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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오순절역사

최초의 한국인 오순절 교역자 허홍(許銾)

한오신 2022. 10. 30. 19:37

 

 

 

 

 

순복음총회신학교 조교수 이창승

20221105/2024년 7월 10일

 

 

최초의한국인오순절교역자허홍(이창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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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허홍(許銾)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라는 교단을 창설한 공로자, 그리고 보다 넓게는 한국기독교 안에서 성령의 역사에 부응했던 목회자로 평가받아 왔다. 2003년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희년대회(총재 조용기 목사)기하성 희년 50인 선정이라는 제목으로 교단발전을 위해 헌신한 인물 50인을 2002년 말에 발표했다. 이때 허홍은 박성산, 배부근 등과 함께 교단창설공로자로 선정되었다. 2004년에 한국기독교성령100주년대회(총재 피종진 목사, 준비위원장 장희열 목사)1907년 평양장대현교회에서 일어난 성령운동 100주년을 기념, 한국기독교성령100년사 선정위원회를 통해 성령의 사람 100인을 발표했다. 허홍은 박성산 목사와 함께 목회자 부문 15인에 선정되었다.

    그런데 이런 허홍에 대한 평가는 적절한 것이기는 하지만, 오직 그에게만 돌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단을 창설한 공로는 허홍만이 아니라, 박성산과 배부근에게도 돌려진 것이다. 또한 성령의 역사에 부응한 목회자는 허홍만이 아니라, 그 외 십 사인의 목회자도 있었다. 오직 허홍에게만 돌릴 수 있는 평가는 무엇일 수 있을 것인가? 그것은 허홍이 최초의 한국인 오순절적인 교역자였다는 것일 것이다. 이외에도 허홍은 한국 오순절 진영 안에서 최초라는 말을 많이 붙일 수 있는 일들을 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본 글은 이런 그에게만 돌릴 수 있는 평가를 제목으로 내걸고 기존의 연구들이 발굴해 낸 자료들과 새로운 자료들을 기반으로 그의 일련의 최초생애를 최대한 복원해 볼 것이다.

 

 

II. 탄생

 

    허홍(許銾)1907129일 충청남도 보령군 청소면 진죽리(靑所面 眞竹里) 111번지에서 태어났다. 충청도의 척추인 차령산맥이 줄기차게 뻗어내려 내포 땅을 이룩하고 한 가닥 그 맥이 서(西)로 내려오다가 790.7m의 오서산이 서해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그 서편 일대가 청수면이고, 또 그 서편이 장척면이었던 것이 조선말엽에 행정구역개혁에 따라 장척면의 송암리의 19개 리와 오천면 천동면 일부, 청수면 전역을 합하여 청소면이라 하고, 진죽, 신송, 재정, 죽림, 성연, 정전, 야현, 장곡 8개리를 관할하여 보령군에 속했다. 그 후 1995년 대천시 보령군 통합후 보령시 청소면이 되었다.

 

 


 

 

 

 

 

청소면 진죽리 111번지

 

  부친 허곤은 1881 3 29일에 충남 보령군 청소면 진죽리에서 출생했다. 1901년에 허곤은 박씨와 결혼했다. 허홍이 태어났을 때, 그의 아버지 허곤(1881-1964) 3대째 한약사였으며, 그 마을에 있는 한약방의 주인이었고, 부유했다. 형은 “허영”이었고, 두 자매는 “허난경” “허차경”이었다.

 

 

 

III. 구세군 입대

 

    190939일에 구세군이 진죽리에 설립되었다. 허곤은 허홍이 세 살 되던 해인 19093월에서 6월경에 구세군 선교사 밀턴(Ensign Milton, 1877-1937) 등에 의해 기독교로 회심했고, 헌신적인 구세군 병사가 되었다. 또한 그의 모친도 부인 정교가 되었다. 밀턴은 1877년에 태어나 1900년에 영국구세군만국사관학교를 졸업했으며, 1908101일 허가두를 필두로 하는 한국 선교에 참여했다. 그는 19093월에 충청도 대천, 우진, 서산, 해미, 군산, 대구 등 각 지역을 순회전도하고 각 구세군 군영에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그는 617일 충남 각 지영을 다녔고, 홍산에서 10개 지영 연합집회를 인도했다. 허곤은 이 기간에 구세군에 입대했으며, 허홍은 부모와 함께 구세군진죽영문에 다녔을 것이다.

 

 

 

현재 구세군진죽영문교회

 

 

 

    허곤은 19121월과 10월 사이에 경성에 있는 구세군 성경대학(Training Garrison)에서 공부하고 제3기 졸업생이 되었다. 그 성경대학은 1910215일에 경성 종로구 평동 76번지(현 강북삼성병원 자리)에서 구세군 사관들을 배출하기 위해 신축된 양옥건물에서 개교되었다. 전국에서 모인 성경대학 학생들은 8개월 동안 교육을 받았다. 과목은 신구약성경, 구세군교훈과 구세군규칙, 국문과 한문, 산술 등이었다. 교수는 참령 본윅(Bonwick Gerald William 1872-1954)이었고, 이의춘이 통역했으며 동년 6월에는 영국에서 본부정위 투윌리 동부인이 입국해 참령 본윅을 도와 성경대학 교수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당시 사관학생들의 일과는 주일에는 오전 10시에 가로전도를 나갔고, 경성제일영에서 예배를 드렸다. 월요일에서 토요일까지의 주중 일과는 매일 오전 6시에 기상하여 날마다 성경을 공부하였고, 하루 2시간씩 전도와 심방을 하였으며, 10시에 잠자리에 들어갔다. 19128, 그동안 성경대학이라고 불렸던 명칭을 구세군사관학교”(The Salvation Army Officer’s Training College)로 개명하였다. 교명과 교과목을 상당 부분 변화시킨 것은 좀 더 유능한 사관, 선교적 상황과 구세군이 지향하는 바와 맞는 구세군 정신이 투철한 사관을 배출하기 위한 강한 의지가 표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허곤은 1921년 사관으로 임관되었다. 그는 19146월에 런던에서 열린 제4회 만국총회, 즉 국제 구세군 대회(International Congress of the Salvation Army)에 한국 대표로 참석하기도 했다.

 

 

 

허홍의 부친 허곤 부령과 모친 박씨

 

 

    허홍은 한약방 일을 도우며 근엄한 아버지 슬하에서 한학을 배웠었다. 그런데 부친이 귀국하자 그는 아버지의 권면에 따라 통신으로 성경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허홍은 대정(大正) 9년 즉, 1921년에 충청북도 영동읍 계산리에 있는 영동공립보통학교를 제4회로 졸업했다.

 

 

 

 

구세군 사관이 된 허곤은 그의 자녀들도 구세군 사역에 참여하게 했다. 허곤의 장남 허영은 제15기로 1923년에 입학하여 192477일에 구세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된 후 유학하여 영국 런던 만국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장녀 허난경은 제19기로 1928년에 입학하여 1929625일에 졸업했다.

 

 

 

    30년사는 허홍은 통신 성경 공부가 계기가 되어 그는 구세군 조선본영에 통신사무원으로 취직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라고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원인 규정이 바르지 않고, 과정이 생략된 기술일 수 있다. 그가 그렇게 곧바로 그 일을 하지는 않았고, 이르게 된 과정이 있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허홍은 그의 형, 허영이 졸업한 1년 후 1925627일에 구세군성경대학을 졸업했을 수도 있다. 최재웅은 구세군사관학교의 제16(1924.09.28.-1925.06.27.) 졸업생 명단에 허연이라는 인물이 허홍이라고 추정했다.

