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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오순절역사

비둘기처럼 온순하나 사자처럼 강직했던 오순절교회 개척자 배부근(裵富根)

한오신 2023. 8. 14. 23:06
배부근목사
 

이창승

2023819일/2024년 1월 13일

 

한국오순절교회개척자배부근(이창승).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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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들어가는 말

     배부근은 무엇보다 기도하는 사람으로 알려졌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30년사는 1981년에 배부근에 대한 항목에 기도하지 않고는 설교를 안하던 배부근 목사라는 제목을 붙였다. 30년사는 이런 제목을 단 근거로서 존 주르겐센의 배부근에 대한 언급을 제시했다. 나고야 성서신학원 원장 존 주르겐센이 배부근을 기도하지 않고서는 설교하지 않는 위대한 사도라고 극찬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배부근은 온화한 성품을 가졌던 사람으로 알려졌다. 선교사 체스넛(Arthur B. Chestnut)은 배부근에 대해 그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언제나 다른 사람들을 기꺼이 도와주려 했다. 그는 마치 고요함이라는 소중한 것을 간직한 보석상자와 같았다. 사람들은 언제나 그를 가까이 하고 싶어했다라고 말했다. 2003년에 박사학위청구 논문을 제출하며 한국오순절에 대해 연구했던 김익진(Ig-Jin Kim)은 한국 오순절교회의 트리오, 박성산, 허홍, 그리고 배부근 각각의 사역의 특징을 묘사했다. 그는 박성산을 지도자”(a man of leadership), 허홍을 행정가”(a man of administration)로 그렸다. 그리고 그는 배부근을 온화한 기도자”(a man of gentle prayer)로 묘사했다. 이러한 배부근에 대한 김익진의 평가는 30년사가 배부근을 기도자로 그렸고, 배부근의 성격을 온순하고 남과 다투는 일이없는 것으로 그린 것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김익진 박사는 2003년에 네덜란드의 Uitgeverij Boekencentrum에서 한국 오순절주의 역사에 대해 논문을 써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아마도 하나님의 성회에서 자라났거나, 하나님의성회에서 배우고 활동했던 사람이었던 같다.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애정을 가지고 한국 오순절, 특히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역사신학을 연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학을 "순복음주의"(Sunbogeumism)라고 규정했고, 순복음Pure Gospel)주의는 서구의 Full Gospel 또는 Classical Pentecostalism과 다르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어떤 연유가 있어 하나님의성회를 떠나 장로교로 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의 순수한 학문적 열정에 경의를 표한다. 그의 연구로 묻혀졌던 한국 오순절교회사의 중요한 부분부분들이 드러나게 되었다. 김익진 박사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김익진 목사는 1980년 7월 독일 아헨(Aachen: 벨기에와 네덜란드의 접경 중서부)에 한인 예향 교회(All Nations Church Aachen)를 개척했다. 학자의 풍모와 지혜를 가지고 열정적인 말씀을 전하며 32년간 교회를 열심히 섬기고, 2014년 7월에 은퇴했다.

 

김익진은 현재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C11 BADPLAAS/CAROLINA ROAD, AVONTUUR, Badplaas에 있는 Immanuel International Bible College(IIBC)의 학장으로 사역하고 있다. 아헨 예향 교회는 김익진 목사를 파송 선교사로 섬기고 있다. 그 학교 스텦과 학생들과 함께, 맨 앞 줄 오른 쪽 두 번째 인물이 김익진 선교사.

 

 

     이런 두 가지의 평가는 적절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며, 보다 더 부각되어 조명을 받아야 할 배부근의 장점이 있었다. 배부근은 한국 오순절 교회 안에서 허홍이나 박성산처럼 맨 먼저또는 맨 앞에서라는 명예를 얻지는 못했지만, 초기 한국 오순절 교회의 개척 삼인방의 일원으로서 필요한 때에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내었다. 그가 한국 오순절교회에 남긴 가장 중요한 역할과 공헌은 단일성주의자들에 의해 촉발된 삼위일체론적 논쟁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정통 삼위일체론을 고수하는 강직함을 보임으로써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신학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이렇게 배부근은 평소에는 비둘기처럼 온순하면서도, 중요한 상황에서는 사자처럼 강직하고 열정적인 한국 오순절교회의 개척자였다.

    본 글은 비둘기 같기도 하고 그러나 결정적인 때에 포효하는 사자 같기도 했던 배부근의 생애를 스케치하고자 한다. 조선총독부관보나 신문 등 해방 전, 일제시대의 자료들에서 배부근에 대한 얼마간의 정보를 얻을 수 있지만, 의외로 해방 후 배부근에 대한 자료는 30년사가, 물론 김익진과 최재웅이 조금 더 찾아내기도 했지만, 거의 전부인 것 같다. 자료가 너무도 부족하지만, 그 자료들에 근거하여 최대한 배부근의 생애를 복원해 볼 것이다.

 

 

II. 탄생

 

    배부근(裵富根)1906616일에 강원도 춘천군 신북면(新北面)에서 태어났다. 신북은 조선시대 북중면(北中面)으로 율대리, 천구리, 산본리, 발산리, 장본리, 유포리, 천전리를 포함했다. 199511일에 춘천시와 춘천군 통합으로 신북읍으로 승격되었다. 본래 춘천을 중심으로 북쪽 중간에 위치했다하여 북중면이라 부르고, 새로 만든 북쪽의 면이라 뜻에서 신북면이라고 붙여졌다. 신북읍은 춘천 기점 북쪽으로 약 8km거리에 자리잡은 평야지대로 왼편은 춘천댐 하류인 북한강, 오른편은 소양댐 하류인 소양강과 접해 있다.

 

 

 

    그는 부친 배덕노(裵德老)와 모친 연안김씨 사이의 장남이었다. 그의 부모는 불신자들이었다. 그는 성격이 온순하고 남과 다투는 일이 없었다.

 

 

III. 감리교 청년

 

    배부근은 만 7세가 되는 1913년에 한문서당에 입학했다. 불행하게도 그가 13세가 된 1919년에 모친이 별세하고 가세가 기울어졌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만 17세가 되는 19233월에 사립보통학교였던 배영학교 2학년에 입학하여 현대적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배영학교(培英學校)는 미국 남감리교 선교회가 춘천 신북면 율문에 설립하고 운영한 초등교육기관이었다. 일제강점기 춘천에는 초등교육기관인 보통학교(현 초등학교) 22곳이 있었고, 사립학교들 중 기독학교 2곳이 있었다. 기독학교 두 곳은 1909년에 설립된 한영지서원과 1911년 경에 설립된 배영학교였다. 배영학교는 19223월에 첫 졸업생을 배출했다. 매일신보에 의하면 사립 배영학교에서는 지난 314일에 제1회 졸업식을 거행하였는데, 졸업생이 11명이요 진급생이 100여 명이었다. 배영학교는 남감리교선교회의 재정문제로 192610월 하순에 폐교되었다. 그 선교회가 설립하고 운영하던 병원이 재정문제로 문을 닫게 되었고, 그 여파로 배영학교도 십오여 년 만에 그 막을 내렸다. 그런데 배영학교는 다음 해인 19275월에 지역 유지들의 투자로 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배영학교는 1930128일자 조선총독부관보에 사립이 아닌 공립학교로 기록되었다.

 

 

 

   

 

     원체 가난한 집안인데다 1919년 모친에 이어 1924년에 부친마저 별세하여 가정 형편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부친의 별세로 슬퍼하고 있던 배부근은 그다음 해인 만 19세가 되는 1925년 봄에 당시 배영학교 교장이었던 부라만 목사에게 전도를 받아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3년 뒤 물세례를 받았다. 한국명이 부라만”(夫羅萬)이었던 코이 브래넌(Lyman Coy Brannan, 1880-1971)은 미국 남감리교에서 파송한 내한 선교사였다. 그는 1880년 미국 앨라배마, 헨리(Henry, Dale County, Alabama)에서 출생한 후, 190911월에 남부대학교(Southern University)를 졸업했다. 당시 앨라배마는 미국에서 성경지대”(Bible belt)라고 알려질 만큼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감리교회가 뿌리 깊은 지역이었다. 브레넌은 190912월에 내한하여 원산지방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1916년 조선총독부관보는 부라만(夫羅萬, エルヽプラナン)이 기독교 남감리교회 소속으로 함경남도 원산부 산제동 9번지에 주소를 두고 포교자로 활동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는 1922년에 주소지를 강원도 춘천군 춘천면 위동리로 옮겼다. 춘천지방감리사(1935-1937), 송도고등보통학교 교목(1937-1940)을 지냈으며, 1940년에 안식년 귀국 후 고향에서 시무하다가 해방 후 1946년 다시 내한하여 활동했고, 1950년에 은퇴했다.

