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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오순절역사

오순절 선교사 메리 럼시(Mary C. Rumsey)의 한국 입국과 출국 시기에 대한 연구

한오신 2022. 3. 23. 14:41

 

메리 C. 럼시

 

 

오순절선교사메리럼시의한국입국과출국시기(이창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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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메리 럼시(Mary C. Rumsey)는 한국에 오순절운동을 전해 준 초기 선교사들 중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되어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신빙성 있는 사료들에 기반하여 그녀에게 집중하는 학문적 연구가 거의 없다. 럼시가 한국에 입국한 시기와 출국한 시기, 즉 그녀의 한국 선교의 시작과 종결 시점에 대한 연구는 그녀에 대한 학문적 연구의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그녀가 한국에 입국한 시기와 출국한 시기에 대한 서로 다른 견해들이 존재해 왔다. 입국 시기에 대한 견해들에는 “1927년설,” “1928년설,” “1930년설,” “1931년설,” 그리고 “1932년설등 다섯 가지가 있다. 그 설들은 6년이라는 상당히 넓은 스팩트럼을 제시한다. 그리고 그녀의 한국 출국 시기에 대한 견해들에는 “1937년설“1940년설이 있다. 그 설들도 3년이라는 제법 넓은 스팩트럼을 제시한다.

    럼시의 정확한 한국 입국과 출국 시기는 언제인가? 그녀가 한국 오순절운동에 끼친 영향을 고려할 때, 그녀의 한국 입출국 시기의 정확한 설정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이 논문은 그 설들을 거론하며, 럼시가 1930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1940년에 출국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것을 주장할 것이다.

 

 

II. 럼시의 한국 입국 시기

 

A. 1927년 입국설

 

    존 스테츠(John Stetz)1927년에 한국에 온 다른 세 명의 여성 선교사들과 함께 뉴욕에서 온 럼시를 언급했다. 그는 분명하게 호주에서 두 여선교사들이 1927년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썼다. 그는 더하여 그리고”(then)라는 접속사를 사용하면서 영국에서 온 베시와 뉴욕에서 온 럼시를 묶어서 언급했다.

 

1927년에 두 미혼 여성이 오스트랄리아로부터 도착했다. 그리고 밀드레드 베시 부인이 영국에서, 메리 럼시가 뉴욕에서 왔다.

 

    럼시가 미국 뉴욕주에서 출발한 것은 확실한 것 같다. 30년사 편찬위원회에 따르면, 럼시는 본래 뉴욕시 근교에 있는 감리교회의 성가대원이었고, 간호원으로 일하고 있을 때 오순절적 은혜를 받았다. 그 후 그녀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했다. 30년사 편찬위원회는 그녀가 감리교계통 신학을 공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럼시는 감리교신학이 아닌 오순절신학을 공부했다. 럼시는 뉴욕주의 로체스터(Rochester)에 있는 Elim Tabernacle 소속 오순절 계통 로체스터 성경 훈련 학교”(Rochester Bible Training School)1921년에 졸업했다. Elim Tabernacle1906년부터 1907년까지의 로스엔젤레스 대부흥시기에 오순절적 역사를 체험한 베이커(Elizabeth V. Baker ) 자매들에 의해 세워졌다. 칼로우에 따르면, 럼시는 1926년에 뉴욕주의 코틀랜드(Cortland, N.Y.)에서 출발했다. 그는 이어서 미스 럼시는 사명을 받고 코틀랜드에서 부를 축적한 어떤 부유한 하나님의 성회 성도(a wealthy member of the Assemlies)로부터 금전적 지원으로 출발하게 되었다라고 적었다.

    스테츠의 주장과는 다르게, 럼시가 1927년에 일본에 들어갔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자료가 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 공식 일본 선교사 디트리지(Harriett Dithridge)의 회고록이 그것이다. 디트리지에 의하면, 럼시는 1927년에 일본에 갔다.

 

이 경험은 나로 하여금 내 사역 안으로 그 어떤 다른 선교사들이라도 들어오는 것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927년경 내게로 한 젊은 여성이 왔는데, 그녀는 뉴욕에서 왔으며, 그녀의 이름은 미스 메리 럼시였다.

