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 은둔의 나라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와 함께하는 외국 선교 여행
레스터 섬랄(Lester Sumrall)
Lester Sumrall, “Korea – The Hermit Kingdom,” Redemption Tidings 12:3 (February 01, 1936), 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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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는 바퀴의 요란한 소리와 나르는 듯한 열차의 움직임에도 그 잠자는 땅으로의 급한 여행은 늦추어졌다. 나는 침대 위에서 뒤척이며 [중국]에서 있었던 일들을 기억했다. 우리는 한밤중에 우리를 보려고 모인 그리스도인들의 작별 인사를 받으며 중국 티엔친에 있는 열차역을 출발했다.
아침 8시 즈음에 중국 국경을 넘어 만주로 갔다. 내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눈으로 덮인 풍경을 보았다. 모국을 떠나온 이래로 첫 번째로 내린 눈을 보았다. 오후 4시 30분에
우리는 묵덴에 도착했다.
그리고 우리의 미국인 선교사들을 만났다. 날씨는 너무도 추웠고, 거리는 얼음으로 덮혔다. 그러나 이 위대한 도시의 타오르는 불들과 현대적인 면모는 기분을 전환시키는 것 같았다.
놀랍게도, 그 형제들은 우리를 곧바로 복음회관(the Gospel Hall)로 데리고 갔다. 그곳에는 훌륭한 회중이 집회를 위해 모였다. 예배는 아주 은혜가 넘쳤고, 모두는 주 안에서 행복하고 기뻐했다. 우리는 여행 중 경험한 것들을 몇 가지 이야기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 사람들은 그 이야기들을 좋아했다. 집회가 끝난 후 훌륭한 저녁을 먹었고, 10시까지 친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가는 열차에 탈 시간이 되었다. 우리의 친구들은 내려와 우리가 열차에 오르는 것을 도왔다. 그들은 “안녕히 가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이 이 극동을 완전히 떠나기 전에 다시 오셔서 며칠간 집회를 인도해 주시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1935년] 11월 15일 아침에 나는 열차 창문을 통해 그 조용한 아침의 나라를 처음 보았다.
그 장면은 아주 유머러스했다.
그 길을 따라 남자들이 걷고 있었는데 머리에 작은 “갓”(top-knot hats)을 쓰고 있는 완전한 한국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옷은 전체가 하얀색이었고, 겨울이어서 그들은 발목 주위를 묶은 크고 헐렁한 바지를 입고 있었는데, 중국풍과 어느 정도 닮았다. 또한 그들은 길고 흰 겉옷을 입었다. 그런데 한국 소녀들은 매우 매력적인 옷을 입었다. 그 옷은 눈부시게 빛나는 색이었는데, 저고리는 밝은 빨간색이고 치마는 밝은 녹색이었다. 한국 여성들은 남자들처럼 보통 흰옷을 입었다.
한국은 매우 흥미로운 역사를 가졌다. 중국과 일본이라는 두 중요한 나라들 사이에 놓인 한국의 지정학적 상황은 그것을 그 동양의 교차로로 만들었다. 한국의 문명은 약 4000년이 되었고, 그 역사의 페이지는 피로 물들었다. 한국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새로운 기계와 속도의 시대를 받아들이는 데 가장 늦은 나라들 가운데 하나였다. 때때로 명명되는 것처럼, 그 은둔의 나라는 외부 세계와의 관계에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느리지만 분명 열강의 압력은 그 나라를 구세계로부터 깨우고 있다.
약 5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구의 모든 부분에서처럼 그 나라 사람들에게 신성한 영향을 시도했다.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 그랬던 것처럼,
그 첫 선교사[로버트 토마스, Robert J. Thomas, 1848-1886]는 그 해안에 도착한 몇 분 후 순교했다.
그의 손에는 전단지들과 복음서들이 가득했다. 그 도성의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다. 1930년에 오순절이 [미국인 선교사 메리 C 럼시, 파슨스와 오프스테드에 의해] 그 복과 능력으로 소개되었고, 그것의 순복음 사역을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때로부터 현재까지 그분의 말씀을 영예롭고 복되게 하셨다.
한국의 수도 서울(케이조, 경성)에 도착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회 선교사 메레디트와 베시[하워드 카터의 제자들], 그리고 다른 그리스도 친구들을 만났다. 현지인들이 우리에게 서너 번 머리 숙여 인사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아주 흥미로웠다. 그래서 우리도 그들에게 머리 숙여 인사했다.
우리가 머물 집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아주 놀랐다. 우리는 그 문 앞에서 신을 벗으라는 요청을 받았다. 그래서 제공된 부드러운 슬리퍼를 신었다. 방안에서 신을 신는 것은 한국인들에게는 아주 실례가 된다. 저녁에 우리는
첫 집회를 가졌다.
