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복음총회신학교 조교수 이창승
2022년 9월 21일/2024년 3월 17일
I. 들어가는 말
II. 탄생과 성장
III. 훈련, 사역과 선교 소명
IV. 일본 선교
V. 한국 선교
VI. 귀국과 소천
VII. 나가는 말
메리 C. 럼시의 연보
I. 들어가는 말
메리 C. 럼시(Mary C. Rumsey)는 한국에 온 오순절적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먼저 온 그리고 가장 중요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다. 럼시는 한국인에게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을 애인처럼 사랑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한국 오순절주의에 대한 공식적인 역사는 그 어떤 다른 오순절적 선교사들보다도 그녀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제공한다. 그렇지만, 그와 동시에 럼시의 생애와 사역에 대해 알려진 것은 너무도 적다. 더욱이 그녀에 대한 역사적 자료의 대부분은 단편적이고, 부정확하고, 오해하기 쉬운 것이다. 그런 공식 역사에만 의존하여 럼시의 삶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럼시의 개인적 역사를 보다 더 구체적으로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더욱 많은 자료가 필요하다. 2003년에 네덜란드 Uitgeverij Boekencentrum에 제출된 한 박사학위 논문은 그 공식적 역사보다 좀 더 새롭고 많은 자료를 제공했으며, 2017년에 풀러 세미나리에 제출된 한 박사학위논문은 럼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고 많은 자료들과 정보들을 제공했다. 본 글은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30년사와 김익진과 최재웅의 연구, 그리고 필자의 미간행물인 “1933년에서 1949년까지의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교단 명칭 연구” 등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II. 탄생과 성장
럼시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매우 적다. 공식적인 한국 오순절주의 역사인 30년사에 따르면, 럼시는 뉴욕주 목수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그녀는 외할머니에 의해 길러졌다. 칼로우(Margaret E. Carlow)는 럼시가 뉴욕, 코틀랜드(Cortland, NY)에서 태어났다고 생각했다.
공적인 문서들은 럼시의 가족과 어린 시절에 대한 보다 더 구체적인 정보를 제공한다. 공식 기록들에 따르면, 메리 C. 럼시로 보다 더 잘 알려진 “메리 클레멘틴 럼시”(Mary Clementine Rumsey)는 뉴욕, 코틀랜드에서 1884년 2월 20일에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 제임스 E.(James E.)는 목수였으며, 어머니 제시 S.(Jessie S)는 주부였다. 럼시에게는 제임스(James)라는 이름의 오빠와 윌리엄(William)이라는 이름의 남동생이 있었다.
럼시의 외가는 독실한 감리교인들이었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윌리엄 J. 밀스(William J. Mills, 1833-1903)와 그녀의 외삼촌, 버톤 J. 밀스(Burton J. Mills, c. 1853-1915)는 감리교 감독 교회의 목회자들이었다. 럼시가 4세가 되던 1888년경, 럼시의 가족은 뉴욕주의 번잡한 도시 시라쿠스(Syracuse)로 이사했다. 시라쿠스에 있을 때 제시가 세상을 떠났고, 럼시의 가족은 흩어진 것 같다. 럼시는 오하이오의 뉴 런던에 있는 감리교회에서 목회하고 있던 그녀의 외삼촌 버톤의 보호 아래 놓였다. 아마도 찬양에 재능이 있던 럼시는 그녀의 외삼촌이 목회하고 있던 그 감리교회에서 성가대원으로 봉사했을 것이다. 럼시가 19세가 되던 1903년 2월 18일에 럼시의 외할아버지 윌리엄 J. 밀스가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즈음에, 럼시는 그녀의 사별한 외할머니 클레멘틴 밀스(Clementine Mills)와 함께 살기 위해 시라쿠스로 돌아간 것 같다.
III. 훈련, 사역과 선교 소명
경건한 감리교인이었던 21세의 럼시는 그리스도께 자신의 삶을 드리기로 결심하고 1905년 9월에 워싱턴 D.C.에 있는 선교사들과 여집사들을 위한 국립 훈련 학교(the National Training School for Missionaries and Deaconesses)에 들어갔다. 현대의 “여집사”(deaconess)는 교회 안에서 임명되는 직분으로서 여집사와는 다른 것이었다. 이 직무는 어떤 개신교, 아시아 동방교회, 동방정교회들에서 목회적 돌봄, 특히 다른 여성들을 돌봄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여집사들은 예배에서 제한된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Deaconess”는 종 또는 조력자를 의미하는 헬라어 “디아꼬노스”(διάκονος)에서 온 말이다. “여집사”의 기원은 13세기였다. 그 직무는 콘스탄티노플과 예루살렘 등에서 초기로부터 중기 비잔틴 시대에 존재했다. 그리고 또한 서유럽 교회들에도 존재했다. 영국 분리주의자들은 1610년대에 그들의 암스테르담 회중 가운데서 여집사 직무를 되살리려 했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 직무는 후에 1840년에 독일 개신교도들 가운데서 부활하기 시작해서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미국으로 퍼졌다. 루터주의 여집사들이 특별히 여러 병원들에서 활동적이었다. 그것의 현대적 활동은 1910년에 절정에 다다른 후 유럽에서 세속화가 종교적인 것을 약화시킴에 따라 그리고 간호와 사회복지의 전문화가 젊은 여성들에게 다른 경력 기회들을 제공하면서 서서히 쇠퇴했다. 여집사는 루터주의와 감리교와 같은 기독교 교단들에서 계속 존재하고 있다. 여집사들은 그들의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여집사로서 성별, 임명된다.
루시 엡 하이스 국립 훈련 학교(The Lucy Webb Hayes National Training School)는 훈련된 기독교 여성 사역자들을 양성하기 위해 1890년에 감리교 감독교회의 여성 국내 선교회(the Woman’s Home Missionary Society of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에 의해 세워졌다. 1894년에 그 학교는 국회에 의해 시불리 기념 병원(Sibley Memorial Hospital)과 합병되었다. 그 학교는 여집사들, 간호사들, 그리고 유치원 교사들을 잘 준비시키기 위해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23세의 럼시는 여집사로서 훈련을 받고, 1907년 5월에 졸업했다.
그리고 즉시 럼시는 여집사로 그녀의 사역을 시작했다. 1907년 10월에 럼시는 감리교 감독 교회의 뉴욕 중앙 지방회에 의해 여집사(deaconess)로 임명되었다. 같은 해에, 럼시는 뉴욕, 알바니에 있는 엘리자베스 그리핀 집사원(the Elizabeth W. Griffin Deaconess Home)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30년사는 럼시가 “간호원”으로 일했다고 썼는데, 그것은 조금 부정확한 정보였지만, 그래도 아주 틀린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공부했던 훈련학교는 학생 전체에게 전문적이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의 간호일을 훈련할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 학교는 간호 집사(nurse deaconess)라는 보다 더 전문적인 직무를 위한 과정도 제공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 유능한 여집사로 인정받았다. 그 집사 시설의 원장 메리 화이트헤드(Mary E. Whitehead)는 1907년에서 1908년까지 그리핀 집사원의 사역에 대해 여성 국내 선교회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럼시의 사역을 칭찬했다. “메리 C. 럼시 양은 산업 지역에서 3개의 반들을 조직했었고, 그녀의 사역은 성공적이었고 특별히 외국인들 사이에서 그랬다.” 럼시는 그리핀 여집사원에서 살면서 수년 동안 그녀의 사역을 지속했다.
이즈음에 그 대륙의 반대편 로스앤젤레스에서 아주사 거리 부흥이 일어났다. 한국 오순절주의에 대한 그 공식적 역사는 럼시가 1906년에 아주사 거리 부흥회에 참석해서 오순절적 침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한국으로의 소명을 받았다고 기록한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럼시의 젊은 시절의 삶에 대한 재검토가 드러내는 것처럼, 럼시가 아주사 거리 부흥회에 참석했을 같지는 않다. 럼시는 아주사 거리 부흥 소식은 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부흥은 전국적이고 세계적인 화제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럼시는 아주사 거리 부흥회에는 참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그 감리교 감독 교회에서 여집사 사역에 몰두하기 전에 1905년에서 1907년까지 (21세에서 23세까지) 루시 엡 하이스 국립 훈련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공적 기록은 1911년 경에 27세의 럼시가 감리교 감독 교회에서 침례 교회로 교단을 옮겼다는 것을 보여준다. 럼시는 1911년에서 1912년까지 버몬트, 풀트니(Poultney, Vermont) 제일 침례 교회에서 침례교 여집사로 섬겼다. 풀트니에 있는 동안, 럼시는 찰스 유게네 로스(Charles Eugene Ross, 1867-1926)를 알게 되었는데, 그는 1908년에서 1912년까지 제일 침례 교회의 목사였다. 로스가 베들린 대학에 유학하여 1911년에서 1912년까지 공부하는 동안, 럼시는 부교역자로서 얼마동안 그 침례교 회중을 섬겼다. 그 후, 럼시가 로스(C. E. Ross)를 통해 그 침례 교회 교인들과 형성했던 관계들은 그녀의 선교사역에로의 소명을 수행하는데 크게 공헌했다.
