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승
2023년 11월 20일/2024년 1월 20일
Ⅰ. 들어가는 말
박헌근(朴憲根)은 지금까지 “한국 오순절 최초의 순교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창설에 공헌자”로 평가되어 왔다. 그런데 이런 평가들에 “마음이 어진 자” 그리고 “탁월한 설교자”라는 평가가 더해졌다. 변종호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30년사, 그리고 50년사는 박헌근을 “한국 오순절교회 최초의 순교자”라고 소개했다. 1953년에 설립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는 50주년을 앞둔 2002년 12월에 교단을 빛낸 50인을 발표했다. ‘교단발전 공로자,’ ‘교단창설공로자,’ ‘순교자’ 등 총 11개 부분으로 나누어진 50인에는 박헌근(朴憲根)이 순교자로 포함되어 있었다.
변종호는 박헌근이 인도했던 1950년 4월 9일의 제1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대회가 1953년 4월 8일에 설립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기반이 되고 모체가 되었으매 그 의의가 크다”고 평가했다. 변종호 이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는 박헌근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설립에 이바지한 공을 계속 언급해 왔다. 김성태는 박헌근의 “순교의 피는 헛되지 않았다. 순복음오순절교회는 호남지역 성령운동의 본산지로 복음을 증거했으며, 1950년 순천에서 열린 ‘대한기독교오순절대회’를 계기로 1953년 4월 8일 서울남부교회에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를 창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썼다.
최근에는 박헌근의 능력과 성품에 대한 평가가 더해지고 있다. 최재웅은 박헌근이 탁월한 설교가였었다는 사실을 발굴해 내었다. 그는 1941년 초에 박헌근이 병들어 약해져 있던 곽봉조 대신 이카이노조선교회를 이끌었으며, 그때 그의 설교를 들었던 선교사들이 그의 설교가 탁월했다고 평가한 것을 찾아내었다. 최상근은 박헌근이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의 순교 소식을 듣고 “그들의 순교를 사모했다”고 썼으며, 박헌근이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외투며 저고리를 다 벗어 주었을 정도로 마음이 어진 사람이었던 것을 밝혀냈다.
그런데 지금까지 이런 박헌근의 일대기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공식문서들에서는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타교단인 예장통합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가 최초로 박헌근의 일생을 제법 상세하게 기술했으며, 타교단에 소속한 한 분이 운영하는 인터넷 사이트는 박헌근의 생애를 그의 유족들에 대한 정보를 더하여 썼다. 그리고 교단 내에서는 김성태 기자가 기사에 따라 짧게 박헌근의 생애를 언급했고, 최상근은 비교적 길게 새로운 내용을 발굴해 내어 박헌근의 생애를 기술했다. 이런 박헌근에 대한 글들은 대부분 그 정보들의 구체적인 출처 표시가 없이 써졌다.
본 글의 목표는 지금까지 박헌근에 대해 언급한 글들을 종합하고, 정보들의 사실 여부를 살펴 최대한 바로잡으며, 관계되는 사실들이나 배경 또는 정황 설명을 더하여 박헌근의 일대기를 기술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한 사람에 대한 글은 잠정적인 것이다. 또 다른 자료가 나오면, 그 이전의 기술은 무용지물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조심스럽고 겸허해질 수 밖에 없다. 독자는 이점을 헤아려주기를 바란다.
Ⅱ. 탄생과 성장
호남선 철도가 1월에 완공되고 8개월 후인 1914년 9월 3일이었다. 그날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봉산3리 567번지에서 한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그 아기의 부친은 박민상(밀양 朴, 敏相), 모친은 이영풍(李永豊)이었다. 남동생 박헌주(朴憲柱)와 여동생 박운애(朴雲愛), 즉 2남 1녀 중 장남으로 박헌근이 출생한 것이다. 밖으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고, 안으로는 총독부가 토지대장규칙, 하천취체규칙, 항만기타공공사용수면 및 그 부지 취체에 관한 법령을 공포하던 해였다.
무안은 남으로 목포, 북으로 함평, 북동으로 나주와 접하고 있다. 서쪽은 서해, 동쪽은 굽이치는 영산강 사이에 자리 잡은 무안군의 북동쪽 끝머리, 그곳에 봉산3리가 있다. 몽탄면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6Km가량 떨어진 곳이다. 567번지의 뒤편, 즉 서쪽에는 노령산맥의 남쪽 끝자락이 품고 있는 해발 101미터의 하문산, 124미터의 제봉산, 165미터의 우방산 등이 서 있다. 그 앞쪽, 즉 동쪽에는 좁게 굽이치던 영산강물이 그 하구로 흘러 바다로 들어가기 전에 그 폭을 300여미터로 넓히기 시작한다. 강과 산 사이, 567번지의 앞쪽에는 호남선이 아래로 목포를 향해, 위로 경성을 향해 달린다. 당시에는 마을 뒤편 산 너머에 호남선이 지나갔다. 무안역에서 567번지까지의 거리는 북으로 약 2Km이다.
사실, 영산강과 567번지 뒷산 사이에는 또 나지막한 산이 있다. 즉 567번지가 있는 봉산3리는 높지 않은 산과 산 사이의 계곡과 같은 말안장 모양의 지형으로 용처럼 승천하는 형국인 용마승천의 기룡동(騎龍洞)이라고도 불린다. 그래서 567번지의 집에서는 영산강이 아닌 호남선 철길을 달리는 기차와 앞의 나지막한 산이 눈에 들어온다. 봉산리는 본래 무안군 석진면 지역으로 1910년 목포부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해창, 기룡동, 기동, 반암리, 사동, 상주촌 등 각 일부를 병합하여 무안군에 편입되었다. 기룡동마을은 밀양 박씨 집성촌이며, 밀양 박씨 제각과 전주 최씨 제각이 있다.
무안군 몽탄면에는 한 전설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를 공략하다가 지금의 나주 동강면으로 가려 했다. 그러나 영산강이 막혀 건너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꿈”(夢, 몽)에 한 백발노인이 나타나 눈앞의 호수는 강이 아니라 “여울”(灘, 탄)이니 빨리 건너라고 말했다. 그래서 왕건은 말을 타고 현재의 몽탄나루를 건너가 견훤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 지역을 “몽탄”(夢灘)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박헌근은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부친에게 한문을 배우면서 성장했다. 기룡동 마을 옆에는 “서당골”이라 불리는 곳이 있다. 서당골은 서당이 있었던 곳을 말한다. 마을에서 끊이지 않고 학문이 높은 선생들이 나와 서당을 차리고 주위 사람들을 가르쳤다. 주변 사람들은 이 마을을 “문헌방”이라고도 불렀다. 예전부터 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함평 엄다 일대는 물론이고, 몽탄면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학문을 배웠다고 한다. 부친 박민상도 그리고 박헌근도 이 서당골에서 한학을 배웠을 것이다.
봉산3리에는 현재 교회가 없다. 직선거리로 500미터 거리, 앞산 동쪽의 봉산1리에 대한예수교장로회 기동교회가 있다. 목포측후동교회가 기동교회를 1950년에서 1951년 사이에 지교회로 세웠다. 그리고 남쪽으로 1.7Km 거리, 사창1리 769-3에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사창교회가 있다. 아마 박헌근이 태어나고 자랄 당시에도 마을에 교회가 없었을 것이다.
III. 일본 이주
1924년 1월 16일 전남 광주의 농민 500여 명이 소작쟁의 문제로 경찰서를 습격했다. 7월 9일에는 전라남도 무안군(현재는 신안군) 암태면 농민 600여 명이 소작쟁의로 구속된 농민 석방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그 흉흉한 해에 박헌근의 아버지는 가난을 벗어나고자 고향을 떠나 일본, 오사카(大阪)의 이카이노(猪飼野)로 10세의 박헌근을 비롯한 가족을 데리고 건너갔다. 1920년대에 오사카의 인구는 200만 명을 넘어서는 거대 도시가 되었다. 이카이노(猪飼野)는 오사카부 오사카시 히가시나리구, 이쿠노구(生野區), 히라노가구, 그리고 하도우기시 일대의 지역이다.
1910년의 한일합병은 곧 일본으로의 조선인 이주자의 증가를 의미했다. 병합 직후 내무성이 경보 국장 명의로 각 지방에 “조선인 호구 직업별 인원표의 건”이라는 통첩을 발했고, 이어 1911년에는 “조선인 명부 조정의 건”을 지시한 것도 그런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 이를 통해 경찰서에서 작성한 명부는 1부를 상급기관에 제출하며, 조선인의 언동과 사상을 조사하는 동시에 이동시에는 행선지를 속보하도록 정해졌다. 이주조선인의 증가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이후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일본 경제의 발전으로 새로운 노동력 수요가 창출되었고, 바로 이 노동력 수요를 메우기 위해 조선인의 도항이 이루어졌다. 1920년에 3만 명을 넘은 재일조선인 인구는 1930년에 약 30만 명으로 급증했다.
박헌근의 가족은 이카이노의 나가야(なが‐や)를 빌려서 살았을 것이다. 이카이노로 건너온 조선인들은 여러 집이 수평으로 벽을 공유하며 기다랗게 연결된 형태의 오래된 나가야(長屋)를 빌려서 조선촌을 형성했다. 이카이노에 조선인이 정주하게 된 이유는 첫째, 중소영세기업이 많아서 일본어를 구사하시지 못하는 조선인이라도 해도 건강한 육체만 갖고 있으면 일자리를 찾기 쉬웠다. 둘째 조선인이 거주할 수 있는 주택이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인에게 집을 빌려주는 일본인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카이노 지역의 주택은 저습지대로 밭을 메워 지었기 때문에 비가 오면 도로가 진흙탕이 되고, 비가 많이 내리면 침수하는 등 악조건이었다. 이 때문에 일본인이 집을 빌리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집주인들은 할 수 없이 조선인에게 그 나가야를 빌려주었다.
부친은 이카이노에서 양복 기술을 배워 양복점 사업을 했고, 그래서 그의 가족은 경제적으로 몇 년간 여유 있는 생활을 영유했다. 박헌근은 한국에 가끔 들어왔는데, 양복을 잘 차려입고 왔다. 그리고 자신이 입은 양복과 와이셔츠를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다. 또한 일본에서 가져온 노트를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남성 중심 사회였던 일본에서 서양의 양복은 1910년대까지만 해도, 남성의 전유물과도 같았다. 보수적인 남자들은 양장을 입은 여성들의 옷차림을 좋지 않은 시선으로 보곤 했다. 그러던 것이, 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20년경이 되자 점차 여성 양장에 대한 편견이 사라지고 여성의 사회 활동이 늘면서 실용성이 강조되어 점차 양장이 보편적인 차림으로 정착되었다. 조선에서도 1920년대에 들어 양복이 크게 유행했다. 경성과 대도시에서 일본인이 양복을 입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인 관리와 상인도 곧잘 입었다. 1920년대가 되면 이전 시기에 자주 볼 수 있었던 대례복과 군복 등의 광고가 거의 사라지고 신사복, 외투 등의 일반 양복 광고가 대량으로 등장했다. 양복은 정부 관리들의 예복이나 군복, 경찰복과 같은 특별한 용도를 위한 옷에서 출발했으나, 1920년대가 되면 한국인의 의생활에서 ‘통상복’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는 양복점의 수도 많이 증가했다. 1926년 서울의 한국인 양복점 수는 약 70여 개에 달했다고 한다. 이런 1920년대 일본과 조선에서 양복의 보편화는 오사카에 거주하던 일본과 조선인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이었을 것이고, 그것은 박헌근의 부친이 양복기술을 배웠던 이유, 차렸던 양복점이 잘 되었던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박헌근은 일본으로 건너간 1924년 그의 나이 10세 때부터 소학교(6년제 초등교육기관)를 다니기 시작했다. 현재 이쿠노구에는 조선인만을 위한 “오사카조선초급학교”가 있다. 그런데 그 학교는 태평양전쟁 후 1945년 10월 17일 이쿠노구 이노우키노 히가시 9초메(生野区 猪飼野東 9丁目)에 국어 강습소로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박헌근은 조선인만을 위한 학교에는 다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 지역에는 오사카시가 세운 “이쿠노소학교”(大阪 市立 生野小学校)가 있다. 그 학교는 메이지 시대 초기에 당시의 히가시나리군 샤리데라무라(초촌제 시행으로 이쿠노무라)에 설치된 초등학교·제5대구 이치코구 6번 초등학교(샤리지 초등학교)를 기원으로 하고 있다. 당초는 히가시나리군 샤리지마을 153번지(현재의 이쿠노구 샤리지 1가) 사리사 경내에 교사를 설치했다가 1898년에 현재의 장소, 당시 이쿠노무라 린지 1번지(生野村 林寺 1番地)로 이전했다. 1920년대 후반부터 1930년대 전반(쇼와 시대 초기)에는 지역의 아동수가 증가하기 시작했다. 그 지역 아동수의 증가의 원인에는 도일한 조선인 자녀들의 증가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박헌근이 1924년부터 그 학교에 다녔을 가능성이 있다.