그 교회에 도착하여 문을 열었을 때, 우리는 깜짝 놀랐다. 모인 모든 사람들이 작은 밀집 방석을 깔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우리는 신을 벗고 들어가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우리 각자에게 의자를 제공했다. 바닥에 한 시간이나 두 시간 동안 앉아 있는다는 것은 너무도 힘든 일일 것이다. 그 집회는 은혜로웠고,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이 참석했다.
다음 날 우리는 세 번의 집회에 참석했고 그 한국인들에게 말하는 것이 매우 즐겁다는 것을 경험했다. 그들은 조용하게 앉아서 우리가 전하는 말을 열심히 들었다. 아침 집회는 친교 모임이었고, 이 머나먼 땅의 형제자매들과 탁자 주위에 모여 대화하는 것은 복된 일이었다. 저녁에는 그 작은 교회가 가득 찼다. 주님께서는 그분의 회개시키는 능력을 그 집회에 행사하셨다.
여덟 명이 앞으로 나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구원자로 영접했다.
다음 날 아침 우리의 친구들은 우리를 그 도시 주변의 특별한 곳들로 데리고 갔다. 우리는 옛 왕궁을 방문했다. 그곳은 왕이 권력을 잃고 죽은 후 공원으로 변했다. 우리는 왕비가 정치적 평화를 위해 갇혔던 곳을 보았다.
쇼핑가를 방문했는데, 몇 가게들은 아주 구식이고 현지식이었지만, 몇 가게들은 모든 점에서 현대적이고 서구적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기 위해 음식점으로 갔다. 그 문에서 신을 벗었다. 화려한 색의 옷을 입은 한 젊은 여인이 우리를 한 방으로 안내했다. 거기에는 8에서 10인치 높이의 한 작은 테이블이 있었고 그 주변에는 손님들이 앉을 수 있도록 소파가 있었다. 그 여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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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 여러 종류의 날 음식이 담긴 큰 접시를 가지고 왔다. 그녀는 그 테이블 가운데에 작은 갈탄 화로를 놓고는 그 위에서 프라이팬을 달구었고, 동시에 고기, 달걀, 야채 등등을 요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프라이팬 한쪽에 있던 음식을 우리에게 주었고, 그 다른 쪽에 날 음식을 채웠다. 그 음식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놓았고, 참으로 더 맛있었다.
저녁에 우리는
포교소 바깥에서 한 집회를 열었다.
먼저 우리는 도심지로 궤도전차를 타고 가서 교외로 가는 전차를 탔고, 그다음 황소와 달구지, 사람들 등등을 실은, 노를 저어 가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16분 정도 깊은 모래 지역을 걸은 후 그 마을에 도착했다. 집회는 한 학교 건물에서 열렸다. 종이 등불과 작은 기름 등불이 밝혀졌다. 그 건물은 흥미롭게 듣는 사람들로 가득 찼다. 미발달한 곳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을 심음으로써 축복하셨다.
다음 날 아침 우리는 작별 집회를 가졌다. 오후 3시에 선교사들과 그리스도인 친구들은 역으로 내려와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했다. 그런 광경은 오순절 진영 바깥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것이다. 열차가 일본을 향해 떠나기 시작할 때, 그들은 우리에게 다시 와달라는 부탁을 했다.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는 선교사들을 위한 선교사였으며 스미스 위글스워스(Smith Wigglesworth)와 레스터 섬랄(Lester Sumrall)의 친구였으며 전 세계 국제 오순절 협회의 주요 강사였다. 그는 성령의 은사에 관한 가르침으로 가장 유명했다. 온유하고 세련된 사람이었지만 필요할 때는 강인했다. 그의 삶을 주의 깊게 연구해 보면, 그가 예수님에 대한 강한 열정과 조용한 유머 감각을 지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교육받은 사람임이 드러난다.
1934년에 하워드 카터(Howard Carter)는 미국에서 두 차례의 캠프 모임에 사역하도록 초청받았다. 이때 그는 43세였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격려와 하나님의 확인으로 이것은 6만 마일의 세계 여행으로 발전했다. 미국에서 그는 레스터 섬랄이라는 17세의 젊은 청년을 만났고, 그 소년은 나중에 호주에서 그를 만나 하워드의 이전 성경 학교 학생들을 방문하는 세계 일주 여행을 함께 했으며. 여행의 대부분은 중국에 집중되었다. 방문한 선교사들 중 상당수는 카터의 제자들이었다. 투어가 끝날 때 하워드 카터는 “우리는 아무것도 없이 시작했고, [남겨 놓을] 것도 없었고, 아무것도 없이 돌아왔으나, 우리 주 하나님 전능하신 분이 통치하신다는 것을 선포하는 특권 외에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Korea – The Hermit Kingdom
With Howard Carter in other Lands
By Lester Sumr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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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roar of rushing wheels and the movement of the flying express train, delayed the usual hasty trip to slumberland. Tossing on my berth I recalled the days’ happenings. At midnight we had gently pulled out of the railroad station in Tientsin, H. China, waving farewell to the assembled Christians who had come down to see us off.