 

 

허홍은 1953년에 열린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에서 서기로 봉사했다. 서기 허홍은 손글씨로 회의록을 작성했는데, 그 회의록에는 허홍의 한문 명칭이 여러 번 등장한다. 허홍이 그 회의록에 남긴 자기 이름의 한문은 許銾이었다.

 

 

최재웅은 허홍보다 1년 먼저 태어난 허영이 1924년에 그 학교를 졸업했으니, 허홍이 1925년에 졸업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러나 허영은 1906년이 아닌 1902년에 출생했으며, 허홍은 1년이 아니라 5년 후인 1907년에 출생했다. 그러므로 최재웅의 첫 추정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최재웅은 허홍의 이름 ”()은 쓰기가 어려워 실생활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는 것이라 그 이름을 기록하는 사람이 그 한자를 비슷한 모양의 다른 한자로 잘못 쓸 수 있다고 추정했다. 이 추정은 설득력이 있다. 최재웅은 조선총독부관보에서 그 사례를 찾아내었다. 그 관보는 을 기록할 때 ”()으로 썼다. 최재웅은 이런 맥락에서, 구세군 자료들도 ”()으로 표기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그런데 에 대한 혼돈된 표기는 구세군 자료나 총독부 자료에서만 나타나지 않고, 오순절 자료들에서도 나타난다. 30년사는 허홍을 한자로 金求이라고 표기했고, 다른 오순절에 대한 자료들에서는 許弘이라고 표기했다.

 

 

    더하여 부친 허곤이 허홍만 구세군에 입대시키지 않았을리 만무하며, 사관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구세군 조선본영에서 일할 수 있었다는 것도 납득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졸업생 명단에 표기된 허연허홍은 동일인물이라고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만약 허연과 허홍이 동일 인물이라면, 구세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허홍은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의 구세군교회에서 사관으로 봉사했을 것이다.허연이란 인물은 허홍이 구세군을 떠난 이후로 구세군사에서 사라졌다.

    물론 허연과 허홍이 각각 다른 인물일 수 있다. 그럴 경우 허홍의 구세군 조선 본영 통신 사무원 근무의 근거가 성경통신공부였다는 30년사의 기술이 정확한 것일 것이다. 그런데, 장형일은 1988년에 구세군의 주요 인물들을 요약하여 제시하면서 허곤에 대해서도 기술했다. 그 기술에서 장형일은 허홍에 대해 허곤의 아들 허홍목사는 순천에 있으며, 한국 오순절교회(현 하나님의 성회) 원로이다라고만 썼다. 장형일은 허홍이 구세군 사관이었는지 혹은 구세군 조선 본영에서 일했는지 등등의 허홍의 구세군 시절에 대해서는 전혀 쓰지 않은 것이다. 허홍은 한국 구세군사에서 사라졌다.

 

 

 

    그런데 허연(허홍)이 구세군에서 그의 사역을 시작하고 1년 후, 구세군의 분규로 인해 그가 구세군 사관 안수 과정을 멈추는 일이 발생했다. 일부 외국인 사관들은 한국인 사관들을 천시하는 태도를 보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 사이에는 임금 차별(서양사관 8, 일본사관 5, 조선사관 1)과 승진 차별이 있었다. 이에 불만을 품고 있던 한국 사관들 중 윤수만, 허곤, 김경선, 전시형 권용준 사관들이 주동이 되어 1926년 가을에 브람웰 부스(Bramwell Booth) 대장의 방한을 계기로 20개조의 진정서를 제출하며 일련의 시위를 시도했다. 사건의 진원지는 구세군이 성하였던 영덕 낙평이었다. 그곳 지방관이었던 허곤과 최봉희 특무, 권용준 병사를 비롯하여 30, 영문의 정교 31, 재무 17, 서기 11, 청년정교 6, 주일학교 교사 28명 등 많은 교인들이 참여하여 거사를 준비했으며, 브람웰 부스 대장 방한을 계기로 서울에서 거사를 일으킬 것을 사관들에게 알렸다. 20개조의 진정서를 작성하는 데, 윤수만 사관이 초안을 작성하고, 권용준 병사가 영어로 번역했다. 그들은 한국을 방문하기 전에 일본에 머물러 있던 대장에게 권용준의 이름으로 진정서를 보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진정서는 반송되고 말았다.

    허홍의 형, 허영을 포함하여 많은 한국인 사관들이 적극적으로 그 운동에 참여했으나, 한국 구세군은 육십여 명의 사관들의 직위를 해제시켰다. 당시 허곤의 직위는 정지되었고, 허용은 해임되었다. 그의 아버지와 형처럼, 허홍은 분명 불복종 사태에 참여했을 것이고, 사관에서 병으로 강등되었을 수도 있다. 그의 아버지와 형은 곧 복위되었다.

 

 

허홍의 형 허영과 형수

 

 

    허홍은 아마도 자신의 복위를 기다리면서 정동에 있는 구세군 조선 본영에서 병 직원(a soldier staff)으로 일했을 것이다. 그는 한국 사관들에 대한 심한 징벌을 경험하면서 구세군 안에서 그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기 시작했다. 30년사는 이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구세군 조선본영에 통신사무원으로 취직이 되어 일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그는 나라없는 설움을 뼈저리게 느꼈고, 차별대우에 한 인간으로써의 통분을 체험했다. 가령 마시는 것은 예로 든다면 미국인은 커피 일본인은 엽차, 한국 사람 허홍에게는 보리차를 주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 힘으로는 이 민족적 차별 대우를 개선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직장을 그만두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있었다.

 

 

IV. 오순절 선교사 메리 C. 럼시와의 만남

 

    허홍은 1930년 봄에 운명적인 전환을 맞았다. 그날도 허홍은 구세군 조선 본영의 한 사무실에서 기가 죽어 일하고 있었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40세가 훨씬 넘어 보이는 외국여성이 목례를 하면서 들어섰다. 그녀와 인사를 나누고 나서 허홍은 그 외국여성이 미국에서 온지 일주일도 못 되는 오순절 선교사 럼시(Miss Mary C. Rumsey)임을 알게 되었다.

 

 

 

    선교사 럼시는 허홍에게 영어로 조선에 오순절신앙을 전교하려고 왔는데 생소한 곳이어서 구체적인 방안이 서지 않으니 허 선생께서 좀 도와주시오라고 청했다. 허홍은 럼시 선교사의 요청을 받고 기꺼히 승낙했다.” 허홍이 럼시의 요청에 기꺼히 승낙했다라는 표현은 허홍의 회상에 의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 영국인 사관들과 일본인 사관들 등 외국인에 비해 열악한 처우와 차별을 시정해 달라는 진정서로 인해 곤욕을 겪어 왔던, 또는 외국인들과의 차별을 받았던 허홍이 외국인 럼시의 갑작스런 제안에 흔쾌히 응했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께서 허홍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 제안에 긍정적인 응답을 하게 하셨을 것은 분명하다. 또한 그때 허홍이 그렇게 빨리 그리고 쉽게 그 제안에 응했다는 것은 허홍이 근본적으로는 외국인들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당시 허홍이 구세군에서 떠날 기회를 찾고 있었다면, 자기 앞에 열리고 있는 오순절이라는 새로운 세계로의 문을 향해 기꺼이 발걸음을 띨 결심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또한 기꺼이 승낙했다라는 표현은 이후 럼시와의 오순절 사역과 그 이후 오순절주의자로서의 삶을 살아보니 그 결정은 잘한 것이었다는 허홍의 생각을 담고 있기도 한 것일 것이다.

