 함께 사용되었을 때, 그 현재는 주의 날(the day of the Lord)을 기대하는 세계사의 마지막 시기라는 것을 의미하였다.
성령의 임함은 종말의 날들의 특징으로 여겨졌다. 포로기 이전과 포로기 이후 시대 구 약의 몇 본문들은-“필경은 위에서부터 성신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리니”(사 32:15), “대저 내가 갈한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리리니”(사 44:3-5),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겔 36:26)-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성령의 일반적 은사(the general gift of the Spirit)가 임하는 것은 종말적 시대의 특징(the characteristic of the eschatological age)이라고 말한다. A.D. 1세기 유대교 사상에서 “성령 주심은 마지막 구원시대의 근본적인 성격이었다.” 그 시대의 “공동체 규범”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진리로 사람들의 모든 행위들을 정결케 하실 것이다 . . . 그리고 성령으로 모든 사악한 행위들로부터 깨끗케 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모든 거짓을 깨끗하게 하는 물처럼 진리의 영을 그들 위에 뿌리실 것이다”(1Qs. 55:20f). 누가는 ‘성령주심’과 ‘마지막 날들’이라는 어구를 함께 묶어 줌으로써 오순절에 예수의 제자들에게 성령의 강림하심은 기다리던 종말의 날들의 표징이라고 외친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의 성령강림은 ‘마지막 날들’에 들어가는 새 시대의 결정적인 전환점은 아니었다. 비록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 예언된 종말(Endzeit)의 한 사건으로서 ‘마지막 날들’이 도래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부인할 수 없는 표징이었지만, 오순절은 ‘마지막 날들’을 표징하는 일련의 사건들 중에 하나였으며, ‘마지막 날들’의 시작을 점유하지는 않았다. 누가는 예수님의 이적적 탄생이나 유아기 이야기(infancy narratives) 안에서 발생한 사건들과 함께 메시야적 성취의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전체 사역이 ‘마지막 날들’ 안에서 수행되었다고 말한다. 즉, 누가는 이미 종말이 시작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2. “주의 날”(ἡμερα κυίου)의 종말론
행 2:20의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에 나타나는 “주의 날”(헤메라 큐리우, ἡμερα κυίου)은 그 인용본문의 헬라어역인 LXX Jl2:31에서도 등장하며, LXX의 ἡμερα κυίου는 MT3:4의 “욤 여호와”(הה םוֹי)를 번역한 말이다. “여호와의 날”(MT: הה םוֹי (the day of aHWeh), LXX: ἡμερα κυίου(the day of the Lord))이라는 용어는 개역성경에서 아모스서에 세 번(5:18 2회, 20), 이사야서에 두 번(13:6, 9), 스바냐서에 세 번(1:7, 14, 14:1), 에스겔서에 두 번(13:5, 30:3), 요엘서에 네 번(1:15, 2:1, 11, 3:4, 4:14), 총 13회 등장한다. “여호와의 날”이 형용사적 수식어구와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라는 표현은 개역성경에서 2회 등장한다(욜 2:31, 말 4:5). 그 밖에도 여호와의 날과 관련하여 “여호와의 한 날”(사 2:12), “여호와의 희생의 날”(습 1:8), “여호와의 큰 날”(습1:14), “여호와의 분노의 날”(습 1:18, 2:2, 3), “여호와의 만국을 벌할 날”(옵 15)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슥 14:7)이라는 문구들이 등장한다. 총괄적으로 “여호와의 날”에 대한 표현은 스바냐서에서 제일 많이 등장하며(8회), 그 다음으로 요엘서(5회), 그리고 이사야서와 아모스서가(각 3회) 뒤를 잇는다. 즉, הה םוֹי는 아모스서에서 등장하기 시작하여 포로기 이전 예언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며, 포로기와 포로기 이후에도 그리고 구약 시대의 마지막 문서에까지 계속 등장하는 어구이다.