About 8 a.m. in the morning we crossed the China border into Manchuria. Then met our eyes a lovely snow-covered landscape, the snow just freshly fallen. It was the first fall of snow we had seen since leaving our home countries. In the afternoon at 4.30
We arrived in Mukden,
and were met by our American Missionaries. The weather was bitterly cold, with ice on the streets; but the blazing lights and modern aspect of this great city seemed to extend some cheer.
To our pleasant surprise, the brethren took us direct to the Gospel Hall, where a nice congregation had assembled for a meeting. The service was most inspiring, everyone seemed happy and rejoicing in the Lord. We were asked to relate some of our experiences in travelling, which the people seemed to enjoy. After the meeting we had a nice dinner and a friendly visit until 10 p.m. Then it was time to catch the train for Korea. Our friends came down and helped us on the train, saying “Goodbye, and don’t forget we want a few days’ meetings before you entirely leave the Far East.”
The morning of Nov. 15th I looked out the carriage window for
My First Impressions
of the Land of the Morning Calm, and it was a humorous sight that met my eyes. There were a number of men walking along the road, and on their heads were little “top-knot” hats, entirely Korean. Their clothes were all white, and this being the winter season they wore big baggy trousers tied around the ankle, some what like the Chinese. Also they had on a long white cloak. But we thought the Korean girls dressed very attractively, in dazzling bright colours, jackets of bright red and skirts of bright green. The Korean women dress mostly in white, as the men.
Korea has a very intersting history. Its geographical situation between the two important countries of China and Japan make it the Crossroad of the Orient. Its civilization dates back about 4,000 years, with its pages of history smeared with blood. It was one of the last countries to yield to the new mechanical life and speed age in which we are living. The Hermit Kingdom, as it is sometimes called, did not care for any association with the outside world. But slowly and surely her imposing superiors aroused her out of her medieval.
About 50 years ago, the Gospel of Jesus Christ, as in all other parts of the globe, attempted to stamp its sacred influence upon the people. As in many other countries,
The First Missionary Was A Martyr,
within a few moments of landing on the shore with his arms full of tracts and gospels. The men of the city stoned him. In 1930, Pentecost, with its blessing and power, was introduced and began its full gospel ministry, and God has honoured and blessed His word until this present time.
On arriving in Zeoul (Kiejo) the capital of Korea, we were met by Assemblies of God Missionaries, the Misses Meredith and Vessey, and other Christian friends. It was so interesting to see the natives bow 3 or 4 times to us, and we, in return, had to bow to them.
When we arrived at the house where we were to stay, to our great surprise we were kindly asked to take our shoes off at the door and put on soft slippers which were provided. It is a great offence in the eyes of the Koreans to wear your shoes in the house. In the evening we had
The First Service.
When we came to the church and opended the door, we were startled at first, for all the people were sitting on the floor with little straw mats under them. We entered, pulled off our shoes, and exchanged a few courtesies. We were pleased to see they had a chair each for us, as it would have been very difficult to sit on our feet for an hour or two. The meeting was inspiring, mostly Christians present.
The next day we attended three services and found it a great pleasure to speak to these Koreans. They sat still and listened attentively to all that was said. The morning meeting was a Communion service, and it was blessed to meet round the Table with these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in this far-off land. In the evening the little church was packed full, and the Lord sent His convicting power upon the meeting.
Nine Came Forward
and accepted Jesus Christ as their Saviour.
The following morning our friends took us to see some interesting features around the city. We visited the ancient King’s Palace which has been converted into a park since his fall from power and death. We saw the enclosure where the former Queen is now held prisoner for the sake of political peace.
The visit through the shopping centre was very interesting, some of the shops being very primitive and native, while some were fashionable and westernized in every detail.
We went into a cafe for dinner, removing our shoes at the door. A young lady dressed in a flaming coloured gown showed us to a private room, here we found a little table about 8 or 10 inches high, with sofas around it for the guests to sit on. the la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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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on brought in a large platter with different kinds of raw food on it. She placed a little charcoal furnace in the middle of the table, heated a frying-pan on it and began to cook the meat, eggs, greens, etc., all at the same time. She gave us to eat from one side of the pan, and replenished with raw food on the other side. It was wonderful, and really more tasty than we expected.
In the evening we had
A Service At An Out Station.
First we took a tram to the down-town district, then an electric train to the suburbs and then a paddle boat across a river, which was loaded with oxen, carts, people, etc. Then we walked for about 16 minutes through deep sand beds and arrived at the village. The meeting was held in a school building, with paper lanterns and one small oil lamp for the lights. The building was full of people who listened with interest. It was primitive but God blessed in the sowing of His Word.
The next morning we had our farewell service, and at 3 p.m. the missionaries and Christian friends came down to the station and sang and prayed with a fervour that is not found very often outside Pentecostal circles. As the train pulled out for Japan they asked us please to come back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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