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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오순절역사

한국 오순절 선교사 엘시 한나 메레디트와 릴리안 베시(Elsie Hannah Meredith and Lillian Vessey)

한오신 2022. 9. 28. 23:10

 

베시와 메레디트

 

한국 오순절 선교사 엘시 한나 메레디트와 릴리안 베시(이창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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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복음총회신학교 조교수 이창승

2022.9.28

 

 

 

I. 들어가는 말

 

    엘시 한나 메레디트(Elsie Hannah Meredith)와 릴리안 베시(Lillian Vessey)는 한국에 오순절 신앙을 전해 준 영국 출신 선교사들이었다.메르테트벳시로 표기되어 온 메레디트와 베시에 대해서는 1932년 즈음에 글레이디스 파슨스의 초청에 의해 영국에서 한국으로 독립오순절 선교사로서 왔다는 것, 한 사람은 여고 교장, 다른 한 사람은 백화점 경영자였다는 것, 배부근과 함께 수창동 교회를 세웠다는 것, 그리고 19401220일에 서빙고교회에서 환송예배를 드린 후 강제 출국을 당했다는 것 이외에는 거의 알려진 것이 없었다.

    그들에 대한 더 많은 자료들과 연구들이 필요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에서 풀러신학교에 제출된 한 박사학위논문은 메레디트와 베시에 대한 상당한 연구 성과를 보였다. 본 글은 그 논문을 뼈대로 삼고 살을 붙인 것임을 밝힌다.

 

 

II. 출생

 

A. 엘시 메레디트의 출생

 

    엘시 한나 메레디트는 1902326일 웨일즈 중부 라드노숴, 린펜팬(Llwynpenfaen, Radnorshire of Mid Wales)에서 출생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반(Evan)이었고, 농부였으며, 그녀의 어머니는 마가렛(Margaret)이었다. 엘시는 12명의 자녀들 가운데 11번째였다.

 

 

 

B. 릴리안 베시의 출생

 

    릴리안 베시는 1902년경 북잉글랜드의 요크셔, 쉐필드(Sheffield, Yorkshire of Northern England)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조지(Geroge)는 철도 짐마차꾼(railway drayman)이었고, 어머니는 로스(Ros)였다.드레이맨튼튼하고 긴 카트로 맥주통과 같은 무거운 짐을 날랐던사람이었다. 그러므로 레일웨이 드레이맨은 기차에 화물을 싣거나 기차에서 화물을 내리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III. 한국선교소명, 오순절적 훈련, 신유체험

 

A. 모교회들

 

    메레디트의 모교회는 웨일즈, 크밤펠린파흐에 있는 교회(the Assembly at Cwmfelinfach, Wales)였고, 베시의 모교회는 쉐필드의 채플타운에 있는 오순절 교회(the Assembly at Chapeltown, Sheffield)였다. 두 교회는 규모가 작았다.

 

B. 한국 선교 소명과 오순절적 훈련

 

    메레디트와 베시는 오순절적인 성경학교에 들어갔다. 최재웅은 그들이 햄스테드 성경 학교(Hampstead Bible School)에 다녔다고 보았다. 그 성경학교는 오순절적 사역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유럽에 개설된 첫 오순절 성경 학교였다. 최재웅은 그 학교의 창립자가 알프레드 하워드 카터(Alfred Howard Carter, 3 January 1891 January 1971)였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 학교의 모체는 리탐의 모그리지(Mr. Morgridge of Lytham)에 의해 오순절 선교 연합회(the Pentecostal Missionary Union)의 후원으로 설립되었다. 잉글랜드의 주도 프레스톤에 있던 그 학교는 곧 성장했고, 1927년에 햄스테드(Hampstead)로 이전했으며, 그곳에서 하워드 카터가 교장이 되었다. 그 학교는 이때 햄스테드 성경 학교(the Hampstead Bible School)라고 알려지게 되었다. 카터가 27, 교장이던 동안 많은 전도자들, 목사들, 그리고 교사들이 전 세계의 선교지로 나갔다. 카터는 1차 세계대전의 와중에서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수감되었었다. 카터는 그곳에서 성령의 아홉 가지 은사들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 그는 후에 영국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의 설립자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카터는 1929년에서 34년까지 그 교단 총회의 부총회장, 1934년에서 45년까지 총회장이었다. 1948년에 카터는 햄스테드 성경 학교를 새로운 교장 조지 뉴솔름(George Newsholme)에게 인도했고, 뉴솔름은 1951년에 그 학교를 하나님의 성회에 넘겼다. 그 학교는 영국 하나님의 성회의 공식 성경 학교가 되었고, 햄스테드에서 켄리(Kenley)로 이전했다. 도날드 기(Donald Gee)가 교장으로 임명되었고, 학생 수와 영향력에서 발전했다. 그 교명은 하나님의 성회 성경 대학(the Assemblies of God Bible College)으로 바뀌었고, 1970년에 현재의 마터시(Mattersey) 캠퍼스로 이전했다.