선지자들이 말한 여호와의 날에는 네 가지 성격 즉, 심판, 우주적 보편성, 초자연적 개입, 그리고 임박성이 있다. 그리는 이 여호와의 날에 네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로 이 날은 하나님의 목적이 역사에 실현된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둘째,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친히 행동하시는 날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이 현존의 세계질서와 인간 역사의 무대에서 승리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날이다. 넷째, 새 시대가 땅 위에서 시작되는 날이다.
여호와의 날은 종말적이다. 아모스 시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역사 속에서 일어나며 역사적 힘들에 의해 영향 받을 하나님 나라를 기대했었다. 일반적인 소망은 다윗 왕국의 영광이 이 세상에서 역사적으로 회복되고 이스라엘이 자기의 적들에 완전한 승리를 성취할 때의 이스라엘을 위한 성공, 축복, 그리고 번영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이 관념을 공격하였다. 아모스는 이 관념을 정죄했다. 여호와의 날은 어둠이며 빛이 아니고, 심판이며 옹호가 아니고, 진노이며 축복이 아닐 것이다(암 5:18-20). 아모스가 선언한 여호와의 날은 물리적 질서의 붕괴 즉, 하나님 자신이 일으키시는 우주적 격변을 가져올 것이다. 신적 심판의 무게에 아래서 땅은 흔들리며 혼란으로 치달을 것이다. 전 땅은 나일강 처럼 출렁거리는 바다가 될 것이다. 그날을 또한 하늘의 격변도 증거 할 것이다. 태양이 대낮에 땅을 어둠으로 몰아넣으며 한낮에 지게 될 것이다(암 8:7-9, 9:5,6). 이것이 자연 재난 이상을 가리킨다는 것이, 처음에 바다를 삼키고 그리고 땅을 삼키는 불에 의해 명확하다(암 7:4). 이것은 ‘묵시적 불’이다. 아모스가 직시한 것은 우주적 차원에서의 어떤 것에 대한 자연계의 격동이다. 그것은 순전한 종말론이다. 프로스트(S. B. Frost)는 아모스가 역사로부터 기인하는 한 날이 아니라 역사를 끝나게 할 역사 속으로의 격변적 분출을 포함하는 종말론을 선포한다고 확신한다. 존 브라이트(J. Bright)와 발터 아이히로트(W. E. Eichrodt)는 둘 다 여호와의 날에 대한 일반적 기대가 종말론이라고 믿는다. 즉, 그것은 자기의 적들을 심판하시고 자기의 통치를 세우시기 위한 역사 속으로의 하나님의 침입을 포함한다.
묵시 문학가들은 초기 예언자들의 예언-“여호와의 날”로 알려진 황금시대에 대한 예언, 악폐와 압제가 자취를 감추고 전 세계 국민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며,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가 영원히 다스리며, 새 하늘과 새 땅에서는 의와 평화가 지배하리라는 약속들-이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즉, 묵시문학의 종말론은 이스라엘의 미래 희망, 특히 구약시대 말기에 발전한 바 있는 선지자 운동에 기원한 “여호와의 날에 관한 개념이 그 기초를 이루고 있다.
사도행전 2:20의 요엘서 인용부분과 MT의 요엘서 부분을 비교해보면 한 가지 두드러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MT אוֹנּ לוֹד הה םוֹי
LXX ἡμεραν κυίου τὴν μεγάλην καὶ ἐπιΦανή
Acts ἡμεραν κυίου τὴν μεγάλην καὶ ἐπιΦανή
LXX는 “하노라”אוֹנּ(두려운)를 “에피파네”(ἐπιΦανή, 영화로운)로 대체 번역하였으며, 누가는 LXX를 따랐다. 킹제임스역(KJV)과 미국표준역(ASV)은 ἐπιΦανή를 “notable"로 새국제역(NIV)은 “glorious"로 번역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개정표준역(RSV)은 ἐπιΦανή를 “manifest”로 번역하였으나 그 개정판인 새개정표준역(NRSV)은 “glorious”로 바꾸어 번역하였다. 개역성경은 NIV나 NRSV처럼 “영화로운”으로 번역하였다. 브루스(F. F. Bruce)도 그 단어를 “영화로운”으로 번역하였다. 누가는 MT의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을 취하지 않고 LXX의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을 택하였다.
