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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오순절역사

한국 오순절 선교사 엘프레다 오프스테드 (Elfreeda Ofstead)

한오신 2022. 8. 21. 17:50

 

한국오순절선교사오프스테드(이창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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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복음총회신학교 조교수 이창승

2022831

 

 

I. 들어가는 말

 

    엘프레다 오프스테드(오세덕, 吳世德, Elfreeda Ofstead)는 그동안 한국 오순절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져 왔던 선교사였다. 오프스테드는 그녀에 비해 잘 알려진 G. M. 파슨스(파선, 巴善, Gladys Margaret Parsons)와 출신 지역이 같고, 섬겼던 교회가 같고, 또한 함께 한국에 입국했다가 같은 해에 귀국했다. 그래서인지 오프스테드는 파슨스와 일체화되어 한국 오순절 선교 기록에서 누락되어 왔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공식 역사책들에 실린 사진들 가운데서 그녀가 등장하기는 한다. 그러나 그녀에 대한 아무런 언급이 없어서, 그 사진 속 인물들 가운데서 그녀를 식별할 수가 없다.

    이렇게 잊혀진 그녀의 삶을 복원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한국 오순절에 대해 박사학위 논문을 썼던 김익진도 그녀를 다루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최재웅이 그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그녀에 대한 자료들, 특히 그녀의 간증문을 제시함으로써 그녀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본 글은 그녀의 간증문과 최재웅의 연구를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각주가 특별히 달리지 않은 정보들은 그녀의 간증문에서 발췌한 것들임을 밝힌다.

 

 

II. 탄생

 

    엘프레다 오프스테드(Elfreeda Ofstead)1900625일에 위스콘신 주, 수퍼리어(Superior, Wisconsin)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1905년에 태어난 글레이디스 M. 파슨스보다 5살 더 많았다. 오프스테드에게는 바이오렛(Violet)과 밀드레드(Mildred)라는 두 명의 자매가 있었다. 그녀의 부모, 미카엘(Michael)과 마틸다(Mathilda)는 둘 다 1880년대에 노르웨이에서 미국으로 이민왔다. 미카엘은 수퍼리어 호수의 덜루스-수퍼리어 항구에서 석탄을 날랐던 인부였다. 덜루스-수퍼리어 항구는 수퍼리어 호수의세인트 루이스 강 하구에 있다. 그 항구는 쌍둥이 항구”(Twin Ports)라고 불리는데, 이는 그 항구가 미네소타, 덜루스와 위스콘신, 수퍼리어의 항구 시설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항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민물 항구라고 여겨지고 있다. 이 항구는 몬태나와 와이오밍으로부터 석탄을 운반해와 오대호 남부에 공급한다. 미국에서 가장 큰 석탄 터미널인 수퍼리어 석탄 터미널(The Superior Coal Terminal)은 세인트 루이스 강의 위스콘신 쪽에 위치해 있다.

 

 

현재의 수퍼리어 석탄 터미널

 

1887년의 석탄 운반 인부

 

 

III. 오순절 입문

 

    190810월에 수퍼리어에서 오순절적인 부흥이 일어났을 때, 8세의 어린 엘프레다 오프스테드는 주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결심했다.

190810월에 한 형제는 오레곤에서 출판되고 있던 사도신앙에 위스콘신, 수퍼리어에서 일어났던 오순절적 부흥 소식을 전했다. 그 형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수퍼리어에 그분의 영을 부어주셨다. 다섯 명이 성령침례를 받고 성령이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을 말했다. 작은 집에서 열린 기도회 동안, 한 자매가 하나님께 항복하고 보혈로 씼음 받았으며, 한 환상에서 7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녀의 어린 아들과 함께 하늘 문 안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자신이 곧 재림할 것이며, 그 길은 좁지만, 바르게 걷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는 충분하다고 말씀하셨다. 자정 무렵에, 성령께서 그녀에게 부어졌고, 그녀는 독일어를 말했다. 그녀는 노르웨이 출신이고 그래서 독일어를 알지 못했다. 독일어를 아는 한 형제가 그녀가 말한 것을 통역했다.

 

 

그 결심 후 오프스테드는 십 대에 나는 오락에 빠진 적이 없었다는 그녀의 말처럼 경건하게 십대를 보냈다. 그녀는 점원으로 일하면서, 오린 더글라스 체너(Orin Douglass Channer, 1895-1966)가 목회하고 있던 순복음 성회(the Full Gospel Assembly)에 다녔다.

 

 

IV. 한국 선교 소명

 

    1928년 봄 어느 날에, 그녀는 스칸디나비아인 오순절 운동의 아버지 T. B. 바렛(T. B. Barratt)이 인도하던 한 부흥회에서 한국 선교사로의 소명을 받았다. 몇십 년 후, 오프스테드는 하나님의 그 소명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28년에 노르웨이, 오슬로에 있는 한 대형교회의 목사인 T. B. 바렛이 덜루스를 방문했다. 그래서 수퍼리어에서 덜루스로 건너가 그의 집회에 참석했다. 그날 저녁에 그는 내적 사람의 일곱 가지 죄들에 대해 말했다. 그가 말하는 동안, 그 죄들 모두를 범했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생각했다. 21년 동안 하나님을 섬겼는데, 이렇게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한 영혼도 구원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날 저녁에 생각했다. "제단에 올라갈 수 없어. 소용없어, 자라난 게 고작 이거야, 포기해야겠어. 수퍼리어 버스 길로 내려왔지만, 울며 부르짖고 있었다. 그래서 그 차를 타고 싶지 않았다. 그 교회로 돌아갔다. 교회의 제단(the altar) 왼편에는 한 자리가 있었다. 무릎을 꿇고 말했다. “하나님, 저는 완전히 파산했습니다. 당신의 피로서 저를 깨끗하게 씼어주시옵소서.” 갈보리의 보혈이 내 머리로부터 발까지 나를 덮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미리 생각한 것도 없이, 옛 시대에 이사야가 그랬던 것처럼 아주 부드럽게 외쳤다. 아무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소서!” 이것은 우리가 정결할 때 또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날 저녁에 하나님께서 나를 한국으로 부르셨다(it is that night when God called me to Korea). 그 나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 줄을 알았다.

 

    그 집회는 미네소타 주, 덜루스(Duluth, Minnesota)에 있는 덜루스 복음 장막(the Duluth Gospel Tabernacle)에서 열렸다. 그 교회는 1915년경에 엘머 C. 에릭슨(Elmer C. Erickson, 1896-1980)에 의해 세워졌었으며, 당시에는 스칸디나비아계 미국 오순절 회중들로 구성되었었다. 그 회중의 목사 에릭슨은 더함(William H. Durham)의 사역의 영향을 받아 침례교에서 오순절주의로 돌아섰으며, 교회의 경직된 조직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지역 교회/회중의 자율성을 선호했다. 1922년에, 에릭슨은 독립 하나님의 성회”(the Independent Assemblies of God, 현재 the Fellowship of Christian Assemblies)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 교단은 미국 A.G”와 교리적으로는 거의 동일하지만, 각 지역교회의 독립성에 더 무게중심을 두었다.

 

 

1940년대 엘머 C. 에릭슨

 

 

 

1966년 Duluth Gospel Tabernacle 50주년 기념예배 후, 왼쪽 세 번째 인물이 엘머 C. 에릭슨

 

 

    그 집회를 인도했던 T. B. 바렛(Thomas Ball Barratt, 1862-1940)은 영국에서 태어난 노르웨이 목사였다. 그는 1906년에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 또는 오순절 운동을 유럽에 이식한 사람들 중의 하나로 인식되어왔다. 그는 본래 감리교 목사였다. 1906년 뉴욕을 방문했을 때 사도신앙지를 통해 아주사 거리 부흥에 대해 알게 되었다. 바렛은 성령침례를 받기로 오랜 동안 갈망해 왔었다. 그는 여비가 부족해 로스앤젤레스로 갈 수 없었다. 그는 뉴욕에서 성령침례를 받기를 기도했고, 19061115일에 마침내 그는 방언을 말하며, 방언으로 찬양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작은 홀에서의 모임이었다. 그 능력은 매우 강력했다. 우리는 마칠 수 없었고 여전히 머무르기로 작정했다. 하나님이 도우셨고 승리는 우리에게 주어졌다. 펼쳐진 장면은. 어떤 이들은 거룩함을 구하였고 다른 이들은 성령과 불침례를 구했다. 그리고 난 방언의 은사나 주님께서 보시기에 나에게 필요한 것을 보내달라고 구했다. 윌리엄스 자매는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축복을 체험했고 방언의 은사를 갖고 있었고, 그녀는 내 머리 위에 손을 올렸고 육체적으로 나는 여전히 강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그 이후 내 몸에 힘이 없어짐을 느꼈다, 육체적으로 나는 여전히 강한 상태인데도 불구하고. 돌아가는 상태의 플레폼에서 나는 누워있었다. 열 두시 반이 지났을 때 나는 한 형제와 레더만이라는 자매에게 그들의 손을 내 머리 위에 얹고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그때 그녀는 불의 왕관과 불의 혀가 갈라진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 형제도 초자연적인 빛을 보았다.