 

 

 

 

햄스테드로 이전하기 전 Kenley Bible School

 

알프레드 하워드 카터

 

 

    그런데 베시 본인은 자기가 다녔던 성경학교에 대해 최재웅과는 조금 다른 말을 했다. 그녀에 따르면, 그녀가 다닌 성경학교는 햄스테드가 아닌 라우드에 있었다. 그녀는 한 간증문에서 이 기간 동안[5] 주님께서는 한국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도록 저를 부르셨습니다. 저는 라우드(Louth)에 있는 여성 성경 학교(Women’s Bible School)에 들어갔습니다라고 썼다. 라우드는 잉글랜드, 링턴쉐어의 린드세이 동부에 있다. 라우드 여성 성경학교의 시작은 1927년 여름에 카터가 라우드에 열었던 4달간의 여성을 위한 성경학교였다. 오순절적 사역자 스테펜 제프리스(Stephen Jeffreys)19276월에 라우드에서 오순절적 집회를 열었고, 많은 영혼을 구원하였다. 제프리스는 광부로 일하다가 이반 로버츠(Evan Roberts)가 이끌던 웨일즈 부흥운동을 통해 사역자가 되었고, T. B. 바렛(Thomas Ball Barratt)이 붙인 오순절 부흥의 불길 속에서 방언을 말하며 성령침례를 받고 오순절 사역자가 되었다. 카터는 제프리스의 라우드 집회의 열매들 가운데서 여성사역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4달간 열리는 성경학교를 라우드에 있는 웨스트게이트 하우스(Westgate House)에 열었다. 그 단기 성경학교가 라우드 성경 학교(Louth Bible School)가 되었다. 여러 곳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했던 카터는 헤롤드 호르톤(Harold Horton)에게 여러 과목을 맡기고 또한 그를 교장으로 세우고 학교를 그에게 맡기다시피 했다. 호르톤은 감리교 대학에서 고등비평과 자유주의신학을 배우고 목사가 되었었으나, 스미스 위글리즈워스(Smith Wigglesworth)의 오순절적 집회를 통해 진정으로 회심하고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고 오순절주의자가 되었다. 그를 알게 된 카터는 라우드에 세운 성경학교에 그를 초빙했던 것이다. 라우드 성경학교는 1928년에 스카보루그(Scarborough)로 캠퍼스를 이전했다. 베시는 자신이 라우드에 있는 여성 성경학교에 들어갔다고 말했는데, 그렇다면, 그녀는 성경학교에 들어가기 5년 전, 21세가 되는 1923년경에 열렸던 한 집회에서 오순절적인 은혜와 한국으로 선교 소명을 받고 25세가 되는 1927년경 카터에 의해 라우드에 세워진 여성 성경학교에 들어가 호르톤에게서 배웠을 것이다. 그런데 라우드 성경학교는 1937년에 햄스테드 성경학교로 통합되었다. 최재웅은 메레디트와 베시가 학창시절에 한국 소명을 받았다고 보았지만, 사실은 베시는 성경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한국 선교 소명을 받았던 것이다.

 

 

스테판 제프리스
헤롤드 호르톤

 

 

C. 신유체험

 

    1931년 즈음에, 메레디트와 베시는 라우드 성경학교 학생시절에 알게 된 런던 남서부 클래팜 공원, 버네빌레가 1번지에 있에 있는 샤프맨의 치유의 집(Chapman’s Home of Healing)에서 머물렀다. 그곳에서 그들은 신유를 경험했다. 메레디트의 왼쪽 귀멀음이 치유되었고, 베시의 오른쪽 전체와 왼쪽 눈 일부의 장애가 치유되었다.

 

 

IV. 한국 선교

 

A. 한국행

 

    1932년에 메레디트와 베시는 영국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에 선교사로 지원했다. 이에 그 교단의 선교 사역을 관장하고 있던 선교국(The Home Missionary Reference Council)은 그들 각자에게 준회원 증서”(Associate Certificate)를 발부했다. 메레디트와 베시는 독립 오순절 선교사로서 왔다고 알려져 왔다. 그러나 사실은 그들은 영국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의 파송을 받았으며 그 교단으로부터 비록 적지만 지속적인 후원을 받았다.

    30세의 메레디트와 베시는 한국 선교 현장에 대한 그 어떤 지식도 없이 한국으로 향했다. 그들은 1932930일에 코모린 호(S.S. Comorin)를 타고 항해를 시작했다. 코모린 호는 길이 165미터의 승객과 화물을 실었던 배로서 Barclay Curle & Co., Ltd., Whiteinch, Glasgow에 의해 Peninsular & Oriental Steam Navigation Co., London을 위해 1925114일에 완성되었다.

 

S.S. Comorin

 

    4일 후 메레디트와 베시는 1932104일에 프랑스의 항구인 마르세유(Marseilles)에서 자기들이 체험한 신유와 한국으로의 소명이 담긴 간단한 간증문을 써서 영국으로 보냈다.

 

