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승
2023.12. 25./2024. 03.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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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곽봉조(郭鳳祚)는 두 가지의 상반된 평가를 받아왔다. 긍정적으로는 “오순절 진리의 변증자”라는 평가를 받아 왔으며, 부정적으로는 다른 교단과 신학교를 설립한 자라는 평가를 받아 왔다. 그런데 곽봉조에 대한 두 평가 중에서 긍정적 평가는 강한 반면에 부정적 평가는 긍정적 평가와 비교할 수 없게 약한 것이었다. 이런 경향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30년사에서 나타난다. 30년사는 곽봉조에 대한 독립된 두 쪽의 글 대부분에서 그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기술했다. 반면에 30년사는 그 글 말미에 “1958년 구도선교사와 손을 잡고 대전시 가양동에 중도성서 신학교를 설립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회와는 점차 멀어졌다”는 짧은 부정적 평가를 실었다. 30년사는 다른 기술들에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초기에 교리적으로 “3위 일체 신앙파”와 “오직 예수 신앙파” 두 부류가 존재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곽봉조, 윤성덕 목사 등은 구도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자 손을 잡고 대전시 가양동 28번지에 중도성서신학교를 세우고 극동사도선교회의 주역이 되었다”고 간단하게 기술한다. 이런 30년사에 기술은 곽봉조에 대한 어떤 비난도 담겨있지 않은 대단히 건조한 것이었다. 이런 기술에는 곽봉조와 공식적으로 더이상 함께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는 곽봉조를 교단 역사에서 지우지 않았고, 오히려 교단을 설립 50주년을 맞아 2002년에 박성산 등과 함께 곽봉조를 교단 설립 공로자의 한 사람으로 선정했다.
곽봉조에 대해서 그동안 네 가지 글들이 써졌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1981년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30년사는 곽봉조의 일생에 대한 전반적이고 독립적인 글을 썼다. 그 글은 1958년 분립을 기술하는 것으로 끝났다. 곽봉조의 넷째 딸 곽선신은 그의 1999년 7월 소천 1개월 후 곽봉조에 대한 글을 썼다. 그 글에는 그녀 자신의 경험담도 곁들여졌다. 그 후 김익진은 2003년 박사학위 논문에서 곽봉조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에서 분립해 나가는 과정을 당시 상황을 잘 아는 인물들을 전화와 편지로 인터뷰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연구했다. 그리고 김길홍은 2016년에 『뉴욕일보』의 『스포츠연예』 판에 총 9회에 걸쳐 곽봉조의 생애에 대해 글을 썼다. 그 글은 소설형식을 취했지만,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그 글은 곽봉조가 그리스도인이 된 과정, 일본으로 도항한 과정, 쿠트를 만난 극적인 과정, 결혼한 상황, 해방 후 만주로 가 선교한 사연, 귀국 후 거제도에서 6.25를 거치며 사역한 과정, 말년의 도미와 소천 등에 대한 많은 정보들, 생애에 걸쳐 썼던 기도문들을 제공한다.
가장 최근에 최재웅은 2017년 박사학위 논문에서 『일본과 오순절』(Japan and Pentecostal)이라는 소식지에 등장하는 레오나르드 쿠트(Leonard W. Coote)의 글들을 바탕으로 곽봉조의 이코마성서신학교 학생시절과 쿠트와의 관계와 쿠트와의 조선 선교 준비를 보다 상세하게 복원해 내었다.
본 글은 지금까지의 곽봉조에 대한 연구들과 기술들과 정보들을 종합하고, 그 기술들과 정보들을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들을 더 제공하고, 그 배경들을 살펴봄으로써 곽봉조의 생애의 뼈대를 굳건하게 세우고 거기에 살을 붙여 보다 구체적인 곽봉조의 삶을 최대한 복원해 내려 한다.
II. 탄생과 그리스도인으로 성장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 체결과 1910년 한일합방 사이의 해인 1909년 1월 25일 곽봉조(郭鳳祚)는 우렁찬 생애 첫울음을 터트렸다. 경상남도 거제군(巨濟郡) 둔덕면(屯德面) 거림리(巨林里)에서 촌부의 6남매중 5남으로 태어난 것이다. 1769년 영조 45년 방리제 실시로 둔덕 7방, “영등, 하둔덕, 산방, 거림치, 상둔덕, 법동포, 한산도”가 설치되었다. 거림리라는 명칭은 그가 6세 때인 1915년에 둔덕면 9개 리(상둔, 시목, 거림, 산방, 방하, 하둔, 어구, 술역, 학산)가 설치될 때 탄생했다 육지 통영에서 동쪽으로 바다 견내량 건너 작은 섬 소록도 동쪽 앞바다 건너, 거제도의 서부, 머리처럼 둥근 땅의 깊숙이 들어간 곳에 둔덕면 거림리가 자리 잡고 있다.
곽봉조가 태어난 해에 고향 둔덕면 거림리에서 서쪽으로 약 3km에 위치한 소록도에는 한센병 치료를 위한 전문 요양소가 생겼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909년 8월 대한제국 칙령 제75호에 의거해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의 요양병원을 전국 각지에 세우는 작업을 했는데 특별히 한센병 치료를 위한 전문 요양소로 소록도의 자혜의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가 7세가 되던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7호가 공포되어 “소록도 자혜의원” (小鹿島慈惠醫院) 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한센인 병원이 운영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대대로 소록도에 살던 원주민들이 육지로 이주했다. 소록도의 원주민들이 앞섬 거제도 둔덕면에도 왔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거림리 북서쪽 뒷산, 산9번지, 해발 326m의 우봉산에는 둔덕기성(屯德岐城)이 있다. 둔덕기성(屯德岐城)은 7세기 신라시대 축조법을 알려 주는 중요한 유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보기 드문 현문식(懸門式) 구조인 동문지(東門址)와 삼국시대 초축(初築)되고 고려시대 수축(修築)된 성벽 등은 축성법의 변화를 연구하는데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이 유적에서 인화문토기, ‘상사리(裳四里)’ 명문기와, 청자접시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신라 문무왕대 설치된 상군(裳郡) 및 경덕왕대 거제군의 치소성(治所城)으로 추정된다. 고려사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등 문헌에 따르면 고려 의종이 3년간 거제도에 유배됐고, 조선 초 고려 왕족들이 유배된 장소로도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폐왕성(廢王城)”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둔덕기성은 둔덕면과 사등면의 경계지역에 있다. 이곳은 서쪽으로 통영 및 견내량과 가깝고 북쪽에는 조선시대의 평지성인 오랑역이 위치하는 등 거제도 내에서는 교통상 주요 거점지이자 조망이 매우 양호한 지역이다. 소년 곽봉조는 이 둔덕기성에 올라 통영과 한려수도, 태평양을 발아래로 내려다보며 호연지기를 키우며 놀곤 했을 것이다.
곽봉조는 7세가 되는 1916년에 서당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는 총명하며 누구보다 먼저 천자문을 떼었다. 어린 곽봉조는 유달리 질문을 많이 했다. 자기 가족들의 나이의 합과 하늘의 별들 중에 무엇이 더 많은 가 알기 위해 밤하늘을 쳐다보며 별을 세곤 했다. 바닷가 집이니 자주 바닷가에 나가 “저 물들이 어디에서 노느냐? 갈매기들이 무엇을 먹고사느냐? 갈매기들은 어디서 자느냐? 배가 왜 물에 뜨느냐? 배에 탄 사람이 물에 빠지면 어떻게 나오느냐?” 곽봉조는 시도 때도 없이 어머니에게 이런 질문을 하곤 했다.
곽봉조는 고향 둔덕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고 전해진다. 아마도 그는 1918년에서 1927년 사이에 3, 4년간 보통학교에 다녔을 것이다. 그가 태어나고 7개월 후인 1908년 8월 26일에 대한제국 칙령 제62호 사립학교령이 공포되었고, 그 결과 사립학교는 위축되었다. 일제는 1919∼1932년까지는 3.1독립 민중운동의 저항에 부딪히자, 소위 문화정치로 한민족에 대하여 일시동인(一視同仁)의 문화주의로 동화주의(同化主義) 교육정책을 실시했다. 이런 유화적 상황에서 1920년대부터 조선인은 부락 단위로 기금을 조성하여 보통학교를 거주 지역에 설립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총독부의 1911년 8월 23일 칙령 제229호 제1차 조선교육령 제9조는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은 4년으로 한다. 단 지방 실정에 따라 1년을 단축할 수 있다”고 공포했다. 1922년 2월에 공포된 제2차 조선교육령은 1차 시행 때 4년을 원칙으로 하였던 보통학교와 고등 보통학교의 수업 연한을 6년과 5년으로 연장했다. 곽봉조의 보통학교 재학기간은 3년에서 4년이었을 것이다.
그가 다녔던 보통학교는 어떤 학교였을까? 그가 “둔덕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는 말은 뭍으로 유학하거나 다른 집에서 학교를 다니지 않고 자기 집에서 학교를 다니고 졸업했다는 것을 의미한 것일 것이다. 경상남도 거제교육지원청에 따르면, 1907년 2월 10일 2년제 거제사립보통학교(현 거제초등학교)가 현 거제면 읍내로2길 20에 설립되었다. 거림리에서 직선거리로 약 8km 떨어진 곳이다. 그 학교는 1911년 4월 8일 거제공립보통학교(4년제)로 개칭(설립인가 4월 1일)되었으며, 1938년 4월 1일 거제성내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되었고, 1941년 4월 1일 거제성내공립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그리고 1946년 5월 10일 거제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곽봉조가 12세가 된 1921년 6월 1일에 거제시 신부로1길 19에 이운공립보통학교(현 장승포초등학교)가 6학급으로 개교되었다. 거림리에서 직선거리로 약 20km 떨어진 곳이다. 그리고 그가 14세가 되던 1923년 3월 31일 거제시 하청면 하청로 22에 4년제 하청공립보통학교(현 하청초등학교)가 설립인가를 받았다. 거림리에서 직선거리로 18km 떨어진 곳이다. 거림리에는 보통학교가 있긴 했다. 둔덕면 청마로 159 (거림리)에 4년제 둔덕공립보통학교가 있었지만, 1932년 9월 20일에 개교되었다. 그리고 그 보다 더 멀리 2.5km 떨어진 둔덕면 거제남서로 4720에 숭덕국민학교가 있었지만 1948년 3월 24일에 개교되었다. 30년사는 곽봉조가 고향 둔덕면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고 전하지만, 공식 기록에 따르면 당시에 둔덕면 근처에는 보통학교가 없었다. 그가 다녔을 가능성이 있는 보통학교는 거제보통학교다. 그런데 그가 거림리에서 거제보통학교까지 통학했다면, 계곡을 따라가다가 산을 넘어 왕복 28km를 걸어야 했을 것이다.
곽봉조는 14세 때에 벌써 한학에 심취되어 후일에 상당한 식견을 가질 수 있었으며 5남매 중 유달리 향학열에 불탔었다. 1900년에 거제에서 태어나 거제보통학교(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와 반민특위 재판장이 되었던 서순영(徐淳永)은 유년에 1705년(숙종 31)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송시열(宋時烈)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거제도 동상리에 창건된 반곡서원(盤谷書院)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고 전해진다. 그런 거제인들이 한학에 일가견을 갖추게 된 것은 선배들이 물려준 전통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동록(東麓) 정혼성(鄭渾性, 1779~1843) 선생은 조선후기 거제도 최고의 지성인으로서, 평생 거제도에 살면서 거제도의 문화와 전통, 그리고 사상과 철학뿐만 아니라, 특히 거제문학의 고유한 정체성을 확보하는데 가장 크게 기여했다.
곽봉조는 1925년 16세가 되던 해 가문에서 처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의 생을 변화시킨 그 사건은 서울에서 내려온 한 청년에 의해서 일어났다. 그 청년은 차영훈 전도사였다. 시골 교회에 부임해 온 것이었다. 차영훈은 바닷가에 아이들을 모아놓고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을 재미있는 동화형식으로 이야기하며 아이들을 사로잡았다. 곽봉조는 차영훈을 통해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다윗, 사울, 사무엘, 다니엘 등등의 이야기를 들으며 점점 교회로 빠져들어 갔다. 거제도에 부임했다는 차영훈 전도사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는다. 경북 김천시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 지좌교회 연혁에 따르면, 1964년 3월 30일에 제15대 담임 교역자로 차영훈 목사 부임했으며, 1968년 8월 30일에 사임했다. 그가 곽봉조를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차영훈인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재 거제시 둔덕면에는 교회가 8개가 있다. 앞마을 방하리 유치환의 생가 부근, 둔덕면 방하1길 17(방하리 505-2)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 방하교회가 있다. 방하교회는 1925년 2월에 창립되었다. 청마로 208(거림리 211-6)에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소속의 거림교회가 존재하고 있다. 거림교회는 방하교회에서 분립되어 1947년 4월 27일에 설립되었다. 곽봉조가 방하교회가 정식으로 성립되기 전 초창기부터 그 교회를 다녔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방하교회 연혁에는 차영훈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가 다녔을 가능성이 있는 또 다른 교회는 “오수교회”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소속의 오수교회는 곽봉조가 12세가 되는 1921년 2월 28일 거림리에서 직선거리로 약 8km 떨어진 거제면 오수리 569번지에서 창립되었다. 오수교회는 거제보통학교에서 약 1.6km 거리에 있다. 곽봉조가 거제보통학교를 다녔다면, 그 즈음에 오수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오수교회 연혁에도 차영훈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경남지역은 호주장로교회선교부 관할 지역이었다. 호주 빅토리아(Victoria) 주는 1851년에 독립했고, 그해 금광이 발견되면서 1890년까지 호주의 무역, 상업, 정치, 교육의 중심도시가 되었다. 급증하는 인구증가와 사회문제에 선교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장로교회는 일치를 모색하게 되었고, 그 결과 1859년 빅토리아 장로교회가 탄생했다. 1860년 빅토리아 장로교회 해외선교위원회(Foreign Mission Committee: 이하 FMC)는 빅토리아의 중국인, 호주 원주민, 뉴 헤브리데스(New Hebrides) 선교에 착수했다. 호주장로교회는 곧 한국이 복음을 듣지 못한 지상의 마지막 나라라고 생각했고, 한국선교는 자기들의 중요한 몫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의 한국선교는 헨리 데이비스의 개인적 결단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1888년 10월 5일 한국에 도착한 호주장로교회의 첫 선교사 조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Henry Davies, 1856-89)는 1889년 4월 4일에 부산에 갔으나 천연두와 폐결핵으로 다음 날 별세했다. 후임 제임스 메카이(James H. Mackay, 1857-1919) 선교사도 2년 만에 병으로 한국을 떠났다. 호주선교부는 새로운 선교사를 물색했다. 중국에서 선교하다 병고로 영국에서 휴양 중이던 앤드류 아담슨(Andrew Adamson, 한국명 손안로, 1860~1915)은 조선의 첫 선발대 선교사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한국선교에 응답했다. 아담슨이 부산에 도착한 것은 1894년 5월 20일이었다. 아담슨은 부산 초량교회를 중심으로 선교하면서 동래, 기장, 울산, 거창, 함안, 통영지역을 순회선교했다. 통영 선교스테이션은 1913년에 세워졌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부산에서 직접 거제와 통영으로 들어가 순례전도를 했다.
일본은 그 무렵 일본인 이주촌을 마산, 거제 지세포, 옥포, 장승포, 통영 등에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부산, 마산, 거제, 통영을 연결하는 여객선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이 여객선을 타고 복음을 전하던 선교사들이 나중에는 직접 복음선을 마련했다. 가장 먼저 아담슨은 “통통배”(발동기선)를 빌려 들어갔다. 통영선교부가 생기고 난 후 마틴 트루딩거(Rev Martin Trudinger BA, 1883-1955.9.1) 선교사는 “데이 스프링”(Day Spring)이란 이름의 선교선을 구입해 활용했고, 스키너 선교사는 80명이 탈 수 있는 “희성”(행복한 소식을 전하자)이란 이름의 선교선을 건조하여 운행했다. 이들은 거제도의 옥포, 장승포, 황포, 송진포, 금포, 지세포, 고현항, 죽림항 등의 뱃길을 통해 복음을 전하여 교회를 설립했다. 해안 주변에 교회들을 세우면서, 거제도 내지에까지 복음이 들어갔다. 아담슨이 순회선교를 통해 개척하거나 세운 교회들은 거제도 옥포교회(1896년), 욕지도 동항리교회(현 욕지교회와 욕지제일교회·1902년), 통영 대화정교회(현 충무교회·1905년), 연사교회(1905년), 사등교회(1909), 금포교회(1909), 유천교회(1909), 거제제일교회(1910) 등이다.
그런데 곽봉조가 그리스도인이 되자 문중은 “[서학] 공부를 제일 많이 시켜 놓으니까 쓸데없는 예수를 믿는다”며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쟁이라는 이유로 핍박의 화살을 받아야만 했다. 곽봉조의 어머니는 그가 교회에 다니는 것을 신문화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라 여겨 덮어두고 있으나, 아버지는 좀 달랐다. 아들이 그쪽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이 못마땅했다. 한 아저씨는 곽봉조를 불러놓고 닦달하며 “너 때문에 우리 문중이 화를 입을까 걱정이다.” “예수 귀신 섬기려면 고향을 떠나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을 본관으로 하는 현풍 곽씨(玄風 郭氏) 시조는 곽경(郭鏡)인데 중국 송나라 사람으로 문연각(文淵閣)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어 고려 인종 11년 7명의 학사들과 우리나라에 나와 인종 16년에 등과하여 평장사 문하시중(平章事門下侍中)을 지냈다. 그 가문에는 의병장 곽재우 장군이 있었고, 임진왜란 이후 충익공파 22세 곽수봉(郭壽奉)이가 거제도로 이주할 때 충익공파 23세 곽상재(郭尙載), 곽상준(郭尙俊)을 데리고 왔다. 거림리에서 남쪽으로 약 3km 떨어진 거제면 법동리, 현풍 곽씨 집성촌 777번지에 있는 영모재(永慕齋)는 31세손 곽권록(郭權祿)이 사비로 1982년에 창건했다.
거제시 둔덕면에서 지방도 1018선을 따라 거제면으로 가다 법동낚시공원으로 가기 전 모퉁이에는 “하미정(荷湄亭)”이라는 조그만 건물이 하나 있다. 정자(亭子)의 이름이 “하미정(荷湄亭)”이라 불린 것은 양하미(揚荷湄), 즉 “물가에 연꽃이 날린다”란 뜻이다. 현재 하미정은 1948년에 무너져가는 정자를 임시로 고쳐 만들었다. 정자 안에는 여러 개의 현판이 걸려 있는데, 김씨·허씨·이씨·권씨·윤씨·조씨·구씨 등 거제지역 문인의 글귀가 30명에 이른다. 하미정은 조선 말기부터 일제강점기 시절 한때 거제도 유림들이 모여 풍월을 읊었던 곳으로 보인다.
고영화 고전문학연구가에 따르면 조선 말기, 거제면 법동리 북쪽은 고당(姑堂)리가 있었고, 이 정자(亭子)가 세워질 시기에는 “하미정” 인근 마을을 “하당(荷堂)”, 하당(荷塘) 또는 “하미(荷湄)”라 불렀던 것으로 보인다. 하미정에는 곽종택(郭鍾澤) 외에도 곽영선(郭英善)·곽도순(郭度淳)·곽홍곤(郭洪坤)의 글도 있어, 법동 곽씨 집안의 화려했던 지난날의 문맥(文脈)을 엿볼 수 있다. 명계(明溪) 김계윤(金季潤·1875∼1951)의 『하당기[荷塘記]』에 따르면 곽씨 집안은 문장 호걸인 이태백(李太白)과 도덕지학(道德之學)의 염계(濂溪) 주돈이를 유달리 사모했으며 곽씨 집안의 뛰어난 문필은 가히 공경할만하다고 했다.
'하미정'(荷湄亭) / 곽홍곤(郭洪坤)
村名自昔?荷湄 촌명(村名)을 예로부터 '하미'라 불렀는데
卜建斯亭的?之 정자를 세울 자리로 마침 정한 이곳은,
花枝爲遂春先到 꽃 달린 가지 두루 피어, 봄이 먼저 도착하고
?玉山高月上奇 구슬이 부딪히듯 높은 산에 떠오른 달이 기이하다.
水沮石防?起地 저지대 습한 땅을 방죽으로 막아 바뀐 옥토의 땅에,
雲深松秀古采基 구름 덮인 빼어난 소나무 고상한 풍채 돋보인다.
追先福後心關事 선조를 추모한 후, 복(福)이 옴은 다 마음에 관한 일이니
餘蔭子孫繼世支 자손은 여음(餘蔭)을 이어받아 자손대대 보전할지니..
'하미정' 차운하여 次荷湄亭韻 / 석초 곽종택(石蕉 郭鍾澤)
荷堂亭子揚荷湄 "하당" 정자 물가에 연꽃이 흩날리니
多士彬彬共賀之 훌륭한 많은 선비들이 한가지로 축하한다.