    브래넌은 키가 작고 둥그스름한 얼굴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얼굴에는 항상 미소가 넘쳐흘렀으며, 유머를 즐겨 재미있는 이야기로 사람들을 웃기기도 잘했다. 부라만은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열심히 한국어를 배웠다. 외국인을 위한 한국어 교수법이나 교본이 전혀 없던 시대라 한국어를 가르치는 교사에게나 배우는 학생에게나 힘들었다. 그러나 부라만은 문자로서 한글의 놀라운 단순성과 과학성에 큰 감명을 받았고, 그를 가르치는 한학자들의 깊은 학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는 한국을 배우고 한국어를 익히는 동안 한국인들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문화민족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일생 한국인과 한국문화를 존중했다. 부라만은 한국어에 능통하게 되었다. 그의 한국어는 자연스러웠고, 이상한 악센트가 거의 없었다. 초기 감리교 선교사 중에 한국말로 부흥회를 인도할 수 있었던 사람은 부라만과 도마련(Harison Stokes) 두 사람뿐이었다. 부라만은 성격이 유순하고 사랑이 많아 많은 사람들이 따랐고, 그중에서도 특히 어린이들을 사랑했다. 불쌍한 사람을 많이 도와주었고, 그의 손의 도움을 받은 고학생, 신학생도 상당수에 이른다.

    배부근은 회심 직후 1925년경 감리교 청장년회인 엡워스청년회”(the Epworth League)에 가입했다. 웹워스 리그는 1889514일에 미국 오하이오, 클리브랜드에서 18세에서 35세의 청장년 감리교도들을 대상으로 설립되었다. 그 회는 곧 세계로 뻗어나갔으며, 영적생활부, 사회사업부, 문학부, 통신부, 구조부, 재정부의 조직을 갖게 되었다. 웹워스(Epworth)는 존 웨슬리와 찰스 웨슬리가 태어난 곳으로서 영국 린컨쉐어(Lincolnshire, England)에 있는 지명이었다. 그래서 그 회원들은 웹워스주의자들”(Epworthians)이라고도 칭해졌다. 엡워스청년회의 초기 목적은 복음 전도사업과 성경연구의 권장, 그리스도인의 절제와 사회 개혁, 그리스도 박애 사상실현, 문화와 사회 활동 등 젊은이들에게 신앙심을 배양하고, 그리스도의 사상을 이 사회에 실현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천하는 것이었다.

 

엡워스청년회 마크

 

 

    당시 조선에 청년 운동 조직으로는 장로교에 청년면려회(Christian Endeavor), 감리교에 엡워스청년회(Epworth League)가 있었으며, 연합 청년 운동으로는 기독청년회(YMCA)와 여성기독청년회(YWCA)가 있었다. 웹워스청년회는 18975월에 정동 제1교회에서 조직되었다. 13회 감리교 한국선교연회에서 청년회를 조직하기로 결정하고, 그 설립위원으로 제물포의 존스(G. H. Jones), 평양의 노블(W. A. Noble), 이화학당의 페인(J. O. Paine) 3명을 임명했다. 18971231일 정동교회 엡윗청년회는 남녀를 같은 학문으로 가르치고 동등하게 대접함이 가하다는 주제를 놓고 찬반토론회를 개최하였는데, 이때 찬성 측의 연사는 서재필이었고, 반대 측의 연사는 윤치호였다. 즉 엡워스청년회를 주도한 이들은 서재필, 윤치호 등 독립협회의 중심인물들이었던 것이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어 수교권을 박탈당하고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되려고 할 즈음에 엡워스청년회 회원들이 총궐기하여 일본의 침략 정책에 항거하자, 이듬해 19066월에 일본 정부로부터 해체당하여 몇 해 동안 활동을 정지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국 웹워스청년회의 후원으로 내한한 선교사도 있었다. 19079, 켄드릭(Ruby R. Kendrick) 선교사는 텍사스 엡워스청년연합회(Epworth League)의 후원을 받아 미국 남감리교 선교사로 내한했다. 내한 직후부터 켄드릭 선교사는 송도(개성)에서 교사로 헌신했다. 그곳에서 켄드릭 선교사는 아침기도회를 인도하고, 영어를 가르쳤으며, 아픈 아이들을 간호하는 일에 헌신했다. 그녀는 젊고 사랑스럽고 아름다웠고, 진실한 마음으로 헌신하여 많은 한국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1908619, 과로로 인해 급성 맹장염에 걸려 한국에 온 지 9개월 만에 별세했다.

    1914년 남감리회에서 엡워스청년회를 조직했을 때는 순수 교회 신앙단체의 성격만 갖고 있었다. 1930년에 남ㆍ북 감리회가 통합할 때 엡워스청년회로 통합하여 총리원 교육국 안에 그 본부를 두었으나 1939년 일제의 압력으로 명칭을 공려회(共勵會)로 바꾸어야 했다. 해방 후에는 감리교 청년연합회(MYF)로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세의 감리교 청년 배부근은 그 조선 웹스회 지부의 문학부가 주관하여 그의 고향 강원도 춘천군 신북면 마산리에 연 야학에서 교사로 봉사했다. 그 야학에서 남자 53, 여자 25, 도합 78명의 학생들이 공부했다. 동아일보는 이 소식을 19251212일에 기사화했다.

 

엡웟회야학성황 강원도 춘천군 신북면 마산리 유지 박순택씨의 노력으로 금년 910일경에 동리에 엡웟청년회를 설립하고 여러 방면으로 활동한 결과 위선 지식향상을 목적하야 동회문학부주최로 야학을 설립하엿다는 데 남자부에 오십 삼명 여자부에 이십 오인 합 칠십 팔명을 교수한다는 데 야학교장 박순택씨와 교원남자부의 배동린, 배부근, 강관득, 배인섭제씨와 여자부의 박영숙, 김경숙량씨는 헌신적으로 교수에 노력함으로 동리 일반인사는 칭송함을 마지아니한다고 (춘천)

 

    배부근은 20세가 되는 1926년경 춘천에서 개성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중고등학교과정의 송도고등보통학교(Songdo Boy’s School)에 다녔다. 그 학교도 역시 남감리교선교회가 설립한 학교였다. 그 선교회는 1906년에 송도학원을 설립하고 한영서원을 세웠다. 1906103일에 미국 남감리교 선교부로부터 기독교학교의 설립을 위임받은 윤치호(尹致昊)는 개성 산지현에서 한영서원(韓英書院)을 설립했다. 초대 원장에 윤치호가 취임했고, 18세 이상의 학생 18명이 입학했으며, 기독교정신을 계승한 봉사의 교훈 아래 실업교육과 전인교육에 역점을 두었다. 19094월 소학과 4, 고등과 3년으로 편성하여 1910년에 제1회 졸업생 10명을 배출했다. 19135월 소학과 3, 고등과 2, 중등과 4년으로 개편했다. 대정 6, 1917320일에 송도고등보통학교로 설립허가를 받으며, 소학과를 분리했다. 당시 그 학교의 주소는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 고려정이었다. 1923년에 송도고등보통학교의 모집생은 1학년 150명이었다. 19193·1운동이 일어나자 많은 재학생들이 참여하여 부상을 입거나 또는 체포되고, 주모자들은 수년간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25년에 송도고등보통학교의 교우회는 교우지 松友의 창간호를 발간했다. 그 후 송도고등보통학교는 한국 전쟁 중인 195245일에 피난하여 인천시 송학동 교사로 이전했다. 그리고 198332일에 인천광역시 남구 옥련동 신축교사로 이전했다. 배부근은 친척들의 도움을 받아 22세가 되는 19283월에 송도고등보통학교를 [제10회] 졸업했다. 그해 졸업자들 중에는 후에 의학박사가 된 장기려도 있었다.

