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레이디스 마가렛 파슨스
2022년 8월 7일
순복음총회신학교 조교수 이창승
I. 들어가는 말
한국에서 사역했던 오순절 선교사 글레이디스 마가렛 파슨스(Gladys Margaret Parsons)는 지금까지 한국에서 “팔선”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지금까지 자료들에서는 그녀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들이 존재했다. 첫째, 그녀의 한국에 머문 기간에 대해 그릇된 정보가 있었다. 스테츠는 “1930년에 개인 자격의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2년 동안만 머물렀다”고 적었다. 그리고 30년사는 파슨스가 1930년 4월에 그리고 1932년에 내한하여 1933년에 떠났다고 썼다.
둘째로, 그녀의 이름에 대한 부정확한 정보가 있었다. 그녀는 한국 오순절주의자들 가운데서 가끔 T. M. Parsons라는 남성 선교사로 오인되기도 한다. 박용규에 의하면 T. M. 파슨(T. M. Parsons)이라는 미국인 선교사가 1936년에서 1937년까지 조선에 있었다. 미 하나님의 성회의 한국 선교사였던 존 스테츠(John Stetz)는 세계 2차대전 이전에 한국에 왔던 열 명의 여성 오순절 선교사들을 열거했는데, 그 명단에서 그녀는 “Mrs. Gladys Parson”으로 표기되었다. 그런데 이영훈은 G. M. Parsons를 T. M. Parson이라고 표기하고, 그녀를 남성(he)으로 묘사했다. 이런 오인은 스테츠에게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김익진은 스테츠의 편지에 의존하여 파슨스에 대해 “세계 곳곳에서 사역해 왔다”고 적었다. 사실, 파슨스는 한국에 오기 전에도, 또한 미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세계 곳곳에서 사역하지 않았다. 세계 곳곳에서 사역했던 선교사는 아마도 T. M. 파슨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영훈은 김익진의 자료를 보고, 분명 김익진이 “Gladys Parson”이라고 썼는데도, 그 인물을 “T. M. Parson”이라고 나름 정정하여 표기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상윤은 그녀를 김익진과 이영훈의 표기를 합하여 “T. M. and Gladys Parson”이라고 표기했다.
본 글은 글레이디스 파슨스에 대한 보다 정확한 정보들을 바탕으로 이런 부정확한 정보들을 최대한 바로잡아 파슨스의 삶을 재구성하려 한다. 물론 이 글도 완전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후의 보다 능력 있는 연구자들이 보다 정확한 파슨스의 삶을 재구성할 것을 기대한다.
II. 탄생과 성장
A. 탄생
G. M. 파슨스(Gladys Margaret Parsons)는오대호 가운데 하나인 수퍼리어호의 연안도시, 위스콘신 주, 수퍼리어(Superior, Wisconsin)에서 1905년 4월 27일에 태어났다. 그녀는 다섯 아이들 가운데서 넷째였다. 그녀의 부모, 다니엘(Daniel)과 파니(Fannie or Fanny)는 둘 다 1980년대에 스칸디나비아에서 이민왔는데, 아버지는 스웨덴에서 그리고 어머니는 핀란드에서 왔다. 다니엘은 경찰이었고, 파니는 가정주부였다.
B. 성장
파슨스는 1917년에 수퍼리어시의 존 에릭슨 공립 보통학교(ヅヨン エリクソン 公立 普通學校, John Ericsson Public School)를 졸업했다. 수퍼리어에는 John Ericsson Public School이 1892부터 1988까지 존재했었다.
그녀는 수퍼리어 중앙 여학교(スピリアー市 中央女學校)를 1921년에 졸업한 후, 1924년에 위스콘신 주, 화이트워러(Whietewater, Wisconsin)에 있는 2년제 전문학교 “화이트워러 노말 학교”(Whitewater Normal School)를 졸업했다. 그녀는 1933년에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서류들 가운데서 자기 이력서에서 그 학교의 교명을 “ホワイト ウオーター 專門學校”라고 표기했다. 그 교명에서는 “Normal”이 누락되었다. 그리고 파슨스는 “School”을 “전문학교”라고 의역함으로써, 그 학교가 2년제 전문대학임을 드러냈다. 이 학교는 1868년 4월 21일에 설립되었고, 1870년 6월에 첫 교사들을 배출했다. 1927년에 교육학 학사를 수여하는 인정교가 되었고, 교명을 화이트워러 교육 대학(Whitewater Teachers College)으로 바꾸었다. 1951년에 위스콘신 주립대학-화이트 워러(Wisconsin State College-Whitewater)가 되었고, 1971년에 위스콘신 대학교-화이트 워러(The University Wisconsin-Whitewater)가 되었다.