우리[메레디트와 베시]는 우리의 간증문을 마르세유(Marseilles)에서 우편으로 보냅니다. [베시]는 이 간증들이 불쌍한 영혼들에게 참으로 복이 되기를 바라고 기도합니다. 저는 제가 예수님께 속하게 된 것을 매우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한 오순절적 집회로 인도하셨음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거기에서 한 사람이 이적적으로 고침을 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수년 동안 허리 문제로 고통을 받아왔었습니다. 저는 놀라운 구원자, 우리 주님의 권능에 대해, 그분이 우리의 질병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들었었습니다. 사랑하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그 오후에 주님께 마음을 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지난 5년 동안 저를 놀랍게 지켜주셨습니다. 이 기간 동안 주님께서는 한국에서 그분을 위해 일하도록 저를 부르셨습니다. 라우드(Louth)에 있는 여성 성경 학교(Women’s Bible School)에 들어갔습니다. 이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샤프맨(Mr. Chapman)을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 소녀들[메레디트와 베시]은 성령강림 주간 마지막 날에 킹스웨이 홀에서 열린 그 집회에 참석했고, 샤프맨의 치유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지내면서 받은 복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당시 왼쪽 눈은 22년 동안 보이지 않았고, 오른쪽 눈의 삼분의 일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몸 전체에 신경염도 발병하였습니다. 저는 세 사람의 전문의들의 치료를 받았고, 각 사람은 저에게 왼쪽 눈은 다시는 보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찬양합니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십니다. 저는 기도를 받은 후 안경을 쓰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는 모든 학업을 아주 잘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저의 눈은 그 의사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점점 더 좋아졌습니다. 저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을 인해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영혼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는 일에 저를 사용하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래서 제가 그들에게 우리 주님의 놀라운 구원하시고 고치시는 능력을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릴리안 베시. 1932104

 

 

 

[메레디트]는 신유에 대한 개인적인 간증을 씁니다. . . .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치시 능력을 간증할 수 있게 되어서 매우 기쁩니다. 저는 왼쪽 귀에 발생한 청각장애로 약 15년 동안 고통을 당해왔었습니다. 그 질병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갔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국을 위한 사역에로 부르신 후에, 저는 저를 부르신 분이 제가 이 어려운 언어를 배워서 순복음(Full Gospel)을 전하게 하시려면 무엇보다 먼저 저의 청각장애를 고치셔야 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장애로부터 건져주시기를 애쓰며 기도했었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는데, 주님께서 저를 샤프맨의 치유의 집(Chapman’s Home of Healing)으로 이끄셨습니다. 그 치유의 집은 런던 남서부 클래팜 공원, 버네빌레가 1번지에 있습니다. 그곳에서 샤프맨 형제가 저에게 주의 깊고 끈기 있게 저의 믿음이 오랫동안 실패했었다는 것을 지적하면서 안수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믿음을 취했고 주님께서 주시기를 바라는 그 신유를 어린이 같은 단순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결코 헛되지 않았기에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몇 주간의 점차적인 고침 이후에 듣는 것은 완전하게 정상으로 회복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분은 부르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소명에 필요한 것을 갖추게 하십니다. 주님께서 몸을 고치심을 구하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격려를 위해 이 간단한 간증을 사용하셔서 그분이 영광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엘시 H. 메레디트. 1932104

 

 

 

    30년사에 의하면, 베시(Lillian Vessey)와 메레디트(Elsie Hannah Meredith)는 글레이디스 파슨스에 의해 한국으로 오게 되었다. 파슨스가 2년 만에 귀국하면서 영국 오순절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편지로 요청했다는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은 팔선은 미국 오순절 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편지로 요청해서 1933년 영국 오순절 교회의 신자였던 메레디드와 베시 등이 한국에 오게 되었다라고 썼다. 그리고 김익진은 파슨이 개인자격 선교사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기 때문에, 그 두 영국 여성들을 영국에서 만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 이외에 선교사로 갔던 나라가 없었다.

    사실은, 도날드 기(Donald Gee)에 의하면, 일본 선교사였던 영국인 윌리엄 테일러(William James Taylor)의 부인 메리 테일러(Mrs. Mary Taylor)가 베시와 메레디트를 파슨스에게 소개했다. 메레디트(1902-1966)와 베시(1902-??)1932930일에 조선 선교를 위해 영국을 떠났다. 그들은 조선으로 오는 도중에 우연히 메리 테일러를 만났다. 그때 영국인 테일러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와 협력 선교를 위해 홍콩에 거주하면서, 중국 순회 부흥회를 열고 있었다. 테일러는 그들에게 조선의 경성에서 사역하고 있던 파슨과 오프스테드를 소개했다. 베시와 메레디트는 그 소개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파슨과 오프스테드와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더하여 테일러는 한국에 있는 파슨과 오프스테드에게 베시와 메레디트를 소개했다.

 

B. 한국 도착과 파슨스와 오프스테드와의 동역

 

    오프스테드에 따르면, 베시와 메레디트는 1933년경 [둘 모두 31세에] 한국에 입국하여 京城府 西大門区 竹添町 三丁目 三番地 二十六号,” 즉 안산(鞍山)의 동남부 금화산 중턱에 있던 파슨스와 오프스테드의 집에서 함께 지내며 그들과 동역했다.

    메레디트와 베시는 파슨스와 오프스테드와 함께 1933년 무더운 여름에 인수받은 내수동(현 수창동)의 한 장로교회를 리모델링 했다. 그들은 회반죽을 발라본 적이 없었지만, 유리창을 갈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해냈다. 그들은 마루에 니스칠을 했고, 제단 의자 하나를 얻어 니스칠을 했고, 설교단을 칠했다. 이 교회가 일명 수창동교회라고 일컬어져 온 기독교오순절교회 경성포교소”(基督敎五巡節敎會 京城布敎所)였다.

