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 장
늦은 비 복음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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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의 성결 운동가들은 그들의 부흥의 신빙성에 대한 근거를 위해 성경을 연구했다. 한 가지 유명한 근거는 마태복음 24장 14절이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언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성결운동은 이미 회심한 사람들 가운데서 보다 큰 헌신을 강조했다. 전 지구적 차원의 부흥 노력이라는 개념은 이런 증가된 헌신을 정당화하는 것 같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대중을 기독교로 성공적으로 개종시키는 보다 강한 열심을 요구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이, 그 구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진심으로 고대하던 전천년주의자들의 마음에 강한 인상을 남겼다. 그것은 그들의 세계 선교 프로그램들을 향한 성향을 강화시켰고, 인류의 마지막 세대 가운데서 살고 있다는 그들의 확신을 또한 강화시켰다. 선교는 전천년적 경고의 정당성을 입증했으며, 성결은 국내와 해외 선교의 서곡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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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큰 종말 사건에 대한 한 대중적인 묘사는 “늦은 비”(the latter rain)이었다. 성경 학생들은 그 용어를 팔레스타인의 비 내림 유형들을 위한 한 은유로 사용했다. 사도행전 2장의 “이른 비” 부흥은 봄비가 막 파종한 밭을 적셨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막 태어난 기독교 교회를 적셨다. 그런데 “늦은 비”는 성장기의 말미에 내려서 추수 직전에 곡식이 잘 여물 수 있게 적셔 주었다. 그래서 전천년주의자들은 현재의 부흥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있을 추수 직전에 성도들을 최종적으로 성숙하게 한다고 주장했다.
찰스 파함은 1900년 9월에 토페카로 돌아왔다. 그는 자기가 이 늦은 비의 목격된 나타남들을 가지고 있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의식적으로 실로에서 보았던 것을 자신의 학교의 모델로 삼았고, 그가 방문했던 다른 성결운동 지도자들의 것들과 같이 중요한 사역들을 설립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파함은 또한 자신의 소명은 독특한 것이라고 확신했고, 토페카 학교가 이 종말의 부흥을 보이는 데 있어서 보다 더 큰 성취를 이루기를 기대했다. 그는 여전히 자기가 살펴보았던 그 모든 운동에 무언가 부족한 것이 있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직 그 절정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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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후 그는 복귀 직후 토페카 신문기자들에게 표현했던 것보다 덜한 낙관으로 자신의 북부 여행을 상기했다.
연구를 위해 우리는 깊은 종교적 사상을 가진 기관들을 방문했다. 그 기관들은 성령의 권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었다. 그런데 이 모든 기관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는 데 실패했다. 주의 깊게 연구한 후, 우리는 이 시대에 아무도 개인적인 오순절의 권능(the power of a personal pentecost)을 사도행전에 기록된 것과 일치하게 받지 못했다는 확신을 갖고 캐나다와 동부를 아우르는 여행에서 돌아왔다. . .
1900년 가을에서부터 1901년 가을까지 파함의 평가의 변화는 그 새로운 성경학교의 교장으로서 그의 경험을 반영했다. 1900년 10월부터 1901년 4월까지 여섯 달은 심지어 샌드포드와 같은 급진적 성결운동 지도자들로부터 그를 충분하게 분리시켰을 것이다. 그의 지배적인 성결운동 이론가들의 성령론으로부터의 분열의 조각에서 오순절운동이 나왔다.
1900년 10월 중순에 벧엘 성경 대학을 설립했을 당시 파함은 맹렬한, 스물일곱 살의 종교적 이론가였다. 그는 토페카에서의 기독교 구제 사역에 중요한 공헌을 해 왔었다. 그리고 그는 의심의 여지 없이 그 도시의 사회적 엘리트들의 대부분에게는 전혀 해가 없는 광신자 같았을 것이다. 작은 규모의 서른 네 명의 학생들과 다른 백여 명이 넘지 않는 회중은 무언가를 더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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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파함은 비상한 영적 통찰력을 가진 젊은 사람, 그리고 3년간의 대학 교육을 받은 성경학자였다. 파함은 그 성경학교의 건물을 위해 미국 필라델피아 성서 공회[사실, 그 건물은 당시 미국 주일학교 협회 필라델피아 지부(American Sunday School Union of Philadelphia), 역자 주]의 소유였던, 기묘하게 정성들여 만든 집을 빌렸다. 그 “스톤 맨션”(Stone mansion)은 토페카의 상업지역에서 2마일 바깥, 집들이 드문드문 들어선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현재의 Most Pure Heart of Mary School 위쪽, 역자 주]. 그 스톤 맨션은 1951년 말엽에 “토페카에 지어졌던 주택들 가운데서 가장 크고 장식적인 것”으로 묘사되었다. 한 현대 해설자는 그 집에 “이른 디즈니랜드”(early Disneyland)라고 이름을 붙였다. 대부분의 거주자들에게 그 집은 마치 중세 유럽의 성과 같았다.
에라스투스 R. 스톤(Erastus R. Stone)은 1880년대 초엽 동안 보육원 사업으로 돈을 좀 벌었다. 전차들은 도시 주변에 저택을 마련하는 것을 현실적으로 가능하게 만듦으로써 도시에서 사는 미국인들의 생활양식을 혁명적으로 바꾸었다. 그 토페카 사업가는 짧은 부동산 붐의 산물들을 향유했다. 새로운 집들과 투기적 개발은 스톤의 목재와 관목 장사가 아주 잘 되게 했다. 사업이 잘되자 스톤은 직접 부동산에 투자하기도 했다. 그는 그 도시 서부 외곽에 2만 달러 이익을 발생시키는 30에이커를 거래했고, 10에이커의 토지를 사용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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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그 땅에 각종 나무들과 과목들을 빽빽하게 심었다. 그리고 1884년에 두 명의 보조자들과 함께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2년 동안의 작업 후, 2만 달러 이상이 투입된 후, 스톤의 꿈이 담긴 건물은 거의 완성되었다. 불행하게도, 그 새집의 거주자는 그곳에서 오래 살지는 못했다. 그 부동산 시장이 1887년에 무너졌고, 그것은 불경기가 캔사스인들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도 닥칠 징후였다. 그의 사업이 흔들리고, 그의 돈의 대부분이 그 새집에 묶여 있었기 때문에, 스톤은 그 재산을 팔아야 한다는 압박을 받게 되었다. 그는 1만 달러를 손해 보아야 했고, 그의 가족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이사했으며, 1917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거기서 살았다.
토페카 주민들이 “스톤의 무용지물”(Stone’s folly)이라고 불렀던 그 건물은 1890년대 동안 대부분 비어있었다. 매우 적은 거주자들이 가족을 위한 주거지로 그 건물을 세내려 했다. 그러나 그 건물의 크기는 1890년대의 불경기 동안 살기 위해 분투하고 있던 가족들에게는 비실용적인 것이었다. 그 건물은 그 이전 십여 년간, 캔사스가 서구개척자들의 결코 사라지지 않을 낙원인 것 같았을 때의 희망을 상징하는 기념물처럼 서 있었다. 그 거대한 저택은 1900년 말에 파함의 눈에 띄기까지 잘 사용되지 않아 활기를 잃었었다. 뾰족한 탑들, 넓은 발코니들, 그리고 화려한 장식물들을 가진 스톤의 무용지물은 파함에게 샌드포드가 종종 그의 지은 건물들을 보여주기 위해 방문객 무리를 안내하던 실로에 서 있는 종합빌딩을 상기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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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함이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 건물을 인수할 분명한 계획을 가지고 실로로부터 돌아왔다는 것에는 조금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의 새로운 시설은 잭슨 14가까지 뻗어있어서[고프는 스톤스 폴리의 정확한 위치를 몰랐던 것 같다. 역자 주] 실로처럼 파함과 그의 학생들에게 도시의 번잡한 왕래로부터 자유로움을 제공했다.
그는 여기서 또한 그의 치유의 집 사역을 다시 시작하기를 소망했고, 아마도 언젠가는 그 10에이커의 부동산 전체를 구입하여 그의 사역을 실로와 같은 사역들로 확장시킬 계획을 세웠을 것이다.
그 구식 스톤의 저택은 분명 파함의 종교적 기획의 시작을 위해 충분한 방을 갖고 있었다. 그 건물의 크기는 가로 40피트[12.5m], 세로 75피트[23.3m], 높이 60피트[18.6m]였다.
그 건물에 대한 가장 초기의 기사는 파함의 계획들을 요약했다.