 

 

V. 오순절주의 입문

 

    허홍은 냉동(冷洞) 71-11에 있는 집에 하숙을 정했다.冷洞은 마을 여기저기에서 찬 샘물이 솟아난 데서 유래되었다. 조선시대에는 한성부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지하계(池下契)였으며, 1895년 서서(西署) 반송방 지하계 이판동(李判洞) · 냉동(冷洞)이라 칭했다. 1914년 경성부 냉동이 되었다. 그리고 1936년 냉천정(冷泉町)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1946년에 서대문구 냉천동이 되었다. 그리고 허홍은 럼시 선교사가 기독교조선오순절선교회의 본부를 두고 기거하고 있는 정동정 34(貞洞町 三四)의 옛 시병원 건물로 매일같이 드나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럼시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배웠다. 그 성경공부는 럼시가 전교하고 싶었던 오순절 신앙에 관한 것이었을 것이다. 30년사에 따르면, 허홍은 럼시와의 오순절적 성경공부 끝에 마침내 은혜를 체험했다.” 은혜 체험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을까? 오프스테드는 그 체험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했다. 그녀는 허홍이 성령을 받아 근처에 한 교회를 개척했다고 전했다. 또한 오프스테드에 따르면, 마리 주르겐센은 박성산과 배부근의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은 것을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received the Holy Spirit)라고 표현했다. 그런데 존 주르겐센은 박성산과 배부근이 미국에서 그러는 것처럼 사도행전 24절에 따라 성령침례를 받았다”(they received it according to Acts 2:4, just they do in America)라고 전했다.

 

 

 

오프스테드와 마리 주르겐센이 쓴 성령을 받았다는 표현은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안수하니 성령을 받는지라라는 말씀(8:17)과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라고 던졌던 질문(19:1-7)에서 유래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허홍이 은혜를 체험했다는 말은 허홍이 성령을 받았다또는 사도행전 24절을 따라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라는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허홍은 럼시의 사역을 통해 오순절적 성경지식과 체험을 겸비한 오순절주의자가 된 것이다.

    허홍이 은혜를 체험했다는 것은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했다는 견해는 허홍과 함께 동역했으며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첫 총회장이었던 체스넛(A. B. Chesnut)의 보다 더 구체적인 언급에 의해 뒷받침된다. 그 언급은 체스넛의 1955년 봄의 한국 선교 보고 중에서 이루어졌다. 그는 먼저 한국인 오순절 목회자들과 교역자들이 한국의 필요에 부응하는 교회 프로그램을 계획하기 위해 열흘 동안 모였다고 전했다. 그는 그들이 한국에서 발생했던 수년 동안의 고통 가운데서도 계속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으며, 기꺼이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하려 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는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원동력을 제시했다. 그 원동력은 그들이 모두 성령침례를 받은 것”(They have all received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이었다. 그 성령침례를 받은 모든 오순절 목회자들과 교역자들에는 물론 허홍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문옥은 이런 견해와 동일한 것을 언급했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여의도순복음총회(총회장 이영훈 목사)는 교단 창립 60주년을 기념해 2013415일 오전 9시에 기하성 역사 신학 심포지엄을 개최했다. 그 자리에서 오순절교육목회연구원 원장 박문옥은 순복음 선교사들의 발자취라는 제목의 강연을 했다. 그는 럼시 선교사의 생애와 활동을 소개하면서 허홍의 은혜 체험에 대해 말했다. 그에 따르면, 허홍은 럼시와의 성경공부를 통해 오순절신앙을 배웠다. 박문옥은 이어서 허홍은 성령세례의 증거가 방언이며, 기도로서 병을 고친다는 것을 배웠고, 성령세례도 받게 됐다라고 말했다.

 

 

왼쪽의 박문옥 원장

 

 

    허홍의 럼시와의 성경공부는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때로 두 사람은 교리적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성경공부를 하는 중, 허홍은 몇 가지 신앙교리에 럼시와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그런데 그것은 의사전달이 정확히 되지 않아서였다. 교리문제로 심한 언쟁을 하고 서로 결별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냉동에 있는 하숙으로 돌아온 허홍은 심정이 찹찹했다. 그래서 럼시를 찾아가는 중, 러시아정교교회 앞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힘없이 그의 하숙집으로 찾아오고 있는 럼시와 맞부딪혔다. 럼시와 허홍은 다시 만나 더더욱 친밀해졌다.

 

 

VI. 기독교오순절교회의 교역

 

    허홍은 럼시와 한국에 오순절신앙을 전교하는 방법론을 논의하며 하나하나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그는 메리 C. 럼시를 위한 언어 교사와 통역자로서 일했다. 그러나 그는 후에 때때로 파슨스나 오프스테드 등 다른 오순절 선교사들을 위해 그런 일을 하기도 했다.

    허홍은 서빙고교회를 설립함으로써 최초의 한국인 교역자가 되었다. 허홍은 럼시와 함께 19324월에 한국 오순절 최초교회인 서빙고포교소를 설립했다. 허홍과 럼시는 어촌마을이었던 고양군 한지면 서빙고리(高陽郡 漢芝面 西氷庫理)”에서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이 주일학교가 서빙고교회로 발전했다.

 

서빙고 주일학교학생들과 럼시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직후인 1917년 상황.

 

 

이 사실은 허홍이 최초의 한국인 교역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런데 허홍은 서빙고교회의 교역자이긴 했지만, 담임교역자는 아니었다. 담임은 박성산이 맡았다. 박성산은 배부근과 함께 19321월 초에 일본 나고야의 존 주르겐센의 성서신학원에서 방언을 그 증거로 동반하는 오순절적 성령 침례를 받았다. 그는 1932531일에 일본 시모노세끼(下関市) 항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왔다.” 귀국한 박성산은 곧 서빙고교회의 담임 교역자가 되었다. 30년사는 서빙고교회의 설립년도를 1933년이라고도 기록했고, 1932년이라고도 기록했다. 박성산의 귀국과 서빙고교회 담임년도와 비교하면, 서빙고교회의 설립시기는 1932년이다. , 허홍이 서빙고교회를 담임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그가 오순절적인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고 추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허홍이 오순절적 신학교를 졸업했다는 기록들은 존재하기는 한다. 허홍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총회장이 되었던 1956년에 미하나님의성회의 초청으로 미국에 가기 위해 작성했던 서류의 12항은 교육에 관한 항목이었는데, 그 항목에 허홍은 “Nippon Theological Seminary”라고 적었다. 이 일본신학교는 나고야의 성서신학원을 의미했을 것이다. 허홍 사후 순천오순절교회에서 건립한 허홍의 묘비문인 사적비에는 千九白貳拾九年 日本聖書神學院卒業하고. . .”라고 기록되어있다.