水月如珠當擥白 물에 뜬 달은 구슬 같이 밝게 빛나고
雲山幻盡八簾奇 구름 낀 산이 모두 변해 여덟 개의 주렴인양 기이하구나.
閑情不讓輞川業 한가로운 심정에 망천의 일 사양하지 않으려,
追跡還同栗里基 쫓아 다시 돌아와, 율리 마을에 자리를 잡았다네.
地遇賢人名自著 우연히 현인을 만나니 명성이 절로 알려졌도다.
先生遺蹟後生支 선생의 유적을 후대에도 길이 보존하리라.
그런 문중이었기에 서학을 공부한 곽봉조가 더하여 예수를 믿자 그를 비난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세가 된 곽봉조는 굽히지 않고 출석하던 교회에서 중추적인 기둥 역할을 해내어 총애의 대상이 되었다.
III. 이치오카 오순절 교회의 성도
어느 날 밤 곽봉조는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 아버지! 제가 어떻게 할까요?” 고요한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다. “아브라함처럼 고향을 떠나라, 내가 너를 인도 하리라.” 그는 그날 밤 파란 바다 위로 자기가 걸어가는 꿈을 꾸었다. 깊은 바다 쪽에서 흰옷 입은 한 사람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곽봉조는 그 꿈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바다 건너 일본으로 부르고 계시다고 해석했다. 그는 일본으로 건너갈 것을 결심하고 어머니에게 알렸다. 일본의 식민치하에서 차별과 서러움을 받아 본 그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인 발아래서 공부한다는 것은 분명 더 힘든 일이 될 것이고, 그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명백한 예상들을 하나님의 부르심과 아는 것이 힘이 된다는 확고한 신념으로 누르고 20세가 되는 1929년경 일본으로 향했다.
거제도는 일본과의 관계가 깊은 섬이었다. 13∼15세기에 걸쳐서 있었던 왜적의 침공 때에는 항상 그 전방기지가 되었고, 임진왜란 때 왜구(倭寇)라 불리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의 조선침략시(朝鮮侵略時)는 조선에서 유일하게 전후(前後) 7년에 걸쳐 일본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임진왜란이 있은 지 300년이 지난 뒤 일본은 러시아와의 일전을 위해 진해만에 일본군의 작전본부를 설치하고 거제도 장목면 송진포에 일본군 해군 군사기지를 설치했다. 1904년 2월 8일, 드디어 러일전쟁이 시작되었다. 일본 함대는 기습을 노리려고 포구가 마치 표주박처럼 생겨 안을 잘 볼 수 없는 장목면 송진포에 진을 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곽봉조가 태어나기 4년 전인 1905년 5월 27일, 러시아 함대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일본 함대는 숨어 있다가 때를 노려 기습했고, 러시아는 참패를 당했다. 일본군은 러일전쟁의 승리를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사격 연습을 했던 취도에 높이 4m, 둘레 2m 크기의 탑 위에 녹슨 포탄을 하늘을 향해 꽂은 승전기념탑을 세웠다. 러일전쟁이 끝나자 아무런 허락도 없이 마음대로 일본 어민들이 장승포에 들어와 마을을 형성했다. 이를 이리사촌(입좌촌)이라 부른다. 이들은 거제도의 모든 어업권을 강제로 거머쥐었다. 그렇게 되자 장승포를 비롯한 거제 군민들의 생활은 어려움에 빠지게 되었다. 곽봉조는 이런 어려움의 한가운데서 자라났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어려움을 마음에 삭이고 일본에서의 교육을 택했다.
곽봉조가 일본으로 떠나는 날 선착장에 가족들과 친구 영민이와 칠석이, 교회의 교인들 그리고 차 전도사도 배웅을 나왔다. 떠나는 그를 위해 차 전도사가 기도를 해 주었다. 어머니는 물론 아버지도 울고 형들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울음을 삼키며 먼바다를 바라보던 곽봉조의 입에서 찬송가 하나가 흘러나왔다.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되시니 큰 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차 전도사가 종교 개혁한 마틴 루터가 어려운 시련에 있을 때 지은 찬송이라고, 너희들도 어려움이 있을 때, 이 찬송을 부르라던 곡이었다.
당시 일본 도항에는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합법적인 도항과 비합법적인 도항, 즉 밀항이 그것이다. 합법적인 도항은 조선에서 일본 내지로의 통행증을 가지고 이동하는 것을 말하며, 비합법적인 도항인 밀항은 통행증을 발급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이동 수단에 숨어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말한다. 밀항이 너무나도 많은 나머지, 1922년 이후 일본정부가 도항제도를 완화했지만, 도항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한 사람들의 밀항은 멈추지 않았다. 곽봉조는 밀항이 아닌 합법적 도항을 택했을 것이다.
일본으로의 도항에는 주로 관부연락선(關釜連絡船, Kanfu Train Ferry)이 사용되었다. 관부연락선은 1905년부터 1945년까지 정기적으로 운항되었다. 러일 전쟁이 종결된 후 경부선 철도가 부산에서 서울까지 연장되자, 이를 계기로 일본의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氣船株式會社)는 일본의 산요선 철도와 한국의 경부선 철도를 연결하기 위한 선박 수송을 계획하고, 정기 여객선 운항을 추진했다. 그 결과 1905년 9월에 부산과 시모노세키(下關)를 잇는 1,680톤 급의 정기 여객선 “이키마루”(壹岐丸)가 시모노세키 항에서 취항했다. 이것이 일본과 한반도를 연결하는 첫 번째 정기 연락선이었다. 그 밖에도 제주-오사카, 여수-시모노세키, 부산-하카타 등의 항로가 이용되었다. 곽봉조는 거제에서 통영에서 오는 배를 타고 마산을 거쳐 부산으로 가서 부산에서 시모노세키(しものせきし,下関市)로 가는 관부연락선을 탔을 것이다. 전술한 것처럼 일본은 일본인 이주촌을 마산, 거제 지세포, 옥포, 장승포, 통영 등에 만들었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부산, 마산, 거제, 통영을 연결하는 여객선을 만들었었다.
곽봉조가 도항했을 해인 1929년 2월 21일 부산일보 기사에 따르면, 당시 관부연락선은 일본으로 건너가는 “노동군”(勞働軍)으로 만원을 이루었다. “노동군”(勞働軍)은 군대의 일종이 아니고, 많은 노동자를 일컫는 말이었다. 예를 들면, 경성일보(京城日報)의 1934년 11월 9일 기사에 의하면, “노동군”(勞働軍)은 수해지역을 피해 탄광으로 향하는 노동자들을 의미했다. 이 기사에서 “노동군”(勞働軍)은 “노동자군”(勞働者群)이라는 말로 대체되기도 했다. 또한 경성일보의 1939년 4월 26일 기사에서 “노동군”(勞働軍)은 철도 건설 현장에 취업한 노동자들을 의미했다. 1929년 관부연락선은 흰옷을 입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 내지에 있는 회사들에 취업해가는 조선인들로 만원을 이루었다. 곽봉조는 이런 조선인 노동자들과 함께 현해탄을 건너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는 관부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곽봉조는 일본으로 가는 배에서 잠을 자다가 한 꿈을 꾸었다. 이상한 꿈이었다. 외계인 같은 사람이 자기를 안아 주었다. 눈은 파랗고 머리는 갈색이요, 코가 크고 얼굴이 뽀얀 사람이었고, 키가 훌쩍 큰 사람이었다. 그는 꿈을 꾸고 나서도 이해가 되지 않아 머리를 뒤흔들었다.
곽봉조는 1928년에 다음과 같은 기도문을 남겼다.
아버지 하나님!
이 땅의 산천초목과 바다
달과 해 그리고 별들을 창조하셨나이다.
낮과 밤이 있게 하시고
역사와 나를 이끌어 가십니다.
우리나라 조선을 기억하시어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도록 인도하소서.
특별히 일본 백성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주의 복음의 씨가 이들에게 떨어져 자라게 하소서
조선은 일본을 미워하지 말게 하시고
일본은 조선에게 오만하지 않도록 하소서
아버지 하나님의 질서 따라 서로 사랑하며
창조의 원리대로 평등하게 살게 하소서
여호와 삼마(하나님이 거기도 계신다)
아멘
청년 곽봉조는 일본 오사카(大阪)로 갔다. 그리고 그는 한 페인트 업자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러던 1929년으로 추정되는 어느 날, 그는 수십 개의 큰 초롱을 들고 가등행렬(街燈行列)처럼 야간에 노방전도를 하는 한 전도대를 보게 되었고, 그 전도대를 따라갔다. 그 전도대는 이치오카 일본인 오순절교회(市岡敎會)로 그를 안내했고, 그는 그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때 레오나르드 쿠트(Leonard W. Coote)는 설교자로 이치오카 교회를 섬기고 있었다.
곽봉조는 쿠트를 보고 깜짝 놀랐다. 일본으로 오는 배 안에서 꾸었던 꿈에서 자기를 안아 주던 키가 크고 파란 눈과 갈색 머리, 큰 코에 얼굴이 뽀얀 그 사람이 거기에 서 있었다. 곽봉조는 쿠트로부터 생애 처음으로 오순절적 메시지를 들었다. 조선인 청년 곽봉조는 쿠트에게 좋은 첫인상을 남기지는 않았다. 쿠트는 곽봉조와의 첫 만남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그를 맨 처음 만났던 곳은 대도시 오사카의 동부에 있던 이치오카 교회였다. 나는 이 작은 이치오가 교회의 담임 목사가 없었을 때 그 교회를 잠시 돌보고 있었다. 곽봉조는 가끔 집회에 참석했다. 그는 언제나 그 교회의 뒷자리에 앉았다. 그는 한 번도 좋은 옷을 입고 온 적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조선인이었기에 그에게 그리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그는 한 페인트 업자의 견습공이었다. 그리고 그는 교회에 올 때마다 작업복을 입은 채로 왔는데, 아주 더러웠다.
그런 좋지 않은 첫 인상에도 불구하고 쿠트와 곽봉조의 관계는 쿠트의 생각과는 관계없이 더 밀접해져 갔다. 쿠트는 한 천막집회를 계획했었다. 그러자 일본 경찰은 그에게 만일에 일어날 불상사를 대비해 경비를 할 사람을 마련하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에 따라 쿠트는 경비인을 물색해야 했다. 그때 쿠트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그 경비인으로 곽봉조를 추천했다. 그때 쿠트의 곽봉조에 대한 평가는 아주 낮은 것이어서 그는 처음에는 그 추천을 거부했다. 그러나 계속되는 추천에 못 이겨 결국 곽봉조를 천막집회의 경비인으로 고용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나는 경찰이 요구했기 때문에 천막집회 동안 천막을 지킬 사람이 필요했다. 사람들이 나에게 그를 고용하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나는 즉시 거절했다. 그는 어떤 것이든 지킬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센스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나는 그 요구를 못 이겨 그를 그 일을 위해서만 잠시 고용하기로 결정했다. 그 결정은 내가 그의 능력을 기대했기 때문보다는 나의 그에 대한 동정심 때문에 내려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IV. 이코마성서학원 오순절 신학생
그 집회가 끝난 직후 쿠트의 교역자들 중 한 사람이 쿠트에게 곽봉조를 새롭게 여는 이코마성서학원(日本生驅聖書學院)에 학생으로 받아들이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쿠트는 주저하며 지켜보는 조건으로 그를 받아들였다. 21세의 곽봉조는 1930년에 첫 신입생들 가운데 한 명으로 이코마성서학원에 들어갔다.
곽봉조는 봄에는 화초가 흐드러지게 피어 새는 노래하고 나비가 날고, 초여름에는 초록빛 바람 향기, 가을에는 단풍으로 뒤덮이는 동산 꼭대기의 150,00㎡ 부지에 자리 잡은, 그래도 이코마가 내려다 보이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거나, 이카노에 있는 집에서 이코마의 학교까지 기차로 통학했을 것이다. 이코마성서학원은 오사카(大阪)에서 동쪽으로 30Km 거리에 있는 나라현 이코마시 아마구치초 95(奈良県 生駒市 俵口町 95)에 자리 잡고 있다. 오사카의 이카이노에서 이코마까지는 오사카와 나라 사이를 잇는 철도 “긴테츠 나라선”(近鉄奈良線)이 놓여있다. 나라선은 킨테츠의 직계전신인 오사카 전기궤도에서 최초로 지어진 노선으로 기존의 오사카~나라간 노선들이 우회했던 오사카와 이코마 사이에 남북으로 놓인 이코마산을 일직선으로 뚫어 거리와 시간을 단축하는 것에 사운을 걸었다. 3km가 넘는 기다란 터널을 짓는 것은 당시로서는 큰 모험으로 엄청난 자금이 소모되었으며 심지어 사장이 스스로의 사비까지 털었다. 또한 이 공사에는 조선에서 징용되어 온 인부들이 많이 동원되었고 공사 도중 사고로 인해 많은 인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당시 일본에서 두 번째로 긴 터널이자 일본 최초의 표준궤 터널인 이코마 터널이 완공되면서 우에혼마치~나라 구간의 노선이 1914년에 개통되었다. 터널을 벗어나자마자 있는 이코마역에서 이코마성서학원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2Km로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다.
쿠트는 점차 더럽고 어수룩해 보이던 조선인 페인트 견습공이 사실은 빛나고 값어치 있는 “보석”(a Jewel)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쿠트는 하나님께서 곽봉조를 덮고 있던 더러운 찌꺼기들을 제거하시자 곽봉조의 보석같은 진면목이 드러나는 과정을 지켜보았다. 쿠트에 따르면, 학생 곽봉조는 여러 번 쿠트의 집에 와서 죄들을 고백하곤 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것에 대해 다루고 계셨던 것이다. 한 번은 곽봉조가 쿠트의 집의 물건들을 옮기다가 상자들의 뚜껑들 중에 하나에서 밖으로 나온 작은 천 조각을 보았다. 그 천 조각은 곽봉조의 눈길을 끌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이 천 조각은 별 가치가 없어. 쿠트 형제는 이것이 없어져도 아쉬워하지 않을 거야. 이 천 조각은 나의 성경 덮개로 제격이야.” 그리고 그는 그것을 가지고 갔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 행동을 보셨고, 그의 영혼에 강력한 가책을 주셨다. 그는 그 행동이 전적으로 다루어지고 바로 잡히기 전에는 평안할 수 없었다. 결국 곽봉조는 그것을 쿠트에게 고백했다. 하나님께서 곽봉조의 더러운 부분을 닦아내시고 보석처럼 빛나게 하신 것이다.
곽봉조는 너무도 똑똑한 학생이어서 학급의 다른 일본인 학생 모두를 능가했다. 고향 집 대문 밖에만 나가도 객지라는데 멀리 현해탄을 건너 타국까지 간 그는 “조센징”이라는 멸시와 모진 풍상을 다 겪어가면서도 신학공부에 열중했다. 원래, 명석한 그는 공부하면서 한 번도 2등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곽봉조가 매번 1등을 하자, 쿠트 원장이 이번만은 입장이 난처하니 일본인에게 1등을 내어주자고 제의할 정도로 곽봉조는 학문과 신앙의 머리가 되었다.
이코마성서학원에서 공부를 시작한 때로부터 육 개월 동안, 곽봉조는 “성령침례의 외적 증거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는 오순절주의의 핵심 교리 문제와 씨름했다. 그 교리는 그의 안에 조선에서 소년 시절부터 뿌리 깊게 형성되었던 장로교 신앙과 다른 것이어서 선뜻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곽봉조는 사도행전을 깊이 상고하며 기도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자신이 직접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 침례를 경험한 후 그 성경의 진리에 기반한 교리를 받아들이며 오순절주의자가 되었다. 곽봉조가 밟았던 이 과정은 먼저 사도행전 연구에 따라 신학적 가설을 세우고 후에 경험함으로써 그 가설을 확증했던 미국 벧엘성경학교의 학생들이 겪었던 과정을 닮았다.
일본 이코마성서학원(日本生驅聖書學院)을 1929년에 설립한 사람은 레오나르드 쿠트(Leonard W. Coote)였다. 22세의 영국인 쿠트는 1913년 10월에 일본에 가서 한 회사의 사원이 되었다. 쿠트는 신앙고백을 했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1914년 2월 20일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깊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1917년 11월 19일 영국 오순절 선교사 윌리엄 메리 테일러(William and Mary Taylor)가 이끈 집회에서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 그 후 강력한 오순절 사역을 펼쳤다. 그런데 쿠트는 프랑크 그레이(Frank Gray)를 통해 1920년경에 오순절 운동의 한 분파이며 이단 시비를 받고 있는 단일성 “오직 예수 이름”(Jesus’ name only)에 전적으로 가담했다. 그는 1929년에 미국 하나님의성회를 탈퇴하고 “니혼펜테코스테교가이”(日本ペンテコステ教會, The Japan Pentecostal Church)라는 이름의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으며, 일본 사도적 선교회(Japan Apostolic Mission), 그리고 이코마성서학원도 설립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창립될 당시 그 안에서 삼위일체주의자들과 단일성주의자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었으며, 결국 단일성주의자들이 1917년에 사도적 성회들의 총회(the General Assembly of the Apostolic Assemblies), 그리고 1945년에 국제 연합 오순절 교회(United Pentecostal Church International)이라는 새로운 교단을 형성했다. 더함으로부터 시작된 오순절운동 안에서 그리스도께 집중은 교회론과 관련된 침례의식을 중심으로 한 “오직 예수 이름 침례”(Jesus Only Baptism)로 이어졌다. 더함의 시카고 Full Gospel Mission에서 방언이 동반되는 성령침례를 받았던 벨(E. N. Bell), 그리고 고스(Howard A. Goss) 등은, 비록 바로 돌이키긴 했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이 아닌 “오직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재침례를 받기도했다.
예수 이름 단일성 운동은 교회론에서 삼위일체론으로 확대되어 “단일성 오순절주의”(Unitarian or Oneness Pentecostalism)가 되었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三位一體)”(Una substantia tres personae)와 동방교회의 “삼체일본(三體一本)”(Μία οὐσὶα τρεὶς ὑποστασὶς)을 어거스틴이 두 가지 논의들의 장점만 취하여 정리한 “삼위일본(三位一本), 한 본질에 세 위격들”(Una essentia tres personae, One Nature, Three Persons)은 정통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단일성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께 지나치게 집중하여 침례를 “예수”라는 이름으로 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선을 넘어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혹은 위격)은 하나(one person)인데, “그 인격은 예수”라는 이단적 양태론(Modalism)을 주장했다.
그런데 쿠트는 일단 단일성 오순절주의가 주장하는, 사도행전을 따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Christ)라는 물침례형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성부 또는 성령으로 나타난 한 하나님(Jesus is the one God who is manifested as the Father or the Holy Spirit)이라는 단일성 오순절주의의 양태론적(Modalistic) 신론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쿠트가 1936년에 영국의 한 오순절적 교단인 사도적 교회(the Apostolic Church of Great Britain)에 가입한 것은 그가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사도적 교회에 가입하고 일곱 명의 영국 사도적 교회 선교사들을 그의 일본 사도적 선교에 받아들였다. 영국 사도적 교회는 신앙진술문 제1항에서 “한 분 하나님과 그분 안의 삼위의 일체”(the Unity of the Godhead and the Trinity of the Persons therein)를 믿는다고 고백했다. 이 신앙진술은 1920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그리고 교단명도 Apostolic Church in the United Kingdom으로 조금 바뀌고, 신앙진술문 제1항의 표현은 바뀌었지만 그 내용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남아있다(“The one true and living God who eternally exists in three persons in unity: Father, Son and Holy Spirit”). 쿠트는 후에 문제가 된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1940년에 자신이 사도적 교회의 모든 신조들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쿠트의 이런 신학은 오사카 재일조선인이며 그의 수제자였던 곽봉조에게도 전수되었다. 그는 쿠트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곽봉조의 물침례론, 삼위일체론은 쿠트의 물침례론, 삼위일체론과 매우 유사했을 것이다.
V. 이카노이조선교회 목사
쿠트가 설립한 일본 사도적 선교회는 1926년에 설립된 이래로 오사카와 교토 지역에 여러 개의 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1933년까지 정부로부터 승인을 받은 여섯 개의 교회를 보유했다. 그 여섯 개의 교회는 오사카의 이카이노교회, 이치오카교회, 사케교회, 히가오카교회, 교토 오미야의 교토교회, 그리고 이코마성서학원 안의 이코마교회였다. 그 교회들 중에 한인들에 의해 운영되는 교회는 이카이노교회와 히라오카교회였고, 여섯 교회들 중에서 가장 활발했다.