1912년 7월에 28세가 된 럼시는 풀트니를 떠나 시라쿠스로 갔다. 그녀는 경건한 침례교 여인, 메리 로스 댄포드(Mary Ross Danforth, 1870-1941)의 집에서 기거했다. 교사 경력을 가진 메리는 찰스 E. 로스(Charlres E. Ross) 목사의 자매였다. 그리고 그녀의 남편 에드윈 프레스톤(Edwin Preston)은 수 년 동안 건설산업에서 사업가로 일했었다. 시라쿠스에서, 럼시는 감리교 감독 교회에 재가입했고,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을 위한 집사 사역에 집중했다. 그 이탈리안 감리교 감독 교회의 목사 에토레 마리오 쉬사(Ettore Mario Schisa, 1877-1938)의 조력자로서 사역하는 동안 그녀는 그 회중의 이민자 자녀들을 돌보는 데 그녀의 시간 대부분을 보냈다. 1915년에 31세가 된 럼시의 가족 가운데 두 사람이 소천했다. 외삼촌 버톤 밀스와 그녀와 함께 살고 있었던 외할머니 클레멘틴 밀스가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여집사로서 럼시에 대한 자료는 그녀가 외국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은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이런 그녀의 성향은 후에 한국 선교에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35세가 된 럼시는 1919년에 제임스 던칸(James Duncan)의 딸 일리자베스 V. 베이커(Elizabeth V. Baker, 1849-1915)와 네 자매들에 의해 국내외 선교를 촉진시키기 위해 뉴욕, 로체스터에 1906년도에 세워진 오순절적 성경 학교인 “로체스터 성경 훈련 학교”(Rochester Bible Training School)에 들어갔다. 베이커와 그녀의 자매들은 본래 경건한 감리교도들이었는데, 1906년에 아주사 거리 부흥의 소식을 듣고 간절하게 기도하던 중에 오순절적 침례를 경험한 후 오순절 운동에 적극적으로 헌신하게 되었다. “광신주의(fanaticism) 또는 원수의 역사”를 염려하여 그 자매들은 아주사 거리에서의 첫 소식에 주저하는 반응을 보였다. 거의 일 년간 망설인 끝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운동의 원인이시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그분이 원인이지는 않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들은 “성령으로부터 기인하는 모든 것을 위해 하나님의 신뢰하고, 그분의 역사가 아닌 것은 버리기”로 작정했다. 그 자매들은 소식들이 1904년 말에 웨일즈(Wales)로부터 당도하기 시작한 이래로 부흥을 기대했었다. “그 놀라운 부흥이 웨일즈에서 일어났을 때, 우리의 마음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매우 격동했다. 참으로 강력하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인간 조작의 없음, 엄청난 영혼 구원 등은 우리로 하여금 간절하게 하나님의 충만하심을 알고 싶게 했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다리는 목적으로 특별한 집회들을 열었으며, 그 집회들에서 우리는 큰 복을 받았다.” 1907년 열린 엘림의 여름 연례 집회 동안, “부어주심의 나타남”으로 그 긴 몇 달간의 기도가 응답 되었다. 오순절적 가르침을 받아들였던 두 자매들은 사도적 신앙 메시지를 설명했고, “집회에 참석한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시에 구도자들이 되었다.” 그 자매들은 새로운 세대가 도래했고, “늦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새로운 일을 행하고 계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엘림 신앙원(the Elim Faith Home), 엘림 출판사(the Elim Publishing House), 엘림 타버나클(Elim Tabernacle), 그리고 로체스터 성경 훈련 학교를 수십 년 동안 운영했다. 베이커의 로체스터에 근거지를 삼은 사역은 오순절적 사역자들과 선교사들 다수를 배출함으로써 초기 오순절주의의 발전을 위한 한 중요한 센터로서 기여했다. 로체스터 성경 훈련 학교의 설립자들은 다른 것들 중에서도 믿음 치유와 생활, 전천년주의, 그리고 세계 복음화를 강조했다. 당시의 다른 성경 학교들에서와 같이 그 학교는 성경을 주교재로 삼아 학생들을 훈련시켰다. 그 학교의 과목들은 성경 공부에 집중되었다. 그 성경 훈련 학교는 1906년 10월 2일에 14명의 풀 타임 학생들과 6명의 파트 타임 학생들 그리고 5명의 교사들에 의해 개교되었다. 그 학교의 2년간의 교과과정에는 “신학, 또는 성경의 주요 교리들(Theology, or the great doctrines of the Bible); 성경 각 권 분석과 통합(Synthesis, or an analysis of the Bible by books); 개인적 사역, 또는 구도자들을 위한 성경 사용법(Personal Work, or how to use the Bible for seekers); 고대와 현대사(Ancient and Modern History), 교회사(Church History), 설교법(Homiletics), 주석(Exegesis), 세대적 진리(Dispensational Truth), 선택 과목으로 수사학(Rhetoric), 헬라어(Greek)”가 개설되었다. “믿음” 중심으로 조직된 그 학교는 학생들에게 “공급을 위해 주님을 어떻게 신뢰해야 하는 가”를 가르치는 것이 그들의 교육의 부분이 되어야 한다는 철학에 따라 학생들을 경제적 방책없이 받아들였다.
럼시는 2년 동안 로체스터 성경 훈련 학교에서 공부하는 동안, 학비와 생활비를 벌기 위해 한 가게에서 판매원으로 일했다. 1920년 미국 연방 인구 조사에 따르면, 메리는 한 가게에서 일하는 판매원이었다. 그녀는 로체스터, 메리 콘로(Mary Conrow)에서 살고 있었다. 럼시는 과정 전체를 마치고 37세가 되는 1921년 4월에 졸업했다.
럼시는 로체스터 성경 훈련 학교에서 공부하고 있는 동안 그녀의 한국으로의 소명을 받았을 것이다. 럼시는 그녀의 주요한 경제적 후원자들 중의 하나였던 케리 주디 몽고메리(Carrie Judd Montgomery)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시를 소개했다. 그 시는 그녀가 자신의 생애를 온전히 하나님께 바칠지에 대해 번민하고 있을 때 지은 것이었다. 럼시는 “그 시는 제가 저의 소명을 받기 전 어느 날 미국에서 수강했던 한 성경 과목 시간에 앉아 있을 때 떠올랐습니다”라고 회고함으로써 그 시가 그녀의 선교 사역으로 부르심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었음을 시사했다. 그녀는 후에 자신의 한국 선교로의 소명을 “하나님께서는 저를 한국(Korea)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그곳으로 인도하실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쓴 편지에서 밝혔다.
비록 럼시가 자신을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에 자신을 드리기로 작정했지만, 그녀의 한국 선교의 문은 쉽게 열리지 않았다. 럼시는 메리 로스 댄포드의 전도 사역에 합류했다. 1920년 경에 에드윈과 메리 댄포드는 실용 성경 훈련 학교(the Practical BIble Training School)에서 공부했었는데, 그 학교는 존 아델버트 데이비스(John Adelbert Davis, 1871-1934)에 의해 1900년에 뉴욕, 존스톤에 세워졌다. 댄포드 부부는 국내 복음화에 전념했고, 뉴욕 상부에 있는 타운들에서 부흥회를 열었다. 1921년 11월 24일, 에드윈은 폐렴으로 사망했고, 메리 댄포드는 제법 많은 부동산을 유산으로 받았다. 메리 댄포드는 그녀의 전도 사역을 계속했다. 럼시는 1922년에서 1923년까지 (38세에서 39세) 찬양 사역자로서 댄포드의 팀에 합류했고, 댄포드의 선교 사역을 도왔다. 그 후, 댄포드는 럼시의 주요 후원자들 중에 한 명이 됨으로써 럼시가 그녀의 선교 사역에로의 소명을 실현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25년경에, 41세의 럼시는 뉴욕, 말레가니(Allegany, New York)에서 목사로서 잠시 사역했다.
1926년, 42세의 럼시는 태평양 건너 선교지로 가기 위한 그녀의 여정을 준비하기 위해 캘리포니아, 오크랜드(Oakland, California)로 갔다. 그때, 메리 댄포드의 형제 찰스 E. 로스(Charles E. Ross)가 오클랜드 침례 교회(the Oakland Temple Baptist Church)에서 목사로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또한 에이미 샘플 맥퍼슨(Aimee Semple McPherson, 1890-1944)의 열렬한 후원자들 중의 한 명이었다. 럼시는 로스의 집에서 기거했다.
