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lfreeda Ofstead, “The Autobiographical Testimony undated tape-recorded around 1985.”
미네소타 주, 덜루스(Duluth, MN)에 있는 덜루스 가스펠 타버나클(the Duluth Gospel Tabernacle)의 전 담임목사 야우히아이넨(Rev. Henry H. Jauhiainen [1924-2015])과 그의 아내 맥신(Maxine)이 이 테잎을 최재웅에게 주었다. 그리고 그 간증 테입은 최재웅의 요청이 요청하여 A. B. 리(Angela Bomina Lee)에 의해 영문으로 문자화되었다. 이 영문 간증은 최재웅의 논문에 실렸다. Jay W. Choi, “The Origins and Development of Korean Classical Pentecostalism (1930–1962),” (Ph.D. Dissertation, Fuller Theological Seminary, 2017), v, 14, 269-289.
이창승 역
2022년 8월 20일
어느 날 아침에, 나는 이 시편 찬송을 부르며 일어났다. 그 가사는 시편 23편이었다. 그 선율이 너무도 유쾌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아침에 평소와는 달리 활력이 넘쳤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무엇이었던 가를 기억해내었다. 그 전날 어떤 사람이 나에게 전화를 해 한국이 이집트에 75명의 선교사들을 파송하고 있다고 말해 주었다. 그 기쁨이 온 밤을 지나 아침까지 내게 남아 있던 것이다.
몇 달 전에, 로이 존슨 부인(Mrs. Roy Johnson)이 내게 전화를 해 자기가 기록할 테니 한국에서의 나의 경험을 테잎에 녹음해보면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느꼈다. 지난 1년 반 동안, 내 심장은 두 번 공격을 받았고, 내 눈은 보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포기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여러 번 요청을 받고, 나는 이 노년에 그것을 시도해보려 한다.
약 두 달 전에, 폴 조용기(Dr. Paul Cho-Yonggi)의 책들을 알게 되었다. 비록 나는 그 책들을 읽을 수 없었지만, 그 집에 오는 손님들은 그 책들을 보고 그것들을 빌려 갈 수 있었다. 그리스도인들뿐만 아니라 비그리스도인들을 포함한 사람들이 그 십여 권의 책들을 읽고 있으며, 그들은 그 책들이 자기 가정과 자신들에게 얼마나 복이 되는지 모른다고 말해 왔다. 나는 단지 이 책의 2장이나 4장만을 들었다. 그리고 또한, 나는 지난 세월 동안 한국의 하나님의 성회(the Assemblies of God in Korea)의 놀라운 성장을 듣게 되어 얼마나 기뻤는지 말하고 싶다. 한국의 하나님의 성회의 나이는 이제 100세가 되었다. 조 박사는 그들이 축하 행사를 열고 싶다고 말하자, “아닙니다, 우리는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로스앤젤레스 아주사 거리 선교의 여파는 약 2년 후에 수퍼리어(Superior)에 도달했다. 웨일즈(Wales)에서의 대부흥은 세기의 전환기에 발생했다. 그러나 이제 나는 기독교 교회는 세계가 경험한 대부흥들 중에 한국에서 발생했던 한 부흥을 백 년 전에 가졌었다는 것을 듣는다고 알게 되었다.
아펜젤러와 언더우드 박사는 1885년에 선교사로서 미국에서 한국으로 왔다. 그들은 한국의 북쪽, 평양까지 올라가 집회를 위해 큰 천막을 세웠다.
캐나다에서 온 하디 박사는 외과 의사이기도 했다. 그는 그의 첫 외과수술을 그 숲속에서 행했는데, 거기에는 병원이 없었다. 군중들은 그를 옴짝달싹을 못하게 할 만큼 몰려왔다. 그들은 온갖 병에 걸려 왔다. 그 당시, 한국에는 세계 그 어떤 나라보다도 인구 대비 문둥병 환자들이 더 많았다. 하디가 그 숲에서 첫 외과 수술을 끝냈을 때,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그 빈궁한 군중을 보았다. 그는 “주님, 저는 이것을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저에게 너무도 버거운 일입니다. 우리는 병원들과 간호사들을 확보할 수 있을 때까지 기다려야만 합니다. 이 군중을 헤치고 나갈 수 있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에게 가서 그들에게 조언을 얻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갔다. 그 밤에, 그 천막 집회가 열렸다. 그들이 그를 보았을 때, 그는 그들이 펴낸 한국 찬송가들 중 한 곡을 부르고 있었다. 그들은 그에게 찬양 인도를 부탁했다. 강단으로 올라간 그는 준비 찬송을 하기 전에 몇 마디 말해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는 “저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저는 거듭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는 찬양을 인도하기 전에 고백하고 싶은 죄들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고백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는 것을 말한 후, 한 한국인이 일어났고 뒤이어 다른 한국인들이 계속 일어났는데, 이 고백들은 밤낮 일주일 동안 멈추지 않았다. 그 선교사들은 지쳤다. 살인자들, 강도들 . . . 사람에게 알려진 모든 죄가 고백되었다. 밤낮 칠일 끝에, 만 명의 영혼들이 하나님의 왕국으로 인도되었다.
1908년에 나는 위스콘신, 수퍼리어에서 열린 한 부흥회 동안에 나의 마음을 주님께 드렸다. 십 대에 나는 오락에 빠진 적이 없었다. 1928년, 노르웨이, 오슬로(Oslo, Norway)에 있는 한 대형교회의 목사, T. B. 바렛(T. B. Barratt)이 덜루스(Duluth)를 방문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수퍼리어에서 덜루스로 건너갔다. 그날 저녁에 그는 내적 사람의 일곱까지 죄들에 대해 말했다. 그가 말하고 있는 동안, 나는 그 죄들 모두를 갖고 있다고 느꼈다. 나는 “이것이 가능한가? 21년 동안이나 하나님을 섬겼다면서도 이 모양이야.”라고 생각했다. 나는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저녁에 생각했다. “제단에 올라가지 안을래. 이렇게 자랐지만, 아무짝에도 쓸모없어, 포기할래.”
나는 수퍼리어로 가는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 내려갔지만, 소리치며 울고 있었고 그래서 그 버스를 타지 않고 싶었다. 나는 그 교회로 돌아갔다. 제단 왼쪽에 한 자리가 있었다. 나는 무릎을 꿇고 말했다. “하나님, 저는 완전히 틀려먹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보혈로 저를 씻어주십시오.” 나는 갈보리의 보혈이 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덮는 것을 느꼈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나는 아주 부드럽게 외쳤다. 아무도 듣지 못했다고 확신한다. 옛 이사야가 그랬던 것처럼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소서”라고 말했다. 우리가 순결할 때 또한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보내소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날 밤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한국(Korea)으로 부르셨다. 나는 그 전에 그 나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는 그 나라를 쓸 수 있었다. 나는 한 시간 반 후에 그 집회에서 나왔다. 영적 삶을 회복했고, 내 삶의 한 목적인 소명을 받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한국에 대해 무엇이든 찾으려고 책들을 뒤졌다. 나는 그 나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다. 다음 날, 나는 내가 일하고 있던 가게가 닫힐 것 만을 기다렸다가 도서관에 가서 한국(Korea)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비치하고 있는지 물었다. 나는 그 나라를 어떻게 발음하는지 몰랐다. 나는 수퍼리어의 그 사서에게 물었다. 그녀는 “아니오, 저도 그 나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당신이 말하는 나라가 코리어일 수 있을까요?”라고 말했다. 나는 “예, 알겠습니다. 그 나랍니다!” 나는 책 한 권을 받았는데, 그것은 한국에 대해 너무도 적은 정보를 갖고 있었다. 한국은 은둔의 나라라고 불렸고, 중국이 그 후견이라고 여겨졌다. 한국은 서구 세계와의 접촉을 거의 하지 않았다. 그 나라의 역사는 사천 내지 오천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역사는 인도의 역사만큼 오래되었다.