이카이노조선인교회는 1927년에 오사카의 북동부 이카이노 지역에 설립될 당시에는 일본인들만의 교회로 출발했다. 그렇지만 그 설립 후 몇 년이 지나자 도일하여 주변에 거주하던 한인들이 대거 교회로 유입되면서 조선인이 교인들의 주류가 되었다. 그 조선인 교인들 대부분은 일본어를 말하거나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인 목사는 더 이상 그 교회를 목회할 수가 없게 되었다. 따라서 이카이노교회는 조선인 교인들을 돌볼 수 있는 조선인 목회자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 되자, 쿠트는 그 조선인이 주류가 된 이카이노교회의 목회를 이코마성서학원의 2학년, 23세의 학생 곽봉조에게 맡겼다. 1932년 7월 7일에 이카이노교회는 정부로부터 이카이노조선오순절교회(猪飼朝鮮五旬節敎會)로 승인을 받음으로써 일본 사도 선교회의 첫 조선인 교회로 전환되었다. 30년사는 곽봉조가 단순하게 이카이노조선교회를 개척했다고 보았지만, 사실은 이런 과정이 존재했다.
1910년의 한일합병은 곧 일본으로의 조선인 이주자의 증가를 의미했다. 병합 직후 내무성이 경보 국장 명의로 각 지방에 “조선인 호구 직업별 인원표의 건”이라는 통첩을 발했고, 이어 1911년에는 “조선인 명부 조정의 건”을 지시한 것도 그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통해 경찰서에서 작성한 명부는 1부를 상급기관에 제출하며, 조선인의 언동과 사상을 조사하는 동시에 이동시에는 행선지를 속보하도록 정해졌다. 이주조선인의 증가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일본 경제의 발전으로 새로운 노동력 수요가 창출되었고, 바로 이 노동력 수요를 메우기 위해 조선인의 도항이 이루어졌다. 1920년에 3만 명을 넘은 재일조선인 인구는 1930년에 약 30만 명으로 급증했다.
“돼지를 기르는 토지”라는 뜻을 갖는 이쿠노쿠 이카이노초(猪飼野町)의 옛 지명인 “이카이노”는 고대 아스카 시대부터 고대 한반도 특히 백제 유민들이 이곳에서 돼지를 사육하며 살았다고 해서 생긴 명칭이었으나, 1973년 행정구획 변경으로 쓰루하시(鶴橋), 모모다니(桃谷), 나카가와(中川), 다시마(田島)로 분할되면서 그 명칭은 사라졌다. “이카이노”는 해방 전부터 재일 한인들(在日韓国人, 자이니치 칸코쿠진)의 집중 거주지였다. 구다라가와(百濟川)를 개수하기 위해 1913년 3월에 시작돼 1923년에 완성된 연장 2,144미터, 폭 16미터의 신히라노가와(新平野川) 운하 공사를 위해 모인 조선인이 그대로 살게 되면서 마을이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당시 오사카 거주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가장 많았다. 예를 들면, 1925년에 동경에는 9,989명의 조선인이 거주했는데, 오사카에는 34,311명이 거주했다. 1928년에 동경에는 28,320명의 조선인이 거주했는데, 오사카에는 55,290명이 거주했다. 그들은 이카이노와 그 주변에 거주하며 오사카 지역에서 발달된 고무공업의 하청 노동에 다수 종사하였으며, 그 외 토목 노동자, 노점상 등도 적지 않았다. 특히 노점상은 한인들이 집중 거주함에 따라 조선에서 각종 생활용품을 반입하여 판매하는 사람들이었다. 1930년대 말에는 이미 이카이노에 조선시장이 형성되어 있었고, 명태, 고춧가루 같은 식료품부터 혼수 용품까지 거주 한인의 생활 용품을 파는 점포가 약 200개에 달할 정도였다.
23세의 곽봉조는 1932년 말에 제주도가 고향이라는 3년 연하의 송우순과 결혼했다. 그녀는 이카이노조선교회의 성도였고, 또한 이코마성서학원의 학생이었다. 곽봉조와 송우순이 연애할 때 일화다. 하루는 점잖은 모습으로 곽봉조가 “난 이미 결혼을 한 몸이요. 그래도 나와 결혼하겠소?”라고 송우순에게 물었다. 놀란 송우순이 “예?” 하고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곽봉조는 “왜 놀라시오? 내가 결혼 한 것에 실망하는 눈치인데, 지금도 늦지 않았으니 생각을 한 번 더 하시오. 난 첫 번 결혼 그분을 일생 잊을 수 없소이다”라며 진지하게 말했다. 송우순은 “정말이예요? 그럼 저는 뭐예요?” 그때 곽봉조가 말했다. “그분을 당신도 만난 것 같소만 . . . 처음으로 당신에게만 말하오. 그분을 만난 후부터 난 정말 행복했소. 그분 이름은 예수요!” 송우순은 특별 은사가 있었을 뿐 아니라 믿음이 좋아 기도하지 않고서는 행하지 않는 독실한 신앙인으로써 곽봉조에게는 더없이 좋은 내조자가 되었다.
수백 년 동안 송우순의 고향 제주는 고립된 곳이었다. 1629년부터 1823년까지 약 200년 동안 조선 정부의 제주지역 주민의 육지로의 이탈을 금지한 “출륙금지령”(出國禁止令)이 제주인의 발을 묶었다. 그전까지 제주는 한라산의 풍부한 목재를 활용한 대형선박을 건조해내는 해양세력의 본거지였으며 한반도와 중국, 일본 사이에 자리한 지리적 특성을 살려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번영을 구가했다. 그러나 출륙금지령으로 인해 제주는 공납의 운송, 관료의 이동 등의 공적인 분야로 제한된 해상교통을 제외하고는 사실상 고립상태에 머물렀다. 내부적으로 정체가 계속될 즈음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서구적 근대로 이행해 가던 일본이 제주사회와 제주인의 운명을 바꾸는 중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1920년에서 1940년 사이에 많은 제주인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갔었다. 도일 조선인들의 비율은 제주인 50%, 경상인 40%, 나머지가 10%였다. 본토에서 경상도 인구가 제주도 인구의 20배에 달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재일조선인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비슷하다는 것은 많은 제주인들이 일본으로 갔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 제주도에서는 농업과 어업에 집중된 열악한 산업환경과 인구증가에 따라 실직자가 다수 발생했었다. 섬 출신을 멸시하는 분위기가 육지에 있었기에 때문에 제주 실업자들은 일자리나 대우 면에서 육지보다 비교적 좋았던 일본 본토로 갔다. 특히 제주인의 도일은 “경무총감부령”에 따른 “여행증명서” 제도가 1922년에 “자유도항제”로 바뀐 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한때 제주인 1/4이 일본에 가 있었다. 제주인들은 경제적으로는 열악했어도 주로 정치적 이유로 양반 등의 지식계급이 귀양을 오는 유배지여서 문해 수준과 교육 수준이 상당히 높았다. 그래서 제주인들은 비교적 쉽게 일본 생활에 적응했고, 상당한 지위를 구축하는 사람도 나오게 되었다.
많은 제주인들이 일본에 갔지만, 일본에서도 특히 오사카에 집중적으로 갔다. 일본, 오사카의 “이카이노”는 해방 전부터 제주도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재일 한인들(在日韓国人, 자이니치 칸코쿠진)의 집중 거주지였다. 오사카에 제주인들이 집중적으로 많이 거주하게 된 요인이 있었다. 그 요인은 크게 외적 요인과 내적 요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외적 요인은 다시 경제적 요인과 교통적 요인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내적 요인은 지연(地緣)적 요인이라고 전환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적 요인은 오사카에 제주인들이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일자리가 많았다는 것이다. 오사카부 셋쓰방적공장 등 여러 회사들은 제주도에 노동 브로커를 파견하여 제주인을 모집해 일본으로 데려갔다. 오사카로 진출한 제주인들은 우수 직공으로 인정받자 제주인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도항자 수도 점점 증가했다. 교통적 요인은 제주인들이 수월하게 도일할 수 있는 교통편이 있었다는 것이다. 1922년 10월 제주도와 오사카 사이에 정기연락선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가 운항을 시작했고, 1923년 아마가사키[尼ヶ崎] 기선의 제2군대환(第2君代丸)이 오사카-제주 간 직항로로 개설되었으며, 1924년에는 조선우선(朝鮮郵船)의 경성환(京城丸)에 의해 오사카-제주 간 항로가 다시 개시되면서 제주인들의 오사카로의 도항이 수월하게 되었다. 내적이며 지연적 요인은 오사카에서 제주 출신의 사람들 스스로 모여서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1925년 이카이노에서 육지 출신으로 구성된 아리랑단과 제주도 출신 청년들의 충돌이 발생했다. 이 싸움에서 제주 출신들이 이긴 후 다른 곳에서 차별받던 제주 출신들이 이카이노에 모였고, 이곳은 일본 속의 제주도가 되었다. 오사카 재일조선인의 60%가 제주도 출신이 되었다.
당시 재일 제주인 중에서 여성의 연령 구성비를 보면, 15세 이하(17.3%), 16~20세(16.8%), 21~25세(17.0%), 26~30세(18.5%), 31~35세(12.9%), 36~40세(8.8%), 41~50세(5.5%), 51세 이상(3.1%)으로 나타난다. 16세에서 30세에 해당하는 여자들이 52.3%로 절반을 상회한다. 이는 결혼을 하지 않은 여성 혹은 결혼해서 얼마 되지 않은 부부들이 주로 이주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여성들은 주로 방직공으로 활동했다. 제주 여성 송우순은 위와 같은 여러 요인들 때문에 가족과 함께 또는 혼자 오사카로 갔을 것이다.
송우순과 또는 그녀의 가족도 제주인들의 육지인들에 대한 대립적 정서를 공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런 대립적 분위기 속에서 육지 남자 곽봉조와 제주 여인 송우순이 결혼했다는 것은 아마도 이례적이고, 눈총을 받는 일이었을 것 같다. 물론 곽봉조는 거제도라는 섬 출신이었지만, 제주인들 입장에서는 거제도는 거의 육지에 속한 곳이었을 것이다. 이런 송우순 안에 까칠하게 존재했을 공유된 대립적 정서는 그녀의 열정적인 오순절적 신앙에 의해 용해되었을 것이다.
이코마에서의 신학공부가 끝나갈 무렵에 곽봉조는 조선으로 돌아가 자기 고향에 있는 한 성결교회에서 사역할 계획을 세웠었다. 그러나 곽봉조는 결국 섬기고 있던 이카이노조선교회에서 계속 목회하기로 결정했다. 곽봉조의 지도력 아래서 이카이노조선교회는 일본사도적선교회 안에서 최고 200명의 교인이 출석하는 가장 큰 교회로 가파르게 성장했다.
1930년대 오사카는 재일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던 무대였다. 1932년 오사카 여름 실업노동자로 등록된 수 약 1만 명 중 90%가 조선인 ‘자유노동자’(일용노동자)였다. 1927년의 금융 공황으로 시작해 1929년의 세계 공황을 거쳐 1930년에서 1931년에 최고에 달한 일본 쇼와시대 초기의 일련의 공황, 이른바 ‘쇼와(昭和) 공황’을 계기로 한 대량 실업의 파고를 조선인 노동자들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경제적 한파는 공산주의자들이 활동할 수 있는 여건이 되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식민지 조선에서는 사회주의 담론이 크게 유행하여 당대의 지식인들 중 많은 이들이 스스로를 사회주의자로 인식했다. 당대 지식계급의 또 다른 중요한 부류였던 민족주의자들과 달리, 사회주의자들은 제국주의 일본의 침략 행위의 근본에 자본주의의 문제가 놓여 있다고 생각했다. 사회주의자들의 관점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제국주의로 발전하게 되어 있는 것이므로 제국주의에 대항한 저항은 자본주의 비판의 문제를 반드시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식민지 지배를 문제 삼는 조선인 사회주의자들 역시 일제 강점기의 현실을 자본주의 비판과 결부지어 생각하려 했다.
일본으로 유학한 조선인들 중 많은 이들이 사회주의자들이었다. 이때의 사회주의 사상은 아직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과 코뮤니즘(공산주의)이 분리되기 이전이었다. 1920년 1월 도쿄에서 재일 한인 유학생들이 결성한 조선고학생동우회(朝鮮苦學生同友會:이하 동우회)는 겉으로는 조선 출신 고학생들의 친목단체였지만 그 내용은 사상단체였다. 일본 검사국에서 펴낸 『사상 월보』에 따르면, “일본에 거주하는 제주인은 약 4만 명에 이르고 [공산주의] 사상운동에 종사하는 자는 약 300명에 달하고 있다.” 1922년 11월 오사카(大阪)와 도쿄에서 각각 조선인노동자동맹회를 결성했다. 1924년 2월 분산되어 활동하던 조선 노동 동맹회의 각 조직을 모아 재일본 조선노동총동맹을 결성했다. 1927년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의 합작으로 민족 단일당 신간회가 서울에서 결성됐다. 일본에서는 같은 해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지회가 결성됐다. 일본에 거주하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조선 공산당 일본 총국, 고려 공산 청년회 일본부를 결성하여 한국과 연계하면서 활동을 펼쳤다.
1930년을 전후해 오사카에서는 소비조합 운동과 노동자의 자녀들을 위한 교육 운동, 의료 기관 설립 등의 공산/사회주의적 운동이 광범위하게 일어났다. 조선무산자진료소는 질병 발생이 쉬운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오사카 거주 조선인들이 언어가 통하는 조선인 의사에게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조선인 스스로가 만든 일종의 의료조합이었다. 1930년 1월 초에 오사카의대 출신의 정구충 등이 중심이 되어 실비진료소를 개설하기로 하고 30여 명으로 후원회를 조직했다. 조선무산자진료소는 정구충과 閔瓚鎬 등 의사와 조선인 간호사를 갖추고 2월에 개업했다. 조선무산자진료소는 1931년 2월 2일에 설립 1주년을 맞이하여 정구충이 진료소를 조선인 무산자대중에게 제공한다고 발표함에 따라 실행기관을 조직하여 운영하기로 하고 오사카조선인무산자진료소로 개칭되었다. 이후 진료소는 일제의 폐쇄조치를 받았다. 소비조합운동은 일본 내 여러 지역에서 전개되었는데, 특히 주목되는 것이 오사카지역의 활동이다. 大阪消費組合 東大阪支部는 1933년 10월 1일에 결성되었다. 조합은 1936년 1월 13일에 유지위원회를 결성하고 적극적인 활동을 전개하기로 했는데, 유지위원회는 회원의 수를 늘리고 소비조합 유지를 위해 노력함은 물론이며, 유지회원의 역할을 통해 일반 민중의 사회적 신념을 집중시키는 데에도 역할을 담당하고자 했다. 東大阪消費組合의 적극적인 활동은 당국의 주목을 받아 1936년 1월 16일에 개최할 예정이었던 정기총회가 금지되기도 했다. 일본 내에 조선인이 정주하면서 자녀교육 문제는 중요한 현안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인들은 교육기관을 자체적으로 마련하여 아동과 무학자에 대한 교육을 담당하고, 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오사카에 설립된 대표적인 교육기관은 1930년대 초 關西共鳴학원이 있었다. 물론 이밖에도 조선촌을 중심으로 야학이 설립되었으나, 공명학원은 몇몇 조선촌이 연합하여 설립한 학교로서 조선인의 기금으로 교사를 마련하여 150명의 아동을 교육했다. 1932년 2월 1일 당국에 의해 학생 3인이 검속된 후 7월 25일에 폐쇄되었다. 오성무·김재수·방남희·정순제 등의 교사들은 노동사전, 자본주의 및 사회주의관련 서적을 구입하여 사상연구에 진력하고 아동에게 계급의식을 침투시켰다. 1932년 5월 중순 경에는 방남희와 김재수가 일본프롤레타리아음악가연맹 구성원 3명을 초청하여 연주회를 개최했으며, 러시아혁명가를 가르치거나 계급의식이 있는 영화를 보여주었다. 또한 8월 1일 반전데이를 맞아 학생 2명에게 격문살포 행동대원의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일본에서는 각종 생활조합이 결성되었다. 특히 오사카에는 소비조합을 비롯해 생활조합이 활성화되었다. 1928년 코민테른이 “일국 일당주의” 원칙을 발표한 후, 오사카에서 활동하던 한국 및 제주도 출신의 공산주의자들은 1931년경부터 일본 공산당 등 일본의 당조직에 합류해 1935년 일본 공산당이 궤멸 될 때까지 많은 활동을 벌이다 검거되었다.
1930년에 쿠트에게 위해를 가했던 조선인들은 공산주의자들이었을 것이다. 1930년에 쿠트는 어떤 오사카 재일조선인들의 공격을 받았다. 쿠트는 조선인 거주지역 부근에서 한 전도 집회 도중 어떤 설교를 했는데, 그 내용이 그들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들은 쿠트에게 폭력을 가했다. 쿠트의 기독교적인 메시지에 발끈하여 폭력까지 행사했다면, 그들이 보통 조선인들이 아닌 공산주의적 조선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곽봉조는 이런 오사카 이카이노 조선인들의 강하고 왕성한 반기독교적인 공산주의적 활동 한 가운데서 목회하면서도 이카이노조선교회를 성장시킨 것이다.
1933년 4월에 쿠트가 설립한 이코마성서학원의 첫 20명 가운데서 11명이 떨어져 나가고, 첫 졸업생 아홉 명이 3년 만에 배출되었는데, 그중에 24세의 조선인 곽봉조(郭鳳祚)가 있었다. 그런데 곽봉조는 졸업시험에서 100점 만점을 받았었다. 놀란 교장 쿠트와 교수들이 그의 시험지를 다시 철저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하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곽봉조가 쿠트를 비롯한 출제자들이 원하는 답을 일본인 학생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제출했던 것이다.
신학교를 졸업한 곽봉조는 쿠트의 통역사가 되어 이카이노의 조선인 복음화에 기여했다. 예를 들면, 그가 쿠트와 함께 노방에서 전도하다 윤성덕을 만나게 되어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될 것을 권면하자 청년 윤성덕은 흔쾌히 승낙하여 이코마성서학원에 입학했다.
한국 이민자들의 복음에 대한 개방성과 헌신 그리고 그들 가운데서 한국인 교역자들의 성공을 보면서 쿠트는 한국인 사역에 보다 더 매진하기 시작했다. 더하여, 한국인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은 한국에 선교지부를 설치할 것을 쿠트에게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33년에 쿠트는 한국에서 한국인 교역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한 한 성경학교를 세우려는 목적을 가지고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더욱이, 1931년부터 1945년까지의 격화된 전쟁 기간 동안, 일본 정부의 한국인 이민 제한은 한국에 성서 학원을 세우는 쿠트의 선교사역을 촉진시켰다. 한국인들이 일본으로 들어오는 것이 엄격하게 제한되었고, 반면에 한국인들이 자기들의 고향으로 돌아가는 비율이 증가했기 때문에 이코마성서학원에 한국인 학생들의 등록이 급격히 감소했다. 그 결과, 1934년 상반기 즈음에, 쿠트는 가칭 한국 사도 순복음 성서 학원(the Korea Apostolic Full Gospel Bible School)과 한국에 그 거점들을 세우기로 결정했다. 에스더 쿠트 부인(Esther Coote)은 1934년 여름에 그녀가 한국어를 배워야만 한다는 신적 확신을 갖게 되었다. 쿠트에게, 이것은 한국에 성서학원을 출범시키려는 자신의 계획에 대한 하나님의 인가로 여겨졌다.
곽봉조는 이카이노조선교회의 목사로 일하면서 또한 이코마성서학원의 교수로 일했다. 그렇게 그는 오사카에서 가장 큰 조선인 교회를 일으킴으로써 자신을 목사로서 입증했고, 일본 이코마성서학원에서 선생으로서 자신을 입증했다. 그러자 쿠트는 하나님께서 조선에 세워질 성서학원의 주요 책임자로 곽봉조를 점찍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 계획을 들은 곽봉조는 그 학교가 세워지기를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게 되었다.
1936년 1월 21일, 음력 1월 2일부터, 양력 1월 20일에서 22일까지 신년 성회가 이카이노조선교회에서 열렸다. 그때 쿠트는 미국에 사는 한 이름 없는 여성 그리스도인으로부터 3,300달러가 동봉된 편지를 받았다. 그 편지에서 그녀는 그녀의 헌금 중에서 1,000달러를 한국 선교에 할당했다. 더하여 1936년 1월 21일은 그의 딸 매리 안나(Mary Anna)의 소천 5주년의 날이었다. 쿠트는 이 동시 발생을 한국으로 선교사역을 확장하려는 그의 노력에 대한 “확실하고 의심할 수 없는 확증”(a definite, undoubted confirmation)으로 이해했다.
몇 달 후, 1936년 4월경에 쿠트와 27세 곽봉조는 한국에 두 번째로 일주일간 방문했다. 그들은 이 두 번째 방문 동안 경성을 살펴보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다. 마침내 쿠트는 경성이 그것을 중심으로 한국의 거점들이 놓일 지역으로 결정했다. 비록 쿠트는 거점 부지들을 구입하고 그 종교기관과 성서학원을 설립하는 것과 관련된 법적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더 머물기를 바랬지만, 미리 계획된 신입생 환영회 때문에 일본으로 급히 돌아갔다.