 

 

 

 

송도고등보통학교 기숙사

 

 

 

 

 

 

 

 

IV. 일본 유학과 오순절 입문

 

    23세의 배부근은 1929년에 친지들과 그곳 유지들의 후원을 받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일본에 건너간 배부근은 학문보다는 신앙에 귀의하게 되었다. 그가 일본에 도착한 후 어떻게 나고야에 가게 되었는지, 그리고 감리교도였던 그가 1931년에 존 주르겐센(John W. Juergenson)이 세운 오순절적 성서신학원에 다니게 되고, 나고야 조선 성서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다. 배부근은 박성산이 개척한 나고야조선인성서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그는 1932221일에 박성산과 나고야조선인성서교회 주일학교 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나고야 조선성서교회유년주일학교학생들과 오른 쪽 끝의 배부근

 

 

    배부근은 박성산과 함께 26세가 되는 1932년 초에 방언을 그 증거로 동반하는 뜨거운 오순절적 성령 침례를 받았다. 존 주르겐센은 미 하나님의 성회의 기관지인 Petecostal Evangel에 배부근이 박성산과 함께 나고야에서 사도행전 2장과 같이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적 성령침례를 받았다고 전했다. 1932년 초에 도쿄에서는 일본 모든 곳의 선교지부 사람들이 본부 교회에 모여 연합집회를 열고 있었다. 그 집회는 미국에서 열리는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영적 축제”(Spiritual Feast from the Lord)와 같은 것이었다. 나고야에 존과 함께 있던 사람들은 도쿄의 그들과 합류하기를 원했지만, 주님께서는 그들이 나고야에 머물도록 인도하셨다. 그래서 그들이 다음에 세운 차선책은 한 특별 강사를 모시고 나고야에서 어떤 특별한 집회들을 갖자는 것이었다. 그들은 몇 이름난 일본 사역자들에게 편지를 썼지만 몇 명만 올 의사를 표명했다. 이것은 그들을 낙담시켰다. 그렇지만 그들 중에서 한 신실하고 열성적이고 작은 사역자가 말했다. “하나님은 도쿄에만 계시는 게 아닙니다. 또한 유명한 사람들과만 함께 하시지는 않습니다. 어쨌든 특별집회들을 열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기를 기대합시다.” 아침에는 하나님의 보다 심오한 일들을 기다렸으며, 저녁에는 전도 집회를 열었다. 그들은 거리로 나가 행진하며 찬양하고 연극을 하여 사람들이 집회에 오도록 청했다. 그러나 단 몇 명만이 그들의 환락을 떠나서 복음을 들었을 뿐이었다. 그렇지만, 그 아침 집회들마다 주님께서 하늘의 창들을 여시고, 그들에게 그분의 복들을 놀랍게 쏟아부으셨다. 사역자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침례를 너무도 갈망했고, 그래서 그들은 오전 열 한 시부터 저녁 다섯 시나 여섯 시까지 기도했다. 그들은 성령침례를 거의 받는 듯 했다. 그런데 집회가 끝났을 때 아무도 성령의 충만함을 받지 못했다. 그 사역자는 말했다. “우리는 이 능력이 없이는 우리의 삶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 권능 없이는 우리는 효과적인 전도사역을 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금식과 기도를 위해 일주일에 하루를 성별합시다.” 그래서 그들은 기도를 위해 각 주간의 월요일을 성별했다. 그리고 그 일본인 사역자는 하루 종일 기도한 후 영광스런 침례를 받았다. 그리고 며칠 후 사역자 박성산과 사역자가 될 배부근이 사도행전 24절에 따라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았다. 존 주르겐센은 그때 성령침례를 받은 조선인 두 명 중에 한 사람은 사역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사역자가 될 사람”(the Korean worker and prospective Korean worker)이라고만 기록했다. “사역자는 나고야 조선 성서 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박성산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또한 사역자가 될 사람, 30년 사의 기록과 비교하면, 박성산의 1년 후배인 배부근이었다.

 

 

 

    오순절 신학생 배부근이 오순절적 경험을 했다는 소식은 존 주르겐센의 자매, 마리 주르겐센에 의해 한국에도 알려졌다. 1932년 어느 수요일 아침에, 오프스테드와 선교사들은 도쿄에 있는 마리 주르겐센(Marie Juergensen)이 보낸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우리는 지난 월요일에 수업을 정오에 끝내기로 결정하고 끝마치는 기도를 위해 일어섰습니다. 그때 주님의 영이 마치 영광의 파도처럼 그 학급 전체를 덮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두 사람의 한국인들, 배 형제[배부근]와 공산주의자가 되었다가 감옥에 갇히기도 했고, 그곳에서 회심했던 박 형제[박성산]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도쿄에 있는 성경 학교(the Bible School in Tokyo)를 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후원은 그쳤고, 그래서 그들은 6개월 이상 후원을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후원하겠다면, 후원금을 보낼 방도를 찾아보십시오.

 

마리 주르겐센은 배부근이 도쿄에 있는 성서신학원의 학생이라고 소개했다. 배부근은 주로 나고야 성서신학원에서 공부했지만, 도쿄에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가 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잠깐 도쿄에 있는 성령신학원에서도 공부하기도 했다. 배부근은 도쿄에 가서 유미야마가 운영하던 滝野川 聖靈神學院”(Takinogawa Holy Spirit Theological Institute)에서 박성산과 함께 2주 동안 공부하기도 했던 것이다. 나고야 성서신학원 원장 존 주르겐센은 배부근을 기도하지 않고서는 설교하지 않는 위대한 사도라고 극찬하기도 했다. 방언을 동반하는 오순절적 성령침례를 받은 신학생 배부근은 럼시를 포함한 한국의 오순절 선교사들이 마리 주르겐센의 도움 요청에 부응해 보낸 재정적 도움을 받았다. 배부근을 오순절 세계로 이끌었던 존 주르겐센은 뜨거움을 넘어서서 불타는 오순절적 선교사였다. 그는 성령 침례를 강조하는 시끄러운 오순절적 예배 스타일”(a Pentecostal worship style, the noisy, loud services with their emphasis on the experience of the Baptism of the Holy Spirit)을 일본에 이식시키려 노력했다. 배부근은 천성적인 온순하고 차분한 성격에 존 주르겐센으로부터 전수받은 뜨거움과 적극성이 결합된 오순절 사역자로 성장해 갔다.

 

 

V. 기독교 오순절교회의 교역자

 

    4년간의 일본 유학을 마친 배부근은 박성산이 19325월에 귀국한 1년 후인 27세가 되는 1933년에 귀국했다. 그는 오프스테드, 파슨스와 팀을 이루어 오순절적 사역을 시작했다. 하루는 오프스테드 등 선교사들에게 서대문 밖의 한 마을에서 사람이 찾아왔다. 그녀는 그렇게 성장하지 않는 한 장로교회의 관리인이었다. 그녀는 말했다. “여러분이 이 교회를 수리하기 원한다면, 몇 장의 새 유리창, 회반죽, 그리고 이런저런 것들이 필요하겠지만, 공짜로 건물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것은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그 건물을 수리했다. 이 건물에서 19335월에 개척된 교회가 수창동교회였을 것이다. 수창동(需昌洞)은 현 내수동의 1936년 이전 명칭이다. 191141일 경기도령 제3호에 의해 개편된 서부 인달방 영빈동누정동승전교내수동내수사전동사직동박정동대창동북문동 지역이 191441일 경기도고시 제7호에 따라 새로 통합되면서 내수사와 대창동에서 글자를 따서 수창동으로 칭해졌다. 193641일 조선총독부령 제8호과 경기도고시 제32호로 경성부 내수정(內需町)이 되고, 1943610일 조선총독부령 제163호로 종로구 내수정이 되었다. 오프스테드와 파슨스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청계천 남쪽 지역으로부터 북쪽 지역, ,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나아가 교회를 개척하게 된 것이다. 수창동교회로 알려진 그 교회의 공식명칭, 그러니까 총독부의 관보에 실린 명칭은 基督敎五巡節敎會 京城布敎所였다.

 

경성포교소 주일학교

 

 

    그런데 수창동교회의 개척에 대한 정보가 오프스테드와 30년사가 제시한 정보와 조금 다르다. 30년사는 사직 공원 전방 300미터 지점, 경성부 사직동 106번지에 그리스도의 교회 건물을 임대해서 한국에서 두 번째 오순절 교회인 수창동교회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리고 파슨스와 오프스테드가 건물 임대료를 매월 감당했다고 전한다. 이에 반해 오프스테드는 그 건물이 장로교회 건물이었고, 임대료는 없었다고 전한다. 그 교회 내부를 찍은 한 사진은 수창동교회의 바닥이 마루였으며, 그곳에 오르간 한 대가 있었다는 오프스테드의 증언을 뒷받침한다.