그 집은 넓어서 열네 개의 방을 갖고 있으며, 각 방은 다른 목재로 마감되었고, 홀과 계단은 레바논의 백향목으로 만들어졌다. 각 층의 계단과 연결된 홀들은 크고 넓으며, 2층과 3층의 홀들은 거실들(sitting rooms)로 활용될 것이다.
그 건물의 크기에 더하여, 그 집의 사치스런 속성은 대단했고, 우스꽝스럽기도 했다. 한 후기의 기사는 스톤이 구상하고 공들였던 세부 사항들을 설명했다.
실내는 다 마감되었는데, 그 어떤 두 개의 방도 같은 목재로 마감되지 않았다. 마호가니, 자단나무, 목련나무, 호두나무, 검은색 흰색 나무, 곱슬 소나무, 새 눈 단풍나무, 버터너트, 그리고 참나무 등 나라의 모든 지역에서 가져온 목재들이 실내 장식에 사용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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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건물의 외관은 아주 인상적이었다. 삼층으로 되어 있었으며, 탑들과 총안이 있는 성가퀴(battlement)로 둘러싸여 있었다. 벽들은 무거운 샛기둥으로 지탱되었고, 얇은 벽돌과 돌로 만든 배내기들(stone cornices)로 마감되었다.
처음 몇 달 동안, 벧엘 성경학교에서의 생활은 토페카 주민들 사이에서 그리 흥미를 끌지 못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한때 “유령이 출몰할 정도”였던 저택이 사람들로 인해 북적거린다는 것에 흥미를 갖기도 했다. 신문기자들은 10월에 학생들이 그 건물의 높은 탑들 중의 하나 안에서 24시간 릴레이 기도를 하고 있는 것에 주목했다. “기도 탑”이라고 명명된 곳에서는, 참가자들이 3시간씩 돌아가며 기도했기 때문에 특별히 세계 전도를 위한 중보기도가 잦아들지 않고 계속되었다. 실로에서의 실행 직후 그것을 모델로 삼은 그 훈련은 그 작은 벧엘 공동체를 학생들과 하나님 사이의 개방된 소통에 대한 상징적 의식 안에서 결속시켰다. 어떤 토페카 주민들은 또한 그 단체의 재정적 필요를 인식하기도 했다. 파함은 봄에 구상했던 것을 계속 밀어부쳤다. 그는 그 학교를 믿음의 원리(the faith principle) 위에서 운영했다. 음식이 부족하거나 16달러의 월세를 낼 돈이 필요할 때면, 그는 그 학교에 기도 경보를 발했으며, 그 신앙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요구에 어떻게 응답하시는지를 보기 위해 기다렸다. 이웃들은 이 결핍의 시기들에 종종 기부했고, 그것은 적어도 받는 사람들에 의해 기도에 대한 응답과 전적인 믿음에 의한 생활의 타당성의 증거로 해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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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절이 다가오자, 파함은 표준적인 성결-전천년설에 대한 그의 강의를 마무리 짓고 그의 학생들을 성령에 대한 연구에로 이끌었다.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에 대한 그의 회고는 오순절 역사에서 가장 잘 알려진 일화 가운데 하나다.
[1900년] 12월에 우리는 회개, 회심, 헌신, 성화, 치유 그리고 주님의 임박한 재림이라는 주제에 대한 시험을 치루었었다. 우리는 연구에 있어서 한 문제에 봉착했다. 사도행전 2장은 어떤가? . . . 너무도 많은 종교적 단체들이 자기들이 받은 오순절 침례에 대한 증거(the evidence)로서 서로 다른 것들을 주장하고 있었다. 나는 학생들에게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the Bible evidence of the Baptism of the Holy Ghost)가 무었이었는지를 진지하게 알아보라는 과제를 주었다.
3일간의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캔사스시에 가면서 그동안 과제를 풀게 했다. 그리고 아침에 학교로 돌아왔고 저녁에 1900년 송구영신 철야예배를 계획했다. 아침 열 시 경에 종을 울려 학생들을 예배당 안으로 불러 과제에 대한 답을 제출하게 했다. 놀랍게도 그들은 하나같이 동일하게 대답했다. 오순절적 축복이 내렸던 다양한 사례들이 일어났었는데, 각 경우에 논의의 여지가 없는 증거(the indisputable proof)는 그들이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는 것이었다. 학생 사십 명 이외에도 약 칠십오 명의 사람들이 철야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였었다. 강력한 영적 힘이 학교 전체에 가득했다. 오후 열시 삼십 분경에 아그네스 오즈만[Sister Agnes N. Ozman] 자매(지금은 라버그[LaBerge])가 해외 선교지로 가고 싶으니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안수해 줄 것을 요청했다. 처음에 나는 거절했다. 왜냐하면 나도 아직 그 경험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더 요청하기에 겸손하게 예수 이름으로 그녀의 머리에 안수하며 기도했다. 내가 서른 마디도 다 하기 전에 영광이 그녀에게 비추었다. 후광이 그녀의 머리와 얼굴을 둘러싸고 있는 것 같았고, 그녀는 중국어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는 삼 일간 영어를 말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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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함과 학생들은 그런 강력한 힘을 경험하면서 이것은 다른 단체들에는 결여된 중대한 영적 요소라고 확신했다. 그들은 다음 이틀 동안 금식하며 기도했다. 각자는 그들이 증거했었던 것과 동일한 극적 경험을 받기를 바랐다. 그러나 오즈만 외에는 이 기다림의 기간 동안 방언을 말하지 못했다. 1월 3일 저녁에 파함은 학생 한 명만 데리고 기도하고 있는 그 단체를 떠나 토페카 중심가에 있는 자유 감리교회에서 설교했다. 그는 그곳에서 그 생소한 사건을 처음으로 바깥세상에 알렸다.
그는 그 회중에게 학교 전체가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파함이 그날 저녁 늦게 벧엘에 돌아왔을 때, 그는 그 건물의 이층이 “다락방”과 같아 보였고, 사도행전 2장의 부어주심의 청각적 증거를 들을 수 있었다.
방문이 조금 열려있었고, 그 방은 석유등들로만 밝혀졌었다. 내가 그 문을 밀어서 열었을 때 그 방은 그 석유등들보다 더 밝은 흰빛의 광채로 가득 차 있었다.
다양한 교단들 출신인 그 학교의 열두 명의 사역자들은 성령으로 충만해져 다른 방언으로 말했다. 몇 명은 앉아 있었고, 몇 명은 여전히 무릎을 꿇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두 손을 든 채로 서 있었다. 비록 몇 명이 그들을 채우고 있는 영광의 능력 아래서 떨고 있었지만, 거기에는 그 어떤 격정적인 육체적 나타남도 없었다.
내가 들어가자 나이 많은 스탠리 자매가 그 방을 가로질러 왔다. 그리고 내게 내가 들어오기 직전 불의 혀가 그들의 머리 위에 임해 있었다고 말했다. . . 나는 오순절의 능력이 임한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게 한 책상 뒤에서 무릎을 꿇고는 하나님께 감사의 마음을 드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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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동안 하나님을 찬양한 후, 나는 그분께 동일한 축복을 요청했다. 그분은 나를 부르셔서 이 놀라운 진리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나를 훈련시킬 것이라는 것을 내게 분명하게 알게 하셨다. 그리고 만약 내가 앞으로 일어날 핍박, 고난, 시련, 비난, 불명예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위해 기꺼이 일어서겠다면, 내게 그 축복을 주실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셨다. 그래서 나는 말했다. “주님, 제게 이 축복을 주신다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즉시 내 목이 조금 뒤틀리고 영광이 내 위에 임했으며, 나는 스웨덴어로 하나님을 경배하기 시작했다. 후에 스웨덴어는 다른 언어들로 바뀌었고 그렇게 아침까지 계속되었다.
1월 3일 부어주심에 이어서, 벧엘 공동체의 보다 많은 구성원들이 성령침례와 방언을 경험했다. 방언과 함께 다른 관련된 현상들도 일어났다. 몇 학생들은 통역의 은사를 받았고, 그 새 방언을 영어로 통역할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며칠 전에 오즈만이 경험한 직후 보였던 것을 반복했다. 그들은 일시적으로 영어로 소통할 수 없어서 메시지를 쓰기를 시도했지만, 외국어로 보이는 것을 통제할 수 없게 썼다. 곧 그런 놀라운 사건은 바깥세상의 관심을 끌었다. 이 관심의 중심에는 가장 흔한 영적 나타남인 방언이 놓여있었다. 파함에 따르면, 외부인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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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이미 취했던 방언은 초자연적으로 인증된 것이라는 것을 입증했다.