IV. 일본 선교
비록 한국 선교의 소명을 받았지만, 럼시는 한국에 직접 오지 않고 일본어 공부를 위해 일본을 경유했다. 아마도 럼시는 오클랜드에 있을 때 일본 선교사 헤릿 루이스 디트리지(Harriett Lewis Dithridge)와 연락을 시작했을 것이다. 럼시는 몇 년 전에 『트러스트』(Trust)에 실린 디트리지의 간증을 통해 디트리지를 이미 알고 있었다. 럼시는 비록 한국으로 소명을 받았지만, 그녀는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얼마 동안 일본에 머물기를 작정했다. 왜냐하면, “한국은 일본의 통치를 받고 있고, 그래서 젊은이들은 일본어로 교육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럼시는 43세가 되는 1927년에 일본을 향해 떠났다.
일본에 도착한 럼시는 동경 부근의 다치카와(Tachikawa)에서 사역하던 디트리지와 합류했다. 디트리지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서 파송한 공식 일본 선교사였다. 디트리지는 1910년에 침례교 선교사로 일본에 왔었던 경험 많은 오순절적 선교사였다. 그런데 1923년에 미국에서 신유와 그녀의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적 성령 침례를 경험한 후, 그녀는 1924년 3월에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가 되어 일본으로 돌아왔다. 1925년에 그녀는 타치카와에 정착하여 오순절 성회를 개척했고, 일본 여성들을 위한 성령 훈련 학교를 세웠다. 럼시가 디트리지에게 왔을 그즈음에, 디트리지는 그 학교를 운영하는 데 바빴다. 디트리지는 럼시가 1927년에 일본에서 사역하던 자기에게 왔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 경험은 나로 하여금 내 사역 안으로 그 어떤 다른 선교사들이라도 들어오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27년경 내게로 한 젊은 여성이 왔는데, 그녀는 뉴욕에서 왔으며, 그녀의 이름은 미스 메리 럼시였다.
럼시의 1927년 일본 입국과 다치카와 사역은 1929년에 편찬된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에서 확인된다. 그 책은 재일 선교사 명단 중에 럼시에 대해 “Rumsey, Miss Mary, 1927, IND, 3833 Saka Cho, Tachikawa, Tokyo Fu”라고 소개했다. 그 소개 중에서 “1927”년은 일본 입국 연도이며, “Tachikawa”는 거주지이다.
럼시는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동경에 있는 한 언어학교에 등록했고, 일본어를 익히는 데 그녀의 시간과 힘을 쏟아부었다. 그녀의 집중적인 언어 공부에 더하여, 그녀는 또한 가끔 그녀의 찬양 재능으로 예배를 인도함으로써 디트리지를 도왔다. 디트리지와 럼시는 곧 친한 친구가 되었다. 럼시는 디트리지가 엘림 공동체로부터 경제적 후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그리고 디트리지는 44세의 럼시를 1928년에 열린 하나님의 성회의 일본 지역 연례회(the AG’s Japan District Annual Conference)에서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들에게 소개함으로써 럼시가 일본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 그룹과 접촉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이즈음에 럼시는 또한 주르겐센 가족과 친하게 되었는데, 그 가족은 미 하나님의 성회의 첫 일본 선교사들이었다. 럼시는 1929년 9월 25일에 동경에서 열린 존 주르겐센(John W. Juergensen)의 재혼식에 초청받기도 했다. 후에 럼시와 주르겐센 가족과의 관계는 럼시가 1932년 초에 나고야에서 존 주르겐센에게 훈련을 받은 한국 오순절 사역자 박성산을 확보하는데 한 역할을 했다. 박성산은 서빙고에 설립된 오순절 성회의 목사가 될 것이었다.
엘림 선교회는 일본에 체류하던 럼시를 경제적으로 후원했고, 럼시는 선교활동을 엘림 선교회에 보고했다. 럼시는 그렇게 엘림 선교회와의 관계를 유지해 갔다. 그녀는 1928년에 “Japan”이라는 제목의 선교 보고문을 엘림 선교회의 기관지 『트러스트』(Trust)에 기고했다. 그녀는 그 보고문의 서두를 자기가 속해있는 디트리지의 사역 상황에 대한 보고로 시작했다. 럼시는 디트리지가 운영하는 성경 훈련 학교(the Bible Training School)는 일본에서 유일한 여성을 위한 오순절적 훈련 학교(Pentecostal Training School)라고 소개했다. 럼시는 디트리지의 사역은 그곳이나 몇 마일 주변에서 유일한 기독교 사역이며, 사역자들은 여기서 그들이 사역하고 있는 다른 지역들로 나가고 있다고 보고했다. 럼시에 따르면 디트리지는 임대한 빌딩들에 세 곳의 다른 설교 장소들을 갖고 있었으며, 일주일에 하루 저녁을 설교하기 위해, 그리고 인접한 대학가에 일주일에 한 번 오후에 남성 대학생들을 위한 영어 성경 반을 이끌기 위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디트리지의 사역을 살펴본 럼시는 디트리지의 사역을 증진시키기 위해 더 필요한 것이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증진법을 생각해내었다. 그 증진법은 여성뿐만 아니라 일본인 남성을 훈련시킬 수 있는 오순절적 성경 훈련 학교를 세우는 것이었다. 럼시는 그 학교에서 새로운 남성 일본인 사역자들을 오순절적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말씀 지식을 갖추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럼시는 디트리지의 여성 성경 훈련 학교의 학생들은 로체스터 성경 훈련 학교의 학생들처럼 필요한 때 필요한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공급받는 훈련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럼시에 따르면, 디트리지 양의 성경 학교 소녀들은 정말로 진정한 기도 용사들이 되어가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과 신실하심에 대한 지식에서 자라가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위에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고 있었으며, 한 사람도 그들의 집으로부터 그 어떤 도움도 받지 않고 있었다. 어떤 학생들은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집에서 쫓겨났다. 하나님께서는 때때로 그들이 큰 시험을 받거나 음식이 부족하도록 허락하셨지만, 그들은 결코 불평하지 않았다. 그저 그들의 밥그릇을 물로 채웠으며, 식사 시간 동안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럼시에게는 성령의 역사로 어떤 사실을 알게 되는 지식의 은사와 섬기는 은사가 있었다. 그 은사들을 럼시가 보고한 그 여성 성경 훈련 학교의 학생들과 관련된 일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럼시는 동경에 있는 매일 아침 일찍 시작하는 어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토요일 아침 집에 있을 때, 그 소녀들이 그들의 기숙사에서 아침 식사 시간 동안 내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소리를 들었다. 럼시는 그들이 쌀이 떨어져서 그것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하나님께서 럼시에게 럼시가 가지고 있던 모든 돈을 디트리지에게 주라고 말씀하셨다. 럼시는 어학원비를 지불하기 위해서는 다음 주 초에 그 일본돈을 가지고 있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럼시는 기쁘게 그 돈을 건내 주었다. 디트리지는 그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지만, 럼시가 그녀에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그 돈을 주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러자 디트리지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돈을 받았다. 디트리지는 그날 돈을 위해 그리고 그 돈은 그날이 토요일이어서 외환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일본 돈이어야 할 것을 위해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럼시는 몰랐었는데, 그 소녀들은 이틀이나 삼일 동안 쌀 없이 지냈었으므로 그 돈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 돈은 하나님께서 보다 많은 돈을 보내실 때까지 그 큰 가족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리고 럼시가 학원 비를 지불해야 했을 때, 지불해야할 돈 보다 더 많은 돈이 럼시에게 왔다.
럼시가 가지고 있던 어학원비는 엘림 선교회에서 보낸 후원금의 일부였다. 럼시는 일본에 도착한 직후 엘림 선교회가 보내준 정성어린 헌금을 받았는데, 보고서를 통해 그에 대해 감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그녀는 후원금과 함께 동봉된 다음과 같은 노버 부인(Mrs. Nover)의 글을 소개했다. “주께서 당신을 축복하사 이것을 이 때에 당신에게 보냅니다. 주께서 참으로 이것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분의 귀한 이름을 찬양합니다. 저의 마음은 우리에게 공급하시는 주님의 신실하심에 대한 찬양과 감사로 넘칩니다.” 엘림 선교회의 후원은 계속되었다. 럼시는 그 후원금이 쇠약해진 디트리지를 호전시키는 데도 사용되었음을 보고했다. 럼시에 따르면, 디트리지가 쇠약해져서 휴식이 필요했지만 돈이 부족했다. 그때 엘림 선교회의 후원금이 럼시에게 왔다. 럼시는 그 후원금에 대해 “하나님께서 은혜롭게도 저에게 돈을 보내셨습니다”라며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것으로 해석했다. 럼시는 그 돈을 디트리지와 자신을 휴양을 위해 산으로 데리고 갈 신실한 일본인 사역자를 보내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느꼈다. 그래도 돈이 부족했었다. 그런데 후원금 수표가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다. 그 휴양 말미에 디트리지는 치료되어 모든 고통과 열이 그녀를 즉시 떠났다. 럼시는 엘림 선교회의 후원금이 일본 선교에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음을 일화들을 통해 알렸다.