소학교를 졸업한 16세의 박헌근은 1930년경 오사카 이쿠노정(東城區, 生野町)에 있는 고등학교에 들어갔다고 전해진다. 오사카시의 동남부에 위치하는 大阪市 生野區(이쿠노구)는 현재 일본 오사카시를 구성하는 24개 구 중 하나이다. 현재 오사카 마쓰바라시 신도 1가 552 (松原市 新堂 1丁目 552)에는 타이쇼(大正) 9년, 즉 1920년 4월 2일 창립된 오사카 부립 이쿠노고등학교(大阪 府立 生野高等學校)가 있다. 그 학교는 타이쇼(大正) 9년, 즉 1920년 7월 31일 당시 오사카부 히가시나리군 이쿠노무라(東成郡 生野村)에 있는 교지를 인수했다. 그러다가 쇼와(昭和) 23년, 즉 1948년 4월 1일 학제 개혁에 의해 오사카 부립 이쿠노고등학교(大阪 府立 生野高等學校)로 전환했다. 그런데 이쿠노고등학교는 1948년 4월 9일에야 남녀공학 학교가 되었다. 그 이전에는 여성들만을 위한 학교였다. 그러므로 박헌근은 이 학교에 다니지 않았다.
콘코토인 고등학교(金光藤蔭高等学校)는 1926년 타이쇼 15년 오사카시 텐노지구에 사립 시즈토쿠 고등여학교(大阪市天王寺区に私立静徳高等女学校)로서 창립되었다. 그리고 1999년에야 남녀공학 학교가 되었다. 그러므로 박헌근은 그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오사카 부립 이쿠노공업고등학교(生野工業高等學校)가 있다. 그가 고등학교 졸업 후 인쇄소에 취직했다는 것은 그가 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을 가능성을 시사할 수도 있다. 그런데 그 학교는 쇼와 15년, 즉 1940년에야 설립되었다. 193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박헌근은 그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오사카 이쿠노구(生野区) 카츠야마 미나미(勝山南)2-6-38에 자리잡고 있는 카이세이가쿠엔 고등학교(偕星学園高等学校)가 있다. 이 학교는 쇼와 4년, 즉 1929년 2월 19일에 갑종상업학교 차화상업학교(此花商業學校)로 설립허가를 받았다. 4월 1일에는 야간부도 설치되었다. 그런데 그 학교는 개교 당시 이쿠노구가 아닌 히가시요도가와구(東淀川区) 長柄中通 3丁目(현재의 北区 長柄中)에 있었다. 1949년에야 현재의 이쿠노구의 장소로 이전했다. 박헌근이 이쿠노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녔다면, 이 학교에 다닐 수 없었다. 박헌근이 이 학교에 다녔을 가능성은 있겠지만, 당시 이쿠노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4Km로 걸어서 통학하기에는 좀 멀었다. 그러나 자전거로 다녔다면 가능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렇든 현재의 이쿠노에 있는 고등학교들 중에 박헌근이 다녔을 가능성이 있는 학교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 이유를 추정해 보면, 첫째로 그 학교가 당시에는 이쿠노에 있다가 다른 곳으로 이전했기 때문이거나, 둘째로 당시에는 이쿠노에 있었으나 후에 폐교되었기 때문이거나, 셋째로 박헌근이 이쿠노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지 않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IV. 오순절 입문
안타깝게도 박헌근이 고등학생일 때 아버지가 병환으로 별세했다(1934년 20세?). 당시는 공황이 일본을 강타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였다. 1932년 나고야 여름 실업노동자로 등록된 수 약 1만 명 중 90%가 조선인 ‘자유노동자’(일용노동자)였다. 1927년의 금융 공황으로 시작해 1929년의 세계 공황을 거쳐 1930년에서 1931년에 최고에 달한 일본 쇼와시대 초기의 일련의 공황, 이른바 ‘쇼와(昭和) 공황’을 계기로 한 대량 실업의 파고를 조선인 노동자들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런 현실 상황을 감안하여 1934년의 각의에서는 조선인의 일본 도항을 억제하고 일본 내에서의 통제를 강화하는 결정을 내렸다. 아마도 부친은 이 어려운 시기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과로하다가 병들었고 별로 치료를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이다.
박헌근이 다니던 교회 성도들이 정성으로 그의 부친의 장례를 잘 마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온 가족이 그 극진한 봉사에 감동해 예수를 영접했다. 그가 다니던 교회는 “이카이노조선인교회”(Ikaino Korean Church)였을 것이다. 최재웅은 박헌근이 고등학생시절부터 이카이노(猪飼野)의 조선인 오순절교회에 출석했다고 썼다. 그것은 정확한 정보일 것이다. 1933년경 오사카에는 단일성 오순절주의자 레오나르드 쿠트(Leonard W. Coote)에 의해 설립된 일본 사도적 선교회 소속의 교회 4개가 있었다. 또한 곽봉조가 목회하던 이카이노조선인교회도 있었다. 곽봉조는 쿠트가 세운 이코마성서학원에 1929년에 입학하여 1933년에 졸업하고, 1933년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던 오사카, 이카이노(猪飼野)에 “이카이노조선인교회”(猪飼野朝鮮敎會, Ikaino Korean Church)에서 목회했다. 이카이노교회가 설립되자 히가시나리에 살고 있던 이주한인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곧 일본인 회중보다 많아졌다. 교회는 잠시 다민족 교회를 유지하려 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결국 조선인들만의 교회가 되었고 곽봉조가 목회하게 된 것이다.
“돼지를 기르는 토지”라는 뜻을 갖는 이쿠노쿠 이카이노초(猪飼野町)의 옛 지명인 “이카이노”는 고대 아스카 시대부터 고대 한반도 특히 백제 유민들이 이곳에서 돼지를 사육하며 살았다고 해서 생긴 명칭이었으나, 1973년 행정구획 변경으로 쓰루하시(鶴橋), 모모다니(桃谷), 나카가와(中川), 다시마(田島)로 분할되면서 그 명칭은 사라졌다. “이카이노”는 해방 전부터 제주도 출신자들을 중심으로 한 재일 한인들(在日韓国人, 자이니치 칸코쿠진)의 집중 거주지였다. 1922년 10월 제주도와 오사카 사이에 정기연락선 기미가요마루(君が代丸)가 운항을 시작하면서 많은 제주도 출신 노동자들이 오사카 이쿠노쿠에 최대 규모의 밀집 지역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1925년 이카이노에서 육지 출신으로 구성된 아리랑단과 제주도 출신 청년들의 충돌이 발생했다. 이 싸움에서 제주 출신들이 이긴 후 다른 곳에서 차별받던 제주 출신들이 이카이노에 모였고, 이곳은 일본 속의 제주도가 되었다. 구다라가와(百濟川)를 개수하기 위해 1913년 3월에 시작돼 1923년에 완성된 연장 2,144미터, 폭 16미터의 신히라노가와(新平野川) 운하 공사를 위해 모인 조선인이 그대로 살게 되면서 마을이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당시 오사카 거주 조선인들은 일본에서 가장 많았다. 예를 들면, 1925년에 동경에는 9,989명의 조선인이 거주했는데, 오사카에는 34,311명이 거주했다. 1928년에 동경에는 28,320명의 조선인이 거주했는데, 오사카에는 55,290명이 거주했다. 그들은 이카이노와 그 주변에 거주하며 오사카 지역에서 발달된 고무공업의 하청 노동에 다수 종사하였으며, 그 외 토목 노동자, 노점상 등도 적지 않았다. 특히 노점상은 한인들이 집중 거주함에 따라 조선에서 각종 생활용품을 반입하여 판매하는 사람들이었다. 1930년대 말에는 이미 이카이노에 조선시장이 형성되어 있었고, 명태, 고춧가루 같은 식료품부터 혼수 용품까지 거주 한인의 생활 용품을 파는 점포가 약 200개에 달할 정도였다.
이렇게 이카이노에는 조선인들이 많이 살았고, 그들을 위한 교회가 필요했으며, 이 필요에 부응하여 쿠트에 의해 이카이노조선인교회가 설립되었고 곽봉조가 이어받아 목회했고, 고등학생 과정 중이던 박헌근이 이 교회에 출석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이카이노의 재일조선인들 중 많은 사람들이 공산주의에 빠져들었고, 1928년 코민테른이 “일국 일당주의” 원칙을 발표한 후 1931년경부터 일본 공산당 등 일본의 당조직에 합류했으나, 박헌근은 그렇지 않았고, 기독교 오순절 신앙에 깊이 들어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급격하게 집안이 어려워졌다. 그래서 박헌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 인쇄소에 취직해야 했다(1935년 21세?). 그는 다른 사람보다 영특해서 글씨를 빨리 쓰고 영어와 한문에 능해서 다니던 인쇄소에서 인정을 받았다. 그는 인쇄소에서 일을 하면서도 하나님을 믿는 일에도 열심을 다했다. 직장생활을 하던 중 그는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았다.
V. 오순절 신학 공부
박헌근은 23세가 되는 1937년에 “일본이코마성서학원”(日本生驅聖書學院)에 입학했다. 이카이노교회의 많은 젊은이들이 이코마성서학원에 들어가기를 원했었다. 쿠트는 일본인들보다 조선인들이 복음에 더 개방적이고 열성적이라는 사실에 감명을 받았고, 그래서 그는 조선인 지원자들을 그의 학교에 흔쾌히 받아들였다.
박헌근은 높지 않은 동산 꼭대기에 자리 잡은, 그래도 이코마가 내려다 보이는 학교 기숙사에서 지냈거나, 이카노에 있는 집에서 이코마의 학교까지 기차로 통학했을 것이다. 이코마성서학원은 오사카(大阪)에서 동쪽으로 30Km 거리에 있는 나라현 이코마시 아마구치초 95(奈良県 生駒市 俵口町 95)에 자리 잡고 있다. 오사카의 이카이노에서 이코마까지는 오사카와 나라 사이를 잇는 철도 “긴테츠 나라선”(近鉄奈良線)이 놓여있다. 나라선은 킨테츠의 직계전신인 오사카 전기궤도에서 최초로 지어진 노선으로 기존의 오사카~나라간 노선들이 우회했던 오사카와 이코마 사이에 남북으로 놓인 이코마산을 일직선으로 뚫어 거리와 시간을 단축하는 것에 사운을 걸었다. 3km가 넘는 기다란 터널을 짓는 것은 당시로서는 큰 모험으로 엄청난 자금이 소모되었으며 심지어 사장이 스스로의 사비까지 털었다. 또한 이 공사에는 조선에서 징용되어 온 인부들이 많이 동원되었고 공사 도중 사고로 인해 많은 인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러한 우여곡절 끝에 당시 일본에서 두 번째로 긴 터널이자 일본 최초의 표준궤 터널인 이코마 터널이 완공되면서 우에혼마치~나라 구간의 노선이 1914년에 개통되었다. 터널을 벗어나자마자 있는 이코마역에서 이코마성서학원까지의 직선거리는 약 2Km로서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다.