오순절적 능력의 이 초자연적인 회복이 사방으로 퍼지자마자 우리는 토페카 신문들의 기자들로 둘러싸였다. 캔사스시, 세인트루이스 그리고 많은 다른 시들은 기자들을 언어 교수들, 외국인들, 정부 통역사들과 함께 보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사역에 가장 엄격한 검증을 가했다. 한 정부 통역사는 하루 저녁에 구별되게 말해진 이십 가지의 중국 방언들을 들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 모두는 그 대학의 학생들이 세계의 언어들로 말하고 있었다는 것에 그리고 적절한 외국어 어조와 억양으로 말하고 있었다는 것에 동의했다.
파함의 토페카 오순절에 대한 기술에 약간의 문제가 있다. 먼저, 오즈만의 방언적 “중국어”는 전날의 철야예배 때보다는 다음 날인 1901년 1월 1일 저녁에 임했던 것 같다. 그런 날짜의 혼돈은 오즈만이 옛 백 년이 역사 속으로 지고 새로운 백 년이 동트는 바로 그 시간에 방언을 말했다는 낭만적인 생각을 포함하여 다양한 해석을 낳아왔다. 더하여, 파함의 열두 교단의 사역자들이라는 말은 그 발발이 참으로 초교파적인 사건이었다는 잘못된 인상을 주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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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는 그 작은 무리는 성결운동의 급진적 과격파들에 기반을 둔 하나의 부분적인 집단을 형성했다. 그들은 그들의 배경에 어떤 교단적 다양성과 유사성을 가질 수 있었지만, 사십 명의 학생들 중 20여 명은 사역증서를 가지고 있었고 주요 개신교 교단들 안에 남아있었다고 추정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파함이 그 사역자들은 열 두 개의 서로 다른 교단 출신이라고 명확하게 말하지는 않기 때문에, 그들이 단지 성결운동과 느슨하게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이 가장 개연성이 있을 것이다. 파함의 처제, 릴리안 티스틀스웨이트(Lilian Thistlethwaite)는 벧엘에서 그 성령침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감리교도들이었고, 다른 사람들은 형제단들이었고,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성결주의자들이었고, 많은 사람들은 어떤 교단에도 가입하지 않았다”라고 말함으로써 이런 판단을 확증해온 것 같다.
더 중요한 불일치는 오순절 공식(the Pentecostal formula)이 어떻게 도출되었는지에 대한 파함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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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학생들이 방언은 성령침례의 명백한 증거라는 동일한 결론에 이르렀다는 사실은 오순절 변증가들에게 중요한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그 전후 관계는 하나님이 영감하신 성경에 대한 공동체적 반응이 신학적 공식을 앞섰었다는 착시를 일으킴으로써 파함의 지도력을 약화시킨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자주 그 이야기를 그들의 운동은 그 어떤 인간 창시자도 없는 성령의 운동이라는 것에 대한 증거로 사용해 왔다. 보통 간과되는 것은 그 각본이 동일한 이유 때문에 찰스 파함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이다. 그의 사역은 종교적 권위로서 사람의 역할에 대한 깊은 의심 위에서 번창했다. 만약 어떤 새로운 신학적 메시지가 나타나려면,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기꺼이 듣고 받으려는 모든 사람들에게로 직접적으로 오는 것이 필수적일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파함이 몇 년 후 쓰면서 그 학생 무리의 개입을 의식적으로 과장했을 것이라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초기 기술들은 다른 그림을 그렸다. 그 이야기에서 다른 중요한 인물은 아그네스 네바다 오즈만(Agnes Nevada Ozman)이었다. 그녀는 네브라스카 출신으로 당시 삼십 세였고, 미혼의 열렬한 성결주의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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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함처럼, 오즈만 양도 19세기 말엽 농업의 예측할 수 없는 전망과 씨름하던 개척지 가족 안에서 자라났다. 또한 파함처럼, 그녀도 개인적으로 치유를 경험했다. 열아홉 살에 그녀의 감리교 목회자가 기도하여 그녀의 “독감과 폐렴”이 성공적으로 치유 받게 했다. 그 경험 이후, 오즈만은 전천년주의를 비롯하여 성결운동의 교리들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1892년에서 1893년까지 “호르톤(C. Horton)의 성경학교”에 다녔다. 2년 후, 뉴욕주 나약(Nyack, New York)에 있는 심슨(A. B. Simpson)의 성경학교(Bible Institute)에서 수강했다.
도중에, 그녀는 시카고에 잠깐 머물기도 했는데, 거기서 무디 성경 대학과 알렉산더 도위의 치유의 집에 가보았다. 1896년에 그녀는 어떤 캔사스 도시 선교에 정착했다. 그녀는 거기서 거리 전도 사역에 전념했고, 계속 그녀 자신의 종교적 충족을 찾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1900년 10월에 파함을 만났다. 막 북부 여행을 마친 파함은 캔사스 시의 성결회들에서 몇몇 집회들을 열어 벧엘 성경 대학의 설립을 알렸다. 오즈만은 분명 그의 신실한 경건과 믿음으로 살려는 그의 헌신에 감명을 받았다. 그녀의 자매가 예기치 않게 토페카로 가는 충분한 비용을 그녀에게 주었을 때, 오즈만은 그것을 하나님의 뜻의 한 징조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그녀는 벧엘로 돌아가는 그 젊은 복음전도자와 동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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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즈만은 자신의 벧엘에서의 경험을 파함과 관련하여 조금 다르게 기억했다. 그녀는 가장 이른 소식들과 일치하게 성령침례와의 극적인 조우의 시기를 정확하게 1901년 1월 1일 오후 11시로 기억했다. 그녀는 또한 그녀의 신년의 받음 몇 주 전에 짧게 방언을 말하는 경험을 했었다고 주장했다.
하루는 우리 세 여성들은 함께 기도하고 있었다. 그때 나는 다른 방언으로 세 마디를 말했다. 그것은 거룩한 경험이었고, 내 마음에 신성한 것으로 자리 잡았다.
파함의 학생의 일치된 이야기이다. 그녀가 그것을 기억하는 것처럼, 그 경험의 규범적 증거로서 방언에 대한 말은 그녀의 받음 이후에 시작되었지 이전에 시작되지 않았다.
보혜사를 받기 전에는 성령을 받을 때 방언을 말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방언을 말하며 성령을 받은 이후에,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받았다고 깨닫게 되었다. . . . 그때에는 다른 사람이 방언을 말할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성령이 어떻게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나실지 몰랐기 때문이다.
그 경험 후, 오즈만은 성경을 깊게 연구하기 시작했고, “그 주제에 대해 그렇게 많이 써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매우 놀랐다.” 몇 달 후, 그녀는 아홉 명의 다른 받은 자들이 동일한 현상을 경험하는 것을 본 후 독립적으로 방언은 성령침례의 최초의 증거라고 결론지었다. 오즈만은 신년 이전의 학생들의 과제에서 그녀의 그 어떤 역할도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학생들에 의한 그런 연구에도 의문을 던졌다. 그녀의 시나리오에서, 그 학생들은 그 나타남에 대해 그녀에게 물었고, 그녀는 그들에게 사도행전 2장을 제시하며 그녀의 경험은 오순절날 사도들이 받았던 것과 동일한 것이었다고 설명했다. 결과적으로 오즈만은 자신을 학생들과 파함 둘 다의 선생으로 그렸다.
두 견해의 차이는 오순절 신학에 어떤 의문을 제기해 왔다. 성령에 대한 전적인 강조를 제외하고,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이 그 운동을 규정했기 때문에, 그 교리는 이후의 오순절주의자들에게 그들의 이데올로기적 탄생의 공표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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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상, 두 기사들은 이 중대한 증거로서 방언 입장(tongues-as-evidence position)을 형성시키는데 있어서 파함의 직접적 역할을 경시하고 그 공을 벧엘 공동체에게로 돌렸다. 각각의 경우, 선생이 아닌 학생이 그 진리를 우연히 발견하고, 그 진리가 성령의 육체적 나타남에 의해 확인된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파함이 1900년 가을 동안 오순절주의의 신학적 퍼즐을 맞추었었고, 그다음에 그의 추론을 결정적으로 확증해줄 그 부흥을 예견했다.
