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복음총회신학교 조교수 이창승
2022년 10월 5일
I. 들어가는 말
존 스테츠(John Stetz) 선교사에 의하면, 세계 2차 대전 이전에 한국에 왔던 선교사들은 모두 10명의 여성들이었다.
스테츠의 그 명단에는 국적이 노르웨이로 추정된 한 선교사가 있었다. 그 선교사는 “스테빅 양”(Miss Stevick)이었다. 그런데 종래의 공식적인 한국 오순절 역사 기술들에서는 그녀가 전혀 등장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녀에 대한 연구가 거의 없었다. 다행히도 2017년에 최재웅이 그녀를 짧게나마 감추어졌던 역사 속에서 최대한 이끌어 내었다. 그는 아마도 김익진이 1995년에 존 스테츠와의 접촉을 통해 알아 낸 “Miss Stevick”이라는 이름을 통해 그녀의 자취들을 추적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추적은 “Miss Stevick”이 “글레이디스 M. 스테빅”(Gladys M. Stevick)이었다는 것, 그녀의 국적은 노르웨이가 아닌 미국이었다는 것을 밝혀내었다. 본 글은 이런 김익진과 최재웅의 노고로 얻은 결실들을 뼈대로 삼고 활용하여 글레이디스 M.[or Winifred] 스테빅 선교사의 삶을 최대한 복원해 보려 한다.
II. 탄생, 교육, 오순절 입문
A. 탄생
스테빅은 1907년 1월 31일에 펜실베니아주, 프리포트(Freeport, Pennsylvania)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셉(Joseph)은 배관공이었고, 어머니는 미어틀(Myrtle)이었다. 스테빅은 다섯 명 중에서 넷째였다.
경건한 자유 감리교 교도들이었던 그녀의 가족은 1927년에 뉴욕주, 북 토나완다(Tonawanda)로 이사했다.
Tonawanda는 원주민어 Tuscarora의 Tahnawá•teh에서 유래하였으며, “합류하는 개울”이라는 뜻을 갖는다. 1930년대에 13,000여명이 살고 있던 토나완다(Tonawanda)는 미국 뉴욕주, 이리 카운티(Erie County, New York)에 북쪽 말단에 있는 한 도시이다. 그 도시는 이리 호(Lake Erie)와 온타리오 호(Lake Ontario)를 연결하는 이리 운하(the Erie Canal)를 끼고 있으며, 버팔로-나이아가라 폭포 메트로폴리탄을 형성하고 있다.
B. 교육
스테빅은 뉴욕주, 북 칠리(North Chili)에 있는 A. M. 체스브루그 세미나리(A. M. Chesbrough Seminary)에서 공부했다. 그녀는 그 다음에 일리노이스주, 그린빌(Greenville, Illinois)에 있는 그린빌 대학(Greenville College)에서 공부했다. 그 두 학교는 자유 감리교회 소속이었다.
자유 감리교(Free Methodist Church)는 1800년대에 성결운동에 호의적이었던 벤자민 T. 로버츠와 일군의 평신도들의 주도로 the Methodist Episcopal Church를 탈퇴하고, 1860년 공예배시 성령의 자유스런 역사와 흑인과 여성의 자유스런 예배 참여를 표방하며 “South Pekin”(Now Sanborn NY)에 본부를 두고 설립되었다.
A. M. 체스브루그 세미나리는 본래 1866년에 벤자민 티투스 로버츠(Benjamin Titus Roberts)에 의해 “칠리 세미나리”(Chili Seminary)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로버츠는 노예제도와 빈자들에 대한 억압에 반대한 사회 활동가였으며, 여성 참정권의 지지자였다. 로버츠는 그 학교를 높은 도덕적 성격을 갖는 지도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세웠다. 이 학교는 자유 감리교회가 세운 첫 교육기관이었다. 1885년에 그 학교는 3만 불의 기부금을 낸 A. M. 체스브루그에 대한 보답으로 교명을 “체스브루그 세미나리”(A. M. Chesbrough Seminary)로 바꾸었다. 그 교명은 1945년에 그 대학과 자유 감리 교회라는 교단을 세운 B. T. 로버츠를 기념하기 위해 “로버츠 주니어 칼리지”(Roberts Junior College)로 바뀌었다가 4년 후 “로버츠 웨슬리안 대학”(Roberts Wesleyan College)이 되었다. 그리고 2022년에 그 학교는 “로버츠 웨슬리안 대학교”(Roberts Wesleyan University)가 되었다.
그린빌 대학(Greenville College)의 모체는 여성의 기독교적 교양을 함양하기 위해 1855년에 세워졌던 알미라 대학(Almira College)이었다. 1891년에 자유 감리교도들(Free Methodists)은 알미라 대학을 인수하고 교명을 “그린빌 대학”(Greenville College)으로 변경하면서 남성도 학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자유 감리회의 아버지 벤자민 티투스 로버츠(Benjamin Titus Roberts)는 교육과 종교는 분리되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기독교에 기반을 둔 교양을 함양하는 대학을 꿈꾸었다. 알미라 대학을 인수한 사람들도 그와 동일한 것을 마음에 두었다. 그 후 그 학교는 대학원 과정이 개설된 그린빌 대학교가 되었다.