 

스테츠의 주장보다는 디트리지의 주장이 더 신뢰성이 있는 것 같다. 왜냐하면 스테츠는 1954년에야 한국에 왔지만, 디트리지가 스스로 밝힌 것처럼, 그녀는 1927년부터 몇 년간 일본에서 럼시와 함께 동역했던(“came to me”)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럼시가 1927년에 일본에 입국하여 디트리지와 동역했던 지역은 다치카와였다. 19271224일 자의 디트리지의 선교 보고 기사는 그 서두에 디트리지에 대한 부가 설명을 붙였다. 그 부가 설명에 의하면, “헤릿 디트리지(Harriett Dithridge)는 일본의 다치카와(Tachikawa)에서 수년 동안 신실하게 일해왔다.” 일본 오순절 역사학자 수주키는 럼시가 다치카와에서 디트리지를 도왔다고 썼다. 다치카와(立川)는 동경에서 서쪽으로 40km 근처에 있는 시이다.

    디트리지와 수주키가 주장한 럼시의 1927년 일본 입국과 다치카와 사역은 1929년에 편찬된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에서 확인된다. 그 책은 재일 선교사 명단 중에 럼시에 대해 “Rumsey, Miss Mary, 1927, IND, 3833 Saka Cho, Tachikawa, Tokyo Fu”라고 소개했다. 그 소개 중에서 “1927”년은 일본 입국 연도이며, “Tachikawa”는 거주지이다.

 

B. 1928년 입국설

 

    럼시의 1928년 입국설은 한국 오순절 최초의 한국인 교역자 허홍에 의해 주장되었다. 허홍은 한국에 입국한 럼시가 맨 처음으로 오순절주의자로 변화시킨 인물로 알려져 왔다. 1950년대의 기록으로 추정되는 허홍이 손글씨로 쓴 한국 오순절 역사에 대한 자료가 남아있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오순절교회는 구미 어디를 막론하고 성신에 감동된 성도들이 자연히 뭉치어 교회를 이룬다. 곧 오순절적이다. 이러한 오순절적인 성신의 역사가 우리 한국에서도 일어났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 오순절교회에서는 럼시씨가 선교사로 1928년 봄에 자발적으로 내한하여 은혜를 나누었고, 동년(同年) 가을에는 영국에서 메레데드씨와 배시씨가, 뒤따라 미국에서 옵스테드파선씨가 선교사로 내한하여 초대교회를 상징하는 오순절적인 성신운동의 포교와 전도가 활발하여 . . .

 

    허홍은 럼시와 영국 선교사 메레데드와 배시가 同年(같은 해)에 내한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메레데드와 배시는 3팀 중에서 가장 늦게 1933년에 내한했다. 허홍은 미국 선교사 옵스테드와 파선이 영국 선교사 메레데드와 배시보다 늦게 내한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옵스테드와 파선은 영국 선교사들보다 먼저 1930년에 내한했다. 허홍은 미국 선교사들과 영국 선교사들 가운데 한 측이 럼시가 내한한 동년에 내한했다고 기억한다. 미국 선교사들은 1930년에, 영국 선교사들은 1933년에 내한했다면, 맨 먼저 내한한 럼시가 1933년에 내한하지 않았을 것은 확실하므로 럼시는 1930년에 미국 선교사들이 내한한 동년에 내한했다. 허홍의 기억은 어느 정도는 신뢰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전적으로 신뢰할 만한 것은 아니다. 럼시가 제일 먼저 내한했고, 두 팀 중에 한 팀이 럼시와 동년에 내한했다는 기억은 신뢰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영국 선교사들이 먼저 내한했고, 미국 선교사들이 나중에 내한했다는 기억은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럼시가 1928년에 내한했다는 기억은 신뢰할 만한 것이 아니다.

    1972년에 종교학자 변종호는 럼시 선교사가 1928년 봄에 한국에 왔다고 기록했다. 변종호에 따르면, 럼시가 허홍을 찾아왔던 시기는 그녀가 한국에 들어온 지 일주일이 지난 후였으며, 그때는 1928년 이른 봄이었다. 그 만남에 대한 묘사가 상당히 자세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변종호는 허홍에게서 그 정보를 취득했을 것이다.

 

때는 분명히 1928년 이른 봄 방에 꺽어다 꽂은 개나리꽃이 펴있다가 져 떨어지고 있는 어느 날 오전 11시 경이었다. 정동 구세군 본영 사무실에 노크소리가 나더니 들어선 이는 그 얼굴 생김이나 체격 풍채가 아주 준수 온후한 40세가 넘어 보이는 외국인 여성이었다. 사무실에 앉아 있던 청년 허홍이 인사를 나누니 미국서 나온 지 한 주일 되는 오순절교회 선교사 럼시부인(Miss Mary C. Rumsey)이었다.