곧 나는 빛으로 가득 차게 되었고 그러한 능력으로 나는 방언을 외치기 시작하였는데 나는 외국어를 말할 수 있었다. 새벽 네시 경 아침에, 나는 일곱이나 아홉 가지의 언어로 말하였는데, 이것은 다양한 소리와 말이 사용된 형태를 구분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차례로 일어선 상태에서 한 가지 외국어로 설교했고, 그리고 나는 나의 목소리의 세기가 만 명 정도가 듣기 쉬울 정도였다는 것을 알았다. 아홉 명의 사람들이 세시까지 남아 있어서 이 모든 것의 증인이 되었다. 가장 영광스러운 시간으로서, 나는 아름다운 바리톤 솔로를 불렀고 내가 들어왔던 가장 아름답고 순수한 언어를 사용하였다. 음률과 가사는 내게 매우 새로운 것이었고 리듬과 박자와 화음은 매우 완벽한 것이었다. . . . 그날 밤에 함께하였던 사람들은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지금 그리고 잠시 숨을 돌린 후에, 단어들은 폭포수와 같이 쏟아져 나왔다. 이때 나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의 부담을 갖게 되어 내가 나의 혼에 격렬한 짐을 얻은 것과 같이 사랑하는 이들과 친구들 모든 뉴욕, 미국과 노르웨이, 모든 스칸디나비아와 유럽을 위하여 이때 나는 성령 안에서의 기도의 부담을 갖고 기도했다. ! 어떠한 기도의 능력이 나에게 주어졌는가. . . . 나는 사자와 같이 다윗과 삼손이 어디에서 그들의 능력을 갖게 되었는지 느끼게 되었다. 오늘 내가 간 곳에서 나는 방언으로 노래하고 말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바렛은 자기의 경험을 써서 노르웨이 신문 Byposten에 기고했다. “갱신된 오순절.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부흥이 일어나고 있다는 제목의 기사와 서부로부터 내린 섬광. 내가 성령침례를 받았을 때라는 기사가 Byposten에 실렸다.

    오프스테드는 바렛이 인도한 집회를 통해 영적인 삶을 회복했고, 소명을 받았다. 그녀는 수퍼리어의 도서관에 가서 생소한 한국에 관한 책을 찾았다. 그런데 그 책에는 한국에 대한 정보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그 정보는 한국이 서구에 개방적이지 않은 나라, 중국의 속국과 같은 나라, 그런데 긴 역사를 가진 나라 정도라는 것을 포함했다.

 

한 시간 반 후에 그 집회에서 나왔다. 영적 삶을 회복했고, 삶의 한 목적인 소명을 받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  한국에 대해 무엇이든 찾으려고 책들을 뒤졌다. 그 나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음 날, 일하고 있던 가게가 닫힐 것 만을 기다렸다가 도서관에 가서 한국(Korea)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비치하고 있는지 물었다. 그 나라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몰랐다. 수퍼리어의 그 사서에게 물었다. 그녀는 아니오, 저도 그 나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당신이 말하는 나라가 코리어일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 알겠습니다. 그 나랍니다!” 책 한 권을 받았는데, 그것은 한국에 대해 너무도 적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한국은 은둔의 나라라고 불렸고, 중국이 그 후견이라고 여겨졌다. 한국은 서구 세계와의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나라의 역사는 사천 내지 오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역사는 인도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소명을 받은 후, 그녀는 그 교회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종종 Portage County에 있는 드위(Dewey) 교외 슬럼 선교, 비누와 도넛 나누어 주기, 간증하기, 때로 피아노 치기, 주일 모임 인도하기 등등에 참여했다. 한 여름 주일 모임들 후, 체너(Channer) 형제가 나와 그 집회의 열매인 25명에게 물침례를 주었다. 그 당시, 글레이디스 파슨스(Gladys Parsons)가 그녀와 함께 했다. 파슨스는 여전히 수퍼리어시의 공립 중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고, 오프스테드도 일하고 있었다. 그러나 파슨스는 가끔 드위 교외 집회들에 올 수 있었다. 이때 그 둘은 한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V. 한국 선교

 

A. 미국 출발

 

    독립 하나님의 성회 안에서 각 지역 교회는 그 자신의 뜻에 따라 해외 선교를 착수했다. 그 결과, 덜루스 복음 장막(the Duluth Gospel Tabernacle)은 그들의 선교사들인 글레이디스 M. 파슨과 엘프레다 오프스테드를 후원하며 1930년에 한국에 보냈다. 그 교단의 총회장이었던 엘머 C. 에릭슨(Elmer C. Erickson)을 포함한 세 임원은 1930723일자로 파슨스에게 안수례증”(Certification)을 발급했는데, 오프스테드에게도 이 안수례증을 받급했을 것이다.

    그들은 짐을 꾸려서 한국 경성 인사동 194로 보냈다. 그리고 오프스테드는 파슨스와 함께 덜루스, 수퍼리어, 드위에서 온 교인들과 친구들의 환송을 받으며 오마하 역(the Omaha depot)을 떠났다. 오마하 역은 미국 최초의 대륙횡단 철도 중에서 유니온 퍼시픽 철도 회사(Union Pacific Railroad)가 담당하여 1869년에 완공시킨 부분의 동쪽 첫 번째 역이었다. 이 역은 연합 터미널”(The Union Station) 또는 연합 승객 터미널”(Union Passenger Terminal)이라고도 불리며, 네브라스카주, 오마하(Omaha, Nebraska)에 있다. 오프스테드는 오마하에서 대륙횡단열차를 타고 서해안 샌프란시스코의 맞은 편 오클랜드까지 갔다가 그곳에서 북쪽으로 가는 기차에 환승하여 시애틀을 지나 국경을 넘어 캐나다 벤쿠버로 갔을 것이다 그녀는 서해안으로 가는 기차에서 첫 한국인, 최 박사(Dr. Choi)를 만났다. 그는 동부에서 대학에 다니고 있었는데, 한 방문을 위해 서해안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이틀 동안 오프스테드와 파슨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미국 대륙횡단철도 가운데 유니온 퍼시픽이 건설한 부분의 동쪽 첫 부분의 오마하

 

 

오마하역 지도

 

1930년대 오마하 역

 

 

 

오마하역 대합실

 

    캐나다, 벤쿠버 항에서 “RMS Empress of Japan”에 오른 오프스테드와 파슨스는 193087일에 일본으로 향했다. “RMS Empress of Japan”1929년에서 1930년에 캐나다 태평양 증기선사(Canadian Pacific Steamships)를 위해 스코틀랜드의 Fairfield Shipbuilding & Engineering Company at Govan on the Clyde에 의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306월에 인도되었고, 87일에 첫 항해에 나섰다. 오프스테드는 동양으로 처녀 항해에 나서는 엠프리스 캐나다(The Empress of Canada)에 승선했다고 말했다. 그 배에서 그들은 중국으로 가던 하그네스 스모이(Agnes Smoy), 리암 존슨(Liam Johnson)의 딸 룻 존슨(Ruth Johnson)을 만났다. 그들은 오프스테드와 파슨스가 3등석 표를 갖고 있다고 듣고는, 각각 75달러를 내어 오프스테드와 파슨스가 그들의 침대 4개가 있는 방을 함께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이 추가 비용은 오프스테드의 부모님의 헌신으로 청산되었다. 오프스테드는 배 안에서 부모님에게 편지를 썼다. 그런데 그들은 그들의 비싼 피아노를 100달러에 팔아 오프스테드에게 그 돈을 보냈다. 오프스테드는 스모이와 존슨이 제공한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이때 오프스테드는 마음이 아팠다고 전한다. 그녀는 잠시 일본, 도쿄에 들러 칼 주르겐센(Carl F. Juergensen)을 만나기도 했다.

 

RMS Empress of Japan

 

 

B. 한국 도착

 

    일본을 떠난 30세의 오프스테드와 25세의 파슨스는 1930825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오프스테드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자기를 부르신 하나님 이외에는 한 사람도 모른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녀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녀는 한 호텔에 머물렀는데, 택시 운전사가 그녀를 서울에서 가장 비싼 그곳으로 데려갔다. 아마도 그 호텔은 경성의 조선호텔이었을 것이다. 조선호텔은 1914년에 경성 소공동에 일본 만철도 직원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당시 동양에서 가장 호화롭게 지어졌고, 따라서 숙박비가 가장 비싼 곳이었다.

 

일제시대 조선호텔

 

아침 식사 후, 그녀는 둘째 날을 머물 만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프스테드와 파슨스는 호텔을 나와 구세군까지 몇 마일을 걸어가 도움을 청했다. 구세군은 다른 교단에서 온 사람은 그 누구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녀에게 머물 장소를 찾아줄 수 있을 것 같은 영국 해외 성서 공회 한국 지부(the Korea Agency of 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앞쪽의 구세군중앙회관과 뒷쪽의 경성방송국

 

    오프스테드와 파슨스는 뜨거운 햇빛 속에서 걸어 영국 해외 성서 공회에 도착했다. 후원수표는 다음 달 첫날, 10일 후에나 도착할 것이었다. 그곳에 있던 사무원은 서울 복음 전도 센터 (Seoul Evangelistic Center)를 소개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물었다. “둘 중에 타자를 치거나 속기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파슨스 여사가 그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두 가지를 가르치는 상업 교사였고, 그래서 그 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오프스테드와 파슨스는 서울 복음 전도 센터로 불리던 “the Woman’s Social Evangelistic Center” 소유의 한 선교사의 집에 머물렀다. 그 집은 인사동 194번지에 있었고, 창동에서 일 마일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그 집에서 10 여일 간의 숙식비는 미국에서 출발할 때 라오 형제(Brother Lao)가 주었던 왓킨스(Whatkins) 바닐라 1 갤런 중에 남아 있던 것을 선교사들에게 팔아 해결되었다.