박헌근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는 그 여동생의 이름을 “박운애”라고 전하며, 최상근은 “박은애”로 전한다. 동생은 오빠가 이코마 신학교 2년 동안 공부할 수 있게 학비를 지원했다. 동생은 후에 박헌근이 참석하는 가운데 이종희 장로와 결혼했다. 박헌근은 신학교에서도 남다른 영성과 기도생활을 잘해서 많은 신학생들이 모여서 함께 기도했다. 성령 충만했던 박헌근은 주일학교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구령의 열정으로 노방전도에 전심을 다했다. 열심히 기도와 전도하던 박헌근은 질병으로 인해 힘들어 하는 성도들을 치료해주었다. 그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서 질병과 귀신들린 많은 성도들이 고침을 받았다.
박헌근이 이코마성서학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에 대해 박헌근 자신이 언급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 학교 교장과 졸업생의 언급들에서 그가 그 신학원에서 배운 것을 추정할 수 밖에 없다. 일본이코마성서학원(日本生驅聖書學院)를 1929년에 설립한 사람은 레오나르드 쿠트(Leonard W. Coote)였다. 22세의 영국인 쿠트는 1913년 10월에 일본에 가서 한 회사의 사원이 되었다. 쿠트는 신앙고백을 했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나지 못했었다. 그러다가 1914년 2월 20일에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미를 깊이 알게 되었다. 그리고 1917년 11월 19일 영국 오순절 선교사 윌리엄 메리 테일러(William and Mary Taylor)가 이끈 집회에서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 그 후 강력한 오순절 사역을 펼쳤다. 그런데 쿠트는 프랑크 그레이(Frank Gray)를 통해 1920년경에 오순절 운동의 한 분파이며 이단 시비를 받고 있는 단일성 “오직 예수 이름”(Jesus’ name only)에 전적으로 가담했다. 그는 1929년에 미국 하나님의성회를 탈퇴하고 “니혼펜테코스테교가이”(日本ペンテコステ教會, The Japan Pentecostal Church)라는 이름의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으며, 일본 사도적 선교회(Japan Apostolic Mission), 그리고 이코마성서학원도 설립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창립될 당시 그 안에서 삼위일체주의자들과 단일성주의자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었으며, 결국 단일성주의자들이 1917년에 사도적 성회들의 총회(the General Assembly of the Apostolic Assemblies), 그리고 1945년에 국제 연합 오순절 교회(United Pentecostal Church International)이라는 새로운 교단을 형성했다. 더함으로부터 시작된 오순절운동 안에서 그리스도께 집중은 교회론과 관련된 침례의식을 중심으로 한 “오직 예수 이름 침례”(Jesus Only Baptism)로 이어졌다. 더함의 시카고 Full Gospel Mission에서 방언이 동반되는 성령침례를 받았던 벨(E. N. Bell), 그리고 고스(Howard A. Goss) 등은, 비록 바로 돌이키긴 했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이 아닌 “오직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재침례를 받기도했다.
예수 이름 단일성 운동은 교회론에서 삼위일체론으로 확대되어 “단일성 오순절주의”(Unitarian or Oneness Pentecostalism)가 되었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三位一體)”(Una substantia tres personae)와 동방교회의 “삼체일본(三體一本)”(Μία οὐσὶα τρεὶς ὑποστασὶς)을 어거스틴이 두 가지 논의들의 장점만 취하여 정리한 “삼위일본(三位一本), 한 본질에 세 위격들”(Una essentia tres personae, One Nature, Three Persons)은 정통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단일성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께 지나치게 집중하여 침례를 “예수”라는 이름으로 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선을 넘어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혹은 위격)은 하나(one person)인데, “그 인격은 예수”라는 이단적 양태론(Modalism)을 주장했다.
그런데 쿠트는 일단 단일성 오순절주의가 주장하는, 사도행전을 따르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Christ)라는 물침례형식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예수가 성부 또는 성령으로 나타난 한 하나님(Jesus is the one God who is manifested as the Father or the Holy Spirit)이라는 단일성 오순절주의의 양태론적(Modalistic) 신론에 동의하지는 않았다. 쿠트가 1936년에 영국의 한 오순절적 교단인 사도적 교회(the Apostolic Church of Great Britain)에 가입한 것은 그가 삼위일체에 대한 전통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는 사도적 교회에 가입하고 일곱 명의 영국 사도적 교회 선교사들을 그의 일본 사도적 선교에 받아들였다. 영국 사도적 교회는 신앙진술문 제1항에서 “한 분 하나님과 그분 안의 삼위의 일체”(the Unity of the Godhead and the Trinity of the Persons therein)를 믿는다고 고백했다. 이 신앙진술은 1920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그리고 교단명도 Apostolic Church in the United Kingdom으로 조금 바뀌고, 신앙진술문 제1항의 표현은 바뀌었지만 그 내용은 오늘날에도 동일하게 남아있다(“The one true and living God who eternally exists in three persons in unity: Father, Son and Holy Spirit”). 쿠트는 후에 문제가 된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것을 제외하고는 1940년에 자신이 사도적 교회의 모든 신조들을 인정했다고 말했다.
쿠트의 이런 신학은 오사카 재일조선인이며 그의 수제자였던 곽봉조에게도 전수되었다. 1933년 4월에 쿠트가 설립한 이코마성서학원의 첫 졸업생 아홉 명이 3년 만에 배출되었는데, 그중에 조선인 곽봉조(郭鳳祚)가 있었다. 곽봉조는 신학생시절에 다른 학생들보다 뛰어났었다. 예를 들면, 그는 졸업시험에서 100점 만점을 받았다. 놀란 교장 쿠트와 교수들이 그의 시험지를 다시 철저하게 살펴보았다. 그러나 하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곽봉조가 쿠트를 비롯한 출제자들이 원하는 답을 일본인 학생들이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제출했던 것이다. 그는 쿠트의 가르침을 누구보다 철저하게 받아들였던 것이다. 그래서 곽봉조의 물침례론, 삼위일체론은 쿠트의 물침례론, 삼위일체론과 매우 유사했을 것이다.
곽봉조에 따르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라고 명령하셨는데(마 28:19), 제자들은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었다(행 2:38, 8:16, 10:48, 19:5). 그리고 구약에서는 “하나님 또는 여호와”라는 명칭이 삼위 하나님(세 위격들)을 지칭했던 것처럼, 그와 동일하게 신약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명칭이 삼위 하나님(세 위격들)을 지칭했다. 주는 성부 하나님과 관계가 있고, 예수는 예수 인격이며, 그리스도는 성령과 관계가 있다. 결과적으로 곽봉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것은 삼위일체의 이름으로 침례를 주는 것과 동일하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이다.” 김익진처럼 곽봉조가 문제가 되는 물침례 형식을 제외하고는 정통 삼위일체론을 버리지는 않았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1973년에 마일스 선교사와 함께 서대문순복음교회를 설립했으며 곽봉조의 사위 소교민은 위와 같이 곽봉조에게 배운 것을 상기하며 곽봉조가 삼위일체론을 믿었다고 주장했다.
곽봉조가 정통 삼위일체론을 배격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설립에 동참했던 1953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당시 신조 제2항이 증명해 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 신조 2항은 “우리는 삼위(성부, 성자, 성신)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라고 고백한다. 곽봉조가 이 제2항에 동의했기 때문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에 참여했을 것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이 신조에는 물침례에 대한 항목이 없다는 것이다. 1916년에 미국 하나님의성회가 채택했던 근본진리진술문의 제11조는 물침례 (Baptism in Water) 에 대한 항목이었다. 아마도 박성산과 곽봉조가 합의하여 연합에 방해가 될 소지가 있는 이 항목을 누락시켰을 것이다.
박헌근은 이렇게 철저하게 쿠트의 신학을 전수받은 곽봉조가 담임하던 이카이노조선교회의 성도로서 곽봉조의 설교를 수없이 많이 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박헌근은 이코마성서학원에서 쿠트로부터 직접 곽봉조가 배웠던 것과 동일한 것을 배웠을 것이다. 그러므로 박헌근의 성령침례론, 물침례론, 그리고 삼위일체론은 그 학교의 설립자 쿠트와 동문 선배 곽봉조의 성령침례론, 물침례론, 그리고 삼위일체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추측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박헌근은 일본 이코마성서학원 재학 중에 담임목사인 곽봉조의 주례로 최예임과 결혼했다. 박헌근은 최예임에게 이성적으로 큰 호감을 보이지는 못했지만, 박헌근의 어머니가 최예임이 튼튼하고 건강하게 생겨서 좋다고 하시면서 결혼을 추진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1939년 말(25세)에 이코마성서학원 3년간의 전 과정을 이수하고 졸업했다. 최재웅은 박헌근이 신학원 재학 중에 결혼했다고 전하는데, 30년사는 신학원을 졸업한 후에 곽봉조의 주례로 결혼했다고 전한다.
이코마성서학원을 졸업한 박헌근은 탁월한 설교가가 되어 있었다. 박헌근이 이코마성서학원을 졸업하고 1년 후, 1940년 말에서 1941년 초에 미국에 간 쿠트 대신 오사카의 교회들과 이코마성서학원을 돌보고 있던 호주 선교사 올리브 휴스(Olive Hughes)의 부인(Miss Hughes)은 곽봉조(Kaku)가 폐렴(pneumonia)에 걸려 오사카에 있는 작고 좁게 기다란 방, 즉 한 나가야 방에서 혼자 몹시 앓고 있는데, 그의 아내와 가족은 조선에 있다는, 즉 곁에서 간호해줄 사람들이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하이든(Hayden) 선교사가 곽봉조에게 병문안 간 소식을 전했다.
우리는 가여운 곽 선생(Kaku Sensei, 廓 先生)이 오사카의 작고 좁은 방에서 폐렴에 걸려 몹시 앓고 있다는 것과 그의 아내와 가족은 한국에 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는 그에 대해 마음이 아프고, 그가 정당하게 대우를 받아왔는지 돌이켜 봅니다. 하이든 형제가 오늘 밤 일찍 그를 방문하기 위해 이카이노 집회에 갔습니다.
휴스 부인은 그 선교보고서에서 곽봉조의 폐렴소식만 전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1941년에 1월 3일에 이코마성서학원에서 열렸던 신년연합부흥회 소식도 전했다. 그녀에 따르면, 그 집회에는 조선인들도 참석했을 뿐만 아니라 한 조선인이 집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그 조선인 인도자는 “Boku San”으로 소개되었다. 휴스 부인이 언급한 “보쿠 상”에서 “보쿠”는 예배를 인도하던 사람의 성(姓)이고, “상”은 초면이거나 친하지 않은 타인을 지칭할 때, 또는 일반적인 경칭으로 성 뒤에 붙이는 호칭 “さん”일 것이다. 그런데 “보쿠”는 “박”에 대한 일본식 발음이었을 것이다. 그 신년집회를 인도했던 조선인은 이코마성서학에서 훈련받고 졸업한 박헌근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휴스 부인은 박헌근으로 추정되는 조선이 그 집회를 인도하면서 스스로 말을 한 것이 아니고, 그가 성령으로 충만해지자 말이 저절로 넘쳐서 흘러나왔다고 전했다. 그 정도도 그 조선인, 보쿠 상은 탁월한 설교가였다.
우리는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었습니다. 조선인들은 온 마음을 다해 외치며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성경학교에서 훈련시켰던 사람들 중에 한 사람) 보쿠 상(Boku San)은 집회를 인도하면서 거의 입 밖으로 말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그는 그저 [말이] 넘쳐서 흘러나오기까지 충만해졌을 뿐이었습니다. 그 집회는 모든 사람들이 함께 진정으로 주님을 찬양하는 시간이었습니다.