 

    럼시의 1928년 한국 입국설은 일본 오순절 교단의 선구자 유미야마(弓山 喜代馬, ゆみやま きよま, Kiyoma Yumiyama)의 언급에 의해 뒷받침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자기가 1928년과 1929년에 한국에 오순절 교회를 세우는 것을 돕기 위해 한국에 들어갔다고 회고했다. 또한 그는 19286월부터 8월까지의 발송날자로 기록된 편지형식의 한국 선교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유미야마의 이런 회고와 보고는 거기에 럼시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지만, 그가 19286월 경에 한국으로 건너가 럼시를 도왔다고 가정할 수도 있게 한다.

    1978년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해외선교부는 럼시의 한국 도래 시기를 1928년 즈음으로 잡았다. 그 해외 선교부는 1978년에 한국에 관한 선교보고서를 작성했다. 그 보고서는 오순절적 메시지를 전하는 럼시가 비공식 선교사로서 1928년 즈음에 한국에 들어갔다고 썼다.

 

일찍이 1928년 즈음에 한국에 오순절 메시지를 전하는 영국과 미국 선교사들이 있었다. 이 즈음에 미스 메리 럼시가 한국에 가서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비공식 선교사로 수년 동안 섬겼다.

 

미 하나님의 성회의 럼시의 내한 년도에 대한 기술은 아마도 한국 하나님의 성회의 문서들을 참고해서 작성되었을 것이다.

    2003년에 장로교목사이며 비오순절 학자인 김익진도 자기의 박사학위 논문에서 럼시가 19283월에 한국에 들어왔다고 보았다. 김익진의 럼시 한국 입국 시기에 대한 추정도 역시 허홍의 회상을 따라 기록된 한국 하나님의 성회의 문서들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일 것이다.

    2009년에 출판된 책에서 이영훈은 럼시가 1928년에 한국에 오순절적 신앙을 맨 처음 전해주었다고 주장했다. 그는 감리교인이었던 럼시가 아주사 집회에 참석하고 오순절주의자가 되었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럼시는 오순절적 배경을 가지고 1928년에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였다. 그런데 그의 주장과는 달리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럼시 이전에 이미 한국에는 오순절적 신앙을 전하는 여성 선교사들이 존재했었을 수도 있다. 이영훈의 1928년 입국설도 허홍의 회상을 따른 변종호 등 한국 하나님의 성회의 문서들을 바탕으로 주장된 것이었을 것이다.

    성결교 역사학자 박명수에 따르면 1928년에 한국에 방언을 강조하는 오순절주의가 존재했다. 그는 그 근거로 감리교가 1928년에 지금에 와셔 셩신을 밧고 각국 방언을 한다는 자들은 미혹된 생각이라 하겟슴니다라고 주장했었음을 인용했다. 그런데 감리교의 이런 반응이 꼭 럼시의 사역의 결과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전술한 것처럼 럼시가 아니라도 당시 한국에 베시 등 다른 여성 오순절 선교사들이 존재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은 허홍의 회상에만 의존한 1928년 입국설은 이와는 상충되는 자료들에 의해 의심스럽게 된다. 럼시가 1928년 여름에도 한국이 아닌 일본에 있었다는 것은 벤더(G. R. Bender)와 럼시 자신과 디트리지, 이 세 사람의 일치하는 언급에 의해 명확하게 증명된다. 벤더는 192812월에 미국 하나님의 성회 기관지인 Pentecostal Evangel에 재일 선교사 연례회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벤더에 따르면, 디트리지와 럼시를 포함한 미국인 선교사 15명은 차로 도쿄에서 5시간 거리에 있는 산지에서(in the mountains) 연례 대회를 열었다. 그 기사는 그 연례회 참석자들이 한 곳에 모여 촬영한 기념사진을 싣고, 그 사진 밑에 설명을 붙였다. 그 사진의 윗줄 왼쪽 제일 바깥에 디트리지가 서 있고, 그 옆에 럼시가 서 있다. 벤더에 따르면, 그 일본 선교사들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해 모였다. 한 목적은 공식적인 연례회였으며, 또 하나의 목적은 비공식적인 여름 동안의 무더위를 피해 쉬기 위한 것”(for rest and to escape the heat in the summer months)이었다. 그러니까 그 회의가 열린 계절은 여름이었다. 벤더의 기사는 럼시가 1928년 여름에 일본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럼시는 192812월에 발간된 Trust에 일본 선교에 대한 글을 기고했다. 럼시에 따르면, 디트리지가 심하게 아프게 되었다. 그래서 럼시는 디트리지와 함께 휴양을 위해 산으로(to the mountains)” 갔다.