 

 

 

    그곳에서 거하자마자 오프스테드는 당시 한국 교회의 영적인 생활을 목격하게 되었다. 그 첫날 아침 3시에 그 집에서 살고 있던 로이스 스윈하트(Lois Swinehart) 부인이 오프스테드의 방문을 빠르게 두드렸다. 그녀는 오프스테드와 파슨스에게 자기와 함께 기도회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두 사람은 시간이 너무 일렀고, 긴 여행으로 너무 지쳐있었지만, 좋은 선교사들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입증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들은 바쁘게 옷을 입고 세수를 하고 그녀와 함께 양옆에 도랑이 있는 골목길들을 내려갔다. 이것은 오프스테드에게 동양에 대해 들어왔었던 것, 세 가지 S, 소리(sound), 풍경(sights), 그리고 냄새(smells)을 기억나게 했다. 그들은 그때 그 세 가지를 경험했다. 그들은 한 천막이 쳐있는 한 넓은 광장에 도달했다. 그녀는 말했다. “저 사람들은 밤새 기도했습니다. 3시 후에 오는 것은 늦은 것입니다.” 그 천막 안에는 500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무릎을 꿇고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오프스테드는 그 광경은 결코 있을 수 없었다. 그 광경은 50년이 지나도 그녀에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C. 언어 수학

 

    초기 오순절 선교사들은 한국어를 배우지 않고 내한했다. 그래서, 그들이 도착하여 제일 시급한 것은 한국어를 익히는 것이었다. 당시, 개신교 선교부 공의회 (the 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1912년에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세운 연합 신학교였던 피어슨 기념 성경학교(Pierson Memorial Bible School, 평택대학교 전신)의 부설 기관으로서 언어학교를 개설하고 있었다. 그 학교는 정동에서 가까운 “89 서대문정 2정목”(현 신문로 2)에 있었다. 그 언어학교는 일 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각 8주간, 3년 진행되는 한국어 집중 교육 기관이었다. 그 한국어 강좌들은 선교사들에게 인기가 높아서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선교사들 가운데 삼 분의 이 이상이 그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오프스테드와 파슨스는 그 언어학교(the Federal Council Language School)2년 동안 다녔다. 비록 파슨스 부인이 일주일에 6일간 일했지만, 그녀는 오프스테드와 하루에 3시간씩 언어 학교에 다녔다. 또한 허홍도 오프스테드와 파슨스의 언어 교사 겸 통역자로 일하기도 했다. 비록 허홍은 대부분 럼시와 동역했지만 오프스테드와 파슨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오프스테드는 언어학교에 다니기 시작한 몇 달 후 종로 감리 교회에서 간증했다. 그녀에 의하면, 한국에 온 첫 번째 선교

사들 중 하나였고, 또한 종로 감리 교회의 목사였던 언더우드 박사가 오프스테드의 선생님들 중의 하나였다. 그녀에 따르면, 그 교회는 서울 도심에 있는 큰 감리 교회였다. 그런데 언더우드는 장로교 선교사였고, 그가 세운 교회는 새문안교회였다. 오프스테드가 착각을 했던 것 같다. 몇 달 후, 그는 오프스테드에게 한국어로 간증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아주 당황스러웠다. 그녀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에게 주님을 만나게 된 내 경험을 말했다. 몇 주 후 그는 오프스테드의 집에 와서 그녀에게 아침 예배 시간에 간증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그녀가 아직 한국어를 잘 말할 수 없으니까 자기가 통역을 하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영어로 종로 감리 교회에서 주님을 만나게 된 경험을 간증했다.

 

D. 어린이 학교 개설

 

    2년 후, 그러니까 한국어를 어느 정도 익힌 오프스테드와 파슨스는 1933년경에 거주지를 옮겼다. 어떤 주일 오후에 그들은 타케조-초 마을(the Takezoe-cho village)로 걸어 올라갔다. 새로운 일본 집들이 있는 그곳은 아주 쾌적했다. 그곳 산은 매우 높았는데, 한 대지가 그 일본 집들 위에 있었다. 파슨스 부인이 말했다. “여기 고지대에 집 한 채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몇 주 후 그들은 같은 코스를 걸었다. 그런데 그곳에 집 한 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집은 셋집이었다! 그 집은 새로운 양편으로 나뉘어 있는 2층 집(duplex)이었다. 한편에는 한 일본인 과부가 살고 있었다. 5개의 방이 있었고, 2층에는 두 개의 침대가 있는 방이 있었다. 그들은 즉시 그 방을 빌렸다. 그들은 그곳에서 영국 엘림(Elim)에서 온 두 젊은 여성들, 벳시(Lillian Vessey)와 메르테트(Elsie Hannah Meredith)가 합류하게 되기까지 몇 주간 거기서 지냈다.

    “Takezoe-cho village”京城府 竹添町”(케에조오후 타케조에마치)이다. 파슨스가 1933118일에 조선총독부에 제

출한 포교관리자 설치 신청서에 따르면, 당시 오프스테드와 파슨스가 거주하고 있던 곳은 京城府 竹添町 三丁目 三番地 二十六号였다. 竹添町 서대문구(西大門区)에 있었다. 그래서 오프스테드의 새로운 거주지는 京城府 西大門区 竹添町 三丁目 三番地 二十六号였다. 조선시대 북촌(北村)과 남촌(南村)의 경계였던 청계천은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면서 이른바 민족의 거리 종로”(鐘路)왜인들의 마을 혼마찌本町를 가르는 경계선이 되었다. 이것은 곧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차별의 선이 되었다. 먼저 마을 이름에서 조선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북쪽은 ”()과 같은 전래의 마을 이름을 사용했지만, 일본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청계천 남쪽은 혼마찌”(本町, 지금의 명동)과 같은 일본식 지명을 사용했다. 도로의 확장, 주요 시설물의 신축 등 도시의 기반시설은 주로 일본인들이 거주하는 청계천 이남에서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西大門区 竹添町 三丁目은 현 서대문구 충정로3가이다. 竹添町1884년 갑신정변 때 일본공사였던 竹添進一郞의 성을 따서 붙인 데서 유래되었다. 19144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의해 죽첨정 3정목이 되었다. 광복 후 1946101일 서울시헌장과 미군정법령 제106호에 의해 일제식 동명을 우리 동명으로 바꿀 때 서대문구 충정로3가로 되었다. 오프스테드가 살던 집은 해발 296M안산”(鞍山)의 동남부 금화산 중턱에 있었던 것 같다.

 

 

 

 

 

 

 

 

 

 

 

왼쪽 하단에 竹添町三이 표기된 일제시대 경성 지도

 

 
 

안산에서 내려다본 서울

 

    그즈음에, 그들은 105명의 아이들이 출석하는 학교(a day school)를 열었다. 한 한국 장로교 사역자가 그들을 가르쳤다. 어느 날 오프스테드는 그 산 중턱에 있는 굴들에서 살고 있는 많은 한국인들이 있는 산에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자기들의 한국 집들에서 쫓겨났었다. 그것은 산 중턱에 있는 그저 마대자루로 막은 굴이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병에 걸렸고 벌레들에게 물렸다. 그리고 그녀는 그 어린이들을 그 학교에 오라고 초청하려 했다. 그러나 그 두 학급을 함께 운영할 수 없었다. 그래서 오프스테드와 파슨스는 그들을 위해 토요 학급을 마련했고, 그 학급을 오프스테드가 맡았으며, 그 장로교 사역자가 역시 그들을 가르쳤다.

 

E. 한국인 사역자 양육 지원

 

    오프스테드, 파슨스, 베시, 메르테트, 그리고 럼시는 이제 성령 충만한 한국인 사역자들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들은 이것을 놓고 기도하기 위해 오프스테드의 집에 모였다. 그들이 기도하고 있는 동안, 주일 밤 9시쯤이었는데, 그들은 몇 명이 문 앞을 지나가며 한국어로 십자가로 가까이라는 찬송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그 선교사들은 어찌 된 일인지 보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그 한국인 성도들은 집 위에 있는 그 지대로 올라갔다. 그래서 그 선교사들은 소나무 숲 아래 달빛 아래에 있는 그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습관처럼, 모든 한국 교회들이 마음을 합해 기도하기 위해 모였다. 선교사들은 그 많은 사람들이 큰 소리로 한꺼번에 기도했기 때문에 사람의 말들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기도를 향한 열정이 있었다. 분명하게, 그 달빛 속에서 사람들은 외쳤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성신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간절히 간절히 비옵나이다!”

    오프스테드와 선교사들은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방으로 돌아와 하나님께서 이 집단만이 아닌 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침례를 주시기를 기도했다. 다음 날, 그들은 목요일에 금식하며 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 모이기로 했다. 목요일 아침 8시에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정오 즈음에 기쁨의 영이 그들에게 임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느꼈다. 그러나 그 방법은 알지 못했다. 그들은 1층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음으로 금식과 기도를 마쳤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수요일 아침에, 오프스테드와 선교사들은 도쿄에 있는 마리 주르겐센(Marie Juergensen)이 보낸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우리는 지난 월요일에 우리의 수업을 정오에 끝내기로 결정하고 끝마치는 기도를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때 주님의 영이 마치 영광의 파도처럼 그 학급 전체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두 사람의 한국인들, 배 형제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그곳에서 회심했던 박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쿄에 있는 성경 학교(the Bible School in Tokyo)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후원은 그쳤고, 그래서 그들은 6개월 이상 후원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후원하겠다면, 후원금을 보낼 방도를 찾아보십시오.

 

 

1916년의 마리 주르겐센, 오른쪽 끝

 

앞줄 오른쪽 두 번째, 마리 주르겐센

 

1931년도의 마리 주르겐센, 왼쪽

 

1940년대의 마리 주르겐센

 

박성산과 배부근이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소식은 존 주르겐센에 의해 미국에도 알려졌다. 오프스테드와 선교사들에게는 그 두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은 한국인 신학생들(박성산과 배부근)을 도울 경제적 여력이 없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 문제들을 감당하셨다. 몇 주 후, 그들은 그 두 형제들을 위해 도쿄에 첫 수표를 보낼 수 있었다.