소명을 받은 후, 나는 그 교회의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드위(Dewey) 바깥 교외 슬럼 선교, 비누와 도넛 나누어 주기, 간증하기, 때로 피아노 치기, 주일 모임 인도하기 등등에 참여했다. 한 여름 주일 모임들 후, 체너(Channer) 형제가 나와 25명에게 물침례를 주었다. 그 당시, 글레이디스 파슨스(Gladys M. Parsons)가 나와 함께 했다. 그녀는 여전히 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었고, 나도 일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가끔 드위 밖에서 열린 집회들에 올 수 있었고, 우리는 우리의 한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날 종합 역에 가서 표를 샀다. 나는 상업은행에 295달러를 예치해 놓았었고, 나의 어머니는 나의 생명 보험료를 내주기로 하셨고, 당시에 그것은 아주 적은 가치가 있었다. 그리고 수퍼리어에 있던 그 교회는 우리에게 100달러를 주었다. 그리고 그 돈은 우리가 한국, 서울 인사동 194로 가는 표를 사는데 다 들어갔다. 그렇지만, 우리는 오마하 역(the Omaha depot)을 떠났고, 우리의 짐들은 꾸려져서 그 서울 주소로 보내졌다.
우리는 덜루스, 수퍼리어, 드위에서 온 교인들, 친구들의 큰 무리와 함께 오마하 역에 서있었다. 우리는 팔에 꽃들, 사탕, 작별 편지, 그리고 선물들을 한 아름씩 안고 있었다. 군중을 헤치고 한 사람이 와서 말했다. “잠깐만요!” 그는 우리에게 크고 무거운 꾸러미 하나를 건네주었다. 그는 “통들과 상자들을 싸느라 제 시간 맞추어 올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왓킨스(Whatkins) 바닐라 1 갤런입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 꾸러미를 기차에 가지고 들어가 선반에 올려놓았다. 어떻게 이 짐을 뜨거운 여름에 6000마일을 가지고 가야할지 고민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처분할 다른 방도를 생각했다. 몇 교회에 그것을 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그렇게 할 때마다, 우리는 옳다고 느끼지는 않았지만, 그것은 한국을 위해 기부되었다.
우리가 미네아폴리스(Minneapolis)에서 그 기차에 타고 있을 때, 우리는 세인트 폴과 미네아폴리스에서 한 집회를 가졌는데, 한 부인이 한국에 있는 영혼들을 위해 기도했다. 그녀가 우리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있을 때, 그 기차에 타고 있던 한 남자가 그녀가 “한국 영혼들을 위해!”라고 말하는 것을 들었다. 그는 문밖에 나와 물었다. “여기에 한국으로 가는 사람이 있나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첫 한국인, 최 박사(Dr. Choi)를 만났다. 그는 한 방문을 위해 서해안으로 가고 있었다. 그는 동부에 있는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그는 이틀 동안 우리에게 첫 번째로 한국어를 가르쳐 주었다.
밴쿠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여전히 바닐라 1갤런을 가지고 있었고, 동양으로 처녀 항해에 나서는 엠프리스 캐나다(The Empress of Canada)에 승선했다. 거기서 우리[글레이디스 M. 파슨스와 오프스테드]는 하그네스 스모이(Agnes Smoy), 리암 존슨(Liam Johnson)의 딸 룻 존슨(Ruth Johnson)을 만났다. 그들은 중국으로 가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3등석 표를 갖고 있다고 듣고는, 우리에게 충고하기를 “그렇게는 갈 수 없을 겁니다. 특히 3등석에 탄 온갖 동양인들과 함께는요.” 그들은 각각 75달러를 내어 선장에게 주고, 우리가 그들의 침대 4개가 있는 방을 함께 사용할 수 있게 했다.
우리는 도쿄에 도착해 주르겐센 가족을 방문했다. 그리고 부모님에게 편지를 썼다. 그들은 그들의 비싼 피아노를 100달러에 팔아 내게 그 돈을 보냈고, 나는 내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우울한 날들이었다. 때때로 나는 내가 왜 우울하게 보내야 하는지 의아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었다.
우리가 한국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 이외에는 한 사람도 모른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리고 우리는 충분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우리는 한 호텔에 머물렀는데, 택시 운전사가 우리를 서울에서 가장 비싼 호텔로 데려갔다. 아침 식사 후, 우리는 둘째 날을 머물 만한 돈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그날 아침에 일박 짐과 함께 라커에 들어갈 수 없었기 때문에 우리의 바닐라를 들고 밖으로 나왔다.
우리는 구세군까지 몇 마일을 걸었지만, 그들은 다른 교단에서 온 사람은 그 누구든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머물 장소를 찾아줄 수 있을 것 같은 영국 해외 성서 공회 한국 지부(the Korea Agency of the British and Foreign Bible Society)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었다.
우리는 뜨거운 햇빛 속에서 걸었다. 그 바닐라는 내가 날라보았던 짐 중에서 가장 무거웠다. 영국 해외 성서 공회에 도착했을 때, 그 사무실 안에는 어떤 사람이 있었다. 우리는 그에게 머물 방이 필요한 상황을 말했다. 우리는 그달 첫날에 우리의 후원 수표가 도착할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날은 열흘 후였다.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서울 복음 전도 센터(Seoul Evangelistic Center)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곳 선교사들은 너무도 더운 여름날 휴가를 얻어 해변에 있습니다. 그런데 한 작가, 로이스 스윈하트(Lois Swinehart)가 집에 있습니다. 그녀는 글을 쓸 수 있도록 집에 혼자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녀가 여러분을 그달 첫날까지 머물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물었다. “둘 중에 타자를 치거나 속기록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파슨스 여사가 그 두 가지를 다 할 수 있었다. 그녀는 그 두 가지를 가르치는 상업 교사였고, 그래서 그 일을 하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바닐라 병을 들고 서울 복음 전도 센터로 걸어갔다. 작은 로이스 스윈하트는 벨소리를 듣고 우리를 안으로 들어오게 했다. 우리는 그녀에게 그 집의 관리자가 휴가에서돌아올 때까지 그녀가 우리를 머물게 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영국 해외 성서 공회의 그 남자가 우리에게 말했던 것을 말했다. “글쎄요, 적어도 여러분은 저와 함께 점심을 먹을 것입니다. 지금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우리는 감사했다.