3.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이 이루는 종말
a.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의 병치
사도행전의 베드로의 요엘서 인용에는 “마지막 날들”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행2:16)과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에 나타나는 “주의 날”(ἡμερα κυίου, 행 2:20)은 짝을 이루며 나타난다. 이러한 짝 이룸(juxtaposition)은 구약의 예언서 전통을 이은 것이다.
구약 예언서에서 “욤 하후”(אוּה־םוֹי, 그 날, LXX에서는 “헤 헤메라 에케이네”(ἡ ἡμερα ἐκεινη) 또는 “에케이네 헤 헤메라”(ἐκεινη ἡ ἡμερα)는 הה םוֹי(여호와의 날)의 대체어로 הה םוֹי를 지칭하는 말로 쓰이기도 했다. 아모스는 5장에서 הה םוֹי를 두 번 언급한 후, 8:3, 9, 13과 9:11에서는 הה םוֹי를 אוּה־םוֹי로 대체한다.
이사야는 2:12에서 “여호와의 한 날”(MT 욤 라와, ההי םוֹי, LXX ἡμερα κυίου)을 언급한 후 17절에서는 그날을 “그 날”(הה םוֹי)로 대체한다. 스바냐는 1장 8절에서 “여호와의 희생의 날”(욤 쩨바 여호와, הה ח םוֹי)이라고 말한 후 9절, 10절에는 “그 날”(הה םוֹי)이라고 말한다. 또한 1:14에서는 “여호와의 큰 날”(욤 여호와 학가돌, לוֹד הה םוֹי), “여호와의 날”(הה םוֹי)이라고 말한 후 15절에서 그날을 “그 날”(하후 욤, םוֹי אוּה)이라고 지칭한다.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심히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애곡하는도다 (습 1:14)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습 1:15a)
에스겔은 30:3에서 “여호와의 날”(הה םוֹי)이라고 말한 후 9절에서는 “그 날”(אוּה־םוֹי, ἡ ἡμερα ἐκεινη)이라고 말한다. 요엘은 3:14절(MT4:14)에서 “여호와의 날”(הה םוֹי)이라고 말한 후 18절(MT4:18)에서는 그 날을 “그 날”(אוּה־םוֹי)이라고 부른다.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사람이 많음이여,
판결 골짜기에 여호와의 날이 가까움이로다 (욜 3:14)
그 날에 산들이 단 포도주를 떨어뜨릴 것이며
작은 산들이 젖을 흘릴 것이며 (욜 3:18a)
스가랴는 12장에서 13장까지는 “그 날”(욤 하후, אוּה־םוֹי)로 표현하다가 14장에서 “여호와를 위해 오는 한 날”(욤 바 라에호와, הוהי א םוֹי, 14:1), “여호와께 알려진 한 날”(욤 하하드 후 이이야다 라에호와, ההי ע אוּה ד םוֹי, 14:7)로 표현하며, 14장에서는 다시 “그 날”(אוּה־םוֹי)로 표현하는데 무려 7번이나 거듭 표현한다(14:4, 6, 8, 9, 13, 20, 21). 스가랴는 “여호와께 알려진 한 날”(ההי ע אוּה ד םוֹי이라고 말한 후(14:7) 바로 그 날을 “그 날”(אוּה־םוֹי)이라고 지칭한다(4:8).
여호와의 아시는 한 날이 있으리니
낮도 아니요 밤도 아니라 어두워 갈 때에 빛이 있으리로다
그 날에 생수가 예루살렘에서 솟아나서
절반은 동해로 절반은 서해로 흐를 것이라(슥 14:7-8)
특히 스가랴는 그의 글을 אוּה־םוֹי로 마친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구약 예언서에서 “그 날”(אוּה־םוֹי)은 “여호와의 날”(הה םוֹי)을 대체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구약 예언서 중에 “여호와의 날”(הה םוֹי)의 대체어인 “그 날”(אוּה־םוֹי)이 “마지막 날들”(베아하리트 헤이야임, םי תיאַ)과 짝을 이루며 나타나는 구절들이 있다.