파함과 모든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그들의 방언이 실제로 제노글로사(xenoglossa), 즉 외국어라고 생각했다. 그 견해는 오즈만의 극적인 성령침례 받음이후에 어떤 토페카 지역 선교에서 방언을 말하자 보헤미아인들에 의해 이해되었을 때 확증된 것 같이 보인다. 그녀는 그 대면은 “모든 사람들이 그 방언은 실제 언어였다는 것을 알도록 고무시켰다”고 보고했다. 글로솔랄리아(glossolalia) 보다 제노글로사(xenoglossa)가 더 중요함은 그저 그 현상의 신빙성 정도를 넘어섰었다. 파함과 학생들 모두는 세계 복음화에 대한 강력한 관심을 공유했었다. 그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재림이 자기들의 생애 동안에 발생할 것이라고 확신했고, 그래서 자기들 세대를 그런 멋진 책무를 감당해야 할 마지막 세대로 여겼다. 파함은 1899년 6월에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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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는 세계에 15억 명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 다른 사실은, 그 통계가 또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세계 인구 10억 명 이상이 아직 성경 없이, 교회 없이, 그리고 아무런 선교 사역도 없이 살아가고 있다.” 세계 복음화에 기울이고 있는 압도적인 시도는 그에게 새롭고, 그리고 더 영적인 방법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파함은 1899년에 세인트루이스에서 출간되고 있던 『영원한 복음』(Everlasting Gospel)이라는 성결운동 정기 간행물을 읽다가 처음으로 선교적 방언(missionary tongues)이라는 개념을 발견했다. 그 간행물은 샌드포드의 실로 공동체에 가입된 제니 글라세이(Jennie M. Glassey)라는 젊은 여성의 짧은 글을 실었다. 글라세이는 아프리카 선교사로서의 “부르심”을 수용한 후 갑자기 어떤 토착어를 말하는 놀라운 능력을 받았을 때 조금 놀랐다. 파함은 사도신앙 독자들에게 그녀의 경험을 열광적으로 알렸다.
글라세이는 지금 예루살렘에 있다. 그녀는 어느 날 밤에 아프리카 방언을 받았다 . . . 그녀는 1895년에 성령 안에 있을 때 그 은사를 받았고, 정상적이고 정신이 온전한 상태에서 그 언어를 읽고 쓰고, 통역하고 그 언어로 찬양할 수 있었다. 그녀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들었던 신자든 불신자든 수 백 명의 사람들이 그 사실을 증언할 수 있다. 그녀는 또한 리버폴과 예루살렘에서 시험을 받았다. 그녀의 기독교적 경험은 거룩하고, 헌신된, 성령으로충만한 여성의 경험이었다. 사도신앙의 회복으로 인해 우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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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함이 글라세이의 은사를 그가 초기 기독교에 대한 자신의 강조를 위해 택했던 용어인 “사도적 신앙”(apostolic faith)과 동일시한 것은 중요했다. 파함이 사도행전 2장의 사도적 경험을 해석한 것처럼, 사도들도 또한 제노글로사(xenoglossa)와의 극적 대면을 가졌었다. 오순절 날에 말해진 언어들은 이중적 기능을 가졌었다. 그 언어들은 외국에서 태어난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방언으로 복음 메시지를 듣게 했으며, 또한 새롭게 형성된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이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파함은 글라세이의 경험이 종말에 세계 복음화에 열쇠를 제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1900년 4월에 그 전제(the premise)를 받아들였다. 그리고 사도신앙 독자들에게 “하마커 형제와 자매가”(Brother and Sister Hamaker) 벧엘에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방인 방언을 주셔서, 그들이 선교 현장에 갈 수 있기를” 기다리며 머물고 있다고 알렸다.
이 현상의 매력은 아마도 글라세이의 스승, 프랭크 샌드포드에 대한 파함의 관심을 더 깊어지게 했을 것이다. 샌드포드는 세계 복음화라는 불가능할 것 같아 보이는 직무를 촉진시킬 성령의 부으심에 대한 파함의 기대를 굳게 만들었다. 파함은 실로에 있는 동안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방언을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몇 학생들이 그 학교의 “기도 탑”에서 긴 중보기도를 마치고 내려오면서 방언을 말하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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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관찰은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그 관찰은 그에게 샌드포드의 세계 복음화을 위한 성령침례라는 주제를 넘어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파함이 그의 생각에 대해 샌드포드와 논의했는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하여튼, 그 두 사람은 방언 현상에 대해 아주 다른 개념을 취했다. 샌드포드는 방언을 글라세이의 독특한 은사의 사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부흥 중에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간주했다. 그러나 파함은 방언을 실용적으로 보게 되었다. 대규모의 제노글로사는 세계 복음화를 아주 단기간에 실제적인 것으로 만들 것이었다. 제노글로사는 선교사들이 언어를 배우기 위해 여러 해를 보내지 않아도 되게 만들 것이며, 거의 누구든지 지구상 어디서든 선교를 위한 후보자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그 방법은 어떤 사람에게 자신의 소명을 확신시켰다. 모든 성령 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이 해야만 하는 일은 그들의 방언과 지역을 일치시키는 것이었으며, 하나님의 임명은 보증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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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함은 1900년 10월 15일에 벧엘 성경 대학을 열었을 당시 이미 “선교 방언”에 의해 확증되는 성령침례라는 개념을 확고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의 새로운 교리의 열쇠는 그 성경학교 자체 안에서 발견되었다. 벧엘성경학교는 특별히 선교사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학교였다. 과거에, 그의 성경학교는 그의 치유의 집 사역에 첨부된 것이었다. 그러나 파함은 벧엘 대학을 열면서 그 역할들을 뒤집었다. 훈련 센터가 우선이었다. 그렇게 바꾼 이유는 그가 세계 복음화에 대해 새롭게 말할 거리를 갖고 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성탄절이 되기 전 몇 주 동안, 파함은 학생들에게 그들이 아직 진정한 성령침례를 받지 못했었다고 납득시키는 것에 집중했다. 오즈만은 그녀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이미 “헌신 때 또는 온전한 성화 때에” 그 경험을 했었다고 기억했다. 그렇지만, 파함은 그 학생들에게 “대단한 확신과 능력으로 성령께서 아직 부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오즈만이 회고한 것처럼, “지금 여기서 충만함을 받는 것은 우리의 특권이다”라고 선포했다.
[역자 부연]
아그네스 오즈만은 1911년에 오순절 설교가 필레몬 라버그(Philemon LaBerge)와 결혼했다. 두 사람은 미국 전역에서 가능한 곳에서 마다 집회를 열었다. 그녀(Mrs. Agnes N. O. LaBerge)는 1917년에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가입했고, 전도자로 인정받았다. 1937년 11월 29일에 로스앤젤레스에서 소천했다 (https://www.apostolicarchives.com/articles/article/8795590/174072.htm).
[고프 계속]
파함은 그의 학생들에게 성령침례는 의심의 여지 없이 성경적이고 기능적인 어떤 확실한 증거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을 입증하기를 원했다. 그는 그의 교육 과정의 중심을 사도행전에 맞추었다. 비록 다른 카리스마적 은사들이 거기에 또한 기록되어 있지만, 방언이 성령의 권능과 복음화 사이에 분명한 실용적 연결이 있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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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에 기록된 첫 방언은 제노글로사적 방언이었다는 것은 특히 주목할만한 것이었다. 그 부음의 결과는 하루에만 삼천 명의 회심자였다. 그 숫자는 파함이 바랬었던 복음 전도의 결과와 일치하는 정도였다.
파함이 의도적으로 그의 학생들에게 이 선교 방언 개념에 대해 동기를 부여하고 있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록 오즈만이 이것을 언급하지 않았지만, 파함은 그녀가 그에게 성령침례를 받도록 자기에게 안수해 달라고 요청하기 이전에, 그녀가 해외 선교지에 갈 소망을 피력했다고 기록했다. 그 이야기는 파함 자신이 그 학교를 세운 목적을 언급한 것과 오즈만이 캔사스시에서의 사역을 떠나 파함에게 배우기 위해 토페카로 갔다는 사실을 통해 신빙성을 얻는다.
사실, 오즈만과 다른 학생들이 파함의 훈련 학교에서 발견했던 것은 선교에 대한 통전적인 접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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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의 급박성 속에서, 기독교 사역자들은 위로부터 오는 권능에 사로잡혀야 했다. 그 경험은 봉사를 위해 그들을 분발시켰고 구비시켰을 것이다. 파함은 후에 이 해외 선교 훈련은 단지 하나님께 전적인 헌신의 문제였다고 설명했다.