 

우리가 여기에 오기 직전에, 디트리지 양은 아팠고, 쉬기 위해 두 여름 동안 밖으로 나가지를 못했기 때문에 그녀는 밖으로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녀에게 수입이 없을 것 같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은혜롭게도 저에게 돈을 보내셨고, 저는 그 돈을 디트리지 양과 저를 휴양을 위해 산으로 데리고 갈 신실한 일본인 사역자를 보내는 데 사용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그래도 돈이 부족했었는데, 여러분의 수표가 정확한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럼시는 그 산에서 일본어가 아닌 모국어인 영어 설교를 듣고 영어로 찬양한 것을 기뻐했다. 그녀는 이 여름에 영어로 몇 설교들과 찬양을 들어서 좋았습니다라고 썼다. 럼시에 따르면, 그 모임이 열린 계절은 여름”(summer)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럼시와 디트리지가 여름에 산에서 열린 영어로 진행된 어떤 모임에 참석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들은 휴양과 모임 참석이라는 두 가지 목적으로 그 산에 간 것이었다. 럼시 자신의 언급은, 럼시가 1928년 여름에도 여전히 일본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디트리지에 따르면, 럼시와 디트리지가 모임과 피서를 위해 갔던 산은 “Karuizawa”였다. 그녀는 자기의 몸이 좋지 않았을 때, 일본인 동역자들이 심한 여름 더위를 피해 “Karuizawa”로 가기를 추천했다고 전했다.

 

그 여름을 피할 것을 . . . 그러나 나의 일본 사역자들은 매우 염려하며 내게 가루이자와로 갈 것을 강력히 권했다.

 

가루이자와정”(軽井沢町)은 일본 나가노현 기타사쿠군의 정이다. 그곳은 도쿄에서 서북쪽으로 약 160km 부분에 자리 잡고 있다. 최고 지점은 해발 2,568m이고, 최저 지점은 798.7m이다. 연평균 기온은 7.9°C로 홋카이도 수준으로 낮다. 고지에 있기 때문에 겨울 추위는 심하고 여름은 시원한 전형적인 고원형 피서지의 기후이다”(さはしくしいという 典型的高原型避暑地気候である).

    럼시와 디트리지의 언급들은 벤더의 보고와 일치한다. 벤더와 럼시와 디트리지는 산지에서 열렸던 동일한 모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벤더와 럼시 자신, 그리고 디트리지의 동일한 대회에 대한 보고는 럼시가 1928년 여름에 한국이 아닌 일본에 있었다는 것을 지시한다. 더하여, 럼시는 그 보고에서 독자들에게 이번 가을에 일본어를 더 공부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이 언급은 그녀가 1928년 가을에도 일본에 있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럼시는 1929년에도 계속 일본에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Trust19296~ 7월호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글을 기고했다.

 

일본에서 문안드립니다. 하나님의 풍성한 복이 여러분과 엘림 가족 전체에 깃들기를 기도합니다. . . 주님의 뜻이라면, 이곳[일본]에 있는 것이 좋고, 여기에 머무는 것이 아주 행복하고 기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하나님께서는 저를 한국(Korea)으로 부르셨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그곳으로 인도하실 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럼시는 이 글 서두에서 일본에서 문안드립니다라는 인사말을 통해 자신이 일본에 있음을 분명하게 밝혔다. 그리고 그녀의 이곳[일본]에 있는 것이 좋다라는 언급도 역시 그녀가 일본에 머물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리고 럼시는 1929925일에 도쿄에서 열린 존 주르겐센(John W. Juergensen)의 결혼식에도 참석했다. 또한 위에서 인용했던 것처럼, 1929년에 발간된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은 재일 선교사 명단 중에 럼시라는 이름을 올렸다. 그 책은 럼시라는 이름이 1927년과 1928년의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럼시가 1927년에 일본에 입국하여 1929년까지 일본에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게 그녀는 1929년에도 한국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며 일본에 있었던 것이다.