말일에(םי תי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사 2:2)
그 날에(אוּה־םוֹי) 눈이 높은 자가 낮아지며 교만한 자가 굴복되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시리라 (사 2:11)
이미 위에서도 언급하였듯, 이사야는 “마지막 날들”과 “그 날”을 병치시킨 후(2:2과 2;11) “그 날”을 “여호와의 날”의 대용어로 사용하였다(2:12과 17절).
대저 만군의 여호와의 한 날이 모든 교만자와 거만자와
자고한 자에게 임하여 그들로 낮아지게 하고 (2:12)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요 (2:17)
흥미로운 것은 2:17에서 “여호와의 한 날”의 대체어로 사용된 “그 날”이 들어있는 구절이 2:11을 거의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이사야가 2:2과 2:11에서 “마지막 날들”(복수 형태)과 “그 날”(단수 형태)을 병치시킨 것은 곧 “마지막 날들”(복수 형태)과 “여호와의 날”(단수 형태)을 병치시킨 것과 같다는 것이다.
미가는 이사야의 “마지막 날” 전승을 이어받는다. 그는 4:1-3에서 사 2:2-4를 거의 그대로 인용한다(인용에 대한 언급 없이). 그리고 곧이어 4:6에서 회복의 소망을(이사야서의 문맥은 심판) 전하며 “그 날”(אוּה־םוֹי)을 언급한다.
말일에 이르러는 여호와의 전의 산이 산들의 꼭대기에 굳게 서며 (미 4:1)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그 날에는 내가 저는 자를 모으며
쫓겨난 자와 내가 환난 받게 한 자를 모아
그 저는 자로 남은 백성이 되게 하며 (미 4:6-7a)
이렇듯 이사야와 미가는 복수형태의 “마지막 날들”과 단 수 형태의 “그 날”(“여호와의 날”을 대체한)을 병치시켰다. 이러한 병치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날들”과 “여호와의 날”(사도행전에서는 “주의 날”)의 병치와 일맥상통한다. 즉, 누가가 베드로의 요엘서 인용을 통해 “그 후에”를 그와 동의어인 “마지막 날들에”로 대체하고, “그 날”과 동의어인 “여호와의 날”과 병치시킨 것은 순전한 누가의 순수 창작물이기보다는 성경의 전통을 따른 것이다.
그 후에 = 마지막 날들에 그 후에 = 마지막 날들에 여호와의 날에 = 그 날에
(호세아3:5) (요엘) (이사야, 미가)
↘ ↓ ↙
마지막 날들에
여호와의 날에 (주의 날에)
(사도행전)
표 1.
b.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의 병치에서 드러나는 누가의 종말론
사실 복수의 날들과 단수의 날의 병치는 이미 요엘의 본문에 들어 있었다. 요엘은 복수의 “그날들”(MT Jl3:2 바이야임 하헴마아 ה םי, LXX Jl2:29 ἐν ταίς ἡμέραις)과 단수의 “야웨의 날”을 병치시켰다. 누가는 이러한 요엘의 복수의 날들과 단수의 날의 병치에 구약을 따라 “마지막”(ἐσχάταις)이라는 형용사 하나를 덧붙인 것뿐이다.
누가는 성경의 전통에 따라 “마지막 날들”(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םי תיאַ)과 “여호와의 날”(ἡμερα κυίου, הה םוֹי)을 병치함(juxtaposition)으로써 무엇을 말하였는가? 누가는 “마지막 날들”과 “여호와의 날”을 병치하고 함께 묶어 종말을 제시하였다. 누가는 복수 형태의 “마지막 날들”과 단수 형태의 “여호와의 날”(주의 날)을 함께 묶어서 종말을 표 2처럼 제시한 것이다.
마지막 날들 + 여호와의 날 = 종말
표 2.