 

D. 수창동교회 개척

 

    오프스테드와 선교사들은 다른 기도회를 가졌다. 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그 여성은 귀신들을 섬기기로 위명한 서대문 밖의 한 마을에서 왔다. 그녀는 그렇게 성장하지 않는 한 장로교회의 관리인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여러분이 이 교회를 수리하기 원한다면, 몇 장의 새 유리창, 회반죽, 그리고 이런저런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공짜로 건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은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날씨는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그리고 그들은 회반죽을 발라본 적이 없었지만, 유리창을 갈아 본 적이 없었지만,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을 해냈다. 그들은 마루에 니스칠을 했고, 제단 의자 하나를 얻어 니스칠을 했고, 설교단을 칠했다. 그리고 그들은 오르간이 있다면 좋을 텐데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오르간이 없었다. 그런데 100달러가 그들에게 왔다. 그 돈을 보낸 사람은 오프스테드와 파슨스에게 왓킨스 바닐라를 선물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그들은 그 돈이면 도쿄에서 오르간 한 대를 사서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오르간은 개척 예배에 맞추어 도착했다.

 

수창동교회, 마룻바닥과 오르간 한대가 보인다. 오른쪽 뒷 줄에 선교사 네 명(오프스테드, 파슨스, 벳시, 메르테트)이 서있다. 그런데 누가누구인지 분간할 수 없다.

 

    193394일에 오프스테드와 선교사들은 한국에서의 첫 전도 집회를 열었다. 이때 존 주르겐센의 일본 성서신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배부근이 그녀를 도왔다. 첫 집회에서 두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자주 따르는 표적들로 그분의 말씀을 확증하셨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들이 놓임을 받았다. 그 첫 집회에서, 한 불교 중이 회심했다. 선교사들은 한국 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라는 문구를 인쇄했다. 오프스테드는 일본에서 사들인 오르간을 연주했는데, 그녀가 그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이 건물에서 19335월에 개척된 교회가 수창동교회였을 것이다. 수창동(需昌洞)은 현 내수동의 1936년 이전 명칭이다. 19114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개편된 서부 인달방 영빈동누정동승전교내수동내수사전동사직동박정동대창동북문동 지역이 19144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따라 새로 통합되면서 내수사와 대창동에서 글자를 따서 수창동으로 칭해졌다. 19364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과 경기도고시 제32호로 경성부 내수정(內需町)이 되고, 19436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종로구 내수정이 되었다. 오프스테드와 파슨스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청계천 남쪽 지역으로부터 북쪽 지역, ,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나아가 교회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수창동교회로 알려진 그 교회의 공식명칭, 그러니까 총독부의 관보에 실린 명칭은 基督敎五巡節敎會 京城布敎所였다.

 

 

 

    그런데 수창동교회의 개척에 대한 정보가 오프스테드 자신과 30년사가 제시한 정보와 조금 다르다. 30년사는 사직 공원 전방 300미터 지점, 경성부 사직동 106번지에 그리스도의 교회 건물을 임대해서 한국에서 두 번째 오순절 교회인 수창동교회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리고 파슨스와 오프스테드가 건물 임대료를 매월 감당했다고 전한다. 이에 반해 오프스테드는 그 건물이 장로교회 건물이었고, 임대료는 없었다고 전한다. 그 교회 내부를 찍은 한 사진은 수창동교회의 바닥이 마루였으며, 그곳에 오르간 한 대가 있었다는 오프스테드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E. 폐렴과 장티푸스에 건강 악화

 

    안타깝게도 오프스테드는 193312월 말에 박성산 목사가 목회하던 서빙고교회에서 진행된 연합 크리스마스 축하 프로그램에 참석했다가 치명적인 폐렴에 걸리게 되었다. 그 크리스마스 행사 때 오프스테드는 데워진 바닥에 앉았었다. 그런데 그녀의 몸은 너무 뜨거워져 버렸다. 박성산이 목회하고 있던 교회는 서빙고교회였고, 서빙고 교회의 건물은 한옥이었기 때문에 교회당 난방이 바닥온돌방식이었을 것이다. 이에 비해 수창동교회는 바닥이 마루로 되어있었다. 수창동교회 난방이 서양식 난방과 유사해 오프스테드가 그것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서빙고교회 난방에는 잘 적응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마도 연합집회여서 다른 때에 비해 온돌에 불을 더 세게 지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독감에 걸렸고, 그날 밤 그 오르간을 연주할 수 없었다.

 

한옥에 세워진 서빙고교회

 

 

    문화적 차이로 독감에 걸린 오프스테드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겹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의 독감은 폐렴으로 진행되고 말았다. 더구나 그 어려운 기간 동안 그녀에게 장티푸스가 추가되었다. 미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했을 때, 독감에 걸린 오프스테드와 파슨스는 몇 주 동안 후원금을 받지 못했다. 세 주간 동안, 선교사 넷은 단지 3파운드의 감자와 분홍 우유 2캔으로 생활해야 했다. 그때 오프스테드는 장티푸스에 걸렸다. 그 집의 수도관이 얼어붙어 버리는 바람에 그들은 물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고, 그 물을 끓이지 않고 마셨다. 그래서 그녀는 폐렴에 더하여 장티푸스를 앓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서도 하나님은 오프스테드와 선교사들을 통해 영혼구원의 일을 계속하셨다. 그날도 그녀는 아파서 누워있었다. 오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함께 있던 네 명의 여자들이 대답을 했고, 네 남자가 한 여인을 태운 들것을 들고 들어왔다. 선교사들은 그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그 남자들은 선교사들에게 그녀는 그들의 어머니인데, 7년 동안 눈을 뜨지 못했고, 말하거나 걷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 남자들은 그녀가 귀신들(demons)을 숭배했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녀가 귀신들렸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선교사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매우 두려웠다. 오프스테드는 거실 바깥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른 여성 선교사들은 거실에 있었다. 오프스테드는 어떻게 기도할지 몰랐고, 다른 선교사들이 어떻게 기도했는지도 몰랐다. 한 가지 그녀는 그녀와 선교사들이 무서워했었다는 것은 알았다. 그녀는 내가 주님, 이 여인이 무엇으로 인해 고통을 받든지, 그녀를 건져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다른 선교사들도 기도했다. 그러자 들것에 실려있던 그녀는 일어서서, 한국말로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귀신 숭배자였었고 예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자기의 구주에 대한 계시를 받았었다. 그 네 남자는 그녀를 데리고 나갔다.

    그날 저녁에 오프스테드는 들것에 실려 동대문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오프스테드가 말한 동대문병원은 스크랜튼 모자(母子)가 세운 널리 여성을 구하는 집이라는 의미의 보구녀관(普救女館)의 동대문 분원이었던 것 같다. 1930년 릴리안 해리스 기념병원이 산부인과만 전담하는 동대문부인병원(East Gate Woman Hospital)으로 개편 · 개칭되었다. 이 분원은 이대동대문병원의 전신이 되었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6가 동대문 옆에 위치했던 이대 동대문병원 건물은 리모델링되어 2014년에 개관된 한양도성박물관이 되었으며, 2018614일에 동대문성곽을 포함하는 흥인지문공원(興仁之門公園)의 일부가 되었다.

 

 

 

 

 

 

 

의료진은 그녀가 폐렴과 장티푸스 열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그녀는 여섯 달간 입원했다. 의료진은 그녀의 오른쪽 폐 2 쿼트를 떼어 냈고, 그쪽은 평생 무너진 채로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 원장 의사가 그녀의 방에 와서 그녀에게 그들은 그녀가 아침에는 거기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던 밤을 결코 잊지 못했다. 그래서 오프스테드는 자기 물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본 정부가 그녀가 가졌던 것들을 취할 것이었다. 그녀는 아끼던 장서들과 접시 세트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들을 선교사들에게 주어야 했다. 오프스테드와 선교사들은 그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이름을 붙여야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 모든 것을 그 집에 함께 살던 글레이디스 파슨스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녀는 손을 가슴에 얹어 놓았다. 그녀는 더이상 고투하지 않게 되어 기뻤다. 그녀는 손을 어긋나게 가슴에 얹고 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날 밤에 그녀는 한 꿈을 꾸었다. 매우 가파른 산을 오르고 있었다. 한 음성이 그녀에게 말하는 듯했다. “, 내려가서 주위를 걸어보지 않느냐?” 그래서 그녀는 오른쪽 위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찬송을 부르며 그 황금도시로 올라가는 수 많은 한국인들의 무리가 있었다. 그녀는 여기서 혼자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꼭대기에 올라갔는데, 거기에는 두 개의 큰 문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들이 천국의 문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문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보다 큰 집으로 들어가는 한국 양식의 나무 문들이었다. 그녀는 그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자기 손을 내려다 보았는데, 손에 아무 것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다른 집을 방문할 때 선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 관습이었다. 때로 그 선물은 그저 호두거나 비단 보자기에 싼 감자였다. 그녀는 빈손이었다. 그녀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는 빈손으로 가야합니까?” 이때 그녀는 주님께 15년을 달라고 간청했다. 그런데 그분은 그녀에게 50년을 주셨다.

    오프스테드는 다음 날 아침에 생명에는 지장이 없게 회복되었다. 그 아침에, 여의사가 그녀에게 와서 말했다. “좋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뿐만 아니라, 당신은 모든 간호사들이 당신의 병실로 내려올 만큼 크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프스테드는 회복 후 6개월간의 병원비가 걱정되었다. 그녀는 그 여섯 달 동안이나 후원금을 받지 못하고 거기 있었다. 1월에 입원했는데, 6월 말이 되었던 것이다. 말할 기운을 찾자마자, 그녀는 로버츠 양(Miss. Roberts)에게 물었다. “병원비를 받으셔야지요? 그런데 나는 내 이름으로 1달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자 그 의사는 자신을 파송한 덴마크 교회에 그 문제에 대해 논의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 교회는 오프스테드의 병원비를 지불할 의사를 표명했다. 그러나 오프스테드는 빚지지 않고 자기가 그 병원비를 지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침, 그 아침에 바닐라와 오르간을 준 라오 형제와 자매(Brother and Sister Lao)로부터 편지 한 통이 왔다. 그 편지 안에는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백 달러짜리 수표 한 장이 있었다. 그녀는 그 수표로 6개월간의 병원비를 지불했다.

