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세계의 오순절신학을 위해 KIPT

찰스 F. 파함 전기(고프)

오순절운동의 아버지 찰스 F. 파함 전기 1 (고프)

한오신 2024. 8. 3. 21:43

찰스 F. 파함과

오순절주의의 선교적 기원

 

제임스 R. 고프, Jr.

 

이창승 역

 

2024. 8. 3.

 

한국 오순절 신학연구소

 

 

Fields White

Unto

Harvest

 

 

Charles F. Parham

and

the Missionary Origins of Pentecostalism

 

 

James R. Goff, Jr.

 

 

The University of Arkansas Press

Fayetteville London

1987

 

 

James R. Goff, Jr.

 

Dr. James Goff earned his M.Div. from Duke University and his Ph.D from the University of Arkansas in 1987. Dr. Goff primarily researches issues pertaining to the late-19th and early-20th century U.S. South, American Religious History, Holiness and the Pentecostal Movement, and 20th Century Popular Culture (particularly Country and Gospel Music).  Now he is a professor of history at Appalachian State University in Boone, North Carolina.   

 

James Goff | Department of History (appstate.edu)

 

 

역자 서문

 

 

    1900년과 1901년이 교차되던 송구영신 예배로부터 시작된 오순절운동이 이제 124세의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1930년대에 메리 C. 럼시를 필두로 미국과 영국의 선교사들이 오순절운동을 한국에 이식시키기 시작한 후 94년이 지났다. 그동안 오순절운동의 아버지 찰스 F. 파함의 생애는 로버츠 리아돈(Roberts Liardon)AD. 2000년에 썼던 God’s Generals: Why They Succeeded and Why Some Fail (Whitaker House, 2000)의 한국어 번역인 치유사역의 거장들박미가 역 (은혜출판사, 2012, 12004)을 통해 한국에 알려졌었다. 리아돈은 그 책에서 파함을 오순절의 아버지”(The Father of Pentecost)로 소개했었다(97쪽에서 122).

 

 

Roberts Liardon

 

 

 

    그런데 리아돈은 전문적인 학자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저술가이며, 파함의 생애는 다른 치유사역자들의 생애와 함께 일부분으로 다루어졌다. 사실, 리아돈의 2000년 파함의 생애 기술 12년 전인 1987년에 이미 파함의 생애에 집중한 전문적인 학자의 연구의 결실이 맺어 졌었다. 그런데도 이 연구는 그동안 한국에 소개되지 않았다. 제임스 고프 (James Goff) 1987년 알칸사스 대학교(University of Arkansas)에 체출한 박사학위신청 논문에서 역사가의 관점에서 파함의 생애를 집중적이고 전문적으로 연구했었다. 한국 기독교계에 그리고 좁게는 한국 오순절계에 오순절운동의 아버지의 생애에 대한 이 전문적인 연구의 소개가 절실하게 필요했다. 그래서 역자가 이 연구를 번역하여 소개한다. 이 번역 소개를 계기로 찰스 파함에 대한 합당한 평가와 전문적인 연구가 한국에서 일어나기를 바란다.

    사진들과 지도들은 고프의 논문에는 없던 것들이며, 역자에 의해 부연된 것이다. 간간이 필요할 때 [역자의 부연]이 등장할 것이다. 또한 고트의 글은 학위논문이라 좀 딱딱하다. 보다 부드러운 글을 원하는 사람들은 파함의 아내 사라 파함(Sarah Parham)이 편집하고 쓴 The Life of Charels F. Parham을 읽기를 추천한다.

 

역자 한국오순절신학연구소 소장 이창승

2024 8 4

 

 

 

 

감사의 글

 

    이 책은 알칸사스 대학에서의 나의 박사학위 과정 동안 시작된 연구와 논문에서 싹텄다. 이것은 20세기의 상황에서 오순절주의의 중요성과 그 운동의 발전에 있어서 찰스 파함의 역할을 강조한다. 나의 연구가 진행되면서 오직 파함의 생애만이 20세기 오순절 신학의 기원을 드러낼 수 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그의 경험과 신학적 평가의 독특함은 오순절 운동의 발전과 성장의 신비를 간직하고 있다. 내 자신의 배경은 오순절적 세계에 대한 값진 통찰을 제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주제와의 그 어떤 정서적 제휴로부터도 내 자신을 떼어놓으려고 노력했다. 그런 노력은 역사가로서 나의 훈련에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앙은 결코 감상적인 역사에 의해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단순한 신념에서 일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의 완성에 도움을 주었다. 네 분의 교수님들은 오순절주의에 대한 나의 관심을 일으키고 성장시켜주신 것으로 인해 특별히 언급될 만하다. 빈슨 사이난 박사(Dr. Vinson Synan)는 오순절 운동의 지적 기원에 관해 대학 1학년 과정생으로써 나를 맨 처음으로 고무시키셨다. 몇 년 후 그랜트 웨커 박사(Dr. Grant Wacker)는 그 운동의 사회적이고 문화적 뿌리에 대해 비평적으로 생각하도록 나를 자극하셨다. 대학원 과정을 통해 데이비드 하렐 박사(Dr. David E. Harrell)와 윌라드 게이트우드 박사(Willard B. Gatewood)는 이 연구에 이르게 한 그 탐구에 대한 매우 귀중한 방향 제시와 격려를 나에게 주었다.

