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승
2022년 5월 29일/2024.03.17.
순복음총회신학교 조교수
I. 들어가는 말
II. 탄생과 성장: 뜨거운 제임스 E. 아담스와의 만남
III. 우보면의 청년: 사회주의 접촉
IV. 일본 유학: 마르크스주의 수용
V. 대전환: 불타는 존 주르겐센과 메리 럼시와의 만남
VI. 분열된 정신과 삶: 박성산과 박진환 사이에서
VII. 대환란: 불가능한 공존의 파국과 선택, 소천
VIII. 나가는 말
부록: 박성산 목사 연보
참고문헌
I. 들어가는 말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창립 30주년을 맞아 1996년에 기념 책을 발간하며 박성산(朴聖山) 목사를 요약하여 평했다. 그 책에 따르면 박성산은 “성령세례의 표적은 방언이며 바람직한 기독신앙은 사회참여라고 주장했다.” 그런 그에 대해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박성산은 기독교 신앙은 사회 구원 없이는 온전해질 수 없다고 믿었다. 자신의 삶을 한국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한 한 사역자로 헌신하면서도, 그는 사회적 변화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표명했고, 생각하기에 불의를 개선하는 일에 참여했다. 평소에 그는 가난한 자들의 탄원을 듣고 함께 기도했다”고 그의 생애를 요약하며 평했다.
또한 순복음문학회는 박성산의 이름을 딴 문학상을 제정했다. 그 문학회는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목회자와 평신도 등단 문학인으로 구성되었다. 순복음문학회는 2001년도에 “박성산 문학상”을 제정했다. 그리고 그 제정의 목적을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의 병렬에 의한 오순절 성령 운동과 문학성을 겸비했던 기하성 교단 창립자 박성산 목사의 뜻”을 기리기 위한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한국기독교성령백주년기념사업회는 박성산을 매우 중요한 인물로 여겼다. 그 기념사업회는 2009년에 평양장대현교회 성령강림 이후 성령 100년 역사의 흐름을 기록한 『한국의 기독교성령백년인물사 2』를 펴냈다. 그 편찬위원회는 박성산 목사를 “한국 최초 오순절 교회 담임목사, 성령세례와 사회참여를 외치며 하나님의 성회 창립을 주도한 목사”로 평가하고 목회자 편에서 맨 처음으로 다루었다.
이렇게 박성산 목사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는 두 가지를 중심으로 내려졌다. 하나는 그가 봉사의 권능을 부여하는 성령침례에는 방언이 성경적 증거로서 동반된다는 전통적인 오순절적인 신앙(Classical Pentecostal faith)을 가졌었으며, 한국 오순절 교회 설립과 발전에 초석을 놓았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의 관심과 활동이 교회에 머무르지 않고 사회로 향하여 사회 개선과 구원을 위한 참여로 이어졌었다는 것이다. 박성산 목사는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 참여”를 함께 시도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온 것이다.
그런데 이런 평가는 그 근거가 되는 역사적인 자료를 제시하지 않았었다. 종래의 일반적인 기록들에서는, 의도적이었는지 혹은 비의도적이었는지 모르지만, 박성산 목사가 추구했다는 “사회 구원” 또는 “사회 개선 참여”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도 2017년에 풀러 세미나리에 제출된 한 박사학위논문은 그것에 대한 국내외의 구체적인 자료들을 제공했다. 그런데 국내에는 그 논문에서 인용된 자료들 이외에 박성산에 대한 자료들이 좀 더 있다. 또한 일반적인 평가처럼 박성산이 “개인 구원”과 “사회 참여”를 아무런 갈등도 없이 자기 정신 안에서 그리고 삶에서 끝까지 병렬 혹은 공존시켰을지 의심스럽다. 그의 정신과 삶의 궤적을 담은 그 자료들은 그 가능성을 부정하고 있다.
본 글은 그 자료들에 입각하여 조금이나마 박성산의 삶의 모습을 좀 더 구체적으로 복원해 보고자 한다. 우주 안의 먼지 한 줌 같은 적디 적은 사료들을 가지고 한 사람을 복원해 본다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모험이다. 본 글이 한국 오순절 교회의 영적 아버지 박성산의 명예를 훼손하거나, 그의 영광을 가리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하지만, 설혹 본 글이 그렇게 하려 한다 해도, 박성산의 신앙과 정신과 삶의 위대함은 결코 손상되지 않고 길이 빛날 것이다.
II. 탄생과 성장: 뜨거운 제임스 E. 아담스와의 만남
박성산(朴聖山)은 1908년 1월 20일, 경상북도 군위군 우보면, 선곡리(慶北 軍威郡 友保面 仙谷里)에서 태어났다. 군위군은 동대구에서 북으로 34km 지점에 있다. 우보면은 군위군의 중앙 부분에 자리하고 있다. 우보(友保)라는 명칭은 조선 시대에 “이우보인(以友補仁)”의 우애로써 인(仁)을 서로 돕는다는 뜻과 보(保)의 오래 보전시키자는 의미로 사용하게 되었다. 선곡리(仙谷里)는 의흥군에서 군위군으로 편입되었다.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의흥군이 의흥면으로 개편되어 군위군에 속하게 될 때 선동, 원계동 일부와 의성군 산운면의 개일동 일부를 병합하여 선동과 개일의 이름을 따서 선곡동이라 일컬었으며, 신선이 살았던 마을이라 하여 선동(仙洞)이라 불렀다. 당시, 선곡동은 전형적인 두메산골 동네로서 삼십 오호(戶) 정도가 모여 사는 씨족(氏族) 마을이었다.
그런데 “박성산”은 그가 태어날 때 받은 이름이 아니었다. 그의 본명은 “박진환(朴珍煥)”이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감추어져 드러나지 않았던 사실이다. 장남으로 태어난 박진환에게는 세 명의 자매들이 있었다. 아버지 박동희는 장로교 초창기 조사(전도사)였으며, 어머니 신영복도 장로교 집사였다. 아버지 박동희 조사는 장로교 초창기 선교사 제임스 E. 아담스(James E. Adams)의 영향 아래서 세워진 고향마을 선곡교회에 박성산을 데리고 다녔다. 구미지산교회 이규목 원로목사에 의하면 박동희는 조사로서 1904년에 세워진 선곡교회를 섬겼다. 선곡동 주민이었던 박수일에 의하면, 그 당시 선곡동 골짜기에 선곡교회가 있었다.선곡교회는 조선총독부에 의해 우보면 나호리의 나호교회와 강제로 합병되었다가, 그 후 선곡 2구, 선동길의 작은 산 넘어, 선곡 3구 사답길 가에 다시 세워졌다. 현 선곡교회의 담임목사인 홍경수에 의하면 선곡교회는 조선총독부가 중일전쟁이 격화되면서 1개 면 1개 교회 정책을 강요함에 따라 1938년에 군위면 소재지였던 나호동의 나호교회와 통폐합되었다. 그러다가 해방 후 선곡교회는 1946년에 나호교회로부터 분립하여 이석영 장로 가정에서 다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사답에 교회를 건립했다. 박진환의 가정뿐만 아니라 친척들도 거의 믿음의 가정을 이루었다. 그의 가정은 비록 가난했지만, 믿음으로 연합되어 불화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렇게 박진환은 유년 시절을 아담스의 영향 하에서 기독교 신앙에 젖어 보냈다.
30년사 편찬위원회는 박진환이 “고향 군위군 우보면 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고 썼다. 그런데 그가 20세가 되던 1928년까지도 우보면에는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지 않았었다. 『中外日報』는 1928년 3월 26일자 2면에 “보교설립허가: 구년간계속기망, 면민은 대회를 열고 항의, 맹랑한 군위군 당국”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그 기사에 따르면, 군위군 우보면 주민들은 공립보통학교를 설립하려고 대정(大正) 구 년인 1920년도에 기성회를 조직했다. 그리고 현금 일만 원의 기본금을 모아놓고 군당국과 투자 교섭을 시작했다. 그런데 군당국은 곳 설립해준다고 약속을 했으나, 어찌 된 사정인지 돌연히 십일 년도에 효령면에 학교를 설립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교통상 편리한 곳임으로 그곳에 먼저 설립하게 된 것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이 다음에는 꼭 세워준다고 선언했었다. 그런데 1928년도에 이르러서도 평의원 신봉균씨가 있는 산중 적은 면인 고로면에 설립하기로 결정되었다. 즉, 1928년까지도 우보면에는 공립보통학교가 세워지지 않았다. “우보공립보통학교”는 다음 해인 1929년 9월 24일에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동년 11월 15일에 개교했다. 그러므로 박진환은 우보면이 아닌 인근 면의 공립학교나, 혹은 어떤 교회에서 운영하는 보통학교에 다녔을 것이다.
일제는 1911년 제1차 조선교육령을 발표하여 학제를 규정하였는데 이때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은 4년으로 했다. 3.1 운동 후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제2차 조선교육령을 발표, 보통학교의 수업연한을 소학교와 같은 6년으로 연장했다. 6세에 입학하면 11세에 졸업하는 것이다. 1908년에 출생한 박진환은 1914년에 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20년에 졸업했을 것이다.
박진환은 미션스쿨인 대구 계성학교에서 공부했다. 1906년, 아담스(James Edward Adams) 선교사는 대남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대구 남문안교회 구내 행랑채 3동을 교실로 삼아 남자학교를 열었다. 그 학교의 현주소는 대구광역시 서구 새방로 171 (상리동 494번지)이다. 원래는 서문시장, 대구동산병원 옆인 중구 대신동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2015년 신건물 이전 공사가 완료됨에 따라 서구 상리동으로 이전했다. 거룩한 빛을 비출 수 있는 학교가 되기를 바라며 교명을 “계성”(啓聖 : 거룩한 시작이란 뜻)으로 정했다. 잠언 1장 7절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니라(寅畏上帝智之本)”라는 말씀으로 설립 정신을 삼았다. 초창기의 교과목은 성경과 한문 등이었으나, 점차 화학, 물리, 지리, 상업, 어학, 수학, 역사 등으로 다양해졌다. 계성학교는 예배와 교육과정을 통해 아담스가 염원한 대로, 대구와 경북지역의 개화와 민족운동의 요람으로 자라났다. 1911년에 제1회 졸업생 12명을 배출했다. 1919년 교사와 학생들을 중심으로 항일 독립운동인 3.1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일제에 의해 잠시 폐쇄되었다가 해방 후 재개교되었다.
박진환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계성학교 설립자 제임스 아담스(James E. Adams), 한국명 “안의와”(安義窩) 선교사는 1867년 5월 2일 미국 인디애나(Indiana)주 맥코이(McCoy)에서 태어나, 1888년 캔사스주(Kansas) 토페카(Topeka)의 워쉬번 대학(Washburn College)을 졸업했다. 그 후 1년간 존 홉킨스 대학(John Hopkins University)에서 수학하고 매코믹(McCormick) 신학교에 들어가 1894년 졸업했다. 당시 맥코믹 신학교는 초기 한국 장로교 형성과정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학교였다. 이 학교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입장을 지녔었고, 무디 부흥운동의 영향을 받아 부흥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또한 무디의 영향 하에 형성되어 19세기 말부터 세계 선교를 주도하는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한 “학생선교자원 운동”(Student Volunteer Movement)의 영향을 어느 학교보다도 더 강하게 받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맥코믹 신학교 출신들은 한국 장로교가 선교의 기초를 다지는 1890년부터 1900년까지 10여 년 동안 한국 장로교 형성과 발전을 주도해왔을 뿐 아니라 한국 장로교 신학을 형성하는 데 많은 영향을 주기도 했다.
아담스는 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고,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로부터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어, 28세인 1895년 5월 29일 가족들과 함께 부산에 도착하여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배위량 선교사로부터 대구 선교를 인계받은 후 즉시 대구에 부임하지 않고 부산에서 한국어를 습득하고 선교사 실습을 했다. 그리고 1년 후인 1897년 11월 1일 대구에 도착했다. 아담스는 대구에 도착하자 곧 거리와 시장에 나가서 노방전도를 하고 쪽 복음을 팔고 사랑방에서 오순도순 모여 앉아 복음을 전했다.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조사 김재수와 함께 대구 근교를 두루 다니면서 노방전도를 했고, 장날을 찾아 시장에서 전도서적을 팔았다. 그의 부인 넬리는 아이들을 모아서 찬송을 가르치고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어떤 때는 바쁜 일정과 언어 소통의 약점으로 인해 일일이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전도 책자들을 나누어 주는 방식으로 전도를 하기도 하였다. 복음전도를 하면서 아담스와 당시 선교사들은 당시 사람들이 항상 자연스럽게 모이는 “사랑방”과 “장터”를 가장 효과적인 복음전파의 장으로 파악하여 그곳을 최대한 활용했다. 즉 사랑방과 장터는 교회를 건축하기 이전에 복음전파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장들이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1897년 말 자신과 함께 대구에 온 가족과 어학 선생, 임시 보모 등 7명을 교인으로 남문안 교회(현 대구제일교회)를 창립했다. 이것이 대구, 경북지방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이다. 그 후 교회는 나날이 성장하여 1900년 봄 존슨 의사의 조수 서자명(徐子明)과 정완식(鄭完植), 김덕경(金德卿) 등이 출석하여 세례를 받았고, 이듬해부터 교인이 급증하여 1907년에는 800여 명에 이르게 되었다. 안의와 선교사는 1912년 6월 미국 캔사스주 오구한 신학대학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1923년 병으로 대구를 떠날 때까지 경북 곳곳에서 선교활동을 펴 수많은 교회를 설립했다.
아담스 선교사는 대구 지역을 중심으로 선교사역을 펼쳤지만, 그의 사역은 대구에만 제한되지 않았다. 그는 대구를 중심으로 경산, 영천을 포함하는 동쪽 지역을 광범위하게 순회 전도를 하면서 교회를 개척했다. 30년사에 따르면, 박진환의 부친은 아담스가 세운 고향교회의 전도사로 봉사했다. 그런데, 의흥군이나 군위군에는 아담스가 직접 세운 교회가 없었다. 한 통계에 따르면, 그의 순회전도에 의한 31개의 교회 설립은 주로 경산군, 영천군, 그리고 달성군에 집중되었다. 그러나 선곡교회의 초대장로였던 이석영의 기록과 이규목의 증언에 따르면 선곡교회는 아담스 선교사와 박희조씨에 의해 1904년 4월 3일에 세워졌다. 아담스는 1901년에 사경회를 개최하기 시작했으며, 1903년에는 “남자 조사반”(Helpers’ Class for Men)을 시작했고, 이 반이 후일에는 복음전도자 훈련과정(Training Class of Evangelistic Workers)으로 발전되었고, 또 그다음 1912년 가을에는 남자 성경학원(Men’s Bible Institute)으로 발전되었다. 조사였던 박진환의 부친은 이 조사반이나 성경학원에 다녔을지도 모른다. 아담스는 1923년에 선교사를 은퇴하기 일 년 전에 그의 모든 재산을 다 헌납하여 “아담스 전도 복음 기금”을 만들었다.
아담스의 교육선교에 대한 구상은 그의 1897-98년의 선교보고서에 나타난다.
나는 또한 내가 선교여행을 다닐 수 없는 겨울의 두 달 동안에 학교(school)나 교실(class)을 운영하면 어떨까를 선교부에 제의할 마음이 있다. 내가 구상하는 학교는 단순히 한문만 가르치는 서당과 같은 재래식 초등학교가 아니라 한문은 이미 배운 자로서 세상 학문을 공부할 수 있는 20 - 30명 정도의 청년들을 선발하여 산술, 지리, 역사, 천문학,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이다. 세상 학문을 가르치되 세속학교에서 하는 것처럼 독립적으로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사상 중심의 세상에서 사용될 학문을 교육하는 것이다.