 

C. 1930년 입국설

 

    이 설이 입국설들 중에서 가장 가능성이 높다. 2001년에 수주키(鈴木正和, Masakazu Suzuki)는 럼시가 1930년에 한국에 갔다고 주장했다. 수주키의 그런 주장은 디트리지의 언급을 근거로 삼았다. 디트리지는 일본선교 회고록에서 럼시의 1930년 한국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1930년에 휴가차 고국에 가기로 작정했을 때, 그녀는 내가 없는 동안 나의 사역을 주관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이것을 거절했다. 나는 여전히 외국인을 신뢰하지 않았으며, 일본인이 내 사역을 주관하기를 선호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그녀에게 그녀가 언젠가는 한국에 가야 한다면, 그때가 지금이다, 일본에서 3년을 보냈다면 충분하다고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그런 것을 보아왔었기 때문에, (한국으로 소명을 받았는데, 일본에 머물러버리는) 그녀가 일본에 주저앉아 버릴까 걱정이었다. 그래서 미스 럼시는 1930년에 한국으로 갔으며(So Miss Rumsey went to Korea in 1930), 그곳에서 좋은 사역을 펼쳤고, 그녀가 했던 사역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녀는 지금 은퇴했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건강이 좋지 않다. 그것이 내가 내 사역 안에서 외국인과 가졌었던 유일하고 특별한 경험이었다.

 

    수주키는 The Japan ChristianYear Book (1915-1941)을 토대로 작성한 태평양전쟁 전 일본에 있던 오순절 선교사들의 명단 중에서 럼시의 선교기간을 1927년에서 1930년으로 표기하였다. 실제로 1930년도에 발간된 The Japan Mission Year Book, 28권은 럼시에 대해 “Rumsey, Miss Mary, IND”라고 기록했다. “IND”“independent”의 약자로서 어느 선교단체와도 관련이 없는 독립선교사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1931년에 발간된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은 디트리지에 대해 Dithridge, Miss Harriett”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럼시라는 이름은 기록하지 않았다. 럼시가 1930년 초에 한국에 왔다면, 그 해 말에 만든 재일 선교사 명단에 올랐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1930년 초에 한국에 왔으니, 1931년 명단에는 등장하지 않는 것일 것이다.

    결정적으로 1940년의 상황을 기록한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은 헤리 로드스(Harry A. Rhodes)에 의해 편집된 조선과 만주 선교사 인명부를 실었는데, 거기에 럼시의 정보가 등장한다. 이 정보에 따르면, 럼시는 오순절 교회 소속(PA, Pentecostal Assembly) 선교사로서 “34 Teidocho, Keijo”에 거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녀가 조선에 입국한 연도는 1930년이다. 최재웅은 2017년에 풀러신학교에 제출한 한국 전통 오순절주의에 대한 박사학위논문에서 이런 정보들을 근거로 럼시의 입국시기를 1930년이라고 결론지었다.

    193511월에 한국을 방문한 하워드 카터와 레스터 섬랄은 한국에 오순절운동이 들어온 연도가 1930년이라고 썼다.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는 영국 하나님의 성회의 회장이었으며, 레스터 섬랄(Lester Sumrall)은 미국 복음전도자였다. 함께 한국을 방문한 그들은 럼시와 미국 선교사들(파슨스와 오프스테드) 그리고 영국 선교사들(메레디트와 베시)을 만났다. 레스터 섬랄이 쓴 한국선교여행기가 1936년에 영국 하나님의 성회 기관지인 구원의 소식(Redemption Tidings)에 실렸다. 그 글 중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5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구의 모든 부분에서처럼 그 나라 사람들에게 신성한 영향을 시도했다.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첫 선교사[Robert J. Thomas, 1848-1886]는 그 해안에 도착한 몇 분 후 순교했다. 그의 손에는 전단지들과 복음서들이 가득했다. 그 도성의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다. 1930년에 오순절이 그 복과 능력으로 소개되었고, 그 순복음 사역을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로부터 현재까지 그분의 말씀을 영예롭고 복되게 하셨다.

 

이 부분에서 섬랄은 한국에 개신교의 최초 전례와 오순절의 최초 전례를 병행하여 썼다. 그는 먼저 한국에 개신교가 최초로 전해졌던 연도와 첫 선교사, 영국인으로서 제너럴셔먼호를 타고 왔던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 1866831) 선교사에 대해 언급했다. 그다음, 그는 한국에 오순절운동이 최초로 전해졌던 연도를 언급했다. 그런데 섬랄은 허홍이 주장한 것처럼 오순절이 1928년에 한국에 전해졌다고 쓰지 않았다. 또한 함께 한국을 방문했던 카터의 제자들, 영국인 메레디트와 베시가 한국에 도착했던 1933년에 오순절운동이 최초로 전해졌다고도 쓰지 않았다. 섬랄은 1930년에 오순절이 한국에 소개되었고, 그 순복음 사역을 시작했다고 전했다. 럼시가 내한한 최초의 오순절 선교사였으므로, 섬랄에 따르면, 럼시는 1930년에 내한했다.

