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 to the Home Missionary Reference Council of the Assemblies of God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Concerning Our Missionaries in North China and Korea: Miss Meredith and Miss Vessey
도날드 기
(Donald Gee)
January 25, 1938
이창승 역
역자 서문
도날드 헨리 페레 기(Donald Henry Frere Gee)는 1891년 5월 10일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났다. 1924년에 도날드 기는 브리튼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 형성에 일조했으며, 1925년에서 1963년까지 총회 실행위원으로 일했다. 그는 1929년부터 1937년까지 세계를 돌면서 선교하기도 했고, 영국 총회가 파견한 선교사들 실태 파악 보고를 하기도 했다. 그는 총회 행정가, 선교사이기도 했지만, 많은 오순절에 관련된 책들을 쓴 저술가이기도 했다. 도날드 기는 1905년에 웨일즈 부흥의 영향아래서 은혜를 받고 후에 오순절세계연맹에서 일하기도 했다.
1941년에 도날드 기(Donald Gee)는 오순절운동의 기원에 관해 “자생설”을 주장했다. 그는 오순절 운동이 그 기원을 그 어떤 탁월한 인물이나 종교적 지도자에게 빚지지 않았고, 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거의 동시에(almost simultaneously) 나타난 자생적 부흥(a spontaneous revival)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오순절운동의 창시자(founder)로 인식되어온 사람들을 단지 오순절운동의 지도자(leader)로만 인식했다. 그는, 부정적 의미에서, 어떤 지도자들은 오순절운동의 범위를 확장시키려는 일단의 사람들에 의해 창시자로 인식되어왔다고 분석했다. 또한 그는 어떤 지도자들은 오순절운동 안의 특별한 지역 단체의 창시자로 추앙을 받아왔다고 비판했다. 그는 그런 판단의 이유에 대해 그 지도자들이 오순절운동을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오순절운동이 그들을 만들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But the outstanding leaders of the Pentecostal Movement are themselves the products of the Movement. They did not make it; it made them). 그리고 그는 오순절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성령께서 무언가 특별한 것을 공급하시는 것이라고 보았다.
이런 도날드 기의 주장은 바틀맨의 주장과 공통점을 갖는다. 도날드 기는 오순절운동의 특징 가운데 하나를 성령께서 제공하시는 특별한 것으로 보았다. 오순절운동에 있어서 이러한 성령의 능동적인 역사는 또한 바틀맨이 부각시킨 것이기도 했다. 오순절 지도자들이 오순절운동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오순절운동이 그들을 만들었다는 기의 주장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시대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대가 사람을 만든다”라고 말했던 프랑크 바틀맨의 말을 연상시킨다. 아마도 기는 바틀맨의 글을 읽었을 것이다. 도날드 기는 바틀맨의 “사람”을 “오순절운동”으로만 대체한 것 같다.
도날드 기의 주장은 바틀맨의 주장과 차이점도 갖는다. 바틀맨은 성령께서 시무어 더함 등의 미국 지도자들을 통해 일으키신 오순절운동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도날드 기는 성령께서 세계 여러 지역의 많은 지도자들을 통해 거의 동시에 자생적으로 오순절운동을 각 지역별로 독립적으로 발생시키셨다고 주장했다. 즉, 기와 바틀맨은 둘 다 성령기원설을 주장한다는 점에서 공통적이지만, 발생 기점에 대해서는 차이를 드러냈다. 아마도 기는 바틀맨의 주장에 자기 경험을 더하여 성령께서 오순절운동을 일으키셨다면 한 특정한 지역이 아니라 전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동시에 일으키실 수 있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둘 사이의 차이점은 또 하나있다. 그 차이점은 오순절운동의 정체성과 관련된다. 바틀맨은 오순절운동에 있어서 교리(dogma)는 다툼의 원천일 뿐이었고, 오순절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성령의 산역사라고 주장했다. 이와는 달리 도날드 기는 “오순절운동은 방언 말하기는 성령침례의 성경적 최초의 증거라고 끊임없이 가르쳐 왔다(speaking with tongues is the scriptural initial evidence of that baptism)”고 말했다. 기는 이것을 “교리”(doctrine)라고 칭하고, 오순절운동의 간증 안에서 가장 도전적인 특징(challenging doctrine)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그 교리가 역사 속에서 실제로 구현되고 있는 역사적 사실(historical fact)이므로, 그 교리에 대한 논쟁을 그치고, 그 교리가 실제로 현실 속에서 실현되어 역사(history)가 되게 하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했다. 기는 방언이 성령침례의 성경적 최초 증거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았으나, 더 중요한 것은 그 교리가 역사 속에서 구현되어 온 것처럼, 현재에도 실현시키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의 이런 방언과 성령침례와의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성에 대한 교리적 역사적 고수는 20년이 지난 후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1961년에 “방언 말하기는 성령침례의 성경적 최초 증거”라는 교리를 “우리의 교리”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나는 이 교리가 옳다고 생각한다”(I hold that doctrine to be right)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 실제성을 결여하는 가정된 오순절적 경험의 결과들은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라고 경계했다. 즉, 그는 그 교리를 철회한 적이 없으며, 오직 그 교리의 역사 속에서 구현에 몰두했다. 도날드 기에게 오순절운동의 정체성은 성령침례에 방언이 최초로 동반된다는 교리에 있었다.