쿠트는 호주 사도적 교회(the Apostolic Church)의 초청으로 7월부터 11월까지 호주와 뉴질랜드로 선교 여행을 가기 전에 한국 사도적 선교 사역을 위한 거점들이 될 부지들의 매입을 완결짓기를 원했다. 쿠트와 곽봉조는 야마모토 형제와 함께 1936년 5월 말에서 6월 초에 한국을 다시 방문했다. 야마모토는 쿠트의 비서로서 쿠트와 곽봉조와 동행했는데, 그 이유는 그가 종교 그리고 교육 기관들의 설립을 위한 법과 규정들에 관련해 일본 정부와의 거래에 능했기 때문이었다. 경성 안과 주변에 있는 많은 가능한 장소들을 찾아보며 열흘을 보낸 후, 쿠트는 최종적으로 경성의 남서부 끝에 있는 한강 건너 영등포 지역에 있는 땅을 매입했다. 그리고 그의 이름으로 총독부에 그 땅을 등록했다. 그때 그 땅 매입과 등기는 아주 시의적절했다. 왜냐하면 조선 총독부는 1936년 12월 26일에 외국인이 한국에 있는 땅의 토지주가 되는 것을 금하는 법령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그 땅 매입을 마친 후, 쿠트는 서울을 새예루살렘으로 선포하면서, 한국에서의 선교 출발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했다. 한국 성서 훈련 학원 캠퍼스의 청사진은 세 동의 건물, 남자 기숙사가 있는 본부, 여자 기숙사, 그리고 선교 본부의 건설을 포함했다. 그 기간시설은 100명의 학생들, 두 선교사와 가족들, 그리고 세 명에서 네 명의 조선인 교사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초기 건설 비용은 16,500달러로 예상되었다. 일본 사도 선교회 산하 조선인회의 감독 곽봉조는 한국 사도 선교회의 설립을 처리하고 새로운 성서 학원에서 한국인 사역자들을 길러내는 일을 감당하기 위해 서울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한국 사도 선교회의 개시는 크고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다. 이 프로젝트가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쿠트는 전 세계에 걸쳐 그의 친구들과 후원자들로부터 경제 그리고 기도 도움을 끌어내야만 했다. 쿠트는 그의 소식지 『일본과 오순절』(Japan and Pentecost)을 통해 그의 한국 사역의 성취와 경과를 계속 알렸다. 1936년 10월 호는 한국 관련 특집이었다. 쿠트는 또한 기금을 증가시키기 위해 1937년 1월 23일에 한국 프로젝트를 위한 특별 기도회를 계획했다. 그런 노력의 결과, 쿠트는 1937년 2월 2일까지 25,00엔을 모금했다.
그렇지만, 쿠트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프로젝트는 1937년에 그다지 진전을 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쿠트의 기금모금이 한국 프로젝트를 위한 예상 비용에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프로젝트를 위한 쿠트의 기금 진작 캠페인 2년 후, 모금액은 1937년 2월에 거친 금액과 여전히 동일했다. 더욱이, 포교 법규와 같은 한국에서 집행된 종교와 교육 기관에 관한 법령들은 한국 프로젝트의 개시를 지체시켰다. 왜냐하면 그 법령들은 한국 안의 그 어떤 종교 기관이든 총독부로부터 종교적 사역을 위한 허가를 획득하기 전에 그 거점들을 얼마나 작든 상관없이 짓거나 세내게 했기 때문이다.
29세의 곽봉조는 1938년 즈음에 이카이노조선교회의 성도이며, 이코마성서학원에 재학 중이던 박헌근과 최예임의 결혼식을 주례하기도 했다.
총독부의 강화된 법령에도 불구하고 쿠트는 방해받지 않았다. 쿠트는 1939년 초에 성서 학원을 짓고 한국 선교를 수행하기 위한 정부의 인가를 받기 위해 서울로 네 번째로 방문했다. 쿠트는 총독부가 쿠트의 땅을 주거지 및 학교 부지로 지정해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으나, 포교에 관한 법규들 때문에 아무런 진전도 이룰 수 없었다.
네 번째 한국 방문 직후, 그 한국 프로젝트는 쿠트가 가족 문제로 일본을 떠나야 했기 때문에 중지되었다. 그 가족문제는 쿠트의 큰딸, 페이스 쿠트(Faith Coote)와 그녀의 결혼 상대자 월터 덴턴 사이의 사랑 문제였다. 1939년 봄에, 열 일곱 살의 페이스는 일본 사도 선교회의 젊은 호주 선교사 덴턴과 사랑에 빠졌다. 쿠트는 그 두 젊은 커플 때문에 마음이 심란해졌다. 왜냐하면 그는 그들의 관계가 온당하지 못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쿠트는 그들을 억지로 떼어놓으려고, 페이스를 1939년 7월에 미국으로 보내버렸다. 쿠트가 그 사랑 문제를 독단적으로 다룬 것은 그와 그 젊은 커플들을 동정하는 호주 선교사들 사이의 불화를 야기시켰다. 이 내부 문제는 곧 쿠트와 덴턴을 포함한 호주 선교사들을 후원하던 호주 사도적 교회 사이의 외적 불화로 번졌다. 이 불화는 1939년 여름부터 1940년 가을까지 지속되었고, 결국 쿠트가 사도 교회와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쿠트는 그의 가장 큰 후원자들 중 하나를 잃었다. 쿠트는 1939년에 그의 가족을 돌보기 위해 미국으로 돌아가면서, 일본 사도 교회와 이코마 성서 학원의 일을 레타 던(Leta Dunn)과 올리브 휴스(Olive Hughes)에게 맡겼다. 쿠트가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1941년 12월에 태평양 전쟁이 발발했고, 그 전쟁은 쿠트가 선교를 위해 일본으로 돌아오는 것을 가로막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쿠트는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한국 프로젝트를 포함하여 일본에서 그의 선교 사역 모두를 중지시키기를 거부했다.
곽봉조는 낮에는 직장에 나가 일하고 저녁에는 온 시내를 누비며 노방전도를 하며 온 몸을 던져 목회했다. 그러다가 31세-32세, 1940년 말에서 1941년 초에 질병에 걸렸다. 호주 선교사 올리브 휴스(Olive Hughes)의 부인(Miss Hughes)은 미국에 간 쿠트 대신 오사카의 교회들과 이코마성서학원을 돌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곽봉조(Kaku)가 폐렴(pneumonia)에 걸려 오사카에 있는 작고 좁게 기다란 방, 즉 한 나가야 방에서 혼자 몹시 앓고 있는데, 그의 아내와 가족은 조선에 있다는, 즉 곁에서 간호해줄 사람들이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하이든(Hayden) 선교사가 곽봉조에게 병문안 간 소식을 전했다.
우리는 가여운 곽 선생(Kaku Sensei, 廓 先生)이 오사카의 작고 좁은 방에서 폐렴에 걸려 몹시 앓고 있다는 것과 그의 아내와 가족은 한국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에 대해 마음이 아프고, 그가 정당하게 대우를 받아왔는지 돌이켜 봅니다. 하이든 형제가 오늘 밤 일찍 그를 방문하기 위해 이카이노 집회에 갔습니다.
아마도 그때 곽봉조가 걸린 병은 피를 토해내는 심각한 폐병이기보다는 심한 감기로 인한 급성 폐렴이었을 것이다. 이때 이코마성서학원을 졸업한 박헌근이 곽봉조의 목회를 도와주었다.
VI. 만주 길림성 연길에서의 목회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항모를 이륙한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태평양함대 기지를 폭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정부는 선교사들을 포함한 외국인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쿠트도 호주로 가야 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모든 교회들을 하나의 연합교회 안에 통합시켜 버렸다. 이카노조선인교회도 예외가 아니었고, 교회 건물은 징발당했다. 쿠트가 이끌던 조선인 신자들과 교역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대부분 조선으로 돌아왔다.
33세 곽봉조는 1942년에 “내 나라 내 땅에 가서 성령의 불씨를 터트리기 위해 귀국”했다. 고향인 거제도로 가서 복음사역을 시작하자 독립운동의 중심이 된 교회를 핍박하던 일본인들은 곽봉조를 감옥에 가두고 모진 고문을 하기도 했다. 가까스로 옥살이에서 풀려난 곽봉조는 고향에 가족들을 둔 채 외사촌 유치화가 살고 있는 멀리 만주의 길림성으로 떠났다.
만주는 총면적이 한반도 6배나 되는 광활한 땅이다. 중국인들은 이 지역을 동북지방, 혹은 동삼성(길림, 봉천, 흑룡강성)으로 불렀다. “둥베이, 동북”(东北, 東北)이란 명칭은 청나라 시기에 만들어진 명칭이다. 명나라 시기에는 이곳은 산해관 바깥쪽이라고 해서 관외, 내몽고와 구별해서 관동지역이라고 불렸다. 이곳은 청나라의 발원지였기 때문에 봉금지역으로 묶어서 한족의 출입을 금했으며, 만주족들이 대거 관내 지역으로 이동한 후 남아 있던 만주족만 거주하는 등, 인구가 희박한 지역이었기 때문에, 행정 기관도 설치되지 않았다. 그래서 청나라는 입관 후에도 이 명칭을 계속 썼지만, 19세기 들어 러시아가 이 지역을 탐내면서 이곳의 인구를 늘리기 위해 봉금령을 풀었고, 이때부터 한족들이 이 공백지에 대거 밀려들었다. 이 현상을 틈관동(闖關東)이라고 하며, 이때 이곳을 지칭하는 명칭으로 “관동”이 쓰였다. 청나라는 이곳에 인구가 늘어나자, 멸망 직전인 1907년 이곳을 헤이룽장성, 봉천성 지린성 3성으로 개편하면서 동북3성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한국 및 일본에서는 “만주”(滿洲)로 통칭했다. 또한, 압록강 건너편을 서간도(西間島), 두만강 건너편을 북간도(北間島) 혹은 동간도(東間島)라 불렀고, 봉천성 일대와 길림성 남부를 합하여 남만주, 흑룡강성 일대와 길림성 북부를 합하여 북만주라 불렀으며, 흔히 “간도”라 하면, 북간도를 일컫는 말이었다.
남만주 지역은 산지 비율이 매우 높다. 그러나 요동과 북만주 지역은 산지가 적고 평야가 많아 사람이 살 수 있긴 하나 춥다. 지리적으로는 춥고 황량한 허허벌판이라는 이미지와는 달리 아무르강, 송화강이나 랴오허 같은 큰 강이 흐르고 한카호 같은 거대한 호수도 있으며 풍성한 삼림이 우거져 있다. 그리고 몽골고원과 경계를 이루는, 해발 1,900m에 이르는 거대한 다싱안링산맥을 비롯한 여러 산맥도 자리 잡고 있으며, 늪지도 많았다. 남부에서 대략 한가운데 둥베이 평원이 자리 잡고 있다.
근세에 들어서 만주에 한국인이 이주하게 된 것은 주로 경제적인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조선 후기에 계속되는 흉년과 부패한 관리의 가렴주구는 주로 함경도, 평안도의 농민들로 하여금 생존을 위해 두만강, 압록강 건너편으로 건너가 농사를 지어오거나 아예 그리고 이주하게 만들었다. 조선 정부는 처음에는 강압적 금지책을 썼으나 후에는 방관했다. 그리고 이주민의 수가 급증하자 적극적으로 이들을 보호하는 정책을 쓰기도 했다. 1910년에 이르기까지 약 10만 명, 1920년에 46만 명, 1930년에 61만 명, 1940년에 110만 명, 1945년 해방 당시에는 210만 명에 달했다.
곽봉조가 만주에 갔을 때 그 지역은 만주국(満州国)이었다. 만주국은 일본제국이 만주사변 직후 동삼성(東三省)을 강제로 점령하여 1932년 3월 1일부터 1945년 8월 18일까지 존속시켰던 괴뢰국이자 식민지였다. 일본의 천황 지배하에 황제였던 강덕제(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 1906~1967])를 왕 명칭인 대동왕으로 하락시키고 명목상 원수로 하는 국가로서, 만주족과 한족, 몽골족, 한민족, 야마토 민족의 오족협화로 이루어진 “만주인”에 의한 민족자결의 원칙에 기초에 둔 국민국가를 표방했다. 그러나 실제 통치는 일본 관동군이 주도했다. 1928년경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가 관동군 작전주임참모로 부임했는데, 그는 만주국 설립을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전략으로 삼았다. 첫째, 총력전 수행을 위한 자급자족권의 확립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당연히 일본의 국가개조와 연동하고 있었다. 둘째, 국방, 전략상의 거점의 확보라는 과제인데, 이것은 또한 조선통치와 1922년 12월 30일일 세워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맹(Сою́з Сове́тских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их Респу́блик)과 1921년 7월에 창단된 중국 공산당을 대처하는 방공(防共)이라는 이데올로기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이러한 두 가지 문제는 만몽을 영유함으로써 한꺼번에 해결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만주가 일본제국의 세력권이 되자 조선인이 만주로 이주하는 데 큰 변화가 일어났다. 1930년대 이후 일제는 만주로 일본인과 조선인을 대량으로 이주시키고자 했다. 이주한 일본인이 만주의 국방과 개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일본인의 이민은 예상외로 저조했다. 그러나 조선인의 이민은 조선총독부의 적극적인 의지로 추진되었다. 조선인의 이민은 일본인과 같이 만주국의 농촌개발과 ‘협화’라는 건국 이념을 실현하는 데 중요했다. 조선총독부에게 조선인을 만주국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이민’은 일종의 사회정책으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었다. 조선총독부는 농촌 인구의 과잉 현상과 계속되는 경제불황으로 인한 실업 발생 등 사회의 불안을 해소하여야 했고, 만주를 그 탈출구로 삼았다. 또 ‘불령선인의 온상인 재만 조선인사회를 포섭하고 항일세력에 대응하기 위해서도 이민이 필요했다. 한편 조선인의 만주 이민은 일본의 사회문제 해결과 연결되었다. 주로 남부 지역의 조선인들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자리를 구하였는데, 조선인들은 가난한 빈민으로 집단 거주지를 이루면서 살았으므로 일본의 도시문제로 비화되었다. 조선의 사회문제가 일본으로 건너간 형국이 된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조선과 일본 본토의 사회문제를 해결한다는 입장에서 정책 이민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또한 만주 관동군은 중일전쟁으로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조선인의 만주 이주를 찬성했다. 만주는 인구 밀도가 낮고 노동력의 수준도 떨어져서 전시에 동원할 인구가 부족했다. 이처럼 조선인 이민은 제국의 이익과 국방이라는 목적 속에서 이루어졌다. 만주에서 조선인 자작농창정(自作農創定) 사업을 실시하고, 안전 농촌과 집단 부락을 건설하는 동시에, 북변진흥계획(北邊振興計劃) 등의 일환으로수전(水田)을 개발했다. 그간 ‘불령선인’의 온상이었던 조선인의 만주 이민은 ‘개척’으로 선전되었다. 조선과 만주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 통치권으로 포괄되면서 이들 양 지역 간의 관계는 긴밀해졌다. 만주국과 조선 사이에는 상당한 양의 물자와 인적 교류가 이루어졌고, 그 결과 만주국은 조선의 중요한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 특히 일제의 미곡 반출에 따른 조선의 식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하여 만주산 농산물이 수입되었으며, 조선에서 부족한 전시물자의 상당량이 만주에서 유입되었다. 반대로 만주국에서는 쌀 · 생선류 · 인조견직물 · 시멘트 · 목재 등을 가져갔다.
곽봉조는 만주 길림성(吉林省)에서 원래 장로교 소속이었던 한 교회를 인수했다. 조선 말기의 한국인들은 정치, 사회, 경제적 불안 가운데 종교적으로 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었는데, 한국 재래의 종교들은 이미 그 생명력을 읽고 있었고, 기독교가 새로운 종교로서 많은 한국인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황해, 평안도 등 한국의 서북지방에는 여러 요인에 의해 일찍부터 자립적 중산층이 성장하고 있었는데, 특히 중국 국경 근처의 의주에는 중국과의 국경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많았다. 이들은 대개 한문과 만주어에도 능통한 지식인들이었으며, 개방적이고 독립적인 성향과 함께,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사회질서에 대한 요구가 강한 사람들이었다. 이러한 사람들 가운데 백홍준의 부친, 이응찬, 서상륜, 서상조 형제 같은 사람들이 여러 과정을 거쳐 만주에서 존 로스(John Ross, 중국 이름: 나요한(羅約翰), 1842년 ~ 1915년) 선교사를 만나 신앙을 갖게 되었고, 그의 한글성경 번역과 보급에 능동적으로 참여했다. 서상륜은 1882년에 5개월간 로스 선교사를 도와 성경을 번역하고 세례를 받은 후, 국내에 들어와 자발적으로 전도하여 한국 최초의 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로스 등에 의해 한글로 번역된 성경은 먼저 만주 각지의 한인촌에 반포되기 시작했다. 로스는 식자공인 김청송을 전도자 겸 권서로 삼아 파송했는데, 김청송은 자신의 고향인 만주 즙안을 중심으로 수 많은 한글 복음서와 전도책자를 반포했고, 얼마 되지 않아 많은 한국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세례를 받게 되었다.
1930년에서 40년대는 만주의 조선인교회에게도 혹독한 시기였다. 1931년 만주침략으로 만주에 대한 지배를 획득한 일제는 조선인 교회에 대해서도 교묘하고도 직접적인 통제, 지배책을 강행해 나갔으며, 1941년에 이르러는 모든 교회를 “만주조선기독교연맹”에 강제로 통합함으로써 그 통제 및 지배의 파국을 자초했다. 해방전 만주 지역 교세는 장로교 6개 노회, 교회 309, 목사 65, 선교사 3, 남자 전도사 84, 여전도사 20, 교인수 40,500였고, 감리교는 만주 선교회, 교역자 52, 교인 4,500명, 그 외에 성결교, 동아기독교(침례교) 조선 기독교 등이 약간이었다. 1934년에 연길에는 6개의 교회에 3,578의 성도들이 있었다. 그런데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면서 일제에 의해 영국과 미국의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추방되면서부터 연변의 교회는 침체 상태에 빠졌었다. 곽봉조는 이 어려운 전환기요 침체기에 만주에서 목회를 다시 시작했던 것이다. 곽봉조는 그런 부정적인 환경을 이겨내며 전도에 심혈을 기울이고 교회를 성령에 사로잡힌 교회로 이끌어 갔다. 그러자 그 교회는 300명을 웃도는 큰 교회로 성장했다. 그 교회의 성장은 당시 그 지역 조선족의 높은 기독교 선호도를 고려할 때 놀라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1945년 해방 이전의 중국의 조선족은 어느 누구나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던 적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당시 조선족의 70%가 기독교 신자였다. 그렇지만 그렇게 상황이 좋은 곳에서도 모든 교회가 그만큼 성장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 교회의 성장에는 곽봉조의 영성이라는 큰 요인이 있었다.
곽봉조가 목회했던 교회는 현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주정부가 있는 길림(지린)성 연길(옌지)시 중심가(中国 吉林 延吉 参花街 1685 [参花街 邮政编码: 133001])에 세워진 연길교회(延吉基督教堂, Yanji Christian Church)다. 연길교회는 1911년 10월에 설립되었고, 첫 성도는 유기연이었고, 처음에는 10여 명이 이민자인 유 형제의 집에서 예배를 드렸고, 1911년 12월에 헌당예배를 드렸다. 연길교회의 1945년 8월 15일까지의 공식적인 명칭은 “조선족 예수교 장로회 국자가교회(局子街敎會)”였다. 국자가(局子街)는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중심도시인 연길(延吉, 옌지)에 실제로 있는 도로명이다. 1936년 서금선 목사가 시무하던 당시에 건축된 예배당 건물이 1994년까지 사용되었다.
곽봉조의 넷째 딸 곽선신에 따르면, 곽봉조는 길림성 연길에서 농부 목사가 되었다. 만주는 농사가 잘되는 곳이어서 먹을 것은 풍부했다. 그런데 벼농사를 밭에서 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논에서 농사하는 것보다 벼수확이 적었다. 곽봉조는 그곳 사람들에게 논을 만들고 농사를 짓는 법을 가르쳤다. 그러자 많은 벼를 수확하게 되었다. 곽봉조는 이렇게 만주에서 농부 목사가 되었다.
만주는 결코 평온한 곳이 아니었다. 1925년에서 1945년에 만주의 조선인들은 사회주의 영향으로 농민대중과 청년들이 조직화되고 의식화되었다. 1920년대 만주지역의 공산주의 운동은 오히려 한인들이 주도했다. 코민테른(국제 공산당)의 산하 조직인 코르뷰로(고려국)는 1923년 9월에 박윤서(朴允瑞), 주청송(朱靑松) 등을 길림성 연길현에 파견하여 고려공산청년동맹을 조직했다. 1926년 5월에는 국내 조선공산당이 흑룡강성 영고탑에 해외 지부로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건립했다. 반면 중국공산당은 1927년 10월에 요녕성 심양에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를 결성했다. 그리고 연이어 중국공산당 동변도특별위원회(동만특위)를 발족하고, 1928년 2월에 길림성 용정에 중국공산당 지부를 건립했다. 중국공산당 만주성위원회는 결성 초기부터 한인들을 고려한 토지 소유권 분배 및 조선공산당과 연대 강화를 주요 전술로 상정했다. 만주지역에서 조선공산당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컸던 데 대한 부담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1928년 12월 코민테른 제6차 대회에서 일국일당(一國一黨)의 원칙에 따라 조선공산당의 승인이 취소되었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중국공산당에 합류하여 중국혁명에 동참했다.