 

D. 1931년 입국설

 

    이영훈은 럼시의 한국 도착을 1928년이라고 기술하기도 했는데, 럼시가 허홍을 찾아간 시기를 1931년이라고도 기술했다.

 

럼시는 1931년에 한국 구세군 본영을 방문했다. 그녀는 거기서 허홍을 만났는데, 그는 그 본영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녀는 그에게 그녀의 선교사역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변종호에 따르면, 럼시가 구세군 본영을 방문한 때는 한국에 입국한지 일주일이 지난 때였다. 그런데 이영훈은 럼시가 구세군 본영을 방문한 때가 1931년이었다고 적었다. 1931년에 그녀는 거기서 일하고 있던 허홍을 만나 선교사역을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31년에 발간된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에 럼시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은 그녀가 1931년 이전에 한국에 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E. 1932년 입국설

 

    1932년 입국설은 수주키에 의해 주장되었다. 2001년에는 럼시가 1930년에 한국에 입국했다고 주장했던 수주키(Masakazu Suzuki)2006년에 자신의 주장을 수정하여 럼시가 1932년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왔다 주장했다. 그는 럼시의 1932년 입국설의 근거로서 1932년 발간된 Trust 1월과 2월 합본호에 등장하는 선교사들에 대한 소식을 제시했다 그래서 수주키는 유미야마가 1928년에 한국에 간 것은 럼시를 돕기 위한 것이 아니었고, 그의 개인적인 가족 문제 때문이었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그는 유미야마가 럼시를 돕기 위해 한국에 간 시기는 1934년이었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1932년에 출판한 The Japan Christian Year Book에는 Dithridge라는 이름이 세 번 등장하지만, 럼시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이는 럼시가 1932년 이전에 한국에 왔다는 것을 증명한다. 또한 수주키는 2013년에 행한 한 연구에서 디트리지의 회고록을 근거로 삼아 2001년에 주장했던 럼시의 1930년 한국 입국설로 회귀했다.

 

 

II. 럼시의 한국 출국 시기

 

A. 1937년 출국설

 

    1996년에 한국 하나님의 성회 30년사 편집위원회는 서빙고 교회에서 드린 럼시 선교사의 출국 환송예배 사진을 싣고 그 하단에 다음과 같은 설명을 붙였다.

 

1937210일 럼시 선교사는 못다 이룬 선교의 한을 안고 강제 출국 당하는 비운을 겪어야 했다.

 

그 위원회는 일제가 1937년에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한국 기독교를 탄압하고 선교사들의 선교를 방해했다고 기술하였다. 그리고 그 위원회 그런 설명과 함께 럼시가 1937210일에 강제 출국을 당했다고 설명을 붙였다. 이영훈도 럼시가 1937년에 한국에서 추방되었다고 주장했다. 한 편, 미하나님의 성회는 럼시의 한국 출국에 대해 “2차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스 럼시는 한국을 떠나야만 했다라고 간단하게 기술했다.

 

B. 1940년 출국설

 

    사료에 근거해 볼 때, 럼시가 한국을 출국한 시기는 1937년보다는 1940년이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높다. 1940년 출국설은 한국 하나님의 성회 30년사 편집위원회에 의해 주장되었다. 그 위원회는 동일한 책에서 1937년 출국설과 서로 충돌되는 1940년 출국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 위원회는 1940년 출국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이 땅에 오순절신앙을 전교하려왔던 19401220일 영국 오순절교회 선교사 벳시 메르테트와 미국 오순절교회 선교사 팔선, 럼시 등도 서빙고교회에서 쓸쓸하게 환송예배를 드리고 난 뒤 강제 출국을 당했다.

 

그 위원회는 1940년 선교사들이 출국한 이유에 대해 썼다. 그 이유는 당시 주한미국총영사 마쉬(O. Gaylord Marsh)가 선교사의 완전 철수를 명령했기 때문이었다. 그 명령에 따라 11월에는 선교사와 그 가족 189명을 비롯한 219명의 미국인들이 마리포사호(SS Mariposa)로 귀국하였다. 럼시가 1220일에 출국했다면, 11월에 떠난 마리포사가 아닌 마리포사와 함께 미국과 호주를 오갔던 다른 3척의 태평양 여객선들(몬테레이, 말로, 룰린) 중의 하나를 탔을 것이다.