아담스의 이러한 교육에 대한 구상은 1906년의 계성학교 설립을 통하여 구체화 되었다. 1906년을 즈음하여 경상북도에만 각 교회가 경영하는 49개의 보통학교에 433명의 재학생이 있었다. 그리하여 이들 학교에서 졸업하는 기독교 가정의 자녀들의 상급학교로의 진학 문제는 시급한 과제로 대두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대구와 부산 선교지부의 선교사들이 대구에 모여 이 문제를 논의한 결과 기독교 이념으로 가르칠 2차 교육기관을 설립할 때가 왔다는 사실을 공감하고 아담스 선교사에게 대구에서 남자중학교를 설립하도록 위임했다. 이러한 결정에 따라 아담스는 대남학교를 졸업한 27명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1906년 5월 1일 대구 선교지부 내의 제일교회 행랑채를 교사로 삼고 보이즈 아카데미(Boy’s Academy, 계성중학교)를 개교했다. 아카데미(Academy)는 미국식 학제로 초등학교(primary school)를 졸업하고 대학(college)에 입학할 때까지의 중간교육기관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카데미는 한국의 학제로 말한다면 현재의 중 고등학교를 의미하는 것이다. 교명은 “계성”(啓聖)으로 하였는데 그 의미는 “영적인 출발”(Spiritual Beginning) 또는 “거룩한 시작”이다. 이후의 계성중학교의 발전상을 선교부의 자료를 통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906년 5월 1일 보이즈 아카데미가 27명의 등록생으로 조직되었다. 이 학교는 10주 동안 운영되는데 가르침은 아담스와 사이드보탐의 부인들이 담당했다. 1907년 8개월 동안에 48명의 학생들이 등록했다. 그러므로 선교지부는 선교부에 신축교사를 위하여 5,000달러를 청구했는데, 자금의 일부를 수령한 즉시 공사를 시작하여 1908년 가을에 교사를 완성했다. 이 교사에는 5개의 교실과 한 개의 예배실을 가졌다. 학교는 기숙사 건립기금으로 5,000달러를 청구하여 1910에 완성했다. 첫 번째 졸업생은 12명으로 1911년 5월에 졸업했다 [5년 과정]. 이전 가을에 도착한 라이너(Mr. R. O. Reiner)씨가 교장으로 아담스를 승계했다. 과학관이 필요하여 6,000달러의 비용으로 1913년에 건립했는데, 이를 “맥퍼슨 기념과학관”(McPherson Memorial Science Building)이라고 불렀다. 이 해 동안에 실업과(industrial department)를 위해 기부금이 600에서 1,000달러까지 증가했다. 1911년의 보고에 따르면 이 실업과에 소위 “크고 무거운 짐”(a big burden)이라고 불리는 40명의 남학생들이 등록했다. 1923에서 1928까지 이 아카데미의 제 2진 선교사역자인 라이온(W. B. Lyon)이 이 과를 담당하였다. 라이너 선교사는 1915년에 평양으로 이거하였고 아담스가 다시 교장이 되었는데, 현재 교장인 핸드슨(Henderson)이 그를 승계하여 1919년까지 담당했다. 이 아카데미의 학생 수는 대개 100에서 170여 명 수준을 유지했다. 계성학교 교과과정에는 예배와, 성경과목이 있었다. 그러다 태평양전쟁 이후 일제의 탄압이 더욱 심해지면서 1943년 예배와 성경 과목이 폐지당했다.
계성 학생 YMCA가 조직된 것은 1924년 6월이었다. 전교 학생회장이 YMCA회장을 겸하였으며 계성 YMCA는 한때 “지염회”로 불려지기도 했다. 이러한 계성중학교는 1931년까지 154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 중에 17명은 안수받은 목사가 되었고 (박성산 목사는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다), 30명은 조사(Helpers) 또는 전도사(Evangelists), 50명은 교회학교의 교사가 되었다. 즉 계성중학교는 졸업생 10% 이상을 목사로 배출했고 또 전체 졸업생 60% 이상을 평신도 지도자로 배출했다. 이러한 점에서 계성학교는 초창기 영남지방의 기독교 발전에 큰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박진환이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계성학교에 입학했다면, 11세인 1920년에 입학하여 17세인 1925년에 졸업했을 것이다. 당시 계성학교의 수업연한이 5년이었던 것은 계성학교가 1924년에 조선총독부에 제출했던 학칙개정신청서에 명기되어있다. 그 신청서의 학칙 제 5 조는 수업연한을 “五年”으로 규정했다.
그는 1924년에 결성된 계성 학생 YMCA에 가입했을 수도 있다. 아마도 그는 학교 기숙사에서 기거했을 것이다. 이렇게 박진환은 한편으로 어렸을 때부터 고등학생 시절까지 미국의 제2차 대각성운동의 열매인 아담스의 보수적이고 구복음주의적인 중생한 뜨거운 구령 신앙의 영향을 받았으며, 서양식 교육을 받았다. 또한 다른 한편으로 박진환은 1919년에 3.1운동에 참여했던 선배들과 교사들의 애국적이고 민족주의적 정신과 활동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 인문계 중등학교와 고등교육의 확대는 극히 제한적으로 이루어졌다. 1935년까지 인가를 받은 고등보통학교는 남녀 모두 42개교에 불과하여 0.09%의 중등학교 취학률을 보였다. 그런데 계성학교는 그 시기의 관공립 또는 사립 고등보통학교 명단에는 들어있지 않았다. 그러나 계성학교는 1933년 4월 4일에 지정학교로 승격했다. 그렇다 해도 박진환은 일제 강점기에 고등교육을 받은 1%에 해당하는 엘리트 조선인, 애국적 기독교 신앙 청년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III. 우보면의 청년: 사회주의 접촉
30년사에 따르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그는 돈독한 신앙의 밑바탕에서 농촌문제, 사회개발문제, 청소년문제, 금주단연 운동 등에 깊은 관심을 갖고 민족계몽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했다. 그는 일본의 통치 아래 있던 조선의 현실에 직면하게 되었고, 민족주의 사상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몇 해 동안, 대구 등 도시에서의 마땅한 일을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인지, 아니면, 낙후된 고향을 발전시켜보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 박진환은 군위 주변을 벗어나지 않았다. 당시 농민들은 대부분이 문맹인 데다, 일제의 우민화 정책으로 교육을 받을 기회를 거의 갖지 못했다. 드물게 여유 있는 농민의 자녀들이 신식 교육을 받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직업을 갖고자 했고, 농촌에 뿌리를 내리고 농민의식개혁에 투신하려 하지 않았다. 그와 달리 박진환은 군위 지역의 사회 계몽 운동들에 활발하게 참여했다.
그런데 박진환이 참여했던 민족, 사회 계몽운동이란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청년동맹 등의 사회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동아시아에서 “청년”(靑年)이란 근대 이후에 사용되기 시작한 근대적 어휘이다. 일본에서 1880년 YMCA를 “기독교청년회”(基督敎靑年會)로 번역하면서 처음 만들어진 “청년”은 곧이어 중국과 조선에도 도입, 확산되기 시작했다. 조선에서 “청년”은 1897년 감리교회들이 청년회를 조직하면서 처음 사용되었다. 그리고 1907년 이후 애국계몽운동이 크게 활발해지는 가운데 빠른 속도로 확산되고 정착되었다. 일제에 의한 한민족의 말살 정책은 3단계로 나누어 시도되었다. 첫 번째 단계는 무단통치(1910∼1919), 두 번째 단계는 문화통치(1919∼1929), 세 번째 단계는 전략통치(1930∼1945)로 구분할 수 있다. 1920년대 초반, 문화통치시기의 청년운동은 주로 지식인층이 주도하는 문화계몽운동으로서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문화계몽적인 성격을 띤 1920년대 초반의 청년단체는 반일 독립과 근대 사회로의 이행이라는 기치 하에 광범위한 청년층을 조직하고 계몽하는 역할을 했다. 이때까지 청년은 신체적 개념뿐만 아니라 정신적인 개념을 포함했다. 그래서 장년과 노년이 청년회의 간부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국내에는 근대 교육을 받은 학생층을 중심으로 사회주의사상이 수용되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초반의 청년운동은 민족주의적 성격과 사회주의적 성격이 혼재하고 있었다. 그러나 1920년대 중반 이후에는 양자가 분화되었다. 1910년에서 1920년대는 조선에 사회주의가 수용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이 시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는 데, 첫 시기는 다양한 사회주의 사상과 마르크스사상 유입기, 둘째 시기는 마르크스사상에 대한 인식 편차로 인한 논쟁기, 셋째 시기는 마르크스사상 인식 심화와 레닌주의 수용기이다. 1920년대 중반부터가 세 번째 시기였다. 사회주의로 어느 정도 기울어진 급진적 “청년”의 존재는 1922년 10월 조직된 “무산청년회”에서 가장 먼저 확인된다. “무산청년선언문”에 의하면, 이들은 자신들을 “먹지 아니하면 살아갈 수 없스면서 먹으라도 먹을 수 업는 우리 財産 업는 靑年”이라고 정의했다. 이즈음 사회주의적 청년들은 노년들을 부르조와적인 세뇌를 당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규정하고, 계급투쟁의 “전위”(前衛)로서 청년을 자리매김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주종건은 “자본주의적 고도의 착취를 당하고 잇는, 변태적 사회진화의 과정에 잇는” 조선에 있어서 “계급전선(階級戰線)의 전위대(前衛隊)가 될 자는, 無産靑年을 제하고는 다시 잇지 못하다”고 썼다. 그들은 1924년 청년단체의 전국적 대중조직으로 조선청년총동맹(청총)을 결성하였다. 청총의 주도하에 전국 각지의 군에는 청년동맹, 면에는 지부, 리에는 반의 이름으로 청년단체가 조직되었다. 그런데 청년 내부의 계급적 분열에 주목하게 되면서 세대적 주체로서 청년의 전위적 성격이 약화되기 시작했다. 조선청년총동맹의 하부조직으로서 군위청년동맹(軍威 靑年 同盟)이 군위군 내의 5개 청년단체를 통합하여 1927년 8월에 결성되었다. 이 단체의 사회주의성은 그 토론 사항들 가운데 6번째인 “전위(前衛)단체해체 권고”라는 말에서도 드러난다. 그리고 동년 9월에는 군위청년동맹의 집행위원장 유지상(柳志相)이 참석한 가운데 군위청년동맹의 한 지부로서 “우보지회”(友保支會)가 결성되었다. 박진환은 군위청년동맹 우보지회의 집행위원장은 아니었지만,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慶北 軍威에서는 九月 九日 午後 二時에 友保面 梨花洞 朴斗淵氏방에서 軍威 靑年 同盟 友保支會 發會式을 擧行하였는데 臨時議長 朴鳳煥氏의 開會辭를 비롯하야 議事를 進行함에 友의 團體를 代表하야 金汶柱, 柳志相, 柳一諸氏의 祝辭가 잇슨後 朴珍煥氏의 規約通過가 끗나자 다음과 가치 役員選擧를 마치고 午後四時에 無事閉會하엿다더라. 軍威. 一. 執行委員長 朴斗淵, 執行委員 朴致亨, 趙雲 , 朴珍煥, 朴鳳煥, 朴斗基,” “軍威 靑年 同盟 友保支會 發會,” 『東亞日報』 (召和 二年 九月 十五日, 1927년 9월 15일): 4.
박진환은 청년동맹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선원흥농회”에서도 활동했다. 그의 이름은 1928년 1월에 열린 “선원흥농회 정기총회”(仙源興農會 定期總會)의 개최 소식에서 등장했다. 중외일보에 따르면, 군위군 우보면 선곡동에서 1928년 1월 6일 선원흥농회의 4주년 정기총회가 열렸다. 4주년이면, 선원흥농회는 1924년에 창설되었다. 그 총회에서 박진환은 취지를 설명하고 회원을 점명했다. 그리고 그는 선원흥농회의 집행위원들 4명 중 한 명이 되었다. 그 총회는 각부 보고 시간에 “우리의 經濟界가 나날이 破滅됨을 如實히” 말했으며 일반청중은 흥분했다.
당시 농업과 관련된 여러 단체들이 존재했다. 조선총독부는 1920년 어용단체인 “농회”(農會)를 조직했다. 그리고 1925년의 조선미(朝鮮米)증산계획을 계기로 하여 그 필요성을 인정, 1) 농업자의 복리증진 및 농업의 지도 · 장려에 관한 시설의 운영, 2) 농업에 관한 연구조사와 농업에 관한 필요사항의 행정관청에 대한 건의, 3) 농업에 관한 분쟁의 조정과 중재 등을 주요 업무내용으로 규정하는 “조선농회령”을 1926년 1월에 공포했다. 이를 계기로 각 도는 즉시 계통농회 설립에 착수, 동년 6월까지 212개소의 단위총회를 설치하였으며, 동년 10월까지 13개 도농회의 설립을 보았고 다음 해 3월 조선농회가 설립됨으로써 법령에 의한 계통농회 성립의 완성을 보게 되었다. 사회주의적 학자들은 총독부가 계통농회를 관청이 임원 전부를 임명하는 하향식으로 설립하여 “다수의 예속적 소작인을 거느린 지주 중심조직”이 되도록 하였다고 보았다. 즉, 그들은 일제가 유생층의 지주들과 독립운동가들 사이를 끊으려고, 유생층의 지주들 중심, 즉 자본주의적으로 농회를 구성했다고 보았다. 일본인이 경영하는 농장의 사회사업, “흥농회”가 존재하기도 했다. 예컨대 1904년에 설립된 조선흥업주식회사는 전남과 경남 등지에 대규모 농장을 운영하면서 흥농회를 조직하여 소작인의 사회사업 명목으로 소작인 가족 위안회, 육영 및 위생사업, 일본 관광단 시찰 따위를 실시했다.
조선인 스스로 “흥농회”(興農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1921년 10월 2일 정동 명월관에서 조선인들에 의해 흥농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었다. 흥농회의 “취지서”(趣旨書)에 따르면, “우리 반도(半島)의 주되는 산업이오 또한 우리 민중최대다수자의 생업인 농사문제의 해결은 그 가장 급한 자의 일임이 사실”이었다. 또한 “농촌문제의 해결은 곳 문화운동 현하 조선의 사회문제 노동문제는 농촌문제를 이(離)하야서는 차(此)를 논의할 사실적 가치가 태무(殆無)하다.” 그래서 뜻있는 조선인들에 의해 농촌문제의 해결을 위해 흥농회가 발기되었다. 발기규정 제 3조에 의하면, 발기인은 일시금 백 원 이상을 납부하는 자였다. 발기규정 제 4조에 따르면, 흥농회의 사업들은 “농사에 관한 연구 및 조사, 농사에 관한 특수사항에 대해 전문가에게 연구 또는 조사 의뢰, 보조, 농사에 관한 학술 강연 또는 순회강화 및 강습회 개최, 잡지발행, 농사에 관한 국내외 도서 및 자료 수집 등이었다. 동아일보는 1922년 1월 9일에 종로 청년회관에서 열린 “조선흥농회”(朝鮮興農會)의 발회식 소식을 알렸다. 흥농회의 발기인은 삼십여 명이었고, 총 오천원의 자본금이 마련되었다. 흥농회는 “먼저 농업에 관한 잡지를 발행하고, 차후로 각 디방에 지부를 설치하야 농민의 지도와 농업개량을 도모할” 계획을 세웠다.