 

 

    하나님은 메레디트와 베시 그리고 선교사들을 통해 특별한 영혼구원의 일을 하셨다. 그날 오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함께 있던 네 명의 여자들이 대답을 했고, 네 남자가 한 여인을 태운 들것을 들고 들어왔다. 선교사들은 그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남자들은 선교사들에게 그녀는 그들의 어머니인데, 7년 동안 눈을 뜨지 못했고, 말하거나 걷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 남자들은 그녀가 귀신들(demons)을 숭배했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녀가 귀신들렸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선교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매우 두려웠다. 오프스테드는 거실 바깥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른 여성 선교사들은 거실에 있었다. 오프스테드는 어떻게 기도할지 몰랐고, 메레디트와 베시 등도 어떻게 기도했는지도 몰랐다. 한 가지 오프스테드는 그녀와 메레디트와 베시가 무서워했었다는 것은 알았다. 오프스테드는 내가 주님, 이 여인이 무엇으로 인해 고통을 받든지, 그녀를 건져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메레디트와 베시도 기도했다. 그러자 들것에 실려있던 그녀는 일어서서, 한국말로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귀신 숭배자였었고 예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자기의 구주에 대한 계시를 받았었다. 그 네 남자는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그리고 그 여인은 최자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3394일에 메레디트와 베시를 비롯한 선교사들은 한국에서의 첫 전도 집회를 열었다. 이때 존 주르겐센의 일본 성서신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배부근이 그들을 도왔다. 첫 집회에서 두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자주 따르는 표적들로 그분의 말씀을 확증하셨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들이 놓임을 받았다. 그 첫 집회에서, 한 불교 중이 회심했다. 선교사들은 한국 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라는 문구를 인쇄했다.

 

메레디트와 베시

 

 

C. 독립적 사역

 

    폐렴과 장티푸스, 그리고 대수술로 인해 허약해진 오프스테드와 심리적으로 약해진 파슨스가 19346월 말에 본국인 미국으로 떠났다. 남겨진 메레디트와 베시는 배부근과 함께 경성포교소(수창동교회)의 사역을 이어갔다. 파슨스는 귀국 전에 메레디트를 임시 기독교 오순절 교회의 관리자로 세웠다. 19353월에 메레디트와 베시는 조선총독부에 기독교 오순절 교회 소속 선교사로 등록했다. 그 서류에 따르면, 메레디트의 한국명은 마리도”(馬理道, エル シ- メリデト)였으며, 베시의 한국명은 배시의”(裵時義, リリアン ツイ)였다.

 

 

 

 

 

 

 

 

D. 영국인 알프레드 카터와 미국인 레스터 섬랄의 방문

 

    영국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의 총회장이었던 알프레드 하워드 카터(Alfred Howard Carter, 1891-1971)가 미국 전도자 레스터 섬랄(Lester Sumrall, 1913-1996)과 함께 세계 선교 여행을 위해 다니다가 1935년 11월 15일에 한국을 방문했다. 40대의 카터와 20대 초반의 섬랄은 알칸사스주, 유레카에서 처음 만났다. 그들은 곧 친해졌고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로서 함께 세계를 여행했다. 섬랄은 성령의 은사들과 사역들이라는 책에서 카터의 가르침들을 해설하기도 했다. 카터는 그의 성경학교 학생들이었던 메레디트와 베시를 격려하기 위해 두 번 한국을 방문했다.

    카터와 섬랄은 나흘간의 첫 방문 동안 경성 오순절 성회(Kyŏngsŏng Pentecostal Assembly, 수창동 교회)에서 저녁 집회를 인도했고, 두 번째로 서빙고 근처의 어느 학교 교정에서 집회를 인도했다. 이 소식은 섬랄에 의해 영국에 전해졌다.

 

[첫째 날] 저녁에 우리는 첫 집회를 가졌다. 그 교회에 도착하여 문을 열었을 때, 깜짝 놀랐다. 모인 모든 사람들이 작은 밀집 방석을 깔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신을 벗고 들어가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우리 각자에게 의자를 제공했다. 바닥에 한 시간이나 두 시간 동안 앉아 있는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일 것이다. 그 집회는 은혜로웠고,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참석했다. 다음 날 우리는 세 번의 집회에 참석했고 그 한국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매우 즐겁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들은 조용하게 앉아서 우리가 전하는 말을 열심히 들었다. 아침 집회는 친교 모임이었고, 이 머나먼 땅의 형제자매들과 탁자 주위에 모여 대화하는 것은 복된 일이었다. [둘째 날] 저녁에는 그 작은 교회가 가득 찼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회개시키는 능력을 그 집회에 행사하셨다. 여덟 명이 앞으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구원자로 영접했다. [셋째 날] 저녁에 우리는 포교소 바깥에서 한 집회를 열었다. 먼저 우리는 도심지로 궤도전차를 타고 가서 교외로 가는 전차를 탔고, 그다음 황소와 달구지, 사람들 등등을 실은, 노를 저어 가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16분 정도 깊은 모래 지역을 걸은 후 그 마을에 도착했다. 집회는 한 학교 건물에서 열렸다. 종이 등불과 작은 기름 등불이 밝혀졌다. 그 건물은 흥미롭게 듣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미발달한 곳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심음으로써 축복하셨다.

 

섬랄

 

 

 

    두 달간의 일본 선교 후 그들은 서울을 다시 방문하여 일주일을 보냈다. 이 두 번째 방문은 계획에 없던 것으로 한국에 있는 오순절 선교사들의 요청에 응한 것이었다. 섬랄은 이 방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영국에 써 보냈다.