    이 연구의 어떤 부분은 알칸사스 주의 페이이트빌(Fayetteville)에 있는 알칸사스 지역 연구를 위한 메리 허긴스 장학 재단 센터의 보조금으로 진행되었다. 다음과 같은 연구소들과 기관들 또한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는데 도움을 주었다. 알칸사스 대학교의 멀린스 도서관과 특별히 그 상호 대차대여 부서, 하나님의 성회 도서관, 오랄 로버츠 대학교의 성령 연구 센터, 사도적 신앙 성경 대학과 사도적 신앙 소식(Apostolic Faith Report), 오순절 교회 도서관, 캔사스 역사 협회, 벡사 카운티 법원 도서관, 텍사스 대학교의 유진 바커 텍사스 역사 센터, 서남 하나님의 성회 대학, 연합 오순절 교회 도서관, 그리고 애팔래치아 주립대학교 아카데믹 컴퓨팅 서비스가 그것들이다.

    나는 또한 알칸사스 대학교의 내 친구들과 와타우가 고등학교와 애팔래치아 주립대학교의 내 동료들에게도 감사한다. 그들은 지난 몇 년간의 연구와 저술을 격려해 주었다.

    특별한 도움과 방향 제시로 인해 나는 디모데 도노반 박사(Dr. Timothy Donovan), 이반 벅키 박사(Dr. Evan Bukey), 데브라 코란(Debra Cochran), 웨인 워너(Wayne Warner), 카렌 로빈슨(Karen Robinson), 마가렛 뮤즈 드럼(Margaret Muse Drum), 맥신 벤슨(Maxine Benson), 파울린 파함 박사(Pauline Parham), 베니 스탠베리 목사(Rev. Bennie Stanberry), 마조리 헤어(Marjorie Haire), 제랄린 하쉬필드(Geralean Harshfield), 잭 코넬 목사(Rev. Jack Cornell), 나오미 부쉬 목사(Rev. Naomi Bush), 찰스 찰팬트 박사(Dr. Chales Chalfant), 웨이드 번사이드 박사(Dr. Wade Burnside), 데이비드 가르시아(David Garcia), 알마 네르바스(Alma Nehrbass), 에디 모리스 목사(Rev. Eddie Morris), 윌리와 쟝 클락(Wiley and Jean Clark), 존 헨들러(John Hendler), 칩과 리네 우드워드(Chip and Lynne Woodward), 죠지 앤톤 박사(Dr. George Antone), 그리고 릭키와 스티브 위크스(Ricky and Steve Weeks)에게도 감사한다.

 

 

 

19884

북 캐롤라이나, 분에서

제임스 R. 고프, Jr.

 

 

 

목차

 

 

서론 ------------------------------------------------------ 1

1. 청소년기의 위기들 -------------------------------- 27

2. 성결과 치유 ----------------------------------------- 54

3. 늦은 비 복음 ---------------------------------------- 106

4. 늦은 비의 확산 ------------------------------------- 149

5. 오순절운동의 발기인: 약속 --------------------- 180

6. 오순절운동의 발기인: 추락 --------------------- 218

7. 인내와 무명 ----------------------------------------- 255

결론 ------------------------------------------------------ 279

 

 

*이 번역에 표기된 페이지는 고프의 원논문의 페이지이다.

 

 

 

서론

 

1

    “오순절주의”(Pentecostalism)는 틀림없이 현대에서 가장 중요한 종교적 운동이다. 숫자만으로도 이 주장은 충분히 설득력 있다. 오순절주의는 경이적인 성장을 자랑한다. 그 운동은 1901년 미국에서의 미미한 시작 이후 1세기도 채 못 되어 이제 전 세계에 걸쳐 총 51백 만여 명의 추종자들을 얻었다. 이것은 개신교 안에서 한 단위 집단으로서는 가장 큰 것이다. 은사주의 운동의 11백만 명이 더해지면, 오순절적 관행을 따르는 사람들은 62백만 명에 이른다. 거기에 오순절적 가르침에 의해 일상적인 영향을 받고 있는 1억 명이 더해진다.

    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은 1980년에 미국에서 성인 인구의 19 퍼센트를 차지했다. 그 성장률은 지난 25년간의 상황에서는 가장 놀랍다. 반 듀센(Henry Van Dusen)1958년에 맨 처음으로 잡지 라이프(Life)3 세력현상을 기술했을 때, 그는 전 세계의 오순절주의자들을 85십 만여 명으로 추산했었다.

 

Henry Van Dusen

 

 

2

    반 듀센의 오순절주의 분파의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평가에도 불구하고, 그는 60 내지 70 퍼센트라는 경이적인 성장을 상상할 수 없었다. 1964년에 오순절 신학은 전통적 개신교 진영으로 쇄도하고 있었다. 성공회, 장로교, 루터교, 감리교 그리고 침례교도들이 사적인 모임들에서 영적 은사들에 의해 드러내지는 성령 충만한 삶의 시작을 위해 기도하기를 배웠다. 1970년 로마 가톨릭 교회도 그 영향을 받았다. 신학교 학생들과 혁신적인 사제들이 작지만 급격하게 성장하는 은사적 갱신운동을 발기했고, 그 갱신운동은 대단히 놀랍게도 가톨릭 성직자단의 신중한 승인과 함께 그 교회 안에 남아있다.

    그런 단 기간의 경이로운 성장은 종교적 평론가들과 역사가들의 관심을 사로잡아왔다. 설명을 위해 그 운동은 세 가지로 독립된 진영들로 나뉜다. 전통적 오순절주의자들(traditional Pentecostals, 초기-1960)은 별개의 교파들을 형성했으며, “고전적”(classical)이라고 명명된다. 개신교적 오순절주의자들은 각자의 주류 교파들 안에서의 기반을 유지하며, “새로운 또는 신오순절주의자들”(New or Neo-Pentecostals)이라고 불린다.