이렇게 누가는 구약과 함께 하나님이 개입하시기 시작하시는 “마지막 날들”이라는 중간적 성격의 날들이 완전한 파국이 펼쳐질 “주의 날”에 앞서 올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종래의 구약의 종말구조에 대한 이분법적 모델을 수정해야함을 의미한다.
이전의 신약학계의 누가를 포함한 신약기자들의 종말론에 대한 보편적인 이해는 신약기자들이 구약과 유대교의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이분법적 종말론을 수정하여 오는 세대가 이미 이 세대에 침입하여 이 세대에 겹쳐있지만 아직 완전한 종말에 이르지 못했다는 이미-아직의 종말구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마틸(A. J. Mattill)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역사에 대한 직선적 철학을 계발하였다고 보았다. 그 철학에 의하면 역사는 두 세대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세대는 악하며, 새로운 세대는 주의 날로 인해 시작되는데 (암 5:18-20),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자나 메시야(사 11:1-9)에 의해 소개될 새로운 세대는 평화, 번영, 안전과 풍요의 시간이 될 것이라고 말한다는 것이다 (사 2:1-4, 암 9:13-15). 그는 표 3처럼 구약의 두 세대론을 정리하였다.
여호와의 날
이 세대 오는 세대
표 3.
프로스트 (S. B. Frost)도 역시 이사야가 과거 세대와 미래 세대 사이의 이분법을 끌어 들였다고 보았으며, 이 이분법은 후기 묵시문학에서 중심적인 것이 되었는데, 현재의 악한 세대와 오는 세대 사이에는 날카로운 이원성이 있다고 보았다. 그는 그 예로 에스드라가 “가장 높으신 분은 하나의 세대를 만드시지 않으시고, 두 개의 세대를 만드셨다”(“For this reason the Most High has made not one world but two"(NRSV 2Esdras 7:50)고 말한 것을 인용한다. 그리고 폰 라트(Von Rad)는 바룩 2서 31:5을 근거로 세대 사이에는 연속성이 없다고 보았다.
엘리스는 이러한 구약의 이분법적 종말구조와는 달리 누가복음 안의 종말구조는 예수님의 승천에서 최초로 성취된 종말과 그러나 여전히 미래의 파루시아에 최종적으로 이루어질 종말이 기다리고 있다고 보았다. 마독스도 또한 누가복음에는 종말론의 미래적 성격과 함께 종말적 희망들의 현재적 성취의 실제성이 공존한다고 결론지었다. 베이커(W. R. Baker)는 사도행전의 종말론을 두 가지 관점에서 축약적으로 기술한다. 둘 중 하나는 “과거와 현재”(이미, already)이고, 다른 하나는 “미래”(아직, but not yet)이다. 이들이 생각하는 종말구조는 학계에서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으로 표 4와 같다.
표 4.
그러나 필자가 보기에는 누가의 “이미-아직” 종말론은 구약 종말론의 변형이 아니고 오히려 “마지막 날들-주의 날”이라는 구약의 종말론을 계승한다. 누가는 마지막 날들이 이미 시작되었고, 아직 주의 날이 이르지 않았다고 말함으로써 구약의 종말구조를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즉, 구약과 누가의 종말론 구조는 같은 것이며, 그 모델은 표 5와 같다.
표 5.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시기 시작하심으로써 구약과 요엘을 통해 하셨던 하나님의 약속과 예언이 성취되어 “마지막 날들”이 이미(already) 시작되었다고 외친다. 그러나 누가는 “이르기 전”(프린 엘쎄인, πριν ἐλθειν)이라는 표현을 통해(행 2:20) “크고 영화로운 주의 날”이 아직(not yet) 이르지 않았다고 외친다. 즉, 종말이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지금은 “마지막 날들”이며, 앞으로 “여호와의 날”이 올 것이라고 말한다.
누가는 콘첼만이 말했던 것처럼 종말을 미래로 밀어낸 것은 아니며, 마샬(I. H. Marshall)처럼 누가가 종말을 길게 늘렸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누가가 종말을 긴 기간으로 잡은 것은 자신의 창작이 아니었고, “마지막 날들”과 “여호와의 날”(“그 날”)을 병치시켜 종말을 제시했던 예언서의 전승을 따른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누가는 구원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해 계시하신 종말의 구조를 다시 드러내어 말한 것이다.