    193394일에 오프스테드와 선교사들은 한국에서의 첫 전도 집회를 열었다. 이때 귀국한 배부근이 그들을 도왔다(Brother Pai coming from Japan to help them). 첫 집회에서 두 영혼이 구원을 받았다. 주님께서는 자주 따르는 표적들로 그분의 말씀을 확증하셨다.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자들이 놓임을 받았다. 최재웅은 구체적 근거도 없이 이때 배부근은 강단에서 설교했다고 전했다. 그러나 그 정보는 전혀 틀린 것은 아니었다. “배부근이 그들을 도왔다라는 말은 배부근이 집회에서 설교했다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다.

 

 

Korea

Sister Gladys Parsons and Sister Elfreda Ofstead, both from Superior, Wisconsin, were the first Pentecostal missionaries of Korea, arriving there on August 25, 1930. Their first two years were spent in the study of the language. After the second year they opened a Sunday School with an enrollment of 105 children. On September 4, 1933 they held their first evangelistic service in Korea, Brother Pai coming from Japan to help them.

 

 

당시 오프스테드 등 미국 선교사들과 베시 등 영국 선교사들은 배부근 등 현지인 사역자들을 설교 등 사역 전면에 내세웠다. 그에 대한 정보는 한국을 방문했던 영국 하나님의 성회 실행위원들 중 하나였던 도날드 기(Donald Gee)의 보고에 담겨있다.

 

사실을 말하자면, 우리의 두 선교사들[베시와 메르테트]은 강단 아래에 회중들과 함께 앉아 있었다. 나는 예외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단지 미국 자매들[파슨과 오프스테트]이 놓은 전통을 따랐으며, 모두 여전히 그렇게 하고 있다. 한국 목사들[배부근, 허홍, 박성산]은 그 집회들을 아주 적절하게 이끌었다. 그런 방법은 분명 현지인 원리를 촉진시키고 있다. 그 선교사들은 존경받고 있으며, 선교사로서 적절한 위치를 지키고 있다.

 

 

도날드 기는 선교사들이 뒤로 물러나 현지인 사역자들을 설교 등 사역 전면에 내세우는 것을 목격하고는 그것은 현지인 원리를 촉진시키는 적절한 것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물론 선교사들이 현지인을 중요한 설교에 내세운 것은 그들이 조선어에 능통하지 못한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도날드 기는 우리의 자매들은 조선어를 알긴 하지만, 생활어는 가능하나, 설교할 정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래서 한국인들이 그녀들의 설교를 통역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그 상황이 오히려 역으로 배부근 등 현지인 교역자들을 성장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28세인 배부근은 19345월에 허홍, 박성산과 함께 기독교오순절교회의 포교자로 등록되었다. 이 명단에서 배부근의 주소지는 경기도 경성 수창동이었다. 배부근은 열심히 축호전도, 노방전도, 부흥회 등을 통해 경성포교소(수창동교회)를 성장시켜 나갔다.

 

 

경성포교소교인들과 교역자들. 선교사들은 바깥쪽에 서있고, 배부근이 중앙에 서있다. 이 장면은 선교사들은 2선에서 이끌어가고 현지인들이 설교 등 사역 전면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도날드 기의 보고를 뒷받침한다.

 

 

    배부근과 팀을 이루어 활동했던 메레디트와 베시는 보통 재정적 어려움에 처해졌다. 그들은 영국과 아일랜드 하나님의 성회로부터 아주 적은 후원금을 받았다. 그들은 부족한 재정을 메꾸기 위해 자신의 가족들과 모교회로부터 간헐적으로 조금의 후원금을 받았다. 이런 그들의 재정적 부족은 30년사의 기록에서도 드러난다. 30년사는 이들이 한국에 빈손으로 왔기 때문에 선교에는 별 도움을 주지 못했다라고 기록한다. 그래서 그들이 파슨스, 오프스테드와 함께 1933년에 내수정(內需町) 106번지에 있던 장로교회를 인수해 세웠던 수창동교회(공식명칭 기독교오순절교회 경성포교소, 基督敎五巡節敎會 京城布敎所)는 재정을 거의 담당했던 오프스테드와 파슨스가 갑자기 미국으로 귀국한 후 결국 재정문제[아마도 관리유지비를 감당하지 못해]193691일 사직정(社稷町) 117번지의 보다 작은 건물로 이사해야 했다. 이 건물이 30년사가 수창동교회라고 일컫는 사직 공원 전방 300미터 지점, 경성부 사직동 106번지에 그리스도의 교회 건물을 임대해서 한국에서 두 번째 오순절 교회였을 것이다. 30년사는 경성포교소의 위치변경과 건물 상황의 변화를 파악하지 못하고 두 정보를 혼합하여 제시했던 것이다. 교회의 이전을 따라 배부근 역시 경기도 수창동에서 새 교회 건물로 주소를 옮겼다. 1936년 조선총독부관보는 포교자 배부근의 주소지가 경기도 경성부 사직정 117이라고 기록했다.

    193630세인 배부근은 박성산의 주례하에 중매로 알게 된 수창동 교회 김영인과 결혼했다. 김영인의 집에서는 그 결혼이 결정되려 하자 이단 교파의 목사하고는 결혼을 시킬 수 없다고 강경하게 나왔다. 그러나 김영인은 배부근이 앞으로 큰일을 할 인물이라고 굳게 믿고 그 뒷바라지를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고 하나님 앞에 서원했다. 결혼 후 김영인 사모는 개척교회를 맡은 배부근을 음으로 양으로 정성을 다해 내조했다. 경성포교소의 재정적 열악함은 곧 갓 결혼한 배부근과 사모가 꾸리고 갔던 가정 재정의 열악함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배부근, 메레디트와 베시에 의해 운영되던 기독교오순절교회 경성포교소(수창동교회)19371110일에 합정동(合井町) 211번지에 지교회를 세우게 되었다. 배부근은 사직동에서 합정동 교회로 주소지를 옮겼다. 그들은 다음과 같이 이 소식을 영국 하나님의 성회에 전했다.

 

우리는 우리의 복음 전도사역을 축복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한국의 수도에서 몇 마일 떨어진 곳에 한 교회를 설립하는 큰 기쁨을 주셨습니다. 1114일에 열린 개척 예배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석했고, 복음이 권능과 축복으로 전해졌습니다. 그 주간의 특별 집회들은 관심을 계속 받았고, 하나님께서는 열세 명의 영혼들을 구원하심으로써 이 사역을 인증하셨습니다. 그 회심자들 가운데 청년들 대부분은 그들의 집에서 그리고 그들의 동료들 가운데서 주님의 진정한 증인들이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 사역은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습니다. 서울에서 온 형제들과 자매들로 구성된 작은 무리는 우리의 점심을 나르며 그 시골 지역으로 일주일에 한 번씩 나갔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위한 활동적인 집회를 위해 하루 온 종일을 보내야 했습니다. 우리는 복음서들과 소책자들을 들고 마을 마을을 돌아다니며 각 집을 방문하고, 가능한 곳에서마다 읽어주고, 기도하고 설교했습니다. 관심이 높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 관심을 보였고, 근처에 교회가 있으면 다니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기도, 연기, 그리고 실망 후,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 목적을 위해 훌륭한 집을 허락하셨습니다. 그 집은 한 마을에 있는데, 그 마을은 모든 방향에서 다른 마을들과 연결되어 있어서 그 마을들에 접근하기가 용이하고 복음 전도에 효과적인 곳입니다. 우리가 바라기는 이 중심으로부터 가까운 시일 내에 지교회들을 세우고 그 지역들의 보다 많은 필요를 채울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설교하고, 방문하고, 개조하고, 고치는 일을 하는 모든 현지인 사역은 전적으로 자원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어서 한국인들은 이 새 사역에 있어서 매우 특별하게 봉사하고 있으며, 그것에 매우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날씨가 허락하는 한 이 개척 사역을 실행하기 위해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큰일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꺼이 희생하는 젊은이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그 나라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를 수 있도록 하게 하지 않으시렵니까?