 

3

    가톨릭 오순절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가톨릭 은사주의자들 혹은 가톨릭 갱신주의자들”(Catholic Charismatics or the Catholic Renewal)로 분류된다. 신 오순절주의자들과 가톨릭 갱신주의자들은 종종 간단히 은사주의자들”(Charismatics)로 함께 결부된다. 오순절주의와의 결속을 주장하는 미국의 성인 29백만 명 중에 거의 사분의 일이 가톨릭 은사주의자들이다. 나머지 사십 퍼센트가 신 오순절주의자들이다. 그래서 총 1천 만여 명의 미국 오순절주의자들 중에서 단지 삼 분의 일 정도가 전통 오순절적 교파들의 범위 안으로 분류된다.

    1982세계 기독교 백과사전(World Christian Encyclopedia)은 오순절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기독교적 고백 혹은 교회적 전통으로서 모든 기독교인들이 성령 침례라는 회심 후 종교적 경험을 추구해야 한다는, 그러면 순간적인 성화’(instantaneuou sanctification), ‘예언 능력’(the ability to prophesy), ‘신유 실행’(practice divine healing), 방언(glossolalia)을 말함, 또는 방언 통역’(interpret tongues) 등의 초대 교회에 알려진 초자연적 은사들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을 받을 수 있다는 분명한 교의를 주장한다.” 그러나 오순절주의자가 은사주의자인가? 은사주의자가 오순절주의자인가? 첫 질문에 대한 거의 공통적인 대답은 부정적이며, 둘째 질문에 대해서는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운동 내부의 신학적 다양성은 어떤 것보다 엄격한 정의를 요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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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한 신학적 차이점들은 양측의 참여자들에 의해 인지된다. 전통 오순절주의자들은 신오순절주의자들과 은사주의자들 측의 신학적 준거의 결핍을 문제 삼아 왔다. 가장 중요한 것은 최초의 증거”(initial evidence) 교리이다. 그것은 성령 침례 받음”(reception of the Holy Spirit baptism)은 모든 참석자들이 명백하게 규정지을 수 있는 표징, 방언 말하기”(speaking in tongues) 또는 글로솔라리아”(glossolalia)를 수반한다는 것이다. 은사주의자들은 자주 자기들이 방언에 대한 독단적인 강조라고 간주하는 것을 반대하고 고린도전서 127절에서 11절에 언급된 아홉 가지 은사들 중 그 어떤 것에 의해서도 입증되는 성령 침례 받음을 받아들여 왔다. 그 문제의 중요성이 1980년에 행해진 크리스챤 투데이 갤럽 여론조사의 결과에 의해 입증되었다. 미국 오순절-은사주의자들 전체의 17 퍼센트만이 방언을 말한 경험이 있다고 보고한 반면에, 전통적 오순절주의자들의 거의 50 퍼센트가 그런 경험을 주장했다. 한 저명한 역사가가 세 가지 서로 다른 지류들(전통적, , 그리고 은사주의적)에 의해 공급되는 하나의 강”(즉 오순절주의)의 이미지를 사용함으로써 그 간격을 메우려고 노력해 왔다. 그러나 그런 줄타기는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5

    교회 안에서의 은사의 정당성”(the validity of charismata)을 주장하는 사람들 모두를 망라하는 포괄적인 용어로서 오순절주의”(Pentecostal)를 계속 사용하는 것보다는 그 용어를 오직 정통 오순절주의자들”(the traditional Pentecostals)을 위한 것으로 제한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그 운동의 역사적 뿌리들은 오순절주의는 그 기원을 19세기 후반에 두는 성령에 대한 보다 폭넓은 강조 안의 한 보다 엄격하게 한정할 수 있는 운동이라는, 역사가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것 보다는 보다 더 명확한 초점을 요구한다. 1875년 이후의 기간은 성령 시대”(a Pneumatic or Spirit Age)라고 느슨하게 칭해질 수 있을 것인데, 그 시대 안에서 오순절주의라는 보다 엄격한 신학적 현상”(the stricter theological phenomenon)이 일어났다. 그러므로 은사주의 운동(신오순절과 카톨릭 은사주의 갱신 모두)은 백 년 된 현상의 보다 최근의 표명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오순절주의는 성령 시대에서 싹텄지만, 그 자체의 정체성을 획득하기에 성공한, “보다 신학적으로 한정된 운동”(a more theologically defined movement)이다.

    오직 오순절주의만이 1천만 명의 미국인들과 51백만 명의 전 세계의 사람들이 증명하는 것처럼 충분히 인상적인 역사적 현상이다. 명백하게 미국적 뿌리임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의 추종자들이 미국의 추종자들보다 다섯 배에 이른다는 것은 오순절주의적 선교의 중요성과 영향력을 강조한다. 그 전 세계적인 폭발적 성장은 최근 몇십 년 동안 소위 제 3 세계 국가들 안에서 일어났으며, 어느 정도 은사 시대”(Charismatic age)의 개시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6

오순절 선교사들의 메시지는 지방 사람들을 사로잡아 왔으며, 독특한 종교적 해방의 메시지로 변환되어왔다. 그 운동의 확실한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성장은 그 운동이 그곳에서 그 자체의 정체성을 획득해왔다는 것을 시사한다. 전 세계의 51백만 명의 오순절주의자들 중에서 적어도 22백만 명은 1980년 조사에서 비백인계로 기록되었다. 이 오순절주의자들은 비록 종종 작은 규모의 미국 조직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이제 교단적 오순절 선교사들의 양육 팔을 넘어서 있다.