조선흥농회의 발기인들은 민족주의, 친일(지방 행정관료), 사회주의 등 다양한 경향을 보였다. 경영인이며 언론인 김성수(金性洙)는 1919년 3·1운동 초기 계획에 참여했다. 그해 10월 경성방직 설립 인가를 받았다. 동아일보 설립을 주도해서 1920년 7월 동아일보 사장이 되었다. 1921년 7월 조선인산업대회 발기총회 위원으로 선출되었고 그해 9월 동아일보가 주식회사로 전환되며 취재역으로 활동했다. 1922년 11월부터 동아일보를 통해 물산장려운동을 폈다. 1923년 3월 조선민립대학 설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조선민립대학기성회 회금(會金)보관위원으로 위촉되었다. 소설 상록수의 저자 최용신(崔容信)의 아버지인 최창희는 민족주의자로 1920년 미의원한국방문단에 한국독립의지를 전하다가 연행되었으며(원산독립사건), 석방 후 교사로 재직하면서 흥농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덕원청년회, 덕원청년동맹 임원과 중도 좌파와 우파가 1925년에 통합한 독립운동 단체인 신간회 덕원지회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이곳을 대표하는 민족해방운동가이자 실천적인 지도자였다. 거창 출신의 정연기(鄭然基)는 행정관료였다. 1914년 7월 도쿄 제국 대학 농과 대학 임학과를 졸업했다. 1915년 4월 조선 총독부 농상공부 산림과 고원으로 들어가 1918년 6월 기수에 임명되었다. 1919년 11월부터 임야 조사 위원회 통역생을 겸임했다. 1921년 10월 흥농회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3년 5월 충청남도 논산군속으로 이전, 이듬해 2월 고등관 8등의 군수로 승진해 강원도 삼척 군수에 임명되었다. 장덕수(張德秀)는 동아일보 부사장이었으며, 사회주의적 언론인이었다. 그는 1921년 1월 김명식, 오상근 등과 함께 조선청년회연합회를 중앙에서 지도할 목적으로 서울청년회를 결성했었다. 일부 연구들에서는 조선 청년회 연합회, 조선노동공체회, 흥농회, 세계협회 등과 같은 단체에서 전개되는 그의 활동을 동아일보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파악하기 보다는 사회혁명당 활동과 같은 사회주의운동의 맥락에서 파악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사회주의적 청년, 사상단체 가운데서 농민운동과 결합한 경우는 대구, 안동, 예천, 영주, 문경, 상주, 김천, 청도, 군위 등 9개 군에서 발생했다. 군위군에는 “효령소작인회”가 효령청년회 주도하에 1926년에 설립되어 지세불납과 소작조건개선을 요구의 활동을 했다. 농민운동이 발생한 지역에서는 청년회나 노동공제회 혹은 사상운동단체들이 소작조합이나 농민조합의 결성을 주도하였고, 그 구성원들이 농민조직의 지도자가 되어 농민계몽이나 소작쟁의를 주도하거나 혹은 외부에서 지도 내지 지원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박진환이 소속했던 선원흥농회는 “조선 흥농회”의 지부였을 수도 있고, 사회주의 청년농민운동 단체의 지부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선원흥농회가 “우리의 經濟界가 나날이 破滅됨을 如實히” 말하여 일반청중을 흥분케 했다는 것에서 박진환이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던 선원흥농회의 사회주의적 경향을 읽어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진환은 17세가 되는 1925년에 유지혜와 결혼했다. 그녀는 전 군위군 군수의 딸이었다. 그들은 교회에서 만났고, 교회에서 기독교적 결혼식을 올렸다. 그의 장인은 자기 딸을 데려간 가난한 박진환에게 평생을 두고 한을 품었다고 한다. 더구나 불신자였던지 그 장인은 두 사람이 교회에서 만나 교회에서 기독교적인 결혼식을 올린 데 대해 불만이 대단했다고 한다. 그의 결혼에 대한 정보만으로는 그가 어느 교회에 출석했는지를 알 수 없다. 그럼에도 그 정보는 그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청년이 되어 사회주의에 접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여전히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담고 있다. 그는 1928년 3월까지는 조선에 있었다. 그때 그는 우보면 공립보통학교 설립을 위해 결성한 대표단의 삼인의 대표자들 중 하나로 군청에 민원을 제기했다.
IV. 일본 유학: 마르크스주의 수용
스무 살이 된 박진환은 1928년에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그의 유학 목적은 개인의 입신양명이 아닌 “사회 봉사”였다. 그의 정신에서 사회는 개인보다 더 중요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는 사회 봉사를 위해서는 고등학교 교육 수준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대학 수준의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그는 조선의 경성이나 다른 곳에 있는 대학들에 진학하지 않고, 꿈을 더 키워 바다 건너 일본 유학을 택했다. 그는 부인 유지혜 여사를 고향에 두고 단신으로 일본으로 떠났다. 그런데 박진환은 자기가 십팔세에 일본에 왔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20세가 실제 나이이고, 18세는 출생신고에 따른 서류상의 나이였을 것이다. 그의 일본 유학 허가에 그의 장인이 조선에서 군수를 역임했다는 것이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박진환은 도쿄(東京)에 있는 2년제 대학에 들어갔다.
그의 일본 유학은 당시 일본 내 사립학교의 급증과 조선인 유학 자유화의 상황 속에서 성사되었다. 1920년대에 조선으로부터의 일본 유학생이 급증했다. 그런 현상은 3.1운동을 계기로 조선인들의 고등교육에 대한 욕구를 억누르기만 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 이루어진 광범위한 “도일자유화(渡日自由化)” 조치와 연관된다. 복잡한 도일(渡日) 수속의 폐지, 유학생 관리감독을 총독부로부터 민간 동양 협회(東洋協會)로 이관, 도항(渡航) 제한의 폐지, 그리고 일본 내에서의 사립대학의 증설, 일본과 동등 학제로의 변화 등이 이루어지면서 당시 조선에서 사비(私費) 유학생이 급증했다. 일본에 1903년 전문학교령에 의거한 사립대학이 등장했고, 1918년 대학령이 공포되면서 많은 사학들이 1920년과 1922년 사이에 한꺼번에 대학으로 승격, 인가되었다. 이 시기 승격된 사립대학은 게이오의숙대학, 와세다대학, 메이지대학, 호세이대학, 주오대학, 니혼대학, 도지샤대학, 리츠메이칸대학 등등이다. 1922년 제2차 조선교육령에 의거 학제개편이 공포됨으로서 한국에서 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학생이 일본의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의 유학 생활은 어려움에 봉착했다. 경제적 어려움이 가장 컸을 것이다. 미혼도 아니고 가족을 조선에 두고 온 유학생 박진환에게 누구 하나 도움을 베풀어준 사람이 없었다. 그는 사면초가의 절망감에 빠졌다. 스스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서 해결하며 “고학”(苦學)하던 박진환은 더 버티지 못하고 1년 후 휴학을 해야만 했다. 배가 고파 입에 풀칠하기 위해서 신문팔이를 시작했고, 상점 점원으로 일했고, 서생 노릇도 하며 삶을 이어 나갔다. 그 어려움에 더하여 사상적 환경도 혼란스러웠다. 당시 유학생들은 도일(渡日)과 동시에 눈 앞에 펼쳐지는 다양한 정치 사상적 단체⋅조직들, 나날이 끊이지 않는 시위와 연설들, 20년대 중반을 기점으로 좌익화되고 분열된 유학생조직단체들을 경험했다. 그런 고단한 삶과 혼란스런 환경 속에서 박진환은 “불평불만”(不平不滿)을 품게 되었고, 부르조아를 타도하고 프로레타리아의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마르쿠스주의”(マルクス主意)를 더 깊이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본의 제국주의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체제를 전복시키는 것을 최종 목표로 삼았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운동에 참여했다. 그는 한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고 있으면서 그 마르크스주의 운동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다가 곧 일본 경찰(警察)의 감시 대상이 되었다.
마르크스주의를 추구하던 “신문기자”(新聞記者) 박진환은 1929년 즈음에 도쿄에서 나고야(名古屋)로 갔다. 그의 나고야 행은 노동운동과 관련된 것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일본 노동운동가들은 1928년 6월에 “전협”(日本労働組合全国協議会)을 결성하고, 중부지방협의회(이하, 중부지협)는 본부를 나고야(名古屋) 시에 두었다. 그 지지 노조들에는 우파나 중도파 노조들과 함께 나고야금속노조, 중부합동노조, 나고야목재노조 등의 좌파 노조들이 있었다. 나고야시의 1928년 조선인 노동자에 관한 조사(朝鮮人労働者に関 する調査)에 의하면 시내의 동구, 서구, 중구, 남구에 거주하는 932명에 대해 조사한 결과 43%(398명)가 토목건축 노동자이었고, 31%(292명)가 건축 보조 및 하역꾼, 기타 20%(187명)가 실업 중이거나 불특정 직업이었다. 거주 조선인의 대부분이 비숙련의 임시직 노동자였다. 1929년 2월 1일에는 회원 43명의 참석 하에 신간회 나고야 지회가 창립되었고, 동년 10월에는 “나고야 조선노동조합”이 결성되었다. 1930년의 일본 경제는 미국발 세계공황의 여파로 더욱 심각한 불황에 빠졌다. 1920년대에는 비록 비숙련 단순 직종이라 하더라도 도일하여 나고야에 거주한 조선인들이 상기와 같은 업종에서 일하고 있었지만, 30년에 시작한 심각한 불황으로 공장 직공은 일용직으로 추락하고, 일용직은 더욱 심하게 몸으로 부딪히는 구직 경쟁 속에 처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30년 5월 1일 나고야 시에서도 메이데이(노동절) 행사가 거행되었다. 이날의 행사에는 “전협”계 노조와 신노농당계 노조, 사회대중당계 노조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참가한 아이치 조선노조, 신간회 나고야지회에 소속된 조선인들도 포함한 총 3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실업반대”라는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였는데, 전체 참가자의 3분의 2가 조선인들이었다. 박진환은 조선인들 사이의 노동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1929년에 나고야에 간 것 같다.
V. 대전환: 불타는 존 주르겐센과 메리 럼시와의 만남
나고야에서 기자로 일하던 마르크스주의자 박성산은 1930년 5월 노동절의 행진이 있기 한 달 전인 4월 10일에 특별한 전도집회에 참석했다. 그 이유는 그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 집회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고, 그 집회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대항하는 사람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에 위협을 느낀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유산자들을 노동자들의 계급투쟁으로 멸하는 일에 가장 큰 위협이 되는 그 집회를 방해하기 위해 그 집회에 갔을 것이다.
다음 날 저녁에, 그는 어찌 된 일인지 그 집회를 방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존 W. 주르겐센(John W. Juergensen)이 이끌고 있던 “일본성서교회”(日本聖書敎會)의 선교단을 찾아들어 갔다. 그리고 존 주르겐센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 다음 날, 박진환은 일본 성서 교회에서 열린 한 특별 부흥 집회에 참석했으며, 그들의 설득에 힘입어 회심했다. 이 회심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가 존 주르겐센의 집회 방해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 회심은 마르크스주의로부터 아담스의 영향 하에서 이식받은 보수적인 기독교 신앙으로의 복귀를 의미했을 수 있다. 또한 모태 신앙인으로서 미션스쿨에서 채플과 성경 과목을 통해 교육받고 교회에 출석하며 지적으로 찬동하는 것에 그쳤던 그가 그때 진정으로 거듭나는 회심에 이르렀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점점 더 마르크스주의에 깊이 빠져들어 가던 그를 하루아침에 대전환시켰으니 존 주르겐센의 영적 영향력은 참으로 불같은 것이었다. 회심한 박진환은 기독교 사역자로서 “이천삼백만”(二千三百萬)의 조선인 복음화에 헌신하기로 결심하고, 1930년 5월에 주르겐센 밑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그의 삶의 목적은 마르크스적 “사회 봉사”에서 조선인 복음화로 바뀌었다.
30년사는 존 주르겐센의 집회를 방해하러 갔었다는 박진환 자신의 말과는 사뭇 다른, 감동적이고 심리적인 묘사를 제공한다.
어느 날 길을 지나가다가 열심히 노방에서 전도하고 있는 청년과 맞부딪혔다. 박성산은 한참 동안 그 청년의 전도를 엿듣다가 마음에 새로운 감동을 받았다. “예수를 믿으려면 저렇게 뜨겁게 믿어야지! 나는 고작해야 겉치레 신앙이었지 않은가?” 박성산은 노방전도하는 청년에게 감화를 받아 청년의 뒤를 따라갔다. 그 청년이 박성산을 인도한 곳은 일본 오순절교회였고 그 교회 내에는 성서신학원이 있었다.
박진환은 존 주르겐센과 가네자키 츠토무 전도사(兼崎勉二 伝道師)의 지도로 신앙을 강화하며 신학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한 일본인에 따르면, 박진환은 “강건한 정신을 가지고 열심히 성경을 연구했다. 특히 우리가 믿는 성령의 교리에 대해서는 자고 먹는 것을 잊어버릴 정도로 공부했다.” 즉, 박진환은 그 신학원에서 성령침례에 증거로서 방언이 동반된다는 오순절 신학을 중점적으로 공부했다. 박진환은 존 주르겐센의 사역을 통해 아담스를 통해 형성되었던 뜨거운 구령, 부흥운동의 심장을 회복했고, 그에 더하여 그 심장을 더 박동치게 하여 행동에 나설 수밖에 없게 하는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의 성령침례의 불을 연구했다.
아담스, 마르크스에 이어 박진환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던 존 주르겐센은 1893년 5월 3일에 독일, 플렌스브르그(Flensburg)에서 태어나, 1897년 3월에 부모들과 함께 미국으로 이주했다. 그의 아버지 칼 주르겐센(Carl. F. Juergensen)과 어머니, 그리고 두 자매들이 일본 선교사로 출발할 당시 불신자였던 존 주르겐센은 반대했으며, 미국에 홀로 남았다. 그의 부모는 아들의 구원을 놓고 기도했으며, 그 기도는 응답을 받았다. 존 주르겐센은 뉴욕으로 가 대학에서 엔지니어링을 공부하면서 동시에 로체스터(Rochester)에 있는 오순절적인 엘림 성경 훈련 학교(Elim Bible Training School)에서도 오순절 신학을 공부했다. 그는 1919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선교사가 되었으며 일본으로 파송되었다. 존 주르겐센은 뜨거움을 넘어서서 불타는 오순절적 선교사였다. 그는 “성령 침례를 강조하는 시끄러운 오순절적 예배 스타일”(a Pentecostal worship style, the noisy, loud services with their emphasis on the experience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을 일본에 이식시키려 노력했다.
존 주르겐센의 일본 선교의 가장 큰 일본인 열매는 유미야마 키요마(弓山 喜代馬, ゆみやま きよま, Kiyoma Yumiyama)였다. 유미야마는 1922년경에 도쿄의 혼고 지역 후지마에 있는 오순절 교회(Pentecostal church)에 출석했는데, 존 주르겐센이 그곳에서 목회하고 있었다. 유미야마는 존과 그의 아내 에스더가 이끄는 오순절 성경 공부(Pentecostal Bible study)에 참석했으며, 방언을 말하는 오순절적 성령침례를 경험했다.
나는 그 선교사 부부, 그리고 다른 일곱 명과 함께 기도하고, 예배드렸으며, 그 성경학교를 열었고, 다른 여러 가지 일들을 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내 안으로 하늘로부터 큰 파도가 밀려 들어왔고, 이것은 지금 우리가 성령으로 채움 받는 것(the filling of the Holy Spirit)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친히 나를 채우셨고,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자유롭게 기도하고, 말하고, 예배하고, 울고, 웃고, 그리고 뒹굴도록 하시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였다.
유미야마는 1949년에 “일본 어셈블리즈 오브 가드 교단”(日本アッセンブリーズ・オブ・ゴッド教団)을 설립하고 1973년까지 총회장을 역임했다. 그리고 그는 1950년에서 1992년까지 도쿄에 있는 중앙성경학교(Central Bible Institute)의 교장이었다.
존 주르겐센은 1928년에 나고야로 사역지를 옮겼다. 1929년 4월에 존은 『後の 雨』(늦은 비)라는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으며, 성경학교를 열었다. 그 후 존은 1938년 11월 11일에 급성폐렴으로 일본에서 소천했다. 하나님은 미국에 있던 불타는 오순절주의자 존 주르겐센과 조선에 있던 박진환을 일본 나고야로 불러 만나게 하셨다. 박진환은 존 주르겐센에게서 “성령 침례를 강조하는 시끄러운 오순절적 스타일”을, 불타는 오순절 신학과 신앙을 전수받았을 것이다.