 

 

VI. 귀국

 

A. 한국을 떠남

 

    오프스테드는 약간의 회복으로는 선교사역을 지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1930년부터 1934년까지 한국에서 오순절 선교사로서 4년을 섬긴 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녀에 따르면, 그녀는 19346월 말에 프레지던트 잭슨 호(USS President Jackson)을 타고 귀국길에 올랐다. 다른 이전의 세 가지 선물들을 준 라오 형제가 그 뱃삯에도 보태주었다. 그런데 최재웅은 그녀가 1934612일에 여객선 프레지던트 존슨(S. S. President Johnson)을 타고 캐나다, 브리티쉬 콜롬비아, 빅토리아에 도착했다고 썼다. 프레지던트 잭슨 호는 1939년에 건조되었고, 1940630일에 진수되었다. 반면에 프레지던트 존슨 호는 태평양 우편 증기선사의 샌프란시스코-태평양 항해 서비스를 위해 1903년에 진수되었다. 진수 당시 그 배의 이름은 “SS Manchuria”였다. 1차 세계대전 동안 군함으로 전용되었었으며, 전후 1928년에 돌라 증기선사 소유가 되면서 “President Johnson”으로 개명되었다그러므로 오프스테드가 1934년에 귀국할 때 탔던 배는 프레지던트 존슨이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그런데 도착했던 항구에 있어서는 오프스테드의 회상이 더 정확한 것 같다. 그 회상에 따르면, 그녀는 캐나다 벤쿠버에서 하선하려 했지만, 그곳에서 파업이 일어나 시애틀로 내려와 하선했다.

 

프레지던트 존슨 호

 

    많은 한국인들이 34세의 오프스테드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그 역에 왔다. 그들은 찬양을 불렀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오프스테드는 자기 생애에서 그렇게 슬프게 울었던 적이 없었다고 그때를 회고했다. 떠나는 것은 그녀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 그때 그녀는 한국에 다시 오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도쿄로 갔고, 도쿄에서, 실제로는 S. S. President Johnson를 탔지만, 그녀의 회상에 따르면, 프레지던트 잭슨 호에 승선했다. 승선한 오프스테드는 한 가지 염려가 생겼다. 그것은 폐렴으로 폐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받아서 한 쪽 팔을 들지 못했던 그녀가 식당에서 선실까지 식사를 나를 방도가 마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한 선원이 한 여성을 데리고 와서 그녀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 고국으로 가고 있던 장로교 선교사였다. 그녀는 얼마나 급했는지, 선교사 임원회에게 허락받을 시간도 없이, 표를 구해 배에 올랐다. 그녀는 슬픔 속에서도 오프스테드에게 자기가 오프스테드의 식사를 가져다 주겠다고 자청했다. 이 일화는 오프스테드가 파슨스와 함께 귀국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오프스테드는 자기가 쓰던 물건들을 파슨스에게 주고는 먼저 한국을 떠났고, 파슨스는 오프스테드가 떠나고 난 후, 어느 때 한국을 떠났다.

 

B. 하선

 

    오프스테드는 캐나다 밴쿠버에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곳에서 내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한 파업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녀를 태운 배는 미국 시애틀까지 내려가야 했다. 그녀는 시숙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가 그 변화에 대해 알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배 안에서 줄곧 오프스테드를 도왔던 장로교 여선교사는 밴쿠버에서 그녀를 도와 몬태나에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친구들을 만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매우 걱정한 것 같았다.

 

 

 

 

    오프스테드의 일행이 배에서 내렸을 때, 시숙이 거기 있었다. 오프스테드는 그녀를 그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는 말했다. “자 여러분은 오늘 저녁 식사에 저의 손님이 되실 것입니다.” 오프스테드가 첫 번째로 원한 것은 저민 돼지고기와 딸기였다. 그런데 그 장로교 여선교사는 어머니가 죽어가고 계셨기 때문에 슬퍼했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돈도 없습니다. 내가 몬태나에 갈 수 있도록 내게 돈을 빌려줄 수 있을 친구들을 벤쿠버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오프스테드의 시숙은, 비록 천주교 신자였지만, 매우 감동을 받았다. 그는 말했다. “문제 없습니다. 엘프레다의 방에 두 개의 침대를 준비했습니다. 당신의 운임은 지불되었고, 제가 당신을 저녁 식사에 데리고 가겠습니다. 저녁에 호텔에서 묵고 내일 떠나실 수 있습니다.”

 

C. 간증 사역

 

    오프스테드는 수퍼리어에 있는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자매들과 함께 7월과 8월에 집에 머물렀다. 9월 어느 날, T형 포드차가 오프스테드의 집 앞에 멈춰섰다. 거기서 블로밍턴 템플(Bloomington Temple)에서 온 존 모시드 목사(Pastor John Mosied)가 내렸다. 그는 9월에 열리는 그 컨퍼런스에 그녀를 데려가려고 왔다. 그녀는 그가 자기가 그 컨퍼런스에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에 놀랐다. 그녀는 몸무게를 쟀는데, 80파운드가 나갔다. 좀 더 건강해졌다. 그는 우리는 자매님이 그 컨퍼런스에 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큰 선교 컨퍼런스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와 함께 갔다. 그 여정은 매우 험난했고, 그는 그녀를 도날드슨 선교 센터(Donaldson’s Missionary Home)로 데리고 갔다. 그녀는 그 선교 대회의 밤 이전에는 어떤 선교 대회도 가 본적이 없었다. 거기에는 중국, 아프리카, 인도, 그리고 중앙 아메리카에서온 선교사들이 있었다. 참으로 영광스런 대회였다. 그 건물에는 세 개의 발코니가 있었고 선교사들로 가득찼다. 10시 경에 그녀가 말할 시간이 왔다. 그것을 해낼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민수기의 성경 본문을 읽었다. 큰 포도 송이들을 메고 약속의 땅에서 돌아왔을 때의 말씀이었다.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요.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그녀가 병원에 있었을 때 툴루스(Toulouse)에 있던 선교사 클리포드 존슨(Clifford Johnson)이 그녀에게 안부 전화를 했다. 그녀는 그에게 내가 심장병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그녀게 블루밍턴 템플에서 인도했던 것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그리고 그는 당신은 한국에 있을 일을 예언하셨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미네아폴리스에서 집으로 돌아갔고, 아이오아, 디모인(Des Moines, Iowa)에 있는 성경학교의 교사인 브레인 미첼 형제(Brother Brain Mitchell)로부터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는 저는 미네아폴리스 블루밍턴 템플에서 열렸던 컨퍼런스에 있었고, 당신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디 모인에 오셔서 우리 성경학교에서 말씀하실 수 있으신지요?” 그는 그에게 전화하기를 요청했고, 그녀는 그렇게 했다. 그들은 교통비를 보내왔고, 그녀는 그곳에서 2주간 머물렀다. 모틴(Mortin) 형제와 헬렌(Helen) 형제가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디모인에서 소명을 받았는지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그녀가 믿기는 여섯 명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오클라호마, 이니드(Enid, Oklahoma)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 성경 대학(the Assemblies of God Bible College)에 초청을 받았다. 1927년에 오클라호마, 이니드에는 넬슨(P. C. Nelson) 목사의 지도력 아래에서 사우스웨스턴성경학교”(Southwestern Bible School)가 세워졌다. 이 성경학교는 1963년에 사우스웨스턴 하나님의 성회 대학”(Southwestrn Assemblies of God College)이 되었다. 그리고 1994년에는 대학원 과정을 가진 사우스웨스턴 하나님의 성회 대학교”(Southwestern Assemblies of God University)가 되었다. 오프스테드는 1927년과 1963년의 교명을 혼합하여 “Assemblies of God Bible College”라고 표기했을 것이다.

 

 

Southwestern Assemblies of God University

 

그 학교에서, 세 명이나 네 명이 한국에 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놀랍게 사용하셨다. 그녀는 한국은 사실 설교자가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람들은 구원받자마자 거의 대부분 곧 설교자가 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놀라운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는 어려웠다. 그들은 의사들과 병원들과, 교사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설교자가 되었다.

 

 

 

D. 복음전도 사역

 

    오프스테드는 다음 5년 동안, 네브라스카, 프리엥 (Friend, Nebraska)와 민덴(Minden)에 있었다. 그녀는 1937년에서 1939년까지 네브라스카 주, 프리엥(Friend, Nebraska)에 있는 프리엥 크리스찬 성회(Friend Christian Assembly)를 목사로서 섬겼다. 그때, 주님께서는 그녀에게 몇 영혼을 붙여주셔 구원받게 하셨고, 에릭슨 목사(Pastor Erickson)가 회심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기 위해 아주 자주 내려왔다.

 

프리엥

 

1950년 프리엥 교회의 자료, 20년전, 즉 1930년대에 그 교회가 세워졌다는 정보를 포함한다.

 

 

 

민덴

 

 

    그녀의 남편과 아들이 다섯 달 차로 세상을 떠났고, 그녀는 회복하는데 오래 걸렸다. 다음 해 동안, 그녀는 대리 설교자였다. 침례교 목사가 두 주간 동안 휴가를 갔을 때, 그리고 장로교 목사가 휴가를 갔을 때, 그녀에게 자기들의 자리를 대신해 줄 수 있느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거의 일 년간 대리 설교자가 되었다.

    다음 몇 해 동안, 그녀는 전도사역을 했고, 특별히 어린이 사역을 했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녀의 사역을 번성케 하셨다.