 

 

 

 

그러나 허홍이 1930년 봄에 럼시가 내한 함으로써 처음으로 오순절을 접했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가 오순절 선교사 존 주르겐센이 1929년경 일본 나고야에 세운 성서신학원을 1929년에 졸업했다는 기록은 부정확한 것일 수 있다. 박성산도 나고야 성서신학원을 19305월에야 들어갔다. 물론, 1929년이 와전된 것이라면, 이후 다른 때에 그가 일본에 가서 일본성서신학원에서 공부했을 가능성은 있다.

    1932118일에 한국 최초의 오순절 교단이 탄생했다. 글레이디스 파슨스(Gladys Margaret Parsons)는 조선총독부에 포교관리자 설치 신청서를 제출했다. 그 신청서에 기록된 교파 명칭”(敎派 名稱)基督敎 五旬節 敎會였다. 허홍은 1933925일에 기독교오순절교회(교단)의 포교자로 등록했다. 이때 등록한 기독교오순절교회 소속 포교자들은 경성부 수창동의 배부근, 정동의 메리 C. 럼시(-, -, ラムィ), 냉동의 허록[허홍], 고양군 한지면 서빙고리의 박성산이었다. 박성산의 주소지는 서빙고교회의 주소지와 일치했으나, 허홍의 주소지는 냉동,” 럼시의 주소지는 정동으로 표기되었다. 박성산을 담임 포교자로 삼은 서빙고포교소는 1933102일에 기독교오순절교회의 산하 교회로 등록되었다.

 

 

    허홍의 담임 사역은 19357월에 비로소 시작되었다. 그는 193575일에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신사리 一區(彦州面 新沙里)에 기독교오순절교회 산하 사평포교소(沙坪布敎所)를 세우고 그 교회의 포교담임자가 되었다. 언주면(彦州面)은 옛 경기도 광주군에 있었던 행정 구역이다. 1577년에 생겨 1962년에 폐지되었고, 현재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염곡동, 내곡동 및 신원동 일대와 강남구 대부분(일원동, 수서동 등 제외)을 관할하고 있었다. 부리도도 원래 언주면 관할로 잠실동 일부도 포함된다. 대체로 강남구의 전신이다. 신사리는 현재 강남구 신사동이다. 허홍은 자주 주변 마을들을 다니며 전도지들을 나누어주며 복음을 전했다. 그가 전도를 나갈 때마다 박성산이 허홍 대신 사평교회를 돌보아 주었다.

 

 

현재 강남구 신사동

 

 

    허홍은 1937년에 북아현동으로 이사했다. 그는 4월경에 냉천정 71-11에 있던 그의 집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북아현정 3-27(현재 북아현로 10길에 위치한 북아현동 3-27)으로 터전을 옮겼다. 북아현정은 1911년 일제에 의해 경성부 연희면에 편입되었고,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연희면 아현북리로 바뀌었다. 1936년 경성부로 재편입되어 북아현정()이라 칭해졌다. 30년사는 당시 북아현동을 능만이라 하였다 했지만, 그곳 사람들은 굴레방다리안쪽을 능안이라고 했다. “능안은 사도세자(1735-1762)의 아들 위정이 두 살에 죽자 이곳에 안장하고 의령원이라 이름한 애기능에서 유래하며, “능의 안동네라는 뜻이다. 굴레방다리에는 서울역에서 신촌으로 가는 왕복 기차길이 있었다. 능안에는 집도 별로 없었고, 나무도 풀도 많았으며, 한가운데로 신작로가 있었다. 그 길 끝에 산이 있었는데 그 산이 안산이었다. 허홍이 이사한 집은 북아현동 중앙여중 동남쪽, 전에 간이 정거장 연희역이 있던 바로 뒤였으며 한식와가로서 위풍이 있는 집이었다. 이 경치가 좋고 조용한 동네에는 많은 현대적 건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곳은 연희장”(延禧莊)으로도 일컬어졌다. 그 이유는 근처의 연희 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와 이화여자대학의 많은 학생들이 그곳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허홍은 북아현동의 집을 기반으로 새로운 교회를 세웠다. 비록 4,778명이 193312월에 북아현동에 살고 있었지만, 허홍이 그곳에 가기 전에는 기독교 교회가 없었다. 허홍은 메리 럼시의 재정적 도움을 받아 세든 그 집에 교회를 개척했다. 기독교오순절교회는 193761일에 허홍을 포교담임자로 삼고 연희장교회”(延禧莊敎會)를 등록했다.

 

 

현재에도 그 교회로 사용되었던 건물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 같다. 30년사는 연희장교회 교인들이 교회건물 앞에서 모여 서 있는 사진을 실었다. 그 사진에 따르면, 건물 중앙에 문이 있고, 교인들이 두 줄로 서 있는 데 벽쪽에 사람들은 상당히 높은 곳에 서 있다. 도로에 접해있는 그 건물은 2개의 계단 같은 층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런 구조는 현재도 존재하고 있는 그 건물의 구조와 동일하다 항공사진을 보면, 가운데 마당을 중심으로 방들이 자 모양으로 연이어 있다1937916일에 서울에 도착했던, 글레이디스 M. 스테빅(Gladys M.[or Winifred] Stevick)은 몇 달간 메리 C. 럼시와 함께 지낸 후 거주지를 새로 개척된 연희장교회로 옮겨 허홍과 팀을 이루었다.

 

 

 

 

카카오맵거리뷰로 본 북아현동 3:27 건물과 동일한 구조의 옆건물

 

 

중앙 건물이 3-27, 가운데 마당에 나무가 있고 방들이 "ㄷ"자로 붙어있다.

 

구글지도

 

 

.맨 뒷줄 중앙의 허홍과 그 앞에 럼시와 연희장교회교인. 대문 왼쪽 기둥에 세운 "기독교 오순절회 연희장"이라는 글씨가 새겨진 간판이 보인다

 

 

1937년 박성산과 함께 기념촬영. 오른쪽 끝 기와건물이 연희장교회

 

 

    허홍은 1937년 가을에 럼시와 함께 서빙고에서 남쪽으로 한강 건너편 흑석동에 교회를 개척했다. 흑석동(黑石洞)은 현재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북동쪽에 위치한 동으로 한강대교와 동작대교 사이의 남쪽에 있으며 동 · · 남쪽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한강과 나란히 하고 있다. 1895년에는 인천부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 1896년에는 경기도 과천군 하북면 흑석리, 1914년에는 경기도 시흥군 북면 흑석리, 1936년에는 경성부 영등포출장소 흑석정이 되었다. 한강 이북과 이남을 잇는 인도교가 1917년에 놓였고, 1937년에 확장되었다. 중앙대학교의 전신인 중앙보육학교와 경성상공학교, 양복재봉학교 등이 1936년에 흑석지역으로 이전하여 대학가를 형성했다. 19381월에 총독부관보에 등장한 그 교회의 명칭은 기독교오순절교회 흑석교회””(基督敎五巡節敎會 黑石敎會)였다. 그 주소는 경기도 경성부 흑석정 95”이었고, 현재의 남부교회에서 가까운 곳이었다. 1937년 가을에 박경준이라는 서빙고포교소의 교인의 가족이 흑석정 95로 이사했고, 그 집에서 흑석교회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흑석교회의 포교담임자는 박성산이 되었고, 그는 주일 오전에는 서빙고포교소의 예배를 오후에는 흑석교회의 예배를 인도했다.