박진환은 1930년 8월에 존 주르겐센이 펴내고 있던 『後の 雨』(늦은 비)에 “하나님의 위대한 권력과 무한한 사랑과 섭리”(神の 偉大なる 勸力と 無限なる 愛と 摂理)라는 신앙 간증문을 발표했다. 그는 그 글을 “나는 조선 경상북도의 한 작은 촌에서 태어난 20세의 청년입니다”라는 말로 시작했다. 20세는 호적상의 나이이고, 실제 나이는 22세였을 것이다. 박진환은 사회주의에 접한 자기를 식민지 조선에서 이끌어 내셔서 일본 동경으로 부르시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어 등졌던 자기를 나고야로 데려가시고 그곳에서 독일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미국에서 일본 나고야로 오게 하신 존 주르겐센을 만나게 하시고 자기를 돌이키게 하신 하나님의 위대한 권력과 무한한 사랑과 섭리에 감격하여 그 글을 썼다.
1930년 12월에 성령께서 도쿄에 있는 유미야마의 교회에 강력하게 임하셨을 때, 박성산은 유미야마와 소식을 주고받았다. 후에 박진환은 도쿄에 가서 유미야마가 운영하던 “滝野川 聖靈神學院”(Takinogawa Holy Spirit Theological Institute)에서 배부근과 함께 두 주 동안 공부하기도 했다. 성령신학원은 전에 존 주르겐센에 의해 세워졌으며, 유미야마는 1930년 가을에 야간 반을 재개설했고, 1931년 1월에 주간 반을 재개설했다.
1931년 1월 즈음에 박진환은 자신의 이름을 “聖山”으로 바꾸었다. 박성산의 여동생 박정숙은 1998년 2월 18일 김익진과의 국제통화를 통해 박성산이 “일본의 한 산에서 기도할 때 이 이름을 받았다”고 전했다. 박성산은 곧 복음 전도에 열심을 내었다. 특히 나고야에 거주하던 13,000명의 조선인들 가운데서 더욱 그랬다. 그리고 그는 1931년 1월에 존 주르겐센의 성서교회의 한 지교회로서 “나고야 조선 성서교회”(名古屋 朝鮮 聖書 教会, Nagoya Korean Japan Bible Church)를 개척했다. 박성산은 담임 교역자가 되었고, 약 이십여 명의 교인들을 위해 주일에는 두 번 집회를 인도했고, 수요일에는 한 번 집회를 인도했다.
박성산은 배부근과 함께 1932년 봄에 방언을 그 증거로 동반하는 오순절적 성령 침례를 받았다. 존 주르겐센은 미 하나님의 성회의 기관지인 Petecostal Evangel에 박성산이 나고야에서 사도행전 2장과 같이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적 성령침례를 받았다고 전했다. 1932년 봄에 도쿄에서는 일본 모든 곳의 선교지부 사람들이 본부 교회에 모여 연합집회를 열고 있었다. 그 집회는 미국에서 열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적 축제”(Spiritual Feast from the Lord)와 같은 것이었다. 나고야에 존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도쿄의 그들과 합류하기를 원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나고야에 머물도록 인도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다음에 세운 차선책은 한 특별 강사를 모시고 나고야에서 어떤 특별한 집회들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몇 이름난 일본 사역자들에게 편지를 썼지만 몇 명만 올 의사를 표명했다. 이것은 그들을 낙담시켰다. 그렇지만 그들 중에서 한 신실하고 열성적이고 작은 사역자가 말했다. “하나님은 도쿄에만 계시는 게 아닙니다. 또한 유명한 사람들과만 함께 하시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특별집회들을 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기를 기대합시다.” 아침에는 하나님의 보다 심오한 일들을 기다렸으며, 저녁에는 전도 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거리로 나가 행진하며 찬양하고 연극을 하여 사람들이 집회에 오도록 청했다. 그러나 단 몇 명만이 그들의 환락을 떠나서 복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아침 집회들마다 주님께서 하늘의 창들을 여시고, 그들에게 그분의 복들을 놀랍게 쏟아부으셨다.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침례를 너무도 갈망했고, 그래서 그들은 오전 열 한 시부터 저녁 다섯 시나 여섯 시까지 기도했다. 그들은 성령침례를 거의 받는 듯 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났을 때 아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했다. 그 사역자는 말했다. “우리는 이 능력이 없이는 우리의 삶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 권능 없이는 우리는 효과적인 전도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금식과 기도를 위해 일주일에 하루를 성별합시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위해 각 주간의 월요일을 성별했다. 그리고 그 일본인 사역자는 하루 종일 기도한 후 영광스런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사역자 박성산과 사역자가 될 배부근(裵富根)이 사도행전 2장 4절에 따라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 존 주르겐센은 그때 성령침례를 받은 조선인 두 명 중에 한 사람은 “사역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사역자가 될 사람”(the Korean worker and prospective Korean worker)이라고만 기록했다. “사역자”는 나고야 조선 성서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박성산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사역자가 될 사람”은, 30년 사의 기록과 비교하면, 박성산의 1년 후배인 배부근이었다.
박성산이 교역자가 되기 위한 과정을 마무리하고 있을 때 조선에서 온 메리 C. 럼시(Mary C. Rumsey) 선교사가 나고야의 성서신학원을 방문해 존 주르겐센을 만났다. 존과 럼시는 로체스터에 있는 엘림 성경 훈련 학교의 동문이어서 서로 친밀감이 있고 말이 잘 통했을 것이다. 사실 그들은 이미 잘 아는 사이였다. 럼시는 1927년부터 1930년 초까지 일본에 있으면서 존 주르겐센을 알게 되었고, 1929년에 열렸던 그의 재혼식에도 참석했었다. 1930년 봄에 조선으로 갔던 럼시는 1932년에 잠시 일본에 왔던 것이다. 럼시 선교사는 존 주르겐센과 오순절 신앙을 포교하기 위한 협의를 했다. 이때 조선 청년 신학도 박성산은 럼시 선교사를 만났다. 럼시 선교사는 존 주르겐센에게 박성산을 조선에 보내달라고 간청했다. 소정의 신학과정이 끝나자 존 주르겐센 원장은 박성산에게 축복기도를 해주고 “당신의 나라이니 당신이 가야하오!”하면서 한국에 오순절 신앙을 전교토록 사명을 줘서 내보냈다. 박성산은 1932년 5월 31일에 “용사로써 출발할 때에 신자와 교인 또한 J W 선생 부부에게서까지도 전송을 받으며, 승리 중에 [야마구치현에 있는 항구로 부산을 이어주는 부관연락선이 기항하던] 시모노세끼(下関市)로 향했다.” 24세 청년 박성산은 회복된 아담스를 통해 받은 대각성운동적 구령의 열정과 존 주르겐센을 통해 받은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로 인한 불같이 타오르는 권능으로 충만하여 조선으로 향했던 것이다.
한국 오순절주의의 역사에서 첫 한국 오순절 성회인 일본 나고야 조선 성서 교회를 개척했던 박성산은 한국 본토의 첫 오순절 성회인 서빙고 오순절 교회를 담임하기 시작했다. 박성산은 럼시, 허홍과 팀을 이뤄 이 땅에 오순절 신앙을 전교하기 시작했다. 박성산은 이즈음 고향에 있는 가족들을 불렀다. 그가 장손이기 때문에 가족을 분양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족들이 올라오자 박성산은 생활에 궁핍에 다시 찌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부인 유지혜 여사는 박성산이 가정에 신경을 쓰는 것을 원치 않았다. 다만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데 만 전력투구할 것”을 독려했다.
불타는 박성산의 오순절 신앙은 신도들도 불타게 했다. 이혜열이라는 여신도가 있었다. 이 자매는 이화여전에 다니던 당시의 엘리트였으며 사대부집 외동녀였는데 그의 부모는 “우리 딸이 교회를 나가더니 한밤중에 요상스런 헛소리를 하게 됐다”며 교회를 가지 못하도록 종용했다. “한밤중에 요상스런 헛소리”란 방언기도를 지칭하는 것이었다. “딸아이를 버렸다”고 집안에 감금까지 불사했으나 이혜열이 끝끝내 굽히지 않자 그의 부모들은 “엿새 동안 학교에 가고 일요일에는 또 교회를 가니 사대부집 외동녀가 떠돌이가 되어서는 안된다”며 “학교를 그만두든지 교회를 그만두든지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최후통첩을 하자 이 열성신도 이혜열은 이화여자 전문학교를 그만두고 교회 봉사에 전력했다. 이혜열은 그 후 원산 윌슨신학교를 졸업하고 송창근 박사의 며느리가 됐다.
럼시, 허홍 등 동역자들은 있었지만 진정 몸과 마음을 함께 교회 부흥을 위해 뛰어줄 사람이 있어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된 박성산은 일본 나고야 시절 때 사귄 김동업(金東業) 장로를 교회에 합류하게 했다. 경북 안동군 남후면 출생의 김동업은 비행사였다. 그는 1927년 12월 9일 신용욱, 서웅성 등과 함께 도쿄에서 조선비행가협회를 결성했다. 귀국한 김동업은 1929년 1월 5일 안동의 지역유지들과 청년 사십여 명이 마련한 성대한 귀향 환영 행사에 참석하기도 했다. 그는 1929년 봄 개교한 조선비행학교의 2등 비행사 겸 정비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김익진은 존 주르겐센의 나고야 성서신학원에서 3명의 조선인이 배출되었으며, 그들 중 둘은 목회자였으며, 나머지 한 사람은 장로였다고 전한다. 그의 말의 맞다면, 그 장로는 김동업이었을 것이다. 당시 서빙고는 어촌마을로 기독교에 대한 일반상식도 전혀 없었고 다만 완강한 무지뿐이었다. 어민들은 배타적이어서 복음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여느 날과 다름없이 박성산은 김동업, 유지욱 등 교회 청년들과 북을 치며 노방전도를 하고 있는 데 난데없이 동네 청년이 다가와 “시끄럽다!”고 하며 북을 치고 있는 박성산의 손목을 비틀며 발길질을 했다. 청년은 그 동네의 난봉꾼이었다. 이 사건으로 박성산은 근 2개월 동안 치료해야 하는 고난을 겪었다. 서빙고교회는 장년 1백 명까지 돌파했다.
1933년 9월에 박성산이 목회하고 있던 서빙고교회 주일학생들은 한 고아원에 쌀을 기부했다. 조선중앙일보에 따르면, 홍제원에 있는 조선고아원이 재정난이 심해져서 수용되어 있는 고아들이 어려움에 처해졌다. 그 소식을 들은 오순절교 서빙고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이 그 고아들을 돕기로 작정했다. 그 주일학교 학생들은 삼일 동안 점심을 금식했다. 그리고 그 끼니에 해당하는 흰쌀을 모아 조선고아원에 보내달라고 조선중앙일보 경남지국에 맡겼다. 그 조선고아원은 전남 구례군 마산면 냉천리에 있던 홍제원이었다. 조선고아원(홍제원)은 무단통치기에 한국인이 세운 8개의 민간 복지시설 중 5개의 아동복지시설 가운데 하나로 사회사업, 자선사업가 국포 김택균(1872∼1945)이 1918년 세운 것이었다. 서빙고교회 주일학교 학생들의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선행은 박성산의 지도와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을 것이다.
부외 홍제원(弘濟院)에 잇는 조선고아원(朝鮮孤兒院)이 재정난으로 다대한 곤난을 밧고 잇다는 소문을 드른 부외 서빙고(西氷庫) 오순절교주일학교(五旬節敎主日學校) 아동들은 이를 측은히 생각하고 이에 동정할 맘이 생겨 자기들이 三일동안이나 점심을 굶어 모든 백미(白米) 五두를 조선고아원으로 보내달나고 본보 경남지국(京南支局)으로 보내엇슴으로 본지국에서는 곳 전기 조선고아원으로 이를 보내엇다.
『朝鮮中央日報(여운형)』 (1933년 9월 4일)
박성산은 30세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38년 10월 기독교 오순절교회 최초의 목사안수식이 있었다. 이때 박성산은 허홍, 배부근과 함께 정동 시병원에 위치한 럼시의 조선오순절교회 선교본부에서 안수를 받았다. 박성산은 이즈음에 목포로 가서 쿠트(Leonard W. Coote)가 일본 대판에 세운 일본이꼬마성서학원(日本生驅聖書學院)에서 단일성 오순절 신학(單一性 五巡節 神學)을 공부하고 졸업한 윤성덕(尹聖德) 목사를 만났다. 박성산은 윤성덕에게 “오순절 신앙을 전교할 인재가 더 필요하니 함께 일하자”고 권했다. 이것이 한국 삼위일체적 오순절주의자와 단일성 오순절주의자의 첫 만남이었을 것이다.
VI. 분열된 정신과 삶: 박성산과 박진환 사이에서
1945년에 해방이 되자, 한 편으로, 박성산은 오순절 동지들과 함께 교회를 재건하기에 힘썼다. 박성산은 1949년 즈음에 오순절교회 재건을 위한 일환으로 동지들을 규합하기 위해 전국을 순회하기 시작했다. 박성산은 이때 오순절 신앙전교의 주역이 될 또 하나의 인물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윤성덕을 일본이꼬마성서학원(日本生驅聖書學院)로 이끌었고, 당시 거제도에서 보통학교 교장으로 일하며 거제도 교회를 섬기고 있던 곽봉조(郭鳳祚) 목사를 찾아가 만나서 함께 오순절교회를 설립하자고 설득했다. 아마 박성산은 이꼬마성서신학원을 졸업하고 박귀임 전도사가 세운 순천오순절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박헌근(朴憲根) 장로도 만나 연합을 제안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이듬해 1950년 4월 9일 전남 순천에서 제1회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 대회로 모였다. 평신도는 200여 명쯤, 교역자는 허홍, 박성산, 윤성덕, 박헌근, 박귀임, 곽봉조 등이 모였다. 대회의 사회는 동지규합에 공이 컸던 박성산 목사가 맡았고 박헌근 장로가 성회를 인도했다. 오순절교회의 재건은 그의 통합적 정신에서 가능했을 것이다. 그 시절 박성산은 교단 밖으로는 장로교 최거득, 김종대 목사, 감리교 윤성열, 손흥구, 변흥규 목사와 각별하게 친하게 지냈고 기독교계에 처음으로 순복음의 이색적인 이미지를 던졌다. 또한 그의 통합 정신은 해방 후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와 6·25 전쟁 후 초기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안에서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Oneness Pentecostals; 쿠트의 이꼬마성서학원[生駒[いこま]聖書学院] 출신인 곽봉조, 윤성덕, 박헌근 등)이 “삼위일체적 오순절주의자들”(Trinitarian Pentecostals; 존 주르겐센의 나고야 성서신학원 출신인 자신과 배부근 등)과 함께 사역하도록 설득했다.
30년사에 따르면, 박성산은 광화문 근방에 성문당이라는 서점을 차려 생계를 꾸려 나가고 있었다. 그런데 30년사는 그 서점의 위치를 대략적으로 “광화문 근방”이라고 잡았고, “성문당”이란 상호를 한문으로는 표기하지 않았다. 그 서점의 보다 정확한 위치와 한문상호는 변종호의 증언에 의해 알려졌다. 1972년에 『한국의 오순절 신앙 운동사』를 펴낸 변종호는 1904년 평안북도 선천에서 출생했다. 폐병 투병 가운데 신앙적 회의에 빠져있던 그는 1931년 이용도 목사의 재령 부흥회에서 회심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마음에 두었던 마리아처럼 이용도 곁에서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가슴에 담아두었다.
은인이었던 이용도 목사가 1933년 세상을 떠나자, 이용도의 편지가 있을 법한 곳을 찾아다니며 서간을 모아 1934년 『이용도 목사 서간집』을 출간했다. 변종호는 『한국의 오순절 신앙 운동사』에서 박성산에 대해 이용도 목사 서간집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33년 가을에 이용도 목사가 승천[소천]했고, 1934년 봄에 이용도 목사 서간집이 발행되었는 바 배부근씨가 서간집 발행소를 찾아와 인사를 나누고 책을 사간 것이 1935년 봄이었고, 박성산씨가 야주개(唐珠洞)에 성문당(聖文堂)이라는 책방을 경영하면서 서간집을 열심으로 사다가 판 것이 1936년 겨울이었다.