우리는 점심을 먹기 위해 앉았고, 그녀는 요리사가 선교사들과 함께 갔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그 집의 집사 김 서방은 거기에 남아 있었다. 그녀는 “그가 요리를 잘하지는 못합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그것을 확인했다. 점심을 먹은 후, 김 서방이 들어와 말했다. “스윈하트님, 후식으로 무엇을 먹을까요? 저는 아무 것도 모릅니다! 바닐라 푸딩을 만들죠! 우리는 4년 동안 바닐라를 먹지 못했습니다. 저는 그 주부가 아니라,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방을 나간 후, 나는 “바닐라가 필요하세요?” 그리고 우리는 그녀에게 바닐라 이야기를 말했고, 그러나 우리가 돈이 없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그녀에게 바닐라를 주면 기쁘겠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것을 지금 주어버리는 해방감을 느꼈다. 우리는 한국에 있었고, 바닐라는 한국을 위해 주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공짜로 받지는 않겠습니다. 유일한에게로 내려가겠습니다. 그는 그곳의 약사인데, 지금 거기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도착하여 그들의 아름다운 집에서 저녁을 먹을 것입니다. 저는 조그만 바닐라 병들을 몇 개 가지고 가서 그것들을 선교사들에게 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당시 서울에는 많은 선교사들이 있었다. 그녀는 그 병들을 채운 후 유일한에게로 내려갔다. 그녀는 “당신들에게 많은 돈을 빚졌습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아닙니다, 식사와 방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말했다. “오, 이 바닐라를 판 돈이 적어도 여러분의 두 주간의 식사와 방값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말했다.] “글쎄요, 그렇다면, 좋은 일이죠! 그렇다면, 가지고 가십시오! 잘하시는 일입니다!” 그렇게 우리의 식사와 방값은 지불되었다.
우리의 방에는 두 개의 작은 침대가 있었다. 그 첫날 아침 3시에 우리는 그 방에 있었는데, 스윈하트 부인이 우리 문 앞에 와서 빠르게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우리가 그녀와 함께 기도회에 가고 싶냐고 물었다. 시간이 너무 일렀고, 긴 여행으로 우리가 너무 지쳐있었지만, 우리는 우리가 좋은 선교사들이라는 것을 그녀에게 입증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는 바쁘게 옷을 입고 세수를 하고 그녀와 함께 양옆에 도랑이 있는 골목길들을 내려갔다. 이것은 우리에게 우리가 동양에 대해 들어왔었던 것, 세 가지 S, 소리(sound), 풍경(sights), 냄새(smells)를 기억나게 했다. 우리는 이것에 대해 첫 경험을 한 것이다! 드디어, 우리는 한 천막이 쳐있는 한 넓은 광장에 도달했다. 그녀는 말했다. “저 사람들은 밤새 기도했습니다. 3시 후에 오는 것은 늦은 것입니다.” 그 천막 안에는 5000여 명의 사람들이 있었고, 무릎을 꿇고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나는 이 광경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 광경은 50년이 지났는데도 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우리는 언어 학교에 들어갔다. 비록 파슨스 부인(Mrs. Parsons)이 일주일에 6일간 일했지만, 그녀는 하루에 3시간씩 언어 학교에 다녔다. 한국에 온 첫 번째 선교사들 중 하나였고, 또한 종로 감리 교회의 목사였던 언더우드 박사(Dr. Underwood)가 우리의 선생님들 중의 하나였다. 그 교회는 서울 도심에 있는 아주 큰 감리 교회였다. 몇 달 후, 그는 나에게 한국어로 간증을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것은 아주 당황스러웠다. 나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지 못했다. 나는 그에게 주님을 만나게 된 내 경험을 말했다. 몇 주 후 그는 우리 집에 와서 내게 아침 예배 시간에 간증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내가 아직 한국어를 잘 말할 수 없으니까 자기가 통역을 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가끔 내가 무엇을 말했기에 그가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듣기 원했었는지를 생각하면 신기하기만 하다.
어떤 주일 오후에 우리는 타케조-초 마을(the Takezoe-cho village)로 걸어 올라갔다. 새로운 일본 집들이 있는 그곳은 아주 쾌적했다. 그곳 산은 매우 높았는데, 한 대지가 그 일본 집들 위에 있었다. 나는 파슨스 부인이 내게 했던 말을 기억한다. “여기 고지대에 집 한 채가 있다면 참 좋을 텐데요?” 나는 말했다. “예, 그러나 없어요.”
몇 주 후 우리는 같은 코스를 걸었다. 그런데 그곳에 집 한 채가 있었다! 그리고 그 집은 셋집이었다! 그 집은 새로운 양편으로 나뉘어 있는 2층 집(duplex)이었다. 한편에는 한 일본인 과부가 살고 있었다. 5개의 방이 있었고, 2층에는 두 개의 침대가 있는 방이 있었다. 우리는 즉시 그 방을 빌렸다. 우리는 그곳에서 영국 엘림(Elim)에서 온 두 젊은 여성들이 우리와 합류하게 되기까지 몇 주간 거기서 지냈다.
그즈음에, 우리는 105명의 아이들이 출석하는 학교(a day school)를 열었다. 한 한국 장로교 사역자가 그들을 가르쳤다. 어느 날 나는 그 산 중턱에 있는 굴들에서 살고 있는 많은 한국인들이 있는 산에 올라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들은 일본인들에 의해 자기들의 한국 집들에서 쫓겨났었다. 그 집들은 산 중턱에 있는 그저 마대자루로 막은 굴에 불과했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병에 걸렸고 벌레들에게 물렸다. 그리고 나는 그 어린이들을 그 학교에 오라고 초청하려 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두 학급을 함께 운영할 수 없었다. 우리는 그들을 위해 토요 학급을 마련했고, 그 학급을 내가 맡았으며, 그 장로교 사역자가 역시 그들을 가르쳤다.
우리는 이제 성령 충만한 사역자들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세 명의 다른 선교사들과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 우리의 집에 모였다.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동안, 주일 밤 9시쯤이었는데, 우리는 몇 명이 우리 문 앞을 지나가며 한국어로 “십자가로 가까이”라는 찬송을 부르는 소리를 들었다. 우리는 보기 위해 2층으로 올라갔다. 그들은 우리 집 위에 있는 그 지대로 올라갔다. 그래서 우리는 소나무 숲, 달빛 아래에 있는 그들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습관처럼, 모든 한국 교회들이 마음을 합해 기도하기 위해 모였다. 우리는 어떤 사람의 말들을 분간할 수 없었다. 그곳에는 기도를 향한 열정이 있었다. 분명하게, 그 달빛 속에서 사람들은 외쳤다. “하나님이시여, 하나님이시여, 성신으로 충만하게 하옵소서, 간절히 간절히 비옵나이다!”
우리는 시간이 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우리 다섯 명의 선교사들은 우리의 방으로 돌아와 하나님께서 이 집단만이 아닌 한국의 모든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시기를 기도했다. 다음 날, 우리는 목요일에 금식하며 이 기도를 드리기 위해 모이기로 했다. 목요일 아침 8시에 우리는 기도하기 시작했는데, 정오 즈음에 기쁨의 영이 우리에게 임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다고 느꼈다. 어떻게? 우리는 그 방법은 알지 못했다. 우리는 1층으로 내려가 점심을 먹음으로 우리의 금식과 기도를 마쳤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셨다. 수요일 아침에, 우리는 도쿄에 있는 마리 주르겐센(Marie Juergensen)이 보낸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우리는 지난 월요일에 우리의 수업을 정오에 끝내기로 결정하고 끝마치는 기도를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때 주님의 영이 마치 영광의 파도처럼 그 학급 전체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두 사람의 한국인들, 배 형제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그곳에서 회심했던 박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쿄에 있는 성경 학교(the Bible School in Tokyo)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후원은 그쳤고, 그래서 그들은 6개월 이상 후원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후원하겠다면, 후원금을 보낼 방도를 찾아보십시오.”