 

 

 

    기독교오순절교회 산하 교회들을 개척하고 연희장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허홍은 1938105일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파슨스가 조선을 떠난 후 기독교오순절교회의 포교관리자 재선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국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 존 제임스 클레멘트(John James Clement)와 미국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 노르만 H. 바르트(Norman H. Barth)가 내한했다. 그들은 한국 방문 마지막 날, 럼시의 정동 조선오순절선교회 본부에서 허홍을 포함하여 박성산과 배부근에게 안수했다. 존 클레멘트는 193812월에 Redemption Tidings에 실린 기고문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돌아오기 전에 한 목사 안수식을 거행했다. 그 안수식에서 세 명의 현지인 사역자들[박성산, 배부근, 허홍]이 안수를 받았다. 그때는 우리 모두에게 복된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임했고 눈물이 나도록 기쁨이 임했다. 그 안수식은 우리가 그 한국 형제들을 두 팔로 포옹하면서 끝났다. 형제애가 넘쳐나서 한 시간 후 기차가 역을 떠날 때 만감이 교차했다. 그 사역의 미래는 감추어져 있었고, 여시면 닫을 자가 없는 주님만 아실 것이었다. 이 이름을 모르는 현지인 사역자들은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들을 한 시간만 만난다면, 여러분은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음에 부담을 갖고 한국을 떠났다. 그러나 하늘에 뜬 구름은 은빛으로 빛났다. 오순절이 한국에 들어갔다. 기초는 놓였고, 주님의 말씀 따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존 클레멘트(John Clement)

 

 

두 사람의 안수위원들중 하나였던 노르만 H. 바르트와 가족들

 

 

 

1938년에 목사안수를 받은 세 사람, 왼쪽 위의 허홍, 아래의 배부근, 오른쪽 아래의 박성산

 

 

 

    허홍은 두 번째 포교관리자였던 엘시 메레디트(Elsie H. Meredith, 馬理道)가 호주로 떠난 후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기독교오순절교회의 3대 포교관리자가 되었다. 기독교오순절교회는 19401011일자로 총독부에 포교관리자변경신청서를 제출했다. 그 서류에는 새 포교관리자가 목원 결”(牧原 潔, 마키하라 키요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목원 결은 아마도 허홍의 일본식 이름이었을 것이다.

 

 

 

 

총독부관보는 새 포교관리자의 거주지가 북아현정 3-27이라고 기록했는데, 이 주소는 당시 허홍의 거주지 주소와 일치한다. 30년사는 허홍이 1942년에 오순절교회 포교책임자가 되었다고 기술했다. 연도의 차이는 있지만, 한국인 오순절 교역자들 가운데 맨 처음으로 포교관리자가 된 사람은 허홍 한 사람이었던 것을 감안 할 때, “목원 결허홍과 동일 인물이라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

    결정적으로 허홍의 부친의 호적등본은 목원 결허홍의 또 다른 이름이었음을 확인해준다. 허곤의 호적등본에는 허곤(許坤)이라는 이름 오른 쪽에 牧原 正治가 병기되어 있다. “牧原은 성인 를 대신한 것이며, “正治는 명인 을 대체한 것이다. 아마도 牧原 正治목장에서 양을 바르게 기른다는 구세군 사관 허곤의 삶을 담은 것이었을 것이다. 허곤의 호적등본은 자녀 허홍에 대한 기록에서 ”() 옆에 ”()을 병기했다.

 

 

 

 

 

 

 

    기독교 오순절교회의 포교관리자가 된 허홍은 서빙고포교소, 경성포교소, 연희장교회, 연소교회, 흑석동교회를 돌며 활발한 포교 활동을 시작했다. 그런데 허홍은 안타깝게도 포교관리자가 되어 활발하게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심하게 약해져서 그의 사역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 결과 허홍은 연희장교회와 사평교회를 폐쇄해야 했다. 그는 1944131일에 연희장교회의 폐쇄 서류를 공식적으로 총독부에 제출했다.

 

 

 

 

VII.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교역

 

    1945815일 해방된 지 5년 후인 195049일 전남 순천에서 제1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 대회가 열렸다. 허홍은 허약했던 몸 때문에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를 세우는데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그는 평신도 200여 명과 교역자 박성산, 윤성덕, 김성환, 박헌근, 박귀임 등과 함께 그 대회에 참석했다. 그로부터 2개월 후 625일에 한국동란이 일어났다.

    그 전쟁 중에 허홍은 박성산, 배부근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했다. 그 전쟁 동안 많은 다른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셋 모두를 지켜주셨다. 허홍은 박성산과 배부근과 함께 채소 장사로 위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모두 3-4개의 언어들을 말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었지만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이게 했다. 허홍과 그 일행은 예수쟁이들인지 아닌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인민군들이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다. 허홍 등은 벌통 안에 성경 한 권을 숨겼고 여러 위기 속에서도 그 성경을 지켜내었다.

    1946년에 미국 종군목사 엘로드(John R. Elrod, 1918-1992)가 입국하여 근무했었다. 춘천에서 근무하던 그는 배부근을 만나 전도에 필요한 증정용 성경을 공급하기도 했었는데, 전쟁 중에는 오순절교회를 애타게 찾다가 허홍을 만났다. 그리고 일 년 동안 함께 예배를 드렸다. 195124일 자 펜테코스탈 에반젤의 한 기사에 따르면 당시 존 R. 엘로드는 일본에서 가까운, 아마도 경상남도 어딘 가[부산?]에 있었다. 엘로드는 1951년 겨울에 한국을 떠나면서 내가 미국에 도착하는 대로 미국 하나님의성회에 요청해서 한국에도 하나님의성회를 세우도록 주선하겠다고 다짐했다. 엘로드의 노력으로 19524월 초엽에서 중순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선교국 극동아시아지부장 오스굳(Howard Coit Osgood, 1899-1892)이 한국으로 와서 허홍, 박성산, 배부근, 곽봉조, 윤성덕 등을 만났다.  이때 허홍은 오스굳의 영어를 통역했다. 오스굳은 보고서에서 미 하나님의 성회에 적극적인 한국 선교를 주문했다.

 

한국 오순절은 미미합니다. 그러나 저는 오순절적으로 잘 교육을 받은 이 사람들을 등지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제법 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전쟁으로 찢겨진 나라의 절망에서 벗어나려는 손이 우리의 양심의 문을 두드리고 있습니다. 즉시 이런 한국에 들어가는 것 이외에 어떤 다른 것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But though the outlook for the Pentecostal group may not seem bright, I do not see how we can turn our back on these people with their fine background of Pentecostal teaching. With such a substantial number calling to us, and with the desperate need of the war-torn country knocking at the doors of our conscience, how we do anything else but enter Korea with the gospel at once?

 

John R. Elrod와 가족

 

 

창틀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위 사진과 같은 장소일 것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부산교회교인들로 추정되는 성도들과 엘로드 가족. 뒷줄 왼쪽에서 세번 째 허홍. 오른쪽 끝 인물은 박성산일 것이다. 아마도 이때 배부근은 대구에 있었던 것 같다.
엘로드 가족과 허홍의 식사

 

체스넛의 자서전에 실렸던 사진 속의 부산교회 성도들. 한 가운데 여 성도는 박성산이 등장하는 위 사진의 두 번째 줄 제일 오른 쪽 여 성도와 비슷하다.