 

E. 한국 지원 사역

 

    오프스테드는 1950년대 후반부터, 한국전쟁 시기에 한국을 지원하는 일도 했다. 그녀는 뉴욕주에 살고 있던 60대 후반에서 70대 초반 나이의 미스 럼시(Mrs. Rumsey)로 부터 충분한 돈을 받았다. 또한 슬럼 선교를 도왔던 라스무센(Rasmussens)로 부터도 돈을 받았다. 그들은 매달 헌금을 보내왔다. 헨리 존슨은 10년간 꾸준히 헌금을 보냈다. 그리고 오프스테드는 그녀의 남편과 자신의 헌금을 더하여 그 돈들을 로스앤젤레스, 제퍼슨 거리(Jefferson St. in Los Angeles)에 있는 한국 장로 교회를 통해 한국으로 보냈다. 이 교회는 1374 W Jefferson Blvd, Los Angeles, CA에 현존하는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Korean United Presbyterian Church)인 것 같다. 이 교회는 1906510일에 하와이에서 본토로 들어온 한인 장로교인들을 중심으로 제퍼슨 장로교회라는 이름으로 창립되었다.  미국 본토에 3번째로 세워진 한인교회였으며,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운동과 한국전쟁 시에는 본국 지원에 힘썼다. 1937216일에서 1958531일까지 김성락 목사가 제2대 담임목사로 섬겼고, 195971일에서 1967121일까지 권희상 목사가 제3대 담임목사로 섬겼다. 창립후 32년이 지난 193854일에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의 1906년 첫 예배처

 

왼쪽 건물이 1938년에 헌당된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1938년 헌당된 예배당

 

 

1938년 이승만 대통령도 참석했던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의 야외예배

 

 

F. 허홍의 방문

 

    1948, 오프스테드는 재혼했다. 그래서 성이 바뀌어 엘프레다 홀트(Elfreeda Holt)가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오프스테드는 1960년에, 허홍 목사가 한국 서울에서 와서 자기를 방문했다고 회고했다. 그러나 최재웅은 김익진의 연구에 더하여 그녀가 1956년에 미국에서 허홍을 만났다고 보았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총회장이 된 허홍을 스프링필드 총회본부로 초청했고, 허홍은 1956827일에 미국 시애틀에 도착했다는 것이다. 허홍은 오프스테드가 있던 로스앤젤레스에 두 주간 머물렀다. 오프스테드는 또한 로스앤젤레스에서 사역하던 한 한국 장로교 목사를 저녁 손님으로 모셨다. 이 장로교 목사는 전쟁기간 한국 지원을 도왔던 나성한인연합장로교회 김성락 목사였다

 

김성락 목사

 

오프스테드는 허홍 목사의 간증을 들으라고 덜루스와 수퍼리어에 있는 많은 친구들을 그리고 ICA에 있는 몇 친구들을 불렀다. 그 전쟁 동안 많은 다른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셋 모두를 지켜주셨다. 허홍은 박성산과 배부근과 함께 어떻게 채소 장사들로 위장했었는지, 그리고 비록 모두 3-4개의 언어들을 말해도 얼마나 어리석게 보였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쟁이들인지 아닌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 군인이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다. 그들은 벌통 안에 성경 한 권을 숨겼고 들키지 않을까 조마조마 했던 일을 간증하기도 했다. 주님께서 그 전쟁 끝까지 세 사람 모두를 지켜 주셨던 것이다. 이런 허홍의 간증은 한국전쟁 중에 박성산이 홀로 남하하지 않고, 허홍 그리고 배부근과 함께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허홍 목사

 

 

    허홍은 이때 오프스테드에게 한 여성을 상기시켰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허 목사가 그녀에게 말했다. “아들들에 의해 들것을 타고 당신 집에 들어왔던 부인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그녀가 귀신들렸다고 말했었지요. 그리고 그녀가 일어나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었지요. 그리고 그들이 그녀를 데리고 나갔지요. 그녀를 기억하십니까?” 오프스테드는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아주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에 대해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그녀는 도쿄로 가서 하나님의 성회 학교에 다녔고, 졸업한 후 도쿄에서 한국인들에게 설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한국에 와서 한 교회를 개척했고, 성도수가 25천명에 달했습니다. 그즈음에 조 박사(Dr. Cho)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교회를 맡아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여성은 최자실 목사였을 것이고, 그 교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 여성이 최자실 목사였다면, 이 일화는 숨겨져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에 그 여성이 최자실 목사가 아니었다면, 그 작지 않은 교회가 여의도순복음교회로 합병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여의도순복음교회가 다른 대형교회와 합병되었었다는 것을 듣거나 읽어보지 못했다. 그런데 그 여성이 최자실이었다고 가정한다면, 1915년생이었던 그녀는 1933년에 18세여야 한다. 18세에 성장한 아들 넷을 두었다는 것은 성립되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다. 하나는 놀라운 능력의 또 다른 여성이 존재했을 가능성이며, 다른 하나는 최자실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들이 뒤엉킨 것이다.

 

 

최자실 목사와 조용기 목사

 

    허 목사의 고별의 밤에, 오프스테드와 성도들은 한 집회를 열고, 식탁 가운데에 한 바구니를 놓았다. 그 바구니는 지폐로 가득 찼다. 그들은 그 돈을 귀국 여행에 쓰도록 허홍에게 주었다. 허 목사는 한국으로 돌아간 뒤, 오프스테드의 팀이 워싱턴, 타코마(Tacoma, Washington)에 한 장소를 개설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곳에서 그 팀은 전쟁 후 통들과 상자들을 한국으로 보낼 수 있었다. 크밤미(Kvamme) 목사가 그 운송 비용을 감당했다. 오프스테드의 팀은 몇 년 동안 통들과 상자들을 한국에 보냈다.

 

워싱턴, 타코마

 

 

 

VII. 한국 재방문

 

A. 한국으로부터의 초청

 

    1973년에 오프스테드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열린 세계오순절대회에 참석하도록 초청장을 받았다. 1973819일 현재의 여의도에 있는 성전에서 여의도순복음교회 최초의 예배가 드려졌다. 그리고 1973918일부터 22일까지 일주일간 5만 명의 한국성도와 5천 명의 외국인들이 참석한 가운데 제10차 세계오순절대회(the 10th World Pentecostal Conference)가 여의도순복음교회 본 성전과 효창운동장에서 열렸다. 세계오순절대회는 세계 오순절주의자들이 결성한 오순절세계회(Pentecostal World Fellowship)가 개최하는 세계대회이다. PWF는 진앙진술문(Our Statement of Faith)을 개시했는데, 그 진술문의 제5항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사도행전 24절에 따라 성령께서 말하라고 주시는 것을 말하는 방언이라는 증거를 동반하는 성령침례와 영적 은사들과 사역들의 작동을 믿는다 (We believe in the baptism in the Holy Spirit with the evidence of speaking in other tongues as the Spirit gives utterance according to Acts 2:4, and in the operation of the spiritual gifts and ministries). PWF3년마다 세계오순절대회를 열어왔다. 레오나르드 스테이너(Leonrard Steiner), 데이비드 J. 듀 플레시스(David J. du Plessis), J. 로스웰 플라우어(J. Roswell Flower), 그리고 도날드 기(Donald Gee)가 오순절 지도자들을 위해 세계오순절대회를 조직하고 19475월에 3천여 명이 모인 첫 대회를 열었다. 1회는 1947년에 쥐리히에서, 2회는 1949년에 파리에서, 3회는 1952년에 런던에서, 4회는 1955년에 스톡홀름에서, 5회는 1958년에 토론토에서, 6회는 1961년에 예루살렘에서, 7회는 1964년에 헬싱키에서, 8회는 1967년에 리오 데 자네이로에서, 9회는 1970년에 텍사스주, 달라스에서, 그리고 10회는 1973년에 서울에서 열렸다.

 

 

 

 

 

    아마도 그 대회 준비위원회의 두 명의 부위원장들 중의 하나였던 허홍이 그 위원회에 그녀를 추천하고 그녀의 미국 주소를 알려주었을 것이다

 

 

즉시 그녀는 대답했다. “불가능합니다. 수술 후 회복을 기다리며 병원에 있습니다. 더구나, 저는 비용이 없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녀는 그 초청에 처음에는 몸 상태와 비용 문제를 들어 거절했던 것이다. 어느 날, 주치의가 그녀의 붕대를 제거하고 있을 때, 그녀가 그에게 물었다. “토마스 박사님, 제가 약 3주 동안[가는데 1주일, 한국 체류 1주일, 돌아오는데 1주일] 한국 서울에서 열리는 한 컨퍼런스에 가려 한다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는 말했다. “글쎄요, 가셔도 될 것 같기는 합니다.” 그 순간, 그녀는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갈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그 문제를 생각하며 병원을 떠나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는 나머지 붕대를 제거하고는 물었다. “여전히 가고 싶으신가요?” 그녀는 말했다. “, 가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주사기들을 가지고 가셔야만 합니다. 담당 의사인 존슨 박사에게 가셔서 주사기들을 받으십시오.” 그녀는 그렇게 했다! 그녀는 그에게 가서 토마스 박사가 주사기를 소지할 것을 추천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왜 그것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그녀는 말했다. “한국, 서울에 가려고 합니다.” 그는 머리를 긇으며 말했다. “글쎄요, 늙은이처럼 바보 같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주사기들을 받았다.

    정한 시간에, 그녀는 한국 서울로 가는 여정에 올랐다. 그녀는 서해안으로 갔다. 존슨 형제 목사들(Rev. Johnsons)은 필라델피아 교회의 목사들이었는데, 그들의 집에 그녀를 초대했다. 일 주일가량 그곳에서 머문 후, 그녀는 한국으로의 여정에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컨퍼런스에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녀는 그들에게 마음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녀는 다음 주 중반에 위스콘신, 수퍼리아에 있는 집에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날 저녁에 그녀는 한 부부와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았다. 거기에는 한 전도자가 있었는데, 그가 설교를 마쳤을 때, 존슨 형제가 말했다. “잊지 마십시오, 엘프레다 홀트는 화요일 아침에 한국 서울로 떠납니다. 그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그녀는 그렇게 놀라본 적이 없었다! 그녀는 듣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예배 후 그녀는 존슨 형제에게 전화로 말했다. “목사님, 저는 진짜로 포기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당신의 표를 샀습니다. 다 지불 되었습니다. 당신의 여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을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리고 도쿄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잭 홈스(Jack Holms)에게 당신이 거기에 갈 것이라고 전화했습니다.” 그녀는 너무 고무되어 겨우 갈 준비를 했다.