여기서 우리의 사역자들을 위해, 그리고 또한 책무들을 위해 어디에서 집회소를 마련하겠는가? 우리는 어떻게 그들을 후원할 수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문제들을 감당하셨다. 몇 주 후, 우리가 그 두 형제들을 위해 도쿄에 우리의 첫 수표를 보낸 후, 우리는 다른 기도회를 가졌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는데, 그 여성은 귀신들을 섬기기로 유명한 서대문 밖의 한 마을에서 왔다. 그녀는 그렇게 성장하지 않는 한 장로교회의 관리인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여러분이 이 교회를 수리하기 원한다면, 몇 장의 새 유리창, 회반죽, 그리고 이런저런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공짜로 건물을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은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날씨는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그리고 우리는 회반죽을 발라본 적이 없었지만, 유리창을 갈아 본 적이 없었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해냈다. 우리는 마루에 니스칠을 했고, 제단 의자 하나를 얻어 니스칠을 했고, 설교단을 칠했다. 그리고 우리는 오르간이 있다면 좋을 텐데라고 말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오르간이 없었다. 그런데 100달러가 우리에게 왔다. 그 돈을 보낸 사람은 우리에게 왓킨스 바닐라를 선물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우리는 이 돈이면 도쿄에서 오르간 한 대를 사서 보낼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 오르간은 개척 예배에 맞추어 도착했다.
한국에서의 첫 집회에, 한 불교 중이 회심했다. 배 형제는 여기서 목회하게 되었다. 우리는 한국 말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하신다”라는 문구를 인쇄했다. 나는 오르간을 연주했는데, 내가 그 오르간을 연주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박 형제는 얼마간 떨어진 곳에 서빙고에 교회를 개척했다. 그는 아주 훌륭한 전도자였다. 그리고 75세에 한국에 온 럼시(Mrs. Rumsey)가 그 가족을 후원해 왔었다. 그리고 구세군의 일원이었던 허 형제는 럼시의 언어 교사가 되었고, 후에 성령을 받아 근처에 한 교회를 개척했다. 거의 매주 주일 오후에는 서빙고 바깥 한강에서 침례식이 있었다. [그 침례식에는] 그 세 명의 목사들이 다 참여했다.
박 형제가 목회하던 작은 교회에서 한 프로그램을 행한 것은 크리스마스 동안이었다. 나는 데워진 바닥에 앉았었다. 한국인들은 방바닥을 뎁힌다. 나는 뜨거워져서 지쳤다. 그래서 나는 독감에 걸렸고, 그날 밤 그 오르간을 연주할 수 없었다. 미국이 금본위제를 포기했을 때, 우리는 몇 주 동안 후원금을 받지 못했다. 세 주간 동안, 우리 네 사람은 3파운드의 감자와 분홍 우유 2캔을 갖고 있었다. 그때 나는 장티푸스에 걸렸던 것 같다. 우리의 수도관은 얼어붙어 버렸다. 우리는 물을 구하러 마을로 내려갔고, 그 물을 끓이지 않고 마셨다. 나는 많이 아팠다. 나는 그 마지막 날에 우체통에 가며 편지 안에 은행이 받아 줄 얼마간의 종이 돈이 있을 것을 기대했다. 그날에 나는 “주여, 거기에 아무것도 없다면, 이 길을 따라 당신이 계획한 것을 제가 알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돈이 없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다음 날, 나는 일어날 수 없었다. 오후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함께 있던 네 명의 여자들이 대답을 했고, 네 사람이 한 여인을 태운 들것을 들고 들어왔다. 우리는 그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그녀는 그들의 어머니인데, 7년 동안 눈을 뜨지 못했고, 말하거나 걷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그녀가 귀신들(demons)을 숭배했었고, 그래서 그들은 그녀가 귀신들렸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우리는 어찌할 바를 몰랐고, 매우 두려웠다. 나는 거실 바깥 침대에 누워있었다. 다른 여성들은 거실에 있었다. 나는 어떻게 기도할지 몰랐고,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기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무서워했었다는 것은 안다. 나는 내가 “주님, 이 여인이 무엇으로 인해 고통을 받든지, 그녀를 건져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다른 사람들도 기도했다. 그녀는 일어서서, 한국말로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귀신 숭배자였었고 예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자기의 구주에 대한 계시를 받았었다. 그 네 사람은 그녀를 데리고 나갔고, 우리는 그 후 그녀에 대해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그날 저녁에 동대문 병원에서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들것에 실려 그 병원에 갔다. 그들은 내가 폐렴과 장티푸스 열병에 걸렸다고 말했다. 여섯 달간 입원했었다. 그들은 나의 오른쪽 폐 2 쿼트를 떼어 냈고, 그쪽은 아직까지도 무너진 채로 남아 있다. 나는 그 원장 의사가 내 방에 와서 내게 그들은 내가 아침에는 거기에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말했던 밤을 결코 잊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내 물건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야 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본 정부가 내가 가졌던 것들을 취할 것이었다. 나는 아끼던 장서들과 접시 세트들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들을 선교사들에게 주어야 했다. 우리는 그것을 합법화하기 위해 이름을 붙여야 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것을 그 집에 함께 살던 글레이디스 파슨스에게 주었다. 그리고 손을 가슴에 얹어 놓았다. 나는 더이상 고투하지 않게 되어 기뻤다. 그것은 놀라운 감정이었다. 그것은 아름다운 배회였고, 외국이 주는 아주 특별한 선물, 해법이었다. 나는 내 손을 어긋나게 가슴에 얹고 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날 저녁에 나는 한 꿈을 꾸었다. 매우 가파른 산을 오르고 있었다. 한 음성이 내게 말하는 듯 했다. “왜, 내려가서 주위를 걸어보지 않느냐?” 그래서 나는 오른쪽 위를 보았는데, 거기에는 찬송을 부르며 그 황금도시로 올라가는 수 많은 한국인들의 무리가 있었다. 나는 여기서 혼자 올라가고 있었다. 마침내 꼭대기에 올라갔는데, 거기에는 두 개의 큰 문이 있었다. 나는 그것들이 천국의 문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 문들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보다 큰 집으로 들어가는 한국 양식의 나무 문들이었다. 나는 그 문을 두드렸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내 손을 내려다 보았는데, 손에 아무 것도 없었다. 한국에서는 다른 집을 방문할 때 선물을 가지고 가는 것이 관습이었다. 때로 그 선물은 그저 호두거나 비단 보자기에 싼 감자였다. 나는 빈손이었다. 나는 노래하기 시작했다. “나는 빈손으로 가야합니까?” 나는 주님께 15년을 달라고 간청했는데, 그분은 내게 50년을 주셨다. 그리고 그분은 내게 몇 미국 영혼을 주셨지만, 한국 영혼은 모르겠다.
아침에, 그 여의사는 내게 와서 말했다. “좋아지고 있는 것 같은데요. 그뿐만 아니라, 당신은 모든 간호사들이 당신의 병실로 내려올 만큼 크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아주 특별한 일입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걱정이 생겼다. 나는 여섯 달 동안이나 후원금을 받지 못하고 거기 있었다. 1월에 입원했는데, 이제 6월 말이 다가왔다. 말할 기운을 찾자마자, 나는 로버츠 양(Miss. Roberts)에게 물었다. “병원비를 받으셔야지요? 그런데 나는 내 이름으로 1달러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천히 받겠습니다.” 나는 말했다. “그때 제게 알려 주십시오.”
결국 그녀는 내 방에 와서 말했다. “덴마크에 있는 우리 교회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그들은 내게 당신이 여기서 6개월 동안 요양하며 머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은 이 병실과 복도를 공짜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오,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여섯 달 동안 얼마나 빚진 건가요?” “회의가 있습니다. 갔다가 돌아오겠습니다.”