변종호에 따르면, 박성산이 운영하던 서점은 종로구 “당주동”(唐珠洞) 당시에는 “당주정”(唐珠町)에 있었다. “당주동”은 “당피동”(唐皮洞)의 “당”자와 “야주현”(夜珠峴)의 “주”자를 따서 작명되었다. 그리고 그 서점의 한문상호는 “聖文堂”이었다. 박성산은 개명한 자기 이름에도 들어있던 “聖”(거룩할 성)자를 자기가 운영하는 서점의 상호에도 넣었다. 박성산이 그 서점의 이름에 “거룩할 성”자를 넣고, 이용도 목사의 서간집을 판매했다는 것은 그 서점이 일반서적도 판매했겠지만 주로 취급한 것이 거룩한 도서들, 즉 기독교 서적들을 취급, 판매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런데 필자는 이 글의 이전 판에서 박성산이 운영하던 서점의 한문상호를 “盛文堂”이라고 생각하고 그 상호를 중심으로 추측 글을 썼었다. 30년사는 그 서점의 한글상호만 표기하고, 위치도 추정치로 표기했었다. 그래서 필자는 한글상호에 따라 “성문당서점”(盛文堂書店)을 박성산이 운영하던 성문당과 동일시 했었다. 그러면서도 내심 확신이 서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변종호의 증언을 다시 보게 되었고, 두 서점이 한글상호는 같지만, 서로 다른 것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박성산이 운영하던 성문당(聖文堂)은 “경성부 종로구 당주정”에 있었고, 성문당서점(盛文堂書店)은 “경성부 종로구 서대문정 1정목 79”에 있었고, 발행자는 “이준열(李駿㤠)”이었으며, 그의 주소는 “경성부 동대문구 창신정 81”이었다. 그러므로 박성산은 월북소설가 이기영(李箕永)의 1942년 좌익적 작품 『生活의 倫理』를 펴낸 적이 없었다고 재판단하게 되었다. 필자는 이전 판에서 “박성산이 성문당서점을 경영하고 있었다면, 그가 이기영의 좌익적인 소설을 출판했고, 후에 그것을 숨기기 위해 책명을 바꾸고 내용을 일부 삭제하여 재출판했을 것이다”라고 가정법을 사용했었다. 그 불안함은 공연한 것이 아니었다.
위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박성산은 한때 마르크스주의의 활동가였다. 그런 그의 전향 소식이 들리자 조선총독은 존 주르겐센에게 감사 편지를 보냈었다. 그런데 박성산은 한편으로는 오순절교회 재건을 주도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 민주동맹”(基督敎民主同盟)에 집행위원들 중 한 사람으로 적극 참여했다. 기독교 민주동맹은 1947년 2월부터 1948년 4월까지 존재했던 소위 사회주의적 기독교 조직이었다.
기독교 민주동맹은 3·1 운동의 33인 대표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김창준(金昌俊, 1890년 5월 23일 ~ 1959년 9월 29일)에 의해 결성되었다. 마르크스주의와 선을 그었었던, 한때 감리교의 목사이며, 감리교신학대학 교수이기도 했던 김창준은 좌익이 일으킨 대구폭동을 계기로 급격히 마르크스주의에 함몰되기 시작했다. 1946년 10월 대구폭동이 일어났다. 김창준은 대구폭동을 보면서 자신의 입장을 바꾸었다고 설명했다. “나는 기독교인이다. 8·15 이후 국제교화협회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좌우합작에 노력하였으나 덮어놓고 좌우합작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10월 人民항쟁을 보았다. 여기에서 경제적 공평이 없는 곳에 정치적 평등과 세계평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것은 김창준이 어떻게 중도파에서 좌파로 넘어갔는가를 보여주었다.
해방정국의 소용돌이 속에서 김창준이 자신의 정치적 진로를 선택한 것은 1947년 1월 7일 좌파계열의 연합단체인 “민주주의 민족전선(民戰)” 확대중앙위원회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는 민전에 참여한 동기에 대하여 “8‧15 이후 국제교화협회라는 것을 만들어 가지고 좌우합작에 노력하였으나 덮어놓고 좌우합작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던 중 10월 인민항쟁을 보았다. 여기서 경제적 공평이 없는 곳에 정치적 평등과 세계평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하였다. 곧 그는 국제교화협회를 통한 좌우합작을 위한 노력의 실패와 1946년 10월의 대구폭동을 통한 경제적 공평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에 의하여 좌우의 중간적 입장에서 좌익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한경직의 이런 김창준에 대한 평가는 냉혹했다. 한경직은 김창준이 공산주의자들의 유혹에 넘어갔다고 보았다. 해방 후 김창준이 보여준 행동은 일반 교회로서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에서 공산당은 김창준을 이용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이 생활이 그런 줄 아니까 아무데도 오라는 데가 없고, 또 다른 사회층에서도 인정을 안 해주고 그랬는데, 공산당 녀석들이 보니까니 33인 중에 하나니까 이용가치가 있거든. 그래서 찾아가서 인사도 하고, 대접도 하고는 “아무래도 우리가 예수교를 바로 믿어야겠는데, 우리 노동자가 중심으로 해 나가야 되고, … 하여 기독교연맹을 조직해야 합니다.” 이러면서 포섭을 한 것이외다.
그리고 김창준은 허헌, 박헌영, 여운형, 김원봉, 김기전 등과 더불어 6인의 민전 의장단에 선출된 지 며칠 뒤인 1947년 2월 4일에 “민전에 참가하는 나의 이유”라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성명을 발표했다.
첫째로 나는 기독교 목사로서 특권계급의 편에 서는 것보다 예수의 정신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더 가까운 친구가 되고자 근로 인민을 기초로 한 민전에 참가한 것이다. 둘째로 십자가애(十字架愛)는 경제적 공평의 제도까지 병행해야 하며, 지금 세계의 무산대중은 기아선상에서 굶어 죽어가므로 형제애를 달성키 위하여 경제적 공평을 주장하는 민전에 참가한 것이다. 셋째로 국제정세에 순응하고 민족주의적 국가로서의 독립을 쟁취하는 첩경은 막부(莫府) 3상결정을 지지하는데 있으며, 우리 민족의 근본적 해방은 근로대중의 승리로 올 것과 세계 약소민족의 해방은 세계 인민민주주의의 최후의 승리로 올 것을 확신하기 때문에 삼상 결정을 지지하는 민전에 참가한 것이다.
김창준은 “기독교사회주의”로부터 “인민민주주의”로 한 걸음 더 나아 간 것이다. 이 같은 입장과 행동은 이 무렵 김창준이 마르크스주의 세계관을 수용하는 기독교 사회주의자가 되었다는 것을 추정하게 해 준다.
김창준 등은 1947년 2월 19일 서울 시내 모처에서 만나 토의한 결과 “노동대중을 기반으로하는 교도의 생활 향상과 진정한 신앙의 자유를 확보함으로써 민주 건국에 이바지하고저 기독교민주동맹을 결성하기로 하고” 결성대회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준비 중에 있던 기독교민주동맹결성식은 1947년 2월 24일 오후 1시 맹원들과 방청객 다수가 모인 가운데 김창준 목사의 개회사로부터 시작해 시천교당(侍天敎當)에서 열렸다. 그 결성식에는 민전, 남로당 등의 대표들의 축사가 있었다. 그런데 그 결성식은 3시 30분경부터 “大韓民靑” 등 우익 청년들의 “侍天敎堂을 向하여 돌팔매질”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었다. 그런 그 우익 청년들의 행동은 좌익들의 테러에 의해 촉발된 것이었다. 강금복은 2월 16일 우익 대한독립청년단지부결성대회를 위해 경기도 고양군 원당에 내려갔는데, 이곳에서 좌익의 테러를 당해서 사망했다. 그래서 2월 24일 열 한시부터 대한독청단 본부 앞 시내 안국동(安國洞) 네거리에서 김구(金九) 김성수(金性洙) 조성환(曺成煥) 조소앙(趙素昻) 씨 등을 비롯하여 각 청년단체 내빈 다수와 가족 참석하에 신일용씨의 사회로 거행되었다. 식순에 따라 김구의 식사가 있은 다음 고 강금복군의 약사보고 피해진상 보고가 있었고 이어서 각 정당 사회단체의 조사가 있은 다음 서상천의 애도사로 오후 4시 반경 회장을 끝마쳤다.
박진환은 기독교민주동맹의 중앙집행위원들 중 한 사람이었다. 기독교민주동맹은 제대로 창립총회를 할 수 없었고, 각 부서의 조직은 전형위원회에 넘겨졌다. 기독교민주동맹은 1947년 3월 5일 중앙부서를 결의하고 발표했다. 그리고 民戰에 가입했다. 그 발표에 의하면, 박진환(朴珍煥)은 김창준, 이은영, 차마리사, 노대욱, 김태성, 지재익, 김우산 외 43명의 중앙집행위원들 중 하나였다. 각 부서는 위원장 김창준, 부위원장 이은영, 차마리사, 총무부 노대욱 외 4명, 조직부 김태성 외 5명, 선전부 이진환 외 4명, 문화부 설병호 외 5명, 부녀부 남옥희 외 4명, 청년부 안순겸 외 5명, 원호부 지재익 외 5명, 조직부 김우산 외 4명이었다. 박진환은 기독교민주동맹의 중앙집행위원이었으며, 총무부에 속해있었던 것 같다.
박성산은 좌익, 사회주의자로서의 활동을 이미 십육여 년 전에 개명하며 버렸던 “박진환”(朴珍煥)이라는 이름을 다시 주워들고 그 이름으로 했다. 오순절교회를 수습하고 목회하는 일은 “박성산”이라는 이름으로 했고, 좌익적인 사회활동은 “박진환”이라는 이름으로 했다. 그는 왜 이렇게 두 가지 이름으로 각각 다른 두 가지 활동들을 했던 것일까? 박성산이라는 이름으로는 두 가지 활동 모두를 당당하게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라고 추측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가 박성산이라는 이름은 좌익적인 활동에는 사용할 수 없는 거룩한 이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이름들에 의한 두 가지 활동들은 그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처럼 “개인구원”과 “사회참여”가 그렇게 쉽고 편안하게 그의 생각과 마음과 삶에서 “병렬”되었던 것이 아니었고, 서로 섞이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즉, 이 두 가지는 그의 안에서 온전하게 통합되지 못하고 마치 적과의 동침처럼 불안하게 대립되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생각과 마음과 삶에서는 “박성산”과 “박진환”이라는 이름이 서로 대변하는, 서로 양립할 수 없는, 구복음주의적이고 오순절적인 전통 신앙을 추구하는 오순절주의와 종교를 말살하려는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를 억지로 혼합시키려는 소위 기독교사회주의라는 두 가지 분열된 힘들이 격렬하게 충돌하고 있었다는 해석이 보다 정확할 것 같다.
기독교민주동맹은 북한신문 『民報』 1947년 5월 31일 기사에 새로 세워질 나라의 정권형태는 북한처럼 인민위원회형태로 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북한에 동조했다. 그 신문을 통해 기독교민주동맹은 “예수의 사회복음정신은 人民본위이다. 인권은 신성불가침이다. 特權階級을 粉碎하고 萬民平等의 協愛社會가 곧 예수의 福音情神이다. 예수 정신에 입각한 본 동맹은 절대로 人民政權形態를 주장한다. 人委는 우리 민족의 창의로서 탄생된 예수의 복음정신에 가장 합치된 정권형태로서 그 밑에서만이 진정한 신앙의 자유와 백만 교도의 생활권을 확보할 수 있고 나가서는 우리나라가 절대 자유독립국가로서 세계평화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개신교 주요 교단들은 기독교민주동맹을 인정하지 않았다. 2월 28일, “소위 기독교민주동맹”에 관하여 조선예수교장로회본부 기독교조선감리회본부 기독교조선성결회본부 기독청년전국연합회에서 다음 같은 성명서를 발표했으며, 이와 비슷한 성명을 영락교회도 발표했다.
우리 기독교회는 소위 기독교민주동맹이라는 존재를 부인한다. 역사 깊고 토대가 굳은 조선기독교를 모단체의 모략으로나 김창준씨 등이 기독교라는 이름을 도용함은 도저히 용인할 수 없다. 기독교라는 명칭은 교회와 교인을 떠나서 사용할 수 없다. 김창준씨는 전에 목사이었으나 오래 전부터 신앙과 교회를 떠난 자이며 감리회에서 제명된 자이다. 고로 그를 중심하는 기독교민주동맹이 있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라는 명칭을 띠운 회명에 신자가 입장하지 않았고 불신자 그보다 반종교자들이 모여 수라장을 만들어 부상자를 내어 귀한 청년들의 피를 흘리게 하였다고 하는 것은 죄악의 행동이므로 우리는 그 존재를 부인하며 일반 사회 앞에 이 사실을 성명한다. 일구사칠년 이월 이십팔일 조선예수교장로회본부 기독교조선감리회본부 기독교조선성결회본부 기독청년전국연합회.
박진환은 1947년 좌익의 3·1절 행사에서 종교계 대표로 연설했다. 좌익이 김창준을 포섭한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아마도 1947년 3·1절 행사에 김창준을 내세워서 좌익 행사의 정통성을 입증하려는 것이었을 것이다. 김창준은 1947년 2월 민전을 중심으로 형성된 3·1 운동 기념 준비위원회에 허헌, 박헌영, 여운형과 함께 명예회장으로 참여했다. 그리고 그는 3월 1일 더 성대하게 열리고 있는 우파의 기념대회와 따로 남산에서 열린 삼일 기념 시민대회에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여기에는 김원봉의 기념사와 기타 순서가 있었다. 주목할 점은 각계의 결의를 표명하는 순서가 있었는데, 기독교민주연맹 집행위원 “박진환”은 종교계를 대표하여 “민주주의 국가 수립과 종교인은 언제나 인민대중과 같이 사러있다”고 절규했다는 것이다. 그 연설에서 박진환은 인민민주주의를 강력하게 지지한 것이다. 미군정은 이것을 민전이 단지 공산당의 모임이 아니라 기독교를 포함한 많은 세력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시도라고 평가했다.
그러면 한경직 등은 김창준이나 박진환과는 달리 어떤 나라를 건설하려고 했을까? 박명수 교수에 따르면, 한경직은 우선 김창준과 동일하게 기독교는 노동자와 농민에게 가까운 종교라고 말했다. 기독교와 공산주의는 무엇이 다른가? 한경직은 이 두 가지가 다 실패했다고 보았다. 기독교는 제정 러시아에서 보는 것과 같이 귀족, 또는 정부와 결탁했고, 공산주의는 종교를 무리하게 박해했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사상은 다 같이 실패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한경직은 여기에서 가진 자의 의무를 강조한다. 사업을 하는 사람이 이익을 남기면 그 이익을 가지고 자선사업을 하든지,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가진 자의 의무는 기독교적인 정신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경직은 김창준에게서 보는 것과 같은 계급투쟁을 반대한다. 물론 그는 현재의 사회에 문제가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에 있어서 혁명적인 방법은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문제를 더욱 키우게 된다. 그는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여론을 조성하고, 의회를 통하여 합리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 피해가 적다고 본다. 한경직은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개인의 인권이라고 보았다. 한경직은 “진정한 민주주의의 핵심은 1) 개인 인격의 중심사상, 2) 개인의 자유사상, 3) 만인의 평등 사상”인데 이런 정신이 바로 성경에서 가장 강조하는 사상이라는 것이다. 한경직의 강조점은 이런 점에서 김창준과는 다른 것이다. 한경직은 북한에서 공산주의의 이름으로 개인의 인격과 자유가 무시되는 것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그는 월남하면서 “우리는 공산주의든지 그 외의 어떤 형태이든지 더 이상 독재를 원하지 않습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한경직이 건설하기를 원하는 나라는 인민민주의의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48년 3월 김창준은 김일성과 김두봉 등의 명의로 된 “남조선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남조선 정당단체에게 고함”이라는 문건과 초청장을 받고, 4월에 평양에서 열린 “전조선정당사회단체 대표자연석 회의(남북협상)”에 김구, 김규식, 조소앙 등 13명과 함께 월북하여 그대로 잔류했다. 그는 1948년 8월 제 1기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과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초대 서기장에 선임되었고, 1957년 8월에는 최고인민회의 부의장이 되었으며, 1959년 5월에 뇌일혈로 사망하였다.