도날드 기가 오순절운동의 정체성을 성령침례에 방언이 최초로 동반된다는 교리에 둔 것은 그가 오순절운동을 찰스 파함과 연관시켰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프랑크 바틀맨은 오순절운동에 대한 글을 쓰면서 오순절운동의 성령침례에 대한 교리의 내용과 그 교리를 발생시켰던 찰스 파함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다. 도날드 기는 바틀맨과 달리 교리의 내용을 언급하고 강조하기는 했지만, 바틀맨처럼 그 교리를 발생시킨 파함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도날드 기는 그 교리를 오순절운동의 정체성으로 파악함으로써 간접적으로 오순절운동에 있어서 파함의 지대한 중요성을 인정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그 교리를 오순절운동의 정체성으로 파악했으면서도, 파함을 오순절운동의 기원으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모순된 일이다.
이렇게 나름대로 오순절 운동에 대한 관점이 뚜렸했던 도날드 기가 오순절운동이 도입된지 얼마되지 않은 유아같은 조선 오순절교회를 찾아왔다. 1938년 1월에 당시 영국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의 부총회장이었던 도날드 기(Donald Gee)가 한국을 방문하고 이 선교지에 대해 보고를 남겼다. 도날드 기는 경성에 하루 동안 방문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기는 한국인들을 포함한 두 번의 회합을 가졌다. 하나는 [메르테드와 베시와의] 긴 개인적인 만남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미국 동역자들[럼시 등]과의 만남이었다. 그리고 기는 영국 총회에 보고서를 보냈다.
도날드기의 보고서
Donald Gee, “Report to the Home Missionary Reference Council of the Assemblies of God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Concerning Our Missionaries in North China and Korea: Miss Meredith and Miss Vessey (January 25, 1938),” in HMRC the Home Missionary Reference Council of the Assemblies of God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Minute Book X (August 1936-August 1938), 135 -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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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록 168 1(b)에 포함된 영국과 아일랜드 선교국(the Home Missionary Reference Council of the Assemblies of God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의 특별한 요청에 따라, 나는 귀국행을 조정하여 기차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여행을 할 수 있어서 기뻤다. 만주에서 한국을 경유하는 도중에 서울에 있는 우리의 두 선교사들을 만나기 위해 한국에 들렀다. 그 짧은 시간 동안 우리는 한국인들을 포함한 두 번의 회합을 가졌다. 하나는 [메레디트와 베시와의] 긴 개인적인 만남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미국 동역자들[럼시 등]과의 만남이었다.
나는 이 두 자매들과 관련된 상황, 그리고 H.M.R.C.가 요청한 정보와 어느 정도 관련하여 처음부터 설명하려 한다.
메레디트 양과 베시 양은 영국에서 조선으로 오다가 홍콩에서 일본 선교사 테일러 부인(Mrs. Taylor)을 만났다. 그들은 그녀를 통해 서울에서 사역하고 있던 두 독립적인 미국 오순절 선교사들을 소개받았다. 그들은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라고 느꼈고, 조선에서 그 미국 선교사들[파슨스와 오프스테트]과 합류했다. 거기에는 또한 미국에서 온 럼시 양(Miss Rumsey)이 있다. 그녀는 보다 강한 인물이고, 내가 판단하기에 그 연합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적 버팀목이다.