럼시가 일본에서 어떻게 선교를 했는지를 구체적으로 전해주는 자료는 거의 없다. 찾을 수 있는 기록은 단 하나다. 그 기록에서 그녀는 디트리지와의 협력에 의한 오순절이 사역과 관련하여 새로운 거점(station) 하나가 막 열려 네 개의 거점이 되었음을 알렸다. 럼시와 디트리지는 그 거점에 “주일학교”(Sunday School)를 개설하여 청소년들을 교육시킴으로써 복음을 전파하는 것에 집중했던 것 같다. 럼시는 그 주일학교 학생들 가운데서 “세 명이 최근 성령침례를 받았다”라고 보고했다. 그리고 럼시는 개인 전도에 대한 보고도 했다. 그녀는 동경의 어학원에 열차로 오고 가고 있었다. 그런데 한 소녀가 그녀와 종종 함께 앉았다. 럼시는 그 소녀가 마지막 거점이 있는 동네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대학생인데도 그리스도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럼시는 그때부터 그 소녀의 구원을 위해 많이 기도하게 되었다.
럼시와 디트리지의 선교에서는 중생, 성령침례를 포함하는 오순절적 순복음의 요소들이 나타났으며, 의식으로 물침례가 시행되었다. 럼시는 비록 일본인들이 무관심하고 자기 만족을 추구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받았고, 또한 성령침례를 받았다고 보고했다. 1928년 1월 이후로 열다섯 명 이상, 대부분 남성들이지만 몇 여성들이 그 집회들에 참석했는데, 그들은 예수님을 자기 구주로 영접하기를 원했고, 각자가 기도하여 몇 명이 성령 침례(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를 받았다. 부활절에는 열두 명이 물 침례(water baptism)를 받았고, 다른 사람들도 곧 물 침례를 받을 것이었다. 럼시는 항상 “진정한 오순절적 집회”(the real Pentecostal meetings)들이 열릴 것을 기대했다.
럼시는 1929년에 『트러스트』에 실린 일본 선교보고에서 자신의 한국 선교 소명을 밝혔다. 그녀는 먼저 당시의 일본 생활에 만족을 표명했다. 럼시는 “이곳[일본]에 있는 것이 좋고,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주 행복하고 기쁠 것입니다”라고 썼다. 아마도 럼시는 디트리지와의 협력에 의한 일본 선교에서도 선교적 성과를 내고 있다는 것에 만족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럼시는 일본에서의 만족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한국 선교를 위해 부르셨다는 것을 잊지 않고, 그것을 자신과 후원자들에게 각인시켰다. 그녀는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는 저를 한국(Korea)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그곳으로 인도하실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그런데, 일본 정부나 어떤 선교단체 또는 개인이 그녀를 강제로 막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고, 갈 비용만 있다면, 충분히 한국으로 갈 수 있었을 텐데, “하나님께서 저를 그곳으로 인도하실 때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선뜻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 표현은 일본에 머무는 것과 한국에 가는 것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던 럼시의 마음을 드러낸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환경을 조성하셔서 한국에 가지 않으면 안되게 하시기 전에는 스스로 적극적으로 한국으로 갈 이유는 없다는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내적 갈등에도 불구하고, 럼시는 최종 선교 목적지에서 한국을 제거하지는 않았다.
1929년에 발간된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은 재일 선교사 명단 중에 럼시라는 이름을 올렸다. 그 책은 럼시라는 이름이 1927년과 1928년의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럼시가 1927년에 일본에 입국하여 1929년까지 일본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럼시는 1929년 9월 25일에 동경에서 열린 존 주르겐센(John W. Juergensen)의 재혼식에 초청받기도 했다. 존 주르겐센의 아내 에스더(Esther)가 1928년 1월 6일에 29세의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존 주르겐센은 그의 친구들과 가족들의 기도로 네티 그림스(Nettie Grimes)와 재혼하게 되었다. 네티(Nettie Grimes)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부설대학인 스프링필드의 중앙 성서 대학(Central Bible Institute)을 졸업했으며, 미 하나님의 성회의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나고야에서 존과 에스더의 사역을 돕고 있었다. 그렇게 럼시는 1929년에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일본에 있었다.
V. 한국 선교
보통 럼시가 1928년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일본 오순절 역사학자 수주키(鈴木正和, Masakazu Suzuki)는 럼시가 1930년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갔다고 주장했다. 수주키의 그런 주장은 디트리지의 언급을 근거로 삼았다. 디트리지는 일본선교 회고록에서 자기가 일본에 계속 있고 싶어 하던 럼시를 어떻게 1930년에 한국으로 가게 했는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내가 1930년에 휴가차 고국에 가기로 작정했을 때, 그녀는 내가 없는 동안 나의 사역을 주관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것을 거절했다. 나는 여전히 “외국인”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일본인이 내 사역을 주관하기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그녀에게 그녀가 언젠가는 한국에 가야 한다면, 그때가 지금이다, 일본에서 3년을 보냈다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을 보아왔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소명을 받았는데, 일본에 머물러버리는) 그녀가 일본에 주저앉아 버릴까 걱정이었다. 그래서 미스 럼시는 1930년에 한국으로 갔으며(So Miss Rumsey went to Korea in 1930), 그곳에서 좋은 사역을 펼쳤고, 그녀가 했던 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 . . 그것이 내가 내 사역 안에서 “외국인”과 가졌었던 유일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수주키는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 (1915-1941)을 토대로 작성한 태평양전쟁 전 일본에 있던 오순절 선교사들의 명단 중에서 럼시의 일본 선교기간을 1927년에서 1930년으로 표기했다. 실제로 1930년도에 발간된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 28권은 럼시에 대해 “Rumsey, Miss Mary, IND”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1931년에 발간된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은 디트리지에 대해 “Dithridge, Miss Harriett”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럼시라는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럼시가 1930년 초에 한국에 왔다면, 그 해 말에 만든 재일 선교사 명단에 올랐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1930년 초에 한국에 왔으니, 1931년 명단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결정적으로 1940년의 상황을 기록한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은 헤리 로드스(Harry A. Rhodes)에 의해 편집된 조선과 만주 선교사 인명부를 실었는데, 거기에 럼시의 정보가 등장한다. 이 정보에 따르면, 럼시는 오순절 교회 소속(PA, Pentecostal Assembly) 선교사로서 “34 Teidocho, Keijo”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조선에 입국한 연도는 1930년이다. 럼시는 1930년 초에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갔다. 하나님께서 디트리지를 통해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럼시를 한국으로 보내신 것이다.
한국 땅에 도착한 46세의 럼시 선교사는 1903년에 원산부흥운동의 위대한 불씨를 지폈던 하디(R. A. Hardie) 목사가 기거하기도 했던 경성(현 서울)의 정동 시병원(施病院) 건물에 여장을 풀었다. 지금은 정동제일교회가 서 있는 곳과 바로 이웃하는 자리, 선교백주년기념예배당의 서쪽 터전 일대에 자리 잡았던 시병원은 의료선교사 스트랜튼(William B. Scranton)과 헤론(John F. Heron)을 통해 감리교가 세운 최초의 병원이었다.