 

 

 

 

    1938105일에, 메레디트 그리고 베시와 함께 동역했던 38세 배부근이 박성산, 허홍과 함께 정동에 있는 시병원 자리, 럼시의 선교본부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안수식의 안수위원은 영국 오순절교회 감독 카타[Alfred Howard Carter] 목사 썽무라[Lester Sumrall] 목사였다고 알려져 왔다. 그런데 사실은, 도날드 기의 권고에 따라, 오프스테드와 파슨스가 갑자기 떠나 사실상 공석이 된 포교관리자 선정 문제로 내한했던 영국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 클레멘트(John James Clement)와 미국 하나님의 성회 일본 지부장 바르트(Norman H. Barth)가 그들에게 안수했다. 그들은 한국 방문 마지막 날, 떠나기 한 시간 전에 그 안수식을 주관하고 이름도 모르는 그 세 사람에게 안수했다. 존 클레멘트는 193812월에 Redemption Tidings에 실린 기고문에서 당시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우리는 돌아오기 전에 한 목사 안수식을 거행했다. 그 안수식에서 세 명의 현지인 사역자들[배부근, 박성산, 허홍]이 안수를 받았다. 그때는 우리 모두에게 복된 시간이었다. 하나님의 권능이 임했고 눈물이 나도록 기쁨이 임했다. 그 안수식은 우리가 그 한국 형제들을 두 팔로 포옹하면서 끝났다. 형제애가 넘쳐나서 한 시간 후 기차가 역을 떠날 때 만감이 교차했다. 그 사역의 미래는 감추어져 있었고, 여시면 닫을 자가 없는 주님만 아실 것이었다. 이 이름을 모르는 현지인 사역자들은 여러분의 기도가 필요하다. 그들을 한 시간만 만난다면, 여러분은 그들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마음에 부담을 갖고 한국을 떠났다. 그러나 하늘에 뜬 구름은 은빛으로 빛났다. 오순절이 한국에 들어갔다. 기초는 놓였고, 주님의 말씀 따라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할 것이다.” 존 클레멘트(John Clement)

 

 

 

1938년에 목사안수를 받은 세 사람, 왼쪽 위의 허홍, 아래의 배부근, 오른쪽 아래의 박성산

 

 

 

    30년사는 배부근이 1939년에 당인리에 교회를 개척했다고 기록했다. 그런데 조선총독부관보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그로부터 2년 후, 1934년에 갑자기 동역했던 오프스테드와 파슨스와 이별해야 했던 배부근은 함께 동역했던 메레디트와 베시도 떠나보내야 하는 안타까움을 겪게 되었다. 서구 국가들은 태평양 전쟁(1941-1945) 발발 직전에 극동으로부터 자국민들을 철수시켰다. 조선의 기독교 오순절교회의 공식 포교관리자로 등록된 지 불과 7개월 후, 19401220, 이 땅에 오순절 신앙을 전교하러 왔던 영국 오순절 선교사 메레디트와 베시는 서빙고 교회에서 환송예배를 드리고 난 뒤 조선을 떠나야 했다. 배부근이 홀로 남아 사직정으로 이전한 경성포교소와 합정포교소를 지켜야 했다. 배부근은 노방전도를 하다가 상대방이 복음에 대해 바른 인식을 하지 못할 때면 상대방의 손을 붙잡고 기어이 설득을 시킬 정도로 복음전파에 열정을 가졌었다. 그러나 그 교회는 당시 그리스도교회 건물을 함께 썼었는데 메레디트와 베시가 떠나자 건물 임대료를 지불할 길이 없었고, 일제의 각 교단 해산과 탄압 정책이 극심해져 한때 장년 60명까지 출석했었지만, 결국 문을 닫게 되었다. 또한 배부근은 1941822일에 총독부에 합정포교소의 폐지를 알렸다.

    사역지를 잃은 36세 배부근은 1942년부터 경성부 견지정 30에 있는 구영숙이 개원한 소아과의원의 약제사로 일하며 생활을 꾸려갔다. 구영숙(具永淑)은 한국 최초의 소아과 의사였다. 그는 1892년에 황해도 황주에서 태어났다. 열 살 전에 고아가 된 구영숙은 평양에 가서 상점 점원을 하며 고학으로 학교를 다니던 중, 미국 하와이로 이민을 가는 김원택을 알게 되었다. 그 가족의 일원으로 하여 1905년에 하와이로 떠났다. 그 이듬해에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으며 6년간 육체노동을 하면서 여러 곳을 다니며 공부할 기회를 찾다가 박용만 등이 네브라스카에 설립한 헤이스팅스한국소년병학교를 1912년에 입학했다. 1915년에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마운틴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 조지아주 액스포드대학 예과를 수료한 후 에모리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하여 1920년에 졸업하여 의사가 되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1921년에 귀국한 구영숙은 미국 남감리교선교부에서 경영하는 개성 남성병원에 2년간 근무하다가 평양 기홀병원으로 옮겨 근무했다. 평양에 간지 얼마 되지 않아서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소아과학교실 창설과 함께 그 책임자가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았기에 미국 인디애나폴리스대학에 가서 2년 동안 소아과를 전공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는 이미 1913년에 에비슨교장의 아들인 다글러스 에비슨선교사가 독립된 소아과 외래를 시작하고 있었으나 학교 편제상 소아과가 내과로부터 분리되어 1925년에 소아과학교실이 창설되었는데 초대 주임교수로 취임했다.

 

 

구영숙

 

 

1931년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교두가 되었다. 한편 일본강점시대에 총독부에서 일본어로 강의할 것을 강요하여 구영숙은 1934년에 교수직을 사임하고 서울 서대문에 구소아과의원을 개원하였으며, 1937년에는 견지동으로 신축 이전했다. 1931년에는 미국 감리교 남가주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석하는 등 기독교활동을 했다. 광복 직전에는 항일독립운동단체인 흥인구락부사건에 관여되어 경기도 창동으로 피신했다. 광복과 함께 1946년에는 미 군정청 한국교육사절단장으로 도미하였고, 이듬해에는 주식회사 유한양행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사장 재임 중 1949년에 초대 보건부장관을 임명받아 3년 반 동안 일했다. 장관 재임 중에는 세계보건기구 총회 한국대표와 제18회 국제적십자총회 한국대표로 참석하였으며, 1952년 제3대 한국적십자사 총재로 부임했다. 1954년에 서울 상도동에서 구소아과를 다시 4년간 개원했고, 1958년부터는 경기도 시흥에서 휴양하다가 198089세로 타계했다. 안국동로타리 부근의 구소아과의원 건물은 1936년에 유명한 조선인 건축가 박길룡씨가 설계한 것으로서 현재도 그 자리에 남아있다.

 

 

 

 

 

사진출처: 사울의 칼 인사이드, 근대건축(견지동30) -근대건축(견지동30) - 구영숙 소아과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보구녀관에서부터 시작해서 볼드윈진료소, 릴리안해리스기념병원(동대문부인병원)으로 이어지며 병원의 규모와 진료활동이 체계화되어가는 과정 속에서 약제사’(藥劑師)라는 새로운 직종이 서양식 병원에 등장하게 된다. “약제사란 현재의 약사(藥師)를 칭하는 용어로 대한제국기부터 1954년 약사법이 제정되기 전까지 사용되었다. 일제시대에 서양약학 교육이 시작되었다. 1915년에 설치된 조선약학강습소가 1918년에 발전적으로 2년제의 조선약학교로 설치된 것이 한국약학교육의 실질적인 시초라고 할 수 있다. 이후 조선약학교는 1930년에 3년제의 경성약학전문학교로 승격됐으며 지금의 서울대학교 약학대학의 전신이 되었다. 이 사이의 11년이 우리나라의 근대 약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 때라고 할 수 있다. 1940년 이전에는 미국에서도 약사들은 2-3년제 초급대학 과정을 졸업하여 약사면허를 취득했고, 이 시기에는 약사직능의 규정조차도 모호했다. 이는 1945년 해방 전후의 우리나라 약학교육의 상황과 비슷하다. 경성약학전문학교는 사립 전문학교였기 때문에 약제사(약사) 면허를 취득하기 위해서는 조선총독부 약제사자격시험을 보거나 일본의 약제사면허시험을 보아야 했다. 1933년 일본 문부성의 약학전문학교 지정 이전에는 일본에서 을종약제사면허만을 취득할 수 있었지만, 약학전문학교 지정 이후에는 일본에서 을종약제사면허를 취득한 후 갑종약제사면허를 취득할 수 있게 되었다. 일제시대 약제사 면허에 관련된 조선총독부관보 최초의 기록은 191648일에 이루어졌다.

    배부근이 약제사로 일했다는 것은 그가 약학을 공부하고 자격증을 취득했다고 가정할 수 있는데 이를 입증할 자료가 없다. 약제사 시험 합격자는 관보에 게시되었는데, 관보에 배부근이라는 사람이 약제사시험에 합격했다는 기록은 없다. 최재웅은 배부근이 한 소아과병원에서 몇 년간 일했는데, 그 병원은 배부근의 친척들 중의 한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었다고 적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정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그가 그 정보의 출처를 파악했지만, 의도치 않게 각주를 달지 못했을 것이다. 구영숙 의사가 배부근의 친척들 중의 하나였다면, 그가 병원장 직권으로 고등교육을 받은 배부근에게 자기 병원에서, 아마도 면허증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약제를 돕는 일을 할 수 있도록 배려했을 것이다.