 

기도와 숙고 후, 우리는 한국의 성도들을 다시 방문하기로 결정했다. 시모노세키에 도착하여 직접 만주, 아더항으로 보트를 타고 가는 대신 조선으로 가는 “Te Kiyer Mare”호에 승선했다. 그 증기선은 동트기 직전에 조선에 당도하여 일곱 시 삼십 분 경 부산에 있는 부두에 도착했다. 그 저녁은 추웠다. 한국 해안에 내렸을 때, 날씨는 아주 쌀쌀했다. 남자들은 얼어붙지 않으려고 차 주위를 맴돌면서 토끼처럼 걸었고, 다른 사람들은 털옷을 입고 있었다. . . 경성(Keijo, 경성포교소)과 서빙고(Gabingo, 서빙고포교소)의 성도들은 큰 기대를 가지고 우리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다. . .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셨고, 그들은 마음에 그리스도를 영접했다. 그 친구들은 우리에게 첫 방문 때 고침을 받았던 몇 그리스도인들을 소개해 주었다. 4년 동안 자신의 집 마당 밖을 걸어본 적이 없던 한 남성이 그 집회에 이끌려 와 기도를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치료하셨고, 다음 날 그는 그 역으로 걸어 내려와 일본으로 가는 우리를 배웅했다. 그의 아내는 동일한 집회에서 성령침례를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지금 하나님의 축복 안에서 함께 기뻐하고 있다. 또 다른 남자는 2년 동안 정신착란에 빠져 직장을 잃어버렸었다. 기름부음과 기도를 받은 후, 그의 정신적 균형이 온전하게 회복되었고, 그를 고용했던 사람은 그를 이전 자리로 복귀시켰다. 이외에도 성도들의 신앙을 강하게 한 여러 가지 치유들이 일어났다. 그래서 죄인들이 여호와의 권능을 알게 되었다.

 

 

 

 

이 소식은 베시와 메레디트에 의해서도 영국에 전해졌다.

 

[1936] 117일 금요일에 우리는 카터(Alfred Howard Carter, 1891-1971)와 섬랄(Lester Sumrall, 1913-1996)이 다시 우리를 방문한 것을 매우 기뻐하며 환영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 형제들을 한국으로 다시 보내시도록 많이 기도해 왔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 기도가 응답되어 너무도 기뻤다. 이전의 방문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음식의 전체를 맛보기에는 너무도 짧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족하지 못했던 이전의 방문보다 더 풍성한 영적 잔치를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서울 성회[수창동교회]에서의 집회는 영하 6도 이하의 아주 추운 날씨 가운데서 시작되었다. 그 야외에서의 특별 집회들은 허락된 기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날씨가 그렇게 추운 것은 참 애석한 일이었다. 추운 날씨는 이 사역을 어느 정도 방해했다. 날씨가 좋았다면 더 많은 불신자들이 참석했을 것이다. 124일에 돌아올 한국의 설날을 준비하는 때라서 또한 사람들이 더 나오지 못했다. 그러나 이렇게 좋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그 집회들에는 큰 복이 임했고, 모든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일곱 명의 남성과 한 명의 여성만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 그 집회들은 주일 아침과 오후에, 그리고 화요일과 수요일 저녁에 서빙고교회와 여기 경성 교회에서 열렸고, 카터와 섬랄이 각 집회들에서 말씀을 전했으며, 그 말씀은 참석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복이 되었다.

 

 

 

    이때 카터와 섬랄은 오순절 선교사들과 한국인 사역자들과 경성 오순절 성회[수창동교회]와 서빙고 오순절 성회[서빙고교회]의 학생들을 위해 성경 공부반을 열었다.

 

오전에는 현지인 사역자들과 선교사들이 성경 공부를 위해 모였다. 그 시간에 그 젊은 한국 목사들은 다루어지길 바라는 그들의 문제들과 어려움들을 가지고 왔다. 그들은 그것들이 마치 거품처럼 사라지는 것을, 또는 너무도 간단하게 설명되어 그들이 너무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에 아주 만족해 하며 하나님을 찬양했다. - 섬랄 - 

그리고 우리는 성경 공부들에 대해 말해야만 한다. 선교사들과 더 깊은 사역자들은 영적 진리들을 위해 하나님의 말씀 주위에 모였다. 이것은 우리에게 오랫동안 혼란스러웠던 질문들을 해소한 좋은 기회였다. 우리는 아주 어려운 주제들이 매우 명확하고 쉽고 온전하고 만족스럽게 다루어지는 것에 놀랐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한 이 즐거운 시간 때문에 감사하기를 멈추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영적으로 보다 더 풍성해졌을 뿐만 아니라, 주인을 위해 보다 좋은 선교사들과 사역자들이 되었다. 6일간이었지만, 또한 너무도 짧았다. 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이 하나님의 일을 촉진시키기 위해 만주로 가는 것을 배웅하기 위해 24일에 서울역에 모였을 때 감사와 슬픔이 교차되는 것을 느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넘치는 상을 주시기를, 그리고 그들이 다른 많은 갈망하는 선교사들에게 영감과 축복의 근원이 되게 하시기를 바란다. - 오프스테드와 베시 -

 

    1936517일 주일날 경성 성회와 서빙고 성회는 함께 카터와 섬랄의 집회들에서 회심한 열 명의 형제와 자매들을 위해 서빙고 성회 근처 한강에서 물에 잠기는 공동 침례식을 가졌다.