미국 북장로회가 제중원을 통해 의료선교 사업을 벌인 것과는 대조적으로 감리회는 민간병원을 설립하고 가난하고 비천한 병자를 껴안으며 의료사업을 시작했다. 스크랜튼은 조선에 온 직후 한 달 가량 제중원에서 알렌을 도와 진료를 맡았으나 제중원에 헤론 의사가 합류한 직후 별도로 독립하여 정동에 독립가옥 두 채가 딸린 땅을 구입했다. 그 땅은 공사관 길 건너편에 있었고, 그곳을 미국 공사가 소개해 주었다. 아펜젤러 부부와 스크랜튼 가족이 나누어 사용했고(성벽에 붙어있는 서쪽 집은 아펜젤러, 동쪽 집은 스크랜튼), 스트랜턴은 집 한 칸에 진료소를 마련하여 환자들을 보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의료기구와 의약품이 도착하자 1886년 6월 동쪽에 있던 옆집을 구입하여 정식으로 병원을 개원했으나 아직 간판도 없이 문 앞에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어떤 병에 걸렸든지 매일 열 점 종에 빈 병을 가지고 미국 의사를 만나시오”라는 방 한 장을 붙여 놓았을 뿐이었지만 동네 이름을 따서 보통 정동병원이라 했다. 이것이 미국 감리회 의료사업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서양인이 낸 병원을 선뜻 찾는 환자는 거의 없었고 오히려 환자를 찾아 나서야 했다. 외출 중이던 메리 스크랜튼이 콜레라에 걸려 서대문 성벽 아래 버려진 여인과 그의 딸을 발견하고 병원에 데려왔는데, 정동병원의 첫 입원환자였다. 여인이 치료받고 회복된 후에는 패티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스크랜튼 가족 집안일을 돌보며 살게 되었고, 네 살 난 어린 딸 별단이는 이화학당에 맡겨졌다. 제중원과는 달리 정동병원은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들에게 문턱이 낮았으며, 돌림병 환자를 헌신적으로 돌보면서 병원의 명성도 높아졌다. 이에 1887년 3월경에 나라로부터 “시병원”(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배재학당과 이화학당에 이어 나라가 이름을 준 곳이 되자 시병원은 나라의 지지를 얻은 셈이 되었다. “베푸는 병원”이라는 뜻인 시병원은 공교롭게도 스크랜튼의 한자명 “시란돈”(施蘭敦)의 첫 자와도 같았다. 스크랜튼은 시병원의 영문명을 “Universal Relief Hospital”이라 했다.
스크랜튼은 시병원을 남대문 쪽으로 이전하고 싶었다. “남대문병원” 또는 “상동병원”은 스크랜튼의 모친이 1890년 10월에 세운 병원이었다. 평소 스크랜튼은 정동에 시병원을 꾸려나가면서도 항상 “상동”으로 자신의 병원을 옮기기를 갈망했다. 그는 1893년 연차보고서에서 “병원을 성공하려면 가장 필수적인 것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올 수 있도록 붐비는 곳에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제 판단으로는 남대문 상동에 있는 병원이야말로 그 위치며, 주변의 교통량이며, 상주인구수를 감안할 때 참으로 바람직한 곳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곳은 민중이 있는 곳인 반면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외국인 거주지역입니다”라고 쓰며 병원이전의 당위성을 피력했다. 이런 그의 바람이 마침내 실현되어 1895년에 시병원은 상동병원(현 남대문시장 상동교회 자리)과 통합되었다.
시병원이 남대문병원과 통합한지 몇 년 후 시병원 건물은 외국인들이 거주하는 곳이 되었다. 1930년 5월에 블록(M. Bernita Block)은 “아무도 모르는 집”(The House Nobody Knows)이라는 제목으로 그 건물에 대해 글을 썼다. 블록에 따르면, 1895년에 시병원이 남대문병원과 통합된 후에도 몇 년 동안 진료는 계속되었다. 그러나 결국 그 건물은 완전히 거주공간으로 전환되었다. 황폐해진 그 가옥은 여러 나라와 온갖 직업의 사람들이 머무는 숙소가 되었다. 영국해외성경회의 알렉스 켄무어(Alex Kenmure), 영국영사관의 어네스트 홈즈(Ernest Holmes), 테일러 목사 내외(Rev and Mrs. H. C. Taylor), 닥터 루퍼스 내외(Dr. and Mrs. W. C. Rufus), 그리고 닥터 케이블 내외(Dr. and Mrs. E. M. Cable) 등이 그곳에서 기거했다. 당시 그곳에 살고 있던 버딕(Mr. Burdick)을 제외하면, 빌링스 일가(The Billings family)가 최장 거주기록을 갖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에 만족하였으며, 흔들거리는 벽에 널판지를 대고 또한 비가 새는 지붕 아래에서 5년간을 살았다. 벡 목사 내외(Rev. and Mrs. S. A. Beck), 쥐베르씨 내외(Mr. and Mrs. M. Zuber), 그리고 레이가 일가(The J. V. Lacy family)도 또한 당시에 그곳에 주소를 두었었다. 그 집에서는 여러 차례 불이 났었다. 언젠가는 이 집이 정말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블록은 최초의 선교병원이 시작된 바로 그 건물에 관심을 기울여 줄 것을 호소했다.
럼시는 그 정동 외국인 숙소의 허름한 한 방에서 꿇어 엎드려 “하나님이시여! 당신의 명령에 따라 무조건 이역만리 한국에 왔습니다. 저로 하여금 이 땅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당신의 뜻을 부족함 없이 이루게 하소서”하고 간절히 기도드렸다. 그리고 발길이 닿는 데로 걸어 구세군 조선 본영 사무실로 갔다. 여기에서 럼시 선교사는 사관으로 일하고 있던 청년 허홍(許銾)을 만나 “조선에 오순절 신앙을 전교하러 왔는데 전혀 생소한 곳이어서 구체적인 방안이 서질 않으니 허 선생께서 좀 도와주시오”라고 간청했다. 허홍은 자기로서는 이 민족적 차별대우를 개선할 수 없다고 여기고 조만간에 사표를 내리라고 각오를 단단히 먹고 있는데 40여 세쯤 되는 외국 여성이 목례를 하면서 다가와 “선교사업을 같이 하자”고 하니 이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라 생각하여 그날로 럼시 선교사와 손을 잡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이 일화에서 럼시가 기도 가운데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었음이 드러난다.
럼시를 포함한 오순절 선교사들은 한국어를 배우지 않고 내한했다. 그래서, 그들이 도착하여 제일 시급한 것은 한국어를 익히는 것이었다. 당시, 개신교 선교부 공의회 (the 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는 1912년에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세운 연합 신학교였던 피어슨 기념 성경학교(Pierson Memorial Bible School)의 부설 기관으로서 언어학교를 개설하고 있었다. 그 학교는 정동에서 가까운 “89 서대문정 2정목”(현 신문로 2가)에 있었다. 그 언어학교는 일 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각 8주간, 3년 진행되는 한국어 집중 교육 기관이었다. 그 한국어 강좌들은 선교사들에게 인기가 높아서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선교사들 가운데 삼분의 이 이상이 그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럼시도 도쿄의 언어학교에서 일본어를 배웠던 것처럼, 경성의 그 언어학교에서 가을에 한국어를 배웠을 것이다. 물론 럼시는 또한 허홍에게서 한국어를 배웠을 것이다.
럼시 선교사는 조선인에게 동족 이상의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왔으며 조선인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허홍과 럼시 선교사는 럼시가 기거하는 정동 외국인숙소에 선교본부를 두고 이 땅에 오순절 신앙을 전교하기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먼저 두 사람이 한 마음이 되어야 한다는 전제하에 허홍은 럼시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배우면서 “은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 “은혜 체험”은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 경험을 의미할 것이다. 럼시 선교사와 허홍의 노력으로 한국 최초의 오순절 교회가 섰으니 “서빙고교회”이다.
“엄세”(嚴世)라는 한국명의 럼시는 정동의 외국인숙소를 선교본부로 사용했으며, 선교회명도 부여했다. 럼시가 사용했던 선교회의 정확한 명칭은 “기독교 조선 오순절 교회”(基督敎 朝鮮 五旬節 敎會, Korea Msission of the Pentecostal Church)였으며, 선교회본부 주소는 “京城府 貞洞町 三四 朝鮮”(34 Teido Cho. 3, Seoul, Korea)이었다.