자신의 이름으로 총독부에 그 교단을 등록시켰던 파슨스 양(Miss Parsons)은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겨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오프스테드 양이 그녀와 함께 했다. 그때로부터 두 사람의 다른 미국 독립 오순절 선교사들이 그들의 자리를 채웠고, 그래서 여전히 다섯 명이 함께 한국에서의 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파슨스 양은 정신적 문제가 심해지기 전에 우리의 메레디트 양을 그 교단의 명목상 포교관리자로 임명했고, 총독부에 메레디트 양을 그녀의 휴가 동안 임시 대리자로 보고했다. 지금 총독부는 파슨스 양의 귀환이 연기되는 이유를 따져 묻고 있지만, 당연히 선교사들은 총독부가 파슨스 양의 정신적 상태를 알기를 바라지 않는다. 어쨌든 메레디트 양은 지난 몇 년 동안 총독부에 그녀의 입지를 증명할 만한 그 어떤 공식 증서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결과 총독부는 그 사역 전체를 점차 신뢰하지 못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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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1월 9일에 H.M.R.C.에 가능하다면 메레디트 양을 선교사로 임명한 증서를 보내주기를 요청했다.
럼시 양은 또한 성회들 안에서 그녀의 이름을 포교관리자로 등록하라는 압박을 받고 있다. 그렇게 된다면, 그 사역은 영국이든 미국이든 하나님의 성회(Assemblies of God)와의 공식적인 관계를 끝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한국 성회들에 불행한 퇴보가 될 것이다. 일본 총독부는 번잡한 종파들을 아주 싫어하며, 그래서 더 이상의 오순절적 기관의 등록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동시에, 나는 그 미국 오순절 독립 선교사들의 문제와 함께 우리의 영국 자매들의 문제도 인식하고 있다. 나의 유일한 권고는 그들이 사역 현장에서의 불화를 극복하고 어느 정도의 합의에 이르라는 것이다. 그래서 관리자 등록 문제에 있어서 총독부에 대해 공동 대응을 유지하라는 것이다.
나는 메레디트와 베시 양에게 일본에 있는 클레멘트 군(Mr. Clement)과 긴밀한 관계를 갖기를 강력하게 촉구했다. 그리고 나는 며칠 후 일본에서 클레멘트 군을 만나 그 문제를 상의했다. 클레멘트는 이것에 흔쾌히 동의했다. 그리고 그는 서울에 있는 우리의 두 자매들과 즉시 연락하고 가능하다면 개인적으로 방문하겠다고 약속했다. 고베에서 서울까지는 고작 24시간이 걸릴 뿐이다. 그리고 그 여행비는 비싸지 않다. 나는 H.M.R.C.가 클레멘트 군에게 한국으로의 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제공해 줄 것을 제안한다. 일본과 한국은 정치적으로 연합되어 있고, 그래서 일본과 한국은 선교 사역을 위해 한 지역 선교지를 형성한다(Japan and Korea are united politically, and they make one logical Field for missionary work). 지금 클레멘트 군은 그런 선교지를 위한 우리의 선교 지부장으로서 손색이 없고, 나는 그런 조정은 아주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역 자체에 관해서 말하자면, 나는 현재 서울 안과 주변에 여섯 곳의 등록된 설교 장소들 또는 성회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교회들 중에 두 곳에 가 보았는데, 그 건물들은 단순한 한국식 집들이었고, 그런 사역을 위해서 아주 적당한 곳들이었다. 저녁 집회에는 오십 명 이상이 참석했다. 한 한국 목사[허홍]가 나의 설교를 아주 유창하게 통역했다. 거기에는 몇 명의 훌륭한 한국인 지도자들이 있는 것 같았는데, 그들 중의 하나는 비행사[김동업]였고, 그의 아내는 오르간을 잘 연주했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의 두 선교사들은 강단 아래에 회중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나는 예외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단지 미국 자매들이 놓은 전통을 따랐으며, 모두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한국 목사들은 그 집회들을 아주 적절하게 이끌었다. 그런 방법은 분명 현지인 원리를 촉진시키고 있다. 그 선교사들은 존경받고 있으며, 선교사로서 적절한 위치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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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들은 그 사역을 자진하여 돕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자주 복음을 전하러 나가기 위해 며칠간의 노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우리의 자매들은 조선어를 알긴 하지만, 생활어는 가능하나, 설교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그녀들의 설교를 통역하고 있다. 우리의 선교사들은 스스로 그 사역은 아주 고무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모국으로부터 받아 온 그 낮은 평가에 놀라고 있다. 내게 이것은 내가 보아온 다른 오순절 선교사역의 많은 것과 견줄만 한 것 같다.