C. 오순절 입문
스테빅은 토나완다의 1932년경 청장년 그룹의 한 리더로서 제일 자유 감리 교회를 섬겼다.
그런데 1934년에 랄프 E. 화이트(Ralph E. White, 1890-1977) 목사가 그녀의 집 근처에 “벳세다 순복음 장막”(the Bethesda Full Gospel Tabernacle)을 창립했다. 그 교회는 1936년에 그 도시의 델웨어-브로드(the corner of Delaware and Broad)의 코너에 자리 잡았고, 그곳에서 현재까지 존재하고 있다. 그 교회가 인수하기 전에 그 건물은 극장이었다. 세상 것들을 보여주던 극장이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들을 보여주는 교회가 되었다. 랄프 E. 화이트 목사는 1954년에 9월에 그 교회에서 루이스 난키벨(Louise Nankivell of Chicago) 자매의 인도로 열렸던 한 집회를 소개했다. 그 집회에서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 신유의 역사가 일어났다.
현재의 벳세다 순복음 장막은 신앙진술문 제 5 항에서 “우리는 성령님의 사역과 성경적인 성령의 은사들의 현존과 실행을 믿는다”라고 고백하며, 제 6 항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봉사를 위해 성령님과 권능을 구하는 자에게 [성령] 침례를 주시며, 그 침례는 종종 중생에 후속한다”고 고백한다. 이런 진술들은 그 교회가 오순절적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그 교회의 신앙진술문의 제목 “Statement of Faith” 중 “Statement”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근본진리 진술문”(the Statement of Fundamental Truths)의 영향을 드러낸다.
스테빅은 그 교회를 통해 오순절주의를 접했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성령의 역사의 자유를 추구했던 자유감리교회의 영향으로 아마도 그녀는 성령의 역사에 개방적이었을 것이고, 그런 개방성은 그녀의 오순절주의 수용에 일조했을 것이다. 그녀는 락포트(Lockport), 버팔로(Buffalo), 그리고 토나완다(Tonawanda)에서 복음전파에 전념했다.
III. 한국 선교
글레이디스 M.[or Winifred] 스테빅은 1937년 5월에 벳세다 순복음 장막에 의해 한국 선교사로 임명을 받았다. 스테빅은 1937년 8월 27일에 워싱턴주, 시애틀에서 승선했고, 일본 요코하마를 거쳐 1937년 9월 16일에 서울에 도착했다.
그녀는 몇 달간 메리 C. 럼시와 함께 지냈다. 그 후 그녀는 거주지를 새로 개척된 연희장 교회(Yŏnhŭijang Pentecostal Assembly)로 옮겨 연희장교회를 담임하던 허홍과 팀을 이루게 되었다.
스테빅은 1937년 12월 16일자로 기독교 오순절 교회의 포교자로 등록했다. 그 서류에 따르면, 스테빅의 한국명은 “서태약”(徐泰約)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의 일본어 역은 “ウインニフレド ステヴイク”이었다.
일본어 역을 역으로 영어로 번역하면 “Winifred Stevick”이다. 최재웅이 제시한 “Gladys M. Stevick”과는 미들 네임이 다르다.
한국기독교사연구소에서 제시한 선교사명단에는 소속 선교회나 교단이 파악되지 않은 “Stevick, G. W. (미상, 미국, 1937-1939)”이라는 선교사가 있다. Stevick, G. W.은 1937년에 내한했던 것으로 기록된다.
이 내한 연도는 최재웅이 파악한 글레이디스 M. 스테빅의 내한 연도와 동일하다. 이 리스트에 나타난 이름의 약자 부분을 모두 풀어쓰면 “Gladys Winifred Stevick”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전자사료관에는 1939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주재 미국총영사관, 일본주재 미국총영사관, 미국무부가 주고받은 서한, 전보, 보고서가 들어 있는 사료철이 있다. 이 사료철의 수집정리번호 040136029의 자료 연번 1에서 18까지는 한 미국인 선교사에 대한 자료다. 그 선교사는 그 자료에서 두 가지로 표기된다. 하나는 미들 네임이 없이 퍼스트 네임과 라스트 네임으로 구성된 “Miss Gladys Stevick”이며, 다른 하나는 풀 네임으로 구성된 “Miss Gladys Winifred Stevick”이다.
이 풀 네임은 한국기독교사연구소에서 제시한 선교사 명단에 기재된 “Stevick, G. W.”와 일치한다. 조선총독부 관보에 제시된 “ウインニフレド ステヴイク”는 퍼스트 네임(Gladys)이 누락된 것이지만, 미들 네임과 라스트 네임이 다른 두 자료와 일치한다. 조선총독부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사료, 그리고 한국기독교사연구소 명단은 동일하게 그녀의 이름을 “Gladys Winifred Stevick”(글레이디스 위너프레드 스테빅)이라고 기록했다. 최재웅이 그녀의 미들 네임을 잘못 기입했거나, 그녀에게 두 개의 미들 네임이 있었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그런데 최재웅은 그녀의 미들 네임을 풀어쓴 적이 없고, 미들 네임을 약자인 “M.”으로만 표기했다.