파슨스는 교육대학을 졸업한 후 1924년부터 1928년까지(自 大正 十三年 至 昭和 三年) 수퍼리어시의 공립 중학교(スピリアー市 公立 中學校)에서 상업과목 교사(a commercial teacher)로 일했다. 그 학교는 “수퍼리어 공립 학교”(Superior Public Schools)로 현존한다. 수퍼리어 공립 학교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그리고 고등학교를 포함하고 있다.
파슨스는 위스콘신 주, 수퍼리어에 있는 교회에 다니지 않고, 인근 미네소타 주, 덜루스(Duluth, Minnesota)에 있는 오순절 교회 “The Duluth Gospel Tabernacle”에 다녔다.
1908년 10월에 한 형제는 오레곤에서 출판되고 있던 『사도신앙』에 위스콘신, 수퍼리어에서 일어났던 오순절적 부흥 소식을 전했다. 그 형제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수퍼리어에 그분의 영을 부어주셨다. 다섯 명이 성령침례를 받고 성령이 말하라고 주시는 대로 다른 방언을 말했다. 작은 집에서 열린 기도회 동안, 한 자매가 하나님께 항복하고 보혈로 씼음 받았으며, 한 환상에서 7년 전에 세상을 떠난 그녀의 어린 아들과 함께 하늘 문 안에 서 계신 예수님을 보았다. 예수께서는 그녀에게 자신이 곧 재림할 것이며, 그 길은 좁지만, 바르게 걷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는 충분하다고 말씀하셨다. 자정 무렵에, 성령께서 그녀에게 부어졌고, 그녀는 독일어를 말했다. 그녀는 노르웨이 출신이고 그래서 독일어를 알지 못했다. 독일어를 아는 한 형제가 그녀가 말한 것을 통역했다. 파슨스는 오프스테드가 그랬던 것처럼 1908년 10월에 수퍼리어에서 일어난 오순절적인 부흥의 영향을 받아 오순절주의자가 되어 수퍼리어에서 덜루스에로 오가며 그 오순절적 The Duluth Gospel Tabernacle에 출석하게 되었을 것이다.
교사직을 사임한 파슨스는 1928년에서 1929년까지(昭和 三年-四年) 수퍼리어 시 및 기타 여러 지역에서 순회 포교, 오순절적 전도 집회를 인도했다.
III. 한국 입국과 선교
A. 한국 입국
“RMS Empress of Japan”에 오른 G. M. 파슨스는 1930년 8월 7일에 캐나다, 벤쿠버 항을 떠나 일본으로 향했다. 그 배는 스코틀랜드, 고반(Govan)에 있는 페어필드 선박회사(Fairfield Shipbuilding & Engineering Company)에 의해 1929년에서 1930년에 카나다 태평양 증기선사(Canadian Pacific Steamships [CP])를 위해 두 번째로 만들어진 대양 항해 선박이었다. 그 배는 1930년 5월에서 1942년까지 카나다와 극동 아시아 사이를 항해했다. 그녀는 잠시 일본, 도쿄에 들러 칼 주르겐센(Carl F. Juergensen)을 만나기도 했다.
일본을 떠난 파슨스는 드디어 昭和 五年, 즉 1930년 8월 25일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선교를 위해 The Duluth Gospel Tabernacle의 파송 선교사로 조선에 도착했다. 30년사는 파슨스가 1930년 4월에 그리고 1932년에 내한하여 1933년에 떠났다고 썼다. 그러나 파슨스 자신과 오프스테드를 파송한 Independent Assemblies of God의 기관지 The Herald of Faith에 의하면, 그녀는 1930년에 한국에 왔다.
파슨스는 여성과 어린이들을 위한 기독교 사회 복지 기관이었던 “여성 사회 전도 센터”(the Woman’s Social Evangelistic Center) 소유의 한 선교사의 집에 머물렀다. 그 집은 인사동 194번지에 있었고, 창동에서 일 마일 거리에 있었다.
며칠 후에, 미국에서 상업과목 교사였던 파슨스는 영국 해외 성서 공회 한국 지부(the Korea Agency of 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에서 타이피스트와 속기사로 일하기 시작했다. 파슨스는 “여성 사회 전도 센터” 자매기관인 한국 개신교 선교 연맹(the 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의 기관지 The Korea Mission Field를 통해 한국에 있는 선교사들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곧 알려지게 되었다. 그 기관지의 1930년 10월 호는 파슨스와 오프스테드 두 사람의 새로운 오순절 선교사들의 도착을 알렸다.