일본 선교에서도 드러났던 럼시의 성령에 의한 초자연적 지식의 은사, 더하여 병고치는 은사는 한국 선교에서도 발휘되었다. 하루는 허홍에게 럼시로부터 급한 전갈이 왔다. 허홍은 영문을 모른 채 달려갔고, 럼시는 어디 급히 갈 곳이 있다며 동행을 요구했다. 가면서 럼시는 허홍에게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으니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자”고 했다. 허홍이 따라가 보니 40대 중년인으로 갑자기 쓰러져 열이 40도를 넘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그들은 힘을 합하여 기도했다. 그리고 럼시 선교사가 그 환자에게 안수하자 곧 환자는 열이 내리고 완쾌됐다. 한 번은 럼시가 또 허홍에게 어딜 가자고 했고, 허홍은 따라나섰다. 럼시가 들른 곳은 배가 고파 거의 죽어가는 어떤 부인댁이었다. 럼시는 “얼마나 고생이 많으세요!”라는 말과 함께 준비해온 금일봉을 그 부인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그 부인은 럼시에게 “우리가 양식이 없어 며칠 굶은 것을 어떻게 알았느냐?”고 물었다. 럼시는 성령의 역사에 의해 선지식 없이 타인의 상황을 알게 되는 지식의 은사와 병고치는 은사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럼시가 한국에서 수행했던 오순절적 선교의 주제는 중생, 신유,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였으며, 의식으로 물침례가 포함되었다. 그 주제들은 “순복음”(Full Gospel)의 요소들이지만, 그녀는 “순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았고, “오순절 신앙”(Pentecostal faith)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그녀는 그의 일본 선교 보고에서 일본에 남성을 위한 오순절적 성경 학교(Pentecostal Bible Training School)가 필요하다고 전했던 적이 있다. 그리고 “진정한 오순절 집회들”(the real Pentecostal meetings)이 다시 열렸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럼시는 한국에서 허홍을 만나 “오순절 신앙을 선교하러 왔다”라고 말했다. 변종호에 따르면, 럼시의 생활과 말을 통해 허홍이 배운 것은 “오순절 신앙이란 방언을 하는 것, 기도하여 병고침을 받는 것,” 즉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와 신유였다. 럼시는 일본 선교 보고에서 “물침례”(Water baptism)을 언급했었는데, 그 “물침례”는 그 방식에 있어서 “살수”(撒水)나 “관수”(灌水)가 아닌 “침수”(浸水)였다. 30년사는 럼시가 세운 서빙고교회는 1934년에 한강뚝섬에서 최초의 “침례식”을 거행했다고 전하며 그 사진을 제시했다. 그 사진에서는 한강물 위에 배가 띄워져 있고 그 위에 목회자와 신도들이 서 있다. 살수나 관수를 했다면 굳이 한강에 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 물침례식은 물을 뿌리거나 붓는 방법에 의한 “세례식”(洗禮式)이 아닌 물에 잠기는 “침수”에 의한 “침례식”(浸禮式)이었다. 오프스테드에 따르면, “거의 매주 주일 오후에는 서빙고 바깥 한강에서 침례식이 있었다. [그 침례식에는] 그 세 명의 목사들[박성산, 배부근, 허홍]이 다 참여했다.
럼시가 한국 오순절교회에 남긴 공헌들 중 가장 큰 것은 그녀가 중요한 인물들을 길러내거나 발굴해 내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성경공부와 동역, 은혜 체험을 통해 허홍이라는 인물을 길러냈다. 그는 최초로 한국인 오순절 교회 목사로 안수받은 사람들 중의 하나였으며, 1956년에는 한국 사람들 중에 최초로 오순절교회 총회장이 되었다. 허홍은 어려서부터 구세군 선교사들과 함께 생활한 관계로 영어를 잘했다. 그래서 럼시와 허홍의 의사소통은 원활했을 것이고, 그는 럼시가 한국어를 못하던 초기에 통역 등으로 그녀가 선교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럼시는 또한 한국 오순절교회에 중요한 인물을 발굴해 내고, 한국에서 오순절적 사역을 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었다. 박성산과 배부근이 존 주르겐센의 사역을 통해 성령침례를 받았다는 소식은 존 주르겐센의 여동생 마리 주르겐센(Marie Juergensen, 1902-1991)이 보낸 편지에 의해 한국에 있던 오순절 선교사들에게 알려졌다. 마리는 그 편지에서 한국의 오순절 선교사들이 박성산과 배부근을 재정적으로 도울 수 있는지를 타진했다. 이에 럼시를 포함한 한국의 오순절 선교사들은 그들을 재정적으로 돕기를 결의하고 그들에게 돈을 보냈다. 럼시는 그것에 머무르지 않고 48세가 되던 1932년에 일본으로 직접 건너가 나고야의 성서신학원을 방문해 존 주르겐센을 만났다. 존과 럼시는 로체스터에 있는 엘림 성경 훈련 학교의 동문이었다. 럼시 선교사는 존 주르겐센과 오순절 신앙을 포교하기 위한 협의를 했다. 이때 럼시는 한국 청년 신학도이며, 나고야 조선 성서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그리고 그해 1월에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은 박성산을 만났다. 럼시는 존 주르겐센에게 박성산을 한국에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럼시는 1932년 5월에 박성산이 귀국하자 그가 서빙고 교회에서 목회하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 그녀는 그 후 박성산과 허홍과 함께 팀을 이루어 선교했다. 럼시가 54세가 되던 1938년 10월에 그녀가 길러낸 허홍과 그가 발굴한 박성산, 그리고 배부근이 럼시의 정동 선교본부에서 한국 오순절 교회 역사에서 최초로 목사안수를 받았다.
럼시가 박성산과 같은 훈련받은 한국인 목회자를 원했던 것에는 그녀의 한국어가 유창하지 않았다는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부의 부의장이었던 도날드 기(Donald Gee)는 1937년 말에 중국, 일본, 그리고 한국을 방문하고, 이 선교지들에 대한 보고를 남겼다. 이 보고에 따르면, 한국에서 사역하고 있던 오순절 선교사들은 간단한 생활어는 말할 수 있었지만, 유창하게 한국어로 설교하거나 가르치지는 못했다.
럼시의 한국인 인재 영입은 목회자에 그치지 않았다. 럼시는 또한 김동업 장로 같은 평신도 지도자를 한국 오순절교회로 합류하게 했다. 그동안 김동업 장로는 박성산에 의해 서빙고교회에 합류한 것으로만 알려져 왔다. 물론 김동업 장로는 박성산과의 친분에 의해 서빙고교회로 왔지만, 럼시와의 친분에 의해서도 서빙고교회와 합류했을 것이다. 김동업은 1902년에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며, 비행사의 꿈을 안고 20대에 일본, 다치카와(立川市)로 갔다. 당시 다치카와에는 일본의 첫 국제 공항이 있었으며, 이것은 다치카와를 일본 항공 산업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김동업은 1925년에 대판[大坂, 오사카]조일신문사 항공부에 들어가면서, 다치카와에 정착했다. 그는 그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2등 비행사 면허와 기관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같은 해 4월에 일본 선교사 디트리지가 다치카와로 와서 다치카와 오순절 교회를 세웠다. 어렸을 때부터 그리스도인이었던 김동업은 그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데, 그 교회는 그 지역에 세워진 유일한 기독교 교회였다. 그는 그 교회에서 카타야마라는 여인을 만나 1930년 여름에 결혼했다. 카타야마는 성령충만하고 음악적 재능이 있던 여인으로서 디트리지가 운영하던 유치원에서 가르치며 디트리지를 도왔다. 럼시는 1927년부터 1930년 초까지 다치카와의 디트리지와 합류했다. 이때 럼시는 김동업과 카타야마를 알게 되었다. 김동업이 1933년 2월에 자신의 비행기로 귀국하여 경성의 조선 비행 학교에서 교관으로 일하기 시작했을 때, 럼시와 김동업 부부와의 친분은 그들이 서빙고 교회에 합류하는 데 큰 이유가 되었다.
럼시는 파슨스의 뒤를 이어, 비록 오프스테드가 임시 포교관리자였지만, 기독교 오순절 교회의 포교관리자가 되고 싶었던 것 같다. 또한 이 상황에서 그 기독교 오순절 교회의 주요 재정 후원자였던 럼시는 교회들로부터 포교관리자로 등록하라는 압력을 받았다. 미국에서 머무는 동안, 럼시는 아마도 총독부에 제출할 목적으로 엘림으로부터 선교사 증서를 받아내었다. 럼시는 어떤 단체에 의해 공식적으로 파송된 선교사는 아니었다고 전해졌다. 디트리지는 럼시를 “독립적인 믿음 선교사(an independent faith missionary”로 규정했다. 1930년도에 발간된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 28권도 럼시에 대해 “Rumsey, Miss Mary, IND”라고 기록했다. 그 자료는 럼시를 “independent,” 즉 독립적인 선교사로 분류한 것이다. 그런데 럼시는 50세가 되던 1934년 12월 14일자로 발행된, 뉴욕, 로체스터 이스트 1025번가에 자리한 엘림 선교회의 선교사 증명서를 받았다.
이것은 뉴욕, 로체스터의 엘림 신앙 본부와 선교회는 종교 기관에 관한 뉴욕 주의 법률에 저촉을 받는 법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선교사들과 기독교 사역자들의 관심 아래서 국내 본부로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증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본국에 있든 해외 선교지에 있든 막론하고, 선교 또는 복음 전도 사역을 위해 우리의 수중에 들어오는 그 어떤 그리고 모든 자금을 기꺼이 제공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선교사로서 또는 사역자로서 추천합니다.