휴스 부인이 알린 것처럼 하이든과 마틴이라는 선교사들이 곽봉조를 병문안하기 위해 이카노조선교회에 갔다. 그들은 담임 목사가 병들어 교회를 이끌어갈 수 없기 때문에 교회가 위축되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교회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자기들의 예상이 빗나가는 경험을 했다. 그들은 담임 목사가 제대로 이끌어가지 못하는 데도 교인들이 전과 다름없이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했다. 그들의 궁금증은 그들이 정확한 발음은 아니지만 “복 상”(Bok San)이라는 사람이 예배를 인도하는 것을 보면서 풀렸다.
저[하이든]는 최근 몇 번 이카이노 교회를 방문했습니다. 여전히 저녁 예배에 오십 명에서 육십 명이 참석하고 있습니다. 그 교회 수요예배에 참석한 것은 이번 주가 처음이었습니다. 마틴도 함께 갔습니다. 그곳에는 우리 외국인을 제외하고 스물 두 명이 있었습니다. 복 상(Bok San)이, 그의 이름이 무엇이든, 예배를 인도했습니다. 그는 이 제국에서 내가 본 그 어떤 동양인보다도 더 미국인처럼 설교하는 활기 넘치는 졸업생입니다.
“복 씨”의 활기차고 뛰어난 설교가 곽봉조의 부재를 상쇄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예배를 인도하고 있던 “복 씨”는 바로 박헌근이었다. 스스로 쓴 것처럼 그의 이름을 잘 몰랐던 하이든이 “박”(朴)을 “복”으로 잘못 알아들었던 것이다. 휴스 부인은 “박”을 “보쿠”(Boku)라고 표기했고, 하이든은 “복”(Bok)이라고 표기했다. 27세의 박헌근이 폐렴으로 약해진 32세의 곽봉조 대신 이카이노조선인교회의 예배를 인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이든은 박헌근이 이코마성서학원의 “활기 넘치는 졸업생”(lively graduate)이라고 소개했다. 그리고 하이든은 박헌근의 설교는, 곽봉조를 포함하여, 자기가 그때까지 들었던 동양인들의 모든 설교들 중에서 가장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박헌근이 “미국인처럼”(like an American) 설교했다는 것은 그가 일본어가 아닌 영어로 잘 설교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일본어로 설교했지만, 미국인이 설교하는 것처럼 잘했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둘 중에 어떤 경우일지라도 박헌근이 미국인도 놀랄만큼 설교하는 뛰어난 설교가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VI. 귀국과 장로교회 봉사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항모를 이륙한 전투기와 폭격기들이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 태평양함대 기지를 폭격함으로써 태평양전쟁이 발발했다. 일본 정부는 선교사들을 포함한 외국인들에게 본국으로 돌아가라는 명령을 내렸다. 쿠트도 호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모든 교회들을 하나의 연합교회 안에 통합시켜 버렸다. 이카노조선인교회도 예외가 아니었고, 교회 건물은 징발당했다. 쿠트가 이끌던 조선인 신자들과 교역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대부분 조선으로 돌아왔다.
28세의 박헌근도 1942년에 오사카를 떠나 조선으로 향했다. 그 신자들과 교역자들과 박헌근이 일본을 떠난 것은 이주조선인 동원과 어느 정도 관련이 있었을 것이다. 협화회는 이주조선인의 ‘동원’을 적극적으로 모색하기 시작했다. 오사카부 ‘내선융화사업조사회’의 경우 1941년 3월 13일 총회를 열고 일본 내에서 오사카 지역으로 전입하는 숫자가 현저히 증가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주조선인에게 노동수첩을 소지하게 할 것을 주문했다. 그리고 이동방지령을 적용하여 노무수급의 원활 적정을 도모할 것과 국민징용령을 이주조선인에게도 실제로 적용하여 시국산업에 취업시킬 것을 권했다. 이주조선인의 본격적인 동원은 이른바 ‘모집’에서 ‘관 알선’으로의 이행과 맞물려 구체화되었다. 1942년 2월 13일 ‘조선인 노무자 활용에 관한 방책’이 각의결정에 의해 실시된 것은 이런 변화의 시작이었다.
귀국한 박헌근은 대전으로 갔다. 그리고 일본에서 배웠던 인쇄 기술로 “소화인쇄소”에 취직했다. 왜, 그가 출생지에서 가까운 광주, 목포, 또는 순천 등의 전라남도의 도시들이나, 더 번화하고 기회가 많았던 경성으로 가지 않고 충청남도 대전으로 간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그리고 귀국하여 바로 목회를 하지 않고 취직을 했는지에 대한 이유도 알려진 것이 없다. 아마도 조선에 쿠트가 세운 교단이 존재하지 않았고, 조선에서도 교단들이 관제 교단 하나로 통합되었기 때문에 목회를 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귀국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위해 취직을 우선적으로 고려했을 것이다. 그리고 취직한다면, 기술을 갖고 있던 인쇄업을 우선적으로 생각했을 것이며, 당시 인쇄업이 성행하던 대전을 택했을 것이다. 또는 그가 고등학교 졸업 후 일했었던 일본 인쇄소에서 대전의 인쇄소를 소개해 주었을 수도 있다.
그가 취직한 “소화인쇄주식회사”(昭和印刷株式會社)는 1931년부터 1940년까지 신문에 광고했었다. 『조선신문』 1931년 1월 7일자 4면 하단에는 신년을 축하하며 대전의 “昭和印刷株式會社” 광고가 실렸다. 1940년 10월 5일에는 『경성일보』에 조선대박람회를 축하하며 “昭和印刷株式會社” 광고가 실렸다. 그 광고에 나타난 소화인쇄소의 주소는 “대전부 영정 1정목”(大田府 榮町 一)이었다. 그리고 소화인쇄소의 사장은 “고노 토요”(增野豊)였다.
박헌근은 대전제일장로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주일학교 부장과 청년회장으로 봉사하면서 새벽예배와 주일학교 집회를 인도하고 기도할 때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체험했다. 그가 기도회를 인도할 때 강대상이 진동하고 교회 안에 있던 성도들도 성령 충만의 은혜를 체험하였다. 대전제일장로교회(현재는 대전제일교회)는 1938년 2월 청주제일교회에서 대전에 교회를 세우기 위한 전도회를 조직함으로서 잉태되었다. 1938년 8월 5일 “대전부 영정 1정목”(현 정동 37번지) 소재 양철가옥 1동을 900원에 교회당으로 매입하고 이전했다. 1945년 12월 28일 해방과 동시에 일본인 금강교 자리(현 중동 16번지)를 입수하여 이전했다. 박헌근이 대전으로 갔던 1942년경에 소화인쇄소와 대전제일장로교회는 “대전부 영정 1정목” 안에서 서로 인접한 거리에 있었던 것이다.
1945년 8월에 태평양전쟁이 끝나면서 소화인쇄소 창업자 “마쓰노”(松野?)는 평소 정직했던 박헌근을 관리위원장으로 세운 뒤 31세의 그에게 인쇄소를 맡기고 일본으로 갔다. 대전 동구에 인쇄 골목, 혹은 인쇄특화거리라고 부르는 구역이 현재도 있다. 인쇄와 관련한 다양한 업종이 모인 곳이다. 대전인쇄특화거리라 부를 수 있는 삼성동과 정동, 중동 지역은 모두 대전역 인근이다. 일제시대 그즈음에 도심을 형성한 곳이다. 당시 첨단 지식 산업이라 부를 수 있는 ‘인쇄 산업’이 이곳을 중심으로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물류를 책임질 대전역도 가깝고 인쇄 물량이 민간 영역보다는 아무래도 많았을 충남도청도 지척이었다. 이런 특성은 한국 전쟁을 거친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인쇄 산업이 활황일 때, 대전은 서울, 대구와 함께 전국 3대 인쇄거리라 부를 만큼 인쇄 산업이 특징적이었다.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는 “그와 뜻을 같이하는 제일교회 장로들과 함께 1946에 대전 삼성장로교회를 창립하게 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대전제일교회 교회연혁에 따르면 “1947년 12월 민영호 장로[를] 중심으로 제3교회[를] 분교”했다. 보다 정확하게는 1947년 11월 14일 삼성 2동 303-5번지에서 민영호 장로 외 12명이 “대전3교회”란 이름으로 창립 예배를 드림으로 출발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49년 3월 6일 “삼성교회”로 교회 명칭을 변경했다. “삼성교회”는 2013년 4월 7일에 “더드림교회”(The Dream Church)가 되었다. 33세에 삼성장로교회의 개척 멤버가 된 박헌근은 삼성교회에 주일학교를 조직하여 어린이들의 신앙교육에 전념했다. 그가 열심을 다해 가르치자 그 주일학교는 250명가량으로 성장했다.
마쓰노로부터 물려받은 회사는 자본과 규모가 상당했지만, 박헌근은 회사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맡겨 버리고 오직 주님의 일에 열심을 다했다. 특히 34세의 그는 1948년 10월 19일에 발생한 여순사건 때 동인, 동신 두 아들을 공산주의 반란군인 안재선에 의해 친미, 예수쟁이란 이유로 자행된 총살로 인한 순교의 재물로 바쳤던 손양원 목사가 대전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오자 참석하여 은혜와 감동을 받았고 그들의 순교를 사모했다. 그런데 손양원은 해방 후 부흥회를 5년 남짓하여 약 60여 회를 인도했는데, 공산주의를 버리고 민주주의를 택할 것을 설교하곤 했다. 예를 들면, 여순사건 1년 전인 1947년 봄에 부산의 영도교회(현 제일영도교회)에서 집회할 때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비교하며 설교했다.
여러분 공산주의가 무엇입니까? 공산주의는 남의 것 빼앗아 먹자는 주의입니다. 같이 공평하게 나누어 먹자가 아닙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강제입니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성경의 정신입니다. 민주주의는 이것 맛보시오 하면서 나눠 먹는 주의입니다. 내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 사랑으로 나누어 먹는 주의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정신 바짝 차리십시오. 어느 주의가 좋습니까?
이런 아버지의 사상을 그 아들들도 물려받았던 것이다. 마음이 어질었던 박헌근은 손양원이 언급했던 하나님으로부터 온 민주주의를 실천하며 살았다. 최상근에 따르면, 박헌근이 고향 마을에 다녀올 때면 속옷 차림으로 집에 들어서는 경우가 많았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을 보면 입고 있던 외투며 저고리를 다 벗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박헌근은 대전에도 순천이나 광주, 군산처럼 남장로회 선교지부가 생기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민영호 장로, 이종희 집사와 뜻을 합하여 순천에서 활발하게 선교하던 보이열선교사(Rev. Boyer, Elmer Timothy)에게 청원서를 보냈다. 청원서를 쓰는 일은 영어를 잘하는 박헌근이 담당했다. 이에 보이열선교사가 대전을 둘러보고 수락하여 대전에도 지부를 설립하게 되었다. 한국에 와서 활동한 선교사들의 일반적인 선교 패턴을 보면, 먼저 선교 대상 지역의 중심도시에 그들만의 생활공간을 건설하고, 그 안에 병원과 학교, 그리고 교회를 세워나가는 방법을 취하였다. “스테이션”(station, 선교거점 또는 선교지부)은 선교사들의 주거와 전도, 의료, 교육의 기능이 하나의 유기적인 조합을 이루는 복합선교지구인 것이다.
북미해외선교부회의는 1949년 2월에 모인 회의에서 한국에서 시행할 “5개년계획”(Five Year Program of Advance)을 결의하고 5개년 사업의 일부로 선교부가 연합해 대전에 새로운 선교센터를 세우기로 하고 이것을 ‘대전프로젝트’라고 불렀다. 대전은 연합사업을 위해 지리적으로 적합했다. 대전은 대구와 부산을 서울로 또한 광주와 목포를 연결하는 중심적 위치에 있었다. 대전에는 오직 감리교 선교지부만이 소규모의 유아원을 운영하고 있었고, 구세군이 운영하는 병원은 남쪽으로 30마일 떨어진 곳에 있었다. 대전은 북장로교회와 남장로교회의 선교부의 합류지역이었고 감리교 선교지역이었다. 따라서 교단연합 선교센터를 짓는 최적의 장소로 여겨졌다. 남장로교회도 이 사업에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참여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참여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던 남장로교회는 소규모로 선교지부를 대전 삼성동 387번지에 있던 일본적산 가옥에 세우고 협력할 준비를 갖추었다. 이 남장로회의 소규모 대전선교지부 설립에 박헌근 장로가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이다.