나는 수 년 간 해외 선교지에 가려는 어떤 선교사든 현지인의 언어로 전해야만 한다고 느껴 왔었다. 하나님께서 그 방식으로 그분의 사역자들을 구비시키셨다면, 오늘날에도 그렇게 하실 수 있으실 것이다. 발람의 당나귀가 그 길 한가운데서 멈추고 돈을 목적으로 나가고 있던 그 첫 설교자에게 아랍어로 호통을 칠 수 있었다면, 오늘날 누구든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혀와 목청을 사용하시도록 할 만한 나귀적 감각만이라도 갖고 있다면 그 어떤 세상 언어로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오즈만의 방언이 1월 2일에 그 지역 “보헤미아인”에 의해 제노글로사로 확인된 이후, 다른 학생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즉시 스스로 이 해외 선교 도구를 추구하기 시작했으며, 다음 날 저녁에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부음을 받음으로 응답을 받았다.
파함과 그의 학생들이 진짜 제노글로사를 경험한 것은 있을 법하지 않은 놀랄만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증명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이었을 것이다. 참여자들 중 아무도 언어적 패턴들을 판단할 만한 능력이 없었다. 그들이 그런 능력을 가졌었다면, 신적 은사를 통해 그런 언어들을 받을 필요가 거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들의 모국어를 들었던 또는 들었다고 생각했던 외국인들의 가지 각색의 보고들을 평가한다는 것은 지극히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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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증언자의 특정한 언어에 대한 본래의 유창함 정도 그리고 그의 미국 체류 기간은 그런 보고들이 진지하게 평가되기 전에 면밀한 조사가 요구될 것이다. 그런 증거를 수집할 최상의 기회는 1914년 찰스 섬웨이(Charles Shumway)의 학문적 연구로 끝났다. 섬웨이는 파함의 “언어학 교수들”과 “정부 통역사들”에 대한 전반적인 연구를 수행했지만, 기꺼이 그 복음전도자의 주장들을 확인해 줄 사람을 발견하는 데 실패했다.
토페카 발생 이후 신문기자들은 즉시 적어도 방언을 말하는 사람들이 명확한 언어들을 말했다고 확신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현상이 어쨌든 일어났다는 것에 놀랐다. 비록 그들이 조롱하려고 “사적인 일들을 주절거림”(laundry talk)이라고 칭한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함을 인정했을지라도, 그들 대부분에게 방언은 “횡설수설 하는 소리”(gibberish)로 들렸다. 기록된 방언(written tongues) 또는 방서(glossographia)는 비슷한 의심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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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벧엘 공동체가 방언 필기들은 실제 언어들이라고 주장했지만, 한 신문기자는 그렇게 만족하지 못한 분석 기사를 썼다.
영감된 것이라고 주장한 오스윈 양(Miss Auswin)의 몇 가지 필기는, 번역될 수 있는지 보려고, 여기 토페카에 사는 한 중국인에게 보여졌다. 그는 그 종이를 공중으로 날리며 말했다: “난 모르겠어. 일본인에게나 줘.”
오순절주의자들이 세기의 전환 시기에 제노글로사보다는 글로소랄리아를 경험했다는 지배적인 컨센서스에도 불구하고, 실제 언어를 들었다는 많은 보고들에 어떤 해결책을 제시하는 증거가 있다. 이 놀라운 현상은 아무런 의식적 노력없이 보유중인 어떤 개인의 기억 안에 담겨있는 외국어 형태들을 포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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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스트레스의 순간에, 마음은 이 단어들을 자동적으로 쏟아낸다. 겉모양은 “가장된 제노글로사”(simulated xenoglossa)의 일종이다. 왜냐하면 발화자가 외국어 단어들을 알지만, 그러나 그가 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비언어적 글로솔라리아라고 규정된 척도에 삽인된 실제 외국어 단어들의 사례들은 잊혀졌던 기억이 새롭게 의식에 나타나는 현상인 크립토므네시아(cryptomnesia)의 한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데 동의해 왔다.
1860년부터 1900년까지, 캔사스는 이민으로 인해 언어적으로 아주 다양했다. 거의 모든 카운티와 동네는 비-영어를 말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 주에 정착한 것에 의해 영향을 받았다. 노르웨이인, 덴마크인, 스웨덴인, 보헤미아인, 프랑스인, 그리고 독일인들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 보다 더 적은 폴란드인, 유고슬라비아인, 헝가리인, 불가리아인, 그리고 오스트리아인인들이 또한 그들의 존재를 과시했다. 1870년에, 그 주의 인구의 15퍼센트 이상이 해외에서 태어났었다. 미국 문화에의 동화는 캔사스 개척지에서 꽤 오래 걸렸다. 1910년에도 해외에서 태어난 성인들 중 21 퍼센트 이상이 영어를 말할 수 없었다. 캔사스 언어 구성은 미국의 나머지 주요 지역의 언어 구성과 조금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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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하거나 보다 높은 비율의 통계들이 다른 중서부 주들에 대한 것들에서 입수할 수 있다. 특별한 것은 찰스 파함이 성령침례를 받는 사람들에게 외국어가 주어진다는 인식을 개발했다는 것이다. 그와 그의 학생들은 그들의 과거에 실제 외국어들에 노출되어 왔었다. 그들은 또한 자기들에게 그분의 특별한 종말적 축복을 주십사고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했다. 그래서 그들은 크립토므네시아의 최고의 후보자들이었고, 그 현상은 의심의 여지 없이 어떤 단어들과 언어 같은 구조를 쉽게 외국어로 오인하게 했을 것이다.
적어도 통역이라는 다른 은사 없이는 방언이 받은 사람들 자신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것으로 판명된 후, 파함은 자신의 원래 견해를 조금 바꾸었다. 성령충만한 그리스도인들은 언어와 설교를 위해 하나님께 의존하는 순종적 종들이었다. 그 경험은 그래서 선교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메시지를 말하기 때문에 보다 이적적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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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지만, 소수는 몇 년 전에 글라세이의 사례처럼 방언 언사를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1919년에 파함은 그런 언어 은사는 계속 해외 선교지에서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방언 은사를 가진 몇 명의 선교사들을 선교지에 갖고 있다. 그들은 그 언어를 말하고 현지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지적으로 그 말을 사용할 수 있다. 이것은 그들에게 하나의 은사가 되었다.
방언은 비록 동일한 언어를 말하는 집단들 가운데서 기능했을 때 조차도 선교 지향적인 것으로 남았다. 방언은 하나님의 임재의 극적인 표징으로 기능했고 불신자들에게 복음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권고했다.
선교는 방언의 실용적 기능을 설명해 주었지만, 파함은 성령침례의 경험은 또한 기독교 신앙을 위해 중요한 내적 구별성(distinction)을 가져온다고 결론지었다. 그 구별성은 “신부의 인”(sealing of the bride)이었다. 성령침례를 받고 인류의 마지막 세대의 의기양양한 선교사들이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 그리스도의 신부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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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그리스도인들의 엘리트 집단은 휴거 때에 들림을 받을 사람들이 될 것이고 칠년 간의 극심한 환난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의 두 번째 단계 동안 그리스도와 함께 지상에 돌아온 그들은 천년 정부의 통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감당할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적 침례는 하나님의 허가의 특별한 인증이었고 새 세대에 어떤 사람의 자리에 대한 보증이었다. 벧엘 발생 삼 주 후, 파함은 새로운 부흥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의 조짐이며, 신랑의 신부의 선택의 때라고 선포했다. 그 특별한 경험은 이 독특한 세대를 위한 것이라고 설명함으로써 그는 논리적으로 그 이전 세기들 동안 그것을 받은 적이 없는 탁월한 종교적 사람들을 위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존 웨슬리와 다른 사람들이 이 침례를 받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까? 그렇습니다. 그와 많은 사람들이 내주하시는 강력한 기름부으심(a mighty anointing that abideth)을 향유했기 때문에, 그래서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았던 과거의 거룩한 사람들처럼 말했지만, 그러나 오순절적 성렴침례의 능력은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성령침례는 특히 지금 인침으로서 주어집니다. 그것은 마지막 날들의 보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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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솔로라아는 이 인침이라는 과정을 확증했고 그리고 그 새로운 교리의 분명한 부분이었다. 파함은 그것을 실용적 측면에서도 그리고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Bible evidence)로서 영적 나타남들 측면에서도 옹호했다.