    그날이 되어 오프스테드는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에스페셋 형제(Brother Espeset)가 거기서 그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한국 대사관이 문 닫을 시간이 한 시간 반 남았습니다. 저는 그만큼 빠르게 샌프란시스코를 가로질러 운전할 수 없습니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능한 빨리 그곳에 도착해야 한다고 말하십시오. 저도 따라갔다가 공항으로 당신을 데리고 올 겁니다.” 그녀가 대사관에 도착했을 때는 121분 전이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여권을 주었고, 그녀는 도쿄로 가는 비행기 시간 안에 그 공항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눈은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들을 볼 수 있었지만, 그 비행기를 볼 수 없었다.

 

B. 한국 재방문, 여의도순복음교회

 

    그녀가 도쿄를 경유해 서울 세관을 통과하려고 할 때, 그녀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나?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짐들을 싸는 게 내게는 버거워 모든 것이 다시 꼬일텐데.” 그때 금빛 리본들을 단 한 군인이 그녀 앞에 와서 한 신사에게 말했다. “그녀가 지나가게 하십시오, 그녀는 저의 자매입니다.” 그는 서울에 있는 공군 소속이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그녀를 지나가게 했다. 그들은 분명 그 신사를 알고 있었다. 그는 중위였을 것이다. 그는 그 선 끝으로 왔다. 그녀는 말했다. “제가 당신의 자매라니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저의 자매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 도쿄까지 그 모든 여정에서 당신은 사람들에게 주님과 그 컨퍼런스에 대해 말했습니다. 저 또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서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공항에서 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당신이 저의 자매지 않습니까?” 그녀는 말했다. “,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걱정스러웠다. 그녀는 그들이 자기 전화를 받기를 바랬다. 그는 말했다. “제가 당신이 누군가를 만날 때까지 당신과 함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영접하기 위해 누군가를 보내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서울은 아주 큰 도시입니다.” “, 저도 압니다, 그러나 제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 즈음에, 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려 나왔다. “덜루스에서 오신 숙녀분. 주목하십시오! 일어서주십시오!” 그녀는 일어났고, 한 여성 택시 운전사가 그녀에게 달려와서 물었다. “홀트 부인이신가요?”

    그 운전사는 그녀를 그 아름다운 교회, 순복음중앙교회(현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데려다 주었다. 그 교회의 계단에 허홍 목사,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배 형제의 부인, 박 목사의 딸과 이 큰 교회의 사역자들 중 하나인 아들이 서 있었다. 배부근 목사의 사모는 김영인이었다. 박성산의 딸은 박정숙이었으며, 박성산의 아들은 박재주였다. "박재주"라는 이름의 전도사는 1973년 당시 서대문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했으며, 그는 1976년 목사로서 사임했다. 오프스테드는 분홍 카네이션과 솔잎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부케를 받았다. 그들은 그녀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그녀에게 한 여성을 붙여주어 한 호텔에 묵게 했다. 침대 두 개가 있는 큰 방과 응접실이 있었다. 그녀는 매우 피곤했지만 거기에 있는 것과 그 아름다운 교회를 보게 되어 너무도 기뻤다. 세계에 있는 오순절 교회들 중에 제일 호화스런 교회라고 말한 사람은 데이비드 뒤 플레시스였을 것이다.

 

 

여의도순복음교회

 

    방에서 식사하는 동안 두 목사가 주일 집회 때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 묻기 위해 그녀에게 왔다. 그녀는 이런 컨퍼런스에서 말한다는 것은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러 왔다. 페트루스 목사(Pastor Pethrus)가 한 날 말할 것이었다. Pastor Pethrus는 루이스 페트루스(Lewi Pethrus, 1884-1974)였을 것이다. 그는 스웨덴 침례교 목사였으나 후에 오순절 지도자가 되어 스톡홀름에 있는 필라델피아 교회(The Filadelfia Church)를 대형교회로 성장시켰다. 페트루스는 1955년에 스톡홀름에서 열린 제4회 세계오순절대회에 헌신했으며, 1958년에 토론토에서 열린 제5회 세계오순절대회의 개막설교자였다. 그는 제10회 세계오순절대회에서도 설교자로 참여하려 했으나 고령으로 뜻을 이루지 못했고, 다음 해인 1974에 소천했다. 또한 도쿄의 유미야마 목사가 말할 것이었다. 유미야마 키요마(弓山 喜代馬, みやま きよま, 1900 2002)1949년에 일본 어셈블리즈 오브 가드 교단”(日本アッセンブリーズ・オブ・ゴッド教団)을 설립하고 1973년까지 총회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1950년에서 1992년까지 도쿄에 있는 중앙성경학교(Central Bible Institute)의 교장이었다. 그가 24년간이나 임직했던 일본 하나님의 성회의 총회장에서 1973년에 물러난 것은 건강 문제 때문이었던 것 같다. 따라서 서울에 와서 제10차 세계오순절대회에 참여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오프스테드는 설교 제안에 대해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그 집회에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눈이 보이지 않아 성경이나 다른 것을 읽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 대신 앞을 잘 보지 못하던 오프스테드에게 한국에서, 자기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 앞에서 다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주신 것이다.

 

 

Lewi Pethrus

 

 

弓山 喜代馬

 

 

    오프스테드는 주일 아침에 그 교회에 가도록 초청을 받았고, 830분에 조용기 목사의 당회장실에 가야 했다. 조용기 목사의 장모, 최자실 목사가 그녀를 맞이했다. 최 목사는 머리에 작고 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여성들이 주님의 집에 특히 주님을 예배하러 모였을 때 머리를 덮어야 한다고 믿었다. 오프스테드에 의하면, 최자실 목사는 도쿄에 있는 한국인 교회의 목사이며, 아주 위대한 설교자였다. “도쿄에 있는 한국인 교회의 목사라는 말은 허홍이 미국 방문때 오프스테드에게 말해 주었던 귀신들렸다 놓임받았던 여성에 대해 말해 준 것과 일치한다. 이 오프스테드의 진술은 귀신들려 들것에 실려 오프스테드의 집에 왔었던 여성이 최자실이었을 가능성을 말해 준다.

 

 

사역중인 흰 모자를 쓴 최자실 목사

 

    조 목사의 당회장실에는 두 개의 긴 검은 가죽 소파가 있었고, 네다섯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앉았다. 그 소파들 사이에는 긴 커피 테이블이 있었다. 그녀는 조 박사, 그의 장모, 미국에서 온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제9대 총회장 짐머만(Thomas F. Zimmerman) 박사, 교회일치 운동에서 오순절을 알린 그리고 세계오순절대회를 처음부터 공동기획하고 이끌어온 데이비드 뒤 플레시스(David Du Plessis), World Outreach의 창립자 렌 존스(Len Jones)가 있는 사무실에 앉았다. 그 다섯 사람은 그 큰 교회 강단에서 말할 것이었다.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그녀뿐이었을 것이다.

 

    10차 세계오순절 대회(the 10th World Pentecostal Conference)에 대해 동아일보는1973년 9월 19일자로 다음과 같은 기사를 썼다.

 

오순절대회, 동양최초 한국서 개막: 36개국 이천여 대표 등 이만여 명 참석, “성령체험으로 우리의 마음을 구하자지머만 박사 설교

10차 기독교오순절세계대회가 18일 저녁 7시 동양에서 처음으로 서울효장운동장에서 미국 영국 등 36개국 대표 이천여 명과 국내신도 이만오천 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개막됐다비가 내리는 가운데 대회기와 36개국의 국기가 오백 명의 성가대합창과 공군군악대 연주 속에 차례로 입장한 개막식은 대회장 지머만 박사(미국)의 설교(통역 조용기 목사)로 시작됐다. 지머만 박사는 설교를 통해 성령체험의 열렬한 신앙으로 우리의 마음을 구하고 교회를 부활하여 그리스도로부터 우리 모두 구원을 받자라고 말했다. . . 오는 23일까지 거행될 이번 대회는 오전에는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에서, 오후에는 효창운동장에서 집회를 갖는다. 오순절대회가 열리는 여의도에 신축된 순복음중앙교회(목사 조용기)6,800석의 대예배실과 600석의 예루살렘성전, 300석의 베들레헴 성전, 8개 교실의 교회학교 등 10,000명이 한꺼번에 예배를 볼 수 있는 단일 건물로는 동양 최대의 교회다. 이 교회는 704월 신도들의 성금 84천 만원으로 착공, 지난 819일 준공됐었다.

 

 

1973년 9월 19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10차 세계오순절대회 기사

 

 

Thomas F. Zimmerman
David Du Plessis

 

렌 존스

 

 

    그런데 그 교회에 가고 있을 때, 그녀에게 시므온(Simeon)에 대한 말씀이 떠올랐다. 시므온과 안나가 성전에 갔을 때, 아기 예수님, 주님을 처음 보고는 그의 팔로 안아 올리고 그분을 축복하여 말했다. “이제, 종으로 하여금 평안히 가게 하시나이다. 나의 눈으로 당신의 큰 구원을 보았나이다.” 그녀는 이 시므온의 찬송을 통해 큰 구원,” 즉 한국인들이 오순절 성도들로 성장하여 여의도순복음교회와 같은 큰 열매를 맺은 것을 목격하게 되어 기쁜 마음을 전했을 것이다.