 

 

오스굳

 

 

    그 결과 19521215일 한국 최초의 미 하나님의 성회 공식 선교사로 체스넛(Arhber Chesnut) 목사가 한국 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체스넛이 내한하자 하나님의 성회 결성의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195253, 허홍은 용산구 한강로 165번지(현 대우월드마크용산아파트자리)에서 있던 자신의 집에 전에 서빙고교회 성도들이던 사람들 중에 몇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 집은 허홍의 개인소유였고, 목조 2층 건물이었는데, 1층에는 허홍의 가족이 사는 방과 7-8평 정도의 예배실이 있었다. 허홍의 집 2층에 머물고 있던 체스넛이 그를 도왔다. 허홍이 육체적으로 매우 허약해서 혼자 사역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6개월 후, 체스넛이 몇 사람에게 침례를 주었다. 이 교회가 남부교회가 되었다.

 

체스넛

 

 

 

서울공항에 도착한 체스넛

 

 

 

남부교회 2층의 허홍

 

 

 

 

남부교회교인들과 허홍(왼쪽, 건물 처마 왼쪽끝 아래)

 

 

    허홍이 세운 남부교회는 한국 오순절 사역자들의 임시 본부가 되었다. 한국 오순절 지도자들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와 관계를 갖는 교단을 조직하고 싶었다. 마침내 남부교회는 일제강점기의 기독교오순절교회의 명맥을 잇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창립회의 장소가 되었다. 195348일에 허홍, 체스넛, 박성산, 윤성덕, 배부근, 곽봉조, 박귀임 등이 남부교회에 모여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 창립에 관한 건을 토의할 목적으로 첫 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에서 통역하던 허홍은 서기로 선출되어 봉사했으며, 상임위원과 기획위원 재무를 맡아 보게 되었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첫 회의 기념사진, 제일 왼쪽의 허홍, 제일 오른쪽의 체스넛

 

허홍이 손으로 기록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첫 회의록

 

 

    창립총회시 교단명칭을 한국어로 어떻게 부를까 하는 문제가 대두되었다. 195346일 밤 체스넛과 허홍은 교단명칭을 두고 기도하고 논의를 시작했다. 중국에서 일한 바 있는 체스넛 선교사는 중국 하나님의 성회처럼 신소회”(神召會)로 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허홍 목사가 하나님의 성회로 명명하자고 제안했다. 허홍은 Assembly of God이란 말을 잘 번역하려고 고심했다. Assembly는 회합, 집회, 대회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그 일례로 국회를 National Assembly라고 하는 것을 들 수 있다. AssemblyChurch와 같이 교회라고 하기도 그렇다. 그래서 그는 결국 Assembly거룩한 모임을 의미하는 성회”(聖會)라고 번역했다. God도 번역이 쉽지 않았다. 구미의 God, Gott, Deus 등은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여러 신에 다 통용되는 것이다. 그래서 허홍은 God하나님으로 번역했다. 그래서 그는 “Assembly of God”하나님의 성회라고 번역했다. 허홍의 안이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허홍이 제안한 명칭이 창립총회에서 사용되었다. 변종호는 허홍이 제안한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 명칭을 성회가 교회보다 좋고 하나님이 세계의 어떤 신명(神名)보다 존귀하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성회는 그 명칭만으로서도 세계에 뛰어나고 세계를 복음화할 의미와 내용을 가지고 있다며 격찬했다. 순 한글로 표기된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분으로, 오직 한 분, 그분은 자기 이외에 그 어떤 신도 비교되기를 거부하신다. 그래서 그분을 받아들이려면 다른 모든 신을 버려야 한다. 그래서 변종호는 하나님이란 명칭에 세계를 복음화할 의미와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한 것이다. 이런 뛰어난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명을 후대에 남긴 허홍의 업적은 길이길이 칭송받아야 한다.

    19535월에는 순복음신학교가 남부교회를 기반으로 문을 열었고, 허홍은 그 학교의 학감이 되었다. 첫 학기 말엽에 체스넛은 캐나다 오순절 복음전도자 하비 맥알리스터 (Harvey McAlister, 1892-1978)를 초청했다. 약 열세 명의 학생들이 참석했고, 그들은 모두 방언을 말하며 성령침례를 받았다.

 

하비 맥알리스터

 

1955년 3월 22일에 열렸던 순복음신학교 제1회 졸업기념사진, 참석했던 교역자들, 제일 왼쪽 가운데줄의 허홍
제1회 졸업식, 교수들과 학생들, 오른쪽 앞에서 두번 째 줄의 허홍, 뒤의 박성산

 

 

    허홍은 럼시로부터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설립 초기 체스넛에 이르기까지 내한 오순절 선교사들의 통역자였다. 이런 그의 역할은 한국 오순절 안에서 어떤 의미에서 박성산보다 우월한 위치에 두었었다. 그런데 박성산은 유문회(Mun-hŭi Yu)라는 새로운 통역자를 영입했다. 유문회는 박성산의 자매의 남편이었고, 허홍보다 영어를 잘했다고 한다. 그는 곧 체스넛과 셋츠(John Stetz)의 제1 통역자가 되었다. 그 결과, 허홍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유일한 통역자라는 특권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이것은 그와 박성산과의 관계를 소원하게 만들었다.

 

 

 

 

    48세의 허홍은 1954년에 2월에 결혼했다. 허홍의 호적등본은 婦子홍점순(洪点順)이 단기 428728일에 허홍과 혼인했다고 기록했다. 단기 4287년은 1954년이었다. 195428일에 홍점순과 결혼한 것이다. 홍점순은 단기 4246, 즉 서기 191321일에 출생했다. 허홍은 4살 연하의 홍점순과 혼인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홍점순에게는 단기 4278, 즉 일제로부터 해방된 해인 1945125일에 출생한 9세의 선희”(善姬)라는 딸이 있었고, 허홍과의 혼인과 함께 호적등본에 허홍의 자손으로 올랐다.

    휴전협정이 맺어지고, 비무장지대가 설치되었다. 모든 노력이 국가 재건에 집중되었다. 자선적, 공적, 사회적 또는 종교적 돌봄을 위한 건축자재를 공급하려는 계획이 미국정부에 의해 개시되었다. 미군에 의해 공급되고 인도될 그 자재를 받을 자격을 얻기 위해, 선교사 체스넛과 한인 교역자들은 한 건물을 설계하고 건설을 위한 자금을 모아야 했다. 그들은 그 공급이 좋은 기회임을 인식하고, 재빠르게 승인을 받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첫 프로젝트는 녹원영아원(錄原嬰兒原, Green Meadows Baby Home)이라고 명명한 원치 않는 아기들을 위한 집이었다. 녹원재단법인 승인을 위해 제출된 서류에는 녹원영아원의 이사장 체스넛(최스낱), 이사 허홍과 이영석, 원장 허난경(許蘭卿, 허홍의 자매)이 등장했다. 당시 서대문구 대조동 88-34호 부지는 기부를 받았고, 골조 건물이 지어졌다. 녹원영아원은 195489일에 개원되었다. 이렇게 허홍은 한국 오순절 교단이 세운 첫 사회복지기관의 초대 이사들 중 하나가 되었다.