    미국에서 오순절 교단들은 그 기원에 있어서 세 가지 구별된 단계들을 거쳤다. 가장 초기의 그 교단들은 대부분 1890년도에 온전한 성화”(entire sanctification) 문제로 감리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급진적 성결 교단들로 구성되었다. 그 교리는 초교파적이었지만 아담으로부터 유전된 타고난 죄를 개인에게서 제거할 수 있는 은총의 순간적인 두 번째 사역”(an instantaneous second work of grace)이라는 메시지를 전한 감리교인들에 의해 주도된 운동이었던 전국 성결 운동”(the National Holiness Crusade) 안에서 중요한 조항이 되어 왔었다.

 

7

1890년도에 꽤 많은 성결 전도자들은 주류 교회들이 성결보다는 사회적 지위나 체면에 더 관심을 갖는다고 판단했다. 감리교 지도자들은 많은 성결 전도자들의 교육받지 못한 행실을 겪고 매우 당황하면서 더욱 그렇게 판단하게 되었다. 그 결과 다수의 이탈자들이 신학적 관심과 윤리적 정결을 위해 자신들의 작은 교단들을 세웠다. 이 성결 교단들 중 일부가 방언으로 입증되는 성령침례의 구별된 체험(separate experience)이라는 새로운 오순절적 교리를 받아들임으로써 20세기의 첫 10년 동안에 오순절주의가 되었다. 하나님의 교회(테네시, 클리블랜드) 그리스도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오순절 성결 교회는 그 교단들을 대표한다.

    교단 형성의 두 번째 단계는 오순절 교리의 전파의 뒤를 이었다. “사도적 신앙 운동”(The Apostolic Faith movement)은 중서부에서 1906년에 형성된 느슨하게 조직된 집단이었다.

 

8

사실 그 추종자들은 웨슬리안 성결 옹호자들이었으며, 그들은 1901년에 오순절적 침례라는 독특한 신학을 공식화하고 사도적 순수성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함께 착수시켰다. 1906년 이후에 오순절 교리와 만난 다른 사람들은 성결에 대한 웨슬리안적 정의를 공유하지 않았다. 전국 성결 운동에 더하여 19세기 후엽의 무조직 성결 운동은 적어도 두 가지 다른 근원으로부터 힘을 얻어 왔었다. 하나는 영국 케스윅에서 매년 개최된 집회의 종교적 각성이었다. 다른 하나는 미국 개혁교회 안의 복음주의자들에 의해 후원된 보다 높은 삶”(higher life) 운동이었다. 케스윅 지지자들은 회심 후에 오는 어떤 경험은 그 받는 자에게 보다 과감한 그리스도인의 봉사를 위한 능력부여(empowring)라는 실용적인 기능으로서 공헌한다고 주장하면서 성결의 능력의 소식을 전했다. 또한 보다 높은 삶 주창자들은 두 번째 축복”(the second blessing)으로 가능해지는 증진된 봉헌과 헌신에 주목했다. 이 전통 속에서 오순절적 메시지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웨슬리안들이 그랬던 것처럼 옛 교리를 유지하기 보다는 그 경험을 능력을 위한 두 번째 경험의 최종 성취로 보았고, 더하여 새로운 세 번째 축복을 만들어 내었다. 성화 문제에 있어서 타협의 여지를 발견할 수 없었고, 의심할 바 없이, 이미 세워진 성결-오순절 조직에서 축출된 그 개혁주의적 오순절주의자들”(Reformed-Pentecostals)은 정통 오순절 교단들 중에서 가장 큰 교단인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ies of God)를 형성하기 위해 융합되었다.

 

9

    교단적 조직의 세 번째 단계는 분열을 통해 왔다. 1906년에서 1908년까지 오순절 교리의 급속한 성장에 의해 진동했다가 그 자체의 느슨한 조직으로 인해 약화된 사도적 신앙 운동은 세 가지 집단으로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그 각각은 그 원래 이름을 유지했다. 그러나 이 분열에 내포된 문제들은 대부분 지도자들 사이의 개인적인 마찰들과 예배 방식에 관한 것들이었다. 보다 중대한 분열은 그 운동이 존재하기 시작한지 십여 년이 지났을 때, 하나님의 성회 안의 삼위일체 논쟁이 단일신론적 오순절 조직인 세계 오순절 성회”(the Pentecostal Assemblies of the World)의 형성으로 귀착되었을 때 발생했다. 후속적인 분열들은 오순절주의의 이 세 번째 단일성”(oneness) 분열을 굳혔다.

    그런 분열에도 불구하고 오순절주의는 번창했다. 1930년에 그 운동의 그 세 분파들은 각각 자체의 협회(fellowships)를 조직했었다. 각 협회는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해외 선교 프로그램을 증진시켰다.

 

10

윌리엄 워렌 스위트(William Warren Sweet)의 고전적인 미국 종교 조사”(American religious survey)에 대한 1950년도 개정판은 십 여 년 간의 공황은 대중을 내세적”(otherworldy) 메시지에 쉽게 자극받게 만들었다는 주석을 달면서 성장일로에 있는 오순절주의를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성회는 1926년에 48,000명에서 1937년에 175,000명으로 뛰어올랐다. 같은 기간 동안 테네시, 클리블랜드에 기반을 둔 하나님의 교회는 23,000명에서 80,000명으로 증가했다. 스위트가 기록하고 있을 때 발생했던 증가는 훨씬 더 극적이었다. 1950년에 하나님의 성회는 318,478명에 이르렀으며, 1960년에 508,602명을 기록했다. 1983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신자는 총 1,788,394명이었으며, 하나님의 성회는 미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교단이라고 공표할 수 있었다.