    배부근이 다녔던 송도고등보통학교는 당시 한옥 기숙사와 최신식 보일러 난방시설을 갖춘 석조본관에다 전천후 체조장, 박물관표본실 및 강의실, 물리화학실험실 및 강의실 등이 갖춰져 있었다. 그리고 1924년에는 박물교실과 이화학교실을 만들어서 과학수업에 필요한 각종 실험기구와 표본들을 갖추게 됨으로서, 당대에 우리나라 최고 수준의 고등보통학교로 자리 잡았었다. 또한 교장 윤치호는 학생들의 실습을 강조했었다. 아마도 배부근이 이때 습득했던 기초적인 실험실습 자세와 지식이 약제 일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송도고보 박물관 표본실(1926년)

 

 

 

VI.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교수 및 교역자

 

    38세 배부근은 1944년에 경기도 가평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곳에서 8.15해방을 맞았다. 춘천에서 근무하던 종군 목사 엘로드(John R. Elrod, 1918-1992)를 알게 되어 그의 배려로 수십 상자의 성경을 선교용으로 증정받았다. 그는 그것을 가평군민들에게 나누어 주며 가가호호 축호전도에 박차를 가했다. 배부근이 전도에만 전념하자 김영인 사모는 가족과 친정식구의 생계까지 책임을 지고 허덕이여 원만한 생계유지를 위해 행상을 시작했다.

 

 

 

 

    엘라우드라고 알려진 존 R. 엘로드(John R. Elrod)19181117일 미주리 주 재스퍼(Jasper, MO)에서 태어났다. 미니애폴리스에 있는 노스웨스턴 루터 신학교(Northwestern Lutheran Theological Seminary)를 졸업했다. 그 학교는 1976년에 루터 신학교(Luther Theological Seminary)와 합병되어 현재의 루터 세미나리(Luther Seminary)가 되었다. 엘로드는 19421121일 그곳에서 콘스탄스 L. 룬드퀴스트(Constance L. Lundquist)와 결혼했다. 1942년부터 1945년까지 미주리주 콜럼버스의 피플교회(Peoples Church) 목사로 활동했다. 그후 12년간 육군 군목으로 한국, 프랑스, 미국 등에서 사역했다. 1970년부터 1977년까지 로체스터 병원(Rochester hospitals)에서 목사로 활동했으며, 그 기간 동안 미네소타주 글렌우드의 챌린지홈스에서도 목사로 활동했다. 1977년 앨라배마 주 투스칼루사(Tuscaloosa, Ala)로 옮긴 뒤 팔로우 개발센터에서 목사로 재직했다. 엘로드는 199231673세에 텍사스 주 오스틴에 있는 아들의 집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엘로드는 아마도 1946에서 1951년까지 한국에서 군목으로 활동했을 것이다. “파인드 어 그래이브는 엘로드가 1945년까지 피플교회에서 사역했다고 전한다. 그리고 그가 군목으로 사역한 맨 처음 나라가 한국이었다고 밝힌다. 30년사는 배부근 목사가 1944년에 춘천으로 갔고 1945년 해방 후 그 지역에서 군목으로 활동하던 엘로드를 알게 되었다고 전한다. 펜테코스탈 에반젤은 195124일 자의 한 기사에서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세 명의 미국 하나님의 성회 소속 군목에 대해 썼다. 그 기사에 따르면 당시 미군 군목으로 섬기고 있는 하나님의 성회 목회자들은 열 명이었다. 그중에 세 명이 한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프랑크 R. 그랲과 더들리 Q. 보이드는 오산(烏山)-장호원(長湖院)-제천(堤川)-영월(寧越)-삼척(三陟)을 연결하는 전투 지역에 있었다. 그리고 존 R. 엘로드는 일본에서 가까운, 아마도 경상남도 어딘 가에 있었다. 그리고 30년사는 엘로드가 1951년에 한국을 떠났다고 전한다. 종합해 보자면, 엘로드는 1946년경에 한국에 왔고, 1951년에 한국을 떠났다. 엘로드는 미국으로 가면서 전쟁중에 만난 허홍에게 내가 미국에 도착하는대로 곧 하나님의 성회를 한국에도 세우도록 주선하겠다고 약속했고, 그의 노력으로 1952년 3월경, 미국 하나님의 성회 동양 선교부장 오스굳(Osgood) 목사가 한국에 왔다. 30년사는 엘로드가 6.25 전쟁을 통해, 즉, 1950년 경에 한국에 왔다고도 전하는 데, 이는 그의 춘천에서의 사역을 간과하는 것이다.

    배부근의 노력으로 가평에 교회가 서게 될 무렵, 1950년에 민족의 비극 6.25가 터져 44세 배부근과 그의 가족들은 피난민의 행렬을 따라 전북 이리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 후, [다시 부산으로 내려갔던?] 그는 전세가 회복되었을 때 대구로 올라왔다. 배부근은 그곳에서 오순절 신앙 동지 김두년 전도사와 함께 대구시 남산동에서 오순절 교회 간판을 걸고 대구 남산동 교회를 개척해 나갔다. 배부근은, 허홍에 따르면, 그 전쟁 중에 허홍 그리고 박성산의 [가족들]과 함께 남쪽으로 피난했다. 그 전쟁 동안 많은 다른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셋과 가족들 모두를 지켜주셨다. 그 삼총사는 함께 채소 장사로 위장했다. 그리고 그들은 비록 모두 3-4개의 언어들을 말할 수 있는 지식인들이었지만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이게 했다. 그 일행은 예수쟁이들인지 아닌지 질문을 받았을 때, 그 인민군들이 말하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는 척했다. 그들은 벌통 안에 성경 한 권을 숨겼고 여러 위기 속에서도 그 성경을 지켜내었다.

 

 

1952년 5월 4일에 열린 제2회 대한기독교오순절교회성회에 참석한 배부근, 중앙 왼쪽 두 번째

 

 

 

    47세 배부근은 195348일에 열린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창립총회에 참석함으로써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교역자가 되었다. 그리고 그 1회 총회에서 총회집행위원이되었다. 2회 총회에서는 소속 교회들의 보고가 있었다. 회의록에 따르면, 대구교회의 시무목사는 배부근이었다. 대구교회의 교인수는 수세례자”(受洗禮者) 6명과 미세례자”(未洗禮者) 26명을 합하여 32명이었다. 특이한 용어는 수성신자”(受聖神者). “수성신자성신을 받은 자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은 자를 의미할 것이다. “수성신자4명이었다.

 

1953년 4월 8일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제1회 회의에 참석한 배부근,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 남성

 

 

 

 

    배부근은 고려병원 옆 박성산이 개척한 서부교회내로 옮겨진 순복음신학교의 사감으로 근무하기 시작했고, 또한 성경 교수도 겸했다. 그는 신학교의 일 뿐만 아니라 성암교회(현 응암교회)를 개척하여 크게 발전시키기도 했다.

 

 

1955년 3월 22일에 열린 순복음신학교 제1회 졸업식, 허홍과 박성산은 분간이 쉽게 되는 데 배부근은 분간이 어렵다. 아마도 두 번째줄 왼쪽에서 네 번째 인물이 배부근이었을 것이다.

 

 

배부근이 순복음신학교의 교수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당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과 이단적 단일성주의자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박성산의 통합 정신은 해방 후 대한 기독교 오순절교회와 6·25 전쟁 후 초기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 안에서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Oneness Pentecostals)삼위일체적 오순절주의자들”(Trinitarian Pentecostals)과 함께 사역하도록 설득했다. 박성산과 배부근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 존 주르겐센이 나고야(명고옥)에 세웠던 성서신학원 출신이었다. 반면에 곽봉조, 윤성덕 등은 쿠트(Leonard W. Coote)가 일본 대판에 세운 일본이꼬마성서학원(日本生驅聖書學院)에서 단일성 오순절 신학(單一性 五巡節 神學)을 공부했다.