 

 

 

    곽봉조 등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이 신학적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배부근은 순복음신학교 교수로서 이의를 제기하며 그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체스넛에 이어 1955년에 순복음신학교 2대 교장이 된 셋츠는 배부근을 사직시키려 했지만 허홍은 그것에 강하게 반대하여 배부근이 사직하지 않게 했다. 체스넛은 1956년 봄에 휴가를 간 후 돌아오지 않았고, 박성산은 3월에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허홍은 그런 상황에서 정기총회일보다 한 달 전인 1956426일에 열린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임시총회에서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총리가 되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총리가 된 허홍을 스프링필드 총회본부로 초청했고, 허홍은 1956827일에 비행기로 미국 시애틀을 향해 떠났다. 그는 미주리 스프링필드에 있는 미 하나님의 성회 본부를 방문했다.

 

미국 비자를 받기 위해 제출했을 여비보증서

 

 

 

허홍은 로스앤젤레스에 두 주간 머물며 1930년부터 1934년까지 한국에 오순절을 전파했던 선교사 엘프레다 오프스테드(Elfreeda Ofstead)를 만나기도 했다. 오프스테드는 허홍의 간증을 들으라고 덜루스와 수퍼리어에 있는 많은 친구들을 그리고 ICA에 있는 몇 친구들을 불렀다. 한국으로 돌아온 허홍은 오프스테드의 팀이 워싱턴, 타코마(Tacoma, Washington)에 한 장소를 개설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곳에서 그 팀은 구호품을 담은 통들과 상자들을 한국으로 보낼 수 있었다.

    셋츠(John Stetz)는 종교재단법인을 만들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산하 교회들의 재산을 재단법인에 귀속시키고 이완식에게 맡기려 했다. 그에 동조하는 선교사들과 교역자들은 19575월에 열린 제6차 총회에서 존스턴(Richard Lawrence Johnston, 1919-1961)을 새 총리로 선출했다.

 

 

존스턴과 가족

 

 

이 결정을 둘러싸고 논란이 일어났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반대했고 그 실행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완식에 의해(이완식은 4년 후 문제를 일으켰다) 195710월에 재단법인이 설립되었다. 창립 당시 그 법인은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의 집들, 신학교 재산, 그리고 서울에 있는 한 교회를 귀속 재산으로 갖고 있었다. 그 재단법인 설립을 반대했던 사람들은 교회 재산을 그 법인에 귀속시키기를 거부했다. 그들을 이끈 사람은 허홍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허홍을 사적인 욕심을 부려 교단의 재산을 사유화하려는 사람으로 보았다. 셋츠는 당시의 분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섰다.

 

보다 작은 위기는 새롭게 설립된 재단법인에 자신의 교회의 재산을 귀속시키는 것을 반대하는 지도적인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목사는 서른 개 교회들의 모든 재산을 훔치려는 계획을 잘 세웠었다. 이 계획은 교단의 재산을 지키려는 셋츠 형제에 의해 드러났고, 그 모든 재산문서들은 안전하게 지켜졌다. 그렇지만 이 지도적인 목사는 하나님의 성회를 떠날 때 추종하는 몇 목사들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들은 다른 오순절 집단을 형성했다.

 

셋츠는 허홍이 하나님의성회의 재산을 사유화하려 했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허홍이 교단의 재산을 사유화한 사실이 없기 때문에 이런 판단은 그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허홍이 재단법인 자체를 반대했다고 생각한다. 순복음가족신문은 개교회의 재산은 개교회가 관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허 홍 목사 측과 개교회의 재산은 교단에 귀속되어야 한다는 선교사 측의 주장이 팽팽히 맞섰다고 당시를 묘사했다. 그러나 허홍은 재단법인 설립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 그가 다른 재단법인을 세웠기 때문이다.

    허홍은 교단의 재산을 사유화하려 하지도 않았으며, 재단설립 자체를 반대하지도 않았다. 그가 반대한 것은 선교사 주도의 재단법인 설립이었으며, 하고자 했던 것은 한국인 주도의 재단법인 설립이었다. 김익진은 허홍이 그 재단법인 설립을 반대했던 이유 세 가지를 추정했다. 첫째로, 다른 교단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정점에 있는 한 사람이 모든 재단의 재산을 차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둘째로, 허홍 자신의 법인을 만들기 위해. 셋째로, 허홍이 3월에 총회장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김익진은 그 모든 추정을 통합하여, 허홍이 당시 선교사가 주도하는 재단법인을 반대했던 이유는 독립적인 한국인 재단법인을 세워서 한국인들이 미국인 선교사들의 통제를 벗어나 스스로 그 운동을 이끌어가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보았다. 최요열의 언급은 이런 시각을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 순복음신학교 제1회 졸업생이며, 1960년에 허홍이 시무했던 서울교회에서 전도사로 일하기도 했던 최요열에 따르면, 허홍의 형제, 즉 허영이 고아원 하나를 세웠다. “그러자 선교사들이 자신들이 그것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으니 자기들에게 고아원을 넘기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그 문제는 법적 다툼으로 번졌다.” 김상호는 허홍이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초청을 받고 미국 총회에 다녀온 후 자신이 선교사들 없이도 교단을 더 잘 유지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고 보았다. 체스넛은 허홍의 독립 시도는 당시로는 무모했으며, 그 결과는 독립이 아닌 분리였다고 평가했다. 허홍의 선교사들로부터 독립된 교단의 꿈은 구세군 일본인 사관이나 외국인 사관들과 비교되는 한국 사관들의 처우 개선을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그의 아버지 허곤의 꿈을 닮았다. 비록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갔기 때문에 비록 그 꿈은 화려한 꽃을 피우지 못하고 큰 열매를 맺지는 못했지만, 누군가는 꾸어야 했고, 언젠가는 실행되었어야 할 좋은 꿈이었다.

    허홍은 기독교오순절교회를 재건하여 1957911일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오순절회의 총회장이 되었다재단법인 기독교대한오순절회는 아래와 같은 설립취지서를 작성했다.

 

오순절은 성신의 역사하신 날이요, 그리고의 몸 곧 교회가 시작된 날이다. 성신역사는 내면인생에 새로운 변화를 불러이르켜 비겁하고 나약한 제자들을 대담하고도 용맹하게 그리스도가 인류의 구세주되심을 믿고 증거케 하였고 또 이를 전파하게 하였다. 성신의 충만함을 받은 모든 동지들은 자연히 뭉쳐서 집단을 이루게 되었으니 이것이 기독교특유의 교회인 것이다. 이 교회는 이천년을 내려오며 인류사회에 공헌한 바가 크다 할 것이니 불법과 혼란 속에 세대가 빠져들어갈 때, 부패와 암흑이 민심을 사로잡았을 때에, 기독교는 그 시대를 구원하여 주었고, 민심을 해방시켜 주었다. 이러한 오순절적인 성신의 역사가 우리 한국에서도 일어났으니 1928년 봄에 미국오순절교회에서는 럼시씨가 선교사로 자진 내한하였고 동년(同年) 가을에는 영국의 메레데드씨와 베시씨가 또 내한, 성신의 충만과 포교와 전도가 활발하여짐에 따라 교회는 자연히 성립되어 이름하여 오순절회라 하였다. 처음 한국인 교역자는 배부근 목사, 허홍 목사 등이었든 바 허홍 목사는 포교관리자로 피택되어 당국에 정식 포교소를 내고 교회는 순복음운동에 적극 진출하게 되었다.