목사인 김창준이 왜 자유민주주의를 지향하는 남한을 버리고, 신앙의 자유가 없는 인민민주주의 곧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북한을 선택했을까? 유영렬은 네 가지 이유를 추정했다. 첫째로 도탄에 빠진 민중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목사로서, 예수는 부자의 친구가 아니고 가난한 자의 친구라고 생각한 김창준은, 자유민주주의는 자본가계급을 옹호하여 정의롭지 못하고, 인민민주주의는 노동대중을 옹호하여 정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인민민주주의국가인 북한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론과는 달리 현실적으로는 인민민주주의국가(공산주의국가)보다 자유민주주의국가(자본주의국가)가 민중에게 더 많은 자유와 빵을 주었음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둘째로 조국의 완전한 통일독립을 지상과제로 생각했던 김창준은, 해방공간에서 남한은 단독정부수립을 추구하고, 북한은 남북통일정부의 수립을 추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북한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한의 이승만보다 먼저 북한의 김일성이 이미 1945년 10월에 “민주기지론”(인민민주기지론) 곧 공산기지론을 주장하고 실질적으로 은밀히 북한에 단독정권을 준비했던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셋째로 통일조국을 위하여 3‧1운동 때와 같은 국민적 단합의 필요성을 강조했던 김창준은, 해방공간의 남한은 지도층이 4분 5열 되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무질서와 혼란이 극에 달했으며, 북한은 김일성 중심체제를 갖추어 질서 있고 단합된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북한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공간에서 남한의 혼란과 북한의 일사불란(一絲不亂)은 본질적으로 국민적 단합의 문제가 아니고, 남한에는 어느 정도 자유가 있었고 북한에는 거의 자유가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넷째로 자유독립국가의 건설과 대중의 행복을 위한 큰 목표가 같으면 방법상의 차이는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김창준은, 기독교적 사회주의와 마르크스적 사회주의가 방법상의 차이는 있으나 큰 목표는 같다고 생각하여 목사로서 북한의 인민민주주의를 선택했다고 본다. 그러나 그가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곧 인민민주주의를 수용한 것은 사실상 기독교의 포기를 의미하며, 마르크스주의와 기독교의 양립을 부정했던 그의 1930년대 사고의 일대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김창준의 평양 숭실대학 후배로서 평안북도에서 기독교사회주의민주당을 조직하여 공산주의에 대항하다가 자유가 없는 북한을 떠나 월남한 한경직 목사는, “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설교에서 “공산주의야말로 묵시록에 있는 붉은 용”이며 “이 용을 멸할 자 누구냐”고 했는데, 이는 당시 남한 교회지도자들의 일반적인 정서였다.
후에, 박진환의 기독교 민주동맹에의 참여는 1948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 기념일 전과 후에 서울 경찰이 좌익과 수 백 명의 내란음모자들을 일제히 검거할 때 체포되어 지역 경찰서에 구금되게 했다. 조선일보는 “지난 11월 7일 쏘련혁명기념일을 전후하야 포고령 일호 법령 십구호급 내란음모형의 죄 등으로 수도청관하 각서에 구속된 씨명은 다음과 같다”는 기사를 썼다. 그리고 그 기사에 따르면, “朴聖山”이 서대문서에 수감되었다. 이후 기독교민주동맹은 대한민국 수립 이후 지하 활동을 계속하다 1949년 10월 정부의 등록취소 처분을 받아 해산되었다.
VII. 대환란: 불가능한 공존의 파국과 선택, 소천
석방된 박성산은 1950년 1월에 연신 신도교회를 개척했다.
그런데 다섯 달 후 새벽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대한민국으로의 남침으로 전쟁이 시작되었다. 인민군이 서울에 입성하자, “기독교민주동맹”이 재결성됐다. 월북했다 서울에 다시 나타난 김창준 목사가 위원장이 되었다. 기독교민주동맹은 인민군 환영대회를 준비하기로 하고, 고문에 신홍우 목사, 총무에 “박성산 목사”를 위촉하고 각 교단 대표자로 장로교에 최문식 유호준 김종대 목사, 감리교에 최택 박만춘 심명섭 목사, 구세군에 황종율 사관 등이 준비에 나섰다. 7월 10일 YMCA에서 3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종대 목사가 설교, 임영빈 목사가 환영문을 낭독했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에 서울의 교회들은 몇몇 그대로 예배를 본 곳이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문을 닫았다. 그런데 서울 점령 한 달가량이 지난 8월 2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승동교회에서는 최문식의 강압으로 남아 있었던 목사들을 다 동원하여 인민군 환영집회를 열고 있었다. 몇몇 되지는 않았지만 명색이 재경 기독교목사 인민군 환영대회였다. 거기 모인 목사들은 장로교계에서 김영주, 송창근, 감리교계에서는 김유순, 박만춘, 김희운이었다. 성결교계에서는 박현명, 이건, 김유형 등이었다. 이들이 그날 바로 최문식에 의하여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그런데 참 묘한 일이 일어났다. 당시에 승동교회를 시무하던 홍대위 목사는 신기하게도 거기 참석하지 않아 납북을 면했다. 그것은, 민경배에 의하면, “오순절계의 박성산 목사”의 귀띔 때문이었다. 그가 홍대위 목사에게 그 전날 밤에 찾아가 “그 모임에 절대 참가하지 말고 지방으로 떠나 숨으라”는 말을 하여 주었기 때문이다. 홍대위(洪大衛) 목사는 17세에 예수를 믿고 20세에 중국으로 건너가 섭구신의신학교를 졸업하고 미국 루터선교회 선교사로 중국 청도신의신학교교수를 거쳤다. 중국에서 40여 년간 목회활동을 하다가 중국이 공산화된 직후에 탈출했다.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그는 1950년 2월 12에 승동교회의 제11대 담임목사가 되었었다. 최문식 목사로 남한 거물 목사 납북이라는 비극이 연출되고, 박성산 목사는 홍대위 목사를 구했다.
박성산이 전쟁 초기에 서울에 남아 있었던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 그가 인민민주주의를 추구했던 사람이라 인민군의 입성을 피해 남하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거나, 피하지 못해 어쩔 수 없이 남아 있었거나 둘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재결성된 기독교민주동맹의 총무가 된 것은 그의 자의에 의했거나, 아니면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했을 수도 있다. 박성산이 승동교회의 홍대위 목사를 구출했다는 것은 이 두 가지 이유들 중에서 후자의 이유가 강했기 때문이었음을 암시한다. 어떤 이유 때문에 박성산은 자기가 추구했던 인민민주주의가 구체화된 조선인민민주주의나 그곳으로 월북한 김창준이 이끄는 기독교민주동맹에 거부감을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추정은 1951년에 그가 인민군이 빠져나간 전라도 지역에 들어가 오순절 교회들을 돌보았고, 순천에서 순교한 한 오순절 동지에 대한 소식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종주국인 소비에트연방이 아닌 그 적국인 미연방 하나님의 성회에 알렸다는 것에 의해 사실이 된다. 1951년 박성산은 손종영 목사를 통해 전쟁 중의 한국 오순절 교회의 상황을 알리는 편지를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 보냈다. 손종영은 캘리포니아 남부지역에서 안수받은 목회자인데, 캘리포니아 몬테레이에 있는 군인언어학교에서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는 한 한국 오순절 목회자(minister)가 한국의 상황에 대해 알리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박성산이라는 또 다른 한국 목회자(minister)에 의해 써진 그 편지의 일부는 해외선교국장 노엘 퍼킨에게 보내졌다. 그 편지의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저는 남부지역의 교회들과 형제들을 방문하기 위해 한 여행을 시작했는데, 그 형제들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지역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지역을 일 년 이상이나 방문하지 못했었습니다. . . 저는 한국의 현재 불행들은 다른 것이 아니라 대환란의 시작이라고 생각합니다. . . . 제가 순천에 도착했을 때, 그곳 성회 교회(the Assembly church)를 담임하고 있던 박 장로가 순교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도쿄에 있는 ‘성회 성경 학교’(the Assembly Bible School)를 졸업했습니다. 공산주의자들(the Communists)이 그 도시를 떠날 때, 백 명 이상의 민주주의자들(democrats)을 총으로 사살했는데, 그들 중에 두 사람이 기독교 지도자들이었습니다. 그 공산주의자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려 할 때, 박 장로가 앞으로 뛰어나가 하나님의 사랑을 증거했습니다. 담대하게 공산주의자들이 쓰던 탁자를 탕탕 치면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모두 회개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그래서 그는 첫 번째로 총을 맞았습니다. 그는 얼굴에 기쁨과 만족이 가득하여 “할렐루야”를 외쳤습니다. 이것은 영광스런 순교였습니다! 순천에 있는 그 교회는 폭격으로 무너졌지만, 예배는 여중학교 강당에서 계속 드려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 교회를 축복해 오셨습니다. 한국에 있는 감리교 성경 학교를 졸업한 한 여성과 장로교회의 한 장로는 우리에게 와서 성령 침례를 경험했습니다. 그들은 우리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해 왔습니다. 우리는 그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 . 우리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박성산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들을 “공산주의자들”(communists)라고 칭했고, “박 장로” 즉 “박헌근,” 등 기독교적인 우익 인사들을 “민주주의자들”(democrats)이라고 칭했다. 박성산은 “민주주의” 즉 “자유민주주의”와 “기독교”는 공존할 수 있어도 “공산주의” 즉 “인민민주주의”와 “기독교”는 결코 서로 공존할 수 없는 것임을 신앙의 동지였던 박헌근의 “영광스런 순교”를 통해 더욱 절실하게 깨달았을 것이다. 박성산은 인민민주주의자들이 일으킨 전쟁의 아비귀환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 직전에 일어날 “대환란”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체험했다. 박성산에게 자신의 사회주의적 이상과 인간의 역사는 파국적 종말에 다다랐다. 우는 사자처럼 배회하던 마르크스의 망령이 그에게 미끼로 던져주었던 “인민민주주의”와 “기독교민주동맹”이라는 우상들이 산산이 부숴지고 있었다. 반면에 그런 무너짐의 폐허 속에서 열린 그가 인도한 집회에는 하늘 문이 열리고 불꽃같이 성령이 강림하시며 맹렬한 하늘의 언어가 동반되는 성령침례의 사건이 일어났다. 그 후 박성산은 김창준을 따라 북으로 가지 않았다. 그는 승동교회 홍대위 목사에게 “그 모임에 절대 참가하지 말고 지방으로 떠나 숨으라”고 말했던 것처럼 자신도 반대 방향으로 길을 잡고, 인민민주주의와 기독교민주동맹이 없는 자유민주주의의 땅 남쪽 부산으로 갔고, 1952년 11월 27일 서대신동에 “부산교회”를 세웠다. 부산교회는 “순복음부산교회”로 교명을 바꾸어 현존하고 있다. 30년사에 따르면, 1980년대에 순복음부산교회는 부산 서구 서대신동 3가 387에 위치하며 장년 300여명의 중형교회로 성장했다. 순복음부산교회의 역대교역자는 “박성산, 배부근, 김상필, 박정근” 등이었다.
그리고 홍대위 목사도 52년 8월에 대구삼덕교회(52년 1월 창립)에 부임했다.
6.25전쟁 발발 직후 한국에 입국한 미국 하나님의 성회 소속의 종군 목사 엘로드(John R. Elrod)는 한국 내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파악한 후 1951년 미국으로 돌아가 미국 하나님의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보고했다. 이 무렵 박성산도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 하나님의 성회 본부에 한국 오순절교회가 처한 어려움을 알리면서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조속히 한국 선교를 시작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러한 엘로드와 박성산의 노력의 결과로 1952년 여름 미국 하나님의 성회 동양 선교부장인 오스굿(Osgood) 목사가 한국을 방문하여 한국 오순절교회의 현황을 직접 조사했다. 조사를 마친 후 오스굿 목사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 한국 선교를 시작할 것을 적극적으로 요청했다. 이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는 당시 일본 주재 선교사인 체스넡(Arthur B. Chestnut)을 1952년 12월에 공식 한국 선교사로 파견했다. 체스넡의 내한으로 교단 결성을 위한 움직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인화력이 뛰어난 박성산 목사가 순천 부산 거제 광주 등지를 순회하며 오순절교회와 교인들을 모으는 일에 헌신했다. 그의 헌신의 결과로 1953년 4월 8일 오전 10시 수복된 서울에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창립회의가 열렸다. 이 창립총회에 모인 이들은 체스넡, 허홍, 박성산, 곽봉조, 배부근, 윤성덕, 박귀임과 방청인 4인 합하여 모두 11인이었다. 이 창립에도 곽봉조, 배부근, 윤성덕이라는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이 참여했다. 박성산 목사는 서대문구 충정로 1가 21번지(현 강북삼성병원)에 서부교회를 개척했다. 순복음신학교는 1953년 5월에 허홍이 개척한 남부교회에서 개교되었는데, 3개월 후인 8월 1일 교사를 교통편이 더 좋은 서부교회 내로 옮겼다.
한국에 파송된 미 하나님의 성회의 첫 공식 선교사였던 아더 체스넡(Arthur B. Chestnut)은 박성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는 한국 사람들의 필요에 대해 우리에게 편지를 썼던 사람이었다. 그는 한국 오순절 신앙인들의 대부분을 위한 영적 아버지(the spiritual father)였다. 후에 나는 그가 한국 남부지방에서 몇 교회들 중에서 신앙을 지키는 것을 돕는 사역에 자신을 헌신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사람은 한국동란의 시작이래로 하나님을 위한 살아있는 메시지였다. 그는 그가 방문했던 지역들 안의 문제들과 상황들에 대해 말할 때면 종종 울었다.
체스넡은 그의 편지에서 박성산을 “가장 나이가 많고 강한 사람”이라고 일컬었다. 사실은, 그는 배부근보다도 더 어렸다. 그러나 그의 큰 체격과 지도력은 그를 나이 많게 보이게 만들었을 것이다. 김상호는 박성산이 존경받는 목사였다고 말했다. 한국 오순절 신앙인들의 영적 아버지 박성산은 자신이 그토록 돌보고자 했던 가난한 사람들이 그들을 위한다는 인민민주주의자들에 의해 무참히 살해되고, 그 참화 속에서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는 것을 보며 눈물을 쏟곤 했다. 그 눈물들은 그토록 열정적으로 추구했던 인민민주주의와 기독교민주동맹이 허상이었음을 뼈 속 깊이 깨달은 자의 회한의 눈물이기도 했을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라는 괴물의 탄생에 자기가 어느 정도 일조했음을 한탄하는 자의 피눈물이기도 했을 것이다.
박성산은 1955년 3월에 교단신문 『순복음』에 오순절 신학의 정수인 성령침례에 대한 설교문을 기고했다. 그 글은 박성산이 정통 오순절주의자(a Classical Pentecostalist)였음을 보여준다. 그 설교문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성령침례를 받은 첫 번째 증거가 방언을 말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성령침례와 방언은 밀접성에 대한 그의 견해는 일본 유학시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 존 주르겐센으로부터 그리고 기독교조선오순절교회라는 교단에서 목회하고 있을 때 내한했던 영국 하나님의성회 하워드 카터로부터 전수받은 것일 것이다. 박성산의 그런 주장은 오늘날 성령침례와 방언과의 밀접한 관계를 억지로 끊어버리려는 수정주의자들을 각성시킨다.