    숫자의 증가와 함께 미국 오순절주의자들은 이상할 것 없는 사회적 지위의 상승을 구가해왔. “숲속의 작은 갈색 교회옆에 세련된 물질적 설비들, 많은 직원들을 거느리는 목회적 지도력, 순조롭게 진행되는 교회 성장과 발전을 위한 프로그램들을 자랑하는 많은 새로운 대형교회들이 인접해 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미국 사회의 빈곤자들과 노동자들에 대한 전통적인 구제활동에 더하여 중산층과 중상류층 집단들 안에서의 사역을 찾아내었다. 의심할 바 없이 부분적으로 2차 대전 이후 몇십 년간의 미국 번영의 결과였다.

 

11

어떤 모태”(birthright) 오순절주의자들은 꾸준히 사회적 사다리를 올라갔으며, 자신의 교회에 머물렀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그 변화를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진취적인”(up and coming) 종교적 방식의 한 부분인 자신의 열린 예배 스타일을 펼쳐 보이며 자의식이 강한 중산층에 호소하기 시작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의 사회적 유동성(mobility)은 자신의 발전의 기반들을 살펴보려는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한 연구는 비록 보다 나은 설명들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해오긴 했지만, 특히 사상적인 기원(ideological origins)에 있어서, 자주 그 운동을 낭만적으로 묘사해 왔다. 빈슨 사이난의 1971미국 오순절 성결 운동(The Holiness-Pentecostal Movement)은 후에 일어난 개혁주의적 교단들은 본래의 대열 안에서의 신학적 분열을 대표한다고 주장하며 웨슬리주의적 성결 운동을 관통하는 오순절 뿌리들(Pentecostal roots)을 추적했다.

 

Vinson Synan

 

 

 

발드포겔(Edith Lydia Waldvogel, Blumhofer)은 [1977년 하버드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승리의 삶’: 오순절주의의 개혁 복음주의적 기원”(The ‘Overcoming Life’ : A Study in the Reformed Evangelical Origins of Pentcostalism)에서 오순절적 사상의 기원 안에서 케스윅과 높은 삶 운동에 대한 인지로서 반격에 나섰다. 발트포겔은 개혁주의적 오순절주의를 생성시킨 것은 분열이 아니라 웨슬리주의적 흐름만큼이나 강한, 그 운동의 발전에 동등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던 개혁주의적 신학의 독립적인 흐름이었다고 주장했다. 사이난과 발드포겔은 둘 다 오순절주의를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과의 그 독특한 신학적 결합으로 규정지었다. 그들은 백인 캔사스 신유 전도자 찰스 파함(Charles Fox Parham)이 그 신조 형성의 지휘자라고, 윌리엄 시무어(William J. Seymour)1906년부터 1909년까지 삼 년 동안 로스앤젤레스에서 일어났던 아주사 거리 부흥의 국제적인 영향력을 통한 그 교리 보급의 감독자라고 믿었다.

 

Edith  Lydia   Waldvogel, Blumhofer

 

 

12

    비오순절 역사가들 또한 오순절의 기원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다. 그 현상의 성장에 의해, 특히 그것의 현재 모습의 복잡성에 의해 자극을 받은 로버트 앤더슨(Robert Anderson)소외된 자들의 비전(Vision of the Disinherited)에서 그 운동의 기원에 관한 가장 상세한 연구를 제공했다. 앤더슨의 논지는 오순절주의는 일반적으로 미국의 빈곤층과 노동 계급에 대한 사회적 착취에 의해 촉발된 고도의 천년왕국 운동으로 일어났다는 것이었다. 그의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은 극단적으로 단순화한 분석을 제공했지만, 종교적 성향 배후의 사회적 역학에 대한 그의 평가는 그 운동의 역사가들로 하여금 복잡한 문제들과 씨름하게 만들었다.

 

Robert Ander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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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 번째 역사적 맥이 여기서 언급될만하다. 더글라스 넬슨(Douglas J. Nelson)은 [ University of Birmingham, England, 1981] 오순절운동의 기원 안에서 찰스 파함의 역할은 사이난-팔트포겔과 앤더슨 각본 모두에서 역사가들에 의해 과장되었다고 주장해왔다. “인종적 음모 이론”(racial conspiracy theory)을 발전시키고 있는 넬슨의 이런 때를 위해: 감독 윌리엄 J. 시무어와 아주사 거리 부흥의 이야기”(For Such a Time as This: The Story of Bishop William J. Seymour and the Azusa Street Revival)는 시무어를 한 영웅적인 종교 운동의 절대적인 창시자”(unqualified founder)로 소개한다. 그는 그 영웅적인 종교 운동의 기원은 방언으로 입증되는 성령 경험이 아닌 인종적이고 계급적인 장벽들의 진정한 와해에서 찾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주사 거리 부흥의 초기에 일어난 인종혼합예배”(the interracial worship)는 넬슨으로 하여금 이 현상이 방언보다도 사도행전 2장에 묘사된 신약 성경적 오순절 경험의 정신을 재현했다고 확신하게 만들었다. 넬슨의 논지는, 인종혼합예배의 명백하게 짧은 수명과 후속적인 오순절주의자들의 인종 교회 분리의 예방 실패”(the subsequent failure of Pentecostals to prevent racial church segregation)를 전제할 때, 오순절주의에 대한 그런 재정의를 뒷받침할 수 없다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다. 결국 인종적 평등”(racial equality)은 아주사에서의 흑인 오순절주의자들의 한 교리였다는 것이 분명하다. 그와 같이 그것은 20세기 초엽에 흑인 공동체의 사고방식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오직 백인들은 의식적으로 백인 우월의 메시지를 전했다. 넬슨은 아주사 집회에 참석했던 백인 오순절주의자들은 일반 대중과는 아주 달랐다는 것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는 데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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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사 부흥의 중심점에 의한 운동 통합의 실패는 그와 정반대를 입증한다.