 

 

사단법인 기독교대한오순절회의 설립취지서일부

 

    허홍과 함께 대한오순절교회에 가입했다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로 되돌아간 배부근이 1972324일 세상을 떠났다. 허홍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허홍은 조용기, 정두영과 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그 차 안에서 그들은 쌍방 간에 무조적 통합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1972828일 서울역 그릴 소회의실에서 양측교단 통합추진정권위원들이 모였다. 그 위원회는 하나님의성회 헌법을 모법으로 하고 헌법서문에 허홍에 관한 사항을 삽입할 것, 허홍을 교단 원로목사 및 명예교수로 추대할 것 등을 결의했다. 그리고 1024일 오전 10시에 임시총회를 열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와 대한오순절총회는 통합했다. 허홍은 통합 후 통취위의 결의대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다. 같은 해에 그는 개척하고 20여 년간 돌보았던 남부교회의 담임을 사직했다.

    1973918일부터 22일까지 일주일간 5만 명의 한국성도와 5천 명의 외국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0차 세계오순절대회(the 10th World Pentecostal Conference)가 여의도순복음교회 본 성전과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허홍은 한국 측 준비위원회의 두 명의 부위원장들 중의 하나였다. 허홍은 아마도 그 위원회에 한국에 오순절을 전해준 선교사 엘프레다 오프스테드를 초청인사로 추천하고 그녀의 미국 주소를 알려주었을 것이다. 허홍은 배부근의 부인, 박성산의 아들, 딸과 함께 여의도에 세워진 중앙순복음교회(현 여의도순복음교회) 계단에서 오프스테드의 두 번째 한국 방문을 환영했다.

 

 

 

 

 

    허홍은 1975년 11월 21일 순천오순절교회(현 순복음오순절교회)에 제10대 교역자로 부임했다. 허홍은 교회를 사랑했고, 성도들을 자식처럼 보듬었다. 그를 기억하는 모든 성도들은 이구동성으로 가식과 거짓이 없는 진실한 목사로 칭송했다. 절대 무리수를 두거나 화려한 목회를 추구하지 않았다. 시대적 혜안을 가지고 교회를 옮기려 했지만, 한 두 명 성도가 반대하자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허홍은 교회가 갈등을 빚거나 시끄러운 것을 원치 않았다. 자신의 야망보다 교회의 생명과 평안을 중요시했다. 그는 교회의 아버지와 같았다. 방황하는 청년들을 가슴으로 품었다. 혹 누군가 문제를 일으키면, 조용히 불러서 타일렀다. 사람들 앞에서 그의 자존감을 깎아내리지 않았다. 청년들은 그를 아버지처럼 따르며 존경했다. 그가 1982년 원로목사로 추대되며 은퇴하기까지 교회는 한 번의 소용돌이도 없이 평안한 가운데 조용히 성장해 갔다.

 

1956년 10월에 완공된 남내동 65번지의 순천오순절교회

 

 

현재 순복음오순절교회

 

 

    허홍은 1991421에 순천에서 세상을 떠나 소천했다.

 

 

구세군진죽영문 앞에서 친족들과 함께 했던 허홍(중앙)

 

 

 

 

VIII. 나가는 말

 

    허홍(許銾)1907년에 태어나 1991에 별세했다. 허홍은 한국 오순절 첫 선교사 메리 C. 럼시의 사역을 통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고 오순절주의자가 되었다. 허홍은 기존의 평가들처럼 성령과 함께 일한 오순절적인 개교회의 개척자요 목회자였다. 그는 서빙고포교소, 사평포교소, 연희장교회, 흑석교회 등 한국의 초기 오순절적 교회들을 개척하고 목회했다. 또한 허홍은 오순절적인 교단 창설자이기도 했다. 그는 기독교오순절교회라는 교단과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라는 교단의 창립자들 중의 하나였다.

    허홍에게는 최초라는 수식어를 붙일만 하다. 허홍은 서빙고포교소를 설립하며 최초의 한국인 오순절 교역자가 되었다. 그리고 허홍은 최초의 한국인 오순절 통역자, 최초의 한국인 기독교오순절교회(교단) 포교관리자, 최초의 한국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교단) 총리였다. 또한 그가 설립했던 남부교회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의 최초의 본부이며, 회의 장소, 최초의 순복음신학교 개교 장소였다. 더하여, 허홍은 하나님의 성회라는 교단명칭을 최초로 제안하기도 했다.

    허홍은, 비록 일제에 의한 것이었지만, 개방된 조선에서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 그는 밀려드는 세계와 영어로 소통할 준비를 착실하게 했고, 그 준비는 오순절운동이 한국에 도입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허홍이 그렇게 준비했기에 하나님께서 주관하셨던 한국에의 오순절 진입에 요긴하게 쓰임 받을 수 있었다.

 

 

허홍의 연보

 

1907129일 충남 보령군 청소면 출생

1909년 부친 허곤 구세군 입대 (3)

1912년 부친 허곤 구세군 성경대학 졸업 (6)

1914년 부친 허곤 국제구세군대회 참석 (8)

1915년 구세군 통신성경공부 (9)

1921년 부친 허곤 구세군 사관 임관 (15)

1924년 형 허영 구세군 사관학교 졸업 (18)

1926년 구세군 분규발생, 부친과 형 등 연루 (20)

1929년 자매 허난경 구세군 사관학교 졸업 (23)

1930년 구세군 조선 본영에서 성경통신부서 근무

            럼시 만남, 럼시로부터 성경공부를 통해 오순절신앙 전수 받음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고 오순절주의자가 됨 (24)

             한국 오순절 최초 통역자

1932년 한국 오순절 최초 교회인 서빙고포교소 설립 교역자 (26)

1933년 기독교오순절교회(교단)의 포교자로 등록 (27)

1935년 사평포교소 설립, 포교담임자 (29)

1937년 북아현정에 연희장교회 설립, 포교담임자 등록 (31)

             흑석동교회 개척

1938년 목사안수 받음 (32)

1940년 기독교오순절교회 제3대 (조선인 최초) 포교관리자 (34세)

1944 연희장교회 폐쇄 (38세)

1950년 제1회 대한기독교오순절교회대회 참석 (44)

1951년 남쪽으로 피난, 엘로드 군목 만남 (45)

1952년 미국 하나님의성회 동양선교부장 오스굳 만남 (46)

            미국 하나님의성회 선교사 체스넛과 함께 서울에 남부교회 개척

1953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교단) 창립, 서기, 재무 (47)

            교단명칭 하나님의 성회제안

             남부교회 내에 순복음신학교 개교, 학감

1956년 최초의 한국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총리로 선출됨 (50)

             미국 하나님의성회 본부 방문, 오프스테드 만남

1957년 대한오순절교회(교단) 총회장 (51)

1972년 교단통합,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원로목사 추대, 남부교회 사임 (65)

1973년 제10회 세계오순절대회 한국 측 준비위원회 부위원장 (66)

             오프스테드 영접

1975년 순천오순절교회 부임 (68)

1982년 원로목사로 은퇴 (75)

1991년 소천 (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