만주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를 박해했다. 1924년에서 1930년 사이에 만주의 공산주의자들은 만주의 조선인 3,872명을 살해하고, 재산 73,709원의 손해를 끼쳤는데 대상은 기독교인들이었다. 1932년 동만노회의 상황보고서에 따르면, 공산당 비적들이 훈춘의 수백 명의 신도가 모이는 투드거교회, 광포교회, 심리평교회를 방화하고, 성도의 가옥 30여 곳을 방화하고, 헐고, 4명의 교인을 피살하고, 십여 명을 납치했다. 그 기간동안 그들은 단 한 곳의 일본경찰서도 습격하지 않았다. 1924년에서 1930년까지가 조선인 공산주의의 최전성기였는데, 당시 일제가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자 만주로 대거 이동해서 기독교인을 습격하고 파괴를 일삼았다.
한편 거제도에서는 송우순과 네 딸(은신, 혜신, 영신, 정신, 큰딸 은신이 7살)이 남편과 아버지 없이 살아가야 했다. 어머니로서 어린 네 딸을 먹이고 키워야 하는 송우순의 고생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일제는 전쟁 군수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강제로 조선인들에게 할당량을 배당했다. 그 배당 물품을 바치고 남은 것만 먹을 수 있었다. 그래서 송우순은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미싱을 머리에 이고 다니며 품삯 바느질을 해가며 살았다. 더하여 “예수쟁이, 남편 빼돌린 조센징”이라는 경멸을 받아야 했다. 송우순은 그때 일을 회상할 때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다”라고 말하곤 했다.
곽 목사는 고국과 가족을 떠난지, 3년 후 거제도로 가족을 데리러 귀국했다. 그가 거제도에서 그의 아내와 딸 넷을 이끌고 멀리 기차를 타고 길림성으로 가다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던 하얼빈역에 도착했을 때 36세가 되는 1945년 8.15에 해방을 맞이했다. 곽봉조의 가족들이 한데 모여 정착하나 싶었으나 역사의 소용돌이는 공산주의 물결로 곽봉조를 안주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중국 공산당은 “종교는 아편이다”라고 떠들며 기독교 말살 정책을 펴고 지도자들을 잡아 죽이기 시작했다. 곽봉조도 표적이 되었다. 곽봉조는 마오쩌둥이 이끌던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八路軍)에게 붙잡혀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팔로군(bālù-jūn, 바루쥔)은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중국 공산당 휘하 독립적 성향을 가진 부대로 1937년 8월에 중국 국민혁명군 예하 제8로군으로 편성됐고, 제2차 국공합작시인 9월에 제18집단군으로 개편됐지만 팔로군이라고 계속 불리었다. 팔로군은 신사군과 함께 화베이 지방에서 항일전의 유격전을 담당했다. 사실 팔로군은 일본군에 제대로 반격 한번 해보지 못했다. 팔로군은 주로 관동군 점령지역의 후방 교란과 게릴라전을 담당했다. 1939년에 조선인 정율성은 “팔로군 행진곡”(현 중국인민해방군진행곡)을 작곡했다. 1940년 8월에는 화북에서 백단 대전이라고 하는 철도나 탄광에 대한 대규모 게릴라 공세를 실시했지만, 관동군은 이 팔로군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해 특수치안부대, 간도특설대를 미리 조직했고 팔로군 일부는 백단 대전에서 금세 소탕되었다. 그런데 일본의 패전 후, 국공 내전이 재개하면서 팔로군은 더욱 큰 힘을 발휘하게 된다. 만주의 할힌골 전투(러시아어: Бои на Халхин-Голе)에서 승리한 소련군은 일본 관동군의 장비를 접수했고 이것을 그대로 팔로군에게 주었다. 또 일본군의 군인이나 민간인을 팔로군에 가세하는 것으로 군사 기술이나 전문 기술을 얻을 수 있었다. 공군이 없었던 팔로군은 일본군의 항공 부대의 장교를 회유하여 항공대원을 양성했고, 포병 전술, 전략 측이 미비하여 기본적으로 체계화된 일본군의 포병 전략을 베이스로 삼았다. 또한 팔로군 내 조선인 간호사, 의사들 그리고 좌익 아나키스트 계열의 항일군이었던 조선의용대를 필두로 국공 내전의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미국에 항복하면서 중국 동북지역에 있었던 만주국 역시 소멸하게 되었으며 일본 관동군을 몰아낸 소련 정부와 홍군(紅軍)에 의한 군정이 실시되었다. 소련군은 ‘중·소우호동맹조약’ 체결과 함께 일제 패망 3개월 후 동북에서 철수하기로 약속했다. 이로 인해 당시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동북지역은 권력의 공백기를 맞이하면서 임자 없는 땅이 되고 말았다. 항일전쟁이 종결된 후 국·공 양당의 국공내전이 다시 시작되었으며 동북지역의 전략적 가치는 상당히 높았다. 공산당은 일제가 만주국 시절에 건설한 산업시설이 많아 부유한 동북지역을 점령하여 혁명의 근거지로 삼고자 하였으며 국민당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중국공산당은 제7차 당대표대회에서 선출된 1/4 이상의 중앙위원, 2만여 명의 간부, 10여만 명 규모의 부대를 동북지역에 파견했다. 국민당의 장개석은 “동북이 없으면 화북도 없고, 화북이 없으면 중국도 없다”라고 하면서 동북지역 점령에 대한 의지를 단호하게 표명했다. 1945년 9월 30일부터 국민당군은 美. 해군의 도움의 받아 진황도(秦皇島)에 상륙한 후 산해관(山海關)으로 진격함으로써 공산당은 국민당에게 산해관, 금주, 심양 등의 군사요충지를 내어주고 통화, 곽봉조가 목회하고 있던 연길, 밀산, 도남 등지에 근거지를 설립했다.
국민당은 국민당의 점령구역인 수복구(收復區) 내 조선인들을 한교(韓僑) 즉, 교민으로 보고 전부 송환한다는 기본방침을 수립했다. 반면, 공산당은 공산당의 점령구역인 해방구(解放區) 내 조선인들을 소수민족(조선족)으로 보고 이들을 흡수하여 공산당군의 주력으로 활용하려 했다. 중국 공산당은 1928년 7월 9일 열린 중국공산당 제6차 전국대표 대회에서 통과된 「민족문제에 관한 결의문」에서 조선민족을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인정했고 1930년 5월 반포한 「중국소베트 10대강령」에서도 이를 재확인하였으며 자원의 원칙하에 지역자치를 실시한다는 권리를 부여하기도 했다.
조선의용군 무정 사령은 “소수의 간부와 지휘관만 조선으로 향할 것이며, 대부분의 대원은 동북에 남아 민주정권을 건설하는 데 일조할 것이다.”라고 연설했다. 전군대회의 결의에 따라 무정 사령을 비롯한 70여 명의 간부들은 입북하여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하기로 했으며, 대부분의 조선의용군은 동북인민해방군[동북민주연합군] 소속으로 중공동북국(中共東北局)과 협력하여 동북지역의 민주정권 건설에 참여하기로 했다. 이에 조선의용군은 기존의 편제를 제1, 3, 5, 7지대로 개편했다. 제1지대는 심양과 통화 일대를, 제3지대는 하얼빈 일대를, 제5지대는 연변 일대를, 제7지대는 길림 일대를 주요 활동 무대로 삼았다.
동북지역으로의 진출 및 확장 과정에서 조선의용군의 성격은 ‘민족해방’보다는 중국 공산당의 동북지역 세력 공고화를 위해 조선 인민들을 통제하고 규합하는 중심세력으로 변화했다. 즉, 동북지역으로 진출 후 조선의용군은 동북지역 각지에서 중국공산당을 도와 중국 공산당 정권 건설에 참여하는 동시에 이를 보호하고 안정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이는 조선의용군 집단적 정체성의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동북지역으로 진출 전 조선의용군의 집단적 정체성은 부분적으로 “조선독립을 위한 무장단체”로 정의될 수도 있겠지만, 동북지역 진출 후에는 “중화인민공화국 건립을 위한 조선인 대표 단체”로 정의할 수 있다.
조선의용군을 앞세운 팔로군은 중국 동북지역에서 그들의 용어로 소위 “정치토비들”, 만주국 시기의 군대, 경찰, 헌병, 지주 등이 국민당의 위임을 받아 조직한 무장단체였으며, 패전하며 달아난 일제의 무기를 입수했던 무리들을 소탕하고 민주정권을 수립한다는 과정에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했다. 일본 관동군이 패주하고, 소련군이 만주에 진주하자 만주의 도시들은 화염에 휩싸였고, 잿더미로 변했다. 중국 공산당 팔로군이 만주를 비롯한 대륙 전역을 장악하자 연길 성의 기독교를 박해하기 시작했다. 심양은 1948년 팔로군이 들어오면서 “공산주의 세상”이 되었다. 그 전에 대부분의 목회자들과 교인들이 귀국했다. 12명 장로들과 재적 교인 800명을 넘었던 서탑교회 교인들 중에 종 치던 노인 하나만 남고 모두 귀국했고, 20여명만 남아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리고 천주교 수도원도 몰수되었다. 1945년 9월 2일에는 엔겔레만 첼네르 수사를 사살했다. 1946년 5월에는 유 셀바시오 신부가 살해당했다. 팔로군 길동 보안사령부는 쁘레헬(Brehel) 주교를 비롯해 독일인 신부 십구 명과 수사 십칠 명과 스위스 수녀 15명을 가두고 강제 노동을 시켰다. 이 과정에서 수감 되었던 본 이파시오 신부가 옥사했다. 1947년부터 한국 가톨릭교회의 공산주의에 대한 공세적 비판이 시작되었다. 공산주의와의 투쟁을 선언했고 이를 “가톨릭과 악마와의 전쟁”이라 명명했다. 『경향잡지』는 공산정권의 탄압을 낱낱이 고발했다. 팔로군들이 연길의 교회를 전멸시킨 사건을 비로소 알렸다.
곽봉조는 “죽음에서 건져주신 주님! 주님을 위해 죽음도 사양치 않겠습니다”라며 뜨거운 눈물로 주님께 기도했다. 한 장로님의 안내로 온 가족이 빠져나와 길림성에서 두만강을 건너고 삼팔선을 넘어 서울로 다시 거제도로 탈출했다. 몇 달 후 곽봉조와 그 가족을 탈출시킨 70세의 장로가 끝내, 공산주의자들에게 순교 당했다는 소식이 곽봉조에게 전해졌다. 하나님께서 그 장로를 통해 기도에 응답하셨고, 곽봉조는 극적으로 팔로군의 손길을 벗어났던 것이다.
VII.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목사와 순복음신학교 교수
36세의 곽봉조는 다시 1945년 겨울에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향 거제도로 갔다. 그런데 사선을 넘어 긴 여행길에 어린 네 딸 중 네 번째 딸 곽정신(4살)은 병을 얻고 결국 하늘나라로 갔다. 그 아이가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특별한 일들이 있었다. 먼저 송우순 사모에게 일어났다. 환상 중에 두 천사가 나타나 “어린아이에게 이 세상에서 너무 어려운 일들이 많아 데리러 왔다”고 말했다. 송우순은 어린아이들을 목욕을 시키고 임종을 준비했다. 그때 그 아이가 요구했다. “나 집에 가요. 만주에서 입었던 비단옷을 입혀주고 예배를 드려주세요.” 그래서 예배를 드렸는데 마지막 주기도문이 끝나고 숨을 거두었다. 딸만 넷을 두어서 아들을 바라던 곽봉조는 그 아이에게 관심을 덜 기울였다. 곽봉조는 딸을 묻으면서 하나님께 회개하는 마음으로 딸을 하나 더 주시면 잘 기르겠다고 서원기도를 했다. 하나님께서 그 기도에 응답하셔서 1947년 5월에 다섯 번째 딸(곽선신)을 주셨다. 기도의 응답인 줄 모르는 동네 사람들은 또 딸을 낳았다고 수군대었다. 다섯째 딸을 감사하니 그의 중심을 보신 1950년에 하나님께서 아들(곽은식)을 하나 더 주셨다.
거제도로 돌아온 곽봉조는 거제에 있는 교회들을 돌보았다. 30년사는 “그는 동시에 거제에 있는 한 교회를 도왔다”고 썼다. 김길홍은 거제도로 돌아온 곽봉조가 “이미 세워진 두 장로교회를 섬겼다”고 썼다. 그런데 사실 곽봉조는 그때 세 교회를 섬겼다. 한 교회는 거제면 오수리 569번지에 있는 “오수교회”였다. 오수교회의 연혁에는 1945년에 곽봉조 목사가 부임하여 시무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른 두 교회는 “거제교회”와 “유천교회”다. 옥포 1동 417번지의 거제교회는 현재의 “옥포교회”로서 1896년에 거제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다. 설립 당시 교회 주소는 거제군 국산리 50번지였고, 호주 선교사 아담슨(Andrew Adamson)에 의해 주금주씨, 부인 윤혜선씨, 아들 형찬 등이 설립 예배를 드렸다. 1920년도에는 강습소를 설립하여, 야학 청소년들에게 조선어와 성경, 찬송, 수신(체육), 미술, 연극 등 다양한 내용으로 교육하기에 이르렀고, 당시 수십명의 청소년들이 이 교육과정을 거쳤다. 옥포교회는 1945년 8월 17일에 해방 기념 예배를 오전 10시에 드렸는데 진병효 전도사 집례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1946년에 제4대 교역자 송상석 목사가 부임했다고 기록한다. 곽봉조는 해방 기념 예배와 송상석 부임 사이에 옥포교회를 돌본 것이다. 동부면 산양리 224번지에 있는 유천교회는 1945년 8월 15일 해방과 동시에 교회문을 열었고, 곽봉조 목사가 부임했으며, 거제교회와 오수교회를 겸무했다고 기록했다.
곽봉조는 1946년에 아래와 같은 기도를 드렸다.
아버지 하나님!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는 누구입니까?
저는 모세도 성 프란시스도 아닙니다.
나그네 길을 인도하시는 당신은 누구십니까?
광야길!
당신의 지팡이 끝 닿는 곳
나의 쉼터 되어 누우니
당신의 옷자락으로 날 덮으소서.
중국의 한쪽 날개 길림성
이곳이 영원한 생명의 샘터 되어
중국이 복음화되게 하소서
흩어진 조선의 디아스포라
작은 조선의 디아스포라
작은 민족 일어나 창대케 하시고
영원히 찬송과 영광 홀로 받으소서
여호와 라파(하나님은 치료하시는 분이다)
아멘
곽봉조는 교회들을 돌보는 한편, 한 초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했다. 앞서 언급된 것처럼, 당시에 둔덕면에는 두 개의 국민학교가 있었다. 그의 고향 마을 거림리, 즉 둔덕면 청마로 159에 둔덕국민학교가 해방 전 1932년 9월 20일에 개교되었다. 그리고 해방 후 숭덕국민학교가 1946년 11월 1일 거림리에서 2.5km 떨어진 둔덕면 녹산교회당에 2학급으로 개교되었다. 녹산교회당은 아마도 현재의 거제남서로 4715에 있는 거제녹산교회를 지칭하는 것일 것이다. 벧엘요양원을 겸하고 있는 녹산교회의 부지는 상당히 넓은 편이며, 교회당 건물도 단층이지만 폭에 비해 유난히 길이가 길며, 둘로 나누어진 듯하며 지어진지 꽤 오래된 듯하다. 그러나 현재 녹산교회의 담임목사인 장윤옥에 따르면, 현재의 녹산교회당의 상량식은 1977년 5월 31일에 있었으며, 1946년 당시 녹산교회는 현재 녹산2길 45번지에 있었다. 숭덕국민학교는 1947년 9월 1일에 설립인가를 받고, 1948년 6월 1일 현재의 녹산2길 30-1에 교실 4개를 신축하고 이전했다. 숭덕국민학교의 최초의 교정은 두 번째 교정에서 서쪽으로 길 하나 건너에 인접해 있었다. 8·15광복과 더불어 교육열에 불타는 학구민들은 먼 거리에 위치한 둔덕국민학교까지 통학의 어려움을 덜고자, 4개리 10개 자연마을의 중간지점인 녹산마을에 숭덕국민학교를 2개 학급으로 세웠던 것이다. 거제도 교육에 관한 자료에 따르면, 해방 4년 후, 1949년 1월 1일 40세 곽봉조는 두 학교 중에서 숭덕국민학교의 제1대 교장이 되었다. 숭덕국민학교 두 번째 교정은 숭덕초등학교가 2003년에 현재의 자리로 이전하면서 폐교되었으며, 현재는 유소년축구캠프 노블하우스로 사용되고 있다.
이즈음에 박성산이 광주와 순천에서 활동하고 있던 박귀임과 박헌근을 찾아가 오순절교회의 연합을 제안했다. 그 열매로 1950년 4월 9일에 순천오순절교회에서 제1회 대한기독교 오순절대회가 열렸다. 허홍, 윤성덕, 박성산, 김성환, 박헌근, 박귀임 등의 교역자를 비롯하여 약 이백여 명의 신자들이 모였다. 그런데 곽봉조는 그 대회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직 거제도에 있는 곽봉조의 존재가 박성산에게 포착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에 41세의 곽봉조는 한국 민족과 한국교회에 북한 공산군이 일으킨 비극의 1950년 6.25 전쟁을 겪게 되었다. 피난민들이 쏟아져 내려와 숭덕국민학교는 피난민 수용소가 되었다. 매일 같이 밀려들어 오는 피난민들 사이에서 곽봉조는 이리 뛰고 저리 뛰었다. 그의 집에서 키우던 모든 짐승들은 피난민들의 음식이 되었다. 곽선신은 “피난민들이 큰 운동장에 즐비하게 누워있는 모습”을 기억했다. 그의 언니들은 당시 사람들이 “북한[군]이 거제도까지 내려오면 이제 세상은 끝난 것이고, 예수님께서 이때 재림하실 것”이라고 진지하게 말했었다고 전했다. 곽봉조는 만일 공산군이 그곳까지 몰고 내려오면 순교하리라는 각오로 임했다.
그런데 곽봉조의 순교 각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곽봉조의 순교를 허락하지 않으셨다. 북한 공산군은 대한민국 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에 가로막혀 거제도에 발을 들여놓지 못했다. 1950년 8월에 접어들자 전선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서로 대치하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동부 전선에서는 포항 외곽에서, 중부 전선에서는 왜관 등지에서 혈전이 계속되었고, 서부 전선에서는 진동리로 침입한 적이 마산 · 진해 · 부산을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은 해병대의 맹렬한 공격에 의해 공격 기세가 꺾여 본래의 의도인 마산 · 진해 · 부산 등지로 직접 침입하는 것이 곤란해지자, 거의 무방비상태에 놓여있는 통영반도를 먼저 점령한 뒤 거제도를 점령하여 마산항과 진해만을 봉쇄하려 했다. 1950년 8월 16일 미명을 기하여 고성으로부터 통영으로 향한 북한군 제7사단 제51연대와 제104치안연대의 650명이 1950년 8월 17일 새벽 1시 통영 시내로 침입해 왔다.
이런 긴박한 상황이 발생하자 해병대 김성은 부대는 즉시 거제도에 상륙하여 통영으로부터 거제도에 침입하려는 적을 격멸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1950년 8월 17일 새벽 3시 김성은 부대는 해군함정 512호정과 평택호에 나누어 타고 통영반도 동북방 1㎞ 지점에 있는 지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상황을 살펴본 김성은 중령은 거제도에 상륙하여 거제도의 기다란 서해안을 방어하는 것보다 통영반도에 상륙하여 적을 섬멸하는 것이 작전상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통영 근해를 경비하던 7대의 해군함정들의 지원 엄호하에 8월 17일 18시 통영반도 동북방에 있는 방어가 허술했던 장평리에 20여대의 어선을 빌려 타고 상륙을 개시했다. 한편, 해군함정들은 공산군의 눈을 속이기 위해 협조된 계획에 따라 통영항 내에 접근하여 매일봉 · 남망산 및 부두에 포격을 가하기 시작했고, 해병대를 상륙시킨 512호정과 평택호도 남하하여 함포 사격에 가담했다. 상륙을 완료한 해병대는 밤을 새워 가며 맹렬한 공격작전을 감행하여 8월 18일 새벽 제2중대가 원문고개로 진격하여 방어진을 구축하고, 제7중대는 통영전투에서 승패의 관건이 되는 매일봉을 점령했다. 이에 당황한 공산군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으나 8월 18일 12시부터 해군함정의 지원 사격을 받으며, 8월 19일 10시까지 통영시내 소탕작전을 벌여 잔적을 완전히 소탕했다. 해병대의 적극적인 소탕작전에 전의를 상실한 적은 퇴로를 차단당하자 목선 3척을 이용하여 해상으로 도주하다가 해상을 경비하던 504 · 512호정에 의해 격침되었다. 통영상륙작전을 성공리에 완수한 해병대는 적의 유일한 공격로이며 통영 공격의 전술상 요지인 원문고개에 강력한 방어진을 구축하여 빈번히 습격해 오는 적의 대부대를 치열한 육박전을 감행하면서 격퇴시켰다. 이렇게 거제도에 상륙하여 부산을 공략하려던 공산군의 작전이 실패했다. 이 해병대의 통영상륙작전으로 인천상륙작전이 가능해지고, 보다 안전해지게 되었다. 곽봉조는 이 치열한 전투에서 발생하는 포 소리와 총소리를 들었을 것이고, 아마도 둔덕기성에서 내려다보며 해병대의 승리를 기도하기도 했을 것이다.