일 년 동안의 휴가를 마친 럼시는 1935년 10월 말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이었던 노르만 H. 바르트는 럼시에게 미국 하나님의 성회와 협력의 길을 모색해보라고 권고했다. 럼시는 그 권고에 따라 미 하나님의 성회에 가입하려고 1939년 초에 선교사지원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선교국장은 1939년 3월 23일에 그 요청에 대해 부정적인 답신을 55세의 럼시에게 보냈다.
개인적으로 선교지에 간 사역자들이 본국으로 돌아와 우리 선교위원회와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선교사 임명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우리 선교국의 관례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자매가 자진해서 본국으로 돌아와 여기 본부를 방문할 수 있고, 그리고 한국에서의 상황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가 다른 사례들에서 해왔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결정을 연기하겠습니다. 노만 바르트(Norman Barth) 형제로부터 그런 추천서를 받아서 기뻤습니다. 그 추천서에서 그는 자매를 우리 선교사들 중 하나로 받아줄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는 그 승인 문제를 당분간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누가 한국에서의 사역 허가를 차지해야만 하는가라는 문제는 논의의 쟁점들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매가 우리 선교위원회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될 때, 이것이 보다 더 이의 없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문서에서 선교국은 럼시에게 직접 미국 선교국을 방문하여 심사를 받을 것을 요청했다. 럼시는 이후 무슨 이유에서인지 미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녀는 미 하나님의 성회 입장에서는 비공식 선교사로 남게 되었다. 아마도 그녀는 한국의 어려운 상황하에서 선교지를 비우지 않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런 미 하나님의 성회 선교국의 럼시의 요청을 거부하는 공문을 받은 럼시는 1939년 4월 18일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퍼킨(Rev. Noel Perkin) 선교국장에게 편지를 또 보냈다. 그 편지는 1939년 5월 12일 미국에 도착했다. 그 편지의 내용에서 럼시가 미 하나님의 성회의 소속 선교사가 되고 싶어 했던 이유를 추정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온 형제들의 [한국] 방문 후, 우리들은 사안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그렇게 하기를 바랬던 것처럼, 우리는 오해와 견해차들을 . . . . 다른 사람들이 와서 사과했으며, 그래서 우리는 친해지고 화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어떤 반대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자매들 중 한 명의 지부장(acting lead)을 중심으로 동일한 지시서(the same paper)에 따라 계속 사역하고 있습니다. 요구를 받은 것처럼, 그리고 제가 목사님께 썼던 것처럼, 우리가 반드시 그래야만 하듯 진정으로 . . . 우리는 같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공식 직분을 가져야 되느냐에 관해서는 아무런 다툼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계속 사역을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럼시가 한국 선교에 있어서 어려웠던 점 가운데 하나는 선교사들 간의 조직과 지도력이었을 것이다. “일본으로부터 온 형제들의 [한국] 방문 후”(After the visit of the brethren from Japan)라는 문구만 보면, 럼시에게 당면했던 문제가 일본 선교사들과의 문제였다고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자매들 중의 한 명이 지부장으로 계속 사역하고 있다”(one of the sisters continues as acting lead)는 구절은 그 문제가 또한 한국에서 사역하던 오순절 여성 사역자들 간의 문제이기도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김익진은 그 지휘체계 문제를 조선에 들어와 있던 오순절적 여성 선교사들 간의 문제로 해석했다. 그러나 그 문제는 그 둘 모두를 포함하고 있던 것이었을 것이다.
럼시는 엘림 선교회 소속만으로는 한국 선교가 수월하지 않다는 것을 겪고 나서 미 하나님의 성회에 소속하기를 희망했을 것이다. 그런 럼시의 희망에 장애는 먼저 일본 선교사들과 자신을 포함한 한국 선교사들 간의 지휘체계 문제였을 것이다. 미 하나님의 성회 입장에서는 일본의 통치를 받고 있던 한국에 독립적인 지위를 부여하기가 어려웠던 것 같다.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 선교국장도 이런 인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한 보고서에서 “일본과 한국은 정치적으로 연합되어 있고, 그래서 일본과 한국은 선교 사역을 위해 한 지역 선교지를 형성한다. 지금 클레멘트 군[영국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은 그런 선교지를 위한 우리의 선교 지부장으로서 손색이 없고, 나는 그런 조정은 아주 유익할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썼다. 또한 앞에서도 살펴 본 것처럼 럼시에게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 선교사로 등록해 보라고 권고하고 미 하나님의 성회에 추천서를 써주었던 노르만 H. 바르트(Norman H. Barth)도 “그 승인 문제를 당분간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했던 것은 도날드 기와 동일한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한 한국의 오순절 선교회의 선교사 수나 교세가 일본 오순절 선교회로부터 독립적인 지부를 형성할 만큼 되지 못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미 하나님의 성회는 럼시를 교단의 공식 선교사로 삼지 않았을 것이다. 미 하나님의 성회는 남성 일본 선교사들(클레멘트와 바르트)을 한국에 보내어 럼시와 대화하게 했고, 그 대화를 통해 럼시의 불만을 해소시켰다. 그 후 럼시는 미 하나님의 성회가 일본 선교사들에게 보내는 “동일한 지시서에 따라”(under the same paper) 활동했다.
두 번째 장애는 한국 선교사들 가운데서 지휘체계 문제였을 것이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한국에 들어온 오순절적 선교사들 가운데서 남성은 전혀 없었고, 모두 여성이었다. 럼시는 엘림 선교회 소속 선교사였고, 팔선과 메르테트는 미국의 스칸디나비아계 “독립 하나님의 성회”(Independent Assemblies of God) 소속 선교사였다. 이렇게 지시하는 곳이 서로 다르니 선교 목표, 절차, 방식도 서로 달랐을 것이다. 럼시는 박성산 허홍과 함께 팀을 이루어 사역했고, 팔선과 메르테트는 배부근과 함께 따로 사역했다는 것은 이것을 시사한다. 그러나 일본으로부터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 남성 사역자들이 방문한 후 럼시를 포함한 여성 선교사들은 갈등을 봉합하고 미 하나님의 성회가 지정한 한 명의 지부장의 지시에 따라 사역하게 되었다. 물론 그 이전에도 럼시와 팔선과 메르테트와 서로 따로 사역했던 허홍과 박성산 그리고 배부근이 함께 한 장소에서 한 날에 목사 안수를 받은 것처럼, 그 여성 선교사들은 연합하여 한국에 오순절 신앙을 전파했다.
이처럼 럼시와 퍼킨스 간의 편지는 1930년대 초기에는 한국의 오순절 선교사들이 각 소속 선교회에 따라 사역했지만, 1930년대 말에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 중심으로 일원화되어 사역하게 되었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는지 그 이전에는 “독립 선교사”(ID)라고 표기했었지만, 1940년의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은 럼시를 “오순절 하나님의 성회”(PA, Pentecostal Assembly of God) 소속 선교사라고 기록했다.
비록 럼시는 미 하나님의 성회의 공식적인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미 하나님의 성회 소속으로 인정되었던 것이다. 럼시의 미국 하나님의 성회와의 접촉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 한국 오순절 교회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런 일원화와 접촉과 각인은 1940년 후반부터 1945년까지 일어났던 태평양 전쟁과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 후 1953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공식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는 데 일조했을 것이다. 또한 선교사들 간의 미 하나님의 성회로의 일원화는 함께 동역했던 박성산이 1951년에 미 하나님의 성회로 편지를 보내 한국 오순절 교회의 사정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게 하는 데 기여했을 것이며, 그와 허홍, 배부근 등 한국 사역자들이 거부감없이 기꺼이 미 하나님의 성회의 선교사들과 함께 사역한 밑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럼시는 1940년에 한국을 떠났다. 1940년 출국설은 한국 하나님의 성회 30년사 편집위원회에 의해 주장되었다.
이 땅에 오순절신앙을 전교하려왔던 1940년 12월 20일 영국 오순절교회 선교사 벳시 메르테트와 미국 오순절교회 선교사 팔선, 럼시 등도 서빙고교회에서 쓸쓸하게 환송예배를 드리고 난 뒤 강제 출국을 당했다.
그 위원회는 1940년 선교사들이 출국한 이유에 대해 썼다. 그 이유는 당시 주한미국총영사 마쉬(O. Gaylord Marsh)가 선교사의 완전 철수를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그 명령에 따라 11월에는 선교사와 그 가족 189명을 비롯한 219명의 미국인들이 마리포사호(SS Mariposa)로 귀국하였다. 럼시가 12월 20일에 출국했다면, 11월에 떠난 마리포사가 아닌 마리포사와 함께 미국과 호주를 오갔던 다른 3척의 태평양 여객선들(몬테레이, 말로, 룰린) 중의 하나를 탔을 것이다.