 

 

레오나르드 쿠트

 

生驅聖書學院

 

 

 

 

    미국 하나님의 성회가 창립될 당시 그 안에서 삼위일체주의자들과 단일성주의자들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었으며, 결국 단일성주의자들이 1917년에 the General Assembly of the Apostolic Assemblies, 그리고 1945년에 United Pentecostal Church International이라는 새로운 교단을 형성했다 더함으로부터 시작된 오순절운동 안에서 그리스도께 집중은 교회론과 관련된 침례의식을 중심으로 한 오직 예수 이름 침례”(Jesus Only Baptism)로 이어졌다. 더함의 시카고 Full Gospel Mission에서 방언이 동반되는 성령침례를 받았던 벨(E. N. Bell), 그리고 고스(Howard A. Goss) 등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이 아닌 오직 예수 이름으로 침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재침례를 받았다. 예수 이름 단일성 운동은 교회론에서 삼위일체론으로 확대되어 단일성 오순절주의”(Unitarian or Oneness Pentecostalism)가 되었다. 서방교회의 삼위일체(三位一體)”(Una substantia tres personae)와 동방교회의 삼체일본(三體一本)”(Μα οσα τρες ποστασς)을 어거스틴이 두 가지 논의들의 장점만 취하여 정리한 삼위일본(三位一本), 한 본질에 세 위격들”(Una essentia tres personae, One Nature, Three Persons)은 정통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그런데 단일성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께 지나치게 집중하여 침례를 예수라는 이름으로 주어야 한다고 주장할 뿐만 아니라, 선을 넘어가 성부, 성자, 성령의 인격(혹은 위격)은 하나(one person)인데, “그 인격은 예수라는 이단적 설을 주장했다. 그리고 단일성 오순절주의는 물침례와 성령침례를 구원론에 포함시키고 구원의 서정의 첫 단계에 두고 말았다.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은 회개하고 예수 이름으로 물침례를 받을 때 동시에 방언을 말하는 증거를 동반하며 성령침례를 받는다고 믿는다. 그들은 이 세 과정은 동시에 일어나며 온전한 구원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시며 흘리신 보혈이 회개와 물침례 뿐만 아니라, 성령침례를 가능하고 효력 있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구원론에 따르면, 방언을 말하지 못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 것이 되어 버린다. 단일성 오순절주의는 그리스도께 집중하여 더함이 온전한 성화를 앞으로 당겨 중생과 일치시킨 것에서 더 나아가 성령침례마저 앞으로 당겨 중생과 단일화시켰다. 단일성 오순절주의의 복음에서는 다층성이 거의 제거되었으며,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극도로 강화된 단일성만 남게 되었다.

    일본에서도 1920년 경에 두 흐름 사이에서 분쟁이 일었고, 쿠트를 중심으로 한 단일성주의자들이 다른 교단을 형성했다. 일본 오순절 역사학자 수주키(鈴木正和)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1920년에서 1929년까지 일본 오순절 교회”(日本 五旬節 敎會, Japan Pentecostal Church)라는 명칭이 사용되었었다. 일본오순절교회는 5개 항의 신조(Creed)를 표방했다. 1.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는다. 2. 우리는 중생을 믿는다. 3. 우리는 성화를 믿는다. 4. 우리는 성령의 내주를 믿는다. 5. 우리는 주님의 재림을 믿는다. 그리고 하나의 문장이 첨부되었는데, 그것은 위의 신조는 첫 오순절의 형태 안에 있으며 그 기초는 삼위일체이다”(Above creed is in the form of First Pentecost and its base is Trinity)였다.첫 오순절의 형태라는 말은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의 첫 역사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본오순절교회의 신조는 삼위일체(Trinity)라는 기초 위에 세워진 것이었다.

 

수주키( 鈴木正和, Masakazu Suzuki )

 

    수주키에 의하면, 일본에서는 정통 삼위일체론자들이 1929년부터 1937년까지 日本 聖書敎會”(Japan Bible Church)라는 교단을 형성했다.일본오순절교회대신 일본성서교회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게 된 이유는 일본오순절교회가 쿠트가 사용하던 “the Japan Pentecostal Church”라는 교단 이름과 동일하여 혼돈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 삼위일체 오순절주의자들이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과 분리와 구분을 위해 새로운 이름을 새 교단에 붙였던 것이다.일본성서교회의 사역은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 “The Pentecostal work under the Assemblies of God in Japan”으로 보고되었다. 밴더 선교사는 새로운 헌법이 승인되었고, 우리의 일본인 형제들과 사역자들이 한 부분을 담당하도록 공동 회의를 형성했다고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 보고했다.일본성서교회의 신조는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신조와 특히 삼위일체를 표방한 점에서 동일한 것이었던 것이다. 1914년에 설립된 미 하나님의 성회 총회는 2년 후인 1916년에 근본 진리 선언”(A Statememt of Fundametal Truths)를 승인했다. 그 선언의 제2조는 한 분 진정한 하나님”(THE ONE TRUE GOD)이라는 표제어 밑에 한 분 진정한 하나님은 자신을 성부, 성자, 그리고 성령과 같은 관계성과 연합의 원리들을 구현시키는 분으로 계시해 오셨다”(The one true God . . . has further revealed himself as embodying the principles of relationship and association. i.e. as Father, son and holy Ghost)라고 기록했다. 그리고 그에 더하여 그 선언은 신성에 본질적인 것”(THE ESSENTIALS AS TO THE GODHEAD)이라는 표제어가 붙은 13조에서 삼위일체에 대해 아주 길게 설명하고 표명했다.

    미국 하나님의 성회의 파송 선교사 존 주르겐센은 삼위일체를 표방하는 일본성서교회 소속이었고, 그 교단에 의해 그 공식 소식지 늦은 비의 편집장으로 임명되었다. 배부근은 바로 삼위일체주의자들과 단일성주의자들이 따로 교단과 신학교를 세우고 첨예하게 대립하고있던 이 시기(1931-1933)에 존 주르겐센이 설립한 나고야 성서신학원에서 오순절 신학을 공부했다. 배부근은 이 신학원에서 미국 하나님의 성회에서 인정된 방언이라는 그 성경적 증거가 동반되는 성령침례론을 포함하는 정통 오순절 신학과 정통 삼위일체론을 배웠을 것이다.

 

(John W. Juergensen)

 

 

    1932118일에 조선총독부에 제출된 기독교오순절교회포교관리자신청서에 첨부된 교의신조에서도 삼위일체가 담겨있었다. 그 교의신조의 제2항은 하나님은 삼위일체(三位一體)이심을 믿는다라고 진술했다. 그리고 그 신청서에 나타난 기독교오순절교회의 교회의 회원은 첫째로 구도자둘째로 중생자셋째로 세례자인데, 세례자란 중생한 표로 목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물세례를 받은 자였다. , 기독교오순절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신앙으로 표방했을 뿐만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 성신의 이름으로 삼위일체적 물침례를 시행했다.

 

 

 

배부근은 이 삼위일체를 표명하는 신조와 삼위일체적 물침례 수행방식이 담긴 신청서에 포교관리자로 기명된 파슨스와 함께 사역했으며, 그 신조를 기반으로 세워진 기독교오순절교회에서 교역자로 활동했다. 또한 1953년에 새로 설립된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신조 제 2항은 우리는 삼위(성부, 성자, 성신)로 영원히 존재하시는 한 하나님이심을 믿는다라고 표명한다. 이렇게 배부근은 삼위일체적 오순절 교육기관에서 정통 삼위일체론을 배웠으며, 정통 삼위일체론을 신조로 표명하고 물침례를 삼위일체적으로 시행하는 오순절 교단에서 활동했었고, 활동하고 있었다.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에서도 미국과 일본의 하나님의 성회에서처럼 두 흐름이 공존하다가 격돌했으며, 결국 단일성주의자들이 탈퇴하고 새로운 교단을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평소에 뒤로 물러나 2선에서 활동했던 배부근이 전면에 나서며 빛을 발했다. 이 불안하게 가라앉아있던 삼위일체론적 불일치는 195310월에 광주에서 열렸던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제4회 성회에서부터 수면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 성회의 말미에서 물침례식이 계획되었었다. 참석자들의 거의 반인 250여명 정도가 물침례를 받기를 원했다.