 

 

 

    메레디트와 베시는 보통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졌다. 그들은 영국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로부터 아주 적은 후원금을 받았다. 그들은 부족한 재정을 메꾸기 위해 자신의 가족들과 모교회로부터 간헐적으로 조금의 후원금을 받았다. 이런 그들의 재정적 부족은 30년사의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30년사는 이들이 한국에 빈손으로 왔기 때문에 선교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라고 기록한다. 그래서 그들이 파슨스, 오프스테드와 함께 1933년에 내수정(內需町) 106번지에 있던 장로교회를 인수해 세웠던 수창동교회(공식명칭 기독교오순절교회 경성포교소, 基督敎五巡節敎會 京城布敎所)는 결국 재정문제로 193691일 사직정(社稷町) 117번지의 보다 작은 건물로 이사해야 했다. 이 건물이 30년사가 수창동교회라고 일컫는 사직 공원 전방 300미터 지점, 경성부 사직동 106번지에 그리스도의 교회 건물을 임대해서 한국에서 두 번째 오순절 교회였을 것이다. 30년사는 경성포교소의 위치변경과 건물 상황의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고 두 정보를 혼합하여 제시했던 것이다.

 

 

 

 

E. 합정교회 개척

 

    메레디트와 베시에 의해 운영되던 기독교오순절교회 경성포교소(수창동교회)19371110일에 합정동(合井町) 211번지에 지교회인 기독교오순절교회 합정교회”(基督敎五巡節敎會 合井敎會)를 세우게 되었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이 소식을 영국 하나님의 성회에 전했다.

 

우리는 우리의 복음 전도사역을 축복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국의 수도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한 교회를 설립하는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1114일에 열린 창립예배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복음이 권능과 축복으로 전해졌습니다. 그 주간의 특별 집회들은 관심을 계속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열세 명의 영혼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이 사역을 인증하셨습니다. 그 회심자들 가운데 청년들 대부분은 그들의 집에서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 가운데서 주님의 진정한 증인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사역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온 형제들과 자매들로 구성된 작은 무리는 우리의 점심을 나르며 그 시골 지역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나갔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한 활동적인 집회를 위해 하루 온 종일을 보내야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들과 소책자들을 들고 마을 마을을 돌아다니며 각 집을 방문하고, 가능한 곳에서마다 읽어주고, 기도하고 설교했습니다. 관심이 높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관심을 보였고, 근처에 교회가 있으면 다니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도, 연기, 그리고 실망 후,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목적을 위해 훌륭한 집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집은 한 마을에 있는데, 그 마을은 모든 방향에서 다른 마을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 마을들에 접근하기가 용이하고 복음 전도에 효과적인 곳입니다. 우리는 이 중심으로부터 가까운 시일 내에 지교회들을 세우고 그 지역들의 보다 많은 필요를 채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설교하고, 방문하고, 개조하고, 고치는 일을 하는 모든 현지인 사역은 전적으로 자원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한국인들은 이 새 사역에 있어서 매우 특별하게 봉사하고 있으며, 그것에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날씨가 허락하는 한 이 개척 사역을 실행하기 위해 힘쓰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큰일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꺼이 희생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를 수 있도록 하게 하지 않으시렵니까?

 

 

 

 

 

 

F. 영국인 도날드 기의 방문

 

    19381월에 영국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의 부총회장이었던 도날드 기(Donald Gee)가 한국을 방문하고 이 선교지에 대해 보고를 남겼다. 그의 보고에 따르면, 한국에서 사역하던 두 영국 오순절 선교사들은 생활 한국어 정도는 말할 수 있었지만, 한국어로 유창하게 설교할 정도의 수준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도날드 기는 경성에 하루 동안 방문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기는 한국인들을 포함한 두 번의 회합을 가졌다. 하나는 [메르테드와 베시와의] 긴 개인적인 만남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들의 미국 동역자들과의 만남이었다. 짧은 방문이었지만, 기는 영국 선교사들과 미국 선교사들 간의 어떤 분쟁을 알아챘다. 그 분쟁은 글레이디스 파슨스가 수행했던 포교관리자 직무를 누가 이어야 하느냐를 두고 일어난 것이었다. 메레디트는 공식이 아닌 비공식 그리고 임시 포교관리자였다. 파슨스가 미국에서 돌아올 기미는 없었다. 총독부는 1937년에 메레디트가 포교관리자 직무를 수행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메레디트는 공식 증서(준회원이 아닌 정회원 증서)가 없었고, 이것은 총독부가 기독교 오순절 교회의 사역 전체를 불신하게 했다. 이 상황에서 그 교단의 주요 재정 후원자였던 럼시는 교회들로부터 포교관리자로 등록하라는 압력을 받고 있었다.

 

도날드 기

 

    도날드 기는 독립선교사 럼시가 포교관리자가 된다면 영국이나 미국 하나님의 성회와의 공식적인 관계가 사라지게 될 것을 염려했다. 또한 총독부는 난삽한 종파들의 분립을 싫어했고, 따라서 이후 더 이상의 오순절 기관의 등록을 쉽게 받아줄 것 같지 않았다. 이런 바람직하지 않은 상황을 예방하기 위해, 기는 메레디트와 베시에게 회원증서보다 낮은 등급의 준회원 증서”(Associate Certificate)를 발급해 줄 뿐만 아니라, 영국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이었던 존 제임스 클레멘트(John James Clement)를 한국에 파송하여 한국 선교지 전체를 돌아보고, 가능하면 그 영국 선교사들의 사역을 접수할 것을 그 교단에 권고했다.