십 년간의 선교사역 후, 56세의 럼시는 1940년 12월 말에 한국을 떠나 미국 마실론으로 갔다. The Evening Independent라는 미국 오하이오주의 마실론(Massillon, Ohio)의 한 지방 신문은 1941년 2월 14일에 선교사 럼시가 귀국하여 그 지역의 사우스이스트 트레몬트 400번가에 살고 있는 그녀의 아주머니 밀스 부인(Mrs. B. J. Mills)을 방문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신문은 결혼하지 않은 럼시가 한국(Korea)과 중국에서 13년 동안 선교사로 일했다고 썼다. 그리고 그 신문은 럼시가 “두 달 전에” 중일 전쟁 발생으로 인해 철수하게 되었다며, 럼시의 한국 출국 시기와 원인을 제시했다.
메리 럼시 양은 한국과 중국에서 13년 동안 선교사로 일했다. 그런데 두 달 전에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다른 500여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철수했다. 지금은 사우스이스트 트레몬트 400번가에 살고 있는 그녀의 아주머니를 방문하고 있다.
그 기사가 난 1941년 2월로부터 두 달 전(two months ago)이면, 럼시의 한국 출국 시기는 1940년 12월경이 된다. 그 신문의 럼시의 1940년 12월경 한국 출국 시기 언급은 30년사 편찬위원회의 럼시의 1940년 12월 20일 출국 시기 언급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또한 1940년의 상황을 담고 있는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에 실린 조선 선교사 명부는 럼시가 그 해까지 한국에 있었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한다.
그 지방 신문에 따르면, 럼시는 뉴욕을 거쳐 캘리포니아로 가서 사역을 계속할 계획을 세웠었다. 아마도 럼시는 선교를 떠나기 전 준비하기 위해 갔던 캘리포니아 오크랜드의 메리 댄포드의 형제 찰스 E. 로스(Charles E. Ross) 목사를 찾아가 그곳에서 지내면서 다음 사역을 계획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디트리지는 한국에서 미국으로 돌아간 럼시의 건강이 좋지 않다고 전했었다. 아마도 디트리지의 언급처럼 건강 문제 때문에 럼시는 오하이오, 마실론에서 친척을 만난 다음 캘리포니아로 가는 것을 접고 뉴욕주, 리욘(Lyons, New York)으로 가서 그곳에 머물게 되었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시라쿠스에서 일할 때부터 알고 지냈던 럼시의 평생 후원자 메리 로스 댄포드(Mary Ross Danforth)가 한 독립 오순절 교회인 순복음 성회(the Full Gospel Assembly)를 섬기고 있었다. 메리 댄포드는 1927년에 그 교회를 개척하고 1941년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목회했다. 이런 럼시의 리욘 정착 추측은 그녀가 1956년에 허홍에게 보낸 편지에 의해 사실이 된다. 럼시는 미국 뉴욕주 리용(Lyons, NY)의 한 우체국에 1956년 5월 3일 오후 1시에 수납된 편지를 한국에 있는 허홍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 편지 속지에 럼시가 표기한 편지를 쓴 날자는 1956년 4월 5일이었다. 럼시는 그 편지에서 얼마 전에 박성산 목사의 아들로부터 박성산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면서 자기가 받은 충격을 알리고 허홍과 한국 교인들을 위로했다. 그 편지에 기록된 럼시의 주소는 “86 Broad Street, Lyons, N.Y. 였다.”
럼시는 귀국해서도 한국을 잊지 않았다. 글레이디스 M. 파슨스와 함께 한국에 오순절 신앙을 전해주었던 엘프레다 오프스테드(Elfreeda Ofstead)에 따르면, 미스 럼시(Mrs. Rumsey)는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오프스테드를 통해 전쟁 후 어려웠던 한국으로 지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메리 C. 럼시는 1969년 10월 11일 85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VII. 나가는 말
지금까지 알려진 정보를 바탕으로 메리 C. 럼시의 생애를 최대한 재구성해 보았다. 그러나 그녀의 삶에 대한 정보는 그녀의 삶을 특히 한국에서의 사역을 충분히 재구성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메리 C. 럼시는 미국의 뉴욕주, 코틀랜드에서 1884년 2월 20일에 태어나 뉴욕주, 리욘에서 1969년 10월 11일 85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럼시는 외국인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한국에 파송된 후 한국인을 사랑했다. 찬양의 은사가 있던 그녀는 오순절적 성령침례를 받은 후 기도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 초자연적으로 타인의 상태를 알게 되는 지식의 은사를 가졌었고, 손을 얹고 기도하면 병이 낫는 병고치는 은사를 갖고 있었다. 또한 럼시는 타인에게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나누는 봉사의 은사, 나눔의 은사를 가졌었다.
그녀의 어린 시절에 받은 교육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다. 럼시는 1905년부터 1907년까지 루시 엡 하이스 국립 훈련 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후 “여집사”(deaconess)로서 감리교단과 침례교단 산하 기관들에서 일했다. 그녀는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오순절적 성경 학교인 로체스터 성경 훈련 학교에서 오순절적인 훈련을 받으며 한국 선교의 소명을 받았다.
1927년에 일본어 습득을 위해 일본에 먼저 입국하여 1930년 초까지 일본에서 디트리지와 함께 다치카와 지역을 중심으로 사역했다. 1930년 초에 오순절적 엘림 선교회 소속 선교사로서 한국에 입국하여 외국인 거주지였던 정동의 구 시병원 건물에서 기거하며, “엄세”(嚴世)라는 한국 이름과 “기독교 조선 오순절 교회”라는 선교명으로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오순절 신앙” 즉 불신자의 중생과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와 신유를 중심 주제로 삼고 선교했으며, 잠기는 침례를 시행했다. 럼시는 일본의 통치를 받던 한국에서 일본 선교사들과 그리고 한국의 여성 선교사들과의 갈등을 이겨내고 연합하여 활동했으며, 한국 오순절 교회의 중요 인물인 허홍을 길러내고, 일본에 있던 박성산이라는 거목을 발굴해 내어 한국에서 오순절적 사역을 펼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으며, 김동업 장로 등 평신도 지도자들을 발굴하고 길러내었다. 평생 주님과만 결혼했던 메리 C. 럼시는 1930년 초부터 1940년 말까지, 46세에서 56세까지 십 년간의 중장년의 삶을 한국에 오순절적 신앙을 전해주기 위해 바쳤다.
메리 C. 럼시의 연보
1884년 2월 20일 뉴욕주, 코틀랜드에서 탄생
1888년 시라쿠스로 이주, 4세
1905년 루시 엡 하이스 국립 훈련 학교 입학
가게 판매원으로 학비, 생활비 마련, 21세
1907년 졸업, 감리교단 “여집사”로 임명됨, 23세
뉴욕주, 알바니에 있는 엘리자베스 그리핀 집사원에서 사역,
외국인들 사이에서 사역에서 뛰어남
1911년 버몬트 플트니로 이주 침례교단 소속
제일 침례 교회에서 침례교 “여집사”로 사역, 27세
1912년 시라쿠스로 귀환, 감리교단 재소속,
이탈리안 감리교 감독 교회의 목사의 조력자로서 사역,
그 회중의 이민자 자녀들을 돌보는 데 집중,
후원자 메리 로스 댄포드 만남, 28세
1919년 뉴욕주, 로체스터의 로체스터 성경 훈련 학교 입학, 35세
1921년 졸업, 37세
1922년 찬양 사역자로서 메리 로스 댄포드의 선교팀에 합류, 38세
1924년 뉴욕주, 말레가니에서 목사로 사역, 41세
1926년 캘리포니아주, 오크랜드에서 한국 선교 준비
1927년 일본 입국, 일본어 수학, 디트리지와 동경 부근 다치카와 선교, 43세
1928년 엘림 선교회에 선교 보고, 44세
1929년 엘림 선교회에 선교 보고, 존 주르겐센 재혼식 참석, 45세
1930년 한국 입국, 허홍과 동역 시작, 46세
경성 정동 시병원 건물, 외국인 숙소에 “기독교 조선 오순절 교회” 설립
1932년 일본에 있던 박성산 발굴과 영입, 48세
1933년 서빙고교회 창립, 49세
1934년 서빙고교회 첫 침례식 거행, 50세
1934년 가을 -
1935년 가을 휴가차 미국 귀국, 엘림선교회 선교사증서 받음, 51세
1938년 정동 선교회 본부에서 허홍, 박성산 목사안수 받음, 54세
1939년 미 하나님의 성회에 선교사 신청서 제출, 거부당함, 55세
1940년 12월 20일 미국으로 귀국, 56세
1941년 미국 오하이오주 마실론을 거쳐 뉴욕주 리욘에 정착,
메리 로스 댄포드와 거주, 57세
1969년 10월 11일, 소천, 85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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