그 자매들을 만나고 그들이 너무도 가난하고 의기소침한 것을 보았을 때 깊은 동정심이 일어났다. 강물은 두껍게 얼어붙었지만, 그들은 지극히 적은 경제적 지원도 감사했다. 그들 가족들로부터의 적고 간헐적인 도움은 그 성회들로부터 받는 조금의 사례비를 보충하고 있다. 메레디트 양은 음펠린파흐(Wwmfelinfach) 성회와 베시 양은 쉐필드의 채플타운(Chapeltown, Sheffield) 성회와 연결되어 있는데 두 성회 다 작은 교회들이다. 그런데 그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그들의 사역에 대한 열정과 흥미가 현저하게 부족해서, 그들이 잊혀지고 경멸당하고 있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나는 최선을 다해 그들을 주 안에서 북돋우어주고 격려해 주었고, 우리는 서로 나의 방문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했다. 우리는 만약 그들이 R.T.(Redemption Tidings)의 편집장에게 보낸 사진들과 보고서들이 그에게 전달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생각한다. 아마도 그 사진들과 보고서들은 중간에 분실되었을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만약 우리가 그 여성들을 우리의 선교사들로 공식적으로 승인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의 준회원증서(Associate certificates) 정도를 발부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들에게 장악력이나 놀라운 재능이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주님께서 그들을 그 사역으로 부르셨다는 깊은 확신을 갖고 끈기 있게 일하는 사역자들이라고 믿는다. 내 자신의 권고는 그들이 휴가차 고국에 왔을 때 그들에게 우리의 증서들을 발부해 주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는 클레멘트 군으로부터 올 보고서와 비교하여 재검토될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 그 사역이 처한 상황들의 관점에서 그 어떤 공식적인 뒷받침도 없이 그들을 어려움에 처하게 놓아둔다는 것은 무자비한 것일 것이다. 미국 선교사들은 더 높은 윤리적, 경제적, 그리고 영적 후원을 받고 있다. 우리의 두 영국 자매들도 온전한 후원과 신뢰를 받는다면, 보다 나은 사역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을 굶주리게 하면서 그들이 조금밖에 성취하지 못했다고 비난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나는 우리가 이 나무를 잘라버리기 전에 이 나무에게 더 인내심을 베풀고 격려하기를 권한다.
p135
In presenting this Report I am constrained to testify to the special help and grace of God whereby I was enabled in December 1937, and January 1938, to visit our missionaries in North China, Korea and Japan in a time of war and great political upheaval. I consider it remarkable that I was thus able to not only complete my original program in entirety, but also to add some happy and valuable unexpected items. To God be the glory!
Needless to say, a visit from one of the brethren from the Home Fellowship meant to our beloved missionaries at such a time than it would have even meant in more normal conditions. Although I suffered some extremely unpleasant and difficult experiences in a few sections of my journey, yet I gladly testify to the preserving and sustaining power of God, so that I was kept in peace, safety and health throughout. I am especially thankful for the prayers of the saints, and there were times when I could actually FEEL their po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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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Miss Meredith and Miss Vessey
Following the special request from the H.M.R.C. contained in Minute 168 1(b) I was pleased to be able to arrange my homeward journey so that I could travel by train from China to Japan, by way of Manchukuo and Korea, and so stop over for 24 hours with our two missionaries in Seoul. During the short time at our disposal we had two meetings with the Koreans, a long private conference, and a united conference with their American co-workers.
The situation regarding these two sisters, and the matters upon which the H.M.R.C. request information are somewhat involved, and I must explain things from the beginning.
On their way out from England the Misses Meredith and Vessey met Mrs. Taylor of Japan at Hong Kong, and through her received an introduction to two independent American Pentecostal missionaries working in Seoul, - Miss Parsons and Miss Ofstead. They felt that this was providential, and so joined forces. There is also a Miss Rumsey from America, rather a strong character, and now the main financial stay of their united work as far as I could judge.