초기 오순절 선교사들은 한국어를 배우지 않고 내한했다. 그래서, 그들이 도착하여 제일 시급한 것은 한국어를 익히는 것이었다. 당시, 개신교 선교부 공의회 (the Federal Council of Protestant Evangelical Missions in Korea)는 1912년에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이 연합하여 세운 연합 신학교였던 피어슨 기념 성경학교(Pierson Memorial Bible School, 평택대학교 전신)의 부설 기관으로서 언어학교를 개설하고 있었다. 그 학교는 정동에서 가까운 “89 서대문정 2정목”(현 신문로 2가)에 있었다. 그 언어학교는 일 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각 8주간, 3년 진행되는 한국어 집중 교육 기관이었다. 그 한국어 강좌들은 선교사들에게 인기가 높아서 1919년에서 1923년 사이에 선교사들 가운데 삼 분의 이 이상이 그 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웠다. 파슨스는 그 언어학교(the Federal Council Language School)에 2년 동안 다녔다. 또한 허홍도 파슨스의 언어 교사 겸 통역자로 일하기도 했다. 비록 허홍은 대부분 럼시와 동역했지만 파슨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오프스테드(Elfreeda Ofstead)는 허 형제가 자신과 파슨스의 언어 교사였다고 증언했다. 1933년도 11월에 조선총독부에 제출한 서류 가운데 파슨스의 이력서에 따르면, 그 이력서를 작성할 당시에 파슨스는 “현재 조선어 수학 중”(目下 朝鮮語ヲ 修學中)이었다.
B. 수창동 교회 설립과 지원
2년 후, 파슨스는 주일학교를 열었으며, 105명의 어린이들이 등록했다. 1933년 9월 4일에 파슨스는 한국에서의 첫 전도 집회를 열었다. 이때 존 주르겐센의 일본 성서신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한 배부근이 그녀를 도왔다. 첫 집회에서 두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자주 따르는 표적들로 그분의 말씀을 확증하셨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들이 놓임을 받았다. 파슨스는 오프스테드와 함께 배부근 목사와 1933년 5월경 사직 공원 전방 300미터 지점, 경성부 사직동 106번지에 그리스도의 교회 건물을 임대해서 한국에서 두 번째 오순절 교회인 수창동교회를 세웠다. 그리고 파슨스와 오프스테드는 건물 임대료를 매월 감당했다. 파슨스는 비록 주로 박성산이 아닌 배부근과 동역했지만, 박성산의 부인 유지혜 여사와 각별하게 친하게 지냈다.
C. 벳시, 메르테트와 협력
30년사에 의하면, 파슨스는 곧 영국 오순절교회 소속교인 벳시(Lillian Vessey)와 메르테트(Elsie Hannah Meredith)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불러들였다. 그녀가 2년 만에 귀국하면서 영국 오순절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편지로 요청했다는 것이다. 국제신학연구원은 “팔선은 미국 오순절 교회에 선교사 파송을 편지로 요청해서 1933년 영국 오순절 교회의 신자였던 메레디드와 베시 등이 한국에 오게 되었다”라고 썼다. 그리고 김익진은 파슨이 개인자격 선교사로 세계 여러 나라를 다녔기 때문에, 그 두 영국 여성들을 영국에서 만났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그녀는 한국 이외에 선교사로 갔던 나라가 없었다.
사실은, 도날드 기(Donald Gee)에 의하면, 일본 선교사였던 영국인 윌리엄 테일러(William James Taylor)의 부인 메리 테일러(Mrs. Mary Taylor)가 벳시와 메르테트를 파슨스에게 소개했다. 메르테트(1902-1966)와 벳시(1902-??)는 1932년 9월 30일에 조선 선교를 위해 영국을 떠났다. 그들은 조선으로 오는 도중에 우연히 메리 테일러를 만났다. 그때 영국인 테일러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와 협력 선교를 위해 홍콩에 거주하면서, 중국 순회 부흥회를 열고 있었다. 테일러는 그들에게 조선의 경성에서 사역하고 있던 파슨과 오프스테드를 소개했다. 베시와 메르테드는 그 소개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파슨과 오프스테드와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더하여 테일러는 한국에 있는 파슨과 오프스테드에게 벳시와 메르테드를 소개했다. 벳시와 메르테드는 1933년경 한국에 입국하여 파슨과 오스트테드와 함께 사역했다.