IV. 결론
살펴본 바와 같이 누가는 구약을 계승하여 “그 후에”를 “마지막 날들”로 대체하였다. 누가는 자신의 순수한 창작력으로 요엘서의 “그 후에”(ראַ)를 “마지막 날들”(םי תיאַ)로 대체한 것이 아니라, 호세아는 3:5에서 “그 후에”를 “마지막 날들”과 교차대구법적 구조 안에서 동의어로 사용한 것을 계승하여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 중 요엘서 인용에서 “그 후에”를 “마지막 날들”로 대체하였다.
또한 살펴본 바와 같이 누가는 이러한 대체를 통해 구약의 종말구조를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계승하였다. 누가는 구약의 여호와의 날을 중심으로 한 이 세대와 오는 세대의 날카로운 이분법적 종말구조를 변형시킨 것이 아니고, 오히려 “마지막 날들”(םי תיאַ)과 “주의 날/여호와의 날”(הה םוֹי)로 구성된 구약의 종말구조를 그대로 계승하는 것이다.
구약 성경에는 이미 “마지막 날들”의 전승이 선지서를 중심으로 흐르고 있었다. 또한 “마지막 날들”이라는 문구는 유대교 독자들에게 생소한 문구가 아니었다. 구약에는 “마지막 날들”이라는 문구는 10회 등장한다(사 2:2, 호 3:5, 미 4:1, 렘 23:20, 30:24, 48:47, 단 10:14, 신 4:30, 31:29, 렘 49:39). 그리고 쿰란 문서에는 약 28회 등장한다. 이 구약과 유대교 문헌에서 나타나는 “마지막 날들”의 특징들 중 중요한 하나는 성령의 강림이었다(사 32:5, 1Qs. 55:20f).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를 통해 마지막 날들이 이미 시작되었으며 그 사실은 마지막 시대의 상징인 성령의 임하심으로 증명된다고 말한다.
“주의 날/여호와의 날”이라는 용어는 구약에 총 22회 등장한다. 구약의 “주의 날”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적들을 심판하시고 자기의 통치를 세우시기 위해 역사 속으로 침입하시는 크고 두려운 날이다. 중간기의 문헌에서 “주의 날”은 압제가 그치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구원자가 영원히 다스리시는 황금시대의 시작의 날이다. 누가는 “주의 날”이 아직 임하지 않았으나, 그 날은 크고 영화로운 날이 될 것이라고 외친다.
누가는 구약을 계승하여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여호와의 날”을 병치시킨다. 누가는 요엘서의 인용에서 “그 후에”를 구약과 중간기의 “마지막 날들” 전승을 계승하여“마지막 날들”로 대체하면서 그 “마지막 날들” 요엘서에 이미 존재했던 “주의 날/여호와의 날”과 병치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의 병치는 누가 자신의 순수 창작물이 아니었고 구약을 계승한 것이었다. 구약은 여러 곳에서 “그 날”을 “주의 날/여호와의 날”을 대체할 수 있는 어구로 사용한다(예, 습 1:14과 습 1:15a, 욜 3:14과 욜 3:18, 슥 4:7과 4:8 등등). 또한 구약은 “마지막 날들”과 “그 날”을 병치시킨다(사 2:2과 2:11, 미 4:1과 4:6-7a). 이러한 구약의 “마지막 날들”과 “그 날”의 병치는 결국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여호와의 날”의 병치와 같은 것이다.
이렇게 누가는 구약을 계승하여 “마지막 날들”과 “주의 날/여호와의 날”이 병치되어 이루어지는 종말구조를 드러낸다. 그에 의하면 이미 종말의 시작인 “마지막 날들”이 시작되었고, 아직은 “주의 날/여호와의 날”이 오지 않았다.