그 아침에 나는 라오 형제와 자매(Brother and Sister Lao)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 남자는 우리에게 바닐라와 오르간을 준 사람이었다. 그 편지 안에는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백 달러짜리 수표 한 장이 있었다. 나는 이 봉투 안에 들어있는 것을 보고는 옆 테이블 위에 있던 내 스카프 아래 놓았다. 그 의사는 돌아와 말했다. “나는 당신이 내게 솔직하기를 바랍니다. 그 돈을 지불할 수 없다면, 그렇다고 말하면, 지불된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말했다. “저는 비용이 얼마인지 알고 싶습니다. 100달러면 너무 많나요?” “아닙니다, 딱 그 정도입니다.” 그래서 나는 바로 지불했다.
며칠 후, 나는 집으로 옮겨졌다. 내 몸무게는 70파운드였다. 그리고 이미 나의 뱃삯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이전의 세 가지 선물들을 준 그 형제가 그 뱃삯에도 보태주었다. 6월 말이었다. 나는 준비가 되었다. 프레지던트 잭슨(the President Jackson)호를 탈 수 있는 표가 있었다.
한국인들이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그 역에 왔다. 그들은 찬양을 불렀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나는 내 생애에서 그렇게 슬프게 울었던 적이 없었다. 떠나는 것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힘들었다. 나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했었다. 도쿄에서 프레지던트 잭슨 호에 승선했을 때, 나는 나의 선실에서 식당까지 어떻게 다닐까 염려스러웠다. 한 선원이 한 여성을 데리고 와서 내게 소개해 주었다. 그녀는 어머니가 돌아가시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서 고국으로 가고 있던 장로교 선교사였다. 그녀는 임원회에게 허락받을 시간도 없이, 표를 구해 배에 올랐다. 그녀는 말했다. “제가 당신에게 식사를 가지고 오겠습니다.” “저는 암에 걸려 폐를 잘라냈기 때문에 이 팔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녀는 자주 기도했다.
우리는 밴쿠버에 내릴 준비를 했다. 그러나 우리는 내릴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파업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시애틀까지 내려가야 했다. 시숙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그가 그 변화에 대해 알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그녀는 밴쿠버에서 그녀를 도와 몬태나에 갈 수 있도록 도와줄 친구들을 만날 예정이었기 때문에 매우 걱정한 것 같았다.
우리가 배에서 내렸을 때, 시숙이 거기 있었다. 나는 그녀를 그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는 말했다. “자 여러분은 오늘 저녁 식사에 저의 손님이 되실 것입니다.” 내가 첫 번째로 원한 것은 저민 돼지고기와 딸기였다. 그녀는 어머니가 죽어가고 계셨기 때문에 슬퍼했다. 그녀는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말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돈도 없습니다. 내가 몬태나에 갈 수 있도록 내게 돈을 빌려줄 수 있을 친구들을 벤쿠버에서 만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시숙은, 비록 천주교 신자였지만, 매우 감동을 받았다. 그는 말했다. “문제없습니다. 엘프레다의 방에 두 개의 침대를 준비했습니다. 당신의 운임은 지불되었고, 제가 당신을 저녁 식사에 데리고 가겠습니다. 저녁에 호텔에서 묵고 내일 떠나실 수 있습니다.”
엘프레다 홀트 (결혼 전 성, 오프스테드)의 간증 (2편)
나는 지금 수퍼리어에 있는 집에 돌아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자매들과 함께 있다. 4년 전, 한국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 사람들이 다음 날 나의 고별 만찬을 위해 식품을 사러 나갔을 때, 나는 집에 혼자 있었다. 나는 내 성경이 놓인 삼목 상자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는 매우 슬펐다. 나는 내가 평안하게 가기 전에 충족되어야 한다고 느끼는 몇 가지 필요가 있었다. 기도 후, 성경을 펼쳤다. 분명 욥기 5장 19절이었다. 이 여섯 가지를, 일곱까지도 너에게 행하리라. 왜냐하면 내가 일곱 가지를 구했었기 때문이다. 그 저녁에 주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셨던 여섯 가지 모두가 내가 한국에 가기 전에 이루어졌다. 그 일곱째의 것은 조금 후에 말하겠다.
나는 7월과 8월에 집에 머물렀다. 9월 어느 날, T형 포드차가 우리 집 앞에 멈춰 섰다. 거기서 블로밍턴 템플(Bloomington Temple)에서 온 존 모시드 목사(Pastor John Mosied)가 내렸다. 그는 9월에 열리는 그 컨퍼런스에 나를 데려가려고 왔다. 나는 그가 내가 참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에 놀랐다. 나는 내 몸무게를 쟀는데, 80파운드가 나갔다. 좀 더 건강해졌다. 그는 “우리는 자매님이 그 컨퍼런스에 가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큰 선교 컨퍼런스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와 함께 갔다. 그 여정은 매우 험난했고, 그는 나를 도날드슨 선교 센터(Donaldson’s Missionary Home)로 데리고 갔다. 그 선교 대회의 밤 이전에는 어떤 선교 대회도 가 본적이 없었다. 거기에는 중국, 아프리카, 인도, 그리고 중앙 아메리카에서온 선교사들이 있었다. 참으로 영광스런 대회였다. 그 건물에는 세 개의 발코니가 있었고 선교사들로 가득찼다. 10시 경에 내가 말할 시간이 왔다. 그것을 해낼 것이라고 생각해 보지 않았다. 그러나 민수기의 성경 본문을 읽었다. 몇 장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큰 포도 송이들을 메고 약속의 땅에서 돌아왔을 때의 말씀이다. “이것은 그 땅의 과일이요.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얼마 전에, 선교사 클리포드 존슨(Clifford Johnson)은 툴루스(Toulouse)에 있었고, 나는 병원에 있었다. 그는 내게 안부 전화를 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심장병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는 내게 블루밍턴 템플에서 인도했던 것을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어떻게 그것을 잊겠습니까?”라고 말했다. “당신이 한 말을 기억하십니까?” “아니요, 그저 그 본문을 기억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그 열매라.” “그렇습니다. 당신은 한국에 있을 일을 예언하셨습니다.” “그들이 올라가면 취하리라.” 나는 그날 저녁에 몇 명이 특히 라이베리아를 향한 소명을 받았다는 것을 기억하지만, 내가 아는 한국을 위해 소명을 받은 사람은 없었다. 그 집회는 아침 5시까지 계속되었다.
미네아폴리스에서 집으로 돌아갔고, 아이오아, 데 모인(Des Moines, Iowa)에 있는 성경학교의 교사인 브레인 미첼 형제(Brother Brain Mitchell)로부터 온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그는 “저는 미네아폴리스 블루밍턴 템플에서 열렸던 컨퍼런스에 있었고, 당신의 메시지를 들었습니다. 데 모인에 오셔서 우리 성경학교에서 말씀하실 수 있으신지요?” 그는 그에게 전화하기를 요청했고, 나는 그렇게 했다.
그들은 교통비를 보내왔고, 나는 그곳에서 2주간 머물렀다. 모틴(Mortin) 형제와 헬렌(Helen) 형제가 거기에 있었다. 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데 모인에서 소명을 받았는지 기억할 수 없다. 그러나 내가 믿기는 여섯 명이었다. 그리고 나는 오클라호마, 에니드(Enid, Oklahoma)에 있는 하나님의 성회 성경 대학(the Assemblies of God Bible College)에 초청을 받았다. 거기서, 세 명이나 네 명이 한국에 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놀랍게 사용하셨다. 한국은 사실 설교자가 필요 없다. 한국 사람들은 구원받자마자 거의 대부분 곧 설교자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훌륭한 학생들이었다. 그런데 경제적으로는 어려웠다. 그들은 의사들과 병원들과, 교사들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들은 보통, 설교자가 되었다.