박헌근은 선교사의 설교를 통역하기도 했다. 그의 딸 박청자에 따르면, 지금의 한남대학교 자리에서 한 선교사가 인도하는 부흥회가 열렸다. 그때 박헌근은 그 선교사의 설교를 통역했다. 선교사에게 박헌근이 쓴 편지가 영문편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박헌근의 장로 피택이 모호하다. 총회순교자기념회는 박헌근이 1946년에, 즉 대전제일장로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대전제일교회의 연혁에 나타난 최초의 장로 장립은 1944년 8월 6일에 있었고, 이때 장로로 취임한 사람은 김원배, 전일헌이었다. 1947년 5월 17일에 실시된 두 번째 장립식에서 피택된 사람은 민영호와 오진문이었다. 최상근은 1947년에도 박헌근이 집사였다고 주장했다. 그런 주장은 삼성장로교회의 기록에서 입증된다. 더드림교회는 창립 70주년을 맞아 교회 내에 역사자료실을 만들었다. 그 역사자료실에는 1948년 12월 16일에 개최되었던 제1회 당회록 원본이 전시되고 있다. 1회 당회록 1페이지 끝부분은 “1회 부록”인데 그 부록에는 1948년 12월 23일 오전 11시 30분에 투표를 통해 집사로 피택된 남성들의 명단이 있다. 그 사람들은 “지남규, 송장용, 장환갑, 박헌근(朴憲根), 김종만, 이종희, 이정찬” 7인이었다. 박헌근은 1948년 12월 23일에 삼성장로교회의 집사가 된 것이다. 이 기록은 한국에 남아있는 박헌근에 대한 당시의 유일한 문서 자료다. 집사로 함께 피택된 이종희는 박헌근의 여동생 박운애와 결혼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1968년 11월 1일에 삼성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었다.
최상근에 따르면, 박헌근은 삼성장로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되었다. 그러나 삼성장로교회(현 더드림교회)의 연혁에는 박헌근의 장로 임직이 나타나지 않는다. 상성장로교회의 제1회 장로임직은 1953년 1월 4일에야 있었고, 이때 임직을 받은 사람은 권순룡이었다. 박성산은 1951에 박헌근을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소개할 때 “장로”(elder)라고 칭했다. 그런데 1948년 12월 23일에 집사로 피택된 박헌근이 1949년 11월사이에, 1년 만에 삼성교회에서 장로로 피택받을 수 있었을 가능성은 없을 것 같다.
VII. 오순절 목회
대전을 중심으로 장로교 평신도 활동을 하던 박헌근은 순천에 세워진 순천오순절교회에 담임 교역자로 부임하면서 한국에서의 오순절교회 첫 번째이며 마지막 목회를 시작했다. 순천오순절교회의 설립자는 박귀임이었다. 박귀임의 오순절적 신앙의 맥은 거슬러 올라가면 곽봉조에까지 이른다. 곽봉조가 목회하던 일본 이카이노조선인교회 성도들 중에 박자신(朴慈信)이라는 부인이 있었다. 박자신은 전남 무안군(현재 신안군) 암태면에서 출생했다. 미모뿐만 아니라 머리도 좋았고, 말도 잘했던 그녀는 임구만이라는 부자와 결혼했다. 임구만은 그녀를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녀는 곽봉조의 설교에 감화를 받고 오사카조선교회의 성도가 되었다. 적극적이고 성실한 성격의 박자신은 자신의 신앙을 전남 해남에 있는 그의 시어머니 이복덕(李福德)에게 전했다. 오순절 신앙을 받아들인 이복덕은 그 후 방언, 예언, 신유 등 마가의 다락방의 불같은 오순절 역사를 해방전 전남일대에 일으켰다. 수 많은 사람들이 이복덕의 설교에 감동감화를 받자 그녀가 출석하고 있던 장로교회에서 이복덕을 출교시켰다. 그녀를 따르던 신자들이 힘을 모아 집회처소를 마련하여 예배를 드렸다.
이복덕의 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은혜와 감화를 받았다. 그 사람들 중에 목포에 살고 있던 표씨 부인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해태 생산조합장이었던 남편을 두었던 그녀는 자신의 집에 예배처소를 마련하여 사람들을 모아서 함께 예배를 드렸고, 그 예배에서는 방언, 예언, 신유 등의 오순절적 역사가 일어났다. 이 가정예배에 고향으로 내려와 있던 박귀임이 우연한 기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감리교인이었던 박귀임은 표씨 부인의 설교를 듣고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경험하고 오순절주의자가 되었다. 그때가 1947년 6월경이었다. 박귀임은 재질과 언변과 열정이 특출하여 점차 표씨보다 더 강력한 역사를 나타냈다.
박귀임은 목포시 옹금동에서 1912년 1월 9일에 태어나 상업에 종사하는 문성원과 1938년 결혼했다. 줄곧 병마에 시달리던 그녀는 친구의 딸의 전도를 받아 어릴 적 신앙을 회복하고 논산감리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1943년 이성봉 목사의 집회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고 4년 후 표씨 부인을 만났던 것이다.
박귀임은 여수와 순천을 휩쓸었던 공산주의적 여수 반란 사건이 일어나자 순천 철도청에 조역과 차장으로 근무하고 있는 동생 박용덕의 생존 여부가 궁금하여 1948년 늦가을에 순천을 찾았다. 30년사와 최상근에 의하면, 그녀는 순천중앙장로교회에 출석하며 신앙생활을 했다. 그런데 현재 순천에는 순천중앙장로교회가 없고 순천중앙교회가 있다. 그와는 달리 30년사의 또 다른 언급은 그녀가 다닌 교회가 “역전교회”였다고 전한다. 역전교회는 순천제일교회로부터 1945년에 분립되었다. 그 역전교회는 현재 순천승산교회이다. 하루는 박귀임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귀가하려는데 양 장로가 “성령세례”를 받았느냐고 물었다. 그녀가 “받았다”고 대답했더니 양 장로는 자기 부인을 소개했고, 양 장로의 집에서 가정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그 장소가 박귀임의 동생이 기거하던 철도관사였다. 순천중앙교회 연혁에는 양씨 성을 가진 성도가 장로 장립을 받았다는 기록이 없다. 그리고 순청중앙교회는 순천역에서 서북쪽으로 철길과 동천을 건너 멀리 직선으로 2.5Km 거리의 매곡동에 있었다. 양 장로는 순천역전교회의 장로였다. 순천승산교회의 연혁에 의하면, 1945년 8월 25일에 양상준 집사가 일본인 사찰을 예배당으로 개조하여 순천제일교회에서 개척했던 덕암교회와 병합하여 순천역에서 북동쪽으로 1Km 떨어져 있는 조곡동에 순천역전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1948년 3월에 양상준은 순천역전교회에서 장로 임직을 받았다.
박귀임이 이끌어간 이 역전교회 양상준 장로의 가정집회소에서는 성령침례와 놀라운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다. 정신질환자와 늑막염 환자 등이 병고침을 받았다.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더 모여들어 보다 넓은 예배처소가 필요하게 되었다. 교인 중에 이애순이라는 성도가 소방서 옆 소금창고를 하나님께 드렸고, 그곳이 교회가 되었다. 순천소방서는 1945년 8월 15일에 순천 소방조로 발족했고, 이후 1949년 11월 19일 2급지 관설 소방서로 승격했다. 그런데 순천소방서는 1949년 2월 5일 자 호남신문에 서장 성광휘(成光輝) 이하 직원 명의로 신년을 축하하는 광고를 냈었다. 공식적으로 승격되기 전, 1949년 초에도 소방조가 아닌 소방서로 불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소방서의 주소는 드러나지 않는다.
최상근은 위와 같은 “분립설”과는 다르게 “출교설”을 따른다. 그에 의하면, 박귀임과 성도들이 가정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순천중앙장로교회가 박귀임과 그녀를 추종하던 성도들을 출교시켰다. 그러자 박귀임과 성도들은 소방서 옆 소금창고에서 교회를 개척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최상근의 파악은 30년사가 그 근거를 제공했다. 30년사는 이 당시에 대해 “출교”와 “분립”이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정보를 제공했던 것이다. 그런데 30년사의 “출교설”의 근원은 변종호였다. 변종호에 따르면, 박귀임이 남동생의 집을 중심으로 여러 집을 다니며 가정집회를 인도했는데, 순천중앙장로교회 교인들 중 많은 신자들이 이 신앙에 동조하여 참석했다. 그러나 중앙장로교회가 많은 교인들을 책벌하고 축출했다. 그러자 교인들이 두 파로 갈리었고, 박귀임을 추종하는 성도들이 합류하여 교회가 이루어졌다.
그즈음에 한 꿈에 천사가 나타나 박귀임에게 “순천오순절교회”라는 교회명칭을 계시해 주었다. 1949년 3월경에는 순천경찰서 남쪽(변종호에 의하면 북쪽) 뒷담 곁에 있는 남내동의 이층집(변종호에 의하면 적산가옥)으로 예배처소를 옮겼다. 순천경찰서의 위치에 대해 두 가지 언급이 있다. 하나는 대한예수교장로회순천노회의 언급으로서 순천경찰서가 당시에 “중앙동 22-20번지”에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중앙동 22에는 자그마한 필지들만 있어서 경찰서와 같은 공공기관이 있었을 법하지 않다. 다른 언급은 K기독신문에 의한 것이다. K기독신문에 따르면, 당시 순천경찰서는 “남내동 22-20번지”이다. 현재 남내동 22-24번지(북쪽) 외 22-20(남쪽)을 포함하는 8필지(전에 시티관광호텔이 있던 자리)에는 판매시설인 순천 원스퀘어가 자리 잡고 있다. 그 건물의 대지면적은 1,312.25평으로서 제법 크다. 그 정도 크기이면, 당시 그곳에 순천경찰서가 있었을 법하다. 순천오순절교회는 순천경찰서 남쪽 뒤뜰 담과 붙어있었다. 현재의 원스퀘어에서 황금2길 건너 남쪽 부분이다.
순천오순절교회는 주일학교 150명, 장년 200명의 교회로 급성장했다. 교회가 성장해 가자 전임 사역자가 필요해졌고, 박귀임은 당시 전라남도에서 활동하고 있던 곽봉조 목사와 친분관계가 있던 박헌근을 초대 교역자로 청빙했다. 박헌근의 순천오순절교회 청빙에 대해 그의 딸 박청자는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그녀에 따르면, 순천 역전에서 한 부흥회가 열렸는데, 박헌근이 말씀을 전하고 인도했다. 그 부흥회에 매산고등학교의 교감과 서무과장이 참석했는데 큰 은혜를 받았다. 박헌근은 설교를 잘하고 성령충만하게 집회를 인도했다. 이 일을 계기로 순천오순절교회에 초빙되었다고 한다.
그의 부임시기에 대해 1948년설과 1949년설이 존재한다.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와 최상근, 그리고 김성태는 박헌근이 1948년 11월에 부임했다고 보았으나, 변종호와 30년사는 박헌근이 1949년 11월에 부임한 것으로 보았다. 박헌근이 남장로회 선교부를 순천에서 대전으로 옮기기를 청원하는 편지를 1948년 초엽과 중엽에 보냈다면, 그가 1948년에 말엽에 순천오순절교회에 부임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남장로회가 대전지부 설립을 망설이고 있을 때인 1949년 초엽에 재촉하는 청원 편지를 보냈다면, 그가 1948년이 아닌 35세가 되는 1949년 말에 순천오순절교회로 부임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순천오순절교회(현 순복음오순절교회)의 교회연혁 게시판에는 “제1대 교역자 박헌근 장로가 1949년 11월에 부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박헌근이 1948년 12월 23일에 대전 삼성교회에서 집사로 피택되었다는 삼성교회 첫 당회록 부록의 기록은 박헌근이 1948년 12월 말에도 여전히 대전에 있었다는 것을 입증한다. 따라서 박헌근은 1949년 11월에 순천오순절교회에 부임했다.