 

 

    그런 모순된 연구를 바로잡는 오순절주의의 기원에 대한 보다 깊은 연구는 절대 필요한 것이다. 앤더슨의 사회학적”(sociological) 연구는 가치 있지만 사이난-발트포겔의 이데올로기 학파”(ideological school)의 연구와 비교 검토되어야만 한다. 넬슨의 연구는 그 운동의 중요한 초기 지도자들 가운데 한 사람에 대한 면밀한 고찰을 제공하지만 그 과도한 낭만주의적 논지”(romantic thesis)는 문제들을 풀기보다는 더 많은 문제를 야기시켜왔다. 그 절실한 연구의 한 부분으로서 본 연구는 찰스 파함(Charles Fox Parham)20세기의 그 전환기 동안 중서부에서 일어난 그의 사도적 신앙 운동(Apostolic Faith movement)에 대한 첫 학문적 연구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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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무어보다는 파함이야말로 오순절 운동의 창시자로 주목받아야만 한다. 방언을 성령침례와 연결시킴으로써 오순절주의에 대한 신학적 정의를 맨 처음으로 공식화한 사람은 바로 파함이었다. 파함뿐만 아니라 현대 오순절주의자들 중 그 어느 누구도 방언을 오순절 축복을 받은 것에 대한 유일한 증거”(only evidence)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방언은 최초의 증거”(initial evidence)이다. 그 의미론보다는 그 현상이 중요했다. 최초의 증거로서 방언은 성령침례 경험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 되고 있으며, 그 중요성은 아무리 높이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넬슨의 인종간의 평등성과 결부된 방언에 대한 정의는 오직 오순절 운동의 처음 몇 달 동안에 관해서만 해당되며, 백인들이 그런 전제를 인정했는지는 불확실하다. 그렇게 오순절주의를 재정의하는 것은 그 운동이 시작한 후 오직 몇 달 동안만 존재하고 사멸했다는 우스꽝스런 주장에 이르고 말 것이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오순절주의는 오순절적 운동의 인종적 관행의 어떤 일시적인 와해를 목격했다. 그 운동의 파함의 진영도, 비록 덜 극적이었지만, 마찬가지로 영향을 받았다. 새로운 종교적 운동들은 종종 그런 이상주의적인 특성을 극적으로 그려내 왔다. 오순절주의의 경우에 그 이상주의적 표명은 그 운동이 20세기 초엽의 모진 삶의 실체들을 접하면서 사라져 갔다. 남은 것은 그 운동을 언제나 규정해왔었던 중심적인 신학적 몸체, 방언 말하기로 입증되는 성령침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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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함의 역할은 그것이 오순절주의의 사회적 기원을 상징하기 때문에 또한 중요하다. 급격한 회심(radical conversion), 일상적 삶 안에서의 성화 또는 성결, 모든 병으로부터의 신적 치유, “그리스도의 신부의 전천년 휴거라는 오순절적 집회들에서 표현된 주제들은 모두 지금 여기서 직면하는 문제들로부터의 미래적 해방을 묘사하는 개인의 종교적 정신 안에서의 해방을 담고 있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주제들이 실망과 두려움에 대처하는 데 있어서 이생에서 위안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회심은 과거의 결점들에 대한 죄책으로부터의 해방감을 주었고, 성화는 하나님으로 인해 의롭게 됨에 대한 확신을 약속해 주었다. 신유는 아마 다른 모든 것보다도 더 한 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승인과 죽을 인생의 불확실성을 지배하는 그분의 능력을 상징했다. 전천년설은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하나님의 공의의 성취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유할 것이라는 인식을 표현했다.