그리고 박성산은 방언을 말하는 것과 예언하는 것을 병치시켰다. 다른 말로 하면, 박성산은 성령침례는 발성과 선포의 은사를 발생시킨다고 본 것이다. 이는 누가가 성령을 예언의 영으로 제시한 것을 따른 것이다. 로버트 멘지스 등 현대 오순절 신학자들은 예언의 영으로서 누가의 성령론을 활발하게 논의해 왔다.
박성산은 성령침례의 전제 조건으로 구원, 즉 중생을 제시했다. 그는 성령침례를 받기 위해서는 먼저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고 중생함으로써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다음에 중생과 구분되고 중생에 후속하는 두 번째 단계로서 성령침례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박성산의 견해는 중생, 성령침례, 신유, 재림이라는 윌리엄 H. 더함, 그리고 그것을 이어받았던 미국 하나님의성회의 사중복음 즉, 순복음(Full Gospel)의 맥락 안에 있는 것이다.
박성산은 성령침례가 받는 자에게 두 방향의 결과를 낳는다고 보았다. 한 방향은 내적인 것이며, 다른 방향은 외적인 것이다. 성령침례는 내적으로 받는 자에게 구원의 확실성, 증거가 된다. 외적으로는 “봉사를 위한 권능”이 부여된다. 박성산은 성령이 충만하게 임하심 또는 성령을 받음과 성령침례를 일치시켰다.
그리고 박성산은 성성령침례는 특별한 사람만 받을 수 있는 특수한 은사가 아닌 모든 신자들이 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선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방언을 증거로 동반하는 성령침례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므로, 모든 신자가 받을 수 있는 보편적인 것이라고 썼다. 그런데 박성산은 아무리 하나님께서 모든 신자들에게 성령침례를 주시마고 약속하셨다할지라도, 그 침례를 받으려면, 개개인이 참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받을 때까지 인내하며 구하며 기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참믿음과 열심과 인내는 박성산이 내건 오순절 신자가 되는 지성적, 감성적, 그리고 의지적 조건인 것이다.
박성산은 the baptism of the Spirit을 “성령세례”라고 번역했다. 이것은 baptism을 세례로 번역한 기독교오순절교회 설립신청서로부터 유래한다. baptism의 방식은 침례를 택하면서 명칭은 세례로 번역했던 것이다. 이런 실행과 명칭의 유리는 살수를 택하는 장로교나 감리교, 성결교 신학에의 종속을 보여준다. 이런 유리는, baptism을 침례로 번역함으로써 그런 종속을 벗어나 바로잡혀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진실한 신도들은 열심히 성령의 세례를 구하야 받았으니 이는 믓 성령이 충만히 림하신 증거로 방언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림하시면 일반적으로 방언을 하며 예언을 하는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그 따르는 제일 첫 번의 결과는 방언이라는데 의견이 일치되고 있음을 부인치 못한 사실이다.… 첫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써 믿은 것이요.… 둘째는 신도들은 다만 구원의 확실한 증거로서뿐만 아니라 마땅히 받어야 할 은혜의 하나로써 성령을 받으라는 것이다.… 성령은 모든 신도가 일반적으로 받을 수 있는 선물이 되었으며 이 약속은 신도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받아 주셨다는 단순한 증거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친히 그 마음속에 들어오시고 또한 봉사를 위한 권능까지 주시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으려고 기도하다가 아무런 결과도 없이 이렇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이 만약 참믿음을 가지고 기도한다면 그 즉시로 또는 잠시 후에 성령에 충만하심을 받었을 것입니다.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가 여러 가지 문제들에 봉착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그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헌신했으며, 이것이 그를 고갈시켰을 것이다. 그 문제들 중 하나는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이 그들의 정체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곽봉조는 물침례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행하지 말아야 하며, 반드시 “예수 이름”으로 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르크스에게 점령당했던 한쪽이 이미 전쟁을 통해 죽었던 박성산은 1956년 3월 20일에 48세의 많지 않은 나이로 그의 나머지 한쪽, 전 존재가 지상에서 사라지는 불시의 죽음을 맞이했다. 그의 여동생 박정숙에 따르면, 그는 특별한 병에 걸린 것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침상에 누워있다가 3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곁에는 몇 명의 시골 교역자들이 있었을 뿐이었다. 김익진은 그의 죽음의 원인이 교단의 그런 좋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박성산의 소천 시기는 기록들마다에서 차이를 보인다.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교단 홈페이지에는 박성산 목사가 1957년 11월에 소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30년사는 그가 1962년 2월 28일 타계했다고 기록한다. 이렇게 그의 소천의 시기에 대한 기록들이 차이가 나고 모호하다는 것은 그가 외롭고 쓸쓸하게 죽어갔다는 것을 방증한다.
1957년 9월 11일에 허홍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던 재단법인 기독교대한오순절회가 작성한 설립취지서에는 박성산의 별세 연도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담겨있다.
이러한 오순절적인 성신의 역사가 우리 한국에서도 일어났으니 1928년 봄에 미국오순절교회에서는 「럼시」 씨가 선교사로 자진 내한하였고 동년(同年) 가을에는 영국의 「메레데드」 씨와 「베시」 씨가 또 내한, 성신의 충만과 포교와 전도가 활발하여짐에 따라 교회는 자연히 성립되어 이름하여 오순절회라 하였다. 처음 한국인 교역자는 배부근 목사, 허홍 목사 등이었든 바 허홍 목사는 포교관리자로 피택되어 당국에 정식 포교소를 내고 교회는 순복음운동에 적극 진출하게 되었다.
그 취지서는 한국 오순절회(일제시대의 기독교오순절교회) 첫 한국인 교역자가 배부근과 허홍 둘이었다고 썼다. 한국 오순절 1세대 목사들이며 함께 안수를 받았던 세 명 가운데서 박성산이 누락된 것이다. 박성산이 1957년 9월에는 이미 고인이 된 후였기 때문에 그에 대한 언급이 누락되었을 것이다.
또한 박성산의 1956년 3월 20일 소천설은 순복음신학교 제2회 졸업사진에 의해 뒷 받침받을 수 있다. 순복음신학교는 1956년 3월 22일경 제2회 졸업식을 갖고 학생들과 교원들이 기념촬영을 했는데, 그 사진에는 배부근은 있으나 박성산과 곽봉조가 없다. 곽봉조는 1955년 말경에 순복음신학교를 떠났고, 박성산은 1956년 3월 20일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박성산이 1956년 3월 20일에 소천했다는 김익진의 주장이 제일 설득력이 있다.
결정적으로 박성산의 1956년 3월 20일 소천설은 당시 미국에 있던 메리 럼시가 허홍에게 보낸 편지를 통해 증명된다. 럼시는 미국 뉴욕주 리용(Lyons, NY)의 한 우체국에 1956년 5월 3일 오후 1시에 수납된 편지를 한국에 있는 허홍에게 보냈다. 그런데 그 편지 속지에 럼시가 표기한 편지를 쓴 날자는 1956년 4월 5일이었다. 럼시는 그 편지 서두에서 얼마 전에 박성산 목사의 아들로부터 박성산 목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고 썼다. 럼시는 자신이 그 소식을 접했을 때 큰 충격을 받았다고 썼다. 그녀는 박 목사가 오래 앓다가 세상을 떠났는지, 아니면 갑자기 떠났는지 궁금해했다. 그리고 그녀는 아마도 박성산이 갑자기(suddenly) 소천했을 것이라고 추정했다. 박성산의 아들이 1956년 3월 21일경 미국에 있는 럼시에게 아버지의 부고를 보냈다면, 약 15일 후 럼시에게 전달되었을 것이고, 럼시는 곧바로 허홍에게 그 편지를 썼을 것이다.
그가 소천한 후 일어난 1956년 신학교 맹휴사건은 교단분열의 전주곡이었다. 허홍목사가 2대 총리로 당선된지 반년 후인 1957년 11월 분열의 쓰라린 비극을 경험해야 했다. 허홍 목사는 대한오순절교회로 환원했다. 그리고 박성산 목사에 의해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와 연결되었던 곽봉조, 윤성덕 목사 등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은 쿠트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자 손을 잡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를 탈퇴했다. 그리고 그들은 1958년 5월 10일 “극동사도선교회”를 창립하고, 대전시 자양동 28번지에 중도성서신학교를 세웠다.
“극동사도선교회”는 1980년 전두환 군부정권 당시 무인가 신학교 정비령이 내려지자 교단 신학교가 폐쇄되고 인가 신학교를 가진 교단과 통합을 추진하는 움직임 가운데서 장로교로 전환했다. 소속 교회 목회자들이 안정적으로 사역을 하기 위해 장로교단으로 바꾸면서 예장 은혜총회로 이름을 붙인 것이다. 대전 가양제일교회, 해남교회와 가동교회, 평택은실교회 등이 대표적 은혜 측 교회다. 그리고 대전 연합부흥회가 인연이 되어 연합 측과 1981년 1월 통합을 하게 됐다. 연합과 은혜는 통합 후 연합총회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어 같은 해 12월 연합은 백석의 전신인 합동진리와 통합하고 합동정통을 결성했다. 중도성서신학교는 현재 가양제일교회 내에 있다. 가양제일교회는 1975년 11월 4일 중도성서신학교 강당에서 창립되었고, 1980년 1월 중도성서신학교 부설에서 분리 독립되면서 대전시 가양동 35-3 선교부 부지 일부를 사용하여 개척되었다.
박성산은 아마도 자기가 이루어놓았던 이 연합의 죽음, 즉 분열을 예감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고통스러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삼위일체적 오순절주의와 단일성적 오순절주의는 물침례론과 삼위일체론에 대해 서로 다른 견해들을 갖고 있기 때문에 함께 할 수 없는 사이다. 그런 불가능한 연합을 성사시키고 유지시키려 했던 박성산의 노력과 힘은 가히 초인적이었지만, 그것의 실패는 처음부터 필연적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VIII. 나가는 말
박성산(朴聖山) 목사는 제임스 E. 아담스를 통해 제2차 대각성운동의 보수적이면서 뜨거운 구령의 신앙 안에서 성장하고 교육을 받았으며, 존 주르겐센과 럼시를 통해 방언이 동반되는 성령침례를 경험한 전통적인 오순절적인 불타는 신앙과 권능을 갖고 오순절 교회들을 설립하고 목회했다. 반면에 사회주의,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인 그는 박진환(朴珍煥)이라는 이름으로 청년동맹, 기독교민주동맹, 민전 등에 가입하여 기독교와 인민민주주의를 혼합시키려는 적극적인 활동을 하기도 했다. 이런 분열적 공존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남침으로 촉발된 전쟁 속에서 한 쪽이 죽음으로써 깨졌다. 그리고 나머지 한 쪽을 지탱하고 있던 것들 중에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을 삼위일체적 오순절주의자들과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의 연합이 결렬되는 것을 감지하며 비교적 이른 나이에 소천했다.
박성산의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을 후대가 길이길이 칭송하며, 본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마르크스의 소위 계급투쟁설을 받아들여, 부르조아, 부자들을 타도하고, 프로레타리아, 가난한 자들만의, 인민들만의 세상을 만들겠다는 헛된 꿈을 꾸었던 것, 근본적으로 서로 섞일 수 없는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를 혼합하려 했던 점들은 후대가 비판하고 버려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태어나시며 말구유에 누이셨으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을 때는 부자가 제공하는 묘실에 누이셨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자들만을 사랑하지 않으시고 또한 부자들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며, 기독교가 인민민주주의와 공존하여 자유롭게 번성한 예를 역사 속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 공존은 박성산의 삶이 증언하는 것처럼 허상일 뿐이다. 박성산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사랑을 실현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삶에서 구체화하려 했다는 점은 참으로 안타까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두운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 자라서 한국 오순절교회의 초석을 놓으며 한 줄기 빛을 비추고, 해방 후 혼란스런 격동기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사랑하며 치열하게 살았고, 생의 말미에 자유민주주의에 입각한 대한민국을 선택함으로써 후대가 따라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준 박성산은 체스넡의 평가처럼 진정 “한국 오순절교회의 영적 아버지”였다.
부록: 박성산 목사 연보
1908 경북 군위군 우보면 선곡리 출생, 박진환
1914 보통학교 입학 (만)6세
1920 보통학교 졸업, 대구 계성학교 입학 11세
1925 계성학교 졸업, 결혼 17세
1927 군위청년동맹우보지부활동(사회주의) 19세
1928 선원흥농회활동, 일본 도쿄 유학 20세
1929 학업중단, 마르크스주의 심취, 나고야 거주, 기자 생활 21세
1930 주르겐센과 만남, 성서신학원입학 22세
“하나님의 위대한 권력과 무한한 사랑과 섭리” 기고
1931 “박성산”으로 개명, 나고야 조선 성서 교회 개척 담임 23세
1932 오순절적 성령침례 받음 24세
1932 귀국 럼시와 동역, 서빙고교회 담임
1937 흑석동에 오순절 교회 설립 29세
1938 목사안수 받음 30세
1945 성문당서점 운영 37세
1947 기독교민주동맹 중앙집행위원, 박진환 39세
1948 서대문서에 수감 40세
1950 대한 오순절교회 설립 주도, 오순절교회대회 사회 42세
연신 신도교회 개척
1950 기독교민주동맹 총무, 홍대위 목사 납북 저지
1951 미 하나님의 성회에 박헌근의 순교 소식 알림 43세
1952 부산교회설립 44세
1953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 45세
1956 3.20. 소천 48세
참고문헌
김광열. “1930년대 전반 일본노동조합전국협의회와 한인노동자 -나고야 지역의 운동을 중심으로.” 『韓日民族問題硏究』 제22권 (2012.6): 5-47.
김병희 편저. 『한경직 목사』 서울: 규장문화사, 1982.
김병희 편역. ?경북교회사? 서울: 코람데오, 2004.
김영애. “근대 장편소설의 개제(改題) 양상.” 『기초학문자료센터』. https://www.krm.or.kr/krmts/search/detailview/research.html?dbGubun=SD&m201_id=10038921. 2022년 5월 22일 검색.
. “이기영 소설의 개제(改題) 양상과 그 의미.” 『한국문학이론과 비평』 Vol.17, No.1, 통권 58호 (2013): 5-25.
김홍수. 『일제하 한국 기독교와 사회주의』 한국기독교사논문선집. 서울: 기독교문사, 1992.
박명수. “해방 후 월남기독교인들의 국가건설운동과 영락교회 청년회의 탄생.” (사)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세미나. (2019.04): 6 – 52.
박용규. ?한국기독교회사 1 (1784-1910)? 서울: 생명의 말씀사, 2004.
박종린. “1920년대 사회주의사상의 수용과 社會改造の諸思潮의 번역.” 『역사문제연구』 제35호 (2016): 317-351.
박창식. “미국 북장로교회의 영남지방 선교와 교회형성 (1893-1945).” 박사학위논문, 계명대학교 대학원, 2004.
박철하. “1920년대 사회주의 청년운동과 고려공산청년회.” 『역사와 현실』 (1998): 242 - 273.
박철희 “중등교육(1895-1945)” 『국가기록원』. http://contents.archives.go.kr/next/content/listSubjectDescription.do?id=008051&pageFlag=A. 2022년 4월 28일 검색.
박태원. “박성산목사님과 나.”
裵成龍. 『朝鮮農村硏究의 準備知識』 京城: 漢城圖書, 1933.
민경배. “북한군 점령하의 서울교회: 박성산과 최문식.” 『한국장로신문』 제1410호 (2014년 4월 26일). http://www.jangro.kr/Jmissions/detail.htm?aid=1398220925&PHPSESSID=e47ed7036194eff86a7652b9bfcb64de. 2022년 5월 12일 검색.
30년사 편찬위원회.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30년사』 서울;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1996.
신용균. “정연기(鄭然基).” 『디지털거창문화대전』. http://geochang.grandculture.net/geochang/toc/GC06300808. 2022년 5월 7일 검색.