D. 한국 최초의 오순절 교단 설립
파슨스는 1932년 11월 8일에 조선총독부에 “포교관리자 설치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 신청서에 기록된 포교관리자는 럼시가 아니었고, 파슨스(巴善, ヅー エム パールソン, Gladys Margaret Parsons)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상업교사이었던 만큼 단체 설립과 공문작성 등에 있어서 럼시보다 더 적합했던 것 같다. 그리고 이 신청서에 기록된 “교파 명칭”(敎派 名稱)은 “基督敎 五旬節 敎會”였다. 이 교단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전신이었으며, 한국 최초의 오순절 교단이었다. 그녀가 공식적으로 오순절 교단을 설립함으로써, 이후 다른 오순절 선교사들과 조선인 사역자들이 그 우산 아래서 사역할 수 있게 되었다.
E. 소속 교단
30년사는 “미국 오순절교회 소속교인 팔선 선교사가 한국에 순전한 개인자격으로 선교차 왔다”고 기술한다. 그런데 그녀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입장에서는 개인자격 선교사였지만, 사실은 어떤 교단의 파송 선교사였다. 그녀의 소속은 그 포교관리자 설치 신청서 서류에 첨부된 그녀의 “안수례증”(按手禮證)에 표기되었다. “기독교 오순절교회”의 첫 포교관리자 팔선이 신청서에 첨부했던 그녀의 “안수례증”은 그녀가 “신의 교회(神-敎會)” 회원이라고 적었다.
안수례증(按手禮證)
원적: 미국 위스콘신 주 수퍼리어 시
G. M. 파슨
명치 39년(1905년) 4월 27일 생
위 자는 신의 교회(神-敎會)(히 12:23) 회원으로 하나님(神)의 은덕(賜物)과 그리스도(기독)의 예복음(禮福音) 전도에 대한 소명을 받았음을 표시하는 바 기도와 안수를 정식으로 성별함으로 이에 우리들이 서명하고, 복음의 사역자로 그가 일반 복음 전도에 관한 모든 직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승인함. 서력 1930년 7월 23일
안수례증에 나타난 승인자들의 이름들 중 첫 이름은 “イー ツー エリツクソン”이었는데, 영문으로 역번역하면, 엘머 C. 에릭슨(Elmer C. Erickson, 1896-1980)이었다. 에릭슨은 더함(William H. Durham)의 사역의 영향을 받아 침례교에서 오순절주의로 돌아섰으며, 교회의 경직된 조직에 대해 강한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는 지역 교회/회중의 자율성을 선호했다. 1915년 경에 엘머 C. 에릭슨은 미네소타 주, 덜루스(Duluth, Minnesota)에 “덜루스 복음 장막”(the Duluth Gospel Tabernacle)을 개척했다. 그 교회는 당시에는 스칸디나비아계 미국 오순절 회중들로 구성되었었다. 에릭슨은 1922년에 “독립 하나님의 성회”(the Independent Assemblies of God(현재 the Fellowship of Christian Assemblies)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안수례증에 나타난 “神-敎會”는 그녀를 선교사로 파송한 교단 “the Independent Assemblies of God”에 대한 번역이었던 것이다. 그 교단은 “미국 A.G”와 교리적으로는 거의 동일하지만, 각 지역교회의 독립성에 더 무게중심을 두었다. 그 교단은 대부분 스칸디나비아 오순절 회중들로 구성되었다.
독립 하나님의 성회 안에서 각 지역 교회는 그 자신의 뜻에 따라 해외 선교를 착수했다. 그 결과, 덜루스 복음 장막이 속한 교단(the Independent Assemblies of God)은 또한 그 교회의 교인이었던 글레이디스 M. 파슨스를, 안수례증을 발급하며, 1930년에 한국에 선교사로 파송했다. 그래서 그 “안수례증”의 영문은 아마도 “Certification”(증서) 혹은 “The Certification of Missionary”(선교사 증서)이었을 것이다.
IV. 귀국과 소천
G. M. 파슨스는 오프스테드가 폐렴과 장티푸스로 인해 대수술을 받고 미국으로 돌아가야 했을 때, 정신적인 충격을 받고 더 이상 선교사역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파슨스는, 도날드 기에 의하면, 1934년 6월에 오프스테드가 미국으로 돌아갔을 때 함께 동행했다.
그녀는 아마도 1930년대 후반에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을 것이다. 그녀는 남은 생애 동안 로스앤젤레스 지역에서 30년 동안 고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그녀는 1974년 11월 11일에 로스앤젤레스에서 69세의 나이로 소천했다.