 

 

1973년 9월 19일 여의도순복음교회 세계오순절대회

 

 

 

VIII. 재귀국과 소천

 

    오프스테드는 일주일 간의 컨퍼런스 참석 후 재귀국했다. 그녀는 이 한국행으로 인해 폐렴과 방광염에 걸려 병원에 가야만 했다. 담당 의사의 첫 마디는 보세요, 홀트 부인, 정말 힘드셨겠군요, 그렇지요? 제가 경고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으시지요.” 그런데 그녀는 말했다. “박사님, 제가 죽는다 해도, 이보다 더 행복하게 죽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어느 날 아침에, 그녀는 한 시편 찬송을 부르며 일어났다. 그 가사는 시편 23편이었다. 그 선율이 너무도 유쾌하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 아침에 평소와는 달리 활력이 넘쳤다. 그리고 그녀는 그것이 무엇이었던 가를 기억해내었다. 그 전날 어떤 사람이 그녀에게 전화를 해 한국이 이집트에 75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 기쁨이 온 밤을 지나 아침까지 그녀에게 남아 있던 것이다.

    1980년대 어느 날 로이 존슨 부인(Mrs. Roy Johnson)이 오프스테드에게 전화를 해 자기가 기록할 테니 한국에서의 그녀의 경험을 테잎에 녹음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지난 1년 반 동안, 그녀의 심장은 두 번 공격을 받았고, 눈은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그녀는 그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번 요청을 받고, 그녀는 노년에 그것을 시도했다. 그녀의 한국 오순절 선교에 대한 소중한 증언이 그 테잎에 담기게 되었다. 이 오프스테드의 구술 테잎은 미네소타 주, 덜루스(Duluth, MN)에 있는 덜루스 가스펠 타버나클(the Duluth Gospel Tabernacle)에 보관되었고, 그 교회의 전 담임목사 야우히아이넨(Rev. Henry H. Jauhiainen [1924-2015])과 그의 아내 맥신(Maxine)이 이 테잎을 풀러신학교에서 박사학위논문을 쓰고 있던 최재웅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간증 테입은 최재웅이 요청하여 A. B. (Angela Bomina Lee)에 의해 영문으로 문자화되었다. 이 영문 간증은 최재웅의 논문에 실렸다.

    엘프레다 오프스테드(홀트)19861223일에 86세의 나이에 위스콘신, 수퍼리어에서 소천했다.

 

 

IX. 나가는 말

 

    엘프레다 오프스테드(Elfreeda Ofstead)1930825일부터 19346월 말까지 4년간의 선교와 1973년의 일주일 간의 재방문에도 불구하고 한국 오순절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져 왔었다. 그런데 독립 하나님의 성회의 기관지였던 The Herald of Faith19361월에 오프스테드와 파슨스의 한국 선교에 대한 기사를 실었고, 그녀 자신이 그녀의 생의 말기인 1980년대에 테잎에 구술함으로써 그녀의 한국 선교에 대한 증언을 남겼다. 이 소중한 자료를 최재웅이 발굴해 내었고, 오프스테드를 한국 오순절 역사 속에 자리매김하게 했다.

    엘프레다 오프스테드는 1900625일에 위스콘신 주, 수퍼리어에서 태어나, 1986122386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그녀는 8세였던 190810월경에 수퍼리어에서 일어났던 오순절적 부흥 시기에 오순절에 입문했다. 그리고 1928년 봄에 덜루스에서 열렸던, 스칸디나비아인 오순절 운동의 아버지 T. B. 바렛이 인도하던 한 부흥회에서 한국 선교사로의 소명을 받았다. 30세였던 오프스테드는 1930825일에 독립 하나님의 성회의 소속이며 그 교단의 중심 교회였고 엘머 C. 에릭슨이 담임으로 섬기고 있던 덜루스 복음 장막의 후원을 받으며 파슨스와 함께 “RMS Empress of Japan”을 타고 한국에 왔다. 한국에 도착한 그녀는 서울 복음 전도 센터로 불리던 “the Woman’s Social Evangelistic Center” 소유의 한 선교사의 집에 머물렀다. 그 집은 인사동 194번지에 있었.

    오프스테드는 2년 동안 개신교 선교부 공의회 (the 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가 개설한 언어학교에서 파슨스와 함께 한국어를 공부했으며, 허홍에게서도 한국어를 배웠다. 그녀는 언더우드가 섬기고 있던 종로감리교회에서 간증설교를 하기도 했다. 1933년 초에 영국 엘림에서 온 두 젊은 여성들, 벳시와 메르테트가 오프스테드, 파슨과 합류했다. 그즈음에, 오프스테드 팀은 105명의 아이들이 출석하는 학교를 열었고, 빈민지역의 어린이들을 위한 학급도 개설했다.

    오프스테드의 팀은 교육받고 성령충만한 한국인 사역자들을 위해 기도하던 중 마리 주르겐센을 통해 일본에서 1933년 초에 박성산과 배부근 두 신학생이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럼시를 포함한 오프스테드의 팀은 그 두 신학생을 어려운 가운데서도 물질적으로 후원했다.

    오프스테드 팀은 더 기도하던 중 5월경에 한 장로교 건물을 인수하게 되었고, 그 건물에 19338월경 한국 오순절교회의 두 번째 교회였던 수창동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파슨스, 벳시, 메르테트 그리고 오프스테드는 후원해 왔던 배부근을 수창동교회의 목회자로 초빙했다. 그들은 193394일에 첫 전도집회를 시작했다. 첫 집회에서 두 영혼이 구원을 받았는데 그들 중 하나는 불교 중이었다. 주님께서는 자주 따르는 표적들로 그분의 말씀을 확증하셨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들이 놓임을 받았다. 오프스테드는 그 교회의 오르간으로 반주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193312월 말 서빙고교회에서 진행된 크리스마스 축하 행사 기간 동안, 오프스테드는 폐렴에 걸렸으며, 더하여 장티푸스에 걸렸다. 그 와중에서도 최자실로 추정되는 한 여성이 오프스테드의 집에 들려왔다가 귀신들로부터 놓임받는 역사가 일어났다. 병이 중해져 동대문병원으로 이송된 오프스테드는 폐 일부를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게 되고 생을 마감해야하는 상황에 놓였다. 그러나 그녀는 기도로 호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를 더 지속할 수 없는 몸이 되어 부득이 19346월 말에 프레지던트 존슨 호(President Johnson)을 타고 미국 시애틀에 하선하여 귀국했다.

    귀국 후 오프스테드는 간증사역과 복음전도사역을 계속했다. 그리고 1850년대와 60년대에 그녀는 한국을 물질적으로 지원하는 일을 하기도 했다. 재혼하여 엘프레다 홀트(Holt)가 되어 로프앤젤레스 근교에 살고 있던 오프스테드는 1960년에 허홍 목사의 방문을 받았다. 그녀는 허홍을 통해 한국전쟁 동안 박성산과 배부근이 허홍과 함께 무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는 허홍의 도움으로 한국에 지원하는 일을 더 지속했다. 이때 오프스테드는 그 귀신들렸다 놓임받았던 여성이 조용기 목사와 관련된 사역을 하는 목사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1973, 73세의 오프스테드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중심으로 열린 제10차 세계오순절대회 참석하도록 초청장을 받았다그리고 그 일주일간의 컨퍼런스에 참석하며 허홍과 배부근의 사모, 박성산의 아들과 딸, 그리고 조용기 목사, 또한 귀신에서 놓임 받은 최자실 목사를 만났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기회를 통해 그 컨퍼런스에서 연사로 감격스럽게 말씀을 전하기도 했다.

    일주일 간의 한국 체류 후에 재귀국한 오프스테드는 한국행 중에 발생한 폐렴과 방광염 때문에 다시 병원에 가야만 했다. 그러나 자기가 어려운 가운데 뿌린 씨앗들이 풍성하게 열매를 맺은 모습을 눈으로 확인했던 그녀는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

    비록 오프스테드의 본격적인 한국 선교 사역은 1933년 한 해에 머물게 되었지만, 그리고 그녀가 본국으로 돌아갈 때 그녀의 손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지만, 그녀의 손을 떠난 살아있는 오순절적 복음의 씨앗은 뿌려져 박성산, 배부근, 최자실 등 기라성같은 한국 오순절 지도자들을 통해 큰 열매를 맺었다. 특히, 그녀가 남긴 한국 오순절 선교에 대한 구술 기록은 초기 오순절적인 한국 선교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단비와 같이 반가운 것이다. 오프스테드는 자신의 신체의 일부를 떼어내야 했고 평생 그 상처를 몸에 가지고 살아야 했지만, 그리고 물질적 어려움을 감내해야만 했지만, 한국을 지원하는 일을 계속했고, 자신의 사역이 좋은 열매를 맺는 것을 기뻐하며 소천했다. 이제는 한국 오순절 성도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감사해야 한다.

 

 

 

엘프레다 오프스테드의 연보

 

1900625일    위스콘신 주, 수퍼리어에서 출생

190810월          수퍼리어 오순절적인 부흥시 주님께 자신의 삶을 드림

1928년 봄               T. B. 바렛의 한 부흥회에서 한국 선교사로 소명 받음

1930825일     30세에 RMS Empress of Japan을 타고 한국에 도착

1931,1932년          언어학교에서 한국어 수학

1933년 초              벳시와 메르테트가 합류

                               어린이학교 개설

                               박성산과 배부근 후원

19335월             수창동교회 개척, 배부근과 사역 시작

193394일      한국에서의 첫 전도 집회 개최

193312월 말      폐렴과 장티푸스 발병, 폐의 일부를 떼어 내게 됨

19346월 말        미국으로 President Johns을 타고 귀국

                               간증사역

1930년대 말           복음전도사역, 남편과 아들 사별

1948년                    재혼 (엘프레다 홀트)

1950년대 말            한국지원사역

1960년                     허홍의 오프스테드 방문, 한국지원

1973년                   일주일간 한국 재방문, 허홍, 조용기, 최자실 만남

                                10차 세계오순절대회 참석, 설교

1980년대                 한국 선교 증언 테잎에 구술

19861223일    86세에 위스콘신, 수퍼리어에서 소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