    럼시가 1937년에 한국에서 추방되었다고 주장한 이영훈은 베시와 메르테트가 1940년에 추방되었다고 썼다.

 

첫 오순절적 선교사 럼시는 19372월에 추방되었고, 영국 선교사들인 베시와 메르테트는 1940년에 추방되었다.

 

그런 이영훈의 주장은 그가 30년사 편찬위원회의 상충되는 주장들을 조정하기 위해 30년사 편찬위원회의 1940년 출국 명단에서 임의로 럼시를 뺀 결과일 것이다.

    1940년 출국설은 럼시와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선교국장 간에 오고 간 문서와 서신, 그리고 럼시의 귀국에 대한 미국의 한 지방 신문의 기사에 의해 강력하게 뒷받침된다. 먼저, 럼시와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선교국장 간에 오고 간 편지와 문서를 살펴보자.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선교국장은 1939323일에 럼시가 보낸 공식선교사 수락요청서에 대한 부정적인 답신을 럼시에게 보냈다.

 

개인적으로 선교지에 간 사역자들이 본국으로 돌아와 우리 선교위원회와 만날 수 있을 때까지 선교사 임명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 우리 선교국의 관례였습니다. 그러므로 만약 어떤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자매가 자진해서 본국으로 돌아와 여기 본부를 방문할 수 있고, 그리고 한국에서의 상황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가 다른 사례들에서 해왔던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결정을 연기하겠습니다. 노만 바르트(Norman Barth) 형제로부터 그런 추천서를 받아서 기뻤습니다. 그 추천서에서 그는 자매를 우리 선교사들 중 하나로 받아줄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는 그 승인 문제를 당분간 밀어붙이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했습니다. 누가 한국에서의 사역 허가를 차지해야만 하는가라는 문제는 논의의 쟁점들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자매가 우리 선교위원회를 방문할 기회를 갖게 될 때, 이것이 보다 더 이의 없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문서의 한국에서의 상황그리고 누가 한국에서의 사역 허가를 차지해야만 하는가등의 언급들은 럼시가 한국에 있었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 문서는 그 문서를 받을 럼시가 거주하고 있는 주소를 윗부분에 기재하였는데, 그 주소는 “Korea Mission of the Pentecostal Church, 34 Teido Cho. 3, Seoul, Korea”였다.

    럼시는 1939418일에 한국에서 미국 하나님의 성회 퍼킨스(Rev. Hael E. Perkins) 선교국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는 1939512일 미국에 도착했다. 럼시는 그 편지를 선교국장이 보낸 323일의 문서를 받은 후 작성했다. 그 편지에서 그녀는 일본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들과 한국에서 활동 중인 선교사들 간의 지휘체계 문제에 대해 썼다.

 

일본으로부터 온 형제들의 [한국] 방문 후, 우리들은 사안들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처음부터 제가 그렇게 하기를 바랬던 것처럼, 우리는 오해와 견해차들을 . . . . 다른 형제들이 와서 사과했으며, 그래서 우리는 친해지고 화합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 어떤 반대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지역장(선교지부장, acting head)으로 활동하는 한 분을 중심으로 동일한 지시서(the same paper)에 따라 계속 사역하고 있습니다. 요구를 받은 것처럼, 그리고 제가 목사님께 썼던 것처럼, 우리가 반드시 그래야만 하듯 진정으로 . . . 우리는 같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공식 직분을 가져야 되느냐에 관해서는 아무런 다툼도 없습니다. 저는 제가 항상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 직분을 수행하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계속 사역을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편지의 본문은 럼시의 친필로 작성되었다. 그러나 그 편지의 상부는 공문처럼 인쇄되었다. 그 상부의 왼편에는 宣敎師 嚴世, 基督敎 朝鮮 五旬節 敎會라는 한문과 “MISS M. C. RUMSEY MISSIONARY”라는 영문으로 럼시가 소개되어 있다. 그 상부의 중앙에는 “KOREA MISSION OF THE PENTECOSTAL CHURCH라는 사역 명칭이 소개되어 있다. 그리고 그 상부의 오른편에는 京城府 貞洞町 三四 朝鮮이라는 한문과 34 TEIDO CHO. 3, SEOUL, KOREA”라는 영문으로 럼시의 주소가 기록되어 있다. 이런 문서와 편지는 럼시가 1937년에 출국하지 않았고, 1939년에도 한국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럼시의 한국 출국 시기의 보다 정확한 추정은 럼시의 미국 귀국 소식을 알린 미국 지방 신문의 기사에 의해 가능할 것이다. The Evening Independent라는 미국 오하이오주의 마실론(Massillon, Ohio)의 한 지방 신문은 1941214일에 선교사 럼시가 귀국하여 그 지역의 사우스이스트 트레몬트 400번가에 살고 있는 그녀의 아주머니 밀스 부인(Mrs. B. J. Mills)을 방문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그 신문은 결혼하지 않은 럼시가 한국(Korea)과 중국에서 13년 동안 선교사로 일했다고 썼다. 그리고 그 신문은 럼시가 두 달 전에중일 전쟁 발생으로 인해 철수하게 되었다며, 럼시의 한국 출국 시기와 원인을 제시했다.