V. 나가는 말
글레이디스 마가렛 파슨스(Gladys Margaret Parsons), 한국명 파선(巴善)은 미국 위스콘신, 수퍼리어(Superior, Wisconsin)에서 1905년 4월 27일에 태어났다. 파슨스는 1908년 10월에 수퍼리어에서 일어났던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가 발생했던 오순절적 부흥의 영향을 받고 인근 미네소타, 덜루스에 있는 오순절 교회, The Duluth Gospel Tabernacle에 다녔다. 1924년에 위스콘신 주, 화이트워러(Whietewater, Wisconsin)에 있는 2년제 교육 전문학교 “화이트워러 노말 학교”(Whitewater Normal School)를 졸업한 그녀는 1928년까지 수퍼리어 공립 중학교에서 상업교사로 재직했다.
그녀는 교직을 사임한 후 수퍼리아를 중심으로 순회 전도 집회를 인도하다가 1930년 8월 25일에 The Duluth Gospel Tabernacle의 파송 선교사로 한국에 입국했다. The Duluth Gospel Tabernacle의 담임목사 엘머 C. 에릭슨(Elmer C. Erickson)은 1922년에 “독립 하나님의 성회”(The Independent Assemblies of God, 현재 the Fellowship of Christian Assemblies가 형성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엘머 C. 에릭슨 등이 사인하고 증명한 파슨스의 안수례증에 나타난 “神-敎會”는 그녀를 선교사로 파송한 교단 “The Independent Assemblies of God”에 대한 번역이었다.
영국 해외 성서 공회 한국 지부에서 타이피스트와 속기사로 일하면서 2년간 조선어를 익힌 파슨스는 주일학교를 열면서 본격적인 한국 선교에 나섰다. T. M. Parsons라는 다른 인물과 혼돈되기도 하는 파슨스는 메르테드, 배부근과 함께 1933년 5월 한국에서 두 번째 오순절 교회인 수창동교회를 세우고 지원했다. 그녀가 벳시와 메르테드를 불러들였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들은 1933년경 메리 테일러 부인(Mrs. Mary Taylor)의 소개와 다리 역할에 의해 한국에 오게 되었다.
파슨스는 1932년 11월 8일에 한국 최초의 오순절 교단인 “기독교 오순절 교회”(基督敎 五旬節 敎會)를 세워 그 우산 아래서 다른 오순절 선교사들과 조선인 사역자들이 오순절 운동을 할 수 있게 했다. 이 교단 설립은 글레이디스 마가렛 파슨스가 한국 오순절 교회를 위해 행한 가장 큰 업적이며, 한국 오순절 교회가 영원히 기억하고 감사해야 할 유산이었다.
파슨스는 1934년에 4년간의 조선 선교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 교편을 잡았으며, 1974년 11월 11일에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서 69세에 소천했다.
글레이디스 마가렛 파슨스의 연보
1905년 4월 27일 위스콘신, 수퍼리어에서 탄생
1917년 수퍼리어의 존 에릭슨 공립 보통학교 졸업
1921년 수퍼리어 중앙 여학교 졸업
1924년 화이트워러 노말 교육 전문학교 졸업
1924년 – 1928년 수퍼리어 공립 중학교 상업교사로 재직
The Duluth Gospel Tabernacle에 다님
1928년 – 1929년 순회 포교, 오순절적 전도 집회 인도
1930년 8월 25일 “神-敎會,” 즉 “the Independent Assemblies of God”의 파송을 받고
오프스테드와 함께 한국에 입국 (25세)
여성 사회 전도 센터 소유의 한 선교사의 집에 머뭄
영국 해외 성서 공회 한국 지부에서 타이피스트와 속기사로 일하기 시작
1931년 – 1932년 피어슨 기념 성경학교의 부설 기관으로서 언어학교에서 조선어 익힘
1933년 9월 4일 한국에서의 첫 전도 집회 개최
1933년 5월 배부근과 함께 한국 오순절 두 번째 교회인 수창동 교회 개척
메리 테일러로부터 벳시와 메르테트를 소개받고, 동역 시작
1933년 11월 8일 조선총독부에 “포교관리자 설치 신청서” 제출
한국에 “基督敎 五旬節 敎會”라는 첫 오순절 교단 설립
1934년 미국으로 귀국, 교직에 복귀 (29세)
1974년 11월 11일 로스앤젤레스에서 69세에 소천
'한국오순절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한 영국 오순절 선교사 엘시 한나 메레디트와 릴리안 베시(Elsie Hannah Meredith and Lillian Vessey) (1) | 2022.09.28 |
---|---|
한국 오순절 선교사 엘프레다 오프스테드 (Elfreeda Ofstead) (0) | 2022.08.21 |
한국을 사랑한 오순절 선교사 메리 C. 럼시 (0) | 2022.06.18 |
한국 오순절교회의 영적 아버지 박성산 (0) | 2022.05.29 |
1932년에서 1949년까지의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교단 명칭 연구 (1) | 2022.03.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