심재욱. “설산 장덕수(1894~1947)의 정치활동과 국가인식.” 박사학위논문, 동국대학교 대학원, 2007.
안승오. “대구 지역 선교의 아버지 제임스 아담스의 생애와 선교.” 『신학과 목회』 Vol. 30 (영남신학대학교, 2008.11): 237 – 268.
유도진. “청년운동(靑年運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199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56309. 2022년 5월 4일 검색.
유영렬. “기독교민족사회주의자 김창준에 대한 고찰.”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25집 (2005): 177 - 224.
윤명구. “이기영(李箕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43868. 2022년 5월 21일 검색.
윤수종. “일제하 일본인 지주 회사의 농장 경영 사례: 조선흥업주식회사의 사례.” 한국사회사연구회 편. ?일제하 한국의 사회 계급과 사회 변동? 서울: 문학과지성사, 1988): 11-69.
윤하영. “한경직이 연합군 사령부에게 보내는 비밀청원서(1945년 9월 26일) 영락교회.” 『만남』 525 (2017년 10월): 25.
이기훈. “1920년대 사회주의 이념의 전개와 청년 담론.” 『역사문제연구』 13권 (2004): 287-318.
이선교. 『다시 써야 할 한국 기독교사』 서울: 풀빛목회, 1993.
李石初. “靑年運動統一振興策(三): 無産階級靑年運動の擡頭.” 『朝鮮思想通信』 Vol.- No. 235 (京城: 朝鮮思想通信社, 1927): 5.
李潤甲. “1920년대 경북지역 농촌사회의 변동과 농민운동.” 『한국사연구』 제113호 (2001): 139 – 177.
이윤범. “1920년대 해외유학에 관한 연구-동아일보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석사논문, 2002.
이창승. “에이미 셈플 맥퍼슨과 Foursquare Gospel.” 『성령과 희년의 희망』 오순절 신학총서 제9권. 대전: 건신대학원대학교 출판부, 2021: 171-212.
. “오순절 선교사 메리 럼시(Mary C. Rumsey)의 한국 입국과 출국 시기에 대한 연구.” 미출판물. https://blog.daum.net/jesusgate/12, 2022년 3월).
이혜영, 윤종혁, 류방란 편. 『한국 근대 학교 교육 100년사 연구(II) : 일제 시대의 학교 교육』 서울: 한국교육개발원, 1997.
장규식. 『일제하 한국기독교 민족주의 연구』 서울: 혜안, 2001.
장병욱. 『6 · 25 共産南侵과 敎會』 서울: 한국교육공사, 1983.
정종현. “1940년대 전반기 이기영 소설의 제국적 주체성 연구: 『동천홍』, 『광산촌』, 『생활의 윤리』, 『처녀지』를 중심으로.” 『한국근대문학연구』 7권 1호 (2006): 121-151.
조이제. 『김창준 목사의 생애』 감리교와 역사. 서울: 한국감리교회사학회, 1990.
주종건. “無産靑年運動과 朝鮮.” 『개벽』 39호 (1923).
차혜영. “청년의 기억, 청춘의 이미지, 1930년대 일본체험 회고담 연구 2.” Comparative Korean Studies Vol. 20 No. 3 (2012): 261-295.
한경직. 『건국과 기독교』 서울: 보린원, 1949.
. 『한경직목사설교전집』 1 서울 : 大韓예수교장로회, 1975.
한국기독교성령100년사편찬위원회. 『한국기독교성령 백년인물사 2』 서울: 쿰란출판사, 2009.
Bruen, Clara Heldberg. 40 Years in Korea. Vol. I. 서울: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87.
Chestnut, Arthur B. Put ... Shoes on His Feet. Tulsa, Oklahoma: Christian Publishing Services, Inco, 1989.
Choi, Jay W.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Korean Classical Pentecostalism (1930–1962).” Ph.D. Dissertation, Fuller Theological Seminary, 2017.
Kim, Ig-Jin. “History and Theology of Korean Pentecostalism: Sunbogeum (pure gospel) Pentecostalism.” Ph.D dissertation, Zoetermeer, Netherlands: Uitgeverij Boekencentrum, 2003.
Rhodes, Harry A. History of the Korea Mission Presbyterian Church U.S.A 1884-1934. Seoul: The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Department of Education, 1984.
Suzuki, Masakazu (鈴木正和). “The Life and Ministry of Kiyoma Yumiyama and the Foundation of Japan Assemblies of God.” Asian Journal of Pentecostal Studies 9:2 (2006): 220-243.
. “The Origins and the Development of the Japan Assemblies of God: The Foreign and Japanese Workers and Their Ministries (1907 to 1975).” Ph.D. Dissertation, Bangor University, 2011.
McGee, Garry B. “Three Notable Women in Pentecostal Ministry.” Assemblies of God Heritage (Spring, 1986): 12.
Yumiyama, Kiyoma (鈴木正和). “Pentecost in the Land of the Rising Sun.” World Pentecost (1971): 10
鈴木正和. “韓国アッセンブリー教団の礎を築いた人たち.” https://fellowship.j-ag.org/2021/09/16/fire-of-holy-spirit06/. 2022년 3월 12일 검색.
Juergensen, John W. “Opening New Territory.” Pentecostal Evangel (1928-10-13): 11.
. “Report From Nagoya, Japan.” Pentecostal Evangel (1929-09-21): 11.
Juergenson, John W. and Mrs. “Pentecostal Fires Falling In Nagoya, Japan.” Pentecostal Evangel Nov. 951 (June 4, 1932), 7, 11.
Juergensen, Marie. “Heralding the Pentecostal Message in Japan.” Pentecostal Evangel (1931-06-27): 1, 6.
. Foundation Stones: Carl F. Juergensen. Springfield, Missouri: Foreign Mission Department, AG, 1960.
朴珍煥. “神の 偉大なる 勸力と 無限なる 愛と 摂理.” 『後の 雨』 (1930.8.1): 8
. “名古屋教会報.” 『後の 雨』 (1930.8.1.): 8
朴聖山. “悔改.” 『後の 雨』 (1931.1.1): 7.
. “名古屋 朝鮮 聖書 教会報.” 『後の 雨』 (1931.4.1.): 6.
堀和生. “日帝下 朝鮮における 植民地 農業政策.” 『日本史硏究』 (1976): 171
丸⼭栄. “福⾳ 使者の 派遣.” 『永遠の 御霊』 第37号 (1932.6.1)、7ページ.
喜代馬, 弓山. “インタビュー 日本の ペンテコステ 運動.” 『現代宗敎』 東京: 東京堂出版, 2001): 152.
“故姜金福君 團體聯合葬.” 『조선일보』 (1947년 2월 26일), 2.
“軍威 . . . 靑年 同盟 創立大會.” 『中外日報』 (소화 이년 팔월 삼십 일일, 1927년 8월 31일): 四.
“軍威 靑年 同盟 友保支會 發會.” 『東亞日報』 (召和 二年 九月 十五日, 1927년 9월 15일): 4
“基督敎民主同盟結成準備.” 『中外經濟新報社』 (1947년 2월 22일), 1.
“基督敎 民主同盟 結成式.” 『獨立新報社』 (1947년 2월 25일), 1.
“基督敎民主同盟結成大會에 不祥事.” 『工業新聞社』 (1947년 2월 26일), 1.
“基督敎民主同盟의 中央部署發表.” 『中外經濟新報社』 (1947년 3월 6일), 1.
“기독교민주동맹과 무관.” 『조선일보』 (1947년 3월 4일), 2.
“基督敎民主同盟.” 『民報』 (1947년 5월 31일), 2.
“金飛行士歡迎會.” 『每日申報』 (1929년 1월 9일), 7.
“勞動人民基礎의 「民戰」.” 『獨立新報』 (1947년 2월 5일): 1.
“民戰 路線은 正當.” 『獨立新報』 (1947년 1월 30일), 1.
“普校設立許可: 九年間繼續欺罔.” 『中外日報』 (1928년 03월 26일), 2.
“蘇聯革命記念日期한 首都管下 拘束者氏名.” 『朝鮮日報』 (1948년 11월 11일), 2.
“所謂 基督敎의 民主同盟을 否認→社會에 事實을 聲明.” 『現代日報社』 (1947년 3월 1일), 2.
“仙源興農會 定期總會.” 『中外日報』 (召和 三年 一月 十三日 [1928년 01월 13일]): 四.
“오호! 고 강금복군 애국단체연합장; 조 강금복 참사.” 『現代日報』 (1947년 2월 21일), 2
“中部労働組合.” 『部労働新聞』 제4호 (1930년 5월 15일)
“興農會組織.” 『동아일보』 (1921년 10월 2일), 4.
“흥농회의 발회식.” 『동아일보』 (1922년 1월 9일), 3면.
慶尙北道警察部, “内地在留朝鮮人の状況.” 『集成』 第5巻 (1929).
“創刊辭.” 『한글』 創刊號 (昭和二年七月二十五日): 一.
“Another Martyr in Korea.” Pentecostal Evangel, Number 1955 (October 28, 1951): 5.
“Graduating Class April 10th 1921.” Trust Vol. 20, No. 2 (April 1921): 2.
“Juergensen Mr. J. W.” Kirisutokyo Nenkan (1927): 342.
“J. W. Juergensen Passes Away.” Pentecostal Evangel (1938.12.03): 7.
“건학이념 및 교육방향.” 『계성고등학교』, http://www.keisung.hs.kr/index.do?menuCd=MCD_000000000000079770, 2022년 4월 20일 검색.
“계성고등학교(대구).” 『나무위키』, https://namu.wiki/w/%EA%B3%84%EC%84%B1%EA%B3%A0%EB%93%B1%ED%95%99%EA%B5%90%28%EB%8C%80%EA%B5%AC%29, 2022년 4월 20일 검색.
“계성고등학교(啓聖高等學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3177, 2022년 4월 20일 검색.
“계성박물관.” 『계성 중고등학교 동창회』, http://www.keisung.or.kr/02ksschool/museum.html?page=3&. 2022년 4월 20일 검색.
“고 홍대위 목사 구원의 진리 증보판.” 『매일신문』, http://mnews.imaeil.com/page/view/1993122408081518577, 2022년 5월 28일 검색.
“교단역사.”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http://www.kihasung.org/tong/document/document_view.asp?uotc_code=1444&uotc=6088&chk_ON=undefined&lef=01&sublef=undefined, 2022년 5월 4일 검색.
“교회소개, 연혁” 『가양제일교회』, http://www.kayang.org/, 2022년 5월 28일 검색.
“구원에 직결된 것 아니라면, 다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 『아이굿뉴스』, 기독교연합신문, (2020년 7월 6일), https://www.igood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63742, 2022년 5월 28일 검색.
“기독교민주동맹.”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75981, 2022년 4월 20일 검색.
“김성수(金性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tem/E0009469, 2022년 5월 7일 검색.
“김명식(金明植).”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SearchNavi?keyword=%EC%9E%A5%EB%8D%95%EC%88%98&ridx=2&tot=8, 2022년 5월 7일 검색.
“농회.”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B%86%8D%ED%9A%8C, 2022년 4월 30일 검색.
“단행본.” 『재단법인 현담문고』, http://adanmungo.org/result.php?page=9&mode=cate&q=&kind=%EB%8B%A8%ED%96%89%EB%B3%B8&cate=%EB%AC%B8%ED%95%99, 2022년 5월 22일 검색.
“대한국민항공사(KNA)를 아시나요?” 『하늘따기의 역사이야기』, https://blog.daum.net/coar21/42, 2022년 5월 28일 검색.
“묻혔던 순교역사 재조명 … 믿음의 유산으로 이어갈 것.” 『기하성신문』, http://kagnews.net/bbs/board.php?bo_table=sub04&wr_id=15, 2022년 5월 7일 검색.
“129년 발자취: 주요 연혁.” 『대한예수교 장로회 승동교회』, http://seungdong.or.kr/tong/history/history_main.asp?sub=history&lef=05&sublef=undefined, 2022년 5월 28일 검색.
“보통학교.” 『나무위키』, https://namu.wiki/w/%EB%B3%B4%ED%86%B5%ED%95%99%EA%B5%90, 2022년 4월 20일 검색.
“‘비밀청원서’ 美서 발견… 故한경직 목사, 광복 직후 소련군 만행 ‘폭로’.” http://www.enews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098254, 2022년 5월 29일 검색.
“성령 100년 역사 속에 쓰임 받은 사역자들의 휴먼스토리.” 『뉴스미션』, http://www.newsmission.com/news/news_view.asp?seq=32457, 2022년 5월 8일 검색.
“소련군에게 무기 넘겨받은 공산주의자들, 라디오 방송국과 지역신문 빼앗고 있다… 반대세력 학살 위협하고 대낮에 총살.” 『조선일보』 (2017년 8월 16일),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8/16/2017081600252.html, 2022년 5월 29일 검색.
“순복음문학회, 1회 박성산 문학상 시상식.” 『크리스천투데이』, http://www.christiantoday.co.kr/articles/133599/20041213/%EC%88%9C%EB%B3%B5%EC%9D%8C%EB%AC%B8%ED%95%99%ED%9A%8C-1%ED%9A%8C-%EB%B0%95%EC%84%B1%EC%82%B0-%EB%AC%B8%ED%95%99%EC%83%81-%EC%8B%9C%EC%83%81%EC%8B%9D.htm, 2022년 5월 7일 검색.
“시모노세키시.”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8B%9C%EB%AA%A8%EB%85%B8%EC%84%B8%ED%82%A4%EC%8B%9C, 2022년 4월 17일 검색.
“안의와(安義窩, James Edward Adams, 1867~1929) 선교사.” 『KCM』, http://kcm.kr/dic_view.php?nid=39695, 2022년 4월 20일 검색.
“오늘의 약사.” 『한국컴퓨터선교회』, http://kcm.kr/history_more.php?page=7&mkey=1&date=&kword=%BD%C5%C7%D0&scheck=1&starget=&smon=&sday=&sbc=&sdate=&ebc=&edate=, 2022년 5월 28일 검색.
“우보면.” 『내사랑 군위』, https://www.gunwi.go.kr/ko/page.do?mnu_uid=277&, 2022년 4월 20일 검색.
“일제 강점기의 교육.” 『위키백과』, https://ko.wikipedia.org/wiki/%EC%9D%BC%EC%A0%9C_%EA%B0%95%EC%A0%90%EA%B8%B0%EC%9D%98_%EA%B5%90%EC%9C%A1, 2022년 4월 28일 검색.
“중외일보.” 『한국사 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download.do?levelId=npjo&fileName=intro_npjo.pdf, 2022년 5월 8일 검색.
“최용신.”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C%B5%9C%EC%9A%A9%EC%8B%A0, 2022년 5월 4일 검색.
“평생 꾸지 않은 넉넉한 삶.” 『중국을 주께로』 통권 69호 (2001년 4월 20일), http://www.chinatogod.com/main/z3s_c_v.php?no=1221&PHPSESSID=43d8f6a70594c987b09ff491856ab470, 2022년 5월 28일 검색.
“학교연혁.” 『우보초등학교』, http://school.gyo6.net/ubo/0104/history, 2022년 5월 20일 검색.
“Founder of Trust magazine had unusual ministry opportunities.” Trust : Pentecostal Voices from the Past, http://trustjournal.info/ 2022년 2월 6일 검색.
'한국오순절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 오순절 선교사 글레이디스 마가렛 파슨스(Gladys Margaret Parsons) (0) | 2022.08.07 |
---|---|
한국을 사랑한 오순절 선교사 메리 C. 럼시 (0) | 2022.06.18 |
1932년에서 1949년까지의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교단 명칭 연구 (1) | 2022.03.26 |
오순절 선교사 메리 럼시(Mary C. Rumsey)의 한국 입국과 출국 시기에 대한 연구 (0) | 2022.03.23 |
한국의 또 다른 순교자 오순절 박헌근 장로 (0) | 2019.11.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