파함이 그의 학생들 대부분에게 그들의 세대가 놀라운 은사들과 표적들을 받도록 예정된 세대라고 확신시키는 데 성공했음에도 불구하고, 소수는 여전히 회의적이었다. 1월 3일 목요일 밤 부어주심 이후, 스톤스 폴리(Stone’s Folly)의 종교적 분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그 학생의 절반 정도가 기도 중에 그 새로운 경험을 받았고, 소리 높은 찬양 소리가 새벽 공기를 타고 퍼졌다. 토요일 아침, 1월 5일, 그 황홀한 분위기는 일시적으로 깨졌다. 벧엘 공동체에 그 첫 이탈(defection)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캔사스시에서 왔던 사무엘 J. 리긴스(Samuel J. Riggins)가 벧엘을 떠나 토페카에 있는 옛 파함의 치유의 집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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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신문은 그것을 알아차렸고, 다음날 리긴의 그의 동료 학생들에 대한 평가가 Topeka Daily Capital의 2면에 실렸다.
내 생각에는 그들이 다 미쳤다. . .. 그와 같은 것을 본 적이 없다. 그들은 이 이상하고 무의미한 언어를 사용하여 말하고 몸짓하며 그 방에서 돌아다녔다. 그들은 그것이 가장 높으신 분으로부터 오는 말씀이라고 주장한다.
리긴스의 폭로는 기자들이 그 독특한 학교에 대한 관심을 유발시켰고 그 이상한 일에 대한 그들 자신의 인상들을 형성시켰다. 다음날, Topeka State Journal은 “벧엘의 생경함”(Row At Bethel)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는 리긴스의 이탈을 상세하게 다루고, 그가 떠나버린 그 종교적 분위기를 비슷하게 비우호적으로 묘사했다.
현재 그 집단의 약 열다섯 명이 방언 은사를 받았다고 한다. 한 스테이트 저널 기자가 그 학교를 방문했을 때, 선별된 사람들이 소집되었고, 그들은 생소하고 부자연스럽게 몇 문장들을 말했다. 그 문장들은 이국적 말들이었는데, 그들은 말하고 있는 그 언어도 몰랐고 그 의미를 알지도 못했다. . . . 남자와 여자들이 한 방 가득 둘러앉아서 간헐적으로 그들이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많은 언어들 중에서 하나로 갑자기 말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묘하다. 그들은 또한 기묘하고 분간할 수 없는 상형문자들을 쓰는데, 그들은 그것들이 시리아어, 중국어, 일본어, 아라비아어 그리고 다른 언어들의 문자들이라고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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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며칠 동안, 그런 신문 기사가 지속되었다. 기자들은 벧엘 공동체가 공산주의의 원시적 형태를 실시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모든 거주자들이 그들의 돈과 물건들을 공동 금고에 넣고 그들의 미래의 필요들에 대해 하나님을 신뢰했기 때문이었다. 기자들은 또한 24시간 기도 탑에서의 엄격한 행동도 상세하게 보도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신문기자들이 세계 복음화를 위한 그 새로운 신학적 공식을 정확하게 포착했다는 것이다. 그 신학적 공식은 파함이 그의 학생들에게 주입시킨 것이었었다. 또한 기자들은 세계 복음화 계획에서 그 기묘한 방언이 해야 할 역할을 인지했다. 그래서 글로솔라리아는 다른 무엇보다도 기자들의 관심을 받았다. 한 기자는 학생들중 하나가 말하는 것을 들은 것을 통역하기도 했다.
“Euossa, Euossa use, rela sema calah mala kenah leulla sage nalan. Ligle logle lazle logle. Ene mine no, sha rah el me sah rah me.” 이 문자들은 다음과 같이 통역되었다. “예수께서는 구원하실 능력이 있으시다.” “예수께서는 들을 준비를 하고 계시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최초로 대중의 관심이 일어난지 일주일 후, 다른 학생이 토페카 신문들에 그 학교를 고발했다. 랄프 헤릴(Ralph Herrill)은 이전 학생이었던 리긴스(Riggins)의 도움을 받아 벧엘 대학에서 나갔다. 그는 두 번째로 자퇴한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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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사스시에 사는 헤릴의 부모가 리긴스에게 돈을 주며 아들을 무사히 토페카시로 데려와 달라고 부탁했었다. 그 청년이 떠나는데 큰 장애가 없었지만, 리긴스는 다른 학생들이 헤릴이 떠나는 것에 항의하며 “내가 귀신들렸다고 주장했다”라고 알렸다. 헤릴은 비록 자신도 그 새 선교 방언의 신빙성에 대해 의심했지만, 그 학교를 비판하는 것은 꺼렸다. 추측할 수 있는 것처럼, 리긴스도 헤릴도 그 오순절적 침례를 받지 못했었다. 헤릴은 10월 하순에 학교에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적응하지 못한 몇 학생들을 따라 캔사스시로 돌아갔었다가, 오순절적 부흥이 시작되기 불과 몇 주 전에야 벧엘로 돌아왔었다. 그 두 사람은 동료 학생들을 비판했지만, 파함을 공개적으로 공격하고 싶어하지는 않았다는 것은 분명했다. 심지어 헤릴은 파함의 방언 말하기는 신빙성있는 것이라고 발표하기도 했다.
불안정하게 출발했지만, 벧엘 공동체는 단단해졌다. 더 이상 이탈하는 학생들이 없었다. 성령침례를 받지 못했음에도 남아있던 학생들은 반 동료들의 경험이 신빙성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계속 그 경험을 추구했다. 그들은 자기 선생의 복음화에 대한 극적인 계획의 성취를 보려고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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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함은 토페카에서 오순절의 비열광적인(nonenthusiastic) 받음을 평가한 후 발의 먼지를 털고 그의 메시지를 보다 넓은 시장에 가지고 갈 준비를 했다. 토페카 신문들은 1월 21일에 파함과 일곱 명의 성령충만한 추종자들이 미국과 캐나다 선교 여행을 떠났다고 전했다. 여덟 명으로 구성된 이 무리는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부탁을 그 공동체에 남기고 떠나 먼저 캔사스시로 향했다. 거기서 좋은 평판을 받으며 시작한 그들은 파함의 작년 여름 여행코스를 다시 밟으며 중서부와 북동부 성결연맹의 연결망을 통해 이 새로운 오순절의 빛을 퍼트리기를 바랬다. 성결운동 사역자들 중 하나였던 넬슨(J. Nelson)은 파함의 뒤를 이어 토페카 도심에 있던 치유의 집에서 사역을 사고 있었는데 이탈했던 두 학생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는 젊은 파함의 경력의 종말을 예언했다.
나는 이것을 예견해 왔었다. 나는 이전에 방언 은사를 받았다고 주장해 온 학교들을 보아 왔었다. 그것은 언제나 학교의 해체로 끝난다. 나는 그들 중 얼마가 하잖은 선교 여행을 떠난다는 소식을 들을 것이라고 예견했었는데, 그러나 그들이 돌아오리라고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
파함과 그의 아내는 그들의 자녀들을 벧엘 공동체에 맡기고는 진정한 복음전도 열정을 가지고 종교적 세계를 공략하기 위해 출발했다. 그 작은 무리에는 오즈만, 파함의 처제이며 방언과 통역 은사를 받은 릴리안 티스틀웨이스트, 그리고 외국어에 뛰어난 재능을 보이고 있던 십사 세의 소년 알버트 호어(Albert Horr)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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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무리는 캔사스시 도심 메디슨가 1675에 있는 한 건물을 빌렸다.
그들은 처음에 어느 정도 성공했다. 저녁 집회에는 칠십 오명에서 백여 명의 참석자들과 흥미를 느낀 구경꾼들이 왔다. 극적인 치유들이 일어났는데,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제니 케인 부인(Mrs. Jennie Caine)의 치유였다.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다리를 절었었는데, 그녀의 치유는 큰 관심을 끌었고 파함이 가끔 지역 음악 아카데미 건물에서 보다 큰 집회를 잡을 수 있게 했다. 그 성공은 또한 신문기자들의 새로운 관심을 끌었다.
캔사스 시 신문은 처음에는 토페카로부터의 소식이 몇 탐사기자들의 방문을 초래했을 때 1월 중순경 파함의 위업들을 기사화했다. 이제는 그 기자들이 파함이 그 도시의 인구에 어떤 영향력을 행사할 것인지를 보려고 왔다. 그 기자들은 그 젊은 사역자를 아주 상세하게 기술했고 의심스런 눈으로 바라보았다.