다음 5년 동안, 나는 네브라스카, 프린드(Friend, Nebraska)와 민덴(Minden)에 있었다. 그때, 주님께서는 내게 몇 영혼을 붙여주셔 구원받게 하셨고, 에릭슨 목사(Pastor Erickson)가 회심한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기 위해 아주 자주 내려왔다.
남편과 아들이 다섯 달 차로 세상을 떠났고, 나는 회복하는데 오래 걸렸다. 다음 해 동안, 나는 대리 설교자였다. 설교자라고 말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침례교 목사가 두 주간 동안 휴가를 갔을 때, 그리고 장로교 목사가 휴가를 갔을 때, 내게 자기들의 자리를 대신해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 오순절 교회는 두 주간을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나는 여성 설교자들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은 아니지만, 거의 일 년간 대리 설교자가 되었다.
다음 몇 해 동안, 나는 전도사역을 했고, 특별히 어린이 사역을 했다. 그리고 나는 주님께서 나의 사역을 번성케 하시는 것을 보았다. 이 시기에, 나는 미스 럼시(Mrs. Rumsey)로 부터 충분한 돈을 받았다. 80세 이상이 된 그녀는 뉴욕에 살고 있었다. 슬럼 선교를 도왔던 라스무센(Rasmussens)로 부터도 돈을 받았다. 그들은 매달 헌금을 보내왔다. 그리고 나의 남편과 나는 우리 헌금도 보냈다. 그리고 헨리 존슨은 10년간 꾸준히 헌금을 보냈다. 나는 그 돈을 로스앤젤레스, 제퍼슨 거리(Jefferson St. in Los Angeles)에 있는 한국 장로 교회를 통해 보냈다. 왜냐하면 그들은 큰 교회였고, 전쟁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 돈 모두는 안전하게 수령되었다.
1948년, 나는 재혼했고, 다시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로 갔다. 1960년에, 허홍 목사가 한국 서울에서 와서 우리를 방문했고, 두 주간 우리와 함께 지냈다. 우리는 또한 로스앤젤레스에서 온 한 한국 장로교 사역자를 저녁 손님으로 모셨다. 우리는 허홍 목사의 간증을 들으라고 덜루스와 수퍼리어에 있는 많은 친구들을 그리고 ICA에 있는 몇 친구들을 불렀다. 그 전쟁 동안 많은 다른 사람들이 죽임을 당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그 셋 모두를 지켜주셨다. 그는 그들이 어떻게 채소 장사들로 위장했었는지, 그리고 비록 모두 3-4개의 언어들을 말해도 얼마나 어리석게 보였는지를 말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쟁이들인지 아닌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들은 그 군인이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다. 그들은 벌통 안에 성경 한 권을 숨겼고, 아무도 그들을 보지 않았다고 느꼈지만, 서로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주님께서 그 전쟁 끝까지 세 사람 모두를 지켜 주셨다.
어느 날 저녁을 먹고 있었는데, 허 목사가 내게 말했다. “아들들에 의해 들것을 타고 당신 집에 들어왔던 부인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이 그녀가 귀신들렸다고 말했었지요. 그리고 그녀가 일어나 ‘예수님, 감사합니다!라고 말했었지요. 그리고 그들이 그녀를 데리고 나갔지요. 그녀를 기억하십니까?” “물론입니다. 아주 선명하게 기억합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에 대해 듣지 못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그녀는 도쿄로 가서 하나님의 성회 학교에 다녔고, 졸업한 후 도쿄에서 한국인들에게 설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얼마 후, 그녀는 한국에 와서 한 교회를 개척했고, 성도수가 2만 5천명에 달했습니다. 그즈음에 조 박사(Dr. Cho)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그에게 자신의 교회를 맡아달라고 청했습니다.”
허 목사는 한국으로 돌아간 뒤, 우리가 워싱턴, 타코마(Tacoma, Washington)에 한 장소를 개설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전쟁 후 통들과 상자들을 보낼 수 있었다. 크밤미(Kvamme) 목사가 우리가 비용을 들지 않게 해 주었다. 우리는 몇 년 동안 통들과 상자들을 보냈다.
그리고 허 목사의 고별의 밤에, 우리는 한 집회를 열고, 우리 식탁 가운데에 한 바구니를 놓았는데, 그 바구니는 지폐로 가득 찼고, 우리는 그 돈을 귀국 여행에 쓰도록 그에게 주었다.
우리 옆집에 사는 사람들이 우리의 동양인 손님들을 보고는 아주 호기심이 발동했다. 그래서 어느 날 우리가 뒷마당에 앉아 있을 때, 그들은 우리에게 와서 “아시아 사람이 당신을 방문하다니, 어찌된 일인가요?” 그들은 내가 한국에 갔었다는 것을 몰랐다. 나는 그것을 그들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에게 30년 전 일을 말해 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는 저의 한국어 선생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흥미로와 하며 그에 대해 무언가 말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말해야 할까 생각하다가, 그에게 가지고 갔던 바닐라 병에 대해 말해 주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일어났던 두 세 가지 다른 일들도 말해 주었다. 이것들을 들은 후, 그는 말했다. “내가 만약 당신이었다면 어떻게 했을까요? 나는 아마 리더스다이제스트에 기사를 써서 보냈을 것이고 2,500자로 일등상을 받았을 겁니다.” 내가 말했다. “팔릴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는 말했다. “그럴 것입니다. 저는 그 제목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회 또는 기획(Chance or Design).”
그 이후 그것을 종종 생각해왔다. 나는 기회를 고려하지 않았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담임 목사가 어느 날 내게 말했다. “엘프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아무 것도 우연히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기획에 관련해서는 나는 그것을 완전히 고려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바닐라 이야기는 내게 주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을 생각하게 한다. “네 손에 든 것은 무엇이냐?” 무언가 기획되는 때가 있다.
여러분은 내가 처음으로 한국에 가기 전 그 밤을 기억한다. 나는 주님께 여섯 가지를 요청했다. 그것들은 모두 저에게 주어졌다. 그러나 또한 “일곱 가지도”를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받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세월이 지난 후, 그 기도는 놀랍게 응답 되었다.
나의 아버지의 나이는 지금 90세가 넘었다. 비록 그가 좋은 사람이고 바른 사람이었지만, 나는 그가 예수 이름을 고백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것이 걱정이었다. 그는 더 늙어가고 있고, 혼수상태로 병원에 누워있다. 나는 그와 함께 있었지만, 그는 눈을 뜨거나 내게 말한 적이 없었다. 주치의가 와서 말했다. “홀트 부인, 집에 가셔서 쉬십시오. 그는 당신이 여기 있는 것 조차도 모를 겁니다.” 나는 말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가 중생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긴 하지만요.” 그러자 그는 말했다. “저는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 확신합니다.” 나는 말했다. “우리는 그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그 어떤 증거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을 알 수 있을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때 나는 다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의 귀에 옛 스칸디나비아 찬송을 불렀다. 나는그의 침대 곁에 무릎을 꿇고 그의 귀에 대고 부드럽게 찬송을 불렀다. “Trigarare caninvenala endenvanilla barescala.” “구주는 이 작은 신실한 순례자들의 주님이시네.” 이것은 최고의 번역은 아니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번역이다. 그러자 그는 눈을 뜨고 물었다. “에릭슨 형제가 여기 있냐!” 나는 말했다. “안 계셔요, 아버지. 그러나 여기에 그분의 친구가 있어요. 가서 그를 불러올 수 있어요. 그는 그렇게 멀리서 살지 않아요.”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제터스튼(Zettersten) 목사였다. 그래서 나는 제터스튼 목사에게 전화했고, 그는 즉시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the Good Samaritan Hospital)에 왔다. 그리고 아버지는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나는 그의 귀 가까이에 찬송을 불렀다. 그는 눈을 뜨고는 말했다. “엘프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기다렸다.” 나는 말했다. “아니예요, 아버지. 그렇지 않아요. 11시에 갈 수 있고, 지금 모습 그대로 갈 수 있어요. 에릭슨 목사의 친구인 제터스튼 목사가 여기 있어요. 그가 여기 지금 아버지를 위해 기도할 거예요.” 그는 말했다. “아니다, 나는 너무 기다렸어.” 이 삼일 후, 우리는 아버지를 집으로 모셨다. 그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깨어났다를 반복했다.