그가 부임하자 뜨거웠던 순천오순절교회는 더욱 뜨거워져 기도와 전도 성령운동을 통해 350여 명이 모이는 교회로 더욱더 성장했다. 변종호는 “체격과 풍모가 신비형으로 생겼고 기도와 성경읽기에 열중하는 박 장로는 순천교회에 온 이후로 더욱 오순절적 은사를 사모하고 깊은 명상과 기도생활에 열중하고 있었다”라고 당시의 박헌근을 묘사했다. 박헌근이 예배를 인도하고,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할 때면 방언과 신유 등의 오순절적 역사가 계속해서 일어났다. 박헌근은 이 시기에 다음과 같은 설교를 했다고 전해진다.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는 송사리를 보십시오. 이 작은 물고기가 흐르는 물을 거슬러 올라 갈 수 있는 것은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큰 물고기라 할지라도 죽은 물고기는 흐르는 물에 휩쓸려 내려갈 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우리의 영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고 살아있으면 모든 고난을 이기고 하나님 나라에 이를 것이지만 우리에게 살아있는 영이 없다면 육신은 살아있다 할지라도 죽은 자이므로 결코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없습니다.
이즈음에 박성산이 박귀임과 박헌근을 찾아와 오순절교회의 연합을 제안했다. 박헌근은 이 제안에 흔쾌히 화답하고 연합했다. 그 열매로 1950년 4월 9일에 순천오순절교회에서 제1회 대한기독교 오순절대회가 열렸다. 허홍, 윤성덕, 박성산, 김성환, 박헌근, 박귀임 등의 교역자를 비롯하여 약 이백여 명의 신자들이 모였다. 이때 장로취임식과 침례식도 거행되었다.
이 대회에서 박성산은 사회를 보았고 박헌근이 말씀을 전했다. 1932년에 이미 결성되어있던 기독교 오순절교회라는 교단에 새롭게 합류한 것에 대한 답례로 그렇게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 대회에 참석한 교인들 가운데 순천오순절교회의 성도들이 가장 많은 것이 고려되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직책상 박성산 목사, 그리고 합류한 다른 목사들이 있었고 박헌근은 장로였는데, 박성산이나 다른 목사들이 설교하지 않고 박헌근이 설교했다는 것은 일본에서 그의 설교를 들었던 휴스 부인과 하이든도 평가하고 기록한 것처럼 그만큼 박헌근이 탁월한 설교가였다는 것을 말해준다.
VIII. 영광스런 순교
박헌근이 순천오순절교회에 부임한지 1년도 채 지나지 않았던 1950년 여름에 인민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북한 공산군이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남한을 새벽에 기습함으로써 6.25 전쟁이 일어났다. 그런데 박헌근은 피난하지 않고 성도들의 가정을 심방하면서 주일예배에 열성을 다했다. 순천오순절교회에서 서쪽으로 600여 미터 거리의 금곡동 집에 있을 때 비행기 폭격 소리가 나면, 자녀들을 안고 지하실로 대피하곤 했다. 교회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어렵게 되자, 대청마루에서 교회 청년 박종수와 박광수, 가족과 함께 예배를 드렸다. 두 청년은 1956년 3월에 순복음신학교 제2회 졸업생들이 되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에 큰 족적을 남겼다.
박헌근의 차녀 박청자는 대청 마루에서 성령 충만하게 말씀을 전하던 아버지가 어렴풋이 기억난다고 전했다. 공산군이 7월 26일에 순천을 점령하고 갖은 행패를 부리기 시작했다. 19세 청년이었던 박종수는 박헌근에게 찾아가 피난 갈 것을 권했다. 그러자 오히려 박헌근은 박종수에게 피난 가라고 권하며 자신은 교회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박헌근은 비밀리에 성도들을 심방하고 다녔으며, 그럴 때면 방언, 신유 등 오순절적 역사가 뜨겁게 일어났다.
그러던 중 박헌근은 9월 초에 한 성도의 집에 모인 성도들과 함께 조심스럽게 주일 아침 예배를 드리고 있었다. 이때, 공산군 치안대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그는 체포되어 순천경찰서(당시 내무서)로 끌려가 감금되었다. 공산군은 박헌근을 모질게 고문하기도 하고, 신앙을 버리면 살려준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그러나 박헌근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굴하지 않았고, 회유에도 신앙을 버리지 않았고, 오히려 공산주의자들에게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며 전도했다.
순천오순절교회가 순천경찰서에 접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고문당하며 부르짖는 비명과 신음소리가 성도들에게까지 들렸다고 한다. 전세가 불리해지자 공산주의자들의 행패는 더욱 심해져서 박헌근에게 가하는 고문은 더욱 혹독해졌다.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에 따르면, 함께 잡혀있던 “순천중앙병원 원장 최씨”는 박헌근이 고문에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가족들과 성도들이 들여보내 준 자기가 먹을 김밥과 옷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면서 복음을 전해 많은 사람들이 감동과 은혜를 받았다며 당시 감옥 안에서의 행했던 어진 박헌근의 행실을 전했다.
그런데 그 소식을 전해준 사람은 “순천중앙교회 장로”이며 “고산의원 원장” “최정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순천시의사회에 따르면, 일제시대부터 1950년까지 순천에는 개인 의원이 일본인 의원 3개, 고산의원(최정완 원장 1943~1980년, 2001년 10월 26일 作故), 남산의원(임영호 원장/作故), 이내과의원(이주달 원장/作故), 중앙의원[정인대 원장/作故] 등 한국인 의원 4개가 있었다. 그 원장들 중에 최씨는 “최정완”이었고, 근무하던 병원은 장천동의 “고산의원”이었다. 최정완은 순천중앙교회 장로였다. 그는 1939년 5월에 김동섭, 황두연, 김원식과 함께 순천중앙교회에서 장로 장립을 받았다. 최정완 장로는 1940년 9월 20일에 신사참배반대 원탁회 사건으로 새벽 1시에 검거되어 14일 동안 옥고를 치를 정도로 신실하고 강인한 신앙인이었다. 순천 도심에 있는 순천중앙교회는 117년 역사의 이 지역 어머니 교회다. 교회 뒤쪽 매산등(梅山嶝)으로 5분가량 걸어 올라가면 언덕 위에 “고산병원 사택”이 나온다. 고산병원 원장이던 최정완 장로가 지은 사택으로 1923년 처음 조성됐고, 1980년대에 순천중앙교회에 기증한 곳이다. 공산군이 신실한 기독교인이며 지역의 유지였던 최정완 장로를 붙잡아 박헌근과 함께 내무서 유치장에 가두었을 가능성이 있다. 순천중앙교회가 순천중앙병원으로 와전되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9월 15일에 감행된 유엔군의 인천 상륙의 성공으로 공산군의 패배가 확실해지자 퇴각하던 공산군은 감금된 양민들을 대부분 사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때 박헌근도 총살당했다. 최예임 사모가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웃음 띤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다. 그래서 사모는 그가 살아있는 줄 알았었다. 박헌근은 두려움이 가득한 얼굴이 아니라 웃음 가득한 얼굴로 죽음을 맞이했다.
박헌근의 순교일을 다시 검토해 보아야 한다. 30년사는 박헌근의 순교일을 “9월 말”로 보았다. 김성태와 최상근은 9월 17일로 보았다. 사단법인 박헌근 장로 순교기념사업회도 9월 17일에 순교추모행사를 갖고 있다. 그런데 “진실화해위원회”와 “한국전쟁위족회”는 순천에서의 인민군에 의한 학살이 10일 후인 9월 27일에 일어났다고 전하고 있다. 김성태와 최상근은 그 날을 설정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않았다. 반면에 진실화해위원회 등은 증언들에 의하여 그날을 설정했다. 북한군의 총 후퇴가 9월 23일부터 시작되었고 대전이 9월 28일에, 광주가 9월 29일에 탈환되었다. 공산군의 총 후퇴가 시작되기 전,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고 이틀 뒤인 9월 17일에 벌써 순천에서 공산군 정예부대가 황급하게 퇴각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방호산의 6사단은 후퇴할 때 부대편제가 와해되어 무질서하게 패주한 여타 부대들과 달리 부대편제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주변의 낙오/패잔 병력들을 수습해 후퇴 이전보다 오히려 사단 인원수를 늘려가며 질서정연하게 북으로 퇴각했다. 북한군의 총 후퇴가 시작된 9월 23일에서 광주가 탈환된 9월 29일 사이인 9월 27일에 공산군 6사단이 순천에서 지리산 쪽으로 퇴각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 같다. 따라서 박헌근의 순교일은 1950년 9월 27일이었다.
비극적이게도 일본의 압제를 피해 자기가 태어난 조국에 돌아왔던 박헌근은 동족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처럼 당당하게 죽음을 향해 나아갔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고 말씀하시며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셔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 그리스도처럼(요 10:17-18), 박헌근은 당당히 공산주의자들의 총부리를 피하지 않고 신앙으로 맞서 장렬하게 순교했다.
6.25 전쟁 당시 소위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가장 큰 피해자집단 중 하나는 종교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었다. 지금까지 정리된 학자들의 조사에 따르면 6·25 당시 공산군과 “바닥빨갱이들”에 의해 학살당한 목사·신부·장로·수녀들은 신원이 밝혀진 사람만 174명에 달한다. 또한 공산군이 퇴각하며 납북된 종교인들도 184명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기독교인에 대한 집단학살은 전남 영암읍 교회사건 등 3개월 이하의 인공치하 동안 조직적으로 전개됐다. 전남 영압읍 교회에서는 신도 24명이 집단 학살됐고, 옥구에서도 20여 명의 신도가 학살됐다. 전남 서쪽 바다에 있는 임자도에서는 150여 명이 구덩이를 파고 양민과 교인이 학살됐고, 충남 논산 병촌교회에서는 한 살짜리 어린아이부터 육순의 노인에 이르기까지 60여 명의 교인들이 학살됐다.
박헌근을 총살한 그 공산군의 모체는 공산주의자 김원봉이 1938년에 결성했던 조선의용군이었다. 조선의용군의 80%가 모택동의 중국 공산당 인민해방군 164사단과 166사단에 편입되어 제2차국공내전에서 장개석의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국민당과 싸웠다. 해방 후 그 두 사단은 김일성 치하의 조선인민군 12사단에 편입되었다. 1949년 5월, 조선인민군 정치부 주임 김일이 김일성의 친필 서한을 가지고 북경으로 가서 모택동을 만났다. 김일성은 모택동에게 중국인민해방군의 3개 조선족사단과 기타 부대에 있는 조선족 장병들을 북조선에 보내줄 것을 요구했고, 모택동은 이를 허락했다. 1949년 9월 20일, 164사단과 166사단이 장비 전체를 가지고 신의주로 가서 조선인민군복장으로 갈아입고 조선인민군 제5사단과 제6사단으로 편성되었다. 6사단은 T34 전차와 모터사이클 연대, 보병연대 등을 갖췄으며 실전 경험이 있는 병사가 많은 최정예 부대였다. 1개 사단 편제였지만 실제 병력은 2개 사단 수준이었다. 1950년 6월 25일 남침하기 시작한 북한 공산군 6사단은 서해안을 타고 남하했다. 7월 12일에는 공주를 그리고 7월 19일에는 금강을 도하하고, 사단을 3개로 나눠 7월 20일 김제, 같은 날 전주를 점령했다. 7월 24일에는 인민군 6사단 예하 13연대가 목포항을 점령하고, 또 다른 연대는 25일 여수항을 점령했으며, 아군의 저항을 받지 않고 26일 새벽 5시 순천을 점령했다. 방호산은 각각 1개 대대씩 항구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전 병력을 28일 하동에 집결시켰다.