파함 씨는 표준 키보다 작고, 호감이 가는 외모를 가졌고, 사나운 붉은 수염을 가졌고, 아파트 관리인처럼 무뚝뚝한 태도를 보인다. 그는 캔사스 출신이고 1분에 250단어의 속도로 말한다. 그가 방언 은사를 가진 것에 대한 의심의 문제라면, 그는 최소한 하나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말솜씨에 있어서. . . . 그는 한 마디도 더듬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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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함은 더 존경받는 목사들로부터 그를 고립시키는 잦은 열변으로 언론을 그의 문간에 머물게 했다. 그는 벧엘에 적용된 공산적 삶의 방식(the communitarian lifestyle)을 천년 시대의 임박성을 주장함으로써 변호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사도적 믿음”(apostolic faith)의 조항들을 회복시키는 데 집중해야만 했다. 왜냐하면 “땅에 대한 사적인 소유와 다른 모든 소유물들은 사라질 것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돈과 모든 소유물을 그리스도의 금고에 쏟아 넣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함은 또한 금주에 관한 그의 독특한 입장 때문에 약간의 관심을 끌었다. 비록 그는 한때 조직화된 금주회들에 대한 강력한 옹호자였었지만, 이제 케리 네이션(Carry Nation[Caroline Amelia Nation, November 25, 1846 – June 9, 1911])의 술집 제거 전술이 무익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금주법은 오직 주류 거래를 가격을 올림으로써 거대 기업 경영자들의 수중으로 가라앉게 만들 뿐이었다. 파함은 익살스럽게 캔사스의 모든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지하 술집으로 가는 길에 불을 밝히는 “붉은 코”를 가진 사람이 쉽게 술을 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 문제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주류 거래에서 사람들의 몸을 구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마귀로부터 그들의 영혼을 구할 수 있는” 성령이 역사하시는 부흥이었다. 그의 반-기존 질서 성향(anti-establishment bent)에 대한 보다 큰 사례는 파함이 지역 천연두 전염 가운데서 예방 접종을 거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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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조악한 백신”으로 그의 가족의 어떤 일원이든 예방주사를 놓으려는 캔사스시 권위에 공공연하게 반항했다. 전적인 믿음에 의한 삶은 사람이 만든 치료법들에 대한 그 어떤 신뢰도 배제했다.
그 새로운 오순절 신앙의 추종자들도 또한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그 관심의 대부분은 그들의 지도자가 받은 것보다 덜 우호적이었다. 파함을 “성실하고 아주 낙관적인 열심자”로 처리한 한 기자는 그 설교자의 학생들은 “세계 여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촌스럽다”라고 평했다. 그렇지만, 소수의 다른 학생들은 보다 동정적인 시선을 받았다. 한 캔사스 주립대학교 졸업자는 그 소식들에 흥미를 느끼고 그 봄 하순에 벧엘 공동체를 방문했다. 그는 비록 파함의 추종자들이 어느 정도 생소한 종교적 신앙을 실행하고 있지만,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며, 눈에 띄는 개인의 건강이나 가족복지의 상실이 없다고 보았다.
언론의 관대한 기사에도 불구하고, 파함은 기대했었던 대중의 지지를 받지는 못했다. 회중은 그저 백 명 이하인 채여서 작은 선교회를 구성할 만은 했지만, 계획한 북부 여행을 충당할 만큼의 재정을 지원할만 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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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중순 경에, 그 여덟 명의 무리와 소수의 새로운 회심자들은 토페카에 있는 성경학교로 돌아왔다. 파함은 기자들에게 학교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돌아와야만 했다고 설명했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지만, 캔사스시의 너무도 소수의 회중은 지속적인 북부 선교 계획을 재정적으로 지원할 수 없었다. 겨울 눈보라들은 특히 매서웠고, 2월 초에 캔사스시에 8인치의 눈을 퍼부었다. 보다 북부의 더 심한 눈보라는 최상의 상황에서 여행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파함이 그 여행을 했다 할지라도, 그가 기대했던 큰 반응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전국의 성결 집단들은 그의 오순절 회복에 대한 최초 보고들에 무관심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새로운 운동을 과도한 감정주의(emotionalism)라고 비난했으며, 선교적 방언 주장을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겼다. 몇 주 후, 파함은 친숙한 벧엘 주변에 재조직을 결정했다. 세계를 변혁시키려던 최초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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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파함은 첫 펀치에 넘어질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그 무리는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해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하라시는 것을 하기 위한 자금은 결코 부족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기자들에게 학생들은 봄과 여름 동안 전국에 걸친 선교적 정복을 나설 것이며, 방언 은사를 받은 많은 사람들이 외국에 갈 것이라고 말했다. 2월 하순에 파함은 로렌스 근교에 20명으로 구성된 학생들의 무리를 데리고 갔다. 그는 그곳에서 얼마간 성공했지만, 다시 한번, 그 도시의 종교적 확신을 전적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기세를 꺽지 않았다. 파함은 로렌스로부터 캔사스시로 돌아와서 기자들에게 다음 몇 달간 그의 새로운 사도 신앙 운동이 놀라운 성장을 하리라고 기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선교를 위해 언어를 받으러 그 성경학교에 다니기를 바라는 많은 성직자들의 지원서들을 받았다고 밝히면서 토페카에 큰 강당을 지을 거대한 계획을 발표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필요한 재정을 충당해 주시리라 믿으며 다음 몇 달 동안 그 건물이 완공될 희망을 품고 그곳에서 여름 캠프 집회를 열었다. 학생들이 “훈련”을 위해 추가로 들어올 것이며 그 운동은 활기를 되찾을 것이고, 그러면 토페카 본부로부터 전세계 선교가 시작될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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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낙관적인 계획을 발표한지 일주일도 못되어, 파함은 진짜 비극에 직면했다. 3월 16일에, 그의 한 살배기 아들, 찰스 F. 파함 주니어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몇 학생들은 계속 하나님께서 사도적 회복의 한 놀라운 표징으로 그 유아를 일으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러나 파함은 이것이 승리가 아닌 시련의 시간이라는 것을 알았다. 이 비극은 다른 어떤 사건보다도 더 가까운 장래에 세계 선교의 그 어떤 소생도 파멸시켰다. 파함은 자신의 낙관을 지키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의 아들의 소천 두 달 후, 그는 소규모의 무리를 이끌고 캔사스시 선교에 나섰다. 그는 여름 캠프 집회를 알리며, 그 집회로 새로운 강당을 위한 계획을 대체했다. 스스로 납득시키려는 노력처럼, 파함은 미국 전역에서 와서 토페카 집회에 참석할 “수천 명”에 관한 거친 계획을 발표했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토페카에 오백 명, 그 지역 주변에 다른 수천 명의 추종자들이 있다고 그 신문에 말했다.
그 거대한 토페카 캠프 집회는 결코 시작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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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비극을 겪은 후 벧엘 공동체를 사로잡았던 절망감은 극복하기에는 너무도 컸었다. 많은 학생들은 두 달 전 그 성령침례의 새벽에 의해 예시되었던 것과 같은 낙관을 가지고는 그 사건을 설명할 수 없었다. 아그네스 오즈만은 후에 그 최초의 부흥 후 그 기간 동안 “한 사람의 목소리가 추종되었는 데 그 목소리는 주님의 것은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1901년 6월에 스톤의 무용지물은 새로운 주인에게 팔렸고, 파함과 학생들은 그 집을 비워주어야 했다. 헤리 크로프트(Harry Croft)는 지역 사업가였는데 그 건물을 구입하여 빠르게 지역 유흥업소(Harry Croft Road House)로 바꾸었다. 우아한 옛 맨션이 이제 크로프트의 비밀스런 밀매를 위한 “접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는 소문이 무성했다.
파함은 그 학교를 지속시키기 위해 토페카에 보다 작은 건물을 얻었지만, 오직 충성스런 학생들만 그와 함께 남았을 뿐이었다. 대부분의 추종자들은 스톤의 무용지물을 잃은 것은 토페카에서의 사역에 대한 최종적 징조로 여겼고, 그래서 비록 토페카 사람들에게 새로운 오순절적 교리를 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새로운 사역지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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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함은 가을에 그 학교를 닫고 그의 가족과 함께 캔사스시로 이사했다. 그는 그곳에서 깊게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이전 해의 자신의 경험을 신학적 단일체로 굳혔고 1902년 1월에 그의 첫 책을 펴냈다.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를 위한 히브리어 “콜 카레 보미드바르”(Kol Kare Bomidbar)는 침례 요한처럼 자신이 새로운 시대를 선포했었다는 파함의 믿음을 상징했다. 또한 침례 요한처럼, 파함은 자신의 길이 곤경과 고난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책은 성령침례가 세계 복음화와 기독교인의 삶에 새로운 시대가 동튼 것을 상징했다는 그의 낙관을 확인시켜주었다.