 

 

1953년 10월 10일에 열린 제4회 성회에 참석한 배부근, 앞줄 오른 쪽에서 두번 째

 

한국인 목회자들은 체스넛(Arthur B. Chestnut)에게 그 침례식을 주관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그때까지 물침례를 받지 않았었는지 의아해했다. 그래서 이유를 찾았던 그는 두 가지를 발견했다. 하나는 허홍이 육체적으로 물침례를 주관하기에는 너무도 약했다. 19525월에 허홍이 개척했던 남부교회에서 정작 허홍은 육체적으로 매우 허약해서 혼자 사역을 할 수 없었고 물침례식도 주관할 수 없었다. 그래서 6개월 후, 체스넛이 몇 사람에게 침례를 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진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한국인 지도자들이 어찌할 바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 양대 흐름의 지도자들이 1950년에 연합한 이후로 그들은 서로 다른 입장 때문에 물침례식을 연기했었을 것이다. 그래서 체스넛은 마땅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주는 삼위일체적 침례 방식을 그 지도자들에게 설명했다. 그런데 그때 곽봉조가 체스넛의 설명에 동의하지 않았다. 그리고 곽봉조는 물침례식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행해져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체스넛은 총회장으로서 그에게 성경적 진리를 보여주려 했지만, 곽봉조는 거절했다. 곽봉조는 1955년과 1956년에 순복음신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주요 교수였고, 교수들을 선발하는 직무도 갖고 있었다. 그는 요한계시록, 로마서, 그리고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가 로마서를 가르치고 있을 때 물침례 문제가 다시 발생했다. 그는 로마서 6장에 근거하여 침례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삼위일체론적으로 집행하려는 견해를 비난했다. 그의 그런 견해는 배부근의 거센 저항에 부딪혔다. 그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내가 그 신학교를 관리하며 체스넛과 함께 사역하고 있을 때, 한 목사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물침례를 주는 것은 삼위일체를 믿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이유로 나와 함께 일하기를 바라지 않았다. 이것이 문제가 되었으며, 그로 인해 두 흐름 사이가 갈라졌다.

 

곽봉조가 언급했던 한 목사는 바로 배부근을 지칭한 것이었다. 곽봉조 등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이 신학적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을 때, 배부근은 순복음신학교 교수로서 이의를 제기하며 그들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배부근은 삼위일체에 대한 기독교 정통 신학과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신학을 지키기 위해 곽봉조 등의 반삼위일체적 주장을 비판하고 나선 것이다. 이점은 그의 신학교 동문이었고, 같이 목사 안수를 받고 동일한 교단에서 함께 활동해 왔던 박성산과 다른 점이었다. 박성산은 삼위일체에 대한 신조보다는 오순절이라는 범주를 더 중요시 함으로써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을 받아들였다.

 

 

배부근(오른쪽)과 박성산(왼쪽)

 

 

그러나 그와 달리 배부근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의 이단성을 결연히 비판하고 나섰다. 이런 배부근의 결연함은 박성산을 당황시켰을 것이다. 배부근은 그 시점까지는 아마도 박성산과의 오랜 그리고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자제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배부근은 삼위일체 문제가 그런 관계보다 더 중요하다고 판단하고 자기의 신앙과 힘을 다해 단일성주의(Oneness, Jesus only)를 비판하고 나섰을 것이다.

    체스넛에 이어 1955년에 순복음신학교 2대 교장이 된 스테츠(John Stetz)49세 배부근을 사직시키려 했지만 허홍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배부근이 사직하지 않게 했다. 박성산이 소천한 후 일어난 1956년 신학교 맹휴사건은 교단분열의 전주곡이었다. 그리고 박성산 목사에 의해 기독교 대한 하나님의 성회와 연결되었던 곽봉조, 윤성덕 목사 등 단일성 오순절주의자들은 쿠트 선교사가 한국에 입국하자 손을 잡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를 탈퇴했다. 그리고 그들은 1958510극동사도선교회를 창립했다.

 

1956년 3월 12일 순복음신학교 제2회졸업생들과 배부근,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스테츠(John Stetz)는 종교재단법인을 만들어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 산하 교회들의 재산을 재단법인에 귀속시키고 이완식에게 맡기려 했다. 그에 동조하는 선교사들과 교역자들은 19575월에 열린 제6차 총회에서 존스턴(Richard Lawrence Johnston, 1919-1961)을 새 총리로 선출했다. 재단법인화를 반대했던 허홍은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를 떠날 것을 결심하고, 기독교오순절교회를 재건하여 1957911일 대한예수교오순절회의 총회장이 되었다. 배부근은 허홍을 따라 대한오예수교순절회로 갔다. 그리고 195711월에 순천오순절교회에 제4대 교역자로 부임했다.

 

 

    그런데 배부근은 1958928일에 순천오순절교회의 교역자직을 사임하고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로 되돌아갔다. 그는 1963년, 1964년 연이어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부총회장이 되었다. 배부근은 1967년에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목사직에서 은퇴했다. 그리고 1972324일 역촌동 자택에서 노환으로 앓다가 향년 66세에 소천했다. 배부근의 소천은 갈라졌던 교단이 재결합하는 계기가 되었다. 허홍은 그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허홍은 조용기, 정두영과 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그 차 안에서 그들은 쌍방 간에 무조적 통합하자는 데 의견을 모았다.

 

VII. 나가는 말

 

    배부근은 1906616일에 강원도 춘천군 신북면(新北面)에서 태어나 1972324일에 서울 역촌동에서 66세에 소천했다. 그는 1925년에 회심하고 감리교인이 되었고, “엡워스청년회에서 활동했다. 1929년에 일본으로 떠나 유학길에 올랐으며, 1931년에 나고야의 성서신학원에 입학했다. 1932년에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고 온화하나 열정적인 오순절주의자가 되었다. 1933년에 신학원을 졸업하고 귀국하여 오순절교회 역사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경성포교소에서 기독교오순절교회 소속 포교자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36년에 김영인과 결혼했으며, 1937년에 합정포교소를 개척했다. 1938년에 박성산, 허홍과 함께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1953년 기독교대한 하나님의성회의 결성에 참여했다.

    타고난 성품이 온화한 기도의 사람이었던 배부근은 한국 오순절 교회 안에서 허홍이나 박성산처럼 맨 먼저또는 맨 앞에서라는 명예를 얻지는 못했다. 그러나 배부근은 초기 한국 오순절 교회의 개척 삼인방의 일원으로서 필요한 때에 그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해 내었다. 배부근이 남긴 가장 중요한 역할과 공헌은 단일성주의자들에 의해 촉발된 삼위일체론적 논쟁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고 정통 삼위일체론을 고수하는 강직함을 보임으로써 기독교대한 하나님의 성회의 신학을 지켜냈다는 것이다. 이렇게 배부근은 평소에는 비둘기처럼 온순하면서도, 필요하고 중요한 상황에서는 사자처럼 강직하고 열정적인 한국 오순절교회의 개척자였다.

 

 

 

 

배부근의 연보

 

1906. 6. 16.    춘천군 신북면에서 탄생

1913    한문서당 입학 (7 )

1919     모친 사망 (13)

1923     배영학교 2학년 입학 (17)

1924     부친 사망 (18)

1925     감리교 부라만 선교사에 의해 회심 (19)

             감리교 청장년회인 엡워스청년회에 가입

              엡워스청년회주관 야학 교사

1926      개성, 송도고등보통학교 입학 (20)

1928      송도고등보통학교 졸업 (22)

1929      일본유학 시작 (23)

1931      나고야 성서신학교 입학 (25)

1932      나고야 오순절 조선인성서교회 주일학교 교사 (26)

              방언을 동반하는 성령침례를 받고 오순절주의자가 됨

1933      귀국, 수창동 경성포교소에서

              파슨스, 오프스테드와 함께 오순절 교역 시작 (27)

1934      기독교오순절교회 소속 포교자로 등록 (28)

1936      김영인과 결혼 (30)

1937      합정포교소 개척 (31)

1938      목사안수 받음 (32)

1940      선교사들의 출국으로 단독 목회시작 (34)

1941      합정포교소 폐지 (35)

1942      구영숙 소아과의원에서 약제사로 일 시작 (36)

1944      경기도 가평으로 이사, 종군목사 엘로드 만남 (38)

1950      전쟁 중 피난 (44)

1951       대구교회 개척 (45)

1953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집행위원 (47)

1954       순복음신학교 사감, 교수, 성암교회 개척 (48)

1956       곽봉조의 단일성오순절 비판, 스테츠의 배부근 축출 시도 (50)

1957       허홍과 함께 대한오순절교회로 옮김, 순천오순절교회 4대 교역자로 시무 (51)

1958      순천오순절교회 교역자직 사임.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로 회귀 (52)

1963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부총회장 (57세)

1964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부총회장 (58세)

1967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목사직 은퇴 (61)

1972. 3. 24. 서울 역촌동에서 소천 (6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