42살의 곽봉조는 1951년에 아래와 같은 기도를 드렸다.
하나님 아버지!
당신은 저를 사랑 하나이다.
저도 당신을 사랑하나이다.
만일 저를 순교자로 쓰시려면
모리아산의 이삭처럼 눈을 감싸오니
이 민족의 제물 되게 하소서
나라가 갈라지고 조국이 찢기었으니
차라리 생명록에서 제 이름 제할지라도
하나 되게 하소서
성령의 불길 일던 평양성이 마귀의 소굴 되었사오니
나의 왕 나의 주여
아말렉과 여리고를 치시던 강한 손 펴사
평양성 높이 들어 세계 복음화의 횃불되게 하소서
여호와 닛시!(하나님은 승리자이시다!)
아멘
박헌근이 1950년 9월 27일에 순교하고, 공산군이 순천지역을 떠나자 박귀임이 순천오순절교회를 다시 돌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박귀임이 광주 볼로동 순복음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떠났다. 1952년 3월 25일에 숭덕국민학교 제1회 졸업생 47명이 배출된 직후 43세의 곽봉조는 순천오순절교회(현 순복음오순절교회)에 제2대 담임교역자로 부임했다. 아마도 박귀임이 자신의 신앙의 대부라 할 수 있는 곽봉조를 그 교회로 초청했을 것이다. 곽봉조는 열과 성의를 다하여 교회 부흥에 힘썼다.
부임 2개월 후인 1952년 5월 4일에 순천에서 제2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대회가 열렸다. 이때 박성산이 사회를 보았고, 성회인도는 순천오순절교회의 담임목사였던 곽봉조가 맡았다. 박성산, 허홍, 배부근 목사가 새로운 교단 창립을 준비하며 오순절 동지들을 규합하던 중 오순절 신앙전교의 주역이 될 또 하나의 인물이 있음을 알고 박성산 목사가 곽봉조 목사를 찾아옴으로써 곽봉조가 그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1953년 4월 8일 오전 10시에 44세의 곽봉조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창립 회의에 참석했다. 그럼으로써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소속 목사가 되었다. 다음 날 곽봉조는 총회의 기획위원이 되었다. 이날 회의에서 그는 주일학교교사들의 향상을 위한 길을 모색하자는 안을 내었다. 1953년 10월 7일에 광주하나님의성회에서 개최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제2회 회의에서는 소속 교회들의 교세가 보고되었다. 이때 순천오순절교회의 시무목사는 곽봉조였고, 수세자(受洗者)는 10명, 미세례자(未洗禮者) 40명, 수성신자(受聖信者) 40명, 주교생(主校生) 130명이었다. 그리고 그 회의록에 의하면, 곽봉조는 남원교회(南原敎會)를 개척했으며, 당시 교인은 60여 명이었다.
1953년 5월에 남부교회를 기반으로 문을 열었던 순복음신학교가 3개월 후인 8월 1일 교사를 교통편이 더 좋은 서대문구 충정로 1가 21번지 박성산 목사가 개척한 서부교회 내로 옮겨졌다. 곽봉조는 순복음신학교의 교수와 교수선임문제를 담당했다. 곽봉조는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중심으로 한 오순절신앙에 대해서만은 누구에게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오순절적인 성구 및 신학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어느 누구에게도 오순절 진리를 변증할 수 있도록 했다. 요한계시록과 로마서 또 교리문제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가 이단시 취급받고 있는 점을 감안하여 교리문제를 다루기 위해 조직신학도 강의했다. 곽봉조를 거쳐 1955년에 이태구, 강정호, 조동천, 문재호, 최요열, 정봉희, 함상군, 7인의 순복음신학교 제1회 졸업생, 1956년에 강대연, 김기병, 김옥호, 김유정, 동봉금, 마명숙, 박조수, 박광수, 박종수, 박정근, 송준섭, 이안식, 우옥암, 정두영, 조숙자, 한정희, 허순회, 18인의 2회 졸업생이 배출되었다.
VIII. 극동사도선교회, 한국예수교오순절교회, 중도성서신학교 설립
1953년 10월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제4회 성회가 광주에서 열렸다. 그 성회의 말미에서 물침례식이 계획되었었다. 참석자들의 거의 반인 250여명 정도가 물침례를 받기를 원했다. 한국인 목회자들은 총리 체스넛(Arthur B. Chestnut)에게 그 침례식을 주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때까지 물침례를 받지 않았었는지 의아해했다. 그래서 이유를 찾았던 그는 두 가지를 발견했다. 하나는 허홍이 육체적으로 물침례를 주관하기에는 너무도 약했다는 것이었다. 1952년 5월에 허홍이 개척했던 남부교회에서 정작 허홍은 육체적으로 매우 허약해서 혼자 사역을 할 수 없었고 물침례식도 주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6개월 후, 체스넛이 몇 사람에게 침례를 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한국인 지도자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존 주르겐센의 제자들과 레오나르드 쿠드의 제자들이라는 두 흐름의 한국 오순절 지도자들이 1950년에 연합한 이후로 그들은 방식에 대한 서로 다른 입장 때문에 물침례식을 연기했던 것이다. 그래서 체스넛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는 삼위일체적 침례 방식을 그 지도자들에게 설명했다. 그때 곽봉조가 체스넛의 설명에 이의를 제기하고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곽봉조는 물침례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행해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체스넛은 총리로서 곽봉조에게 권고하려 했지만, 곽봉조는 거절했다.
그런데 사실 이 침례 방식의 다름이 문제가 되기 시작한 때는 1953년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가 결성된 후가 아니었다. 그 문제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가 결성되기 이전인 1952년 봄에 이미 미국 선교사도 대면했던 것이었다. 종군목사 엘로드(John R. Elrod)의 노력으로 미국 하나님의 성회 동양 선교부장 오스굳(Howard Coit Osgood)이 1952년 3월경에 상황을 살피기 위해 내한했다. 그는 박성산, 배부근, 허홍뿐만 아니라 곽봉조, 윤성덕도 만났다. 이때 오스굳은 물침례를 예수 이름으로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한국인 목사와 대면해야 했다. 그 한국인 목사는 바로 윤성덕이었다. 오스굳은 윤성덕에게 물침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야 한다고 말했지만, 윤성덕은 오스굳의 견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했다. 윤성덕을 설득하는 데 실패한 오스굳은 한국을 떠나 일본을 거쳐 홍콩에서 허홍에게 편지를 썼다. 오스굳은 미국하나님의성회에 시급한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알렸다고, 그리고 체스넛 선교사가 한국에 관심이 있다고 전했다. 그다음, 오스굳은 윤성덕의 물침례 방식을 거론했다. 오스굳은 여전히 윤성덕이 잘못된 물침례 방식을 수정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저는 여러분이 윤성덕 형제와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갖기를 바랍니다. 그가 물침례에 대한 그의 교리를 고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그리고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물침례를 베푸는 것이 바른 방식인 것을 보여주십시오.
46세의 곽봉조는 1955년 2월에 순천오순절교회의 제2대 담임교역자직을 사임했다. 그리고 순복음신학교 교수 사역에 전념하기 시작했다. 그가 로마서를 가르치고 있을 때 물침례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 그는 로마서 6장에 근거하여 침례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삼위일체론적으로 집행하려는 견해를 비난했다. 그의 그런 견해는 배부근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그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그 신학교를 관리하며 체스넛과 함께 사역하고 있을 때, 한 목사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침례를 주는 것은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유로 나와 함께 일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두 흐름 사이가 갈라졌다.
곽봉조가 언급했던 “한 목사”는 바로 배부근을 지칭한 것이었다. 배부근은 순복음신학교 교수로서 곽봉조의 물침례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배부근은 삼위일체에 대한 기독교 정통 신학과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신학을 지키기 위해 곽봉조의 물침례 방식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배부근은 곽봉조가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예수 이름으로 주는 물침례 방식을 택하는 것으로 보아 곽봉조가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의 또 다른 주장, 인격(또는 위) 하나에 세 가지 양태라는 비정통적 삼위일체론을 택했을 것이라고 짐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곽봉조는 그의 스승 레오나르드 쿠트가 그랬던 것처럼 단일성 오순절주의의 예수 이름으로 주는 물침례 방식만 받아들였을 뿐, 양태론적이고 비정통적 신론을 받아들이지는 않고, 비교적 정통 삼위일체론을 견지했다.
곽봉조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는데(마 28:19), 제자들은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행 2:38, 8:16, 10:48, 19:5). 그리고 구약에서는 “하나님 또는 여호와”라는 명칭이 삼위 하나님(세 위격들)을 지칭했던 것처럼, 그와 동일하게 신약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칭이 삼위 하나님(세 위격들)을 지칭했다. 주는 성부 하나님과 관계가 있고, 예수는 예수 인격이며, 그리스도는 성령과 관계가 있다. 결과적으로 곽봉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것은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이다.” 김익진처럼 곽봉조가 문제가 되는 물침례 형식을 제외하고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버리지는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73년에 마일스 선교사와 함께 서대문순복음교회를 설립했으며 곽봉조의 사위이며, 1968년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경상지방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1982년에서 1983년까지 제20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총회장을 역임했던 소교민은 위와 같이 곽봉조에게 배운 것을 상기하며 곽봉조가 삼위일체론을 믿었다고 주장했다.
곽봉조가 정통 삼위일체론을 배격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설립에 동참했던 1953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당시 신조 제2항이 증명해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1953년 10월 7일에 광주 하나님의성회에서 개최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제2회 회의에서는 교회헌장 및 총칙이 회원들에게 배포되었다. 그 신조 2항은 “우리는 삼위(성부, 성자, 성신)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라고 고백한다. 곽봉조가 이 제2항에 동의했기 때문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 신조에는 물침례에 대한 항목이 없다는 것이다. 1916년에 미국 하나님의성회가 채택했던 근본진리진술문의 제11조는 물침례(Baptism in Water)에 대한 항목이었다. 아마도 박성산과 곽봉조가 합의하여 연합에 방해가 될 소지가 있는 이 항목을 누락시켰을 것이다.
곽봉조는 구약의 야웨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고 믿었다. 왜냐하면 두 명칭은 둘 다 삼위일체적 하나님을 드러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의 이름이다”라고 썼다. 그는 삼위일체적 하나님이 예수(안에서)를 통해 계시되었다고 말하는 대신 이 공식을 선호했다.38
곽봉조는 그의 스승 쿠트가 그랬던 것처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정통 삼위일체론을 견지하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신학과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고 비정통적 삼위일체론을 견지하는 연합 오순절교회의 신학의 중간 길, 중도를 택한 것이다. 배부근이 곽봉조가 주장한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것은 하나님의 성회의 신학에 기반을 둔 수긍될 수 있는 정당한 행위였다. 현실적으로 물침례 방식이 서로 다른 두 흐름이 한 교단 안에서 계속 공존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배부근이 곽봉조가 하나님의성회의 정통 삼위일체론을 채택하지 않는다고 판단한 것은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체스넛은 휴식을 위해 1955년 5월에 한국을 떠났다. 체스넛에 이어 1955년에 순복음신학교 2대 교장이 된 스테츠(John Stetz)는 배부근을 사직시키려 했지만 허홍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배부근이 사직하지 않게 했다. 스텟츠는 또한 곽봉조에게는 물침례에 관한 단일성 오순절주의의 견해를 버리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곽봉조는 그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1955년 말에 조용히 학교를 떠났다. 이 소용돌이 속에서 박성산이 1956년 3월 20일에 48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박성산의 여동생 박정숙에 따르면, 그는 특별한 병에 걸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침상에 누워있다가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곁에는 몇 명의 시골 교역자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김익진은 그의 죽음의 원인이 교단의 그런 좋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순복음신학교는 1956년 3월 22일경 제2회 졸업식을 갖고 학생들과 교원들이 기념촬영을 했는데, 그 사진에는 배부근은 있으나 박성산과 곽봉조가 없다. 곽봉조는 1955년 말경에 순복음신학교를 떠났고, 박성산은 1956년 3월 20일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박성산이 소천한 직후 일어난 1956년 봄의 순복음신학교 학생 맹휴사건은 교단분열의 전주곡이었다. 그리고 박성산 목사에 의해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와 연결되었던 곽봉조, 윤성덕 등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은 교단에서 점차 멀어졌다.
순복음신학교를 떠난 곽봉조는 1956년에서 1957년 사이에 전라남도 함평으로 갔다. 그리고 한 교회를 개척했다. 곽봉조는 1944년부터 미국 텍사스에 국제 성경 대학(the International Bible College)을 세우고 운영하고 있던, 그리고 1950년에 일본으로 돌아와 활동하고 있던 그의 스승 레오나르드 W. 쿠트를 한국으로 초청했다. 쿠트는 잠시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간 후 몇 명의 선교사들을 보냈다. 49세의 곽봉조는 1958년 5월 1일에 쿠트와 함께 대전시 동쪽 끝자락 가양동 산28번지에 “중도성서신학교”(中都聖書神學校)를 세웠다. 쿠트와 곽봉조의 오랜 꿈이 20여 년 만에 현실이 된 것이다. 중도성서신학교라는 이름은 대전이라는 대한민국의 중간지역에 세워진 신학교라는 의미를 갖고 있었다. 쿠트에게는 지역적으로 중간이라는 것이 중요했던 것 같다. 그는 일제시대에는 조선의 중간지역인 경성의 영등포에 선교센터를 만들려고 땅을 매입했었다. 그러나 해방 후 남북이 갈라진 후에는 남한의 중간지역인 대전에 중간지역이란 뜻을 갖는 명칭의 신학교를 세웠다.
당시의 가양동 산28번지는 현재 번지로는 가양동 159-9 인근이며, 도로명으로는 대전 동구 충정로90번길 34 인근이다. 당시 가양동 산28의 중도성서신학교는 현재 구세군 대전중앙교회도 포함하는 상당히 넓은 부지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학교부지는 과수원이었고, 그 주변은 개발이 덜 된 야산 지역이었다. 현재 남은 부지에는 가양제일교회가 있다. 당시 학교부지에는 선교사 사택, 곽봉조 사택, 사찰 관사, 남학생 기숙사, 여학생 기숙사, 채플, 연구실 2개, 강의동, 축구와 배구를 할 수 있는 운동장 등이 들어섰다. 온 가족이 대전으로 이사했다. 그리고 쿠트와 곽봉조는 1958년 5월 10일 유지재단 “극동사도선교회”를 창립했다.
곽봉조는 중도성서신학교에서 주로 성경과목을 담당했다. 중도성서신학교 제3회 졸업생이며 대전 가양제일교회 원로목사가 된 고창훈은 곽봉조가 강의했던 사도행전 시간을 특별하게 기억했다. 고창훈에 따르면, 곽봉조는 목회는 인력이 아닌 성령에 의존하여 성령충만 받아야 할 수 있는 것임을 실감있게 강의했다. 제6회 졸업생이며 대전 은실교회 원로목사가 된 홍태희는 곽봉조가 함평에서 교회를 개척할 때 근처 교회의 교인이었다. 그때 송우순 사모가 그를 잘 대해 주었다. 홍태희가 대전으로 가 중도성서신학교에 입학했을 때, 송우순 사모가 그곳에 있었다. 당시 학교에서는 성령을 못 받으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지 못하면, 마치 죄인과 같았다고 회고했다. 그래서 그는 무려 세 번이나 짐을 싸서 학교를 떠나려 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에 1964년 2월 21일 새벽기도 시간에 방언을 말하며 성령을 체험했다. 그러자 성경에 눈이 떠졌고, 사명감에 불타게 되었다. 홍태희가 기억하는 곽봉조는 영성과 지성이 뛰어났고, 더하여 부지런하고 성실했다. 순복음신학교 1회 졸업생이었던 최요열은 1961년부터 중도성서신학교 전임강사로 4년을 사역하기도 했다.
곽봉조는 53세가 되는 1962년에 아래와 같이 기도드렸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의 몸 된 한국교회가
조직화되고 제도화 되어
교회단 중심화, 성공 중심화 되어
인본주의로 흘러가고 있사오니
말씀 중심, 성령 중심으로 흐르게 하소서.
이 땅을 적신 순교자들의 피가 얼룩져 있는데
사치화, 권력과, 황금화, 인기화 되어 가오니
선지자들의 피와 사도 바울의 전승으로 이어져
세계화의 물결 타게 하소서
주님! 저의 남은 생애는 그길로 가게 하사
믿음의 후진들에게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
제가 선 땅과 이 우주가 아름답습니다.
별은 빛나고 달은 아름답고 해는 찬란합니다.
나무는 무성하고 풀은 꽃을 피우며
새들은 노래하며 둥지 틀고
짐승들은 새끼를 낳습니다.
바다의 물고기들은 꼬리를 가르고
강물은 춤을 춥니다.
이 아름다운 세계에서
제가 숨 쉬고 살도록 하신 주 여호와여!
영원 무궁히 존귀와 찬송 받으소서.
여호와 이레(하나님이 여기까지 인도하셨다)
아멘
쿠트는 1963년에 교단인 대한예수교오순절교회(Korea Pentecostal Church)를 설립했다. 1958년 쿠트가 내한, 극동사도선교회(Far East Apostolic Mission), 중도성서신학교와 대전제일교회를 설립함으로써 기반이 놓였다. 그리고 그 위에 산하 중부노회와 호남노회로 구성된 대한예수교오순절교회가 설립되었다. 쿠트는 1958년 내한 이후 1년에 한 차례씩 내한하여 중도성서신학교에서 강의하곤 했다. 쿠트가 일본어로 설교와 강의를 하면, 곽봉조가 한국어로 통역하곤 했다. 재단법인 극동사도선교회는 유지재단설립 허가신청서를 1965년 8월 18일에 문화공보부 종무국 종무1과에 제출했다.
56세 곽봉조는 1965년 11월 5일에 남원중앙교회에 제8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59세가 되는 1967년 2월 25일에 퇴임했다. 남원중앙교회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소속 교회로서 1953년 10월 3일에 박성산이 설립예배를 주관했다. 그리고 곽봉조가 부임하기 7개월 전인 1965년 4월 5일부터 제3차 건축을 시작했는데, 그때 스테츠 선교사가 지원했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를 탈퇴했던 곽봉조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소속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한 것이었다.
곽봉조는 시골에 대한 향수가 남달리 컸다. 그는 아모스의 자기 고백을 자주 인용했다. 아모스는 태평성대한 이스라엘, 국토는 번창하고 사업은 잘되고 흥왕한 데 내적으로는 위선과 부정과 탐욕이 가득하여 하나님을 멀리하고 타락으로 돌아가자 기근, 한해, 죽음, 질병, 파괴, 그 어떤 일로도 돌아서지 않을 이스라엘에게 준엄하게 예언으로 경고한 선지자였다. 아모스는 자기 백성을 썩은 과일을 담은 광주리 같이 느끼고 있었다. 곽봉조는 시골 여러 곳, 순천, 남원, 함평 등지에서 목회하면서 아모스처럼 밭농사 논농사를 지으며 사역했다. 물론 가족들도 농사꾼으로 살았으며, 늘 경제적으로 어렵게 생활했다. 특별히 두 딸은 농사일을 돕느라 학교 진학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쿠트의 한국 선교의 흔적은 아직도 남아있다. 예를 들면 대전광역시 동구 중앙로203번길 88-1에 세워진 건물은 영국인 쿠트(Leonard W. Coote)와 곽봉조에 의해 1966년 5월에 건립되었고, 1992년까지 대전정동교회로 사용되었다(현재는 전시관). 건립 당시에는 교회가 아닌 오순절 구령회관(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전도하는 건물)으로 불리었고, 이 건물이 완공되기 4년 전 하늘나라로 간 쿠트 선교사의 부인 에스더 쿠트(Mrs. Esther Coote)를 기리는 “쿠트부인 기념관”으로 봉헌되었고, 건물 출입문 우측 머릿돌에 그 문구가 새겨져 있다. 보다 더 구체적으로 그 머릿돌에 새겨진 문구는 아래와 같다.