어느 날 내가 그를 돌보고 있었는데, 그가 너무 창백하고 차갑게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소리쳤다. “아버지, 곧 천국에 가실 거예요.” 그는 말했다. “모르겠구나, 너무 오래 기다렸다. 그런데 예수님과 어머니를 보았다.” 나는 말했다. “아버지 좋은 일이예요.” 그리고는 그는 다시 혼수상태에 빠졌다.
어느 저녁에, 나는 어머니와 자매가 아버지를 돌보는 것을 도운 후, 나는 내 짐이 매우 무거워진 것을 느꼈다. 내 남편은 그 아파트의 반대편에서 백혈병에 걸려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 홀을 걸어 내려오고 있을 때, 낙담하고 지쳐있었다. 자매가 뒷문을 열고 뛰어와 말했다. “엘프레다, 돌아와! 아버지가 침대에 일어나 앉아계셔. 그리고 손을 높이 들고 찬송을 부르고 계서!” 나는 빨리 돌아갔는데 그가 그렇게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눈물이 그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반복해서 이 말을 했다. “Talknol nol priease tilhan sahamed sirule.” “감사합니다, 영광과 존귀를 돌려드립니다. 마침내 저에게 평안을 주셨습니다.” 얼마 후, 그는 주님께로 갔다. 떠나기 전, 그는 말했다. “저기 예수님과 어머니가 오시네.”
하나님의 약속이 그 안에 있었다. 그렇다, 입곱 번째 것도 너에게 행할 것이다. 나는 그가 소천했을 때 너무도 기뻐서 뒷마당을 가로질러 한 이웃에게 그것을 말해 주기 위해 달려갔다. 그녀는 천주교인이었다. 그녀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얼마 후 건너와 말했다. “장례식을 위해 검은 모자를 빌려주시겠습니까” 나는 말했다. “물론이지요. 그런데 검은 모자가 없습니다.” 그녀는 말했다. “저는 내일 시카고에 가려고 합니다.” 나는 말했다. “그러십니까? 서두시는 것 같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예, 당신이 당신의 아버지에 대해 말했을 때, 우리 아버지는 두 주간 혼수상태로 병원에 있었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저는 아버지와 수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집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하셨던 것을 나에게도 해 주시기를 기대해야겠다고 느꼈습니다.” 그녀는 돌아갔고, 두 주 후에 건너와 나에게 말했다. “나의 아버지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두 주간 집에 오셨습니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던 우리 가족의 화해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주님께서 그를 천국으로 데려가셨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며칠 후, 초인종이 울렸다. 남편과 나는 막 저녁 먹기를 마치고 있었다. 우리 집 현관문에 조그만 구멍이 있는데, 그 문을 통해 한 신사가 서 있는 것을 보고, 왜 그러시냐고 물었다. 그는 말했다. “당신의 남편의 편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가 그 나이에 받을 수 있는 보험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남편은 65세를 지났다. 그는 말했다. “우리에게 그에 맞는 보험들이 몇 개 있습니다. 들어가도 될까요?” 나는 말했다. “글쎄요, 너는 더 이상의 보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암, 백혈병에 걸렸고, 나이가 많고, 그래서 다른 보험사들은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들어가게 해 주십시오.” 그래서 그렇게 했다. 나는 부엌에 가서 커피를 타왔다. 그는 남편이 암이 얼마나 그의 간을 먹었는지, 얼마나 아팠는지를 말하는 것을 들은 후 말했다. “아닙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보험을 더 가입해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그는 잠시 조용히 앉아 있다가 물었다. “당신은 안락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나는 말했다. “오, 안 됩니다!” 나는 90세가 지난, 제법 오랫동안 혼수상태에 빠졌던 내 아버지의 구원에 대해 그에게 말해 주었다. 그는 말했다. “나를 위해 기도해 주시겠습니까? 저는 복음 사역자입니다. 그러면서 안락사를 추천하다니요!” 그래서 우리는 기도대 앞에 내려가서 기도했다. 내가 믿기는 그 사람이 진정으로 주님께로 돌아왔다.
1973년에 나는 십 년마다 열리는 세계 컨퍼런스에 참석하도록 한국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았다. 즉시 나는 대답했다. “불가능합니다. 수술 후 회복을 기다리며 병원에 있습니다. 더구나, 저는 비용이 없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주치의가 붕대를 제거하고 있을 때 물었다. “토마스 박사님, 제가 약 3주 동안 한국 서울에서 열리는 한 컨퍼런스에 가려 한다면, 뭐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그는 말했다. “글쎄요, 가셔도 크게 문제 될 게 없을 것입니다.” 그 순간, 나는 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갈 방도를 찾을 수 없었다. 나는 그 문제를 생각하며 병원을 떠나 집으로 가고 싶었다. 그는 나머지 붕대를 제거하고는 물었다. “여전히 가고 싶으신가요?” 나는 말했다. “예, 가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말했다. “주사기들을 가지고 가셔야만 합니다. 담당 의사인 존슨 박사에게 가셔서 주사기들을 받으십시오.” 나는 그렇게 했다! 나는 그에게 가서 토마스 박사가 주사기를 소지할 것을 추천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말했다. “왜 그것이 필요하단 말입니까?” 나는 말했다. “한국, 서울에 가려고 합니다.” 그는 머리를 긇으며 말했다. “글쎄요, 늙은이처럼 바보 같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는 주사기들을 받았다.
정한 시간에, 나는 한국 서울로 가는 여정에 올랐다. 나는 서해안으로 갔다. 존슨 형제 목사들(Rev. Johnsons)은 필라델피아 교회의 목사들이었는데, 그들의 집에 나를 초대했다. 일 주일 가량 그곳에서 머문 후, 그 여정이 얼마나 돈이 많이 드는지 알게 되었다. 그 컨퍼런스에 갈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들에게 마음을 바꾸어 집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나는 시간과 돈을 서해안에 가는 데 허비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저는 그 방문과 집회들을 참으로 즐겼기 때문이다. 그들의 토요일 밤 기도회마다 5천 명의 사람들이 모여 왔었다. 나는 그들에게 내가 매우 만족했으며,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에게 이것을 금요일 저녁에 말했다. 우리는 다음 주일 그 집회에 참석했다. 그들은 각 주일 마다 세 번의 예배를 드렸는데, 우리는 두 예배에 참석했고, 그 저녁 예배 때는 집에 머물렀다.