    오순절주의는 그런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강조가 전에 없이 높았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반적으로는 복음주의적 개신교의 그런 주제들에 대한 표명과 거의 다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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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순절적 메시지의 한 가지 독특한 점은 그 강렬함을 드러내었다. 성령침례는 적어도 두 가지 점에서 하나님의 승인을 표현했다. 먼저 그 경험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사도적 수령”(the apostolic reception)의 종말적 발현(latter-day manifestation)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그 수령자들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과 동일시되었다. 그래서 이 경험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신부들종말에 돌아와 그들의 승리자 구세주에 의해 인도함을 받으며 최후의 일련의 종말적 싸움들에서 사단의 세력들을 물리칠 휴거된 일단의 성도들안에 들어가기에 적합하다는 증거로 공헌했을 것이다. 또한 성령침례 경험 자체는 우리가 아는 한 인류 역사의 절정을 의미했다. 그것은 종말 시대, 즉 교회 시대의 마지막을 특징짓는 한 쌍의 첫 장과 마지막 장으로(a set of bookends) 공헌했다. 사도행전 2장의 부어주심(outpouring)으로 시작된 이 시대는 유사한 발현으로 끝날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 운동은 자신을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과 악에 대한 그분의 승리의 신호로 규정지었다. 이 부어주심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과정의 활기찬 종결을 거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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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앤더슨이 지적했듯이 이 천년의 환경은 초기 오순절주의의 혁명적 정신을 창조함에 있어서 아주 중요했다. 이것은 왜 대망을 품었으나 대중 운동의 실패에 환멸을 느끼고 좌절을 맛본 미국인들이 사회 안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효과적으로 바꾸지 못하자 임박한 재림에서 확실한 변화를 약속하며 발전 중에 있는 종교적 운동으로 돌아섰는지를 설명해 준다. 앤더슨의 논지는 왜 그 운동이 어떤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주었고, 모든 미국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대답하는데 실패한다. 그 운동이 그 힘을 빈곤층과 노동자 계급에서 얻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 운동이 그런 사회적 집단들 안의 적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격렬하게 거부되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오순절주의의 성장에 대한 그런 중요한 묘판을 제공한 급진적 성결 교단들 안에서 겪었던 거부의 정도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회학적 설명은 어떤 부분을 설명하지만, 그 기원에 관한 모든 질문에는 답하지 못한다. 그 신학적 해석들은 중요했고, 이번에는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그런 중요성을 인식시켰던 성결교단들의 지도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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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게다가 종교적 동기의 문제는 단순한 사회학적 모델들 안에 한정시킬 수 없다. 결국 어떤 사람들에게는 완전히 터무니없는 것 같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영속적인 확신이 되었다. 자주 그 차이는 그 운동의 복음 전도자들에 의한 회심 그리고 개인적인 경험과 관계있었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맹렬한 헌신을 일으키기 위해 수용할 만한 교리는 사회학적 필요들과 결합되어 있었다. 이 신학적-사회학적 결합 안에서 초기에 회심한 사람들은 찰스 폭스 파함(Charles Fox Parham)의 사역의 결과였다.

    존 토마스 니콜(John Thomas Nichol)오순절주의(Pentecostalism)20년 전에 파함을 탁월한 위치에 놓았으며, 그가 그 창시자라는 자신의 주장을 위한 적어도 다섯 가지의 기준을 열거했다. 1) 파함은 아주사 거리 부흥운동의 태동 이전과 그 동안에도 중서부에서 오순절 지도자로 인식되었던 사람이었다. 2) “사도적 신앙”(Apostolic Faith)라는 그의 용어는 그 운동의 초기 멤버들에 의해 사용된 보편적인 용어가 되었다. 3) 그는 사도적 신앙(Apostolic Faith [Topeka, Kansas])이라는 최초의 오순절 정기 간행물을 출판했다. 4) 그는 최초의 각 주 연합 오순절 회합들을 조직했다. 5) 그는 느슨하게 조직된 오순절 운동 안에서 최초의 목회 자격증들을 발부했다. 니콜의 연구는 한 오순절 선구자로서 파함의 명성에 관한 수정을 강조했다(undersc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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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운동에 대한 오순절주의자들에 의해 기록된 초기 발달사들은 파함의 공헌을 강조하는데 실패했다. 그의 복음 전도적 노력들은 자주 그의 이름 언급 없이 기록되었다. 이 누락은 처음으로 프랭크 에와르트(Frank J. Ewart)에 의해 오순절 현상(The Phenomenon of Pentecost)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 클라우드 켄드릭(Klaude Kendrick)에 의해 성취된 약속: 현대오순절운동의 역사(The Promise Fulfilled: A History of the Modern Pentecostal Movement)에서 바로잡혔다. 특히 켄드릭은 오순절주의의 개척 단계에 있어서 파함의 역할에 대한 면밀한 묘사를 제공했다. 비오순절주의 연구자 찰스 셤웨이(Charles William Shumway)1914년 이전의 그 운동의 한 중요한 부분으로서 파함을 언급했다. 후에 니콜과 앤더슨 같은 비오순절주의 연구자들은 파함의 역할에 강화된 탁월성을 부여했다.

 

 

Frank J. Ewart

 

 

    역설적으로 파함과 시무어를 위한 변증가들은 오순절주의에는 인간 창시자가 없었다는 오랜 그러나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관념을 바로잡는데 기여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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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함의 위치의 모호함은 근본적으로 1907년에 텍사스에서 씌워졌던 동성애 스캔들을 중심으로 한 개인적인 도덕성에 대한 문제들에서 기인했다. 시무어의 탁월함으로부터의 추락은 1906년 이후 아주사 부흥운동의 일치성의 결여에서 온 것이었다. 그 외관상의 결여는 그래서 성령 홀로 이 운동을 유발시켜왔었다”(the Holy Spirit lone had prompted this movement)는 낭만적 관념에 의해 채워졌다. 그 주장은 왜 초기 지도자들이 시야에서 사라졌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 주는 것 같았으며, 인간 역사 안에서의 오순절주의의 독특한 위치에 대한 오순절주의의 비전과 잘 어울리는 것 같았다.

    오순절주의는 오직 영적 기원”(Spiritual origins)만을 갖고 있었다는 착각은 오순절에 관한 문헌 안에서 그 운동은 전 세계적 부흥 풍조 안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는 가정과 대비된다. 증거로서 사용된 방언은 곧바로 1901년 토페카 부흥에서의 파함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기 때문에, 그 억측은 무너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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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방언의 돌연한 발생들(glossolalic outbreaks of the nineteenth century)을 강조하는 설명들은 마찬가지로 잘못된 것이다. 어떤 오순절주의 저자들은 방언 말하기가 발생했었기 때문에 그들의 운동이 토페카 부흥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그 주장은 오직 방언(glossolalia)만이 광범위하고 다양한 신학적이고 역사적 배경들을 연결할 수 있다는 것을 가정한다. 1901년 이전의 방언 발생들은 흥미로운 비교들을 제공하지만, 그 어떤 경우도 성령침례는 최초로 방언 말함에 의해 입증된다는 파함의 주장에 대한 역사적 선례를 제공하지 않는다.