기재된 그녀의 주소는 “京畿道 京城府 貞洞町 三四 三”이었다. 이 주소는 럼시가 거주하고, 기독교 조선 오순절 선교회의 본부로 삼았던, 이전에 시병원이었던 곳이었다. 스테빅이 주로 살고 교육을 받고 신앙생활을 하던 곳이 뉴욕주였고, 럼시가 그렇게 했던 곳도 뉴욕주였다. 이런 출신지의 동질성은 스테빅이 파슨스 그리고 오프스테드와 동역하기 보다는 럼시와 동역하게 한 요인들 중 하나였을 것이다.
IV. 귀국
국사편찬위원회의 전자사료관에 있는 사료철에 따르면, 1940년 3월 8일에, J. C. Stevick은 Mrs. Roosebelt에게 “글레이디스 스테빅 양의 귀국을 돕기 바람”(Assistant for the Return of Miss Gladys Stevick)이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리고 1940년 5월 14일에는, 한국주재미영사관 부영사가 미국무부에 “글레이디스 스테빅 양의 원조”(Welfare of Miss Gladys Stevick)를 청했다.
글레이디스 스테빅은 1940년 6월 말에 3년간의 선교사역 후 미국으로 돌아갔다.
그녀는 1940년 6월 29일에 일본 고베에서 “Heian Maru”라는 배에 승선했고, 1940년 7월 14일에 시애틀에 도착했다. “Heian Maru”(平安丸)는 1930년에 취항한 일본 해양선이었고, 주로 요코하마와 시애틀 사이의 태평양을 오갔다. 1920년대 말에 니폰 유센(Nippon Yūsen (NYK)) 선사는 국제 승객 서비스를 확장시키기 위해 주요 선박건조 기획을 세우고 Hikawa Maru, Hiye Maru, 그리고 Heian Maru를 건조했다. 헤이안 마루는 1929년 6월 19일에 오사카 제철소에서 제작되기 시작하여 1930년 11월 24일에 진수되었다. 그리고 1930년 12월 18일에 홍콩에서 시애틀로 처녀 항해에 나섰다.
기독교 오순절 교회는 스테빅이 한국을 떠난 1달 후 1940년 7월 20일에 지면상으로만 존재하고 있던 오프스테드(오세덕)와 윈너프레드 스테빅의 포교자 사임을 총독부에 공식적으로 보고했다.
스테빅은 그때 그저 휴가를 위해 미국에 갔다. 그녀는 휴가를 마치면 한국으로 복귀하려 했다. 1942년에 발간된, 1941년에 미국에서 써진 시들을 소개한 책은 글레이디스 스테빅이 한국에서 3년간 선교했었는데, 그 당시 미국에 있던 그녀는 여전히 한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글레이디스 M. 스테빅(Gladys M. Stevick)은 끝내 한국에 돌아오지 못했고, 1995년에 세상을 떠났다.
V. 나가는 말
안타깝게도 글레이디스 M. 스테빅(Gladys M.[or Winifred] Stevick)이 펼쳤던 한국에서의 선교사역의 본모습은 아직도 드러나지 않고 있다. 김익진과 최재웅의 분발에도 불구하고, 글레이디스 M. 스테빅의 한국 선교 부분은 아주 빈약한 상태로 남아있다. 또한 그녀의 미들 네임에 있어서 자료들 간에 불일치를 보인다.
필자는 최재웅이 접근할 수 있었던 Tonawanda (NY) Evening News에 접근할 수 없어서, 그 신문에 남긴 스테빅의 자취를 직접 살펴볼 수 없었다. 그래서 이전 연구자가 초점을 맞춘 것들을 확인하거나, 불일치 부분, 또는 놓친 부분들을 찾아내어 더 파고 들어갈 수 없었다. 차후에 최재웅이나 다른 유능한 연구자들이 글레이디스 M. [또는 Winifred] 스테빅의 한국 선교를 더 풍부하게 복원해주기를 기대한다.
'한국오순절역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최초 내한 오순절 선교사 메리 럼시와 미국 하나님의성회 간의 서신들 (0) | 2023.07.19 |
---|---|
최초의 한국인 오순절 교역자 허홍(許銾) (0) | 2022.10.30 |
한국 오순절 선교사 엘프레다 홀트 (Elfreeda Holt, 재혼전 성 Ofstead)의 간증 (1) | 2022.10.01 |
한국 오순절 선교사 엘시 한나 메레디트와 릴리안 베시(Elsie Hannah Meredith and Lillian Vessey) (1) | 2022.09.28 |
한국 오순절 선교사 엘프레다 오프스테드 (Elfreeda Ofstead) (0) | 2022.08.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