나는 그 주간 중반에 위스콘신, 수퍼리아에 있는 집에 돌아갈 계획을 세웠다. 그날 저녁에 우리는 어떤 부부와 함께 한 테이블에 앉았다. 거기에는 한 전도자가 있었는데, 그가 설교를 마쳤을 때, 존슨 형제가 말했다. “잊지 마십시오, 엘프레다 홀트는 화요일 아침에 한국 서울로 떠납니다. 그녀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나는 그렇게 놀라본 적이 없었다! 나는 듣고 있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예배 후 나는 존슨 형제에게 전화로 물었다. “목사님, 저는 진짜로 포기했습니다.” 그는 말했다. “그렇게 하셨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당신의 표를 샀습니다. 다 지불 되었습니다. 당신의 여권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당신을 샌프란시스코에서 그리고 도쿄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잭 홈스(Jack Holms)에게 당신이 거기에 갈 것이라고 전화했습니다.” 나는 너무 고무되어 겨우 갈 준비를 했다.
그날이 되어 우리는 샌프란시스코로 갔다. 에스페셋 형제(Brother Espeset)가 거기서 우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말했다. “한국 대사관이 문 닫을 시간이 한 시간 반 남았습니다. 저는 그만큼 빠르게 샌프란시스코를 가로질러 운전할 수 없습니다. 택시를 잡아타고, 가능한 빨리 그곳에 도착해야 한다고 말하십시오. 저도 따라갔다가 공항으로 당신을 데리고 올 겁니다.” 대사관에 도착했을 때는 12시 1분 전이었다. 그들은 내게 나의 여권을 주었고, 우리는 도쿄로 가는 비행기 시간 안에 그 공항으로 돌아왔다. 내 눈은 보이지 않았다. 그림자들을 볼 수 있었지만, 그 비행기를 볼 수 없었다.
매우 즐거운 여행이었다. 도쿄에서 내렸을 때, 한 전기 카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물었다. “홀트 부인이십니까?” 나는 대답했다. “예.” “같이 가실까요?” 그는 나를 힐튼 호텔에 투숙시켰다. 12시 즈음에, 아름다운 식사가 나를 위해 준비되었다. 아침 6시에, 그들은 내게 와서 나를 한국 서울로 가는 공항에 데려다주었다. 나는 걱정하기 시작했다. 나는 잭 홈스(Jack Holms)가 정말로 전화를 받았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도쿄에서 하룻밤을 묵었기 때문에 그들이 나를 마중하러 공항에 올지 궁금했다. 그게 계획에 있는 줄은 몰랐다.
우리가 서울 세관을 통과하려고 할 때, 나는 생각했다. “어떻게 하나? 눈이 잘 보이지 않고, 짐들을 싸는 게 내게는 버거워 모든 것이 다시 엉망이 될텐데.” 금빛 리본들을 단 한 군인이 내 앞에 와서 한 신사에게 말했다. “그녀가 지나가게 하십시오, 그녀는 저의 자매입니다.” 그는 서울에 있는 공군 소속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가 그렇게 말하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나를 지나가게 했다. 그들은 분명 그 신사를 알고 있었다. 그는 중위였다고 생각한다. 그는 그 선 끝으로 왔다. 나는 말했다. “제가 당신의 자매라니 무슨 말입니까.” “당신은 저의 자매입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부터 도쿄까지 그 모든 여정에서 당신은 사람들에게 주님과 그 컨퍼런스에 대해 말했습니다. 저 또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서울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공항에서 일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당신이 저의 자매지 않습니까?” 나는 말했다. “예,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나는 걱정스러웠다. 나는 그들이 내 전화를 받기를 바랬다. 그는 말했다. “제가 당신이 누군가를 만날 때까지 당신과 함께 있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영접하기 위해 누군가를 보내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서울은 아주 큰 도시입니다.” “예, 저도 압니다, 그러나 제 눈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즈음에, 한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울려 나왔다. “덜루스에서 오신 숙녀분. 주목하십시오! 일어서주십시오!” 나는 일어났고, 한 여성 택시 운전사가 내게 달려와서 물었다. “홀트 부인이신가요?”
그녀는 나를 그 아름다운 교회로 데려다주었고, 그 계단에 허 목사, 1년 전에 세상을 떠난 배 형제의 부인, 박 목사의 딸과 이 큰 교회의 목사들 중 하나인 아들이 서 있었다. 분홍 카네이션과 솔잎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부케를 받았다. 내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내게 한 여성을 붙여주어 한 호텔에 묵게 했다. 침대 두 개가 있는 큰 방과 응접실이 있었다. 나는 매우 피곤했지만 거기에 있는 것과 그 아름다운 교회를 보게 되어 너무도 기뻤다. 세계에 있는 오순절 교회들 중에 제일 호화스런 교회라고 말한 사람은 데이비드 뒤 플레시스(David Du Plessis)였을 것이다. 그 땅은 서울의 전쟁 후 재건기에 주어진 것이었다. 일본인들은 러시아인들이 진주해 38선 이북을 취하기 7년 전에 쫓겨났다.
방에서 식사하는 동안 두 목사가 주일 집회 때 말씀해 주실 수 있는지 묻기 위해 왔다. 나는 이런 컨퍼런스에서 말한다는 것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을 들으러 왔다. 페트루스 목사(Pastor Pethrus)가 한 날 말할 것이고, 도쿄에서 온 유미야마 목사가 말할 것이었다. 그런데 두 사람 90세가 넘어 다 병 때문에 올 수가 없었다. 나는 그러겠다고 대답했지만, 그 집회에서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몰랐다. 눈이 보이지 않아 읽을 수가 없었다.
우리는 주일 아침에 그 교회에 가도록 초청을 받았고, 8시 30분에 그 목사의 목회실에 가야 했다. 그 목사의 장모가 우리를 만났다. 그녀는 머리에 작고 흰 모자를 쓰고 있었다. 그녀는 여성들이 주님의 집에 특히 주님을 예배하러 모였을 때 머리를 덮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녀는 도쿄에 있는 한국인 교회의 목사이며, 아주 위대한 설교자이다.
거기에는 두 개의 긴 검은 가죽 소파가 있었고, 네다섯 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앉았다. 그 소파들 사이에는 긴 커피 테이블이 있었다. 여러분은 조 박사가 주님께 구한 그 책상에 대해 읽어보았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첫 번째로, 그는 한 작은 테이블을 구했고, 그리고 나서 그는 큰 마호가니 책상을 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조 박사, 그의 장모, 미국에서 온 짐머만(Zimmerman) 박사, 데이비드 뒤 플레시스(David Du Plessis), 그에 대해 오랫동안 들어왔지만 만난 적이 없던 전도자 렌 존스(Len Jones)가 있는 사무실에 앉았다. 그 다섯 사람은 그 큰 교회 강단에서 말할 것이었다. 준비하지 못한 사람은 나뿐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교회에 가고 있을 때, 시므온(Simeon)에 대한 말씀이 떠올랐다. 시므온과 안나가 성전에 갔을 때, 아기 예수님, 주님을 처음 보고는 그의 팔로 안아 올리고 그분을 축복하여 말했다. “이제, 종으로 하여금 평안히 가게 하시나이다. 나의 눈으로 당신의 큰 구원을 보았나이다.”
나는 지금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한국에 단지 7일 동안 있었다. 나는 폐렴과 방광염에 걸려 집에 왔기에 병원에 가야만 했다. 담당 의사의 첫 마디는 “보세요, 홀트 부인. 정말 힘드셨겠군요, 그렇지요? 제가 경고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으시지요.” 나는 말했다. “박사님, 제가 죽는다 해도, 이 보다 더 행복하게 죽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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