In 1934 Miss Parsons, in whose name the work was registered with the Government had to go home to America through becoming mentally deranged. Miss Ofstead accompanied her. Since then two other American in dependent Pentecostal missionaries have taken their place, and so there are still 5 of them engaged in the work together. Just before Miss Parsons became violent she put the work in the nominal charge of our Miss Meredith, and gave her name to the government authorities as the missionary temporarily responsible during her furlough. Now the authorities press for reasons as to the delay in the return of Miss Parsons, and of course the missionaries do not want them to know of her mental condition. Miss Meredith has had no official certificate to produce to the authorities during the past year to prove her standing in any way, and as a result they are now viewing the whole work with increasing distr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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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this reason I wrote to the H.M.R.C. on Jan. 9th urging them to send a certificate immediately if they felt free to do so.
Miss Rumsey is also pressing within the assemblies to have the registration transferred to Her name. In such a case the work would cease to have any official connection with Assemblies of God at all, either British or American. I think this is undesirable, and might have unfortunate repercussions upon the Korean Assemlies. The Japanese authorities are very averse to the multiplication of sects, and will not easily agree to the registration of any further Pentecostal organization. At the same time I see possible difficulties in our British sisters working with the independent American sisters. My only advice is that they seek to come to some agreement among themselves for a division of the field of labour, while they maintain a united front before the Government in the matter of registration,
I strongly urged the Misses Meredith and Vessey to get in closer touch with our Mr. Clement in Japan; and upon my meeting Mr. Clement in Japan a few days later I laid the whole matter up. This he very willingly consented to do; and promised to immediately correspond with our two sisters in Seoul, and to consider a personal visit if possible. It is only just over 24 hours from Kobe to Seoul, and the journey is not expensive; I would suggest that a small grant by the H.M.R.C. to Mr. Clement for the expense of such a journey might be well justified. Japan and Korea are united politically, and they make on logical Field for missionary work. Mr. Clement is now becoming well fitted to be regarded as our Field Superintendent for such a Field, and I consider such an arrangement would be very helpful.
As to the work itself in Korea; I found that there are now 6 separate registered preaching places, or assemblies, in and around Seoul. I met in tow of these, and found them simple Korean houses, and very suitable for such work. We were packed for the evening meeting, when I suppose over 50 were present. A Korean pastor interpreted for me very ably. There seem to be some fine young Korean leaders, one of them is an aeroplane pilot, and the wife of another played the organ excellently. With regard to the fact that our two missionaries sit downstairs with the congregation; I see nothing to take exception to in that. They simply followed the tradition set by the American sisters, and all still do the same. The Korean pastors lead the meetings quite competently, and such a method surely all encourages the Indigenous Principle. They are treated with every respect, and have their proper place as missiona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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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Koreans do quite a lot of self-support for the work; and they often forfeit several day’s labour in order to go out preaching the gospel. Our sisters have the language for working purposes, but not for preaching. So the Koreans interpret for them for the present. Our missionaries themselves consider that the work has been very encouraging, and they are surprised at the lack of appreciation which they have been receiving from the Homeland. To me it certainly seems to compare favourably with much of the other Pentecostal missionary work that I have seen.
My natural pity was deeply stirred when I met them, and found them so poor and discouraged. The ice was Feet Thick on the river, and they were obviously thankful for a little financial assistance. A little occasional help from their families supplements the tiny amounts they receive from the Assemblies. Miss Meredith is connected with Wwmfelinfach; and Miss Vessey with Chapeltown, Sheffield; both small assemblies. But the hardest part to them has been the quite obvious lack of enthusiasm and interest in their work, so that they felt forgotten and despised. I did my best to cheer and encourage them in the Lord, and we mutually thanked God for my visit. We wondered if photographs and reports that they had mailed to the Editor of R.T. had ever reached him. Probably they were lost en route.
Personally I question if we would officially endorse such women as our missionaries now, and I appreciate that in any case we only gave them our Associate certificates. I should think that they lack dominating personalities or brilliant gifts; but I believe them to be two faithful plodding workers with a deep sense that the Lord called them to the work. My own advice would be to give them our certificates until they come home on furlough; and the matter can then be reviewed, probably in the light of a further report from Mr. Clement. It seems little short of cruel to now leave them high and dry with no official backing at all, in view of the circumstances of the work in Korea. It is different for the Americans, who by more moral, financial and spiritual support our two British sisters could do a work worthy of our full support and confidence. It is unfair to starve them, and then criticize them for accomplishing little. I recommend that we give this tree a little more patience and encouragement before we cut it d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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