이러한 필자의 연구는 종래의 구약 종말론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를 수정해야하는 당위성을 제공하며, 결과적으로 누가가 구약의 종말구조를 수정/변형시켰다는 종래의 주장도 수정해야하는 당위성을 제공한다.
부 록
누가복음 이외에서 나타나는
“마지막 날들”(개역에는 “말세”)과 “마지막 날”
A. 마지막 날들
신약 개역에서는 “말세”라는 용어가 7번 나타나는데, 복수 형태를 취하는 ἐν(ἐπ')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마지막 날들에)는 그들 중 4번을 차지한다. 그리고 나머지 네 번 다 이미 시작되었거나, 마지막 날 이전에 올 날들을 의미하였다.
1. 베드로의 “마지막 날들”(말세)
a. 그는 창세전부터 미리 알리신바 된 자나
이 말세에(ἐπ' ἐσχάτού τών χρόνών)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바 되었으니 (벧전 1:20) -- 이미
b. 먼저 이것을 알찌니 말세에(ἐπ' ἐσχάτών ἡμερών) 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좇아 행하며 기롱하며 (벧후 3:3)----------------- 이미
2. 바울의 “마지막 날들”(말세)
a. 말세를(τὰ τέλη τών αἰνών)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고전 10:11) --- 이미
b. 말세에(ἐν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딤후 3:1) ------- 이미
3. 야고보의 “마지막 날들”(말세)
a. 너희가 말세에(ἐν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재물을 쌓았도다 (약 5:3) --------- 이미
살펴보았듯 ἐν(ἐπ')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는 신약 기자들에게 새로운 것이 아닌 보편적으로 알려졌던 용어였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베드로가 사용한 ἐπ' ἐσχάτών ἡμερών는 바울과 야고보가 사용한 ἐν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보다는 LXX의 어법에 더 가깝다(예를 들면 LXX Hos.3:5의 ἐπ ἐσχατών τών ἡμέρών. 베드로는 신약 기자들이 사용한 전치사 ἐν 보다는 ἐπι를 사용한 것이다. 베드로는 LXX가 ἡμέρών 앞에 사용했던 정관사를 빼고 사용하였다). 베드로를 포함한 신약 기자들은 이 용어에서 LXX와는 달리 ἡμέραις 앞의 정관사를 빼고 사용하였다. 누가만의 특징은 ἐσχάταις 앞에 정관사를 붙여 사용한 것이다 (ἐν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
B. 마지막 날
단수 형태를 취하는 “마지막 날”(개역에서도 “마지막 날”)은 주로 요한 복음에 등장한다.
1. 베드로의 “마지막 날”(말세)
너희가 말세에(ἐν χαιρῷ ἐσχτῳ)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벧전 1:5) ----- 아직
2. 요한의 “마지막 날”
a. “마지막 날”의 부활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ἐν τῇ ἐσχατῃ ἡμέρᾳ) 다시 살리는 이것 이니라
(요 6:39, cf. 6:40, 44, 54, 11:24) ---------------------------- 아직
b. “마지막 날”의 심판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ἐν τῇ ἐσχατῃ ἡμέρᾳ) 저를 심판하리라 (요 12:48) -- 아직
요한은 단수로 표현한 아직 도래하지 않은 “마지막 날”을 주로 부활을 언급하며 사용하였으며, 심판과 관련해 한 번 언급하였다. 베드로와 요한도 역시 다른 신약 기자들처럼 LXX와는 달리 ἡμέρᾳ 앞에 관사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요한의 어법은 누가의 것이 복수 형태라고는 하지만 누가의 어법과 가깝다. 요한은 ἐσχάταις앞에 정관사를 사용한 누가처럼 ἐσχατῃ 앞에 정관사 τῇ를 사용하였다.
결론적으로, 신약에서 발견되는 이미 시작한 ἐν(ἐπ) (ταίς) ἐσχάταις ἡμέραις(마지막 날들)과 아직 오지 않은 ἐν τῇ ἐσχατῃ ἡμέρᾳ는 함께 “이미-아직”이라는 종말론의 구조를 형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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