그런데 사실 방호산이 이끌던 6사단은 빠르게 하동까지 진격했지만, 그 과정에서 목포, 순천, 그리고 여수를 점령했는데, 그것은 결정적 실수로 평가된다. 그 지역들을 점령하지 않았다면, 더 빨리 경남으로 진격했을 것이고, 국군과 유엔군은 수습할 수 없는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6사단은 충청지역으로 진출한 뒤 전남 남원, 경남 진주로 직행하지 않고 오른쪽으로 돌아 목포와 순천, 여수를 점령하는데 3일가량을 흘려보냈다. 또 충남 공주까지 진출했다가 세종시 전의면 지역으로 부대를 후퇴시켜 4일을 보냈다. 대전에 집결한 미군의 병력 규모를 과대평가해 일단 부대를 뒤로 물렸다. 이 1주일은 이후 전세를 결정지을 정도의 영향을 미쳤다. 국군 해병대의 분전과 미군의 반격에 북한군은 진주에서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해 9월 역사적인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완전히 뒤집히게 된다. 그래서 그런 북한군의 오판은 6·25 전쟁 최대 미스터리로 남았다. 워커(Walton Walker) 미 8군 사령관조차 “북한군이 목포와 여수에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다면 전쟁 결과가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고 평가했을 정도다.
이렇게 공산군의 순천 등의 점령으로 인한 지연은 국군과 유엔군에게는 숨을 돌리고 방어할 수 있는 소중한 틈이 되었다. 워커는 “만일 적 제6사단이 호남지역 항구를 우회하지 않고 모든 전력을 집중하여 부산을 향해 쇄도해 왔다면 아마 나는 이를 저지하기 위한 병력을 투입할 시간적 여유조차 갖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시기는 대한민국에게는 그렇게 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지만, 순천 등의 남서부지역에는 재앙의 시간이었다. 그 재앙의 시간에 박헌근은 고통을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마주 대했으며, 끝끝내 신앙을 버리지 않고 순교했다.
1950년 9월 말 인민군이 퇴각할 때 인민군과 좌익에 의해 처형 형식의 대량학살 사건이 벌어진 이유가 있었다.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유엔군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더이상 지탱할 수 없게 되었다. 북한노동당은 9월 중순경 인민군 전선사령부에 후퇴 명령을 내리는 한편, 각 지방당에 지시를 내렸는데, 그 지시들 중 세 번째는 “유엔군 상륙 때 지주(支柱)가 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할 것”이었다. 이러한 지시를 받은 각 도당위원회는 지시를 이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유엔군 상륙시 지주가 될 요소’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상당히 모호하였고, 군당, 면당, 리당, 그리고 명령이 집행자인 실무선으로 내려가면서 해석에 따라 엄청난 차이가 날 수 있었다. 충북 옥구군 좌익들의 행동 사례에서 이러한 지시가 하급 실무선으로 내려가면서 어떻게 구체화되고 확대 해석되면서 대규모 학살로 연결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도당의 지시를 접수한 옥구군당 조직부장은 다음과 같은 지시를 하였다. “1) 유엔군 진주 후 적 진영에 가담, 적극적으로 활동할 자를 학살할 것. 여기서 알 수 있듯이 “유엔군 상륙시 지주가 될 모든 요소의 제거”라는 중앙당과 도당의 지시는 군당급에서는 “유엔군 진주 후 적진영에 적극 가담할 자의 학살”로 구체화 되었고, 면당급에서는 “일체 반동가족까지의 학살”로 확대되었다.
여수에서는 1950년 9월 27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퇴각하던 인민군과 내무서원(지방좌익 포함)이 내무서 수감자를 학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노동당원, 내무서원과 인민위원장 등은 내무서장실에서 처치문제를 논의한 다음, “전원 총살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수감자 197명 중 일부를 석방하고 손양원 목사를 포함한 150여 명은 순천으로 호송하여 “재심석방”한다는 구실로 포박한 다음, 도보로 미평(美評)에 이르렀을 때 과수원과 그 일대의 둔덕재 아래 벽돌공장 주변에서 총살하였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순천에서도 역시 9월 27일 순천내무서에 수감되어 있던 30여 명이 내무서 뒤뜰에서 총살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30년사는 박헌근이 유치장에 갇혀있는 상태에서 사망했다고 전한다. 최상근은 순천 학살이 학교 운동장에서 일어났다고 기록한다. 박헌근의 사망 장소에 대해 세 언급이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일치하는 것은 그 학살은 “총살”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 순천에 있었던 권OO은 “사건 당일 콩 볶는 것 같은 총소리가 마을까지 들렸어요”라고 증언했다.
박성산은 박헌근의 순교를 “영광스런 순교”(glorious martyrdom)라고 규정하고, 그 소식을 미국하나님의성회에 전했다. 그는 미국에 있던 손종영 목사를 통해 미국하나님의성회 해외선교국장 노엘 퍼킨(Noel Perkin)에게 편지를 보냈다.
제가 순천에 도착했을 때, 그곳 성회 교회(the Assembly church)를 담임하고 있던(was in charge of) 박 장로가 순교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도쿄에 있는 ‘성회 성경 학교’(the Assembly Bible School)를 졸업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그 도시를 떠날 때, 백 명 이상의 민주주의자들을 총으로 사살했는데, 그들 중에 두 사람이 기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 공산주의자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려 할 때, 박 장로가 앞으로 뛰어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담대하게 공산주의자들이 쓰던 탁자를 탕탕 치면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래서 그는 첫 번째로 총을 맞았습니다. 그는 얼굴에 기쁨과 만족이 가득하여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이것은 영광스런 순교였습니다!
박헌근은 1930년 봄에 메리 C. 럼시에 의해 오순절신앙이 전래되기 시작한지 20년이 되는 1950년 9월 17일 순교의 제물이 되었다. 그의 나이 36세였다. 한국오순절교회는 최초의 순교자를 낸 것이다. 양들을 지키다 노모와 처, 어린 자녀들을 두고 순교한 박헌근은 노모의 피난 권유를 뿌리치면서도 교인들에게는 얼마 안 남았으니 계속 잘 피신하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는 선한 목자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신 삶을 그대로 실천했다.
놀랍게도 박헌근의 순교 장소는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의 순교 장소와 일치한다. 박헌근이 순교했던 옛 순천경찰서 남쪽 뒤뜰, 남내동 22-20번지는 손양원 목사의 두 아들, 손동인과 손동신이 2년 전인 1948년 10월 21일에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순교한 바로 그곳이다. 동인과 동신의 친구들이었던 윤성홍과 나제민의 증언에 의하면 동인과 동신은 “순천경찰서 뒤뜰”에서 좌익 학생들에 의해 총살당했다. 현재 남내동 22-20번지 원스퀘어건물 남쪽 끝 앞 조그만 광장, 1950년 당시 순천경찰서 뒤뜰에는 동인과 동신의 순교 표지판이 세워져 있다. 순천 교계는 2013년 ‘순천만 국제정원박람회’를 계기로 기독교 순례지 투어를 실시하면서 두 사람의 순교 사적을 발굴하기 위한 추진위원회를 구성한 바 있으며, 수차례의 고증작업과 회의를 거쳐 순천시와 중앙동 상인회가 더불어 표지판 설치를 합했다. 고증작업에는 손양원 목사의 큰 딸 손동희 권사 등 유족들을 비롯해 미국 뉴욕에서 거주하는 라재민 장로, 서울 동은교회 김양수 원로목사 등이 당시 상황에 대한 증언과 현장답사 등으로 참여했다. 그런 확인 작업을 거친 후 2018년 7월 29일에 옛 순천경찰서 뒤뜰 자리에 순교 표지판이 세워진 것이다. 진실화해위원회에 따르면, 1950년 9월 27일 순천에서 순천내무서에 수감되어 있던 30여 명이 내무서 뒤뜰에서 적대세력에 의해 총살당했다. 30년사는 박헌근이 순천경찰서 유치장 안에서 순교했다고 전한다. 유치장 안과 밖의 차이가 있을 뿐, 경찰서 담장 안에서 박헌근이 순교한 것이다. 그러나 박헌근의 보다 정확한 순교 장소는 순천경찰서 뒤뜰 현재의 남내동 22-20이다. 손동신과 손동인의 순교를 사모했던 박헌근은 그들이 순교했던 같은 장소에서 순교한 것이다.
또한 박헌근의 순교는 동인과 동신의 순교처럼 당당하고 영광스런 순교였다. 동인과 동신의 친구들이었던 윤성홍과 나제민의 증언에 의하면, 동인과 동신의 죄목은 “기독학생회장, 예수쟁이들의 두목”이었다. 좌익 학생 한 명이 이렇게 윽박질렀다. “동인이, 너 지금이라도 그 지독한 예수 사상 뽑아버리고, 우리 공산주의를 받아들여서, 우리와 같이 협력할 것 같으면 살려주겠다. 어떻게 할 테냐?” 그러자 손동인은 당당하게 말했다. “너희들은 내 목숨을 빼앗을 수 있으나, 내 속에 신앙은 빼앗을 수 없다. 너희들도 이런 악한 짓 하지 말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 너희들은 비록 내 육신은 죽일 수 있으나, 내 영혼은 죽일 수 없다.” 이때 어떤 폭도 학생 한 명이 손동인의 두 눈에 수건을 가렸다. 그러자 동인은 “너희들은 회개하여라. 나는 지금 곧 천국으로 간다”고 외치며 양팔을 벌리고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동인은 그 말과 함께 날아오는 총탄을 맞고 순교했다.
박헌근은 동인과 동신처럼 공산군의 총부리 앞에서도 당당하게 예수 믿으라 외쳤다. 그는 박성산이 전해주는 것처럼 담대하게 공산주의자들이 쓰던 탁자를 탕탕 치면서 “여러분 모두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라고 외쳤다. 최예임 사모가 증언하고 박성산이 재차 전한 것처럼 박헌근은 얼굴에 나타날 정도로 기쁨과 만족함 가운데 웃으며 순교했다. 박헌근의 죽음은 구차한 죽음이 아닌, 박성산과 변종호가 언급한 것처럼, 교회 사상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과 비길만한 “영광의 순교”였다. 스데반 집사가 순교할 때 하늘이 열리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 것처럼(행 7:54-60), 박헌근 장로가 순교할 때 하늘이 열리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서신 것을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남성도들이 접근하기 힘들어 하자, 여성도들이 용기를 내어 그의 장례를 치루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남은 몸은 전남 무안군 몽탄면 봉산3리 고향마을 뒷산, “응달뫼,” 현 기룡동산 내 순교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IX. 유족과 순교 추모
한국기독교순교유족회가 작성한 순교자유족카드에 따르면, 박헌근이 순교하고 4, 5년 후, 최예임 사모가 병환으로 소천했다. 박헌근의 딸 박청자에 따르면, 박헌근과 함께 인민군에 의해 수감되었다가 박헌근의 행실에 감화를 받았던 순천중앙교회 장로이며 고산병원장 최정완은 박헌근 소천 후 최예임 사모에게 정성껏 대했다고 한다. 최예임 사모는 박헌근이 순교한 후 어려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계속 울기만 하는 최예임을 딱하게 본 한 비단장사가 함께 장사할 것을 권유했다. 그녀는 막내를 등에 업고 비단 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그녀는 폐병을 얻게 되었다. 이때 최정완은 최예임 사모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자기 병원 간호사를 최예임에게 보내서, 그 당시에 구하기 어려웠던 페니실린(항생제) 주사를 계속 놓아주었다. 박청자는 병원에 가기 힘든 상황에 처한 최예임에게 간호사가 와서 주사를 놓아주는 모습을 보곤 했다.