 

메리 럼시 양은 한국과 중국에서 13년 동안 선교사로 일했다. 그런데 두 달 전에 중일전쟁의 와중에서 다른 500여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철수했다. 지금은 사우스이스트 트레몬트 400번가에 살고 있는 그녀의 아주머니를 방문하고 있다.

 

 

 

 

 

그 기사가 난 19412월로부터 두 달 전(two months ago)이면, 럼시의 한국 출국 시기는 194012월경이 된다. 그 신문의 럼시의 194012월 경 한국 출국 시기 언급은 30년사 편찬위원회의 럼시의 19401220일 출국 시기 언급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III. 나가는 말

 

    이상과 같이, 한국에 오순절적인 신앙을 전해주었던 메리 C 럼시의 한국 입국과 출국 시기에 대한 여러 설들을 살펴보았다. 본 연구는 럼시가 1930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1940년에 출국했다는 것이 가장 설득력있는 주장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1926년에 미국 뉴욕주 코틀랜드를 떠난 럼시는 1927년에 한국에 입국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입국하였으며, 1928년 그리고 1929년에도 여전히 일본의 다치카와를 중심으로 디트리지와 동역했었다. 럼시는 드디어 1930년 봄에 한국으로 가라는 하나님의 소명을 향한 문이 열려 한국에 입국했다. 그로부터 10년간 한국에서 미 하나님의 성회 입장에서는 비공식 선교사였던 럼시는 그런 직함에 아랑곳하지 않고 오순절적 신앙을 전해주었다. 중일전쟁 와중에서 주한공사 마쉬의 출국령에 따라 원치 않게 1937년이 아닌 19401220일 무거운 마음으로 한국을 떠나 모국인 미국 마실론으로 갔다. 1930년에서 1940년까지 한국의 어두운 세월을 밝히며 한국인들에게 오순절 신앙을 심어주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그녀가 뿌린 씨앗이 오늘날까지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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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A Study on the Entrance into and Departure from Korea

of a Pentecostal Missionary, Mary C. Rumsey

 

Lee, Chang-Soung(Ph.D.)

Assistant Professor, Systematic Theology

Korea Christian College

Republic of Korea

 

Mary C. Rumsey has been most importantly mentioned among the early Pentecostal missionaries for Korea. But there is no academic study concentrating on her based upon trustworthy historical materials. Research on her entrance into and departure from Korea will be a good start to an academic inquiry on her. Mentioning various theories of her entrance(1927, 1928, 1930, 1931, 1932) and departure(1937, 1940), this study is insisting that Rumsey entered Korea in 1930 and departed Korea in 1940. After departing from Cotland, New York in 1926, Rumsey entered Japan in 1927. She learned Japanese and worked with Harriett Dithridge at Tachikawa from 1927 to 1929. Rumsey came to Korea in the Spring of 1930. For 10 years she brought Pentecostal faith to Korean people. In the vertex of the Sino-Jap war Rumsey was left Korea for Massillon, America on December 20, 1940.

 

 

주제어

 

메리 C. 럼시, 오순절, 선교, 한국, 일본, 헤릿 디트리지, 허홍, 하나님의 성회, 1927, 1928, 1930, 1932, 1937, 1940

 

Mary C. Rumsey, Pentecostal, Mission, Korea, Japan, Harriett Dithridge, Hong Heoh, Assemblies of God, 1927, 1928, 1930, 1932, 1937,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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