역설적이게도, 파함의 책의 완성은 스톤의 저택의 파괴와 동시에 일어났다. 그 장중한 건물은 1901년 12월 6일에 별 특별한 이유도 없이 불타서 잿더미가 되었다. 파함은 그 불이 그가 떠난 후 그 건물 안에서 행해졌던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의 성취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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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파함의 생각은 많은 토페카 주민들도 공감하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사건의 역설은 파함의 관심 밖이었다. 새로운 오순절 운동과 가장 밀접하게 동일시 되었던 그 건물이 파괴되었다. 그 자리에 보다 더 지속적인 기념비가 세워졌다. 파함의 그 책은 역사상 최초의 오순절 신학 서적이었다.
* 역자 부연
스톤스 폴리 (Stone’s Folly)의 위치
스톤스 폴리의 매혹적인 역사는 보육원운영자에서 부동산 투자자로 변신했던 사람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는 1887년 즈음에 17번가와 스톤 아베뉴 근처에 고딕양식의 건물을 지었다. 불행하게도, 경제적 어려움으로 그 프로젝트는 완성되지 못했다. 그 건물은 “스톤스 폴리”(스톤의 무용지물)라고 알려졌다.
스톤은 1890년에 그 건물을 팔았고, 그 건물은 여러 단계를 거쳐 1895년 7월에 미국 주일학교 협회 필라델피아 지부(American Sunday School Union of Philadelphia)에게 500달러에 팔렸다. 그 건물을 빌린 찰스 파함은 1900년 10월에 벧엘성경학교를 열었다. 파함은 그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홀로 하나님과 함께 있기 위해 내 방에 들어가서 금식하며 나의 미래의 사역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나의 많은 친구들이 내가 어떤 성경학교를 열기를 바라고 있었다. 여러 놀라운 이적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 "스톤스 폴리"로 알려져있던 건물을 빌릴 수 있었다. 그 건물은 영국 성을 본딴 커다란 저택이었고, 캔사스, 토페카에 있는 와슈번 컬리지(Washburn College)에서 서쪽으로 1마일 거리에 있었다.
“I went to my room to fast and pray, to be alone with God that I might know His will for my future work. Many of my friends desired me to open a Bible School. By a series of wonderful miracles we were enabled to secure what was then known as “Stone’s Folly,” a great mansion patterned after an English castle, one mile west of Washburn College in Topeka, Kansas.” (Sarah Parham, The Life of Charles F. Parham, 49)
그 학교가 열리고 몇 개월 후 그 학교의 학생들은 방언 은사를 받았다. 이 사건은 “토페카 부어주심”으로 알려져 있다. 즉, 그 스톤스 폴리는 오순절운동의 탄생지가 된 것이다.
파함과 그의 추종자들은 주목을 받았고, 캔사스 시로 이사했다. 스톤스 폴리는 1901년에 유명한 주류 밀매업자 헨리 크로프트(Herry Croft)에게 팔렸고, “크포프트의 로드 하우스”(Crofts Road House), 일종의 갈보집이 되었다. 1901년 10월말에 관계기관원들이 스톤스 폴리를 급습했지만, 크로프트는 이미 증거들을 빼돌린 후였다. 그럼에도 그와 그의 형제는 체포되었고 800달러 벌금과 함께 60일 동안 감옥에 수감되었다.
1901년 12월 5일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발생하여 그 건물을 태웠고, 크로프트는 그 땅을 1902년에 토마스 오웬(Thomas Owen)에게 팔았다. 오웬 부부는 1905년에 그 땅에 자기들의 집을 지었고, 1946년에 "모스트 퓨어 하트 오브 메리 가톨릭 성당"(Most Pure Heart of Mary Chatolic Church)에 팔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2019년에 새로운 건물이 지어지기 전까지 60여 년 동안 그 집은 성당 사제들의 관사로 사용되었다.
파함은 스톤스 폴리가 와슈번 대학에서 서쪽으로 1마일 거리에 있었다고 회상했다. 1마일은 1.60934Km인데, 구글 지도상에서 측정해 보면 그 성당은 거의 현재 와슈번 대학에서 서쪽으로 1.7km 지점에 있다.
1977년에 릴리안 J. 케네디(Lillian J. Kennedy)는 그 성당의 역사를 썼고, 그는 토마스 오웬이 그의 집을 스톤스 폴리의 기초 바로 위에 지었다고 주장했다.
“Stone’s Folly,” Most Pure Heart of Mary Catholic Church https://mphm.com/about/stones-folley
팀 바우어(Tim Bauer)는 토페카의 미술가인데, 2010년대에 스톤스 폴리를 그림으로 그리려다 당시 흑백 사진만 존재하여 폴리의 색채를 고민하다가 3600 block of S.W. 17th 에서 붉은 벽돌 등 폴리의 잔해로 추정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아래와 같은 그림을 그렸다.
Phil Anderson, "Painting brings historic mansion to life," cjonline:The Topeka Capital-Journal (https://www.cjonline.com/story/lifestyle/faith/2016/08/20/painting-brings-historic-mansion-life/16577329007/).
리 데펜도르트(Lee Defendort) 는 1980년에 한 지역 방송의 DJ로 토페카에 왔고, 모트스 퓨어 하트 메리 처어치에 다니게 된 후 스톤스 폴리에 대해 처음 들었었다. 그는 2016년 5월에 『이것은 모두 하나님의 계획』(It’s All in God’s Plan)이라는 책을 펴냈다. 그 책에서 그는 스톤스 폴리의 위치를 옛사제관사이라고 주장했던 케네디를 따랐다. 데펜도르트는 9월 25일에 옛사제관사 지하실에서 스톤스 폴리가 갖는 오순절운동적 의미와 가톨릭 갱신운동에 대해 강연했다.
Phil Anderson, “Book sheds new light on Stone’s Folly: Topekan Lee Defendorf to give talk on Sunday afternoon,” cjonline:The Topeka Capital-Journal (https://www.cjonline.com/story/lifestyle/faith/2016/09/23/book-sheds-new-light-stones-folly/16573441007/).
그렇지만 케네디의 주장은 1898년 토페카 지도 등 다른 보다 신뢰성 있는 자료들과 상충된다. 1898년에 제작된 토페카 시의 지도(Standard atlas of Shawnee County, Kansas, 45)는 스톤스 폴리가 옛 메리성당 사제 관사보다 조금 북쪽에, 길과 인접한 곳(17th and Stone street )에 세워졌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https://www.kansasmemory.org/item/223961/page/23).
2020년에 캔사스 지질 연구소(Kansas Geological Survey)는 그 지도가 지목하는 장소를 땅속을 살펴볼 수 있는 지질 탐사 레이더로 조사해 보았다. 그 보고서는 케네디의 주장과 1898년에 제작된 캔사스 지도가 보여주는 것 사이의 이견을 더욱 증폭시켰다.
이 탐사로 고무된 성당 주임신부 나탄 하버랜드(Fr. Nathan Haverland)와 신대원 학생들을 포함한 한 작은 팀은 1898의 지도가 지목한 곳에 대한 비공식적인 발굴을 시작했다. 몇 피트를 파 내려갔을 때, 그들은 몇 가지 확신을 주는 인공물들을 발견했고, 그것들은 그 장소가 스톤스 폴리의 실제 장소였다는 것을 지지했다. 곧, 발굴단은 못들, 부서진 벽돌들, 그리고 석기 또는 도기 파편들을 파냈다. 놀랍게도, 그들은 불에 녹은 유리 파편과 잿더미를 포함한 어떤 화재의 증거를 발견했다. 몇 피트 더 파 내려 갔을 때, 그들은 또한 돌로 만든 기초석을 발견했다.
이 발견들은 1901년 그 화재를 다룬 신문기사들과 관련되는데, 그 기사들은 그 건물이 화재로 주저앉았다고 진술했다.
1898에 작성된 지도와 폴리의 기초석들을 발견한 메리 성당의 발굴 성과를 감안할 때 스톤스 폴리의 정확한 위치는 3601 SW 17th St, 메리성당 북쪽 잔디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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