박헌근은 1남 4녀의 자녀를 낳았다. 그런데 장남은 출생한지 100여 일도 되지 않아 사망했다. 박헌근과 최예임이 사망한 후에 양자 박용원(朴湧源)이 박헌근의 호적에 등록되는데, 아마도 남아를 통해 가계를 이으려는 문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박헌근의 남겨진 딸들은 한 기독교 고아원에 맡겨졌다. 미국 종군목사 엘로드(John R. Elrod, 1918-1992)의 노력으로 1952년 여름, 미국 하나님의 성회 동양 선교부장 오스굳(Howard Coit Osgood, 1899-1892)이 한국으로 와서 허홍, 박성산, 배부근을 만났다. 그때 오스굳은 목사들 중 한 명이 전쟁 중에 죽임을 당했다는 것과 그의 자녀들은 기독교 어린이들을 위한 기금의 도움으로 한 고아원에서 보호받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라난 차녀 박청자는 권사로 광주광역시 남구 중앙로 110에 있는 광주서현교회에서 봉사하고 있다. 3녀 박성지는 충북 괴산군 청천면 청천리 131-2에 있는 청천순복음교회의 전도사 직분을 다하다가 40세 전에 소천했다. 4녀 박성실은 군산시 서수면 화등리 620에 있는 신성교회의 정진일 담임목사의 사모로서 교회를 섬기며 박헌근의 순교신앙을 이어오고 있다.
그동안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박헌근 순교 추모는 교단차원에서 공식적이고 체계적이거나 지속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의 순교에 대한 체계적 추모는 오히려 타교단에 의해 이루어졌고, 교단 내에서 지속적 추모는 개 교회나 개인에 의해 이루어져 왔다. 박헌근은 2001년 8월에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에 의해 순교자로 등록되었다. 그리고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에 의해 그의 일대기가 처음으로 정리되어 수록되었다. 그런데 그 일대기에는 박헌근이 소속했던 교단명이 “기독교 대한 오순절장로교”로 소개된다.
2001년 9월에 사단법인 박헌근장로순교기념사업회가 창립되었고, 초대회장으로 수원에 있는 순복음좁은길교회 박종수 목사가 취임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비영리법인현황에는 그 법인 설립일이 2001년 10월 30일로 표기되어 있다. 그 현황에 기록된 순교기념사업회의 설립목적은 “박헌근 장로님의 위대한 순교정신을 올바르게 계승하여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참된 그리스도인의 신앙을 정립케 하고 하나님이 바라시는 사람다운 삶을 살아가는 건강한 사회를 구현하기 위하여 그 뜻을 기리고 전파함”이다. 그리고 그 법인이 수행할 주요 사업은 “1. 박헌근 장로님의 순교역사 발굴 및 보존, 전파, 2. 한국기독교 순교자 기념관 안치 및 기념석 설치, 3. 박헌근 장로님 순교 기념관(교회) 건립 및 교육사업”이다.
사단법인 박헌근장로순교기념사업회가 활동한 결과인지, 2002년 3월 14일에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에 의해 박헌근의 순교기념비가 용인에 있는 한국교회 순교자기념관 입구에 세워졌다.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인터넷 사이트에는 순교자 254명의 명단이 있는데 박헌근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그의 영정이 다른 순교자 영정과 함께 순교자기념관 3층 초상 전시실에 모셔져 있다.
순천오순절교회 청년 중에 박종수는 후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순복음신학교 부학장을 역임한 목사가 되었고, 다른 청년들도 그에게 감화를 받아 많은 사람이 목회자가 되었다. 박종수 목사는 박헌근의 설교 중 “송사리는 아주 작은 물고기이지만 그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물에 떠내려가지 않고 물살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음과 같이 우리 성도들 속에도 예수님께서 주신 영원한 생명의 힘이 있어서 죄악의 물결에 휩쓸리지 말고 이기며 나가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순교한 고귀한 정신이 생애에 깊은 감화를 끼쳐서 좁은길교회 목사로 헌신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고 고백했다.
순천오순절교회 정문균 장로는 1965년부터 교회에 출석했지만 박헌근 장로의 순교 역사는 몰랐었다. 그러다 2010년 우연한 기회에 박헌근 장로의 순교역사를 알고 충격을 받았다. 이 소중한 믿음의 역사가 그동안 묻혀 있었다는 사실에 부끄러웠다. 그 길로 사료를 수집하고, 박헌근 장로의 제자들을 만나 그의 생애를 들었다. 그리고 교회적으로 “박헌근장로순교사업회”를 설립하고 순교한 날에 무안군 몽탄면 순교자 묘역에서 기념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2017년 9월 17일 좁은길교회 대예배실에서 ‘박헌근 장로 순교 67주년 기념 추모예배’가 드려졌다. 그 기념예배에는 유족대표로 차녀이며, 순교기념사업회 부회장인 박청자 권사가 참석했다. 그리고 순교 69주년 기념예배는 2019년 10월 12일 전남 무안군 몽탄면 기룡동산 내 순교자 묘역에서 드려졌다. 이 기념예배에는 넷째 사위 정진일 목사가 유족대표로 참석하여 감사 인사말을 했다. 그리고 이 기념예배에 순교기념비가 제막되었다.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는 2021년 8월 3일 순교자 유족 장학예배를 드리고 유자녀·손 장학생 10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그때 박헌근의 자손이며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3학년 학생 김하선이 장학금을 받았다.
무안군청 홈페이지의 몽탄면 소개 자료는 봉산3리 부분에서 “순복음교회 최초의 순교자가 있어”라는 제목으로 박헌근의 순교를 알리고 있다.
그동안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가 총회차원에서 박헌근 순교 추모에 소극적이었던 이유, 또는 걸림돌은 무엇이었을까? 그 부정적인 이유 두 가지를 추정해 보고, 그에 대한 긍정적인 해결 실마리를 잡아본다. 첫째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소속이 아니었다. 물론 박헌근은 1953년에 설립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소속 교역자는 아니었다. 1950년 4월 9일에 있었고, 그가 참여하여 인도했던 제1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 대회는 변종호의 말대로 “그저 연합부흥회 비슷하게 모였을 뿐 아직 교단 조직의 논의는 없었다. 그러나 이 대회가 2회 3회를 거쳐 4회까지 개최되었고, 이 대회가 바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기반이 되고 모체가 되었다.” 그 대회에 참여했던 교역자들은 모두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설립 멤버들이 되었다. 박헌근이 순교하지 않았다면, 이 설립 멤버가 되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둘째로, 단일성 오순절주의자여서 삼위일체론과 물침례 방법에 있어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교리와 상충되는 신학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V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박헌근이 이코마성서학원에서 배웠을 삼위일체론과 물침례론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교리와 단일성 오순절주의의 중도적 입장이었다. 쿠트와 곽봉조의 물침례론은 단일성 오순절주의의 물침례론과 유사했으나, 삼위일체론에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삼위일체론과 다른 것이 없었다. 따라서 박헌근의 삼위일체론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삼위일체론과 다른 것이 없었을 것이다.
1956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분열의 씨앗이었던 곽봉조는 분열 전인 1952년 3월부터 1955년 2월까지 순교한 박헌근에 이어 순천오순절교회 2대 교역자로 사역했다. 또한 분열 후인 1968년 2월부터 1970년 2월까지 제7대 교역자로 순천오순절교회에서 일했다. 순천오순절교회와 이코마성서학원 출신의 이 두 교역자와의 관계는 끊어질 수 없는 것이다. 이 둘을 부정하는 것은 곧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안에서 순천오순절교회에 존재를 부정하는 것이다. 순천오순절교회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안에서 계속 든든하게 존재하려면, 박헌근과 곽봉조를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역사 안에 긍정적으로 자리잡게 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는 박헌근에 대한 긍정적 연구와 평가와 마땅한 공식적이고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추모를 수행해야만 한다.
박헌근의 제자, 고(故) 박종수 목사는 다음과 같은 시로 영광스런 순교자 박헌근을 기렸다.
잘 싸웠다. 순교자여!
빛나리라 그대 모습
주 위해 흘린 피는
장차 받을 영광이로다.
X. 나가는 말
박헌근은 1914년 9월 3일에 출생하여 1950년 9월 27일에 36세의 젊은 나이에 공산군의 총탄에 의해 순교했다. “순교했다”는 사실은 박헌근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 것이었는가를 그대로 보여준다. 순교는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스데반 집사와 야고보 사도의 순교는 하나님에 의해 허락되었지만, 당시에 베드로는 하나님이 보낸 천사에 의해 감옥과 죽음으로부터 두 번이나 구출됨으로써 순교를 허락받지 못했다. 순교는 아무나,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박헌근은 순교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순교를 허락하신 것이다. 손동인과 손동신의 순교를 사모했던 박헌근은 그들이 순교한 장소에서 순교하고, 그들의 당당하고 영광스런 순교처럼 당당하고 영광스럽게 순교했다.
성품이 어질면서도 적극적인 오순절 신앙을 가졌고, 설교에 탁월했던 그가 계속 살아남아 있었다면, 한국 오순절교회의 발전에 큰 공헌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피흘린 순교는 오순절교단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성장과 성숙의 밑거름이 되었다. 뜨거운 오순절주의자였던 박헌근은 순교도 담대하게 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순교 직전 그가 함께 했고, 한국 오순절교단에서 제일 거대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가 그의 순교를 공식적이고,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추모하지 못해 왔다. 세대를 거쳐 박헌근의 “영광스런 순교” 신앙을 추모하고 이어받을 수 있도록 지금 필요한 일을 해야 한다.
박헌근 장로 연보
1914년 9월 3일 전라남도 무안군 몽탄면 봉산3리 567번지에서 출생
1924년 일본, 오사카(大阪)의 이카이노(猪飼野)로 이주 (10세)
1930년경 이쿠노정(東城區, 生野町)에 있는 고등학교 진학 (16세)
1933년경 곽봉조가 목회하던 이카이노조선교회 출석하기 시작 (19세)
1934년경 부친 별세, 이카이노조선교회 성도들이 장례식 도움
가족들이 이카이노조선교회에 출석하기 시작 (20세)
1935년경 고등학교 졸업 직후 인쇄소에 취직 (21세)
재직시 목회 소명 받음 (21-22세)
1937년 곽봉조가 졸업한 이코마성서학원에 입학 (23세)
재학 시 곽봉조 목사의 주례로 최예임과 결혼
1939년 말 3년간의 전 과정을 이수하고 이코마성서학원 졸업 (25세)
1940년 말 -
1941년 초 폐렴으로 약해진 곽봉조 대신 이카이노조선교회 목회
선교사들에 의해 탁월한 선교사로 평가받음 (27세)
1942년 오사카를 떠나 대전으로 이주 (28세)
소화인쇄소에 취직
인쇄소 근처 대전제일장로교회(현재는 대전제일교회)에 출석하기 시작
1945년 8월경 소화인쇄소 창업자 마쓰노로부터 인쇄소를 사실상 물려받음 (31세)
1947년 11월 14일 민영호 장로와 함께 “대전3교회”(현 더드림교회)란 이름으로
삼성 2동 303-5번지에서 창립 예배를 드림 (33세)
장로 피택 (?)
1948년 말 손양원 목사가 인도하던 부흥회에 참석, 순교 사모
1948년 12월 23일 삼성장로교회에서 집사로 피택됨 (34세)
1948년 –
1949년 초 순천에 있던 남장로회 선교부의 대전 이전에 한 역할 수행 (35세)
1949년 11월 순천오순절교회에 담임 전도사로 부임 (35세)
1950년 4월 9일 순천오순절교회에서 열린 제1회 대한기독교 오순절대회에 참석 설교
1950년 9월 초 비밀리에 한 성도의 집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다
공산군 치안대에게 체포되어 순천경찰서 유치장에 갇힘
1950년 9월 27일 퇴각하던 공산군에게 총살당하여 순천경찰서 뒤뜰에서 순교 (36세)
2001년 8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총회순교자기념선교회에 의해 순교자로 등록
2001년 10월 30일 사단법인 박헌근장로순교기념사업회 창립
2002년 3월 14일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에 의해 박헌근의 순교기념비가
용인에 있는 한국교회 순교자기념관 입구에 세워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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