TAEJON PENTECOSTAL TABERNACLE ERECTED MAY 1966 IN MEMORY MRS ESTHER COOTE 대전 오순절 구령회관 크-트 부인 기렴관 1966. 5. 건립
홍태희는 1969년 12월 2일에 이 구령회관에서 곽봉조의 주례로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구령회관”(救靈會館)은 일본 오사카에도 세워졌다. 태평양전쟁 후 일본에 돌아온 레오나르도 W. 쿠트는 1952년 大阪府 大阪市 西成区 太子 1丁目 1−14에 大阪救霊会館(Osaka Evangelistic Tabernacle)를 설립했다. 오사카의 구령회관은 대전의 구령회관과 외관에서 다르다. 대전 구령회관은 전형적인 교회건물 모양이지만, 오사카의 구령회관은 현대적인 일반건물 모양이다. 그리고 오사카 구령회관의 영어명에는 “복음적”(Evangelical)이라는 보편적인 단어가 사용되었다. 그런데 대전 구령회관의 영어명에는 “오순절적”(Pentecostal)이라는 원색적이고 근본적인 단어가 사용되었다. 아마도 이런 원색적인 용어 채택에는 곽봉조의 “오순절”이란 말 선호와 의지가 작용했을 것이다. 오사카 구령회관 내부 벽기둥에는 쿠트 부부의 사진이 걸려있다. 쿠트는 “불가능은 도전이 된다”(Impossibilities become challenges, 不可能は 挑戦と なる)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강물이 흐르는 곳에는 물고기가 산다”(Swarms of living creatures will live wherever the river flows, この川が入る所では、すべてのものが生きる)는 말도 남겼다.
오사카구령회관은 지금도 오순절교회로 사용되고 있다. 교회 이름은 大阪救霊会館이며, 현재의 담임 목사는 이코 사케(榮 一仰, Ikko Sakae)다. 이코 사케는 1928년 쿠슈, 카고시마에 있는 작은 섬 토쿠노시마(鹿児島 県徳之島)에서 출생했다. 그는 노동자로 오사카에서 생활하던 청년 때 술에 취해 걷고 있었다. 그때, 곽봉조가 그랬던 것처럼, 노방전도대에 의해 오사카구령회관으로 인도되어 구원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이코마성서학원을 졸업하고 오사카구령회관의 목회자가 되었다. 이코 사케 목사는 일본펜테코스테교단(日本ペンテコステ教団) 소속이다.
일본펜테코스테교단은 태평양전쟁 후 1950년에 일본으로 돌아온 쿠트에 의해 설립되었다. 전쟁 발발로 일본을 떠난 쿠트는 호주를 거쳐 먼저 미국 텍사스, 샌 안토니오(San Antonio)에 가 있던 가족들과 합류했다. 쿠트는 딸 루스(Ruth)가 결핵에 걸리자 치료를 위해 부인과 딸을 그곳으로 보냈었다. 그런데 루스는 샌 안토니오로 가던 중 캘리포니아에 있는 한 작은 흑인 교회에서 이적적으로 고침을 받았다. 쿠트는 1941년 샌 안토니오의 the Tobin Center for the Arts를 사용하여 “임마누엘 복음 회관”(Emmanuel Gospel Tabernacle)을 세웠다. 1952에 Revival Temple로 교회명을 변경하고 Texas Avenue에 교회당을 지었으며, 1978에 Christ is King Church로 교회명을 변경하고 현 위치인 8635 Callaghan Road으로 이전했다. 그리고 쿠트는 1944년 2369 Benrus Blvd, San Antonio에 국제 성경 대학(the International Bible College)을 세웠다.
1948년경에 전혀 알지 못하는 한 부인이 쿠트가 일본으로 갈 수 있는 항공료와 비용을 충당할 수 있는 2,000달러를 기부했다. 쿠트는 전쟁 후 지금이 일본 선교에 가장 적합한 시기라고 보았다. 쿠트는 패전 후 일본인들의 마음은 우상과 자기 확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찾을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쿠트는 맥아더가 일본인들이 빼앗았던 선교사들의 일본 내 재산들을 남김없이 다 되돌려 주라고 명령함으로써 일본 선교의 재개를 용이하게 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 선교의 재개는 일본을 중심으로 한 다른 아시아 국가들의 선교를 수행할 수 있는 바탕이 될 것으로 보았다. 쿠트는 1948년에 일본으로 돌아왔고, 국제성경대학은 그의 일본 선교를 적극 후원했다. 그리고 초기 졸업생들 중에 상당수가 선교사가 되어 쿠트와 동역했다. 쿠트는 이런 후원과 동역에 힘입어 이코마성서학원을 다시 열었고, 일본펜테코스테교단을 설립했으며, 오사카구령회관을 건립했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 후 일본에 들어와 쿠트와 동역했던 선교사들은 먼저 다시 열린 이코마성서학원에서 일 년간 언어 공부를 했다. 쿠트와 그렇게 훈련된 선교사들은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 선교에도 박차를 가했다. 그 선교사들 가운데는 아이오아, 폴크(Des Moines, Polk County, Iowa) 출신의 데이비드 머윈(David R. Merwin, 1932-1995)이 있었다. 그는 쿠트가 세운 국제성경대학(the International Bible College)을 졸업했으며, 1961년부터 1980년까지 한국의 극동사도선교회와 대한예수교오순절교회에서 활동하는 동안 1971년부터 1972년 까지 대한예수교오순절교회의 총회장, 1965년에 1978년까지 극동사도선교회 이사장직을 수행했다. 머윈은 대전에 있던 한 고아원에 있던 혼열소녀 스테파니를 딸로 입양하기도 했다.
곽봉조가 진성 단일성 오순절을 표방하는 한국연합오순절교회와 관계를 맺었다는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한국연합오순절교회는 1965년에 엘톤 버나드(Elton D. Bernard, 1930-2017) 선교사 가족에서 비롯된다. 그는 6.25 전쟁에 군인으로 참전했으나 단일성 오순절 교단 가운데 가장 큰 미국 국제연합오순절교회(United Pentecostal Church International, UPCI) 소속 선교사로 다시 한국에 왔다. 그리고 1985년 6월에 떠났다. 버나드는 1967년 8월 5일 문화공보부 종무실 종무행정과에 재단법인 한국연합오순절교 설립허가신청서를 제출했다. 1968년에 본부 교회 건물이 세워지고 1969년 2월 25일에 문화체육부에 “재단법인 한국 연합 오순절교회”로 등록하였다. 1969년 10월 제3회 총회에서는 미국연합오순절교회의 헌법을 기본으로 하여 한국 실정에 맞게 수정하는 작업을 하였고, 교역자 양성을 위하여 서대문제일교회 안에 연합오순절신학교를 개교하고 단기과정을 운영하였다. 1978년 9월 교단본부와 신학교를 경기도 광명시로 이전했다.
국제연합오순절교회는 “은혜의 2차 사역(second work of grace)”과 삼위일체의 역사적인 교리와 전통적인 삼위일체식 침례 식문을 제외한 성결 운동과 오순절 운동(Holiness-Pentecostal movement)의 신학을 공유한다. 그리고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 받은 최초의 표적이라는 오순절적인 관점을 지지한다. “은혜의 2차 사역”을 제외한다는 것은 찰스 파함과 윌리엄 시무어가 중생이라는 은혜의 첫 사역 이후 온전한 성화라는 2차 사역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을 거부하고 더함이 중생과 더불어 온전한 성화를 얻는다고 주장한 것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중생과 온전한 성화와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가 동시에 일어난다고 본다는 의미이다. 국제연합오순절교회는 삼위일체의 역사적 교리를 거부한다.
국제연합오순절교회의 단일성 오순절주의는 물침례와 성령침례를 구원론에 포함시키고 구원의 서정의 첫 단계에 두고 말았다.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은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물침례를 받을 때 동시에 방언을 말하는 증거를 동반하며 성령침례를 받는다고 믿는다. 그들은 이 세 과정은 동시에 일어나며 온전한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며 흘리신 보혈이 회개와 물침례 뿐만 아니라, 성령침례를 가능하고 효력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구원론에 따르면, 방언을 말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되어 버린다. 단일성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께 집중하여 더함이 온전한 성화를 앞으로 당겨 중생과 일치시킨 것에서 더 나아가 성령침례마저 앞으로 당겨 중생과 단일화시켰다. 한국연합오순절교회도 역시 물침례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주며, 물침례와 동시에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아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께서 성육신 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으며, 예수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되고, 부활하심을 따라(롬6:3-5) 우리도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침례 받고 방언 표적으로 성령을 받아 구원에 이르며(행2:38)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연합오순절교회의 단일성 오순절주의는 물침례를 “예수”라는 이름으로 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선을 넘어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혹은 위격)은 하나(one person)인데, “그 인격은 예수”라는 이단적 설을 주장한다. 한국연합오순절교회도 그런 설을 따라 삼위일체적 신관을 거부한다. “연합오순절교인”은 신성에는 오직 하나의 개체만 있을 뿐이라고 믿으며, 이 사실은 골로새서 2장 9절의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라는 말씀에 근거를 둔다. 아버지 하나님(제 1위)이 아들 하나님(제 2위)을 세상에 보내사 세상 죄를 위하여 죽게 했다는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대하여 “연합오순절교인”이 믿고 증거하는 것은 “참 한 하나님, 구약의 여호와께서 스스로 사람의 형상을 입고 사람인 아들로서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났다”는 것이다.
삼위일체 오순절주의와 단일성 오순절주의를 요점들을 비교하면 다음 표와 같다.
삼위일체주의(Trinitarianism) | 단일성주의(Oneness) | |
1 | 한 분 하나님 안에는 세 인격(또는 위격들)들이 있다 | 한 분 하나님은 본성에 있어서 본질적으로 아무런 구분도 없다. 그분은 인격(위격)들이라는 다양함이 아니다. 다만 그분은 나타남들, 역할들, 명칭들, 속성들, 또는 사람과의 관계성들을 갖는다. 더욱이, 이것들은 세 가지에 제한되지 않는다. |
2 |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신성 안의 세 인격(위격)들이다. 구별된 인격들로서 동등하시고, 동등하게 영원하시고, 동등한 본질이시다. 그렇지만, 성부 하나님은 어떤 의미에서 삼위일체의 근원이시고, 성부와 성자는 어떤 의미에서 그분으로부터 나오신다. |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은 한 분 하나님에 대한 다른 호칭들이다. 성자는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다. 성자라는 말은 언제나 성육신과 관련되며 인성을 떠나서는 신을 지시하지 않는다. |
3 | 예수 그리스도는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다. 예수는 성부나 성자가 아니다. |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자이다. 그분은 하나님의 충만하심의 성육신이다. 신성에 있어서 예수는 성부와 성령의 나타남이다. |
4 | 성자는 영원하다. 성자 하나님은 영원전부터 존재해 오셨다. 성자는 성부에 의해 영원히 낳아지신다. | 성자는 낳아지지, 영원하지는 않다. 하나님의 아들은 영원 전부터 존재하셨지만, 오직 하나님의 마음 안의 한 계획으로서만 존재하셨다. 하나님의 아들은 성육신에서 실제로 존재하게 되었다. 성육신 때 성자는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잉태(탄생)되었다. |
5 | 요한1서의 말씀(로고스)은 신성 안의 두 번째 인격, 즉 성자 하나님이다. | 요한1서의 말씀(로고스)은 하나의 구별된 인격이 아니고, 하나님의 마음, 생각, 계획, 행위, 또는 표현이다.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육체로 표현되었다. |
6 | 예수는 육체로 나타나신 성자 하나님께 주어진 인간 이름이다. | 예수(여호와-구원자라는 의미를 갖는)는 신약에서 하나님의 계시된 이름이다. 예수는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의 이름이다. |
7 | 물침례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라고 말함으로써 올바르게 수행된다. | 물침례는 “예수 이름으로”라고 말함으로써 올바르게 수행된다. 예수 이름은 보통 주, 그리스도, 또는 둘 모두의 명칭들이 동반된다. (쿠트와 곽봉조 동의) |
8 | 우리는 천국에서 삼위일체 또는 삼위 일체 하나님을 뵐 것이다. | 우리는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뵐 것이다. 그는 보좌에 앉으신 유일한 분이고, 우리가 영원히 볼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이다. |
David K. Bernard, Pentecostal Theology: the Oneness of God Vol. 1 (Hazelwood, MO; Word Aflame Press, 1983), 294-296.
곽봉조는 한국연합오순절교회와 관계를 맺지 않고 59세가 되는 1968년 2월에 당시 대한기독교오순절회 소속 순천오순절교회(당시 남내동 65번지) 제7대 담임교역자로 부임했다. 그리고 1970년 2월에 퇴임했다. 허홍이 이끌던 교단 소속 교회에 곽봉조가 부임한 것이다. 30년사는 1969년 기유년(己酉年)에 곽봉조의 환갑축하예배 기념사진을 실었다. 그 축하예배는 아마도 순천오순절교회에서 드려졌을 것이다. 그 사진에는 곽봉조의 호가 등장하는 데, 그의 호는 “혜원”이었다. 다른 자료에 의하면, 곽봉조는 동일한 기간인 1968년에서 1971년까지 윤성덕, 김성환에 이어 대한예수교오순절교회의 제3대 총회장이었다. 대전에서 순천으로 왕복하며 교단을 초월하여 총회장직과 목회직을 겸임했던 것이다. 그리고 곽봉조는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대한예수교오순절교회의 제6대 총회장이었다.
셋째 / 은혜측교단
1958년 미국 선교사 레오날드 쿠드씨가 유지재단 극동사도선교회 재단법인을 인가 받아 당년 5월 10일에 중도성서신학교를 개교하였으며 1963년 중도성서신학교출신 및 외부목사를 영입하여 총회를 결성하다. 산하 중부노회와 호남노회로 창립이 되다.
역대 총회장
제1대 1963년 - 1965년 윤성덕 목사
제2대 1965년 - 1968년 김성환 목사
제3대 1968년 - 1971년 곽봉조 목사
제4대 1971년 - 1972년 마위인[데이비드 머윈] 목사
제5대 1972년 - 1974년 윤성덕 목사
제6대 1974년 - 1976년 곽봉조 목사
제7대 1976년 - 1977년 주풍식 목사
제8대 1977년 - 1979년 최철종 목사
제9대 1979년 - 1981년 고창훈 목사
극동사도선교회유지재단은 1975년 4월 9일에 “법인설립신고서”를 국세청 대전지방국세청 동대전세무서 법인세과에 제출했다. 그리고 재단법인 “극동사도선교회”는 1980년에 정부로부터 무인가 신학교 정비령이 내려지자 교단 신학교가 폐쇄되고 인가 신학교를 가진 교단과 통합을 추진하는 움직임 가운데서 장로교로 전환했다. 소속 교회 목회자들이 안정적으로 사역을 하기 위해 장로교단으로 바꾸면서 예장 은혜총회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대전 가양제일교회, 해남교회와 가동교회, 평택은실교회 등이 대표적 은혜 측 교회다. 그리고 대전 연합부흥회가 인연이 되어 연합 측과 1981년 1월 통합을 하게 됐다. 연합과 은혜는 통합 후 연합총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 연합은 백석의 전신인 합동진리와 통합하고 합동정통을 결성했다. 가양제일교회는 1975년 11월 4일 중도성서신학교 강당에서 창립되었고(당시 제일교회), 66세의 곽봉조가 초대 목회자였다. 곽봉조에 이어서 고창훈이 목회했고, 1979년에 대한예수교장로회(은혜측) 충청노회 가양제일교회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1980년 1월 중도성서신학교 부설에서 분리 독립되면서 대전시 가양동 35-3 선교부 부지 일부를 사용하여 개척되었다.
은혜 측의 대부인 평택은실교회 원로 홍태희 목사는 중도성서신학교를 졸업(6회)하고 대한예수교오순절교단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그 교단은 신유와 은사를 중시하고 성령 체험을 강조했다. 세례는 반드시 침례로 받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 장로교단과 신학적 차이는 큰 틀에서 이것이 전부다. 오순절에서 장로교단으로 교단 정체성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은데, 장로교단들과 연이은 통합까지 은혜 측 입장에서는 정착이 쉽지 않을 수 있었다. 이에 대해 홍태희 목사는 “교리적 차이들을 말하지만 성경적으로는 다를 것이 없다. 단순히 침례냐 세례냐의 차이였고, 성령의 역사와 은사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은 구원과 직결된 문제가 아니다. 한쪽이 내려놓으면 되는 것이었다. 통합 당시 요구조건들은 없었다. 조건 없는 통합을 이뤘고, 함께 총회와 신학교를 잘 세워나갔다”고 회고했다. 중도성서신학교는 대전기독신학교를 거쳐 대전백석신학교가 되었다.
IX. 미국 생활과 소천
71세 곽봉조는 1980년도에 미국으로 건너가 노스캐롤라이나의 샬롯장로교회(Charlotte Presbyterian Church), 즉 사위 전기현과 넷째 딸 곽선신이 장로와 교육전도사로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서 협동 목사로 일했다. 곽봉조의 1980년 도미는 극동사도선교회와 대한예수교오순절교회의 장로교와의 통합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73세 곽봉조는 198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제9대 원로성직자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그 후 공직에서 물러났다.
초기 한국인 오순절 지도자들 가운데서, 곽봉조는 몇 가지 책을 쓴 유일한 사람이었다. 1970년에 펴낸 『오순절 진리: 성령론』(The Pentecostal Truth: Pneumatology), 1990년에 펴낸 『삼위일체론』(An Essay on the Trinity, 1990), 그리고 모세오경, 아가서, 로마서, 욥기서 주석들이 그 책들이다. 그 책들 중에 한국에서 볼 수 있는 것들은 두 권, 로마서강해와 모세오경강해다. 『모세오경강해』는 1986년에, 『로마서강해』는 1988년에 서울, 성광문화사에 의해 출판되었다. 두 책은 국립중앙도서관, 서울신학대학교 도서관 등에서 열람할 수 있다.
『모세오경강해』의 영어명은 An Exposition of the Pentateuch이었다. 그 책에 소개된 곽봉조의 영어명은 Rev. Joseph B. Kwak이었으며, 이름 끝에 D.D. 즉, Doctor of Divinity, 신학박사라는 학위명이 기재되었다. 곽봉조는 모세오경강해 서문을 1986년 4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 아파트에서 썼다고 밝혔다. 그는 그 서문 서두에서 한국교회의 양적 성장과 많은 신학서적들의 출판을 언급하며 감사했다. 그러나 그는 쏟아져 나오는 신학서들 중에서 많은 책들, 특히 구약신학에 관한 많은 책들이 신자들의 믿음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그르치고 무너뜨리고 있다고 한탄했다.
그는 한국 교회와 민족이 당해온 파란의 역사 가운데서 중국, 일본, 한국을 떠돌며 그리고 최종적으로 미국에 와 있는 자신의 여정을 되돌아보았다. 미력이나마 교역에 몸 드리게 하신 주님의 은혜 안에서 덧없이 흘려보낸 70 평생을 돌이켜 회상했다. 그는 주님 앞에 그리고 민족의 교회 앞에 해놓은 일이 없어 심히 송구하다고 자신의 마음을 드러냈다. 그래서 곽봉조는 주님께서 주님의 나라로 부르시기 전에 신자들의 믿음을 세워주는 구약, 모세오경에 대한 책을 사랑하는 조국의 교회와 신학에 남겨 매우 적은 거름이라도 되기를 바라면서 내놓았다.
곽봉조는 서문 말미에서 그 책이 나오기까지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감사했다. 그런데 눈에 띄는 것은 순복음신학교를 1955년에 제1회로 졸업한 함상군 목사의 언급이다. 곽봉조는 당시 미국에 있던 함상군 목사가 모세오경강해가 출판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며 그에게 감사했다. 그것은 곽봉조의 순복음신학교 제자 함상군이 졸업 후에도 곽봉조와의 관계를 지속시켰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곽봉조는 한국에 있는 최철종 목사가 모세오경강해 출판에 도움을 주었다며 그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가 언급한 최철종 목사는 1977년부터 1979년까지 대한예수교오순절교회의 제8대 총회장을 역임했던 최철종 목사였을 것이다.
모세오경의 총론 서두에 곽봉조는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표제어를 달았다. 곽봉조는 구약성경을 “한 민족에 관한 기사”라고, 신약성경을 “한 사람에 관한 기사”라고 요약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신약의 그 사람을 이 세상에 오게 하시기 위하여 구약의 그 민족을 창조하시고 육성하셨다”고 보았으며, 그에게 신약의 그 “사람”이란 예수 그리스도였다. 곽봉조는 요한복음 1장 14절을 근거로 “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을 입으신 분”이라고 썼다. 그리고 곽봉조는 “이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심으로써 인류역사는 방향을 바꾸게 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인류역사의 중심인물이 되었다”며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주장했다. 곽봉조는 이어 예수 그리스도의 중심성을 부연 설명한다. 그에게 구약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무대이며, 신약성경은 그의 나심으로써 생겨난 여러 일들을 기술한다. 그래서 그에게 “성경 전체는 그리스도에 관한 아름다운 실화이다.” 이렇게 곽봉조는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역사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된 성경 전체의 중심이다.