    어떤 오순절주의 저자들은 파함 학파, 시무어 학파, 그리고 -창시자 학파”(no-founder school)에 더하여 파함의 신학적 원천과 시무어의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성공적인 운동을 강조해왔다. 이 학파는 신학적 뿌리와 실천적 결과의 융합을 제공했던 일종의 이중 역할에 있어서 두 사람 모두 창시자들이었다고 주장해왔다. 그런 접근의 문제는 신학적 공식화”(theological formulation)의 탁월성을 모호하게 만들며, 아주사 거리 부흥 기간 동안 나타난 사회적인 요인들의 관련성을 간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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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 모두 선구자들로 간주되는 것은 적절할 수도 있지만, 오직 파함만이 연대기적으로(chronologically) 창시자로 분류될 수 있다. 그의 아주사 이전 공헌은 오순절주의의 신학적 기초해방이라는 사회적 메시지의 출현둘 다를 남겼다는 것이었다.

    본 연구의 이중적인 논지는 찰스 파함은 1901년 초에 캔사스주 토페카에서 일어난 오순절 운동의 기초를 놓았으며(founded the Pentecostal movement), 그리고 그 새로운 신앙의 본질적인 특성은 강력한 천년왕국-선교 강조”(intense millenarian-missions emphasis) 주위를 맴돌았다는 것이다. 이런 선교적 추진력”(missionary thrust)은 아주사 거리 부흥의 초기 성장 기간을 통해 그 운동의 정체성을 형성했고, 그 초기 낙관주의가 시든 후에도 오순절적 사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앤더슨이 오순절주의의 천년왕국주의의 뿌리를 조사했을 때, 그는 파함의 제노글로사”(xenoglossa)에 대한 강조를 주목했다. “글로솔라리아”(glossolalia)와 구별되는 제노글로사는 그 언어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 알려진 외국어”(known foreign language)를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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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함과 다른 전천년주의자들은 종말적 마지막 날들의 증거로서 이교도들의 땅에서의 성공적인 선교적 노력들에 의해 유발될 전 세계적 부흥이 일어날 것과 새 방언의 은사의 중요성이 보다 큰 의의를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었다. 파함과, 사실상 모든 초기 오순절주의자들은 방언 말하기가 특수한 제노글로사라고 추정했다. 실용적인 접근을 취하면서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이 새로운 은사는 선교의 급격한 증가의 시작의 전조가 되었다는 것을 이론화했다. 외국어를 배우는 힘든 노역 없이도 이제 거의 누구나 선교사라고 명명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양성해내시고 방언 형태의 메시지를 주셨다. 받은 자들이 해야 할 일이란 자기가 받은 언어가 어떤 나라의 것인가를 결정하고, “하나님께서 내시는 생각 없는 그릇”(incogitant vessel of divine issue)으로서 그 나라에 가는 것이었다. 앤더슨이 최초로 초기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서 이 믿음의 보편성을 인식했지만, 그 운동의 산란기에 있어서 그것의 이데올로기적(ideological) 중요성은 그의 사회적 결정”(sociological determination)이라는 보다 넓은 논지 한 가운데서 상실되었다. 사실, 방언의 유용성에 관한 이 현저한 믿음은 보다 넓은 성결 운동으로부터 오순절주의를 구별해내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이생 안에서 경험될 수 있는 결과들을 약속하는 이상주의적 열심(idealistic zeal)을 제공했다. 1909년에 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이, 적어도 만연된 현상으로, “선교적 방언”(missionary)에 회의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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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날에는 주로 글로솔라리아로 이해되고 있는 방언은 [당시에] 어떤 사람이 성령침례를 받은 것에 대한 증거로(as proof),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 영감을 받은 통역자의 도움에 의해 개별적인 회중들에게 희망과 확신의 메시지(as a message)로 이바지 했다. 그러나 그 최초 증거 해석”(the initial interpretation)은 그것으로 파함과 오순절주의가 미국 종교계에 갑자기 등장하게 되었다는 혁명적 주장을 가장 분명하게 진술했다.

    그렇다면 파함은 오순절주의의 기원에 대한 그 어떤 해석을 위해서도 열쇠가 된다. 그는 성령침례와 방언 사이의 연관을 공식화했고, 초기의 성장과 조직을 감독했으며, 제노글로스적 선교에 대한 목가적 비전을 전수시켰다. 그의 생애와 사역에 대한 이 이야기는 오순절주의의 사회학적이고 또한 이데올로기적 뿌리를 드러낸다. 그 운동이 열 살이 되기도 전에 파함의 이름은 스캔들에 의해 손상되어 왔었으며, 그의 지도력은 주요한 오순절파들에 의해 거부되어 왔었다. 그 운동을 통제하기에 실패하자 그는 종교적 열심이라는 정력적인 힘을 과시하기 시작했고, 그것은 때를 맞춰 그의 지도력에 도전했던 카리스마적인 인물들을 일으켰다. 보다 크게는, 파함의 쇠퇴는 사회-종교적 중요성의 혁명으로부터 복음주의적 신교의 일부로서 체면을 찾으려는 조직화된 교단들의 한 운동으로의, 오순절 내에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반영했다. 종교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은 한 캔사스 복음전도자의 큰 뜻과 꿈은 20세기의 51백만 명의 강력한 오순절 운동의 기초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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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운동의 초기 이야기는 바로 찰스 파함과 사도적 신앙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