 

 

 

 

 

 

    이에 그 교단은 1838년에 메레디트와 베시에게 선교사 증서(the Fellowship Certificate)를 갱신 발부하기로 결정했고, 메레디트와 베시에게 일본 지부장 클레멘트와 긴밀하게 동역하라고 권고하기로 결정했다. 클레멘트는 일본에서 총회에 한국에 있는 메레디트와 베시를 방문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더하여 미국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 노르만 H. 바르트(Norman H. Barth)가 한국에서의 미국인의 사역에 관심을 갖고 있는 데 그와 함께 동행한다면, 그 연합 방문이 유용한 것이 될 것이라고 썼다.

 

 

그런데 그 교단은 메레디트와 베시에게 1939년 선교사 증서를 발부하는 것을 보류했다. 그 총회는 클레멘트의 보고서가 올라오기까지 더하여 그들이 한국어를 확실하게 익힐 때까지 증서발급을 미룬다고 결정한 것이다.

 

한국에 있는 릴리안 베시 양과 엘시 메레디트로부터 서신이 더 왔다. 이에 총회는 클레멘드(Mr. J. J. Clement)의 보고가 오기까지 그리고 그 두 여성이 한국어를 확실하게 익힐 때까지 결정을 보류하기로 동의했다.

 

 

 

이런 이유는 표면적이었을 것이다. 드러나지 않은 이유는 아마도, 도날드 기가 생각했던 것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도날드 기는 조선이 일본과 정치적으로 합병되었기 때문에 조선은 일본과 하나의 지부를 형성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교단도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것을 고려하여 일본지부로부터 독립적인 지위를 한국 선교지에 부여하기가 어려웠던 것이었을 것이다.

 

 

G. 영국인 존 클레멘트와 미국인 노르만 바르트의 방문

 

    193810월 초, 영국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 존 클레멘트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이었던 노르만 H. 바르트와 함께 한국에 왔고, 조선에서의 지도력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메레디트, 베시, 그리고 럼시와 회합을 가졌다. 그 회합에서 메레디트가 포교관리자가 되고, 선교의 협력 지속이 결정되었다.

그런 회합과 결정 후 1938105일에, 메레디트 그리고 베시와 함께 동역했던 배부근이 박성산, 허홍과 함께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안수식의 안수위원은 영국 오순절교회 감독 카타[Alfred Howard Carter] 목사 썽무라[Lester Sumrall] 목사였다고 알려져 왔다. 사실은, 영국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 클레멘트와 미국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 바르트가 그들에게 안수했다. 그들은 한국 방문 마지막 날, 떠나기 한 시간 전에 그 안수식을 주관하고 이름도 모르는 그 세 사람에게 안수했다. 존 클레멘트는 193812월에 Redemption Tidings에 실린 기고문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돌아오기 전에 한 목사 안수식을 거행했다. 그 안수식에서 세 명의 현지인 사역자들[박성산, 배부근, 허홍]이 안수를 받았다. 그때는 우리 모두에게 복된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임했고 눈물이 나도록 기쁨이 임했다. 그 안수식은 우리가 그 한국 형제들을 두 팔로 포옹하면서 끝났다. 형제애가 넘쳐나서 한 시간 후 기차가 역을 떠날 때 만감이 교차했다. 그 사역의 미래는 감추어져 있었고, 여시면 닫을 자가 없는 주님만 아실 것이었다. 이 이름을 모르는 현지인 사역자들은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들을 한 시간만 만난다면, 여러분은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음에 부담을 갖고 한국을 떠났다. 그러나 하늘에 뜬 구름은 은빛으로 빛났다. 오순절이 한국에 들어갔다. 기초는 놓였고, 주님의 말씀 따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존 클레멘트(John Clement)

 

 

 

H. 2대 기독교오순절교회 포교관리자 메레디트

 

    메레디트는 1940523일자로 조선총독부에 서류상으로 파슨스가 포교관리자로 되어 있던 것을 시정하기 위해 포교관리자변경서를 제출했다. 그 서류에 따르면, 구 관리자는 巴善(ヅー エム パールソン; G. M. 파슨스 [Gladys Margaret Parsons])이었고, 신관리자는 馬理道(エル シ- メリデト; E. H. 메레디트 [Elsie Hannah Meredith])였다. 그렇게 메레디트는 한국 오순절 진영 안에서 최초의 교단 기독교 오순절 교회의 두 번째 공식 포교관리자가 되었다. 비록 기독교 오순절교회는 조선총독부 하에서는 독립적인 교단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미국과 영국 하나님의 성회의 일본지부에 소속된 조선 지방회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V. 호주 선교와 소천

 

A. 조선 출국

 

    서구 국가들은 태평양 전쟁(1941-1945) 발발 직전에 극동으로부터 자국민들을 철수시켰다. 조선의 기독교 오순절교회의 공식 포교관리자로 등록된 지 불과 7개월 후, 19401220, 이 땅에 오순절 신앙을 전교하러 왔던 38세의 영국 오순절 선교사 메레디트와 베시는 서빙고 교회에서 환송예배를 드리고 난 뒤 조선을 떠나야 했다.