곽봉조가 이렇게 구약과 신약의 중심을 예수 그리스도로 설정한 것은 두 책이 서로 단절되고 분리된 책이 아니고 연결성, 연속성을 가지는 것임을 말하기 위한 초석을 깔고 있는 것이었다. 곽봉조에게 그 연속성을 가능하게 하는 고리는 예수 그리스도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연속성은 모세오경을 해석하는 방법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열쇠다. 그는 “성경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첫 표제어에 이어 두 번째 표제어를 “본 강해가 취한 방법론”이라고 붙였다. 곽봉조는 모세오경에 일반 역사문헌이나 문학서적 해석법을 가하는 일반해석학을 제쳐두고 우선 모형론을 포함하는 특수해석학을 적용하려 했다. 그에게 “구약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역사와 상징과 도형(그림자)으로 보여 주고 또 예언한다. 그리고 신약은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준다.” 그래서 그는 “구약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해하기 위해 그 문자적 표현과 역사적 사실 안에 들어 있는 신약적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 구약의 신약적 의미를 아는 방법은 “구약을 신약으로 조명하는 것이다.” 곽봉조는 “구약을 신약으로 조명하여 해석하는 이 작업을 본 강해의 방법론으로 한다”고 요약하여 밝혔다.
곽봉조는 이어서 구약을 신약으로 조명해야 하는 이유를 썼다. 그 이유는 요약하면, 구약이 고대 유대의 종교서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는 구약성경을 신약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다만 역사적 사실과 문자적 표현 그대로만 받아들인다면 구약은 고대 유대의 종교서가 될 것이며 유대민족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구약연구는 그 역사적 사실과 문자적 표현을 신약이라는 여과기를 통과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게 신약으로 구약을 조명해야 비로소 구약이 현대 독자에게 의미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고대 유대의 종교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경륜과 섭리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곽봉조는 구약에 대한 또 다른 접근법, 해석법의 해악을 경고했다. 그는 “구약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구약의 역사 사실들을 부정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상징적인 기사로 취급하여 해석한다면 이 또한 엄청난 잘못이 된다”고 보았다. 그는 그런 취급의 예로 창세기 3장의 선악과 사건이나 6장의 홍수 사건을 어떤 상징이나 문학적 가공설화로 취급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그렇게 하는 것은 구약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큰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고 판단했다. 곽봉조에게 “구약성경의 사실들은 역사적 기반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역사적 사실들은 그 자체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곽봉조가 그래서 거부한 접근법은 소위 고등비평(Higher Criticism), 임마누엘 칸트의 인식론에 기초한 문헌비평, 편집비평, 양식비평, 문학비평 등의 역사비평이었다. 이 역사비평 방법에서 사용하는 “역사”라는 말에는 초월적인 것이 개입해 들어올 수 없는 인간만의 역사, 이적과 기사가 발생할 수 없는 역사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이렇게 볼 때, 곽봉조의 모세오경 해석법, 넓게는 구약 해석법은 신학적 보수주의, 구복음주의, 근본주의자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정경적-문법적-역사적-신학적 해석법”(Canonical-Grammatical-historical-theological Hermeneutics)이었다. 이 방법에서 “역사”는 초월적인 것이 개입할 수 있는 역사를 의미하며, “신학적”이란 모형론(Typology)을 포함한다. 곽봉조는 구약해석에 있어서 고등비평을 기반으로 삼는 자유주의나 고등비평을 수용하는 신복음주의의 해석학을 거부하고 근본주의, 구복음주의의 해석학을 채택했던 것이다.
곽봉조는 1988년 3월에 로스앤젤레스 한 아파트에서 『로마서강해』 서문을 썼다. 그의 로마서강해 속지에는 저자 이름 앞에 “혜원”이라는 호가 등장했다. “혜원”이라는 말은 그의 환갑축하예배 사진에 등장하는 축하예배당 전면에 장식되었던 “혜원”이라는 말과 일치한다.
곽봉조는 한국교회가 선교 100년 만에 경이적인 성장을 이룬 것에 세계교회가 관심을 갖고 있다며 로마서강해 서문을 시작했다. 그리고 그는 이런 한국 교회의 빠른 양적 성장은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라고 평가했다. 곽봉조는 이런 양적인 교회성장에 비례하여 질적인 성장도 병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게 질적 성장은 무엇보다 “신학적인 믿받침이 든든해야” 가능한 것이었다. 곽봉조는 그 과업을 이루는 데 기여하기 위해 다년간 신학교에서 강의하던 원고를 정리하여 내놓았다. 그는 자신의 개인적 종말을 목전에 두고, 로마서강해가 사장되지 않고 한국 교회의 질적 성장에 이바지하기 위해 그 원고를 세상에 출판하여 내놓았던 것이다.
그 자신의 언급처럼 곽봉조의 로마서강해는 1955년 순복음신학교에서의 강의도 그 빼대와 내용이 되었을 것이다. 김익진은 곽봉조가 1955년 순복음신학교 로마서 수업에서 6장을 근거로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고 전했다. 그래서 필자는 곽봉조의 로마서강해 중에서 6장을 집중적으로 살펴보았다. 그러나 곽봉조는 그곳에서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지는 않았다. 그 대신 전통적인 로마서강해를 이어갔다. 80대에 접어든 곽봉조는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주제의 언급을 피했던 것이다.
그는 로마서 6장 4절에 대한 강해에서 헬라어 “밥티스마”(βαπτισμα)를 “세례”가 아닌 “침례”로 번역했다. 그는 밥티스마가 “수중에 잠근다”는 의미를 갖는다고 보고 세례가 아닌 침례로 번역한 것이다. 이런 번역은 대부분의 한국 오순절주의자들이 밥티스마를 세례로 번역해 왔던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는 침례를 장례식으로 비유했다. 그에게 침례식은 옛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회개로 사망하고 사망한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즉 매장됨을 상징한다. 그는 신앙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영적 침례와 그 영적 침례를 상징하는 의식으로서 침례식을 일단 분리한 것이다. 그는 침례식을 상징으로만 해석하지 않고 그리스도에게로 들어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분의 것이 되고, 그분을 옷 입는 것,(갈 3:27) 그리스도화되는 성결의식으로도 보았다. 즉 곽봉조는 침례식을 그리스도인의 성화되어가는 생활과 연결시켰다. 그가 그렇게 영적침례와 침례식과 침례적 삶을 구분하면서도 분리시키지 않고 하나로 연합시킨 이유는 로마서강해 독자들이 삶의 질적 성장을 이루기를 바라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침례를 받은 자는 죄에 대하여 죽어 관계를 끊고 성령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새로운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썼다.
2003년 보이스사에서 출판한 『(미국이민 100주년 기념) 재미 한인목사 100인 설교집』 103쪽에서 105쪽에는 곽봉조 목사의 “축복의 강”이라는 설교가 실려있다. 이 설교집은 국립중앙도서관과 평택대학교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992년경 곽봉조는 한국 대전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의 제자이며 가양제일교회를 담임목회하고 있던 고창훈을 만났다. 당시 장로교로 전환한 가양제일교회는 제3차 성전 건축(본당 증축)을 계획할 정도로 부흥하고 있었다. 대전에서는 대전세계박람회가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93일 동안 개최될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어서 곽봉조는 고창훈 등과 함께 둘러보기도 했다. 곽봉조는 고창훈과 함께 찍은 사진을 남겼는데, 그 사진 속 곽봉조는 81-3세의 나이에도 정정한 모습이었다.
1995년 연길에 곽봉조와 가족들이 방문했을 때 곽봉조가 목회했던 연길교회(延吉基督教堂)는 해외 동포들이 세운 교회로는 세계에서 제일 큰 1만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해 있었다. 곽봉조의 외사촌 유치화의 아들 유두봉 목사가 담임으로 사역하고 있었다. 그 교회는 중국은 물론 북한과 전 세계를 향한 선교의 큰 꿈을 갖고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연길교회는 1966년 문화대혁명으로 폐쇄당했다가, 1981년 등소평의 개방 정책하에 교회가 회복되었고, 그해 9월 20일 곽봉조의 외사촌 유치화(유두봉 목사의 아버지) 집사와 김원배 장로 등이 복당 기념 예배를 드렸다. 1992년 1월 5일 유두봉 목사가 안수를 받으면서 이 교회의 제10대 담임 목사가 되었다. 그런데 연길교회 100주년 기념영상에 소개된 역대 담임목사 명단에서는 곽봉조가 등장하지는 않는다. 1997년 9월 예장통합교단이 10억원의 건축기금을 지원해 연길에서 가장 큰 교회로 건축됐다. 연길교회는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중심교회로 부상하고 있다. 한때 1만여 명의 교인들이 출석했으나 인근에 교회가 개척되면서 교인들이 분산되어 1997년에는 8천여 명의 교인들이 출석했다. 연길시 중심을 흐르는 강언덕에 자리 잡아 한눈에 띄며 연변 중국동포들에게 정신적인 자양분을 제공하고 있다. 이 교회는 중국 삼자교회이면서도 한국교회와의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북방선교에 큰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곽봉조는 90세가 되는 1999년에 아래와 같이 기도드렸다.
아버지 하나님!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요셉의 하나님
아니 곽봉조의 하나님!
저의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처럼 험한 저의 나그네 길 지켜주신 아버지,
야곱을 통해 12자녀를 축복케 하신 분이시여
저를 통해 5자녀 주셨으니 축복케 하소서
그들이 믿음의 장부들이 되게 하소서
하나님 아버지보다 세상 사랑치 않게 하소서
의를 위해 생명 길 걷게 하소서
형제 사람 깊게 하소서
예수 내 구주를 가슴 판에 새기게 하소서
장녀(은신)는 어미와 함께
동생을 거두느라 수고했사오니
그 길이 거친 파도 같을지라도 평안케 하소서
둘째(혜신)는 성직자 반열에 서게 하셨으니
그 자손에서 당신의 종인 사역자 많이 나게 하소서.
셋째(영신)는 창대케 하사 주님의 품으로 덮으소서.
넷째(선신)는 영특하고, 그녀에게 좋은 남편 주셨으니,
남편은 물론 많은 사람들과 능력의 팔을 펴
더불어 살게 하소서
다섯째(은식)는 다윗처럼 주님 사랑하오니
요셉같은 축복을 주소서
부족한 당신의 종, 곽봉조!
우리 하나님, 주님, 성령님, 삼위일체시여
감사와 찬송, 영광, 세세 무궁토록 드립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다)
아멘
곽봉조는 이 유언과 같은 기도문에서 자신의 삼위일체신앙(三位一體信仰)을 고백했다. 그는 “우리 하나님, 주님, 성령님”을 불렀다. 이 부름에서 “우리”는 곽봉조 자신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은 성부를 일컫는 것일 것이다. “주님”은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할 것이다. 곽봉조는 이렇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각각 따로 불렀다. 그리고 그는 각각 따로 부른 분들을 “삼위일체”라는 신학적 용어로 묶었다. “삼위”(三位) 또는 “세 인격들”(三人格, the Three Persons)은 제1위 성부, 제2위 성자, 그리고 제3위 성령이라는 혼합되지 않는 세 위격들 또는 세 인격들을 구분한 것이다. 그리고 “일체”(一體, One Substance)는 각각의 삼위가 분리된 것이 아니고 그 신성(Divinity)이라는 본질에 있어서 하나로 연합해 있다는 것(一本質, One Essence Unified)을 표현한 말이다. 곽봉조의 “삼위” 고백은 배부근이 곽봉조의 신앙을 오해했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알려 준다. “삼위”를 부정하고 “일위”(一位) 혹은 “하나의 인격”(一人格)을 주장하는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과는 달리, 곽봉조는 “삼위” 혹은 “세 인격들”을 고백했다.
1999년 7월 17일, 곽봉조는 향년 90세의 일기로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소천했다. 그리고 그의 남은 몸은 로스앤젤레스 근교 1712 S. Glendale Ave. Glendale, CA에 있는 글렌달 묘지(Glendale Cemetery, Forest Lawn Memorial Park)에 아내 송우순과 함께 안장되었다. 그 묘지에 등록된 그의 이름은 Joseph Kwak이며, 생존기간은 1909년에서 1999년까지이다. 묻힌 곳은 좁혀서 할리우드 힐스(Hollywood Hills)이고, 구체적인 장소는 Murmuring Trees, Lot. 8514이다.
장례식에서 곽봉조의 제자이며 사위였던 소교민 목사는 다음과 같은 추모사를 낭독했다.
추모사
거목이 쓰러졌도다
거목이 쓰러졌도다
동역자요, 선배요, 아버지이신 곽봉조 목사님!
바라만 보시어도, 곁에만 계시어도
주님의 음성이, 하나님의 사랑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모습에서 풍겨 나오시던 저의 길잡이!
아니 만인의 스승!
어인 일로 기침 한 번 안 하시고
풍진 세상, 모진 세상, 거친 세상
훌쩍 떠나십니까?
높은 산! 깊은 바다! 넓은 들판! 높은 하늘!
아름답다 하시며 멀리 바라보시던 그 눈 빛!
못 쫓아 애타던 저의 가슴 이제 누구에게 열라십니까?
걸어가신 발자국마다 정직, 근면, 성실로
울며 뿌리신 복음의 씨들, 무성한 종려나무가지처럼,
잘 자라 무화과나무처럼 열매 맺는 그 날!
생명의 면류관,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
받아 쓰시고
열 고을 상급 받으소서!
눈물도, 슬픔도, 고통도 없는
생명 강가에 영원히 거하소서!
그렇게 좋아하시던 예수님과 함께!
(전 하나님의 성회 총회장 소교민 목사 배상)
X. 나가는 말
곽봉조는 1909년 1월 25일 경상남도 거제군 둔덕면 거림리에서 탄생하여 1999년 7월 17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90세에 소천했다. 그는 지역적으로 한국, 일본, 만주, 미국에 걸쳐 야곱과 같은 풍운아처럼 쉽지 않게 사역했으며, 그러나 다른 초기 오순절 지도자들 그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장수하는 복을 누렸다.
명석했던 곽봉조는 성령침례의 성경적 증거는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는 오순절 신학의 핵심을 경험하고 확실하게 붙잡고 있었으며, 물침례의 방식에 있어서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물침례 방식과 다른 방식을 취했으나, 삼위일체에 있어서는 비교적 전통적인 삼위일체론을 견지했다. 그 상이함 때문에 1958년 이후 공식적으로 하나님의성회를 떠나게 되었지만, 완전히 떠나지는 않았으며, 그 이후에도 남원교회, 순천오순절교회 등 하나님의성회 소속 교회들에서 목회하는 등 하나님의성회와의 관계를 간간이 이어갔다. 곽봉조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를 중심으로 오순절주의자들이 이루었던 연합의 결렬을 평생 아쉬워했던 것 같다. 또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도 그와의 결렬을 아쉬워하여 그에 대한 공식적 비판을 삼갔던 것 같다.
비록 4-5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곽봉조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에 강한 인상과 자취를 남겼다. 그래서 하나님의성회는 그에 대해 “오순절 진리의 변증자”라는 긍정적 평가를 내렸다. 곽봉조의 제자이며, 하나님의성회의 대표적 교육자이며 목회자였던 박정근은 1970년에 『오순절 진리를 변증함』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 책의 동사적 제목은 30년사가 곽봉조에 대한 독립적인 글을 쓰면서 내건 명사적 제목과 놀랍게 상응한다. 이것은 곽봉조가 그만큼 핵심적인 오순절 신학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자신감 있고 효과적으로 제자들을 교육했던 것을 드러낸다. 그래서 필자도 본 글의 제목을 30년사의 제목을 따라 “오순절 진리 변증자 곽봉조”라 붙인다.
곽봉조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연합오순절교회의 신학 사이의 중도신학을, 엄밀히 말하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에 더 가까운 신학을 갖고 있었다. 그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성령침례론과 삼위일체론과 동일한 신학을 표명했다. 그는 연합오순절교회의 물침례론과 유사한 신학을 표명했으나, 연합오순절교회의 모달리스트적 반삼위일체론을 거부했다. 그러나 그가 연합오순절교회와 접촉하고 연대한 흔적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곽봉조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와의 관계의 끈을 놓지 않았다.
곽봉조의 신학은 한 교단이 어떤 신학적인 한계선까지 상이한 신학을 포용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한다. 곽봉조의 신학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신학과 형제와 같았다는 말로 그 고민을 유화시킬 수 있을까? 곽봉조가 오사카의 쿠트가 아닌 나고야의 주르겐센에게 사사를 받았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 궁금하고 안타깝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반대의 길을 택하셨다. 그렇다면, 곽봉조를 통해 하나님께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에 주시고자 하셨던 것, 말씀하시고자 하셨던 것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은 씨앗이 되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라는 밭에 떨어졌고,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는 그 열매를 지금까지 거두어 왔다.
곽봉조 연보
1909년 1월 25일 경상남도 거제군(巨濟郡) 둔덕면(屯德面) 거림리에서 탄생
1915년 서당에 다니기 시작 (6세)
1918년 – 1927년 보통학교 취학 (10세 – 19세)
1923년 한학에 심취 (14세)
1925년 차영훈 전도사의 인도로 그리스도인이 됨 (16세)
1929년 대한해협을 건너 일본, 오사카에 감 (20세)
이치오카 오순절 교회로 인도되어 레오나르드 쿠트를 만남
1930년 이코마성서학원 입학, 오순절주의자가 됨 (21세)
1932년 7월 7일 이카이노조선오순절교회의 담임교역자가 됨 (23세)
1932년 말 제주도 출신 송우순과 결혼
1933년 4월 이코마성서학원 졸업 (24세)
1936년 4월경 쿠트와 함께 사도선교회를 세우기 위해 조선 방문 (27세)
1936년 5월 – 6월 쿠트와 함께 조선 재 방문, 영등포 땅 매입
1938년 박헌근과 최예임의 결혼식 주례 (29세)
1940년 – 1941년 폐렴에 걸림 (31세-32세)
1942년 일본을 떠나 조선, 거제도로 귀환 (33세)
만주국 길림성, 연변의 국자가교회(현 연변교회) 목회
1945년 8.15 만주 하얼빈역에서 해방 맞이 (36세)
1945년 말 조선의용군을 앞세운 중공 공산당 팔로군의 박해를 피해 낙향
넷째 딸 소천
오수교회, 거제교회, 유천교회 돌봄
1948년 3월 24일 숭덕국민학교 교장으로 부임 (39세)
1950년 6월 25일 숭덕국민학교에서 피난민 돌봄 (41세)
1952년 3월 25일 숭덕국민학교 제1회 졸업생 47명 배출
순천오순절교회(현 순복음오순절교회) 제2대 담임교역자로 부임 (43세)
1952년 5월 4일 제2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대회 인도
1953년 4월 8일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창립 회의에 참석 (44세)
1953년 5월 순복음신학교 교수 사역 시작
1953년 10월 물침례 방식 두고 이견 표출
1955년 2월 순천오순절교회의 담임교역 사임 (46세)
물침례 방식 표출과 배부근 목사와 충돌
반삼위일체주의자로 오해받음
1958년 5월 1일 – 10일 대전에서 극동사도선교회, 중도성서신학교(中都聖書神學校) 창립 (49세)
1963-65년 초 쿠트와 대한예수교오순절교회 설립 (54세)
1965년 11월 5일 남원중앙교회 제8대 담임목사로 부임 (56세)
연합오순절교회의 선교사 입국, 곽봉조는 관계를 갖지 않음
1967년 2월 25일 남원중앙교회 담임목사 사임 (58세)
1968년 2월 순천오순절교회(현 순복음오순절교회) 제7대 담임교역자로 부임 (59세)
1969년 환갑축하예배
1969년 12월 2일 대전 구령회관에서 홍태희 목사 결혼 주례
1970년 2월 순천오순절교회 담임 사임 (61세)
『오순절 진리: 성령론』 펴냄
1968-1971년 대한예수교오순절교회의 제3대 총회장
1974-1976년 대한예수교오순절교회의 제6대 총회장
1975년 11월 4일 중도성서신학교 강당에서 창립되었던 가양제일교회(당시 제일교회) 초대목회 (66세)
1979년 제일교회가 대한예수교장로회(은혜측) 충청노회 가양제일교회로 전환 (70세)
1980년 미국으로 건너가 샬롯장로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사역 (71세)
1981년 1월 대한예수교오순절교회가 장로교 백석 측과 통합
1982년 로스앤젤레스에서 제9대 원로성직자회 회장 역임 (73세)
1986년 『모세오경강해』 펴냄 (77세)
1988년 『로마서강해』 펴냄 (79세)
1990년 『삼위일체론』 펴냄 (81세)
1992년 대전 방문 (83세)
1995년 가족들 중국 연길교회 방문 (86세)
1999년 7월 17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소천 (90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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