 

서빙고교회에서 환송예배를 드린 후 베시와 메레디트

 

 

B. 호주 선교

 

    한국을 떠난 메레디트와 베시는 호주, 멜버른(Melbourne, Australia)으로 가면서 영국 총회로 전보를 통해 보고했다. 그들은 호주에서 영국과 아이랜드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로 일하고 싶었다. 그래서 메레디트와 베시는 한국을 떠나 호주에 오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그 교단에 선교사 증서를 발급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그 교단은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고, 호주 하나님의 성회와 접촉해 볼 것을 권고했다.

 

 

 

    그 후 메레디트와 베시는 호주 오순절주의의 선구자이며 1927년부터 멜버른에 있는 리치몬드 템플(Richmond Temple)의 목사였던 찰스 루이스 그린우드(Charles Louis Greenwood, 1891-1969)의 사역에 합류했다. 그 교회는 그린우드의 목회 기간 동안 호주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다. 그린우드는 어렸을 때 너무 가난하여 남루한 옷을 입었기 때문인지 학교에 가지 않았고, 그로 인해 많은 고통을 받아야 했다. 성장, 회심하고 소명을 받은 후에도 신학대학에 다니지 않고 오직 성경만 읽었다. 그는 청소년기에 불량아들과 지냈다. 19세에 회심하여 그들과 관계를 끊고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20세에 존 레이크(John G. Lake)와 로버트 혼(Robert Horne)의 사역을 통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소개받고 접했으며, 드디어 19131125일에 멜버른 철도 역사에서 열린 성령침례를 받기 위한 모임에서 성령침례를 받았다. 그린우드는 오랫동안 호주 하나님의 성회의 선교국장으로 일했다.

 

호주 오순절운동의 선구자 찰스 그린우드(Charles Louis Greenwood)

 

"오순절적 교회"라는 광고판이 붙은 리치몬드 템플 (Richmond Temple)

 

 

    최재웅은 포브스의 글을 인용하며 메레디트와 베시가 1950년대에 그린우드가 경영하던 빅토리아 성경 대학(Victoria Bible College)에서 교장과 주요 직무자로(as its principal and its matron) 사역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호주 오순절 사전은 그린우드가 오랫동안 영연방 성경 대학”(the Commonwealth Bible College)의 이사(director)로 일했다고 전한다. 그 대학은 맥스웰 암스트롱(Maxwell Armstrong)이 영국 하나님의 성회 총회장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와 영연방 호주에 하나님의 성회를 위한 성경학교를 세우는 것을 놓고 논의한 결과물이었다. 1935년에 카터의 제자였던 핸리 위긴스(Henry Wiggins)가 암스트롱에게 와서 투움바(Toowoomba)에 성경학교를 세웠고, 그 성경학교는 곧 빅토리아(Victoria)에 있는 단기 학교들과 통합되었다. 그 통합 성경학교가 1948년에 멜버른에 자리 잡은 영연방 성경 대학”(the Commonwealth Bible College)으로 성장했으며, 영연방 성경 대학은 1974년에 카툼바로 이전하였고, 1993년에 서던 크로스 칼리지(Southern Cross College)가 되었다가 2009년에 알파크루시스 칼리지(Alphacrucis College (AC))가 되었으며, 2022년에 대학교(University)가 되었다. 아마도 포브스는 빅토리아에 있는 성경학교들을 통합해서 세운 학교를 그 학교의 교명으로 말했던 것 같다.

 

 

 

 

C. 소천

 

    메레디트는 1966년에 64세의 나이로 소천했으며, 베시의 소천일은 알려지지 않는다.

 

 

VII. 나가는 말

 

    1902년에 태어난 엘시 한나 메레디트(Elsie Hannah Meredith)와 릴리안 베시(Lillian Vessey)는 오순절적 체험을 하고 신유를 체험했던 평범한 영국 오순절 여성 신자들이었다. 그들의 여성성과 평범함과 경제적인 넉넉지 않음, 조선어에 익숙하지 않음이라는 부정적 요소들은 그들의 조선에 오순절을 이식하겠다는 선교적 열정을 꺾어 넘어뜨리지 못했다.

    1933년에 조선에 입국한 그들은 파슨스, 오프스테드와 함께 경성포교소(수창동교회)를 중심으로 영국인과 미국인에 의한 연합 선교 사역을 수행했다. 메레디트와 베시는 19346월 파슨스와 오프스테드의 갑작스런 귀국 후 7월부터 그들의 선교사역을 이어받아 지속시켰다. 1937년에 메레디트와 베시는 드디어 합정교회를 개척해내었다. 파슨스의 귀국 후 기독교오순절교회 임시 포교관리자였던 메레디트는 19405월에 공식 제2대 포교관리자가 되었다. 1940년 말에 한국 선교를 강제에 의해 끝내야 했던 메레디트와 베시는 본국 교단의 불인정에도 불구하고 호주로 건너가 선교사역을 지속했다.

    영국인 메레디트와 베시의 내한은 영국 하나님의 성회의 총회장 카터와 부총회장 도날드 기라는 유명하고 쟁쟁한 영국 오순절주의 지도자들이 조선에 오게 하였으며, 그들에 의해 한국인들이 오순절적 신앙을 이식받고, 한국 오순절 지도자들이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보다 높은 수준의 신학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또한 영국인 메레디트와 베시가 미국인 파슨스와 오프스테드와 연합 선교사역을 펼친 것은 영국 하나님의 성회와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연합하여 조선의 기독교오순절교회를 공동으로 관리하게 하는 보기 드문 경우를 만들어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